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8화 (8/180)

제8화. 아카데미 (2)

“아까 그 생도, 학사장과 연줄이 있다면 꽤나 시끄러워지겠군요. 하지만 가능한 선까지는 수습해 볼게요.”

먼저 본교로 들어서며 정서희가 뒤처리를 약속했다.

상부에 보고는 해야겠지만, 어떻게든 해결되리라 믿는 모습이었다.

“다시 도전해 온다면 정식으로 맞붙어도 됩니다. 기회가 있을진 모르겠는데.”

“음… 아카데미에서는 대련도 많이 하는 편이니까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보세요.”

“뭐, 그렇게 하죠. 갑자기 선공을 해오지만 않는다면야.”

자존심을 건 결투 신청은 언제든 받아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전요한은 실내의 통로를 살폈다.

이능력자를 위한 양성기관이라 그런지 교내 분위기는 자유로우면서도 엄숙한 면이 있었다.

“아무튼, 생도들은 대부분 미성년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성인의 경우엔 부설기관에서 속성 코스를 밟거든요.”

앞서 걷던 정서희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앞엔 굳게 닫힌 출입문 하나가 있었다.

“이곳이 환영회를 개최한다는 소강당인가요?”

“네, 저번엔 더 넓은 공간에서 성대한 입학식을 거행했는데, 뒤늦게 들어온 생도까지 그럴 필요까진 없겠죠.”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절차니까요.”

애초에 많은 걸 기대하고 온 것이 아니었다.

끼이이익.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법 규모를 갖춘 수용 공간이 드러났다.

“수행요원이 붙어 있네?”

“퍼스트 클래스인가?”

“그럼 최우선 순위로 들어왔겠다.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잖아.”

먼저 기다리고 있던 신입생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정서희가 말했던 대로 평균적인 연령층은 어린 편.

미성년층이 선호되는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성장 잠재력이 높기 때문일 터였다.

“저는 기숙사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부디 무의미한 마찰은 일으키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위협요소가 없음을 확인한 정서희가 뒤쪽으로 물러났다.

이어서 단정한 차림의 한 청년이 전요한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봐, 정말로 퍼스트 클래스야? 대체 어떤 이능력을 지니고 있어?”

관리국 관계자도 아니고, 첫 대면에 상대의 전력을 묻는 건 실례였다.

아카데미 내에서는 서로가 잠재적인 경쟁자이기도 하다.

전요한은 흘끗 쳐다본 후 적당히 말을 아꼈다.

“글쎄. 이야기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는데.”

“그러지 말고 자랑 좀 해봐. 앞으로 함께 지내게 될 텐데.”

청년은 괜히 남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에 일가견이 있었다.

안 그래도 주위의 이목이 쏠려있던 터라 본보기를 보여줘야 하는 상황.

전요한은 건방지단 표정으로 청년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그렇게 궁금하면 한번 붙어볼래? 때려눕혀줄 자신 있는데.”

“크윽… 미안해. 잘못했으니까 이만 놔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청년은 잽싸게 꼬리를 내렸다.

여러모로 싱거운 애송이.

전요한은 혀를 차며 녀석을 옆으로 밀쳐냈다.

“너 같은 놈한텐 흥미 없어.”

혹시나 해서 주위를 살펴봤는데 미래시가 발동하지 않는다.

그만큼 영향력이 전무한 인물들만 모여 있다는 이야기다.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가던 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번에 들어오신 신입생분들.”

아카데미의 학사장이 교관 두 명을 이끌고 소강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형적인 속물 스타일.

메르키오르 재단의 대표자인데 상당히 뒤가 구리다고 들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아직 몇 명 안 온 거 같은데… 뭐, 상관없겠지.”

“누가 담당 교관이 되려나. 저 외국인 여성이 취향이긴 한데.”

수근 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정면의 강단으로 시선이 집중되자 전요한은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시기적절하네.’

학사장의 뒷배경에 대해선 별로 관심은 없었다.

오히려 양옆에 서 있는 두 명의 교관이 기대가 된다.

‘저들도 퍼스트 클래스인가.’

오른쪽의 갈색 머리칼 사내는 제법 눈매가 날카로웠다.

독일계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전투 장비의 일종인 마도서를 들고 있다.

한편, 왼쪽의 연보라색 머리칼 여인은 우아한 장검을 허리에 찬 것이 보인다.

천사처럼 상냥해 보이는 표정.

외모도 수준급이라 그런지 연수생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할 정도면 기본적인 자질은 갖췄을 테니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곧 진로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헛기침을 하던 학사장이 오늘의 일정을 설명했다.

우선, 각자가 지닌 재능을 고려하여 그에 맞는 담당 교관을 선정해야 한다.

이번 기수를 맡게 된 교관은 학사장이 데려온 둘뿐.

하지만 실력만큼은 이의제기하는 자가 없을 정도로 확실했다.

“마법사 계통을 희망하는 연수생은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갈색 머리칼의 사내가 앞으로 나와서 먼저 지원자를 받았다.

이어서 연보라색 머리칼의 여인도 반대편에 섰다.

“전사 계통은 제게 모여주세요. 원거리 무기를 사용해도 딱히 상관은 없어요.”

가장 기본적인 분류이므로 망설이는 연수생은 극소수였다.

‘나는 검사이니 전사 계통을 선택해야겠군.’

고개를 끄덕인 전요한이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연보라색 머리칼의 여인이 상큼하게 웃으며 윙크를 했다.

“아까 못된 아이들을 혼내주는 모습은 잘 봤어요, 신입생 군.”

그녀는 얼마 되지 않는 교내의 목격자 중 한 명이었다.

이름까지 따로 조사했을 정도로 호감을 드러내는 상태.

인정사정없는 대련 교습으로 악명 높은 실비아의 교육 열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흐음?”

실비아와 마주하던 전요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다정해 보이는 연상의 이미지와 사뭇 다른 기류.

모르긴 몰라도, 뭔가 집요하고 가학적인 면이 있었다.

[실비아]

검을 든 귀부인.

상당히 적극적인 무력 행사로 당신에게 애정 공세를 가해옵니다.

일정 기간을 버텨낼 경우, 성장 면에서 흔치 않은 기회가 생깁니다.

미래시가 발동하는 것을 보니, 역시 불길한 직감이 맞았다.

결혼식의 신부처럼 차려입은 여인이 얼굴을 붉힌 채 장검을 안고 있는 운명 카드.

지금까지 나온 유형 중에서는 조금 특이한 편이었다.

“참고로 이번 기수의 잠재력 평가는 대련 교습으로 할 거랍니다. 지금이라도 몸을 풀어두세요.”

전요한과의 결투가 기대되는지 실비아가 콧소리를 흥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신입생들의 눈동자에 하트가 맺혔다.

“한 명씩 친절하게 장점을 가르쳐줄 모양인가 보네.”

“이런 누님이라면 얼마든지 맞상대를 해줄 수 있어!”

“전투 복장도 우아하고 아름다우신걸? 노출이 적당해서 마음에 들어.”

아직 실비아의 본모습을 경험하지 못한 풋내기들의 반응.

전요한은 그들이 곧 마주하게 될 현실을 생각하며 말없이 웃어보였다.

“자, 그럼 함께 대련장으로 가도록 해요. 이런 곳에서 난리를 피우면 다른 생도들에게 피해가 되니까요.”

실비아가 활짝 웃으며 신입생들을 인도했다.

목적지는 본교로부터 조금 떨어진 대련장이었다.

“이거 콜로세움 아냐?”

“대련장이라고 부르기엔 규모가 정말 웅장하네.”

“마치 중세시대의 노예 검투사가 된 기분이야.”

원형의 석조물을 본 신입생들이 솔직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이들 대부분은 던전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대련장의 외형은 강도 높은 수호 마법으로 유지되고 있어요. 그러니 마음껏 날뛰셔도 된답니다.”

설명을 마친 실비아가 석조물 내부의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이후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들며 대련 순서를 정한다.

“가장 뒤쪽에 있는 생도부터 시작할게요. 다들 준비는 되어 있겠죠?”

미처 갖춰 오지 못한 이들은 미리 구비해둔 대련용 장비를 이용하면 되었다.

기존의 무구보다 좋다고 생각한 전요한은 야외 거치대의 도검류에 손을 뻗었다.

“이게 더 쓸 만하군.”

적당히 휘둘러보며 성능을 시험한 후, 첫 번째 대련을 지켜봤다.

“저는 괜찮으니까 전력으로 덤벼드세요. 혹여 부상을 입게 되더라도 전적으로 훈련 교관인 제 책임이니까요.”

실비아는 안심하란 듯이 맞은편의 신입생을 향해 웃어 보였다.

조금 전에 전요한의 신경을 자극해서 멱살이 잡혔던 청년.

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한 손 검과 방패를 들어 올렸다.

“알겠습니다. 제가 선공할게요.”

그러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나간다.

나름 민첩하게 움직였지만, 기본적인 자세부터가 어수룩하다.

휘익!

당연히 그러한 공격은 먹혀들 리가 없었다.

날아드는 검날을 본 실비아의 안색에 실망감이 어렸고, 곧 무자비한 응징이 시작되었다.

카랑!

예리한 마찰음과 함께 섬광이 번뜩였다.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한 청년이 신음을 내며 나가떨어졌다.

“크윽!”

단지 가볍게 한 합을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빈틈을 노려져서 위기에 처한 것도 아니고 검상을 입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청년은 압도적인 역량에 밀려서 고통받아야 했다.

“일어서세요. 아직 당신을 어떤 쪽으로 특화해야 할지 감이 안 오니까요.”

여전히 실비아는 웃는 낯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제야 신입생들의 표정이 걱정으로 어두워졌다.

“정말 인정사정없네.”

“아니, 봐주긴 하는데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몰아붙여.”

“저 누나, 원래 저런 타입이었던 거야? 항상 웃고만 있어서 전혀 눈치 못 챘어.”

잡담이 오가는 와중에도 청년의 부상은 늘어만 갔다.

하지만 실비아는 당연하다는 듯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건 결코 장난 따위가 아니에요. 실전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적당히 봐주는 정도로 도움이 되겠어요?”

그녀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이공간의 전장에서 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공략을 떠날 때마다 귀환하지 못하는 헌터들의 수는 적지 않은 편.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했고, 그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교관의 임무였다.

“하아, 하아….”

첫 번째 대련자인 청년이 가파른 심호흡을 했다.

내리꽂은 한 손 검에 몸을 의지한 채로, 그는 최대한 버티려 노력하고 있었다.

털썩!

결국엔 강한 타격을 입고 나가떨어져서 다시 일어서지 못했지만 말이다.

“한계인 모양이네.”

“주, 죽은 거야?”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는데 그래도 전혀 안 이상할 것 같아.”

겁에 질린 신입생들이 자신의 순서를 확인했다.

뒤쪽에서부터 차례대로 진행된다고 했으니, 머릿수만 세어보면 쉽게 답이 나왔다.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하는 건가.”

차갑게 얼어버린 분위기를 느끼며 전요한이 중얼거렸다.

신입생은 안일한 모습을 보이며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긴 할 터.

이러한 방식은 실비아의 타고난 성향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이 높다.

얼마 후, 자신의 차례가 되자 전요한은 앞으로 걸어나갔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당신 말고는 저를 즐겁게 해줄 생도가 없어 보이네요.”

지루해하던 실비아가 반색하며 장검을 고쳐 들었다.

서슬 퍼런 검기를 실어 넣는 것이, 여태까지보다도 더 강도를 높일 셈이었다.

‘확실히 장난 아니네.’

직접 마주하고 보니 실비아의 전투 방식은 특이한 면이 있었다.

검술의 파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마력을 적극적으로 운용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런 전투 방식으로 성장하는 자들을 대미궁에서는 마검사라고 불렀다.

‘마력을 운용하는 방식이 까다로워서 나름의 소질이 있어야 가능한데.’

타고난 자질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졌다.

흥미가 동한 전요한은 실비아를 향해 가벼운 검격을 날렸다.

“!”

여유롭게 대처하려던 실비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겉보기와 달리, 그 위력이 결코 만만치 않은 수준인 탓이었다.

티잉!

양쪽의 장검이 맞부딪치며 긴장감어린 불협화음을 냈다.

신입생들 중에선 처음으로 대등하게 합을 겨룬 것이다.

“역시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던 생도다워요. 그런 검술은 어디에서 배운 거죠?”

실비아의 반응은 놀람에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이번엔 그녀가 자세를 바꿔 회심의 선공을 해온다.

카랑!

신입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반격이었다.

하지만 대미궁을 공략한 자에게 위협은 되지 않았다.

비록 환생으로 인해 성장치가 전부 초기화된 상태여도 말이다.

“흐음….”

실비아의 공격을 받아낸 전요한이 마음속으로 품평을 했다.

이 정도면 3성급의 마검사.

대미궁에서 만났던 이들 중에서도 희귀한 자질의 소유자였다.

“꽤나 여유로워 보이네요. 시간을 때우는 게 시시하다면 대련 난이도를 좀 더 높여 볼까요?”

실비아는 불붙는 전투의 열기에 점차 달아오르고 있었다.

흥분한 것처럼 얼굴이 조금 붉어진 모습.

야릇하면서도 섬뜩한 면이 있어서, 참관 중인 신입생들이 한 차례 긴장했다.

“설마 이 상황을 즐기는 건가?”

“표정을 봐. 완전히 요녀처럼 변해버렸어.”

“일종의 가학증이로군. 마음에 드는 상대일수록 더 채찍질하고 싶은 모양이야.”

여기로 오기 전에 미리 소문을 들은 이는 없었다.

잔학교성의 실비아.

본모습을 알고 나면, 생도들이 전부 피한다는 삼대교관 중 한 명이다.

그런 존재의 표적이 된 전요한은 성가신 맞상대를 계속해야 할 판이었다.

“첫날부터 무리한 대련은 자제해 주시지요, 실비아.”

대치 중이던 두 사람의 곁으로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