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특별한 자질 (2)
도심가로 나온 전요한은 가장 먼저 휴대폰부터 구매했다.
물론, 정부기관의 지원금으로.
“좀 비싼 거 골라도 돼요?”
“네, 이 정도는 허용 범위입니다. 아카데미 생도의 품위유지비는 생각보다 적지 않아요.”
정서희가 안심하라며 가볍게 웃어보였다.
아직 정식으로 아카데미 생도가 된 건 아니지만, 입학 허가가 떨어졌으니 지원금은 곧장 나온다고 한다.
게다가 전요한의 경우, 던전 재해로 피해를 입은 것이 인정되어 초기 액수가 제법 되었다.
“재학 기간 동안 매달 300만 원이요? 기본급이 그 정도면,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겠네요?”
“물론이에요. 대신, 평범한 학생에 비해 요구되는 과제가 많은 편이죠.”
장차 유능한 헌터로 활약하게 될 인재들이다.
지원받는 혜택이 많은 만큼,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학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정서희가 지난 경험담을 들려주자 전요한은 재밌겠단 반응을 보였다.
“심심하진 않겠네요. 처음부터 재성장하는 과정이라 조금 지겨울 뻔했는데.”
이번이 3회차 환생이었다.
지난 일들을 되풀이하는 만큼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안 그러면 너무 나태해져서 시간을 헛되이 보낼지도 모른다.
‘절대로 그럴 순 없지.’
대미궁의 하얀 마녀로부터 얻은 정보를 잊어선 안 되었다.
최종 보스였던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한 가지의 중대한 비밀을 이야기해줬다.
‘지구는 이미 적지 않은 권능자들에게 노려지고 있다 했었어.’
각각의 차원에 군림하는 권능자들은 대미궁 같은 영지를 지배하며 서로 서열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영지를 키워나가기 위해서 다른 차원을 침공하는 짓도 망설이지 않는다.
조만간 하얀 마녀처럼 야욕을 드러내는 권능자가 나타날 터였다.
“무슨 생각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휴대폰은 대충 고르신 것 같은데, 요금제가 문제인 건가요?”
정서희는 친절하게 어떤 요금제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지 소개해줬다.
디테일한 내용까지 막힘없이 말하는 걸 보면,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둔 것 같다.
“그럼 추천해주신 대로 하면 되겠네요. 나쁘지 않아 보여요.”
“이왕 둘러보는 김에 액세서리도 구입하시는 게 어때요? 이곳 매장은 다양한 유형의 제품을 팔고 있어요.”
휴대폰 케이스부터 시작해서 무선 충전기, 보조 배터리, 휴대용 거치대 등등 많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과소비는 피하려 했지만, 이것 하나는 꼭 사야겠다 싶었다.
“생각해보니 제가 고른 휴대폰엔 충전 단자가 없네요. 무선 충전기를 필수 구매하도록 유도한 건가요?”
“뭐, 그런 목적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편리한 점이 많으니 반발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귀환하니 확실히 적응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휴대폰 같은 경우엔 기술 진보가 빠르다 보니 시간의 격차를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네요.”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귀환한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니 너무 성급해하지 마세요.”
가이드 역할을 맡고 있던 정서희가 어깨를 토닥였다.
멍해진 전요한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정서희]
견습 마법사.
일천한 지식으로 당신에게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그녀의 조언은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하세요.
순간, 눈앞에 특이한 형태의 상태정보창이 떠올랐다.
이건 대체 뭘까.
언뜻 보기엔 점성술 따위를 이용한 운세 풀이 같기도 하다.
‘견습 마법사라.’
단순히 정서희가 마법적 재능에 소질이 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닌 듯했다.
가까이 손을 대보니, 상태정보창이 뒤집히며 타로카드 형태의 무언가가 나타난다.
‘일종의 점괘인 모양이군.’
마법학교를 배경으로 작은 법구를 든 여자애가 그려져 있었다.
무언가 주문을 외우려는 모습인데, 자세가 불안하기 그지없다.
후면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그녀와는 두터운 신뢰감이 형성되긴 어려워 보인다.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요, 잠시 다른 생각 중이었습니다.”
전요한은 별일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방금 전의 기현상이 환생을 통해 새롭게 얻은 능력이라 추측했다.
‘분명 미래시라고 했었지. 이런 식으로 가능성을 보여주나 보네.’
점괘가 정확하기만 하다면, 선택지를 고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윽고 쇼핑이 끝나자, 전요한은 새로 산 휴대폰으로 최근 뉴스를 뒤져봤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키워드만 놓고 봐도 국내외의 상황은 혼란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생성되는 던전 게이트와 그로 인한 피해.
제법 세월이 흘렀음에도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사건들이 늘어나는 건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예민한 감각을 통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느껴졌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전요한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 비상경보 발령! 8등급의 마력 파동이 감지되었습니다!
돌연 긴급대피를 알리는 재난문자가 날아왔다.
“8등급의 마력 파동? 이건 뭘 의미하나요?”
“…인근에 던전 게이트가 생성된 것 같습니다. 8등급이라면 크게 우려할 수준까진 아니군요.”
정서희의 설명에 의하면, 예의주시해야 하는 건 최소한 6등급 이상이었다.
“던전 게이트라. 제법 구미가 당기네요.”
잠시 멈춰 선 전요한이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은 곳이라면 한번 구경해봐도 괜찮겠다 싶었다.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내부로 먼저 들어가진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요.”
“걱정 마세요. 웬만하면 안 나설 테니까.”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인파가 도망치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임시로 대여받은 전투장비를 소환해봤다.
“막 쓰기엔 나쁘지 않네.”
대미궁에서 얻었던 것들에 비하면 티끌만큼의 값어치도 없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래도록 사용할 장비들은 앞으로 하나씩 구하면 그만이다.
뉴비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하던 때였다.
“꺄아아악!”
돌연, 한 여성의 비명이 전요한의 귓전을 때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흉측한 모습을 지닌 존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대미궁에서 수도 없이 해치웠던 몬스터의 한 종류.
던전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모양인데, 내버려 두면 상당한 혼란이 일어날 터였다.
“도, 도와주세요! 헌터님!”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전요한의 곁으로 여성이 달려왔다.
오피스룩의 그녀는 대답조차 듣지 않고 재빨리 등 뒤에 숨었다.
“아아, 또 눈에 띄는 행동을 해야 하나.”
주위에 평범한 이들이 대부분인 걸 확인한 전요한은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됐건,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자신도 위험해진다.
스르르르.
옆구리의 검집에 손을 뻗자, 주위의 미세입자가 이에 반응하듯 모여들었다.
잠시 후, 서슬 퍼런 섬광이 몬스터의 흉부를 강타했다.
치이익―
치명상을 입은 마물의 형상이 점차 허공으로 스러져갔다.
그 광경을 본 행인들이 잠시나마 긴장을 풀며 안도했다.
“후우, 마침 헌터가 있어서 다행이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구경하지 말고 어서 도망치자. 또 이런 상황에 휘말리기 전에.”
다들 몬스터의 존재 자체에 대해선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이미 익숙해진 대상이란 의미.
전요한이 기억하고 있던 지구와는 많이 달랐다.
도움을 받은 여인이 주위의 인파 속으로 사라지자, 옆에 있던 정서희가 다가왔다.
“다친 데는 없으세요?”
“네, 생각보다 성급이 낮은 몬스터였어요.”
“무슨 말이세요? 방금 그 녀석은 재버워키라고 불리는 3성 마수종인데.”
재버워키는 2성 헌터들이 여럿이서 달라붙어야 상대가능한 마계의 존재였다.
그런 골칫거리를 단 일격에 베어 넘기고 아무렇지 않아 하는 전요한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들었어? 아무래도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랭커인가 본데?”
“혹시 퍼스트 클래스인가?”
“도망치지 말고 잠시 지켜볼까? 이런 구경거리는 흔치 않은데.”
현장에 실력자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해서인지, 일부 무리는 자리를 지켰다.
본의 아니게 관심을 받게 된 전요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대미궁의 난이도가 훨씬 높은 편이라는 걸 잊고 있었군.’
거기에서 무를 썰 듯이 베어 넘기고 다닌 몬스터들이 처치 곤란한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종합 능력치가 낮은 척하는 중이었으므로 잘못하면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재버워키를 손쉽게 해치울 수 있었던 비결이라도 있나요? 대미궁에서 상당한 노하우를 쌓으신 듯한데.”
예상대로 정서희가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히든 스탯에 대해 알지 못했던 그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공략법이 존재하리라 믿고 있었다.
“뭐, 나름의 상대법이 있긴 한데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영업 비밀이니 쉽게는 안 알려주겠단 거죠? 치사해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서 삐친 정서희가 혀를 내밀었다.
그때, 어딘가로부터 다급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조금 전에 생성된 게이트가 조금 이상해!”
“더 지체하지 말고 피하자! 이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분명 낮은 등급이라고 들었는데 예상외로 상당한 파장이 일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유형의 던전 게이트가 아닌 모양이네요. 이대로 물러서는 편이 좋아 보여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정서희가 옷깃을 잡아당겼다.
“괜찮지 않을까요? 8등급의 마력파동이었다면서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전한 장소로 피신….”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서희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스멀거리던 게이트로부터 붉은 섬광이 한차례 발산된 직후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정서희의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져 있다.
“으….”
다급함 역시 어디론가 없어지고 발길이 돌연 게이트를 향하기 시작한다.
그녀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상당수가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뭐지? 단체로 최면이 걸린 모습이네.”
조금 전에 발산되었던 붉은 섬광의 여파인 것인가?
이대로 내버려 둬선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상부로부터 파견된 요원인 정서희마저도 현혹될 정도면 사태의 심각성이 위중하다.
“뭐, 이렇게 된 이상 공략을 시도해 봐야겠네.”
정부기관으로부터 헌터증도 발급받았겠다, 안 될 건 없어 보였다.
직접 나서야겠다 결심한 전요한은 걸음을 옮겼다.
* * *
까악. 까악.
까마귀가 우는 소리였다.
스르르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에 메마른 불모지가 들어왔다.
앙상한 회갈색 나무와 짙은 안개로 가득한 공간이다.
“…꽤나 음산하네.”
주위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다.
정황을 고려하면 아마도 대다수가 평범한 부류일 것이다.
고개를 드니 저 너머에 쇠창살로 된 높다란 울타리가 있는 게 보인다.
“누군지는 몰라도 무대 하나는 확실히 만들어 놓았군.”
불쾌한 마기가 끈적하게 몸에 달라붙는 걸 느끼며 전요한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곳은 악마의 둥지.
덫에 걸린 사람들을 가둬두고 제멋대로 죽이기 위한 유희 공간이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무언가에 홀렸던 것 같아….”
정신을 차린 일부 사람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당혹감을 표시했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귀족풍의 금발 사내가 나타나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여러분. 제 이름은 앨런 테일러. 남작의 위계에 해당하는 귀족입니다.”
앨런은 모두를 한번 스윽 훑어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험상궂게 생긴 폭주족 한 명이 앞으로 나와 힐난하듯 손가락질을 해댔다.
“어이, 이봐! 네가 우릴 여기로 끌고 온 장본인이야?”
“아닙니다. 저는 단지 존귀하신 주인님의 명령에 따르는 미천한 하수인일 뿐. 여러분을 직접 초대할 권한은 없지요.”
“그럼 지금 당장 돌아가서 그 잘난 주인님 좀 데려와! 너 같은 따까리한텐 볼일 없으니까!”
폭주족은 고압적인 말투와 자세로 위협하며 앨런을 도발했다.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앨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안타깝게도 저의 주인님은 당신 같이 저급한 존재와 대화하는 걸 매우 싫어하십니다.”
“뭐? 이 녀석이 좋게 말해주니까 처돌았나!”
흥분한 폭주족이 주먹을 불끈 쥐고 앨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앨런은 싱겁다는 표정으로 그 공격을 피해낸 후 곧바로 폭주족의 명치에 발길질을 했다.
퍽―!
“커헉…!”
“네 주제를 알아라. 여긴 너 같은 벌레가 날뛰어도 좋은 곳이 아니다.”
앨런의 돌변한 말투에 주위가 급조용해졌다.
덕분에 여차하면 가세하려던 이들도 꼬리를 내리고 슬그머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자식…!”
“또 덤빌 생각이냐?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기어오르면 더는 봐주지 않고 즉결 처형하겠다.”
앨런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폭주족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살의 충만한 그 눈빛에도 폭주족은 소리를 지르며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크아아아아아아!”
많은 이들 앞에서 공개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와 분노가 폭주족의 이성을 마비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폭주족은 본의 아니게 일벌백계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푸욱!
일순간 사라졌던 앨런이 배후에서 나타나 한 손으로 폭주족의 흉부를 꿰뚫었다.
이후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심장을 본 사람들이 경악한 반응을 내비쳤다.
“미, 미친!”
“꺄아아아악!”
심장은 꿈틀대며 아직 기능을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앨런이 그것을 쥐어짜자 분수처럼 사방으로 혈액이 흩뿌려졌다.
촤아아아아아아―!
살인을 저지를 때의 앨런은 너무도 즐거워 보였다.
그가 피의 향연을 만끽하는 모습에 전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봐, 너.”
“아아, 당신도 뭔가 할 말이 있으신가요? 죄송하지만 좀 더 만끽할 시간을….”
스걱!
서슬 퍼런 검광이 심장을 들고 있던 앨런의 팔을 순식간에 절단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