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네크로맨서 (1)
온몸을 엄습하는 한기를 느끼며 천강우는 눈을 떴다.
“여, 여기는 어디야?”
사방이 온통 벽뿐이었다.
시커멓고 더러워서 기분이 나빠질 지경이다.
“어어, 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도중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함께 교내에서 음모를 꾸몄던 한동혁이었다.
“야, 정신 차려.”
주저앉은 채 잠자고 있는 녀석을 발길질로 깨웠다.
“으음…?”
한동혁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하품을 한다.
“하암, 이제 왔냐?”
왜인지는 몰라도, 완전히 체념한 상태였다.
천강우는 눈을 부릅떴다.
“멍청한 새기야! 네가 그따위로 나태해서 일을 망친 거잖아!”
계획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만약 차질이 생기지만 않았더라면, 학생회장인 채린은 자신의 것이 되었을 텐데.
“빌어먹을. 전부 끝났어.”
이제는 전요한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계약을 했던 악마의 조언대로 최대한 피해 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질긴 놈이었다.
“그런 녀석은 당해낼 수 없어.”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깨달았다.
자신과는 애초에 격이 다르다는 걸.
생명력을 대가로 얻은 마기로도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는 존재였다.
천강우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래, 포기하는 편이 좋아. 어차피 싸워 봤자 다치니까.”
멱살을 잡혀 있었던 한동혁이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리며 다시 잠을 청한다.
“조용히 있지 않으면 그녀가 찾아올 거야. 그때는 나도 책임 못 져.”
“그녀?”
“불량한 생도의 교화를 담당하는 이단 심문관, 성녀 메르첼.”
“뭣….”
천강우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곳에 끌려와서 메르첼과 단독 대면이라니.
그녀는 막강한 신성력의 소유자라서 일대일로는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어디로든 도망칠 구멍을 찾고 있을 때였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문이 열렸다.
또각또각.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다름 아닌 메르첼이었다.
“드디어 깨어났나 보군요. 3학년 E반의 상급생.”
경건한 목소리로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 나를 어떻게 할 셈이야?”
“교화 담당 교관으로서 철저히, 무자비하게 악한 본성을 꺾어 놓겠습니다.”
메르첼은 무엇 때문에 일을 저질렀는지 추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오자 천강우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뒷걸음질 치다가, 이를 갈았다.
“다, 당하고만 있진 않아!”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삶에 대한 집착까지 버린 건 아니었다.
일단은 도망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스르르르.
체내의 마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메르첼이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전의가 남아 있다니, 그렇게 혼쭐이 나고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네요.”
“다, 닥쳐! 네가 뭐라고 하든 듣지 않을 거야!”
남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훈계를 듣는 게 제일 싫었다.
교내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해온 그였으나, 잔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모범적인 행동을 강요하는 학내 분위기가 역겨웠고, 이를 위선이라 여겼다.
그래서 천강우는 실력지상주의 악당이 되기로 결심했다.
“악한 본성을 꺾어 놓겠다고? 그럼 너희는 천사들이야? 기껏해야 훈계나 하면서 남들 피 터져라 싸우는 꼴이나 지켜보는 주제에!”
미성년의 생도들이 다니는 아카데미에서도 적자생존의 법칙은 피할 수 없었다.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향후진로도 어둡고, 어중간한 스타트라인에서 시작하게 된다.
교내 성적과 실전 평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냉혹한 세계.
천강우가 지내왔던 아카데미는 바깥 세계의 축소판이었다.
어차피 실력만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겠다.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건 짓밟고 올라가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휘익! 휘익!
망상에 사로잡힌 천강우가 정신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마기로 전신을 휩싸서 그 위력이 만만치 않았지만, 상대는 교화 담당 교관인 메르첼이었다.
“그렇게 멋대로 생각하니까 죄악의 길로 빠져버리는 거예요. 어디에서부터 교정을 해야 할지 알 것 같군요.”
메르첼은 자신에게 강공격을 퍼붓는 천강우를 잠시 바라봤다.
필사적으로 밀어붙이려 하고 있지만, 무형의 장벽은 흔들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닥쳐!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나를 평가하려 하지 마!”
“지나친 자기중심주의네요.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그 자세, 조금 늦긴 했지만 교정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메르첼이 성가를 노래했다.
그녀의 노랫소리는 악에 받친 천강우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으악! 그만둬!”
영혼마저 정화될 것 같은 선율에 천강우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무릎 꿇자, 뒤에서 구경하던 한동혁이 선량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교화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 다시는 죄악에 빠질 수 없게 되어버려.”
한동혁은 이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마리의 순한 양이었다.
“너, 이 자식….”
뒤늦게 배반당한 사실을 안 천강우가 이를 악물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계획이 그렇게 빨리 탄로 날 리가 없었다.
공범이었던 한동혁이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는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끌어들이지도 않는 건데.”
믿을 만한 동료와 함께하지 못한 것이 패착의 원인이었다.
의욕을 잃은 천강우는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경건한 노랫소리가 반복되듯 귓가를 맴돌았고, 독기 어린 눈은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정말로 포기하니 마음이 편해지네.”
메르첼의 신성력에 교화된 천강우는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의식을 잃었다.
* * *
“그래도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에요. 별 피해도 없었고요.”
창밖을 바라보던 정서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관리국에 모든 보고를 마친 상태였다.
“뭐, 타이밍이 좋았죠. 학생회장을 제때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안 좋은 일이 발생했을 겁니다.”
전요한은 딱히 한 게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단지,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을 흠씬 두들겨 패줬을 뿐.
채린을 위기에서 구해준 건 어디까지나 덤이었다.
“조만간 괜찮은 사례를 받겠네요. 학생회장은 명문가의 자녀인 거 이야기했었죠?”
“글쎄요. 받으면 좋지만 딱히 기대는 하지 않을 겁니다.”
천강우를 때려눕혔을 때 채린의 표정을 봤었다.
그녀는 수치심에 몸을 떨고 있었고, 자유의 몸이 되자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당시에도 사과 한마디 받지 못했는데, 별로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나름의 성과가 있었으니까.’
미래시가 발동되지 않던 채린에게서 운명 카드가 보였다.
[채린]
잠자는 숲속의 마녀.
곤경에 빠진 상태여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녀를 구원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나중에 마음을 얻고 나면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줍니다.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준다라.’
마녀로 표현된 이유는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의미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운명 카드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선 곤란했다.
미래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점괘라고 여기는 편이 낫다.
“그나저나, 천강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만간 모습을 드러내겠네요. 그 네크로맨서.”
“재미있겠네요. 다시 만나면 제대로 상대해 줘야겠어요.”
티브이나 봐야겠다고 생각한 전요한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마침, 오늘의 저녁 뉴스가 속보로 보도되고 있었다.
- 이쪽 지역을 휩쓸었던 좀비 바이러스는 현재 확산세가 상당히 줄어든 모습입니다. 드디어 며칠간의 봉쇄령이 효과를 거두는….
저번에 발발했던 사건은 여전히 세간의 주목거리였다.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된 던전 게이트에서 좀비들이 쏟아져 나온 것인데, 덕분에 외출도 한동안 금지된 상태다.
“저도 몇 달간은 관리국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게 생겼어요. 배달도 못 시켜 먹는데 무슨 낙으로 살죠?”
“이참에 요리를 배워보는 건 어때요? 식자재는 외부로부터 매일 보급받고 있잖아요.”
봉쇄령 때문에 고립된 상태지만, 전용 헬기를 통해 생활필수품이 지속적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별다른 불편함 없이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요한이 요리를 권하자, 정서희는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흐음, 그런데 누구한테 배워요? 요한 씨는 음식 만드는 데 소질 없잖아요.”
“듣자 하니 실비아 교관의 취미가 요리라던데.”
“으엑, 실비아 교관이요? 그, 그건 좀 고려를 해봐야겠네요.”
정서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기숙사 부사감으로 임시 재직 중인 그녀조차 기피할 정도로 악명 높은 인물.
하지만 전요한은 그저 좀 까다로운 교관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대련 수업을 할 때는 좀 몰아붙이는 면이 있는데, 성품이 안 좋은 여자는 아니에요.”
“요한 씨에게는 나름 잘 해주잖아요. 아니, 그녀의 애정 공세를 잘 버티는 거죠.”
정서희는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전요한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의심이 가는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렇게 매도하는 스타일이 취향인 거예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채찍질하는 타입의 연상녀가?”
“솔직히 말하면 딱히 싫지는 않아요. 대미궁에서 별의별 여성상을 다 만나서.”
특히 수인족 여성의 경우, 좋아하는 상대를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굴복시키는 걸 좋아했다.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는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꽤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런 전사형 타입과 비교해봤을 때, 실비아는 천사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수인족 여성하고 공략 도중에 썸 좀 타셨다고요?”
“뭐,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럿 있었죠. 25년이나 갇혀 있었는데 아무 일 없었겠어요?”
물론, 수인족 여성들이 원하는 걸 순순히 해주진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인 경우가 많았고 그녀들도 별 불만은 없었다.
강한 수컷에게 굴복당하는 느낌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나.
전요한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용담을 조금 들려줬다.
“에에? 그게 사실이에요?”
“수인족 여성들도 항상 호전적인 건 아니에요. 잘 보이고 싶은 사내에게는 암고양이처럼 교태를 부리기도 하고….”
정서희의 낯이 뜨거워질 정도로 수위가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똑똑.
출입문으로부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들 열어보니 학생회장인 채린이 서 있었다.
“저, 저기. 실은 아까 구해준 거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어.”
채린은 왠지 모르게 얼굴이 붉게 변한 상태였다.
“몸은 좀 어때? 마기에 당했다고 들었는데, 괜찮아?”
“응, 진료실에 가보니 별 일 아니라고 했어. 그런데….”
뭔가를 말하려던 채린이 개인실 내부를 들여다봤다.
그녀는 본의 아니게 한자리에 있던 정서희와 눈이 마주쳤다.
“둘이… 혹시 사귀는 사이야?”
덕분에 이상한 오해가 생겨났다.
뜻밖의 말에 전요한은 극구 부정하려 했다.
“아니, 서희 씨는 내 수행요원이라 지금….”
“좀 더 빨리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미안해.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
채린은 표정을 굳힌 채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닌 그녀가 보기에, 젊은 남녀가 초저녁부터 개인실에 함께 있는 것은 명백한 밀회를 의미했다.
“멋대로 오해하기는.”
제대로 된 변명조차 하지 못한 전요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뒤에서 구경하던 정서희가 키득 하고 웃었다.
“학생회장에게 수인족 이야기도 들려주시지 그래요? 반응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사양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긴급문자가 한 통 왔네요.”
전요한은 한숨을 내쉰 후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방금 송신된 긴급문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발신자 : 채강윤
지난번의 결전을 마무리 짓고 싶다면 답장해라, 전요한.
기한은 오늘 밤까지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전요한이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해보니 두들겨 패야 할 놈이 한 명 더 있었네.”
관리국 최고의 전력이자 국내 서열 1위의 헌터.
자신의 구미를 자극하기에 이만한 상대가 또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