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히든 피스 (2)
일순간 주위가 시간이 멈춘 듯이 조용해졌다.
그러한 기현상을 일으킨 것은 흡혈귀 군주, 드라카의 절대공간.
한기가 서린 석실에서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전요한 뿐이었다.
“피의 권능을 빌려줘, 드라카. 내가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전요한이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드라카는 정지해 있는 서창민을 흘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대의 곤란함을 해결해주지.”
드라카가 가볍게 손짓하자 선혈의 마법진이 허공에 펼쳐졌다.
이후 주위 공간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서창민은 당혹감을 드러냈다.
“대,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네, 네놈 이대로는 가만히 둘 수 없다!”
암흑 속성의 마법 화살들이 매서운 속도로 전요한을 향해 날아갔다.
아카데미 생도의 전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공격 마법.
하지만 전요한에겐 그다지 위협적인 수준이 되지 못했다.
“만만하게 보지 마, 남의 몸이나 훔쳐서 조종하는 주제에!”
2회의 환생을 거친 터라 초기에 주어진 보너스 스탯만 해도 100이었다.
물론 상대도 생전에 악명을 떨친 흑마법사지만, 숙주로 삼은 서창민의 자질이 부족한 탓에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
카랑! 카랑!
전요한의 검격이 날아오는 마법 화살들을 무리 없이 튕겨냈다.
선별대가 그 모습을 감탄하며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계약자여,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주문 술식을 완성한 드라카로부터 통보가 날아왔다.
동시에 선혈의 마법진이 형체를 잃고 전요한에게 스며 들어갔다.
[‘피의 권능’을 획득했습니다.]
[적합한 인자가 부족하여 사용상의 제약이 뒤따릅니다.]
흡혈귀가 아니므로 권능의 발현이 자유롭지 못한 건 당연했다.
물론, 그렇다고 인간이길 포기하면 득보다 실이 많다.
전요한은 이 정도의 활용성이 생겨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른 것도 아니니까.’
드라카를 소환하기 위해 들어간 비용은 블러드 스톤뿐이었다.
앞으로 피의 권능을 이용해 얻을 이익에 비하면 거저인 셈.
서창민을 쓰러뜨리고 얻게 될 전리품도 그 중 하나였다.
“너, 너 따위에게 질 순 없어!”
전요한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자 서창민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둘러 다음 마법을 시전하지만, 이번엔 모두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더는 곤란해요!”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라고!”
“우리가 내버려 둘 줄 알아?”
여기저기서 만만치 않은 화력 지원이 이어졌다.
덕분에 서창민은 암흑 결계를 펼치며 잠시 멈칫거렸고, 전요한에겐 이 순간이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전리품이나 내놓고 썩 사라져, 음침한 녀석아!”
눈을 번쩍 뜬 전요한이 장검에 서슬 퍼런 마력을 실었다.
그가 내지른 검격은 암흑 결계에 균열을 일으켰고, 서창민은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어, 어떻게 견습 검사 따위가 내 결계를….”
마안으로 확인한 전요한의 종합 능력치는 45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일대일에서 기세가 밀리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
과거에 악명을 떨쳤던 흑마법사도 환생 능력과 보너스 스탯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
“궁금하면 알에서 부화해 보라고. 그것도 시가지 한복판에서.”
씨익 웃어 보인 전요한이 재차 검격을 날렸다.
파열음과 함께 암흑 결계가 완전히 와해되었고, 서창민은 순간 눈을 부릅떴다.
“이, 이놈!”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저주의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예리한 장검이 단번에 체내를 관통한 탓이었다.
“으헉!”
불타는 듯한 통증이 서창민에게 빙의해 있던 흑마법사의 의식을 어지럽혔다.
전요한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피의 권능을 사용했다.
‘더 날뛰지 못하게 하려면 확실히 속박해둬야 한다.’
그냥 목을 베거나 하여 서창민을 죽이면 끝나는 게 아니었다.
숙주를 잃은 흑마법사의 영혼은 주위의 마기를 매개로 삼아 떠돌아다닐 터.
곧 다른 이가 희생양으로 선택될 것이고, 그 과정은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석실의 내부에 최후의 한 명만이 남을 때까지.
하지만 피의 권능으로 놈을 속박해둔다면 서창민만 피해를 입으면 되었다.
스르르.
검상을 입은 부위에서 흘러내리던 혈액이 핏빛 기운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의식이 구속당하자 서창민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크, 큭! 이렇게 당해 버리다니.”
광기에 물든 흑마법사도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안 그러면 여기에서 영혼을 잃고 완전히 소멸해야 할지 모른다.
전요한이 가볍게 위협하자 녀석은 이를 빠득 갈며 후일을 기약했다.
“두, 두고 보자! 다음엔 절대 방심하지 않을 것이니!”
검은 기운으로 화한 흑마법사가금서로 되돌아갔다.
의식을 잃은 서창민이 그대로 고꾸라졌고, 배후에 서있던 드라카는 다시 잠을 청했다.
“시간이 다 되었다, 계약자여. 성역에서 그대의 성장을 지켜보겠다.”
기묘한 소리와 함께 검은 관이 닫혔다.
피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그것을 집어삼키자 주위는 적막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냉기만 감돌던 석실은 떠들썩한 분위기로 변했다.
“사, 사라졌어!”
“대체 정체가 뭐야?”
“아무리 봐도 뱀파이어 같은데, 신입생이 어떻게 불러낸 거지?”
생도들의 시선은 여전히 전요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실비아도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다.
“정말이지 놀라운 면이 많은 생도군요. 교관으로서 더욱 많은 관심을 줘야겠어요.”
전요한이 대미궁에서 돌아온 생존자란 사실은 이제 전교생이 알고 있었다.
뒤늦게 소문이 퍼졌고, 다들 하나씩은 마음속에 의문을 품는 중이다.
“그런데 알에서 부화했단 게 정말이야?”
“설마. 포획형 함정에 갇혀 있었던 건 아닐까?”
“대미궁이란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하나의 의문은 또 다른 의문을 낳고 있었다.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커져가자, 전요한은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저기,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또 당해버릴지 모르는데요. 서두르는 편이 좋지 않아요?”
기분 나쁜 마기가 여전히 피부에 달라붙고 있었다.
경각심이 생겼는지 상급생들의 움직임에 속도가 붙었다.
“어찌 됐건 일단 빠져나가자.”
“보, 보상만 챙기면 여기에 더 볼일은 없어.”
육안상 보상이라고 할 만한 건, 검은 기운에 휩싸인 금서뿐.
하지만 얼마 전에 곤욕을 치렀으므로 아무도 감히 손댈 엄두를 못냈다.
“이건 보상이 아닐 거예요. 그저 눈속임을 해둔 함정일 뿐이죠.”
모두가 우왕좌왕하자 다시 한번 전요한이 나섰다.
그런 그를 향해 실비아는 생긋 웃어 보였다.
“다시 말해, 통찰안이 있는 자만 얻을 수 있는 보상이란 말이죠? 상당히 까다로운 편에 속하네요.”
분명한 건 획득 난이도가 어려울수록 보상의 수준도 그에 걸맞게 올라간단 사실.
케르베로스와 흑마법사의 망령까지 물려쳤음을 감안하면 난이도는 수준급인 셈이었다.
이번이 최후의 관문이라 여긴 전요한은 제단 주위를 주의 깊게 살폈다.
‘금서를 열쇠로 삼는 선택지가 어디엔가 분명 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거짓 보상은 으레 숨겨진 열쇠로 작동했다.
특이점을 찾는 전요한에게 실비아가 한 가지를 알려줬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홈이 조금 파여 있네요.”
제단 앞의 쌍둥이 여신상이 마주 보는 위치였다.
그 벽면에 금서를 끼워 넣으면 마치 그녀들이 껴안고 있는 형상처럼 보이게 된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제게도 통찰안이라고 부를 만한 능력이 있으니까요.”
시험해봐도 좋단 듯이 실비아가 연보라색 눈빛을 반짝였다.
“그렇군요, 믿어 드릴게요.”
“어서 퍼즐을 맞춰 봐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니까요.”
선발대 전원이 힘들게 고생하여 도달한 보상이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벽면의 홈에 금서를 끼워 넣었다.
찰칵
흡사 열쇠가 제자리에 맞춰진 듯한 느낌이었다.
금서를 시계 방향으로 회전시키자 기계음과 함께 벽면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끼이익
이로써 모든 퍼즐은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선발대 전원은 새롭게 드러난 영역에 내리꽂혀 있는 장검 한 자루를 보았다.
“제법 등급이 높아 보이는데?”
“누가 한번 뽑아봐.”
“어지간한 자질이 아니면 여러 번 시도해봐도 어렵겠어.”
고등급의 성유물은 스스로 주인을 선택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전요한이 조심스럽게 교감을 시도하고 있을 때였다.
“먼저 뽑는 사람이 임자라 이건가? 그럼 도전해 봐야겠어!”
참다못한 상급생 중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와서 장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안간힘을 다해 뽑아내려고 노력해본다.
“끄응…!”
하지만 장검은 제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릿발 같은 광채를 내며 상급생을 뒤로 밀어냈다.
“크흑!”
노골적인 거부 의사.
이후에 몇몇 생도가 더 도전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교관님은 손대지 않으실 건가요? 한 번쯤은 탐욕을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요.”
“제겐 이미 선택받은 무기가 있어서요. 아무튼 이제 슬슬 시작하심이 어떨까요?”
실비아는 흑심 따윈 없단 듯이 옆자리를 비켜줬다.
모두의 시선이 전요한에게로 향했고,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러다가 잘못돼서 망신당하긴 싫은데.”
눈앞의 성유물이 자신을 거부할 이유는 충분했다.
애초에 제각기 주인을 선택하는 기준이 다양한 탓이다.
그런데 웬걸.
한겨울처럼 냉혹하던 장검은 전요한의 손길이 닿자마자 은은한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호, 역시 알에서 태어난 인물은 남다른 건가?”
“배가 좀 아프긴 하네.”
“저 사람이 다 했는데 당연한 거 아냐?”
전리품의 소유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전요한은 장검을 가볍게 허공에 휘둘러봤다.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검기가 서릿발처럼 흩어져 내린다.
‘생각지도 못한 결실이야.’
못해도 3성급의 성유물은 되어 보였다.
냉기 속성이란 점 때문에 범용성은 떨어질 수 있으나, 기본적인 성능이 넘사벽이다.
“신학기부터 괜찮은 무기를 손에 넣었네요. 앞으로의 대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장검의 이모저모를 살피던 실비아가 생긋 웃어 보였다.
그녀는 조만간 전요한과 치열한 결전을 벌일 것에 기대가 가득해 보였다.
“대련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면 조기진급도 시켜주나요?”
“음~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불가능하진 않아요.”
“그러면 전력을 다해야겠네요. 다음번에는요.”
실비아에게 인정받는 건 여러모로 장점이 있었다.
전요한이 그녀와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을 때였다.
찌릿–
장검으로부터 마력이 방출되며 상태정보창이 떠올랐다.
[아르티나]
성급 : ☆☆☆
특성 : 빙결의 마법검
특별히 주목해야 할 문구는 없어보였다.
성유물의 이름은 아르티나이고, 하나의 속성에 특화되어 있는 마법검이다.
만약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자가 함부로 손대거나 한다면, 그 손이 곧바로 얼어붙어 버리고 말겠지.
“뭐, 자세한 건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아직 마무리 짓지 않은 한 가지 일이 남아 있었다.
전요한은 몸을 돌려 바닥에 쓰러져있는 서창민에게로 향했다.
“한가해진 김에 문젯거리들을 조금 손봐줄까.”
드라카에게서 피의 권능을 받아낸 건 이런 잡배들을 구속하기 위함이었다.
곧, 곤히 잠든 서창민의 머리 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 *
“재미있구나. 내가 선별한 시련을 무사히 통과하다니.”
수정구를 통해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던 스반힐트는 재미있단 듯이 웃었다.
가벼운 손짓에 그녀의 기다란 은발이 한 차례 찰랑였고, 한 사내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여왕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전요한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 드리겠습니다.”
악명 높은 네크로맨서, 드락실.
그는 일전에 방심하고 나섰다가 크게 혼쭐이 난 바 있었다.
“아니다. 나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굳이 끼어들어 봤자 복잡해지기만 하겠지.”
“하지만….”
“지난번에 당한 능욕을 제대로 갚아주겠어. 그 녀석을 무릎 꿇리고 내 발가락이나 핥게 만들 거야.”
통쾌한 복수극을 머릿속으로 그리던 스반힐트는 요염하게 입을 가렸다.
그녀가 안배해둔 진정한 시련의 무대가 조만간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