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히든 피스 (1)
비밀 통로와 관련해서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다.
항상 이런 곳에서 때아닌 기습을 당했던 탓이다.
어두워서 시야도 제한되고 교묘하게 설치해놓은 함정에 노출되기도 쉽다.
비밀 통로가 발견될 때마다 동료들이 죽어나갔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뭐, 실비아 교관 정도면 믿어도 되겠지.’
전요한은 어느 정도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다.
대미궁에서 만났어도 흔쾌히 동료로 삼았을 정도의 실력자다.
‘내게 집착만 좀 덜 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지.’
계단을 마저 내려가자 제법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곳에선 마수 한 마리가 붉은 눈을 빛내며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르베로스.
해골 머리가 세 개 달린, 불곰만 한 덩치의 개였다.
‘3성급의 몬스터였던가.’
대미궁에서 심심찮게 만났던 녀석이다.
주로 이런 곳을 지키고 있는데 생도들에겐 상당히 버거운 상태일 터였다.
“물러서세요!”
케르베로스를 본 실비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는 녀석의 전력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럴 땐 의외로 챙겨주네.’
최전열에 서 있는 실비아를 보며 전요한은 든든함을 느꼈다.
제자들을 다그치며 매도하는 걸 좋아하는 여자지만, 자신의 본분은 다하는 모습이다.
“크르렁!”
케르베로스가 울부짖자 여기저기서 불기둥이 솟아나와 주변을 집어삼켰다.
“저도 도울게요. 더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요.”
상황을 지켜보던 전요한은 실비아의 옆으로 나섰다.
그러자 상급생 중 일부도 전투에 가담하려 했다.
“학생회장으로서 모범을 보이겠습니다.”
“가만히 있을 순 없죠!”
“신입생에게 보호받다니, 너무 체면이 구겨지잖아요.”
최상위권 집단의 일원들인 채린, 정하은, 송주한이었다.
의욕이 넘쳐나는 그들을 실비아는 흘끗 뒤돌아봤다.
“부상당할 위험성이 높으니 자기 안전을 최우선시하세요. 이건 목숨이 달려 있는 실전이에요.”
담당 교관으로서의 잔소리는 길지 않았다.
곧이어 실비아의 모습이 사라졌고 연보라색 섬광이 눈앞에서 수없이 교차했다.
깽! 깽!
먼저 달려들려던 케르베로스는 순식간에 머리 하나를 잃고 절규했다.
그와 동시에 역겨운 냄새가 어두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뒤쳐질 수야 없지.’
던전 공략으로 벌어들인 수익금은 기여도에 따라 분배한다고 들었다.
그게 다른 생도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유다.
전요한이 몸을 날리자 상급생 3인방도 마법 주문을 서둘렀다.
“뭐 해 송주한, 신입생이 우리보다 앞서가고 있잖아!”
“우리는 마법사 포지션인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
“한발 늦었으니 우선은 서포트에 집중하자, 채린.”
파수꾼 몬스터를 해치우기 위한 레이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들만으로도 충분히 강한 전력이었기에 점차 데미지가 누적되었다.
“크르르르!”
하지만 케르베로스도 잠자코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수세에 몰려 있는 동안 적진의 빈틈을 살폈고, 마침내 한 차례의 기회를 잡았다.
“위험해요!”
최전열에서 맞서고 있던 실비아가 뒤를 돌아봤다.
커다랗게 벌린 케르베로스의 아가리로부터 불꽃이 이글거리려는 찰나였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우리를 노리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빙결 마법으로 방벽이라도 만들어, 채린! 더 늦기 전에!”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상급생 3인방은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타이밍이 늦을 거라 판단한 전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되도록이면 전력으로는 안 싸우려 했는데.’
보너스 스탯을 100이나 적용받고 있는 중이었다.
진심으로 싸우면 당연히 티가 날 터이기에 일부러 힘을 조금 빼고 있었다.
하지만 인명 사고가 나면 더 골치 아플 터였기에 전요한은 주저하지 않았다.
“!”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움직임에 실비아가 깜짝 놀랐다.
그녀의 시선으로도 미처 좇지 못할 정도로의 신속함.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케르베로스의 두 번째 머리가 유려한 베어 넘기기에 의해 떨어진 직후였다.
“뭐, 뭐야?”
“저거 신입 맞아?”
“내가 잘못 본 건가?”
상급생 3인방도 믿기지 않는지 눈을 깜박였다.
“마, 마지막 한 방은 내가 장식하겠다!”
덕분에 얼어붙어 있던 서창민까지 용기를 내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장비만큼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들 중 상급에 속하는 고가품.
타이밍만 잘 노리면 주인의 부족한 역랑을 만회하고도 남았다.
얼마 후, 울부짖는 듯한 풍압과 함께 여러 다발의 마법 화살이 쏟아졌다.
“크륵!”
남아 있던 머리마저 당해버린 케르베로스는 결국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잘했어요, 여러분. 그럼 무엇이 보상으로 책정되어 있는지 확인해 볼까요?”
뒤처리를 마친 실비아가 생긋 웃으며 구석지로 걸어갔다.
먼지가 쌓인 제단 위에 뭔가가 놓여 있었다.
검푸른 가죽 커버로 둘러싸인 낡은 책.
마도서처럼 생겼는데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잠깐만요. 손대기 전에 안전한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요한은 걸음을 옮긴 후 고서를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러자 대미궁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접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설마 금서인가?”
금서는 말 그대로 열어보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은 성유물이다.
불미스러운 존재를 불러내거나 접촉한 이에게 저주가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조심하는 편이 좋았지만, 갑자기 다가온 한 명이 일을 망쳤다.
“이딴 게 뭐가 무섭다고 그래? 보상을 독차지하려고 수작질을 부리는 건 아니겠지?”
아까 케르베로스에게 막타를 날렸던 서창민이었다.
녀석은 다짜고짜 제단 위의 책을 들어 올렸고,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쳤다.
촤르르륵—
검은 기운이 서창민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간 건 바로 그때였다.
현자의 눈을 지닌 전요한에게만 보이는 현상이었으나, 실비아도 뭔가 잘못된 걸 깨닫고 뒤로 물러섰다.
“이런, 조심해야겠어요.”
거대한 석실에 한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금서를 펼쳤던 서창민은 눈이 뒤집힌 상태로 멍하니 서 있는 상태.
음습해진 분위기에 상급생 3인방은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다.
“무, 무섭잖아. 이런 건.”
“인정합니다.”
“대체 뭐냐고. 괜히 하지 말라는 짓을 해버려서.”
뒤늦게 탈출하려는 이들도 있었으나 때는 늦었다.
상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이미 쇠창살에 의해 막혀 있고, 숨겨진 통로는 없어 보인다.
‘올 것이 왔군.’
전요한은 품에 간직하고 있던 블러드 스톤을 조용히 꺼냈다.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상황이 교묘하게도 맞아떨어진다.
“그건 뭔가요? 처음 보는 형태의 전리품인데.”
“골동품 가게에서 우연히 산 거예요. 사악한 기운을 물리쳐 준다길래요.”
실제로 대미궁에 갇혀 사는 어떤 종족은 그런 미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블러드 스톤의 정확한 용도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많은 탓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번째 의식부터가 조금 복잡했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쳐 준다니, 재미있네요. 그런 건 메르첼의 신성 마법이 더 효과적인데요.”
실비아는 미신 따윈 그다지 신용하지 않는 눈치였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으므로 전요한은 소환 의식을 서둘렀다.
뚝. 뚝.
생채기를 낸 손가락으로부터 붉은 혈액이 떨어졌다.
제단 위에 올려놓은 블러드 스톤이 그 혈액을 탐식할 때마다 기묘한 광채가 일렁였다.
“어머, 피를 매개로 해야만 반응하나보군요?”
눈치가 빠른 실비아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녀가 옆에 있든 말든 별 상관은 없었으나, 정신이 나가 있던 서창민이 문제를 일으켰다.
“으, 으으!”
이제는 입에 거품까지 물면서 옆구리의 단검을 아무렇게나 휘두른다.
“저 아이는 제가 막고 있을 게요. 한번 계속해 보세요.”
실비아가 서창민의 눈먼 공격을 막아섰다.
고개를 끄덕인 전요한은 의식을 진행하기 위한 술식을 계속해 나갔다.
이건 대미궁의 심층부에서 우연히 알게 된 건데, 그 후로 몇 번 요긴하게 써먹었다.
“으에엑….”
거의 다 되었다 싶었을 무렵, 난동을 피우던 서창민이 졸도하며 갑자기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전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슬슬 시간이 됐나.’
금서에 걸려 있는 저주 중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건 강신술과 관련이 깊었다.
“이런, 결국 의식을 잃었네요. 도와줘야 할까요?”
“아뇨, 내버려 두세요. 소란의 주범이 곧 나타날 겁니다.”
그 녀석까지 물리쳐야 제대로 된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아무래도 탈출을 시도하진 않는 모양이군요.”
“추워서 기다리기 지쳐.”
저만치서 구경하던 상급생 3인방이 투덜거렸다.
다른 선발대 인원들도 불안감을 견디기 어려운지 수군거리며 발만 동동 굴렀다.
“크큭, 크크큭.”
어수선한 와중에 돌연 들려오는 기괴한 웃음소리.
선발대의 시선이 엎드린 채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서창민에게로 집중되었다.
“전부, 전부 죽인다. 오, 오랜만에 즐겨볼까.”
얼굴을 드러낸 서창민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기괴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게, 마치 악령이라도 빙의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무력으로 제압해야겠네요.”
틀려먹었단 걸 깨달은 실비아가 장검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서창민이 서서히 일어서며 비웃음을 날렸다.
“네, 네가 나를 상대로 맞설 수 있을 것 같어? 키킥.”
현재 서창민을 지배하는 중인 존재는 금서의 주인이기도 한 흑마법사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선발대는 서창민에게 비난을 일삼았다.
“평소에 행실이 이상하더니 결국 본모습을 드러내네.”
“그 마법서를 독차지할 셈이야? 무슨 수작인진 몰라도 절대 안 넘어가.”
“실비아 교관님까지 공격했으니 너는 여기서 죽어도 할 말 없어!”
사실 서창민이 욕을 먹든 말든 별로 중요하진 않았다.
문제는 상대의 전력을 선발대가 간과하고 있단 점이었다.
“목적은 잘 모르겠지만, 잠자코 있지 않으면 이제부터 다쳐도 책임 못 져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실비아가 서창민을 향해 인정사정없는 검격을 날렸다.
유일하게 방심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서창민은 암흑 결계로 간단히 막아냈다.
“너, 너 따위 별로 무섭지 않아. 귀찮긴 해도 시간만 있으면….”
냉기 어린 석실에 어두운 기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금서에 숨어 있던 문제의 원흉.
이대로 내버려 두면, 주위를 잠식하는 저주 마법에 의해 모두가 당해버릴 터다.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지.’
마침내 소환 의식을 마친 전요한이 눈을 번뜩였다.
곧이어 블러드 스톤이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피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이, 이번엔 뭐야?”
“오늘따라 알 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네요.”
“무서워. PTSD 올 거 같아.”
상급생 3인방은 기가 질려서 완전히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다른 선발대 인원도 마찬가지.
“뭐, 뭔데 방해질이야! 키킥.”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있던 서창민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은색 십자가가 새겨진 검은 목관이 놓여 있었다.
스르르.
기묘한 소리를 내며 관이 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목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흡혈귀였다.
창백하고 투명한 피부.
루비처럼 차갑게 빛나는 두 눈.
예리하게 튀어나온 두 송곳니.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길게 기른 검은 머리.
할리우드 영화에서 주연으로 등장할 법한, 훈훈한 외모의 소유자다.
“잘생겼다.”
“남자인 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하, 하지만 역시 무서워.”
상급생 3인방은 다리를 덜덜거리면서도 끝까지 수다를 떨었다.
모두의 관심이 쏠리자, 기분 나빠진 서창민이 암흑 마법으로 흡혈귀를 선공했다.
허나 그 공격은 흡혈귀의 몸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사멸해 버렸다.
더욱 가관인 것은 흡혈귀가 서창민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깨어났을 때부터 계속 전요한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의 계약자여. 어서 원하는 것을 말하라.”
귀족처럼 품위 있게 서 있던 흡혈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