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
침상 안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밭은 숨소리만이 가득한 곳에서 용아는 소리 없이 허우적댔다. 용아의 몸 위에 단단한 몸을 뒤덮고 있는 남자는 오늘도 어김없이 체위가 바뀔 때마다 성마르게 굴었다. 퍽, 퍽, 살 소리가 울릴 때마다 뭉친 신음이 억눌린 채 울렸다.
맨살이 맞닿고 비벼지는 감각이 이상하도록 생경했다.
아마도 어제와 달리 말도 안 되는 욕구가 잠잠한 탓인 것 같았다. 용아의 허우적대는 손이 아래로 바싹 몸을 붙여 오는 단단한 복근을 희미하게 밀어냈지만, 위에서 내리는 누르는 힘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아, 아……! 아.”
한참 안을 들쑤시던 커다란 것이 잠시 멈추었다. 야한 소리와 음란한 숨을 삼키는 용아의 옆얼굴로 남자의 입술이 다정하게 내렸다. 좁은 안은 빠듯하게 채운 커다란 것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압박감에 자꾸만 숨이 차올랐다. 아래를 가득 차지한 남자가 꿈틀꿈틀 요동쳤다.
용아의 손이 다시 단단한 복근을 밀쳐 내는 것처럼 더듬었지만, 맨살을 손으로 아프지 않게 긁고 내리는 것처럼 보이기만 했다. 소리를 억누르는 턱을 따라 입을 맞추던 얼굴이 움직임을 멈췄다.
“왜 자꾸 밀어내.”
윤제가 윗몸을 일으키듯 움직였다. 용아의 안으로 커다란 것이 더 깊이 파묻혔다.
“아! ……송구합니다…….”
열 오른 멍한 입술 사이에서 제멋대로 소리가 토해졌다.
“혼내는 거 아니다.”
신음하는 입술에 잘게 입을 맞추며 윤제가 소곤댔다.
“으응, 읏…… 아!”
윤제가 용아의 위에 겹치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다리 사이에 앉아 허리를 맞췄다. 남자의 손에 무릎이 접힌 다리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체위가 바뀌며 남자가 움직여 대서 안을 가득 채운 커다란 성기가 이리저리 찔러 댔다.
“밀어내면 안달 나서 더 참기 힘들다.”
윤제가 용아의 얼굴 옆을 손으로 짚으며 신음하는 입가에 짙게 입을 맞추었다. 덕분에 적당히 물러났던 성기가 안으로 깊이 직격했다. 깊은 안에 묻은 채로 빠르고 짧게 오갔다. 질척한 소리가 접합부에서 쉴 새 없이 튀어 올랐다.
“아, 아, 아!”
용아의 몸이 들썩일 때마다 침상 위 이불에 엉망으로 주름이 생겼다. 자르르 안이 울릴 감각에 용아가 고개를 내었다.
“싫어?”
신음하는 귓가에 낮게 깔린 저음이 울렸다.
“아!”
용아가 소리를 내뱉으며 귓가에 속삭이는 입술에 입술을 가져갔다. 입술을 맞댄 채로, 신음이 오르는 입술이 옆으로 내저었다. 내젓는 입술을 흠뻑 빠는 입술이 웃음을 퍼트렸다.
침상 안에 젖은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또다시 아침이었다. 빈 이불 속에서 혼자 깨어난 용아는 잠결에 본 것을 가만히 떠올렸다. 발가벗은 몸을, 역시 발가벗은 사내의 몸에 겹치고 다리를 얽은 채 입을 맞췄다. 얼굴을 마주하고 키득댔다. 서로를 살며시 불렀다.
‘화아.’
‘윤제 형.’
‘용아.’
‘윤공자 형님.’
장난기 가득한 말을 들으며 잠에 들었다.
‘우리 용용이 예쁘네.’
좋은 밤이었다.
“아야.”
밤의 흔적이 깨끗하게 지워진 몸으로 바삭바삭한 감촉의 금침에서 깨어나는 아침 또한 좋았다. 무릎으로 버티며 엎드린 채 남자를 받아들이느라 남은 후유증이 가득했지만 그마저도 싫지 않았다. 멍 자국 가득한 세운 무릎에 뺨을 묻고 나른한 숨을 흘리던 용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융각을 찾은 용아는 긴말하지 않았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맹 누이.”
“무슨…….”
태자비를 맞은 맹위이는 주위를 물리고 그녀만이 열 수 있는 궤에서 꺼낸 서신들과 책첩들을 몽땅 내놓았다.
“죽어 주셔야겠습니다.”
맹위이가 내놓은 것은 황후와 대귀족가, 왕공들의 비리와 비밀을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나하나가 대단히 귀하고,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은 것들이었다. 맹씨가 전부를 살려 줄 만한 값어치 있고 희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밀을 가진 이는 비밀을 아는 이가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예, 그러겠습니다. 하오나…….”
위이는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부친과 가솔들의 후일이 궁금하였다.
“나는 투기 많은 태자비이니까요.”
용아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좋으십니까.”
감정 없는 얼굴이 무심히 물었다.
“네.”
용아가 단박에 답했다.
“좋으시겠습니다.”
감흥 없는 얼굴이 의미 없이 동조했다.
“그러니까 맹봉의의 직첩을 파하겠다. 동궁 후궁의 위신과 명예를 어지럽힌 맹위이에게 죽음을 내리겠다. 맹씨의 부친인 승상 맹방과 맹씨가에 죄를 물어야겠으나, 죄인 맹씨가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물러났으니 그에 관해 더 이상 언급 말라.”
위엄 어린 목소리가 말을 마쳤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맹위이가 용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낮추며 예를 올렸다.
“아닙니다. 아직 맹씨가와 승상은 효용이 높습니다. 맹승상이 승상 부친 중 하나이긴 하나, 죄인이 황제의 내궁에 든 상황도 아니고, 권력과 후궁이 결탁했다기에 본격적으로 맹씨가가 이득을 본 바가 없지 않습니까. 문제로 삼아 추문을 퍼트리면 실각할 위기도 되겠으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숨 대신 다른 것을 내어놓으라 한 것입니다. 맹봉의 역시 아직 효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투기 많은 사내라서 말입니다.”
“좋으십니까.”
맹위이가 온갖 표정이 떠오른 얼굴로 물었다.
“예.”
용아가 다시 지체하지 않고 답했다.
“부럽습니다.”
마주한 얼굴이 울 것처럼 흐려졌다.
“맹위이는 죽을 겁니다. 대신, 누이를 살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국경 밖으로 나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겁니다. 국경 밖에서는 자유입니다. 승상에게도 이에 대해 알려 줄 것이나 누이를 찾지는 못할 겁니다. 새 이름을 정하셔야겠습니다.”
용아가 몸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비전하!”
멍하니 있던 위이가 나서는 용아를 따라붙었다.
“말씀하세요.”
“훗날, 아주 훗날이라도 제가 돌아와 당신을 괴롭히는 게 두렵지 않으십니까. 이곳이 황궁이라 하지만…… 세상엔 못 나갈 곳도, 못 들어올 곳도 없습니다.”
“여길 왜 오시려고?”
“만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전에도 말했지만 누구에게나 쟁취할 선택권은 있을 겁니다. 다만 그가 뺏은 것처럼, 그도 빼앗길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겁니다. 나를 괴롭히도록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애초에 돌아올 수도 없을 테지만. 옛 남자는 그만 잊고, 새 남자 찾아보십시오. 대귀족 맹씨가 위세를 떼어 내도 아름다우십니다. 나쁜 짓은 부디 그만하시고요.”
용아는 이해하기 어려운 허망한 얼굴을 향해 말을 건네고 돌아섰다.
겨울의 끝이 다가오는 날이었다.
『죄인 진씨는 황궁의 위엄을 해치고 명예를 어지럽히니 실로 죄가 크다. 진씨는 황족을 위해하려 하였으니 또한 그의 죄가 크다. 황족과 귀족의 사이에서 이간을 하여 정국을 혼란케 한 죄 역시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다. 폐궁 진씨를 량주 수덕사에 유폐한다. 진씨의 죄업이 중하나 황궁에 들어와 황족의 예를 다한 덕이 있으니, 그에게 사약을 내리는 은혜를 베풀겠다. 진씨의 친부, 진렴은 여식을 바르게 인도하지 않고 죄를 부추겼으니 죽음으로 죄를 갚으라. 진렴의 3족을 멸한다.』
태자의 처결안이 황제께 올라갔다.
『봉의 맹씨의 직첩을 파한다. 맹씨는 동궁전 안에 벌어지는 악인의 죄를 묵인하고 사사로이 도와 여러 목숨을 해할 뻔했으니 죄가 적지 않다. 황족의 위신과 명예를 실추시킨 맹씨는 죽음으로 황족과 귀족의 명예를 회복도록 하라. 맹씨의 부친 승상, 맹방과 맹씨가에 죄를 물어야겠으나, 죄인 맹씨가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명예를 지키고자 물러났으니 그에 관해 불문에 부친다.』
이튿날, 황제의 재가가 내려졌다. 새벽이 다 밝기 전에 진씨 일가에 대한 명이 이행됐다. 사약을 거부하며 태자를 찾던 진안은 일가의 멸족을 전해 듣고 반항을 멈추고 무관에게 붙들려 태감이 부어 넣는 사약을 강제로 들이켜 생을 마무리했다.
죽을 때까지 태자를 찾더라는 말에 윤제가 무심히 말했다.
“제대로 처리했느냐.”
“예. 의원이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수고했다.”
서북쪽 양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동남쪽 량주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 온 무관이 태자에게 고했다. 태자의 얼굴은 고요했다. 언준이 마차 곁에서 말을 물렸고, 윤제가 창을 닫았다.
중경, 예업전은 황궁 안 신분 높은 죄인을 잠시 머물게 하는 곳이다.
황족과 대귀족의 명예를 지키고자, 퇴궁한 죄인 맹씨를 태운 마차가 황명이 떨어진 직후 예업전으로 들었다. 다시 날이 밝고, 예업전 밖으로 세 대의 마차가 나왔다. 황성을 벗어나는 동안 세 대의 마차는 태자의 호위대와 맹씨가 호위대의 엄중한 보살핌을 받았다.
세 대의 마차 중 중앙의 마차는 전체를 흰 비단으로 감싸고 있었다. 죽은 이가 타고 있다는 뜻이었다. 동궁의 또 다른 죄인이 죽음을 따랐다.
황성의 초입에서 맹씨가 호위대가 물러났다. 호위대의 가장 앞에 있던 어린 청년이 흰 비단에 싸인 마차가 떠나는 것을 보며 눈물을 쏟았다. 살아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눈물이었다. 승상 맹방의 막내아들이며, 죽은 이의 동복 남동생이 우는 것을 보며 대가를 오가는 사람들은 말을 삼갔다.
태자 호위대의 엄중한 감시 아래에서 내달린 세 대의 마차는 양주로 향했다. 세 대의 마차는 양주성을 그대로 지나쳐 달렸다.
“보입니다.”
선두에 서 있던 언준이 말을 돌려와 태자에게 고했다. 창을 열지 않은 채 윤제가 명했다.
“멈춰라.”
“모두 멈추어라!”
언준의 외침에 따라 빈 터에 일행이 멈추었다. 가장 앞과 끝 마차의 문이 열리며 영양군과 태자가 각각 내렸다. 영양군의 명이 있었는지, 마차가 멈추자 영군왕부 태감이 중앙의 마차에서 흰 비단을 걷어 냈다.
“모두 물러나 있으라.”
윤제의 명에 등우가 몸을 낮추고 뒷걸음쳤다. 등우가 들은 바를 언준에게 전했다. 세 대의 마차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둘러싸고 있던 호위대가 정렬을 갖추어 일사불란하게 물러났다. 언준이 돌아서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영군왕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내리시오.”
열린 문 안에 여자가 있었다.
“송구합니다.”
일체의 단장 없는, 아무런 장신구도 않은 얼굴은 모르는 이처럼 낯설었다. 활기를 잃은 창백한 얼굴이 마차에서 내렸다. 태자와 황족에게 예를 올리려던, 지금은 이름을 잃은 이가 머뭇댔다.
죽은 이가 황족께 예를 올려도 옳은가.
망설이다 씁쓸해지는 얼굴을 향해 윤제가 말했다.
“예는 되었다.”
“송구합니다.”
생기 없는 얼굴이 짧게 감사를 표했다.
“소관은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말씀 나누십시오.”
영양군이 태자를 향해 말했다. 그는 태자 호위대의 반대편 멀찍한 곳에 서 있는 자신의 태감에게로 향했다. 영양군과 태감이 양주 군영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윤제가 입을 열었다.
“위위.”
곧 내려놓아야 할 이름이 울렸다.
“예…….”
맹위이가 시선을 올려 태자를 바라봤다.
“잠깐 걸을까.”
“예.”
둘은 그들을 모르는 척하고 있는, 등 돌린 이들에게서 서서히 멀어졌다. 두 사람이 거니는 곳은 언뜻 보기에 평지 같지만 실제로는 완만한 능선이었다. 언덕을 걷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새 이름은 정했느냐.”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저편에서 마차를 준비하는 이들이 보였다.
“중경으로 돌아올 수 없다.”
“압니다.”
위이의 답은 간명했다.
“받아라. 승상이 네게 주는 것이다.”
윤제가 품에 가지고 있던 서신을 꺼내 건넸다.
“고맙습니다.”
서신은 소박하고 두툼했다. 부친과 가족들과 연락할 때 주고받던 내용 없이 호화롭던 서신과는 완연히 달랐다. 윤제가 다시 품을 더듬어 서신을 받아 든 손에 각낭을 건넸다.
“태자비가 주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소인이 고마워하였다고 비전하께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마. 안에 뭐 들었는지 안 열어 보느냐.”
윤제의 은근한 재촉에 창백하던 얼굴에 살짝 웃음이 감돌았다. 위이는 떠밀리듯 각낭을 열어 보다가 의아함을 내보였다. 각낭 안에는 손가락 두 마디도 안 되는 작은 각낭들이 들어 있었다. 조그만 각낭 표면에 우아한 글씨가 쓰여 있었고, 각낭의 안에는 흔하다고 하기도 귀하다고 하기도 애매한 조그만 보주들이 있었다. 보주의 종류는 크게 일곱 종류였다. 조금씩 다른 종류의 보주가 든 조그만 각낭 하나하나가 엄청난 가치는 아닐 테지만,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인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예쁘네요.”
수많은 아름다운 것을 가졌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던 여자가 소박한 각낭을 장신구처럼 매달며 말했다.
“그런가.”
윤제의 눈에는 어린애 장난감 같았다. 그가 썩 동의할 수 없단 얼굴로 답하며 마지막으로 묵직한 각낭을 건넸다. 각낭을 받아 들며 위이가 물었다.
“전하께서 주시는 겁니까.”
“많지는 않다.”
“전하께는 그렇겠지요. 제게는 클 것입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전하는 제게 관심조차 없으셨을 테지만, 저는 태자 전하를 좋아했습니다…… 전하가 아닌, 태자 전하를 좋아한 것일 테지만 말입니다. 전하께는 정인이 있어 제가 있는지조차 모르셨겠지만 홀로 많이 마음 앓이 하고, 홀로 투기하고, 홀로 술수를 썼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지요. 마지막에는 많이 모자란 짓도 하였고요.”
위이의 쓸쓸한 웃음에 윤제가 마주 웃었다.
“황궁에서 고생하였다.”
“나쁜 짓을 많이도 했는데…… 지난한 목숨을 이어 갈 수 있게 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죄를 내뱉는 얼굴에 울음이 번졌다.
“위위.”
“예.”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태자비가 너를 찾아갔을 때 많이 도와주었지. 미안하지만, 나의 편견에 황궁 안 누구보다 네가 기괴한 소문에 적극적으로 따름직한데 그렇게 도와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얼굴이 장난스러운 음해에 흐트러졌다.
“황족의 혈통을 이은 갓난아이를 잡아먹으면 황족의 힘을 가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소문 말씀입니까.”
“응.”
“그와 관련해 불문에 부칠 것임을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약속하마.”
“소인은 소문에 따라 이행하였지만, 실패한 이를 알고 있습니다. 전하. 황궁도, 군왕부도, 귀족 가내도 권력을 갖기 위하여 혈족을 얻고자 무슨 짓이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권세와 금력을 쥔 이들에게 힘에 짓눌려, 돈에 억압돼 협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방계 혈계를 소상히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고맙다. 더 묻지 않으마.”
웃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녕하십시오. 이 맹위이는 이만 퇴궁하고자 합니다. 전하의 소중한 이와 평안하시길…….”
“허락한다.”
“물러가옵니다.”
맹위이가 태자에게 엄격한 예를 올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돌아서는 여자의 얼굴에 눈물이 하염없이 내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와 얼굴을 감싼 천을 그녀가 단단히 붙들며 걸었다. 마차를 준비하고 기다리던 영양군이 문을 열어 주었다.
영양군이 태자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윤제가 거의 보이지 않는 희미한 끄덕임으로 답했다. 문이 닫히고, 마차가 빠르게 떠나갔다. 텅 빈 터에 바람만이 가득했다. 오래도록 멈추어 있던 윤제가 돌아서서 걸었다.
빈 능선에도 바람만 가득했다.
“전하, 날이 차갑습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말을 타겠다.”
등우가 마차에 오를 것을 돌려 청했으나 윤제가 무심히 말했다.
“전하.”
태자의 말에 태감이 품을 뒤졌다. 소담한 책첩 하나가 나왔다. 등우의 위세 당당한 태도에 책첩을 받아 들며 윤제가 물었다.
“무엇이냐.”
“비전하께서 최근 감명 깊게 본 글귀들이라 합니다. 마차에 타셔서 보시는 게 어떠시옵니까.”
“네가 시켰느냐.”
책첩을 주르르 넘겨보며 윤제가 말했다. 의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니옵니다.”
등우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이 이런 귀여운 짓을…… 이거 뭐야.”
“무어가 잘못되었습니까.”
“술귀신이 붙었나, 왜 죄다 이딴 글귀야. 취향기(醉鄕記)? 취중에 별천지를 읊다? 취향, 그 땅이 광활하여 끝이 없고, 구릉이 없어 비탈길도 험하지 않네. 그 기운이 평화로워 늘 변함이 없고, 어둠과 밝음이나 추위와 더위조차도 없도다. ……술 취해 맛이 가서 더운 것, 찬 것도 구분 못 한다는 거 아닌가. 마차에 오르겠다. 최대한 빨리 황성으로 돌아가도록.”
윤제가 험악하게 투덜댔다.
“하하. 하하하. 비전하께서도 술의 오묘함을 아실 때가 되었지요. 하하.”
등우가 마차 문을 잽싸게 열어 주며 태자비를 두둔했다.
“네놈이 시킨 거냐. 네가 그 녀석한테 술을 줬어?”
“아니옵니다!”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 술을 권하려 하니. 술잔을 들고 달에게 묻노니. 만 가지 생각과 천 가지 근심을 한번에 없애 버리는 일은 이 거룩하고 존엄한 술잔을 마시는 일보다도 못하다? 어서, 빨리 돌아가자.”
윤제가 마차에 오르며 명했다.
책첩 한 장, 한 장마다 술에 대한 예찬과 술 취한 묘미에 대한 찬양이 가득했다. 어느 장을 펴도 그랬다. 빠르게 책첩을 뒤져 전체적으로 글귀를 살피던 윤제는 나중엔 허탈해하며 술 귀신이 좋아할 법만 모아 둔 책첩을 찬찬히 읽어 갔다. 끝도 없는 술에 대한 사랑을 떠드는 책첩에 웃고 말았다.
책첩의 집요한 애원에 농락이라도 당한 것처럼 앵무 모양 술잔에 춘을 조금 부으니, 라는 글귀를 보고는 앵무 모양 술잔을 선물해야 하는가 고민까지 했다.
“황성입니다.”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윤제가 명했다.
“도기점에 들렀다 가겠다.”
“예, 전하.”
“도기점은 어이하여 가시려 합니까.”
대답을 하고 물러나는 언준과 다르게 마부석에 앉은 등우가 의문을 표했다. 마차와 마부석 사이를 나무판이 막고 있어 다행이었다.
윤제가 얇은 책첩을 둥글게 말아 쥐고 괜스레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앵무 모양 술잔을 사 갈까 싶다.”
“……예.”
한참 말없던 등우가 맥없이 동의했다.
“흠.”
마차 안에 쑥스러움 가득한 헛기침만 떠돌았다. 태자의 호위대와 마차가 잘 정리된 대가를 정연히 달렸다. 앵무 모양 술잔이 있을 도기 공방을 향해 힘껏 달렸다.
황제는 지난 신년 연회의 사고를 이유로 모든 연회의 규모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섣달그믐, 정월 초하루 정단절, 초구일, 상원절의 관등회까지 소규모로 적은 인원만으로 꾸렸다.
황제가 참석한 섣달그믐과 관등회에는 태자와 태자비가 참석하지 않았고, 태자가 주관한 정단절과 초구일은 황제와 황후가 참석하지 않았다.
황후에 대한 태자의 거부는 여전했다. 황후는 때문에 자주 와병을 이유로 흠덕전 안에서만 머물렀다. 윤제는 흠덕전까지 찾아가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여유가 있을 때 모후를 찾는 오랜 습관대로 흠덕전 권역에 발걸음을 옮기다 멈추었다. 그대로 돌아서 가 버릴 때보다 흠덕전 앞으로 가 무섭게 황족의 권능을 보여 황후궁 안 모두를 기함하게 했다.
태자의 그러한 불효에 대해 황실 종친과 문무백관은 쉬쉬하기만 할 뿐, 아무도 직접 문제점을 거론하지 않았다. 태자와 마찬가지로 태자비 역시 황후를 찾지 않은 지 한참이었다. 그에 따라 뒷말이 돌았다.
황궁은 태자비의 세상이 되었다.
황궁 안에서 시작된 태자비에 대한 불온한 말은 황궁의 높은 담을 넘어 황성 안과 민간에까지 널리 전해졌다. 태자비의 교만과 관련된 징후는 수없이 많았다.
최근 태자비는 동궁전 후궁들을 죄 몰아내었다. 태자비가 태자의 곁을 얻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후궁들이 죄를 짓고, 지난날 지은 죄가 발각되었다. 태자비가 술수를 썼음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과거 태자비는 황제의 유모 상궁에게 채찍질을 했다. 그러고도 황제께 야박한 소리 듣지 않고 평탄히 넘어갔다. 황태후가 기거하던 함월전을 갈취하였는가 하면, 황궁 안에서 제북의 법도에 따라 태후를 오래도록 기렸다. 고상한 말로 포장했지만 태자비가 한 행동들은 중경 안에서 쉬이 있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모든 게 태자비의 탓이다.
새삼스레 야만이 넘치는 국경 밖 땅에서 온 태자비에 대한 말들이 넘쳐 났다. 후족은 고귀한 일족이지만, 교만하여서는 덕을 얻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황가에 유일하게 아기씨를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후족임에도 아직까지 길한 소식이 없는 것이었다.
태자비는 탐욕스럽고 불효하며 덕이 없다.
황성 안에 어느 순간부터 음해나 다름없는 말이 넘쳐 났다. 누군가 손을 쓴 듯, 의도적인 행적이 명백하게 보였다.
소문의 불편함이 도를 넘어 섰을 때, 제북의 사신과 제관부 대신들이 황가에 정식으로 항의했다.
황제는 유언비어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지만 말만 줄어들었을 뿐 별달리 달라진 건 없었다. 황제와 태자가 앞장서서 태자비를 감쌌지만 오히려 태자비에게 요사함이 있다는 말만 늘어났다.
한겨울이었다.
“…….”
용아는 겨울 싸늘한 공기가 아니라 따듯함 속에서 깨어났다. 타닥타닥, 불티가 오르는 조심스러운 소리만 있었다. 커다란 방 안은 아름다운 화로의 향연이었다.
방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화로를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마다 화로가 놓여 있었다. 연화문 화로는 불씨를 드러내고, 넝쿨문 화로는 불씨를 숨기고 있었다.
따듯한 방 안을 둘러본 용아가 나지막한 소리를 삼켰다.
“또야.”
요즘의 용아는 아침마다 금당대였다. 금당대 침전 안 침상에서 깨어난 용아는 맨몸이었다. 저토록 많은 화로를 들이게 해 둔 범인은 먼저 방을 나선 남자일 터였다.
“깨워 줘요, 좀.”
용아는 천개 밖에 손을 뻗어 곱게 놓인 침의를 털어 펼쳤다. 펼쳐진 침의가 천개 안으로 부드럽게 숨어들었다. 안으로 끌어들인 침의를 용아가 단숨에 걸쳤다.
“비전하.”
내실과 침실 경계 사이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세요.”
천개 밖으로 나서며 용아가 대꾸했다.
“기침하셨습니까.”
“전하께서는?”
“아침에 전각을 나셨습니다. 일찍부터 정무가 있으십니다. 특히 오늘은 정기적으로 왕공 대신으로부터 서안이 올라오는 날이라 바쁘시옵니다. 아침부터 들일까요, 따로 씻으실 것은 없다 하셨는데…….”
태감이 드물게 뒷말을 흐렸다.
“전하께서 정무를 보러 가셨는데 등 태감은 왜 여기 있습니까.”
“노비는 비전하를 지켜드려야지요.”
등우가 머리를 낮추며 아부했다.
“아직 아침 먹을 때가 지나지 않았습니까.”
용아의 말에 등우가 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송구하옵니다. 한참 지났사옵니다.”
등우의 대답에 용아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펼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마른세수를 하는 용아를 등우가 조용히 모른 체했다.
“폐하께서는?”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용아가 물었다.
“……아무 말 없으셨습니다.”
등우는 태자비의 물음이 뜬금없다 생각했다. 더뎌진 대답에 용아가 팔걸이를 탕, 내려쳤다. 벌떡 일어난 몸에 진노가 가득했다.
“왜, 아무 말이 없으셔! 두 달이 넘도록 부황께 문안도 올리지 않는데! 왜! 어찌하여! 혼을 내시지 않아!?”
“비전하, 화를 가라앉히소서.”
등우는 괴로워하는 용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잊으셨나?”
용아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웅얼거렸다. 다급히 엎드렸던 등우가 고개를 들며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례 때마다 비전하에 대한 말이…… 흠흠, 송구하옵니다.”
“그렇지. 부황과 전하께서는 나 좋으라고 두둔하지만 칭송 받는 건 두 분이고, 나만 요요로운 것이다, 요사한 것이다, 요악한 것이다 욕을 잔뜩 먹지. 이 모든 게 전부 부황과 전하가 나를 이리 태만히 대하시기 때문 아니겠나!”
용아의 배부른 투정에 등우가 양 입술 끝을 내렸다.
“비전하.”
“말하게.”
등우의 부름에 용아가 답했다.
“사랑받고 계심을 모르시옵니까.”
“설마 내가 모르겠나.”
용아의 투정은 배부른 것이 맞았다. 특별한 이들의 특별한 사랑을 독차지하는 데 저리 기겁하다니 참으로 별일이었다.
“폐하와 전하께오서 무척이나 비전하를…….”
등우가 황제와 태자를 칭송하며 태자비를 드높이려 했다.
“허나, 이것은 그릇된 애정이야.”
용아가 엄중히 툴툴댔다.
“무엇이 그리 잘못되었다 하십니까.”
때마침 밖에서 가벼운 음식이 들어왔다. 소반을 든 궁인이 등우에게 가져온 것을 건네고 물러갔다. 등우가 먹기 좋도록 적당히 따듯한 탕을 올렸다.
용아가 탕이 든 그릇을 받아 들며 눈썹을 좁혔다.
“전하께서 나를 다시 환자 취급하신다.”
새우가 든 묽은 탕이 백자기 수저에 휘휘 헛돌았다.
“무릎에 올리고…… 송구하옵니다.”
등우가 반사적으로 말을 건네다가 잠을 재우는가에 대한 물음을 입 밖에 낼 수 없어 머리를 한껏 낮췄다. 새우가 담긴 수저를 훌훌 불던 용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아니지만, 요즘 숨 쉬는 것 외에 거의 전하께서 다 해 주시지. 그제부터는 먹는 것도 대신 떠먹여 주시는데…… 전하께서 누굴 곁에서 두시면 본래 저러시나?”
용아의 물음에 등우가 깊이 숙고했다.
“……그 정도는 아니옵니다…….”
태감의 고개가 삐걱삐걱 내저어졌다.
“내가 어린애인 줄 아시는 것 같아. 내가 아직 열두 살로 보여? 내가 걷지도 못하는 어린애인 줄 아는 것 같아. 나한테 너는 약해서 조심해야 한대. 그래, 전하에 비하면 약할 거야. 그런데 전하에 비해 안 약한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어? 안 그래?”
“비전하. 말이 나왔으니 노비가 한 말씀 올려도 될는지요.”
“하게.”
“전하께오서 비전하가 침전에 계실 때 안으로 아무도 들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는 아시고 계시겠지요. 그리고 전하 당신께서 전각을 나서실 때, 전각 주위로 황족의 힘을 결계처럼 펼쳐두지 못하는 것에 무척 아쉬워하십니다. 지난 아침 동안 전각을 나서시기 전에 여러 시도를 했으나 실패하셨습니다.”
용아가 빈 탕 그릇을 건네며 멍하니 말했다.
“나를 감금하려 하신단 말이야……?”
“엄연히 다르옵니다. 비전하로부터 세상 전부를 감금하시려는 거지요. 비전하께서 바라실 때 세상으로 나서시고요.”
소반에 받은 그릇을 올린 등우가 밖을 향해 차를 준비하라 일렀다.
“그게 그거 아닌가?”
“소인의 생각에 상당히 차별점이 있습니다. 노비가 올리는 말을 부디 너그러이 들어 주십시오. 앞서 말씀 올렸던 것처럼 전하께서는 비전하께서 계실 때 안으로 들지 못하게 하십니다. 특별히 그릇 것이라 할 수는 없사옵니다. 허나, 태자께서는 폐하의 정무 일부를 맡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특히 위급을 다투는 군영과 관련해, 밤중에 보고를 받는 일이 잦으십니다. 하온데, 요즘은…… 밤에는 전혀 보고를 받지 못하십니다.”
“전부 나 때문이군.”
용아의 자책하는 말에 등우가 위로해 주었다.
“전부라니요. 엄연히 비전하의 탓이 아니라 전하의 탓입지요.”
별 위로는 되지 않은 듯했다.
“밤에 보고를 받지 못하시면 요즘 보고는 어떻게 받고 있지?”
용아가 침울한 얼굴로 물었다.
“밤중에 보고 드리러 오는 이가 있으면 금당대 별각에서 기다리게 합니다. 아직까지 정말로 화급을 다투는 일은 크게 없었습니다. 사실 전하까지 나셔서야 할 정도로 급박한 일이라면 이미 결과가 나온 일이 대다수이거나, 전하께서 스스로 알아서 전각 밖으로 나오실 일입니다.”
“다행이라 해야 하나.”
“예. 다행입지요. 보고 드리러 온 이가 금당대에서 잠시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태자 전하의 거처인 금당대에 머물러 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나쁘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요. 때문에 지금까지 별탈이 없었습니다. 다만…….”
등우가 용아의 손등을 물끄러미 봤다.
“다만 보고가 밀리고 밤중에 기다려야 하지. 그러니 다시 나인가. 나에게 악명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어.”
“……예.”
태감이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용아가 건넸다.
“전하가 나를 위하실수록 악명만 쌓여 가.”
“비전하…….”
등우가 재차 태자비를 위로하려 했다.
“양제는?”
“예?”
“양제가 전하 곁에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하였지. 그때도 밤새 기다렸나. 괜찮으니 말해 보게. 양제라 칭하여도 돼.”
용아는 비교적 담담히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사옵니다.”
등우의 표정이 기묘했다.
“전하와 양제가 매일 밤 한 이불을 덮고 잘 때는 어떻게 했나.”
용아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울컥함이 가득했다.
“비전하. 비전하께오서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대체 어느 웃기는 작자가 전하와 양제가 매일 밤 한 이불을 덮고 잤다 하더이까?”
“전하라네.”
용아의 대답에 등우의 얼굴이 움칫했다. 그가 말한 어느 웃기는 작자가 태감의 상전이었다. 등우가 불편하고 언짢던 얼굴을 내리 앉히며 말을 이었다.
“그때 전하와 비전하께서 싸우고 계실 때가 아닙니까.”
“그랬지.”
“그런 때에 비전하를 자극하려고 전하께서 작당을, 어흠, 간계 아니, 사실과 다르게 왜곡된 말을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전하도 귀히 크셨겠지만, 전하께서는 이 천하에서 가장 귀히 크셨습니다. 태어나 세 시진 만에 태자에 책봉되신 분이 아닙니까. 모후의 태내에 있으실 때부터 당신의 전각을 가지고 계시던 분입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태자께서 자라 온 과정상 남과 침상을 나누어 쓰기가 쉽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시옵니까.”
등우가 엄격한 선생님처럼 말했다.
“응.”
용아가 착한 아이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양제에게 총애를 내리실 때에 애정이 있되, 위계는 정확했습니다.”
등우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엄했다.
“…….”
용아가 동의할 듯 말 듯한 얼굴로 태감을 바라봤다.
“우선 금당대만 해도 그렇습니다. 금당대 침전 안은 양제를 한참 총애할 적에도 오직 전하만의 권역이었습니다. 법도상 태자의 침실에 들 수 있는 것은 태자비뿐입니다. 금당대로 후궁들을 불러 만찬을 베푸시거나, 전각 없는 이에게 시침을 들게 할 때 금당대로 들여도 침전까지 드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랬나.”
용아의 얼굴에 의혹이 감돌았다.
“전하께서 양제를 총애할 때에 매일 밤을 함께 보내신 적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밤을 보냈다 표현하심은 시침을 말하시는 것이었을 겁니다.”
“글쎄, 그럴까.”
“전하께서 혹여 잠결에라도 황족의 힘을 드러내시면 양제가 잠을 자다 뛰쳐나와야 할 것인데 그걸 방치하였을 리가요. 전하께서 양제를 대면할 때에 가장 신경 쓰신 것이 바로 황족의 힘으로 당신이 아끼는 이를 겁먹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전하라 하시지만 주무시면서까지 당신의 모든 것을 갈무리하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무엇보다, 타인과 잠을 함께 자는 것은 전하의 상식에서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등우의 말은 어째 비방 같은 성토로 흘렀다.
“그러면, 뭐…….”
용아가 마지못해 동의할까 했다.
“아니. 비전하께서 어릴 적에 전하께서 그리 괴롭히고 핍박하고 못되게 굴고 하신 것도 그렇습니다. 애정은 있되, 위계는 확실하게 하기에 양제를 이곳에 들일 순 없는데, 정식 합방례가 시작되면 태자비께서 금당대 침전에 들어야 하니 그리 못나게 구신 게 아니겠습니까. 양제를 못 들이면 비전하도 들이지 않는 정도가 전하가 하실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겁니다.”
“그런가.”
“그분은 황족으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까. 세상은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위계가 숨을 쉬는 것처럼 합당한 것이지요. 비전하와 지금처럼 사이가 좋지 않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태자비께는 위계상 후궁에 비해 제한된 것이 없습니다. 허니, 비전하는 승명원에 가셨지요. 말을 타시고, 전하와 대가를 주유하셨지요. 반면 후궁과 나들이를 가실 땐 화원이나, 행궁 별전의 화원이 최선입니다. 양제에게 애정을 주실 때 후궁이 받을 수 있는 안에서 가장 큰 총애인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옵니까.”
“나는 잘 모르겠다…….”
“지난여름에 석주 청하객잔에 가셨지 않습니까. 석주에 전하가 외유를 가실 땐 항상 혼자 가시옵니다. 친우도 아랫것들도 곁을 허락하지 않으시지요. 하오나, 비전하께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등우가 최선을 다해 상전을 옹호했다.
“내가 받을 수 있는 이라서 받았다는 거 아닌가.”
은근히 웃는 얼굴로 용아가 태감의 말을 반박했다.
“비전하의 것을 비전하께 드린 것은 맞사옵니다. 또한, 비전하의 것을 비전하가 아닌 이에게 주는 불상사가 없었음도 맞지 않습니까. 애정이 있되, 위계가 정확했다 함은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입니다.”
“내게 아부하는 건가.”
용아의 얼굴에 번진 웃음이 선명해졌다.
“지금의 전하는 소인의 미미한 입장에서 보기에도 무척 행복해 보이십니다. 전하께서 편히 밤을 함께할 수 있는 이란 상식 밖의 것이었을 텐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존재가 곁에 계셔 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태자 전하가 외롭다, 함은 어울리지 않고, 온당하지도 않은 말 같지만, 요즘의 전하를 뵈면, 지난날 전하가 외로우셨고 오늘날은 외로움 없이 좋으시겠구나 하는 것을 느끼옵니다.”
“그러나 밤중 보고를 계속 제한할 수는 없음이다, 이 말씀인가.”
“송구하옵니다.”
등우가 몸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내가 어떻게 해 보겠네.”
“어떻게요……?”
용아의 다짐에 등우가 대번 의구심을 드러냈다.
“잘……?”
용아가 자신 없는 얼굴로 말했다.
“될까요.”
그러자 등우가 대놓고 의심했다. 태자에게 등우가 말했음을 알리고 그의 태도를 바꾸어 주십사 청하는 것이 가장 빠를 테지만 그랬다간 등우와 태감들을 가만두지 않을지도 몰랐다. 궁인들 역시 그를 알기에 눈치껏 할 일만 하고 있었다.
“해 보겠다니까.”
용아가 자신 없이 말했다.
“믿사옵니다.”
등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힘내소서! 응원했다.
깊은 밤, 침상 안에는 평온한 숨소리만 있었다. 용아는 탈진해 잠들었다. 온몸에 힘이 전부 빠져나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깊은 잠속으로 가라앉으며 용아는 다짐하고 또 되뇌였다.
1각 후에 깨어난다. 1각 후에 깨어나…… 1각 후에 깨어…….
간절히 바란 덕인지 짧고 깊은 잠에 들었던 용아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깨어난 시야 앞에 잠기운이라고는 없는 반듯한 얼굴이 용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윤제가 가물거리는 얼굴을 향해 소곤거렸다.
“왜 깼느냐. 잠이 안 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용아는 하마터면 투덜댈 뻔했다.
“전하는 안 주무십니까.”
다감한 시선을 보내는 얼굴을 향해 용아가 물었다. 윤제가 용아의 얼굴 아래에 고아둔 팔을 접어 당기며 속삭이는 얼굴을 가까이로 가져왔다.
“자야지.”
바싹 다가선 입술을 향해 남자가 소곤댔다.
“안녕히 주무세요.”
잠에 흠뻑 적셔진 얼굴이 웃으며 윤제의 입술에 자잘한 입맞춤을 내렸다. 웃음을 흘리는 얼굴을 향해 용아 역시 웃음을 퍼트렸다. 그리고 속으로 나직이 되뇌었다.
잠이 든다. 잠이 든다. 잠이 든다…….
조용한 말을 되뇌다 자신이 잠들 뻔했지만 이내 윤제는 잠이 들었고, 용아는 잠든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용아는 섣부르게 굴지 않았다. 잠든 남자의 얼굴을 오랫동안 감상한 후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억지로 잠을 깨운 탓인지 뒷머리가 얼얼했다.
일어나려는 등 뒤에서 아주 낮고 고요한 저음이 울렸다.
“어디 가.”
“…….”
용아는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애처럼 얼어붙었다.
“화아?”
윤제가 상체만 일으켠 벗은 뒷몸에 입을 맞췄다. 둔부 옆쪽과 허리, 등, 견갑골과 목덜미에 입을 맞춘 윤제가 멈춘 채 꼼짝 않고 있는 용아의 뒤에 몸을 붙여 기대며 웃었다. 맨살에 남자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흠칫흠칫하기만 하던 용아가 천천히 옆을 돌아봤다.
“안 주무셨어요?”
“응.”
“왜요.”
용아의 말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따지는 듯한 기색이었다. 윤제가 키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단 향이 나는 매끈한 살에 입술을 묻었다가 떼어 냈다.
“너 하는 짓이 귀여워서?”
용아가 몸을 완전히 돌려 윤제를 바라봤다.
“전하.”
“윤제 형, 해 봐.”
윤제가 어린애를 어르듯 달달하게 속삭이며 입술을 내려 맨가슴을 더듬었다. 겨울 밤공기에 쓸려 소름이 돋은 것처럼 예민해진 유두 위에 젖은 입술이 겹쳐지며 야한 소리를 퍼트렸다. 젖꼭지가 빨리는 감각에 용아가 어깨를 흠칫 구겼다.
“아.”
젖은 입술에 빨린 유두 위에 뜨거운 혀가 굴려졌다.
“어서.”
밤마다 금당대에서 보내고 아침에 깨어나지만 매일 밤 삽입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은 그랬지만, 얼마 전부터 윤제가 적당한 여유를 두고 밤을 취했다. 고환이 텅텅 비도록 서로 만지고 비벼대 다리 아래가 축축하게 젖었지만 다른 밤보다는 움직이기 수월했다.
“윤제 형, 안 돼…….”
복근을 따라 입을 맞추고 내려가는 얼굴을 용아가 붙들었다.
“안 돼? 싫어?”
용아의 손에 붙들린 얼굴이 열이 오른팔 안쪽을 비비고, 하복부로 머리를 들이밀려 하며 속삭였다. 용아가 작게 키득거리며 말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안 돼……! 윤제 형, 소제의 눈앞이 비틀비틀합니다.”
용아의 엄살에 윤제가 움직임을 멈추고 웃었다.
“어디 가려 했느냐.”
윤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 방예요…….”
용아가 웅크렸던 몸을 굴려 엎드려 누우며 속삭였다. 베개 속으로 숨어드는 듯한 몸짓을 지켜보던 남자가 난처해하는 뒷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단호한 저음이 울렸다.
“가지 마.”
용아가 무어라 하려 했다. 윤제가 엎드리고 있는 용아의 위에 덮여 있는 이부자락을 확 걷어 냈다. 무방비하게 엎드리고 있는 늘씬한 벗은 뒷등으로 시선이 내렸다. 목덜미, 어깨, 등, 옆구리에 점을 찍듯이 내려오던 입술이 곧바로 주름진 구멍 위를 뒤덮었다.
잠시 잦아들었던 젖은 소리가 격렬하게 울렸다.
“……윤제 형…….”
용아가 허리를 비틀며 숨을 헐떡였다. 무방비하게 길게 엎드려 있던 몸은 남자의 손에 밀리고, 힘에 들썩여 엉덩이가 들뜬 모양이 되었다. 엉덩이 사이에 파묻혀 아래를 빠는 입술이 곳곳을 타액으로 물들였다.
“응, 싫어?”
“안 싫어. 그런데 정말 죽어요…….”
용아가 신음하며 애원했다. 헐떡이는 목소리의 간절한 말에 힘을 받고 있는 용아의 앞을 더듬던 손이 우뚝 멈췄다. 엉덩이에 묻힌 얼굴이 키득키득 웃었다. 예민한 맨살 위에 번지는 뜨거운 숨에 용아가 약하게 버둥댔다. 윤제가 움칫대는 엉덩이 윤곽을 따라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안 죽어.”
“죽어요. 죽을지도 몰라요. 이제는 해도 물 밖에 안 나올 거예요. 복상사는 사내의 염원이라는 자들도 있지만 저는 복상사는 사내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이러지 마세요, 윤제 형.”
용아가 이불을 당겨 아래를 가리기에 급급했다. 윤제의 손이 늘씬한 몸을 가리는 이불 끝자락을 확 잡아당겼다. 부드러운 이불이 용아와 윤제의 손 사이에서 미묘하게 엎치락뒤치락했다.
“네 방에는 왜 가려 했느냐.”
“약속하세요.”
“무엇을?”
“제게 말을 들었다는 내색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무슨 말인지 듣고.”
말이 오갈 때마다 이불도 오락가락했다. 용아가 되지 않는 힘 싸움을 관두고 헐벗은 몸을 방치했다. 표정이 불퉁한 게 너무 과하게 놀린 모양이었다. 윤제가 드러난 맨몸의 허리 아래를 슬그머니 가려 주며 몸을 붙이고 누웠다. 용아가 몸을 돌려 남자를 등졌다.
“태자께서 나를 아껴 준다는데 다 뻥입니다.”
“그게 왜 뻥이야.”
윤제가 용아의 목덜미를 빨며 속닥거렸다.
“약속.”
용아가 몸을 돌리는 척하며 말하려 했다. 커다란 손이 다리 사이를 더듬어 힘이 들어간 성기와 고환 전체를 험악하게 주물거렸다. 용아가 약하게 버둥거리며 윤제 형을 연신 찾았다. 헐떡이는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용아의 몸 위로 커다란 몸이 옆에서 덮쳐 왔다. 소리를 낮춘 채 헐떡이는 용아의 몸 위로 몸을 겹치며 윤제가 빠르게 속닥였다.
“너무한 것 아니냐. 듣지도 못했는데 무작정 약속부터 하라니. 화내지 못하게 근원부터 강제하는 그런 못된 것은 어디서 배웠어. 차라리 그냥 화내지 말라고 부탁해라.”
용아가 바싹 닿은 몸에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화내지 마세요.”
그가 말한 대로 용아가 대놓고 애원했다.
“……일단 듣고…….”
윤제의 팔이 움칫했다.
“화내지 마세요.”
용아가 다시 남자의 맨살에 뺨을 비비며 속닥였다.
“이러는 게 어딨어.”
윤제의 투덜거림에 용아가 당당히 말했다.
“이러라고 했잖아요.”
“뭔데.”
윤제가 눈썹을 구기며 말했다. 원근감이 사라지도록 얼굴을 맞댄 채 떠드는 건 몇 번을 반복해도 기이하고 낯설었다.
“전하는 폐하의 정무를 돕고 계시죠.”
“그렇지.”
“폐하께서 밤중에 보고를 듣는 일이 없도록 태자께서 군영에서 올라오는 화급한 소식이나, 황성 안 치안과 관련한 보고를 받으시죠.”
“응.”
윤제의 얼굴에 불편함이 선명히 일었다.
“요즘 밤엔 어떻게 하십니까.”
용아가 남자를 향해 말했다. 윤제가 확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서려 했다. 일어나려는 뒷등에 용아가 와락 달려들었다. 맨살에 맨살이 맞닿으며 두근두근 심장의 울림이 또렷이 느껴졌다. 윤제가 등에 거북이 등딱지처럼 착 붙은 용아를 깨닫고 인상을 잔뜩 썼다.
윤제가 등 뒤에 붙은 몸을 만지며 말했다.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저만 욕먹는단 말입니다.”
용아가 침상을 나서려는 남자의 몸을 돌려 돌아앉은 허벅지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를 무게로 내리눌러 가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슬쩍 스친 성기가 꿈틀꿈틀했다. 윤제가 손을 내려 아랫배를 스치고 간 용아의 것을 쓱 훑었다. 용아가 약하게 몸을 떨었다.
“야하긴.”
용아를 음란타 타박하는 남자의 것이 허벅지 안을 툭 때렸다. 용아 역시 손을 내려 핏줄 선을 쓱 훑으며 속닥거렸다.
“보고는 들으셔야죠.”
“듣고 있어.”
“새벽에 일어난 뒤에나 듣는다면서요. 저만 욕먹는다니까요. 제가 태자 전하의 눈과 귀를 가리는 요악한 태자비라는 말을 듣는 게 좋으세요?”
“그런 말 신경 쓰지 마.”
“안 듣게 해 줘요.”
용아가 앞으로 몸을 기울여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래가 맞닿으며 저릿저릿한 감각이 올랐다. 축축한 소리가 침상 안에 울렸다.
“한창 중요할 때 들어오면 나도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는데.”
“그땐 못 들어온대요, 아!”
한껏 열이 오른 목소리가 서로에게 속닥였다.
“제대로 만져 봐.”
“응, 하고 있…… 아, 아……!”
“그런 말 신경 쓸 것 없다. 쓸데없는 말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들은 조만간 이 형이 다 처치할 테니까. 허벅지 사이에 해도 돼?”
윤제가 제 허벅지 위에 앉아 있던 몸을 옆으로 돌려 눕혔다. 용아는 비스듬히 엎드려 턱 아래에 팔을 괴었다. 앞이 만져지는 감각과 붙인 허벅지 사이로 들어오는 커다란 것에 젖은 숨을 토하며 낮고 낮은 소리를 흘렸다.
잠깐 잠들기 전에 수차례 커다란 것이 비비고 간 여린 살이 쓰라리고 아팠다. 그럼에도 금세 열이 오르며 말도 안 되는 감각이 등 전체를 집어삼켜 근육이 뻣뻣하게 움츠러들었다가 풀어졌다. 울음 같은 신음이 흐릿하게 오르내렸다. 윤제의 몸이 바싹 다가설 때마다 밭은 숨이 턱턱 올랐다.
커다란 손에 파정하는 순간 얼굴을 돌려 다가온 입술을 빤 용아가 신음하며 말했다.
“그것들은 소제가 곧 해치울 겁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속닥이던 용아가 숨을 멈췄다.
윤제가 신음하느라 웅크린 귓가에 소곤거렸다. 남자의 말을 들은 용아의 귀가 한껏 붉어졌다. 신음이 더 짙어졌다. 헐떡이는 밭은 소리와 맨살이 찰박이는 소리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깊고, 깊은 밤이었다.
입춘(立春), 봄이 왔다 하지만 떠도는 바람은 차갑기만 했다. 깨달을 수 없는 봄이 시작된 아침. 영화대 앞에 흠덕전의 궁인이 시립해 있었다.
“태자비 전하. 비전하를 뵙습니다. 강녕하셨습니까.”
흠덕전 상궁의 예에 태자비를 뒤따르던 영화대의 궁인들이 머리를 낮추었다. 용아는 영화대 대문에 붙여 둔 입춘축을 눈으로 더듬으며 생각을 골랐다.
입춘대길(立春大吉), 입춘에 크게 길하다.
최근 용아는 태자와 정천궁에 문안을 올리고, 정천궁에서 혹은 금당대에서 아침을 든 후에 함월전을 들렀다가 영화대로 돌아왔다. 만약 태자비의 최근 행보를 모르는 이라면 영화대 앞에서 기약 없이 기다렸을 것이다. 영화대의 태자비께 뵙길 청하는 게 아닌, 영화대로 돌아오는 태자비 일행에게 직접 예를 올리는 상궁은 용아의 행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일어나세요. 흠덕전의 상궁이 아니신가. 황후께서는 강녕하신가.”
“기억해 주시옵니까.”
“물론이네.”
용아는 무난히 답하며 대화를 마쳤다. 흠덕전의 상궁은 비켜서지 않은 채 멈추어 있었다. 태자비를 막아선 형국이었다. 태자비 뒤를 따르던 모장이 곁으로 나서며 말을 건넸다.
“고 상궁께서 예는 어쩐 일이십니까.”
모장의 질문에 고 상궁은 태자비에게 답을 올렸다.
“황후께서 태자비 전하를 찾으시옵니다.”
미묘한 대치였다.
“상궁은 밖에서 기다리게. 환복하고 흠덕전으로 가겠다.”
“예, 비전하.”
용아의 말에 모장이 불편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염려를 표하면서도 손짓으로 명을 내려, 영화대 안으로 드는 태자비의 움직임에 조금의 지체도 없게 했다. 영화대 안을 지키고 있던 궁인들이 태자비가 돌아온 걸 반기다가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알아차리고 높였던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셨습니까.”
옆을 따라붙는 목교에게 용아가 선선히 말했다.
“응. 별일 없었느냐.”
“예. 찾아온 이도, 따로 온 연락도 없습니다. 환복하셔야지요?”
목교가 전전의 문을 열며 고했다.
“정례 때 입는 것으로 챙겨 두거라.”
“예.”
궁인은 더 말 붙이지 않고 명을 따르고자 옆방으로 재빨리 건너갔다. 아직 날이 추웠다. 재빠르게 곳곳에 화로가 놓였다. 의복을 갈아입을 방에도 가벼운 화로가 들여졌다.
“비전하.”
밖을 살피고 안으로 들어온 모장이 용아를 불렀다.
“황후전에서 온 것은 처음이지?”
“그러합니다.”
황후에 대한 태자의 거부는 변함없었다. 몇 년이 지난다 해도 변치 않을 터였다. 윤제는 정인이었던 진안과의 시작과 그녀의 행동이 계획된 것이란 것에 실망했지만, 그보다 모후로 여겨온 황후의 기만에 더욱 분개했다. 진안에 대한 배신감보다 어머니로 여겨 온 황후에 대한 거부감이 더 크고 높았다.
용아는 태자비로, 태자의 입장을 존중해 뜻과 행동을 같이했다. 이런 상황에 황후가 용아를 따로 불러들이는 건 곤란한 일이었다. 태자비에게 태자를 계속 따라 부부의 신의를 지킬 것인지, 황후를 뵈어 예법과 충효를 지킬 것인지 묻는 행위였다.
“별거 없지 않을까.”
용아의 순진한 혼잣말에 모장이 도끼눈을 떴다.
“그럴 리가요.”
“걱정 마.”
“가지 마십시오. 태자께 고하시고 버티십시오. 황후께서 전하와 비전하 사이를 이간하는 것입니다. 의도가 너무도 명백하옵니다. 거부하셔도 되옵니다.”
모장이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다간 온 중경에 황후를 무시하는 요악한 태자비라 떠들썩할걸.”
“그치들이 떠드는 게 무어가 어떻습니까. 저에게는 좋기 만한 분인 것을요! 황후궁 안에 드실 때 소인들을 대동하실 수 없습니다. 홀로 안에 들었다가 괜한 해코지에 휘말리면 어찌한답니까. 무엇보다 전하께서 좋아하시겠습니까. 전하를 기만한 이입니다.”
용아가 모장을 돌아봤다.
“모장은 어떻게 알아?”
“죄인이 추궁당할 때 혼자 죽지 않고자 전부 다른 이에게 죄를 떠넘긴 탓에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떠넘김 받은 이들이 황후이시고, 승상이니 쉬쉬할 뿐이지요.”
모장이 순진한 주인을 염려 가득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걱정 마.”
용아가 말리려는 손을 붙들며 웃었다.
“비전하…….”
“비전하, 준비를 마쳤습니다.”
모장이 용아를 붙들고 설교를 늘어놓으려 할 때, 목교가 건넛방의 문을 열며 알렸다. 용아는 걱정 가득한 이의 손을 잡고 옆방으로 향했다.
방 안으로 든 모장의 얼굴이 바뀌었다.
“내가 잘하면 황후께서 별말 않으실 거 아닌가.”
목교가 준비해 둔 것은 황궁 침방에서 보내온 정복이었다. 태자의 것과 어울리게 만든 태자비의 정복은 중경 황족의 복식을 따르고 있었다. 용아가 제북에서 왔기에 이곳의 것을 강요하지 않는 모장이지만, 한번쯤 태자비가 태자와 맞춰 입어 주길 청할 셈이었기에, 준비된 옷을 본 모장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모장이 궁인들을 내어보내며 아름다운 포를 손으로 쓸었다. 끝자락이 전부 치렁치렁한 것이 보기만 해도 번거로움이 전해져 왔다.
“이 사람을 괴롭히실까.”
“황궁 예법이 얼마나 고약한 줄 아십니까. 연장자가 아랫사람을 곤란하게 하고자 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소인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요.”
“그럼, 입지 말까.”
새삼 정복을 보니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비슷한 걸 입고 가면 덜 생경할 테지요. 일어서 보시지요. 색이 잘 어울립니다. 이걸 입고 전하와 연회에 가셔야 하는데, 흠덕전에 가야 한다니요, 휴우. 머리는 어떻게 할까요.”
모장이 용아의 몸 위에 옷을 한번 대어 보고 아쉬움에 표정을 흐렸다가 생기발랄한 얼굴로 머리 모양에 대해 말했다.
“……어울리는 대로 해 주어…….”
용아가 입고 있던 것을 느릿느릿 벗으며 말했다.
“소인만 믿으십시오.”
모장이 전투력이 듬뿍 느껴지는 얼굴로 답했다. 용아는 뒷머리를 손으로 살짝 감싸서 쥐며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잔뜩 머리를 꾸밀까 두려워하다 말았다. 머리를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속에 입는 것만 서너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옷 자체를 걱정해야 했다.
“역시 이대로 가는 건 어떨까.”
용아가 몸을 빙그르 돌려 보이며 말했다.
“머리 모양 구상이 끝났사옵니다. 팔을 내어 보소서.”
“예, 상궁.”
“아주 헌앙하실 겁니다.”
모장이 걱정을 지우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중경의 황족 정복으로 차려입은 태자비를 본 고 상궁이 새삼스레 예를 올렸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비전하, 참으로 기려하십니다.”
고 상궁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고맙네.”
상궁에게 답례의 말을 건넨 용아가 옆으로 얼굴을 낮추어, 헌앙할 거라고 했잖아? 라고 따졌다. 모장이 기려하다는 곧 헌앙하다는 것, 이라고 항변했다.
고 상궁의 안내를 따라 태자비 일행이 흠덕전이 있는 내궁으로 향했다. 흠덕전은 내궁 안에서 비교적 동선이 짧은 곳에 있었다. 정천궁과 동궁전, 일주대까지 효율적으로 갈 수 있으면서 황후의 위엄을 세울 수 있는 규모의 전각이었다. 역대 황후들이 기거하던 곳이긴 하지만 많은 황후의 선택을 받은 곳은 아니었다.
조금 새삼스러웠다.
내궁 안 황후가 택한 전각에서 그녀의 의도가 엿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과한 해석일지도 몰랐다. 용아가 흠덕전의 묘한 위치에 새삼 깨닫고 있을 때, 전각 앞에 당도했다.
“드소서.”
“잠시 물러나 있게.”
안으로 들 것을 권하는 고 상궁을 용아가 부드럽게 물렸다.
“예.”
고 상궁은 썩 내키는 기색이 아니었으나, 안으로 어서 들라 독촉할 상황도 아니기에 태자비의 청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고 상궁이 몇 걸음 물러났다.
“더 물러나 주게.”
용아가 노골적으로 상궁을 경계했다.
“송구하옵니다.”
고 상궁이 머리를 낮추며 몇 걸음 더 물러났다.
“조금 더 물러나게.”
용아는 고 상궁이 완전히 물러난 후에야 모장을 돌아봤다.
“비전하.”
모장은 못된 태자비가 되더라도 자신을 동행토록 하라 아뢰었다. 용아는 거부했고, 둘은 그것으로 단장하는 내내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았다.
“걱정 마시오, 모장 어멈. 이 태자비는 야만한 땅에서 온 요악한 것이니. 내가 1각 내에 나오지 않거든 부황께 사람을 보내도록 해.”
“전하가 아닌 폐하께요?”
“부황께서 황제이시니 내게 소원 하나쯤 들어주실 수 있다 하였거든. 부황이 오시면 곁에서 정무를 보고 있는 전하도 당연히 오실 것이다. 별일 없을 테니 너무 염려는 말고. 다녀오겠다.”
용아가 말을 마치고 고 상궁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뢸까요.”
상궁이 깍듯한 태도로 태자비를 맞았다.
“고해라.”
모장은 흠덕전 궁인이 여는 문 안으로 들어서는 주인의 뒷등을 염려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영화대 궁인들은 전각 앞마당에 들어오긴 했으나 전각 안으로까지 들 수 없었다. 황후가 허락했다면 함께 들어오라 하였겠지만 그런 말은 없었다. 태자비가 아무리 태자비라 하나, 사내이니 황후가 못된 마음을 먹자고 하면 그것으로 얼마든 일을 꾸밀 수 있었다.
모장의 얼굴에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서 당장 나가 1각 이후에도 태자비께서 나오지 않으면 정천궁 좌태감에게 고해, 태자비의 청이라 알리고 폐하를 모셔 오너라.”
“예, 상궁.”
모장의 속삭임에 궁인이 답하고 재빠른 걸음으로 전각을 나섰다. 흠덕전의 또 다른 상궁이 전각을 떠나려는 목희의 앞을 막아섰다.
“그대는 어딜 가는가.”
목희는 상궁께 예를 올리고 답했다.
“태자비께서 항상 지니고 계시는 쥘부채를 영화대에 놓고 와 불안하니 가져다 달라고 하셔서 가지고 오고자 합니다. 금방 다녀올 것입니다. 태자비 전하의 명이옵니다.”
“그래. 어서 다녀오게. 칭아, 함께 다녀 오거라.”
“예.”
목희의 곁에 어린 궁인이 붙어 섰다. 황궁 안 내궁을 오고 가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 궁인에게 길 안내를 해 줄 필요도 없는데 옆에 궁인을 붙이는 건 감시의 목적뿐이었다.
낭패야.
목희가 태자비가 든 전각을 돌아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흠덕전 안은 사치한 태가 나지 않는 것을 중시하면서도 꾸밈에 빈틈이 없는 주인의 성정과 닮은 모습이었다. 곳곳에 사치한 것이 놓여 있는데, 호화로움보다는 장중함과 우아미가 돋보였다.
“드시지요.”
고 상궁이 내방객을 맞는 곳으로 태자비를 모셨다. 동궁전, 태자비의 거처인 영화대도 전각의 규모가 적지 않으나 황후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열리는 문 너머 한참 먼 거리에 상석이 있었다. 이전에 흠덕전에 왔을 때 황후의 휴식처로 쓰이는 소박한 방에 초대된 것을 생각하면 이상하도록 격식을 차린 만남이었다.
용아는 상궁의 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상석을 향해 걷던 고 상궁이 걸음을 멈추어 태자비에게 시선을 주었다. 상궁의 움직임에 맞추어 용아가 멈추어 섰다. 가까이서 본 상석은 까마득하기까지 했다.
“황후마마.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그간 뵙지 못하여 송구하옵니다. 강녕하셨습니까.”
용아가 상석을 향해 예를 올렸다.
“태자비, 잘 지냈는가. 본궁은 아쉽게도 잘 지내지 못했다네. 이제 나이가 들었는가 자주 아프고 울적해져, 태자와 태자비의 소중한 문안도 받지 못하였구나. 태자는 본궁의 무엇을 오해하였는지 흠덕전을 찾아 주지도 않아. 태자비가 찾아와 주기를 바라였는데, 태자를 거스르고 오기 힘들었는가.”
상석의 우아한 음성이 직설적인 말을 던졌다.
“송구하옵니다.”
용아는 엎드린 체머리를 숙였다.
잘그락.
예를 올리는 용아의 요대에 걸린 우아한 각낭에서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옆으로 떨어진 각낭을 용아가 부드러운 손짓으로 당겨 무릎 곁으로 가져갔다. 깊이 숙인 머리 위로 한동안 시선만 내렸다.
“일어나세요.”
황후가 너그러이 말했다.
“황공하옵니다.”
용아는 황후가 문안만 받고 물리면 엄격히 예를 올리고 물러나고자 했다. 황후는 비록 죄가 있으나, 예를 받을 만했다. 그러나 황후가 어설픈 술수를 쓰고자 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황후는 본 적도 없는 용아에게 정인을 빼앗아 간 악연이었다. 황후가 뺏고자 한 것은 태자비의 짝이 될 태자였고, 용아와 개인적 원한을 쌓고자 함은 아니었을 테지만, 용아에게 악연인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황후의 행동 여하에 따라 용아는 오늘 황후를 끝장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최근 황궁 밖에 태자비에 대한 과한 말들을 부추기는 이들 중 필시 황후가 있을 터였다. 의심스러운 것은 황후만이 아니었고,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아마도 부추기는 이들의 마음이 때마침 중첩됐으리라.
용아는 몸을 일으키고 물러가라는 말을 기다렸다.
“태자비는 더는 본궁을 어미라 여기지 않는가.”
상석에서 서글픈 목소리가 내렸다.
“송구하옵니다.”
용아는 다시 몸을 숙여 무릎을 꿇고 머리를 낮추었다. 예를 올리며 용아는 저리 슬퍼하는 목소리가 거짓이라는 것에 감탄했다. 권력을 움켜쥐고자 하는 이들은 저만한 기만은 당연한 것인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이하여 송구하다고만 하는 것이오.”
쓸쓸한 목소리가 마치 진심 같았다.
“…….”
태자가 황후를 모후라 부르지 않듯이, 용아도 황후를 더는 모후라 칭하지 않았다. 그처럼 황후도 태자를 아드님이라 칭하지도, 용아를 아가라고 부르지 않고, 태자와 태자비로만 부르고 있었다. 서로의 입장차를 암묵적으로 이해하고 호칭을 입 밖에 낸 것인데 용아에게만 서운함을 표하는 작태가 우스웠다.
“태자비.”
상석에서 다시 목소리가 내렸다.
“송구하옵니다.”
용아가 머리를 낮추었다.
탕!
황후가 우아하게 화를 드러냈다. 팔걸이를 치는 소리에 흠덕전 상궁과 궁인들이 태자비를 대신하여 죄를 청했다.
“마마, 화를 가라앉히소서.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옵니다. 마마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노비의 죄가 크옵니다!”
고 상궁의 선창을 궁인들이 분분히 따랐다.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옵니다. 마마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노비의 죄가 크옵니다.”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옵니다. 마마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노비의 죄가 크옵니다.”
궁인들의 일사불란한 외침 속에서 용아는 희게 웃었다.
“태자비께서는 무엇을 하십니까. 마마께서 내린 하문에 올바르게 대답하소서!”
머리를 숙인 궁인이 용아를 엄중히 재촉했다. 일개 궁인이 함부로 태자비를 책할 수 없었다. 황후의 명이나, 재가가 있음이 분명했다.
용아가 낮췄던 머리를 바르게 하며 입을 열었다. 단정한 손이 무릎 곁에 흐트러져 있는 각낭을 정갈하게 한쪽으로 넘겼다.
“황후마마.”
“말하여라.”
답하는 황후의 목소리가 시렸다. 노골적인 압박에도 돌아온 부름이 황후마마라는 것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른 듯했다. 태자비는 황후의 입장에서도 쉬이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황후마마를 어미라 여기지 않느냐 하셨사옵니까. 이 사람에게는 어미가 없사옵니다. 마마를 황궁에 와 모후라 칭하는 것은 황궁의 예법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마마와 진정 모자의 정을 이을 수 있을지도 몰랐을 테지만, 마마께서 하신 일을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이 어찌 마마를 어머니라 부르겠습니까.”
태자비가 적법한 이라고 하나 황후를 상대로 이토록 방자할 게 굴 수 없었다.
“본궁이 무엇을 잘못하였다고, 너희는 본궁에게 굴레를 씌우려 하느냐!”
“마마께서 양제를 태자께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본궁이 죽은 죄인 진씨를 마뜩해하지 않았다는 것은 온 황궁이 다 아는 일이다! 너는 어이하여 죄 없는 이를 핍박하는 게야. 본궁에게 죄를 씌워 태자비에게 좋을 게 무어가 있나!? 이러니 태자비를 황궁 밖에서 요악한 것이라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말이 나도는 것 아니겠나!”
황후가 소리를 높였다. 황후가 내리는 말을 듣고 있던 낮춘 얼굴이 조용히 속삭였다.
“요악.”
용아가 다음 순간 몸을 일으켰다.
“감히 뉘 앞이라고 그리 무엄하게 구느냐! 태자비라 하나 황후 앞이라는 걸 잊었는가, 태자비는 위아래도 없는 것이냐. 태자비를 요악하다고 떠드는 말을 들었다면 경거망동하지 않고자 하여야지! 요악하다는 말 자체를 듣지 못하였나. 태자께서 태자비에게 듣기 나쁜 것은 숨겨 주시나 보오. 태자께서 곁을 주고 아끼실 때 한정 없이 다정한 이이지.”
황후가 보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며 떠들었다. 우아한 얼굴에 서리처럼 차가운 비웃음이 올랐다. 그것이 아마도 황후의 본모습인 듯했다.
오늘 끝을 내드리지.
용아가 상석을 올려보며 고요히 말했다.
“황후마마. 계후가 된 첫날밤 폐하를 뵐 때 설핏잎에 아시게 되었겠지요.”
“……무어라! 무슨…….”
“그리 당황 마소서. 제북에서 설핏잎은 널리 알려진 것이라 어린애도 아옵니다. 황궁과 중경 안에서는 비밀이옵니까. 염려 마세요. 열린 귀들이 담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면 전부 죽여 없애면 그만 아니옵니까. 인자하고 덕 많은 황후께서 하지 못하시면 이 요악한 태자비가 해드리겠습니다. 설핏잎에 관하여 양제에게 알려 주고, 양제를 태자께서 다니는 길목에 놓아둘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본 적 없는 제게 큰 짐을 짊어지게 해 주며 고소하셨습니까, 유쾌하셨습니까. 기대감에 밤잠 못 주무셨던가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태자께서 어려서 착한 아드님이었다면서요. 어릴 때부터 태자께서 일간 들고 날 곳을 부황보다 황후께 더 소상히 고해 어머니라 여긴 당신의 염려를 거둬 주려 하였거늘. 어찌하여 당신을 모후라 부르는 전하를 기만하고, 본 적 없는 나를 들이기 전부터 핍박하였습니까.”
황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헛소리!”
용아가 상석으로 가는 목계를 성큼성큼 올랐다. 잘그락. 목계를 오르는 단정한 손에 붉은 구슬 두 개에 담겨 있었다. 황후 앞에 웅크려 복종하며 태자비에게 은근한 강요를 하던 궁인들 사이에 소요가 일었다.
“비, 비전하!”
“마마!”
“비전하, 멈추십시오! 무엄하십니다!”
궁인들이 용아를 뒤따르려다 계단 앞에서 머뭇댔다.
“요악한 태자비의 헛소리인가.”
“저리 가지 못하겠느냐.”
“당신은 황후가 될 자격이 없다.”
용아의 손이 황후의 손에 겹쳐졌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황후가 팔을 떨쳤다. 그녀가 대노하였다.
“감히……!”
화를 내려던 황후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황후의 가벼운 떨침에, 상석 곁에 있던 용아가 계단 아래로 등부터 떨어져 내렸다. 쿵! 무서운 소리가 전각 안에 울렸다.
“꺄아아악!”
“비전하!”
“비, 비전하!”
태자비가 추락하는 것을 보며 비명을 내지르던 궁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파리해진 것은 황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좌에서 엉거주춤 일어선 황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용아가 떨어져 내린 몸을 웅크렸다.
“아악……!”
황후가 굳은 얼굴로 더듬더듬 손을 움직였다. 움직임 날랜 상궁들이 용아에게로 다가갔다.
“비전하!”
용아가 몸을 웅크린 채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라!”
태자비를 살피려던 상궁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비, 비전하…….”
“피가…….”
“……아래에…….”
상궁들의 달싹거림에 궁인들 역시 하얗게 질려 갔다.
“피라니?”
상석의 황후가 멎은 것처럼 움직임을 굳히며 아래를 바라봤다. 용아가 몸을 깊이 웅크리며 희미한 소리를 내뱉었다.
“아…….”
용아가 몸을 웅크릴수록 겉으로 보이는 출혈량이 늘어났다. 서슬 퍼런 기색으로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상궁들은 눈동자만 바삐 움직이며 눈치를 보았다.
“문을, 문을 단속하여라!”
황후가 굳은 얼굴로 명했다.
“모후…….”
용아가 울음 가득한 얼굴로 상석을 돌아봤다.
“네가 스스로 떨어져 내린 것을 모를 줄 아느냐! 본궁에게…… 무슨 죄를 씌우려 그리 엄살을 부리는 게야!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황후가 희게 질린 얼굴로 진노했다.
“비전하……!”
전각 밖 문 앞에서 모장과 영화대 궁인들의 목소리가 거셌다. 문으로 다가오려는 이들을 밀치고 넘어뜨리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모후…… 소자가 모후를 찾지 않음에 서운케 하였다 하나…… 태중의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리 핍박하십니까.”
울먹울먹한 얼굴이 내뱉는 말에 황후와 흠덕전 궁인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들이 풀릴 줄 몰랐다.
“태중…… 아이라니…….”
황후가 보좌에 털썩 주저앉았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흠덕전의 궁인들이 창백하게 질린 황후와 울먹이는 태자비 사이에서 방황했다.
“용종(龍種)을 해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용아가 가련한 얼굴로 호소했다.
“모두 비켜라!”
그때 문 건너에서 위엄 가득한 소리가 울렸다.
황제였다.
전각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강제로 열리며 황제와 태자가 나타났다. 황제와 태자가 안으로 들 때마다 흠덕전 안의 인영이 재빠르게 물러났다. 소낙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와 물러나는 움직임이 뒤섞였다.
“용아!”
윤제가 쓰러져 있는 용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태의! 당장 태의를 불러오라!”
황제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폐, 폐하…….”
보좌 곁에 웅크리고 앉은 황후가 떨리는 음성으로 황제를 불렀다.
“이것이 다 무슨 일인가.”
황제가 분노를 내리누르며 상석을 향해 물었다. 황후는 황제를 맞아 상석에서 내려와 예를 올려야 했으나 사방에서 내리누르는 황족의 권능에 운신의 자유를 잃은 채 그저 떨기만 했다.
“신첩…… 신첩이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이는 모두 음해이옵니다! 신첩이 용종을 해친 것이 아니옵니다, 폐하!”
황후의 말을 들은 황제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용종.”
갑작스레 전각을 타고 우르르 땅 울음이 울렸다. 윤제가 용아를 품으로 안으며 울먹이는 얼굴을 감쌌다. 윤제의 목덜미에 숨어든 얼굴은 울상이었으나 정작 울음은 묻어나지 않았다. 황제의 사나운 권능으로부터 용아를 보살피려 한 윤제는 용아가 그에게 몸을 겹쳐 오는 순간, 황제의 권능에서 무관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금 난처해했다. 보호해 주려 감싼 것인데 정작 그가 보호받게 되었다.
황제가 내리는 분노에 사방이 끝도 없이 희미하게 진동했다. 황후의 얼굴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얼어붙었다. 그녀의 얼굴이 잘게 내저어졌다.
“아니옵니다, 이는 음해이옵니…….”
황후가 황족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허면 문은 무엇 때문에 걸어 잠갔느냐!”
황제의 노성에 황후가 머리를 감싸고 떨어 댔다.
“폐하, 신첩을 버리시려 하시나이까. 폐하, 살려 주소서…… 태자! 태자, 이 어미를 버리려 합니까…… 모두 요악한 태자비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이 요약한 것! ……살려 주세요, 폐하. 살려…….”
황후는 보좌 다리에 기대어 악을 쓰다가 애원하며 울음을 쏟았다.
“태자는 태자비를 정수궁으로 데려가라.”
“예, 부황.”
“왕공 대신들을 정수궁으로 보내 태자와 태자비를 지키게 하라. 태의는 어떻게 되었느냐!”
윤제가 용아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태자와 태자비를 따라 궁인들이 흠덕전에서 빠르게 물러났다. 정천궁 태감들이 도망치려거나 숨어든 흠덕전의 상궁과 궁인들을 붙잡아 전각 밖 앞마당에 꿇려 놓았다.
전각 안에는 황제와 황후만이 남았다.
“황후.”
상석의 목계를 오른 황제가 덜덜 떨고 있는 여인을 불렀다. 황후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고발했다.
“저것이…… 저 요악한 것이…… 간계를 부린 것입니다. 저 혼자 뒤로 넘어가는 것을 신첩이 똑똑히 보았습니다. 폐하, 신첩의 말을 믿으셔야 하옵니다. 거짓 용종은 3대를 멸해야 하는 대죄이옵니다……!”
황제가 황후 앞에 서며 말했다.
“낙상한 태자비를 감금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있겠는가.”
황후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여인의 작은 어깨가 서럽게 떨렸다.
“……태자비. 태자비라…… 태자비가 고귀한 것은 그저 운 좋게 그리 태어나서이지요! 폐하도 마찬가지이옵니다. 태자도 그렇지요. 신첩도 운 좋은 혈통을 타고나 가진 것이 다르지 않았다면 이리 핍박당하지도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할 말은 그것뿐인가.”
“……황족, 후족…… 대귀족으로 태어나면 무엇한답니까. 황족의 힘 앞에 추하게 무너지고, 후족의 특별함에 모든 것을 빼앗기니…… 폐하가, 황족이 신첩과 같은 이들의 입장을 아시옵니까!”
황후가 눈물을 쏟고 떨며 허망한 웃음을 터트렸다.
“짐과 그대는 달리 태어났다.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나. 가진 것이 다르기에, 자네를 모후라 부르는 아들에게 그리 수를 썼던가. 서로 존중하자던 약속을 모두 잊었나!”
“신첩의 행동은 모두 합당한 것입니다. 가진 것이 다르니 그를 메우고자 피치 못하게 수를 쓸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실 수 없습니까. 가지지 못한 이를 가엾게 여겨 주실 수 없습니까. 서로 존중하자 하였지만, 사실은 폐하께서 한 수가 무업니까, 모두 봐주신 것이지요. 신첩의 앞에서는 화조차 마음껏 내지 못하셨지요. 폐하와 태자 앞에서 두려움을 감춘 채 현숙한 처인 척 어미인 척하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힘겨웠는지…… 평생 모르실 겁니다.”
“나와 그대의 간극을 메우고자, 수를 썼다면 가엾게 여겨 줄 것을 청할 게 아니라 수를 쓴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황제가 내보였던 힘을 모두 거두고 상석에서 내려갔다.
“……폐하…….”
황후가 떠나는 등을 향해 불렀다.
“있느냐.”
목계를 내려선 황제가 말했다.
“찾으시옵니까.”
바깥에 시립해 있던 태감들이 안으로 황급히 들었다.
“황후를 흠덕전 안에 유폐한다. 흠덕전으로 사사롭게 오가는 이가 없어야 할 것이다. 황후의 여러 악행의 정황이 보이니, 황궁 안 감찰궁인들에게 낱낱이 조사토록 명하라.”
“명을 따르옵니다.”
황명에 태감들이 일제히 예를 올렸다.
“…….”
전각 안에는 황후가 울음을 쏟는 소리만 가득했다. 황후의 얼굴을 타고 쉴 새 없이 눈물이 내렸다. 등 뒤에서 울리는 서러운 소리에 시선도 주지 않고 전을 빠져나온 황제가 태감을 향해 말했다.
“정수궁으로 가겠다.”
“모시겠습니다.”
좌첨은 황제를 모시는 한편, 곁을 따르는 태감들에게 유폐를 명받은 흠덕전의 처리를 손짓으로 명했다. 한동안 분주한 움직임이 소리 없이 이어졌다.
정수궁 안은 어수선했다.
“전하.”
전전에 갑작스레 태자와 태자비, 황족을 맞은 정수궁 궁인들은 쉴 새 없이 오가며 부족한 것을 챙기고, 손님 수발에 힘썼다. 용종을 잃고 피를 보였다는 태자비에게 소박하고 안락한 침상이 내어졌고, 왕공 대신들에게는 의자가 내어졌다. 태자에게도 정수궁 궁인들이 공들여 가져다 둔 의자가 있었으나 윤제는 앉지 않고 전전 안을 맴돌고 있었다.
등우가 어지럽게 오가는 윤제를 조심히 불렀으나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윤제의 관심은 침상에 누운 용아와 침상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태자비를 진맥하는 태의에게 고정돼 있었다.
“…….”
용아는 불편해서 숨을 쉬다 체할 지경이었다. 손끝을 물들인 장난감 구슬의 붉은 액이 마음을 불편하게 찔러 댔다.
황후를 끝장내고자 적당히 사기를 치고, 부황께 목숨을 구걸할 셈이었던 간명한 계획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부황이 무섭게 화를 내시는 건 예상한 것이지만 중경 안 모든 왕공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짓 회임을 발각당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방을 빙 두르듯 지키고 앉은 왕공과 황친들의 존재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침상에 엉거주춤 누운 용아는 얼굴이 최대한 파리해 보이길 철없이 기원했다. 태자와 수많은 황족, 긴장한 태자비 사이에서 진맥을 한 고태의가 물러나며 용아를 찾았다.
“비전하.”
“어떠하냐. 목계에서 등부터 떨어졌다. 다친 곳이 있느냐?”
저만치 먼 곳에서 왔다 갔다 하던 윤제가 한달음에 다가와 태의를 다그쳤다.
“경하 드리옵니다.”
고태의가 태자와 태자비를 향해 예를 올렸다.
“……?”
어색하게 누워 아픈 척하고 있던 용아가 당황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온몸으로 나는 아프다, 나는 유산하였다, 주장하던 이가 날쌔게 움직였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고태의가 차분히 얼굴을 낮추며 고했다.
“비전하께오서 회임하셨습니다.”
“……!”
용아가 이번에야말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가까이 있던 커다란 손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놀라 일어나 앉으려는 어깨를 밀어 눕히며 돌아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마침 황제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편에서 예를 올리는 소리가 일제히 울렸다. 윤제가 안으로 들어오는 황제에게 다가갔다.
“부황.”
“새아가는?”
“감축 드리옵니다, 부황. 곧 할아버지가 되시겠습니다. 비에게 다행히 불우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모두 부황의 은혜이옵니다.”
윤제의 축하 인사를 받은 황제께 왕공들도 화급히 축하의 예를 올렸다.
“경하 드리옵니다, 폐하.”
“경하 드리옵니다, 폐하.”
“축하한다, 윤아. 짐이 할아비가 되다니! 너무도 기쁜 일이로다. 우리 새아기, 괜찮으냐. 아니다, 아니다. 누워 있거라. 아가는 이제 혼자만의 몸이 아니야.”
윤제에게 인사를 건네고, 왕공들에게 답한 황제가 용아에게로 다가갔다. 용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엉거주춤, 불편, 어색하게 누워 있으며 고태의에게 몇 번이고 묻고 싶었다.
회임? 회임이라니. 누가 회임하였나.
황제는 진맥을 한 태의에게도 치하했다.
“황공하옵니다.”
황제의 칭찬을 받은 고태의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예를 올렸다. 그 모든 게 꿈만 같았다. 황망해하는 용아의 어깨를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쓸었다.
윤제가 용아의 귓가에 대고 속살댔다.
“좋은 일이잖느냐. 표정 좀 풀어라. 어째 사기 치다 잘못된 것 같은 얼굴이야?”
용아가 멍한 얼굴로 남자를 돌아봤다.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 속삭였다.
“나, 임신했대요…….”
태자와 태자비가 속닥이는 걸 본 황제가 웃음을 흘리며 왕공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전각을 나서는 황제의 등에 웃음이 흘러넘쳤다.
“지금 네 표정 진짜 귀엽다.”
둘만 남게 됐을 때, 윤제가 멍한 입술에 입을 맞추며 키득댔다.
“거짓말.”
“뭐가 거짓말이야. 귀엽다니까. 오늘은 옷도 예쁘다.”
윤제가 정신을 못 차리는 얼굴에 자잘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용아가 간지러운 입맞춤에 뺨을 구기며 다시 멍하니 웅얼댔다.
“내가 임신했다니, 거짓말.”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는 멍한 얼굴을 보고 윤제가 웃음을 퍼트렸다.
“좋다.”
윤제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낯선 침상에 올라 용아를 부둥켜안았다. 남자의 팔에 안겨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깜빡 감았다 뜨던 용아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불쑥 자신을 안고 있는 윤제를 후려쳤다. 윤제는 뼈가 울리도록 얻어맞으면서도 큭큭 웃음을 흘렸다.
용아는 부둥켜안아 온 단단한 몸을 한참 두드렸다. 윤제는 얻어맞으며 자신을 후려치는 사랑스러운 존재를 품에 끌어안았다.
“……거짓말이라고 해 줘요…….”
용아가 가까이 있는 입술을 향해 간절히 부탁했다.
“거짓말 아냐. 나는 좋은데, 너는 싫은가. 괜찮아. 내가 두 배로 좋아하면 되지.”
윤제가 품으로 파고드는 머리에 입을 맞추며 속닥였다. 용아가 추위를 타는 것처럼 남자의 품에 더 깊이 몸을 묻었다.
“나는, 무서워요.”
“괜찮아.”
“내가 모르고…… 잘못될 뻔했어요.”
윤제가 품에 안은 이를 다정하게 쓸어 주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다. 다 괜찮으니까 지나간 건 잊어버려.”
커다란 품 안의 몸이 잘게 떨렸다.
“미안해.”
용아가 맞닿은 몸을 꽉 안으며 말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뒷골을 타고 오른 싸한 감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몇 번이고 떨리는 등을 쓰다듬어 내리고 다독여 주었다. 차올랐던 숨이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윤제가 품에 안은 몸에 두서없이, 쉴 새 없이 입술을 내렸다.
“고마워.”
용아의 이마에, 눈 끝에, 뺨에, 입술에, 턱 끝에 다정한 입술이 차분하고 부드럽게 내리고 또 내렸다. 눈물이 스몄다가 가신 눈가를 따듯한 손이 훔치고, 부드러운 입술이 겹쳐졌다. 몇 번이나, 달콤한 소리가 계속되었다. 부둥켜안은 포개진 몸을 타고, 두근두근한 울림과 따듯함과 울음 어린 웃음이 울렸다. 다시 윤제가 용아를 품으로 당겨 안았을 때, 용아에게서 윤제에게로 달콤한 소리가 건네졌다.
따듯한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황명은 짧고 단출했다.
『흠덕전 황후를 폐한다. 흠덕전 소씨를 령비에 봉한다. 령비 소씨는 황궁 안의 위계를 해치고, 덕이 없으니 통탄할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령비를 량주 수덕사에 죽을 때까지 유폐한다.』
황제는 흠덕전 궁인들을 령비와 함께 량주로 보냈다. 죄인이 되었으나, 긴 세월 황궁과 황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 대해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허나 칭찬은 칭찬으로 그쳤다. 령비를 따라 량주로 간 태감과 궁인들도 수덕사에서 생을 마치라는 명이 내려졌다.
감찰을 거쳐 나온 흠덕전 황후의 죄는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가장 큰 죄는 타국과의 결탁과 내부 정보 유출이었다. 황후 된 도리로 사절을 통해 공식적인 서편을 주고받는 것이 아닌, 사적인 서신을 통해 국경에 관한 정보를 주고 그녀가 필요한 것을 취하거나, 요구한 증거가 수없이 나와 황실을 당황케 했다.
내부인의 입장에는 사소한 것들이지만 외부인의 입장에서는 긴요한 것들을 잘도 내다 판 것이었다. 타국 외에도 대귀족이나 귀족가, 일부 군왕부의 자제, 장군가까지 엮여 있었다.
황후의 가장 두드러진 죄업은 태자가 주관한 신연회의 장소와 국경 상황에 대한 정보를 진족에게 넘겨 수많은 황족의 목숨을 위협하고, 태자와 태자비를 위험하게 만든 것이었다.
황제는 국경과 강산을 위협한 주요 인물들에게 은밀히 사약과 자진 권유서를 내렸다. 황제가 제위에 오른 후 어느 때보다 많은 귀족과 장수가 목숨을 놓았다. 황후의 직위를 이용한 악행이었기에, 황실의 권위를 지키고자 서필로 모두 남기지 않고 하명은 간단하고 단순하게 내려졌다.
『짐이 죽는 날까지 계후는 없다. 계후를 청하는 자는 짐의 죽음을 바라는 역신(逆臣)일 것이다.』
황후가 폐위된 후, 천하에 떨쳐진 황제의 선언은 장중하였다.
황명이 내린 느지막한 저녁에 윤제가 용아를 찾았다. 영화대로 든 사내는 쓸쓸한 얼굴로 차를 부탁했다. 남자는 어머니를 잃었다. 다시 잃은 것이지만, 아마도 그의 기억 속에 유일한 어머니일 터였다. 쓸쓸하고 외로운 얼굴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미운 어머니도, 좋지 않은 어머니도, 잃으면 무척 아플 것이다. 용아에게 미운 숙부고, 좋지 않은 면도 있는 숙부라도, 숙부가 잘못되면 마음이 좋지 않은 것처럼.
용아는 말없이 차를 내었다. 차를 받아 든 윤제도 말이 없었다.
침묵한 공간에 부드러운 차향만 떠돌았다.
윤제는 방을 나서기 전 용아를 깊이 안고 밤에 보자는 말을 속삭였다. 용아는 나서려는 남자를 깊이 마주 안아 주고 살펴 가라 일별했다.
따듯한 봄의 따듯한 저녁 이후로 윤제는 느지막한 시간에 용아를 찾았다. 용아는 당연한 것처럼 차를 내주었다. 차향이 떠도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용아.”
윤제의 얼굴은 많이 나아졌다. 때때로 창가를 보거나, 멍하니 멈춰 서 눈썹을 구기곤 했지만 전보다는 가벼운 표정이었다. 찻잔을 들며 용아가 답했다.
“예.”
윤제가 손 안의 찻잔을 천천히 굴렸다.
“좋아하는 사람 있느냐.”
남자의 질문은 갑작스러웠다. 용아에게는 습격과도 같았다.
“……어…….”
용아의 얼굴에 당황과 망설임과 황망함이 떠돌았다. 방 안을 떠돌던 부드러운 차향이 급격히 굳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을 보며 윤제가 가벼이 말했다.
“너도 사람인데 좋아하는 사람 하나는 있겠지.”
대수롭지 않은 투였다.
“예…….”
용아가 고민 끝에 답했다. 끄는 듯한 목소리였다. 열두 살에 입궁해 동궁전에서만 긴 시간 보내긴 했지만 눈 감고 귀 막은 게 아니니 오며 가며 본 얼굴들이 있을 터였다. 그러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좋아하는 이가 있다는 소리를 듣자, 윤제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 들었다.
찻잔을 든 남자가 말했다.
“나는 너 좋아해.”
“……예?”
용아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는 너를 좋아해.”
윤제가 다시 한 번 고백했다. 용아의 눈에 지진이 끝도 없이 내렸다. 혼란한 얼굴에 윤제의 마음은 조금 불편했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내 기분 좋게 풀렸다.
“예.”
용아가 느릿느릿 숨을 쉬며 말했다. 멍한 얼굴이 입술 모양으로만 말했다.
저도요.
찻잔으로 시선을 내리던 윤제가 멈칫했다.
“뭐?”
남자의 황급한 말에 용아의 어깨가 흠칫 올랐다.
“네?”
놀란 용아를 본 윤제가 그보다 더 놀라며 부지런히 사과했다.
“아니다. 미안하다. 괜찮아? 놀라게 해서 미안해.”
건너편 자리에서 옆자리로 와 놀란 어깨와 등, 허리, 팔을 쓸어 주는 커다란 손에 용아가 조금 더 흠칫했다가 숨을 골랐다. 커다란 손이 부드러이 쓸고 갈 때마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밤마다 이보다 더한 것을 할 때도 있는데, 새삼스럽게 과중한 심장 울림에 귀까지 붉어지며 얼굴이 홧홧해졌다.
“다시, 말해 주시면 안 돼요?”
용아가 붉어진 얼굴을 숙인 채 말했다.
“좋아해.”
윤제가 용아에게 고백했다.
“한 번만 더…….”
“좋아해. 좋아한다.”
“한 번만 더요.”
용아가 빨개진 얼굴로 남자를 올려보며 청했다.
“좋아해.”
윤제의 고백에 용아가 천천히 끄덕였다. 남자가 붉어진 얼굴과 당황하는 표정에서 자신의 속내를 다 읽었지 생각하면서도 얼굴을 가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빨개진 채로 끄덕이기만 했다. 윤제는 차를 다 비울 때까지, 붉어진 얼굴을 감상하고 가끔 손으로 쓸며 고백하고 또 고백했다.
찻잔을 다 비운 윤제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방을 나서려 할 때 뒤따라 온 손이 부드럽게 남자를 멈춰 세워 돌렸다. 돌아서는 입술로 부드러운 입술이 겹쳐졌다가 물러났다.
“살펴 가십시오.”
윤제가 속삭이는 입술에 입술을 내려 맞추며 답했다.
“응, 좋아해.”
윤제의 고백에 붉은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래서 몇 번이나 더 고백을 속삭였다. 붉고 붉은 얼굴이 타오를 것처럼 달아올랐다가 희미하게 옅어졌다 다시 짙게 붉어졌다. 달콤한 고백이 끝도 없이 흐르는 저녁이 지나고 있었다.
윤제의 손이 벗은 등을 연신 오르내렸다. 늘씬한 등을 매만지던 큼직한 손은 마주 앉은 엉덩이로 내려가 움칫대는 살을 움켜쥐고 당기듯 움직였다.
용아가 유난히도 부끄러워하는 밤이었다. 옆구리와 골반, 허벅지의 맨살을 남자의 손이 쓸고 갈 때마다 습윤한 밭은 숨이 토해졌다. 온통 붉어진 얼굴이 숨어드는 것처럼 윤제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귓가에 울리는 젖은 숨소리가 윤제를 자꾸 부추겼다.
“아, 응, 읏…….”
귓가에 번지는 소리에 윤제의 손이 멈칫했다. 돌아본 시선 끝에 자신이 내뱉은 소리에 부끄러워 곤혹스러워 하는 얼굴이 있었다. 윤제가 눈을 살짝 가늘게 구겨 웃으며 신음하는 입술에 입 맞췄다.
“좋아?”
유치한 말을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좋아요.”
용아가 떨리는 턱을 내리누르며 답했다. 울음이 묻어날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코앞에 있는 얼굴을 붙들고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혀를 내어 얽고 빠는 틈에 용아가 깊이 신음하며 커다란 손과 남자의 복근에 정액을 쏟아 냈다. 손 안을 가득 채운 커다란 것을 만지며 우는 것처럼 얼굴을 흐렸다.
윤제가 손을 뻗어 야하게 흐트러진 얼굴을 만졌다. 울 것 같은 얼굴을 위로하듯 만지던 젖은 손은 이내 손끝에 묻은 정액을 옮겨 바르는 장난을 치는 듯한 움직임으로 바뀌었다.
불그스레한 뺨을 찡그린 용아가 몸을 물려 남자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아래로 숙여진 머리가 더 깊은 곳으로 내렸을 때, 윤제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선명한 붉은색으로 젖어 든 용아의 입술이 남자를 집어삼켰다. 커다란 성기의 표면을 타고 부드러운 입술이 느릿느릿 오고 갔다. 웅크린 어깨에 닿은 단단한 손끝에 망설임이 감돌았다. 윤제의 손이 커다란 것을 머금는 턱과 목덜미를 스치고 갔다. 커다란 것을 집어삼켜 불룩해진 뺨 위를 짧게 매만졌다.
입술을 뒤로 물려 끝 부분만 입에 머금고 손으로 만져 가려 할 때, 단단한 손이 용아의 뒷머리와 목덜미의 경계 사이를 붙들었다. 혀끝으로 귀두를 간질이고 있던 얼굴이 올려다봤다. 커다란 것을 입에 담고 빠느라 잔뜩 붉어진 눈가에 울음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미안.”
윤제가 본능적으로 겁을 내고 물러나려는 목을 단단히 쥐며 사죄했다. 다음 순간 남자의 국부와 용아의 입술 사이에서 폭력적인 소리가 울렸다. 용아가 단숨에 움켜 당기는 힘에 쏟아지듯 끌려갔다. 무방비한 얼굴로 위험하게 움칫대는 복근이 충돌하는 것처럼 비벼졌다.
“……!”
열린 입술로 커다란 것이 삽입됐다. 연속해서, 몇 번이고. 뺨을 긁고 가는 뜨거운 열기와 맨살의 움칫거림과 남자의 짙은 체향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우응, 음, 용아의 목 안에서 억눌린 소리가 이어졌다.
한참을 무차별적으로 커다란 남근을 깊이 머금었다가 빼앗기기를 반복했다. 폭력 같은 삽입이 한참 계속됐다.
용아의 뒷머리를 억세게 쥔 윤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목구멍에 쏟아지는 정액에 용아가 남자의 허벅지를 긁어 댔지만 뒷머리를 내리누른 손은 꿈쩍하지 않았다. 사정을 완전히 마친 후에야 윤제가 숨을 몰아쉬며 강제하고 있던 머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미안해.”
흥분감으로 젖어 든 잘생긴 얼굴이 다시금 사죄했다. 윤제의 국부에서 일어난 얼굴은 새빨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열감에 붉어진 얼굴은 눈물과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입술을 적신 희뿌연 체액이 무방비한 입술의 우물거림을 따라 오르내렸다.
윤제는 우는 얼굴에서 눈물과 체액을 동시에 닦아 내며 다시 사과하려 했다.
“윤제 형.”
울음을 훔쳐 낸 눈이 윤제를 올려다봤다.
“응. 미안해, 진짜.”
그가 잠시 미쳤던 것 같다는 말을 하려 할 때.
“저를 정말 좋아하세요?”
아픔에 울 것처럼 구겨진 눈썹이 윤제를 향했다.
“좋아해.”
윤제가 단숨에 답했다.
“정말요?”
“정말.”
용아는 쉬이 믿지 않았다. 열상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도록 발그레한 뺨으로 윤제의 손이 겹쳐졌다. 그의 손도 뜨거웠기에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앞으로 그럼 나하고만 할 거예요?”
용아가 눈을 내리깐 채 소곤거렸다.
“응.”
부끄러운지 눈도 못 마주치는 얼굴이 예뻐서 윤제가 웃음을 흘렸다.
“정말?”
“정말.”
용아가 의심하는 것처럼 흘기는 듯한 시선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우물대는 입술에 윤제가 입을 맞췄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후회 안 해.”
용아가 우물우물 말했고, 윤제가 단호히 답했다.
“나, 진짜 좋아해요?”
윤제의 허벅지에 맨몸으로 올라앉아 기대며 용아가 재차 물었다.
“진짜 좋아해.”
윤제가 지치지 않고 성실히 고백했다.
“좋아요…….”
용아는 부끄러워서 차마 고백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처럼 빨개진 얼굴로 웅얼대며 벗은 남자의 어깨를 안아 왔다. 맨몸을 마주해 오는 용아를 윤제가 단단히 안았다. 윤제의 품에 안긴 용아가 넓은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등 뒤로 팔을 뻗었다.
달그락.
용아의 손이 칠보로 호화롭게 장식된 조그만 궤를 열었다. 공단이 깔린 궤 안에는 자그만 푸른 진주 한 쌍이 있었다. 휘청휘청한 손이 궤 안의 푸른 진주를 꺼내 윤제를 돌아봤다.
윤제가 낯선 보주에 시선을 주었다. 용아가 관심 어린 시선이 닿아 있는 푸른 진주 하나를 윤제의 입술에 펴 바르는 것처럼 올렸다. 윤제의 입술 사이에 있는 푸른 진주를 용아가 입술을 겹쳐 가져갔다. 자그마한 푸른 진주를 삼킨 용아가 윤제를 봤다. 윤제는 따로 설명도 듣지 않고 용아가 한 것처럼 젖은 손에서 자그마한 푸른 진주를 가져가 말없는 입술 사이에 올렸다. 그리고 입술을 내려 입술 사이의 푸른 진주를 삼켰다.
용아가 마주 닿은 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적극적으로 매달려 오는 용아를 윤제가 미소한 얼굴로 먹어 치웠다. 입술이 깊이 얽히고 혀와 혀가 엉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봄의 밤도 끝나 가는 즈음이었다.
교헌재 안은 황제와 태자 둘만 있었다. 각자 다반을 앞에 둔 부자(夫子)는 방금 전까지 격론을 주고받은 것을 잊고, 평온한 얼굴로 차를 즐겼다.
“부황.”
찻잔을 내린 윤제가 황제를 불렀다.
“드디어 네 생각이 글러 먹었다는 걸 깨달았느냐.”
황제 또한 찻잔을 내렸다.
“아닙니다. 소자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윤제의 단호한 답에 황제가 시큼털털한 표정을 내보였다.
“무어냐.”
황명은 중한 것이기에 윤제는 부친의 말이 있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가약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차를 들던 황제의 시선이 일순 멈추었다가 비틀댔다. 찻잔을 올리던 손이 다반으로 내려갔다. 황제가 당황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당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윤아, 너…… 가약 하였잖느냐.”
부황의 말에 윤제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누가…… 가약을 하였단 말씀입니까. 제가 말씀입니다. 언제, 하였습니까.”
윤제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렸다.
“너, 얼마 전부터……!”
상석에 앉은 황제가 답답한 얼굴을 했다. 왕공과 황친들이 제 백화와 가약을 맺고 와 멀뚱한 얼굴로 보던 때에 모자라다 놀리던 것이 머릿속에 스쳐 갔다. 뭐라 말을 잊지 못하는 황제를 보던 윤제가 찻잔을 순식간에 비웠다.
“소자, 잠시 물러가겠습니다.”
윤제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 물러가 보거라. 그거 못 무른다.”
황제가 손을 저어 태자를 배웅했다. 당신의 아들이 당했다는 황망함이 여전한 얼굴이었지만, 놀리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안 무릅니다.”
윤제가 돌아서다 말고 단호히 말했다.
“못 무르는 거라니까. 나는 혼례 하던 날 그대와 가약을 맺고 싶다, 하여 정식으로 치렀거늘. 그으래. 너야 모르니 그랬겠지, 모르니…….”
끝을 흐리는 말에 놀리는 투가 가득했다.
“절대 안 무릅니다.”
윤제는 고집스레 말하고 교헌재를 벗어났다.
“절대 못 무르는 거겠지, 휴우.”
황제는 찻잔을 들며 한숨을 쉬다가 헛웃음을 후훗 흘렸다. 천자의 웃음은 장난기 가득하여 겔겔겔, 괴이하게 울렸다가 시원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이라 차마 놀리지 못하였는데 괜한 염려였다. 내일 오면 실컷 놀려 주어야겠다, 다짐한 이는 결이 또 다른 웃음을 흘렸다. 상대 모르게 가약을 맺게 한 정결한 얼굴도 내일 오면 실컷 놀려 주리라 생각하며 유쾌한 웃음을 퍼트렸다.
영화대 전전 문이 벌컥 열렸다.
“하후용화.”
윤제였다.
“오셨습니까.”
서책을 보고 있던 용아가 오랜만에 영화대 궁인들을 다 도망가게 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큰 남자가 버티고 서니 커다란 방 안도 아담하게 보였다.
“나한테 할 말 없느냐.”
윤제가 엄격한 얼굴로 물었다. 잘생긴 눈썹이 사납게 기울어진 걸 보니 드디어 안 모양이었다.
“아셨습니까.”
“야.”
“부황께서 말씀하시지 않을 것 같았는데.”
용아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혼잣말처럼 떠들었다.
“어이.”
윤제의 기세가 삼엄했다.
“소제가 후회해도 늦는다고 그랬지 않습니까.”
용아가 뻔뻔스레 굴었다. 당당한 얼굴에 기가 막히면서도 화를 낼 수 없어 윤제는 눈썹만 단단히 찡그렸다.
“화아.”
“예?”
남자의 부르는 기색이 위험했다.
“너, 나 좋아하냐.”
커다란 손이 시선을 내리려는 용아의 얼굴을 단단히 붙들어 자신을 보게 했다. 용아는 눈을 내리깐 채로 웅얼댔다.
“네…….”
“크게, 제대로 말해 봐.”
윤제가 딱딱하게 굳힌 얼굴로 말했다.
“그걸 어떻게 말해요.”
“좋아해. 나는 너한테 하는데, 너는 왜 나한테 말 못 해?”
“그걸 말로 해야만 압니까.”
용아가 턱을 움켜쥔 커다란 손을 밀어내며 투덜댔다.
“말로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윤제의 울컥한 말에 용아는 잠깐 시선만 올렸다가 내렸다. 들리지 않는 척 서책으로 내리려는 얼굴은 어떤 밤처럼 온통 붉었다. 새빨간 얼굴로 큰손이 겹쳐졌다. 곧이어 입술이 맞물렸다. 서책을 만지작대던 손이 입을 맞춰 오는 얼굴을 더듬고, 어깨를 만져 내렸다.
입술을 떼어 낸 윤제를 향해 용아가 입술을 열었다.
“……좋, 못 하겠어요…….”
시도는 금세 수포가 되었다.
“해 봐, 좀.”
새빨간 얼굴을 윤제가 껄렁하게 재촉했다.
“못 해.”
붉은 얼굴이 도리질 쳤다.
“고백도 한번 안 해 주고 사기술을 부려 순진한 사내 뒤통수를 치다니. 일국의 태자비가 부끄럽지도 않소. 응?”
“송구합니다…….”
용아가 사죄하며 눈치를 보다 투덜대는 뺨에 입 맞췄다. 윤제가 단단히 붙들고 있던 사나운 눈썹을 풀고 입가로 번지는 웃음을 내보였다.
“네가 나 책임져야 돼.”
정중한 협박이 용아에게 건네졌다.
“책임지겠습니다.”
용아가 굳건한 얼굴로 답했다.
“사랑해.”
윤제가 약속하는 입술에 입을 맞추며 고백했다. 웃는 얼굴이 건네는 고백에 용아의 얼굴이 멍해졌다. 부황과 처결을 두고 싸우던 중이라 돌아가 봐야 한다며 윤제가 몸을 일으켰다. 용아가 떠나려는 남자의 손을 붙들며 반짝반짝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저기.”
용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어.”
“윤제 형.”
“어.”
남자가 눈치 없이 굴었다.
“한 번만 더 말해 주면 안 돼요?”
불그레한 뺨에 반짝반짝한 눈이 윤제를 향해 속삭였다.
“사랑해, 용아.”
윤제가 억누르고 있던 웃음을 풀어 놓으며 반짝이는 얼굴을 향해 고백했다. 빨간 뺨을 더 빨갛게 물들이며 웃음을 퍼트리는 얼굴이 말도 안 되게 좋았고, 믿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완결>
#TRP절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