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악마의 둥지 (4)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세요?”
“정말 이걸로 끝낼 거예요? 함께 목숨 걸고 싸웠던 사람 김치찌개만 먹이고 보낼 거냐고요.”
“그럼 뭐 먹고 싶은데요.”
“배는 불렀으니까 그냥 2차로 술이나 쏘세요, 술!”
정서희는 이대로는 안 된단 듯이 전요한에게 매달렸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전요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사적인 자리에서는 제법 주정뱅이 스타일이시네요.”
“그래서 사 줄 거예요, 안 사 줄 거예요?”
평소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정서희는 매우 취하고 싶어 했다.
그녀가 신세 한탄을 시작하자 주위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사 드리죠.”
“아싸! 이걸로 야근수당 간신히 챙겼다!”
토라져 있던 정서희가 화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는 미성년자라 술 못 마십니다.”
“요즘은 알코올이 없는 음료도 많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녀의 추천 가게로 향하면서 전요한은 은근히 정보 캐기를 시도했다.
“그런데 관리국은 헌터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나요. 일반적인 길드와는 다른 모양인데.”
“당연히 아니죠. 일개 국가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니까요.”
이능 관리국은 주요 국가마다 있고 신원이 확실한 실력자만을 요원으로 뽑았다.
자화자찬이나 다름없는 소리에 전요한은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서 남들 못지않은 엘리트란 말씀이신가요.”
“당연하죠!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노력했는데, 고작 이 정도인 게 오히려 억울한 거 아니에요?”
그것이 정서희의 주된 콤플렉스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잠재력이 뛰어난 이들을 넘어설 수 없다는 극명한 한계점.
미궁에서 그것을 절실히 느꼈기에 정서희는 거하게 술에 취하고 싶은 거였다.
“억울하다라.”
옆에서 쏟아지는 한탄을 들으며 전요한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분명 정서희는 뛰어난 화염계 마법사.
벌써부터 자신의 한계를 단정해 버리는 건 시기상조라 여겼던 탓이다.
“왜요, 퍼스트 클래스라서 나 같은 이능력자는 눈에 안 밟혀요?”
“아니요, 오히려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지난 사건들부터 해서요.”
그것이 바로 정서희에게 술을 사 주는 이유였다.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전요한은 정서희의 빈 잔을 계속해서 채웠다.
“확실히 최근의 사건들이 심상치 않군요. 주위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던전 게이트까지 등장해 버렸고.”
“상부의 높으신 분들은 진상이 파악될 때까지 언론에 입단속을 시키겠단 입장이에요. 그래서 저 같은 요원들만 죽어라 고생하는 거죠.”
정서희가 제공한 정보는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정부요원이라는 입장상 숨기는 것들도 있어 보이지만, 자질구레한 사항까지 전부 알 필요까진 없다.
전요한이 대비하고 싶은 건 조만간 찾아오게 될 재해였다.
‘지금까지의 정보로 판단해보면, 대미궁은 인류에겐 아직 이르다.’
자신이 나서더라도 전력의 열세로 인해 기나긴 시간이 필요할 터다.
그 출현 시기를 늦추려면, 혼란을 조장하는 죄악의 사도들을 최대한 색출하여 소탕해야 했다.
우우우웅—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돌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공간이 흔들렸다.
― 비상경보 발령! 7등급의 마력 파동이 감지되었습니다!
얼마 후 긴급대피를 알리는 재난문자가 날아왔다.
“7등급의 마력 파동? 왜 이렇게 자주 재해가 일어나요?”
“에에? 그러게요. 평소에는 주기가 이 정도로 짧진 않은데.”
정서희의 추측에 의하면, 이 또한 최근의 사건들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
“괜히 또 문제 터질까 봐 걱정되네.”
가게의 창밖을 내다보던 전요한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미궁에서 조우했던 네크로맨서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녀석은 어딘지 모르게 시커먼 목적이 있어 보였다.
“이제 막 등록한 헌터면서 뭘 하려고 그래요? 그냥 오늘은 밤새 실컷 술이나 마시며 놀자니까요.”
볼 살이 달아오른 정서희가 전요한의 목에 팔을 걸었다.
그때 눈앞의 창문이 깨지며 괴수 한 마리가 난입해 들어왔다.
와장창창!
가게는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고 곧이어 소란이 일었다.
“뭐, 뭐야 대체?”
“도망가요 어서!”
일반인들은 대피하기 시작했고 전요한은 장검을 소환해 괴수를 단번에 베어 넘겼다.
촤아아악!
그로서도 대화를 방해받은 것이 썩 기분은 좋지 않았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요? 안전한 곳까지 안내하시죠.”
“아씨, 정말 오늘 운수가 왜 이래요? 죽다 살아난 사람 술도 못 마시게 하네.”
한잔 더 기울이려던 정서희가 빡친 표정으로 손에 화염 구체를 생성해냈다.
그러고는 가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괴수를 태워버린다.
“술에 취하니까 화력이 더 올라간 느낌인데요.”
“마나 조절이 안 되어서 그래요. 금방 방전될지도 모르니까, 쓰러지면 알아서 업고 가요.”
정서희는 이럴 땐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함께 괴수들을 소탕하며 나아가자 주위와 이질적인 공간이 나타났다.
거대한 운석으로 인해 타원형의 크레이터가 형성된 곳.
인근 일대는 다른 행성처럼 환경이 기이하게 변해 있는 상태다.
“만약 내부로 진입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죠?”
“모르겠어요. 궁금하면 직접 들어가 보지 그래요?”
7~9등급의 재해는 평소엔 게이트에서 몬스터만 쏟아낼 뿐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운석의 흔적은 정부요원인 정서희로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잠시 후 다시 한번 진동이 느껴졌고 운석이 쪼개지며 거대한 괴수가 나타났다.
평범한 헌터로서는 감히 독대할 엄두도 나지 않는 상대였다.
“제법 좋은 보상을 주겠는걸.”
정서희를 비롯한 주위의 각성자들이 자리를 피했지만 전요한은 눈을 빛냈다.
“미쳤어요? 미궁에서 우리가 상대했던 녀석보다 수십 배는 더 커요.”
“나름 목적이 있어서요. 걱정되면 옆에서 지켜만 보시죠.”
굳이 나서려는 이유는 단순한 영웅심 때문이 아니었다.
먼저 찾아낸 사냥감을 빼앗기기 싫었고, 어째서 이런 기현상이 발생하는지도 알아내야 했다.
전요한이 새롭게 전의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스걱!
저만치서 누군가가 괴수들을 학살하며 홀로 다가왔다.
무지막지한 대검을 든 사내.
대충 훑어만 봐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전리품을 노리는 부류인가.”
노골적으로 투쟁심을 보이는 사내의 모습에 전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전리품이야 사실 별 상관은 없다만, 이번 건은 자신의 몫으로 하고 싶었다.
‘누가 먼저 쓰러뜨리는지 한번 대결을 해보자고.’
경쟁 심리가 발동한 전요한이 장검에 서슬 퍼런 마력을 실었다.
‘속전속결로 끝내주마.’
정신을 집중하자 거대 괴수의 취약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체내에서 마력을 내뿜는 코어의 위치가 바로 그것.
제대로 된 타격만 입히면 공략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콰지지직!
위협을 느낀 우두머리 괴수가 포효하며 꼬리를 내리쳤다.
그로 인해 지면이 심대한 균열을 일으켰지만 전요한을 제압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덩치가 커서 움직임을 읽기가 한결 수월하네.”
오히려 내리쳐진 꼬리가 취약점까지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되었다.
전요한은 기민한 걸음으로 단번에 괴수의 등허리까지 올라섰다.
푸욱!
서슬 퍼런 장검이 질긴 가죽을 파고들었다.
검 끝이 깊숙한 곳의 코어까지 곧장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접근을 허락한 이상 승부가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말도 안 돼….”
계속해서 장검을 내리찍는 전요한을 보며 정서희가 흠칫 몸을 떨었다.
던전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저 인간은 못 하는 게 없다.
“치잇, 너무 빠르잖아!”
한편, 거리를 좁혀오던 사내는 조급함을 느꼈다.
못해도 뒤처지진 않으리라 여겼는데, 경쟁자가 말도 안 되게 앞서나가고 있었다.
“이만큼의 실력자가 같은 지역구에 있을 줄은….”
지금까지 보여준 전력이면 퍼스트 클래스라고 부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눈앞의 괴수들을 쓸어버린 사내가 발걸음을 재촉하던 때였다.
쿠웅!
굉음과 함께 거대 괴수가 지면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 위로는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전요한이 우두커니 서 있다.
“…….”
서두른 탓에 호흡은 조금 거칠어져 있었으나 손톱만큼의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이를 가까이에서 본 사내는 그만 무릎에 힘이 빠졌다.
“크으….”
공략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으므로 전리품은 애초부터 요구할 권한이 없다.
그렇다고 승부를 걸어서 가로채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뭐, 뭐야?”
“혼자서 우두머리를 잡았다고?”
“새로운 초신성의 출현인가.”
“검호 백윤성이 손도 못 쓰고 내주다니, 이거 특종감인걸.”
그제야 근처까지 다가온 각성자들이 웅성거렸다.
대검을 든 사내, 백윤성은 수치심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런 식으로 망신을 주다니.”
정작 전요한은 그에게 전혀 관심조차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역시 괜찮은 보상이 나왔네.”
손안엔 전리품이 하나 들려 있었다.
푸른 기운을 발하는 내단.
시세는 몰라도 상당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조금 전의 전투, 정말 멋졌어요. 하지만 지나치게 세간의 이목을 끈 것 같네요.”
조심스럽게 다가온 정서희가 반대편의 헌터들을 가리켰다.
전요한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네요. 다음엔 더 조심해야겠어요.”
“상황이 이런데 더 둘러보려는 생각이신가요?”
“네, 딱히 문제 될 것도 없고 말이죠.”
정서희도 잘 모르는 기현상이니 주의 깊게 살펴둘 필요성은 있었다.
푸른 내단을 품에 챙긴 후, 전요한은 운석으로 인해 형성된 크레이터에 발을 들였다.
“확실히 꺼림칙한 영역이네.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서려 있어.”
단순히 크레이터라 하기엔 사뭇 느낌이 달랐다.
감각을 확장하여 주의 깊게 내부를 살피고 있던 때였다.
[재해의 진원지와 최초로 접촉했습니다.]
[‘질투의 죄악’에 의하여 마계로 소환됩니다.]
의미 불명의 메시지가 떠오른 이후 눈부신 섬광이 주위 풍경을 뒤덮었다.
* * *
온몸을 휘감는 마기를 느끼며 전요한은 눈을 떴다.
실로 지옥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풍경이 시야에 펼쳐져 있었다.
“네놈이 드락실에게 모욕을 줬다는 녀석이구나.”
칠흑의 권좌에 앉아 있던 여인이 내려다봤다.
은발 적안의 외모를 지닌 그녀는 서큐버스처럼 농밀한 매력을 과시했다.
“당신은 그 네크로맨서보다도 서열이 높은 존재입니까?”
평범한 이였다면 뇌쇄적인 유혹에 이성이 마비됐겠지만, 전요한은 달랐다.
대미궁에서 구르는 동안 온갖 시련을 이겨낸 덕에 미인계 정도는 면역력이 있었다.
“그래, 내 이름은 스반힐트란다. 자신의 세계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하찮은 여신 따위보다 훨씬 고귀한 존재지.”
스반힐트는 전요한이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비웃었다.
그러고 나선 요염하게 다리를 꼬며 살며시 손길을 내밀었다.
“이러지 말고 나와 함께 하지 않겠니? 미래가 밝은 권능자를 선택해야 오래도록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단다.”
단순히 전력만 놓고 따져보면 스반힐트는 나쁘지 않은 협력 상대였다.
자신이 대미궁에서 상대했던 하얀 마녀보다도 한 수 위다.
하지만.
“당신이 날뛰기 시작하면 지구가 난장판이 될 것 같은데요? 그러면 힘들게 귀환한 이유가 없어요.”
전요한에게 있어 따뜻한 김치찌개조차 시켜 먹지 못하는 지구는 무의미했다.
제의를 거절하자 스반힐트는 수치심에 눈을 홉떴다.
“가, 감히… 내 요청을 거절해? 나에게 어필하려고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마왕들이 달라붙는 줄 아니?”
“솔직히 제 취향은 아니라서요. 질투심이 많아서 매일 붙잡혀 살 것 같네요.”
별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전요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을 본 스반힐트가 이내 일어서며 분노를 터트렸다.
“이런 모욕감은 처음이야! 네놈이 뭐라도 되는 줄 아니? 지구를 정복하면 당장 너부터 붙잡아서 저 녀석의 실험 재료로 내던져 버리겠어!”
어두운 장막 너머로부터 한 존재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던전에서 한번 조우한 적이 있는 검은 로브의 사내.
스반힐트가 지구에 마수를 뻗기 위해 선봉장으로 세운 네크로맨서, 드락실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전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으니까요.”
사방에서 기괴한 마물들이 몰려오자 전요한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차피 지금 독대하는 건 서로 심리전을 벌이기 위함이지, 최종적인 승부를 가리기 위함이 아니다.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때까지 충분히 즐겨둬.”
침착함을 되찾은 스반힐트가 다시 권좌에 앉으며 말했다.
이후 주위의 마물들이 찰나의 기회를 노리기 위해 일시에 달려들었고.
“벌써부터 집착하면 곤란한데.”
마지막 도발을 던지며 전요한은 유유히 섬광 속으로 사라졌다.
* * *
홀로 남겨진 채 대략 10분이 지났을 무렵.
정서희는 곤란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관리국 국장이 수행 및 감시를 맡긴 자의 행방을 알기 전엔 되돌아갈 수 없었다.
투덜대는 그녀의 뒤로 전요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죠?”
“깜짝이야,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예요?”
소스라치게 놀란 정서희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잠시 이공간으로 불려 갔었습니다. 딱히 별일은 없었어요.”
“이상한 일이네요. 어쨌든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팔면 얼마 정도 하죠?”
전요한은 화제를 돌리며 푸른 내단을 꺼내 들었다.
호들갑을 떨던 정서희가 그것을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봤다.
“흠, 정확히 계산해봐야 알겠지만, 삼천만 원은 될 거예요. 우두머리 괴수에게서 나온 건 꽤나 비싸니까요.”
정서희는 정부요원으로서 통상적인 전리품의 시세 파악 정도는 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수입이네요. 얼마간 돈벌이는 안 해도 되겠어요.”
안 그래도 저녁 식사비로 받은 100만 원으로는 부족하던 차였다.
나름의 수확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전요한은 발길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