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죄악의 사도 (3)
“그런데 아침 일찍 어디 갔다 온 거야? 안 보이던데.”
모의 훈련을 하던 정하은이 궁금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목표치를 거의 달성해서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다.
“바람 좀 쐬고 싶었어. 최근에 기분 나쁜 일이 있기도 했고.”
채린도 바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의 난이도는 상급생이라면 누구나 클리어 가능하다.
“혹시 전요한과의 전투에서 밀려서 그런 거야?”
“아니, 다른 일이야. 그 녀석 이야기 좀 하지 마.”
채린은 기분 나쁘단 듯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는 저만치서 돌격해오는 마수를 향해 얼음 송이를 날렸다.
콰드드득!
마수는 발밑에서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숨통을 끊어놔야 했기에 주특기인 혹한의 가시넝쿨을 일으켰다.
“크오오오!”
휘몰아치는 가시넝쿨이 마수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그 모습을 보며 채린은 전요한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걸 어떻게 막아낸 거지.’
종합 능력치는 별로 높지 않은 편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순전히 기백과 실력만으로 압도당했단 말이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도 그랬다.
전요한의 앞에서는 학생회장인 그녀가 한없이 작아지기만 했다.
‘나중에 다시 붙어서 이기고 말거야. 그런 녀석이 나보다 우위라는 걸 인정할 수 없어.’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는 경쟁 심리가 마음속에서 불타올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요한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의욕도 적지 않았다.
대미궁에서 생환했다는 소문.
알에서 깨어났단 일화도 황당하고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건 그렇고, 생활비도 많이 나오는데 왜 김치찌개만 시켜 먹는 걸까.’
입학한지 얼마 안 된 것치고, 전요한은 음식 배달을 자주 시키는 편이었다.
보통 여기서 따로 주문을 하면 특별한 메뉴로 고르는데 성향이 좀 이상하다.
“무슨 생각 해? 제한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채린이 가만히 서 있자 정하은의 재촉이 이어졌다.
이번 모의 훈련에서는 개인 목표치도 중요하지만 조별 성적이 중요하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달라고. 뭐, 나 덕분에 1등은 확정인 것 같지만.”
송주한이 옆으로 지나치며 안경을 고쳐 썼다.
오늘도 그의 중2병은 구제받을 길이 없어 보였다.
“뭐가 네 덕분이야? 중력장으로 몬스터 끌어모으기밖에 더 했냐?”
“효율은 역시 몰이사냥이 최고야, 정하은. 너의 화염 마법도 중력장 덕분에 재미를 볼 수 있었던 거지.”
송주한은 손가락으로 잘난 척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윙크했다.
잠시 후, 모의 훈련이 끝나자 삼인방은 눈앞에 떠오르는 최종 집계를 확인했다.
“이번에도 조별 성적 1등을 사수했어! 우리를 따라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네!”
보람 있는 결과에 정하은이 기뻐했다.
달성한 점수도 역대 최고치.
마법사로만 편성된 조임에도 2등과의 격차가 상당했다.
“이대로면 졸업 후 곧바로 나이팅게일에 들어갈 수 있겠군.”
송주한은 확실한 진로가 정해져 있었다.
세계적인 길드 중 하나인 나이팅게일의 소속원이 되는 것.
나이팅게일은 최전선에서 하드코어한 던전의 공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과연 나이팅게일이 너를 받아줄까? 허구한 날 중2병 행동에 느끼한 말이나 늘어놓는데 말이야.”
“명망 있는 길드는 숨은 인재를 알아보는 법이지. 안 그래, 학생회장?”
입씨름을 하던 송주한이 채린의 동의를 구했다.
채린은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들어가든가, 말든가.”
“들었지? 학생회장도 이 몸의 나이팅게일 입성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고.”
삼인방의 주절대는 대화는 끝날 줄을 몰랐다.
의미 없는 공방이 오가던 도중, 허공에서 문이 열리며 한 갈색 머리칼의 사내가 들어왔다.
율리안.
공간 마법을 구사한다는 독일 출신의 교관이었다.
“오늘의 훈련은 여기까지다. 다들 교실로 되돌아가도록.”
주위를 둘러본 율리안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마계의 풍경이 전이되며 원래의 빈 공간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의 모의 훈련은 가상현실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리안 교관님은 무뚝뚝하시다니까. 친근하게 대해주시면 여생도들이 좋아할 텐데.”
정하은이 먼저 걸음을 옮기며 투덜댔다.
그녀는 연하의 미소년이 취향이긴 하지만, 훤칠한 외모의 율리안에게도 호감을 품고 있었다.
“독신이라고 들었는데, 무언가 중요한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냐?”
“헛소리하지 마, 송주한. 만약 그렇더라도 너보단 백만 배는 나으니까.”
삼인방은 잡담을 계속하며 모의 훈련장을 나왔다.
교정을 거닐며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한 차량이 가까이에 멈춰 섰다.
“어? 메르첼 교관이잖아?”
“저번에 회수해갔던 성유물은 어떻게 했을까나.”
정하은과 송주한이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다는데, 다른 교관들은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모의 훈련이 끝난 건가요? 마침 시기를 잘 맞췄네요.”
차량에서 내린 메르첼이 잘됐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조급해하는 걸 본 채린은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누굴 찾으세요?”
“혹시 천강우라는 생도를 본 적이 있나요?”
천강우는 바로 옆 교실의 상급생이었다.
기분 나쁜 러브레터를 써 보내서 곤란한 적이 있었기에 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요, 근데 왜요?”
“자세히는 못 알려줘요. 아무튼 중요한 일이니 그를 보면 즉시 연락하세요.”
메르첼은 천강우와 최대한 거리를 두라고 주의를 줬다.
이후 그녀는 차량에서 뒤따라 내린 전요한과 함께 어디론가 가버렸다.
“대체 무슨 일일까, 학생회장?”
“어디에서 여생도라도 꼬시다가 사고 쳤나 보지.”
그런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들 채린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삼인방을 이끌고 다시 교실로 향했다.
* * *
“며칠 전부터 행방이 묘연해. 아프다는 이유로 갑자기 휴학계를 낸 다음부터.”
사무실에서 기록을 살펴보던 메르첼이 이를 악물었다.
한발 늦었단 생각에 조금씩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항상 경건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녀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어쩌면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내부 수색을 더 해보죠.”
“천강우가 왜 교내에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한동혁이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곳에 수상한 흔적이 발견되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집단적으로 의식을 벌인 정황이 있었다.
대미궁에서 죄악의 사도들과 오랫동안 다퉈왔던 전요한은 그런 단서를 놓치지 않았다.
“집단의식이라고?”
“어쩌면 천강우가 끝이 아닐 수도 있어요. 제3의 인물까지 고려해봐야 합니다.”
아카데미에서 수용하고 있는 생도의 수는 제법 많았다.
현실적으로 그들 모두를 면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부조사 중이라는 비밀이 새어나갈 위험도 있고, 시간의 압박이 있다.
“그렇다면 유인하는 수밖에 없죠. 적당한 미끼를 던져서요.”
“미끼?”
“제가 녀석들의 주의를 끌어볼게요.”
네크로맨서는 분명 자신을 노리고 있다 말했다.
적당히 빈틈을 보이면 어떻게든 수작질을 해오지 않을까?
전요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생도의 목숨을 위험하게 하면서까지 조사할 생각은 없어. 나는 징계위원장이기 전에 너희들의 교관이야.”
“자청해서 하는 일이에요. 뭣하면, 사건이 해결되었을 때 혜택이라도 주던가요.”
“혜택?”
메르첼은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목숨을 거는 대가로 거래를 해오다니.
이렇게 당돌한 생도는 오랜만에 보았다.
“별것 아니에요. 나중에 면책권을 한번 주시면 됩니다.”
“면책권?”
“대형 사고를 친 것 말고는 적당히 넘어가 주세요.”
교내에서 이상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는 만큼, 면죄부는 하나 정도 갖고 있는 편이 좋다.
전요한이 눈을 반짝이자 메르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네요. 죄악의 사도인 것도 아니면서 그런 것이 필요하다니.”
“본의 아니게 오해받는 경우가 많거든요. 최근의 사건만 하더라도요.”
“좋아요. 대신, 그쪽이 자청한 만큼 이번 일로 문제를 일으켜서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이로써 거래는 성립되었다.
전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획을 세워야 해서 이만 가볼게요. 아참, 저번에 확보하신 성유물은 잘 보관 중인가요?”
“가시면류관?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교관 이상의 권한을 가진 자가 아니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메르첼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임을 보장했다.
그녀도 가시면류관에 손을 댔을 때,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성유물은 절대 세상에 내놓아선 안 되는 물건이란 사실을.
“만약 다른 데로 이동해야 한다면, 교관님이 직접 하셔야 해요. 신성력을 지닌 자가 아니면 마녀의 저주에 당해 버리니까요.”
“알겠어요. 명심하죠.”
메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를 계속하는 그녀를 뒤로한 채 전요한은 사무실을 나섰다.
이제부터는 독 안에 든 쥐를 잡을 시간이었다.
* * *
“하하, 이것 참 감개무량하군.”
박수호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흥얼거렸다.
그가 줄곧 동경해오던 아카데미 교정에 들어온 직후였다.
“헌터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정말 현실로 이루어지다니.”
성년이 되어버린 나이 탓에 정식 입학은 거절당했다.
하지만 성인의 경우도 견습생 신분으로 몇 개월간 속성 코스를 밟는다는 사실.
소정의 지원금까지 나오니 제대로 신분 상승을 한 셈이었다.
박수호가 머릿속으로 행복한 미래를 그리던 때였다.
스슥.
무언가 어두운 그림자가 시야를 스쳐지나갔다.
무심결에 고개를 든 박수호는 눈을 의심했다.
“으음?”
상대는 평범하게 보이는 생도였다.
다만, 무언가 불쾌한 기운이 그로부터 느껴진다.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결심한 박수호가 상대를 불러 세웠다.
“이보쇼.”
“?”
“거, 던전이라도 들어갔다 나온 모양인데 가서 목욕이나 하는 게 어때요?”
이제 막 각성한 박수호에겐 던전을 공략한 경험이 있었다.
평범한 일반인이었을 때, 전요한과 함께 사건에 휘말렸고 무사히 살아 돌아왔었다.
당시에 느꼈던 불쾌한 기운이 상대에게서 느껴지자, 박수호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혹시 기분 나빠? 나한테서 느껴지는 기운이?”
상대는 박수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이 하도 음흉해서 박수호는 한 발짝 물러섰다.
“아니, 그게 아니고 요새 위생 관리가 중요하잖아요. 바깥에선 좀비 바이러스까지 횡행하는데.”
“그래, 신입생인 것 같은데 하나 알려줄까? 나는 말이지….”
가까이 다가오던 천강우가 주먹을 내질렀다.
워낙 빠른 속도였기에 박수호는 피할 생각조차 못 하고 복부를 가격당했다.
“으헉!”
종합무술을 오랫동안 익혀 온 그였지만, 교내 성적도 우수했던 상급생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너 같이 참견질하는 애들이 제일 싫어. 왜인 줄 알아?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의 훈계만 듣고 살아왔거든.”
천강우는 신음하는 박수호를 건방지단 눈길로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도록 여러 차례 걷어찼다.
퍼억! 퍼억!
만약 보는 이가 있었다면, 눈을 가릴 정도로 아파 보이는 강공격이었다.
“사, 살살해….”
“내가 바쁘니까 이만하는데, 다른 때 같았으면 너 뒤졌어. 전요한에게 감사해라.”
천강우는 침을 뱉은 후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고통에 몸을 떨던 박수호는 뒤늦게 그가 언급한 이름을 떠올렸다.
“전요한?”
딱히 문제를 일으킬 만한 녀석은 아니었다.
조금 제멋대로인 성격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 박수호 아니야?”
우연의 일치인지.
마침 지나가던 전요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마기를 좇아온 것이지만, 박수호가 그 사실을 알리는 없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반가워하는 말을 끝으로 박수호는 의식을 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