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미래시 (1)
“지구의 여신이라.”
아카데미로 되돌아온 전요한은 생각에 골몰했다.
네크로맨서가 한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런 존재가 실제로 있다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었다.
실존 가능성을 인정하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실은 대미궁에 갇혔을 때, 그 존재로부터 구원받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갑자기 이능력을 개화하게 된 건 바로 그때였다.
듣도 보도 못한 환생 시스템.
기존의 성장치를 대가로 새로운 특수 능력과 보너스 스탯이 생겨났다.
상위 차원의 권능자가 은총을 내리기라도 하지 않는 한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렇기에 전요한은 마음 한편으로는 배후에 권능자가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어왔다.
그게 지구의 여신일 거라는 자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분주히 보고서를 작성하던 정서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녀는 지난 사건과 관련하여 아카데미에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요한은 창가의 소파에 기댄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여기는 기숙사의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부사감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한가하게 누리고 있었다.
“치이, 맛있는 것도 안 사주면서 속마음까지 숨길 거예요?”
“제가 혼자서 떠올리는 망상을 굳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만?”
“공적을 전부 가로챘으면 뭐라도 알려 달라고요. 힘든 심부름도 시켜 놓고서는.”
정서희는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바라봤다.
연이은 사건으로 인해 평소보다 많아진 작업량 때문이었다.
노동의 강도는 올라갔는데 주어지는 보상이 적으니, 의욕이 떨어질 만도 하다.
‘생각해보니 정서희가 나름 도움을 주긴 했었지.’
네크로맨서와의 결전에서 적잖이 곤란함을 겪었을 것이다.
그녀가 골동품 가게에서 성녀의 목걸이를 구해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골동품 가게는 좀비 사태로 인해 완전히 문을 닫았을 것이다.
‘무엇으로 보상을 줘야 할까?’
지난 사건의 여파가 만만치 않아서 이곳은 여전히 배달 불가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교내 학식에 스페셜 메뉴가 있긴 하지만 별로 좋아할 것 같진 않고, 뭔가 다른 형태의 활력소가 필요했다.
“혹시 조만간 개최된다는 요리 대회에 참가할 생각 없으세요, 서희 씨?”
“요리 대회요?”
“최근에 분위기가 안 좋아서 미뤄진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만약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함께 도전해보죠.”
물론, 정서희는 어디까지나 담당 교관으로서 참여하는 것이다.
자신이 맡은 생도들의 분투를 지켜보며 뒤에서 맛난 것만 먹으면 된다는 이야기.
교내에서 무료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는 그녀에겐 이만한 꿀이 없을 터였다.
“괜찮은 의견이네요. 마침, 교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임무도 받았거든요. 외부의 감시자란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요.”
“그런 거 말해줘도 돼요?”
“별로 숨길 필요는 없잖아요? 어차피 요한 씨는 딱히 적대적인 인물도 아닌데.”
자신은 신뢰해도 괜찮다는 듯 정서희가 윙크를 해보였다.
전요한을 곁에서 감시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죄악의 사도일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제 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우니 적당히 협력하며 지내는 의무만이 남았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보다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도 된다는 말이다.
“뭐, 서희 씨는 별로 경계 대상도 못 되긴 하죠.”
전요한은 상관없다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에 발끈한 정서희가 손아귀에 작은 불꽃을 생성해냈다.
“이래 보여도 나름 관리국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편에 속하거든요? 진급해서 상부로 인사 이동하는 게 어려운 거지.”
“그런가요? 확실히 전력은 나쁘진 않은데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어요.”
대미궁에서 함께 했던 마법사, 시르케라면 요점을 정확히 짚어줄 수 있었다.
네크로맨서 같은 강자들이 활개 치기 시작한 이상, 정서희도 한 단계는 더 성장해줘야 했다.
전요한이 시르케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르첼.
학내의 징계위원장이자 교화 담당교관이었다.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이에요, 또?”
“비밀 장소에 보관해 두었던 성유물이 사라졌어요.”
메르첼이 아카데미의 대변자로 관리국에 머무르는 사이 벌어진 도난 사건이었다.
곤란한 상황에 전요한은 머리가 아파짐을 느꼈다.
“아, 이래서 빈집털이를 조심해야 하는 건데.”
사건 당시에 남겨져 있었던 관리국 인사는 정서희뿐이었다.
물론, 실비아 같은 교관들도 있었으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선 이해도가 부족했다.
그런데 대체 누가 학내에서 최고의 보안이 유지되는 장소를 들락날락한 걸까?
한동혁이나 천강우처럼 일반 생도들보다 조금 뛰어난 정도로는 무리였을 터였다.
“자세한 건 직접 가서 이야기하죠. 단서가 전혀 안 남아 있는 건 아니니까요.”
중대 사안이라며 메르첼이 걸음을 재촉했다.
전요한은 정서희와 마주 본 후 함께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가시면류관은 학내의 비밀 연구소 최심부에 봉인되어 있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조차 권한을 허가받지 못하면 손댈 수 없었는데, 범인은 아무런 입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이런 장소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생도들의 보는 눈도 있는데, 어떻게 유지해온 거예요?”
전요한이 신기하다는 듯 내부를 구경했다.
성인 한 명이 온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시험관.
다양한 신소재의 입자 구조와 원소반응을 관측하는 분석 도구.
학내의 생도들이 모의 전투한 데이터를 검토하여 가상 시뮬레이션화하는 연산장치.
몇 차례 드나들었던 관리국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아카데미는 관리국 산하의 특수기관이에요. 단순히 신입 양성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의미죠.”
곁에 있던 정서희가 간략히 설명을 해주었다.
내부 보안상 현직 교관과 중요 인사가 아니면 이곳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전요한의 경우엔 사건을 해결하는 데 지대한 도움이 되고 있으므로, 유명학의 특별 허가가 내려졌다.
“관리국 국장님도 이제는 저를 조금 신뢰하시는 것 같네요.”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셔도 좋아요. 국장님은 예외 사항에 대해 매우 민감하신 분이니까요.”
인상 좋은 노인네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공과 사가 매우 엄격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원칙을 쉽게 바꾸지 않아서 관리국 요원들이 애를 먹은 적도 많고 말이다.
정서희가 본의 아니게 상관 비하를 하는 동안, 전요한은 문제의 장소를 면밀히 관찰했다.
‘여기저기에 마기를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아무래도 범인이 자신의 정체를 숨길 의도는 없었던 듯하다.
오히려 노골적인 도발과 경고가 곳곳의 흔적으로부터 느껴졌다.
이 정도로 여유롭게 성유물을 탈취해간 자라면 분명 마계에서 위계가 있을 터다.
“어때요?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나요?”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메르첼이 물었다.
전요한은 그녀를 향해 돌아선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족이 남긴 잔향을 추적하는 소질은 없습니다. 이미 시간이 제법 흐른 것도 있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 저번에 빼앗기면 곤란한 성유물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겼는지 메르첼은 곤란해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저번처럼 대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
관리국으로부터 학내의 내부 수습을 맡은 정서희도 적잖이 긴장한 모습이었다.
“일단 차근차근 되짚어보죠. 그 성유물에 어떤 이능이 깃들어 있다고 했었죠?”
“마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설명하자면, 「순교」입니다. 얼마나 많은 희생양을 바치느냐에 따라 영향력이 결정되죠.”
대미궁에서도 여러 차례 접한 적이 있는 골칫거리였다.
마계의 상위 존재를 소환하려면 적지 않은 제물이 필요한데, 그 양질에 따라 강림의 형태가 달라진다.
최소한의 기준치만 달성한다면 적합자를 매개로 빙의하거나 단순히 조종하는 수준.
하지만 일정치를 초과할 경우엔 인근 지역을 마계 영지로 삼으며 직접 현신하는 것도 가능했다.
“마계 영지요? 그 말은, 군림하는 지배자로서의 어떤 권한을 획득한다는 의미인가요?”
심상치 않은 걸 느낀 메르첼이 자세한 내용을 물었다.
“네, 악마의 둥지와 같은 공간으로 변해 버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존재들에게 상당한 불이익을 줄 수 있죠.”
“그럴 수가. 교화에 힘쓰는 입장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요.”
메르첼은 나름의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에게 신성력을 내려준 존재에 대해선 알지 못하지만, 그 목적만은 확실하다.
바로 현세를 어지럽히는 악의 무리를 섬멸하는 것.
질서와 위계를 바로잡는, 긍지 높은 임무가 그녀의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번 건은 관리국에서 해결해줄 수 있나요? 저로서는 힘에 부칩니다만.”
전요한은 은근슬쩍 무리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대로 가다간 골치 아픈 일들과 너무 많이 마주할 것만 같다.
지난 사건들을 도맡아서 처리한 건 단순히 이래저래 엮인 것이 많아서였을 뿐.
언제까지고 해결사 노릇을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문제 해결까지 들여야 할 노고는 둘째 치고, 계속 나서면 실제 전력이 드러난다.
충분히 성장하기 전까지는 되도록 아카데미 생도로서 생활하며 조용히 있고 싶었다.
“음, 확실히 요한 씨가 맡아야 할 사건은 아니네요. 저번 일도 끝맺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다시 수고를 끼칠 순 없죠.”
정서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전요한의 역할은 단순한 조언자다.
전대미문의 대미궁으로부터 생환한 자인 만큼, 미지의 존재들에 대해 아는 게 많아서 데려온 것이다.
악의 세력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는 주 전력으로 내세우기보단 오히려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해야 했다.
“그럼 저는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말을 마친 전요한은 보안 요원들과 함께 입구를 나섰다.
굳건했던 게이트가 열리자, 넓은 지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억하십시오. 이곳에 대해서는 외부의 누구에게도 절대 발설해선 안 됩니다.”
“만약 약속을 어길 경우, 특별보안법에 의거하여 관리국으로 연행될 수 있습니다.”
요원들은 잘 처신하라며 주의를 주었다.
등이 떠밀린 전요한은 말없이 지하통로를 따라 걸었다.
‘여전히 내가 모르는 비밀이 많이 있군.’
단순히 이능력자들로 구성된 기관이라 생각하면 안 되었다.
무언가 숨기려는 목적이 있고, 권한 등급에 따라 접근하지 못하는 기밀도 있다.
이계의 존재들과 맞선다고 해서 완전한 아군이라 여기면 곤란했다.
‘유명학 국장은 주요 기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려나.’
적어도 한국 지부에서만큼은 영향력이 지대한 인물이었다.
죽을 뻔했던 손녀까지 구해줬으니, 언젠가는 찾아가서 비밀을 물어볼 생각이다.
당장 그럴 생각이 없는 이유는 자신에게도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까닭에서였다.
‘예정했던 것보다 성장에 더 박차를 가해야겠어.’
네크로맨서를 물리치긴 했지만, 그 군주는 여전히 자신을 탐내고 있었다.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
그녀의 콧대 높은 모습을 떠올리며 전요한은 눈을 빛냈다.
“나중에 눈앞에서 무릎 꿇리면 재미있겠군.”
마계의 칠죄종마저도 그에겐 길들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이윽고 지상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전요한은 그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