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네크로맨서 (2)
음험한 슬럼가에 검은 복장의 사내가 서 있었다.
채강윤.
그는 연락한 상대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는군.”
자신이 알려준 대로만 했으면 아카데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좀비 바이러스 때문에 외출이 통제되어 있어도 방법은 있다.
“전요한….”
발끈하며 기습적인 공격을 막아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녀석의 종합 능력치가 50밖에 되지 않다니.
실제 전력을 확인한 입장으로선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라면 제대로 본모습을 드러내겠지.’
일부러 아무도 없을 만한 장소로 골랐다.
현재 전요한은 조기 진급한 아카데미 상급생.
무슨 속셈인지 진정한 정체를 숨기려 했다.
만약 그때 상부의 연락을 받고 빠지지 않았다면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운이 정말 좋은 놈이었다.
스륵-
반대편 길가로부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각상에 기대어 있던 채강윤은 흘끗 시선을 돌렸다.
“치잇.”
아쉽게도 기다리고 있던 상대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안광.
역겨울 정도로 기분 나쁜 마기.
어디선가 배인 피비린내.
나타나자마자 실실 처웃고 있는 괴한은 다름 아닌 죄악의 사도였다.
“아직도 저희를 방해할 생각인가요, 사냥개 어르신.”
죄악의 사도 중에서도 제법 지위가 높아 보인다.
더욱이 채강윤과 마주하면서 이토록 여유를 부리는 녀석은 거의 없었다.
“까불지 마라. 쫓아가서 능지처참해 버리기 전에.”
“그분이 강림하실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물러가지 않으면 죽이겠단 위협에도 괴한은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이에 채강윤은 자신의 전용 무기인 그랑디아를 소환했다.
“선약이 있어서 웬만하면 넘어가려 했는데, 안 되겠군.”
사실, 녀석을 베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죽였다고 생각했는데도 자꾸만 재생한다는 것일 뿐.
“체력이 바닥나서 완전히 사멸할 때까지 난도질해 주지.”
걸음을 내디딘 순간, 채강윤의 모습이 여러 개로 겹쳐졌다.
환영난무.
승부를 봐야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만 꺼내 드는 결전 스킬이었다.
“하하. 쓸데없는 짓을.”
다음 광경을 예상한 괴한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곧이어 수차례의 검격과 함께 가만히 서 있던 몸뚱어리가 여러 개로 갈라졌다.
투두두둑.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3성급의 헌터인 채강윤은 관리국 최고의 전력이었다.
“빌어먹을.”
검신의 혈흔을 털어낸 채강윤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저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녀석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마치 죽음이라는 형벌을 거역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용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그분의 그림자일 뿐. 아무리 베어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산산조각 났던 몸뚱어리는 거짓말처럼 금방 재생되었다.
널브러져 있어야 할 신체 부위들은 재로 화하며 사라진다.
서열 높은 죄악의 권능.
그것이 지속되는 한, 괴한이 채강윤에게 당할 일은 없었다.
“귀찮은 자식.”
“드락실 님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아직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면, 이따가 지하철역으로 내려오라는군요.”
괴한은 무슨 속셈인지 네크로맨서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분명 함정일 거라 생각했지만, 채강윤은 주저하지 않았다.
“도망친 줄 알았더니, 잘도 그런 곳에 숨어 있었군.”
어떻게든 결착을 내야겠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네크로맨서의 음모로 인해, 이쪽 지역은 죄악의 무리에게 완전히 잠식당한 상태다.
표면상으로는 좀비 바이러스가 진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단지 주의를 끌기 위한 속셈에 불과했다.
“너희가 죄악을 소환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다.”
그동안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악마교를 퍼트려 직접 강림하려는 마녀가 있었다.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
그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심히 두려운 존재인 건 분명했다.
채강윤은 지하철역이 있는 구역으로 속히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군, 전요한.”
먼저 불러내놓고 자리를 떠나는 건 마음에 걸린다만, 눈앞의 상황이 더 중요했다.
* * *
“분위기가 상당히 암울하네요. 이쪽 동네는.”
전요한은 차량을 얻어 타고 목적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조수석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온통 폐건물밖에 없다.
“여기는 슬럼가잖아. 던전 재해 등으로 인해 황폐화된 외곽지역이지.”
운전 중이던 이수연이 간단히 설명을 해줬다.
일반적으로 슬럼가에 거주하는 주민은 없지만, 치안 유지가 어려운 점을 이용하여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각종 불법행위가 난무하는 구역인 만큼, 무법자들의 습격에 신경 쓸 필요성이 있었다.
“안 그래도 버려진 영역인데, 좀비 바이러스까지 창궐해서 상황이 더 악화되었겠네요?”
“무언가를 몰래 꾸미기엔 매우 적합한 곳이지. 그래서 채강윤도 이쪽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아.”
관리국 요원인 이수연도 그가 어떤 임무를 수행 중이었는진 잘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개입해선 안 되는 일이었지만, 전요한이 연관되면서 입장이 바뀌었다.
“그런데 괜찮겠어? 학사장에게는 관리국으로부터 호출받았다고 둘러댔지만, 만약 문제가 터지면 네가 여기 있었단 사실이 발각되고 말 거야.”
이수연은 괜히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관리 대상인 전요한이 되도록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여차하면 관리국 국장님에게 부탁드리죠, 뭐. 이름이 유명학이라고 했었나요?”
“그래, 유명학 국장님.”
“던전에서 꼼짝없이 죽을 뻔한 손녀도 구해드렸는데, 지난 빚은 잘 갚으실 거라 믿어요.”
“예의 없기는. 국장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 알아?”
이수연이 어이없단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유명학은 아카데미의 주요 인사도 갈아치울 수 있는 인물.
한국지부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미궁을 공략하고 돌아온 전요한에겐 안색이 좀 안 좋은 할아버지에 불과했다.
“인상이 친근하던데요? 전용 무기인 성검도 제게 들어 보라고 빌려줬었어요.”
“…알타니스를?”
“아무튼, 아카데미에서 일어나는 일은 서희 씨가 잘 해결해줄 거예요.”
전요한은 별로 걱정거리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정서희를 어느 정도 신뢰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미숙한 면은 있어도,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왔다.
“너, 걔하고 많이 친해진 모양이다? 혹시 사귀니?”
“에이,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뜬금없게.”
“솔직히 별로인 건 아니잖아? 관리국 요원 중에서는 나름 인정받는 편이고, 얼굴도 반반해. 가끔 칠칠맞긴 하지만.”
이수연은 그녀의 직장 선배였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지켜봤으므로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전요한은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서희 씨는 김치찌개 싫어해요?”
“응? 김치찌개는 왜?”
“저번에 같이 먹자고 했더니 별로 반응이 안 좋아서요.”
“너 설마….”
말문이 막힌 이수연은 전요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사례금이 많이 나와서 잔뜩 기대하고 있었을 정서희에게 그런 거나 먹이다니.
어지간히도 분위기를 못 잡는 녀석이었다.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요? 제가 무슨 잘못 했어요?”
“너, 대미궁에서는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곁에 붙어 다니는 여자 챙겨주는 눈치도 없으면서.”
“어떻게 살아남긴요. 그야….”
패시브인 고속성장 덕분이었다.
마력재생도 효율이 좋은 편이라서 남들보다 우위에 서곤 했다.
솔직히 처음엔 운이 조금 좋아서 버틴 거고, 이후로는 사기적인 능력에 기댔다.
‘동료 운도 나쁘진 않았지.’
만약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공략 시간이 수어 배는 늘어났을 것이다.
모두가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유대감이 깊었다.
하얀 마녀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모두 죽고 말았지만.
“왜 말이 없어?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올린 거야?”
“…부정하진 못하겠네요.”
“괜히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해. 만약 내가 대미궁 같은 곳에 25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다면 미쳐버렸을 거야.”
이수연은 그녀답지 않게 자신의 결례를 인정했다.
이후엔 흘끗 옆을 쳐다보았는데,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뭐, 상관없어요. 지난 일을 모두 잊는 게 꼭 바람직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전요한은 굳이 자신의 예전 동료들을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해선 한 가지 각오를 밝히고 싶었다.
“기억해두지 않으면 비극은 반복되는 법이니까요.”
앞으로는, 단 하나의 동료도 헛되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누군가를 동료라고 인정하게 되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흐를 테지만 말이다.
전요한이 그리운 얼굴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끼이이익!
어둑한 길가를 지나던 차량이 순간 급정차했다.
전방의 유리창을 보니, 좀비들이 떼거리로 몰려들고 있었다.
“여기서부턴 직접 길을 뚫어야겠네. 차량으로 밀어붙이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말을 마친 이수연이 먼저 차량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몰려오는 좀비 무리를 향해 무자비한 전격 마법을 구사했다.
치지지직‒
전기 역장에 당한 좀비들이 역한 냄새를 풍기며 쓰러졌다.
“선배답게 제법 하시네요.”
“당연하지. 이쪽 업계에서 버티는 게 쉬운 줄 알아?”
10여 년간을 관리국 요원으로 활동해온 이수연이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며 전요한은 휘파람을 불었다.
“옆집 누나가 다 해주니 좋네.”
“시끄럽고, 좀 거들어. 부려먹을 때만 치켜세우지 마.”
여러 갈래의 번개를 지상에 내리꽂던 이수연이 눈을 흘겼다.
결국, 전요한도 전용 무기인 아르티나를 소환했다.
“시르케는 불만도 없이 혼자 다 해치웠는데.”
“누구를 말하는 거야?”
“예전 동료요. 대미궁에서 함께 다녔던 마법사죠.”
만약 그녀가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만의 상상을 하며 전요한은 아르티나를 휘둘렀다.
* * *
피바람이 한바탕 몰아친 지하철역의 한복판이었다.
지친 채강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
여기에서 전투를 벌인 지도 수어 시간이 지났다.
수많은 적들을 물리쳤지만, 정작 노리던 네크로맨서는 나타나지 않은 상황.
이대로는 아무런 소득 없이 죽음만 기다리는 꼴이었다.
“제법 명줄이 길군요. 이만하면 쓰러질 줄 알았는데,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아요.”
어둠 속에서 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로 이끌었던 죄악의 사도.
녀석이 빈정거리자 채강윤은 이를 갈았다.
“네놈의 상관은 어디 있냐?”
“글쎄요. 잘 찾아보면 정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괴한은 감염자의 사체로 가득한 플랫폼 구석을 가리켰다.
그 너머에서는 검은 로브를 걸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채강윤은 본능적으로 녀석이 네크로멘서임을 알아차렸다.
생기가 없어 보이는 모습과 기괴한 뼈로 된 지팡이로부터 음산함이 물씬 느껴진다.
“저번에 보았던 얼굴이군. 내 이름을 기억하나?”
이윽고 적당한 거리에서 걸음을 멈춘 드락실이 물었다.
채강윤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노려봤다.
“그게 뭐가 중요하지?”
“전요한이 나의 풀네임도 듣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결전에 앞서 상대의 통성명을 듣는 건 마계에서도 기본적인 관례이거늘.”
드락실은 아직도 그때의 일이 분한 모양이었다.
그가 부들부들 떨며 채강윤에게 자신의 풀네임을 되물었다.
“아무튼, 말해봐라. 내 이름이 무엇인가? 설마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드락실 아나크… 어쩌고였는데. 잘 모르겠다.”
“네, 네놈도냐? 하여간 지구의 인간들은 도무지 예의를 모르는군!”
분노한 드락실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허공을 향해 아무렇게나 한 차례 휘둘러 보였다.
휘익-
순간, 채강윤의 몸이 공중에 붕 뜨더니 벽면에 처박혔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적지 않은 균열이 일어났다.
“쿨럭!”
“나의 위대함을 깨달아라, 어리석은 인간아! 내 이름은 드락실 아나크로노미콘 네세르제키옐! 마계에서는 칠흑의 네크로마키아라 불리우는 존재다!”
이제 드락실은 본격적으로 실력행사를 하는 중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날 때까지 누구든 건성으로만 상대해 왔다는 이야기.
절대적인 격차를 실감한 채강윤은 눈을 부릅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국내 서열 1위를 지켜왔던 자신이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종합 능력치가 못해도 60단위는 차이 나는 것 같았다.
그만한 격차라면, 무슨 수를 써도 혼자선 녀석을 이기지 못한다.
일단 도망쳐야겠다 판단한 채강윤이 바닥을 기었다.
“여태껏 너를 살려둔 이유는 전요한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혼자서 찾아오다니. 더는 살려둘 필요가 없겠어.”
말을 마친 드락실이 다시 한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때, 녀석의 뒤쪽으로부터 한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부 나를 꾀어내려는 수작이었다고?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그런지 조금 기분 나쁜데?”
찌릿한 전기에 휩싸인 여인과 함께 서 있는 사내.
그는 최근에 주가가 미칠 듯이 치솟고 있는 인물, 전요한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