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아는 주기적으로 윤제를 덮쳤다. 입덧의 공격을 받기 전에 착실히 덮치러 갔다. 몇 번인가 남자를 황급히 달려오게 했다.
윤제는 덮쳐드는 용아에게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반응을 하는가 하면, 때로 어울리지 않게 왜 이러냐고 튕기는 체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용아는 굴하지 않고 덮쳐들었다.
때로 그럴 때가 되었다면서 으슥한 밤에 윤제가 용아를 덮쳐들었다. 용아가 갑자기 뭐냐고, 뭐가 그럴 때가 됐냐고 해도 소용없었다.
‘잠깐.’
용아가 멈추려 했다.
‘나한테 계속하지 말라고 화내 봐.’
윤제가 괴상한 소리를 했다.
‘그게, 그게 뭡니까.’
용아가 황망해했다.
‘네가 하지 말라고 해도 나는 계속할 테니까, 계속 화내.’
윤제가 괴이쩍은 말을 진지하게 건네었다. 갑작스러워서, 남자의 말과 달리 아직 그럴 때가 되지 않아서, 윤제가 말한 대로 하지 말라고, 이러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심취하는 윤제에게 용아가 진지하게 화를 낸 적도 있었다.
‘미…… 미쳤습니까.’
그러자 윤제가 하던 것을 멈추었다. 남자가 잔뜩 수줍어하는 게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전해져 왔다.
‘너무 좋다, 용아.’
용아는 뭐가요? 라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수줍어하며 좋아하는 잘생긴 미인이 입을 맞춰 와 어영부영 넘어가고 말았다. 윤제의 이따금 안 된다고 해 보라는 괴상한 요청은 계속 되었다. 둘은 밤마다 서로 덮치고, 덮쳐졌다. 곤란한 밤들이 꿈결처럼 지나갔다.
한여름이 되자, 용아의 배가 본격적으로 불러 왔다. 용아는 자신이 임신을 했다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입덧으로 호되게 고생했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임신을 했다는 걸 알아볼 만한 징후가 없었다. 그래서 배가 불러 왔을 때 이상했고, 신기했고, 놀라웠다.
그제야 임신을 했다는 게 이해가 되었다.
용아가 임신을 했다는 걸 확실히 납득한 이들은 또 있었다. 첫 번째는 윤제였다. 깊은 밤, 용아를 끌어안고 자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용아의 곁에서, 용아가 회임한 것을 안 이후로 특히 더 조심스럽게 구는 윤제가 거칠게 움직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옆에서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기척에 용아 역시 잠에서 깼다. 잠에 잠긴 목소리가 웅얼웅얼 울렸다.
“전하?”
윤제는 용아를 깨웠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태동.”
남자가 모를 소릴 했다. 태동은 여름 시작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용아는 잘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처음이라서 그런 것인지, 사내라서 그런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태동?”
용아가 제 배에 손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전혀 알 수 없었다. 배는 잠잠했다. 윤제가 용아의 배가 아닌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태동이다.”
“주무세요. 저는 먼저 잘게요.”
용아는 이해 못 할 소리를 하는 남자의 팔을 당겨 베고 다시 잠을 청했다. 무심한 얼굴이 웅얼대며 눈을 감았다. 태동이 쉴 새 없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는데, 태동을 퍼트리는 근원을 품은 이는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것은 황가 진족의 특성이었다. 복중 태아가 퍼트리는 태동은 아이를 품고 있는 이에게 영향을 주기보다, 태아와 같은 진족 혈통을 이은 일족들에게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혈족간 사이가 가까울수록 태동을 더 강하게 인지했다. 지금의 경우는 중경 일대에 머무는 거의 모든 황족에게 전해질 만큼, 강한 태동이었다.
윤제가 나지막하게 중얼댔다.
“……딸이라며…….”
잠을 청하던 용아가 눈을 홉떴다.
“딸이에요?”
강하게 전해져 오는 태동에 숨을 고르며 윤제가 가물거리는 용아의 눈 위에 손을 뒤덮었다. 태동을 가지는 것은 사내애였다. 진족의 힘은 사내를 통해 이어지기에, 태동이 있으면 딸일 수 없었다.
“아니야.”
“어, 아니에요?”
용아가 눈이 가려진 채 우물댔다.
“응, 아니다.”
윤제가 단호히 말하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앵두를 좋아하면 딸이라더니, 역시 미신은 미신이었다. 용아가 눈을 가리고 있는 남자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그럼 사내애인가요?”
“몰라.”
윤제가 용아를 품으로 단단히 당겨 안으며 툴툴댔다.
“화내는 거예요?”
“화내는 거 아니야. 그냥…… 외척은 무슨…… 우리 주제에…….”
윤제가 한숨처럼 숨을 훅 내뱉으며 답했다.
“외척?”
“그만 자. 그런데 이 녀석 왜 이렇게 시끄러워. 벌써부터 힘세다고 버릇없이 구는 건가.”
윤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계속했다.
“뭐가 시끄러워요?”
용아는 의아했고, 윤제는 놀랍고 기가 막혔다. 그의 힘 앞에서 무관한 것이야 이제는 당연하다 여기게 되었지만, 사방에서 일족의 힘이 짓눌러 오도록 태동하는 아이를 품은 채인데 전혀 모르는 용아가 신묘할 지경이었다.
“아니다.”
윤제의 품에 기댄 얼굴이 그를 올려보며 물었다.
“애기가 버릇이 없어요?”
“애가 힘이 세…… 좀 많이…….”
답하는 윤제의 얼굴이 조금 시무룩했다.
“윤공자 형님보다 세요?”
“글쎄. 내일 알 수 있을 거다. 어서 자.”
“안녕히 주무세요.”
그보다 아기 힘이 세서 서운한가 싶어 용아는 조금 웃으며 잠에 들었다. 윤제는 바로 곁에서 가해지는 태동에 밤새 얕은 잠을 자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이튿날, 새벽부터 황제께서 금당대로 납시었다. 제대로 잠들지 못한 윤제가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기척 없이 몸을 일으켜 황제를 맞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이 똑같이 묘하게 퀭했다.
태감이 챙겨 준 의자에 앉으며 황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은…….”
“저런데 어떻게 자겠습니까.”
윤제가 무엄하게도 오만상을 그리며 답했다.
“그렇지. 용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잘 자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다행이지 않느냐. 힘든 것은 짐과 너만으로 충분하지.”
황제가 윤제에게 의자에 앉으라는 듯 손짓을 건넸다. 의자에 앉은 윤제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아비 되기가 쉽지 않은 것, 이라고 말하려는 황제를 향해 안으로 들어온 좌첨이 말을 고했다.
“폐하.”
차를 내와야 할 태감의 손이 비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새아가가 깼느냐?”
“정군왕과 소양군, 진양군, 함양군께서 드셨습니다. 폐하를 뵙기를 청하십니다. 교헌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좌첨의 말에 황제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 새벽부터?”
“항의를 하러 오셨다 합니다. 밤새 주무실 수가 없다고요. 네 분께서 말하시길 곧 황실 종친들이 전부 몰려와 항의하실 거라 합니다.”
“……태동 때문인가…….”
황제의 의아하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피어올랐다.
“부황.”
“음?”
“소자와 그 녀석 중 누가 더 셉니까.”
윤제가 유치한 질문을 오만상을 쓴 채로 건넸다. 황제의 흐릿하던 웃음이 짙어졌다. 너그러운 웃음을 걸친 얼굴이 찡그린 얼굴을 향해 말했다.
“아이와 힘겨루기를 하려 하느냐. 자식을 이겨서 무엇 하려고?”
조언하는 것 자체를 기꺼워하고 유쾌해하는 얼굴이 얄미웠다.
“아비의 위엄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짐이 너보다 약하다고 이 아비 위엄이 서지 않겠느냐.”
“부황. 잔소리는 잠시 거두시고 소자의 궁금함을…….”
윤제의 투덜거림이 깊어져 갈 때 소리 없이 물러갔던 좌첨이 다시 들었다. 태감은 황제와 태자의 대화에 끼어드는데 거침이 없었다.
“폐하.”
“무엇이냐.”
황제의 하문에 태감이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황가 종친회에서 폐하께 피해 보상을 받아야 한다, 하시며 항의 방문하셨습니다. 교헌재에서 기다리고 계시다 합니다. 중경에 머무는 거의 모든 황친이 드셨습니다. 가보셔야 할 듯하옵니다.”
황제가 성의 없이 하답했다.
“기다리라고 해라.”
“예.”
물러가는 좌첨을 곁눈질하며 윤제가 픽 웃었다.
“앵두를 좋아하면 딸이라면서요.”
“앵두를 좋아하면 공주가 맞다니까…….”
황제가 안타까운 얼굴로 대꾸했다.
“중경 황족 모두를 놀라게 해 잠도 못 자게 하는 녀석이요?”
윤제가 연신 피식피식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못마땅한 듯 황제의 눈썹이 좁아 들었다.
“……가끔 틀릴 때도 있는 게지. 공주는 둘째나 막내가 더 좋을 수 있지. 여동생이라니. 근사한 단어 아니냐. 너도 동생을 갖고 싶어 했잖느냐.”
부친의 대충 끼어 맞춘 말에 윤제가 단호히 말했다.
“소자는 아우가 갖고 싶었습니다.”
“저 방에 네 아우가 잠들어 있지 않니.”
놀라울 정도로 뻔뻔한 말이 돌아왔다. 실랑이해 보아야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윤제가 불손하게 웃은 후 말했다.
“가 보셔야지요.”
“짐이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새아가가 깨거든 교헌재로 데려오너라. 황친에게 축하를 받고 하례품을 내려야지. 황족들에게 줄 것은 짐이 마련해 두마.”
황제가 기분 좋게 몸을 일으켰다.
“살펴가소서.”
태자의 배웅에 즐거움 가득한 웃음이 돌아왔다. 윤제 자신이나, 황족 중 누구라도 이렇게 천지분간 하지 못하고 황족의 힘을 내어 보이면 가만두지 않을 분이 불쾌감 하나 없는 얼굴인 것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방에서 압박해 오는 듯한 태동에 머리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고얀…….”
나지막하게 투덜거린 사내가 사랑하는 아우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잠든 이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밤새 잠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한 피로감에 심술이 나 고요한 뺨에 입술을 마구 내렸다.
용아가 약하게 소리를 흘렸다.
윤제가 잠에서 깨어나는 입술에 연신 입을 맞추고 실없는 말을 소곤거렸다.
“형제끼리 이래도 되나.”
“형제요……?”
용아가 잠에 취해 대꾸했다.
“형이 잘해 줄게, 용아. 사랑해.”
요즘 흔히 있는 남자의 뜬금없는 고백에 용아가 폭소하며 고백하는 입술에 입술을 마주 댔다.
교헌재의 아침은 분주했다. 새벽부터 들이닥친 황친들을 맞느라 정신없던 궁인들은 갑작스러운 하례연을 준비하라는 명에 사색이 되어 뛰어다녔다.
황제는 정식 하례연이 아닌, 황가 일족들끼리 하례연이니 부담 가지지 말라 했으나 궁인의 입장에 그럴 수 없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바쁜 궁인들을 본 정군왕이 무슨 일이 있느냐 물었다.
교헌재 수석 궁인이 하례연을 준비 중이라 아뢰자, 정군왕이 당연하다는 듯 어서 준비하라는 독려를 건넸다. 갑작스러운 하례연에 투덜거릴 줄 알았는데, 까다롭기로 유명한 정군왕마저 동의할 만큼 좋은 일이 황가에 있는 모양이었다.
한여름의 하례연은 태자비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폐하, 왕자전하의 탄생을 미리 경하 드리옵니다.”
“태자전하, 아버지가 되심에 미리 경하 드리옵니다. 종묘사직을 바르게 하시고자 하는 전하의 노력을 일족 모두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비전하, 왕자전하의 잉태를 경하 드리옵니다. 바라옵건데, 순산하시옵소서. 왕자전하께서 품으신 일족의 힘이 강건하시니, 소신들 모두 기쁘기 그지없사옵니다.”
상석에 앉은 황제와 그 아래 앉은 태자와 태자비를 향해 황친들이 소리 모아 축하를 올렸다. 황제께서 특별히 준비해 둔 앵두를 집어 먹으려던 용아가 괴이한 축하 인사에 멈칫했다.
용아는 교헌재에 부황과 황친들이 계시다 해 인사하러 온 참이었다. 갑작스러운 인사였고, 단순 인사를 하는 것치고 용아를 맞은 교헌재 안 풍경이 무척 과한 데가 있었다.
교헌재 안 모든 탁자는 양칠화선탁으로 준비되었고, 탁자 위를 호화로운 비단이 꾸미고 있었다. 요리도 화려하며 찬란했다. 무슨 일이지? 생각하였는데, 아직 복중에 있는 아이가 태어날 것을 축하하는 자리인 듯했다. 정말 이상한 순간이었다. 축하를 올리는 황친들의 말이 너무 단호하여, 더욱 이상하였다.
“윤공자 형님. 소제가 아들을 낳습니까?”
“아마.”
목소리를 낮춰 물은 용아에게 윤제가 짧고 간결하게 속삭였다. 상석의 황제도 그렇고, 축하를 올리는 황친들도 그렇고, 옆자리의 윤제까지 의심 하나 없이 당당하여서 용아는 괜히 울컥했다.
“아직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압니까.”
윤제가 사방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태동이…….”
“태동이 뭐가 어쨌다는 겁니까. 아무것도 없는데요.”
“너는, 용아…….”
용아가 더없이 단호히 말했다. 누구보다 단호한 태도였다. 윤제가 놀랍고 신묘하고 황망한 표정으로 용아를 설득하려 했다. 용아가 상석의 황제와 축하를 올리고 물러난 황족들을 두루 살피며 말했다.
“태어나기 전까지 여아인지 남아인지 모르는 거지요. 축하는 감사하나, 왕자라는 확언은 거두어 주십시오. 혹여 아니면 태어난 아이가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하례품은 황손이 태어난 후 이 사람이 신경 써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축하,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그리 말하고는 제 몫의 앵두를 씩씩하게 먹어 치웠다.
“…….”
“…….”
황족의 입장에서는 황명에 의해 갑자기 참석하게 된 하례연이었다. 태자비에게 퉁박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저리 단호하게 말하니 아닌가 너무 섣불렀나 싶다가도, 곳곳에서 압박해 오는 듯한 태자비 복중 아이의 태동을 느낄 때면 자신들이 구박받을 이유가 없다, 확신이 들어 억울하고 답답했다.
태자비께서는 이 폭력적이기까지 한 태동이 느껴지시지 않느냐, 당신께서 모른다고 그리 엄히 말하시는 거냐 항명하고 싶었으나, 앵두를 아구아구 먹는 정결한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황가 혈족 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앵두를 좋아하면 여아라 했다.
어느 쪽이든 기쁜 일이었다. 왕자가 태어나면 후사가 결정 되는 것이었고, 공주가 태어나면 황가 내에서 4대만에 적통 공주가 탄생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상황이니 괜히 툴툴거려 분위기를 망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상석의 대화를 듣고 있다 보니 모두는 괜히 울컥했다.
상석의 모습이 보기 나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매우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황제가 앵두를 먹어 치우는 용아를 향해 웃는 얼굴로 물었다.
“맛있느냐.”
“예, 부황.”
좌첨을 거쳐 황제의 앵두가 전부 용아에게로 건네졌다.
“이것도 먹어라.”
“송구하옵니다.”
“무얼. 네가 먹는 걸 보니 이 아비 배가 다 부르구나. 많이 먹거라.”
황제께서 태자비를 어여뻐 하는 것은 복된 일이고 좋은 일이었으나, 이 하례연을 갑자기 연 것은 황제 당신이었다. 태자비에게 구박 받는 황친들은 당신과 상관없는 척, 태자비만 오냐오냐 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니 괜스레 떽떽거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예, 부황. 황공하옵니다.”
항상 엄격한 얼굴의 태자비가 방긋방긋 웃으며 앵두를 받아 들었다. 황제가 연신 웃으며 태자비를 예뻐하였다. 그 모습을 뚱하니 올려보고 있는 황친들에게 황제가 힐끗 시선을 내렸다. 순간 무시무시한 눈길이 내려와 다들 체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황제가 인자하게 웃으며 모두를 향해 말했다.
“식사들 하게.”
밥이나 먹으라는 뜻이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평소라면 왜 그리 무서운 눈초리로 보시느냐, 제일 앞장서서 툴툴대야 할 정군왕이 수저를 들며 아첨꾼처럼 소리를 높였다.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정군왕을 따라 시들시들한 목소리로 예를 올리고 식사에 열중했다. 한여름, 웃음 가득한 하례연이 소박하게 지나고 있었다.
여름이 가고, 바람이 차가워지자 어느새 산달이 가까워졌다. 용아는 이러다 터지는 게 아닐까 싶도록 커다래진 제 배를 보며 신기해했고, 때때로 이유 없이 눈물을 쏟았다.
윤제는 갑자기 우는 용아를 보고 당황스러워 했지만, 아무 말 않고 안아 주었다. 자신도 이유를 모르기에 왜 우는지 묻지 않는 남자가 무척 고마웠다.
커다랗게 부푼 배 때문에 옆으로 누운 모양으로만 잘 수 있었다. 이제 언제 어느 때에 아이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태의의 말을 들었을 때, 기이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다.
임신의 끝으로 갈수록 배 뭉침이 점점 심해져 가, 죽음의 까마득함이 때때로 엄습했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 라는 무서운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잦아졌다.
모두가 잠이 든 밤이었다.
용아는 부른 배를 안고 일어나 서탁 앞에 앉았다. 먹을 갈고, 종이를 반듯하게 펼쳤다. 종이의 각 귀마다 문진을 놓고, 붓을 들 참이었다.
“뭐하고 있느냐.”
등 뒤에서 불쑥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용아가 놀란 얼굴로 윤제를 돌아봤다. 용아는 모르겠지만, 진족의 태동이 있은 후로 윤제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 품 안에 있던 몸이 살그머니 빠져나가는 것도 덕분에 전부 지켜보았다.
“무엇하는 거냐, 물었다.”
윤제의 시선이 닿은 붓을 든 손이 떨림으로 비틀거렸다.
“유서를…….”
용아가 어렵사리 입술을 열었다.
“뭐?”
남자의 반듯한 얼굴이 대번에 삼엄해졌다. 커다란 손이 용아의 손에 있던 붓을 휙, 앗아 갔다. 용아가 손에서 떠나는 붓을 아쉬운 얼굴로 바라봤다.
윤제의 무서운 표정이 풀릴 줄 몰랐다.
“출산 중에는 유언을 남기기 어렵잖아요.”
“네가 유언을 왜 남겨?”
윤제가 낮게 가라앉은 저음으로 물었다. 용아가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출산 중에……”
곧바로 제지가 가해졌다.
“나쁜 말 마라.”
커다래진 배를 팔로 안으며 용아가 말을 이었다.
“나하고 아기하고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남자가 다시 용아의 말을 잘랐다.
“너하고 아이하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면, 나를 죽이고 너하고 아이를 살릴 것이다. 알겠느냐!”
무서운 얼굴이 엄격히 말했다.
“……그, 그럴 수가 있나요?”
용아의 의문을 표했다.
“내가 그렇게 할 거다.”
윤제가 당당히 답했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 틈을 주지 않고 거듭 자신이 그렇게 할 거라고 했다. 잠시 혹했던 용아는 그가 감동적인 억지를 쓰는 거라는 걸 알고 웃음을 흘렸다. 감동적인 말에 용아는 웃음을 흘리다가, 금세 표정을 지웠다. 감동은 지극히 짧았다.
“그런데 저한테 지금 화내신 겁니까.”
윤제의 싸늘하던 얼굴이 당황으로 흩어졌다.
“용아, 형이.”
“나한테 화낸 거죠?”
“아냐.”
윤제가 불퉁해지려는 용아의 등 뒤로 가 몸을 밀착하며 고개를 저었다. 용아가 따듯한 체온에 약하다는 아는 것을 노리고 하는 행동이었다. 용아는 쉬이 울컥함을 가라앉히지 않았다. 윤제가 팔꿈치로 자신을 밀어내려는 몸을 뒤에서 끌어안고 뒤뚱뒤뚱 걸었다.
“저리 가십시오.”
살얼음 같은 밤이었다.
“용아. 형이…….”
애원으로 가득한 밤이었다.
“윤공자 형님이 나한테 화냈어.”
“오해다.”
공손한 밤이었다.
“매일 오해라고 하죠.”
“뭐 필요한 것 없느냐.”
“……앵두…….”
용아가 입맛을 다시며 은근히 속살거렸다. 살얼음 같고, 애원으로 가득하고, 공손한 밤들이 차곡차곡 느리고도 빠르게 쌓여 까마득한 열 달이 꿈결처럼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