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아카데미 (1)
임시 숙소로 되돌아온 후, 전요한은 지금까지의 일들을 곱씹어봤다.
기존과 다른 형태의 재해.
갑자기 등장했던 네크로맨서.
밖에서 활개치고 있다는 죄악의 사도들.
정리해보니 전부 질투의 죄악인 스반힐트의 소행이었다.
‘아직은 지구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긴 어려운 모양이군.’
다른 차원에 확실히 뿌리내리려면 밑 작업이 필요했다.
대미궁의 하얀 마녀는 그러한 준비가 부족했었다.
‘덕분에 애써서 지구까지 뚫어둔 통로가 금방 막히고 말았지.’
어찌 되었건, 이번과 비슷한 사건들은 주시할 필요성이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궁금한 것들을 검색하고 있을 때였다.
- 그래서 어떻게 됐대요, 알에서 부화한 남자?
- 잘은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또 던전을 들락거렸대요.
- 혹시 몬스터 아니에요? 인간의 형체를 지닌 종일 수도 있잖아요.
-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관종인 몬스터가 어디 있어.
다름 아닌, 자신에 대한 전자신문의 댓글이었다.
전요한은 비아냥이 섞인 내용들을 훑어보다가 피식하고 웃었다.
“이거 완전 놀림감이 됐네.”
알에서 깨어난 건 게임 시스템상의 환생을 하기 위한 절차였다.
태생이 몬스터여서도 아니고, 고전 설화의 주인공이여서도 아니다.
“인기 많으시네요. 개인방송 하셔도 되겠어요.”
짐 정리를 하다 다가온 정서희가 재미있단 듯이 웃어댔다.
전요한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웃겨요? 제가 조류 취급당하고 있는 게?”
“오늘 김치찌개에 새알 넣어서 드세요. 돈도 많이 버셨으니까 그 정도는 부담 없죠?”
“됐고, 준비는 끝났어요?”
“아, 네. 컴퓨터만 끄시면 바로 출발할게요.”
오늘은 아카데미에 정식으로 입학하는 날이었다.
챙겨갈 게 거의 없었기에 짐 정리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제가 아카데미의 기숙사에 들어가고 나면 서희 씨는 뭐 해요?”
차량의 조수석에 탑승한 채, 전요한은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저는 그 기숙사의 임시 부사감을 맡게 되었어요. 참으로 안쓰러운 인사 발령이죠.”
운전대를 잡고 있던 정서희가 한탄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상부로의 진급을 원했기에 이 같은 조치는 썩 내키지 않아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저랑 붙어 다니면서 괜찮은 경험도 꽤 했잖아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조만간 행운이 뒤따를지도 모른단 의미예요.”
전요한은 매사에 노력하는 정서희가 싫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면은 있지만, 그 점을 제외하면 성장 동력은 충분했다.
중간에 발목을 잡지 않을 정도의 실력도 갖췄고 말이다.
“말씀은 감사해요. 비록 알에서 태어나진 못했지만, 요한 씨의 발밑까진 따라가려 애쓸게요.”
“그런 걸로 자꾸 놀리시면 대머리 됩니다. 정말로요.”
수십 분간 그다지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갔다.
시시콜콜한 장난질도 점점 지겨워질 무렵이었다.
“슬슬 도착해 가네요. 저기가 바로 아카데미입니다.”
“건축물들이 자리 잡은 부지가 제법 드넓네요.”
멀리서 보이는 광경을 보며 전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수 사관학교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외관의 유려한 학사.
그 본교를 중심으로 낭만적인 교정이 펼쳐져 있다.
“한 번쯤은 캠퍼스 라이프를 누려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대미궁으로 빨려 들어가서 이런 학도 생활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열의를 보이는 전요한의 모습에 정서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일선에서 활약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아카데미의 강의가 그리 수준 높진 않겠지만 뭐 괜찮아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 치죠.”
소실된 성장치를 다시 채우려면 어차피 시간이 필요했다.
기대감을 드러내며 전요한은 차량에서 내렸다.
그가 정서희의 안내를 받으며 본교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휘리리릭!
냉기를 품은 마법 화살 하나가 이동 경로를 향해 날아왔다.
이를 감지한 정서희가 법구를 소환한 다음 화염 마법을 시전 했다.
“하압!”
보유 능력이 평범하긴 하나, 그녀는 나름 실력 면에서 인정받는 정부요원이었다.
부단한 연습과 실전 경험 덕에 시전 속도는 매우 빠른 편.
눈먼 화살 정도는 위협이 되지 않게 소멸시킬 수 있었다.
“흐음.”
간단히 회피하려 했던 전요한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정서희의 감각이 나름 괜찮다 여겼지만 굳이 칭찬까진 해주지 않았다.
“이런 것도 나름 캠퍼스 라이프의 묘미인가.”
이쪽을 향해 겁도 없이 화살을 날렸던 장본인이 누구인지가 더 관심 있었던 탓이다.
“평소에 행실이 부주의한 생도인 것 같습니다. 고의는 아니었던 듯한데 기분 나쁘군요.”
멀리서 다가오는 무리를 본 정서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능력자가 되었다고 멋대로 행동하는 부류를 극도로 혐오했다.
“뭐, 이야기는 들어보도록 하죠. 안 그래도 우리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네요.”
얼마든지 응해 주겠다며 전요한가 혼자서 팔짱을 꼈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지금은 입학을 앞두고 있는 상황.
너무 만만하게 보이는 것만은 사절하고 싶었다.
“다행히 빗나갔네.”
“아니, 그게 아니고 저 여자가 날아 차기로 무력화한 거잖아.”
“어쨌든 사고는 일어나지 않은 거잖니? 별로 사과할 필요도 없겠어.”
곧, 위해를 가했던 무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상당히 껄렁해 보이는 삼인방.
특히 가운데의 여생도는 화장이 짙고 퇴폐미가 느껴졌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니… 황당하네요. 당신들, 교정에서 이런 식으로 이능력을 사용하는 행위는 학칙 위반인 거 몰라요?”
뻔뻔한 대화 내용에 정서희가 발끈했다.
그러자 장궁을 들고 있던 사내가 히죽하고 웃어 보였다.
“학칙 위반? 아아, 쥐꼬리만 한 벌금이라면 내지 뭐. 우리끼리 했던 내기에서 진 겸해서 말이야.”
아까 사내가 노렸던 것은 저공비행하는 철새 한 마리였다.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걸 아쉬워하는 모양이다.
“집안이 부유한가 보네요. 무력시위는 벌금이 가볍지 않을 텐데요.”
“눈치가 빠르네. 여기 학사장하고도 연줄이 있으니까 괜한 시비는 걸지 말아줘. 무사히 졸업하고 싶다면.”
어느 새부터인가 사내는 협박조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노골적인 적반하장에 전요한은 가소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요. 조심해야 할 상대인지 한번 확인해보죠.”
굳이 신경 써야 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지만 태도가 조금 거슬렸다.
미래시가 발동했는지 녀석의 상태정보창이 눈앞에 떠오른 탓도 있었다.
[서창민]
고귀한 잡배.
집안 배경이나 부유한 경제력 등으로 당신을 압박합니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형에 속하지만 한번 굴복시키면 의외로 얌전해질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유형의 운명 카드였다.
화려한 금붙이로 치장한 채 우쭐대는 졸장부의 모습.
꼴불견이라서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참교육이 시급했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학사 일정도 못 맞추고 뒤늦게 입학한 주제에.”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하려던 말을 전부 내뱉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얼굴이 뭉개졌다.
퍼억!
찰나의 순간, 전요한의 다부진 주먹이 밉상스러운 안면을 가격했다.
* * *
“저거 봐! 막 들어온 신입생이 맨주먹으로 서창민을 때렸어!”
창가에서 교정을 내려다보던 여생도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3학년 상급반의 수다쟁이, 정하은.
야단법석을 떠는 그녀의 모습에 채린은 흘끗 시선을 줬다.
“서창민?”
학사장을 뒷배로 두고 있어서 기고만장해하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꼴사나웠는데 보기 좋게 당했다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건 학생회장도 궁금한 모양인가 보네. 평소라면 무시하고 계속 이론 문제나 풀었을 텐데.”
옆쪽의 책상에 기대 있던 남생도가 안경을 고쳐 썼다.
전교 우등생, 송주한.
그는 채린이 고전하는 문제를 보며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끄러, 송주한. 네가 언제까지고 수석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일반 과목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데. 전투병과의 실전평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두고 봐. 너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걸 보여줄 테니까.”
채린은 새침한 표정으로 일어선 후 창가를 향해 다가갔다.
정하은의 말대로 서창민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아서 코를 쥐어잡고 있었다.
“대단하네. 아무리 멋모르는 신입생이라고 해도.”
분명 거들먹거리는 서창민에게서 집안 배경을 들었을 텐데 과감한 면이 있었다.
채린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지자 정하은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호감을 보이는 거야? 냉혹한 공주님께서 드디어 마음에 드는 왕자를 찾아냈나?”
“조용히 해. 그 입 찢어버리기 전에.”
“하하, 민감하게 반응하긴. 그나저나 나쁘지 않은 외모인데? 우리보다 어린 것치고는.”
정하은이 품평하고 있는 상대는 다름 아닌 전요한이었다.
대미궁에서 25년간이나 구르다 귀환했지만, 그의 겉모습은 17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동년배였으면 꼬시기라도 하게? 아니다, 너는 연하가 취향이라고 했으니 딱히 문제 될 건 없겠구나?”
어느새 가까이 접근해온 송주한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러자 정하은은 새빨개진 얼굴로 누가 듣진 않았나 주위를 둘러봤다.
“너, 공공장소에서 그 이야기 하지 말랬지!”
“뭐가 곤란해? 딱히 애들한테 비밀로 할 만한 수준도 아닌 걸.”
“콤플렉스 있다고 소문나는 거 싫거든? 한 번 더 그러면 가만 안 둬!”
수다쟁이라는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숨기고 싶은 비밀이 많은 정하은이었다.
송주한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화내지 마. 다들 밖에 나가 있어서 장난 좀 친 거니까.”
지금은 마력으로 각자의 이능력을 심화 구현하는 실습 시간이었다.
상급생들도 어려워하는 난이도였지만 이들은 일찍 과제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와 있던 상태.
항상 셋만 조기 달성을 해냈기에 자연히 고정적인 집단이 형성된 것이었다.
“다행이네.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저기 있는 서창민처럼 한 방 먹이려 했거든.”
만만하게 보지 말란 듯이, 정하은이 검지에서 주황색 불꽃을 틔워냈다.
그 모습을 본 채린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변했다.
“정하은, 교실에서 또 멋대로 이능력 사용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얼려버린다.”
“아, 네. 잔혹하신 얼음 공주님. 명심하겠습니다아.”
심기가 수틀렸는지 비꼬는 말투.
채린은 그런 정하은을 째려본 후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언가 사정이 있어서 뒤늦게 입학한 듯한 신입생.
매사에 거칠 것 없어 보이는 그가 수행요원을 대동한 채 멋대로 난장판을 벌이고 있었다.
“혼자서 다 때려잡네.”
어디서 굴러왔는지는 몰라도 싸움질 하난 잘했다.
그런데 저런 짓을 벌이고도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명문가의 학생회장인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할 후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 * *
“나에게 기어오르면 그렇게 된다. 다음엔 이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니 명심하도록.”
전요한이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불과 일 분 만에 결판이 난 대결.
그나마 멀쩡한 편인 여생도가 상체를 일으킨 채로 입가의 피를 닦았다.
“언제는 학칙 위반을 걸고넘어지더니, 이거 완전 무법자잖아?”
조금 전에 셋이서 한꺼번에 덤빈 건 생각하지 않는 비난.
입장이 난처해서 지켜보기만 했던 정서희가 고깝단 표정을 지었다.
“본의든 아니든 선공을 한 건 그쪽이에요. 그래서 시비가 붙었고 이런 결과가 나온 거죠.”
비록 전투에 끼어들진 못했어도 그녀는 전요한의 편이었다.
정부기관으로부터 파견된 전속 수행요원으로서, 조금 밀린다 싶으면 곧장 도울 심산이었고 말이다.
“너, 너희들은 다 죽었어….”
“목격자가 없을 줄 알아? 여기는 각성자들이 넘쳐나는 아카데미야.”
신음하던 남생도 두 명이 충혈된 눈으로 전요한을 올려다봤다.
무력 행사에서는 밀렸지만, 이들이 생각하기에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음대로 중얼거려라. 나는 바쁜 몸이니 이만 가도록 하지.”
전요한은 승리의 미소를 지은 후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본교의 유리창들 중 하나를 흘끗 살폈다.
목격자가 있긴 한데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뭐, 문제 될 건 없겠지.”
누가 봐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당방위였다.
휘파람을 불며 전요한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