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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7화 (17/180)

제17화. 불온한 징조 (4)

“드디어 완성됐네요.”

털썩 주저앉은 정서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좀비들은 이제 빙벽 감옥에 갇혀 버벅거리고 있다.

갑자기 어디선가 화염 마법이 날아오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없어 보였다.

“개체 수가 너무 넘치지 않도록 적당히 제거해줘야 해. 그 역할을 교대로 맡아야 할 것 같아.”

손아귀에 있던 얼음 송이를 거두며 채린이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좀비들은 서로를 계단 삼아 빙벽 위로 올라올 것이다.

“봉쇄 작전에 참여하지 않은 신입생들 위주로 먼저 경계 근무를 서면 되겠어요~”

실비아가 생긋 웃으며 모처럼의 휴식시간을 제공해줬다.

이윽고 첫 번째 근무조가 투입되자 주저앉아 있던 삼인방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어라? 서창민 아니야?”

“저번에 던전에서 소란을 피운 이후로 상당히 얌전해졌네.”

“이런 걸 두고 개과천선이라 하는 걸까나.”

사다리를 타고 빙벽 위로 올라서는 무리에 서창민이 끼어 있었던 탓이었다.

녀석은 현재 피의 속박에 걸려 있는 상태.

통제 권한을 얻은 전요한에게 거역할 수 없어서 함부로 경거망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크으….”

부들대던 서창민의 시선이 전요한에게로 향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건물주보다 더한 갑이 되어버린 존재다.

대든다거나 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여어~ 또 만났네.”

체념하는 서창민을 향해 전요한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조기 진급을 통해 상급생이 된 터라, 녀석하고는 이제 같은 학년이다.

게다가 저번에 서열 정리까지 해놓아서 편하게 말을 놓아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번 혼쭐을 내놓더니 완전히 부하로 길들이셨네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관계에 정서희가 놀라움을 표했다.

“뭐, 누가 우위인지 확실히 해둬서 나쁠 건 없죠.”

전력을 숨기고 있다 보니 오해받는 일이 제법 생겨난다.

며칠 만에 일대일 대결을 두 번이나 벌인 것만 봐도 말이다.

‘제대로 우열을 가리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

채강윤의 경우엔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다.

관리국 최고의 전력이라 그런지 상대하는 손맛이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미래시가 발동하지 않은 걸 보면, 당분간은 서로 별일 없을 것 같았다.

“되돌아가죠. 오늘은 이제 그만 쉬고 싶네요.”

만사가 귀찮아진 전요한은 기숙사로 향했다.

별생각 없이 티브이나 보고 있는데 정서희가 개인실로 찾아왔다.

“채강윤이 왜 갑자기 시비를 걸었는지 알아냈어요.”

“이유가 뭐래요?”

“슬럼가에서 네크로맨서와 한바탕 맞붙었대요. 그런데 녀석이 그쪽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나 봐요.”

이해하기 어려운 집착이었다.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가 총애하는 권속이라 그런 것인가?

어떻게 해서든 관심을 받으려 하는 점이 서로 닮아 있었다.

“아마도 제 이름이 언급된 것 때문에 오해가 생겨났나 보군요.”

“네, 그래도 다행이네요. 뭔가 일이 터져서 잠시 물러난 모양이에요.”

관리국 요원인 정서희도 채강윤이 어떤 임무를 수행 중인지는 전부 알지 못했다.

전요한은 그의 최종적인 목적이 뭔지 추측해봤다.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죄악의 사도를 전부 박멸하려는 건가.”

관리국이 극비리에 조사하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내부의 적.

몬스터는 토벌하면 그만이지만, 그들은 배후에 숨어서 활동하므로 치밀한 뒷조사를 해야 한다.

“누구든 한 번쯤은 의심을 해보는 식이겠죠. 그래서 채강윤도 이번에 선공을 시도한 거고요.”

“죄악의 사도가 아니란 사실은 관리국 국장에게 직접 증명해 보였는데, 억울하네요.”

“유명학 국장님이 직접 지시한 일은 아닐 거예요. 채강윤의 단독행동으로 보이는데, 너무 기분나빠하진 마세요.”

정서희는 관리국을 대변하여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들어 올리며 음식 배달 어플의 위치를 찾는다.

“아무튼, 오늘 밤은 기숙사 식당 메뉴도 별론데 맛있는 거나 시켜 먹을래요? 원래 생도들은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부사감의 권한으로 특별히 승인하겠어요.”

지난번에 유명학이 손녀를 구해줬다며 건넨 사례금이 남아 있었다.

그걸로 김치찌개와 소주 몇 병밖에 못 얻어먹은 정서희였다.

그녀가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자 전요한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이번엔 순대국밥 어때요? 뭔가 뜨끈하고 담백한 게 끌리는데.”

“아, 좀! 92만 원이나 남았는데 계속 이럴 거예요?”

절망감을 느낀 정서희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언제 관리국으로 다시 불려 갈지 모르는데, 사례금은 아직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흐음, 어떻게 하지.”

전요한은 고민하는 척하며 혼자 팔짱을 껴보였다.

정서희를 놀려 먹는 재미가 은근 쏠쏠해서 자꾸만 장난질을 치게 된다.

‘은근히 바보 같아서 말이지.’

겉보기엔 당차고 똑 부러지는데 의외로 푼수 기질이 있다.

그녀에게서 보이는 운명 카드의 내용도 아직까진 변함이 없다.

[정서희]

견습 마법사.

일천한 지식으로 당신에게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그녀의 조언은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하세요.

‘확실히 미숙하긴 하지.’

견습 마법사의 수준을 탈출하려면 한동안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정체되어 있지만은 않을 터였다.

전요한이 평가하기에, 정서희는 잠재력 등급이 2성인 것 치고는 마법사로서의 자질이 있었다.

“괜찮은 메뉴로 다시 정해요. 배달 오는 시간도 고려해야 하니까 어서요.”

“아아, 실은 제가 결정 장애가 있어서요. 이번엔 특별히 서희 양에게 뭘 고를지 양보할게요.”

“특별히요?”

“그동안 제 곁에서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시죠.”

“야호! 드디어 쟁취해냈다! 야식 선택권!”

정서희가 해맑게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이후 그녀는 배달 어플에 등록되어 있는 인근의 음식점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어…라?”

그런데 이상했다.

눈여겨보고 있던 음식점들이 전부 배달 불가 상태였던 것이다.

정서희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티브이에서 지상파 뉴스가 보도되었다.

- 긴급 속보입니다. 현재 정체불명의 재해가 발생하여 이능 관리국이 신속한 조사에 나섰다고 합니다. 문제가 발생한 지역은….

아나운서가 언급하고 있는 지역은 이쪽이었다.

경계경보로 인해 일부 교통이 마비되었다고 하자 정서희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서, 설마 배달을 못 시키는 건가요?”

“안타깝게 되었네요. 다음 기회를 노리죠.”

긴급속보를 듣고 있던 전요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천재지변으로 인해 불가능해진 일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히잉,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주문하는 건데.”

김이 빠진 정서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기숙사 저녁 메뉴인 김치찌개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 * *

소란이 벌어졌던 다음 날 아침이었다.

전요한은 일찍 일어나 아카데미의 교정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네.’

한두 시간 정도 기척을 숨기고 다녔는데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존재는 없었다.

죄악의 사도.

녀석들이 아카데미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하지만 단정하긴 아직 이르다.’

발각되기 쉬운 만큼, 눈에 띄는 짓은 피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성을 느껴졌다.

전요한이 슬슬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으음?’

익숙한 모습의 한 상급생이 걸어오고 있었다.

채린.

본교의 옥상에서 한번 맞붙은 적이 있는 학생회장이다.

평소엔 삼인방을 이뤄서 다니는데,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혼자였다.

‘손에 뭔가를 쥐고 있네.’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서 받은 편지처럼 보였다.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전요한은 수풀 사이에 숨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옆쪽을 지나치는 채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상당히 분한 모습이어서 언뜻 보면 흐느끼는 것도 같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러지?’

옥상에서의 결투가 흑역사에 남을 만큼 치욕적이었나?

아니, 그전부터 이미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기억을 되짚어보던 전요한은 그녀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었단 사실을 떠올렸다.

‘분명 원하지 않는 상대를 맞이해야 한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저 편지는 약혼자가 보낸 러브레터일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니, 채린은 학내에서도 인기가 있을 만큼 괜찮은 외모의 소유자다.

흑단처럼 윤기 나게 빗어낸 긴 생머리와 새하얀 피부.

눈매는 그윽하고 보는 사람을 사로잡는 면이 있다.

정혼 상대의 취향은 잘 모르겠지만, 저 정도면 장문의 애정공세를 당할 만하지.

“어딜 그렇게 씩씩대면서 가는 거야, 학생회장?”

확인도 해볼 겸, 뒤쪽에서 채린을 멈춰 세웠다.

이에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전요한? 네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떨리는 목소리에서 당혹감이 묻어나온다.

전요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씨익 하고 웃어보였다.

“누군가에게 러브레터라도 받았어? 왜 그렇게 놀라?”

“그, 그걸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긍정하려던 채린이 양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막았다.

못할 말이라도 한 것처럼 눈을 크게 치뜨는 것이,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허, 헛소리하지 마! 내가 그런 거나 읽고 있을 정도로 한가한 줄 알아?”

하지만 뒤늦게 말을 바꿔도 별 의미는 없었다.

전요한은 직접 확인해 보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보여줘 봐.”

“뭐?”

“아니란 걸 증명해 보라고. 개인적인 편지라도 러브레터가 아니면 별문제 없을 것 아냐?”

“으, 으읏….”

수세에 몰린 채린이 겁이 나는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다.

“도망치게?”

“너, 너 따위랑 이야기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애초에 내가 왜 개인적인 편지를 보여줘야 하는 건데!”

채린이 잽싸게 전요한의 발밑으로 빙결 마법을 날렸다.

하지만 그 정도에 당할 전요한이 아니었다.

“이런 것쯤은!”

가볍게 도약하여 피하는 것과 동시에 거리를 좁혔다.

워낙 빠른 움직임이었기에 채린은 피할 여유조차 찾지 못했다.

“히, 히익!”

단지, 얼빠진 표정으로 급습하는 전요한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얼굴이 제법 볼만하네.’

도도한 분위기의 얼음 공주 이미지라 그런지, 허를 찔렸을 때의 반응이 가관이다.

스르르르.

전요한이 들어 올린 아르티나의 주위에 마력 입자가 모여들었다.

이후 서릿발이 날리며 채린의 발밑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크읏!”

패배를 직감한 채린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녀가 빙결 마법에 의해 발이 묶이자 전요한은 승리를 선언했다.

“아무래도 내가 이긴 것 같네.”

별로 심한 짓을 할 생각 따윈 없었다.

단지, 상대가 숨기려던 내용이 뭔지 확인하려는 것뿐이다.

매사에 열심인 채린에겐 호감도 조금 있어서 곤란한 일이 있다면 도와줄 의향이 있었다.

빼앗은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전요한은 인상 깊은 구절을 읊었다.

“저번에 입고 온 드레스는 너무 구식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조금은 가슴이 파인 옷도 입어야 내가 기분 좋지 않겠어? 그리고 남들 앞에선 말투도 좀 상냥하게 하는 편이….”

“그, 그만!”

듣다 못한 채린이 부끄러워하며 소리를 질렀다.

수치심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흑역사를 갱신한 듯하다.

“왜? 러브레터가 아니라면서?”

“나한테는 아니야. 그저 멋대로 정해진 약속 상대가 보낸 일방적인 통보일 뿐이야.”

채린은 고개를 떨군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쌓여 있던 절망감이 터져 나왔는지 눈빛에 생기가 사라져있다.

“정략결혼이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네.”

“왜, 소문이라도 낼 셈이야? 그렇게 온갖 잘난 체하고 다니던 애가 정혼자 기분이나 맞추는 꼭두각시라고?”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은 보복이었다.

옥상에서 시비가 걸렸던 것에 대한 개인적인 보복 말이다.

하지만 채린의 예상과 달리, 전요한은 순순히 편지를 돌려줬다.

“비밀로 해줄게. 실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니까.”

“다른 목적이라고?”

“너도 조심하는 편이 좋아. 지금 세상엔 악질적인 놈들이 많이 나돌아 다니니까.”

전요한은 빙결 마법의 구속을 풀어준 후 홀가분하게 뒤돌아섰다.

그가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자 채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이게 순정만화에서 봤던 플래그라는 건가?

그렇다기엔 조금 강도가 약하고 분위기도 미묘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조금 뛰는 것이, 마음 앓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멋있는 말이라도 좀 하고 가지.”

딱히 상대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건만, 이상하게 아쉬움이 남는 채린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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