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十一 (10/25)

十一

어둠 속을 걷는 일행 사이에 융각으로 가는 것에 저어하는 기색이 조심스럽게 번져 나갔다. 앞서 걷는 태자비의 등을 보는 얼굴들에 걱정이 흘렀다. 융각의 주인이 소훈일 적에 용아는 한 번도 그곳을 찾지 않았다. 찾을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태자비 전하. 비전하를 뵙습니다.”

어두운 밤임에도 문 앞을 지키는 궁인은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예를 올렸다.

“일어나라.”

“송구하옵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전각 주위는 깔끔하게 잘 가꾸어져 있었다. 깨끗한 정경과 반듯한 궁인은 나무랄 것 없는데, 분위기는 묘하게 어수선했다. 융각 앞을 지키는 궁인은 공손하게 태자비를 맞은 것과 달리, 태자비가 안으로 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숨죽인 채 서 있기만 했다.

“안에 있느냐.”

용아가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이 담긴 말을 건넸다.

“예…… 드소서.”

그제야 궁인이 비껴서며 문을 열었다. 썩 내켜 하지 않는 얼굴이 고했다. 움직임은 느렸고, 시간을 한껏 끄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이 열리고 드러난 전각 안은 더 기묘했다.

작지 않은 전각 곳곳을 지키고 있어야 할 궁인들이 전각 앞마당 한쪽 벽 앞에 할 일 없이 서 있었다. 마치 쫓겨난 듯한 모양새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이어지는 발소리에 일렬로 선 궁인들이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했다.

용아는 죄 쫓겨난 듯한 인상의 궁인들 곁으로 다가갔다. 사람이 왔음을 안에 고해야 할 궁인이 전각 주위에 없으니, 전각 곁으로 가 보았자였다.

“여기서 무얼 하느냐.”

용아의 물음에 주춤주춤하던 궁인들이 우선 예를 올렸다.

“태자비 전하.”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비전하, 봉의께서 전각 안으로 저희가 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필요한 것을 올리고 나면 예서 지키고 있습니다.”

용아의 얼굴이 멈칫했다. 용아 곁을 지키고, 태자비를 뒤따르던 궁인들도 일순 굳어 들었다. 융각으로 오기에 앞서 대략적인 상황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으나 패악이 오롯이 사실인 것은 느낌이 또 달랐다. 융각을 오가는 이들에게서 하소연을 들었던 궁인들 또한 풍문보다 더 난감한 현실에 숨을 죽였다.

“상궁은?”

용아가 굳혔던 표정을 풀며 물었다. 태자비의 물음에 궁녀들이 답했다.

“안에서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궁도 종종 쫓겨나옵니다.”

“상궁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물품을 부수거나, 손찌검도 예사로 합니다.”

본래 금당대 궁인이었던 탓인지 낮은 목소리로 고해 올리는 답에 가감이 없었다. 조금쯤은 고자질을 하는 듯했다. 맹위이의 사나운 기세는 여전한 모양이었다.

“최근 융각주가 밖으로 나온 적 있느냐.”

“없습니다.”

“직첩이 강등된 후에 침실이 있는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주로 혼자 서책을 보시는 듯했습니다. 씻으러 가실 때만 겨우 방을 비우시는데 그때만 안으로 들어가 정돈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식사도 거의 드시지 않으십니다.”

궁인들의 노고가 꽤 커 보였다. 불만이 많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고해 다오.”

용아의 말에 문을 열어 준 궁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꼭 드셔야 합니까.”

채찍을 들지 않은 태자비는 궁인들의 노고를 제법 잘 들어 준다고 했다. 들었던 대로 태자비는 궁인들의 푸념 같은 말도 귀 기울여 들어 주었다.

“무슨 일 있는가.”

“안으로 누가 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시중을 들고자 안으로 들려 문만 열어도 화를 내십니다. 비전하가 계실 땐 괜찮으시겠지만 가시고 나면…….”

궁인의 얼굴에 사나운 새 주인에 대한 어려움이 묻어났다.

“고생 많구나.”

용아가 위로의 말을 건네며 전각문을 당겼다.

“누구냐!”

안에서 단박에 고성이 튀어나왔다.

“……송구합니다…….”

궁인이 그것 보라는 듯한 얼굴로 죄를 청하였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아무도 들지 말라던 말 기억 못하는 게야!? 그새 잊을 정도로 아둔한 것이냐!”

날카롭고, 찢어질 듯 예리한 목소리가 전각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태자비의 움칫하는 어깨에 융각의 궁인들이 제가 죄를 지은 양 안절부절못했다. 용아는 괜찮다는 얼굴을 건네 보이고 한 걸음 걸어들었다. 사람의 소리가 다가가자, 와장창 박살 나는 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들어오지 말라는 말 못 들었느냐!?”

“마마,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맹위이의 대노에 상궁이 애원의 말을 쏟아 냈다.

끼익.

용아의 손에 문이 열렸다.

“너, 어……!”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려던 여자가 용아를 보고 순간 굳어 들었다. 잠시 잠깐 사이에 얼마나 패악을 떨었는지 방 안은 엉망이 돼 있었다.

“여기에는 아기가 없겠는데?”

용아가 가볍게 말했다.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흘려 내보낸 말이지만, 말을 하고 보니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방 안은 무얼 숨길만 한 것이 죄 쓰러지고, 열려 있었다. 무엇을 숨기려야 숨길 데가 없었다. 성질을 부리다 태자비를 보고 당황해 머뭇대던 맹위이가 드높은 상대를 깨닫고 예를 갖추었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 아기라니요…… 누가 아기를 낳았습니까? 그보다 한밤중에 귀하신 분께서 여기는 어찌 오신 것입니까.”

용아가 손을 내저어 예를 거뒀다.

“됐습니다.”

태자비의 선선한 거절에 맹위이는 올리던 예를 어렵지 않게 거두고 더듬더듬 말했다. 의아한 표정이 거짓 같지 않았다. 여자는 흐트러진 차림새였음에도 내내 궁인들에게 오만을 부린 탓인지, 소훈일 적과 그리 다르지 않은 거만함이 도드라졌다.

“송구합니다.”

예법에 따라 말하는 얼굴은 전혀 송구한 기색이 아니었다.

“강녕하신 것 같습니다, 맹 누이.”

용아의 말은 태자비의 것답지 않게 가벼웠다. 태자비가 건넨 알맞지 않은 말에 의아하던 얼굴에 불쾌감이 어렸다. 신경질적인 기색을 억눌렀으나 오만함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가 따져 물었다.

“……소첩이 어찌 비전하의 누이가 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무척 곤란하긴 하지요. 오늘 찾은 것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라 도움 줄 이를 높여드릴 게 나이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맹 누이가 싫으면 맹 소저라고 불러드릴까요. 그런데 전하와 그런…… 사이니까 소저는 아니지 않습니까. 낭자도 아니고요. 아닌가?”

용아의 말에 방 안의 모두가 낯빛을 가라앉혔다.

“맹 누이가 좋겠습니다.”

가벼이 들을 수 없는 가벼운 말에 맹위이가 난색을 떨치며 답했다. 평상심을 완전히 회복한 당당한 얼굴이었다. 용아가 무심한 표정으로 서슴없이 말했다.

“예, 맹 누이. 혹, 아기를 훔치셨습니까.”

태자비의 반복된 해괴한 말에 여자의 얼굴이 다시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니요. 아까부터 어째서 자꾸 아기를 찾으십니까. 갑자기 들이닥쳐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누가 아기를 낳았습니까.”

맹위이의 말은 점차 빠르고 또렷해졌다.

“아니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용아가 선선히 말했다. 적당히 넘기려 하는 태도였다. 용아의 급습하는 듯한 물음을 늦게나마 완전히 이해한 맹위이가 화를 내듯 무엄한 말을 내뱉었다.

“예, 소첩은 아이를 훔치지 않았습니다. 하온데 이 사람 물음에 답을 해 주지 않으십니까. 누가 아이를 낳았습니까. 황궁 안에 아이 낳을 이는 비전하뿐이잖습니까. 그새 아이를 낳으셨습니까.”

여자의 질문하는 태도가 매서웠다.

“아니요.”

용아가 저도 모르게 공손히 답했다. 태자비 주위의 궁인들이 불쾌감과 불안감을 퍼트렸고, 맹위이 곁의 상궁은 자신이 죄인인 양 송구스러워 했다.

맹위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럼 누가 낳았습니까. 전하께서 선시각 궁녀를 종종 불러 들이셨었는데, 그들 중에 누가 아이를 낳는 홍복을 누렸습니까.”

봉의 맹위이가 소훈일 적과 다를 바 없이 오만하게 말했다.

“아뇨.”

용아가 내뱉은 부정의 말에 그녀가 조금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앞서 말을 건넬 때 별반 기대하는 투가 아니었는데, 악담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섭섭해하는 게 분명히 드러났다.

“저런, 여전하신가 봅니다.”

맹위이의 무도함에 곁을 지키고 있는 다른 이들이 다 곤란할 지경인데 용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것이 위이를 화나게 했고, 상궁을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용아의 뒤를 지키고 선 이들을 어쩔 줄 모르게 했다.

용아는 본래 목적에 따라 말을 이었다.

“악록 방계 황족의 처가 황궁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사라졌습니다. 하여, 맹 누이께 고견을 듣고자 찾았습니다.”

“……황족 아이가 납치를 당했단 말씀입니까.”

오랜만에 지체 높은 손님을 맞아 오만함을 한껏 뽐내려던 대귀족가 여식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 어렸다. 맹위이가 시선을 굴려 상궁을 돌아봤다. 곁에 다른 이를 허락하지 않는 그녀의 옆에 있느라 상궁 또한 황궁 돌아가는 소식에 캄캄해진 지 오래였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용아가 대신 답해 주었다. 순간, 맹위이가 가만히 멈추었다. 여자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가 닫혔다. 소리 없이 열렸다가 닫힌 입술이 조금 움칫댔다.

“…….”

용아는 손을 저어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물렸다. 맹위이의 옆에 상궁이, 용아의 곁에 등평과 모장이 남았다. 태감이 주위를 살피고 문을 단단히 닫았다.

“맹 누이.”

용아가 재촉하듯 여자를 불렀다. 맹위이가 손을 뻗어 상궁의 도움을 청했다. 상궁이 메마른 손을 잡아 부축하듯 잡았다. 지탱해 주는 이에게 의지하며 기묘하게 굳은 얼굴이 용아를 바라봤다. 상궁의 손을 단단히 쥐며 맹위이가 말했다.

“잡아먹으려 그러는 것이지요.”

방 안의 공기가 뻣뻣하게 경직했다.

“……잡아…… 먹어요……?”

앞서 다른 이에게 듣고 온 말이 또다시 울렸다. 상궁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앉은 맹위이가 엉망이 된 방에 손님을 청하며 입을 열었다. 용아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마주 앉은 얼굴을 향해 맹위이가 말했다.

“여기는 황궁이 아닙니까.”

“황궁인 게 왜…….”

“황궁에는 자손이 귀한 황가와 황족 사내들이 있습니다. 이곳에 살아가는 여자들에게 가장 빨리 부귀영화를 얻을 방법이 무엇입니까. 황족의 처가 되는 것 아닙니까. 더 나아가 황족의 아이를 낳아 훗날을 도모해야지요. 황궁 바깥, 부귀한 내원에 도는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황족의 혈통을 이은 아이를 잡아먹으면 황족의 힘을 지닌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방 안이 다시 깊은 침묵에 휩싸였다.

“……잡아먹는다…….”

용아의 웅얼거림을 들은 여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신랄하고도, 질려 하는 얼굴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허황된 미신입니다.”

“……아기를…… 사람을, 정말 먹으려 한 경우가 있습니까. 벌써 아이가 사라진 지 사흘째입니다…….”

맹위이가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미신에 기대를 걸고 일을 저지르는 이들이 있으니, 잊을 만하면 그러한 말이 있다는 뒷말이 떠도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욕심을 자극해 만든 허튼소리지만, 사람은 욕심에 때로는 무엇이든 하니까요. 그래도 실행까지 하려는 이는 잘 없습니다. 아이를, 사람을 해치는 게 가벼운 일은 아니니 말입니다. 어쩌다 아이를 잃었답니까.”

제 성질을 누르지 못하고 내내 오만하고 갈급하던 여자의 얼굴에 회한을 닮은 감정이 희미하게 떠돌았다. 잠시 기다리던 용아가 역겨움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더 조언해 주실 말은 없습니까.”

“황궁 출입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일일이 조사하여야 할 겁니다. 태감, 궁인, 상궁, 황족까지도요. 이 소문은 널리 퍼지지 않아 아는 이가 많지 않지만, 소문이란 엉뚱하게 알게 되기도 하니 누구든 의심해야 할 겁니다. 어제 갑자기 황족의 힘이 전각 안으로 가해져 왜인가 했더니 그것 때문인 모양입니다. 몸을 피한 사이 대충 열어 볼 수 있는 곳만 본 듯하던데 그렇게 해서는 찾기 어렵습니다. 전각마다 전부 사람을 비우고 공간이 있는 바닥과 겉에서 안 보이는 밀실까지 살펴봐야지요. 어쩌면 이미 사단이 일어났을지 모르지만, 범인이라도 색출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일은 시간 싸움입니다. 가장 의심스러운 이는 조사해 보셨습니까.”

“가장 의심스러운 이……?”

용아의 물음에 맹위이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황후와 양제. 그리고 이 사람, 아니겠습니까.”

맹위이의 말을 들은 후에야 용아는 자신이 양제가 아닌 소훈을 찾아온 이유를 떠올렸다. 양제를 은연중에 의심하고 있은 탓이었다.

“…….”

용아의 당황에 상관 않고 맹위이가 말을 이었다.

“황가나 군왕부 내원보다, 군왕부 내원으로 들어갈 딸을 키우는 대귀족과 귀족가 내원 안에서 훨씬 더 흔히 나도는 소문입니다. 어제와 같이 대충 훑고 가는 듯한 조사는 의미 없습니다. 이미 아이를 잃었다는 각오를 가지고 살펴야 할 겁니다. 이 사건 대부분이 결과가 참담했다고 들었습니다. 본궁을 구금하고 전각을 살펴도 좋습니다.”

“황후께서 전각을 비우고 조사에 응하셨습니다.”

“황후께서 큰 각오를 하셨습니다. 숨길 것이 많은 분이실 터인데. 전각마다 있는 밀실을 다 알지 못할 거라 여겨 응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맹위이가 다시 오만함이 서린 웃음을 퍼트렸다.

“겉에서 안 보이는 밀실은 뭡니까.”

“해원의 경우 침실 안 병풍 옆에 있습니다.”

위이가 지체하지 않고 답했다.

“범인이…… 양제라 생각하십니까.”

용아의 말에 위이가 침중한 얼굴의 입가를 비틀었다. 뻔히 답이 눈에 보이는데 왜 모르냐는 표정이었다.

“양제는 입궁한 후부터 아이를 낳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 해원은 금당대 궁인들이 지킵니다.”

용아는 되도록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하고자 했다. 맹위이가 고요한 얼굴로 세차게 말을 퍼부었다.

“답답하십니다. 소첩이 어째서 바깥에 있는 궁인을 들이려 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욕심이 날까 봐섭니다. 본궁에게는 권력과 금력을 가진 아비가 있습니다. 한낱 궁인을 어를 금붙이가 이 사람에게 대수겠습니까. 금당대의 궁인이라. 저와 후궁들이 동궁에 들어온 후에 가장 먼저 포섭한 전각이 어디겠습니까. 금당대 궁인은 집도 가족도 없는 이들이랍니까. 누구든 약점과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권력과 금력으로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진안에게는 승상 부친들이 있지요.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태자의 총애를 받는 것을 앞세워 고관들을 양부로 모시고 권력과 금력을 잠시 빌리는 것입니다. 감시하라 붙인 궁인을 믿고 수족처럼 부릴 순 없겠지만,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른 척하도록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건 얼마든 가능할 겁니다.”

“승상 부친?”

용아의 말에 위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비전하. 만약 오늘의 죄인이 진안이 아니라 하더라도 방심하지 마십시오. 비전하께서는 황족의 아이를 낳을 수 있지 않습니까. 권력에 눈이 먼 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설령 진안이, 제가 없다 해도 방심 마십시오. 황궁은 권력이 발에 채일 듯 흔한 곳입니다. 많은 것을 가진 이는 위험을 지고 있는 법. 정의로운 이인 양, 공평한 사람인 척, 착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고자 하지 마십시오. 착한 사람은 이 험진 곳에서 오래 살 수 없습니다. 착한 이들은 전부 다 죽어 버립니다. 자신을 지키려면 칼처럼 벼려져야 하는 겁니다.”

“명심하지…… 요.”

“오늘 죄를 지은 게 만약 진안이라면 그는 모두 태자전하와 비전하의 탓입니다. 금족령은 무엇 하러 푸셨답니까. 비전하께서는 그것을 왜 보고 계십니까. 위선 그만 부리세요. 전하께서 차라리 완벽히 가두어 두었다면 한때 좋았던 이를 더 오래 살게 했을 겁니다. 호의를 베풀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하지 누가 얌전히 살겠습니까. 한번 걸렸으니 더욱 철저히 속이려 한다면 또 모를까. 그러니, 이 사람도 빨리 죽여 주십시오.”

맹위이가 차갑게 언 얼굴로 말을 마쳤다.

“맹 누이는 소제가 차차 죽여 드리겠습니다. 우선 해원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같이 가시렵니까. 침실 안 밀실이란 곳을 찾기 어려울 수 있지 않습니까.”

용아가 바삐 몸을 일으키며 여자에게 친절히 살인을 예고했다. 위이가 제 팔을 툭툭 다정한 아우인 양 두들기고 가는 정결한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너를 죽여 주겠다 약속한 이는 산뜻한 얼굴로 도움을 청했다.

“그러겠습니다. 헌데, 본궁이 도망할 것은 걱정하지 않으십니까.”

“잘됐습니다. 봉의가 전각을 나서면 융각 전체를 조사하라, 명을 내리도록 해라. 전하께서 어디 계신지 알 수 있느냐.”

용아가 호의를 베푸는 이의 면전에 대고 의심을 품은 명을 일사천리로 내렸다. 맹위이가 황망함이 떠오른 얼굴로 다시 용아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

“가시죠. 지금의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만. 여기가 황궁이라는 특별한 환경이라 그런 것이지, 소제가 태어난 곳에선 서로 목숨 내놓고 산 게 아니라면 연애 끝나서 볼일 다 봤으면 새 남자 찾아 가는 게 흔합니다. 후궁들이 여기 순순히 붙잡혀 있는 게 소제는 더 낯섭니다. 그런데 도망가시려고요?”

“……아닙니다…….”

중경에서 태어나 평생 중경에서 산 맹위이에게 용아가 들려준 말은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처럼 황당무계했다. 새 남자를 찾다니. 중경 여자가 두 번 혼인 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수치를 당하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용아는 내가 도망가는 게 걱정되지 않느냐 질문한 여자의 앞에서 그녀가 도망갈지 모르니 감시자를 붙이라는 명을 당당히 내렸다. 맹위이는 대놓고 사람을 놀리는 듯한 단정한 얼굴을 몇 번째 빤히 올려다봤다.

알 수 없는 이였다.

만약 상대가 정적이 되었다면 진안만큼이나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았을 것 같았다. 진안의 수에 휘말려 패배한 것에 불응한 것과 달리, 상대에게 매번 패하며 분해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한 불온한 예감이 들었다. 옆을 돌아보며 밤이 깊어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조심하라는 얼굴이 사심 없고 평탄하기만 해, 그녀의 울컥함을 자극했다. 왜 그러십니까, 감시자 붙여서 화내시는 겁니까. 담담히 묻는 얼굴은 정결하고 당당하며 뻔뻔해 헛숨을 내뱉게 했다. 어쩌면 이런 일, 이렇게 뒤늦은 때가 아닌, 조금 이르게 서로를 알게 되었다면 약간은 친구 비슷한 게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덧없는 생각도 떠올랐다.

모두 분주히 몸을 움직여 해원으로 향했다. 밤길이 몹시 어두웠다.

해원 앞은 조용했다. 금당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전각 앞에는 태자와 세 왕공 자제와 금당대 궁인들이 서 있었다. 용아가 전한 말을 듣고 온 윤제의 얼굴은 표정 하나 없이 서늘했다.

“왔느냐.”

남자는 다가오는 태자비 일행에게 아는 체를 하며 예를 올리는 것도 물렸다. 용아와 일행은 작은 몸짓으로 예를 대신했다. 용아의 곁에 있는 맹위이를 본 태자 일행이 잠시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윤제의 얼굴에 곤혼스러움이 떠올랐다. 진양군과 영양군은 별 고민 없는 얼굴이었다. 소양군의 얼굴에 어떤 짓궂은 말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며 모호한 진중함이 흘렀다.

용아가 해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드시죠.”

윤제의 얼굴에 다시 난처함이 떠돌았다.

“가자.”

태자, 태자비, 세 왕공 자제와 맹봉의의 방문에 해원 앞을 지키는 궁인들이 반듯하게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봉의를 뵙습니다. 세 분 공자를 뵙습니다.”

그러나 예의 반듯할 뿐, 미묘하게 시간을 끄는 움직임으로 일행의 발을 잡으려 했다.

“물러서라.”

태자의 명에 궁인들이 찬찬히 물러났다. 눈치를 보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잔뜩 가라앉은 일행 전체로 참담한 기류가 흘렀다.

윤제는 용아의 옆얼굴을 살피는 것을 잊고, 친히 문을 열어 해원 안으로 들었다. 태자와 태자비, 왕공 자제들의 시중인이 일행을 따라 긴 꼬리를 드리우며 움직였다. 해원에 넣을 물품을 관리하고자 배치된, 금당대의 소속인지 해원의 소속인지 소속이 모호한 궁인들 또한 바쁜 걸음으로 안으로 따라 들었다.

해원 안은 예전에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촘촘히 배치된 불빛이 따듯한 기운을 퍼트렸다. 다만, 전각 주위는 이상하도록 고요했다.

“있느냐.”

전각을 향해 건네진 윤제의 말에 천천히 문이 열렸다. 문 곁을 지키는 궁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벽 상궁의 시중을 받으며 진안이 밖으로 나섰다.

순한 인상의 얼굴은 평온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 오랜만에 찾아주셨습니다. 다시 뵙지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세 분 공자를 뵙습니다. 맹봉의 잘 지냈는가. 어째 한 번도 와 주지 않았나.”

진안의 말은 이상할 것 없었고, 일상적이었다. 굳었던 일행이 조금 느슨하게 풀어졌다.

“잠시 살펴볼 것이 있어 왔다.”

“무엇을…….”

순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의문을 표했다.

“안으로 들어가 우측으로 향하면 내실 안에 침실이 있습니다. 침실 안 침상 옆 모란도를 치우면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을 겁니다.”

맹위이가 낮춘 목소리로 용아에게 말했다.

“위이.”

선한 음성이 위이를 불렀다.

“어서 가세요.”

맹위이가 진안의 얼굴에 무덤덤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진안이 순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용아가 딱딱해진 얼굴을 향해 말했다.

“잠시 안을 살펴보겠습니다.”

“싫습니다. 이러실 순 없습니다. 태자비라 하시지만 비전하는 사내가 아니십니까. 소첩이 무엇을 하였다고 으슥한 때에 이리 몰려와 핍박하시는 겁니까.”

부드러운 얼굴이 침착하게 항변하였다.

“악록 방계 황족의 아이가 사라져 찾고 있는 중입니다.”

“소첩을 의심하십니까.”

진안의 얼굴은 억울함을 표했지만 잠잠했다.

“비켜서세요.”

용아가 짧게 명했다.

“비전하. 소첩은 다 잃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닌, 정인을 잃었습니다. 제게 또 무엇을 빼앗아 가시려 이러십니까. 어떤 서글픈 위명을 붙여주시려 이러십니까. 전하, 소첩에게 이러실 순 없습니다.”

진안이 윤제에게 다가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네가 결백하다면 확인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윤제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태자의 허락하에 들었지만, 세 황족은 동궁전 후궁 안이라 운신이 쉽지 않았다. 윤제 역시 그것을 알기에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용아 또한 비슷하다면 비슷한 조건이지만, 그래도 황족 사내보다는 훨씬 자유로웠다.

“소첩에게 불명예를 주시려는 겁니다.”

진안이 물러서지 않았다.

“……벌써, 잡아먹었습니까?”

용아가 버티려는 여자의 순한 얼굴을 향해 말했다.

“……!”

진안의 얼굴로 두려움이 확 번졌다. 그것은 그녀가 소문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용아가 더 고민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 가려했다. 윤제와 일행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하자, 진안이 윤제의 팔을 끌었다.

“놓아라.”

“저는, 그런 게 아닙니다. 여기는 갑자기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진안이 윤제를 온몸으로 막으며 엉뚱한 소릴 했다. 일행 주위로 해원의 상궁과 궁인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딴청을 부리며 벽을 쌓는 것처럼 둘러섰다. 금당대와 영화대 궁인들이 더 많은 손을 이용해 허튼짓을 하는 이들을 끌어냈다. 완강한 저항이 있었으나 처리는 재빨랐다.

“왜 온 것 같으냐.”

윤제가 간단히 진안을 떼어 내며 말했다.

“전하,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여기서 저를 사랑해 주셨잖아요. 저의 모든 밤은 전하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곳에 새로 들인 이와 낯선 사내들을 들이시려 하십니까. 저를 좋아하셨던 게 진심이라면 제게 이러실 순 없습니다!”

진안의 난데없는 말에 윤제와 황족 사내들이 어깨를 굳혔다. 갑작스러운 말을 늘어놓는 얼굴은 윤제가 아는 얼굴과 같았다. 순하고 부드러워 웃으면 한없이 청순해 보이는 미인이 모두의 앞에서 괴악한 말을 늘어놨다.

용아가 자신을 붙잡는 상궁을 궁인들이 떼어 내자, 앞으로 달려가 진안의 뺨을 날렸다. 짜악, 사나운 소리가 울렸다. 뺨을 맞고 나자빠진 진안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용아를 올려다봤다.

“이 미친 여자가. 헛소리 마. 아이는 어디 있어!”

“마마!”

“용아!”

태감과 궁인에게 붙잡힌 벽 상궁이 진안에게 달려가려고 버둥댔고, 당황스러운 상황에 굳어 있던 윤제가 성난 용아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용아가 전각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윤제가 전각 안으로 달려들어 가는 용아를 뒤따르려 했다. 진안이 무릎걸음으로 기어 윤제에게 매달리며 소리쳤다.

“전하……!”

그것으로 명백했다.

“어째서냐.”

윤제가 처참한 얼굴로 자신에게 매달리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안의 부드럽던 얼굴이 이지러졌다. 윤제의 팔을 붙잡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그러나 금세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전하. ……저는, 그런 게 아닙니다. 저를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를 못 믿으셔요? 전하.”

진안이 침착하게 항변했다.

“너는 아니다. 벌써 증거를 없앴느냐. 이미 아이를 죽였느냐. 황족을 살해했어?”

“아니에요.”

평온한 얼굴과 달리 윤제를 안고 있는 진안의 팔은 떨리고 있었다. 진안이 고개를 저었다. 윤제가 진안을 단단히 붙잡으며 말했다.

“위위. 안으로 들어가 태자비를 도와줘라.”

“전하……! 아니에요! 저는 아닙니다……!”

진안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부정했다. 그녀가 명을 받은 이를 말리려는 듯 버둥거렸다. 윤제의 손에 붙잡힌 진안이 들썩이지조차 못했다.

“아이를 죽인 것이냐. 황족의 목숨에 위해를 가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걸 모르느냐.”

윤제가 낮게 가라앉은 저음으로 물었다.

“왜…… 왜, 저를 믿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저를 믿지 않으실 수가 있습니까. 전하…… 위이!”

윤제에게 애원하던 진안이 소리쳤다.

맹위이가 안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용아가 지나간 길이 열어젖혀 둔 문과 이리저리 흩어져 내린 물건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모란도가 치워진 벽에 어둠처럼 열린 문이 있었다.

“비전하!”

밀실로 달려들어 가며 위이가 용아를 불렀다. 용아는 좁은 방 안을 온통 뒤엎어 둔 뒤였다. 무엇이 있을 만한 곳은 죄다 열어 뒤졌지만 아이는 없었다.

“……없어…….”

용아가 울음이 번진 얼굴로 속삭였다. 엉망이 된 공간 가운데 아이를 감싸고 있던 강보만 있었다. 빈 강보를 본 맹위이의 얼굴이 뻣뻣함이 퍼져 나갔다. 이어 방 한구석을 뒹굴고 있는 날카로운 단도가 시선을 끌었다.

“다시…… 다시 찾아보세요. 진안은 담이 작은 인사입니다.”

위이가 무릎을 꿇고 용아가 뒤졌던 곳부터 다시 헤집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서 찾아보라는 손짓을 따라 용아는 방 입구부터 살폈다. 두 사람은 손끝이 아리도록 방 안 온갖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나오는 것은 사치한 보석과 금은뿐이었다. 용아가 관심 없이 내던진 서신을 한쪽에 챙기던 위이가 털썩 주저앉았다.

“……미친 인사가 진짜 잡아먹었나…… 봅니다…….”

맹위이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댔다.

“무서운 소리 마십시오.”

“그거, 먹어 봐야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아이를 잡아먹는다고 아이를 낳을 수 있으면, 매일 달걀 먹으면 달걀을 낳아야 하지 않습니까. ……미친 것이…….”

“강보는 여기 있는데 아이는 왜 없을까요.”

용아가 넋 놓은 위의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순진하기까지 한 걱정 어린 말에 맹위이가 불손한 시선을 건넸다. 그녀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삐걱삐걱 울던 나무로 된 바닥은 묘하게도 용아가 걸을 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한참 정신없이 헤집을 때 소리 없이 걸었던 용아가 힘이 빠졌는지 이전과 달리 둔탁한 소리를 퍼트렸다. 멍한 시선을 제 발에 건네는 위이를 본 용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몸을 낮추고, 딱딱, 소리가 나도록 바닥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똑똑,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결마다 조금씩 달랐다.

똑똑똑, 울림 후에. 통. 간절한 부름에 답을 하는 것처럼 흐릿한 소리가 들려왔다. 용아의 곁에 함께 구겨져 앉아 있던 맹위이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

“……들, 들었……!”

용아가 방금 두드린 곳을 다시 두드렸다.

똑똑똑. 통. 통통.

애타게 부르는 듯한 소리에 바닥 아래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용아와 위이가 정신없이 바닥을 더듬어 홈을 찾았다. 둘은 손끝이 다 뭉개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뭔가 걸리며 있는 힘껏 당겨 올렸다.

짧은 순간 수차례 시도 끝에 뻑뻑한 소리를 내며 바닥의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입에 부드러운 천 뭉치를 문 아기가 나무 궤에 담겨 있었다. 용아가 뒹굴고 있는 강보를 손으로 쓸어 잘못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미친 것을 연방 꿍얼거리며 맹위이가 다 뭉개진 손으로 아이의 입에 물려 있는 천 뭉치를 빼냈다. 입에서 천 뭉치를 빼내자, 어둠 속에서 홀로 있었던 아이가 서러운 울음을 쏟아 냈다.

용아는 우는 아이를 강보로 감싸며 안아 올렸다. 아이의 울음이 더욱 격렬해졌다. 귀가 다 얼얼했다. 전각 안에서 울리는 아기의 울음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

아이 울음은 전각 밖까지 울려 퍼졌다. 진안과 기묘한 대치 중이던 윤제가 말했다.

“왜 그랬느냐.”

진안의 애원하던 얼굴이 들려오는 아이 울음소리에 눈물이 흘러넘쳤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이라면 퍽 가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윤제는 서럽게 우는 얼굴에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 했을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흘렸다.

한숨짓는 윤제의 얼굴을 향해 진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전하. 소첩과 전하의 아이입니다. 전하께서도 우리 아이가 보고 싶으셨지요? 소첩이……!”

“정신 놓은 척하는 거냐.”

윤제가 현실을 모르는 체하려는 얼굴을 향해 말했다.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당신의 정인이라 하셨잖아요!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저를…… 제게…… 제게 어째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하였습니까! 전하도 저를 좋아할 때 좋으셨잖아요. 그때를 다 잊으셨습니까. 사소한 잘못 좀 하였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예전에는 이러지 않으셨잖아요. 제가 잘못 조금하여도 못 본 척해 주신 것 제가 모르는 줄 아십니까. 저를 이렇게 비참하게 하셨어야만 합니까!”

진안이 온 힘을 다해 소리를 토해 냈다.

“너와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네가 남은 생을 영화롭게 살기를 바랐다. 그것이 너를 비참하게 했느냐.”

“제가 영화롭게 살기를 바랐다면 제가 황후가 될 수 있게 해 주셨어야지요!”

진안이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쏟아 내며 소리쳤다.

“너와 내가 몇 해를 함께 했는데, 너는 나를 모르구나. 너는 나를 조금도 모르는 것 같다.”

윤제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전하……?”

진안의 얼굴은 여전히 웃음과 울음이 엉켜 있었다.

“있느냐.”

표정 없는 얼굴이 명했다.

“찾으셨나이까.”

태감이 재빨리 다가와 고했다.

“봉의 진씨의 직첩을 파한다.”

“명을 따르옵니다.”

“폐궁을 량주 수덕사에 유폐한다. 진씨는 황족을 위해하려 했으니 그 죄를 말로 다할 수 없다. 그에게 사약을 내리는 은혜를 베풀겠다. 처결은 진씨의 여죄를 다 확인할 때까지 미룬다. 진씨의 모든 죄를 하나도 남긴 없이 밝혀야 할 것이다. 밝혀진 여죄의 업이 흉험하면 형의 엄중함을 더하겠다. 죄인을 데려가라.”

울고 웃던 얼굴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윤제를 올려다봤다.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의 얼굴이 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곁을 주지 않는 정도가 전부라 여겼다.

“전하!”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태자를 찾는 여자의 두 팔로 태감들의 손이 겹쳐졌다. 몸부림치는 여자의 몸이 억센 손에 가볍게 들렸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버둥대는 진안을 지키고자 달려들려는 벽 상궁을 금당대 궁인들이 더욱 억세게 붙들어 말렸다.

“…….”

온몸을 뒤틀며 버티는 진안을 윤제가 말없이 지켜봤다. 주인의 명에 따라 맡은 바를 처리하는 태감들은 단순하고 명확한 동작으로 죄인을 끌어냈다. 바깥으로 끌려 나갈 때까지 반항은 끝이 없었다. 명을 이행하는 태감들의 손 또한 흔들림 없었다.

“전하!”

사나운 외침이 흐릿한 메아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

전각 안에서 아기를 안고 나온 용아가 서툴게 아이를 어르며 폭풍이 휩쓸고 간 듯한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내려가지도 못해 석계단 끝에 서 있는 용아를 향해 윤제가 다가왔다.

“아이는 별 탈 없느냐.”

“괜찮습니다.”

용아가 남자의 얼굴을 살피며 답했다.

“부모에게 데려다주자.”

윤제가 말했다. 남자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용아에게 평연한 말을 건넨 그는 석계단을 내려와 어지러운 해원 안을 걸으며 등우에게 해원 안 죄인들을 처결할 냉엄한 명을 내렸다. 삼엄한 말을 내리는 무심한 얼굴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걸었다.

“살펴 가소서.”

태자에게 맹위이가 예를 올렸다.

“수고하였다.”

윤제가 온기 없는 칭찬을 내뱉었다. 맹위이가 챙겨 나온 서신들을 태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저도 죽이셔야 할 것입니다.”

윤제가 서신을 받아 들었다. 손에 들린 서신을 보는 윤제의 얼굴엔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살펴본 서신 내용 중에 맹씨가의 맹과 부친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다음은 너인가.”

윤제가 서슬 퍼런 말을 가벼운 태도로 건넸다.

“기대하겠습니다. 비전하 살펴가소서. 오늘 뵌 것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물러가옵니다.”

자존심과 오만함을 제하고 나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여자가 담담히 말을 올렸다. 용아는 칭얼대는 아이를 다독이며 눈짓으로 답례했다. 떠나는 이를 보던 용아가 태감에게 조용히 말했다.

“데려다주어라.”

태감이 재빨리 머리를 숙이며 떠나는 이의 곁으로 향했다. 잠시 더뎌진 용아를 기다려 주던 윤제가 말했다.

“갈까.”

“예.”

“안아 봐도 돼?”

윤제의 말을 용아가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마터면 안아요, 여기서요? 같은 바보 같은 말을 할 뻔했다. 이상하도록 평온하고 아무렇지 않은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네? 네…….”

뒤늦게 아기를 안아 봐도 되냐는 뜻임을 이해한 용아가 윤제에게 강보를 건넸다. 아기를 받아 든 윤제의 주위로 진양군과 소양군, 영양군이 몰려들었다. 여러 이유로 어린 아기를 안아 볼 일이 별로 없는 이들이 자신들도 안아 보겠다고 수선을 부렸다.

윤제는 아이를 몇 번 어르고 소양군에게 건넸다. 소양군의 품에 안긴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소양군은 아이들이 어여쁘지만 집안에서 공평해야 하기에 안아 줄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 영양군 역시 그러하다고 했다. 영양군의 품에 안긴 아이는 칭얼대며 울음을 약하게 퍼트렸다. 아이는 곧 진양군에게로 옮겨 갔다. 진양군이 기쁜 얼굴로 아이를 받았다. 그의 품에 안긴 아이가 곧장 우렁차게 울음을 터트렸다. 진양군이 난감해하며 용아에게 아이를 돌려주려 했다.

“내가 안으마. 네 얼굴 창백하다.”

윤제가 아이를 대신 받아 들며 용아에게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용아는 괜찮다 답하며 윤제에게 괜찮으냐 물으려다 관뒀다.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괜찮지 않을 게 뻔했다. 윤제는 희미한 웃음을 퍼트리며 말을 하려다 마는 얼굴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나는 괜찮다.”

윤제의 말에 용아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란히 선 두 사람과 뒤따르는 이들이 밤을 거닐었다.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아이의 부모에게로 향했다. 어둠이 짙은 밤을 거닐어 소소한 말들을 부드럽게 나누며 애타는 이들에게로 걷고, 또 걸었다.

정천궁에 다다르기도 전에 화사한 빛을 밝힌 궁에서 다급한 걸음들이 뛰쳐나왔다. 바쁘게 달려 나오는 이들에게서 기쁨과 안도가 담긴 울음과 외침이 터졌다. 반가워하는 말과 감사의 말이 분주히 오갔다. 아이를 되찾은 부모의 소리를 보고 들으며 물러갈 것을 허락받은 용아와 윤제가 부드럽게 돌아섰다.

아직 어두운 밤이었다.

밤길을 걷는 윤제의 손으로 망설임 가득한 손이 머뭇머뭇 겹쳐졌다. 스며들 듯 붙잡아 오는 손길에 윤제가 말없이 옆을 돌아봤다. 서투르고 부끄러움 많은 소년의 뻣뻣한 위로 같은 손짓에 윤제가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퍼트렸다. 달조차 없는 어두운 밤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황궁 안에 위치해 있지만, 경우전은 황궁 안의 전각이라기보다 죄인의 구금 장소로 알려져 있다. 경우전의 전각 바로 옆에 호위대의 임시 집무처가 있기에 더욱 그런 인상을 주었다.

경우전에 강제로 머무는 이들은 대개 황족이었다. 혹은 아직 죄가 확정되지 않은 신분 높은 이들이었다. 전각은 궁인들의 꼼꼼한 손길에 잘 가꾸어져 깨끗하고 단정하지만, 낡고 오래된 태를 숨기지 못했다. 잘 관리돼 먼지 하나 없지만 낡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문이 스윽, 열렸다.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에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이보게! 악록 황족의 아이는 아직도 찾지 못했는가!?”

탁자 앞에 초조하게 앉아 있던 복립이 발소리를 듣고 황급히 나와 말을 쏟아 냈다. 경우전에 드나드는 태감들은 귀가 어두운 이가 많았다. 또한 태감이나 궁인 홀로 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물러서십시오.”

함께 안으로 든 영호대의 무관이 복립에게 주의를 주었다. 영호대 무관 중 대다수가 황가의 성을 따르지 않는 황족 친인척의 혈족이었다. 황족 방계에 비해 황족의 힘이 부족하지 않은 이들이 다수였다. 때문에 복립이 황족의 힘으로 허튼짓을 하는 것은 불가했다.

“조카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만이라도 알려 주시게!”

처음 경우전에 구금 됐을 때 무엄하다, 황족께 예를 올려라, 호통치며 황족의 힘으로 드나드는 이들을 짓누르려 했던 복립은 며칠 만에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황족 적통, 중경 왕공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힘은 중경 안에서 겨우 체면치레를 할 수준이었다. 현실적인 힘의 우위를 깨달은 바도 있지만, 그를 공손하게 만든 것은 벌써 여러 날이 지나간 시간 때문이었다.

탁.

태감과 무관은 할 일만 하고 물러났다.

“이보시오!”

복립이 떠나는 뒷모습을 향해 애타는 소리를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복립은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스윽.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넋 놓고 있던 복립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사촌 형제이며 잃어버린 아이의 아비였다.

“엽아.”

복립이 사촌 아우의 손을 붙들며 반겼다.

“소가주, 계시기는 괜찮으십니까.”

“아이는? 조카는 찾았느냐.”

복립의 물음에 아이 부친이 표정을 굳혔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암담한 소식에 복립이 다급히 말했다.

“태자비! 태자비가 범인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이를 잃은 지 열흘이 넘어갔다. 무엇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이렇게 되리라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곳을 나가야 무엇이든 해 볼 텐데, 어째서인지 사건 해결을 명받은 정군왕은 가장 먼저 복립을 구금했다.

“소가주.”

엽립은 구금당한 사이 얼굴이 말도 못 하게 나빠진 복립을 이끌고 탁자 앞으로 가 앉았다. 번듯하던 복립의 얼굴은 며칠 사이 살이 내려 해골 같은 인상을 풍겼다.

“태자비 처소는 찾아봤느냐.”

그러면서도 여전히 태자비만을 물고 늘어지는 태도가 괴이했다.

“태자비 전하는 범인이 아닙니다.”

“내 말을 못 믿는 것이냐! 태자비가 우리 악록에게 앙심을 품고 아이를 훔쳐 간 것이래도!”

“황궁 안에서 가장 결백한 이가 바로 태자비 전하일 겁니다.”

엽립의 가라앉은 시선이 복립에게 닿았다. 일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복립이었다. 그의 거만한 태도와 황족의 힘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성정에 불만이 없지 않았지만, 엽립 역시 복립의 높은 힘을 믿고 의지하였기에 입궐할 때 그의 동행을 반겼다.

“가장 결백한 이라는 증거라도 있느냐!”

“아십니까, 소가주. 오래전부터 중경 군왕부 내원과 귀족가 내원에 암암리에 해괴한 소문이 떠돈답니다.”

“……해괴한 소문이라니?”

엽립의 얼굴에 고민이 흩어졌다. 복립이 재촉하는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황족의 혈통을 이은 갓난아이를 잡아먹으면 황족의 힘을 지닌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답니다.”

복립의 눈이 일순간에 커졌다. 겁에 질린 것처럼 떨리는 눈동자가 보는 이마저 불안하게 했다.

“……잡아 먹…… 태, 태자비가…….”

태자비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복립에게 엽립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소문은 군왕부 내원에 드는 여자들 사이에서 쉬쉬하는 모양입니다. 군왕의 후손이라도 모두 황족의 힘을 이어받는 것은 아니니까요. 태자비 전하는 한창때이지요. 황가 후계는 당장 급하지 않습니다. 태자비 전하가 태자비가 된 것은 황가의 혈통을 이을 수 있는 혈통을 가졌기 때문이니, 그분이 아이를 훔쳐 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자비 전하는 이 황궁 안에 가장 결백한 이입니다.”

“…….”

“황후마마와 태자비 전하께서는 황가와 악록의 입장을 고려해 전각까지 조사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 소가주는 의심을 거두십시오. 동궁전 후궁 중 폐궁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 있는데, 그녀들이 대귀족과 귀족 출신이라 의심스럽지만 사건 당일 밖을 오간 정황이 없다 합니다.”

엽립의 말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고도 복립은 아무 말 않았다.

“…….”

복립은 얼굴을 굳힌 채 침묵만을 지켰다.

“소가주.”

엽립의 부름이 있고서야 복립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올렸던 그는 시선을 피하듯 내리며 허망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카를 찾을 길은 허면 요원한 것인가.”

“현재는 그러합니다.”

엽립의 대답에 복립이 깊이 눈을 감았다. 후회 가득한 얼굴을 보며 엽립이 새어 나오려는 긴 숨을 숨겼다.

“아직 갓난쟁이거늘…….”

복립이 허공을 올려보며 중얼댔다.

“소제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엽립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일어서기 전에도 일어선 후에도 복립이 어떤 말이든 해 주기를 기다리는 모양새였지만, 생각에 잠긴 복립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전혀 알지 못했다.

“엽아.”

엽립이 다시 예를 건네고, 문을 열고 나서려 할 때였다.

“예. 소가주.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엽립은 다그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미안하구나.”

“형님.”

복립의 사과에 엽립이 안으로 돌아오려 했다. 복립이 황급히 얼굴과 몸을 벽 쪽으로 돌려 앉았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었다. 돌아앉은 복립이 사촌 아우에게 부탁의 말을 건넸다.

“정군왕께 내가 뵙기를 청한다 전해 다오.”

“그리하겠습니다. 물러가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청해 주십시오.”

복립에게 말을 하고 돌아서는 엽립의 얼굴이 침중했다. 밖으로 나서는 그의 곁으로 정군왕이 다가왔다. 언준에게 보고를 듣고 있던 정군왕의 얼굴은 무미건조했다. 정군왕은 예를 올리려는 엽립을 가벼운 손짓으로 말렸다. 미리 하명을 들은 듯한 언준이 물러났다.

“소가주가 뭐라 하던가.”

정군왕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왕야를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죄인 진씨는 여전합니까.”

“그렇지. 실제로 아이를 훔쳐다 준 것은 소가주일 테니, 진씨는 우연히 처음 본 황족이 아이를 맡아 달라 부탁하기에 맡고 있었던 것뿐이라 하지. 아이를 숨긴 것은 의심 받을까 두려움에 그런 것이라 하고. 나머지 죄가 많아 태자께서 내린 처결에서 벗어나기 어렵겠지만, 아이 잡아먹으려 했다는 괴악한 짓만은 부정하기 위해 철저히 소가주에게 죄를 넘길걸세. 황족의 힘이 있는 소가주를 완전히 통제하기 어려우니 둘을 대질하게 할 수도 없다는 걸 아는 게야. 태자비 전하께 사죄는 하였나.”

정군왕이 드물게 엄한 얼굴로 하문했다.

“매일 죄를 청하고 있습니다.”

“뭐라 하시는가.”

“늘 빠르게 일으켜 세워 주시는 통에 더 송구합니다. 아이 잃고 한 말들인데 신경 쓸 것 없다시며 사죄를 올리러 간 저와 가솔들에게 과분한 하례품을 내리시어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황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죄를 청하셔야지.”

“그리하겠습니다.”

정군왕의 말에 엽립이 깊이 머리를 숙였다. 정군왕은 먼 혈족의 어깨를 두드리고 경우전 안으로 향했다.

엽립의 도움은 큰 역할을 할 터였다.

정군왕이 한참 혈통도 신분도 높아 소가주에게 거짓 정보를 전하라는 청을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정군왕이 높다 해도 악록에서 소가주 복립의 특별한 위치를 고려하면, 청을 순순히 따르는 것 역시 쉽지는 않았다. 악록 일가는 복립이 있기에 악록 인근 방계 사이에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악록의 입장에서 복립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계시는가.”

전각 안으로 든 정군왕의 부름에 복립이 바삐 다가왔다.

“왕야, 동궁전을 살펴봐 주십시오.”

정군왕 앞에 무릎을 꿇은 복립이 애원했다. 정군왕이 냉랭한 얼굴로 엄히 하문했다.

“아직도 태자비 전하를 의심하는가.”

“아닙니다. 소인이 태자비를 모함하려 했음을 폐하 앞에서라도 자복하겠습니다. 부디, 조카를…… 아우 내외에게 아이를 찾아주십시오.”

“동궁전을 살펴보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도 소인은 태자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황족도 아닌 이가, 야만인 일족의 후인이 황족의 힘 앞에 오만하게 구는 태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복립의 구겨진 얼굴을 내려다보던 정군왕이 험악하게 말했다.

“자네의 비겁하고 좁은 심계를 두둔하고저 태자비 전하 탓을 하는 것은 그만두게.”

“그날 소인은 태자비께 모든 이 앞에서 무안을 당했습니다. 황족의 체면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상심한 저를 모두 기피할 때 상궁 한 명이 다가와 유일하게 위로해 주었습지요. 압니다. 이 사람이 못난 놈이고, 태자비는 정의로운 이이죠. 모두가 태자비가 제게 가한 호쾌한 훈계에 통쾌했을 것입니다. 허나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태자비에 대한 원망을 내려 두지 못하겠습니다.”

복립이 비웃음과 괴로움이 뒤섞인 얼굴로 토로했다.

“계속하게.”

정군왕이 침음하며 명했다.

“상궁의 알량한 위로가 제게 대단한 힘이 된 것은 아닙니다. 상궁의 주인이 태자비로 인해 폐를 입었다는 것에 오히려 동질감을 가졌습니다. 태자비를 곤란케 하는 데 힘을 보태어주면 훗날 큰 조력자를 얻는 것이라는 제의에 쉬이 넘어간 것은, 오직 태자비를 어려움에 빠트리는 것에 혈안이 되어서였습니다. 이 사람에게 그리도 오만방자하게 굴며 세상을 발아래에 둔 듯 구는데, 뒷말은커녕 모두에게 환영받고 칭찬만 받는 이를 어렵게 할 수 있다니. 제가 어찌 신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조카를 잠시 그녀들이 맡고 있을 때 제가 발고하여 태자비가 큰 곤욕을 치르면 아이를 동궁전 태자궁이나 태자비 처소에 두겠다는 것이 처음의 약속이었습니다.”

방 안엔 정신 나간 듯한 사내의 목소리만 흘렀다.

“악록 소가주가 조카를 빼돌려 동궁전 여자들에게 전했는가? 여자들이 동궁전 소속임을 확언할 수 있는가.”

“……예. 그랬습니다. 혹여 몰라 아이를 건넬 때, 아이를 넘겨받은 여자와 상궁의 뒤를 밟아 두었습니다. 한참 둘러 갔습니다만, 동궁전 안으로 드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자복 잘 들었네.”

정군왕이 희미하게 황족의 권능을 드러내며 말했다.

“처결을, 기꺼이 기다릴 것입니다. 부디 조카를 찾아주소서.”

복립이 머리를 깊이 숙였다.

“악록 소가주는 소가주 신분을 잃을 것이다. 악록의 복립은 태자비를 모함하고, 황족을 납치하고, 황족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죄에 대해 황실 종친회를 거쳐, 처벌을 받을 것이다. 처결이 내려질 때까지 복립은 경우전 밖으로 나설 수 없다. 자숙하고 있으라.”

정군왕이 그대로 가 버리려 하자, 복립이 군왕에게 매달리며 애원했다.

“왕야, 조카를……!”

“네놈이 황족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다.”

정군왕이 복립의 손을 차갑게 뿌리치며 방을 나섰다.

“왕야!”

애타게 부르는 부름에 밖으로 나선 정군왕이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며 한참 멈춰 있다가 획하니 돌아섰다. 조사처의 임시 집무실로 향하는 걸음이 살벌하기만 했다.

황가, 황족 조사처와 악록 일가, 그리고 죄인 진씨 일가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악록 일가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소가주 복립의 목숨만은 지키려 했다. 주도적인 황족 납치와 태자비 모함은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죄들이었다. 둘 중 하나만 해도 황족 아닌 범인이었다면 목숨을 내놓는 것은 당연하고, 어떻게 죽일 것인가가 문제가 될 상황이었다.

악록 일가와 복립은 철저히 태자비 모함에만 치중했다. 황족 납치는 태자비를 모함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며 황족의 목숨에 위해를 가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주장했다.

진씨 일가는 갓난아이를 주도적으로 빼돌린 행위를 하며 황족의 목숨에 위해를 가할 의도가 없었다는 말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라 소리 높였다.

사라졌던 아이의 부모는 일족인 복립이 경솔한 행동에 비통함을 숨길 수 없으나, 복립이 스스로 죄를 시인하고 반성해 용서하였으니 황족 납치를 이유로 복립을 처벌하는 것은 거두어 달라는 간곡한 말을 황가 종친회에 전했다. 반면 진씨에 대해서는 황족을 납치하도록 음험한 술수를 쓴 것이 의심스럽고, 황족 납치를 부추긴 저의가 궁금타 하였다. 무엇보다 며칠간 아이를 데리고 있는 동안 아이를 숨기려는 행동이 명백하게 보이는 것과 애타게 찾는 부모에게 어린아이를 데려다주지 않는 것에 큰 분노를 표하며 진씨를 엄히 벌해 줄 것을 청했다.

진씨 일가는 죄인이 입출입이 자유롭지 않으니 부모가 찾는 줄 몰랐으며 아이를 성심껏 돌봤으니 아이를 잃었던 부모는 진씨에게 감사하여 할 것이라 주장했다.

진씨 일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황족 종친들이 황궁을 대대적으로 조사하였고, 한차례 약식으로, 다시 한 차례 태자와 태자비, 황족이 친히 납시어 아이를 찾는 것을 알렸는데도 의도적으로 죄인이 아이를 숨기고, 아이의 신변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한 점을 이유로 들었다.

결과적으로 죄인 진씨는 납치된 황족를 억류하고, 여러 정황상 항거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의 목숨에 위해를 가하려 했다는 죄가 있음이 밝혀졌다.

정천궁 교헌재 안에 수많은 황족이 있었다.

“죄인, 복립은 들라.”

상석에서 황명이 내렸다. 태감이 문을 열자, 무관의 감시하에 복립이 걸어 들어와 예를 취했다.

“황제 폐하. 죄인, 복립이 폐하를 뵙습니다.”

교헌재 안은 수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어떤 소리도 없었다. 이미 황실 종친들과 황족 조사처에서 복립에 대한 처결을 내려둔 후였다. 복립은 황족이며 친족인 조카를 납치하는 대죄를 지어가며 태자비를 모함하였으니 사지 중 하나를 내어놓아야 했다. 더불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악록 밖으로 나설 수 없었다.

태자와 일부 황친은 강하게 반발했다. 태자비 모함은 목숨으로 갚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좋은 일로 황궁을 찾은 악록 일가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나, 황제 역시 처결안에 대해 못마땅해 했다.

제북의 반발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네 죄를 인정하느냐.”

“인정합니다.”

복립의 말에 교헌재 안의 싸늘한 공기 중에 불쾌한 소리들이 솟았다가 사라졌다. 악록 일가는 여러 황친의 불만 어린 소리에 숨죽인 채 눈치만 봤다.

“태자비.”

황제의 부름에 윤제 곁에 앉아 있던 용아가 중앙으로 나섰다.

“예, 부황.”

“혹 아가는 할 말이 있느냐. 할 말이 있으면 기탄없이 해 보아라.”

황제가 인자한 얼굴로 하명하였다.

“……폐하.”

정군왕이 낮춘 음성으로 황제를 찾았다. 황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손만 슥 저어 부름을 물렸다. 태자비에게 고정된 황제의 시선은 흔들림 없었다. 상석을 지켜보는 태자의 얼굴에 웃음 비슷한 것이 어렸다. 악록 일가 사이에 불안한 기색이 오갔다.

“소자, 태자비를 모함한 죄인의 처결이 궁금하옵니다.”

“복립은 황족이며 친족인 조카를 납치하는 대죄를 지어 가며 태자비를 모함하였으니 그 죄가 실로 중하다. 복립은 사지 중 하나를 내어놓아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또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악록 밖으로 나설 수 없다. 태자비는 본 처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잠시 죄인과 말을 나누기를 청하옵니다.”

황제가 허락의 손짓을 내렸다.

“죄인은 태자비의 말에 성심껏 답하라.”

황제의 말이 다 내리길 기다린 용아가 몸을 일으켜 복립의 곁으로 다가갔다. 복립이 몸을 바싹 낮추었다.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용아가 낮은 목소리가 물었다.

“왼팔을…… 오, 오른팔을 내놓을 것입니다.”

고민을 꽤 한 결과가 우물대다가 금세 바뀌었다. 시선을 힐끔 올렸던 복립이 표정이라고 없는 용아를 보고, 말을 바꾼 것이었다. 반성의 여지를 조금이라도 더 보이려는 시늉이었지만 충동적으로 바꾼 탓인지 후회가 몰아쳤다.

“죄인은 왼손잡이인가.”

“……오른손잡……이 입니다.”

“오른팔을 내놓으면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아니냐.”

용아의 물음에 복립은 이제라도 다시 왼팔을 내놓겠다 할까 하다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목숨을 내놓으라 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두 다리를, 두 팔을 다 내놓으라고 해도 받아들여 할 터였다.

“태자비께서 내놓길 원하시면 무엇이든 내놓을 것입니다. 불초한 죄인이오나, 조카를 찾아 주신 은인께 감사드립니다.”

용아에 대한 원망은 여전했다. 태자비가 야만인 일족의 후인이라는 생각 또한 변함없었다. 제대로 된 황족이 아니란 것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한 목숨 구차하게 빌어야 한다는 치욕감 역시 없는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스스로 자처한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마터면 자신의 모자람 때문에 친혈족을 잃을 뻔했다.

“부황.”

용아가 다시 예를 취했다.

“말하라.”

“소자는 야만한 일족의 후인이며, 제대로 된 황족도 아닌데, 황족이 된 이라서 그런지 욕심이 많사옵니다. 하나로는 부족하옵니다. 소자는 두 개를 받고 싶습니다.”

용아의 말에 복립은 태자비가 자신이 한 말을 알고 있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죄인.”

황제의 부름에 복립이 답했다.

“명을 따르옵니다.”

악록 일가 사이에서 안타까움 섞인 소리가 새어 나왔다.

“태자비는 무엇을 받겠느냐.”

“부황. 소자가 야만한 인사라 그런지 팔이나 다리 같은 평범한 것을 받아 죗값을 씻게 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사옵니다. 소자는 죄인의 두 귀를 잘라, 죄인 복립이 태자비에게 크나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사옵니다. 또한 죄인이 악록 안에서만 머물면 태자비에게 큰 죄를 지은 바를 알리기 어려우니, 일생 동안 중경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으로 죄를 바꾸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용아의 청에 악록 일가 사이에서 감사의 말이 쏟아졌다.

“처결하라.”

황제가 결론을 내렸다.

“명을 따르옵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일제히 황제를 칭송하는 말이 울렸다.

“……비전하의 은혜를 잊지 않겠사옵니다. 망극하옵니다.”

복립이 가까이에서 엎드리고 있는 용아를 향해 낮춘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용아가 엎드린 채 죄인을 돌아봤다.

“두 귀가 잘리면 흉흉한 얼굴이 되어 재미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요. 물론입니다. 코가 하나인 걸 다행으로 여기셔야지요. 코를 자르면 악록의 귀여운 조카아이가 놀랄 게 가여우니까 말이오. 눈을 파 버릴까 했지만 그러면 남들에게 폐가 아니겠소.”

복립이 코가 바닥에 닿도록 머리를 깊이 숙였다.

“다시 이와 같은 일은 없을 겁니다. 남에게 폐 끼치는 일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강력한 힘을 지닌 황족께서 뭘 울고 그러십니까. 귀 잘리는 게 두려우셔서 그런가. 다시 만나지 맙시다.”

“황공하옵니다……!”

용아가 감사의 말을 들으며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악록 일가가 분주한 걸음으로 다가와 차례로 예를 올렸다. 용아는 짧게 고개만 숙여 보이고 전각을 나섰다. 모장과 영화대 궁인들이 다가와 죄인의 처결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오체분시를 하냐는 무서운 말을 하는 얼굴을 향해 흐릿하게 웃음을 내어 보이고, 영화대로 향했다.

최근 정국이 떠들썩하였다. 죄인 진씨와 관련하여 다수의 승상이 연루되었다는 말이 은밀히 떠돌았다.

황제와 태자, 정군왕이 승상들과 독대하였다. 때로는 세 황족을 승상 홀로 마주했다. 요 며칠 거의 모든 승상이 황제와 태자, 정군왕의 부름을 받았기에 누가 죄인과 연관돼 있고, 누가 결백한지 알 수 없었다. 조정의 관료들은 황제의 측근과 금당대, 정군왕부, 황족 의정처에 속한 이들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정보를 알아내려 했다. 주위를 완전히 물린 독대였기에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대신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성격 급한 자들 중에는 죄가 있는 승상께서는 스스로 물러나 주변인이 알 수 있게 해 주던가, 언질이라도 해 피해 갈 수 있게 해 주어야 할 것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승상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는 아니다, 나설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주위를 엄격히 물린 개별 독대였기에 다른 이들과 황제 사이에 오간 대화를 알 수 없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승상 외에도 몇몇 요직의 대신이 불려가 독대하였다. 복립의 처결이 내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감과 궁인 사이에 은밀히 말이 떠돌았다.

승상 부친.

동궁전 태자의 총애를 오랫동안 받아 온 죄인 진씨가 조정 관료와 부정하게 결탁한 정황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태자는 죄인 진씨를 정인이라 부를 만큼 아꼈으나, 한참 총애를 내릴 때에도 권력과 신분이 관련된 부분에서는 법도가 허락하는 범위를 철저히 지켰다.

그랬기에 진씨는 정인이라 불렸으나 후궁이었고, 그녀의 가문에서 뛰어난 자들은 파격적이다 싶도록 빠르게 요직에 올랐지만 그녀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무능한 인사는 태자의 가까이에 가지 못했다. 그랬던 태자이니만큼 죄인에게 권력을 빌려준 것이 확인될 경우 승상들에게 칼바람이 불 것이 자명했다.

황친들이 많은 부분 나섬에 따라 왕공과 결탁한 사례는 없는지, 왕공에게 전폭적인 믿음을 주어도 좋은 것인지, 왕공에게 조사 절차를 맡겨도 되는지에 대한 볼멘소리도 나왔지만 모든 것이 정해진 바 없기에 황족들 또한 아무 말하지 않았다.

황궁의 하루하루가 삼엄했다.

아침이 밝을 때마다 조정의 관원들은 죄인 진씨의 승상 부친이 밝혀졌는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루가 무료하고도 위태위태하게 지나고 있었다.

문밖에서 따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비전하.”

용아는 부르는 소리에 허락의 말 대신 문을 열고 나섰다. 바깥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전각을 나서는 용아의 손에 지우산이 건네졌다. 펼친 지우산을 오른손에 들려주고, 펼치지 않은 것을 반대편 손에 쥐여 주었다. 푸른 지우산 쓴 용아가 가늘게 내리는 빗속을 걸었다.

영화대를 나선 용아는 석교 위에 서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시중인을 멀리 떼어 놓고 선 여자는 비가 내리는 물길을 보고 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태자비 전하. 비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세요.”

예를 올리는 맹위이에게 용아가 말했다. 일어나는 여자를 향해 용아가 손에 들고 있던 지우산을 내밀었다. 그녀는 지우산을 받아 들었지만 쥐고만 있을 뿐, 펼쳐서 쓰지 않았다. 용아는 비를 피하라는 말도, 제가 쓴 지우산의 한편을 내주는 행동도 않았다.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저를 죽이러 와 주셨습니까.”

“봉의.”

“저는 언제나 죽여 주십니까.”

맹위이는 용아를 볼 때마다 죽음을 청했다. 그때마다 용아는 머잖아 죽여드리겠다, 약속했다. 둘 모두 심각한 말을 평연히 주고받았기에 타인이 보기에 진심 같지 않아 보였다.

“나만 보면 죽여 달라고 하십니까.”

용아의 곤란해하면서도 웃음기 어린 말에 맹위이가 차갑게 돌아봤다.

“저는 실패자이니까요.”

“말씀이…….”

“저는 패배자입니다. 저는…… 아십니까. 저는 비전하가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태자비가 될 수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제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여겨 왔어요. 그러기 위해 황궁에 들어왔고, 목표한 바를 곧 이루리라 확신했습니다. 황가는 후족 태자비와 황후만 인정해 왔으나, 나는 대귀족의 딸이고, 내게도 자격이 충분하며, 적법하고 특별함을 타고난 태자비가 온다 하여도 나의 자격과 능력으로 얼마든 태자비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 여겼습니다. 본래 가진 걸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쟁취하여 얻는 것이 더 대단한 것 아닌가, 하였습니다.”

말을 마친 맹위이가 숨죽여 웃었다.

“쟁취하세요.”

용아가 내리는 비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숨죽여 웃던 여자의 얼굴이 흐려졌다. 돌아보는 얼굴에 슬픔과 분노가 헛돌았다.

“저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비전하. 저는…… 제가 쟁취하는 것은 허락되어야 한다 생각하였으면서 제가 쟁취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쟁취, 하라고요…… 저는 그런 말을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쟁취하세요. 할 수 있으면 말입니다. 나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저는, 정말로 패배자군요…….”

맹위이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 괴로워할 것 없습니다. 나도 물어서 안 것입니다. 그때 내가 순진했지. 참을 수가 없었어. 그대로 돌아서려다 물어봤거든. 왜 그랬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것이 갖고 싶었다 하더군. 그런데 그것을 그가 갖고 있기에, 빼앗았다 하였습니다. 순간 할 말을 잃었지. 황족이, 권력을 가진 이가 악행을 저질러서, 옳지 않아서, 나빠서, 그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라서, 그에게 과분한 것이라 그가 가진 것을 빼앗길 수도 있지만, 그저 그가 가진 것이 탐이 나서 뺏을 수도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았고, 인정하였습니다. 권력이란 게 그런 것이니까. 자신이 빼앗은 것을 돌려받으러 올 거면 올 것 없고, 자신이 가진 것이 가지고 싶거든 얼마든 오라고, 그러나 손 놓고 있지 않을 테니 너도 애써 보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용아의 얼굴은 감정 하나 없었다.

“저는 이 실패한 생을 하루라도 빨리 마치고 싶습니다. 저를 어서 죽여 주세요. 저는 자진할 용기도 없는 미련한 이입니다.”

맹위이가 또다시 죽음을 청했다.

“쟁취하시라니까요.”

용아의 말에 위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위이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제가 진안에 대해 잘 알 겁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그와 뜻을 함께 했기 때문이 아닌가.”

용아가 무심히 답했다.

“아니. 제가 진안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안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정략보다 애정이 더 위라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 자신은 하극상을 꿈꾸면서, 하극상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겁니다. 실상 하극상을 꿈꾸면서, 타지에서 온 후족 출신 태자비보다 대귀족가 출신인 제가 더 정당하며 합당하다 여긴 겁니다.”

“그러십니까.”

기묘한 헛웃음을 짓는 얼굴이 서로를 바라봤다. 위이가 웃음을 지우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저는 황궁에 들어온 이튿날부터 나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봉의.”

용아의 부름에 위이가 얼굴을 저으며 말을 더했다.

“저는 말로 다 할 수 없도록 진안이 싫습니다. 온당치도 않은 존재인 진안이 총애를 받는 것도 싫었고, 진안의 뻔한 간계를 다른 이들이 모르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진안을 착한 사람이라 말하는 소릴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고, 답답해 누구라도 진안의 숨겨진 본모습을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나 진안에게 좋은 감정 따위 없지만, 누군가 진안의 본모습을 알아주기를 바라였지만, 제가 그런 식으로 밝히고 싶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진안의 실체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제 입으로 고자질을 하는 꼴로 알려지기를 바란 것은 아닙니다. 모두 수포가 돼 그런 것일 테지만, 진안이 저를 죽이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위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행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겁니다.”

그러나 마냥 동의할 수 없었다. 용아의 말에 위이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 생은 실패한 삶일 뿐만 아니라, 부끄럽고 수치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리 멍청한 짓을 해 놓고 이곳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제게 무엇보다 크나큰 수모입니다.”

“바보 짓 좀 했다고 죽을 건 없잖습니까.”

용아가 진지한 얼굴을 향해 가볍고 못된 소리를 건넸다.

“요즘 전하와 좋으시지요.”

방금 전에 죽음을 청한 여자가 픽 웃다가 물었다.

“그건…….”

용아가 머뭇댔다.

“제가 여기서 수모를 당하며 그것까지 보아야 합니까. 그것을 보고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 지금 당장은 수치스러움에 죄를 청하고, 부끄러워하느라 상실감과 허탈함에 빠져 있겠으나, 곧 또 못난 짓을 하고자 전의를 불태우겠지요. 얼마나 더 못난 짓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얼마나 지독한 죽음을 택하게 될까요.”

“죽음만이 해결법은 아닙니다.”

용아가 허허로운 얼굴을 향해 말했다.

“제가 얼마나 유치한 인간인지 아십니까. 어느 날부터인가 전하가 의무적이 되었습니다. 본래도 제게는 의무적이었는데 더욱 의무적으로 바뀌었죠. 저뿐 아니라 진안에게도 그랬습니다. 서서히 조금씩, 잘 눈치챌 수 없었지만 확실히 그러셨습니다. 그때 저는 씁쓸하고, 또한 몹시 기뻤습니다. 저의 불행에 괴로워하기보다 진안의 불행에 행복해했습니다. 전하의 바뀐 태도를 눈치채고 전하가 아마도 알고 있으리라 짐작했지만, 겉보기엔 크게 바뀐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뒤바꾸고, 이러한 현실로 만든 게 제 입에서 나온 말들이란 게 뼈아픕니다. 지금 여기서 멈추면 위신을 더 어지럽히지 않고 죽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자의 얼굴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평온했다.

“맹승상이 죄를 전부 인정했습니다.”

“그랬습니까. 편히 죽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용아의 말에 맹위이의 얼굴에 고민이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여자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맹승상은 스스로 죄를 전부 인정하였으나, 죽음도 약속하였지만, 승상의 수많은 딸들이 평탄히 살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승상 자신과 적자들은 죄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고 혜택을 보았으나, 혼인한 딸들은 그렇지 않다 주장하였답니다. 황가가 맹씨 여자들의 명예를 존중해 주는 것을 약조하면 자진하겠답니다.”

용아가 현재 상황을 간명하게 말했다.

“…….”

맹위이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죽고 싶다 하였습니까.”

용아의 물음에 여자가 천천히 물러섰다.

“……집에는 정말 많은 딸이 아들이 있습니다. 부친이 자식들 이름을 다 아는 게 놀……랍지요. 아비의 정 같은 건 없는 집이라……생각하였습니다.”

“좋으시겠습니다. 이토록 딸을 아껴 주는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언제든 석교 아래로 뛰어내릴 듯하던 맹위이가 느릿느릿 물러서다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주저앉았다. 용아는 넋 놓고 앉은 여자의 손에서 지우산을 빼앗아 펼쳤다. 펼친 지우산을 내미는 얼굴이 우산도 하나 못 펴냐는 듯한 한심함을 담고 있었다.

“비전하, 소인은…….”

맹위이가 지우산을 받아 쓰며 입술을 달싹였다.

“맹 누이.”

용아가 잔뜩 낮춘 목소리로 여자를 불렀다.

“……예? 예.”

“본궁이 야만한 장군부 출신 태자비이지만, 지금 당장 맹봉의와 승상과 대귀족 일가의 죽음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내게 그대의 죽음과 그대 아비의 죽음보다 더 근사한 것을 가져와 보세요. 가져온 것을 살펴보고 협의해 보도록 하지요. 이왕이면 값어치 높고 희귀한 것으로. 아시겠죠. 맹 누이와 맹승상 죽여 봤자 황가와 내게 이득이 무어가 있습니까. 어차피 맹씨가 가산이야 국고로 넘어갈 것인데요. 기대하겠습니다. 지우산 다음에 돌려주십시오.”

“……예. 살펴 가소서…….”

빗속에 주저앉은 맹위이가 태자비에게 예를 올렸다.

“가 보겠소.”

용아가 선선히 돌아섰다. 빗속을 걷는 푸른 지우산은 우아했다. 고요하고 표표한 움직임은 부드러웠다. 타인의 죽음과 그 죽음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을 청하는 무서움 같은 건 존재조차 모르는 것처럼 해사해 보였다. 빗속을 걷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푸른 지우산이 영화대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응.”

“가셨던 것은 잘되었습니까.”

따듯한 음성이 다감하게 물었다.

“그럴 것 같다.”

따듯하고 넉넉한 목소리가 해사하게 답했다.

새벽이었다. 용아는 열감 속에서 깨어났다. 머리부터 짙은 열기와 얼얼한 어지러움이 쏟아졌다. 온몸에 번진 나른한 멍함이 움직임을 방해했다. 순간순간 앞이 캄캄해지는 듯한 감각이 내려 말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머릿속이 진탕된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열감이 있는 것과 다르게, 으슬으슬한 추위가 등골을 타고 올랐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열에 들뜬 숨을 내쉬며 잘 떼어지지 않는 입술이 웅얼거렸다. 희미한 소리는 바깥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밖에 누구…….”

열감에 잠긴 용아는 늦은 새벽이 되어서 발견됐다.

“비전하!”

밖에서 불러도 일어나는 기척이 없어 안으로 들어와 본 모장이 덜덜 떨고 있는 용아를 보고 소리쳤다. 열기로 메마른 입술이 흐릿한 소리를 내뱉었다.

“……모장…… 나, 아파…….”

가련한 목소리에 모장이 정신없이 열에 취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비전하, 언제부터 이러셨습니까. 밖에 있느냐!”

“찾으셨습니까.”

“어서 가서 의원을 모셔 오너라!”

모장이 다급히 말하며 부드러운 천을 손숫물로 가져온 따듯한 물에 적셔 열에 취한 얼굴을 연신 닦아 주었다. 물을 꼼꼼히 짠 천으로 닦았다고 하지만, 용아의 열에 달뜬 얼굴은 이상하도록 물기를 머금지 못했다. 방금 천으로 닦고 난 후인데 금세 입술이 메말라 갔다.

모장이 연이어 소리를 높였다.

“밖에 있느냐!”

영화대 궁인들은 상궁의 부름과 하명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전혀 차도가 없는 태자비의 용태에 모장이 걱정으로 얼굴을 펴지 못했다. 궁인들 역시 어찌할 바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태의가 올 때까지 손을 놓고 있기에 용아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다.

모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상궁의 하명에 따라 단물을 만들어 방으로 들인 목교가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영화대 밖으로 달려 나갔다.

태의감 태의가 동궁전까지 오려면 한참은 더 걸렸다.

목교는 어느 날 등우의 청에 따라 간 곳에서 태자를 배알했다. 태자는 엄격한 얼굴로 당부했었다. 태자비가 혹 아프거든 태의를 기다리지 말고 자신을 찾아 금당대로 오라고 했다.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었다.

지금 바로 그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금당대로 달려간 목교는 예의범절을 죄다 무시하고 석계를 순식간에 뛰어올라, 등우를 찾았다.

“공공!”

금당대를 지키는 궁인들이 신분도 밝히지 않고 안으로 뛰어든 목교를 따라 부지런히 달려가며 절차도 없이 이게 무슨 무엄한 짓이냐 소리쳤다.

마침 전각을 나서던 등우가 소란을 돌아봤다.

“저 아이 목교가 아니냐.”

태감의 시중을 받으며 밖으로 나서던 윤제가 소란이 난 곳을 돌아봤다. 금당대 안에서 가장 눈이 밝을 사내의 표정은 오늘따라 어두웠다. 아닌 게 아니라, 윤제는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깨어나 예민함을 온 사방에 퍼트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이르게 깨어날 때 예민한 편이지만 오늘은 특히 더 그랬다.

새벽에 불현듯 깨어난 윤제는 기분이 대단히 나빴다. 아주 독특한 단향이 입 안을 훑고 간 듯한 기묘함에 눈을 뜬 그는 순식간에 종적을 감춘 기묘함에 마치 단단히 놀림을 당한 듯해 굉장한 불쾌감을 느꼈다. 좀처럼 떨칠 수 없는 불쾌감은 부드러운 숨결이 목덜미 약한 부분을 살살 괴롭히는 것처럼, 긁고 지나간 후처럼 지독하고 강렬했다. 뭔가 있는 듯한데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답답함에 그의 구겨진 눈썹은 펴지지 못했다.

윤제가 표정 없는 험악한 얼굴로 무심히 내뱉은 말을 들은 등우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멈춰라!”

금당대 태감과 소환들이 멈추었다. 목교는 가슴이 터지도록 한 뜀박질을 이어 갔다. 목표점이 곧이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달린 목교가 소리쳤다.

“전하!”

궁인의 부름에 내내 인상을 쓰고 있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영화대에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등우의 말이 울릴 때 윤제 역시 깨달았다. 남자의 눈썹이 다시 구겼다. 그가 성큼한 걸음으로 달려오는 궁인에게 향했다.

“용아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

윤제의 말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목교가 답했다.

“비전하께서 아프십니다.”

“수고하였다.”

윤제는 궁인을 짧게 치하하고 포(袍)를 휘날리며 목교가 달려온 거리를 되짚어 뛰어갔다. 윤제의 손짓이 명한 바대로 목교를 크게 칭찬하며 궁인을 챙겨 주던 등우는 모든 이를 낙오시키고 혼자 저만치 앞서 가는 태자를 보고 뒤늦게 소리쳤다.

“전하! 다들 무엇 하느냐! 달리거라!”

황족이 강하다 하나 태자를 혼자 다니게 할 수 없었다.

“전하!”

등우의 명에 금당대 궁인들이 소리를 높이며 태자를 따라붙었다. 윤제는 등 뒤 저 너머에서 간절히 울리는 소리에 상관하지 않고 영화대를 향해 달렸다. 순식간에 영교 앞까지 당도한 윤제는 무엇인가 평소와 다름에 머뭇거렸다. 심장이 이상하도록 쿵쾅댔다. 방금 달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영화대로 올 때 그의 심장은 언제부터인가 항상 두근댔다. 좋아하는 이가 있는 곳에 오며 무심할 사내는 없었다. 그런 두근거림과 완전히 다른 심장박동을 느끼며 윤제가 한발 내디뎠을 때. 우르르, 바람 소리가 같은 발소리가 영화대에서부터 쏟아져 나왔다. 그가 저도 모르게 황족의 힘을 퍼트리고 있었다. 문득 코끝을 스치는 기묘한 단향에 윤제의 표정이 달라졌다. 새벽부터 그를 미묘하게 자극한 감각이 영화대로 가까이 갈수록 강해졌다. 단향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이러다 터지는 게 아닌가 싶도록 심장이 울어 댔다. 궁인이 빠져나온 듯한 방 안으로 윤제가 들어서려 했다.

쿠당!

안에서 의자가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용아?”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울리는 심장의 울림을 내리누르며 윤제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내실에 은근히 감돌던 정체를 알 수 없던 단향이, 침실 앞으로 다가가자 피어오르는 것처럼 번져 나왔다. 남자의 손이 내실과 침실을 구분 짓는 문을 열었다.

순간 방 안에 고여 있던 단향이 윤제를 덮쳐 왔다. 숨도 쉴 수 없는 아득함이 그를 뒤덮었다. 훅, 끼쳐 온 단향은 덜컥덜컥 요란한 소리를 퍼트리며 뒷걸음쳤다.

“……안 돼…….”

어둠 속에서 울린 목소리에 가쁜 숨결이 가득 묻어났다.

“용아.”

머리가 텅 비는 감각 속에서 윤제가 속삭였다. 방으로 한 걸음 걸어 들자, 달콤함에 온몸을 담근 것처럼 짙은 단향이 남자를 에워쌌다. 의자를 넘어뜨리고, 탁자를 밀치고, 문턱에 걸리며 달콤한 향내를 퍼트리는 존재가 도망쳤다.

“……안, 안 돼요…… 윤제 형, 오지 마세요…… 오면, 오면 싫어요.”

용아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가쁜 숨결과 헐떡임에 목소리가 불안하게 울렸다. 그 습윤한 속삭임이 윤제를 지독하게 곤란하게 했다. 방 안, 천장까지 가득 차오른 단향 속을 거니는 윤제는 난처한 숨을 삼켰다. 귓가에 들려오는 가쁜 호흡 하나에 발정기에 든 짐승처럼 순식간에 커진 중심이 당혹스러웠다.

“용아.”

윤제는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흥분을 억누르며 힘없이 허우적대는 용아를 불렀다. 주위의 것을 전부 넘어뜨리고서라도 남자를 피하려 했던 용아는 코앞으로 다가온 윤제를 마주하는 순간,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

다리에 힘이 풀린 것 같은 용아의 얼굴은 열이 올라 달아올랐고, 눈가는 울음을 퍼트린 것처럼 젖어 있었다.

“용아, 괜찮…….”

본능적으로 손을 내어 쓰러진 이를 일으키려던 윤제는 그의 손이 닿자, 온 얼굴을 붉히며 달뜬 숨을 내뱉는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숨을 들이켜고 내뱉을 때마다 젖은 숨소리가 귓가로 번졌다.

용아는 몸을 돌려 쓰러진 채 팔로 기어서 도망치려 했다.

울음이 묻어나는 헐떡임은 깊은 밤, 침상 위에서도 잘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예상을 한참 넘어서는 야한 울림에 윤제는 오히려 당황해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남자를 피하던 용아가 앞을 볼 여력이 없는지 문턱에 걸려 힘을 잃고 기우뚱 넘어졌다. 쿵! 무서운 소리가 났다.

“흑…….”

용아가 쓰러지며 신음을 흘렸다. 아픔을 토로하는 소리조차 묘하게 음란했다. 윤제는 단숨에 쓰러진 몸 곁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도망칠 틈을 주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고 일으켰다. 팔뚝을 잡아 오는 윤제의 손길에 용아가 목을 움츠리며 거부를 표했다.

“괜찮아.”

윤제의 목소리에 용아가 울먹이는 얼굴로 돌아봤다.

“안 괜찮습니다……!”

용아는 몸을 움츠리면 커다란 손에서 벗어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등과 어깨를 뒤로 잔뜩 빼는 가련한 얼굴을 윤제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아프다며.”

윤제가 고집을 부리는 얼굴에 손을 겹치며 말했다.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최대한 조심스레 말을 내뱉었다.

용아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피부 위로 화인이 남는 것처럼 남자의 손이 닿는 것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내려뜨고 있던 눈이 윤제를 올려다봤다. 붉어진 뺨을 다정하게 감싸고 있는 손으로 뜨거운 입술이 돌아보는 것처럼 움직여 입을 맞췄다. 젖은 입술이 손가락을 빨고, 혀를 굴려 잔뜩 핥았다.

한참 윤제의 손가락을 머금고 애무하던 용아가 흠칫 놀란 것처럼 멈추더니 얼굴을 돌렸다.

“……저리, 가세요…….”

야한 얼굴이 원망스러움과 서러움을 퍼트리며 속삭였다. 야한 숨을 퍼트리는 얼굴에 손을 빨리며 넋 나간 표정을 하고 있던 윤제가 잠시 머뭇댔다.

남자의 얼굴 역시 용아만큼 붉어져 있었다.

“저기.”

용아가 음란한 얼굴로 소리쳤다.

“저리, 저리 가세요!”

“괜찮은 거냐. 태의를…….”

윤제가 몸을 물리려 하며 말했다.

“태의 필요 없습니다.”

용아가 잘게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붉어진 얼굴과 목덜미, 가쁜 숨을 들이켜고 내뱉으며 이따금씩 긴 숨을 어렵게 토하는 용아의 상태는 위중해 보였다. 구겨져 앉아 있는 모양새가 안쓰러웠다.

“용아.”

윤제가 힘겨워 하는 얼굴을 불렀다.

“……윤제 형…….”

용아가 답을 하듯 희미하게 속삭였다. 윤제가 저리 가라는 말을 잊고 무심결에 다가가자, 남자의 목덜미로 덜덜 떨리는 손이 감겨들었다.

커다란 손이 가여운 손을 감싸 쥐려 했다.

옆을 돌아보는 남자의 반대편 목덜미에 헐떡이는 숨소리가 순간 다가왔다. 더운 입술이 윤제의 목덜미와 귓가에 쪼는 듯한 입맞춤을 내리고, 숨을 헐떡이는 입술을 맨살에 묻고 깊이 비볐다.

윤제가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붉어진 눈가와 남자의 시선이 마주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겹쳐지며 혀가 뒤엉켰다. 입술이 맨살을 빠는 소리와 혀로 점막을 빨았다 놓는 소리가 난잡하게 번졌다. 코가 짓눌리도록 입술을 맞대고 빨아 대던 용아가 덜덜 떨리는 몸짓으로 윤제를 밀쳐 냈다.

윤제를 밀쳐 내면서도, 용아의 몸 일부분은 윤제에게서 떨어져 나오고 싶지 않은 몸짓을 했다. 잠시 크게 들이켜고 내쉬는 갈급한 숨소리만 울렸다.

다시 시선이 마주했다.

윤제가 턱을 기울이자, 용아가 목이 타는 갈증에 빠진 듯한 얼굴로 남자의 얼굴을 당겨 허겁지겁 입 맞췄다. 용아가 윤제의 하복부를 더듬어 완전히 발기한 것을 손으로 만지며 살짝 일으킨 하체를 남자의 허벅지에 비볐다.

윤제는 소리 없이 신음했다.

한참 헐떡이는 숨을 퍼트리며 윤제를 자극하고, 스스로를 자극하던 용아가 또다시 멈칫했다. 곧 다급히 떨어져 나갔다. 용아는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때때로 따르며, 그런 자신을 끔찍해했다.

“저.”

윤제는 무어라 말해 주어야 하나 망설였다.

“어. 어떡해요.”

용아가 야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울먹였다. 속삭이는 몸에서 윤제의 인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단 향이 끝도 없이 퍼져 나왔다. 조그만 몸짓이, 입술의 사소한 우물거림, 숨을 내뱉는 당연한 것까지도 남자를 미혹하는 것처럼 음란하게 보였다.

“괜찮아.”

윤제는 오랫동안 고민했으나 특별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흔한 위로를 내뱉었다. 구겨져 앉은 용아가 다리를 잠그듯 붙이며 다시 울먹였다.

“……하고 싶어요…….”

노골적인 말이 남자를 직격했다.

“…….”

윤제가 뒷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용아를 바라봤다. 잔뜩 흐트러진 얼굴이 잘게 도리질을 했다. 용아가 쥐어짜내듯 소곤댔다.

“그런데 하기 싫습니다.”

앞뒤 말이 맞지 않았지만 윤제는 따지지 않았다. 다른 이가 그렇게 말했다면 뭐라 하는 거냐고 비웃었을 테지만, 제 몸의 낯선 상태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에 대고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음란한 몸에서 나오는 단 향은 윤제를 혼미하게 할 정도였지만, 윤제는 화를 내지도 본능에 따라 성급하게 굴지도 않았다.

“네가 허락 안 하면 아무것도 안 할 거다.”

윤제가 말을 내뱉으며 스스로를 욕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진지하게 내뱉는 자기 자신에게 헛웃음이 다 났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남자의 결코 진심이 아니며 지키지 못할 약속에 용아가 눈물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정말요?”

속삭이는 얼굴에서 달콤함이 번져 나왔다. 용아가 소곤거리며 유혹을 참지 못한 것처럼 손을 뻗어 남자의 허벅지를 만졌다.

윤제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응.”

윤제가 얼굴을 기울여 속삭인 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그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았다. 입술을 맞대는 순간,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입술이 얼얼하도록 서로를 먹어치웠다. 뒷머리가 울릴 때까지 입을 맞추고 천천히 떨어져 나왔다. 물러나는 윤제의 턱을 용아가 몇 번이나 붙들고 가볍게 입술을 마주했다가 떼어 냈다.

“쌀 것 같아요.”

감당하기 어려운 고백이 울렸다.

“나도.”

윤제가 무심히 답하려 노력했다. 유혹에 이기지 못한 것처럼, 동의하는 남자에게 몇 번이고 입술을 겹치고 떼어 낸 용아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구겨 앉은 몸이 평소와 달리 어설프게 움직였다.

그 몸은 짙은 단 향이 났고, 사소한 움직임조차 야해 보였지만, 이해할 수 없는 열이 올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아픈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허우적허우적하던 용아가 의지와 상관없이 무력하게 내려앉았다.

“아……!”

둔탁한 통증에 내뱉은 약한 소리가 선정적이었다.

“필요한 게 있어?”

윤제가 인내심을 수 번 되뇌며 말했다.

“……도, 도이환…… 도이환. 도이환.”

용아가 혼잣말처럼 웅얼댔다. 열에 절은 얼굴이 힘겹게 속삭이며 다가온 윤제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윤제는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용아를 안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용아가 몸을 일으켜는 남자의 옆얼굴에 잔뜩 입을 맞추고, 달콤함이 번져 나오는 듯한 손으로 남자의 맨살을 매만졌다.

윤제가 충동을 참지 못하고 안아 든 용아를 밀어붙이는 것처럼 벽에 기대고 입을 맞췄다. 숨도 쉬지 못하고 혀를 얽었다. 입 맞춰 오는 남자의 허리와 등과 팔뚝을 쉴 새 없이 매만져 자극했다.

“도이환이 뭐야.”

“저기.”

용아가 화려한 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윤제가 용아를 품에 안아 든 채로 걸었다. 남자가 서랍을 열어 살펴보는 동안에 용아가 이를 세워 무방비한 귓불을 긁어내렸다. 뒷목에 더듬더듬한 손길이 닿았다.

“이거?”

서랍 안 납작한 궤를 열자, 얇은 종이에 싸인 푸른색이 도는 환이 나왔다. 용아가 황급히 손을 뻗어 종이를 찢었다. 깊고, 빠르게 숨을 들이켜는 입술 사이로 환이 밀어 넣어졌다.

“으.”

용아가 얼굴을 힘껏 구겼다.

“괜찮아?”

윤제의 걱정 가득한 말에 용아가 투덜대며 환을 강제로 삼켰다.

“너무, 써요.”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입술에 다급히 입을 맞췄다. 젖은 혀에 남아 있는 환의 잔향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뜨겁고, 부드러운 감촉이 뒤섞이는 감각만이 선명했다.

“단 걸 가져다줄까.”

윤제가 단향이 퍼져 나오는 입술에서 입술을 떼어 내며 말했다.

“이상해.”

열감에 감싸인 머리를 남자의 가슴팍에 대며 용아가 웅얼댔다.

“뭐가.”

“왜 가라앉질 않을까.”

용아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멍했다. 퍽 야하고 음란했다. 타액에 젖어 평소보다 더 붉게 색이 짙어진 입술이 속살거리는 모양이 시선을 자꾸 끌었다.

“그래?”

“하나 더 먹어야 할까요.”

“저거 먹어도 되는 거냐?”

윤제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도이환을 돌아봤다. 용아의 상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대답하며, 윤제의 어깨에 팔뚝이며 가슴팍에 작은 입맞춤을 하고 야한 얼굴을 비벼대는 것일 터다.

윤제는 욕심 부리지 않았다. 그저 이 호사를 조금 더 누리면 족했다. 그는 안아 든 용아를 침상으로 데려가 눕히고, 침상 끝에 앉아 용아가 놓아주지 않는 손을 내주고 있었다. 윤제의 손이 뺨을 쓸고 나면 용아의 숨결이 한결 나아졌다. 아까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것 같다가 다시 숨을 죽이다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괜찮으냐.”

윤제는 침상 끝에 앉아 열감에 잠긴 얼굴을 내려다봤다. 힘들어하는 얼굴에 부드럽게 손을 가져다 대 오르내렸다. 남자의 손에 묻혀 있던 얼굴이 굶주림을 호소하는 것처럼 뜨거운 입술로 때때로 정신없이 커다란 손을 먹어 치울 듯이 입을 맞췄다.

윤제는 앞을 보며 얼굴을 붉힌 채로 뜨거운 얼굴을 만져 줬다.

“괜찮아요.”

용아의 몸은 나아질 듯 나아지지 않았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처럼 괴롭지는 않았지만 얼얼한 열감이 흐려졌을 뿐, 충동과 닮은 욕구는 그대로였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윤제가 걱정을 놓지 못해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용아의 손이 남자의 얼굴을 당겨 입술을 머금었다. 윗입술을 빨고 아랫입술을 빨고, 맞물린 입술 사이를 강하게 빨아 들여 혀를 얽고 시야가 어질어질해 진 후에야 얼얼한 입술을 떼어 냈다.

“…….”

윤제는 떨어져 나가는 얼굴을 말없이 쳐다봤다. 열감에 취한 얼굴은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물러나면서 몇 번이고 짧은 입맞춤을 내렸다. 윤제는 가만히 입술을 내주고, 용아가 하는 대로 두었다.

“……송구합니다…….”

윤제에게서 물러난 젖은 입술이 사과했다.

“나는. 괜찮다.”

윤제가 낮게 가라앉아 쉰 것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 깊은 곳에서 울리는 긁히는 듯한 저음에 용아가 다시 대답하는 입술을 당겨 입 맞췄다. 남자를 한껏 자극하고 자극받은 후에 물러나는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미안해요.”

용아의 속삭임에 윤제가 말없이 얼굴을 저었다. 남자의 손이 절망하는 듯한 야한 얼굴을 더듬었다. 긴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열감이 가시고 서늘함이 퍼졌다. 동시에 거칠게 박동하는 욕구를 증폭시켰다. 용아는 그의 손이 닿으면 생명수가 내리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입술을 묻고 뺨을 비볐다.

용아만큼이나 윤제 역시 곤혹스러웠다.

머리끝까지 다디단 향에 잠긴 착각이 일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온몸의 신경이 예민하게 일었다. 살갗으로 와 닿는 공기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흥분이 수그러들 것 같지 않았다. 남자가 제 손에 뺨을 비비며 약한 소리를 흘리는 얼굴을 불렀다.

“용아.”

“응…….”

신음 같은 대답이 흘렀다.

“안고 싶다.”

윤제가 단향을 퍼트리는 몸을 따라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열감을 억누르고 있는 얼굴이 잘고 희미하게 끄덕였다. 깊고 부드러운 숨결이 미세하게 빨라졌다. 윤제가 가볍게 헐떡이는 몸 위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몸을 굴려 겹치며 얼굴을 내렸다.

“…….”

용아의 호흡이 더 빨라졌다. 가슴과 어깨가 오르내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다디단 향을 퍼트리는 얼굴의 코앞까지 입술을 내린 남자가 속삭였다.

“허락하면 입 맞춰 주겠어?”

입술 앞에서 퍼지는 속삭임이 다 울리기도 전에 용아의 입술이 곧장 윤제의 입술에 겹쳐졌다. 숨이 뭉쳐진 가쁜 소리가 맞물린 입술 사이에서 울렸다.

한참 입술을 얽고 혀를 마주하며 젖은 소리를 퍼트렸다. 남자와의 입맞춤으로 한결 나아지고, 훨씬 더 흥분하게 된 용아가 헐떡이는 숨을 내뱉었다. 윤제가 몸을 일으켜 그가 단정하게 눕혀 둔 다리 사이에 파고들어 앉았다.

스슥, 스슥,

커다란 손에 연약한 매듭이 풀려 갔다.

“……전하……? ……아, 흑!”

윤제가 손끝으로 매듭을 풀어 옷을 벗기며 용아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럽게 오르내리던 몸이 충격과 쾌감으로 일순 굳어 들었다.

열린 다리 사이에 앉아 용아의 무릎을 세워 올린 남자가 용아의 중심에 깊이 얼굴을 묻고 비벼 댔다. 다리 사이를 파고든 얼굴이 옷감 위라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입술을 마구 내렸다.

남자의 입술이 허우적대는 몸에 입술을 맞추고, 머금고 빨았다. 얇은 옷감 위로 습윤한 감촉이 덧입혀지며 숨이 막혀 왔다. 내어진 혀가 옷 위를 뜨듯하게 적셨다. 따듯하던 타액은 공기와 만나 금세 차가워졌다. 젖어 든 얇은 천이 맨살에 달라붙어 오며 낯선 감각을 퍼트렸다.

시야가 어지럽게 휘청거렸다.

헐떡이는 허리를 붙잡은 윤제가 허우적대는 다리 밑에 조금 더 확실하게 자리를 잡으며 엎드리고 앉았다. 남자의 어깨가 용아를 밀 때마다 다리가 허공에 들린 채 오르내렸다. 축축하게 젖어 든 얇은 천에 뜨거운 입술이 빨고 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몰아치는 것처럼 쏟아지는 쾌감에 용아가 우는 소리를 냈다.

윤제의 어깨가 용아를 조금 더 위로 밀어 올렸다.

허리가 떠오르듯 밀리며 들썩였다. 다리 사이에서 울리는 축축한 소리가 집요하게 이어졌다. 옷 위에 구멍의 위치가 드러나도록 빨아 대는 입술에 용아가 진저리쳤다.

당혹스러워 발버둥 쳐 봤지만 몇 번이나 연이어 빨렸다.

남자는 아무 말도 않았다. 다디단 향이 오르는 몸에 입술을 묻고 탐하며 온통 먹어 치웠다.

“……아, 흣, ……윤, 윤제 형…….”

용아가 본능적으로 가장 유효한 말을 소곤댔지만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츕츕, 음란한 젖은 소리만 가득했다. 용아는 발버둥을 치는 동시에 좋아서 신음을 흘려 대고 허리를 들썩였다.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금세 저릿저릿한 자극에 신음하느라 잊었다.

윤제가 잠시 물러나 앉았다. 뒤이어 용아의 아래가 선득해졌다. 커다란 손에 입고 있던 것들이 온통 뜯겨져 열리고 밀려 내려갔다. 다시 윤제가 용아의 사이에 자리했고, 남자의 어깨가 큰손에 붙들린 벗은 다리를 밀쳐 올렸다. 팽팽하게 한계까지 부푼 성기에 부드러운 입술이 스쳐 갔다.

“아! 읏…… 흣.”

남자의 어깨 위에 걸쳐져 허공에서 뜬 벗은 다리가 음란하게 들썩였다. 한입에 먹어치워 지듯 더운 입술 안으로 성기가 먹혔다. 강하게 빨아 당기는 얼얼함에 허리 아래가 녹아내리는 감각 속에서 용아가 자신조차 생경한 소리를 흘렸다.

용아의 손이 잘생긴 뒷머리를 욕망에 따라 움켜쥐고 당기다, 흥분을 내리고자 밀쳐 내기를 반복했다.

“……!”

잔뜩 부푼 기둥을 빨던 입술이 용아의 것을 뱉어 냈다. 커다란 손이 기둥의 표면을 따라 매만졌다. 남자의 코끝이 쾌감으로 움칫대는 허벅지 안쪽을 더듬었고, 주름 가득한 좁은 곳 위로 축축하고 뜨거운 호흡이 와 닿았다. 용아가 허리를 물리려 할 때 윤제의 입술이 구멍 위에 깊이 입을 맞췄다.

온몸의 솜털이 바싹 곤두섰다.

“흑!”

용아가 허리를 웅크리며 신음했다. 입술에 빨려 축축해진 곳으로 손가락이 찔러 들었다. 남자 입술이 앞을 빨아 당기며 뒤를 손가락으로 파고들며 휘저었다. 질척질척한 소리가 울렸다. 앞뒤로 가해지는 자극에 용아가 온몸을 들썩이며 신음했다.

괴롭힘 같은 쾌감이 퍼부어졌다.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가 새어 나가는 몸이 부끄러웠다. 또한 참을 수 없는 흥분감에 남자가 주는 자극에 따라 몸을 뒤틀었다.

“흣!”

용아가 순간 허리를 멈추며 윤제의 입과 얼굴에 욕망을 잔뜩 토해 냈다. 흐릿한 체액으로 젖어 든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용아는 제 것으로 엉망이 된 남자의 얼굴에 민망해하면서도 다가오는 얼굴에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윤제는 젖은 얼굴로 용아의 입맞춤을 받으며 허리를 풀어헤쳤다. 뺨에 입을 맞추는 얼굴을 당겨 입을 맞춘 남자가 흥분과 쾌감으로 뒤범벅된 뒷머리를 눌러 내렸다.

커다랗게 부풀어 꺼떡대는 남자의 것이 순식간에 용아의 입술에 비벼지고, 멍하니 열리는 입술 안으로 파묻혔다. 용아가 머리를 깊이 내려 커다란 것을 빨았다. 자극에 밀려 하는 행위는 요령이 없어서 서툴기만 했다.

“음, 응, 으읍…….”

머리는 착실하게 기둥을 머금고 오르내리고자 했지만 입에 다 담기 어려운 크기에 끝만 조금 핥고 마는 수준이었다. 윤제는 불만을 토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성심껏 제 것을 빠는 뺨을 다감하게 만졌다.

다 머금을 수 없는, 커다란 것에 용아가 난처함을 표했다.

윤제는 마치 범위를 정하듯 성기 앞머리만을 빨도록 용아의 손을 당겨 중간 부분을 쥐여 줬다. 커다란 것의 축축한 끝을 머금고 강하게 빨았다. 혀가 아리도록 핥아 보아도 꿈틀대며 턱과 뺨을 사납게 툭툭 때려 오기만 할 뿐인 남자의 것에 용아가 시선을 올렸다.

조금 울먹울먹한 눈이었다.

오심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인 것이지만, 윤제는 야하게 흐트러진 눈물 젖은 얼굴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남자가 젖은 얼굴에 닿을 듯 말 듯 입을 맞췄다.

커다란 손이 용아의 어깨와 허리로 다가갔다. 순식간에 몸이 뒤집혔다.

“……전하?”

등 뒤로 다가선 윤제가 걱정을 머금고 있는 귓가에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윤제 형이라고 해.”

용아가 돌아보려 할 때 남자의 손이 용아를 부드럽게 짓눌렀다. 엎드린 채 엉덩이만 치켜 올린 모양이 된 용아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 흐윽!”

치켜 올려진 엉덩이 사이로 윤제가 코를 박았다.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축축한 소리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커다랗게 울렸다. 뾰족하게 세운 혀가 주름진 구멍 주위를 핥고, 좁은 안을 찔러 들었다.

윤제가 이지를 잊은 듯 감각이 가해지는 대로 들썩이며 헐떡이는 등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용아가 엉덩이 사이를 빠는 얼굴을 밀어내려 했지만, 등 뒤로 손이 당겨지며 붙들리는 꼴이 되었다. 어깻죽지가 당겨질 때마다 남자에게 빨리는 허리가 난잡하게 들썩였다.

윤제가 헐떡이는 손을 당겨 제 것을 만지게 했다. 엉덩이를 빨리며 커다랗게 발기한 남근을 만지는 것은 스스로를 음탕한 존재로 인식하기에 충분했다.

남자의 입술이 빨아 오는 아래에 더 큰 자극을 바라며 들썩이는 순간, 다시 절정이었다. 앞이 캄캄해졌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감각에 용아의 등이 경직했다.

쾌감으로 굳어 든 등은 다음 순간 두려움으로 얼어들었다. 한껏 치켜 올려진 엉덩이 사이로 커다란 것이 슥슥 비벼졌다. 무섭고, 선득하면서 알 수 없는 기대감에 근육이 꿈틀댔다.

용아의 구겨진 몸 위로 단단하고 큰 몸이 겹쳐졌다.

커다란 것이 천천히 파고들었다. 삽입은 숨도 쉬지 않고 조심히, 침착하게 이루어졌다. 깊이 파묻히는 커다란 것으로 움칫대며 달라붙는 안의 젖은 살에 용아가 조금 쑥스러워 했다.

그리고 인정하기 어려운 감각에 몸을 떨며 신음했다. 솜털까지 곤두선 맨살은 남자의 숨결만 스쳐도 좋아서 흠칫흠칫 떨렸다. 민망해하는 것은 잠깐이었다.

삽입을 완전히 마치고 잠시 기다리던 남자가 순간 안으로 직격했다.

“……!”

깊은 안으로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잠시간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억눌린 소리를 토하는 몸 안으로 다시 윤제가 치고 들었다. 퍽, 살과 살이 맞부딪친다고 생각할 수 없는 폭력적인 소리가 울렸다. 용아는 안으로 박아 드는 커다란 성기에 허리를 떨며 젖은 숨만 내뱉었다. 셀 수 없이 꿈틀대는 안으로 커다란 것을 박아댄 후에야 윤제는 잠시 멈추었다.

삽입의 충격과 쾌감에 머리와 윗몸은 완전히 무너지고, 커다란 손이 단단히 끌어올리고 있는 엉덩이만 치켜든 용아의 몸이 흠칫흠칫 울었다.

윤제가 지독한 감각에 무너져 내린 등에 입을 맞추며 구겨진 용아의 몸을 부드럽게 펼쳤다. 무릎을 세우고 있던 남자의 몸이 낮아지며 그곳만 존재하는 것처럼 치켜 올라갔던 용아의 엉덩이도 낮아졌다. 한쪽 다리가 옆으로 밀쳐졌고, 웅크리고 있던 반대쪽 다리도 펴졌다.

“……윤……제 형…….”

눈물 고인 얼굴이 윤제를 돌아봤다. 윤제가 자신을 부르는 얼굴을 당겨 입을 맞췄다. 혀가 뒤엉켰다. 맞물린 입술 사이에서 억눌린 용아의 소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남자의 것이 다시 용아의 안으로 박아 들었다.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잠시간 이어졌다. 철썩철썩, 용아의 흐느끼는 뒷몸을 남자의 몸이 삽입하며 때려 댔다. 다시 커다란 것이 깊이, 깊이 파고들었다. 깊숙이 파묻고 빠르고 짧게 찔러 댔다.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 용아가 짧은 소리를 퍼트렸다.

“아! 아! ……아, 아…… 흑.”

습기 가득한 소리는 높지 않았다. 숨결이 섞인 울림은 짧게 울렸다. 헐떡임을 삼킨 소리에 당황이 가득 묻어났다. 낯선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젖은 소리가 쏟아졌다.

남자가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 감당 못 할 감각이 용아를 먹어 치웠다. 순간순간 기억이 잘려 나간 것처럼 시야가 사라졌다. 어디에서 시작된지 알 수 없는 저릿저릿한 울림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절절한 울림 후에는 오싹오싹한 감각이 뒷머리를 좀먹는 것처럼 타고 올랐다.

울음 같은 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아아……!”

숨죽인 신음이 막을 새 없이 터져 나갔다. 다시 몸이 돌려졌다. 윤제의 손이 오싹한 쾌감에 우는 것처럼 떠는 용아의 몸을 제 것처럼 움직였다. 커다란 성기가 완전히 빠져나가듯 물러났다가 돌린 몸으로 깊이 직격했다. 돌려진 몸 위로 남자의 몸이 완전히 포개졌다.

“흣!”

아래에서 젖은 울림이 부드럽게 번졌다.

“……아아, 으…… 흐읏, 읏.”

용아에게 가해지는 압박감은 젖은 소리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흥분으로 덜덜 떠는 벗은 다리가 남자의 손에 떠밀렸다. 들어 올려진 다리를 손과 팔로 밀며 윤제가 허리를 밀어붙였다.

용아는 우는 듯한 신음만 흘렸다.

체위가 바뀔 때마다 성마르게 구는 남자의 행위가 용아를 낭떠러지 아래로 떠미는 듯했다. 윤제가 안으로 치받을 때마다 활짝 펼쳐진 채 들어 올린 다리가 허공에서 떨렸다. 안으로 깊이 파묻힌 커다란 것이 짧고 빠르게 박아 들면 물결치듯 진동했다.

윤제가 가하는 감각은 수치스러움과 허리를 떨며 신음하고 싶은 마음을 번갈아 주었다.

“흑.”

계속되는 난삽한 체위에 용아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부끄러운 와중에 안을 찔러 대는 남자의 것을 따라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민망해서 숨을 쉴 수 없었고,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오싹한 맨살에 윤제의 손이 닿으면 저도 모르게 커다란 손이 닿은 곳을 비틀며 신음했다.

정신을 차리면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당겨 입을 맞췄다. 혀가 얼얼하게 빨린 후에야 자신이 윤제에게 입을 맞추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윤제가 용아를 팔에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다시 시야가 뒤바뀌었다.

세상이 어지럽게 휘도는 것 같았다. 용아는 앉은 남자의 위에 삽입한 채 앉아 있었다. 안을 치받는 커다란 것이 쉴 새 없이 용아를 신음하게 했다.

윤제가 쳐올리는 움직임에 허리가 튕겨 올랐다.

당연한 것처럼 입술을 얽었다.

숨결이 뒤엉키며 만족한 소리가 울렸다. 신음 후에는 다시 울음이 흩어졌다. 용아는 혀가 뒤엉키는 와중에 남자의 벗은 등을 다리를 꼬아 안았다. 신음하고 울며 남자가 쳐올리는 충격에 용아는 몇 번이나 비틀댔다.

커다란 손이 기우는 몸을 안아 당겼다. 맞물린 몸이 서로를 강하게 얽어맸다. 커다란 몸이 용아를 뒤덮듯 단단히 안았다.

“……아!”

신음하는 몸에 밀착한 윤제의 몸이 일순간 단단히 경직했다. 용아의 안 깊은 곳에 파묻혀 꿈틀거리던 성기가 잠시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곧 뜨거운 것이 안을 흠뻑 적셨다. 젖어드는 안이 부르르 떠는 것처럼 울었다. 윤제가 안에다 뜨거운 것을 쏟으며 다시 삽입했다.

사정은 한동안 계속됐다.

“흣, 흐흣…….”

찰박임을 퍼트리며 착실히 안으로 짓쳐 드는 커다란 것에 용아의 흐느끼는 울음도 계속됐다. 남자가 거칠게 파고드는 안이 삽입이 주는 자극에 따라 움칫움칫 수축하며 기이한 진동을 퍼트렸다.

피가 통하지 않다 갑자기 소통할 때처럼 저릿하게 울리던 안이 어느 순간 확 좁아 들었다.

용아의 안에 파묻힌 커다란 것을 조여 드는 속살이 쥐어짜는 것처럼 단단히 물었다. 용아의 울음 번진 얼굴이 야한 울림으로 흩어졌다. 지독한 쾌감에 엉망으로 구겨진 음란한 얼굴로 따듯한 입술이 입 맞춰 왔다.

용아는 남자의 몸에 쏘아진 불투명하고 흐릿한 제 것을 보며 곤란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커다란 손이 움직이는 대로 허리를 앞뒤로 흔들며 흐느끼는 소리를 쏟아 냈다.

윤제가 우는 등을 품으로 당겨 안았다. 크게 오르내리는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대고 숨을 고르던 용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짐승…….”

숨결 가득한 야한 속삭임에 윤제가 웃음을 퍼트렸다. 용아의 윗옷은 남자가 잔뜩 흩트려 놓아서 입은 것도 아니고, 벗은 것도 아닌 것 같은 상태였다. 얇은 천 위로 도드라진 유두를 단단한 손끝이 다정하고 야하게 만지고 있었다. 한쪽은 헐벗은 윗옷에 가려져 있고 한쪽은 겉으로 드러나 있었다. 얇은 천에 감싸인 쪽은 윤제가 옷감 위를 잔뜩 빨아 대서 유두 주위에 둥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응, 짐승이야.”

윤제는 키득대며 단내가 나는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나, 짐승 같아요…….”

용아가 벗은 가슴에 커다란 손을 가져가 겹치며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윤제가 목을 숙여 손끝으로 만진 유두에 입술을 묻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혀를 굴려 꼿꼿하게 선 유두를 잔뜩 빨아 먹었다. 젖은 숨을 내쉬는 입술에 입을 맞춘 그가 낮게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여쁘고 야한 짐승이네.”

귓가에 울리는 놀리는 말에 용아가 윤제를 올려다봤다.

사랑스럽고 야한 얼굴이었다.

윤제가 품에 안은 몸을 더 바싹 당기며 몸을 굴려 눕힌 얼굴에 입술소리가 나도록 마구 입을 맞췄다. 내리는 입술에 용아의 얼굴로 당황한 웃음이 번졌다. 다시 입술이 뒤엉키고, 달뜬 숨소리가 방 안에 차올랐다. 야한 숨소리가 범벅된 웃음과 울음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고요에 감싸인 침상 안에는 드문드문 부드러운 소리만 울렸다. 간지러운 감촉에 깨어난 얼굴에 웃음이 흩어졌다. 눈이 마주하는 순간마다 입술이 얽혔다.

잠이 든 건지, 기절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마지막 기억 전에도 용아는 남자의 얼굴을 당겨 입을 맞췄다. 기절과 잠, 그 사이 어디쯤 직전에 몇 번이나 사정했는지 정확한 횟수를 가늠할 수 없었다. 기억의 일부는 아예 잘린 것처럼 사라져 있기도 했다. 그저 감당할 수 없도록 좋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것만 또렷했다.

“내가 깨웠어?”

윤제가 품에 안은 맨몸에 입술을 내리며 속삭였다. 이불 안 몸은 벗은 채 서로 다리를 얽고 끌어안고 있었다. 용아는 잠들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본능에 기대어 속삭이는 입술과 입가에 입을 맞추며 웃기만 했다. 가물가물한 시야가 느릿느릿 감겼다.

“용아.”

잠이 드는 발그레한 얼굴을 향해 윤제가 말했다.

“응.”

용아가 웅얼웅얼 답했다.

“예쁘다.”

뜬금없고 안 어울리는 칭찬에 용아가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눈가는 울음으로 우스꽝스럽고 통통하게 붓고, 목에서 나오는 희미한 소리는 돌바닥을 긁는 것처럼 거친 소리가 났다. 감기던 용아의 눈이 천천히 올라갔다. 끝이 살짝 올라간 눈이 깊은 웃음을 퍼트렸다.

용아는 잠들기 전에 윤제에게 입을 맞추다, 남자의 머리칼을 풀어내려 두었다. 오늘 한 일 중 가장 잘한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잠이 잔뜩 묻은 손을 뻗어 긴 머리를 내리고 있는 잘생긴 미인의 뺨을 어루만졌다.

“예쁩니다.”

잘생긴 미인의 얼굴이 살풋 구겨졌다.

“너는 내가 머리 내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잘생긴 미인이 팔꿈치로 버텨 몸을 일으켜 가물대는 시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용아는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으로 빠져들며 소곤거렸다.

“긴 머리 미인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잠든 입술로 짧은 웃음과 입맞춤이 내렸다. 다시 깊은 잠으로 가라앉았다. 암전이었다.

영화대 밖을 지키고 선 궁인들은 사흘째 제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불평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것은 금당대 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 길은 없으나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궁인들의 바람은 문안을 올리러 갈 수 없는 태자와 태자비의 상황을 들은 황제가 누구도 영화대 안의 일을 방해해서 안 될 것이라고 엄히 말했다는 게 전해지며 현실성을 조금 더 가지게 되었다.

“너였냐.”

사흘째 기묘한 교대 불침번이 이어졌다. 모장의 물끄럼한 시선을 본 목희가 옆에 서 있는 목교에게 나직이 말했다. 목교의 얼굴이 난처하게 굳어 들었다.

“응…… 송구합니다.”

영화대 궁인 숙소에서 나온 금당대 궁인이 칭찬의 뜻으로 받는 금낭의 주인을 이름이었다. 금낭 안에 든 금편이 상당했었다.

목교의 대답에 영화대 궁인들의 시선이 뾰족하게 모였다. 목교가 깊이 얼굴을 낮추었다.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목교의 머리 위로 모장의 목소리가 내렸다.

“잘했다.”

다른 궁인들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아주 잘했지요.”

“훌륭하다.”

“애기씨가 생겼으면 좋겠다.”

영화대 궁인들의 속닥속닥 떠드는 말에 등우가 흠! 목을 울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데 경거망동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떠들던 궁인들이 분분히 입을 다물었다.

“비전하 닮은 아드님이면 좋겠소.”

“그렇지요. 첫째는 아들인 게 비전하께도 좋겠지요.”

등우가 은근한 목소리로 모장에게 떠들었고 모장이 기분 좋게 말을 받았다.

“소인은 태자 전하 닮은 공주님이면 좋겠는데요.”

“전하 닮은 따님은 너무한 것 아닌가. 전하 닮았으면 아드님이라야지. 전하 닮은 공주님이 시집은 갈 수 있겠나.”

등우 뒤의 두 태감이 서로 의견을 속닥였다.

“어허이.”

“못하시는 말들이 없네.”

등우와 모장이 자신들은 그랬던 적 없는 것처럼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소인들이 무얼 잘못했다고 그러…… 송,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태감들은 억울함을 표하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궁인들이 더 낮춘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의견을 주고받다가 등우와 모장의 차디찬 시선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새로운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용아는 잠에서 깨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끝났다.

충동적인 욕망이 넘쳐흐르는 지독한 주기가 마무리되었다. 발가벗은 몸을 겹치고 있는 상대 또한 알고 있을 터였다.

“일어났느냐.”

지난 며칠은 꿈도 거짓도 아니었다.

“예…….”

그러나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때와 똑같이 굴 수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용아는 겹쳐진 벗은 몸을 어떻게 떼어 낼까, 엉킨 다리를 어떻게 풀까 고민하며 턱을 움츠렸다.

아래에 고정돼 움직일 기미가 없는 얼굴을 커다란 손이 가볍게 올렸다. 당연한 것처럼, 어제처럼, 지난 며칠처럼 깊이 입술이 겹쳐졌다. 기억이 몽땅 사라지는 기적 같은 건 없었기에 용아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약속된 행위처럼, 진득한 입맞춤이 오갔다.

윤제가 가쁜 숨을 내뱉는 입술에 가벼우면서도 입술 모양을 남기는 것처럼 입술을 내렸다. 몸을 일으키며 붉어진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비비는 것처럼 만진 남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체 말했다.

“다음 합방일은 내가 정하마.”

침상을 내려서는 벗은 뒷모습을 향해 용아가 멍하니 대꾸했다.

“……네……?”

윤제가 돌아섰다.

“나하고 다시 안 잘 거냐.”

“……네? 아, 아뇨…….”

주기는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또 올 것이다.

“나하고 자고 싶어?”

남자가 노골적인 말을 다감하게 건넸다.

“…….”

용아는 귀만 발갛게 물들였다. 침상으로 돌아와 끝에 걸터앉은 윤제가 열 오른 귀에 입을 맞추며 속닥였다.

“싫은가?”

용아가 수줍음 많은 아이처럼 얼굴을 돌렸다.

“아니요.”

“그러니까.”

딴청을 부릴 수 있으면 그러고 싶은 턱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며 윤제가 말했다. 용아가 의문을 담아 남자를 돌아봤다. 돌아보는 뺨을 커다란 손이 넉넉하게 감싸 왔다.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발가벗은 채 입을 맞추는 민망함과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이 한결 나아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러니까, 뭡니까.”

용아가 붉은 얼굴로 조심스레 소곤거렸다.

“화아. 너 자고 싶을 때만 할 수 없다는 거다. 다음은 내가 하고 싶을 때, 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게 언젠데요?”

걱정과 궁금증이 뒤섞인 말에 윤제가 표정을 지웠다.

“지금?”

붉어진 얼굴에 난처함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하고 뭘 또 하냐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곤혹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윤공자 형님.”

“그거로 때우려 하지 마. 아직 할 거 많다. 나는 너하고 하는 거 좋았다. 그러니까 봐주지 않을 거야. 여기 더 있으면 할 거 같으니까 그만 가 보마. 저녁에 금당대에 식사하러 오도록 해라.”

“……예.”

용아가 머리를 끄덕이며 차분히 답했다. 일어서는 윤제의 얼굴을 보는 얼굴에 고민이 산더미처럼 쌓여 갔다. 윤제가 돌아서다 말고 물었다.

“왜 그렇게 봐.”

용아가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 해요……?”

걱정 가득한 표정이 조금 얄미웠다.

“묻지 마.”

윤제는 그래서 튕기듯 말하고 방을 나섰다. 남자가 나서고 혼자 남은 용아는 다가올 저녁을 걱정하다, 지난 저녁과 지지난 저녁과 지지지난 저녁을 떠올리고 베개 밑으로 머리를 숨겼다. 이불을 끌어당겨 꽁꽁 몸을 숨긴 채 괴로워하다 투다다닥 소리가 나도록 몇 번이고 발을 굴렀다. 그래도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이 부끄러움이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 같아서 더욱 부끄러웠다.

저녁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드소서.”

금당대 궁인들이 태자비를 기쁘게 맞았다.

“안에 계신가.”

“예, 계시옵니다.”

등우가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이중문 중 바깥문을 열어 주며 물러섰다. 용아가 문 앞으로 가서 서자 태감이 안쪽 문을 열며 아뢰었다.

안을 향해 고하는 등우를 향해 용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고맙네.”

용아는 최대한 무덤덤한 얼굴을 하려 했다. 용아가 문 안으로 들고 등 뒤에서 부드러운 기척이 울리며 문이 닫혔다. 주위를 물린 텅 빈 안을 홀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모호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어색하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안으로 든 용아가 입구로 들어선 후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윤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왔느냐.”

그의 앞 커다란 사각 탁자 위에는 간단한 식전 음식이 준비돼 있었다.

“낮 사이 강녕하셨습니까.”

용아가 한껏 예를 차려 말했다.

“왜 그렇게 예쁘게 하고 왔느냐. 나하고 하고 싶어?”

용아의 앞으로 성큼 다가선 남자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갈래요…… 가 보겠습니다.”

얼굴을 굳힌 용아가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머리를 꾸벅 숙이고 내빼려는 몸을 커다란 손이 재빨리 붙들었다. 윤제가 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가지 마.”

“…….”

“형이 미안해. 잘못했다. 진짜 예뻐서 그랬다. 내가 너한테 이런 망발을 할 때가 언제 또 있겠어.”

윤제가 부지런히 사죄했다.

“……모장이…….”

용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림은 전부 모장의 작품이었다. 풀어내린 머리의 빗질 하나까지 모장의 노력이었다. 용아는 핑계 같은 말임을 깨닫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결국 모장이 내준 장포를 입는 걸 택하고, 그녀가 해 주는 빗질을 얌전히 받고, 꽂아 주는 장신구를 받아들인 것은 용아 자신이었다.

“예쁘다.”

연이은 칭찬에 용아가 무뚝뚝한 얼굴을 붉혔다.

“과찬이십니다.”

수줍어하는 듯하던 얼굴이 금세 덤덤히 말했다. 윤제가 무심한 얼굴 곁을 천천히 걸었다. 용아의 내리깐 시선이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다.

윤제가 은은한 단 향을 따라 걸었다.

“너한테서 좋은 향이 나.”

지난 며칠처럼 강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용아의 주위에서 번져 나오는 것처럼 부드럽게 체취가 일렁였다. 때때로 용아의 가까이에 의도치 않게 다가갔을 때 났던 희미한 향과 닮은 기척이었다.

정확히는 향이라고 할 수 없었다.

후각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 달았고, 기척 자체는 오감 전체로 존재감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은근히 번지는 미혹하는 울림은 따뜻하고 서늘하면서, 부드러운가 하면 거칠었고, 미약하고 희미한 양으로도 강한 존재감으로 시선과 감각을 압도했다.

“전하께도 좋은 향이 납니다.”

용아 또한 윤제로부터 퍼져 나오는 존재감에 시선이 저절로 옮아 갔다.

“그래?”

윤제의 존재감만으로 용아는 곤란했다. 남자의 앞에 서면, 온몸의 신경이 예민하게 일며 곁에 있는 윤제를 선명히 인지했다. 시각만으로 타인의 시선을 끄는 사내이지만, 용아에게는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등을 돌리고 있어도 머리 뒤에도, 등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남자를 찾을 수 있었고, 그에게만 집중했다. 그에 따른 감각은 그보다 더 특이했다. 때로는 따듯하거나 서늘했고, 때로는 쓰면서도 달콤했다. 남자에게서 퍼져 나와 용아에게 퍼부어지는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용아뿐이었다.

전부 수차를 마시지 않은 탓이었다.

‘차에 어떤 비밀이 있습니까.’

‘…….’

다 늦은 아침에 수차를 찾는 용아에게 수차를 올리며 모장이 물었다. 용아는 들었던 찻잔을 말없이 내리기만 했다. 의아해하는 얼굴을 본 모장이 다시 말했다.

‘항상 수차를 택하시는 것에 의구심을 가졌지만 명하시기에 올렸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차다.’

거짓을 말했지만 청한 차를 마시지 않았다. 왜인지 마실 수가 없었다. 저녁에 금당대로 들려면 조금 뻔뻔해질 필요도 있지 싶었다. 본능에 기대는 것은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어차피 남자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이도, 자신의 체취를 알 수 있는 이도 서로 상대뿐이었다.

용아의 조심스러운 손짓이 윤제를 스쳐 갔다.

“여기. 여기. 또 여기.”

부드러운 손이 윤제의 어깨를 짚었다. 이어 목 뒤와 턱을 타고 스윽 선을 긋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저 짚어 오는 몸짓에 호흡이 어지러워졌다.

윤제가 자신을 건드린 손을 당겨 입가로 가져갔다.

“…….”

정적 속에서 부드러운 소리가 울렸다.

“…….”

용아는 본능의 이끌림에 마냥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껏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의도적으로 피했고, 차단할 수 있는 것은 빗장을 걸어 잠가서라도 전부 막았다.

이상한 긴장감에 휩싸인 방 안으로 등우의 목소리가 건네졌다.

“전하.”

“무슨 일이냐.”

윤제가 용아를 살짝 당겨 입을 맞추고 물러섰다.

“선시각 궁녀들이 들었사옵니다.”

태감이 고하는 말에 기이한 긴장감에 빠져 있던 용아의 얼굴이 순간 깨어났다. 머리 위에 찬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심장의 두근거림이 뚝 그쳤다.

“…….”

문득 용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태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중경의 황족 사내는 처첩을 여럿 두었다. 황가는 그러지 않았으나, 지금의 태자 윤제는 그러했다.

“들여라.”

윤제가 용아의 손을 다감하게 붙들며 명했다.

“드시게.”

용아는 커다란 손이 당기는 대로 걸으며 표정을 정리했다. 선시각 궁녀에 대해 익히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두 사람이 식전 음식이 나와 있는 커다란 탁자 앞으로 가 앉자, 등우를 따라 선시각 궁녀들이 들어왔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선시각 궁녀는 풍문으로 들은 것보다 훨씬 아리따웠다. 그녀들만이 입는다는 하늘하늘한 궁녀복이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아름다운 여자들이 움직일 때마다 분홍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3중 겹옷이 춤추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예를 올리는 여자들의 치마를 고정하는 끈은 선시각 궁녀의 복식으로 널리 알려진 가느다란 흰 띠가 아니라 호화로운 남빛 비단 끈이었다.

선시각이 본디 그런 곳이지만 여자들의 복식은 무척이나 노골적이었다. 귀족가 여자들이 입는 같은 구성의 복식은 명치와 동일선상에 끈을 묶는 데에 비해, 보통의 선시각 궁녀들은 우측 가슴 선상에 묶었고, 태자와 시침했음을 뜻하는 선시각 궁녀들은 가슴 아래와 명치 어림에 폭이 있는 어두운 남빛 비단을 묶어 시선을 한곳으로 집중시켰다.

등우는 예를 올리는 선시각 궁녀들을 소개하듯 한번 바라보고는 머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닫히는 문을 바라보던 윤제가 용아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오해 마라.”

슬쩍 팔꿈치로 옆구리를 건드리기도 했다.

“오해라니요?”

용아의 얼굴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려고 노력한 덕분이었다. 용아의 물음에 윤제가 손으로 앞으로 가리켰다. 반듯하게 예를 올리고 있는 궁녀의 얼굴은 하나같이 흔히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저 녀석들하고 그런 사이 아니다.”

윤제의 불퉁한 말에 선시각 궁녀가 머리를 조아렸다. 얼굴만큼 아리땁고 우아한 목소리가 말했다.

“전하, 선시각과 황가의 약속은…….”

“시끄럽다. 내가 오해받게 생겼는데 선시각과의 비밀 따위가 대순 줄 아느냐. 헛소리 마라. 헛소리 말고, 어서 시집이나 가라.”

윤제가 험악한 얼굴로 투덜대다가 못난 오라비처럼 말했다.

“또 그 소리이시옵니까!”

방금 전까지 아름답고 온후하게 태자에게 말을 올리던 선시각 궁녀가 왈칵 소리쳤다. 용아의 황망해하는 얼굴에 목을 가다듬으며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이미 정체가 드러난 후였다.

“선시각 궁녀가 시집을 갑니까.”

용아가 점잖게 물었다. 용아가 좋아하는 견과가 담긴 그릇을 윤제가 은근히 밀어 주었다. 약한 고소함 외에 별다른 특징은 없으나 씹는 즐거움이 있어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니옵니다, 비전하. 소인은 궁에 남을 것입니다.”

다섯 궁녀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말했다.

“황가에서 선시각에 해마다 들이는 금편이 얼마인 줄 아느냐. 너희를 궁에 남길 것 같으냐. 너희가 풍족히 컸으면 책무를 다해야지. 특히, 너. 자꾸 반란 종자처럼 굴면 육십 넘은 할아범 스무 번째 첩으로 보내 버리는 수가 있다. 선시각 역대 최고 미인이 나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뭐하냐. 시집을 안 가는데. 너 내일모레면 시집가기도 늦었다. 알긴 아느냐.”

윤제가 편견 가득하고 짜증 많은 오라비처럼 툴툴댔다. 시집 안 가는 강경한 여동생한테 아주 질려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전하, 소인 겨우 스물넷이온데 무어가 나이가 많다 하십니까. 아직 창창하옵니다. 소인은 예서 전하와 비전하를 모시고 최고 상궁이 될 것이옵니다. 제가 비록 선시각에 큰 은혜를 입었다 하나 그것은 소인의 미색이 뛰어나기 때문이지요. 소인이 언제 선시각에 넣어 주십사, 하였습니까.”

“너한테 든 돈 그럼 다 내어놓고 최고 상궁인지 뭔지 해라.”

“소인이 선시각에서 평생 컸는데 재물이 어디 있습니까!?”

용아는 가만히 둘 사이의 대화를 들었다. 오독오독, 소리가 부지런히 울렸다.

“그럼 시집 가. 너 좋다는 놈은 많으니까 하나 아무거나 골라라. 언제까지 여기 죽치고 있을 게냐.”

“선시각 궁녀에게도 상궁이 될 기회를 주십시오!”

“야야. 너네가 얼굴 예쁘고, 시서화 아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무어가 있느냐. 네가 무슨 상궁이야. 상궁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 아느냐. 너희는, 특히 너는 얼굴 빼고 봐 줄 게 없어. 너희가 누구 눈치를 보고 커 움직임이 재빠르겠느냐, 음식상 하나를 나르겠느냐. 왕공이나 왕공네 아들이나, 고관대작 중에 적당한 혼처 고르도록 하여라.”

윤제가 들을 것도 없단 얼굴로 말했다. 궁녀가 다시 울컥했다.

“전하는 노친네도 아니면서 소인들만 보면 만날 시집가라 하십니까. 상궁 할 거라지 않습니까. 소인이 노력할 것입니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다.”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용아가 웅얼댔다.

“파란 비단은…….”

“쟤가 훔쳐 간 거다.”

윤제가 제 편을 만난 듯 용아에게 고자질했다.

“훔쳐 가다니요!”

항명하는 여자는 정말로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허면…….”

“비전하께서도 선시각 궁녀가 황가 사내의 시침을 돕거나, 고관들의 처첩으로 가시는 것을 아시지요. 가끔 나이가 찼는데 시집가지 않고 있으면 찾는 이가 없는 줄 알고 미친 자들이 들이대곤 합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요. 해서 엉뚱한 자의 괴롭힘을 피하기 위하여, 이렇게 하였습니다.”

궁녀이 웃는 얼굴로 용아를 바라봤다.

“상궁이 되려 하는가.”

“그냥 놀고먹고 싶은 거다. 시집가서 놀고먹으면 될 텐데, 참으로 문제야. 낯선 데 가서 적응하는 노력 요만큼도 하기 싫다 이거지.”

“전하. 소인은 진정 상궁이 될 것입니다.”

용아와 윤제, 궁녀가 연이어 말을 쏟아 냈다. 실로 아름다운 궁인은 진심인 듯했다. 태자와의 갈등 또한 진실 같았다. 오독오독, 견과를 씹는 소리를 용아가 다시 퍼트렸다.

“상궁이 될 것이면 선시각을 나와 일을 하여야 하지 않나.”

“상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태자비의 하문에 련슬이 답했다.

“왜?”

“소인의 얼굴이 일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거절하였습니다. 소인이 궁인 일을 하고자 궁내에 돌아다니면 사내의 눈을 어지럽혀 아니 된답니다. 남편감을 알아보고 싶으면 선시각 안에서 알아보라 면박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억울한 일이지요. 제가 예쁘고 싶어서 예쁜 것도 아닌 것을요. 예쁘게 태어난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련슬이 울컥한 얼굴로 격하게 말했다.

“…….”

조금 듣는 이를 의도치 않게 화나게 하는 성격인 듯했다.

“비전하. 비전하께서 소인을 궁인으로 써 주시면…….”

“헛소리 말고 시집이나 가라. 너는 그놈이랑 화해했느냐.”

련슬의 조심스러운 제의를 윤제가 곧바로 쳐 냈다. 윤제는 련슬의 옆에 있는 궁인을 향해 말했다. 조금 심심하면서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얼굴이 태자와 태자비를 올려다봤다.

“소인도 련슬 언니처럼 상궁이 되어야 할 듯싶습니다.”

청초한 궁인의 말에 윤제가 인상을 그렸다.

“너는 또 왜.”

“소인이 아홉 번째 첩이라니. 너무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황족이라 하나 아홉 번째……! 이후로 처첩이 얼마나 더 생길지 생각만 해도 분노가 몰려오옵니다.”

“그놈이 너 본 지 이틀째에 청혼하였잖아. 네가 지금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 해서 기다리다 보니 그새 내원에 처첩이 는 것 아니냐. 아홉 번째가 물론 놈의 나이를 생각하면 적지 않지. 너 이후로 안 들이도록 네가 잘하면 될 것 아니냐. 대충 화해하고 시집가면 안 되겠냐. 련슬이만 나이 많은 거 아니고, 너도 많이 늦었다. 무슨 튕기기를 4년이나 하냐.”

“늙은 아비처럼 그리 닦달하지 마십시오, 전하.”

“그놈 싫으면 딴 놈한테 가!”

“4년이나 함양군이랑 만났다고 소문이 다 났는데, 어떻게 딴 공자한테 시집을 갑니까! 그리고 싸운 거지 헤어진 거 아닙니다.”

청초한 궁인이 서러운 얼굴로 웅얼댔다. 윤제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옆얼굴로 옮겨 갔다.

“너는 어떻게 돼 가냐.”

“전하. 저 평생 시집 못 갈 것 같습니다.”

“괜찮다. 얼마 안 됐잖느냐.”

윤제가 묘하게 적극적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궁인이 단호히 말했다.

“그럼?”

“진양군께서는 고자가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남자가 아니거나. 소인은 필시 파란 비단 때문에 제게 관심을 안 주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아니었습니다. 흰 끈일 땐 혹여 소문이라도 날까 소인을 본 척도 아니하시고, 파란 비단 걸치고 있으니 없는 사람 취급합니다. 저처럼 예쁜 애가 그토록 살갑게 굴고, 볼 때마다 말 걸고, 치근거린다 싶도록 들이대는데 아는 척도 안 하다니, 어느 남자가 그렇답니까.”

“좀 더 시도해 보도록 해라.”

윤제가 군정을 열심히 다독였다.

“어림없습니다. 선시각 궁녀는 진양군께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괜히 군정이 힘만 빼게 하시는 겁니다.”

련슬이 불쑥 끼어들어 초를 쳤다.

“네가 못 꼬셨다고 군정이 못 꼬시란 법이 있나.”

윤제가 담담히 맞받아쳤다.

“전하.”

“전하.”

세 언니 옆에 앉은 아직 어린 태가 많이 남은 두 궁녀가 태자를 불렀다.

“말하라.”

“소인은 빨리 신랑감 찾겠습니다. 소인은 진양군 작전에 투입되고 싶지 않습니다. 소인들이 이것을 받기에 아직 어리다 생각해 너무 하시다는 마음이 있었으나, 노력하겠습니다.”

“소인도 어서 시집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윤제가 두 궁녀에게 말했다.

“믿겠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전하.”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전하.”

세 언니가 태자께 약속을 올리는 두 동생을 흘겨보았다.

“모두 물러가 보라.”

윤제가 다섯 궁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충분히 오해를 풀 정황을 보였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용아는 오해가 해소된 것보다 선시각과 태자 사이의 복잡한 전략적 관계가 흥미로웠고, 진양군 작전이라는 말에 안타까운 웃음을 흘렸다.

“진공자 형님은 장가 아니 간다는 말 지키고 계시군요.”

“걔 때문에 짜증 나.”

윤제가 응석 부리는 아이처럼 용아에게 머리를 기대며 투덜댔다. 황제는 하루빨리 진양군이 일가를 이루도록 처리하라 하시고, 진군왕부도 태자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여러 차례 선시각 궁녀를 가까이 보내 봤으나 아는 체도 않는다 했다.

“힘내십시오.”

윤제가 다시 하소연했다.

“다들 나한테만 뭐라고 해.”

용아는 목덜미에 얼굴을 비벼 오는 남자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줬다. 선시각에 대한 흥미로움에 시선이 팔렸었으나, 오해를 풀어 주고자 한 윤제의 태도에 기쁘고 좋았다.

마치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기대어 있던 남자의 손이 슥슥 매듭을 풀 때 얼굴을 붉히며 모르는 척했고, 맨가슴을 핥아 오는 입술에 헐떡이는 숨만 흘렸다. 축축하고 부드러운 혀가 꼿꼿하게 솟은 유두를 적시고 빨았다. 곤두선 유두 끝에 젖은 혀가 둥글게 굴려질 때 흐릿한 소리를 토했다.

말없이 바라본 시선 사이에 밭은 숨이 올랐다.

용아가 얼굴을 내려 남자의 입술에 다급히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입술이 깊이 맞물렸다. 살이 뒤엉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용아는 어느새 남자의 허벅지 위에 앉아, 혀를 뒤섞고 있었다. 겹치고 있는 몸이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커다랗게 발기한 성기가 옷감을 사이에 두고 슥슥 비벼졌다.

숨 쉴 틈 없이 혀를 얽어 오던 입술이 물러나며 속삭였다.

“자고 가.”

윤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용아가 두서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순간 시선이 갑자기 높아졌다. 윤제가 용아를 팔에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가 용아는 알지 못하는 전각과 전각을 잇는 통로를 거닐었다.

어두운 통로를 걷는 윤제의 귓가에 목덜미에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내렸다.

침전 안 내실로 향하는 사이사이, 윤제가 멈추어 서서 올려 안은 용아의 입술을 먹어 치우거나, 벽에 기대어 몸을 비비며 입술을 겹쳤다.

달콤한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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