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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9화 (19/180)

제19화. 죄악의 사도 (2)

‘잘도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내부로 들어서기 전까지 수상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미래시가 발동하여 붉은빛이 보인 걸 제외하곤 말이다.

“어, 어떻게 알아낸 거냐?”

한동혁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일어났다.

전요한은 녀석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불길한 직감이 들어서 들러 봤어. 의외로 찾기 쉽던데?”

“그럴 리가. 분명 은폐 마법을 걸어 놓았다고 했는데.”

한동혁은 땀을 삐질 흘렸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전력이라서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여기에다가 아주 본진을 차려 놨구나? 마녀들이 의식을 치르는 제단도 있고, 산제물까지 붙잡아놨네?”

전요한의 표정은 다시 무섭게 변해가고 있었다.

한동혁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여생도의 목에 날붙이를 들이댔다.

“가, 가까이 오면 이년은 죽어. 너도 그걸 원하진 않겠지?”

한심한 인질극이었다.

전요한은 하는 수 없단 표정으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어이쿠, 그걸 생각 못 했네. 곤란하게 되었는걸?”

“무시하지 마. 내가 만만해? 너도 그렇게 생각해?”

한동혁이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는 학내 경쟁에서 매번 안 좋은 성적을 받은 탓에 열등감이 심했다.

“진정하라고. 서로 화내 봤자 기분만 나쁘잖아?”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뭐라도 되는 듯이 행동하는 네 녀석의 모습이.”

한동혁은 소위 잘 나가는 이들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다.

모든 걸 차지한 주제에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위선자들.

아카데미는 철저히 우등생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그런 체제에 반역을 꾀하기로 했다.

한동혁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자 전요한은 조금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군. 네가 왜 죄악의 사도가 되어 버렸는지.”

“그, 그분께서 강림하시고 나면 모든 게 달라질 거다. 여기서 잘 지켜보라고.”

한동혁은 전요한에게 무릎 꿇고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전요한은 순순히 따르는 척하며 방심을 유도했다.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여자애만 해치지 말아줘.”

실은 생각해둔 계획이 다 있었기 때문이다.

- 지금이야. 공격해.

- 아, 알았어.

은신해 있던 서창민이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빈틈을 노린 기습에 한동혁은 오른쪽 어깨를 당하고 말았다.

“크윽!”

순간적으로 기회가 생겨났다.

전요한은 신속히 일어서며 아르티나를 소환했다.

이후 빠르게 거리를 좁혀나갔고 한동혁이 뒤늦게 탈출을 시도했다.

“두, 두고 보자!”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아르티나의 주위로 모여드는 마력입자가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한다.

빙결 마법은 한동혁의 발을 묶었고 그대로 결착이 났다.

퍼억!

전요한이 뒤통수를 갈기자 한동혁은 억 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내가 인질극을 한두 번 겪어보는 줄 아나.”

전요한은 같잖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대미궁에 갇혀 보낸 세월만 해도 25년이다.

심연의 마물은 물론이고, 수많은 차원의 존재들과 맞부딪치며 살아남았다.

얄팍한 음모와 흉계에 대한 대처법 정도는 숙지한 지 오래였다.

“이제 되돌아가도 돼? 여기는 마기가 가득해서 그런지 너무 기분 나빠.”

서창민이 헛구역질을 하며 먼저 나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잘해주긴 했는데, 네가 가버리면 붙잡혀 있던 애들은 어떻게 하게?”

“응? 그건….”

“괜히 너를 데리고 왔겠어? 무슨 말인지 알겠으면 처신 잘하라고.”

전요한은 포박당해 있던 여생도부터 먼저 풀어줬다.

극도의 긴장감이 해소되자 여생도는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흐흐흑. 엄마아아~!”

불과 17살밖에 되지 않은 여자애였다.

죽을지도 모른단 공포를 이겨내기 어려웠을 테지.

뒤늦게 지원을 온 정서희가 그녀를 위로했다.

“이제 괜찮아요. 어딘가 몸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진료실로 가보죠.”

여생도는 정신이 붕괴된 상태여서 당분간 안정이 필요해 보였다.

그 옆에 쓰러져 있는 강기태도 내버려 두기 곤란한 상태다.

‘험한 꼴을 당했군.’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분발해준 강기태에겐 나중에 맛있는 걸 사줘야 할 것 같다.

전요한은 서창민에게 그를 데리고 가라고 시켰다.

“환자를 어떻게 운송해야 하는지는 수업 시간에 배웠지?”

남은 건 한동혁뿐.

경악한 표정으로 기절한 모습인데,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된다.

만약 녀석 말고도 죄악의 사도가 더 있다면?

이런 은신처를 혼자서 구축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공범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상급생 군?”

연락을 받고 나타난 실비아가 뒤쪽에서 물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생글거리는 특유의 미소를 잃지 않는 중이었다.

“아마도요. 외진 곳의 부속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대담한 계획이었어요.”

“여긴 유지 보수를 위해서 며칠간 폐쇄해 두었던 곳이에요. 그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어야 가능한 범행인 거죠.”

확실히, 생도들이 자주 드나드는 시설물은 아니었다.

잠시 생각하던 전요한은 나머지 잔당을 붙잡을 계책을 찾았다.

“그렇다면 알아서 기어 나오도록 유인해보는 건 어떨까요?”

“어떤 방법으로요?”

“미끼를 던지는 거죠. 이곳이 들통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조급해할 겁니다.”

먼저, 죄악의 사도들이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는지 알아야 했다.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으므로, 전요한은 한동혁을 끌고 가서 심문하기로 했다.

* * *

죄악의 사도.

쉽게 말해서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 타락한 자들이었다.

그럴 듯한 권능과 미래를 약속받으면, 이들은 숨겨왔던 욕망을 드러낸다.

“학내에서 벌어진 사건도 네크로맨서와 관련이 있단 말이지?”

관리국에서 파견된 이수연이 담배를 피우며 물었다.

“제 생각엔 그래요. 범행 방식 등의 유사점도 많고요.”

“일단 알겠어. 그런데 너, 대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 거야?”

이전부터 의문을 갖고 있던 이수연은 잠시 화제를 돌렸다.

관리국 최고 전력인 채강윤과 맞붙는 걸 보았던 터라,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설마 누나도 제가 알에서 깨어났다고 이상하다 생각하는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정상적인 일은 아니잖아.”

“저번 전투에선 채강윤이 봐준 거예요. 뭔가 알아보려 했던 거지, 죽일 의도까진 없었겠죠.”

“후우, 그런가. 하긴 네가 운이 좋은 편이긴 했지.”

이수연은 마지못해 납득했다.

그리고는 녹차를 홀짝이던 전요한을 조사실로 인도했다.

“이, 이거 풀어줘! 안 그러면 너희들 전부 죽여버릴 거야!”

조사실 내부에선 결박당한 한동혁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수연은 미간을 찡그린 후, 하이힐로 그의 발을 짓밟았다.

“아악!”

“조용히 해. 네가 지금 왜 여기 붙잡혀 있는지 몰라?”

학내에서 인질극을 벌인 죄목만으로도 감방에 집어넣기는 충분했다.

한동혁이 침묵하자, 이수연은 다음 역할을 전요한에게 맡겼다.

“잘 구워삶아 봐. 나도 바빠서 시간을 많이는 못 줘.”

“최대한 노력해보죠.”

전요한은 잠시 한동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고는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선택받은 존재라도 된 것 같지? 하지만 착각이야. 이용 가치가 사라지고 나면 결국 버려지고 말 테니까.”

대미궁에서 그런 부류를 많이 봐왔었다.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모든 걸 바치고 목숨까지 잃는 자들.

심연의 악마는 욕망을 부추겨 이성이 멀게 하고, 충실한 노예로 만드는 데 능숙하다.

전요한이 보기에 한동혁도 교활한 설계에 넘어간 인물이었다.

“뭐, 뭘 안다고 지껄여. 내가 얼마나 분에 넘치는 은총을 받았는지 알아?”

한동혁은 웃기지 말란 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후 궤변을 늘어놓는데, 옆에 있는 이수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이미 세뇌가 될 대로 된 상태라, 어떤 말을 한들 달라지는 건 없어보였다.

‘피의 속박을 걸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군.’

능력의 범위가 제한된지라 2명 이상은 제대로 유지할 수 없다.

양자 선택.

만약 한동혁에게 걸려면 서창민을 놔줘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교내 생활에 문제가 생긴다.

‘분명 복수를 하려 들겠지.’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데 서창민까지 날뛰면 곤란했다.

전요한은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대화만으로는 진전이 어렵네요.”

“역시 그렇지?”

“제 경험상 죄악의 신도들은 뭔가 고통스러운 자극을 줘야 고분고분해지더라고요.”

마침, 아카데미 소속의 교관 한 명이 관리국에 와 있었다.

징계위원장 메르첼.

그녀는 타고난 신성력의 소유자라, 한동혁에겐 상당히 거북한 존재였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맡겨줘요. 잘못된 길로 빠진 생도를 교화하는 건 제 임무니까요.”

조사실로 들어온 메르첼은 하늘색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이후 밝은 목소리로 출처가 불분명한 여신의 찬송가를 낭독하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얻은 이세계의 종교서적에 적혀 있던 걸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조, 조용히 해!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메르첼의 성가는 곧바로 효과를 발휘했다.

한동혁이 몸부림치며 괴로워하자 이수연은 신기하단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지? 별로 대단한 내용도 아닌 것 같은데.”

“저 분야에서는 영창이란 게 존재합니다. 의지를 담아 소리 내어 읽으면 하나의 마법 주문이 되죠.”

실제 전투에서는 별로 실용적인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전요한은 말을 아낀 채 한동혁이 지치기만을 기다렸다.

“헉헉, 그만해. 제발 좀 그만하라고. 이러다 숨 막혀 죽겠어.”

“교화되는 게 싫으면 누가 공범인지 말해. 아카데미에 아직 남아 있는 네 친구들.”

“아, 안 되는데.”

“다른 선택지는 없어. 여기서 죽든가, 아니면 협조해서 목숨이라도 부지하든가.”

이번이 마지막 제의였다.

전요한은 아르티나를 소환하여 한동혁의 목에 겨눴다.

“사, 살려는 주는 거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 그래. 동료 한 명 팔아먹는다고 그분을 배신하는 건 아니니까.”

실로 이상한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대답한다고 하니 더는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꾸물대지 말고, 이름을 말해.”

“천강우. 그 녀석이 본격적으로 일을 벌일 예정이었어.”

결국, 한동혁은 누가 공범인지 실토했다.

의외의 이름이 나오자, 메르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천강우? 그는 성적도 우수한 편에 속할 텐데 어쩌다가….”

“크큭, 정확히는 몰라. 예전부터 좋아했던 여자애가 있었다는데 잘 안 된 것 같더라고.”

그다지 주의 깊게 들을 내용까진 아닌 것 같았다.

별생각 없이 듣던 전요한은 중간에 무시 못 할 단서를 얻었다.

“정략결혼?”

“그래, 누군지 끝까지 말은 안 해줬지만 집안이 좋은가 봐. 이왕이면 나도 그런 년을 노렸어야 하는 건데.”

한동혁은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이수연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힘들었을 거야. 사고방식부터가 틀려먹었으니까.”

“크큭, 멋대로 지껄이긴. 그쪽은 너무 나이가 많아서 이제 화장도 짙게 하지 않으면….”

순간 한동혁이 말을 멈췄다.

발끈한 이수연의 하이힐이 다시 한 번 발 위에 내리꽂힌 탓이었다.

“심문 다 끝났지? 이제부터는 관리국의 소관이니까 그저 지켜보기만 해.”

아무래도 이번엔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무언가를 준비하는 이수연을 보며 전요한은 표정을 굳혔다.

‘앞으로는 그만 놀려야겠네.’

조금 부담스럽긴 해도, 옆집 누나라고 불러주는 편이 신상에 좋을 것 같다.

이윽고 조사실에선 고통에 찬 한동혁의 비명만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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