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히든 피스 (3)
“후우, 드디어 끝났네요.”
“7등급의 던전치고는 시간이 제법 걸린 편이었어요.”
“그래도 나름 수확은 있었어. 보스 몬스터가 비싼 마정석을 여럿 떨궜잖아.”
게이트를 빠져나오며 선발대가 잡담을 주고받았다.
히든 피스를 손에 넣은 후의 공략은 무난한 편.
별다른 피해도 없었고, 실비아 교관의 지휘 아래 성공적으로 귀결되었다.
‘무언가 이상하긴 했는데.’
기괴한 느낌을 받은 전요한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누군가 배후에서 은밀히 쳐다보는 것 같았달까.
만약 그렇다면 의심이 가는 후보는 있었다.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
저번에 지구의 지배자가 되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다.
어떤 던전에선 그녀의 권속들을 만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니 만약에 대비할 필요성은 있었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요?”
전리품 분배를 하던 실비아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전요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일 아니에요.”
이 같은 고민을 공유하기엔 아직 시기가 일렀다.
아직은 던전이 단순히 보물창고라 생각하는 자들이 대부분.
다가오는 위협을 알린다고 해도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신입생 군은 이따가 나의 지도실로 찾아오도록 해요. 개인 면담을 할 거니까요.”
실비아는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문득, 그녀의 정보창에 다시 한번 눈길이 갔다.
[실비아]
검을 든 귀부인.
상당히 적극적인 무력행사로 당신에게 애정 공세를 가해옵니다.
일정 기간을 버텨낼 경우, 성장 면에서 흔치 않은 기회가 생깁니다.
미래시에 의하면, 실비아는 귀찮더라도 곁에 두는 편이 좋다.
애정 공세 정도는 가볍게 받아치면 되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좋습니다. 서로 오붓한 시간을 갖도록 하죠.”
현 시점에서 실비아의 이용 가치는 충분하다.
아카데미에서의 영향력이 상당하고 유일하게 호감을 보여주는 전속 교관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지녔다는 통찰안에 대해 개인적인 호기심도 든다.
“자, 그럼 어떤 대화부터 시작할까요? 제가 빨려 들어갔던 대미궁이 궁금하세요?”
지도실로 뒤따라온 전요한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실비아는 입가에 검지를 올리더니, 천천히 좌우로 저어보였다.
“그것보다, 좋아하는 음식이 뭔가요?”
“김치찌개요.”
“정체불명의 알을 깨고 나오신 것치곤, 의외로 서민적인 입맛이시네요?”
예상대로 실비아가 궁금해하는 건 전요한의 비밀이었다.
앞서의 던전 공략을 통해, 그녀는 전요한이 비범한 인물이란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요? 손수 김치찌개라도 해주시게요?”
“사실 요리는 잘 못 하지만, 신입생 군의 취향에 대해 알아두려고요.”
“저에게 개인적인 관심이라도? 아니면 대미궁에 대한 것이 궁금하신 건가요?”
전요한은 본심이 궁금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러자 실비아는 생긋 웃으며 상당한 호감이 있음을 밝혔다.
“신입생 군은 매력적인 존재에요.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 같기도 하고, 남들이 모르는 중대한 비밀을 아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만약 양쪽 다 해당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억지로 입을 열게 하고 싶진 않아요. 지금은 가능한 만큼만 알려주실 수 있나요? 비밀은 지켜 드리겠어요.”
실비아는 머리를 들이대며 연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잠시 고민하던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담당 교관이기도 하시니 그 정도의 요구는 들어드리죠.”
“감사해요. 그럼 첫 번째 질문. 대미궁의 최심부엔 무엇이 있었나요?”
별로 숨길 만한 이유가 없는 내용이었다.
이건 관리국에서 진술한 대로 솔직하게 대답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심부는 하얀 마녀라고 불리는 권능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요. 이름은 이리스였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권능자라고요?”
“네, 대미궁처럼 위계 높은 차원을 지배하는 존재죠. 막강한 권능도 있고요.”
“재미있네요. 그렇게 대단한 상대를 어떻게 쓰러뜨린 건가요?”
실비아는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전요한을 바라봤다.
“정예 수준의 동료들과 함께 사흘 밤낮을 싸웠어요. 하얀 마녀의 전용 마법구가 워낙 사기라서 죽을 만하면 재생했거든요.”
“사흘 밤낮을? 신입생 군, 당시엔 체력이 장난 아니었네요?”
“저는 마력재생이란 소질을 지니고 있어서 그나마 버틸 만했습니다. 아무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치열했어요.”
하얀 마녀가 내리는 저주 때문에 여러 명의 동료들을 잃었다.
절대면역 같은 패시브를 보유하지 못했던 탓이다.
하얀 마녀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을 땐, 오직 전요한만이 살아서 홀로 숨쉬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보상을 얻게 되었나요? 25년 만에 공략한 대미궁이니 분명 엄청난 성유물이었겠죠?”
“마녀의 성배라고 하는 청동 잔이었는데, 지구로 되돌아가겠다는 소원을 빌었어요.”
그로부터 얼마 후엔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알몸으로 귀환한 상태였고 말이다.
지난 흑역사를 언급하자 실비아가 쿡 하고 웃었다.
“알고 있어요.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전신 스트레칭을 하셨었죠.”
“설마 그때 뉴스 시청하고 계셨습니까?”
“네, 알에서 나오시자마자 다급히 모자이크 처리되더라고요. 저는 동체시력이 빨라서 다 봐버렸지만.”
실비아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변했다.
전요한은 헛기침을 한 후 화제전환을 시도했다.
“그 외에 또 궁금한 건요?”
“두 번째 질문 말인가요? 음, 이건 민감할 수도 있겠는데… 가끔씩 종합 능력치를 상회하는 전력을 보이는 이유가 뭔가요?”
남다른 통찰력을 지닌 실비아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내용이라 전요한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재성장하는 과정이라 그런 거 아닐까요? 따지고 보면 제가 종합 능력치는 낮지만 뉴비는 아니잖아요?”
“그렇긴 해요. 확실히, 성장치가 초기화되는 경우는 전무해서 이변이 일어났다고밖엔 말 못 하겠네요.”
실비아의 연보라색 눈동자가 다시 한번 반짝였다.
전요한은 그녀가 이번에 노골적으로 능력을 사용하고 있단 걸 느꼈다.
“혹시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건가요? 그 통찰력이란 걸로요.”
“눈치채신 건가요? 실은 정확히는 알 수 없는데, 대략적으로 짐작 가능해요.”
실비아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선 최대한 말을 아꼈다.
중대한 비밀이라 함부로 떠들어대기 곤란하다는 의미.
전요한은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다음으로 넘어가죠.”
“세 번째 질문은 조금 방대한 내용이에요. 지난 25년간 대미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세요.”
크고 작은 사건들 중에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실비아가 경청하는 모습을 보이자 전요한은 씨익 웃었다.
“원한다면 들려드리죠. 팝콘 하나 미리 준비해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자신의 무용담을 전부 이야기하려면 며칠 밤낮으로도 부족했다.
귀찮은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으나, 그 정도의 수고로움은 감수하기로 했다.
누군가는 대미궁의 존재에 대해 기본적으로 알고 있을 필요성이 있었다.
“1층부터 시작할까요? 처음 눈을 떴을 때, 지옥 같은 풍경이 보였어요. 용암지대선 마물들이 득실거리고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죠.”
그렇게 해서, 전요한은 기나긴 이야기의 서막을 열었다.
* * *
“최근에 지나친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네요. 피곤하지는 않으세요?”
개인실을 청소해주고 있던 정서희가 걱정스레 물었다.
전요한은 소파에 누워서 티브이를 보다가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걱정되는 게 있네요.”
“뭔데요?”
“전에 만났던 네크로맨서요.”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가 지구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 보낸 존재.
현재까지의 정보에 의하면 남작 이상의 귀족 서열이고, 이름이 매우 길었다.
“로리콘이었나. 대충 한쪽 귀로 흘려서 기억이 안 나네.”
풀 네임은 드락실 아나크로노미콘 네세르제키옐.
마계에서는 칠흑의 네크로마키아라는 칭호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요한에게 있어선 그저 로리콘일 뿐.
대미궁에서도 네크로맨서는 심심찮게 봤기에 이름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자를 일으키는 흑마법사가 위험한 존재이긴 하네요. 만에 하나 던전 게이트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순 없습니다. 이 문제를 관리국에 따로 보고해주지 않으시겠어요?”
“알겠어요. 최대한 노력해보죠.”
“만약 녀석으로 추정되는 제보가 들어오면 제가 나설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아카데미 생활보다 네크로맨서를 해치우는 게 먼저였다.
“그러게 왜 무시하고 지나쳤어요? 당시에 맞붙었으면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이 안 생겼을 텐데.”
“솔직히 귀찮았습니다. 굳이 상대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고요.”
네크로맨서가 조만간 지구로 넘어온다는 건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차피 그런 녀석이 날뛰면 제보가 들어올 것이므로 전요한은 인내심 있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전요한, 맞지?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만.”
- 내 이름은 이수연이야. 저번에 본 적 있지? 1시간 안에 근처 카페로 나와.
이수연은 말을 마친 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카데미 근처에 카페가 어디 한둘인가.’
전요한이 속으로 욕하고 있을 때 문자메시지로 이미지 하나가 날아왔다.
조금 전 말한 카페의 약도였다.
“위치는 적당하네.”
번화가에서 다소 떨어진 적당한 규모의 카페.
이수연은 그 안에서 전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법 빨리 왔네.”
“딱히 할 일도 없어서요.”
이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흰 원피스 위에 검은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화장이 짙은 것만 빼면 봐줄 만하군.’
전체적인 이미지는 정서희에 비해 여러모로 앙칼진 면이 있었다.
하긴 그렇지 않다면 정부요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지 못했겠지.
전요한은 적당히 납득하기로 했다.
“앞으로 가끔 만나게 될 거야. 내 번호니까 저장해둬.”
“네.”
“뭐라고 저장했어?”
“이수연 님이라고요.”
“보여줘봐.”
다리를 꼬고 있던 이수연이 불쑥 머리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이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다.
전요한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수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이상한 이름으로 저장하는 애들이 있거든. 특히 아카데미 생도 중에.”
“뭐라고 했었는데요?”
“관리국 아줌마, 화장 떡칠한 꼴초 등등… 잠깐,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거야?”
순간 이수연이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핸드폰상으로 저장되어 있는 이름을 바꿀 것을 권유한다.
“웬만하면 옆집 누나라고 해놔. 그래야 조금 분위기가 살잖아?”
“옆집 누나치곤 나이가 많은데.”
전요한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수연은 발끈해서 화를 내려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네.’
하지만 정부요원으로서 사적인 감정은 금물이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이다.
“아무튼, 카페에 왔으니 커피는 시켜야지. 뭐로 마실래?”
“전 아메리카노로 하겠습니다.”
이수연이 테이블 모서리에 있는 벨을 누르자 메이드복을 입은 여종업원이 달려왔다.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손님?”
“여기 아메리카노랑 카페라테 한 잔씩 주세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여종업원이 사라지자 이수연은 전요한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최근에 이상한 능력을 사용한다는 사내가 있어. 혼자서만 활동하고 증거를 잘 남기지 않지.”
“제가 알려드린 정보와 일치하는 면이 많습니까?”
“그래,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네가 찾고 있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어.”
정부요원인 이수연이 확신할 정도면 조사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전요한은 그녀가 건네준 문서를 천천히 훑어봤다.
“라비린스?”
“녀석에게 피해를 입은 소형 길드야. 이따가 그쪽의 마스터와 만나야 하니까 잘 기억해둬.”
잡담을 나누던 이수연이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연락을 시도했다.
이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접선 위치가 정해졌어. 가자.”
“어디인가요?”
“그건 비밀.”
캐묻지 말고 조용히 따라오기만 하라는 말이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카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