제32화. 도시괴담 (2)
“뭐, 뭐야. 그 눈빛은?”
불안감을 느낀 박수호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녀석은 전요한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단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응? 무슨 일 있었어?”
한편, 강기태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간단히 몸이나 풀러 나온 건데,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기태야, 잠깐만 거기 서 있어 봐.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으, 응.”
전요한의 말에 강기태가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최근에 맛있는 걸 잔뜩 얻어먹은 터라, 그는 충성도가 높은 상태였다.
‘어째서 녀석에겐 미래시가 발동하지 않는 거지?’
뚫어져라 쳐다보던 전요한은 마음속에 의문을 띠었다.
따지고 보면, 강기태는 학내 생활을 함께 하며 더 자주 부대낀 인물.
더욱이 한동혁을 붙잡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었다.
서포트 역할로서는 여러모로 박수호보다 적임자다.
‘도무지 발동 조건을 모르겠군.’
박수호보다 운명 카드가 떠오를 가능성이 높을 터였다.
역시 운명은 함부로 잣대질을 할 대상이 아닌 건가.
미래의 가능성이란 건, 지금 당장 내리는 사소한 결정만으로도 크게 뒤바뀔 수 있다.
본래 인간이란 게, 언제 위기를 맞이하여 소리 소문 없이 죽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으음? 잠깐.’
그냥 넘기려던 전요한의 뇌리에 한 가지의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수도 있는 가능성.
어쩌면 녀석에게 뭔가 변고가 생겨 함께 무언가를 할 기회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전요한이 말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자 강기태는 불안감을 느꼈다.
“대체 왜 그래? 내 뒤에 귀신이라도 있어?”
최근에 떠돌고 있는 학내 괴담 중 하나였다.
한 여생도가 외진 곳에서 사고를 당했다는데, 그 원혼이 남아서 남생도의 뒤에 붙어 다닌다는 내용이다.
“귀신? 갑자기 무슨….”
헛소리라며 일축하려던 전요한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강기태에게서 기분 나쁜 무언가가 느껴진 탓이었다.
‘이건 뭐지?’
미래시가 발동한 것 같은데, 처음 접해보는 색채였다.
잿빛처럼 어둑한 기운.
뭔지는 몰라도, 곧 다가오게 될 당사자의 불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지, 진짜로 있어? 설마!”
전요한이 귀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자 조급해진 강기태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이후 손바닥으로 몸을 털며, 평소에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귀신 들린 것 같은 녀석은 만나 보긴 했지. 얼마 전에 나를 폭행한 상급생 말이야.”
마침, 기괴한 경험을 했던 박수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죄악의 사도였던 천강우에게서 느꼈던 감상을 자세히 말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어두운 기운에 휩싸여 있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침전되는 기분이랄까. 그 기운에 동화된 탓인지, 녀석은 마치 악마 같았어.”
입꼬리가 귓가 쪽으로 길게 벌어지는 것이, 흉악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박수호가 몸서리를 치자, 전요한은 턱에 손을 올렸다.
‘학내 괴담이 최근에 기승을 부리는 이유가 설마 죄악의 사도 때문인가.’
하지만 한동혁과 천강우는 다시 여기로 되돌아올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역시 제3의 인물이?
그것도 아니라면, 서열이 제법 되는 악마가 직접 나선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현재의 상황과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는 수상한 외부인.
강기태에게서 발산되는 어두운 색채의 기운.
도난당한 후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는 마계의 성유물.
쉽사리 끼워 맞출 수 없었던 퍼즐조각이 하나로 모인 기분이었다.
“그래서 누구로 정할 거야? 우리 중에서.”
기다리다 못한 박수호가 먼저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려 했다.
전요한은 흘끗 쳐다본 후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그냥 장난 좀 쳐본 거야. 네 소원대로 개처럼 부려줄게.”
“정말로 고맙다, 야.”
전요한과 함께 팀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박수호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여전히 상황을 모르는 강기태로선 의구심이 생길 모습이었다.
“개처럼 부려 먹는다니?”
“아아, 저놈에게도 뭐 하나 시키고 나중에 맛있는 거 사주기로 했거든.”
전요한은 별것 아니란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세한 사정을 말해주지 않은 이유는 강기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탓이었다.
‘지금 함부로 끌어들였다간 저 기운의 영향을 받을지도 몰라.’
어째서 운명 카드의 형태가 아닌, 색채의 형태로 미래시가 발동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강기태와 관련한 일에 대해 앞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전요한이 혼자서 팔짱을 낀 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 있었네. 찾느라 정말 애먹었어.”
학생회장, 채린이 도도한 표정으로 모두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긴 생머리를 한 손으로 넘긴 후, 대뜸 전요한의 소매를 붙잡았다.
“할 말이 있어. 어서 가자.”
무언가 중대한 정보라도 입수한 모양이었다.
“뭔가 알아냈어?”
“수상한 소문을 조사하던 도중에 목격자를 발견했어.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생인데, 밤중에 이상한 걸 봤대.”
자세한 건 직접 듣는 편이 빠르다고 한다.
고개를 끄덕인 전요한이 함께 있던 두 사내들에게 손짓을 했다.
“바빠서 먼저 가볼 테니까, 너희들끼리 친목이라도 다지고 있으라고.”
이윽고 전요한은 채린의 뒤를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색한 분위기에 휩싸인 박수호는 웃으며 강기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랑 달리기 시합이나 하실래요? 이긴 사람이 저녁 쏘는 걸로 하죠.”
“나쁘지 않은데? 식사 비용에 딱히 제한은 없는 거지?”
같은 신체강화 계열이라 그런지, 의외로 궁합이 잘 맞는 녀석들이었다.
* * *
평소보다 사람이 없어서 조용해진 학생회실이었다.
채린은 숨죽여 울먹이는 한 여생도를 달래고 있었다.
“힘들겠지만,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려줘.”
“흐흑, 네.”
여생도는 지난밤에 겪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눈이 맞은 동급생과 만나기 위해 그녀는 밤중에 기숙사를 나섰다고 한다.
“그런 수고로움까지 감수한 걸 보면 꽤나 불이 붙었나 보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전요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채린은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입가에 검지를 들이밀었다.
“가만히 있어. 지금 용기를 내서 당시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고 있잖아.”
“그래, 알았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순순히 옆자리에 앉았다.
역시 이런 일은 학생회장에게 맡기는 편이 여러모로 편하다.
“외진 곳의 부속 건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앞에 나타났어요. 그건….”
모습을 떠올리는 것조차 두려운지, 여생도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채린은 괜찮다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겁먹지 않아도 돼. 이제는 지나버린 일이니까.”
“그 끔찍한 느낌은 마치 악마 같았어요. 창백한 피부에 금발 벽안의 외모. 고풍스러운 의복을 걸쳐서 중세시대의 귀족 같아 보이기도 했어요.”
여생도의 말 속도가 두근거리는 심장처럼 점차 빨라졌다.
그녀는 고통스러운지 양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중세시대의 귀족 같았다고?”
“그 사람이 웃으며 먼저 말을 걸어왔어요. 자신과 「거래」를 하지 않겠느냐고.”
여기까지는 최근에 유행한단 학내 괴담치고는 수위가 약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이야기가 채린과 전요한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무심결에 누구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그 모습이 제가 아는 사람으로 바뀌었어요.”
그 모습은 밤중에 약속 장소에서 밀회를 하기로 했던 남생도였다.
외형을 바꾼 채 다가온 악마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자신에게 협조하기만 하면, 남들의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대로 연애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이에 현혹된 여생도는 그의 손을 붙잡으려 했으나, 어디선가 율리안 교관이 나타나자 악마는 돌연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렇다면 녀석은 손쉽게 외형을 바꿀 수 있는 거네.”
조사가 어렵겠다 생각한 채린이 좌절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군. 마침 의심이 가는 자가 한 명 있기도 하고.”
한편, 전요한은 조금 알겠다는 눈치였다.
앨런 테일러.
지구로 귀환한 이후 처음 진입했던 던전에서 만났던 남작 지위의 악마다.
녀석이라면 충분히 자신을 노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질투의 죄악이 이번엔 다른 녀석들을 보낸 건가.’
네크로맨서는 현재 관리국의 검문실에 홀로 갇혀 있다.
하지만 녀석이 스반힐트의 유일한 부하일 리는 없었다.
저번 시도가 실패한 만큼, 더욱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도전해 오겠지.
그러려면 새로운 죄악의 사도들이 필요했을 테고, 적당한 상대라 여긴 여생도에게 접근한 것이다.
‘그런데 기가 막힌 타이밍이군. 율리안 교관이 어떻게 알아차린 것이지?’
생각해보니 율리안에겐 천리안이 있었다.
만약 그가 앨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깊은 밤중이라도 수상한 동태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었을 터다.
모든 의문이 풀리자 전요한은 무릎을 탁 쳤다.
“어쩐지 갑자기 나타나서 시비부터 걸더라.”
율리안은 앨런의 목적을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혼자서 지켜만 본 이유는 단 하나.
다른 제자들을 위험한 사건에 휘말리게 하기 싫어서였겠지.
교내에서 벌어진 소동인 만큼, 관리국에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무슨 말이야? 누가 너같이 실력 있는 애한테 시비를 걸었는데?”
전요한의 혼잣말에 채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의심이 가는 인물이 있다느니 하며 중얼거리는 모습이 의아했던 것이다.
“그냥, 최근에 인기가 많아져서 그런지 시기하는 이들이 좀 있더라고.”
전요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난 일들을 대략 이야기해 주자 채린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런 걸 왜 이제야 말해주는 거야? 전혀 모르고 있었잖아.”
“뭐, 비밀로 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어. 나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금 바빴으니까.”
“알겠어. 하지만 다음부터는 되도록 빨리 말해줘. 그런 식으로 문제가 생겨나면 도움을 요청한 내가 미안해지잖아.”
채린은 이전과 달리 제법 고분고분해진 모습이었다.
콧대 높은 이미지가 한풀 꺾였고, 은근히 안위를 걱정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평소와는 다르단 걸 느꼈는지, 옆에 있던 여생도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런데 학생회장님, 이분하고만 교내 사건을 조사하시는 건가요? 조금 의외라서….”
얼음 공주 이미지로 유명한 채린이 남생도를 가까이 두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탓이다.
수많은 고백에도 철벽을 쳤고, 평소엔 삼인방하고만 다녔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여생도의 시선에 채린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
이렇게 전요한과 둘이서만 다니면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단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채린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며 전요한은 희미하게 웃었다.
‘서투른 게 귀엽네.’
온갖 암투가 판을 치는 대미궁에 25년간 갇혀 있었던 그였다.
물론, 현실에선 3년이란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성장은 그 10배에 버금간다고 봐야 할 정도다.
그런 전요한의 관점에서 채린이 순수한 어린애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학내의 다른 생도들이 전부 그러했다.
나름대로 선배이자 어른으로서, 이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줘야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앞으로 다가올 위기는 결코 만만하지 않으니까 말이지.’
어쩌면 실비아 교관과도 같은 사랑의 방식이 저들에겐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지 모른다.
전요한이 말없이 눈을 날카롭게 뜨고 있을 때였다.
[발신자 : 정서희
급히 상의해야 할 일이 있어요. 최근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니 지금 부사감실로 와주세요.]
잠시 잊고 있었던 전속 수행요원으로부터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