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와 태자, 윤자 돌림을 쓰는 종실들의 일치단결하에 공주의 이름이 결론 지어졌다. 물꼬를 튼 것은 태자였다. 윤제는 쓸쓸한 얼굴로 벌써 공주가 태어난 것도 여러 날이 지났는데 아직 이름을 불러 주지 못하니 안타깝고, 태자비를 볼 면목이 없다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이어 소양군이 종친 어른들의 걱정과 염려는 이해가 되나, 황가에 4대만에 태어난 진민 공주의 특별한 위치와 황족의 기쁨으로 사소한 문제는 넘어 가지 않겠는가 권했다.
종친 모임에 나와 늘상 입을 다물고 있는 진양군도 앞으로 나서 자신은 공주께서 독음이 다른 돌림자를 쓰는 것에 어떤 좋지 않은 감정을 갖지 않으며, 도리어 의미가 남다른 공주께서 같은 뜻의 독음을 쓴다 해도 무방하다 힘을 실어 주었다.
오랜만에 황성으로 돌아온 영양군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한 얼굴로 자신 또한 진양군과 소양군의 뜻과 같다, 진지하게 고했다.
황제의 뜻이 굳건한 것은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다. 태자가 힘을 실어주고, 의견을 보태 줄 젊은 황족들을 규합하는 모양새를 보이자, 종친 원로회도 지금까지와 달리 선선한 태도를 보였다.
공주의 이름을 결론 지은 후, 황제는 윤조를 보러 가겠다 대놓고 싱글벙글하며 걸음을 옮겼다.
공주가 태어난 후부터 쭉 그러했지만 사소한 문제를 해결한 이튿날부터는 더욱더, 황제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그날부터 황제는 툭하면 황친과 대신들에게 으쓱한 얼굴로 떠들었다.
‘너희 짐한테 잘해라.’
황제께 잘못하려는 대신과 황족은 하나도 없었다. 의아해하는 귓가로 나직한 말이 떠돌았다.
‘외척이라.’
황제는 그리 소곤거리며 차를 드셨다. 그때서야 오랜 세월 인연이 없어 잊고 있던 위치가 대신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황가의 사돈이 되는 것.
상석에 앉은 황제의 얼굴은 고요한데 어디에선가 후후후,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직 한참은 머나먼 일을 벌써부터 기대하는 상석의 황제와 치열하게 고민해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대신들을 보며 윤제는 보이지 않게 숨을 내쉬었다.
천자는 천자이기에 세상 전부를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주가 태어난 후로 황제는 세상 전부를 가지고, 다시 한 번 더 세상을 가진 듯했다.
그러한 황제가 유난히 저자세로 대하는 이가 있었다.
“용아야.”
“예, 부황.”
본래 영화대에 아기 방을 꾸미고 보살피려 했던 계획을 은근히 금당대에 꾸릴 것을 권한 후부터 황제는 태자비에게 과하도록 공손히 대했다.
“항상 부족한 게 있거든 짐에게 지체 말고 말하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무어 부족한 것 정말 없느냐. 잘 생각해 보거라.”
“없사옵니다. 부황께서 넘치도록 챙겨 주시는걸요.”
황제가 손을 거칠게 내저으며 말했다.
“한참 멀었지, 넘치도록은 무슨. 황가에 공주가 태어난 것이 무려 4대 만이니라. 짐은 네가 정천궁을 내놓아라 하면 내어 줄 것이다. 영화대 전각을 전부 새로 지어 줄까. 아니면, 함월전 연못 있던 자리를 다시 파는 것은 어떠냐. 정말 바라는 게 없니? 새아가가 엄청나게 장한 일을 해내었으니, 짐은 이 기쁨을 어떤 형태로 보답해 주고 싶구나.”
“황가의 기쁨도 클 테지만, 소자도 공주가 태어나 기쁘옵니다.”
용아가 찻잔을 황제 앞에 놓았다.
“새아가가 그리 말하다니 짐은 감동이구나.”
황제가 눈물이라도 찍어 훔치려는 태세로 말하였다. 용아는 희미하게 웃다가, 웃음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공주를 만나 말할 수 없이 행복하오나,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부황께서는 진족의 힘을 가지셨고, 소자는 진족의 힘과 무관하지요. 그러나 공주는 백화이니 그것이 염려가 되옵니다. 백화로 태어나 불행하거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나, 모든 이가 약점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백화의 어려움이 명확하니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사옵니다.”
“그런 말마라. 짐이 있고, 태자가 있고, 네가 있지 않느냐. 짐은 너무도 기쁘다. 정말 오랜만에 집안에 공주이자, 백화가 태어난 것이다. 강성한 힘을 가진 존재만이 강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진족은 진족의 특별함이 있을 것이고, 백화는 백화의 특별함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짐은 진족만이 우위에 있다 생각지 않는다. 짐이 믿고 의견을 논하는 수많은 대신들은 진족이 아니다. 그들 중 진족 보다 뛰어난 이도 수없이 많다. 황가라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새아가도 보아 알지 않느냐.”
황제가 뜬금없이 가련한 얼굴을 하였다.
“그렇습니까.”
“그래. 황가는 박복하다. 불우한 집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황실과 박복은 아득히 먼 관계였다.
“……황가가 말씀입니까.”
“금번에 공주가 태어나 나아졌으나, 황실은 오랫동안 황량하고, 쓸쓸하고, 삭막하지 않았느냐. 이 집안 자손 없는 박복함을 구구절절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이지. 하, 그러고 보니 지난날 새아가를 굳이 짐이 고집하여 데려온 것이 귀여운 아이를 보고 싶은 욕심도 있어서였지. 혈육이 부족한 살벌한 이 황실에 오순도순 어울리는 가족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황제가 슬피 울 것 같은 얼굴로 하소연했다. 용아는 모호한 불편함 속에서 어정쩡한 웃음만 흘렸다.
한참 떠든 황제가 급히 차를 들이켰다. 차를 들이켠 얼굴이 눈에 띄도록 깜짝 놀라는 척 과장된 표정을 건넸다. 그를 본 용아가 보고 소리 내어 웃음을 흘렸다.
“맛이 괜찮으십니까.”
“정말 좋구나. 윤아 녀석이 틈날 때마다 네게 차를 얻어 마시러 갈 때 짐이 알아보아야 했는데. 저만 좋은 걸 먹고 이 늙고 초라한 애비가 안쓰럽지도 않은지 언질조차 않다니…….”
황제의 가련한 체는 계속되었다.
“부황께서는 여전히 근사하십니다.”
“용아가 아부가 늘었구나. 이제 거짓을 진중하게 내뱉는 것과 위악 떠는 법만 배우면 황궁에 완벽히 적응하였다 하겠다.”
“노력하겠습니다.”
용아의 성실한 답에 황제가 웃음을 흘렸다.
“지켜보겠다. 용아 네가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다면 짐이 알아서 챙겨 주고 싶은데, 어떠하냐.”
“이미 과분할 정도로 받고 있어 충분하나, 무엇이든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나이다.”
“허면, 태자비에게 만량 행궁을 하사하겠다. 태자비는 여유가 날 때 시간을 내어 만량궁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여라. 만량궁은 남방의 해안가를 끼고 있어 풍경이 무척 훌륭하다. 황궁에서 먼 거리에 있지만, 시간을 들여 가는 게 아깝지 않을 것이다. 만량궁에 태자비가 아끼는 술도 보내 둘 터이니, 귀찮지 않으면 갈 때 윤아 녀석도 데려가 주던가 하거라. 단, 공주는 황궁에 두고 가야 한다. 알겠느냐.”
황제의 명에 용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예를 취했다.
“부황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부황께서 소자에게 내려 주시는 마음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망극하옵니다.”
황제가 친히 손을 뻗어 용아를 일으켰다.
“짐은 네가 있어 주는 것만으로 좋구나.”
“황공하옵니다.”
용아의 어깨를 두드려 준 황제가 장난스러운 웃음과 말을 던졌다.
“짐이 또 귀찮게 하러 오겠느니라.”
“기다리겠습니다.”
용아가 몸을 돌려 나가는 이에게 가벼운 예와 말을 건넸다. 황제는 돌아보며 웃음 짓고는 전각을 나섰다. 좌첨이 밖으로 나서는 황제의 곁을 따라붙으며 태자께서 금당대로 오고 있다 고했다. 고새를 참지 못하고 아비 찾으러 온다 투덜대야 할 황제가 말없이 걷기만 했다.
금당대 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윤제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황제를 보고 멈추어 예를 올렸다.
“부황.”
황제가 부러 조금 투덜대는 투로 말했다.
“안 그래도 가던 참이다.”
“모시겠습니다. 표정이 왜 그러시옵니까.”
윤제가 마주 투덜거리지 않고 조용한 말을 건넸다. 황제가 부드럽게 주위를 떨쳤다. 황제의 사람과 태자의 사람, 모두 서서히 멀어져 두 사람만 앞서서 걸어갔다.
“태자비 말이다.”
“예.”
“용아가 태어났을 때 짐만큼 기뻐한 이가 없었을 것이다. 네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으나, 제북 하후가 안에서 대가주의 직을 두고 다툼이 있었다. 일방적인 싸움인지 양자간의 싸움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아이는 진족 부친과 백화 부친 모두를 잃게 되었지. 짐이 억지를 부려서 일찍 어린 태자비를 데려온 것은 어린 심신이 지친 것을 달래 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짐이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애정을 쏟고자 했으나, 짐이 노력한다고 친부친만 하며, 친혈육만 했겠느냐. 또한 황제란 허울을 앞세워 사사로운 사랑은 줄 수 없었고,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말없이 강요하였다. 참으로 몹쓸 아비가 아니냐. 짐에게 참으로 소중한 존재이나, 짐은 여전히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새삼 부끄럽고 미안하여서…….”
“소자가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믿는다, 태자. 또한 이 아비를 위한 노력도 잊지 말아다오.”
황제의 위엄 가득한 아첨에 윤제가 표정을 굳혔다.
“방금 태자비에게 새삼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하신 분께서 하실 말씀입니까.”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 아니겠느냐. 어험, 너에게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다. 늦었다, 어서 가자.”
황제가 크게 걸어 성큼성큼 멀어졌다. 윤제 역시 걸음을 빨리했다. 강제로 멀찍하게 떨어져 있어야 했던 태감과 궁녀들이 앞서 가는 이들을 따라 소리 낮춰 내달렸다.
유모모는 스물일곱 이후로 어릴 적 이름을 잊었다. 애기궁인부터 시작한 여인의 운명이 바뀐 것은 황궁에서 군왕부로 나가, 왕부의 인정받지 못한 서자와 일찍 혼인해 머나먼 동쪽으로 떠나면서부터였다.
혼인하여 궁인의 삶이 끝날 줄 알았으나, 국경 수비를 나갔던 지아비가 목숨을 잃고, 혼자된 몸으로 난산 끝에 낳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누구의 도움도 구할 수 없을 때, 함군왕부의 후비가 낳은 현주의 젖어멈을 구한다는 말에 먼 동쪽에서 중경으로 돌아왔다. 무척이나 작게 태어난 현주를 위해 여러 유모를 구하던 군왕부는 이전에는 궁인이었고, 비록 군왕에게 인정받지 못한 서자라 하나 그의 처이며 아이까지 낳은 유모모를 기억하고 신임했다.
기댈 곳 없는 유모모에게 현주를 건강히 장성하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군왕부에 여러 유모가 있었으나, 유모모처럼 밤낮 가리지 않고 정성을 쏟는 이는 드물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현주가 분홍빛 뺨을 가진 건강한 아이가 된 것을 계기로 여러 왕부에서 유모로 찾았다.
한 아이의 유모로 평생을 보내는 이들도 있지만, 왕부에 매인 일꾼이 아닌 유모모는 여러 왕부의 공자와 현주를 보살폈다.
중경 땅 안 왕부 중 유모모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태자비의 회임 소식이 곳곳에 전해졌을 때, 유모모는 일찌감치 태자의 명을 받아 입궁했다.
유모모에게도 공주를 돌보는 것은 뜻 깊은 일이었다. 아이는 모두 소중한 존재이지만, 그녀도 사람이다 보니 공주의 특별한 신분에 무심할 수만은 없었다.
유모모는 첫 현주를 돌볼 때와 똑같은 마음가짐과 태도로 공주를 돌봤지만, 지난 두 달 여간 웃는 일이 많았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유모모의 웃음 대부분은 공주가 아닌 공주를 낳은 태자비로 인한 것이었다.
“유모모, 존경하오.”
공주와 밤을 같이 보내고 맞는 다음 아침마다 태자비는 그리 말했다. 태자비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데 예와 법도가 분명한 점잖은 웃전이었다. 유모들에게는 그것만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태자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첫 출산에 사내라는 특이점이 있음에도 모르는 게 있으면 기탄없이 묻고, 알려 준 바를 성실히 따르고자 노력하는 모범적인 양육자라 유모들을 더욱 기쁘게 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할 땐 미안하다 하였고, 노고를 느낄 때면 고마움을 스스럼없이 전해 왔다.
“비전하. 존경이라니요. 과분한 말씀 거두어 주소서. 소인 맡은 바 최선을 다하고자 할 따름이옵니다.”
유모모가 유모모로 불리게 된 것은 처음 돌봤던 현주 탓이었다. 유모모에게 현주가 첫아이나 다름없어 애틋함이 있었고, 왕부를 떠난 후에도 가끔씩 찾아와 자신을 살뜰히 챙겨 주는 유모모를 현주 역시 잘 따랐다. 현주가 다른 유모들과 구분하기 위해 붙여 준 애칭은 그대로 새 이름이 되었다.
유모모는 어째서인지 태자비에게 유모모라고 불릴 때마다 처음 돌봤던 현주에게 유모모라 불리었던 때의 감상에 빠지고는 했다.
용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 사람은 유모모처럼은 못할 것 같아.”
“비전하께서는 잘하고 계시옵니다. 다음에는 더욱 잘하실 겁니다.”
유모모가 안아 든 공주의 등을 쓱쓱 쓸자, 묘하게 불편한 얼굴을 하던 아이의 얼굴이 편안하게 풀어졌다.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보던 용아가 우물우물 대꾸했다.
“다음…… 그랬지. 이 사람에게 사직을 이어갈 책무가 있었지. 잠깐. 어…….”
말을 하던 용아가 눈썹을 구기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비전하?”
“아, 아닌가.”
잠시 고민에 빠졌던 용아가 유모모의 부름에 표정을 풀었다. 절대로 잊지 못할 축언이 이루어진 게 아닌가 의혹에 빠졌던 용아는 축언 속의 옥과 같은 아이가 황태손이 될 아이인가, 유모모의 품에 안겨 귀여운 소리를 내는 공주인가 고민하다 상념을 털어 버렸다.
“무엇이 말입니까.”
“아닐세. 수고해 주게. 건너가 보겠네.”
“쉬십시오.”
유모모의 말에 용아는 손을 휘휘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본래도 후리후리하던 뒷등은 점점 더 말라 가고 있었다.
황제도 태자도, 유모모와 유모들도 무리 말라 했지만, 용아는 자신의 내원 아버지가 제게 해 준 것만큼 공주에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적당히 타협하여 며칠에 한 번씩이나마 아이의 밤을 지키는 게 고작이었다.
신년이 되면 공주께 황족과 대내신들이 예를 올리러 올 터인데, 유모모를 포함한 모두는 어린 공주가 아닌 태자비의 건강이 쇠해져 신년례가 미루어질까 걱정일 정도였다.
유모모에게 윤조를 맡기고 온 용아는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어디를 지나 침상에 올랐는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온몸이 마냥 무겁고 머리가 띵했다.
며칠에 한 번씩, 그것도 밤에 윤제와 교대로 보는 게 이 정도인데, 매일 밤을 지키는 것은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깊은 잠이 용아를 단단히 얽어맸다.
고요한 목소리가 닫힌 문 너머에서 울렸다.
“소인이옵니다.”
윤제는 침상 곁에서 몸을 일으키며 상대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황족의 권능을 내보였다. 소리를 내지 말라는 뜻이 담긴 행동이었다. 용아는 침상 머리 쪽이 아닌, 발을 두는 쪽에 머리를 두고 잠들어 있었다. 윤제는 침상이 있는 권역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후에야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가.”
앞서 내보인 권능과 낮게 뱉어진 목소리에 상대 역시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잠시…….”
유모모의 말에 윤제가 문을 열었다. 울지는 않지만, 금세 울 것처럼 불만과 짜증이 가득한 어린 얼굴이 윤제를 맞았다. 아이 보기에 누구보다 능숙한 유모모와 유모들이 있는데 필요한 것이 부족해 찡얼대는 것은 아닐 터였다. 윤제가 곧장 손을 내어 보이며 말했다.
“이리 주게.”
“송구하옵니다.”
유모모의 죄스러워 하는 얼굴로 말했다. 윤제는 선선히 웃음을 건네며 품 안의 아이를 다독였다.
“잠시 쉬도록 하게.”
“송구하옵니다.”
돌아서는 태자에게 유모모가 예를 올리며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유모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 아이는 제 아비들을 자주 찾았다. 아직까지는 불만을 표하는 선에서 그치는 수준이었다.
유모모는 그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도 했다. 말을 할 수 없는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울어서밖에 표현하지 못할 텐데, 공주는 제법 점잖게 불만을 표했다.
“윤조야, 이 녀석. 돌봐주는 유모들 말을 듣지 않고 응석을 부리느냐. 용아…… 아범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멈이라 불러야 하나. 화아가 내원 아버지라 부르는 걸 봐서 너도 아버지라 불러야겠지?”
윤제가 조그만 아이를 상대로 부지런히 소곤거렸다. 아이는 혼이 나는 걸 아는 것처럼 떠드는 윤제의 얼굴을 외면하며, 잠들어 있는 용아를 향해 손을 바동거렸다.
“어허.”
윤제가 엄히 말했다. 공주는 계속 딴청을 부렸다. 조그만 손은 잠든 용아를 향해 쉴 새 없이 필사적으로 허우적댔다.
“이 녀석, 부왕이 혼을 내는데 듣는 척도 하지 않느냐. 화아는 피곤하니 나하고 놀자. 우리 둘 다 체력이 좋은 편이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너를 향한 원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듣고 있느냐, 응? 왜 밤에 잠을 안 자고 이각마다 울어 대. 배 좀 고프면 어때, 그냥 자자. 응? 이러다 용아 잡겠다. 효도해야지, 공주야.”
윤제의 훈계를 말간 눈으로 외면하던 아이가 짧은 소리를 내질렀다.
“……마!”
잠든 용아의 눈썹이 슬쩍 움직였다.
“류윤조.”
윤제가 윤조의 작은 머리에 입술을 바싹 가져다대며 소곤거렸다. 아이의 외침이 더해졌다.
“마!”
윤제는 험악한 웃음을 소리 없이 흘렸다. 그는 성큼성큼 움직여 소음의 진원지를 용아로부터 멀리 이동시켰다.
순식간에 용아가 없는, 서실에 당도했다. 용아로부터 멀어져 찡얼거림과 아쉬움을 표하려던 어린 얼굴은 낯선 곳에 대한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이런 방법이 있는 줄 몰랐지?”
윤제는 둥그렇게 떠진 눈을 들여다보며 놀리듯 말했다.
“…….”
동그랗게 뜨인 눈이 슴벅슴벅 깜빡였다.
“책 볼까?”
아이를 눕힐 만한 곳을 물색하던 윤제가 서탁 위의 책을 펴며 말했다. 그윽하게 퍼지는 먹향에 품 안의 아이가 격렬하게 바동거렸다. 책은 싫은 모양이었다.
어린 목에서 끙끙 앓는 듯한 투덜거림이 울렸다.
“우리 윤조 큰일났네. 너, 나중에 이거 다 읽어야 된다. 할아버지가 벌써부터 공주 글 선생을 구하네, 예법 선생님은 누구로 할까 고민하신다. 어쩌려고 그러시나 몰라, 그지?”
윤제의 놀림을 이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가 울 듯 말 듯했다.
“이거 봐 봐. 윤조. 세 살에 천자문 정도는 떼어 줘야 황족이지. 그러니까 우리는 두 살로 하자. 어떠냐. 뭔지 알겠느냐.”
윤제가 새카만 글씨가 가득한 책을 어린 얼굴 가까이로 들이댔다. 기어코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책이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라고 투덜댄 윤제가 품에 안은 아이를 어르며 몸을 일으켰다.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을 지나, 커다란 산수화 앞에 섰다. 언제 울려고 했냐는 듯 아이가 간지러운 소리를 퍼트리며 웃었다.
그 웃는 소리가 귀여워 윤제는 슬쩍 뒤돌아 눈치를 보고, 팔에 단단히 고정해 안은 아이를 공중에 휘이익 빠르게 지나쳤다.
나르는 것처럼 움직인 윤조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연이어 아이를 날듯이 움직인 윤제가 웃는 뺨에 입을 맞추고, 어린 귀에 대고 낮게 낮춘 목소리로 떠들었다.
“유모모에게는 비밀이다, 알았느냐. 우리끼리 비밀이야. 응? 대답해 보아라.”
아직 말을 할 수 없는 아이는 말간 얼굴로 시선만 보냈다. 어린 등을 톡톡 거리는 손길에 자잘한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아이를 날아갈 듯 움직여 보이려 할 때.
“전하.”
서실 문 너머에서 조용한 부름이 들려왔다.
“으흠, 무엇이냐.”
윤제는 날려 보낼 듯한 아이를 품으로 답삭 당기며 몸을 돌렸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에서 등우가 예를 보였다. 공주가 있는 것을 본 그가 아이를 향해 비밀스레 미소를 보냈지만,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던 아이는 갑작스레 다시 품 안에 안긴 것이 어리둥절한지 사방으로 분주히 시선만 보냈다.
“잠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딜?”
“정군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윤제는 등우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딴청을 부리려 했다. 윤조야,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농땡이를 부리려는 태자를 등우가 엄히 찾았다.
“전하.”
윤제가 불퉁하니 답했다.
“알았다. 들었다.”
불만이 켜켜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공주께서 전하를 아주 빼다 박으셨습니다.”
등우가 윤제의 곁으로 슬쩍 다가서며 말을 건넸다. 윤제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몸짓이며 동시에 공주에게 다시 미소를 보내기 위한 자리 선점이었다.
등우를 보는 아이의 얼굴은 무심했다.
윤제는 용아를 더 자게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유모모의 청이 있었던 터라 조금 갈팡질팡했다.
유모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잠든 용아 곁에 두는 것 정도가 그나마 현실적인 타협안 같았다.
서실에서 아기방 옆에 꾸려 둔 태자비의 방으로 이동하는 내내 아이는 올 때처럼 이리저리 정신없이 돌아보았다. 바깥으로 향하는 문 양쪽에는 궁인이 시립해 있지만, 전각 안쪽으로 향하는 문 곁에는 시중인이 없었다. 방 앞에 당도해 등우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아이를 안은 윤제가 방 안으로 들고, 이어 등우가 따라 들려 했다.
문 안으로 발을 들이려던 등우가 움칫했다.
“……!”
순간 강력한 솜방망이에 맞는 것처럼 얼얼한 충격이 등우의 가슴팍을 때렸다. 멈칫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
윤제가 황망한 얼굴로 품 안의 아이를 내려다봤다. 푸푸, 입 바람을 불고 있는 작은 얼굴은 해맑기만 했다. 시선을 올린 윤제가 등우를 바라봤다.
등우의 얼굴 가득 섭섭함이 차올라 있었다. 단란한 시간을 방해하고, 일하러 가자 모시러 온 것이 노복의 잘못이긴 하나 이리 핍박을 하실 정도냐! 라는 외침이 우울한 얼굴에 꼼꼼하게 쓰여 있었다.
“전하.”
등우가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나……”
아니다, 라고 말할 틈이 없었다. 다시 강력한 솜방망이가 등우의 전신을 후려쳤다. 태감이 움칫했다가 힘겨워 하는 소리를 흘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윤제를 향한 원망의 시선을 던질 여유도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윤제가 세상 가장 해괴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품 안의 작은 얼굴을 내려다봤다. 입 바람을 불던 얼굴이 당황스러워 하는 얼굴을 향해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꺄아.”
아이는 퍽 즐거운 듯했다. 듣는 것만으로 간지러움을 주는 웃음이 번졌다.
그즈음 등우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눈치였다. 태자의 품에 안긴 공주는 여아였고, 황족의 힘이 없으니, 태자가 황족의 권능을 내보이면 아이 역시 자신과 같은 충격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태자의 품에 안긴 공주는 무척 흥겨워 보였다.
공주를 유심히 보던 윤제가 등우를 향해 말했다.
“우야, 미안하다. 네게 불만이 있어 그런 게 아니다.”
뜬금없는 사과에 등우가 의아해했다.
“예?”
선사죄 후공격이었다. 방심하고 있던 등우는 태자가 갑자기 내어 보이는 황족의 힘에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뒷걸음쳤다. 윤제의 품에서 겁에 질리거나, 울거나, 힘들어하는 소리가 이어져야 했다. 그런데 꺄아, 기뻐하는 어린 소리가 울렸다.
아주 즐겁고 신이 난 울림이었다.
“……!”
윤제가 품 안의 아이를 단단히 안으며 재빨리 문에서 물러났다. 문 건너로 뒷걸음쳤던 등우 역시 몸을 돌려 빠르게 도망쳤다. 제어가 전혀 되지 않은 황족의 힘이 사방에 무형의 힘을 퍼트렸다. 전각 밖으로 향하는 다급한 발소리들이 울렸고, 저 너머에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푸드득. 푸드득.
윤제는 얼결에 방 안 깊은 곳에 들어온 상태였다. 용아를 본 아이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질렀다.
“마!”
용아는 잠이 더 필요했다.
“이 녀석. 너…… 지금 무엇 한 것이냐.”
윤제가 기뻐하는 아이를 향해 엄중히 말했다.
“꺄아!”
아이는 즐거움이 또렷이 느껴지는 소리를 짧게 내지르기만 했다. 다시 황족의 힘이 사방에서 들썩였다. 용아는 잠이 더 필요했지만, 윤제는 의논할 상대가 필요했다.
“용아.”
침상에 머리와 발 두는 곳을 반대로 둔 채로 잠드는 이를 다급히 흔들어 깨웠다.
“응?”
용아는 비몽사몽했다.
“용아, 우리 딸 좀 이상해.”
윤제가 철없는 아비처럼 말했다. 용아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답했다. 감긴 눈이 뜨일 줄 몰랐다.
“……왜요. 우리 애기 윤제 형 닮아서 예쁜데요.”
윤조가 용아를 보며 소리를 내질렀다.
“마!”
잠에 취한 목소리가 어린 목소리에게 아는 체를 했다.
“으응?”
윤제가 깨지 않는 이를 향해 황망한 얼굴로 말했다.
“용아, 윤조 진족인 것 같다…….”
백화도 엄연히 진족이었다. 편의에 따라 진족과 백화로 나누어 부를 뿐이었다. 용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깨어나다가 당황으로 희게 질려 있는 윤제의 얼굴을 보고, 조금 더 잠을 떨쳐 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잠에 취해 웅얼웅얼했다.
“진족인 것 같다니요……?”
윤제가 품에서 바동거리는 아이를 단단히 다독이며 말했다.
“윤조가 황족의 힘을 써.”
“네?”
“이 녀석이 등우를 쫓아냈다.”
용아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에서 강제로 깨어난 얼굴에 구김이 잔뜩 가 있었다. 뒤숭숭한 뒷머리를 긁는 모양새가 여전히 잘 이해가 안 되는 투였다.
“왜요? 어떻게요?”
“등태감이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니까 힘을 써서 쫓아냈다.”
윤제는 성실히 답했다.
“……공주가요……?”
용아가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윤제가 문 너머를 향해 말했다.
“있느냐.”
문이 열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음성이 답했다.
“예, 전하.”
안쪽의 기색을 한껏 살피는 목소리였다.
“전하가 공주와 놀고 싶어서 괜히 심술부리시는 거 아닙니까.”
잠에서 깨어난 용아가 무성의하게 말했다. 용아가 아이에게 손을 내어 보이자, 윤조가 폭발하는 것 같은 소리를 뱉으며 손을 바동거렸다.
“마!”
그 소리에 놀라 물러나던 등우가 문에 부딪쳤다. 우당탕탕, 격한 소리가 울렸다. 등우는 넘어진 속도보다 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
태감의 반응을 본 용아가 태도를 바꾸었다. 용아의 손이 아이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몸을 일으킨 등우가 공주의 눈치를 잔뜩 보며 조용히 고했다.
“송, 송구하옵니다.”
“괜찮은가.”
“괜찮사옵니다…….”
등우의 얼굴에 불안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공주가 등태감을 처음 봤던가요?”
“항상 목소리만 들었지.”
용아의 물음에 윤제가 답했다. 용아의 표정은 어리둥절했고, 윤제의 얼굴은 여전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멍했다.
“등태감이 부르면 항상 전하가 가셨죠.”
“그랬나…….”
공주의 등을 도닥도닥 두드리는 중에 대화가 오갔다. 용아는 조금 미심쩍은 듯한 기색이었다.
“등태감.”
“예.”
“자흥이를 불러오게.”
태자비에 명에 등우가 깊이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물러갔다.
“자흥이?”
“이곳의 소환입니다. 헌데, 공주가 황족의 힘을 쓰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하께서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유모들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윤제가 멍한 얼굴로 용아 앞에 앉았다.
“이 녀석 태감을 싫어하는 것 같아. 나도 어릴 적에 나하고 안 놀아주고, 나하고 놀아 줄 사람 빼앗아가는 어전 태감들이 싫었거든. 내가 황족의 힘을 쓰지 않았는데 등우가 놀라 물러나서 처음에는 알게 되었다. 이후에는 내가 시험 삼아 힘을 써 봤고, 그러니 따라서 힘을 써서…… 어려서 아는 게 없으니 전혀 제어가 되지 않은 원시적인 힘을 표출한다. 그런데 내 자식이라 그런가? 힘을 써서 이질적이라는 것도 알고 힘의 반동도 다 알겠는데, 불쾌감이 없다. 요 녀석, 백화인데 어떻게 진족의 힘을 쓰는 거지.”
“윤조야, 정말 네가 그랬어?”
어른 둘이 말 못하는 아이에게 간절히 물었으나 답은 없었다.
“마아!”
저에게 관심 갖는 둘이 마음에 드는지 짧고 기분 좋은 소리만 있었다.
“전하. 비전하. 소환을 데려왔습니다.”
문 건너 저 먼 곳에서 고요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부하고 들여보내 주게.”
용아가 문 너머를 향해 말했다. 저편에서 낮게 속닥이는 소리가 울렸다. 등우가 황족의 힘을 갑자기 맞을지도 모르니 주의하라는 말을 무성의하게 건네고, 손짓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예?”
의아한 목소리가 울렸지만 그보다 빠르게 문이 열렸다.
“전하. 비전하. 자흥이옵니다.”
열린 문 너머에서 자흥이 아닌 등우가 고해 올렸다. 난데없이 열린 문에 자흥이 놀라며 예를 올렸다.
“두 분 전하를 뵙습니다.”
용아가 예를 올리는 자흥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너라.”
“예. 비전하, 강녕하셨습니까.”
문 안으로 들어선 자흥이 예의 바른 말을 건넸다. 아무 일도 없었다. 잠잠했다. 용아의 품 안에서 아이는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윤제가 소환을 향해 명했다.
“가까이 오너라.”
“예, 전하.”
자흥이 융이 깔린 침상 권역까지 다가섰다.
“…….”
“…….”
윤조는 다가온 소환을 말가니 보다가 금세 눈길을 돌렸다. 용아가 의문이 담긴 시선을 건넸다. 조금 힐난 하는 얼굴이었다. 윤제가 목을 울리며 자흥을 향해 말했다.
“자흥아.”
태자의 부름에 자흥이 잔뜩 움츠러든 얼굴로 답했다.
“예, 전하.”
“미안하다.”
“……?”
자흥이 의아한 시선을 힐끗 윤제에게 던지다가, 깜짝 놀라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황족의 힘에 물러나는 소환을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봤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윤조가 팔을 짧게 휘저으며 소리쳤다.
“꺄아!”
그와 동시에 뒷걸음치던 자흥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나자빠졌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주저앉은 자흥이 겁에 질린 숨을 삼켰다.
“헉.”
윤제가 친히 소환의 곁으로 가 물었다.
“괜찮느냐.”
“물, 물러갈 것을 허락하여 주소서.”
자흥이 죄를 청할 때처럼 웅크린 채 고하였다.
“물러가도 좋다.”
“망극하옵니다.”
“놀랐을 텐데 가서 쉬도록 해라.”
태자의 극진한 말에 소환은 깊이 머리를 숙여 보이고 후다닥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물러갔다. 문이 닫히고, 닫힌 문 너머에서 조금 투닥이는 소리가 오갔다.
“…….”
용아는 멈춘 채 멍한 얼굴로 품 안의 아이를 바라봤다.
“거봐라.”
윤제가 으스대듯 말했다.
“……공주는 백화가 아닙니까…….”
용아의 얼굴은 충격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렇지.”
윤제가 놀라는 용아의 얼굴을 보고 동질감과 안도를 느끼며 선선히 말했다. 그는 다시 꺄아! 소리를 내지르려는 아이를 말리려 하며 바동거리는 작은 몸을 높이 안아 올렸다.
“그런데, 왜…….”
용아는 충격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무엇을 낳았는가.
용아의 당황한 얼굴에 그런 의문에 쓰여 있었다. 윤제가 허공에 던져 올릴 때마다 아이가 까르르, 까르르 넘어갔다. 평소라면 용아가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낼 텐데,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한마디도 않았다.
“내가 태동을 느꼈다 하지 않았느냐.”
“그럼, 어…… 공주는 백화가 아닙니까? 여아 중에도 진족이 있었습니까.”
용아의 물음에 윤제가 아이와 장난치던 것을 멈추었다. 남자의 얼굴이 다시 심각해졌다.
“모르는데.”
허탈한 대답이 울렸다.
“유모모!”
용아가 다급히 건넛방을 향해 외쳤다. 곧바로 부름에 답해야 할 유모모의 답이 늦었다. 아까 물러났던 발소리에 유모모의 것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용아가 재차 부르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유모모가 멀찍한 곳에서 답을 올렸다.
“예, 비전하.”
“공주가 ……여아가 분명한가?”
용아는 말을 하면서도 쓸모없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도 알고, 이 전각 안 모두가 공주가 여아라는 것을 알았다.
“분명하옵니다.”
유모모가 곧장 답했다.
“……태의와 하후가 여의원을 들라하게.”
유모모의 대답에 어쩔 줄 모르던 용아가 명했다.
“명을 따르옵니다.”
유모모가 답을 하고 물러가는 걸 듣는 와중에도 용아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윤제가 용아 곁에 앉아, 마! 뜻 없는 소리를 내지르는 아이의 등을 쓱쓱 쓰다듬으며 문 너머를 향해 말했다.
“있느냐.”
밖은 고요했다. 다들 도망이라도 갔는가 생각할 때 답이 돌아왔다.
“찾으셨나이까.”
등우였다. 태감은 문을 열지 않은 채 어른거리는 그림자로만 모습을 보였다.
“공주께서 폐하를 뵙기를 청한다고 아뢰어라.”
하명에 따른 대답이 주춤했다.
“……공주께서요?”
등우의 말 뒤에, 전하가 아니옵고요? 라는 소리 없는 물음이 따르는 듯했다.
“응. 공주가.”
윤제가 뻔뻔스레 답했다.
“명을 따르옵니다.”
등우는 다시 묻지 않고 재빨리 물러나 정천궁으로 향했다. 그는 어전태감을 찾을 즈음에야 정군왕이 태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정군왕이 황족 중 높은 위치에 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한 일이 있었다. 정천궁 태감 좌첨 역시 같은 생각인 듯했다.
공주께서 폐하를 뵙길 청하십니다.
등우는 주인인 태자가 시키는 대로 전하였다. 좌첨은 공주가 말은 어떻게 하는가 라는 의심의 기색도 없이, 사색이 되어 황제를 찾아 곧바로 아뢰었다. 황제와 함께 있던 정군왕까지 함께 뛰쳐나와 동궁으로 향했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명에 따라 소리를 한껏 낮춘 납심을 알리는 말이 울렸다.
“부황.”
“부황.”
윤제와 용아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황제를 찾았다. 황급히 안으로 들던 황제는 윤제의 품에서 옹알이를 하고 있는 공주를 보고, 얼굴에 떠올라 있던 걱정과 당황을 지웠다. 조금 맥이 빠진 듯한 얼굴이 잔뜩 굳어 있는 두 얼굴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냐.”
황제가 자연스레 손을 뻗어 아이를 청했다.
“부황, 윤조가 진족의 힘을 씁니다.”
“진짭니다.”
윤제가 황제께 아뢰었다. 용아가 덧붙여 말했다. 아이를 받아 말을 하려던 황제가 그대로 멈추었다.
부황, 공주가 천재입니다. 부황, 공주가 말을 합니다. 부황, 공주가 곧 걸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부모의 착각으로 자식에 대한 과도한 칭찬을 하려나 예상했다. 부모들이 흔히 하는 행동이었다. 황제 자신도 했던 행동이었기에 적당히 웃으며 관대하게 오냐오냐해 줄 셈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한참 상회하다 못해, 뜬금없기까지 한 말에 황제는 품에 안은 윤조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윤조야. 저게 대체 무슨 말이지요?”
너희 아비들 이상하다는 기색이 듬뿍 묻어나는 말이었다.
“윤조가 진족의 힘을 씁니다.”
“진짜예요.”
윤제가 다시 말했고, 용아가 거듭 동조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네 가족의 답답한 행각에 정군왕이 삐딱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정군왕은 황가의 현 상태에 홀로 한숨을 쉬었다. 황제께서 태자비바보에 이어 공주 바보가 되었다는 건 부정할 길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말도 못하는 아기를 상대로 존대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만으로 기암할 일이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백화인 공주가 진족의 힘을 쓴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 얼굴로 한심해하는 것을 표출하고 싶었다. 허나, 태자와 태자비가 허튼소리를 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보십시오.”
말을 한 것은 용아였다. 용아가 툭툭, 윤제의 팔꿈치를 두드렸다. 윤제가 황족의 위엄을 내어 보이자, 정군왕이 대번에 인상을 썼다.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당신의 아들을 지켜보았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이가 생기 넘치는 얼굴로 윤제를 보다가 꺄아! 소리를 내질렀다.
정군왕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왈칵 구겨졌다. 용아는 전혀 느끼지 못했으나, 황제와 정군왕, 윤제는 또렷이 느낀 모양이었다. 실컷 보라고 했던 용아가 셋을 향해 물었다.
“정말, 공주가 진족의 힘을 씁니까.”
“…….”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주께서 정말 공주가 맞습니까, 잘못 본 거 아니오?”
정군왕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봤다.
“부황도, 숙부도, 왜인지 모르십니까.”
윤제가 곧장 결론에 도달했다.
“모른다.”
황제가 얼어붙은 얼굴로 선선히 인정했다.
“공주께서 공주가 맞냐니까.”
정군왕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거듭 물었다.
“공주는 공주가…… 맞습니다…… 혹시 몰라 유모들에게 다시 확인했습니다. 황가 웃어른인 두 분이 모르신다면 제북에 물어보아야겠습니다.”
용아가 황망함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러자.”
황제가 격하게 동의했다.
“……왤까요. 왜, 백화가 진족의 힘을 쓸까요.”
용아가 얼떨떨한 얼굴로 우물댔다. 황제도 윤제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용아는 모든 게 제 잘못인 것만 같아 기울어진 눈썹을 풀지 못했다.
넷을 지켜보던 정군왕이 놀라움을 떨치고 말했다.
“뭐가 문제입니까.”
“예……?”
“백화가 진족의 힘을 쓰면 어떻습니까. 이 사람은 우리 딸내미들이 진족의 힘을 쓰면 든든하겠는데요. 공주께서 튼튼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아니, 근데. 어째 공주께서 태자비는 하나도 닮지 않고, 조카님만 빼다 박았답니까. 진민 공주마마, 내가 누군 줄 압니까. 정군왕이오. 이리 와 보세요. 그러고 보니 조카 손자를 제법 봤지만, 황족의 힘을 쓰는 건 공주님이 처음이오. 본왕은 딸아이만 둘이라 힘을 다룰 줄 모르는 갓난쟁이 대하는 건 처음이야. 아직 어려 그런가 힘이 좋으시오.”
정군왕이 자연스레 황제에게서 아이를 받아 들며 떠들었다.
“그, 그렇습니까.”
용아의 굳은 얼굴은 여전했다.
“다루지 못하는 힘에 얻어맞으니 제법 아프오.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을 테니,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오롤롤롤. 헤헤, 웃어 보세요. 거 좀 비전하는, 표정 좀 푸시게.”
“예, 예…….”
“힘세면 좋지 뭘. 안 그러오? 웃어 보시라니까요.”
정군왕이 황족의 근엄함 따위 잊고 아이 앞에서 재롱을 부리며 애원했다. 퍽 웃기는 모양새인데, 당사자가 너무 진지한 태도라 웃을 수가 없었다.
“황가 역사엔 백화 중 진족의 힘을 부린 이는 없습니다.”
정군왕이 용아를 향해 진지하게 말하고는 공주를 상대로는 한껏 재롱을 떨었다.
“비전하께서 표정을 아니 푸시니까 공주께서 웃질 않잖소. 내 오늘 공주마마를 웃기고 말 것이야. 응? 웃어 주시오, 응?”
정군왕의 힘찬 애교에도 윤조는 말간 시선만 건넸다. 정군왕은 지치지도 않는지 안은 아이를 상대로 쉼 없이 말했다. 정군왕이 공주를 웃게 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밖에서 아뢰는 말이 울렸다.
“고태의와 여의원이 들었습니다.”
용아와 윤제가 황제께 시선을 건넸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뜻을 보였다. 윤제가 밖을 향해 말했다.
“가까이 오되, 밖에서 듣고 답하라.”
“하문하소서.”
밖에서 안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황가 여아 중 황족의 힘을 가진 이가 있었는가?”
“없사옵니다.”
답을 올린 건 고태의였다.
“한 명도 없는가?”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고태의의 음성은 단호하기까지 했다. 방 안에서 소리 없는 시선이 오갔다. 용아의 얼굴이 다시 거무죽죽해졌다. 정군왕은 무어가 걱정이냐는 얼굴을 힘껏 건네며 공주에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까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