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악마의 둥지 (3)
“그러게 왜 까불어. 갑자기 튀어나온 주제에.”
전요한은 한 번만 봐주겠단 듯이 주먹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소녀는 커다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 있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가만 안 둘 거야. 그러니까 어서 숨든가 해.”
“아빠?”
“응, 우리 아빠는 이 영지의 주인이야. 그리고 나쁜 짓도 많이 했어.”
소녀는 앨런 테일러의 영애인 에밀리였다.
고작 9살의 나이에 지병으로 목숨을 잃고 만 여자아이.
하지만 동정이나 하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그러면 너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과 무관하단 말이니?”
유령을 봤다고 얼어붙어 있던 정서희가 뒤늦게 긴장을 풀며 물었다.
“응, 나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걸 원하지 않아. 심심해서 실험체들하고 좀 논 적은 있지만.”
광기에 물든 앨런과 달리 에밀리는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요한은 그녀가 미궁의 근원과 관련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 무고한 사람들이 갇혀 있어. 만약 네가 도와준다면 쉽게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을지 몰라.”
“탈출구?”
“너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안내해줘. 최대한 빨리.”
어쩌면 앨런은 에밀리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상위 악마와 계약을 맺었을 수도 있다.
에밀리의 영혼을 붙잡아두기 위한 장소로서 이런 형태의 미궁도 필요했을 테지.
그게 사실일 경우, 에밀리는 모든 구속을 풀 수 있는 만능 열쇠나 다름없었다.
“으음,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면 도와는 줄게. 나도 아빠가 계속 나쁜 짓을 하는 걸 원하진 않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때, 배후로부터 앨런이 나타나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제 딸을 이용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실질적인 지배 권한은 그녀에게 조금도 주지 않았으니까요.”
앨런은 자신이 이곳의 영주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너도 예외적인 사태까지 모두 통제하지는 못할걸?”
“과연 당신의 뜻대로 될까요? 여기까지 단번에 오느라 체력을 꽤나 소모했을 텐데요.”
앨런의 시선이 뒤늦게 이끌려오는 죄악의 사도들에게로 향했다.
이후 그는 뒤돌아서서 그들을 향해 새로운 명령을 부여했다.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이제부터 제 꼭두각시 역할을 잘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이 정도면 거의 막장 진행이나 다름없었다.
따로 써먹으려던 죄악의 사도들까지 투입시켜서 다짜고짜 데스 매치라니.
하지만 그만큼 앨런이 초조해하고 있단 증거이기도 했다.
“두 분은 저들을 막아주세요. 그동안 저는 미궁의 근원지를 찾겠습니다.”
미래시를 통해 관찰한 결과, 푸른빛이 새어 나오는 장소가 더 있었다.
그 위치를 살피던 전요한은 에밀리를 안고 동굴의 최심부로 달려갔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나올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면 하는 수 없죠.”
앨런은 최후의 수단을 쓰겠단 듯이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소환 마법진이 생겨나며 낯선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내 종복의 일을 방해하다니, 건방지구나.”
정체 모를 검은 로브의 사내.
생기가 없어 보이는 모습과 기괴한 뼈로 된 지팡이로부터 음산함이 물씬 느껴졌다.
대미궁에서의 오랜 경험을 통해 전요한은 상대가 네크로맨서란 사실을 직감했다.
“앨런을 수하로 부리고 있으니 너는 상위 악마겠네?”
“그렇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지…”
“응, 관심 하나도 없어. 시간도 촉박하니 이만!”
전요한은 검은 로브의 사내를 본체만체하고 달려갔다.
어차피 여기서 탈출하면 다시 볼 일이 없으리라 여겨서였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아직 내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
무시당한 것이 화났는지 검은 로브의 사내가 잽싸게 뒤따라왔다.
이후 그의 흑마법에 의해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사체들이 서서히 일어섰다.
“주, 죽은 것 아니었어?”
“대체 뭐야?”
네크로맨서의 능력은 죽은 이들을 권속으로 부리는 것.
검은 로브의 사내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추격해오자, 전요한은 귀찮음을 느꼈다.
“네놈의 이름 따윈 궁금하지도 않다고!”
대미궁에서 온갖 복잡한 이름들을 외우며 이골이 난 상태였다.
양쪽 귀를 막았지만 검은 로브의 사내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내 이름은 드락실 아나크로노미콘 네세르제키옐이다!”
“닥쳐!”
그렇게 긴 이름 따위 기억해줄 의무가 없었다.
아무튼, 달리기는 전요한이 더 빨랐고 그는 목적지까지 뒤도 안돌아보고 달렸다.
“하아, 여기인가.”
푸른 사슬로 얽매여 있는 문.
일반적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했겠지만, 전요한은 기공을 다룰 줄 알았다.
초보적인 수준의 기공도 잘만 다루면 이런 영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슬을 분쇄하자 한층 자유로워진 에밀리가 도움을 주었다.
“열려라, 참깨.”
간단한 주문으로 굳건해 보이던 출입문이 열렸다.
“참깨가 뭔지는 아냐?”
“몰라.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해봤어.”
에밀리가 한국어를 알고 있는 이유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다.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예쁘장한 방 안에 칠흑빛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는 게 보였다.
이곳을 유지하고 있는 만악의 근원.
에밀리가 결단을 내려야만 그 속박을 풀 수 있었다.
“이거 없애주면 나 가끔씩 만나러 와줄 거야?”
“…노력해볼게.”
“응, 그럼 약속한 거야?”
에밀리는 또래 아이들처럼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자신으로 인해 시작된 악몽이 모두 끝난다고 생각해서 홀가분해진 모양이다.
그녀가 칠흑빛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자, 원념의 근원은 점차 그 형태를 잃기 시작했다.
“너는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 침입자!”
한발 늦게 검은 로브의 사내가 나타나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흘끗 뒤돌아본 전요한은 녀석을 어떻게 부를지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분명히 로미콘 어쩌고 했었지. 그냥 로리콘이라 부르자.”
“아니다! 내 이름은 드락실 아나크로노미콘 네세르제…”
반박하려던 드락실이 무언가에 떠밀려 날아갔다.
뒤돌아보니 칠흑빛 소용돌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정화된 에밀리의 형상이 있었다.
“다음에 또 만나, 오빠.”
완전한 모습을 되찾은 에밀리는 작별 인사를 한 후 자취를 감췄다.
이윽고 굉음이 연달아 일어나더니 무대를 이루던 공간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제대로 당하고 말았군요. 당신에게 에밀리를 풀어줄 능력이 있을 줄은.”
한발 늦게 나타난 앨런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의욕을 잃은 상태여서 더는 방해거리가 되지 않는 듯했다.
“전부 끝났으니까 수작질은 그만하라고.”
그런데 탈출구가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무너지는 파편들을 밟고 도약하며 전요한은 높은 곳을 바라봤다.
거기엔 원형으로 실틈처럼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투둑! 투두둑!
방해를 하듯, 파편들이 서로 부딪치며 전요한의 이동 경로를 막았다.
“그리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잠시 멈칫하고 있을 때, 아래쪽에서 쫓아온 드락실이 따지듯이 외쳤다.
“도망칠 생각 따위 하지 마라! 그리고 내 이름이 길어서 외우기 힘들다면, 차라리 칠흑의 네크로마키아란 칭호로…”
“시끄럽고, 잠깐 몸 좀 빌리자.”
무슨 생각으로 네크로맨서가 권속도 안 데리고 단신으로 따라온 건지 모르겠다.
물론, 다급한 상황이라 그런 거겠지만 3회차 환생자인 전요한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퍼억!
힘껏 내지른 주먹에 드락실의 얼굴이 보기좋게 뭉개졌다.
전요한은 녀석을 허공으로 집어던진 후 도약하여 발판으로 삼았다.
그가 중간 다리를 통해 끊겼던 이동 루트를 넘기자, 드락실은 분개했다.
“이 치욕은 반드시 갚아주마!”
하지만 별 신경도 쓰이지 않는 전요한이었다.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어 보인 다음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다행히 정서희와 김수호도 여고생을 데리고 늦지 않게 이쪽으로 향해 오는 모습이다.
“그럼 먼저 나갈게요!”
전요한은 곧장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경계구역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게이트 밖으로 나와 보니 주위가 제법 소란스러웠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외부인 출입을 막던 한 요원이 다가와서 전요한에게 소리쳤다.
“이봐요, 당신! 방금 여기에서 나오신 겁니까?”
“그런데요.”
“일단 급히 가셔야 할 데가 있습니다.”
요원은 다짜고짜 전요한을 검은 차량으로 이끌었다.
연행을 거부할까 생각했지만, 뒷일이 골치 아파지는 걸 막기 위해 일단 따르기로 했다.
“어디로 가는데요?”
“이능 관리국입니다.”
거기라면 정서희가 소속된 정부기관이었다.
이렇게 된 거 전요한은 차라리 잘됐다고 여겼다.
던전을 공략했으니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
얼마 후 최종적으로 도착한 사무실엔 고위직으로 보이는 백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데… 일단 무례를 범한 것에 사과하네.”
백발 사내는 관리국의 총책임자인 유명학이었다.
그가 진술서를 건네주자 전요한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꼭 해야 하나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장문으로 하나 써냈거든요.”
“아아, 번거롭더라도 부탁하네. 이건 관리국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건이라서.”
자신이 직접 나선 만큼 유명학은 조금도 대충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잡아떼려다가 질린 전요한은 진술서를 작성하며 자신도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근데 다른 생존자들은 왜 안 오는 거예요?”
“이런 경우엔 각자 독방에서 심문하는 것이 원칙이네. 불온한 목적으로 공조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말이야.”
“불온한 목적이요?”
“그렇다네, 혹시 죄악의 사도라는 말을 들어보았나?”
유명학은 심연의 악마들을 숭배하는 무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
몇 개월 전부터 녀석들이 상당한 물의를 일으켜왔던 탓이다.
“대미궁에서 자주 봤습니다. 회유에 넘어가 인간이길 포기해버린 족속이죠.”
“자네는 그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단 말이군?”
“네, 제가 죄악의 사도인 게 의심된다면 다른 생존자들에게 각각 물어보시죠.”
“흐음….”
유명학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전요한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은빛을 발하는 대검을 소환하여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뭐죠?”
“나의 전용 무기인 알타니스라네. 신성한 권능이 깃들어 있어서 죄악의 사도들은 집어 드는 순간 손이 잿더미로 화해버리지.”
이것은 신뢰를 주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었다.
전요한은 아무렇지 않게 알타니스를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가볍네요.”
“…….”
모욕을 당했단 생각에 유명학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명학은 이내 안색을 바꾸며 호의적으로 웃어 보였다.
“처음이로군. 이 대검을 내 눈앞에서 제대로 휘두르는 이능력자는.”
그것도 한 손으로.
어지간한 자질을 갖춘 게 아니라면 감히 시도조차 못 할 일이었다.
높은 등급의 성유물은 그만큼 막대한 정신력을 필요로 하니까.
“정신력이라. 제가 그동안 고생을 좀 많이 하긴 했죠.”
“자네에게 관심이 생기는군. 앞으로 자주 만나도록 하세.”
진술서가 완성된 걸 확인한 유명학은 씨익 웃어 보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저편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수행요원 역할을 맡고 있었던 정서희였다.
“어? 생존자는 각자 독방에서 심문한다면서요?”
“서희 양은 관리국에 소속된 요원인데 그럴 필요가 있겠나? 문제가 없는지 간단한 진단 정도만 하면 충분하다네.”
“뭐야, 그러면…”
대략적인 보고는 이미 받았단 의미였다.
민감한 사안이라 직접 확인을 한 것인가?
그것보다도, 같은 일행이었던 박수호와 여고생의 생사가 궁금했다.
“그들은 무사하네. 양쪽 다 자네의 공이 컸다고 하더군.”
“다행이네요. 그러면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정에 없었던 던전 공략으로 인해 허기가 진 전요한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유명학은 다시 한번 웃어보였다.
“아 참, 배가 고프다고 했나? 그 부분은 서희 양이 해결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게.”
“갑자기 잘해주는 이유가 뭐죠? 아까 그 성검을 다뤄 보여서?”
“분명 그런 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내 손녀의 은인이니까말이네.”
“은인이라.”
잠시 생각하던 전요한의 머릿속에 여고생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둘이 제법 닮은 구석이 있었다.
“우연치고는 재미있군요. 그녀가 당신의 손녀였다니.”
“앞으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게.”
유명학은 자신이 진 빚을 확실하게 갚는 스타일이었다.
노년의 나이지만 현역으로 뛸 수 있을 만큼의 강자이기도 했고 말이다.
“국장 님, 그럼 안내할까요?”
“부탁하네. 나는 손녀를 만나 보러 가야 해서 말이지.”
안전하게 돌아왔다고는 해도 적잖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손녀부터 챙기는 모습을 보며 전요한은 좋은 투자를 했다고 여겼다.
이능 관리국이 정확히 어떤 일들을 수행하는지는 몰라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 * *
“뭐 드실래요? 지부장님이 한 끼 거하게 대접하라고 돈 주셨거든요.”
“얼만데요?”
“100만 원.”
정서희는 말 잘했다는 듯이 새근 웃으며 검지를 들어올렸다.
“100만 원이면 상당히 큰 금액 아니에요? 한 끼 식사치고는.”
“죽다 살아났는데 뭘 그 정도 갖고 그래요. 아까우면 적당히 냉면만 먹고 헤어지든가요.”
아무리 그래도 주 메뉴로 냉면은 좀 아니었다.
고심 끝에 전요한은 오늘의 저녁 메뉴를 정했다.
“아니, 김치찌개로 하죠.”
“네?”
“다름이 아니고, 예전부터 정말 먹고 싶었거든요.”
대미궁에서 구를 때, 현지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었다.
임시 숙소에서도 대충 끼니만 때우느라 원하는 메뉴를 고르지 못했고 말이다.
그 한 맺힌 심정을 알 리 없는 정서희는 그만 울상이 되고 말았다.
“히잉, 돼지갈비도 아니고 김치찌개라니.”
이럴 거면 빨리 퇴근하는 편이 나았다고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