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미래시 (4)
방과 후의 늦은 오후였다.
외출 나온 전요한을 누군가가 몰래 뒤따르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상급반의 수다쟁이, 정하은.
그녀는 미행 상대의 사생활을 열심히 캐고 있었다.
채린에게서 떼어놓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실은 개인적인 호기심 탓도 있었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겠어.’
일전에 던전 공략을 함께 했을 때 당시 분명히 목격했었다.
위기의 순간, 전요한이 생도들의 평균 전력을 훨씬 웃돌았던 모습을.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힘을 빼고 다녔는데,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특별한 능력이라도 보유한 걸까? 아니면 전대미문의 성유물?’
정하은의 망상에 별의별 가능성이 떠올랐다.
쉽게 잊혀지지 않는 건, 전요한이 던전에서 소환했던 흑발의 흡혈귀였다.
어떻게 그런 존재가 세상에 있을 수 있지?
피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사라졌던 흡혈귀의 모습은 경외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전요한은 그의 권능을 이용하여 채린을 홀려버린 걸지도 모른다.
정하은이 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을 때였다.
타닥!
평소의 걸음으로 걷던 전요한이 돌연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상당해서 마법사인 정하은에겐 힘에 부칠 정도였다.
“헤엑, 헤엑.”
종합 능력치가 상위권이라고 하더라도 근력이나 체력은 평균 이하다.
어떤 마법사가 법구나 지팡이를 들고 물리 공격에 투자하겠는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런 육성 자체가 불가능했다.
온라인 게임처럼 원하는 스탯을 선별하여 올리는 방식이 아닌 탓이다.
팔굽혀펴기를 해야 근력이 오르고, 오래달리기를 해야 체력이 오른다.
지난 몇 년간 정하은이 강도 높은 신체운동을 한 횟수는 손에 꼽았다.
“이러다 놓치겠네.”
잘 모르겠지만, 전요한은 누군가를 뒤쫓는 것 같았다.
행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스름한 골목.
교내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불순한 무리와 연관이라도 있는 걸까?
채린과 함께 그런 자들을 비밀리에 조사하는 중이라고는 했다.
“아놔, 너무 빠른 거 아냐?”
거리가 점차 멀어지자 정하은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가뜩이나 호흡 곤란 상태인데, 더 분발해야 한다니.
고통과 함께 참기 어려운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포기 직전 상태까지 도달한 정하은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헤에엑, 헤에에엑.”
순간 하늘이 노랗게 변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결국 상태 안정을 위해 잠시 멈춰서 상체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젠자아앙.”
저질 체력이 이토록 저주스러운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불만을 늘어놓는 정하은의 목에 무언가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기어 들어온 거야, 아가씨?”
오싹한 소름과 함께 무언가 형용하지 못할 기분 나쁨이 느껴졌다.
침을 꼴깍 삼키며 흘끗 돌아보니, 웬 괴한이 단검을 겨누고 있었다.
“누, 누구예요?”
“궁금해? 오빠는 말이야. 이 구역에서 활동하는 운반책이란다.”
운반책이라고?
뜻밖의 단어를 들은 정하은이 경악했다.
교내에서 떠도는 괴담 중에 그와 관련된 것이 하나 있었다.
“자, 장기 매매?”
“어이쿠. 예쁘장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쓰나. 뭐, 가끔씩 일을 맡기도 한다만 이번 건은 좀 다르지.”
괴한은 서서히 목에 가져다 댔던 단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반항하지 못하도록 정하은의 복부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흐억….”
신체능력이 낮은 정하은에겐 한 방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가 주저앉자, 괴한의 양손이 가녀린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으윽….”
극도의 위기감을 느낀 정하은이 눈을 크게 떴다.
정면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괴한의 표정에 희열이 드러나고 있었다.
“걱정 마. 당장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냥 기절시킨 후에 적당히 재미를 보려는 것뿐이야. 크큭.”
이런 식으로 못된 짓을 시도하다니, 최악의 상대였다.
강한 거부감을 느낀 정하은의 손아귀에 불꽃이 일었다.
‘절대로 용납 못 해.’
이런 녀석에게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거친 손에 의해 교복이 찢기면서도 정하은은 마력 운용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만 더….’
정신이 혼미한 탓인지 불꽃 송이가 제대로 맺히지 않았다.
거의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짓밟았다.
“아악!”
짧은 비명과 함께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이봐, 조심해야지. 저런 년들은 덮치려 하면 기를 쓰고 달려든다고.”
어디엔가 있었던 괴한의 동료였다.
좌절감을 느낀 정하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흐윽.”
완전히 끝나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더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발끝의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점점 세게 졸려오는 목의 압력이 체내의 혈류마저 방해했다.
시야가 어둑해지며 눈이 감기는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응? 뭐야?”
사내가 고개를 돌린 건 그 순간이었다.
측면으로부터 날아온 발차기가 그의 안면에 제대로 꽂혔다.
푸콱.
순간적으로 고개가 꺾이며 상반신이 들썩였다.
동료가 어이없게 당해버리자 남은 괴한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자식…!”
품에 숨기고 있던 권총을 꺼내 들려 했지만, 그전에 연이은 공격이 날아왔다.
콰드득!
하늘을 찌를 듯한 올려 차기에 취약지점의 목뼈가 으스러진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괴한이 쓰러졌고, 정하은의 표정에 의아함이 들었다.
‘누, 누구야?’
이런 곳에서 도움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정신없이 전요한을 뒤쫓다 보니 이런 음지까지 발을 들이게 되었는데.
상대의 모습이 쉽사리 연상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내려다보며 얼굴을 들이밀기 전까진.
“괜찮냐?”
무신경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귀찮아졌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표정.
그는 다름 아닌 전요한이었다.
“흐윽….”
졸지에 미행 상대로부터 구원받은 정하은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설움이 복받쳤는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한동안 그 상태로 일어나지 못했다.
* * *
시가지의 구석에 있는 분식점.
전요한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정하은과 마주 보고 있었다.
“슬슬 이야기해 줄래? 왜 내 뒤를 쫓고 있었는지.”
정하은이 미행 중이라는 건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종합 능력치가 점차 상승하면서 인지 가능한 감각의 범위도 넓어진 덕분이다.
별 이유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참에 확실히 해야 했다.
“그, 그게….”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뒤적이던 정하은이 시선을 피했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엔 창피한 이야기.
눈치만 보면서 머뭇거리자 전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무언가 보답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하다못해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도.”
“애, 애초에 네가 잘못한 거야! 어쩌다가 채린을 그 지경까지 꼬신 거냐고!”
벼랑까지 몰린 정하은이 벌떡 일어서며 역으로 쏘아붙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제법 커서, 주위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주위 반응에 민감한 정하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아….”
“진정하고 앉아. 너 때문에 나까지 주목받고 있으니까.”
“그, 그래.”
적반하장이었던 정하은이 순식간에 고분고분해졌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자 전요한은 재밌단 표정을 지었다.
‘학생회장의 친구라서 그런가, 좀 닮았네.’
잘만 하면 교내의 정보망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알기로, 녀석은 수다쟁이 스타일에 아는 친구들도 많다.
얼음 공주 이미지라서 친화력이 부족한 채린과는 달랐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자신을 미행하려던 이유는 쉽게 이야기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건 조금 이따가 듣기로 하고, 채린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물어봤다.
“학생회장하고 가까운 사이인 거 맞지?”
“그래, 방과 후를 제외하고는 항상 삼인방으로 붙어 다녀.”
“최근 학생회장의 가장 큰 고민이 뭐야? 말해봐.”
이건 일종의 시험이기도 했다.
정하은이 교내의 정보망으로서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바로 곁에 있는 채린의 심경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본격적으로 임무를 맡기기에 앞서 자질부터 살피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질문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습이었다.
“왜, 혼자서 해결 못 하는 고민거리라도 있으면 저번처럼 나타나서 해결해주게?”
채린과의 관계를 조금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요한은 헛기침을 한 후 정하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잘못 짚었어, 멍청아.”
“……!”
정하은의 얼굴이 다시 한번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번엔 수치심이군.
멋대로 오해하고 상대를 미행할 정도의 얼간이 취급받는 게 충격적인 모양이다.
“자, 질문에 답해봐. 너에 대한 평가가 달려 있으니까 신중하게 대답해야 해.”
“펴, 평가라니. 또 무슨 말이야 그건?”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자 정하은이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긴장감을 풀기 위해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집어 한입 베어 먹었다.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어? 마땅한 방법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지.”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보고 능력에 따라 일을 맡기겠단 거야?”
“아니, 신뢰 가능성까지 따져봐야지. 도중에 배반 때리고 계획을 누설하면 곤란하니까.”
동료를 구할 때 반드시 따져봐야 할 문제들이었다.
뭐라고 답해야 고평가받을까 고민하던 정하은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학생회장은 뭔가 중대한 고민을 숨기고 있어. 예전부터 눈치챘는데 아마도 집안 문제 같아.”
“어떤 집안 문제? 구체적으로 말해봐.”
“재벌가의 영애니까, 혹시 정략결혼? 그만한 이야기가 오갈 만큼의 나이는 되었을 거야.”
“호오.”
의외로 정확하게 알아맞혔다.
이만하면 눈치는 합격.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만이 남아 있다.
“좀 더 지켜보고 너에게 믿음이 가면 이야기를 꺼낼게. 조금 곤란한 사건이 있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이 몸의 능력이 필요하다 이거지? 중2병이라면 송주한에게 밀리지만, 교내의 정보 수집이라면 자신 있어.”
이제야 조금 대화가 통하는 분위기였다.
전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여어, 오랜만인걸?”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흘끗 쳐다본 전요한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능력을 얻어서 그런가, 요새 자주 보이네?”
상대는 일전에 던전 공략을 함께 했던 박수호였다.
당시에는 기껏해야 종합무술을 수년 정도 한 일반인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당당한 신체강화 계열의 능력자라고. 다시 말해서,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동업자라는 말이지.”
박수호가 자랑이라도 하듯 어깨에 힘을 줬다.
전요한은 그의 팔에 감겨 있는 붕대를 응시했다.
“아직도 안 나았냐?”
“벼, 별것 아니야. 전치 4주 정도밖에 안 되는 부상이라더군.”
박수호는 이능력자가 되었다고 애써 센 척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천강우에게 모진 구타를 당하고 이만큼 돌아다닌다는 게 대단하긴 하다.
“적어도 의지력만큼은 인정해줘야 하겠어.”
마침, 뒷조사에 필요한 일손이 부족하던 차였다.
정하은이 정보 수집을 해주고 박수호가 현장에서 서포트해 준다면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좋았어. 이로써 수사팀은 잠정적으로 결성되었다.’
좀비 사태가 안정되어 방과 후의 외출은 언제든 가능하다.
이들을 데리고 인근 지역을 샅샅이 뒤질 생각이었다.
정서희와 채린이 교내의 움직임에 주목하는 동안 말이다.
노력한 만큼의 결실이 있길 기원하며 전요한은 축배를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