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
황궁의 밤은 은밀하고 소란했다. 또한 모든 것이 명백하게 엿보였다. 바스락바스락 메마른 잎이 부서지는 듯한 소란을 흩뿌리며 물러난 발들이 자취를 감추면, 적막에 휩싸인 방 안에 긴장이 증폭되었다.
여름 끝에 황궁을 뛰쳐나갔다 돌아온 태자는 밤마다 태자비를 찾았다.
윤제는 합방례를 할 때처럼 사위를 깨끗하게 비웠다. 그리고 빈 방에 홀로 남아 어색해하는 입술을 굶주린 사람처럼 먹어치웠다.
고요한 방 안 가득 젖은 입술소리가 차올랐다. 입술을 빨아 당기고 놓아주는 축축한 소리에 이어 가쁜 숨을 억누르는 소리가 울렸다. 젖은 입술소리 사이사이 헐떡이는 숨을 내뱉는 입술이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 혀가 아리도록 입술이 깊이 겹쳐졌다.
빛이 가려져 어두운 침상 안에서 쉴 새 없이 관능적인 소리가 이어졌다.
남자가 머금고 짙게 빨아 당길 때마다 얼얼한 감각과 더운 열기가 하복부를 따라 오르내렸다. 차오른 숨을 내쉬던 용아의 입술이 머뭇머뭇 움직였다. 다시 입술을 겹치고 혀를 얽어 오려는 입술을, 용아가 턱을 물려 피하며 머뭇대던 입술을 조심스레 열었다. 머뭇거리는 입술은 애태우는 것처럼 소리 없이 닫혔다.
윤제가 도망치려는 뒷머리를 붙들어 입을 맞추려 하자, 닫혔던 입술에서 힘겨운 숨이 토해졌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어둠 속의 입술이 움칫댔다. 속삭이려는 입술을 재촉하지 않으려, 윤제는 깊고 짙은 입맞춤으로 부어 오른 입술 주위에 짧고 부드러운 입맞춤을 내렸다.
“……만…….”
용아의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열렸다. 금세 다시 닫혔다. 도리질을 하는 것처럼 물러나려는 입술을 따라가며 윤제가 턱짓으로 의문을 전했다.
“응?”
속삭이지 못하는 입술에 입을 짧게 파묻었다가 떼어 냈다. 윤제가 다시 입술을 깊이 머금으려 했다.
“……만져…… 주세요…….”
용아가 눈을 내리깐 채 속삭였다. 어딜? 무엇을? 따위의 짓궂은 말은 없었다.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뜨거운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입맞춤을 퍼부었다. 마주한 입술 사이에서 질척한 울림이 격해졌다.
뜨겁고 습윤한 숨결이 가득 차올랐다.
하복부의 희미한 근골을 따라 내리는 저릿저릿하고 낯선 열감 위로 윤제의 커다란 손이 뒤덮였다. 단단한 손끝이 얼얼한 감각이 흐르는 아랫배를 만지자, 지독한 쾌감이 용아를 덮쳐 왔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커다란 손에 감싸인 허리가 비틀댔다. 허리와 날씬한 배를 따라 흐르던 윤제의 손이 움츠려들려는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침의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퍼트리며 열렸다. 얇은 천 사이에 겨우 숨겨져 있던 화끈한 열기가 맨살을 만져 오는 손으로 와 닿았다.
만져 주기를 청했지만, 이토록 노골적인 감각에 휩싸일 줄 몰랐던 용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를 물리려 했다. 남자의 손이 흥분한 중심을 만져 올릴 때마다 기이한 감각이 허리를 타고 울렸다.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감각이 울리면 잠시간 꼼짝할 수 없어졌다.
남자와의 짙은 입맞춤으로 부풀어 있는 입술이 밭은 숨을 쏟아 냈다.
윤제가 낯선 흥분에 감싸여 도망치려 허우적대는 몸을 품으로 당겼다. 마주 누워 있던 남자의 커다란 몸이 덮치듯, 용아를 뒤덮었다. 부드러운 웃음이 번져 나오는 듯한 진동이 실린 입술이 용아의 흥분한 목덜미를 따라 내렸다. 남자의 입술이 맨살에 닿아 올 때마다 용아의 입술에서 새어 나가는 숨결이 음란해졌다.
어두운 침상 안에는 가쁜 숨소리만 가득했다.
용아는 남자의 손이 흥분한 것을 훑어 쾌감을 퍼부을 때마다 알 수 없어졌다. 윤제에게 만져 주기를 청한 것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커다란 손이 주는 자극은 끔찍하도록 좋았다. 젖어 드는 살을 만져 오는 손이 가하는 노골적인 감각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일 만큼 좋았다. 흥분으로 눈가에 열이 오르며 벌게진 것이 안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동시에 수치와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이 용아를 번뇌하게 했다.
그러나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밤마다 찾아와 혀가 아리도록 달콤한 입맞춤을 퍼붓는 남자와 마주하고 나면 하복부에 고인 열기가 밤새도록 사라지지 않아 말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뒤척여야 했다.
윤제의 입맞춤은 집요했고, 집요한 입맞춤이 퍼부어질 때마다 쌓이는 열감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최근 밤마다 용아는 기이한 얼얼함에 잠이 들지 못할 정도였다. 윤제를 곁에 두고 제 것을 만지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그렇다고 참기만 하는 것도 곤란했다. 그에게 만져 주기를 청하는 것이 최선인 것 같았다. 결과는 흥분으로 당황해 눈물을 쏟을 지경에 처했지만, 좋은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동시에 감당 못할 쾌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다시 괴로워졌다.
“……어, 어떻게 해요…….”
용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헐떡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야하기 그지없었다. 귓가에 퍼지는 뜨겁고 습기 가득한 소곤거림에 윤제가 짧은 웃음을 쏟아 냈다.
남자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소곤거리는 입술 위에서 번졌다.
“너도 만져.”
용아의 것을 자극하던 커다란 손이 더듬더듬 남자를 짚고 있는 손을 당겨 제 것을 만지게 했다. 손에 와 닿는 낯선 부피감에 용아가 순간 멈칫했다. 낯선 생명체처럼 제멋대로 움칫대고, 뜨겁고, 말도 안 되게 커다랗고, 단단한 것이 무방비한 손바닥 안에 찔러 댔다.
남자의 것을 멍하니 감싼 손안에 화끈한 감각이 오갔다.
어둠 속에 헐떡이는 듯한 숨소리만 차올랐다.
서로의 것을 만지는 질척한 소리, 맨살에 맨살이 만져지는 소리, 입술을 깊이 머금었다가 놓는 소리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울리는 시간을 가득 채웠다.
“……읏.”
윤제에게 잔뜩 먹어치워졌던 용아의 입술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용아를 만지던 남자의 커다란 손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윤제가 허리를 떨며 신음하는 입술을 다시 집어삼켰다. 용아는 손안에 움켜쥔 커다란 것을 쥐여 짜듯 더욱 강하게 만지며 덮쳐 오는 더운 입술을 마주 빨았다. 용아의 입술을 먹어치우던 남자가 제 것을 만지는 용아의 손을 커다란 손으로 뒤덮어 더 강한 자극을 가했다.
홧홧한 열기에 손안이 뜨거워졌다.
귓가로 음란한 숨소리가 울리는 순간, 남자의 것을 움켜쥐고 있는 손안이 흠뻑 젖어 들었다. 뜨거운 것이 연이어 퍼부어져 손안을 적셨다.
다음 순간 지금껏 인지한 바 없는 오싹오싹한 감각이 쾌감에 젖어 든 신경을 예민하게 했다. 머리 위로 충격이 내리는 감각과 함께, 맨몸 위를 덮치는 것처럼 뒤덮고 있는 남자의 존재감에 압도되었다. 일순 오감이 마비되며 경험해 본 바 없는 예민함이 오직 눈앞의 상대만을 인지하게 했다.
세상이 거꾸러지는 듯한 무력함 속에서 용아는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윤제를 오롯이 받아들여야 했다. 따스하면서 서늘한, 믿을 수 없이 달콤하면서 쓰디쓴 향과 맛이 남자로부터 퍼부어지는 듯했다.
개화.
윤제가 탈력감에 멍하니 있는 입술을 다정하게 빨아들였다. 혀끝이 닿는 미세한 감각 하나하나가 용아에게 선명히 다가왔다. 본래도 남자와 맞닿을 때 괴롭도록 모든 게 선명한데, 이제는 그가 곁에서 숨만 쉬어도 남자의 존재감과 달콤하고 서늘한 체취에 압도될 것만 같았다.
그저 윤제의 존재 자체가 용아를 미혹했다.
용아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지독한 감각 속에서 남자의 입술이, 손이, 맨몸이 비벼지는 곳곳이 불에 데이는 듯한 열감에 휩싸는 것을 느끼며 소리 없이 신음했다. 그가 만지지도 않았는데 잔뜩 만져 주기 바라는 것처럼 꼿꼿하게 선 유두가 무엇보다 당혹스러웠다. 자신의 몸이 윤제의 숨결마저 좋아하는 것을 인지하며 용아가 형체 없는 웃음을 흘렸다.
“화아. 왜 그러지?”
용아가 그를 피하는 듯 얼굴을 돌리고 들지 않자 귓가로 조심스러운 말이 울렸다. 용아가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부터 윤제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자신은 그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다. 때가 되면 남자를 자극할 음란한 것을 사방으로 잔뜩 퍼트리며 그를 유혹하고 다리를 벌릴 터였다. 생각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입술에 입술을 가져가며 윤제가 말했다.
“싫어?”
용아가 다가온 입술을 살짝 훔치며 답했다.
“좋아요.”
어둠 속에 입술이 겹쳐지고 잔뜩 머금어지는 소리가 다시 차올랐다. 더운 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민으로 어지럽던 머릿속에 저릿저릿한 쾌감만 가득했다.
한낮임에도 검은 가림막을 내려 둔 방 안은 어둡고 침침했다. 타닥타닥, 향 타는 소리만 울리는 안으로 끼이익, 문이 열리며 바깥의 싸늘한 바람이 새어 들었다.
“마마.”
방 안으로 들어온 상궁의 음성에 우울함이 묻어났다.
“확인하였느냐.”
“송구하옵니다.”
화려한 모란도 앞에 앉은 어깨는 고집스럽고 가녀렸다. 그녀가 새벽 일찍부터 밤이 깊을 때까지 그림 앞에 놓인 의자를 지키고 있은 것이 두 계절이 다 되어 갔다.
“오늘도인가?”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에 상궁이 머뭇댔다.
“마마…….”
“오늘도인가 묻지 않았느냐?”
“……그러하옵니다.”
상궁이 침통한 얼굴로 결국 답을 올렸다. 호화로운 의자에 앉은 여린 뒷몸이 무너지듯 더 깊숙이 파묻혀 앉았다. 우는 것처럼 떨리던 몸과 달리, 이어서 나오는 음성은 서늘하기만 했다.
“그럴 리 없다.”
“환궁한 후로 태자께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태자비를 찾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투박한 사내를 귀애하실 리 없어……!”
여자의 앙칼진 외침에 상궁이 긴 숨을 내뱉었다.
“여기서 이러고만 있으실 게 아니옵니다. 감시인이 붙는 조건이지만, 금족령도 풀리지 않았사옵니까. 전하의 노하셨던 마음도 필시 가라앉은 것입니다. 힘을 내셔야지요. 밖으로 나서시어야 무엇이든 기회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다. 총애는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태자께 내가 총애 받은 적이 있던가.”
“마마!”
“태자께서 태자비를 매일 밤마다 찾는 것이 정녕 사실이야?”
“그러하옵니다…….”
상궁의 침중한 대답에 화려한 모란도 위로 발랄한 웃음이 쏟아졌다. 여자의 짜랑짜랑한 웃음은 철없는 어린 소녀의 경쾌한 웃음과 닮았다. 한참을 울리던 웃음은 어느 순간 뚝, 자른 것처럼 끊겼다.
“양제의 꼴이 우습게 되었구나.”
“마마.”
“아주 우습게 되었어.”
여자의 고운 손톱이 호화로운 의자의 나무 팔걸이를 사납게 파고들었다. 뭉개지는 것은 나무가 아닌 자신의 손톱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더욱 힘을 주었다. 나무 팔걸이에 흠집이라도 내야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이 달래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 힘을 다했다. 결국 상궁이 정성을 다해 가꾼 고운 손톱이 부러지며 피를 보았다. 피가 나 쓰라리고 아플 텐데도 지난날 태자가 하사한 그림 앞에 앉은 얼굴은 웃음만 퍼트렸다.
“마마, 고정하소서.”
상궁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그녀를 말렸다.
“승상 부친께 연통하거라.”
때때로 웃음을 퍼트리며 여자가 명했다.
“명을 따르옵니다.”
상궁이 재빨리 명을 받들었다.
고즈넉한 소로로 겁에 질린 발소리가 빠르게 숨어들었다. 나뭇잎이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차올랐다.
용아가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모장과 궁인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영화대 일행은 일주대에서 동궁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꺄아아!”
“이…… 이러지 마시어요, 공자!”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담 저편에서 다급한 소리가 울렸다.
“게 있지 못하겠느냐!”
낯선 사내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희는 여기 있거라.”
용아의 말에 모장이 굳은 얼굴에 긴장을 더했다.
“비전하.”
“내 걱정할 것 없다. 그나저나 누굴까.”
용아가 가벼운 얼굴로 모장을 다독였다.
“악록에서 올라온 방계 황족이 있다 들었습니다.”
모장은 가능한 태자비를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때로 덮쳐 오는 낯선 권능에 몸을 움츠려야 하는 그녀들과 달리 용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녀오겠네.”
“조심하소서.”
궁인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하며 용아가 혼잣말을 웅얼댔다.
“악록이 어디지?”
삼엄함이 깔린 소로 안쪽으로 다가갈수록 풍경은 더욱 엉망이었다. 잔뜩 웅크린 채 엎드리고 있는 태감의 어깨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태감은 비질을 하는 중이었는지, 힘을 잔뜩 줘 손등 뼈가 하얗게 도드라진 손에 나무 빗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리 오라지 않아?! 앙탈들은.”
한껏 거들먹거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저놈은 뭐냐.”
용아는 웅크리고 있는 태감들 곁에 구겨져 앉아 소곤거렸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소환 중에는 입가가 터진 이도 있었다. 황족의 권능에 놀라 도망치다 다쳤다 해도 좋지 않은 일이고, 방계 황족의 손지검을 당해 다쳤다 해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소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속닥거렸다.
“악록에서 올라온 황친이십니다.”
“공자, 이러지 마셔요!”
악록에서 올라온 황친은 선시각 궁녀들과 실랑이 중이었다. 고운 얼굴의 궁녀가 황친이 뻗는 손을 뿌리치고 내달리려 버둥거렸다. 하늘하늘한 선시각 궁녀의 옷자락이 흩날렸다. 월등한 체격 차이와 황족의 권능 앞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저것은 올바른 황족이 아니다.
황족은 특별한 권능을 어려서부터 함부로 드러내지 않도록 훈육 받으며 자라기에 웬만한 일이 아니고선 권능을 내보이지 않도록 돼 있었다. 특히 황제와 태자가 거하는 황궁에서는 역심을 의심받을 수 있어 힘을 드러내는 것에 더욱 주의하였다.
“나하고 같이 놀자니까. 왜 이리 팍팍하게 굴어. 황궁 안 것들은 정이 없네!”
황족이 도망치는 궁녀들을 향해 장난을 치듯 권능을 쏟아 부어 겁박하면 겁에 질린 얼굴들이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권능을 잠시 멈춘 사내가 헐떡이는 궁녀들에게 거리를 좁혀 오면 애원과 무례한 말이 오갔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궁녀들은 필사적으로 그녀들을 향해 뻗어 오는 손을 피하려 애썼다.
“쓰레기를 치우는데 빗자루면 충분하지. 잠시 빌리겠다.”
겁먹은 채 움츠리고 있는 태감의 손에서 대빗자루를 빼어 내며 용아가 말했다.
“엉덩이 좀 만지는 걸로 무얼 그리 꺅꺅대냐 말이야.”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역겨웠다.
“이,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사내가 애원하는 궁녀를 우악스레 잡아끌었다.
“이러면 안 되긴……!”
킬킬대는 뒷머리로 주인 잃은 신발이 퉁!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아픔도 아픔이지만, 신발에 맞았다는 것이 황족의 품위를 상하게 했다. 궁녀에게 더러운 말을 늘어놓고 있던 얼굴이 불손한 신발이 날아온 쪽을 돌아봤다.
용아가 돌아본 얼굴을 향해 말했다.
“그 손 놔라.”
선시각 궁녀들이 황급히 태자비의 곁으로 달려갔다.
“네놈은 누구냐! 감히 본 공자에게 이런 짓을 하고 무사할 것 같으냐? 이년들! 거기 서지 못해!?”
황족의 권능이 실린 음성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도망치던 선시각 궁녀들의 얼굴이 순간 핏기를 잃었다. 사내의 손에 붙잡힌 가련한 궁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나도 제북 촌뜨기지만. 저건 너무한 거 아니야? 시골 사람 티내는 것도 아니고.”
용아는 불퉁한 얼굴로 툴툴대며 성큼성큼 걸었다. 복립이 황족의 권능을 표출 중인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용아를 보고 눈을 치떴다.
“……어, 어떻게?”
복립은 황족으로 태어났다. 중경에서 까마득히 먼 악록에서 태어난 황족은 중경의 고관귀족만도 못했다. 말만 황족이지 방계 중에서도 끝자락에 있는 그의 가문엔 제대로 황족의 위엄을 보여 주는 이조차 드물었다. 그런 집안에서 중경 황족, 어쩌면 황가 적통에 버금가는 권능을 지녔다는 칭송을 듣는 복립이 태어난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방계 중 드물게 강력한 권능을 타고 난 복립이 중경 밖 방계 황족의 중심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황성 밖, 방계 황족 안에서 그는 황제와 다를 바 없었다. 모두가 그의 힘 아래에 굴복했다. 지금 복립을 향해 무심한 얼굴로 다가오는 어린 사내는 그의 생애 가장 큰 위협이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불가한 일이었다.
“그 손 놓으라잖아.”
용아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휘둘러 당황한 옆얼굴을 후려쳤다. 촤악! 색이 고운 낙엽이 얽혀 있는 빗자루가 무방비한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
복립이 쓰러지며 쥐고 있던 궁녀의 손을 놓쳤다. 용아가 쓰러지려는 궁녀를 붙잡아 일으켜 주며 길을 터 줬다.
“어서 가라.”
궁녀는 감사의 말도 못하고 끄덕이기만 했다.
“……이, 이놈!”
쓰러져 있던 복립이 소리쳤다. 노성 안에 황족의 위엄이 짙게 서려 있었다. 도망치려던 궁녀와 멀찍한 곳으로 도망치고 있던 궁인들이 대번에 긴장으로 굳어 들었다.
그것이 정상이었다.
“이놈?”
그런데 어째서인지 빗자루를 든 괴악한 얼굴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용아가 쓰러진 얼굴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빗자루를 내리쳤다.
“악!”
비질하기 좋도록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를 적절한 비율로 섞어 만든 단단한 대빗자루가 고귀한 황족의 얼굴을 때리고 갔다. 퍽퍽, 험악하게 내리는 폭력에 복립이 팔을 세워 막으며 소리쳤다.
“게 아무도 없느냐!”
다급한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강하게 묻어났다.
“바보냐.”
용아가 코웃음을 치며 빗자루가 부러져라 내리쳤다. 패악을 떨어 주위를 물려 놓는 걸 즐기던 자가 사방에 제가 가진 힘을 흩뿌려 대며 도와줄 이를 찾는 게 우습고 또 우스웠다.
“아악!”
복립의 고통에 전 소리가 이어졌다. 무자비한 폭력이 한참 이어졌다. 용아가 장작을 패는 것처럼 내리치던 빗자루를 멈추며 거만하게 말했다.
“무엄하다.”
혼이 쏙 빠지도록 흠씬 두들겨 맞은 복립이 주춤주춤 움직여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노출된 탓인지 사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귀…… 귀공께서는…….”
복립이 넋 나간 얼굴로 웅얼댔다.
“누가 말하여도 된다 하였지.”
용아가 멈춰 세우고 있던 빗자루의 위치를 바꾸며 대꾸했다.
“송, 송구하옵니다!”
복립이 곧장 사죄하였다. 낯선 공포에 짓눌린 눈이 이리저리 떠돌았다. 용아는 비열함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빗자루를 슬쩍 무방비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감히 뉘 앞에서 소리를 높이느냐.”
비껴 누인 빗자루를 본 복립이 순간 앞으로 솟구치듯 다가왔다. 그보다 한발 빠르게 용아가 뒤로 물러나며 허공에 떠오르듯 솟구친 사내의 몸을 대각선으로, 횡으로 긋듯이 두들겼다. 반격을 노렸던 복립은 신음도 흘리지 못하고 굴러 떨어졌다. 끙끙 앓는 몸으로 퍼퍽, 냉혹한 빗자루가 빈틈 곳곳으로 찔러 들었다.
“끄으…….”
복립에게 용아는 본 적 없는 존재였다.
“여기가 네 방 침상인 줄 아느냐.”
용아 역시 복립이 낯설긴 마찬가지였다. 황궁 안에서 황족이란 것으로 만용을 부리는 이는 처음이었다. 제북 후족가 안에도 이토록 무도하게 구는 자는 없었다.
“……귀, 귀공은 누구기에…….”
복립이 끙끙 앓으며 중얼거렸다.
“네 알 바 없다.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본 공자는 황족이오.”
용아의 물음에 복립이 당당히 말했다.
“황족, 누구?”
복립은 상처 입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상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황족의 높으신 권능이 통하지 않았다. 상대는 황족이 아니었다. 황족이었다면 그에게 자신보다 더 강한 권능을 앞세워 힘으로 짓눌러 왔을 텐데, 동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불쾌감은 전혀 없었다.
“악록에서 온 황친이라오.”
“악록이 어디야. 어느 군왕의 자제인가?”
“……아직 봉작을 받지 못하였소.”
대답하는 복립의 얼굴에 분기가 어렸다. 한미한 방계인 것이 무슨 상관인가 했다. 황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었다. 금번에 그가 황성으로 온 것은 일가 친족의 출산 때문이었다. 태동부터 남달라 황가의 보호 아래에서 출산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청을 올려 허락이 떨어져 입궐한 차였다. 강력한 혈계를 이은 혈족이 늘어났으니 봉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선시각 궁녀를 희롱한 죄를 인정하겠느냐.”
“폐하께서 중경 황족에게 선시각 궁녀를 하사하는 것으로 아오. 본 공자는 강인한 힘을 지녔소. 본 공자는 장차 봉작을 받을 수 있으니, 결국 선시각 궁녀는 이 사람의 처첩이 될 이들이 아니겠소. 미리 좀 손댄다 하더라도 후에 처첩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일인데,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오. 본 공자의 내원에 들면 궁녀들에게도 손해가 아닐 것이오.”
복립의 뻔뻔한 말에 용아가 코웃음을 쳤다.
“뭐라는 거야, 이 멍청이가.”
용아가 반듯하게 앉아 있는 황족을 빗자루로 후려쳐 핍박했다. 궁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황족이 무참하게 옆으로 나자빠졌다. 복립이 쓰러진 채로 소리 높였다.
“……본 공자를 이리 대하고 무사할 줄 아는가!”
그의 권능은 여전했다.
“보잘것없는 힘 으스대는 것 그치지 못하겠느냐! 그저 다르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네게 핍박 받은 이들의 원망은 두렵지도 않으냐. 너야말로 무사할 줄 아느냐. 권능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불사의 몸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네놈 같은 작자가 황족의 위엄을 해치는 것이다.”
용아가 대빗자루를 요령 좋게 휘둘러 사내를 툭툭 때렸다. 대빗자루는 위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괴악한 무기였다. 권능 한 자락 없는 음성임에도 용아의 말은 모든 이의 심장을 강하게 두들겼다. 용아는 씩씩 대며 빗자루를 휘두르다 등 뒤에 꽂히는 기척에 움직임을 멈췄다.
뒤돌아본 곳에 진양군이 서 있었다.
“……어, 바쁜 것 같다.”
선시각 궁녀의 손에 이끌려 온 진양군이 벙찐 얼굴로 말했다. 대빗자루는 확실히 태자비가 휘두르기에 위엄이 다소 부족했다. 용아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소중한 무기인 빗자루를 옆구리에 끼고, 진양군을 향해 아는 체를 했다.
“진공자 형님.”
“용공자.”
진양군이 반가워하며 다가오는 용아를 피해 슬쩍 한 걸음 물러났다. 용아가 더 빠르게 걸어 진양군의 곁으로 가며 말했다.
“소제를 피하시는 겁니까.”
“오해다.”
용아의 옆구리에 삐죽이 튀어나와 있는 대빗자루 손잡이를 피해 걸음을 움직이며 진양군이 답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진족의 힘이 가진 위험함은 진족으로 다스려야 하는 법이었다.
“너무 가까운 거 아니냐.”
진양군이 바싹 다가오려는 용아를 슬그머니 피했다. 방금 전까지 사람을 죽일 듯이 현란하게 휘둘러지던 대빗자루의 창연한 움직임이 잊히지 않았다.
“진공자 형님. 황족의 위엄 한번 보여 주십시오.”
용아가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다만 본 공자가 네가 위엄 보여 달라고 하면 위엄을 보여 주어야 하느냐. 내가 광대인 줄 아느냐. 불쾌하구나.”
“오랜만이기는요. 그저께도 봤지 않습니까. 위엄 한번 쓴다고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야박하십니다.”
두 사람은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말을 나눴다.
“그저께 보고 오늘 봤으면 오랜만이지. 너는 형님이 말하는데 그렇게 꼬박꼬박 따져야 하느냐. 요즘 윤공자가 네가 눈짓만 하면 위엄을 펼쳐 보여 준다는 거 나도 들어 안다. 그런 버릇없는 짓이 습관이 되어선 곤란하다는 거 모르느냐. 태자께서 해 주시니 모두가 네가 위엄 보여 주십시오, 하면 다 그러는 줄 아느냐. 다시 한 번 그런 말하면 형님 된 도리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진양군이 격의 없는 형처럼 툴툴댔다.
“이마 사이에 흰 점이 있는 아름다운 산융마가 있는데요.”
“지금 나를 재물로 회유하려는 거냐.”
“예. 회유하는 겁니다. 윤공자 형님이 하도 반대해서 아직 이름도 붙이지 않았습니다. 이마 사이에 흰 점처럼 정강이부터 발목까지도 하얗습니다. 성격이 무척 순하고, 다리도 날씬하고 어여쁜데. 아주 착한 암말이거든요. 진공자 형님이 싫으시다면…….”
진양군이 헛기침을 하며 순간 분위기를 바꾸었다.
“네놈은 누구이기에 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방자하게 구느냐.”
진양군이 황족의 권능을 보이자, 일대의 새들이 황급히 도망가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푸드득. 푸드득. 그 소리 아래에서 궁인들이 도망치는 소리가 울렸다.
용아마저 조금 놀랐다.
“……진공자 형님 센 사람이었군요.”
“으흠.”
뇌물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던 진양군은 다시금 헛기침을 거하게 했다. 산융마에 홀랑 넘어간 게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럴 것 없었다.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말은 원래 진양군에게 주려 한 것이었다.
“악록의 복립이라 합니다.”
진양군에게 예를 올리며 복립이 몸을 바싹 낮췄다. 그는 위엄을 내보인 진양군보다 용아를 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보았다. 황족 적통에 버금갈 만큼 강한 황족의 힘 앞에서도 용아의 얼굴이 흐트러짐 하나 없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늘 위의 하늘이 있는 법이지.”
용아가 복립의 머리에 대고 소곤댔다. 복립이 아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귀, 귀인께서 누구기에…….”
“본 공자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른다니 정말 가진 것은 힘밖에 없는 모양이야. 황족이 힘만으로 봉작을 받는 것은 아닐 테니 더 출세하기 어렵겠어. 세상 살기도 힘드시겠고.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용아가 웃으며 돌아섰다. 돌아보는 얼굴을 향해 불쑥 끼어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황궁 안에서 감히 힘자랑하는 게…… 진공자?”
소로 안으로 위엄 가득한 목소리가 울리다 멈추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진양군이 윤제를 향해 예를 올렸다.
“태, 태자……전하…….”
복립이 엎드린 채로 질린 소리를 내뱉었다. 어수선해진 소로 안으로 분주한 발소리들이 다가왔다.
“용공……! 어라,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다들 여기 있었나? 진공자. 영공자도 왔군.”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큰일 났다더니. 내가 할 일은 뭐야? 뭐할까.”
뒤늦게 나타난 소양군과 영양군이 서로를 확인하며 말을 건넸다.
“대충 끝난 것 같다.”
윤제가 용아의 옆구리에 끼워진 대빗자루를 빼 안 보이는 곳으로 휙 내던지며 상황을 정리했다. 늦게 나타난 둘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진양군이 모여 있는 친우들에게 불쑥 말했다.
“나 산융마 생길 거다.”
“뭐?!”
“왜?!”
소양군와 영양군이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소리쳤다.
“벌써 주는 걸 알려 줬느냐.”
윤제의 말에 진양군이 도리어 놀랐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용아는 네 남자와 마방으로 걸음을 자연스레 옮기며 답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태자의 물음에 진양군이 답했다.
“악록 방계가 황궁 안에서 패악을 부리는 듯해.”
“며칠 전에 온 방계 말인가.”
“제법 쓸 만하다며.”
소양군과 영양군이 각자 아는 바를 덧대었다.
“악록 삼남의 처가 산달이라 입궁했다. 산모가 제북 방계 출신이라 후가주의 축복 아래에서 출산하고 싶다 청하였나 보더라. 복중 태아가 태동부터 심상치 않아, 이번에 봉작을 내리실 듯도 한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함께 입궐한 방계 황친의 소문이 좋지 않은 게 문제인 모양이군. 양주로 보내면 되지 않을까.”
윤제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야. 역시 전하께서 제일 악덕하구먼.”
“윤공자 네가 제일 나빠.”
“양주, 좋지.”
소양군와 영양군이 야유했고, 진양군이 혼자만 다른 의견을 내었다.
“너도 아주 똑같은 놈이야.”
“왜 너만 산융마를 더 받게 된 건데?!”
“시끄러.”
세 남자의 소란함에 주위가 시끌시끌했다. 윤제가 곁을 걷는 용아를 위아래로 살핀 후 불만스럽게 속삭였다.
“네가 그리 위엄 없이 입고 다니니까 함부로 구는 거 아니냐.”
“제 옷을 또 구박하십니까.”
용아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윤제는 물론, 곁의 세 남자 또한 용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연복을 못마땅해 했다. 마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마주의 기분이 나빠서 좋을 게 없었다. 화제 전환이 필요했다. 곁을 따르는 선시각 궁녀를 유심히 보던 진양군이 문득 말을 건넸다.
“용공자, 무엇하러 정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들을 돕느냐.”
“……예?”
진양군의 말에 소양군과 영양군도 선시각 궁녀들을 보았다. 그중에 탐스러운 남색 비단 끈으로 고정하고 있는 궁녀도 있었다. 평소라면 진양군의 말을 받아 과장되게 윤제를 놀렸을 두 사람이 잘못된 화제 전환을 시도한 진양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은밀히 억압했다.
일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해다.”
정적을 깨고 윤제가 엄중한 얼굴로 말했다.
“뭐가요?”
용아가 사심 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오해야.”
윤제가 다시 한 번 엄격히 말했다. 용아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가벼운 얼굴이었다. 마방으로 향하는 분분한 걸음들이 제 각각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자비는 차가운 바람이 불며 수차 마시기에 더욱 열을 올렸다. 진하게 우린 수차를 올린 모장이 안타까움 가득한 얼굴로 주인의 곁을 지키고 섰다.
“비전하.”
“응.”
모장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착한 사람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옵니다.”
“알아.”
용아는 상궁의 걱정 어린 말에 선선히 대꾸하며 눈썹을 좁혔다. 이미 개화가 끝났다. 수차를 마신다고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차라리 도이환을 매일 먹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기도 되지 않았는데 도이환을 먹어도 되는가, 고민하는 얼굴로 닦달하는 시선이 날아들었다.
“비전하.”
용아가 모장의 갈급한 부름에 덤덤히 답했다.
“응. 듣고 있다, 말해.”
“선시각 궁녀에 대해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이들은 여타 궁인들과 복색이 다르니 비전하께서도 보셨으면 아실 테지요. 특별히 미색이 고운 이들을 어려서부터 어여쁘게 단장하고 보살펴 온 겁니다. 그중 남색 비단 끈을 두른 이들은 전하의 시침을 든 이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소인이 이미 말씀 올렸는데 어째 잊으신 겁니다.”
“알아.”
모장의 드물게 격한 조언에 용아가 답했다.
“……예?”
“모장이 말한 것 기억한다. 안 잊었어. 알고 있다 했다.”
“알고 계신데 아까 왜 그러셨습니까.”
모장의 물음에 용아가 향마저 지겨워진 수차가 담긴 찻잔을 내렸다. 찻잔을 내린 얼굴은 귀찮음이 가득했다.
“내가 뭘 했어야 해?”
“비전하. 비전하는 동궁전 내궁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지금처럼 사랑받고 있을 때 정적을 치워 두셔야지요. 그리 물렁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소인이 말씀드리지 않아 그렇지 비전하께 정적이 될 이가 한둘인 줄 아십니까. 해원과 융각에 내려졌던 금족령이 감시인을 붙이는 조건이 달렸다지만 해제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봉의만 해도 문제지만 선시각 궁녀가 몇인 줄 아십니까. 지금처럼 총애를 받으실 때 더는 후궁 직첩은 내리지 않겠다 약조를 받아 두시던가, 방해가 될 이들은 일찌감치 치워 두셔야지요. 비전하가 태자비이시고, 귀하게 나셔서 정당하고 예의를 다해 상대를 대한다고 상대가 그를 알아주는 줄 아시어요.”
모장의 답답해하는 모양새를 보며 용아가 웃음을 퍼트렸다.
“그런 것 아니다.”
주인의 너그러운 미소에 모장은 더욱 애가 탔다.
“그런 것 아니기는요! 전하께서 영화대로 밤마다 오시는데, 이만큼 총애가 집중되었을 때가 있습니까. 폐하께서도 더는 합방례에 대해 관여하지 않으시잖아요. 이렇듯 사이가 좋을 때, 사랑받고 계실 때 비전하께서 편히 지낼 수 있는 상황을 꾸려 두셔야 합니다. 이것은 간사함도 비열함도 아니어요.”
모장이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말했다.
“…….”
용아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비전하.”
모장이 안타까움에 다시 용아를 재촉하듯 불렀다.
“사랑받는 것 같은 게 아니야.”
용아가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모장이 차마 부정적인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어 둘러말했다. 말을 올리는 상궁의 얼굴에 섭섭함과 서글픔이 번져 나왔다.
“법도를 다하는 것이지.”
차분한 목소리가 가만히 말했다.
“…….”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윤제는 일과를 마치자마자 영화대를 찾았다. 상궁이 방에 들어 있다는 말에 고하려는 이들을 멈추고 주위를 물린 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표정을 잃어 갔다. 어느 순간 완전히 정색한 태자를 먼 걸음에서 살피던 궁인들은 전각의 눈치만 살폈다.
궁인들의 귀에는 문 앞에 있어도 안에서 오가는 말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지만, 황족은 다르다 들었다. 태자는 필시 안에서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음이었다. 화를 내실까, 권능을 떨치실까, 둘 모두 하실까 안절부절못하는 궁인의 염려와 달리 윤제는 모장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석상처럼 서 있기만 했다.
문을 열고 나오던 모장이 윤제를 보고 순간 얼굴을 굳혔다. 바깥에서 눈치를 보던 궁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얼굴이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윤제는 상궁의 예에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가 문에 시선을 주었고, 모장이 태자의 안색을 살피며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윤제를 향해 용아가 몸을 일으켜 예를 올리려 했다.
“되었다.”
내내 말 없던 남자가 짧게 명했다.
“송구합니다.”
용아는 태자의 관대함에 예를 표하는 걸 잊지 않았다. 반듯한 말을 내뱉는 입술로 순식간에 다가온 입술이 겹쳐졌다. 열린 입술 안으로 파고든 혀가 안을 난폭하게 휘저었다. 말을 건네던 용아의 목 아래에서 뭉친 소리가 억눌린 채 번졌다. 한참 얽혀 있던 입술이 젖은 소리를 퍼트리며 떼어졌다.
“되었다 했는데.”
숨이 차 허우적대는 용아의 손을 붙들며 윤제가 뒤늦은 대꾸를 건넸다. 용아가 무어라 할 새 없이 커다란 손에 이끌려 내실 깊은 곳에 있는 침실로 향했다. 방으로 오자마자 그가 침실로 드는 것은 최근엔 당연한 일이었지만 여느 날과는 달랐다.
침상으로 내던져질지도.
“…….”
용아는 다시 그와 어려운 사이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납게 침상에 밀쳐지지 않을까 걱정하던 것이 무색하게 침실로 든 태자는 침상 끝에 털퍽 소리 내 앉은 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용아는 말없는 윤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남자의 곁에 다정히 앉는 것도, 그를 두고 가 버리는 것도, 이대로 남자와 어색하게 손이 이어진 채 망연히 서 있는 것도 이상하기만 했다.
“전하.”
용아가 용기를 쥐어 짜내 윤제를 불렀다. 조마조마한 시간을 한참이나 흘려보낸 후에야 윤제가 말했다.
“앉아라.”
용아는 어색함 속에서 움직였다. 침상 끝에 앉은 윤제의 곁 어디에 앉아야 할까 잠깐 사이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팔 하나 거리를 두고 앉았다.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흘렀다. 차라리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입술을 얽고 서로의 것을 아프도록 만지는 게 덜 힘겹지 않은가, 라는 음탕한 생각을 용아가 하고 있을 때. 용아의 손을 쥔 남자의 손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용아의 손을 만지는 윤제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남자는 언제든 흉포해질 수 있었다. 남자의 흉포함을 자극한 것은 자신이었다. 남자가 들어 좋아할 리 없는 말을 했을 때 그가 듣고 있었다. 그걸 알기에 윤제를 이만큼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습고도 죄스러웠다. 미안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두려웠다. 무서웠고, 떨림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좋았다.
“…….”
숨죽이고 있는 용아에게 가라앉은 시선이 내렸다.
“합방례 할까.”
윤제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떨림을 다 숨기지 못한 목소리가 조용히 답했다.
“……네.”
끄덕이는 용아를 본 윤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처럼 윤제가 잠시간 아무것도 않고 멈추었다. 정적을 깨고 윤제가 말했다.
“합방례 법도의 목적과 의도를 아느냐.”
“압니다.”
용아가 곧장 답했다.
“……알아?”
윤제가 조심스럽게 쥐고 있던 용아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어둠 속의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합방례 법도의 목적은 신부를 붙잡아 두는 행위다.
“예, 압니다.”
용아는 자꾸만 커지려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답했다. 조그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떨림은 여전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아는데…… 알면서 왜 거부하지 않았지?”
윤제가 사납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가 황족의 드높은 위엄을 퍼트리는지 저 멀리 문밖에서 겁에 질린 발소리들이 다급히 울렸다.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요.”
용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덤덤히 말했다.
“거부해서는 안 된다?”
윤제의 말이 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용아가 씁쓸한 웃음을 퍼트리며 답했다.
“저는 볼모가 아닙니까.”
“그래서.”
“황가의 법도를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윤제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용아의 곁에 주저앉았다. 어둠 속에서 웃는 남자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반듯하고, 본 적 없이 사나웠다. 웃던 윤제가 곁을 돌아보았다.
“용아.”
“네.”
“너는 나를 화나게 하는데 탁월한 재주를 지녔다.”
용아에게 건네진 말은 폭언이었다. 용아는 남자의 무도한 말에 황망하고 억울했지만, 그의 불쾌함을 조금쯤 이해할 수 있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송구합니다.”
무심한 음성이 떨림을 억누르며 말했다.
“됐다. 가련한 볼모에게 몹쓸 짓을 할 테니까.”
귓가에서 속삭이는 저음이 흉흉했다. 무방비한 뺨과 귓불로 더운 숨을 퍼트리는 남자의 입술이 내렸다. 어느새 바싹 옆으로 다가온 남자가 용아를 뒤덮듯이 안아 왔다.
커다란 손이 용아의 손을 움켜쥐고 당겨 제 앞을 만지게 했다.
“……!”
커다란 손에 감싸인 용아의 손이 남자의 것을 만져 갈 때마다 귓가로 더운 숨이 쏟아져 내렸다. 손에 닿는 뜨겁고 단단하고 커다란 것에 현실감이 없었다.
손안에 화끈한 감각이 내달렸다.
귀 옆의 입술이 뭉근한 숨을 내뱉으며 때때로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용아의 뺨과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젖은 살이 만져지는 소리가 어둠 속을 가득 채웠다. 음란한 소리가 한참이나 울렸다.
용아를 안은 남자의 팔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손안의 여린 살을 때리는 것처럼 비벼지던 커다란 것이 일순 경직했다가 멍한 손바닥에 뜨거운 것을 왈칵 쏟아 냈다. 사출한 것은 남자인데 어째서인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용아의 심장이 빠르게 쿵쾅댔다.
귓가로 데일 것처럼 뜨거운 숨이 내렸다.
축축해진 손끝을 윤제의 단단한 손끝이 훔쳐 갔다. 무방비한 입술 앞으로 제 것으로 젖은 남자의 손가락이 들이대졌다.
“먹어라.”
용아는 얼떨떨함 속에서 윤제를 바라봤다.
“뭘…….”
멍한 입술이 우물댔다.
“이보다 확실한 합방례가 없을 거다.”
윤제의 손이 피하면 강제로 욱여넣기라도 할 것처럼 멍한 입술 가까이로 들이밀어졌다. 모든 것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용아는 이 순간을 따라가는 것조차 벅찼다. 멍한 얼굴은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다 남자의 체취가 짙게 밴 낯선 체액으로 젖은 손가락을 입술로 머금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제 손가락을 입에 담고 숨을 삼키는 용아를 본 남자가 손을 재빨리 빼냈다.
윤제가 타액과 체액으로 엉망이 된 손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화가 난 듯한 그를 용아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바라봤다. 먹으면 안 되는 거였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떠올랐다.
“전하?”
숨을 억누르고 있었던 탓인지 목소리가 다 갈라져 있었다.
“싫으면 싫다고 해.”
“…….”
“불만이 있으면 불만을 말해.”
한참 삼엄하게 굴던 남자의 격의 없는 투덜거림에 용아는 입술만 달싹였다. 용아라고 먹고 싶어서 먹은 건 아니었다. 평생토록 먹어 볼 일 없는 것이었다. 윤제가 들이대기에 거절할 수 없을 따름이었다.
자괴감에 빠진 것처럼 웅크리고 있던 남자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손이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을 뒤덮듯 감쌌다. 당연한 듯 입술이 맞닿았다. 혀가 뒤엉키며 젖은 소리가 울렸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어둠을 떠돌았다. 입술 윤곽을 따라 자잘한 입맞춤을 내린 입술이 턱 선을 따라 귓불까지 옮겨 갔다.
뜨거운 입술이 귀를 흠뻑 먹어치웠다.
축축한 소리와 귀 안에 고이는 기묘한 감각에 용아가 약하게 버둥거렸다. 커다란 손이 애를 쓰느라 가볍게 오르내리는 아랫배를 뒤덮어 왔다. 하복부를 매만지는 손길이 낯설었다. 윤제의 손에 용아의 무릎이 무방비하게 열었다. 열린 다리 사이로 남자의 손이 파고들었다.
본능적으로 좁혀 들려는 무릎을 다가온 남자의 긴 다리가 막아 눌렀다. 얇은 침의의 앞섶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퍼트리며 풀어헤쳐졌다.
“잠깐, 흣!”
노골적인 감각이 용아를 빠르게 집어삼켰다. 커다란 손이 예민한 곳을 어루만질 때마다 앞이 캄캄해졌다. 방 안은 어 두우니 앞이 캄캄해진다는 것은 옳은 표현이 아닐지도 몰랐다.
시야가 순간순간 사라졌다.
현실감 없는 무서운 감각과 함께, 하복부로 어느 때보다 빠르게 피가 몰렸다. 억눌린 소리가 남자에게 먹어치워지는 입가에서 줄줄 새어 나왔다. 윤제의 손이 만질 때마다 용아의 입에서 신음이 쏟아졌다. 젖은 살을 만져 올리는 손이 맨살을 쓰다듬는 소리가 어둠 속을 채웠다.
목이 타도록 헐떡이는 숨소리가 울렸다. 허리로 알싸한 감각이 번져 나갔다. 용아는 신음을 쏟으며 정신없이 퍼부어지는 입맞춤에 움츠러들거나 마주 입을 맞추거나 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리 사이로 축축한 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남자에게 온통 먹어치워진 용아가 허리를 떨며 신음했다. 아래에서 축축한 감각이 퍼져 나갈 때도 윤제의 입술이 쉬지 않고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과 목덜미와 들썩이는 어깨에 입을 맞췄다. 마주 닿은 입술이 오래도록 얽혀 있다가 떼어졌다.
모든 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용아가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윤제가 젖은 아래를 정돈해 주었다.
“너는 볼모가 아니라 나의 신부다.”
말없는 뺨에 입을 맞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용아는 뒷머리가 얼얼한 것 같은 와중에 일어서서 가 버리려는 손을 붙들었다. 새삼스레 쑥스러움과 민망함이 몰려와 뺨이 뻣뻣하게 굳어 들었다.
“……무, 무섭게 좀 굴지 마세요…….”
긴장한 얼굴이 힘겹게 속살거렸다.
“미안해.”
떠나려던 남자가 수줍어하는 듯한 머리를 붙들고 입을 맞췄다. 뒷머리를 살살 쓸어 주는 손길이 다정한 형 같기도 하고, 친절한 연인 같기도 했다. 넋 나간 듯한 기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용아는 조금쯤 미친 듯한 기분으로 소곤거렸다.
“첫날밤에 소박맞았잖아요. ……뭐…… 열두 살이긴 했죠.”
어두워서 보이는 것도 없었다.
“그땐.”
윤제가 끄는 듯한 투로 하는 용아에게 역시 끄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불만, 있으면 말하라고 했잖아요.”
윤제가 슬그머니 다시 침상 끝에 앉았다. 그즈음 쌓은 과오는 말로 다하기 어려웠다.
“…….”
남자는 공손한 침묵을 택했다. 어둠 속에서 울리는 말은 쏟아 내는 것처럼 격렬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도 소박맞았죠. 나하고 문안도 안 가려고 하고. 그건 가고 있으니 됐어. 못된 짓을 많이도 했고. ……아까 그, 그건 왜 먹여요? 그거 먹어도 되는 거예요?”
신부의 격렬한 토로에 윤제가 짧게 목을 울렸다.
“미안해.”
“만날 사과만 하면 다야?!”
“그냥, 나쁜 짓이 하고 싶었어. 네가 나 없는 데서긴 하지만 못된 소리를 했고, 나를 앞에 두고 별다르지 않게 굴기에. 진짜 나쁜 놈이 돼 볼까라는 충동이…… 그건 먹어도 괜찮을 거다. 신부를 절대 도망 못 가게 하려면 그런 짓을 하라는 조언이 있었거든.”
“나쁜 새끼.”
어둠 속에서 격한 말이 울렸다.
“미안하다, 진짜.”
사죄의 말이 정중하게 건네졌다.
“진짜 나쁜…… 신부? 혼례의 말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았으면서. 그래 놓고 무슨 신부예요.”
용아는 울컥 말을 쏟아 놓고 후회했다. 까마득한 과거의 투덜거림을 이제 와 하는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방금 내뱉은 모든 말을 없는 것으로 하고 싶었다.
어둠 속에 가만히 멈추어 있던 남자가 천천히 움직여 분노를 토해 낸 용아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뒷머리를 만지려는 손을 툭, 신경질적으로 뿌리쳤지만 윤제는 개의치 않았다. 몇 번이나 밀쳐졌지만 끝내는 분한 숨을 쏟아 낸 몸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미안하다는 말도, 변명의 말도, 어떤 말도 없었다.
침묵 속에서 그저 따듯한 체온을 마주하고 있었다.
오랜 정적을 후에 낮게 가라앉은 저음이 고요한 귓가에 속삭였다.
“나의 신부가 되어 주심에 감사드리오.”
별것 없는 말이었다. 아무 뜻 없는, 예법에 따른 몇 마디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인지 눈물이 차올랐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울음 가득한 숨결을 들이켜고 내뱉는 소리가 울렸다.
“…….”
윤제가 손을 뻗어 사랑스러운 존재를 부둥켜안았다. 품 안의 몸이 가볍게 몸부림치다 곧 부드럽게 안겨 왔다. 어둠 속에서 한참이나 울음 어린 숨결이 울렸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차가운 날이었다. 바람은 갑작스럽게 쌀쌀해졌다. 궁인들은 서늘한 공기에 걱정의 말을 쏟으며 아침부터 전각 곳곳에 화로를 들이느라 분주했다. 용아는 모장이 가져다준 수차를 마시며 궁인들에게 줄 차를 우리고 있었다.
“비전하.”
안으로 바삐 들어온 모장의 부름에 용아가 시선을 올렸다.
“무슨 일이냐.”
모장의 뒤로 정천궁 태감들이 따랐다. 평소 인자하던 인상들이 오늘은 거의 감정을 느낄 수 없도록 무미건조했다. 무엇보다 정천궁의 발 빠른 소환이나 말을 자주 전하러 오는 태감이 아닌, 태감 총관 좌첨이 직접 방문한 것에 마음이 쓰였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비전하, 어명이옵니다.”
좌첨은 태자비에 대한 예를 짧게 올리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뜻밖의 말에 용아는 놀라면서도 자연스레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서 일어난 몸이 법도에 따라 예를 취했다. 황명을 듣고자 고개를 조아리는 용아를 향해 태감이 엄중한 음성으로 어명을 전했다.
“태자비는 들으라. 금일 태자비를 고발한 이가 있으니 정천궁 교헌재로 찾아와 스스로의 결백함을 밝히도록 하라.”
“명을 따르옵니다.”
용아가 예를 취한 채로 더 깊이 몸을 숙였다. 그러나 예를 올리고 고개를 드는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황망함이 떠올라 있었다. 모장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용아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좌첨이 일어나는 용아를 향해 말했다.
“비전하, 지금 바로 교헌재로 가셔야 합니다.”
“나를 누가 고발하였다고?”
몸을 일으킨 용아가 태감에게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상상조차 못한 일이라 용아는 헛웃음만 훅 퍼트렸다. 그저 황당해하는 용아와 달리 모장의 얼굴은 염려로 얼룩덜룩했다. 걱정하는 이를 부드러운 손짓으로 위로하며 용아가 말했다. 표정만 보아선 고발을 당한 이가 태자비가 아니라 태자비의 상궁 같았다.
“지금 곧바로 가야 하나.”
용아의 물음에 좌첨이 소문 자자한 정체불명의 태자비 연복을 바라봤다. 용아는 이대로 가도 상관없다는 투였지만, 영화대 궁인들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좌첨이 생각할 때도 모두를 위해 그러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환복하시는 것을 기다리겠습니다.”
태감이 얼굴을 낮추며 답했다.
“채비하겠네.”
용아는 됐으니 어서 가 나를 고발한 작자를 보자고 하고 싶었으나, 제 손을 꼭 붙들어 오는 따듯한 손에 무모하게 구는 것을 관두었다.
“차를 올리겠습니다.”
모장은 태감의 배려에 감사를 전하며 궁인들에게 요령 좋게 명을 내렸다. 그녀는 잘하였다는 듯 돌아서는 용아의 등을 다정하게 쓸었다. 등을 쓰는 손길에 발길을 옮기던 용아가 조용히 투덜거렸다.
“내 옷이 그리 이상한가?”
모장이 좋아하는 걸 보니 고집을 누그러뜨린 것은 잘한 것 같지만, 새어 나오는 툴툴거림을 막기는 어려웠다. 곁방으로 드는 문을 열며 모장이 답했다.
“이상하기는요.”
“이대로 가는 건 어때.”
“아니 되옵니다.”
호기로운 물음에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따스하지만 엄한 목소리였다. 모장의 엄격한 말에 용아는 치기 어린 소년처럼 단정하지 못한 소리를 흘렸다. 곁방의 문이 단단히 걸어 닫혔다.
아늑한 방 안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던 용아가 다가오는 모장을 향해 말했다.
“이번에 새로 지은 것으로 입어야겠어.”
“옳으신 생각입니다.”
모장이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나를 고발하다니. 고발이라니. 대체 무엇으로 발고한 거지?”
용아의 어처구니없어 하는 음성이 따듯한 방 안에서 부지런히 울렸다. 모장은 이번에 지은 정복 중 가장 호화로운 장포를 꺼내어 보이며 허락을 구했다.
용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비의 위엄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모장이 살뜰하고 분주한 손놀림으로 시중을 들며 부드러운 말을 건넸다. 용아는 여전히 황망함이 떠도는 얼굴로 다시 훅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시중을 드는 손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내주고, 팔을 내밀고, 어깨를 낮추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슥슥 옷감을 쓰는 노련한 손짓이 퍼트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태감이 전한 어명을 들을 때만 해도 걱정으로 칙칙했던 모장의 얼굴은 매무새를 다듬어 주는데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방 안에 호화로운 비단을 쓸어내려 정돈을 하는 소리와 장신구를 놓고 실랑이하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정천궁 정문 아래에서 잔뜩 낮춘 목소리가 울렸다.
“황궁에서 태어난 황족 아이가 사라졌습니다.”
용아의 얼굴이 멈칫했다.
“악록 방계 황족의 아기 말인가.”
용아는 열 며칠 전에 태어난 아기에게 축언을 보냈다. 제대로 하는 것인지, 잘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황실과 태어난 아이 일가에서 태자비에게 축언을 청했기에 그랬다.
“예. 비전하께서는 그 아이 납치범으로 발고 당하신 겁니다.”
정천궁 안으로 들어서던 발길이 하마터면 삐끗했다. 좌공공을 따라 걷던 용아는 태감이 넌지시 일러 준 말에 소리를 높이려다 멈추며 나직하게 물었다.
“황족 남아를 납치했다고……?”
어명을 들을 때보다 더욱 황망해하는 태자비의 얼굴을 살피며 좌첨이 머리를 낮추었다.
“그렇습니다.”
태감의 공손한 말에 용아가 받아쳤다.
“이 사람이?”
“발고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하옵니다.”
“증좌는?”
교헌재로 향하는 발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아마도 없는 듯합니다.”
“헌데 나를 왜 부르신 게지. 의심할 만한 점이라도 있다는 건가?”
용아가 걸음을 늦추며 물었다.
“평소대로 하시면 됩니다.”
좌공공이 태자비를 부드럽게 독촉해 교헌재 앞으로 이끌었다. 전각 안에 적지 않은 이가 있는지 밖에 시립해 있는 시중인의 수가 많았다. 금당대 궁인들도 보였다. 태감의 눈짓에 영화대 궁인들이 시립해 있는 다른 이들의 곁으로 가 섰다. 공공을 따라 교헌재로 향하는 태자비를 영화대의 궁인들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전각 앞에 선 용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스스로 결백함을 밝히라.”
“그러하옵니다. 전각 안에 현재 중경에 머물고 있는 황실 종친들이 전부 들어 있습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와 그의 일족도 있습니다. 평소대로 예를 다 하시고 태자비의 위엄을 보여 주소서.”
좌첨이 인자한 음성으로 조언을 건네고, 교헌재의 문을 열었다. 태자비가 들었다는 말이 안으로 천천히 번져 들었다. 황제와 태자를 제외한, 전각 안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용아는 수많은 종친들 사이를 거닐어 황제의 앞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전각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곤 용아뿐이었다. 지켜보는 시선들은 살아 있으되, 움직임이 없어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용아의 움직임을 따라, 작은 몸짓 하나 놓치지 않고 살펴보는 눈길은 매서워서 긴장을 배가 시켰다.
“부황을 뵙습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왕야, 공자들을 뵙습니다.”
용아는 황제께 우선 예를 올리고, 황제 곁에 있는 태자와 몸을 일으킨 황족들을 두루 살피며 예를 올렸다. 다시 무릎을 낮추어 황명이 내리길 기다렸다. 독특한 광택이 도는 짙은 남보라빛 장포를 입은 태자비는 특이한 복식만큼이나 특별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가, 왔느냐.”
용아에게 건네진 황제의 음성은 다정하기만 했다. 황제의 답례가 내려질 때, 태자비의 예에 가벼운 움직임으로 예를 대신 한 왕공과 공자들이 다시 착석했다.
“예, 부황.”
태자비는 깍듯하면서도 친근감이 물씬 느껴지는 태도로 황제께 답했다.
“처음 보는 옷이로구나.”
“부황께서 내려 주신 비단으로 이번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헌앙하니 좋구나.”
황제의 태도는 죄를 묻는 것과 거리가 멀었고, 태자비의 태도 또한 무죄를 증명하러 온 이가 아니라 아비에게 사랑받으러 온 막내아들 같았다. 종친들은 화기애애하게 시선과 말을 주고받는 황제와 태자비를 분위기가 흘러가는 대로 지켜만 보았다.
“부황께서 좋다 하시니 소자도 기쁘옵니다.”
“짐이 네게 어울릴 만한 것이 있으면 또 내려 주어야지.”
철없는 아비와 다정한 아들의 대화 같은 말이 유려하게 흘렀다. 화목한 부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종친 사이에서 으흠! 눈치를 거하게 주는 소리가 울렸다.
정군왕이었다.
용아는 개의치 않고 황제께 올려야 할 말을 마저 건넸다.
“송구하옵니다.”
“그런 말 말거라.”
황제 또한 불편해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태자비에게 다감한 말을 내렸다. 이대로 두었다간 태자비에게 어울릴 만한 새로 들어온 비단 물목을 가져오라는 명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황친들은 분위기에 젖어 황제와 태자비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떨떠름해하는 정군왕의 태도에 괜스레 몸을 반듯하게 했다.
요즘의 황제는 두 얼굴의 사내라는 뒷말이 돌았다. 황제의 준엄한 얼굴과 팔불출 아비처럼 태자비를 어여뻐 하는 얼굴. 두 인격을 소유한 사내의 이중성은 한쪽에 태자를, 다른 한쪽에 태자비를 두었을 때 더욱 돋보인다 하였다. 친자인 태자를 볼 때는 엄격한 황제의 얼굴이 대부분인데, 혼인으로 가족이 된 태자비를 볼 때는 물에 내놓은 아이를 대하듯 어쩔 줄을 모르며 태자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오냐오냐한다고 했다.
실제로 보니 소문이 많이 축소된 것이었다.
태자비를 대하는 황제의 얼굴은 까마득히 어린 막내아들을 대하듯 사랑과 애틋함이 뚝뚝 흘렀다. 다정함이 흘러넘치는 시선을 주고받으며 용아가 황제께 고했다.
“부황, 소자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태자비의 예의 바른 말에 황제가 웃음을 서서히 거두며 하문했다.
“응, 그랬다. 아가. 혹시 갓난아이 훔쳤느냐?”
황제의 말은 갑작스러웠다. 본론으로 순식간에 치고 들어가는 황제의 태도에 태자비가 고요한 얼굴로 답했다. 황제의 엄중한 하문에 태자비는 머리와 얼굴, 상체를 낮추었다. 법도에 따른 예의 반듯한 몸짓이면서도 태자비다운 기품이 있었다.
“소자께 하문하신 물음에 우선 답하자면, 아니옵니다. 또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갓난아이를 말씀하시는 것이지 모르겠으며, 아이를 훔쳤다 하는 것은 납치를 이르심 이온데 항상 궁인의 시선 속에 있는 소자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헤아려 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어떠한 연유로 그런 무서운 물음을 내리시옵니까.”
용아의 말에 나선 것은 황제가 아니라 정군왕이었다.
“태자비 전하.”
“예, 왕야.”
앞으로 나서는 정군왕을 따라 황실 종친들의 시선도 옮아 갔다. 정군왕의 곁에 그의 일을 돕는 함양군이 서 있었다. 함양군이 손에 든 목반에서 책첩을 하나 찾아 건넸다.
“어제저녁부터 열이레 전에 태어난 악록 일가의 종손(宗孫)이 보이지 않습니다. 비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사오나, 악록 일가의 산모가 제북 출신이라 제북에서 오신 비전하의 축복 아래에서 아이가 태어나기를 바라, 황궁에서 출산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정대로라면 닷새 뒤 악록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현재 아이의 종적이 묘연한 상황이지요. 종손을 마지막으로 본 이들은 아이의 두 유모입니다. 바깥에서 큰소리가 나 두 유모가 전각을 비운 틈에 아이가 사라졌다 합니다. 두 유모를 따로 격리해 대질해 본 결과, 그들이 납치에 연루된 정황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 악록 일가인 중 비전하를 고발한 이가 있습니다. 비전하께서 결백을 주장하시는 것처럼, 비전하가 악록의 종손을 납치하였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군왕의 설명은 간명했다.
“그는 모함입니다.”
용아가 담담히 말했다.
“본왕도 그리 생각합니다. 증좌는 없답니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비전하께서 종손을 납치해 간 것은 명백하다 하니 조사를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고발이 들어왔고, 악록의 종손이 사라진 것은 작금의 현실이니 말입니다. 비전하께서 혹,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전각 안에 썰렁함이 감돌았다. 황제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음성으로 윤제를 불렀다.
“태자.”
용아가 안으로 들어선 후부터 표정 없는 얼굴이던 윤제는 더욱 삼엄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주위를 지키고 있는 황가 종친들의 낯빛에 희미한 불쾌감이 흐르는 걸 보아 남자가 황족의 위엄을 퍼트리고 있는 듯했다.
“이 태자비가 악록 일가와 악연이 있음을 자백하겠습니다.”
용아의 말에 안의 공기가 싸해졌다. 갑자기 중앙으로 나선 사내가 울분 어린 얼굴로 소리쳤다.
“악록이 비전하께 죄를 지은 바 없거늘 어찌하여 일가 아이를 말도 없이 데려가시고, 악록을 곤란케 하시옵니까!”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송구하옵니다, 폐하. 송구하옵니다, 비전하. 아이를 잃은 충격에 실언한 것입니다.”
악록의 가주로 보이는 중년인이 황급히 나서며 사죄했다.
“비전하의 말씀을 마저 들어 보도록 하지요.”
정군왕이 적당히 중재했다. 아이 아비로 보이는 사내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허나, 악록의 것을 훔쳐 가는 죄를 지었다면 태자비 전하라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부디 너그러이 헤아려 주소서.”
부자의 대화에 황족들의 표정이 제각각 흩어졌다.
“태자.”
황제가 다시 딱딱 끊어지는 어조로 윤제를 불렀다. 정군왕이 뒷머리가 아픈 것 같은 얼굴로 상석에 있는 황제와 태자를 돌아봤다. 상석에서 소리 없이 오가는 싸움을 모르는 척하며, 정군왕이 태자비의 말을 청했다.
“말씀하십시오.”
용아의 얼굴은 처음과 같이 고요하였다.
“이는 자백이며 동시에 고발입니다. 이십여 일 전에 일주대에서 동궁전으로 가는 도중 선시각 궁녀를 불온한 짓을 하려는 사내를 보았습니다. 그는 악록에서 온 방계 황족이라 하였습니다. 전통과 관례에 따라 선시각 궁녀는 강인한 황족의 권능을 지닌 이에게 내려지니, 강한 권능을 지닌 그가 제 욕심껏 불온한 짓을 하더라도 궁녀를 내원에 들이면 되는데 무어가 문제냐는 헛소리를 하였습니다. 해서, 대빗자루로 흠씬 패 줬습니다.”
“……황족을 말씀입니까.”
“이 태자비는 송구하게도 황족의 권능과 무관합니다. 이 사람이 바르다 생각하는 것이 완력으로나마 전해지기를 바라서 다소 무리하게 행동한 것을 인정합니다. 허나, 본 태자비는 불온한 짓을 일삼는 자를 후려 팬 것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또한 악록의 황족에게 말로 겁박하였습니다. 황족의 힘이 강하다 하여도, 황족의 힘만 과신하여 무모하고 단순하게 군다면 악록 일가의 번영은 불가할 것이라 폭언하였습니다. 그가 만약 대빗자루로 이 사람에게 얻어맞은 것과 일가를 두고 한 이 사람의 폭언에 앙심을 품고 모함하였다면, 그의 모자람과 죄를 엄중히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용아가 대빗자루를 들고 휘두를 듯한 얼굴로 말했다.
“선시각 궁녀들을 대질하여 확인해 보겠습니다. 일대를 오갔을 태감들 또한 불러 묻도록 하겠습니다. 비전하의 자백과 고발을 조사하는 동시에 송구합니다만, 영화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비전하를 의심하여서가 아니라 비전하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함이니 따라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정천궁 태감과 궁인들이 빠트림 없으면서도 조심히 조사하고 물러갈 것입니다.”
“정천궁 태감과 궁인의 영화대 출입을 허락하겠습니다.”
“비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태자비가 황족을 폭행한 전례가 없어 황실 종친부에서 죄를 묻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이에 대해서 폐하께 따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자중하여 주소서.”
정군왕은 예를 잃지 않으면서도, 골치 아프다는 것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주의를 주었다.
“왕야.”
“말씀하소서.”
“황족은 황족의 권능을 앞세워 패악을 부리곤 하지요. 황족의 권능이 일으키는 패악에 부당함을 느끼고 그에 항거해 황족에 대항한 것이 죄란 말입니까. 사람 때린 것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황족이랍시고 돼먹지 않은 힘을 으스대면 그 힘 때문에 얻어맞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힘을 쓰기만 하고, 그 힘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는 겁니까.”
태자비의 말을 정군왕이 난감한 얼굴로 받았다.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해도, 대빗자루로 때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황족의 체면이…….”
“황족의 체면은 길 가는 여자 엉덩이 만지려는 놈이 망치는 것 아닙니까. 이 태자비의 포악한 생각에는 황족이랍시고 손목 잘못 놀리는 자들은 대빗자루로 후려 맞아야 한다 생각합니다. 혹여 부황께서 그를 이유로 내게 벌을 내리신다면 벌은 받겠지만, 교훈은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영화대 조사가 끝나면 말씀 주십시오.”
“연통하겠습니다.”
정군왕이 얼굴에서 울컥한 표정이 새어 나오지 않게 애쓰며 말했다.
“저를 고발한 이는 어디 있습니까.”
“왜요. 또 대빗자루로 패시게요? 비전하 모르실 곳에 따로 두었습니다. 관심 꺼 주소서. 본디 범인을 처음으로 지목하는 이가 진범인 법이지요. 엄벌을 제대로 받게 하려면 죄가 확정될 때까지 잘 보살펴야 하는 법입니다.”
서로 예를 주고받는 척하며 낮춘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정군왕은 대빗자루를 입에 올릴 때마다 침중한 얼굴이 되었다. 용아는 벌주기 위해서 지금 지켜 주어야 한다는 정군왕의 냉엄한 말에 조금 질린 얼굴을 했다.
“제가 고발한 이와 대면을 청합니다.”
태자비의 말에 사건을 맡은 정군왕이 긴 숨을 내쉬었다. 황족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말들이 오갔다. 태자비가 자신을 고발한 이를 정확히 골라내고, 경고하려 함을 모두가 알아챘다.
“비전하께서 고발한 이를 만나시려 하시는 겁니까.”
정군왕의 물음 아래에 모호한 뜻이 깔려 있었다.
“그러합니다. 제가 죄를 지목하고, 그에게 징벌을 청하였다는 것을 당사자 앞에서 기탄없이 알려 주고자 합니다.”
“폐하, 악록 일가의 호위에 힘을 더하고자 입궐한 복립을 들게 할 것을 요청 드립니다.”
정군왕이 상석의 황제께 청했다.
“들라 하라.”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용아가 들었던 문이 아닌, 다른 쪽 문이 열리며 언준의 보호와 감시하에 복립이 안으로 들었다. 따로 부르고 기다릴 것 없이 마치 대기해 있다가 나오는 모양새였다. 안으로 들어서며 용아를 본 복립의 얼굴에 기묘함이 지나갔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분위기를 보아 태자비를 고발한 복립이 태자비의 항변을 보이지 않는 곳에 듣고 있었던 듯했다. 용아는 꽤 떨어진 거리, 옆쪽 뒤에 선 사내를 향해 손 모양으로만 예를 표했다. 복립의 얼굴엔 태자비가 내뱉은 고발과 자백에 대한 난처함뿐 아니라, 이전에 본 것과 전혀 다른 차림새를 한 태자비를 낯설게 보는 시선이 공존했다.
“요즘은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십니까.”
“송구합니다.”
“나의 과실과 손님의 죄를 자복하였으니 처결이 있을 겁니다. 그에 대해 직접 알리고자 대면을 청했습니다. 올바른 처결이 내려지길 바라겠습니다.”
용아가 돌아서서 복립의 가까이로 다가가며 말했다.
“소인 또한 올바른 처결을 바라겠습니다.”
복립이 다가온 용아를 향해 예를 다하며 답했다. 용아가 예를 올리는 체하며 허리를 굽힌 사내의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네놈이 범인이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친족을 잃었는데 사사로운 은원이 있는 상대를 모함하다니 참으로 속 편하지 않은가. 무엇 하러 머리는 이고 다녀. 무사할 줄 아느냐. 아기는 어디에 있지?”
귓가에 울리는 고요한 말에 복립의 낯이 딱딱하게 얼었다.
“……모함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태자비를 의심하는 것에 불쾌하신 것은 알겠으나, 이 사람의 고발은 실로 합당합니다. 이 사람에게 출세는 어렵겠다 폭언하신 태자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달리, 황족의 강건함을 이은 이 사람과 조카로 인해 나와 악록의 출세 가도가 예상되니 염려가 되어 이런 불측한 죄를 지으신 게 아닙니까!”
굳은 표정 그대로 복립이 소리 높였다.
“나를 고발한 이가 손님이십니까.”
용아가 무덤덤한 얼굴로 소리치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황족들 사이에서 가라앉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복립이 뺨을 씰룩이며 우왕좌왕한 눈길을 바쁘게 던졌다. 곁에 선 언준은 태자비가 복립에게 쏟아 낸 말을 모두 들었을 텐데, 복립을 지키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방금……!”
복립이 다시 소리치려 했다.
“이 사람은 손님 외의 악록 일가에 지은 죄가 없습니다. 스스로 밝힐 결백함은 충분히 뜻이 전해졌으리라 믿습니다. 만약 남은 의혹이 있다면 죄가 없으니 곧 조사를 통하여 밝혀질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 조사에 협조할 것입니다. 어린 황친을 빨리 찾기를 바라겠습니다.”
용아가 복립과 황족들을 향해 마무리하는 말을 건넸다.
“…….”
태자비의 말에 마주 예를 올리는 것 외에 더 할 말이 없었다. 복립은 하려던 말을 관두고 예를 올렸다. 돌아선 용아가 상석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부황, 물러가옵니다.”
예를 취하며 황제께 예를 올렸다.
“고생하였다.”
황제가 애틋함 가득한 얼굴로 용아의 말에 답했다.
“태자비는 당분간 금당대에 머물게 하겠습니다.”
“그리하라.”
윤제가 황제에게 고하자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물러가옵니다.”
상석 가까이에 있던 태자가 아래로 내려오며 용아를 낚아채 갔다. 고발이라는 위기는 갑작스러웠지만, 별 무리 없이 떨칠 줄 알았다. 악의를 가진 모함은 낯설지만, 죄를 짓지 않았으니 화는 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금당대에 머무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용아가 무어라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윤제가 황망해하는 얼굴을 재빨리 밖으로 몰아갔다. 두 사람의 뒤로 예를 취하고 따라나선 진양군, 소양군, 영양군이 있었다.
“…….”
용아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당장 머무를 곳도 없고, 금당대는 넓으니 그곳에 있는 게 나쁠 건 없었다. 그러나 자꾸만 어색함이 몰려들었다.
용아는 옆에 선 윤제의 눈치를 살피는 한편, 뒤쪽에 포진돼 있는 세 남자 또한 껄끄러워서 종종 힐끔댔다. 세 사람이 뒤따라서 더욱 어색했다. 뒤에서 걷는 세 얼굴 모두 무척 심각했다.
정천궁을 떠나려 할 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전하!”
계단을 내려가던 용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윤제와 세 남자가 순식간에 용아를 에워쌌다. 네 남자에 시야가 가려진 용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울음 가득한 여자의 것임을 알고 앞을 막는 넓은 등들을 옆으로 치웠다.
“비켜 주십시오.”
“비전하……!”
계단을 구르는 것처럼 황급히 내려온 여자는 어디가 아픈 것처럼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곧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붉어진 눈가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누구십니까.”
여자가 무릎을 꿇으며 무방비한 용아의 손을 붙잡았다. 잔뜩 경계하는 남자들이 흠칫했지만, 용아는 여자에게 순순히 손을 내주고 막아서려는 남자들을 말렸다. 울음 번진 얼굴을 한 여자가 용아의 손을 당겨 제 이마에 가져가 댔다.
“악록 삼남의 처이옵니다. 부군과 가족들의 무례를 부디 잊어 주시옵소서. 또한…… 소인의 아이를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해 주시길 청하옵니다.”
아이를 잃은 여자의 슬픔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폐하께서 현명하신 분이니 무도한 이로부터 그대의 아이를 반드시 찾아 주실 겁니다. 일어나세요.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몸을 아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혼자 나오셨습니까.”
용아가 일으킨 여인을 부축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켜보고 있던 소환과 궁인이 달려와 여인을 지탱해 주었다. 여자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 궁인은 그녀를 부축하며 연신 땀을 훔쳐 주었다.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나는 괜찮습니다. 아이는 누구를 닮았습니까.”
용아는 듣고 있는 귀들을 생각해 모호하게 말했다. 후가주에 대한 예를 아는 이라면 그녀가 제북에서 통용되는 것에 꽤 익숙할 거라 생각이 들었다.
“모르옵니다.”
아직 어린 태가 남아 있는 얼굴이 고개를 저었다. 속삭이듯 가느다랗게 말하는 얼굴에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모르…….”
용아의 입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갔다.
“태동은 강하였으나…… 홍문과 이곳은 다르니까요. 막달에 많이 태동을 하였다 하는데 정확한 뜻을 모르겠습니다. 태아의 움직임이 단순히 좋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서방님께서 무척 좋아하셨는데…….”
말을 건네는 얼굴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영화대에 조사가 끝나면 나는 그곳에 있을 테니, 필요하면 그곳으로 오도록 하세요.”
“송구합니다.”
“모셔드려라.”
궁인과 소환이 우는 여인을 달래어 주며 전각으로 향했다.
“…….”
악록 일가의 태도가 불쾌해 교헌재 안에서 냉소적으로 굴었지만, 아이가 사라진 것은 엄연히 현실이었다. 돌아서는 용아의 얼굴에 우울함이 풍겨 나왔다.
“아까 그것은 뭐냐.”
계단을 내려서며 진양군이 물었다. 그가 말하는 그것은, 소양군과 영양군이 행동으로 알려 주었다. 후가주에 대한 예가 그들의 눈에 낯선 모양이었다.
“윗사람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아랫사람을 아껴 주는 것입니다. 태동이 뭡니까.”
용아가 서로의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고 있는 소양군과 영양군을 짚으며 설명하자, 두 남자가 질색하며 떨어져 점잖은 체했다.
일반적으로 태동(胎動)은 모태 안에서의 태아의 움직임을 뜻 했다. 안타까운 울음을 쏟아 낸 얼굴과 그의 일가인 황족이 말하는 태동이 단순히 모체 안에서의 태아 움직임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황족의 혈통을 강하게 이을수록 태동이 강하다 알려져 있다.”
윤제의 설명에 용아가 걸음을 멈췄다.
“중경에서는 태어난 아이의 외원과 내원 거처 구분을 하지 못합니까.”
“못해. 제북은 할 수 있나?”
윤제가 곧장 답하고 물었다. 남자들을 돌아보는 용아의 얼굴은 무언가 몹시 미개한 것을 바라보는 듯했다.
“제북이 홍문을 숭상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제북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친족과 권한을 인정받은 산파가 홍문으로 가 아이의 가능성을 살핍니다. 열네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홍문례에 드는 것은 태어난 직후에 확인한 것을 재확인하는 정도입니다. 태어난 직후는 기억이 나지 않고, 홍문례에 든 적 없으니 정확히 어떻게 확인하는지 모르지만. 신성한 홍문에 닿으면 앞날을 예측해 주신다,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주 드물게 홍문의 예측이 잘못 되어 반대로 발현되거나, 발현되지 않거나, 숨겨져 있다가 갑작스레 발현하기도 합니다. 황족의 태동이란 건 얼마나 정확합니까.”
용아의 설명에 네 남자의 얼굴에 소리 없는 놀라움이 번졌다.
“복불복이랄까.”
소양군이 상쾌하게 말하며 얼굴을 구겼다.
“예……?”
“사람마다 다르다.”
“…….”
영양군의 말에 용아가 깊이 침묵했다.
“황족 태동과 발현은 제각각이야. 잉태되는 순간부터 태동을 보이는 존재.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한 번도 태동하지 않기도 하지. 대개는 뛰어날 것이라 예측되면 서너 달째부터 태동해 막달까지 계속 이어진다. 보통의 황족은 막달에 태동을 보인다. 하지만, 힘이 드러났을 때 누가 얼마나 강한지는 닥쳐 봐야 아는 거다. 태동이 강하면 모체에 심한 충격을 준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도 사람 따라 결과가 다르거든.”
소양군이 실제 예시를 손으로 짚어 가며 설명해 주었다. 태자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태동했고, 진양군은 단 한 번도 제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소양군은 막달에, 영양군과 여기에는 없는 횡양군은 서너 달째부터 태동하였다.
“장군부 대공자가 여섯 살 때부터 힘을 드러냈다며?”
“네 살 때부터입니다.”
“엄청 빠르네. 나는 아홉 살 때부터였지만 열세 살 때까지 긴가민가했다. 일반적으로는 8살 전후다. 윤공자는 태어날 때부터, 얜 성격이 급한 게 틀림없지. 진공자는 여섯 살. 영공자, 횡공자는 여덟 살이지.”
용아의 얼굴이 복잡함에 휩싸였다.
“그 아기 황족의 힘이 없을 수도 있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용아의 걱정 가득한 머리를 윤제가 슥슥 쓰다듬었다.
“어느 쪽이든 큰일이지.”
“황족의 힘을 가진 아이는 강하지 않습니까.”
“강하다. 그래서 더 큰일일 수도 있다. 황궁은 출입이 어려우니 아이를 숨기기 위해서 재갈을 물리고 소리가 나가지 않도록 나무 궤에 넣어 둘 수도 있지. 그렇게 해도 아이가 강하다면 한동안 버틸 수 있을 거다. 강한 것은 좋기도 하지만 강하기 때문에 더 오래 고통 받을 수도 있는 거지.”
윤제의 말에 용아가 눈썹을 한껏 구겼다.
“어린아이 실종 사건은 감정을 내려놓기 어려워.”
“황궁 안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대체 누구지?”
소양군과 영양군의 말은 황족 아이 납치가 흔한 일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용아의 당황한 얼굴을 본 진양군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설명했다.
“황족 혈통을 이은 아이들은 어릴 때 자주 납치나 사고사를 당한다. 황실 안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지만, 군왕부 내원 안에선 암투가 치열하거든. 군왕비가 반드시 다음 군왕이 될 아들을 낳으란 법이 없으니까.”
“가장 다음 군왕에 가까운 아들이 있다 하더라도 언제 그보다 강한 후계를 보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
“그렇지.”
소양군과 영양군이 진양군의 어깨에 척하니 팔을 걸며 말했다.
“황족은 동족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금당대까지는 상당히 멀었다.
“있다.”
윤제가 선선히 답했다.
“동류를 알 수 있다는 것에 외에 동족을 알아보는 실효가 있는지 모르겠어.”
“전제 조건이 필요하잖아. 상대가 제 위엄을 보여 주고자 힘을 드러낼 때. 그와 같은 힘을 내보이거나, 상대의 힘에 불쾌감을 퍼트리기는 하지만 근원 모를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는다. 이것도 상대가 갓 태어난 아기면 소용없지.”
영양군과 소양군이 태자의 말에 덧붙였다.
“너희는?”
질문을 한 것은 진양군이었다. 대답하려는 용아를 보는 모든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저희들끼리 서로를 숨기려 하면 숨길 수 있습니다. 짝이 될 상대에게도 정체를 숨길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은 겉으로 정체가 지나치게 드러나죠. 특히 짝이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에게 그렇다고 하는데, 불행일 수도 있고, 축복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서로 자신에 대해 숨기려 해도 특정한 경우에는 숨길 수 없습니다. 또, 제게는 숨길 수 없습니다. 본인조차 모르는 것이 가끔 저에게는 보입니다. 어떻게? 라고 묻곤 하는데, 저도 모릅니다. 그냥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제가 특별히 숨기지 않으면 일족은 저를 알 수 있죠. 반면 제가 숨기려 하면 아무도 알 수 없고요. 아무튼, 형님들께서는 잃은 아이가 동족이더라도 황족의 힘으로 당장은 찾을 방도가 없다는 말씀이죠?”
용아가 긴말을 끝내며 물었다.
“없지.”
“응, 없어.”
“없다.”
대답하는 헌앙한 얼굴들을 보는 용아의 얼굴이 조금 한심해하는 투였다. 황족의 힘이 있으면 무엇해, 같은 투덜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조금은 무능한 존재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금당대로 향하는 동안 용아는 때때로 힘만 좋고 무능력한 인사들을 보듯 곁의 얼굴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때마다 태어난 후부터 지금껏 특별하고 고귀하다 찬탄 받으며 살아온 얼굴들은 딴청을 부렸다.
금당대로 든 일행은 등우가 보필했다.
“차를 올리겠습니다.”
각각 선호하는 차가 다르기에 차탁에 둘러앉은 사내들이 태감에게 원하는 바를 말했다. 용아는 묘하게 눈치 보는 듯한 기색으로 등우에게 시선을 건넸다.
“…….”
금당대로 우르르 몰려 온 것은 기묘했다. 덕분에 더 어색한가 하면, 덜 어색한 듯도 했지만, 상황이 어떻든 용아는 자꾸 눈치를 보게 되었다. 용아의 시선에 등우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비전하는 항상 드시는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응, 고맙네…….”
그게 아니라 조사는 얼마나 걸리는지, 기일이 걸리면 그동안 용아 자신은 금당대 어디에 머무는지 알고 싶었다. 태감은 다 안다는 얼굴을 다시 한 번 해 보이고 물러갔다.
물러갔던 등우는 비교적 빠르게 돌아왔다.
“드소서.”
누군가는 자식을 잃어 슬픔에 빠져 있고, 슬픔은 타인에게까지 절절히 전해졌지만, 타인에 불과하여서인지 아이 잃은 부모의 슬픔과 무관하게 결 좋은 차는 잘도 넘어갔다.
차를 마신 후에는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칠 즈음, 정천궁 태감들이 와 왕공 자제들을 모시고 갔다. 황궁 안팎을 전부 걸어 잠그고, 황실 종친이 권역을 나누어 살핀다 하였다. 황족의 힘으로 주위를 비우고 잃은 아이를 찾는 수색 작업을 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얼굴들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리 기대하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밤이었다. 운 좋게 어제 호위조를 대대적으로 바꾸는 날이라 밤사이 황궁을 나서는 인원과 신원이 철저히 통제되었다. 아이가 만약 살아 있다면 아직 황궁 안에 있을 것이라 했다.
정군왕은 황궁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의 신원을 어느 때보다 엄히 살폈고, 황궁 밖으로 누구도 나갈 수 없도록 임시로나마 방비했다. 달리 수가 없는 듯 보였다. 중경 안 모든 황족이 투입돼 수색에 힘쓰는 것만이 아이 잃은 부모에게 작지만 유일한 위안일 것이다.
윤제 역시 친우들이 떠나고 금당대를 나서려 했다. 그가 어디를 살피러 가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태자와 동행할 수 없겠지만, 태자를 혼자 다니게 할 수 없기에 등우도 따라 나섰다.
용아가 나서는 남자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소제는 어디에 머뭅니까.”
방을 나서려던 윤제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있어.”
남자의 얼굴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였다.
“조사가 오늘 끝날까요.”
“태감들은, 특히 총관 태감 휘하 태감들은 엉덩이도 무겁고 느리다. 숨도 느리게 쉬지. 무척 꼼꼼하거든. 거기다 황명에, 태자비 거처를 살피는데 얼마나 조심할 게 많겠느냐.”
윤제가 조금 웃는 얼굴로 친절히 말했다.
“소제의 방을 따로…….”
용아가 먼 곳에 시선을 던지며 가만가만 말했다.
“왜 그래야 되는데.”
윤제가 사납게 웃으며 새삼스러운 말을 하는 얼굴에 입술을 내려 입을 맞췄다. 등우와 태감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전하.”
용아가 낮춘 목소리로 윤제를 급히 불렀다.
“여기 있어라.”
윤제가 용아와 같이 낮춘 목소리로 단단히 말하고 방을 나섰다. 용아가 주의를 주는 얼굴에 대고, 저 범인 아니거든요, 라는 때 늦은 말을 전했다. 난데없으며 불필요한 말이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윤제가 알아, 그래서 여기 있으라는 것 아니냐, 아니다, 그래도 여기 있어, 라고 말했다.
그대로 문이 닫혔다.
“…….”
용아는 떠들썩하던 방에 홀로 남겨진 것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내실 안 침상이 있는 곳으로 가기가 괜히 면구스러워 넓은 방을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차탁 앞으로 돌아갔다.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뭉클뭉클함에 잠시 쑥스러워 하다가, 아기가 어디로 갔을까 하는 걱정으로 빠져들었다.
깊은 밤이 다가도록 윤제는 돌아오지 않았다. 태자와 일행이 애매한 때에 차와 식사를 한 것은 수색이 밤늦도록 될 것을 예견했기 때문인 듯했다.
금당대 안의 태자비는 보호받는 것인지, 감시받는 것인지 모호한 상황이었다. 모장은 태자 없는 전각 안으로 금당대 궁인과 동행하여 용아를 찾았다. 금당대 궁인이라 해도 얼굴이 익은 이였기에 용아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밤이 늦었으니 주무시는 게 어떠냐는 상궁의 말에 용아가 고개를 저었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모장.”
“예.”
“군왕부 내원의 황족 아이들은 자주 사라지거나 목숨을 잃어?”
걱정과 다정함이 가득한 말에 모장이 미소했다.
“황실 안에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내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닌데.”
인자한 여인의 말에 용아가 조금 꿍얼댔다. 모장과 금당대 궁인이 조용히 웃음을 퍼트렸다. 용아가 비스듬하고 뚱한 시선을 두 여자에게 건넸다.
“군왕부 내원 안 권력 다툼과 투기가 만만치 않다 들었습니다. 황궁 안 궁인들 또한 주의할 것이 많습니다만, 왕부로 나갔다가 돌아왔거나 왕부에서 온 나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왕부 안 후계 암투 때문에 황궁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황족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목숨으로만 갚게 하는 데에도, 내원 안 여인과 그들의 친정 식구에다 왕부 친족까지 얽힌 복잡한 합종연횡이 무시무시하답니다. 왕부뿐 아니라, 대귀족과 귀족가 안에서도 암중모색이 심각하다 들었습니다. 황궁 밖 부귀한 내원에 사내아이 열이 태어나면 그중 여섯은 죽고, 하나는 불구가 되고, 셋이 살아남는다 할 정도니까요. 반면 여아는 일곱이 태어나면 다섯이 시집가고, 하나둘 아프거나 한둘 말썽 부린다 하지 않습니까.”
시원시원한 인상의 궁인이 소상히 말했다.
“군왕부 내원에 아들이 열이나 있어?”
용아가 엉뚱한 데에서 놀랐다.
“비전하. 군왕부 내원에 아들이 열만 있는 줄 아십니까. 예를 들어 말하느라 열이라 한 것입니다. 소양군과 횡양군은 군왕부 장자지만, 진양군께서는 진군왕의 열넷째 아드님이십니다. 진공자 이전에 사라지거나 다치거나 병에 걸려 생을 달리한 공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영공자께서는 몇 번째냐.”
“아홉, 여덟째이시던가요. 아, 여덟째이십니다. 영군왕부는 진군왕부보다 더 치열한 곳입니다. 영군왕부는 현주와 여아가 적지 않은 데에 비해, 진군왕부는 이상하게 아드님들뿐인 게 특이점이지요. 소양군께서는 장자이시지만 위로 누님만 여섯입니다.”
“누님이 여섯…….”
“헌데 바로 위 동복누이인 현주와 가장 사이가 나쁘고, 이복 누이들과 더 사이가 좋으십니다. 소양군과 현주께서는 거의 원수 수준이지요. 소양군께서도 좀 그러시지만, 소군왕부 현주께서도 좀 그러십니다.”
궁인이 중경 황족에 대한 온갖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장이 중간중간 첨언했고, 용아가 부지런히 맞장구쳤다. 용아가 감탄하며 말했다.
“송화는 그런 것을 다 어떻게 아는 것이냐.”
“비전하, 소인의 이름을 아시옵니까. 그저 이곳에 오래 있다 보니 오며 가며 듣는 말이 많사옵니다.”
송화가 깜짝 놀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구나. 등우가 부르는 것 기억하고 있었다.”
“황공하옵니다.”
“황공은 무슨. 그래서 함양군과 진양군의 내기 결과는 어떻게 되었어?”
용아의 물음에 송화가 더욱 열성적으로 말했다. 모장은 가만히 웃다가 송화의 말에 툭툭 한마디씩 잊지 않고 덧댔다. 세 사람의 알찬 대화는 밤이 깊어 갈수록 더해 갔다.
새벽이 다 갈 때까지 대화는 그치지 않았다.
송화는 그녀가 알고 있던 많은 것을 내어놓은 후에야 방을 나섰다. 모장은 잠들지 않으려는 용아를 몇 번 더 재촉하다가 수차를 끓여다 주고 물러갔다. 윤제는 아침이 밝아 올 즈음에야 돌아왔다. 찻잔을 들던 용아는 열리는 문소리에 손에 든 것을 던지듯 내려 두고 달려 나갔다.
열리는 문 앞에 서 있는 용아를 본 윤제가 멈칫 놀랐다.
“벌써 일어났느냐…….”
“찾았습니까.”
그를 반긴 얼굴이 곤란한 것을 물었다.
“없다.”
윤제가 안으로 들며 말했다. 해결되지 않은 탓인지, 걱정이 큰 탓인지 표정이 유난히 좋지 않았다. 착잡한 얼굴이었다. 금세 시무룩해진 얼굴을 본 윤제가 눈가를 좁히다가 불쑥 손을 뻗어 용아의 얼굴을 살폈다. 별다를 것 없을 텐데 샅샅이 살피는 눈길에 용아가 저도 모르게 움칫거렸다.
“왜, 왜 그러십니까.”
윤제가 문밖을 향해 말했다.
“태자비가 잠을 잤느냐.”
밖이 고요했다.
“…….”
윤제가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는 태감과 궁인들을 손짓으로 전부 물렸다. 예의 바른 발소리들이 물러가고, 한동안 남자의 책하는 시선이 용아에게 머물렀다.
“네가 걱정해서 잠을 안 자면 아이가 돌아오느냐.”
“걱정한 것도 맞고, 잠을 안 잔 것도 맞지만…… 소제가 놀라운 것들로 귀를 트이느라 그런 것입니다. 윤공자 형님이 염려하는 책임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를 따로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윤공자 형님으로 때우려 하지 마. 가서 자자.”
윤제가 웅얼웅얼 말하는 용아의 허리를 팔로 낚아챘다.
“저, 안 졸립니다……!”
“아무 짓도 안 한다. 나도 자고, 너도 자야지. 영화대 전각 방 두 칸 살펴봤다더라. 여기서 며칠이나 있어야 할 텐데 언제까지 안 자고 버틸 거냐. 가서 자. 형이 밤새고 와서 피곤하니까 그만 버둥거려라. 아무 짓 안 한다잖아.”
윤제가 용아를 품에 안고 침상으로 쓰러졌다.
“윤, 윤공자 형님…….”
커다란 품에 파묻히자, 남자의 체향이 훅 끼쳐 왔다. 곤란했다. 당혹스러움은 언제나 갑작스레 덮쳐들었다. 윤제가 품에서 꼼지락대는 몸을 단단히 부둥켜안으며 잠을 청했다. 용아 역시 잠과 고단함에 집중하려 애썼다. 아무 짓 않는다 약조한 남자의 손이 용아의 뒷머리와 목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네 귀를 트이게 하는 놀라운 것이란 건 뭐냐.”
윤제가 잠에 취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을 청하는 중이지만 비교적 분명한 목소리였다. 용아는 버티려던 것을 관두고 단단한 팔에 기대며 우물댔다.
“영공자 형님 첫사랑이 염소라면서요.”
용아의 은밀한 속삭임에 순간 윤제의 가슴팍이 멈칫했다가 웃음으로 크게 울렸다. 뺨에 와 닿는 부드러운 울림이 나쁘지 않았다.
윤제가 자다 말고 키득댔다.
“아, 그 녀석.”
“……?”
용아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올렸다.
“그 첫사랑이 흰 염소라서 지금도 흰색 광신도잖느냐.”
“그런…… 겁니까.”
“아도 녀석만 흰말 타고 다니잖아. 선물하거나 부릴 일 있을 때 흰색으로 골라 보내면 반 이상 넘어온다.”
새삼 우스운지 윤제가 장난을 치듯 품 안의 용아를 더욱 끌어당겨 짓눌러 오며 큭큭댔다. 용아는 남자의 완력과 무게에 짓눌려 파닥거리다 툴툴댔다.
윤제가 또 무얼로 귀를 트였는가 물었다.
용아는 문득 깨달았다. 최고급 소문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는 해답 책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용아가 궁금한 바와 아는 바를 적절히 엮어 흥미로운 것을 속닥거리자, 윤제가 다시 키득댔다. 곧이어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고급 정보가 귓가에서 나지막이 울렸다.
둘은 한참이나 속닥거리다 잠이 들었다. 걱정과 염려가 남아 있는 낯선 아침이지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찍 시작된 아침이 차분히 밝아 왔다.
용아가 눈을 떴을 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새벽이 다 지난 아침에 돌아왔던 사내는 잠시 눈을 붙였다가 아침이 밝자마자 나서고 없었다.
침상 밖으로 나선 용아는 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온 소환을 보고 멈칫했다. 어린 태감은 태자비의 의아함을 알면서도 제가 할 일에만 충실히 하였다. 재빨리 다가와 씻을 물이 있는 곳을 내보이는 태감을 따라 용아가 걸음을 옮겼다.
“시각이 얼마나 되었느냐.”
용아는 우선 씻고, 곁을 지키는 소환에게 물었다.
“정오가 다 되어 갑니다.”
“정천궁에 문안을 가야 하는데 깨워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
용아가 은근히 탓하는 투로 말했다. 소환이 반듯한 태도로 답을 올렸다. 또한, 손은 야무지게 움직였다.
“아직 사건이 해결되지 못해 궁 안에 손님이 많습니다. 때문에 전하와 비전하의 문안은 미루어졌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전하께오서 나서시기 전에 비전하를 두 시진 꽉 채워 주무시게 하라 명하셨기에 일어나실 시각이 지났음에도 알리지 못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소환은 희미한 손짓에도 뜻을 알아채고 시중을 들었다.
“모장은?”
차탁 앞에 앉아 용아가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소환이 조심스레 말했다.
“모 상궁께서는 벌을 받고 계십니다.”
“벌이라니.”
“전하께오서 내리신 벌입니다. 비전하께서 뜻하신 바라 하나, 상궁이 주인께 제대로 잠도 청하지 못해 결국 주인의 몸을 축나게 하였으니 해야 할 바를 하지 못한 것이 이유이옵니다. 모 상궁과 궁인이 받는 벌은 오늘 해가 떠 있는 동안 비전하 앞에 나설 수 없는 것입니다. 모 상궁께서 밖에 시립해 있지만, 비전하를 뵐 수는 없습니다. 비전하께서 방 밖으로 나서시면 모 상궁은 전각 다른 방 안으로 들어가 얼굴을 숨기라는 명이옵니다. 그리고, 소인을 포함해 모든 금당대 안 궁인들은 비전하와 열 마디 이상 나누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하오나…….”
소환이 곤란한 투로 말을 흐렸다. 용아가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모 상궁이 지금 그럼 밖에 있단 말이냐.”
“예.”
소환의 답에 용아가 몸을 일으켰다. 소환이 재빨리 태자비 곁에 붙어 태자가 명한 바를 따를 준비를 하였다. 용아는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
“모장.”
닫힌 문 너머를 향해 용아가 소리쳤다.
“비전하!”
문밖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장, 거기 있어?”
방 안에서 전해진 용아의 물음에 모장이 애달픈 얼굴로 답했다.
“예, 비전하. 소인 예 있습니다. 일어나셨습니까.”
“문을 열면 안 되는 거야?”
“아니 될 듯하옵니다. 식사하셔야지요. 차를 올릴까요?”
금당대 안 궁인들이 태자비와 상궁의 문을 사이에 둔 애절한 대화에 안타까운 시선을 건네면서도 숨죽인 웃음을 퍼트렸다. 방 안에서 어미를 찾는 듯한 태자비의 단정한 부름도, 문밖에서 태자비의 그림자라도 보려고 애쓰는 상궁의 노력도 소리 없는 웃음을 짓게 했다.
용아가 문 너머에 대고 투덜거렸다.
“응. 부탁해. 우리 저녁에나 볼 수 있대.”
“금방 올리겠습니다. 날이 추운 때이니 해가 금방 질 것입니다.”
모장이 살뜰히 답했다. 용아가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투덜댔다.
“전하께서는 나를 외톨이로 만들려는 것인가.”
“전하께서 비전하를 아끼시는 마음에 그러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린 태감이 불쾌해하는 태자비를 달래어 주려 애를 썼다. 태자가 열 마디 이상하지 말라 했지만, 지금까지 주고받은 말만 수십 마디는 될 것 같았다.
“이런 벌은 너무한 것 아니냐.”
“전하께오서 비전하와 모 상궁의 사이를 잘 아시는 터라 이러한 벌을 내리신 듯하옵니다. 그만큼 비전하께 관심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갖다 붙이긴. 네 주인이라고 전하 편드는 거냐.”
용아의 핀잔에 소환이 얼굴을 낮추었다.
“송구합니다.”
사죄의 말에 용아가 손을 살살 내저었다. 곧 문밖에서 모장의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계셔야 한다, 용아에게 주의를 주는 소환처럼, 바깥에서도 상궁께서는 물러서시라는 주의가 울렸다. 밖에서 올린 식사와 차를 들여온 소환이 재빨리 상을 살폈다.
“자흥아.”
수저를 든 용아가 소환을 불렀다. 권과가 든 종지를 태감의 앞으로 들어 보이는 용아를 어린 얼굴이 망연히 바라봤다. 용아가 제 이름을 부를 거라 상상도 못 한 탓이었다.
“……예……?”
“네 이름 자흥이 아니냐. 하나 먹거라. 너도 배고프지 않느냐.”
“송구하옵니다.”
아이는 달콤한 권과를 하나 집어먹으며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 달달한 권과를 입에 머금은 소환이 태자비의 식사 시중을 더욱 성심껏 했다.
“소환들도 태감들 숙소에 머무느냐.”
용아는 죽 그릇부터 뒤적였다.
“다른 전각은 그렇습니다만, 금당대는 소환 숙소가 따로 있습니다. 하온데, 비전하께서 소인의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자흥의 얼굴은 여전히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나도 귀가 있다. 태감들이 소환들 부르거나, 궁인들끼리 말을 주고받는 걸 보면 몇 년이나 곁에서 보고 있는데 자연히 알게 되지. 태감들은 소환한테 윗분이잖느냐. 같은 숙소 머물면 귀찮고 할 텐데, 그래도 금당대는 따로 숙소가 있어 좋은 편인가?”
태자는 전각을 나서기에 앞서 모두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태자비에게 절대 허튼소리 말고, 쓸데없이 열 마디 이상 나누지 말라.
용아가 의문을 표하는 것들은 시시콜콜한 것들이다.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소환들끼리도 위계가 있어?”
황궁 안에서 공기 취급도 받지 못하는 게 태감이었다. 태감들의 손발이 되어, 소소한 심부름을 하고, 장차 태감이 될 준비를 하는 소환은 그보다 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데 이름을 부르며 관심을 보이는 이에게 명이 있었다지만 성의껏 답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용아의 물음에 자흥이 부지런히 답을 건넸다.
태감들의 세계는 황족, 군왕부, 대귀족과 귀족가 소문과 또 다른 흥미로움이 있었다. 자흥이 말을 올릴 때 용아가 때때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 자흥은 더욱 열심히, 상세히 말을 올렸다.
“허, 무섭겠다.”
자흥은 반나절 내내 거의 쉬지 않고 떠들었다. 용아는 밖에서 들여 온 차를 떠드느라 목이 아플 자흥에게 종종 건네었다. 태자비의 너그러움을 접할 때마다 자흥은 한껏 몸을 낮추었다. 반나절 만에 둘은 친근한 형, 아우처럼 편한 사이가 되었다.
저녁이 되어, 자흥이 물러가고 모장이 들었다.
“적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용아의 머리를 빗겨 주며 모장이 물었다. 태자의 허락이 있었는지, 저녁이 되어 든 모장의 곁에 금당대 궁인이 없었다. 용아가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에 살며시 기대며 답했다.
“응.”
“전하께서 비전하와 저를 갈라 두려 하시다니, 너무하십니다. 오늘은 일찍 주무셔요. 아셨지요? 그나저나, 전하께서 비전하께 관심이 많으신 듯하옵니다. 저희 사이를 아시고, 우아하면서도 혹독한 벌을 내리시는 걸 보면 그렇지 않사옵니까. 본디 황족의 체면 잃지 않으면서 엄히 다스리는 법을 아시는 분이기는 하였는데, 유난히 몇 년간 비전하께만 유치하게 구셨습니다.”
모장의 말에 용아가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폐하의 정무를 돕기 시작하시면서 근 몇 년간 황족의 위엄으로 무엇이든 처리하려는 인상을 주시기도 했지요. 최근엔 그러지 않으신 듯합니다. 때문에 소인에게도 고민이 있습니다. 영화대 궁인 중에 금당대 첩자가 있는 것 같단 말이지요. 두 분 사이가 좋아지셨으니 걱정할 것은 아니라 보옵니다만, 비전하도 여기에 누구 하나 심어 두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럴까. 자흥인 어때?”
용아가 모장을 돌아보며 은근히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모장이 언제든 잠들기 좋은 모양으로 머리를 정돈해 주며 답했다. 용아는 지나는 말투로, 황궁 황족들은 사이가 나쁘지 않아도 서로 첩자 심어 두냐고 말했다.
모장은 일반적인 말 대신 그녀가 앞서 말한 것에 대해서 고했다. 정확히 첩자라 하긴 어렵고, 귀인으로부터 받은 듯한 금낭이 영화대 궁인 숙소에서 발견되었다 말했다. 발견된 금낭의 출처는 아마도 금당대일 것이고, 그만한 금낭을 주려면 금당대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함으로 첩자가 의심된다 하였다.
“특별히 징후는 느끼지 못하였는데.”
“소인 또한 그러합니다.”
영화대에서의 일이 금당대로 흘러갔거나, 금당대 주인인 태자와 최근 나쁜 일은 없었다는 뜻이었다. 용아의 말에 모장 역시 동의했다. 태자로부터 오늘 벌을 받기는 했지만, 첩자로부터 생겨난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
웬, 첩자.
모장이 의아해하는 용아를 다독이고는 잠시 물러갔다. 윤제는 오늘도 늦었다. 금당대 주인이 돌아오는 소리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요한 문밖에서 모장의 소리가 울렸다.
“비전하.”
찻물을 우릴 더운 물을 가지러 간 상궁의 부름이 새삼스러웠다.
“들어오너라.”
용아는 느슨하던 태도를 가벼이 추슬렀다. 뜨거운 물이 담긴 찻주전자를 든 모장의 옆에 송화와 또 다른 궁인이 있었다. 모장이 안으로 들어 곁에 선 궁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들의 말을 들어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예는 되었다. 할 말이 있느냐.”
용아는 조금 더 허리를 반듯하게 했다.
“비전하. 소인, 송화이옵니다. 어제 소인과 군왕부와 귀족가에 대한 말을 나눈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기억한다.”
“어제 비전하와 말씀 나눈 것 중 금번 사건과 연관된 것이 있어 다른 궁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알아 두시는 게 좋을 듯한 말이 나와 뵙기를 청했습니다.”
송화가 옆의 궁인을 소개하듯 쳐다보았다.
“비전하. 소인, 채옥이라 하옵니다.”
“채옥은 죽은 봉의 경씨가 친정에서 데려온 궁인입니다. 채옥은 서녀 출신으로 죽은 봉의 경씨의 사촌 여동생이 됩니다. 모친의 출신이 높지 않아 경씨가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고…… 말씀드려라.”
송화가 채옥에 대해 소개한 후 나지막하게 재촉했다.
“어제 비전하께서 군왕부에서 황족 아이들이 사라지거나, 죽거나 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이번에 일어난 일과 연관하여 떠오른 괴소문이 있습니다.”
“괴소문?”
“군왕부 내원에서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사내아이들이 죽거나, 사라집니다. 대다수는 아시는 것처럼 권력을 향한 후계 다툼 때문입니다. 후계 다툼 중에는 아주 드물게 괴이한 소문이 함께합니다. 군왕부 내원 안에서도 괴소문이 떠돌지만 대부분은 접근이 어려워서 그런지 금세 묻혀 버리고 맙니다. 황족 사내아이들을 죽이거나 납치하는 것은 비단 군왕부 내원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군왕부 내원으로 시집가는 딸이 있거나, 일가인이 있는 경우 그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온데……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채옥이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망설였다.
“괜찮다.”
용아의 너그러운 말에 채옥이 입술을 잘근거리며 속삭였다.
“황궁 바깥 부귀한 군왕부와 대귀족 내원의 은밀한 소문 중에…… 황족의 혈통을 이은 갓난아이를 잡아먹으면 황족의 힘을 지닌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깥에서 싸늘한 바람 소리가 몰아쳤다.
“……잡아먹…….”
용아가 작게 웅얼거렸다. 채옥이 얕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뢰었다.
“소인이 어릴 때의 일이옵니다. 경씨가와 가까운 안씨가의 귀한 독녀가 군왕부로 시집을 갔는데 몇 해 동안이나 아이를 낳지 못하였습니다. 군왕부 내원 안에는 수많은 귀족가 여식들이 있으니 친정의 위세만 믿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 백방으로 아이를 낳으려 하였을 겁니다. 군왕부 안의 다른 여자들이 연달아 출산했고, 정신을 놓은 안씨가 아이 중 하나를 훔쳐 갔다는 소문이 있었지요. 그 소문 뒤에 아이를 훔쳐 갔을 뿐 아니라 안씨가 아이를 빼돌렸다는 걸 안 군왕부 태감이 전각에 찾아갔을 때…… 안씨 입가가 붉은 피로 가득했다는 괴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이들에게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뜬소문이라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몇몇 아이는 불행하게 생을 잃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채옥의 구체적인 이야기에 방 안이 깊이 가라앉았다.
“괴소문이란 건 가능한 일인가.”
“당연히 아니옵니다. 그러니 사건이 일어날 때만 잠시 반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소문은 황가와 왕부 차원에서 철저히 묻어 버리려는 것 같기도 하지만요…… 그래서인지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너무 허무맹랑한 것이고 무서운 이야기이니 소문조차 쉬쉬하는 것도 이해가 되긴 합니다. 소인도 죽은 주인에게 듣지 못했다면 크게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용아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펴질 줄 몰랐다.
“봉의와 이에 대해 말했나?”
“예…… 송구하옵니다.”
채옥이 급히 굳어 들었다. 이미 없는 이라고 하나, 태자비의 입장에서 동궁전 후궁 중 하나였던 이에 대해 거론하는 게 좋을 리 없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였느냐.”
용아의 물음에 채옥이 우물쭈물했다.
“먼저 소인의 무엄한 말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죽은 주인이 진씨와 맹씨가 저러다 언젠가 아이를 잡아먹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저 걱정과 시기에 뒷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 많은 이들이 아는 소문은 아니오나, 세 후궁 모두 귀족가 출신이라 괴소문에 대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진씨와 맹씨 모두 비전하라 불리길 바라던 이들이라서요. 망극하옵니다. 천한 것의 부덕한 말을 부디 용서하여 주소서.”
고민 끝에 말을 올렸던 궁인이 급히 죄를 청했다.
“아니다. 나도 알고 있는 것이니 너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송구하옵니다.”
채옥은 연신 머리를 낮추었다.
“비전하.”
모장이 생각에 잠긴 용아를 불렀다. 황궁에서 험진 일을 많이 경험한 그녀에게도 소문은 괴이쩍은 모양이었다. 용아를 보는 어진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무서운 소문을 아는 이는 군왕부와 대귀족, 귀족 내원과 관계된 이들이었다. 현재 황궁 안에 소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의심스러운 이를 꼽으라면 셋이었다.
황후. 양제. 소훈.
용아는 황궁 안을 권역을 나눠 뒤지고 다니는 황족들이 소문에 대해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또한, 걱정스러웠다.
“셋 다 알고 있었다.”
용아가 혼잣말처럼 말을 내렸다. 용아의 말에 채옥이 바삐 답했다.
“확언할 수 없습니다. 허나, 알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지체가 높을수록, 황가와 가까운 혈통과 통혼할수록 이에 대해 모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전하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비전하?”
용아가 몸을 일으켰다. 모장이 갑자기 일어나는 태자비를 따르며 걱정스레 불렀다. 밤이 되어 밖은 캄캄했다. 어두운 하늘과 등불이 밝혀진 곳만 드문드문 빛이 번지는 바깥을 바라보는 용아의 얼굴은 창백하도록 희었다.
어딜까.
무엇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벌써 답이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비극적이게도 이미 결과가 내려진지 오래일 수도 있었다.
아기를 잡아먹어 붉어졌다는 입가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비전하, 바깥바람이 찹니다.”
창백한 얼굴로 밖을 보는 용아의 뒤로 세 여자가 근심스레 서 있자, 태감이 다가와 말을 올렸다.
“전하는 아직이신가?”
등평이 공손히 답했다.
“송구하옵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보내올까요.”
“수색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답보 상태인 것으로 아옵니다.”
용아의 물음에 등평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와 황족 종친들이 황궁 권역을 나누어 살펴본다지. 황후전과 동궁 후궁전도 모두 살펴보았다던가. 등 태감, 아는 바가 있으면 소상히 말해 주시게.”
등평이 자신을 옳게 부르는 태자비를 힐끗 살폈다.
“황후전은 정천궁 태감들이 조사 중이옵니다. 황후께서 썩 내켜 하지 않으신 듯했으나 황족과 관련된 일이라 별말 없이 조사를 허락하신 것으로 아옵니다.”
“동궁은?”
“동궁의 후궁들은 태자께서 조사하셨습니다. 전각 안으로 드시지 않으셨으나 전하께서 주위를 비우시고, 전하의 허락 하에 동궁으로 든 영호대 무관들이 바깥을, 금당대 궁인이나 해당 전각의 바깥일을 맡고 있는 궁인들이 내실을 조사한 것으로 아옵니다. 동궁 조사가 범위에 비해 너무 빨리 처리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황후전과 태자비전처럼 비우고 살펴야 하는 게 아니냐고들 했답니다. 그곳 말고도 살필 곳이 아직도 산더미일 것입니다. 황궁이 워낙 크고 넓어 조사가 쉽지 않은 듯합니다. 범인이 아이를 조사 범위를 피해 이동하여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나를 고발한 이는 어떻게 하고 있다던가.”
“그는 비전하께서 고발하신 내용을 조사 받느라 잃은 아이를 걱정할 여력이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종종 뜬금없이 나가게 해 달라 청하는 모양이지만, 왕야께서 들어주실 분이 아니지요.”
등평은 최대한 성심껏 답했다.
“등 태감.”
“예.”
“사사로운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니 숨김없이 말해 주기를 바라네. 요즘 해원과 융각은 어떠한가?”
황후는 싫든 좋든 자신의 궁을 비워 주었다. 어느 정도 염려를 놓아도 될 것 같았다. 그에 반해 넓은 데에 비해 들일 수 인원이 여의치 않아 빠르게 조사했다는 동궁 후궁이 신경 쓰였다.
“해원은 별고 없습니다. 융각은…….”
등평이 조금 주저했다.
“융각은?”
“융각으로 나가는 궁인들은 무척 괴로운 듯합니다. 맹봉의가 전각 안으로 궁인들을 들이려 하지 않고, 드나드는 궁인들의 얼굴조차 안 보려 하는데다, 툭하면 소리를 높이고 기물을 망가트려서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언제부터 그랬다던가.”
“융각주야 소훈일 때나 봉의일 때나 한결같은 것으로 아옵니다. 봉의가 된 후로 사람들을 아예 만나지 않고, 출입도 일체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등평이 슬쩍 구긴 낯으로 말했다.
“융각.”
용아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태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깊은 밤이었다. 용아가 어둠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뭔가 알 듯 말 듯했다. 밤이 지나고, 다시 시간이 흐르면 더 좋지 않을 터였다.
“맹씨는 대귀족 출신이라지.”
“그러하옵니다.”
“융각으로 가야겠다.”
용아가 어둠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융, 융각에 말씀이십니까?”
태감과 궁인들의 얼굴에 곤란함이 떠올랐다. 태자가 없는 상황에서 태자비가 금당대를 떠나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고, 따로 명받은 바도 없었다.
“사건을 잘 아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지 않겠나.”
“하…… 하오나…….”
“범인 같지는 않아. 하지만 그냥 지나치는 것은 아닌 듯해. 어제오늘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느낀 것인데 같은 이야기도 한 사람에게 듣는 것과 두 사람에게 듣는 것이 다르더군. 그러니 가서 물어라도 보아야겠다. 등평이 나를 따라가 주는 것인가?”
용아가 태감을 향해 말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전하께 말을 전해야 한다면 사람을 보내고, 가세.”
“명을 따르옵니다.”
어둠을 향해 걸어가는 용아의 곁으로 등평과 모장이 재빨리 붙어 섰다. 태자비의 뒤로 영화대와 금당대의 궁인들이 따라붙었다. 금당대에 남아 있을 궁인과 태자를 찾아가 상황을 전할 궁인만 남아 떠나는 일행을 바라봤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태자비 일행을 보던 궁인들도 곧 각자 제 할 일을 찾아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