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죄악의 사도 (1)
“들었어? 어젯밤 던전 게이트가 교내 말고도 우리 지역에 여러 개 생겨났대.”
“여기저기서 좀비들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봉쇄령이 내려졌다지?”
“아직도 사건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대. 전염성이 너무 강해서 관리국도 대처하기가 어렵다나 봐.”
교실에서 생도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쉬는 시간이라 휴대폰을 만지작대던 전요한은 창밖을 내다봤다.
‘사태가 심각해지는 건가.’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다른 차원의 권능자들이 배후에서 수작질을 부리고 있으니, 뭔가 사건은 벌어질 터였다.
기존과는 다른 형태의 던전 게이트가 계속 생겨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슨 생각하니?”
상급생 중 한 명이 전요한에게 다가왔다.
강기태.
학내 성적이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교우 관계가 좋은 녀석이었다.
“이러다 세상이 멸망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 중이었어.”
“하하, 나도 가끔 그런 걱정 해. 예전엔 던전 게이트도, 몬스터도 없어서 평화로웠잖아?”
강기태는 다른 상급생처럼 대미궁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처음 다가가는 만큼 상대가 피곤해하는 주제는 피하는 것이다.
사교적인 그는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가야 할지 잘 알았다.
‘붙임성은 좋네.’
강기태의 모습을 위아래로 한차례 훑어봤다.
미래시가 발동하지 않는 걸 보니, 그다지 신경 써야 할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동급생과도 적당히 대화를 하는 편이 좋았다.
“평화로웠던 시절에 네 장래희망은 뭐였는데?”
시간이나 때워야겠다고 생각한 전요한은 질문을 던졌다.
딱히 궁금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 프로게이머였어. 어렸을 때 동경하던 사람이 있었거든.”
강기태는 신체강화 계열의 이능력자였다.
안경도 쓰지 않았고, 활동적인 성격인데 프로게이머라니.
조금 이미지가 맞지 않는 기분이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요즘에도 프로게이머를 선망하는 사람이 많아?”
“물론이지. 가상현실 게임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와 관련된 직업이 대인기야.”
강기태도 여가 시간엔 개인실로 돌아가서 가상현실 게임을 즐긴다고 했다.
같은 취미를 지닌 동급생이 적은지, 같이 하자면서 은근히 부추긴다.
“나중에 한번 시험 삼아 플레이해보지 않을래? 대세 장르도 여러 가지야. 이세계 판타지, 스팀 펑크, 아포칼립스…”
“관심이 생기면 연락할게.”
“그건 그렇고, 넌 뭐가 되고 싶었어? 나처럼 게임을 좋아했던 것 같진 않은데.”
“글쎄.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바빴으니까.”
어렸을 때의 부모님은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우수한 학내 성적을 강요했던 건 확실했다.
남들보다 좋은 직업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했었지.
그래서 다른 건 굳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던전 재해로 인해 당시에 살던 마을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버리기 전까진.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 전혀 그런 의도는 없었어.”
“상관없어. 어차피 지나가버린 옛날이야기니까.”
그리고 안 좋은 기억이라면 더 심한 것들이 있었다.
던전 재해로 가정을 잃은 고아들이 다니던 대안학교.
재정이 썩 좋지 않아 교육환경도, 식단도 엉망이었고 아이들은 점점 삐뚤어져만 갔다.
힘들긴 했지만 그마저도 최악은 아니었다.
뭔가를 사러 시가지로 나왔는데 던전 게이트에 휘말렸고, 눈을 떠보니 웬걸.
가진 거라곤 책가방밖에 없는데, 심연의 마물들로 가득한 대미궁에 내던져져 있었다.
전요한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강기태는 고개를 숙였다.
“실은 나도 던전 재해로 모든 걸 잃었어. 그래서 다짐했지. 상위 랭커가 돼서 더 이상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막아 내겠다고.”
어느덧 대화 주제는 무거운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침 곁을 지나가던 상급생들이 화제를 돌릴 만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어젯밤에 봉쇄해 두었던 던전 게이트가 소멸했다는데?”
“직전에 신기한 성유물이 튀어나왔대. 어서 구경하러 가보자.”
아카데미 생도들이 밤새 고생한 덕분에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되었으므로 전요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도 가게?”
“어떤 성유물인지 확인해 봐야겠어. 복잡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일부 성유물은 저주나 도난 방지 마법이 걸려 있어서 위험하다.
던전 내부의 석실에서 서창민이 손댔던 금서도 그중 하나였다.
“듣기는 했어. 잘못 건드렸다가 큰일 날 뻔했다면서?”
“내가 없었다면 아마 대부분 죽거나 폐인이 되었겠지.”
이제 그 보답을 조금 받아야 할 때였다.
교정의 한복판으로 달려가면서 전요한은 서창민을 호출했다.
- 너도 들었지? 후딱 뛰어와.
피의 속박을 통해 주종관계가 된 이들은 서로 사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물론,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 크윽,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
- 그때 내가 너 안 구해줬으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그리고 노예 주제에 말이 많다?
- 아, 알았어. 제발 그 이상한 능력으로 괴롭히지만 말아줘. 부탁이니까.
서창민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전요한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혈류를 멈출 수 있는 탓이었다.
그런 행동을 짧게 반복하면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된다.
‘흥, 학사장이라는 뒷배가 있어 봤자지.’
이런 식으로 직접 제약을 거는 방법이 있었다.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이므로 걸릴 위험성도 없다.
대미궁에서 25년간 구른 고인물만 누릴 수 있는 특혜였다.
‘만일에 대비해서 서창민을 방패막이로 써먹어야겠어.’
곤란한 성유물인 것이 확인되면 일단 생도들의 접근부터 막아야한다.
그런데 학내 규칙상 무력시위는 금지되어 있으니 섣불리 나섰다간 징계를 받을 수 있었다.
지나친 의심을 받으면 곤란했으므로 그 희생양 역할은 서창민에게 맡기기로 했다.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꽤나 많이 몰려와 있네.”
함께 현장에 도착한 강기태가 북적이는 인파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전요한은 성유물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들 사이로 먼저 파고들었다.
“비켜, 좀!”
걸리적거리는 녀석들이 많아서 마력 방출로 전부 날려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상당히 높은 등급인 것 같아.”
“그런데 왜 자꾸만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지?”
“함부로 만졌다가는 큰일 날지도 모르겠어. 요새 안 좋은 일도 자주 일어나니 조심하자.”
생도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전요한은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음을 느꼈다.
‘골치 아프게 됐네.’
대미궁에서 겪었던 사건 중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동료 중 한 명이 잠자고 있던 마녀의 유품을 건드렸고, 얼마 후 지옥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성역화로 인해 인근 일대가 마계처럼 변해버렸지.’
상위 등급의 성유물엔 초월적 존재의 권능이 깃들어 있다.
그 권능은 손대는 것만으로 발현되고, 때로는 주위 공간마저 재구축해 버린다.
“적어도 여기선 안 돼.”
전요한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처럼 지긋지긋한 대미궁에서 빠져나와 지낼 곳을 얻게 되었는데, 그 안식처가 파괴되는 건 허락할 수 없다.
어렸을 때 고향의 마을이 불타서 잿더미가 되는 모습을 보며 다짐했었다.
자신이 지켜낼 수 있는 건 반드시 지켜내기로.
“잘 모르는 성유물을 함부로 만지는 생도는 없을 텐데,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
영문도 모른 채 뒤따르던 강기태가 뒤늦게 의문을 표했다.
인파를 뚫고 나온 전요한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저게 뭐라고 생각해?”
“응? 왕관 같은데?”
강기태는 잘 모르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가시면류관이야. 마계와 관련된 장소에서 흔히 볼 수 있지.”
가시면류관은 극도로 위험한 성유물이었다.
만약 죄악의 사도 중 하나가 착용하게 되면, 인근 일대는 생지옥으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전요한은 앞으로 나아간 후 가까이 다가오는 이가 없는지 경계했다.
- 서창민, 듣고 있어?
- 그래, 네 지시대로 나무 위에 올라가느라 혼났다.
- 거기서 지켜보고 있다가 만약 누군가 손대려 하면 일차적으로 경고사격을 해. 그 정도의 실력은 되지?
- 무, 물론이야. 날 무시하지 말라고.
서창민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성유물에 가까이 다가오려는 한 생도가 나타났다.
피익!
서창민이 쏜 마법 화살이 그의 발 앞에 내리꽂혔다.
“크윽.”
움직임을 저지당한 생도가 이를 악물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전요한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 가시면류관에 뭔가 용무라도 있나 보지?”
미래시가 발동한 전요한의 시야엔 운명 카드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한동혁]
악마의 계약자.
교활한 계책으로 당신을 어려움에 빠뜨리려 합니다. 보잘것없다고 무심코 방치하면 큰 화를 입을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뒷면에 적혀 있는 내용만 봐도 명백한 악인이다.
전요한은 일단 붙잡아서 추궁하는 편이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래?”
“시, 싫다!”
하지만 한동혁도 눈치를 채고 재빠르게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녀석이 수군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사라지자, 전요한은 옆에 있는 강기태를 쳐다봤다.
“좀 잡아줘.”
“응?”
“너 달리기 잘할 것 같은데? 멀쩡한 상태로 잡아오면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게.”
가시면류관을 지키고 있는 것이 더 중요했으므로 다른 사람이 나서줘야 했다.
강기태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다 싶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 거다? 비싼 거 시켜 먹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안 그래도 신체강화 계열의 이능력자였다.
웅크린 자세를 하던 강기태가 단번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모여든 인파를 가볍게 뛰어넘은 그는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는 한동혁을 향해 소리쳤다.
“야! 거기서!”
한동혁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더욱 가속도를 붙였다.
이를 본 강기태의 눈빛에 불길이 일었다.
“네가 안 멈추면 그때는 나도 괴물이 되는 거야!”
곧이어 두 생도 간의 숨 막히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 * *
“헉헉…”
지칠 대로 지친 강기태는 멈춰 서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거의 따라잡았는데, 이상하게도 순간적으로 간격이 벌려졌고 결국 상대를 놓쳐버렸다.
‘뭔가 이상한데.’
한동혁도 신체강화 계열이긴 했지만, 이만한 차이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녀석을 붙잡는 건 실패했으니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요한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대로라면 맛있는 걸 얻어먹지도 못했다.
계단 위에 주저앉은 강기태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으음?”
어디선가 꺄악 하는 여성의 비명이 들려왔다.
인근 부속 건물의 교실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정확한 위치는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한번 가볼까.’
한동혁을 붙잡아 오라는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만약 나쁜 놈이라면 사고가 발생한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제자리에서 일어선 강기태는 다시 한번 힘을 내기로 했다.
인근 부속 건물로 들어서자, 기분 나쁜 마기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뭐야, 이건?’
마치 던전에 진입하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내부를 수색하던 강기태에게 누군가 별안간 기습을 날렸다.
“커헉!”
복부를 강타당한 강기태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쓰러진 채 신음하는 그의 곁으로 한동혁이 다가왔다.
“머, 멍청한 자식.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한동혁은 얼마 전부터 여기를 자신의 아지트로 삼고 있었다.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교관들이 잘 눈치 채지 못한다.
“무슨 일을 꾸미는 거냐?”
“지켜보면 알게 돼. 넌 제물에 불과하니까 저리로 꺼져 있어.”
말을 마친 한동혁이 강기태의 머리를 걷어찼다.
기절해버린 강기태를 본 여생도가 공포심에 눈물을 흘렸다.
“흑흑.”
그녀는 온몸을 포박당한 채 모든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분께서 강림하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한동혁은 현재 상황이 재미있단 듯이 낄낄거렸다.
그러고는 음흉한 표정으로 여생도의 몸을 탐하려 했다.
한동혁의 손길이 가녀린 몸에 닿기 직전, 다부진 주먹이 날아와 그를 단번에 날려버렸다.
“건방진 자식.”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난 인물은 다름 아닌 전요한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