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네크로맨서 (3)
“오호,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되었군. 전요한.”
드락실이 반갑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맞이했다.
쓰러진 채강윤을 내팽개쳐 두고는 전요한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저번에 못다 한 통성명을 하지. 내 이름은 드락실 아나크로노미콘 네세르제….”
“됐고, 하나만 물어보자.”
전요한은 관심 없다는 듯 말을 끊었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드락실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 네놈은 또 나를….”
“왜 귀찮게 쫓아다니는 거냐? 이유라도 들어보자 좀.”
전요한이 궁금한 건 오직 하나였다.
바쁘다고 던전에서 몇 번 지나친 것이 그렇게 억울한가?
대미궁을 공략할 당시에도 이 정도로 자기 어필에 집착을 보이는 상대는 적었다.
“이유? 그건 바로 그분께서 네놈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드락실은 순순히 질문에 답해줬다.
어디까지나 통성명을 하는 것만큼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분?”
“마계의 성역을 지배하는 마녀이자 질투의 죄악이신 스반힐트 님이시다!”
“그러니까 왜 관심을 보이는 거냐고, 너희들은.”
“최근에 마계의 대영지 중 하나가 괴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스반힐트 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무래도 네놈의 소행인 것 같다고 하더군.”
확신이라도 하는 듯 드락실이 눈을 번뜩였다.
“만약 그렇다면 어쩔 거지?”
“스반힐트 님은 마음에 드는 자를 어떻게든 수집하는 타입이시다. 네놈을 굴복시킨 후 무릎 꿇리고 발밑을 핥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지.”
“그래서 나를 곤경에 빠뜨려 생포라도 하시겠다?”
“죽인 다음 망자로 부활시키는 방법이 있지만, 그러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지.”
“재미있군. 지금까지 나를 노렸던 이유가 마녀의 개인적인 수집욕 때문이라니.”
전요한은 코웃음을 쳤다.
과연 질투의 죄악답긴 하지만, 상대를 너무 얕보고 있다.
대미궁이 어째서 공략당한 것인지 생각은 해본 걸까?
마계에 속하는 핵심적인 영지 중 하나였고 그 관리자는 하얀 마녀.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과 치명적인 저주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요컨대, 지금 눈앞에 서있는 네크로맨서와 최소한 동급 이상의 서열이었다는 의미다.
“너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새롭게 다시 태어난 나를.”
이번이 무려 3번째 환생이었다.
성장치가 아직 낮긴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손에 넣은 상태다.
중요한 순간에 최선의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드락실]
망자들의 군주.
주위에서 곤란한 사건을 일으키며 당신을 압박해 옵니다.
귀찮은 상대라고 계속 무시한다면 언젠가 큰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건의 발생을 암시하는 미래시가 발동했다.
이대로 물러나는 건 좋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요한이 걸음을 내딛자 옆에 있던 이수연도 뒤를 따랐다.
“채강윤을 가지고 놀듯이 망가뜨린 놈이야. 이상한 술수에 당하지 않게 조심해야 해.”
“적당히 잡몹들만 처리해 주세요. 녀석은 제가 맡겠습니다.”
전요한은 제법 자신이 있는 표정이었다.
일찍이 대미궁에서 네크로맨서를 상대해본 경험이 있었던 덕분이다.
‘어떤 경우에도 일대일 상황을 피하려 할 테지.’
네크로맨서를 공략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끊임없이 달려드는 망자들을 베어 넘기며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
일단 달라붙고 나면 그저 주문이나 외우고 있는 일개 암흑 마법사일 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빈틈을 보일 게 분명했다.
‘종합 능력치는 대략 100단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 같네.’
실전에서는 결코 간과하기 어려운 격차였다.
10단위의 차이만으로도 전력의 열세가 체감된다.
이 정도는 사실상 성급 하나의 차이.
누군가는 덤벼드는 게 무모하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수치상의 격차는 역량으로 극복하면 된다.’
성급 하나의 차이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기백과 자질.
전요한에겐 그만한 경험과 실전 감각이 있었다.
“어서 오거라, 인간족의 영웅이여! 내 이름은 드락실 아나크로노미콘 네세르제키옐! 죄악의 이름으로 너를 타락시켜 주마!”
전투 직전을 틈타 통성명을 마친 드락실이 만족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플랫폼 위에 널려 있던 감염자들의 사체가 검붉은 마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네크로맨서의 권능이군요.”
이수연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관리국 요원으로서 10여 년을 넘게 활동했지만, 이러한 유형의 능력을 보는 건 처음이다.
“단지, 사자를 일으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응용 범위가 상당히 넓은 편이죠.”
곧 벌어질 광경을 예상한 전요한은 아르티나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그가 함부로 달려들지 않자 드락실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오호, 생각보다 침착하군. 지금까지 보아왔던 모습과는 많이 다른데?”
“네 녀석은 조금 진지하게 상대해줄 필요성이 있겠지. 물론, 이름 따윈 아직도 안 외웠지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너를 처참하게 으스러뜨려서 공포와 함께 내 이름을 각인시켜 주마!”
도발을 당한 드락실이 화내며 지팡이를 앞으로 휘둘렀다.
전요한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망자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어떻게 할까? 기다렸다가 최대한 몰아서 잡아?”
“아니요. 정반대입니다. 최대한 간격을 벌리며 처리하세요.”
이유는 곧 지켜보면 알게 될 터였다.
짤막한 조언에 이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일단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관리국의 정예요원으로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본능적인 직감이 그녀에게 순순히 따르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전요한은 이전에도 네크로맨서를 상대해본 적이 있다.
‘채강윤도 당했는데 뭔가 알려지지 않은 능력 같은 게 있겠지.’
미지의 존재와 마주할 땐, 언제나 신중을 거듭하는 것이 관리국 요원의 철칙이었다.
적당히 포지션을 정한 이수연이 전격 마법을 사용하려던 때였다.
퍼어어엉!
굉음과 함께 전요한에게 접근하던 망자가 폭발해 버렸다.
마치 시한폭탄처럼.
그 위력은 주위를 난장판으로 만들 만큼 강력했다.
* * *
“저, 저건…?”
이수연은 순간 벙찐 표정이 되어버렸다.
만약 가까이에서 저 망자를 상대하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사방으로 비산하는 뼛조각과 오염된 피륙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말았을 것이다.
‘헌터에게 마나 실드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지.’
이능력자의 신체를 둘러싼 보호막에도 한계는 있다.
이수연은 최대한 방어적으로 전투에 임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아무렇지도 않네. 저 애는.’
폭발에 조금 휩쓸린 것도 같았는데, 별다른 피해가 없다.
주위의 망자들을 해치운 이수연의 시선이 전요한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현재 빙벽을 세워가며 망자들의 자폭 테러에 대처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하면 어렵지 않게 사냥을 계속할 수 있지.”
빙벽 사이를 오가며 전투하던 전요한이 즐거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미궁의 30층에서 동료들과 함께 네크로맨서를 제대로 엿 먹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보고 있나, 로리콘? 너의 그 잘난 시체 폭발도 사실 별거 아니라고.”
“크윽, 나는 로리콘이 아니다! 제대로 이름을 불러라, 건방진 녀석아!”
전황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드락실은 다시 한번 지팡이를 휘둘렀다.
이번엔 망자들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콰광‒!
매끈한 절단면을 드러내며 빙벽이 무너져 내렸다.
“호오.”
바로 뒤에 숨으려던 전요한이 제법이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저만치서 바닥을 기고 있는 채강윤을 쳐다봤다.
“네가 그렇게 당해버린 이유가 있긴 했구나? 네크로맨서인 주제에 염동력까지 쓰는데?”
염동력은 의지만으로 대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질이었다.
조금 전에 드락실은 그걸 조금 응용해서 빙벽을 절단했다.
단순히 마력칼날을 날려 보내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여, 염동력이라고?”
힘겹게 고개를 든 채강윤이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분명, 그러한 능력을 지닌 헌터가 극소수로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응용 범위부터가 수준을 달리하는 터라, 자신이 보기엔 전혀 다른 현상 같았다.
“그래, 저것에 당하지 않으려면 나처럼 특이체질이어야 하지.”
전요한은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라며 키를 재는 듯한 동작을 해보였다.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이는 그 모습에 채강윤은 할 말을 잃었다.
“…….”
“아 참, 내가 저 네크로맨서를 때려눕히고 나면 결투는 무의미하겠다.”
“왜지?”
“너는 제대로 타격도 주지 못하고 개발렸잖아. 당연한 결론 아니야?”
“…마음대로 생각해라.”
자존심이 상했는지 채강윤의 표정은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옆쪽에 같은 소속의 요원까지 있는데, 창피를 당한 것이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럼에도 채강윤은 순순히 전요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니 더는 맞붙어야 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현장에서 지켜본 결과, 전요한이 죄악의 사도가 아니란 건 명백했다.
오히려 자신을 도와 그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중이다.
뭔가 숨기고 있단 게 켕기긴 하지만, 적으로 간주할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다.
‘지금은 저 둘에게 모든 걸 맡겨야겠다. 나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아까 드락실에게 당한 데미지가 적지 않았다.
둔기처럼 휘둘려진 염동력에 내상을 입어서 출혈이 멈추지 않고 있는 상태.
자가 회복 하려면 앞으로도 시간이 더 걸렸다.
다시 한 번 무기력함을 느낀 채강윤은 실눈으로 전요한을 올려다봤다.
그는 뒤돌아선 채 드락실과 전투를 재개하려 하고 있었다.
“자아, 이제 어떻게 할 테냐? 너의 빙벽은 아주 쓸모없게 되었다만?”
나머지 빙벽까지 전부 박살 낸 드락실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요한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네? 네가 그 염동력으로 계속 잘라내면 이런 전술은 의미가 없겠어.”
“패배를 인정해라, 애송이. 시체폭발을 피할 은폐물 없이 나에게 접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드락실은 자비로운 척하며 항복을 권유해왔다.
되도록 멀쩡한 상태로 끌고 가야 자신의 주인, 스반힐트에게 칭찬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요한을 이리로 유도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단독행동.
도중에 일이 잘못되거나 하면 스반힐트의 엄중한 질책이 내려질 터였다.
‘이만하면 꼬리를 내리겠지.’
전요한이 어떤 이유로 성장치가 초기화되었단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계속 정면 돌파를 감행해올 것 같진 않았고, 계획이 실패하면 도주 각을 잡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건 무리다. 인근 일대의 망자들을 전부 불러 모았으니까.’
녀석들은 지하철역 바깥에서 포위망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전요한이 도망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순순히 항복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상상한 드락실의 안광이 붉게 번쩍였다.
이후 그는 다시 한번 상대의 결단을 재촉했다.
“조금 까불거리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발밑을 긴다면 스반힐트 님은 자비롭게 용서해주실 것이다. 노력하기에 따라서 그분의 무한한 은총도 얻을 수 있을 테고 말이야.”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그냥 넘기지 못할 유혹이다.
마계의 칠대 죄악에게 직접 간택 받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무한한 영광이고 평생을 헌신하며 갚아가야 할 은총이었다.
스반힐트의 충실한 종복인 드락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커다란 오산이었다.
“미안한데, 나 대미궁에서 마녀의 목을 한번 벤 적이 있거든? 아직 그 촉감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말이지.”
가볍게 거절한 전요한이 아르티나의 검 끝을 내밀었다.
이후 그는 곧장 드락실이 있는 곳을 향해 최단거리로 달려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