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죄악의 사도 (4)
“심한 짓을 당했군.”
박수호는 부상이 심한지 완전히 녹다운된 상태였다.
어깨를 흔들어 봤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이만한 짓을 할 만한 자가 교내엔 별로 없을 텐데.’
전요한의 머릿속에 문득 한 명이 떠올랐다.
천강우.
현재 유력한 죄악의 사도다.
녀석이라면,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단 이유로 누군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 있을 터였다.
‘복수는 해주마.’
비록 한 번밖에 만나지 않은 사이긴 하지만, 그래야 할 의리는 있었다.
악마의 유혹이 많은 던전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따라준 놈이니까.
[박수호]
방패를 든 하급 기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순수한 열망만으로 당신의 곁을 지킵니다.
실력은 아직 형편없지만, 어디엔가 쓸모가 있을지 모릅니다.
미래시가 발동하는 걸 보니, 인연이 전혀 없진 않은 모양이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걸 확인한 전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그렇고.”
분명 인근에서 불쾌한 마기가 느껴졌었다.
천강우가 악마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남긴 흔적인 것 같은데.
궁지에 몰려서 그런지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어떻게 해야 녀석을 원하는 장소로 꾀어낼 수 있을까.’
계속해서 피해다니는 걸 보니, 순순히 일대일 신청을 받아줄 것 같진 않았다.
함께 음모를 꾸미던 한동혁이 당하기도 했고, 이쪽의 전력을 어느 정도는 아는 눈치다.
직접 미끼가 되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상황.
그렇다면 그 역할을 다른 사람이 해줘야 했다.
‘생각해보니 채린이 있었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면, 천강우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인물은 채린이었다.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는데, 그녀가 정략결혼을 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분노한 모양이다.
잘하면 손쉽게 천강우를 사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뭔가 발견한 거라도 있어요?”
기숙사로 되돌아온 전요한에게 정서희가 물었다.
그녀는 만일에 대비해 관리국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딱히요. 하지만 숨어 있는 쥐를 어떻게 나오도록 할지는 알 것 같습니다.”
“치즈가 올려진 덫이라도 설치할 계획인가요?”
“비슷해요. 우선 학생회장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지금쯤 채린은 내부 소동으로 인한 문젯거리를 처리하느라 학생회실에 있을 것이다.
정서희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말해준 후, 전요한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 * *
“뭐가 이렇게 할 일이 많은 거야, 젠장.”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보며 채린은 곤란해했다.
최근 교내에서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지다 보니, 학생회장으로서 처리해야 하는 게 늘어났다.
“후우….”
한숨을 내쉰 채린이 주위를 둘러봤다.
방과 후라서 그런지 학생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무슨 고생이람.”
잠시 용무를 보고 되돌아온다던 정하은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송주한도 말없이 어디론가 가버렸고, 오늘따라 홀로 내버려진 기분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상태였어.’
제대로 된 고민을 들어줄 상대따윈 없었다.
재벌가의 영애라고 다들 높이 치켜세워 주기만 할뿐.
접근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꼬셔 보려는 질 나쁜 남생도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정말 잘하고 있는 걸까.’
지난 학기 동안 교내 성적은 항상 1위를 유지해왔다.
교관들에게 칭찬받는 우등생이었고, 부지런한 학생회장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의 공백은 제대로 채워지지 않는다.
어쩌면 상처 입는 게 두려워서 혼자 남겨지길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한의 얼음 여왕.
남생도들은 붙임성 없는 철벽녀라며 자신을 그렇게 부른다.
‘그래도, 결혼만큼은 좋아하는 상대와 하고 싶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무언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지만, 그와 무관하게 미래는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평생을 함께 마주하며 지내게 될 배우자마저도.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진 채린은 작게 흐느꼈다.
“흑.”
그녀가 눈물을 보인 것은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벽면에 걸린 시계의 초침만이 째깍거리고 있을 때였다.
“여기 있었네.”
학생회실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내부로 들어왔다.
채린은 눈물을 훔치며 슬며시 고개를 돌아봤다.
“…넌?”
익숙한 얼굴이었다.
교내에서 나름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는 상급생.
무공이 특기인 신체강화 계열의 이능력자, 천강우였다.
“나 기억하지? 저번에 고백했다가 대차게 차였잖아. 덕분에 제대로 망신당했지.”
“그래서?”
“벌써 집안끼리 혼사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라며? 상대는 요새 잘나가는 대기업 회장의 후계자라지?”
천강우는 이번 정략결혼에 대해 뒷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그가 자세한 내용까지 떠들어대자 채린의 동공이 흔들렸다.
“너, 너 그걸 어떻게….”
“궁금해? 사실 정보 입수가 빠른 지인이 있거든. 재벌가의 일들에 대해서 말이야.”
천강우는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채린은 그의 상태가 불안정한 것을 알아차렸다.
“몰래 술이라도 마셨어? 평소하고는 많이 달라 보이는데.”
“아아, 조금 사정이 있었어. 그런데, 너 괜찮겠어? 정략결혼으로 물건처럼 팔려나가도 아무렇지 않으냐고.”
문 옆에 서 있던 천강우가 본심이 궁금하다는 듯 쳐다봤다.
곤란한 문제였기에 채린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는 거야? 나 같이 집안 배경도 없고 잘난 것도 없는 놈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잘 모르겠어. 그리고 계속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야?”
더는 대답하기 싫어진 채린이 날카로워진 눈으로 쏘아봤다.
천강우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혼자서 킥킥댔다.
“크큭. 역시 학생회장도 별다를 바 없는 여자였네.”
“뭐라고?”
“자신도 확실한 주관이 없는 주제에, 지금까지 잘도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모욕을 줬잖아?”
손으로 얼굴을 가린 천강우에게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놀란 채린은 제자리에 일어나서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대,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집안에서 정해주는 배우자와 생각 없이 결혼할 정도로 지조 없는 여자라면, 차라리 내 것이 되라고!”
고개를 쳐든 천강우가 눈을 번뜩였다.
녀석이 가까이 다가오자 채린은 손아귀에 얼음 송이를 생성했다.
“설마 덮치려는 거야? 그렇게까지 인간 말종일 줄은 몰랐네.”
“뭐, 어때. 이러나저러나 마음에 안 드는 상대인 건 똑같잖아? 그렇다면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남자에게 안기라고!”
말을 마친 천강우는 체내의 내공을 이끌어냈다.
그리고는 마기를 증폭시켜 극한의 신체능력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위험해….’
채린은 본능적으로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사에게 있어 이렇게 좁은 공간은 전투에 불리하다.
게다가 상대는 정체불명의 마기를 뿜어내고 있어서,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일단 도주로를 열어야겠어.’
유일한 길목은 천강우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렇다면 녀석을 어떻게든 무력화시킨 후 곧바로 그 옆을 지나쳐야만 한다.
채린은 하는 수 없이 높은 위력의 빙결 마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콰드득!
학생회실의 천장이 고드름을 형성하며 얼어붙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인지 다 알아. 저걸 떨어뜨려서 잠시 틈을 만들고, 내 하체를 얼려 버리려는 거지?”
“……!”
“너에 대해서라면 훤히 보여. 그만큼 분석을 많이 했거든.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그마저도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정략결혼을 하게 되면, 채린은 더는 자신의 것으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강우는 결심했다.
그녀를 빼앗기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버리자고.
그것만이 서로를 위한 길이며, 진정한 구원이라고.
신입생 시절부터 시작된 짝사랑은 결국 이런 식으로 왜곡된 욕망을 낳고 말았다.
“어, 어쩌지.”
탈출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던 채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속내를 읽힌 이상 이대로는 가망이 없다.
흑심을 드러낸 천강우가 입꼬리를 올린 채 다가오는 동안, 그녀는 다급히 계획을 수정했다.
“에잇!”
고민 끝에 채린이 선택한 방법은 강행 돌파였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것 같아서 잔머리를 굴리려 해봤는데, 통하지 않은 탓이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이마저도 천강우의 예측범위 내였다.
그는 매섭게 뻗어오는 얼음 가시넝쿨을 무공으로 분쇄했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지만, 지금은 악마의 하수인이 된 몸이다.
계약으로 얻은 마기를 사용하면 저 콧대 높은 학생회장도 때려눕힐 수 있었다.
“아악!”
전신을 휩싸는 마기에 당한 채린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뭐야 이건?”
마치 그림자처럼 뻗어져 나왔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주위의 마기가 마력 제어를 방해하고 있었다.
“이대로 내 신부가 되어라, 학생회장. 순종적으로 따른다면 모든 고민을 잊게 해줄게.”
코앞까지 다가온 천강우가 혀를 날름 렸다.
그의 손길이 고개를 돌린 채 분해하는 채린을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똑똑.
뒤쪽에서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방해한 인물은 전요한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천강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나의 예비 신부와 최근에 자주 노닥거리던 녀석이군.”
줄곧 숨어서 채린을 지켜봐 왔으므로, 전요한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라이벌 의식을 느낀 천강우가 서서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후 그는 다시 한번 내공을 최대치까지 이끌어냈다.
“한판 붙게? 아무래도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보네.”
도발이라고 여긴 전요한이 고개를 까딱하며 몸을 풀었다.
안 그래도 기분 나쁜 광경을 봐서 심기가 불편한데, 상대가 죽을 짓을 자처하고 있었다.
“한동혁을 때려눕혔다고 잘난 체하지 마라. 나는 그 녀석보다 훨씬 강하니까.”
“강하다고? 네가?”
전요한은 시선을 위아래로 훑으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침, 미래시가 발동해서 천강우의 운명 카드를 보여주는 중이었다.
[천강우]
악마의 계약자.
절묘한 순간에 나타나서 당신의 계획을 방해합니다.
내버려 두면 호감이 있는 상대를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글쎄. 잘 모르겠는걸?”
저번에 맞붙었던 채강윤이라면 모를까, 천강우가 할 말은 아닌 듯했다.
따지고 보면, 강해진 것도 악마의 능력을 빌린 결과다.
녀석은 배후에서 서열 놀음이나 하는 권능자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빈정거림에 화난 천강우가 주먹을 뻗었다.
내공으로 단련된 그의 강공격은 바위도 부술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신체강화 계열의 생도 중에선 나름 상위권이라 할 수 있는데, 마기로 인해 그 위력이 더욱 증폭되었다.
제대로 얻어맞는다면, 일반적으로는 커다란 부상을 입거나 죽는 게 정상이다.
퍼억!
그리고 천강우의 주먹은 전요한의 안면에 정확히 적중했다.
승리를 확신한 천강우의 표정에 비웃음이 그려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별로 안 아픈데?”
고개가 꺾여 있던 전요한이 소감을 말했다.
그러고는 흠칫하며 놀라는 천강우의 주먹을 붙잡았다.
“내가 정말로 매운 맛이 뭔지 좀 보여줘?”
전용 무기인 아르티나를 소환할 필요도 없었다.
대미궁에서 25년간 굴렀던 고인물에겐 주먹 하나면 충분하다.
성장치가 초기화되는 바람에 약해진 것 아니냐고?
환생으로 주어진 보너스 스탯이 어마어마해서 걱정할 필요 없다.
방금 날아온 일격에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덕분이다.
빠각!
한 차례 휘둘러진 주먹에 천강우의 고개가 꺾였다.
그런데 전요한과 달리, 버티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억….”
종합 능력치는 물론이고, 그동안 극복해온 역경의 격차가 압도적인 탓이었다.
“사실, 아까 일부러 맞은 거야. 그래야 널 죽도록 팰 마음이 생길 것 같았거든.”
주먹을 거둔 전요한이 사악하게 웃었다.
어느 쪽이 정말로 나쁜 놈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날, 천강우는 생애 최초로 비 오는 날에 먼지도 안 나게 처맞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