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21/25)

아이의 얼굴에 짧은 웃음이 활짝 피었다.

“아이고, 웃었어요? 봤느냐. 공주께서 웃었다.”

정군왕이 이 상황을 전혀 염려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주를 몇 번 웃게 하는가인 것 같았다. 정군왕의 설득에 넘어갔는지, 황제와 윤제 역시 그럴 수 있지 라는 얼굴이 되어 갔다.

“고태의는 물러가고, 여의는 안으로 들라.”

용아가 저들끼리 동질감을 주고받는 황족 일동을 흘겨보며 말했다.

“물러가옵니다.”

“예, 비전하.”

고태의는 예를 올리고 물러가고, 여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었다. 황제가 손을 내저어 예를 물렸기에 여의원은 깊이 몸을 낮춘 채 하문이 있기만을 기다렸다.

“홍문의 일족 중 백화가 진족의 힘을 가진 경우가 있는가.”

용아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사서에 따르면, 딱 한 분이지만 계시옵니다.”

“그가 누군가……?”

“그분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었으나 백화가 틀림없사옵니다. 황가가 아직 왕가일 때에, 헌원씨의 가주 중 한분입니다. 사서에 따르면 모두 그분이 진족의 힘을 가졌기에, 진족 정인을 들여 가주의 후사를 걱정하였는데, 후에 출산을 하여 후사를 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용아의 얼굴이 잠시 캄캄해졌다가 돌아왔다.

“……헌원씨…… 백화가 진족의 힘을 가져도, 백화가 가지는 것 또한 전부 가지고 있는가.”

“물론이옵니다. 아기씨는 건강하시옵니다. 다만…….”

“다만?”

“헌원씨는 비전하께서 아시는 대로 헌원씨 일족의 시조인 헌원량을 받들어 같은 항렬 중 가장 강한 이를 다음대 가주로 삼지요. 황족의 힘을 이어받은 공주마마께서 당연히 강력한 힘을 가지셨을 것이고, 헌원씨 가주 중 한분의 선례와 같은 특징을 보이니…… 혹여 있을지 모를 분란을 방비하시기 위해 공주께서 백화이며 진족의 힘을 가진 것을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지 않을는지요. 공주께서 힘을 보이시면 결국 모두가 알게 될 것이나, 감히 헌원씨가 일가 가주로 공주마마를 청하지는 못하겠지만, 일부러 알릴 필요는 없지 않나 하옵니다.”

“그대의 고견을 숙고해 보겠네. 물러가 보게.”

“물러가옵니다.”

여의원이 깊이 예를 올리고 물러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용아가 황제를 불렀다.

“부황.”

“얼굴이 어찌 그러하냐.”

용아가 몸을 일으켜 침상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모두 소자의 불충이옵니다.”

황제가 화들짝 놀라며 죄를 청하는 용아를 일으켰다.

“용아, 어서 일어나라. 무엇이 불충이란 말이냐.”

침상에 강제로 앉혀진 용아가 울 것처럼 뺨을 씰룩였다.

“소자의 백화 아버지가…… 헌원…… 씨이옵니다.”

“그것이 어째서 너의 불충이냐. 가깝게는 새아가의 부친이 헌원씨지만, 황가로 혼인 온 헌원씨도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공주가 튼튼하니 좋은 것 아니겠니?”

“정말요……?”

용아가 갑자기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왜, 왜 우느냐.”

“그래. 왜, 왜 우시오.”

황제와 정군왕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윤제가 우는 용아의 어깨를 감싸고 다독여 주었다. 쉴 새 없이 놀아 주던 정군왕과 황제가 우는 용아에게 정신이 팔려 있어, 볼거리가 없어진 아이는 조용히 눈만 슴벅이고 있었다.

“저는 아이가 잘못되었을까 봐…….”

용아가 울며 웅얼댔다.

“공주께서 튼튼하니 좋은 것이라니까요.”

“그럼.”

정군왕의 말에 황제가 격하게 동의했다.

“우리가 안일했던 거지. 황족 전부가 태동을 느꼈는데. 아이가 황족의 힘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니. 태동만큼 확실한 게 있나.”

“그렇구나. 이 아비가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다.”

황제는 윤제의 말에도 열렬히 동의했다.

“……여의원한테 감시자를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대가주께 보고가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결국 알려지겠지만 일찍부터 알릴 필요는 없지요.”

울던 용아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하후가로 향하는 모든 인편에 감시자를 붙여 두었소.”

정군왕이 염려 말라는 듯 말했다. 용아는 정군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덜 멈춘 눈물을 조금 훌쩍이다가, 세 황족 사내의 조마조마한 시선과 한 아이의 물끄럼한 시선을 받으며 겨우 울음을 그쳤다. 말간 얼굴이 된 용아가 저를 보고 있는 어린 얼굴을 보고 입을 열었다.

“하온데.”

황제가 곧바로 답했다.

“왜 그러냐. 무엇이 더 필요할까? 공주가 진족의 힘을 가지는 걸 아는 자들을 전부…….”

황제가 과격한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정군왕과 윤제가 조용하고 미세하게 도리질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티 없이 말간 눈이 황제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공주가 진족의 힘을 가졌으면 앞으로 소자가 계속…… 혹여 소자가 깜빡 졸기라도 하면…….”

용아의 얼굴이 공포로 다시 캄캄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황제가 엄격한 표정으로 용아의 걱정을 떨쳐 냈다.

“하오나, 혹 아이가 갑자기 진족의 힘을 보이면 아무도 공주 곁에 갈 수 없지 않습니까. 진족의 힘도 세다고 하니…….”

용아의 겁먹은 얼굴을 본 황제가 넉넉한 웃음을 퍼트렸다. 등을 쓸어 주는 손에 인자함이 가득했다. 황제의 느긋한 태도에 용아가 의아한 표정을 건넸다.

“무어가 너 혼자야. 이 중경에 진족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이가 한둘이냐. 봐라, 여기만 해도 짐도 있고, 태자도 있고, 정군왕도 있지 않느냐. 중경에는 공주를 돌볼 수 있는 후보군이 아주 많으니 그런 걱정 말아라. 알겠느냐. 일전에 말한 행궁에 피접 가는 것도 꼭 일정대로 가도록 해라. 황명이니라.”

황제가 너른 웃음으로 용아를 독려 하였다.

“예…….”

용아는 무언가 큰 배신을 당한 듯한 정군왕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피면서도 순종적으로 답했다. 황명이었다. 거스를 수 없는 명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기도 했다. 중경에는 진족의 힘을 감당할 이가 꽤 있었다. 용아가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몸짓으로 정군왕의 품에 있는 윤조에게 손을 뻗었다.

“꺄아!”

용아의 품으로 파고들며 아이가 힘껏 황족의 힘을 퍼트렸다. 황제의 배신 아닌 배신에 굳어 있던 정군왕이 아이의 힘에 흠칫 놀랐다가 거친 웃음을 터트렸다.

“폐하. 소제는 진양군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공주의 아비와도 제법 닮아서 적격이 아니겠습니까.”

웃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 주며 정군왕이 은근히 말했다.

“좋은 것 같구나. 용아는 어떠하냐.”

“진공자 형님이 아이를 안으면 아이들이 전부 우는데요. 공주가 진공자 형님을 좋아할까요.”

“처음부터 어떻게 다 좋겠느냐. 하나둘 맞추어 가는 거지.”

방 안에 따듯하고 온화한 웃음이 넘쳐흘렀다. 용아의 품에서, 황제의 품으로, 정군왕의 품으로, 윤제의 품으로 옮겨 간 아이가 마아! 알 수 없는 소리를 퍼트리며 까르르 웃을 때마다 더 큰 웃음이 번졌다.

용아의 걱정은 거대했다. 용아 자신이 생각해도 과한 데가 있었다. 그것을 다 알고 동의하면서도, 용아는 해가 떠 있는 동안 내내 윤조의 곁을 지켰다. 해가 진 후에는 내내 윤제가 아이의 곁을 지켰다.

둘 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살이 쑥쑥 빠져 말라 갔다.

지켜본 결과, 공주는 유모들과 있을 때 황족의 힘을 표출하지 않았다. 유모들만 있는 곳에 태감이 들어도 역시 힘을 표출하지 않았다. 윤제만 있을 때 태감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용아와만 있을 때 태감이 아뢰면 역시 오는 것을 싫어했다. 윤제와 용아, 아이 셋이 있을 때 태감이 들면 또한 싫어했다.

아이는 황족의 힘을 기분이 좋지 않을 때와 기분이 좋을 때 모두 표출했다. 용아는 기분이 좋을 때 황족의 힘을 쓰는 공주를 무척 곤란해 했다. 윤제는 자연히 스스로 다스리게 될 거라고 무성의하게 말했다.

공주는 진족이며 백화이기에, 튼튼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해가 뜨면 교헌재로 가 놀았다. 황명이었다. 황제는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지는 용아를 보며 태자와 태의를 닦달했다.

용아는 교헌재로 온 군왕부의 황족 공자들이 윤조를 돌봐 줄 때만 잠시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전혀 정제되지 않은 황족의 힘을 부리는 공주를 황친들을 너 나 할 것 없이 기꺼워했다.

그것 봐라. 저희가 태동을 느꼈다 하지 않았냐.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 철없이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예상대로 진양군의 품에서 공주는 곧장 울음을 터트렸다. 진양군이 보이지 않는 땀을 뻘뻘 흘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진양군은 아이와 놀아 주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이도 진양군 품에 안기는 것 외에는 진양군을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진양군, 소양군, 영양군, 함양군, 각 왕부을 이어받을 황족들이 공주의 웃음 한 번을 위해 애교를 떨어 댔다. 종친회 원로들 또한 체면을 전부 내려놓고 공주의 앞에서 황제 못지않은 혀 짧은 소리를 시전했다.

그를 볼 때마다 당혹스럽고 웃음이 났다. 너무나 호화롭고 사치한 보모 군단에 끙 앓는 소리가 저절로 흘렀다.

아이는 황족의 힘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역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용아와 윤제였다. 그래서 둘은 황친들 덕에 여유가 생겼음에도 날이 갈수록 말라 갔다.

결국 황명이 내려졌다.

태자와 태자비를 만량궁으로 가 달포간 돌아오지 말라는 명이었다. 달포는 너무 길었다. 윤제와 용아가 간곡히 청하여 달포를 보름으로 줄였지만, 보름도 너무 길었다.

이 시기 아이는 하루가 달랐다.

공주가 더 큰 후에 명을 내려 주십사 다시 청하였으나, 황제는 아무리 편히 아이는 잊고 하루쯤 쉬라 해도 가까이 있으면 어느새 공주를 돌보느라 태자도 태자비도 긴장을 놓을 틈이 없으니 불허한다 하셨다.

아이가 부모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 하면서도 황족으로 태어났으면 양친의 돌봄 없이 크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하셨다. 이왕지사 공주와 떨어지게 되었으니 아이는 잠시 황제와 황친들에게 맡기고 편히 쉬다 올 것을 명받았다.

그렇게 용아와 윤제는 황궁에서 쫓겨났다.

요즘 진양군 류윤환의 하루하루는 곤혹스럽고 행복했다.

일찍이 입궁하라는 황명이 내렸다. 태자와 태자비가 쫓겨난 직후였다. 황제께서 태자와 태자비께 할 당부나 명을 잊으셨나 생각하였다.

어전태감은 입궐한 진양군을 정수궁으로 데리고 갔다.

정수궁 안에서 간지러운 아이 웃음이 번졌다. 진양군은 달리는 말에서 또 다른 달리는 말로 옮겨갈 수 있는 사내였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인사이기도 했다. 아이의 부드러운 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뒷등이 긴장으로 솟은 땀에 축축하게 젖어 갔다.

안으로 들라는 명이 내렸다.

황제께서 공주를 돌보고 있고, 명을 내리려 자신을 잠시 불러들이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진양군이 안으로 들 때, 황제는 요람에 누운 공주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윤조야. 환 숙부가 왔어요. 숙부, 오셨습니까. 해 보세요.”

공주께 말을 속삭이는 황제는 몇 번을 보아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진양군은 황제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담담히 제 할 말을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가 진양군을 돌아봤다. 넉넉한 웃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진양군을 향해 황제가 말했다.

“환아.”

“명하소서.”

진양군이 반듯하게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거라.”

“예, 폐하.”

진양군은 적당한 거리까지 황제께 다가갔다.

“더 가까이 오라.”

진양군은 공주의 눈치를 보며 가까이 가기를 주저했다. 황제가 손짓으로 진양군을 채근했다. 황명이었다. 진양군은 울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황제의 바로 곁에 섰다.

“명하소서.”

“공주와 놀고 있거라. 잘됐지. 할 일도 없잖느냐. 우리 공주 관심을 다 환 숙부가 차지하셨어요.”

황제가 명을 내리고 힁하니 가려 했다.

“폐하. 소질이 안아 주면 공주께서 우십니다.”

“괜찮다. 애들이 울기도 하고 그런 게지. 놀고 있거라.”

황제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가 버렸다.

“……잠……”

진양군이 황제를 따라가 무어라 더 하려 했지만 나서려는 그의 등 뒤에서 우옹! 아기 소리가 울렸다. 마치 그를 붙잡는 듯한 외침이었다.

“…….”

그러나 진양군이 돌아보자, 말간 시선만 건네졌다.

“…….”

지독하게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한 살도 채 되지 못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 진양군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어색함에 굳어 있던 남자는 쭈뼛쭈뼛한 움직임으로 요람 곁으로 가 앉았다.

“마!”

다가온 진양군을 향해 말을 걸 듯 아이가 작게 소리쳤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혼자 팔을 휘저으며 노는 아이를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긴 침묵 끝에 진양군이 뻣뻣한 음성으로 물었다.

“숙, 숙부가 안아드릴까요…….”

아이는 답하지 않았다.

“…….”

진양군은 제게 관심 없는 조그만 얼굴이 야속했다. 그는 홀로 노는 아이를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태도로 경건히 지켜보다가 결심을 다지고 다시 권하였다.

“숙부가 안아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고 요람 안으로 손을 넣어 혼자 버둥거리며 노는 아이를 안아 올렸다. 교헌재에서 몇 번 안아 본 덕에 아주 낯설지는 않았지만, 말도 안 되게 조그만 몸을 품 안에 안을 때마다 혹여 해를 끼칠까 긴장되어 숨도 쉬기 어려운 것은 여전했다.

뻣뻣한 품 안에서 허우적거리던 윤조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자그마하게 시작된 울음은 전각이 다 떠나갈 듯 거대해졌다. 우는 아이를 안고 다독이며 진양군은 숙부가 다 잘못하였다, 애원하며 빌고 또 빌었다.

깊은 밤이었다.

“우아앙!”

이각 마다 한 번씩 칭얼대는 윤조를 안아서 얼러야 했다. 잠깐 잠이든 진양군은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 우는 아이를 안아 올렸지만 이미 늦었다. 울음은 커질 대로 커져 며칠간 부지런히 노력해 친해진 것도 소용이 없었다.

방의 문이 소리도 없이 휙 하니 열렸다.

황제가 납시었다.

“윤조가 깨었느냐.”

지지난밤까진 아이가 울고, 황제가 납시면 진양군은 정신이 없었다.

“송구합니다.”

진양군은 지지난밤과 마찬가지로 우는 아이를 어르며 보이지 않는 진땀을 뻘뻘 흘렸지만, 곁으로 오는 황제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황제 아닌 고황제가 온다고 해도 신경도 쓰지 않을 터였다.

“잘 좀 해 보거라, 환아.”

황제가 성격 사나운 아비처럼 투덜대었다.

“소질이 부족하여 송구하옵니다.”

진양군은 입으로는 황제의 말에 충실히 대꾸하면서 눈길은 얼굴 전체가 빨갛게 되도록 힘껏 우는 아이에게만 쏟았다.

“윤아인 척해 보래도.”

“소질이 태자 전하가 아닌데 어떻게 전하인 척합니까. 폐하께서 그만 들어가 주무십시오.”

진양군이 울음을 그치지 않는 윤조를 애타는 얼굴로 달래며 황제를 타박했다. 황제가 둥그렇게 눈을 뜨며 진양군을 바라봤다. 그 얼굴이 우는 윤조와 아주 꼭 닮아 더욱 얄밉고 짜증스러웠다.

“환아, 너. 지금 짐에게 화내는 것이냐……?”

황제가 짐짓 상처 입은 체하였다.

“그럴 리 있사옵니까. 오해이십니다. 할 일 없이 한가한 소질은 공주와 화목한 시간을 보내고 싶사오니, 내일 정무로 바쁘실 폐하께오서는 그만 건너가 쉬시옵소서.”

말을 하는 목소리는 정중하기만 했다. 예의 바른 목소리가 내뱉는 말은 뾰로통하기까지 했다.

“환아가 이 숙부에게 서운 것이 있느냐.”

“없사옵니다. 하나도 없사옵니다. 조금도 없사옵니다. 그저 소질은 폐하께오서 쉬시기를 바라는 것뿐이옵니다. 진정이옵니다.”

진양군이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흐응. 내 너를 불러다 밤마다 고생시켜 섭섭한 게지. 그렇지?”

“아니옵니다!”

황제의 말에 진양군이 다시 부정했다.

“짐이 다 아느니.”

“아니옵니다.”

여기서 솔직히 밤마다 아이 보는 것이 쉽지는 않다 고하면, 지난밤들 내내 들었던 황제의 눈물겨운 기나긴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황가는 쓸쓸해, 혹여 용아가 잘못될까 짐은 항상 두려움을 갖고 있다, 어려움을 한 사람에게만 지게 할 수 없으니 우리 너그러운 조카의 도움을 간절히 바란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고, 이해가 되어 더 짜증스러운 말들이었다. 천자의 불쌍한 척이라니 당할 때마다 황망했다.

“환아.”

애달픔 가득한 저음이 진양군을 불렀다.

“소질은 모두 괜찮사옵니다.”

진양군은 아이가 울 때면 속이 타고 야속하기도 했지만 공주의 곁을 지키는 것이 좋았다. 혹자는 바보 같다 놀릴지도 모르지만, 그는 기껍기만 했다.

아이가 그를 보고 이유 없이 까르르 웃어 줄 때면 이런 게 삶의 기쁨이지 싶기까지 했다. 스스로 중증이다 싶을 정도였지만 상관 않았다.

진양군의 거듭된 말에 황제가 못 이기는 척 목을 울리며 말했다.

“그럼, 고생하여 다오.”

“쉬소서.”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인사가 건네어졌다.

“녀석…….”

황제는 입 뗄 기회도 안 주는 야속한 얼굴을 돌아보고 잠시 삐죽거리고는 자리를 떴다.

공주와 자신, 둘만 남은 것을 확인한 진양군이 곁을 스윽 살피고는 잔울음을 퍼트리는 아이의 등을 다독이다가 휘익, 아이를 안은 채 빠르게 제자리에서 휘돌았다. 울던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고 놀란 얼굴로 진양군을 바라봤다.

“놀랐어?”

윤제가 은밀히 알려 주고 간 필살기였다.

“마아!”

언제 울었냐는 듯 작은 얼굴이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의 웃음을 보고서야 진양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웃는 얼굴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진양군이 나지막하게 고백했다.

“우리 윤조 아비들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기다란 손가락이 어린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을 조심스레 훔쳤다.

“우옹!”

아이가 다시 소리를 퍼트리며 웃었다.

“숙부 집에 가서 살래, 윤조야?”

“우옹!”

“그렇게 하겠다고? 숙부 집이 여기보다 조금 안 좋다만, 쓸 만하다. 언제 숙부 집에 갈까, 내일 갈까? 아니면, 지금 갈까?”

말귀를 알아들을 리 만무하고, 대답을 할 수 없는 아이를 상대로 진양군이 부지런히 제의했다.

그는 쉴 새 없이 조그만 등을 다독이며 ‘그럴게요, 숙부.’ 라는 하답이 울리기를 간절히 바라였다. 대답 대신 잠든 아이가 퍼트리는 쌔근쌔근한 숨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채웠다.

고단하고 행복한 밤이다.

만량 행궁은 바다를 품고 있었다. 후전 깊은 곳까지 문을 닫아 두어도 파도 소리가 밀려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물의 일렁임은 척박한 땅에서 태어난 용아에게 감당 못 할 감정을 퍼부었다.

쏴아아.

귓가를 풍요롭게 채우는 파도소리 위로 정연한 말발굽 소리가 내렸다.

땅이 울리는 강렬한 진동 후에 행궁 앞에 아름다운 준마가 멈추었다. 살구빛 모에 윤기가 흐르는 산융마 뒤로 준수한 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태자의 보필하는 기병 방호대였다.

선두에서 윤제와 함께 달린 언준이 말에서 내리며 태자가 돌아왔음을 알리려 했다. 햇살을 받으면 금빛을 퍼트리고, 평소에는 옅은 분홍빛 얼굴을 가진 홍안에게서 내려선 윤제가 손을 저어 예를 물렸다.

그보다 빠르게 언준이 행궁 문 앞에 다가섰고, 무관의 외침이 있기 전에 문이 열리며 등우가 잔걸음으로 뛰어나왔다.

“전하, 오셨사옵니까.”

등우의 시중을 받으며 윤제가 언준을 향해 말했다.

“모두 그만 들어가도 좋다. 고생했다. 내일은 따로 부르는 귀찮은 짓 하지 않으마.”

태자의 웃음 어린 말에 무관들이 일제히 예를 올렸다.

“명을 따르옵니다.”

“명을 따르옵니다.”

단단한 외침을 뒤로하고 윤제가 안으로 향했다. 태자의 말고삐를 받아 쥔 소환과 언준을 비롯한 무관들은 태자가 문 안으로 다 들 때까지 기다렸다.

윤제의 곁에 딱 달라붙다시피 해 걸으며 등우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기승은 어떠셨습니까.”

윤제가 무심히 답하며 안에 있을 이를 찾으려 했다.

“그럭저럭.”

황명에 의해 태자와 태자비는 만량궁으로 쫓겨나듯 보내졌다. 황궁을 나선 직후에는 갓난쟁이 걱정, 잠시 떨어지는 사이 자신들을 잊지는 않을까 걱정, 황족의 힘은 어찌하나 하는 걱정, 윤제와 용아는 끊임없는 걱정의 말을 주고받았다.

말로 걱정을 너무 해서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둘은 행궁으로 가는 여정 중 첫날은 걱정 이후에 꼬박 앓았다.

용아는 특히 심해서 이튿날까지도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여의는 특정한 곳이 아픈 것은 아니니 잘 먹고, 좋은 생각을 하심이 좋다 권했다. 행궁이 더 가까운 지점에서도 용아는 궁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 그리 섭섭하신가 모장이 달래 주자, 용아가 엉엉 울었다. 모두는 안쓰럽지만, 함께 슬퍼하지 않아도 좋을 모습에 우는 이를 번갈아 가며 위로했다.

이튿날까지도 우울한 얼굴에 모장이 드물게 엄히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공주께서 어여쁘고 어린아이이니 보살핌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긴 임신과 출산 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몇 날 며칠을 꼬박 갓난쟁이 곁에 붙어 눈길 한번 떼지 못한 용아 역시 쉬어야 앞으로 더 오랜 시간 공주를 돌봐줄 수 있다는 꾸짖음이었다.

태자비에게 엄중하게 떠든 모장은 그녀에게 공주도 중하지만, 열두 살 어릴 때부터 지켜봐 온 용아 역시 중요하다 화를 내며 울었다.

황궁에 능란한 유모가 여덟인데 첫아이를 낳은 비전하가 그들보다 더 잘하겠는가, 냉엄한 툴툴거림도 이어졌다. 황친들과 유모들이 어련히 잘할 것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기만 한다고 따끔하게 혼이 났다.

그 뒤로 용아도 윤제도 아이 걱정은 잠시 미루고 기력을 차리는 데 힘썼다.

용아는 행궁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말을 청해 오랜만에 흠뻑 달렸다.

모두를 뒤에 떨구고 저만치 앞으로 달려갔다. 이전에 몇 차례 태자비에게 기승으로 따돌림 당한 전력이 있는 무관들은 그러려니 했고, 금당대 궁인들은 오랜만에 봐도 놀랍다 했고, 영화대 궁인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순식간에 멀어져 점이 되어 버린 태자비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윤제는 특히 놀란 얼굴을 한 모장을 각별히 위로하고, 무관들에게 어서 간격을 좁히라고 채근했다. 그렇게 모두를 따돌리고 신나게 달린 탓인지 용아는 행궁에 온 후로 기승하러 나서는 태자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느긋하게 앉아 있거나, 파도 소리를 듣고 있는 걸 좋아했다.

“윤제 형!”

후전으로 가는 회랑에서 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용아였다. 웃음 가득한 얼굴을 향해 마주 웃어 보인 윤제가 곁에 붙어선 등우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

태자의 시선을 받은 등우가 쾌속하게 시선을 깊이 내렸다.

“다녀왔다.”

윤제는 웃고 있는 얼굴 곁으로 가 돌아왔음을 알렸다. 커다란 손이 기분 좋은 웃음을 쉼 없이 퍼트리는 얼굴에 겹쳐졌다.

“기승은 어떠셨습니까. 홍안은 좀 컸습니까.”

속삭이는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안 알려 줄 거다. 같이 가자니까.”

윤제가 웃는 용아에게 성실히 답하며 곁눈으로 등우를 무섭게 노려봤다. 등우는 모르는 척 두어 걸음 물러났다. 등우의 탓이 아니었다. 그것을 주장하듯 등우는 저만치 먼 곳에 허옇게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모장과 영화대 궁인들을 힐끗힐끗 바라봤다.

“여기 있는 게 좋습니다. 파도 소리예요, 윤제 형.”

용아가 웃고 있었다. 꼬박꼬박 기분 좋은 울림으로 윤제 형을 불러 주었다. 부쩍 사이가 좋아지기는 했으나 이토록 웃음이 너그러운 용아는 드물었다.

“용아.”

“예, 윤제 형.”

윤제가 자연스레 용아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걸었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타인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꼬박꼬박 답하는 얼굴에 산뜻한 웃음이 넘쳐흘렀다.

“너. 술 마셨느냐?”

술을 마신 용아는 무척 관대했다. 특히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평소의 심드렁하기까지 한 무표정과 달리, 웃는 얼굴은 달콤하고 말랑한 분위기를 퍼트렸다. 몽글몽글했다. 웃는 얼굴은 놀랍게도 사리분별은 비교적 정확하게 했고, 말도 조리 있고 분명하게 했다. 그저 웃음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만 달랐다.

용아는 곤란한 질문에 웃음을 한가득 퍼트리며 커다란 손을 붙들고 흔들었다. 어서 들어가자는 뜻 같았다.

헤헤.

다른 이가 그리 웃으면 가볍다 책했을 텐데, 평소와 느낌이 확 다른 얼굴이 뜻 없이 웃을 때면 머리를 쓸어 주고만 싶었다. 술기운으로 발긋해진 뺨으로 제멋대로 손이 갔다.

용아의 손에 이끌려 방 안에 든 윤제는 사방에서 풍기는 달콤한 술 향기에 표정을 굳혔다. 어지간히 마신 듯했다.

일 년이 넘도록 감시에 가까운 관리하에 가벼운 술 한 잔 하지 못했을 태자비를 위해 기분 전환용 술을 권한 궁인을 탓할 수 없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석 잔이 되고, 한 병이 두 병, 세 병이 된 것이 문제였다. 술 한 잔에 취해 웃음이 너그러운 얼굴이 좋아서 재차 술을 올렸다면 역시 문제였다. 술을 맛보고 웃음 짓는 얼굴이 술을 다시 찾았을 때 찾는 대로 주었다고 해도 또한 문제였다.

윤제의 손은 용아의 손에 붙들린 채였다. 커다란 손이 닿아 있는 손을 깍지를 껴 단단히 얽었다. 깊이 겹쳐진 두 손이 잠시 체온을 나누었다. 은근히 얽힌 손을 만지던 남자의 손이 웃음을 퍼트리는 얼굴을 찬찬히 만졌다.

용아의 웃음이 더 깊어졌다.

커다란 손이 뺨을 쓸고, 귓가를 더듬어 뒷머리로 옮아 갔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용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용아의 웃음이 잦아 든 것은 남자의 손이 겹쳐 입은 겉옷을 벗겨 내리고, 한 손으로 침의의 매듭을 풀며 다른 손으로 엉덩이를 따라 내렸을 때다.

“윤제 형……?”

용아의 부름이 다 울렸을 때 침의가 다 풀어헤쳐졌다. 윤제가 대답 대신 물음을 던졌다.

“너한테 술 준 거 누구냐.”

용아 역시 대답을 피하려 했다. 자신의 대답에 따라 누군가 곤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엉덩이를 뒤덮은 남자의 손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윤곽을 가늠하는 것처럼 만져 내리는 손이 거칠었다.

“아.”

입에서 흐린소리가 토해졌다.

“대답 안 해?”

낮게 속삭여 다그친 남자는 대답 할 틈을 주지 않았다.

곧바로 입술이 겹쳐졌다.

입술을 맞대고, 서로 혀를 내어 얽으며 빠는 음란한 입맞춤은 익숙하면서도 오랜만이라 어색하고 낯설었다. 뭉클한 살덩이가 갈급하고 두서없이 얽히고 바쁘게 빨아 당겼다.

입맞춤을 하는 사이, 얇은 하의가 벗겨 내려가 사라지고 엉덩이 맨살 위를 커다란 손이 정신없이 더듬었다. 엉덩이 골 사이로 겹쳐 든 손가락이 매만지던 좁은 틈 안으로 예고 없이 찔러 들었다.

“음!”

여전히 입술 맞닿은 채였다. 윤제의 입술에 막힌 용아의 입술 너머에서 억눌린 소리가 울렸다. 용아가 놀라 허우적거리는 것을 본 윤제가 마주한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당황한 얼굴 곳곳에 짧은 입맞춤을 내렸다. 얼굴로 입맞춤이 쏟아지는 와중에 안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휘돌았다.

“추워?”

낯선 감각에 소름이 돋는 턱 선을 따라 입을 맞추며 윤제가 물었다. 남자의 저음은 낮고, 걱정을 가득 품고 있었다. 자상한 물음과 다르게 안으로 찔러 든 손가락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긴 손가락은 좁은 안에 깊이 빠르게 파묻혔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단단한 손가락에 밀린 살벽이 열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살벽의 모양을 따라 살짝 구겨지는 것처럼 휘어진 손가락이 빙글빙글 휘돌며 움직였다. 깊이 파묻힌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들어올 때 하나에서 둘로 늘어났다. 압박감이 확 달라졌다.

“아!”

용아의 입에서 무거운 소리가 토해졌다. 윤제가 마주 하고 있던 용아를 돌아서게 했다. 만량궁의 방 안에는 벽마다 아름다운 장이 채워져 있었다. 전각을 지을 때부터 방에 맞는 장을 짜 넣은 것은 것 같았다. 금도금을 한 어린 사슴과 은도금을 한 대나무 숲과 칠보로 꾸민 호화로운 바다가 용아의 시선을 가득 채웠다. 갑작스레 아름다운 벽을 마주하게 된 용아가 다시 돌아서려 했다.

단단한 손에 허리가 붙들렸다.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사슴 위로 커다란 손에 붙들린 용아의 손이 내리눌려졌다. 붙들려 눌리지 않은 손은 뒤로 끌어당겨져 남자의 앞에 겹쳐졌다. 커다랗게 부푼 것에 용아의 손을 겹치고 제 손으로 힘껏 만지게 하며 윤제가 차분히 말했다.

“만져 줄래?”

용아는 술을 잔뜩 마셔 기분이 좋았다. 무엇이든 좋은 상태였다. 그러나 등 뒤의 사내가 하는 행동이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음은 알 수 있었다.

윤제는 용아가 황망한 얼굴로 돌아보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남자는 용아가 제 것을 만지는 것을 만족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제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 빠르게 적셨다. 용아는 남자의 것을 만지며 뭐냐고 소곤거리려 했다.

축축하게 적셔진 기다란 손가락이 좁은 안을 깊이 치받았다. 그저 단순히 파묻는 것뿐이지만 용아에겐 앞으로 고꾸라질 만큼 큰 충격을 주었다.

“으흑.”

좁은 안으로 젖은 손가락이 파묻힐 때마다 살이 비벼지는 습윤한 소리가 울렸다. 단단한 손가락이 살벽을 넓히고자 찔러 들면 용아의 입에서 깊은 숨소리와 낯선 신음이 토해졌다. 윤제가 자꾸만 돌아서려는 용아를 화사한 벽으로 밀어붙였다. 찌걱찌걱 소리가 나도록 젖어 든 안으로 손가락이 빠르게 파묻혔다.

용아는 잠시 숨도 쉬지 못했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뒷덜미를 타고 오르내렸다. 손가락이 파고드는 안이 얼얼했다. 아래가 녹아내리는 이질적인 감각에 용아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정신없이 야한 소리를 흘리는 용아에게 윤제가 엄격하게 말했다.

“술 또 마신 거냐.”

대답해야 할 입술에서 우는 소리만 흘렀다.

“아!”

눈물이 맺힌 눈이 윤제를 돌아봤다. 윤제가 돌려 세운 용아의 모은 발 사이로 다리를 넣어 공간을 확보했다. 남자의 손이 얇은 침의 안에서 흠칫대는 허벅지를 붙잡아 올렸다.

한쪽은 발끝만 선 채로, 다른 쪽은 무릎이 접혀 윤제의 손에 잡힌 모양이 된 용아는 아득한 균형감각에 본능적으로 손에 힘을 줘 화사한 장을 짚었다.

좁은 안을 난폭하게 넓히던 손가락이 한꺼번에 쑥 빠져나자 선득한 감각이 일었다. 뒷머리가 쭈뼛 서는 기묘함 뒤로 단단한 것이 잔뜩 괴롭힘 당한 틈 위에 비벼지는 것이 느껴졌다. 체액이 맺혀 젖은 윗머리가 감각이 집중된 곳에 비벼지자 저절로 허술한 소리가 새어 나갔다.

한계까지 발기한 것을 좁은 틈새에 맞춘 채 윤제가 속삭였다.

“네 안에 넣고 싶다.”

용아는 말할 수 없었다.

“흑!”

용아가 넘어지지 않게 앞을 짚고 있는 손을 붙들어 주고 있던 커다란 손이 아래로 내려가 무방비한 앞을 만져 야하게 울도록 했다. 귀두 끝을 정중히 파묻어 오며 윤제가 말했다.

“넣어도 돼?”

“아!”

남자는 차분하고 정중하지만, 커다란 성기가 주는 뜨겁고 지독한 압박감과 꿈틀대는 성기의 움직임은 전혀 예의 바르지 않았다. 윤제가 파묻어 드는 순간 용아가 비틀대 쿵! 소리가 나도록 아름다운 장에 몸을 기댔다. 부닥치는 것처럼 파묻힌 어깨와 팔꿈치에 번지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커다란 것이 단박에 깊은 안으로 직격했다.

용아의 등이 공포로 굳어 들었다. 삽입 직후 충격으로 캄캄해진 시야와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용아.”

등 뒤에 깊이 와 닿은 남자가 용아를 불렀다.

“아! 아파…….”

오랜만의 삽입은 지독했다. 처음이었을 때보다 더 아파서 제멋대로 울음이 터졌다. 윤제가 울며 비틀대는 용아를 감싸 안아 단단히 버텼다.

울음으로 더 뜨거워진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윤제가 사죄했다.

“형이 미안해, 응?”

그러면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너, 너무 깊…… 아!”

커다란 것이 안을 치받았다.

덜컥.

아름다운 장이 용아의 몸이 가하는 체중 실린 힘을 견디지 못하고 사납게 울었다. 남자의 단단한 몸이 용아를 다시 깊숙이 겹쳐졌다. 용아가 다시 앞으로 떠밀리듯 비틀대며 신음했다.

그때마다 덜컥덜컥, 아름다운 장이 울렸다. 무섭고 부끄러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용아는 당황해서 제 안에 깊이 삽입해 오는 남자를 민망한 얼굴로 돌아봤다.

“너무 좋다.”

“아아!”

“그래도 술 마시는 건 안 돼.”

윤제의 엄격한 말에 용아가 되물으려 했다.

“아, 왜 안…… 아아! 아!”

말은 제대로 된 물음이 되지 못하고 신음과 함께 흩어졌다.

퍽.

폭력적이기까지 한 소리를 퍼트리며 커다란 것이 안으로 찔러 들었다. 깊은 안에 커다란 것이 쿡 찌르자, 살벽이 움칫움칫 울다가 꽉 조여 들었다.

안이 그런 식으로 만져지는 것 또한 오랜만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감각이지만, 오랜만이라 낯설고 어색하고 당황스러워 용아가 허우적댔다.

윤제가 안으로 치받을 때 용아는 세상이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삽입을 이어 가는 동안 때때로 시야가 희뿌옇게 흐려지고 자꾸 눈가로 열이 올랐다. 말도 안 되게 거대하고 낯선 통증과 직접적으로 와 닿는 지독한 쾌감이 용아의 머릿속을 진탕으로 어지럽혔다.

끔찍하도록 아프고 좋았다. 입에서 울음이나 다름없는 신음들이 흘렀다.

기억이 순간순간 잘려 나갔다.

“용아.”

윤제의 부름에 시선을 올렸을 때 용아는 왜인지 서탁에 걸터앉은 남자의 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옮겨 온 게 가물가물 떠오르는 듯도 했다.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커다란 것을 따라 용아는 오르내리는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따금 도망치는 것처럼 뒤로 빼려는 허리로 단단한 팔이 겹쳐 왔다.

“아! 아!”

모든 감각이 이상하도록 선명했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안이 얼얼하게 울리고 눈앞이 순간 사라졌다. 땀에 젖어 반짝여 근육의 윤곽이 또렷한 윤제의 상체에 용아가 희뿌연 것을 토정했다. 사정 후의 탈력감에 용아가 남자의 어깨로 쓰러지려 하자, 윤제가 냉정하게 말했다.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뒤덮으며 앞뒤로 움직이게 했다.

“안 돼.”

다시 세상이 쿵쿵 울렸다. 남자 위에 앉은 용아의 몸이 강한 충격에 쓰러질 것처럼 비틀댔다. 용아가 윤제의 윗몸을 끌어안아 기댔다. 수직으로 찔러 오는 성기가 주는 감각에 남자의 허리에 느슨하게 닿아 있던 무릎이 제멋대로 위로 올라붙었다.

온몸을 울리는 감각에 기억이 몇 토막쯤 잘려 나갔다.

“아.”

윤제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접합부의 결합이 달라졌다. 감각의 기묘한 울림에 용아가 필사적으로 남자의 몸에 매달렸다.

앞으로 걸어간 윤제가 땀에 젖은 등을 아름다운 장에 기대었다. 등에 와 닿는 벽에만 의지한 채 남자의 것과 이어져 있는 것은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커다란 남자의 것이 용아를 찔러 들었다. 깊이, 더 깊이 파묻혔다. 고환까지 전부 쑤셔 넣을 것처럼 거세게 안으로 밀고 들었다. 깊이 파묻은 채 빠르게 움직여대는 삽입에 용아가 다시 울음 같은 신음을 쏟아 냈다.

손으로 호화로운 벽을 짚어 버텨 보려 했지만 그보다 안으로 박아 드는 충격이 훨씬 컸다. 끝에는 윤제에게 체중을 전부 기댄 채 허리 아래만 들썩였다.

용아가 가볍게 허우적댔고, 윤제가 안아 올린 몸을 단단히 안고 뜨거운 것을 쏟았다. 열감으로 젖어 든 얼굴로 작은 입맞춤이 연이어 내렸다. 안이 질척하도록 토해 낸 남자가 그답지 않도록 느릿느릿 움직여 후희를 즐겼다.

애정을 갈구하는 것처럼 입을 맞춰 오는 얼굴을 붙들고 용아가 마주 입을 맞췄다. 잔웃음과 가벼운 헐떡임이 마주한 입술 사이에서 오갔다.

입맞춤을 받고, 입맞춤을 건네던 중에 용아는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암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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