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9화 (9/180)

제9화. 아카데미 (3)

성녀처럼 차려입은 여인.

정숙하면서도 세련된 의복이 하늘색 머리칼과 잘 어울렸다.

‘훈련 교관 중 한 명인가.’

미래시가 발동하지 않는 걸로 봐서 당장 신경 써야 할 필요까진 없었다.

“실전 훈련은 담당 교관의 재량이에요. 당신이 나설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요, 메르첼?”

실비아가 끼어들지 말란 듯이 흘끔 쳐다봤다.

평소처럼 웃는 얼굴이지만, 어조에 싸늘함이 묻어나왔다.

“저는 학사장님의 지시로 온 겁입니다. 거기 있는 신입생을 데려가야 하는데, 방해할 생각인지요?”

메르첼도 해볼 테냐며 팽팽하게 기 싸움을 벌였다.

타고난 성향이 엇갈리는 탓에 두 교관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후우… 하는 수 없죠. 무슨 일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다음을 기약하죠.”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가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메르첼은 전요한에게 다가와서 동행을 재촉했다.

“자, 어서 따라오세요. 저도 이런저런 업무로 바쁜 몸입니다.”

학사장이 무슨 용무로 불렀는진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아마도 얼마 전에 서창민 일행을 혼내준 것 때문인 모양이다.

“그러도록 하죠.”

학사장이라고 해도 별로 두렵진 않았다.

걸음을 옮기려는 전요한에게 실비아가 뭔가를 내밀었다.

“아 참, 이걸 가져가도록 하세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평범한 규격의 흰 봉투에는 소견서라고 적혀 있었다.

얼마 전, 교정에서 생도들이 서로 다퉜던 사건의 경위와 시시비비를 다룬 내용.

그것을 본 메르첼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당신이… 이런 걸?”

“아끼는 제자가 곤란함을 겪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미리 준비해 두었죠.”

장검을 거둔 실비아가 애정의 윙크를 보내왔다.

그녀는 얼마 되지 않는 목격자 중 한 명.

소견서에 적힌 진술은 전요한이 서창민 일행을 때려눕힌 걸 정당화해줄 터였다.

“뭐, 거짓된 내용이 아니라면 상관없습니다. 솔직히 저도 서창민이란 생도를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요.”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메르첼이 중립을 유지했다.

폭력적인 문제 해결을 싫어하는 성향답지 않게 방관적인 모습이었다.

함께 걷던 전요한은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치유 마법 계열의 능력자인가요?”

“네,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알아차리셨죠?”

메르첼은 신기하다는 듯이 전요한을 쳐다봤다.

“아까 실비아 교관과 대치할 때 신성력이 느껴졌거든요.”

“여차하면 공격 마법을 날리려고 했어요. 그녀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상대라서요.”

다만,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서로의 상성 탓인데, 지금까지 맞붙어서 누군가 확실히 이긴 적은 없다.

“성녀 이미지인 것치고는 꽤나 호전적이시네요.”

“여기에서는 이단 심문관이라고 불려요. 학칙을 위반한 생도들에게 벌을 주는 징계 위원장이거든요.”

자신의 별명을 언급하며 메르첼은 썩 달갑지 않아 했다.

이단 심문관이란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메르첼 교관님이 사용하는 신성력은 누구의 권능이죠? 혹시 질서를 관장하는 여신, 아리안델?”

“글쎄요, 거기까진 잘 모르겠네요. 그냥 각성을 하고 난 후에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이니까요.”

메르첼은 단지 우연히 치유 마법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전요한은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본교의 최상층에 있는 학장실.

최고 직위자의 공간답게 내부는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오늘 입학한 신입생이라고 들었네. 듣자하니 상당히 골치 아픈 사고를 쳤더군.”

의자에 앉아 있던 학사장이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사실상 아카데미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메르키오르 재단의 인물.

희끗한 머리와 가늘게 뜬 눈매가 중노년의 노련함을 보여줬다.

“그 일이라면 더는 문제 삼지 않아도 될 텐데요. 제겐 우호적인 증언자들이 있거든요.”

전요한은 별로 개의치 않는단 태도로 일관했다.

단지, 도전해오는 상대를 적당히 혼내줬을 뿐.

전속 수행요원인 정서희가 상부엔 변명을 해뒀을 것이다.

“이능 관리국에서 파견된 요원을 말하는 건가? 아무래도 자네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보고한 모양이더군.”

“만약 그렇다면 어쩔 셈이죠?”

“일개 요원의 말을 맹신하기 어려우니 내부적으로 별도의 조사를 진행할 걸세. 자네의 처분은 충분한 진상 규명을 한 후에….”

학사장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단 듯이 이번 사건을 물고 늘어졌다.

그를 바라보던 전요한의 시선이 점차 날카로워졌다.

“흐음.”

그다지 흥미가 없는 인물이었으나, 자꾸 딴죽을 거니 신경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유감이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네요.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목격자도 많지 않을 테고, 그중 한 명은 우리 쪽의 인사니까요.”

대화가 길어지자 잠자코 있던 메르첼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학내의 풍기 단속을 전담해 왔기에 이 같은 상황에서는 꽤나 영향력이 있었다.

“이미 조사가 끝난 것인가?”

“네, 실비아에게서 목격담을 들었는데 정부요원의 진술과 일치합니다. 직접 소견서까지 제출했으니 읽어보시죠.”

메르첼이 지금이라면서 무언의 곁눈질을 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학사장에게 실비아의 소견서를 건넸다.

“진상 규명은 확실히 된 듯하군요. 이래도 정당방위가 아니었다고 계속 주장할 셈인가요?”

“…크윽.”

줄곧 여유롭게 굴던 학사장이 소견서를 읽어보고는 한 방 먹은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는 조금 전의 발언을 취소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입장을 취했다.

“서창민 생도가 먼저 잘못했으니 책임을 묻진 않겠네.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주의하게.”

아무리 학내의 최고 직위자라고 하더라도 명백히 드러난 사실을 거짓이라 우길 순 없었다.

하지만 전요한에게 얻어맞은 서창민은 메르키오르 재단을 후원하는 명문가의 자제.

재단의 대표로서 학사장은 그가 개인적인 복수를 하도록 도와줄 의무가 있었다.

배후에서 주의 깊게 지켜보겠다는 말에 전요한은 피식하고 웃었다.

“조만간 또 만나도록 하죠.”

자신에게 도전해오는 상대는 언제든 환영이었다.

물론, 당장 신경 써야 하는 우선순위가 있긴 하다.

“지금은 제가 좀 바빠서요.”

바짝 약이 오른 학사장을 뒤로하며 전요한은 발길을 돌렸다.

* * *

아카데미에서의 첫날은 화젯거리만을 남긴 채 끝이 났다.

덕분에 주위의 이목을 끌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마음껏 교정을 둘러본 전요한은 기숙사로 되돌아왔다.

“그래도 도움이 되긴 했네.”

헌터를 훈련시키는 양성기관이다 보니 잡다한 지식이 늘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정서희가 노크를 하고 개인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녀는 전요한을 대신해서 저번에 획득한 전리품을 매각하고 오는 길이었다.

“수익은 얼마나 되죠?”

“삼천칠백만 원 정도에요. 잡다한 전리품까지 처분하니 예상보다 좀 더 나왔더라고요.”

심심해서 몸풀기를 한 것치고는 괜찮은 돈벌이였다.

그런데 너무 오랜만에 현실로 되돌아와서 그런지,

막상 어디에 이번 수익금을 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매달 300만 원을 지원받으니 생활비는 걱정 안 해도 된다.

“이걸로 적당한 장비라도 구해봐야 하나?”

“별로 추천드리진 않아요. 그 정도의 자금으로는 그리 좋은 성능의 매물을 구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고심하는 전요한에게 정서희가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다.

그녀는 정부기관에서 파견된 요원이므로 이쪽 시장의 시세 파악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재투자하는 게 좋겠어요? 김치찌개에 새알 넣어 먹는 거 말고요.”

“기분전환도 할 겸, 한번 골동품 가게에나 들러보는 건 어때요? 별 기대는 하지 말고요.”

입가에 검지를 대고 있던 정서희가 후다닥 달려가서 노트북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자신이 언급한 가게의 구체적인 위치를 띄웠다.

“딱히 골동품이나 수집하는 고상한 취미 따윈 없는데요.”

“요새는 그런 수집욕을 불태우는 사람 많아요. 의외의 횡재를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골동품 가게에는 던전을 통해 채굴된 이세계의 산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값어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썩어가는 유물도 드물게 존재한다.

상당히 유용한 고급 정보였기에 전요한은 감사의 표시를 했다.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때도 있군요. 다시 봤습니다.”

“흥, 득템하면 다음에 함께 외출해서 한번 쏘세요.”

아카데미에 입교한 생도들은 학사 외부로 나가는 것이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전요한은 이제 막 신입생으로 편입된 상태라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다.

“운전은 해주실 거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복잡할 것 같은데.”

“안 될 게 뭐 있겠어요? 저, 사실상 전속 수행요원이잖아요.”

정서희의 임무는 전요한을 가까이에서 보호하고 한편으로는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어느 쪽에 더 치중할지는 상대적인 친밀도와 이해관계에 달려 있다.

“곁에 있어 주셔서 든든합니다, 서희 양. 김치찌개를 혐오하는 것만 제외하고요.”

“누가 싫어한다고 했어요? 자취한 기간이 길어서 나름 김치찌개 요리 잘해요.”

얼굴이 붉어진 정서희는 투덜대며 차량에 먼저 탔다.

그녀의 조력 덕분에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여기가 골동품 가게인가.”

창밖에서 전시대를 들여다보며 전요한은 기묘한 인상을 받았다.

확실히 무언가 용도가 불확실하고 미심쩍은 매물들이 많다.

“혹시 저희 상품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손님?”

가게 안에서 일하던 금발의 여점원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냥 둘러보기만 하려고요. 아직 구매 의사는….”

손사래를 치던 전요한의 시야에 한 골동품이 들어왔다.

거대한 청동 열쇠.

평범해 보이지만 푸른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그건 270만 원이에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인테리어에 제격이죠.”

여점원은 상당히 높은 가격을 제시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정서희가 혀를 내두르며 저었다.

“으엑. 구체적인 감정 기준이 대체 뭔가요.”

바가지를 씌우려는 낌새가 역력하니 되도록 피하라는 눈치다.

그녀에겐 미래시가 없어서 열쇠를 휘감고 있는 푸른 기운을 인식하지 못했다.

“제 생각에도 조금 비싼 것 같은데요. 단순히 인테리어 목적이라면 더 좋은 것들도 많지 않을 까요?”

전요한은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가격 협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종업원도 영업력이 만만치 않은 베테랑이었다.

“이제 막 들어온 신상품이라 할인은 많이 해드릴 수 없어요. 그렇다면 250만 원 어떠세요? 헌터이시니 부담이 될 정도의 금액은 아니실 텐데.”

종업원은 타고난 눈썰미를 통해 두 사람이 헌터란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전요한은 재미있단 듯이 웃고는 일단 구매를 보류했다.

분명 어디엔가 유용하게 쓸모가 생길 테지만, 당장 팔려나갈 매물도 아니니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일단 제 명함을 드릴게요. 나중에 주머니 사정이 괜찮아지면 다시 찾아오세요.”

아쉬운 표정을 짓던 여점원이 영업용 윙크를 날렸다.

명함에 적힌 이름은 알리사.

이국적인 겉모습만큼이나 네이밍이 특이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많아진 느낌이군요.”

길가에서도 그런 경향성이 느껴진 바 있었다.

“헤헤. 지금은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거든요. 헌터들이 던전에서 유물을 발굴해오는 덕분이죠.”

알리사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괜찮은 골동품은 매입해줄 테니 가져와요. 비슷한 가치를 지닌 것들하고 교환도 해드려요.”

알리사의 말에 의하면 여기 전시된 상품은 전부 헌터들이 발굴해온 것이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이 생각해뒀던 유형의 매물에 대해 물었다.

“혹시 보석 같은 건 없나요? 지구에는 존재하진 않은데, 미지의 재질로 되어서 가공이 불가능한 거요.”

“귀중품은 도난 방지를 위해 따로 보관해두고 있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해맑게 웃어 보인 알리사가 가게의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보안장치를 만지작하자 구동음과 함께 다채로운 귀중품들이 드러났다.

“흐음.”

정서희와 함께 매물을 살피던 전요한은 말없이 눈을 빛냈다.

그가 관심을 보일 만한 보석이 마침 거기에 잠들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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