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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5화 (15/180)

제15화. 불온한 징조 (2)

“지금 내가 여자라고 무시하는 거야? 우스워 보여?”

발끈한 채린이 미간을 찡그리며 노려봤다.

전요한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닌데. 너무 민감한 거 아냐?”

“기분 나빠. 정부요원이 붙어 있어서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손아귀에서 피어오르던 얼음 송이가 증폭되기 시작했다.

그 위력이 무시하지 못할 수준까지 도달하자 전요한도 전용무기를 소환했다.

빙결의 마법검, 아르티나.

그동안 성능을 시험해볼 기회가 없었는데, 잘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의 솜씨가 더 뛰어난지 한번 우열을 가려볼까.”

예상치도 못했던 결투에 전요한은 마음이 들떠 있었다.

승부는 이미 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안 그래도 3성급의 헌터가 어떤 식으로 능력을 활용하는지 궁금했어.”

나름 인정할 만한 실력을 갖췄던 자는 실비아뿐이었다.

그녀는 검사였지만 채린의 경우엔 마법사.

자신과 같은 잠재력을 보유한 셈이니 내심 기대가 되었다.

“이따가 후회하면서 빌지 말라고. 내 별명이 뭔지는 알지?”

혹한의 얼음 여왕.

채린은 평소에도 차가울 뿐만 아니라, 한번 실력 행사를 하면 무자비하기로 유명했다.

“대미궁의 하얀 마녀도 쓰러뜨리고 왔는데, 별로 무섭진 않은걸?”

전요한은 도발만 할 뿐, 일부러 선공을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채린에겐 자신감이 없는 것으로 비춰졌다.

“저번부터 대미궁이라고 하는데, 사실 평범한 던전이었던 것 아냐?”

“믿기 싫으면 말고.”

“확인해 봐야겠어. 알을 깨고 나왔다느니 하는 소문이 진실인지, 내 눈으로 직접.”

마력 역장을 확보한 채린이 첫 걸음을 뗐다.

그녀가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혹한이 일어 얼어붙었고, 급기야는 서릿발까지 몰아쳤다.

‘어린 나이에 제법이네.’

상당히 넓은 주변 범위를 자신의 마력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이런 식의 마력 역장을 얼마나 확대할 수 있느냐에 따라 급이 갈린다.

‘하지만 아무래도 실전 경험이 부족해.’

함께 던전 공략을 했을 때부터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봤었다.

현자의 눈에 의하면 흔치 않게 은빛 기운을 내뿜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빈틈이 많았고, 자신의 마력을 과다 소모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미궁에서 그런 실수는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

투둑. 투둑.

얼음 밭을 밟으며 채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자신이 패배할 리 없단 듯이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에선 여유마저 느껴진다.

스르르르.

전요한이 쥐고 있는 아르티나가 주위의 마력을 끌어들였다.

곧이어 서슬 퍼런 검공이 일렁였고, 그 경지는 검사로선 상당한 것이었다.

“역시 숨겨둔 실력이 있었네.”

예상했다는 듯 채린이 냉혹하게 이죽거렸다.

던전에서 전요한의 활약을 지켜봤던 그녀는 일찍이 의문을 품고 있었던 상태다.

상황에 따라 완급 조절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

전력을 숨기는 이유도 명확하지 않아서 농락당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상대하려면 더는 그런 여유를 부리지 못할 터다.

“검공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3단계 숙련자, 소드 익스퍼트쯤 되려나?”

채린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 경지에 도달한 자는 자유롭게 검기를 날리는 것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전요한의 실제 실력은 그마저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소드 익스퍼트? 수업 시간에 그 수가 많지 않다고 배웠는데.”

여전히 평가절하당하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전력이 들통나지 않아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도 들긴 했다.

“아무튼, 어떻게 할 거야? 그 상태로 가만히 있을 생각이면 선공하겠어.”

어느덧 채린은 전요한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전요한이 그러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얼음 가시넝쿨이 눈앞으로 쇄도해온다.

쏴아아아!

가시넝쿨은 마치 똬리를 트는 뱀처럼 전요한을 압박했다.

스치기만 해도 신체 일부가 절단될 것 같은 맹렬함이었다.

“흐음, 저번에 봤던 그거네.”

던전 공략을 할 당시에도 중요한 순간에만 펼친 마법이다.

그만큼 채린은 속전속결로 승부를 내려 하고 있었다.

적당히 시간을 끌며 상대의 자질을 파악해 보려는 전요한과는 정반대의 목적.

어느 쪽의 바람이 이루어질지는 순전히 상대적인 실력 차이에 달려 있었다.

“하압!”

가시넝쿨의 공격 범위에 들어온 전요한이 기합을 내질렀다.

앞으로 뻗어나가는 아르티나가 보기 좋게 가시넝쿨을 분쇄하기 시작한다.

“뭐, 뭐야?!”

자신의 주력 마법이 너무도 쉽게 무력화되자 채린이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어떤 상급생도 제대로 구사할 수 없을 텐데, 상대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정면 돌파를 감행한다.

“벌써부터 기겁하면 곤란한데.”

선공을 막아낸 전요한이 본격적인 움직임으로 전환했다.

여태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주력 검술.

그 요체는 초신속에 가까운 연속 베기로 적을 압도하며 마지막 결정타에 모든 가속도를 싣는 것이다.

처음 이걸 전수해준 검성은 그 기세가 쇄도하는 용의 이빨과 같다 하여 용아돌참이라고 이름 붙였다는데.

‘기술명이야 아무렴 어때.’

매번 시전할 때마다 용아돌참! 이라고 외치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참고로, 대미궁에서도 위력이 증대된다면서 기술명을 외치거나, 마법 영창을 하는 부류가 있었는데 전부 자신에게 참교육을 당한 바 있다.

“히, 히익!”

일찍이 경험해본 바 없는 위력의 검술에 채린은 안색이 새파래졌다.

다급히 얼음 장벽을 세워 막아보려 했으나, 때는 늦어 있었다.

승부가 났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의 개입이 훼방을 놓았다.

지지지직!

두 사람의 사이에 강력한 중력장이 형성된 것이다.

우회하여 다시 빈틈을 노릴 수 있었으나 전요한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아군이라도 불렀나 보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엔 상급생 두 명이 서 있었다.

정하은과 송주한.

둘은 채린과 함께 상위 성적을 자랑해온 우등생이었다.

“왜 멋대로 끼어든 거야, 송주한? 나 혼자서도 충분했는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채린이 눈을 흘겼다.

그녀는 아직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전요한도 굳이 승리를 선언할 생각은 없었다.

“안타깝게 되었네. 결전은 다음 기회로 미루자.”

자신이 알아내고자 했던 건 채린의 잠재적인 자질.

그녀를 굴복시켜서 다시 한번 교내의 화젯거리가 되는 게 아니었다.

“조금 밀리고 있었던 것 아냐? 마법사가 내주어선 안 되는 안전거리였다고?”

눈치 없는 정하은이 떠들어대며 신경을 긁었다.

고개를 떨군 채린이 수치심에 몸을 떨고 있을 때였다.

“교내에서 멋대로 싸우는 건 학칙 위반이에요.”

정숙한 하늘색 머리칼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르첼.

일전에 실비아와 대련을 했을 때, 마주친 적이 있는 징계 위원장이었다.

“아놔, 골치 아프게 됐네.”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거야?”

고개를 돌린 송주한과 정하은이 안색을 굳혔다.

한편, 전요한은 아무래도 상관없단 반응이었다.

“정당방위였다고 하면 되려나.”

채린이 제멋대로 결투를 신청한 건 사실이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메르첼에게 이끌려 면담실로 향했다.

* * *

“젠장, 하필이면 그때 메르첼 교관이 나타나다니.”

“억울하게 됐어. 우리는 구경하는 입장이었는데, 다구리를 한 것처럼 몰렸잖아.”

밀걸레질을 하던 송주한과 정하은이 투덜거렸다.

소란을 일으킨 벌로 둘은 채린과 함께 교내 청소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끼어들지 말랬잖아. 너희 잘못이니까 내 탓은 하지 마.”

채린은 한숨을 쉬며 복도의 창문을 닦았다.

그녀와 결투를 벌였던 전요한은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혼자만 빠진 상태였다.

“그나저나, 어땠어? 며칠 만에 상급생으로 진급한 애잖아.”

“궁지에 몰렸던 거 맞지? 그 때 네 표정 봤어. 어쩔 줄 몰라서 아연실색하고 있던데.”

송주한과 정하은이 다시 한번 채린의 신경을 건드렸다.

평소라면 차갑게 쏘아붙였을 그녀였으나, 이번엔 자신의 열세를 인정했다.

“그래, 완전히 졌어. 솔직히 말하면 우리 셋이서 달려들었어도 어려웠을 거라 짐작해.”

체감상으로 이능력자로서의 격부터가 달랐던 탓이었다.

채린은 그만한 강자와 맞붙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평범한 생도들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왔을 뿐.

그동안 안일했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뭐, 그 정도야?”

“하긴, 던전 공략을 할 때도 심상치 않기는 했어. 실비아 교관까지 놀라게 했었지, 아마?”

전요한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것들이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25년 동안 실종된 상태였던 탓에 그를 아는 사람도, 지난 행적도 알아내기 어렵다.

정부기관에서 따로 수행요원을 붙여 놓았음을 볼 때, 숨기는 비밀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고 말이다.

“대체 대미궁이란 곳에서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인지, 나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창문을 닦던 채린은 잠시 멍하니 교정을 내려다봤다.

마침 모두가 궁금해하는 문제의 인물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학생회장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단 건가요?”

“네, 조금 의외였네요. 겉으로는 상당히 모범생처럼 보였거든요.”

전요한은 억울하단 표정으로 동행중인 정서희를 바라봤다.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는데, 그게 뭐였는진 끝내 알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마도 정략결혼 문제 때문일 거예요. 채린의 부친이 거대 기업을 운영하는 재벌가인 건 아시죠?”

“어깨 너머로 듣긴 했습니다.”

“유력한 가문들은 어렸을 때부터 짝이 정해지곤 하니까요. 그러다보니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많겠죠.”

정서희도 채린의 결혼 상대에 대해서까진 알지 못했다.

“불쌍하긴 하네요. 17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미래가 대부분 정해지다니.”

“한편으로는 부러운데요? 재벌가의 자식이면 나중에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생활을 하게 될 거 아니에요.”

“흐음, 그런가. 하지만 돈은 헌터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번에 우두머리 괴수를 쓰러뜨려서 삼천만 원을 벌었다.

던전을 공략하다가 3성급의 성유물도 얻었고 말이다.

전요한이 생각하기에, 능력만 있으면 헌터에게 수입의 한계치는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그렇겠죠. 하지만 헌터들의 세계도 무한 경쟁이에요. 자질이 부족하거나 해서 성장이 정체되면, 금방 밀려나고 퇴물 취급받죠.”

정서희는 헌터가 극한 직업이라며 열변을 토했다.

실제로 사망률도 높은 편이고, 많이 번다 쳐도 그만큼 장비에 재투자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제가 보기에 서희 씨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잠재력이 낮은 편은 아니어서.”

“그런 말 마세요.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얼마나 노오오력을 했는지 아시….”

한탄하던 정서희는 별안간 말문이 막혔다.

아카데미에서 모두가 회피하는 3대교관인 실비아가 저만치서 다가오고 있었다.

“노력이요? 물론 중요하지요. 오늘도 얼마나 알찬 하루를 보냈나요, 상급생 군?”

그녀는 생글거리며 전요한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관리국에서 파견된 요원이 찾고 있어요. 어서 본교의 지도실로 가봐요.”

이런 와중에 호출할 정도면 꽤나 중대한 사안이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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