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아카데미 (4)
블러드 스톤.
루비보다 더 핏빛에 가깝고 기괴한 광택을 발하는 유물이다.
연금술에 조예가 깊은 것이 아니라면, 간단한 가공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까다로운 녀석이기도 하다.
“그건 고객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던 매물이에요. 세공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엔 입맛만 다시고 포기했지만요.”
알리사는 간단한 소개를 하며 블러드 스톤에 대한 남다른 애증을 드러냈다.
아름답긴 하지만 투박한 원석 상태로만 지니고 있어야 해서 제값을 받지 못하는 탓이다.
게다가 마정석과 달리 별다른 용도조차 알려지지 않아 진정한 의미의 골동품이었다.
“그래서 얼마죠?”
“음, 삼천만 원이요.”
“아까의 청동 열쇠보다 훨씬 더 비싸네요. 이유라도 있나요?”
“일단 아름다운 보석이니까요. 계속 기다리면 언젠가는 가공법이 밝혀지겠죠.”
알리사는 급할 필요 없다며 부드럽게 블러드 스톤을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본 정서희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입술을 씰룩였다.
“그 가격이면 어지간한 결혼 예물 하나 장만하겠네요. 역시나 안 팔리는 이유가 있었네요.”
“가치는 언제나 변하는 법이거든요. 고객님들도 헌터로 각성하기 전에는 가공되지 않은 원석에 불과했잖아요?”
블러드 스톤은 알리사가 가게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매물이기도 했다.
그 안에 숨겨진 진정한 가치를 알아내는 것이 그녀의 오래된 비원.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전요한은 납득했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투자 가치는 있네요. 구매하겠습니다.”
“정말이에요? 이삼백만 원도 아니고 무려 삼천만 원인데.”
예상치 못한 결단에 정서희가 떡하니 입을 벌렸다.
어디에 쓸 거냐고 채근해 왔지만 전요한은 말을 아꼈다.
블러드 스톤의 진정한 가치가 밝혀지면 이 정도의 푼돈으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테니까.
“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 괜찮은 매물이 있으면 아껴두세요.”
“물론이에요. 아 참, 혹시라도 그 보석을 가공하게 되면 제게 알려주세요.”
알리사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골동품 가게에서 나오자 정서희가 허탈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이제 칠백만 원 남았네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지르신 거얘요?”
“나름 보는 눈이 있거든요.”
블러드 스톤에선 금빛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청동 열쇠보다도 몇 배의 값어치가 있단 의미.
아마도 그 사실은 대미궁을 공략했던 자신 말곤 모를 터였다.
“소소하게 구경이나 하라고 데려온 건데. 일이 너무 커졌네.”
상황을 이해 못한 정서희가 머리를 긁적였다.
전요한은 의미심장하게 웃은 후 발길을 돌렸다.
“늦기 전에 되돌아가죠. 통금 시간 있다면서요.”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보통 오후 7시에 인원 파악을 시작했다.
슬슬 노을이 지는 시간이라 교통도 정체될 터.
입학 첫날인데 재차 구설수에 오르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 * *
아카데미에 도착하니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생도들이 다급히 뛰어가는 걸 보며 전요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의 학사 일정은 끝났을 텐데 왜 이리 분주하죠?”
“글쎄요. 오면서 재난문자를 하나 받긴 했는데.”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정서희가 휴대폰을 꺼냈다.
현재 지역구에서 7등급 마력 파동이 감지되었다는 내용이 떠올라 있었다.
“전에도 말했던 거지만, 던전 게이트의 출현 빈도가 잦네요.”
“이럴수록 더욱 조심해야 해요. 강도 높은 이상현상이 발생하는 전초 단계니까요.”
아카데미의 기숙사 부사감으로 인사이동되어서 그런지, 정서희에겐 이렇다 할 임무가 내려오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실비아가 나타나서 두 사람을 이끌었다.
“여러분, 이번 던전 게이트는 우리 관할 구역에 생성되었어요! 그러니 서두르세요!”
다시 말해, 시한폭탄이 교정 안에 있다는 의미였다.
일반적으로 던전 게이트는 정해진 기간 안에 공략하지 못하면 내부의 몬스터들이 밖으로 튀어나온다.
“학칙에 의하면 생도들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자발적으로 대응하도록 되어 있어요.”
함께 옆에서 달리는 정서희가 상황을 설명해줬다.
전요한은 이해했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도에게 있어 이건 현장을 무대로 한 실전 연습이군요.”
장차 일선에서 활약해야 하는 헌터들이니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된 비숙련자들은 공략 편성에서 제외해야겠지만 말이다.
“잘 들으세요. 이건 전형적인 미궁 던전이에요. 최근에 논란이 되는 유형일 가능성이 낮으니 기존의 관행대로 뽑을게요.”
이번 선발대의 지휘교관은 실비아였다.
그녀는 각자의 전력을 감안하여 인원을 구성했다.
“저 녀석도 함께인가?”
“오늘 입학했는데 너무 과대평가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
“내버려 둬.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는지는 들어가 보면 알게 되겠지.”
던전 공략을 위한 선발대엔 전요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사감이란 이유로 제외당한 정서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최근 불미스러운 사건에 너무 휘말리시네요.”
“걱정 마세요. 이런 것쯤이야 일상이니까요.”
대미궁에 갇혀 있었을 땐, 매일이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인지 무리를 하고 있단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럼 진입할게요! 다들 공간전이를 할 때 정신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마지막으로 당부한 실비아가 먼저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이후 전요한을 비롯한 선발대는 차례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음산한 어둠으로 짙게 물든 거대한 공동.
전요한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철갑도마뱀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상급생들과 비교해봐도 독보적 존재인걸?’
저만치 떨어져 있던 실비아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해했다.
‘역시 퍼스트 클래스다워.’
전요한에 대해서는 관리국으로부터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상상했던 것 이상이다.
일정 간격을 유지하면서 한 마리씩 사냥하는 차분함.
구석으로 몰리지 않도록 적절히 적들을 교란시키는 치밀함.
이 바닥에서 꽤나 굴렀다고 자부하는 실비아로서도 트집 잡을 것이 별로 없었다.
대미궁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것 때문일까? 물론 그때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바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전요한의 능력을 설명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단순한 능력치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급변하는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은 노력만으로 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야생 본능. 전요한은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너무 혼자서 활약하려는 것도 안 좋아요. 함께 역할을 분담해보죠.”
잠시 숨을 고르는 전요한을 향해 실비아는 윙크를 해보였다.
아직 해치우지 못한 몬스터들이 그의 앞에 줄지어 서 있다.
7등급의 던전임에도 개체 수가 이상하리만큼 많아서, 공략이 더디게 진행되는 상황.
그런데 실비아가 개입하자 그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연보라색의 섬광이 쇄도하듯이 전장을 가로질렀고, 그것을 본 상급생 중 하나가 혀를 찼다.
“뭐가 저렇게 빨라. 눈으로 따라잡기도 어렵네.”
일전에 까불었다가 한번 제대로 얻어맞았던 서창민이었다.
녀석도 선발대에 편성될 정도의 전력은 갖췄으나 그건 오로지 장비빨.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놓고 보면 최하위권에 속했다.
“있잖아, 저 악녀가 너의 왕자님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지 않니?”
주황색 불꽃을 날리던 정하은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 놀리는 듯한 말투에 채린은 살며시 눈을 흘겼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전투에나 집중해. 노닥거리다 기여도 떨어지면 상급생 체면 구겨지니까.”
“잘 알겠습니다, 얼음 공주님. 그러면 누가 더 성적이 높은지 경쟁해 볼까요?”
재수 없게 웃어 보인 송주한이 법구를 들어 올렸다.
그가 주문을 외우자 해골 전사들이 중력장에 휘말려 세차게 맞부딪쳤다.
빠드득.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골격이 형체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살과 근육이 없어서 움직임도 느린 탓에 녀석들은 몰이사냥이 쉬운 편이다.
“여기서 잠시 휴식하죠. 파티장들은 각자 부상 여부를 보고해 주세요.”
눈앞의 전장이 정리되자 실비아는 전투 중단 명령을 내렸다.
던전에 진입한 이후 4시간 만의 일이라 선발대는 상당수가 지쳐 있었다.
“실전이라고 마음먹고 제대로 굴려대네.”
“한계까지 몰아붙인 기분이야.”
“이러다 탈진해서 쓰러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불만을 늘어놓는 이들은 대부분 신입생이었다.
남다른 자질이 있지만 경험과 수련이 부족한 부류.
그들을 보니 입술이 간지러웠지만 전요한은 말을 아꼈다.
‘내가 대미궁에 갇혔을 때는 이런 휴식 시간조차 없었어.’
하나의 층계를 완전히 공략하기 전엔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언제 기습을 받아서 죽음을 맞이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옆에 있는 동료조차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지.’
대미궁엔 수많은 차원에서 끌려온 종족들이 모여 있었다.
정령의 숲에서 살던 엘프.
다양한 외형이 뒤섞인 수인족.
제련 기술 하나는 끝내줬던 드라고니안.
성향과 이해관계가 다른 녀석들이 얽혀서 지내다 보니 갈등도 적잖이 있었다.
아니, 인간만 있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터.
대미궁의 가혹한 환경은 선량한 이도 죄악의 신도로 타락시킬 정도였다.
지난 일들을 떠올리던 전요한은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해봤다.
[전요한]
기본 성급 : ☆☆☆
보유 특성 : 환생자 (3회차)
종합 능력치 : 45 (+100)
특화 소질 : 성장가속, 마력재생, 절대면역, 미래시
실질적으로 변화가 있는 항목은 종합 능력치뿐이었다.
대략 10개의 스탯이 상승했는데, 귀환한 지 3일 차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예전엔 이 정도의 성장치를 달성하기 위해 한 달 이상이나 고생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보너스 스탯도 지금의 절반인 50이었지.’
환생으로 인해 붙는 보너스 스탯은 특히 초반부에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100개 정도면 성급 두 개 정도의 격차는 족히 되니까 말이다.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하고 있는 건가요? 휴식 시간에 성장 변화까지 체크하다니, 훌륭한 생도네요.”
대충 정리가 끝났을 무렵에 실비아가 달라붙었다.
전요한의 상태창을 보지 못했지만, 어떤 면에서 자질이 있는지 그녀는 파악하고 있었다.
“칭찬해 주시니 고맙네요. 그건 그렇고, 언제 알려주실 겁니까?”
“무엇을 말인가요?”
“여기에서 잠시 휴식 시간을 준 이유가 있잖아요.”
전요한이 통로의 가장자리로 흘끗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쓰러져 있는 불꽃꼬리 사자 외엔 육안상으로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하지만 미래시가 발동한 전요한의 시야엔 숨겨진 무언가가 보이고 있었다.
“눈치채고 있었군요.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에요.”
전요한이 빤히 바라보자 실비아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나름 재능 있다고 자부하는 상급생들도 눈치채지 못한 부분이라, 대견하게 여긴 것이다.
“대체 뭔데요? 교관님의 다른 목적이요.”
“나는 전혀 모르겠는걸?”
“동감이야. 주위엔 몬스터들의 사체뿐인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상급생들이 질문을 던졌다.
채린, 정하은, 송주한.
막 들어온 신입에게 뒤쳐졌단 사실에 그들은 자존심이 상한 모습이었다.
“비밀 통로야.”
“비밀 통로?”
실비아의 말에 선발대 인원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잘 봐. 그렇게 어려운 구조가 아니야.”
윙크를 해보인 실비아가 통로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가슴 높이에 있는 흙벽돌 하나를 손으로 밀었다.
후두두둑.
잠시 후 흙벽돌들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지하로 이어지는 작은 통로.
이렇게 은밀한 장소엔 보물상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먼저 앞장설게. 뒤를 봐주지 않겠니?”
“알겠습니다.”
실비아가 먼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전요한은 한마디 덧붙였다.
“꼭 이런 곳에 골치 아픈 함정이 숨어 있던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