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미래시 (5)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상급생 군? 감탄이 나올 정도예요.”
얼굴이 발그레해진 실비아가 장검을 거두며 말했다.
그녀는 격렬했던 검술 대련으로 인해 흥분한 상태였다.
“교관님도 상당하시네요. 이만하면 지친 모습을 보일 만도 한데요.”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전요한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신의 전력이 만만한 수준은 아닌데, 기세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생도들에게 실전의 가혹함을 가르쳐 주려면 저 또한 한계 이상으로 강해져야 하는 법이죠. 그것이 사랑이니까요.”
실비아는 윙크하며 자신의 지론을 늘어놓았다.
자고로 사랑이란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서로를 몰아붙이는 것.
지금보다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한 원동력이었다.
그 과정에서 조금 상처를 입는 건 사랑의 열기가 확실히 전해진다는 증거.
아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실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상급생 군도 황홀한 기분이지 않나요? 제대로 느끼고 나면 다른 것에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려요.”
“성장의 변화를 체감하는 정도에서 만족하겠습니다. 매도당하는 것에 딱히 취향은 없어서.”
지나친 애정 공세에 전요한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과연 잔학교성의 실비아.
사람을 잘 가리지 않는 데다, 임시 부사감으로서 모두와 원만하게 지내려는 정서희마저 회피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와의 대련은 분명 유익한 시간이었다.
난이도가 낮아서 하품만 나오는 학내의 다른 수업들과는 달리 말이다.
[실비아]
검을 든 귀부인.
상당히 적극적인 무력 행사로 당신에게 애정공세를 가해옵니다.
일정 기간을 버텨낼 경우, 성장 면에서 흔치 않은 기회가 생깁니다.
‘흔치 않은 기회라.’
저번에 미래시가 발동한 이후로 그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긍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니 이대로 계속해도 될 것 같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상급생 군. 가끔 지도실에 들려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시고요.”
오늘의 교습은 끝이라며 실비아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를 뒤로한 채 걷던 전요한은 교정의 한 나무에 기대어 있는 정하은을 발견했다.
“잔학교성을 상대로 잘도 버티네. 혹시 네 이상형이라도 되는 거야?”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
실비아에 대한 교내 평가를 감안하면 무리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나쁘진 않아. 그래서 상급생이 되고 난 이후로도 담당 교관을 바꾸지 않은 거지.”
“흐흥, 학생회장이 들으면 질투하겠는걸? 그래도 이쪽을 더 우선시하도록 해. 나도 포함해서 말야.”
정하은이 당당하게 가슴을 펼쳐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전요한을 홀릴 수 있다는 듯, 여자로서의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다.
“관심을 원한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를 가지고 오도록 해. 그건 그렇고, 이번엔 뭐야?”
“저번에 난리를 피웠던 애들 말인데, 당시 교내에서 수상한 외부인과 접촉이 있었다나 봐. 혹시 성유물 도난 사건하고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확인해볼 가치가 있다며 정하은이 검지를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그녀의 정보는 대체로 신뢰할 만한 편에 속했다.
‘수상한 외부인이라.’
전요한은 턱에 손을 올렸다.
어쩌면 네크로맨서에게만 집중하느라 놓쳤던 부분일지 모른다.
한동혁과 천강우.
두 녀석의 자백 내용에 왜 이런 접촉 사실이 적혀 있지 않았을까?
확실히 개과천선하게 만들었으므로, 중요한 내용이었다면 일부러 숨겼을 리는 없다.
“의혹이 생겨서 재수사받을지도 모르는데, 그 사실을 왜 안 알려줬는지 궁금한 거야?”
허리 뒤로 손깍지하던 정하은이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전요한의 속내를 읽었다는 듯 표정이 암고양이처럼 변해 있다.
“넌 알고 있어?”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수상한 외부인이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면, 나름의 대책도 세웠지 않을까?”
뒷골목 업계에서는 그런 자들을 도마뱀이라고 불렀다.
곤란한 일이 발생하면 일명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함께 가담한 끄나풀들부터 처리하거나 입을 막아서 사건의 전말을 은폐한다.
그것이 바로 꼬리 자르기의 핵심이었다.
“네 말은, 한동혁과 천강우가 기억 조작 같은 거라도 당했단 말이야?”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잖아? 확인되지 않은 루머긴 해도, 환각 상태에 빠뜨려 최면을 걸 수 있는 알약도 시중에 유통되고 있대.”
정하은이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최근에 좀비 사태도 발생했겠다, 그녀가 소설을 쓰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확실히, 그냥 흘려들을 이야기는 아니네. 녀석들도 무언가 계기가 있어서 나쁜 짓을 하게 된 걸 테니까.”
전요한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이전부터 의심하고 있던 부분이긴 했다.
한동혁과 천강우는 어떻게 죄악의 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
기본적으로 아카데미 생도는 외부로 나가더라도 금방 되돌아와야 하는 만큼, 그러한 계기가 형성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악마의 하수인이 직접 교내로 방문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서열이 조금 되는 놈이라면 기억 조작을 거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정말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개인적인 조사를 한다고 그간 여기저기를 샅샅이 돌아다녔을 터였다.
‘설마 그 녀석인가.’
기억을 되짚어보던 전요한은 문득 한 인물을 떠올렸다.
네크로맨서와 싸울 당시 슬럼가의 지하철역에서 마주쳤던 괴한.
분명 악마의 하수인으로 보였는데, 먼저 도망치길래 내버려 뒀었다.
물론, 봐준 건 아니고 네크로맨서를 사로잡는 일에 집중한 것이다.
“짐작이 가는 바라도 있는 거야? 그렇다면 내게도 알려줘.”
정하은이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눈치가 빨라서인지, 전요한이 뭔가 숨기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이야기해 주어야 하나.’
죄악의 사도들에 대한 건 되도록 비밀로 해야 했다.
관리국 국장의 부탁도 있었고, 괜히 혼란을 조장해서 좋을 것이 없다.
만약 정하은이 계획을 누설하기라도 하면, 일이 적잖이 꼬이게 되겠지.
그녀가 얼마나 신뢰 가능한 인물인지 아직은 확신이 안 선다.
전요한이 입을 여는 걸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정하은]
교내의 사립탐정.
적당한 대가를 치르면 당신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하지만 호기심이 너무 많은 게 탈이므로, 갑작스레 변을 당하진 않는지 늘 지켜봐야 합니다.
‘이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미래시가 발동했다.
언제, 어떻게 해야 조건이 만족되는진 모른다.
덕분에 정하은을 어느 정도는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지.’
미래의 여러 가능성을 알려주는 능력이었다.
그 가능성에 배신이나 변절 따위의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뭔가를 믿고 맡길 상대는 된단 의미였다.
전요한은 이제부터 정하은을 수사팀에 확정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잘 들어.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한 내용이니까.”
“으, 응.”
긴장한 정하은이 침음을 삼키며 귀 기울였다.
* * *
정하은을 동료로 삼은 건 잘한 일이었다.
덕분에 교내의 자질구레한 사건들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사방에서 날뛰는 죄악의 사도들에 대처하려면, 대신 몸으로 뛰어줄 손발이 필요하다.
“언제 퇴소하냐?”
교내 훈련소의 벽에 기대어 있던 전요한이 물었다.
그의 앞에서 운동기구를 정리하던 박수호가 고개를 들었다.
“일주일 후. 입소한 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시간 참 빠르네.”
박수호는 20세의 성인이어서 아쉽게도 아카데미 생도는 되지 못했다.
대신, 견습생의 신분으로 여기서 속성 코스를 밟고 있었다.
“종합 능력치 좀 많이 올렸냐? 신체강화 계열은 초반엔 스탯의 총합이 더 중요해.”
“하하. 내 걱정을 해주는 거냐? 문제 같은 건 전혀 없다. 중간에 이상한 녀석하고 시비가 붙어서 조금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저번에 천강우를 만나서 구타당했던 사건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교내에 그만한 강자가 많지는 않지.
이능력을 막 개화하여 기고만장하던 박수호의 입장에선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항상 명심해. 너보다 강한 자는 세상에 널렸단 사실을.”
“쓰라린 교훈을 떠올리게 해줘서 고맙군.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야? 네가 아무 용건도 없이 찾아오진 않았을 텐데.”
박수호는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요한은 자신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
과거에 던전 공략을 함께 했을 때, 그가 대단한 이능력자임을 실감한 바 있었다.
‘예상대로 고분고분하군.’
혼자 팔짱을 끼고 있던 전요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보통 이능력을 각성한 지 얼마 안 되는 녀석들은 상급생에게도 기세가 등등하다.
하지만 박수호는 강자들이 판치는 현실을 비교적 빨리 깨달은 편이었다.
‘그렇다면 앞뒤 재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어.’
현재 계획 중인 수사팀의 일원으로 녀석이 필요했다.
전요한은 복근을 기르는 운동기구에 다가와 걸터앉았다.
“너, 본의 아니게 처음 들어갔던 던전 기억나지?”
“응, 물론이지. 그때 나는 일반인이었는데 이상한 붉은빛에 이끌려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잖아.”
박수호는 당시의 일들이 잊히지 않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분 나쁜 마기로 가득했던 악마의 미궁.
그곳에선 정체 모를 존재가 모든 상황을 주도하며 생존자 간의 다툼을 조장하고 있었다.
“살아남고 싶은 자는 옆에 있는 누군가를 죽이라고 했잖아. 그러면 혹독한 생존 게임에서 열외시켜 준다고 유혹했지.”
“녀석의 수작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도 직접 봤었지?”
“물론. 네가 최대한 이끌어 주려고 했는데 전부 수포로 돌아갔잖아. 조금 안타깝긴 했어.”
박수호가 잠시 말을 멈추고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확실히, 나쁘진 않은 녀석이다.
종합무술을 배웠다고 힘자랑이나 하고 쓸데없이 허세를 부려서 그렇지.
“만약 현실에도 그런 악마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할래?”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전요한은 회심의 질문을 던졌다.
이건 녀석을 동료로 맞이하기 전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
인간성은 대충 파악해 뒀지만 직접 대답으로 듣고 싶었다.
“무조건 막아야지!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 아니야?”
박수호가 눈을 부릅뜬 채 길길이 날뛰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전요한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죄악과 싸우기 위한 정신교육 하나는 제대로 되어 있네.’
[박수호]
방패를 든 하급 기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순수한 열망만으로 당신의 곁을 지킵니다.
실력은 아직 형편없지만, 어디엔가 쓸모가 있을지 모릅니다.
과연, 운명 카드의 내용대로였다.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박수호는 적당히 거들어줄 존재로서 손색이 없다.
‘나중에 진정한 가치를 증명해낼지는 미지수로군.’
박수호가 어느 정도의 자질을 지녔는지에 대해선 파악해둔 바가 없었다.
녀석과 조우한 게 이번이 세 번째에 불과한 까닭이다.
이왕이면 후일에도 써먹을 인재이길 바랐으므로, 전요한은 한 가지 더 시험해 보기로 했다.
“악의 무리와 맞서기 위해선 힘이 필요해. 너도 동의하지?”
“당연한 것 아니야? 아무런 능력도 못 갖춘 영웅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래서 말인데, 한번 덤벼봐. 조금 봐줄 테니까.”
제자리에서 일어선 전요한이 도발하듯 손을 까닥했다.
박수호는 잠시 망설였다.
“저, 정말 봐줄 거야?”
“그래. 구면인데 설마 내가 심한 짓을 하겠어?”
“그, 그럼 잘 부탁해!”
정중하게 한 수를 부탁한 박수호가 주먹을 뻗었다.
전요한은 가볍게 피한 후 발차기로 녀석을 멀리 날려버렸다.
콰광‑!
소음과 함께 멀리서 힘겹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믿은 내가 병신이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