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4화 (4/180)

제4화. 악마의 둥지 (2)

고블린은 일대일로 상대하면 그다지 위협적인 몬스터는 아니다.

하지만 녀석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고 지능도 조금 있어서 골치아픈 면이 있었다.

“자신의 몸은 자기가 지키십시오. 그것이 첫 번째 룰입니다.”

전요한은 다른 이들의 안위를 신경 써주진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도전해오는 고블린들을 학살했고 인근의 수풀은 붉게 물들었다.

“아….”

배후에서 지켜보던 여고생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인간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속한 움직임.

무기도 변변치 않은데 수적 열세를 기세로 압도했다.

“옛날 생각이 나네요. 처음 대미궁에 떨어졌을 때,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어요.”

쓰러진 고블린의 머리를 짓밟으며 전요한이 말했다.

그는 한 단계 짙은 마력을 장검에 실었다.

그리고는 한쪽에 몰려있던 나머지 고블린 무리를 향해 가차 없이 날려 보냈다.

“쿠왁!”

“케에엑!”

눈부신 섬광의 궤적이 진녹색의 몸뚱이들을 일시에 절단한다.

“그때 처음으로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란 걸 해봤죠. 덕분에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잠재력에 눈을 뜰 수 있었어요.”

재성장하는 과정이다 보니 예전 일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모험담은 나중에 들을게요. 지금은 전투에 임하느라 정신이 없네요.”

화염 구체를 던지던 정서희가 한숨 돌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잠시 주위 상황을 훑어봤다.

“제길, 다가오지 마!”

“이런 데서 죽고 싶지 않다고!”

생존자들은 나뭇가지 같은 조악한 것들로 고블린 무리와 맞서고 있었다.

그나마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는 건 전요한과 정서희뿐.

일반인 중에선 나름 강한 편에 속하는 박수호조차 애를 먹고 있었다.

‘그래도 죽진 않을 것 같네.’

종합무술 5년이라는 경력이 전혀 무의미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문제는 박수호를 제외한 나머지 생존자들이다.

전투가 길어지는 동안 희생자의 수는 늘어났고, 절망감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더는 못 버티겠어!”

“어쩌면 좋지?”

그때였다.

어디선가 유혹하는 앨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존하는 것이 어렵다면 피의 제단에 산제물을 바쳐 보시지요. 물론 고블린 같은 몬스터가 아닌, 주위에 있는 다른 동료들을 말이죠.”

실로 흉악한 간계가 아닐 수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이를 받아들인 한 사내가 옆에서 방해만 되던 노인을 찔렀다.

“으헉!”

기습을 당한 노인은 제단에 흡수되듯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누구든 죽기만 하면 머릿수가 채워지는 건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바쳐야 하는지, 그러면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진 몰랐다.

상황 파악이 끝난 전요한은 몸을 돌려 노인을 살해했던 사내에게 검격을 날렸다.

촤아아악!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사내는 두 동강이 나며 쓰러졌다.

이를 본 생존자들이 서로 칼끝을 겨누려다 멈칫했다.

“누구든 동료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룰입니다.”

한번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탈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의 목숨에 기대지 말라고 엄포를 놓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으라고!”

“딱히 보호해주는 것도 아니잖아! 어째서 이런 식으로 선택지를 뺏어가는 건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보는 시각에 따라선 위선이라고 할 수도 있는 행동.

하지만 전요한은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저 악마의 다른 목적은 여러분을 죄악의 사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죄악의 사도라고요?”

화염 구체를 날리던 정서희가 고개를 돌아봤다.

전요한은 한 차례 끄덕인 후,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예전에 악명을 떨쳤던 한 마족은 자신의 영지에서 수많은 신봉자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용해 왕국 하나를 집어삼켰죠.”

결국 국왕과 왕비는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왕녀는 노리개가 되었다.

악마교를 믿는 수많은 광신도들에 의해서 말이다.

비극적인 결말을 전해 들은 박수호가 살짝 표정을 굳혔다.

“요컨대, 타락할 만한 자들은 미리 제거해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네.”

만약 죄악의 사도가 살아남아 현실로 되돌아간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박수호와 정서희의 싸늘한 시선에 생존자들은 품고 있던 악의를 버리려 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3명을 제물로 바치는 것에 성공하면 제가 개입해서라도 목숨은 살려드릴 테니까요.”

앨런의 달콤한 속삭임이 다시 한번 들려오기 전까진 말이다.

“에, 에잇! 모르겠다!”

“타락이건 뭐건 살아남고 보겠어!”

“어차피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증거는 안 남잖아?”

죄악의 사도가 되면 생존에 극도로 유리해진단 사실이 모두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통제 불가능한 유혈 사태가 벌어지자 전요한은 그들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니 고블린들이나 마저 제거하죠.”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아무리 만류해도, 앨런의 간계에 넘어가는 이들이 많을 터.

단지 저들에게 죄악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를 주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역시 무리였나.”

동료를 찌르지 않고 생존에 성공한 이는 매우 드물었다.

이렇게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말 것이다.

“결국, 완성되었네.”

주위의 핏줄기를 모두 빨아들인 제단은 더욱 섬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럼 약속대로 구원해 드리도록 하죠. 여러분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앨런의 만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피의 제단이 갈라지며 거대한 갈고리 형태의 닻이 튀어나왔다.

카랑!

인간이 휘두를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크기.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성인 남성을 가볍게 압도하는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철제 투구를 착용하고 있어서 정체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끔찍한 생체실험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저건 대체….”

이 순간만큼은 강한 척하던 박수호도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정서희 역시 입을 떡 벌린 채 본능적으로 뒷걸음질만 치고 있다.

“산 제물을 바친 대가로 소환된 몬스터입니다. 아마도 죄악의 사도들은 공격하지 않고 우리만 노리겠죠.”

전요한은 반파된 피의 제단 주위를 살폈다.

비록 모두를 신경 써주진 못했지만, 양심적인 결정을 한 이까지 죽게 내버려 두는 건 왠지 기분이 나빴다.

“이리로 달려와. 더 늦기 전에.”

유일하게 무고한 생존자인 여고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성이 마비되었는지 좀처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흐윽….”

유약한 심성을 타고난 여고생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스르르륵―

닻을 끄는 소리가 스산한 바람과 함께 들려왔다.

전요한은 여고생을 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인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래서는 계속 발목만 잡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기엔 미래시를 통해 보여지는 여고생의 정보창이 매력적이었다.

[유다희]

황금 열쇠를 쥔 소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면, 뜻밖의 행운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신의 발목을 묶고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금 열쇠라.

확실히, 지금 그녀를 챙겨주는 건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아무래도 도와줘야겠어요. 더 늦기 전에.”

한편, 이 같은 심산을 모르는 정서희는 혀를 찼다.

“구하실 생각인가요? 저렇게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여자애를.”

“전위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동안 서희 씨는 쟤를 데리고 최대한 멀리 떨어지세요.”

간단히 지시한 후 전요한은 괴생명체의 앞으로 나섰다.

쉬이익 ―!

갈고리 형태의 닻이 바람을 가르며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일반인에겐 회피하기 어려운 일격이었지만 전요한은 그렇지 않았다.

콰지지직 ―!

처형자의 공격이 다시 한번 빗나가며 목표 대상이 서 있던 석면을 깨부쉈다.

튀어오르는 파편을 장검으로 쳐낸 전요한의 눈빛이 일순간 야수처럼 번뜩였다.

타다다다다.

지면과 맞닿은 갈고리 형태의 닻을 따라 등반을 시도하는 전요한.

그가 어깨까지 올라와 날이 무딘 장검으로 처형자의 목을 찌르자.

티익!

불꽃이 튀며 검날의 끝자락이 미끄러졌다.

‘보기보다 질긴 편이군.’

희생자가 꽤 많았으니 그에 걸맞는 녀석이 소환된 모양이었다.

“크르르!”

분개한 처형자가 왼손을 들어올려 전요한을 움켜쥐려 들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쉽게 간파되었고 전요한은 도약하여 안정적으로 지면에 착지했다.

“오호, 멋진걸!”

“박수호 씨도 도우세요. 너무 깊이 들어가진 말고 적당히 시선만 끌어주면 됩니다.”

“맡겨달라고!”

박수호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과감하게 선공을 시도했다.

타다다닥!

걸음을 내달려서 거리를 좁힌 후, 여차하면 공격을 가하려는 움직임.

하지만 이번엔 처형자도 쉽사리 빈틈을 내주지 않았다.

끼익.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적당히 반격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물론, 그 순간은 불행히도 오지 않았다.

콰아아앙!

어디선가 날아온 화염 구체가 처형자의 머리에 작렬했다.

정서희가 시전한 공격 마법.

덕분에 전요한은 잠시나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평소라면 혼자서도 충분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런 식의 팀플레이도 나쁘지 않았다.

이윽고 도약하여 처형자의 어깨 위에 도달한 전요한은 장검에 마력을 실어 넣었다.

스르르.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전력.

허점이 드러났을 때 제대로 한 방 먹이려고 아껴 왔던 것이었다.

정교한 검술로 투구를 벗겨내자 처형자의 흉악한 몰골이 드러났다.

“크르르!”

투구가 벗겨진 처형자는 대노하며 으르렁댔다.

녀석의 우악스러운 주먹이 다급히 들어 올려졌으나.

콰아아앙!

다시 한번 화염 구체가 맹렬한 위력을 가해왔다.

처형자가 주춤하자 지켜보고 있던 죄악의 사도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지겠는데?”

“슬슬 도망쳐야겠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후순위였다.

전요한 일행은 계속해서 레이드를 진행했고, 위기감을 느낀 처형자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그뿐이었다.

스걱!

전요한은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 주인을 잃은 머리가 허공을 날았고 지면에 철퍼덕하는 소리를 냈다.

“후우, 해냈다.”

“사상자가 없어서 다행이네요.”

정서희가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극도의 긴장감이 풀리자 그만 다리에 힘이 빠진 모습이다.

“아무래도 이 정도로는 부족했나보군요. 난도를 조금 더 높여볼까요?”

잠시간의 적막을 깨고, 다시 한번 앨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콰드드득.

섬뜩한 괴음이 들려오더니 주위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어서 움직이는 편이 좋겠어요!”

아직 제대로 걷지 못하는 여고생은 박수호가 맡기로 했다.

숲속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균열이 생겨난 틈이 사방에 생겨났다.

촤아아악!

기다란 촉수가 한차례 뻗어나가며 휘둘려졌다.

간신히 공격을 피해낸 정서희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하지만 전요한도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강행돌파 해야죠 뭐.”

저 너머에도 이 같은 촉수들은 사방에 도사리고 있을 터다.

전요한은 걸음을 내달려 눈앞을 막고 있는 촉수를 베어 넘겼다.

투둑.

그는 대미궁을 정복하고 돌아온 유일한 생존자였다.

이런 위기 따위에 고전했다면 진작 죽고 말았을 것이다.

“후우, 간만에 실력발휘 좀 하려니까 힘드네.”

환생으로 주어진 보너스 스탯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상당히 애를 먹었을 것이다.

옥식각신하며 길을 뚫던 전요한은 푸른빛이 새어 나오는 비밀 공간에 들어섰다.

교묘하게 출입구가 가려져있던 숲속의 동굴.

무언가 숨겨져 있을 거란 확신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이것도 미래시의 일종인가.’

뒤따라온 동료들은 푸른 빛 따윈 전혀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져볼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다.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갑자기 눈앞이 일렁이더니 푸른 형체의 소녀가 나타났다.

“새로운 실험체야? 키히힛!”

소녀는 양 갈래 머리를 커다란 리본으로 묶은 채 앙증맞은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처음 내뱉은 말도 심히 괴랄했다.

[에밀리 테일러]

구원받지 못한 영혼.

적당히 달래주면 원하는 것을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와 접촉하는 것은 배후에 있는 사악한 존재를 화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미래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정보창이 떠올랐다.

“사악한 존재?”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에 전요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소녀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고압적인 어조로 경고했다.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나와 마주친 죄로 너는 이제 벌을 받아야 하니까.”

이후 동굴의 통로 전후에 푸른 장막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전요한의 일행은 꼼짝없이 갇힌 꼴이 되었다.

“까불고 있네. 어린애가.”

뜻밖의 방해를 받은 전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주먹을 들어 올려 소녀의 작은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콩!

영혼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공을 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얏! 왜 때려!”

득의양양하던 소녀는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