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미래시 (3)
“아아, 잘 먹었다.”
강기태는 만족한 표정으로 배를 매만졌다.
그가 주문했던 음식의 빈 접시들이 눈앞에 쌓여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먹는구나, 너.”
상상을 뛰어넘는 식사량에 전요한은 땀을 삐질 흘렸다.
신체강화 계열의 헌터가 대식가 성향이란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칼로리 소모량이 엄청나서 말이지. 평소에는 고단백 식단으로 버티지만, 가끔씩 이렇게 원기 회복을 해줄 필요가 있어.”
식비가 많이 나오는 탓에, 대부분의 경우엔 요구되는 식사량을 채우지 못한다.
허기진 채 살아가는 것이 일상인 강기태에게 이 같은 대접은 충분한 포상이었다.
“그런가? 생각해보니 예전 동료 중에도 폭식을 자주 하던 수인족 여성이 있었지.”
육식만 엄청나게 하는 주제에 날씬한 체형을 유지했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강기태는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수인족이라니, 나도 실제로 만나 보고 싶은걸? 인간의 체형에 고양이 귀와 꼬리가 달린 거야?”
“뭐, 종류는 다양한 편이야. 어쩌면 네 취향에 맞는 상대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사실 이종족과의 사랑을 해보고 싶긴 해. 나, 어렸을 때 판타지도 많이 읽었거든.”
“판타지?”
갑작스러운 단어에 전요한은 머리를 갸웃했다.
생각해보니 우연히 도서관의 책장에 꽂혀 있던 종이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세계를 배경으로 여러 종족이 등장하는 소설 말이야?”
“왠지 실제로 존재할 것 같지 않아? 네가 말한 수인족도 본래 살던 곳이 있을 거 아냐.”
강기태는 이세계를 모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가능성에 들뜬 표정이었다.
실은 학계에서 오래전부터 가설이 제기되어 왔다고 한다.
핵심은 던전이 차원 간의 경계에 위치한 중간지대라는 것.
마치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이어질 수 있고, 이를 이용하면 반대편의 차원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고.
“재미있는 이론이네.”
“네가 갇혀 있었다는 대미궁도 그런 개미굴이 아닐까? 일반적으로 던전은 공략하면 소멸하지만, 특정 조건하에서는 융합되면서 규모가 커질지도 몰라.”
강기태의 상상력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가상현실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에 빠삭해서 그런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전요한은 강기태에 대한 평가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너, 단순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제법 똑똑하네?”
“신체강화 계열이라고 두뇌도 근육으로 되어 있을 줄 알았어?”
“응, 솔직히 조금은.”
“야 이….”
입가를 닦던 강기태의 표정에 억울함이 드러났다.
그는 잠시 마음을 안정시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미궁에선 대체 뭘 먹고 지낸 거야? 일반적으로 던전내부는 척박한 환경이잖아. 갑자기 궁금해지네.”
미경험자로서는 충분히 의문을 가질 만한 내용이었다.
딱히 비밀로 할 것도 없었기에 전요한은 사실대로 알려줬다.
“네가 비유한 개미굴로 설명하자면, 각각의 구역마다 식량 창고가 있어. 여왕개미의 명령으로 마련해둔 것이지.”
“여왕개미?”
“그래, 복잡한 개미굴은 사실상 그녀의 지배하에 철저히 경영되고 있지.”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란 쉽지 않았다.
다양한 차원의 이종족들이 합심하여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음에도 말이다.
전요한이 지난 일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친구가 한 명 늘었나 보네.”
기숙사 식당의 누군가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강기태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하, 학생회장?”
갑자기 다가온 인물은 다름 아닌 채린이었다.
콧대 높은 그녀가 내려다보자 전요한은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일이야? 또 한판 붙게?”
“그럴 마음은 없어. 이번엔 개인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려는 것뿐이야.”
개인적인 도움이라.
이런 대화가 오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된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학생회장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의 일이라면 알아둘 필요성은 있었다.
“뭔데?”
“일단 따라와. 여기에서 이야기를 꺼내기엔 보는 눈이 많으니까.”
채린은 다짜고짜 전요한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 모습을 본 강기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오우, 둘이 요새 잘되는 모양인데?”
“그런 게 아니야. 쓸데없는 추측은 그만둬.”
채린이 기분 나쁘다는 듯 흘겨봤다.
그러고는 가만히 있던 전요한의 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어서 가자.”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로 향했다.
* * *
“실은 나와 함께 교내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한 조사를 맡아줬으면 좋겠어.”
채린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왜 도움을 요청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덧붙였다.
“이번 사건은 일단락되긴 했지만, 언제 또 그런 소동이 발생할지 몰라. 기존의 학생회 소속 생도들은 맡은 업무가 많아서 새로운 인력이 필요해.”
한마디로 내부 조사와 관련하여 학생회의 일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실속이 없다고 판단한 전요한은 일단 거절 의사를 밝혔다.
“굳이 나일 필요가 있어? 오히려 너만 괜히 구설수에 오를 것 같은데.”
“천강우 같은 녀석들을 상대하려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전력의 소유자여야만 해. 그러니까 너 말고는 적임자가 없어.”
채린은 결단을 촉구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지간한 생도라면 그녀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겠지만, 전요한은 달랐다.
“그거, 아무런 소득도 없어 보이는데?”
“무슨 말이야? 우리 둘이서라면 분명….”
“아니, 그 말이 아니고 내게는 전혀 이득 될 게 없단 의미야.”
“그런….”
반박하려던 채린이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전요한의 거절엔 명확한 사유가 있다.
괜한 관심을 끌고 오해까지 살 수 있다는 것.
다른 생도들과 경쟁하는 시간을 허비하면서까지 얻을 만한 보상은 없다는 것.
아무리 학생회장이라 해도 희생을 강요하지는 못했다.
‘역시 무르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채린을 보며 전요한은 혀를 찼다.
여기까지 다짜고짜 끌고 온 주제에 이제 와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극복해야 할 장벽일지 모른다.
[채린]
잠자는 숲속의 마녀.
곤경에 빠진 상태여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녀를 구원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나중에 마음을 얻고 나면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줍니다.
‘운명 카드대로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긴 하네.’
저번에 미래시가 발동한 이후로 그 내용은 변한 것이 없었다.
부탁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
망설이는 채린을 앞에 둔 채, 전요한은 잠시 고민해봤다.
‘만약 가시면류관을 찾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나쁘지 않은 결정일 수도 있겠어.’
실종된 성유물의 행방은 관리국에 맡겨두었긴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뒷조사는 몰래 할 생각이긴 했다.
악용될 경우에 자칫 재앙을 일으킬 수도 있는 탓이다.
‘학생회장의 도움을 받으면 조사 과정이 수월해지겠지.’
학내 문제와도 관련 있으니 채린은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선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부탁한다면 함께 다녀줄게.”
“저, 정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던 채린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려는 연기 따윈 아니고, 어디까지나 순수한 진심이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그게 뭔데?”
“함께 다니는 동안은 내 말에 순종하도록 해. 적당히 이의를 제기하는 건 좋지만, 지금까지처럼 날을 세우면 안 돼.”
만약 도중에 의견이 갈리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복잡한 일에 휘말려 시간만 낭비할 수도 있다.
그런 위험성을 최소화하려면 채린이 내 의사에 적극적으로 따라줘야 한다.
“수, 순종하라고?”
뜻밖의 말에 놀란 채린이 눈을 크게 떴다.
콧대 높은 그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일 것이다.
학생회장으로서 다른 생도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훈계하는 입장이었을 텐데.
생각해보니 단어 선택에 좀 오해의 여지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뭐, 적당히 알아듣겠지.’
그런 쪽으로는 딱히 수작을 부린 적이 없었다.
오해를 한다는 게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전요한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는지, 채린은 수줍어하며 조금 얼굴을 붉혔다.
“아, 알겠어. 그 정도 조건이라면….”
순순히 허락하며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무언가 어색한 느낌을 주었다.
‘설마, 아니겠지.’
순간 이상한 생각이 떠오른 전요한은 극구 부정했다.
둘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의 정적이 흐르고 있을 때였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며 정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급반의 수다쟁이.
그녀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가렸다.
“여, 여기는 밀회 장소가 아니야! 그만 떨어져!”
정하은은 학생회원으로서 업무를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분위기가 깨지자, 채린도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누가 밀회를 했다고 그래!”
망상을 한 게 찔리는지 목소리가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한편, 전요한은 곤란한 상황을 피해서 다행이라는 반응이었다.
“어쨌든, 번호부터 교환하자.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바로 만나야 하니까.”
“으, 응.”
휴대폰을 주고받으며 손길이 와 닿자 채린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이후 전요한이 손을 흔들며 사라지자, 정하은의 표정이 암고양이처럼 변했다.
“별로 마음에 안 든다며? 그런데 왜 그렇게 수줍어하는 거야?”
“너, 너는 알 필요 없어!”
변명하기 귀찮아진 채린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보니 연락처까지 주고받게 되었네.’
전요한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사심도 품지 않고 다가가서 용무를 말했다.
더군다나 정략결혼으로 상대가 정해져 있는 몸.
다른 남자를 이성으로 보아선 안 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사귀는 여자도 있어 보이던데.’
관리국으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임시 부사감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서희.
생각해보니 그녀도 만만치 않은 용모의 소유자였다.
발휘할 수 있는 이능력의 수준도 제법인 모양이고 말이다.
‘아니, 내가 왜 지금 경쟁의식을 느끼는 거야?’
채린은 자신의 혼란해진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예전부터 바랐던 그 감정일지, 아니면 단순히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나약함일지는 확신이 가지 않았다.
“뭘 그렇게 고민해? 자존심 높이지 말고 확 고백해버려. 너 정도의 여자라면 그 녀석도 거절 못 할걸?”
불구경 난 듯이 맴돌던 정하은이 결단을 부추겼다.
그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로서 정보원의 역할까지 자처했다.
“개인적인 취향 같은 거 알아봐 줄까? 예를 들면 좋아하는 음식이라든지….”
“됐어! 그런 거 아니니까 제발 멋대로 떠들어대지 마!”
결국 얼굴이 새빨개진 채린은 학생회실의 문을 박차고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홀로 남겨진 정하은이 재미있다는 듯 입을 가렸다.
“정말 솔직하지 못한 계집애라니까. 정작 중요한 타이밍엔 어설프기만 하고.”
평범해 보이는 전요한이 뭐가 좋다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됐다.
무언가 유별난 면이 있긴 해보이지만, 솔직히 채린의 곁에 두기엔 부족함이 많았다.
콩깍지가 씐 친구를 구원해 주려면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어떤 녀석인지 알아봐야겠네. 몰래 뒤를 밟아 봐야지.”
안 그래도 전요한과 관련하여 들려오는 소문이 많아 흥미가 있었던 차였다.
책상 앞에 앉은 정하은이 철두철미한 미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