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P절갠
九
순식간에 여름의 끝이었다. 태자와 태자비는 기나긴 여름 두 달간 아홉 차례나 합방례를 치렀다. 정식 합방례가 그토록 빈번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남짓 있을까 말까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모든 합방례는 첫 합방례처럼 정중하였다.
첫 합방부터 두 번째 합방까지는 열흘이 넘는 휴지기가 있었으나, 합방례가 이어짐에 따라 아흐레, 이레, 나흘, 하루로 점점 간격이 좁혀져 갔다. 합방을 한 바로 이튿날 합방하라는 황명이 내리기도 했다.
“…….”
용아는 힐끗, 시선을 올려 옆을 걷고 있는 남자를 살폈다. 태자는 침상에 앉아 그를 기다리는 자신을 하루걸러 마주할 때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기는 했지만, 불편하거나 싫어하거나, 부정적인 기색을 표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이 사나운 기색을 퍼트렸다.
윤제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전하.”
황후는 태자가 황족의 위엄을 보여 준 후 몇 번 와병을 이유로 문안을 피했다. 윤제는 계속해서 문안을 거부했다. 그것은 흡사 무력시위였다. 정천궁 석계단을 오르면서부터 황족의 드높은 권능을 걸음걸음마다 표출하는 태자의 행동에 황후는 다시 혼비백산 보좌를 떠났다.
황후를 떨쳐 내는 태자의 위엄 어린 걸음은 며칠이나 이어졌다.
공식적으로 황후의 위(位)에 있는 이에게 태자가 그렇게 구는 것은 무엄한 일이었다. 용아의 책하는 말에, 윤제는 칼 들고 목을 치려고 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보기 싫으니 가 버리게 하는 게 무어가 문제냐 차분한 얼굴로 되받아쳤다. 남자는 침착한 얼굴로 치기 가득한 행위가 더없이 인자한 아량이라는 듯 굴었다.
결국 황후는 다시 와병을 핑계로 문안을 피했다.
태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의심이 많은 이였다. 어쩌면 그저 성격이 나쁜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정천궁 석계를 오를 때마다 태감에게 황후는? 이라는 의문이 담긴 시선을 건넸다. 황후께서는 계시지 않다, 라는 답을 듣고도 반드시 황족의 위엄을 과시한 후에야 정천궁 문 안으로 들었다.
윤제의 성격 나쁜 행위는 황제의 심기를 거슬렀다.
‘이놈! 없다지 않아!?’
석계를 오르는 태자의 위엄 서린 걸음에 황제가 그보다 더한 위엄이 실린 노성을 내뱉었다. 안으로 든 태자에게 황제는 뭔가 짚이는 대로 던지려다 용아를 잠시 보고는 악당 같은 미소를 건네며 하명하셨다.
‘태자와 태자비는 황후가 와병 중이라 하니 자식 된 도리로 직접 찾아 인사드리라.’
여름의 끝임에도 아직 여름 한가운데인 것처럼 볕이 강렬한 아침이었다. 새벽이 겨우 지난 무척 이른 아침에도, 태자의 의복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다. 아무리 날이 더워도 손등을 다 가리는 우아한 상의를 흩트리는 법 없는 남자가 팔을 둥둥 걷으며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쉬다가 한숨을 후욱 내뱉었다.
“내가, 왜.”
고아한 기색으로 황후전을 바라보던 사내가 사납게 웃으며 툭 던지듯 말했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섰다. 돌아선 남자가 긴 다리로 잠깐 사이에 저 멀리로 걸어갔다. 남들보다 몇 배는 빠른 남자의 속도에 용아가 화들짝 놀라며 바삐 따라붙었다.
“전하!”
용아의 손이 윤제의 팔을 건드리는 것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제 팔을 붙잡으려는 손을 윤제가 유려한 움직임으로 낚아챘다. 손이 붙들린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 때, 용아는 남자의 어깨에 들쳐 올려졌다.
갑자기 시야가 우뚝 높아졌다.
용아가 태자를 말려 주기를 바라며 지켜보던 궁인들이 다급히 소리를 내질렀다.
“전하!”
“비전하!”
등우가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치며 달렸다. 모장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윤제가 어깨에 들쳐 올린 용아를 단단히 쥐며 스윽 돌아보았다. 궁인들을 여유롭게 돌아보는 태자의 모습은 잘생긴 납치범 같았다.
등우, 등평, 등섭이 안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태자의 사지를 붙들어서라도 말리려는 듯했다. 허공에서 갈급한 손짓을 허우적대는 모장과 영화대 궁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태자비를 끌어내려 빼돌리려는 모양새였다.
윤제가 피식 웃음을 토하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저 녀석들 나를 만만히 봐.”
“이게 무슨 짓입니까. 딴소리 말고 내려 주세요, 윤공자 형님.”
용아가 온몸을 버둥거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남자의 얼굴을 밀치려 한 손만 도리어 붙들려 제압당했다. 허리를 안은 팔은 굳건하기만 했다. 아쉬울 때 밖에서 듣는 귀가 있어도 윤공자 형님을 찾는 용아의 태도에 윤제가 다시 웃음을 퍼트렸다.
웃음을 머금은 입술이 잘난 체를 하는 것처럼 으쓱 오르내렸다.
“전하!”
“비전하!”
태자를 향해 애타게 소리치며 다가오던 태감과 궁녀가 우르르 멈추었다. 포식자를 앞에 둔 가련한 초식동물처럼 발길을 급히 물리는 궁인들을 보고서 용아는 알아차렸다.
“윤공자 형님!”
“귀에 대고 소리치지 마라.”
“윤제 형!”
남자의 외면하는 뒤통수에 대고 용아가 거듭 소리쳤다.
“전하! 비전하를 내려놓으소서!”
“비전하!”
궁인들이 피라도 토할 기세로 소리를 높였다.
“모두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윤제가 악당처럼 가련한 이들을 을러댔다.
“무엇하시는 겁니까.”
용아는 남자의 어깨에 걸린 채라 얼굴로 피가 몰려 괴로운 와중에도 남자의 못된 작태에 대해 어깃장을 놓았다. 윤제는 황족의 위엄 따위 내버린 듯했다.
“무엇하긴. 너를 내려놓으래. 던질까?”
앞의 두 말은 용아에게, 마지막 말은 궁인들에게 건넨 윤제가 어깨 위의 태자비를 내동댕이치려는 시늉을 했다.
“악, 전하! 그러면 천벌 받으실 것입니다!”
“평생 홀아비가 되실 작정입니까!”
“비전하, 깨무십시오!”
“비전하!”
궁인들이 제각각 소리를 내질렀다. 금당대 태감들은 드물게 주인을 협박했고, 제 주인의 귀나 옆얼굴이나 뒤통수를 물어뜯어 달라 태자비에게 부탁했다. 영화대의 궁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무슨 생각인지 태자가 던지면 몸을 던져서 주인을 받아 내겠다는 몸짓을 해 보였다.
그러나 태자를 제외한 이중 가장 답이 없는 소리를 내지르건 태자비였다.
“던지십시오!”
용아는 자신을 외면하는 뒤통수에 대고 패기만만하게 외쳤다. 태자를 향해 기세 좋게 악다구니를 쓰며 덤벼들 것처럼 구는 궁인들을 못된 얼굴로 보며 가소로워 하던 윤제가 뒤통수에서 울리는 외침에 움직임을 멈췄다.
“용아.”
남자의 부름에 용아가 호기롭게 말했다.
“던지라구요!”
“내가 너를 어떻게 던져. 왜 던져. 미쳤느냐.”
방금 전 태자비를 던지겠노라 협박을 하던 남자가 무섭게 정색하며 차가운 말을 쏟아 냈다. 악덕한 협박을 한 것은 사내인데, 냉혈한을 다 보았다는 얼굴로 따지는 윤제의 태도에 용아는 순간 잘못한 사람처럼 머뭇댔다.
“윤, 윤제 형이 던진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태자의 험악한 기세에 태감과 궁녀들은 기겁하며 물러나야 했다. 태자에게 붙잡혀 있는 태자비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러나던 궁인들은 태자가 그의 어깨에 올린 태자비와 다투는 걸 유심히 보았다. 등우는 움찔움찔하며 안절부절못했고, 등평은 눈빛으로 ‘비전하, 지금입니다! 귀든 볼이든 무세요! 물어뜯어요!’라는 위험한 응원을 보냈다.
“윤제 형이…….”
“저 녀석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잖아.”
“저들이요?”
“나를 붙잡으려 하잖아. 나한테 손을 대려고. 될 것 같으냐.”
윤제의 오만한 말에 용아가 잠잠해졌다.
“…….”
귓가가 고요해진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남자가 잠자코 그를 지켜보는 궁인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려 했다. 궁인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태자가 하는 짓은 못된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보다 못했다. 더 유치했다.
황족이란.
용아는 말없이 표정으로만 투덜댔다.
“전하!”
“비전하!”
태자의 유치한 태도에도 궁인들은 제 할 일에만 집중했다. 태자를 말리려 했고, 태자비를 어떻게든 구출하고자 모색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용아.”
“예.”
“도망가자.”
방금까지 못된 짓을 하던 사내가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용아가 무심한 얼굴로 지금 이것은 누가 보아도 납치임을 알려 주었다.
“도망이라니요.”
용아의 싸늘한 말에도 윤제는 개의치 않았다.
“야시장 가 보고 싶지 않느냐.”
귓가에 울리는 저음이 유혹적이었다.
가 보고 싶다.
태어난 이례로 쭉 답답한 내원에서 커 온 용아였다. 내원을 나서게 됐을 땐 황궁 동궁전에 몸담게 돼 더욱 드나들기가 어려워졌다. 이후로는 황궁 내궁에 갇히게 될 터였다. 그러면 더욱더 바깥으로 나갈 일이 없었다. 무심하던 얼굴에 방황이 떠올랐다.
“…….”
시선을 돌리는 용아와 옆을 보고 있던 윤제의 시선이 마주쳤다.
“황도보다 놀기는 석주 시가지가 더욱 좋다.”
“……석주요?”
“석주 중심가는 밤마다 번화하고, 석주 외곽 만경에는 커다란 고호가 있어 경관이 정말 수려하지. 나무 배 타고 호수 둘레를 따라 돌면 시원하고 좋다. 고호 앞에 유명한 청하객잔도 있지. 나에게 납치당해 가는 것보다, 나와 같이 가 주는 게 너에게도 더 좋은 거 아니냐.”
“뭐…….”
용아는 넘어갈 듯 말 듯 했다.
“가는 길에 거리가 있으니 말도 탈 수 있잖아.”
사실 거의 다 넘어갔다.
“그럴까요…….”
용아는 스스로 귀가 얇은 유형은 아니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태어난 이후부터 계속 감금에 가깝게 살아온 탓에 밖으로 놀러 가자는 말에 지나치게 유약하다 싶었다.
“갈까.”
윤제가 곤란하게 재차 물었다.
“……네.”
용아의 대답에 남자가 호쾌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가자.”
성큼한 걸음 뒤로 애달픈 외침이 솟았다.
“전하!”
“비전하!”
궁인들의 애통함은 말로 다하기 어려웠다. 눈앞에서 도망가는 걸 뻔히 보며 다가갈 수가 없었다. 답답해 속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왜인지 억울하고 원통했다. 그래서 더욱 소리를 높였다. 싫다고, 냉랭한 얼굴로 태자를 책하던 태자비가 갑자기 막으려던 몸짓을 그만둔 것이 참으로 염려스러웠다. 착한 아이를 나쁜 악당이 물들이는 과정을 손도 못 쓰고 두 눈 뜨고 지켜보는 듯한 암담함이 밀려왔다.
태자비를 어깨에 둘러메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태자의 한가한 뒷등이 무척 얄미웠다.
황가 적통은 위험한 일족이었다. 모든 이를 무력하게 만드는 난감한 존재였다. 황궁 마장에 들어선 윤제는 ‘비켜라’ 한마디로 모두를 도망치게 했다. 말로만 비켜서게 한 것은 아닐 터였다. 그렇게 태자가 말 한 마리를 탈취해 태자비를 납치해 홀연히 가 버렸다.
정천궁 안이 고요하게 들썩였다. 좌첨의 다급한 움직임을 본 궁인들이 재빨리 앞을 틔워 주었다. 좌공공의 뒤로 등우와 모장이 뒤따랐다.
“폐하!”
좌첨의 황급한 부름에 서탁 앞에 앉아 있던 황제가 문을 바라봤다.
“들어오라.”
휙 열리는 비단 휘장 안으로 좌공공과 등우, 모장이 들었다. 좌첨이 데리고 온 이들의 면면을 아는 황제가 미묘한 시선을 공공에게 보냈다.
“폐하. 태자께서 태자비를 납치하여 도망하셨다 합니다!”
“뭐라!”
황제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거칠게 내리며 소리 높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태자였다면 십중팔구 주위를 도망치게 했을 황족의 위엄이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황제의 용안이 깊게 구겨졌고, 방 안에 침묵이 휘몰아쳤다. 최소 두어 번 뛰쳐나갔다 들어올 것을 예상한 등우는 황제의 절제력에 감탄하며 죄를 청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 노비의 무능을 벌하여 주소서.”
“송구하옵니다, 폐하.”
웅크리고 엎드려 있는 둘의 옆에 허리를 잔뜩 굽히고 선 좌첨이 황제를 유심히 살폈다. 황제가 노기를 천천히 내리누르고 앞을 향해 말했다.
“태자가 마음먹고 도망하고자 하면 너희가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황제의 말을 다 들은 좌첨이 재빨리 무릎을 굽혔다.
“폐하. 태자께서 황궁 임시 마장을 급습하시어 주위를 물리고 태자비 전하의 산융마를 가져가셨다 하옵니다. 산융마의 용모가 일반의 눈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하니, 뒤따르며 찾으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쫓을까요?”
좌첨의 말에 순간 재차 분노하였던 황제가 짧은 숨을 내뱉었다.
“아니다.”
좌첨이 깊이 윗몸을 낮추며 아뢰었다.
“혹여 몰라 말 드나드는 곳마다 귀인이 드시면 연통하라 전해 두었습니다.”
“잘했다. 일어나라. 너희도 일어나거라. 태자와 태자비 둘만 갔다고?”
황제의 너그러움에 세 사람은 몸을 일으키며 짧은 감사의 예를 연신 올렸다.
“그러하옵니다.”
좌첨이 재빨리 물음에 답을 올렸다.
“됐다, 그럼.”
황제께 어떻게 고하고 얼마나 무섭게 혼이 날까 잔뜩 긴장했던 것에 비하면 별것 없는 반응이었다. 황제가 다시 찻잔을 들었다. 좌공공이 등우와 모장에게 눈짓으로 물러날 것을 명했다. 둘은 숙인 머리를 더 낮추는 것으로 예를 표하고 뒷걸음질하다 몸을 돌려 숨쉬기조차 어려운 방을 유려하게 물러갔다. 두 사람이 떠나는 걸 확인한 후에야 좌첨이 황제의 곁으로 다가가 고했다.
“황후전 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합니다.”
“황후는?”
“뵙지 않고 가셨다 합니다.”
공공의 우아한 표현에 황제가 입술을 비틀었다.
“가기는, 도망친 게지!”
황제가 손 안의 찻잔을 내던질 것처럼 거칠게 팔을 내저었다. 좌공공이 황제의 등 뒤로 향하는 옆으로 몸을 옮기며 사납게 허공을 가르려는 손에서 찻잔을 챙겼다.
성질을 부려 분노를 풀려던 것을 실패한 황제가 좌첨을 노려봤다.
“아주 귀한 것이옵니다.”
찻잔을 가져간 공공이 예의 바른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가 괜히 심술을 부려 차탁을 서탁 아래로 쳐 내려 하자, 그보다 빨리 좌공공이 찻잔과 한 쌍인 차탁을 챙겨갔다.
“너.”
“큰일이옵니다. 태자께서 점점 폐하의 젊을 적을 닮아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저러시다 왕공들이나 종친과 말을 주고받다 뜻이 통하지 않는다 황족 배에 칼을 찔러 넣으시면 어쩌지요. 황족은 짧고 비루한 단도에 배 좀 뚫린다고 죽지 않는다,까지 말하시면 아주…… 큰일 아니옵니까.”
좌공공의 시선은 비켜나 있었으나 몸과 얼굴은 황제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 나를 욕하는 것이냐.”
“소인이요?”
“짐이 과거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왕공 배에 칼 쑤셔 박은 게 잘못되었다는 게야?”
황제가 당연한 소릴 뻔뻔하게 물었다.
“잘하셨다 하기는 어렵지 않겠사옵니까.”
“좌첨, 네가 속으로 나를 그리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때 내게 경탄할 만큼 결단력이 높으시다, 아첨한 게 누구냐.”
“소인이 그랬습니다. 허나 속으로라니요. 폐하. 그때에도 결단력이 높으시다 말하며 왕공들에게 그리 폭거를 휘두르시는 게 훗날 어떻게 돌아올지 염려 되온다, 직접 말씀 올리지 않았사옵니까. 특히 태자께서 따를 이는 폐하뿐인데 그를 보고 따르실까 폐하께서도 걱정된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자식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줄 아느냐!?”
황제가 당신도 억울하다는 듯 씩씩대며 핑계를 늘어놨다.
“태자께서 폐하의 엄한 훈육 덕분에 이따금 성격을 누르지 못해 주위를 떨치는 것 외에는 크게 걱정할 것이 없었사 온데, 요즘 아주 삐뚤어지셨습니다. 오늘도 보십시오. 여태껏 폐하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궁을 나서거나, 고하는 이 하나 보내지 않고 궁을 나서신 적이 없사 온데, 보란 듯이 궁인들 앞에서 다가오지 못하게 하시고 가 버리셨지 않습니까. 아주…….”
황제를 향하는 태감의 얼굴에 전하지 못하는 말이 실려 있었다.
아주, 폐하와 똑같사옵니다.
황제가 팔을 휙 떨쳐 팔걸이에 걸며 툴툴댔다.
“짐의 아들이 짐을 닮지 누굴 닮겠느냐.”
“그렇지요.”
“헌데 둘이 갔는데 말은 한 마리만 사라진 게 맞느냐. 새아가가 말을 잘 탄다 하였는데? 궁인들 보기에 납치로 보여도 태자비의 동의 없이 데려갈 수가 있나. 태자비 동의가 없다면 꽁꽁 묶어 두기라도 해야 하는데, 설마 그런 게야?!”
황제는 문제의 근원보다 현안에 시선을 돌렸다.
“산융마가 가장 빠르기에 그를 탈취한 것 아니겠습니까. 비전하를 묶지는 않았다 합니다.”
“놀러 가자 하였겠지.”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좌첨의 동의에 황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껏 이런 일이 없었거늘. 곤란하기는 하구나. 자식 키우며 속 썩는 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스물여섯은 질풍노도를 겪기에 너무 늙은 것 아니냐. 딱히 늦되지도 않은 아이인데, 계후의 필요성을 모르는 것도 아닐 녀석이 눈앞에 있는 것조차 못 견뎌 하다니. 잘못된 것이 있다고 눈에 걸리는 대로 죄를 묻고 벌을 내릴 수 없다는 걸 알지 않은가. 그 녀석 잡아와 배에 칼 찔러 넣고 혼뜨검을 내줄까?”
황제가 무서운 말을 유쾌하게 내뱉었다.
“황후마마를 경원시하는 것은 당분간 눈감아 주시지요.”
“태자비를 납치한 것은?”
“태자께서 어려서부터 말 잘 듣는 아들이셨으니 이제야 반항기에 드셨나 보다 생각해 주시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두 분 다 황궁과 타인의 시야에 갇힌 채 커 오셨으니 잠깐씩 외유하시는 것을 나무랄 수만은 없겠지요.”
좌첨의 말에 황제가 태만하게 몸을 기울였다.
“휴우. 주아 그것이 짐한테 애물단지를 맡겨 놓고 저 혼자 가 버렸다. 내게 내 팔에 둘, 제 팔에 둘 해서 아이 넷 낳아서 화목한 황가를 만들자 그리 사기를 쳐 놓고 좀 아프다고 시름시름하더니 가 버렸지. 넷이 아니라 하나라 다행인가. 넷이 사방에서 사고 치면 내가 혼자 감당하기 힘들 까 봐 한 놈만 낳고 그리 튄 거겠지.”
“보고 싶으십니까.”
“하나도 안 보고 싶다. 못된 태자 놈은 어찌 제 어미는 하나도 닮질 않았단 말이야. ……그 녀석 다음 합방일은 기억하고 있겠지? 새아가 몰래 태자한테 서신 보낼까.”
황제의 말이 이리저리 튀었다. 지존의 물음에 좌첨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었다. 태감이 엄숙한 얼굴로 답했다.
“태자께서 기억하실 겁니다.”
“지키겠지?”
황제의 말에 좌첨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그럼요. 당연히 지키셔야지요.”
“그럼, 됐다.”
정천궁 깊은 곳에서 동의를 구하는 간절한 시선과 격한 끄덕임이 오갔다.
문 너머에서 정중한 소리가 울렸다.
“아직 멀었느냐.”
용아는 좁은 공간에서 조용히 애를 쓰며 자신이 곱게 자랐음을 실감했다. 고귀하게 태어나 손발이 되어 주는 이들에게 폐 안 끼치고 살았다 자부해 온 것이 겨우 환복하는 것 하나에서 전부 허사임을 깨달았다. 탈의야 그럭저럭 해냈지만 익숙하지 않은 중경 복식으로 갈아입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궁중 복식도 아니고 고작 무복을 입는 것인데도 그랬다.
지금껏 스스로 잘해 왔다 여긴 것은 몽땅 착각이었다. 쉬운 건 자신이, 어려운 건 수족이 되어 주는 이들이 능숙하게 대신 해 준 덕에 다 제가 한 줄 알았던 것 같았다.
“금방 나가겠습니다.”
“용아.”
문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잊을 만하면 날아들었다. 용아와 다르게, 군영에 장기간 머물기도 한 태자는 스스로 옷을 척척 갈아입는 듯했다.
태자가 군영에 머물 때 곁에서 도울 태감이나 궁인, 군영 내 시위를 따로 대동하지 않는 것이 황족 아닌 조정 대신들의 불만이라 알려져 있었다. 조정의 그러한 염려를 가장한 불만을 남자는 웃는 얼굴로 내게 집착하는 시선이 없으니 좋기만 하다, 능글맞게 쳐 낸다고 했다.
귀하게 보살핌 받는다는 것이 반드시 좋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때로 당사자를 서글픈 곤혹스러움으로 밀어 넣기도 했다.
용아는 어느 방향으로 매야 할지 애매한 매듭을 이렇게 매었다 저렇게 매었다 하며 답했다.
“예.”
“형이 입혀 줄까.”
사내의 헛소리가 정중하게 울렸다.
“저리 가십시오!”
용아는 결정을 내리고 매듭들을 마무리했다.
“부끄러워 그러는 거냐.”
황도 수비군 별기대 율천영의 중랑장 금시빈은 중경 금씨가 가주의 사남으로 손색없는 대귀족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굳건히 닫힌 문을 향해 시시덕거리는 말을 던지는 남자의 드높은 혈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전하.”
황성을 수비하는 별기대는 특이하게도 황가와 같은 힘을 가진 이와 힘을 가지지 않은 이가 비슷한 비율로 구성되어 있었다. 직위를 내릴 때 황족의 기이한 힘과 무관하게 임명된 탓이었다. 별기대가 영호대와 마찬가지로 황족 직속 부대라는 것을 고려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규칙이라 할 수 있었다.
“뭐?”
금시빈의 부름에 윤제가 불퉁한 기색으로 옆을 돌아봤다. 남자의 부루퉁한 기세에 금시빈이 호칭을 얼른 바꾸었다.
“윤공자님.”
“왜.”
윤제의 목소리가 대번 평연해졌다. 남자가 손을 내어 보였다. 금시빈이 품에 가지고 온 별기대 소속임을 알려 주는 패를 꺼내며 말을 끌었다.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윤제가 웃는 얼굴로 금시빈의 손에서 패를 홱 채갔다.
“어, 간다.”
영호대 수장인 언준의 말에 따르면 태자는 군영에 오면 사람이 껄렁하게 변한다고 했다. 누구나 군영으로 향하며 패기가 만만해지니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그러나 황궁 안 태자와 군영 안 태자는 모르는 이가 보면 전혀 다른 사람 수준이라고 하니 궁금하기는 했다.
“그것은 왜…….”
금시빈은 황족이 별기대의 구성을 이렇게 한 것은 보통 사람이 만만하여 다루기 편해서가 아닐까 늘 의심해 왔다. 태자의 손으로 옮겨간 패를 다시 가져오고 싶다는 듯 그가 손을 꾸물거리며 말했다. 윤제가 품으로 금시빈에게서 빼앗은 패를 찔러 넣으며 당당히 말했다.
“필요해.”
물론 필요하니 가져갔을 것이다.
“꼭 돌려주셔야 합니다.”
금시빈은 괜한 말 말고 해야 할 말만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지.”
윤제가 곧장 답했다. 단호한 대답인데 왜인지 썩 믿음이 가지 않았다. 금시빈의 의혹 가득한 시선에 윤제가 위협적인 표정을 건네 주위를 떨치려 했다.
“저, 안에 계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태자를 통한 것이라 하나, 별기대 무관의 패를 민간인이 사용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기색을 건넸다. 윤제가 버릇없는 애처럼 입술을 비틀었다.
“몰라도 된다.”
“전하.”
금시빈의 방심한 부름에 태자가 다시 사나운 얼굴을 했다.
“뭐?”
금시빈은 속으로 꿍얼대며 호칭을 바꾸었다.
“윤공자님.”
“알 것 없다잖아.”
금시빈의 거듭된 물음에 윤제가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태자와 손님이 영 안으로 들어올 때 앞을 지킨 호위들의 말로는 황족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금시빈이 보았을 때 오묘한 분위기가 있는 손님은 중경에서 볼 수 있는 황족과는 달랐다.
황족과 손님 양쪽 모두 태어난 순간부터 주위의 온갖 보살핌과 치장 속에서 살아와 손끝에 거스름 하나 없는 완벽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으나, 손님의 얼굴은 황족의 인상과 확연히 차이점이 있었다.
그렇다고 황족 일가의 내원에 기거하는 귀하신 분도 아닌 것 같았다. 밖으로 좀처럼 나서지 않는 특정 황족은 황족의 힘 아래에 굴종할 수밖에 없는 자신과 힘의 논리 앞에서 같은 입장이었다. 황족이 위엄을 퍼트릴 때 황족끼리 주고받는 특유의 불쾌해하는 기색이 손님에게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태자에 비견될 정도로 잘 보필 받은 분위기가 역력했다.
누구지.
금시빈은 궁금증과 걱정으로 태자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태자가 혹여 귀한 집 자제를 꼬드겨 왔다면 다행이나, 협박해 왔거나 납치해 왔다면 어떻게 해서든 손님의 신변을 보호해 주어야 했다.
“납치해 온 것은 아니지요?”
금시빈이 고민 끝에 무엄하게 말했다.
“뭐, 인마.”
윤제가 별기대 중랑장을 향해 으르렁댔다.
“인마가 뭡니까.”
태자는 현재 자칭 군의 특직을 맡고 있는 외부 인사를 가장하고 있었다. 특별한 손님이라 해도 중랑장에게 인마라고 부르는 이는 없었다. 태자라 해도 그리 부르지는 않을 테지만 여하간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하시라는 뜻의 눈짓을 금시빈이 부지런히 보냈다.
“너 여기서 계속 얼쩡거리는 거, 나 가고 나면 황궁에 곧바로 일러바치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 안 알려 줄 거니 썩 꺼져라.”
“꺼지라니요. 말씀을 차암…… 정말 누구십니까. 납치하셨습니까, 아닙니까. 그것만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그리고 저 말은 뭐고요. 진짜 여기 마장에 넣어 둬도 되는 겁니까.”
금시빈이 태자를 닦달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무방비하게 밖으로 나오던 용아가 멈칫했다. 열린 문 너머에 서 있는 잘생긴 미인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
긴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무늬 없는 흑의를 입은 윤제는 평소와 다른 인상을 주었다. 항상 올려 고정하고 있던 머리칼을 내리자, 남자가 평소 지니고 있던 날 선 기운이 누그러들고 얼굴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왔느냐.”
남자의 물음에 용아가 새카만 머리칼과 대조되는 수려한 이목구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조금 멍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밖으로 나온 어린 총각의 순진한 얼굴을 본 금시빈은 생각했다.
꼬드겨서 왔구만.
태자는 처음 알아 온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잘난 얼굴로 수많은 어려운 상황을 웃음 한 방으로 때운 전과가 있었다. 사내의 오만한 성정과 거만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혈통을 알고 있음에도 그가 이따금 친한 척 굴며 본인 얼굴로 때우려 들면 자꾸만 넘어가 버릴까 혹하게 되었다.
“말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서로 합의가 된 상태라면 금시빈이 신경 쓸 바 아니었다.
“가지.”
금시빈이 안내한 곳에 잘생긴 군마 두 마리가 서 있었다. 금시빈은 눈치껏 낯선 공자에게 먼저 말을 고를 선택권을 주었다. 둘 중 아주 순한 말 쪽으로 은근히 공자를 몰고 간 것은 그가 친절한 성품이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귀찮은 건 되도록 사양하고 싶었다. 괜히 말이 무섭네, 푸릉거리네 겁먹고 물러나면 그와 그의 수하들만 고생이었다.
최근 언준의 반응으로 보아 낯선 공자는 후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일 터다.
언준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궁전 후궁에 대해 말이 나오면 질색했다. 태자께서 후궁들을 치워 버리셨을 땐 잘하신 일이라 극찬하며 아예 폐궁으로 결정 내리지 않은 걸 아쉬워까지 하였다. 그런 언준이 며칠 전 왔을 때 별말 없는 걸 보아 황궁에 파란을 일으킬 무서운 공자는 아니지 싶었다.
금시빈이 은근히 권한 말을 두드리며 용아가 칭찬의 말을 건넸다.
“말이 아주 순합니다.”
“송구합니다.”
권력자들의 곁에 오래 있어 온 만큼 금시빈의 처신은 훌륭했다.
“그렇지만 본 공자는 고집 있는 성격을 좋아합니다.”
웃는 얼굴로 애써 준 이에게 고마움을 건넨 용아가 가벼운 몸짓으로 옆의 말에 올랐다. 두 말은 기승에 있어 큰 차이는 없었다. 그저 지금 용아가 오른 말은 보통의 말답게 금시빈이 권한 말만큼 순하지 않을 뿐이었다. 금시빈은 낯선 공자가 말을 탈 줄 아는 청년이구나, 생각하며 웃음으로 답했다.
갈기가 내리는 주위를 따라 흐릿한 얼룩무늬가 있는 말에 오른 용아가 처음 타 본 말을 다독여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윤제도 순한 말에 올랐다.
말에 오른 둘을 향해 금시빈이 말을 건넸다.
“하온데.”
그들이 타고 온 말을 군영 마장에 넣어도 되냐는 물음을 재차 하려 것이었다. 군영 마장에 있는 군마들은 성격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순이 말입니까.”
군마를 점검하던 용아가 아는 체를 해 왔다.
“…….”
용아의 말에 금시빈은 눈치 없는 자처럼 예?! 하고 놀랄 뻔했다.
남순.
정결한 얼굴이 내뱉은 몹시도 수더분한 이름에 헛기침을 하고 싶은 표정이 된 태자를 보고서 금시빈은 자신의 의심이 사실임을 눈치챘다. 태자와 손님이 타고 온 말은 앞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헌앙한 산융마였다. 산융마 중에도 혈통이 좋은지 체고가 높고, 털빛이 적갈색으로 비교적 흔한 빛깔임에도 윤기의 광도가 달라 보통 말과 자태부터 달랐다. 만약 후광이란 게 있다면 후광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헌앙한 말의 이름은, 남순이었다.
“두 분께서 타고 온 말…….”
금시빈은 믿을 수가 없어서 어물어물 말을 건네었다.
“예. 그 녀석 이름이 남순입니다. 본래 남순희였는데 윤공자 형님이 그것만은 안 된다고 하도 뭐라고 하셔서 앞에 두 글자만 남겼습니다. 남순이는 아무 데서나 다 잘 지냅니다. 괴롭힘 당할 것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말 괴롭히는 녀석은 아닌데 혹여 모르니 살펴봐 주시고 못된 짓하면 격리해 두셔도 괜찮습니다.”
“……예, 공자.”
남순이의 본명이랄지, 본명이 될 뻔한 걸 알게 된 금시빈은 약간의 침묵 후에 답했다. 용아가 마저 말을 살피는 동안 윤제가 몸을 옆으로 기울여 금시빈에게 말했다.
“남순희가 왜 남순희인 줄 아느냐.”
“왜입니까.”
“태어난 고향보다 남쪽에서 내려와 태어난 순희라서. 남순희다. 희자 떼어 버리는 데 얼마나 싸운 줄 아느냐. 남순이 아우는 춘희다. 남순이에 맞춰 남춘이 한다는 거 말리느라 얼마나 진을 뺐는지. 이만 가 볼 테니 뒤에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말 잘 해 둬라.”
옆으로 기울였던 몸을 바르게 하며 윤제가 험악하게 웃었다.
“예, 전하.”
그가 말 머리를 돌려 용아에게 다가갔다.
“가자.”
“예, 윤공자 형님.”
태자의 말에 대답하는 얼굴은 예의 반듯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오늘에야말로 진정한 기승 실력을 겨룰 수 있겠다. 산융마 효과를 떼어 내고 달리는 기마 실력이 네 진신 실력 아니겠느냐. 항상 이 형이 불리한 승부를 해 왔다 할 수 있지.”
“가시죠.”
윤제의 너스레에 용아가 무뚝뚝한 시선만 돌려보냈다.
“가 보마. 가, ……자.”
윤제는 바깥으로 배웅을 하러 온 이들에게 인사를 내리고, 말을 달리게 하며 용아에게도 다시 한 번 출발하자 말하려 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늘 처음 탄 말에 오른 용아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윤제가 달리고 있었으나 용아의 속도가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배웅하러 나온 이들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출렁였다.
“…….”
“…….”
한참 앞서 달려 나가던 용아가 말 머리를 돌려 앞으로 나아간 속도보다 더 빠르게 되돌아왔다.
“어디로 갑니까.”
윤제가 돌아온 용아를 뚱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형이랑 같이 가야지.”
“예.”
이번에는 속도를 맞추어 두 사람이 함께 달려 나갔다. 두 필의 말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빠르게 멀어져 갔다.
태자의 기마술은 군영 안에서도 이름 높았다. 그런데 낯선 공자는 그에 비할 게 아니었다. 떠나는 태자를 배웅하러 나왔던 이들은 엉뚱한 데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와아…….”
감탄하는 이들 사이에서 함께 멍하니 있던 금시빈이 돌아섰다. 남순이를 마장으로 데려가야 했다. 잘생긴 남순이에게로 향하는 금시빈의 머리에 생각이 차례로 흘렀다.
남순이가 공자의 말이었구나.
남순이는 헌앙하고 잘생긴 산융마다. 산융마는 제북 이남에 가지고 있는 이가 몇 없다. 산융마를 가지고 있다 해도 한 마리씩이 전부다. 제북 이남의 산융마는 전부 얼마 전 태자비가 제북에서 가져 온 것이다. 중경 주위에 돌아다니는 산융마는, 산융마 부자인 태자비가 친구로 여기는 왕공 자제에게 하사한 게 대부분이다. 때문에 최근 중경 왕공과 귀족들 사이에서 산융마 친분이라는 부러움이 담긴 투덜대는 신조어가 떠돌고 있다. 아까 온 공자는 산융마를 한 마리 이상 가지고 있다. 최소 두 마리 남순, 춘희. 공자는 사내이고, 태자비도 사내라 알려져 있다.
공자는 태자비이다.
“……!”
금시빈이 걸음을 멈추며 뒤를 휙 돌아봤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입궐해야겠다.”
금시빈이 다급히 말하며 남순이를 조심조심 끌었다. 보통 말이라면 다른 이에게 맡기고 가겠지만 태자비의 산융마였다. 무조건 격리해야 했다. 혹여나 태자비의 산융마가 어디 긁히기라도 하면 그때는 지옥도가 현실에 펼쳐질 테니.
“입궐이요? 갑자기…….”
“태…… 묻지 마. 아무튼 입궐해야겠다. 발 빠르고 은밀한 추적대를…… 붙이면 따라 잡을 수 있을까. 어디로 가는지 방향만이라도?”
“추격하다 윤공자님께 잡히면 수치스러운 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금시빈의 곁에 있던 무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상관을 말렸다. 무관은 소규모로 다닐 때 태자와 꽤 빈번히 동행한 경험이 있는 이었다.
“무슨 꼴을 당하기에? 성공하면 금덩이를 하사받을지도 모른다.”
“우선 추적하면 숨을 안 쉬고 따라붙어도 걸릴 겁니다. 가볍게 붙잡아서 겁주고 몇 대 패고 가면 운이 대단히 좋고, 겁주고 패고 묶어 놓고 가도 괜찮죠. 겁주고 패고 웃으며 협박해서 추격자 스스로 탈의하게 하고 쫓아 보내도 다행인데, 윤공자님이 친히 욕을 하시며 겁준 채로 나무나 트인 대로 구석에 묶어 두고 가면 온 동네에 소문 다 납니다. 쪽팔려서 살겠습니까. 금덩이가 아무리 좋아도 그건 좀…… 저는 싫습니다.”
“사람이 어찌 그러실까.”
“태자께서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획기적인 괴롭힘을 당하게 되니까요. 생각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사람은 거스르는 게 아닙니다.”
“우선 보고만 하고 와야겠다.”
남순이를 가장 좋은 곳에 격리한 금시빈이 계획을 수정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석주는 좋은 곳이었다. 잠깐 말을 달려, 석주에 당도한 둘은 번화가 저자를 쏘다니며 희희낙락하였다. 여정의 행보는 느슨하기만 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멈춰 서서 구경하고, 떠들고, 말을 건네고, 주머니를 털어 필요 없을 게 분명한 것들을 사들였다.
“형이 사 주마.”
윤제는 몇 번이나 한 말을 다시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용아가 웃으며 거절했다.
“형이 사 줄 건데, 그런데 그거 쓸 거냐.”
윤제가 끝에 뭉툭한 나무 조각이 달린 안마봉에 시선을 힐끗 주며 말했다. 그가 값을 치르자마자 용아가 뭉퉁한 나무 조각 안에 자그마한 나무 노리개가 들어 있어 움직이면 착착 소리가 울리는 안마봉으로 감히 태자의 등을 툭툭툭, 두드리며 답했다.
“네.”
착착착 울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읏.”
윤제가 허리를 비틀며 야릇한 소리를 토했다. 순간 주위가 기묘하게 가라앉았다가 술렁였다. 웃으며 신음한 남자를 향해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애초에 남자를 지켜보는 시선이 많았다. 그저 지나만 다녀도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는 얼굴이었다.
황궁 안에야 평생 태자를 모셔 온 이들이거나, 태자의 얼굴을 감히 볼 수 없는 이들이니 지금과 같이 관심이 담긴 노골적인 시선을 보낼 수 없지만, 황궁 밖은 달랐다.
“…….”
윤제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 마라.”
“예.”
“배고프다. 식사하러 가자.”
용아는 마냥 고개만 끄덕였다. 안에 든 노리개 소리가 착착착 나는 안마봉 외에 노리개 없이 안이 꽉 차 있는 나무 조각이 달린 안마봉까지 덤으로 사서 건넨 남자가 용아를 이끌고 말을 맡겨 둔 객점으로 향했다. 객점 일꾼은 말 맡기고 이따 식사하러 오겠다는 윤제에게 머물다 가시는 게 어떠냐, 방이 깨끗하고 훌륭하다 열심히 영업을 했으나 남자는 우선은 말만 맡기고 잠시 후 식사하러 오겠다, 지겨워하는 기색도 없이 몇 번이고 차분히 답했다.
“오셨습니까.”
윤제와 용아가 객점 안으로 들어가자 일꾼이 쪼르르 달려와 맞았다.
“이 층에 자리 있느냐.”
“오르시죠.”
용아는 윤제의 얼굴로 시시각각 쏟아지는 시선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윤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모르는 것은 아닌 듯했다.
“먹고 싶은 것 있느냐.”
점소이를 따라 이 층으로 오르며 윤제가 물었다.
“맛이 일품인 술이―.”
의자에 앉는 손님들을 향해 다시 점소이가 영업에 들려 했다.
“술은 안 돼. 술은 되었다.”
황궁 밖 이들에게 나온 후 내내 관대하기만 하던 윤제가 일꾼의 술 권유만은 곧바로 냉정히 쳐 냈다. 두 번 말 붙일 분위기의 얼굴이 아니었기에 아까 수차례 투숙을 권했던 일꾼이 입을 꾹 다물고 허리를 굽혔다.
“윤공자 형님이 시켜 주십시오.”
용아가 낮춘 목소리로 청했다. 윤제가 주문을 하며 얼굴을 제 쪽으로 기울이며 속삭이는 머리를 슥슥 매만졌다. 어린 아우를 무척이나 어여뻐 하는 모양새였다.
주문을 다 받고 계단을 내려오던 점소이가 얼굴을 갸웃거렸다. 무언가 기묘했다. 객점 일꾼으로 일하며 굽실거린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순식간에 기세를 바꾸어 버리는 손님은 흔치 않았다. 거기다 함께 온 일행도 그랬다. 잘생긴 미인 옆에 정결한 얼굴이 함께 다니니 두 배로 시선을 끌었다. 호칭과 말투로 보아 나이 차가 제법 나는 형제 간 같기도 했지만 시선을 끌 만큼 잘났다는 것 외에 닮은 구석이 없었다.
기묘해.
어느 댁 귀한 자제들인가 의아했다.
객점에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곧바로 고호가 있는 만경으로 향했다. 휴식을 취한 말을 달리자 한달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경, 고호 앞 청하객잔이 유명하다 오며 가며 몇 번이나 들었기에 청하객잔으로 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들었던 대로 청하객잔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고호에 비견될 정도로 대단해 문정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윤제가 사람이 바글바글한 청하객잔의 일꾼을 손짓으로 불러 오게 한 것도 의외였고, 일꾼 손에 쥐여 준 패가 자신에게 나누어 준 것과 별다를 게 없어 아무런 기대도 않았다. 패를 본 일꾼의 안색이 바뀌며 객잔 옆문으로 두 사람을 들이고 기다리라는 말을 건넨 후, 부리나케 움직여 척보아도 주인장처럼 보이는 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윤공자.”
“잘 지내셨소, 화대인.”
“항상 묵으시는 곳으로 준비했습니다, 드시지요.”
“고맙소. 들어가자.”
화대인을 따라 안으로 들며 윤제가 아무 말 말라는 얼굴을 용아에게 건넸다. 주인이 두 사람을 데리고 간 곳은 고호가 한눈에 보이는 별채였다. 객잔과 독립된 건물이라 시끌시끌한 사람 소리가 돌아서는 통로를 기점으로 뚝 끊겼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수고에 감사하오.”
화대인의 배려 가득한 말에 윤제 역시 예의 바르게 답례했다. 금당대 등 태감이 보면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질 만큼 인자한 얼굴이라고, 용아는 생각했다.
“예, 물러가옵니다. 하온데, 옆에 계신 공자님도 함께 머무십니까.”
물러갈 모양새를 취하던 화대인이 점잖게 용아를 소개해 주길 청했다.
“용공자, 청하객잔의 객주이신 화대인이시다. 화대인 용공자요. 이 사람이 어여뻐하는 아우라오.”
“용공자. 귀하신 분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옵니다.”
“화대인 기쁘게 맞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짧은 인사 후에 화대인이 예를 건네고 물러났다. 용아는 눈치껏 윤제를 따라 마주 예를 건넸다. 마주 예를 일일이 건네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황궁 안에서 태자비인 용아가 예를 올릴 상대라 해 봐야 황제, 황후, 태자가 다였다. 왕공과 황족을 대면할 때 먼저 아는 체를 하거나 마주 예를 올리지만, 태자비가 황족을 만날 일은 궁인이 황족을 만나는 것보다 드물었다. 황친이라 해도 먼 방계의 경우에 태자비가 따로 예를 차릴 것 없이 가벼이 끄덕이는 것만으로 충분할 때도 있었다. 여러모로 황궁 밖으로 나온 것은 용아에게 색다른 경험을 주었다.
곧 별채에 두 사람만 남겨졌다.
용아가 질문을 하려고 할 때 윤제가 먼저 말했다.
“황족 티 내면 안 된다.”
“안 된다고요? 아까…… 화대인이 알고 있는 게 아닙니까.”
엄중히 경고하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청하객잔은 천하에 깔린 황궁 사유물 중 하나라, 황족이 실질적인 주인이지만 대대로 객잔 운영을 대신해 주는 이들조차 황족이 실제 주인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나에게 깍듯한 것이야 내가 이곳 실제 주인의 아들이라 생각해서지. 주의해라.”
“예.”
“잠깐 구경하며 쉬어라. 네 방도 골라 두고. 네 새 짐들도 잘 챙겨 둬. 나는 화대인과 이야기 좀 하고 오마.”
윤제가 용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별채를 나섰다. 남자는 여행을 함께하기에 좋은 상대였다. 뭘 잘 몰라 헤매도 답답해하거나 짜증 나 하는 기색도 없었다.
가장 심각한 표현이 찡그린 얼굴로 유심히 보다가 웃음을 터트리는 거였다. 구박하고 화를 내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도록 실컷 웃고 난 후에, 모자람 없이 큰 철부지 도련님을 보는 듯한 얼굴로 다정하게 하나하나 알려 줄 때 쑥스러움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커다란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별채 난간에 서서 밖을 보던 용아의 얼굴이 문득 가라앉았다. 여정 내내 보여 준 윤제의 따스함과 이곳에서 함께 머무는가 묻는 객주의 얼굴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리고 폐궁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 양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자의 직첩이 봉의로 바뀌었지만 용아의 기억 속에 진안은 늘 양제로 기억되었다.
그녀도 이곳에 왔을까.
유치하고 치기 어린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바람이 좋네.”
얼굴에 올랐던 싱숭생숭함을 털어 내 버리고 한 아름이나 되는 새 짐을 챙겨 든 용아가 별채의 방을 하나씩 열어 보며 제 방으로 삼을 곳을 찾아다녔다. 별채 탐방의 즐거움에 빠진 얼굴로 조금씩 웃음이 퍼져 나갔다.
윤제는 용아가 고른 방을 둘러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여정 중에 추가된 용아의 새로운 짐이 방 한구석을 꾸미고 있었다. 남자의 눈에 용아가 늘어놓은 새 짐들이 어린애 장난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둘은 느긋하게 저녁을 챙겨 먹고 호수 주위를 따라 느릿느릿 걸었다.
석주, 만경의 자랑이라는 고호는 바다처럼 광활했다. 둘 중 누구도 재촉하는 일 없이 여유로운 저녁을 보내고 밤이 시작될 즈음 가볍게 야참을 즐겼다.
술은 안 돼.
황궁 바깥으로 나온 후로 늘 인자한 윤제였지만 술만큼은 허락하지 않았다. 청하객잔의 위세를 더욱 높여 주는 온갖 진귀한 술 이름이 탁자 위로 오고 갔지만, 윤제는 끝까지 고개를 내저었다. 용아는 엄격한 감시의 시선 아래에서 차만 호록호록 마셨다. 서로의 방문 앞에서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긴 하루를 마쳤다.
햇살이 얼굴을 다 적시고 방 안 가득 빛이 들어찼을 때가 되어서야 용아는 눈을 떴다. 몹시 늦은 아침이었다. 화사한 빛이 흘러 찬란한 창을 보고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던 용아는 이곳이 어디인지 움직이는 중에 깨달았다.
“……아.”
온몸을 꼼짝하지 못할 정도로 아플 때가 아니고서야 항상 새벽이 밝히 무섭게 채비하는 게 황궁의 일상이었다. 정오가 다 되어 갈 때까지 늦잠을 자 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긴 잠의 후유증인지 온몸이 나른했다.
시중인 없이 혼자 씻고 매무새를 다듬는 건 어설펐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나았다. 상의 팔은 세수를 하는 사이 팔꿈치까지 다 젖었다. 머리를 감은 후에는 머리칼 끝에서 떨어지는 물에 상의가 온통 젖어 얼룩덜룩해지다 끝내는 전부 젖어 들었다.
용아는 상관하지 않았다. 궁이었다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얼굴을 하고 사방에서 궁인들이 뛰어왔겠지만 여기는 아무도 없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 될 일이었다. 환복할 때와 자기 전에 갈아입어 본 덕인지 세 번째 갈아입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차를 마시고 있는 윤제가 보였다. 남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빈틈없는 차림새였다. 궁에서처럼 사치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일어났느냐.”
별채 입구에 놓인 탁자 위에 다기가 놓여 있었다. 윤제가 새 찻잔에 차를 부었다. 다기에서 쏟아져 나온 찻물에서 훈김이 올라왔다. 아직 한낮은 여름처럼 더운데, 그는 계절이 어떻건 차는 따뜻하게 마셔야 한다 주의인 듯했다.
“늦었습니다.”
다가가며 답하자, 윤제가 새로 부은 차를 용아에게 권했다.
“더 자도 돼.”
동시에 몹시도 유혹적인 말을 내뱉었다. 윤제의 앞자리에 앉아 차를 훌훌 마시던 용아가 잠이 전부 달아난 상쾌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요?”
“정말.”
윤제가 단호하게 답했다. 용아가 다시 차를 마셨다. 찻잔은 크지 않았지만 찻물이 뜨거운 탓에 차는 천천히 줄어들었다. 별말하지 않고 차만 마시는 용아를 윤제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용아의 찻잔이 다 비워졌다. 용아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렸다. 윤제가 첨차를 해 주려 하자, 용아가 손으로 찻잔을 가렸다.
“소제는 들어가 자겠습니다.”
용아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그래라.”
윤제가 입가로 오르려는 웃음을 억누르며 답했다.
“물러갑니다.”
용아가 바람처럼 몸을 일으켜 제 방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경쾌했다. 닫힌 문은 오래도록 움직임이 없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열렸다.
다 늦은 오후에 깨어난 용아는 여유로웠다. 바깥 탁자에 놓여 있는 과일을 몇 알 먹고 차를 마시며 시야를 넉넉하게 채우는 커다란 호수를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넋 놓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황홀한 것이었다. 지독한 분노도, 치열한 고민도, 정쟁도, 어떤 생각도 없이 텅 빈 머리로 있으며 이런 게 행복일까 싶었다.
하루가 빈둥빈둥 흘렀다.
객주의 초대를 받아 만찬을 즐겼다. 쉴 새 없이 나오는 윤기 흐르는 음식들을 먹으며 화대인과 객잔 가솔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가의 일원으로 의무를 다하고자 손님을 맞거나, 손님으로 초대 받아 갔으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참석해야 했던 식사와는 완연히 달랐다. 의무를 내려놓은 주인과 손님의 관계는 흥겹기만 했다.
어려서 타지에서 자랐다는 용아의 말에 모두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건넸다. 어떤 곳이냐는 객주 부인의 물음에 웃음을 흘리며 이곳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곳이라 말했다. 의미심장하기까지 한 용아의 표정에 짧게라도 이야기해 달라고 객주 식구인 어린 소저가 졸랐다.
용아는 들어 좋을 것 없을 거라 두어 번 거절하다가 말을 꺼냈다.
옆집 살던 누나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결혼하여 남편과 살았으나 관에 알리지 않은 부부라 따지고 보면 미혼의 아가씨다. 누이와 그의 남편은 서로 사랑하였으나 서로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 사이라, 둘은 때때로 서로가 아닌 이와 밤을 보냈다.
용아가 여기까지 말을 마쳤을 때 모두의 얼굴이 굳어 들었다. 남편이 누이를 놔, 놔두었습니까? 어린 소저가 충격 받은 얼굴로 질문했다. 용아는 눈가를 접어 웃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남편이 다른 이와 밤을 보낼 때 누이는 때때로 남편이 입을 옷, 먹을 음식, 그를 대신 해 연통이 필요한 곳에 가주기도 했다 덧붙였다.
모두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옆집 누이와 그의 남편은 서로를 무척이나 아꼈으나 결국 이러한 생활은 파탄이 났다. 남편은 장성한 아들이 있는 부잣집 과부의 재취로, 누이는 일곱 번째 새 남편 겸 애인을 들였다.
파격적인 애정 관계를 떠든 용아는 이런 게 동네마다 한둘 씩 있는 그런 곳이라 으슥한 얼굴로 말을 마쳤다. 뒷이야기가 더 있었지만 거기까지 했다간 착한 사람들에게 못들을 이야기를 들려주는 꼴일 것 같아 관두었다. 애초 용아가 꺼낸 이야기의 남녀 관계도 사실과 달랐다.
즐거운 식사를 마친 후에 용아는 윤제와 만경의 야시장으로 향했다.
“그 동네 괜찮은 거냐.”
윤제가 심각한 얼굴로 제북을 염려했다.
“네? 아. 아까 그 이야기. 사실 둘 다 사내입니다. 뒤에 더 있는데요. 새 남편 겸 애인을 들인 형은 남편이 옆옆집 남자랑 바람이 나서, 옆옆집 남자랑 남편을 두고 싸우다가 엉뚱하게 둘이 정분이 났죠. 남편만 곤란하게 되었지요. 형의 전 애인 겸 남편은 재취로 간 집의 아들과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심각하게 났었습니다.”
“그런 걸 어디서 들은 거냐.”
“옆집 형이 소제의 사형 중 하나였습니다.”
“뭐?”
“숙부도 사형의 그러한 습생 때문에 저와 함께 수학하는 것에 무척 고심하셨죠. 가문과 능력이 사형제가 되기에 손색없는 사람이라 받아들여졌습니다만.”
윤제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
둘은 시끌벅적한 야시장을 한참 떠돌았다. 용아는 다시 윤제의 눈에 잡동사니나 다름없는 것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애달픔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에 윤제가 또 형이 사 줄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말을 건네 왔다. 덕분에 용아는 자신이 말한 사형의 특별한 사연을 잊어버렸다.
사형은 후족만큼이나 존중 받는 혈계의 백화였다. 그러나 그는 어째서인지 어려서부터 정인으로 백화만을 좋아했다. 애인과 항상 애틋했지만, 백화는 주기에 진족 사내와 동침을 필요로 했다. 타인과 좋아하는 이가 동침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동침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니 동의할 수밖에 없지만 결국 관계는 깨어져 버렸다. 사형의 여덟 번째 남편은 그와 가약을 맺어, 이제는 유일한 남편이자 애인이 되었다.
어린 날 용아는 사형의 불가한 연애가 부질없다 여겼다. 한편으로 불가능한 것을 꿋꿋하게 이어 가는 것이 대단하게 보였다. 그랬기에 사형의 파란만장한 연애가 끝나는 것이 시원섭섭했다. 결국 순리를 따르는 수밖에 없는가 싶었다. 사형의 연애가 끝난 것을 알게 됐을 때, 기묘한 패배감이 어린 용아를 자극했다.
“고맙습니다.”
윤제가 보잘것없는 것을 사는 자신을 나무라지 않는 게 고맙고 좋았다. 볼품없는 것들을 얕보지 않고,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자신을 귀여운 아우를 보듯 쓰다듬어 주는 것도 좋았다. 남자가 용아가 좋아할 만한 부실한 것을 진지하게 고르고 권할 때면 그가 더욱더 좋아졌다. 모두 정해진 것을 따르는 것은 아닐까, 싶으면서도 남자가 더욱더 좋아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호사스러운 밤이 저물고 아침도 지나갔다. 용아는 하루하루 게으름과 나태라는 타락을 뿌듯하게 키워 갔다. 다 늦은 정오에 깨어난 용아에게 윤제가 맛난 것들을 시켜 주었다. 말 타고 호수 주위를 달리고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쉰다, 라는 달콤한 말을 몸소 배워 갔다. 하는 것 없이 빈둥거리며 무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용아에게 윤제가 달콤한 말을 넉넉하게 내려 주었다.
“쉬어라.”
때문에 용아는 날로 더더욱 남자가 좋아졌다. 정말이지 곤란했다.
만경에 온 후 처음으로 새벽에 가까운 시각에 눈을 뜬 날이었다. 용아는 제법 익숙해진 간소한 공간에서 시중 없이 씻기를 끝내고 방을 나섰다. 하늘이 아직 파르스름했기에 윤제가 자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헌데 밖으로 나가자 정오에 가까운 때에 본모습과 다를 바 모습의 남자가 용아를 맞아 주었다. 용아가 놀란 것처럼 윤제도 놀랐다. 왜 더 안 자고 이렇게 일찍 일어났는가 하는 얼굴이었다.
윤제가 건네는 찻잔을 받으며 용아가 말했다.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용아는 받은 차를 마시며 첨차를 준비하려는 남자에게서 찻주전자를 가져왔다. 윤제의 찻잔이 비었을 때 용아의 차가 완성되었다. 빈 찻잔을 가져와 차를 따른 후 남자에게 건넸다.
“진짜 맛있다.”
반쯤 빈 제 찻잔에 첨차하던 용아가 윤제의 칭찬에 웃음을 흘렸다. 똑같이 데워진 물에, 똑같은 찻잎으로, 똑같은 도구를 사용해 만든 것이었다. 첨차한 차를 맛본 용아는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용아의 입에는 윤제가 제게 건넨 것이나, 자신이 만든 것이나 별로 다르지 않았다.
“더 드릴까요.”
용아의 물음에 웃는 얼굴이 답했다.
“더 다오.”
둘은 찻주전자를 두 번 더 비우는 시간만큼 아침을 흘려보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덕분에 여유가 있었다. 여유로움은 빈둥거림을 극대화시켰다. 윤제가 이리저리 떠도는 용아를 보고 배 타러 갈까? 제의했다.
이곳에 온 후로 용아가 느지막이 일어났기에 그들이 배를 타러 갈 때마다 까마득히 긴 줄을 마주해야 했다. 윤제의 제의에 용아가 잊고 있던 배 타기에 열을 올렸다.
둘은 식사도 하지 않고 배를 타러 나갔다.
고호가 워낙 커 바다를 본 적 없는 용아에게 호수가 바다처럼 느껴졌다. 윤제는 대기 중인 배들을 일일이 둘러보고 적당히 규모가 있는 배를 권했다. 꽤 많은 인원이 함께 탔지만 배가 큰 편이라 문제 되지 않았다. 출발하기에 앞서 윤제가 선장과 외따로 떨어져 오래도록 말을 나눈 게 의아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점이 없었다.
뱃놀이는 즐거웠다.
물살을 타고 오르내리는 배의 움직임에 즐거워하는 용아를 본 윤제가 이럴 줄 알았으면 조그만 배에 따로 갈걸 그랬다는 말을 해, 그가 자신을 배려해 일부러 큰 배를 골랐다는 걸 깨달았지만 재미있어 하느라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였을까.
호수 둘레를 돌아보고 출발지에 당도해 배에서 내리는 용아는 들떠 있었다. 꿀렁꿀렁한 배의 움직임이 잊히지 않았다. 윤제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몇 배는 가벼워진 듯한 몸놀림으로 움직였다. 앞서 돌아와 있던 작은 배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인파 속을 가볍게 떠돌던 용아의 시선에 아이가 걸렸다. 녹포를 입은 아이는 부모 없이 혼자 작은 배의 끄트머리에서 놀고 있었다. 서너 살이나 될까 싶은 어린아이였다. 배를 탕탕 치는 아이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 다가가 말을 걸려 했다. 몸놀림이 평소보다 훨씬 가벼웠기에 귀찮음도 없었다.
“으아!”
아이의 귀여운 외침과 달리 갑자기 난간 끄트머리에 올라 통통 튀는 모습은 걱정을 부풀렸다. 까르르 웃던 아이가 제 발에 걸려 기우뚱했다.
“평아!”
뒤늦게 아이를 발견한 부모가 소리를 내질렀다.
“읏차.”
용아는 내딛던 걸음을 달리기로 바꾸어 옆으로 쓰러지려는 아이에게 단숨에 다가가 기우뚱한 어린 몸을 받아 냈다. 그대로 몸을 돌려 어쩔 줄 몰라 하는 부모에게 아이를 건네려 했다. 용아의 가볍지만 무게감 실린 걸음의 여파가 다음 순간 그를 덮쳤다.
“고맙습……!”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하던 젊은 부모가 옆으로 크게 요동치는 배 위에서 비틀댔다. 아이의 모친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아이를 꽉 쥐었다.
“……어……?”
용아는 옆으로 크게 들썩이는 배에서 제 몸이 벗어나는 광경 하나하나를 느릿느릿 받아들였다. 시야가 모든 것을 일일이 포착해 용아에게 보여 주는 듯했다. 아이의 부친이 위기에 빠진 듯한 은인을 붙잡아 주려 손을 내밀었다.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손을 보며 용아는 아래로 잡아당겨지듯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귓속으로 물이 빠르게 고여 드는 것처럼 낯설고 무서운 소리가 온몸을 에워쌌다.
온통 물로 가득한 공간은 지독히도 적막했다. 아무것도 없는 침묵 안에서 허우적댈 때마다 부글대는 기포 터지는 소리만 외롭게 울렸다. 물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사방에서 짓눌러 왔다. 용아는 오직 팔다리를 휘젓는 것만 할 수 있는 것처럼 버둥대기만 했다.
힘껏 움직이는 몸의 의도와 다르게, 계속해서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에 사지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다. 속절없이 가라앉는 몸으로 단단한 손이 감겨들었다. 강하게 당기는 힘에 끌려가다 갑자기 귀가 뻥 뚫렸다. 희뿌연 시야로 물 밖으로 나왔다는 걸 겨우 인지했다.
“……쿨룩쿨룩.”
힘 빠진 입술에서 억눌린 소리와 토하는 것 같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얼얼했다. 반면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흠뻑 젖은 얼굴을 타고 물이 흘러내렸다. 눈가는 홧홧하고, 숨을 쉬는 코는 따갑고 쓰렸다. 입술에서는 여전히 기침이 토해졌다. 덜덜 떨리는 입술로 숨을 내쉬며 구해 준 이를 보려 했다.
용아의 머리 위에 커다란 소리가 내렸다.
“인마!”
세상이 쩌렁쩌렁 울렸다. 용아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젖은 윤제가 귀가 아프도록 소리를 질렀다. 남자의 외침에 놀란 것이 용아만은 아니었다.
바깥으로 나온 후 황족의 위엄을 실수로라도 내보인 적 없는 윤제였다. 윤제의 온몸에서 권능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사고가 난 곳으로 모여들어 있던 인파가 순간 사방으로 흩어졌다. 석계 위로 돌무더기가 쏟아지는 듯한 사나운 소리가 일었다. 우르르 물러난 사람들을 인지할 틈이 없었다.
“……큽. 송구합, 쿨룩…….”
눈이 발개진 채 기침을 토하면서 사죄의 말을 내뱉는 용아를 본 윤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물 먹었어? 말하지 마. 그냥 기침 내뱉어.”
기침을 토해 내는 용아의 등을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두드렸다.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얼굴과 달리 등을 쓸어 주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귓속에도 물이 고였는지 남자의 손이 두드려 올 때마다 머리가 웅웅 울렸다. 진동 때문에 머리가 다 아팠다.
낯설고 불쾌한 통증은 조심스러운 손이 닿을 때마다 조금씩 가셨다. 아픔은 빠르게 진정되어 내뱉는 호흡도 평상시와 비슷해졌다. 점차 안정되어 감에도 핏기 가신 굳은 얼굴과 머리를 시끄럽게 하는 심장 소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겁에 질린 것처럼 턱이 이따금 경련했다.
용아는 숨을 내뱉으며 평연히 말하려 애썼다.
“……괜…… 찮습니다.”
긴장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인지 말이 울컥 튀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윤제가 여전히 펴지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건져 낸 직후보다 훨씬 나아 보여서인지 남자의 사나운 기세가 많이 누그러들었다. 남자와 말을 주고받고 나자 놀랐던 것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윤제 형…….”
멍한 얼굴로 있던 용아가 주위를 돌아보고는 낮춘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사방으로 흩어져 저 멀리로 물러난 이들이 윤제와 용아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왜.”
용아가 기침으로 갈라진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어떡해요.”
“어떡하긴. 가면 되지.”
윤제의 얼굴은 주위에서 지켜보는 시선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덤덤한 표정이었다. 남자가 예고도 없이 용아를 안아 올렸다.
“……?!”
뭐라고 말할 틈도, 말릴 틈도 그가 걸음을 옮겼다. 성큼한 걸음 때문에 지켜보는 시선들을 둘러볼 새도 없었다. 지름길을 거닐어 객잔에 도착한 윤제는 별채로 곧바로 드나드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화대인과 그의 부인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시지요.”
화대인 부부의 크게 놀라지 않은 얼굴에 용아가 도리어 당황했다.
“따듯한 물을 있는 대로 모아 두었습니다. 우선 탕조가 하나뿐이니 호수 물부터 씻어 내시지요. 물을 더 데우고 있으니 곧 들이겠습니다.”
“부탁드리오.”
부인이 말을 하는 사이 화대인이 탕조가 놓인 욕탕의 문을 열어 안내했다.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에 용아를 내린 윤제는 탕조에 담긴 뜨거운 물을 바가지로 퍼 온도를 가늠했다.
그사이 욕탕의 문이 닫혔다. 욕탕은 사방이 석재와 나무로 꾸며져 있었다. 욕탕 둘레를 따라 이어진 나무 수로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물처럼 물이 솟아 나오는 곳에는 물을 저장해 두는 돌로 만들어진 궤가 있었다.
용아의 겉옷 매듭으로 윤제의 손이 다가왔다. 욕탕 안을 구경하던 얼굴이 흠칫했다. 윤제가 매듭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야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남자의 단호한 말에 용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젖은 천이 쓸리는 소리가 울리며 매듭이 풀렸다. 용아가 힘들게 묶어 두었던 매듭들이 윤제의 손에 허무하도록 쉽게 풀렸다. 상의에 이어 하의의 매듭까지 푼 손이 용아에게서 젖은 옷을 벗겨 냈다. 다리 사이와 엉덩이만 가리는 가장 안에 입는 속옷만 남겨졌다. 얇은 속옷 역시 흠뻑 젖어 맨살이 훤히 비쳤다.
용아는 미묘하게 불편해하는 윤제에게 대범한 말을 건네고 싶었다. 괜찮다던가, 같은 남자인데 뭐가 어떤가. 소양군과 같은 뻔뻔함을 발휘하고자 했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
윤제가 받아 둔 물을 용아에게 조심스레 끼얹으며 물었다.
“뜨거워?”
남자의 시선은 용아의 팔꿈치에 고정돼 있었다. 팔꿈치와 얼굴, 발등 외에는 볼 수 없는 것처럼 구는 윤제의 태도에 용아 역시 머뭇댔다.
“……괜찮습니다…….”
“들어가.”
윤제가 용아를 일으켜 뜨거운 물이 담긴 탕조에 들여보냈다. 남자의 손이 권하는 대로 움직여 탕조에 들던 용아가 멈추었다.
“전하는요…….”
윤제가 용아의 벗은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앉혔다.
“나는 괜찮다.”
“……저도…….”
대꾸를 하려던 용아의 입술이 잦아들었다.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도 아직도 심장이 아프도록 뛰어 댔다. 손끝에 감도는 미세한 떨림 역시 여전했다. 우물대며 말을 건네려는 입술로 따듯한 숨결이 겹쳐 들었다. 따듯하고 습윤한, 부드러운 감촉이 용아의 입술을 머금었다가 놓아주었다.
아까와는 또 다르게 심장이 쿵쾅댔다.
잠시 물러났던 윤제의 입술이 용아의 입술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시선이 엉키고,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여름밤마다 얽었던 덕분인지 서로를 뒤덮은 입술이 부드럽게 상대를 어루만지며 상대의 숨결을 삼켰다. 뒤엉킨 혀가 젖은 소리를 퍼트렸다. 입술이 맞닿았다가 떼어지고 방향을 비틀어 포갤 때마다 젖은 살결이 쓸리는 소리가 울렸다. 마주하고 있던 입술을 물리기 전에, 용아는 여름밤의 습관대로 깊이 얽은 따듯한 입 안을 혀끝으로 더듬어 남자의 타액을 훑고 삼켰다.
온몸으로 미세한 떨림이 번져 나갔다. 따듯한 물에 몸의 대부분을 담그고 있는데도 맨살을 따라 낯선 소름이 일었다. 심장이 무섭게 뛰어 대 머리가 다 얼얼했다.
윤제의 입술이 물러나려는 입술을 붙잡듯 가볍게 빨아 당겼다. 아랫입술을, 윗입술을 머금고, 다시 아랫입술을 짓씹듯 잘근거리다 입술을 겹쳤다. 입술을 깊이 포갠 채 떨리는 숨이 번져 나갔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많은 입맞춤으로 용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헐떡이는 것처럼 급히 숨을 들이켜는 목덜미로 윤제의 손끝이 스쳐 갔다. 하얗게 질린 얼굴보다 붉어진 얼굴이 훨씬 보기에 좋았다. 망설이는 것처럼, 곤란해하는 것 같은 입술에 윤제가 쪼는 듯한 짧은 입맞춤을 퍼부었다.
마침 입술을 떼어 냈을 때.
“윤공자.”
닫힌 문 너머에서 정중한 부름이 울렸다. 남자가 아쉬운 듯 용아의 입술을 다시 한 번 짧게 훔치고 놓아준 후에 몸을 일으켰다. 윤제는 욕탕 한쪽에 엉성하게 세워 둔 가벽을 한 손에 하나씩 들어 옮겼다. 가벽 하나를 두 사람이 들고 한 사람이 곁에서 방향을 알려 주며 옮기는 걸 생각하면 남자의 가벽 옮기기는 놀라울 지경이었다. 가벽을 탕조 주위에 요령 좋게 세운 윤제가 낮춘 목소리로 ‘잠깐. 기다려’, 말을 건네고 돌아섰다.
“대인.”
윤제가 욕탕 문을 열며 상대를 불렀다.
“따듯한 물을 더 가져왔습니다.”
“고맙소.”
“갈아입을 옷도 챙겨왔습니다. 공자께서도 씻으시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지요. 옷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감모에 걸리지 않는 게 더 중하지 않겠습니까.”
화대인이 가져온 옷을 건네며 인자하게 말했다. 화대인을 뒤따른 객잔의 식구들이 데운 물이 가득 담긴 나무 물통을 안으로 부지런히 들였다.
“신경 써 주어 고맙습니다.”
화대인에게 감사를 표한 윤제는 입구 쪽에 놓인 나무 물통을 안쪽으로 옮기며 객잔의 식구들에게도 일일이 감사를 표했다. 윤제의 인사를 받은 객잔 식구들이 손사래를 치며 그런 말할 것 없다 말했다. 부담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반응에 윤제는 말없는 웃음만 지었다.
“윤공자께서도 어서 씻으시지요. 물러가 보겠습니다.”
화대인이 주위를 물리며 문을 닫았다. 윤제가 닫히는 문 너머로 마주 인사하고, 걸쇠를 걸어 문을 잠갔다. 새로 들인 물통을 들고 가벽으로 다가선 남자가 가벽을 치우며 말했다.
“뜨거운 물 더 줄까.”
“……괜찮습니다…….”
용아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답했다. 빈 탕조에 새로 가져온 물을 쏟아붓던 윤제가 시선을 피하는 얼굴로 입술을 내려 재차 입을 맞췄다. 다시 혀가 엉켰다. 입술을 물리기 전, 이번에도 윤제가 멈추어 기다렸고 용아가 습관적으로 남자의 입 안을 훑었다.
혀끝으로 입 안을 쓸던 용아의 얼굴이 선명히 붉어졌다.
깊은 밤 합방례의 법도를 따르고자 입술을 얽는 게 아니었다. 마치 서로 좋아하는 것처럼, 어떤 징후도 없이 불쑥 입술을 얽었다. 자연스럽게 입술을 얽는 현실이 당혹스러웠고, 본심을 들킨 게 아닐까 머리가 혼란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시선을 두서없이 던졌다.
“밖에.”
윤제가 황망해하는 용아의 입술을 짧게 입술을 묻었다가 떼어 내며 말했다.
“네.”
“새로 입을 옷 놔뒀으니 입어.”
“……네…….”
남자는 말을 하는 사이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촉, 촉.
입술이 빨아 당겨졌다가 놓아지는 민망한 울림이 쉬지 않고 울렸다. 윤제의 당연하다는 듯한 입맞춤에 어떤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이따금 혀가 엉킬 때 자신이 혀끝으로 남자의 입 안을 적극적으로 더듬고 빨아 댔기에 무어라 할 입장이 아니었다.
싫은 것은 더욱 아니었다.
숨결이 뒤엉킬 때마다 심장박동이 격해지기만 했다. 좋아서, 서로 입술을 깊이 맞대고 체온을 나누고 호흡을 주고받는 게 너무 좋아서 하복부로 기묘한 열감이 쏠렸다. 입술이 얼얼하도록 입을 맞출 때마다 뒷머리를 따라 알싸한 감각이 흘렀다.
“씻어라.”
“네…….”
윤제가 가벽을 용아의 탕조와 자신이 들 탕조 사이에 놓아 시야를 가로막고, 저편으로 건너갔다. 젖은 옷을 벗는 소리가 얇은 가벽 너머에서 울렸다. 툭, 옷이 던져지는 소리에 허공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용아의 눈동자가 소리가 난 곳을 찾아 떠돌았다.
왜인지 목 너머로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용아는 가벽 아래쪽의 뚫린 곳으로 자꾸만 향하는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리며 속으로 투덜댔다. 같은 남자 벗은 몸을 봐서 뭘 어쩌겠다고. 내가 벗는 건 다 봤으면서. 쓸모없는 투덜거림이 소리 없이 튀었다. 벗은 남자의 몸을 보고 싶다는 건 결코 아니다, 혼자만의 변명을 하고 있을 때.
촤르르.
물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제멋대로 가벽 아래의 빈틈으로 보이는 벗은 발에 시선이 쏠렸다. 남자의 맨발을 보며 발조차 잘생겼구나, 생각하는 스스로가 대책 없는 팔불출 같아서 깊이 부끄러워했다. 용아의 시선 끝에 있던 잘생긴 맨발이 멈추었다.
“뭘 봐.”
가벽 너머에서 울리는 저음에 용아가 흠칫했다. 가려져 있어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를 돌리다 물소리를 울린 자신이 모자라게 느껴졌다.
“…….”
용아는 괜한 바보짓을 더하지 않고자, 입을 굳게 다물고, 당황해 거칠어진 숨만 힘껏 내리눌렀다. 남자도 더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먼저 나가 보마.”
“네.”
아무렇지 않기 바랐던 마음과 달리 목소리가 휘청댔다. 잠시 미뤄 뒀던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수치스러웠다.
“뜨거운 물 더 필요하면 가져다주마.”
“괜찮습니다.”
이번엔 목소리가 제대로 나갔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혼자만 남은 공간에 적막감이 차올랐다.
“…….”
뜨거운 물에서 뿜어져 나온 따듯한 증기가 토라진 것처럼 구겨진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퐁, 퐁, 수면을 건드리는 손길에 물방울 튀는 소리가 울렸다.
“좀 볼 수도 있지…….”
누가 보고 싶어서 봤냐는 뒷말까지는 내뱉을 수 없었다. 혼잣말이라도 그만한 분별력은 남아 있었다. 삐친 애 같은 치기 어린 소리를 전부 숨기기는 어려웠다.
따듯한 물에 잠긴 몸이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얼굴을 거칠게 씻었다. 벌겋게 오른 열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용아는 철부지 아이처럼 따듯한 물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적막한 공간에 찰박이는 물소리만 가득했다.
욕탕 문을 열고 나서려던 용아가 멈칫했다.
“이제 나와?”
윤제가 용아에게 아는 체했다. 그는 욕탕 문이 마주 보이는 벽 앞에 놓아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상대가 기다리는 줄 알았다면 더 일찍 나왔을 터였다. 머리칼 한 올까지 꼼꼼히 말리고 나오느라 상당히 시간을 지체했다.
“계속 여기 계셨습니까.”
“하도 안 나와서 잘못됐나 싶어서 들어가 볼까 말까 고민하던 차다. 화부인이 네게 먹이라고 데운 술을 줬다. 네 방으로 가자.”
“네.”
용아가 답하며 앞서 걷는 윤제를 따랐다. 문 앞까지는 금방이었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던 윤제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합방례 날이다.”
“네, ……네?”
겨우 느슨하게 가라앉혀 둔 숨이 긴장으로 움츠러들었다. 발이 제멋대로 멈추었다.
“안 들어올 건가.”
문 안으로 들어갔던 남자가 문 사이에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당황해 멈춰 있던 용아가 물러나는 윤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침상에서 두 걸음 거리에 있는 탁자에는 따듯하게 데운 술과 간단한 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용아가 자리에 앉자, 윤제가 기다렸다는 듯 조그만 잔 가득 데운 술을 부어 줬다.
용아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술은 안 된다고…….”
용아라고 술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따듯한 술이 담긴 우아한 잔을 만지작거리며 묻자, 윤제가 눈썹을 좁히며 술을 채워 둔 자신의 잔을 들이켰다.
“걱정 마라. 나는 인내심이 강한 편이니까.”
윤제가 다시 잔을 채워 연거푸 비웠다.
“그렇습니까.”
인내심이 여기서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용아는 받은 잔에 입술을 살짝 대 맛을 봤다. 뜨겁게 데워서인지 짙은 술 향기가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마실 만하냐.”
“숙모님이 과실주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랬어?”
“예. 과실주가 독한 술인가 봅니다.”
“제조법에 따라 다르지.”
조심조심 술을 맛보던 용아가 잔을 홀짝 비웠다. 윤제가 빈 잔을 채워 줬고, 용아가 남자의 속도를 맞추듯 다시 잔을 비웠다.
“숙모님이 가끔 맛있는 거라고 과실주를 주셨습니다. 얼음을 띄워 주셔서 시원하고 달았죠. 먹고 나면 알딸딸하고요. 좀 덜 달긴 한데, 이쪽이 훨씬 순한 거 같습니다.”
용아의 시음 평에 윤제가 눈썹을 사납게 세웠다.
“너희 친척들은 하나같이 애한테 뭘…….”
남자는 할 말 많지만 더 하지 않겠다는 듯 뒷말을 흐렸다.
“한 잔 더 주십시오.”
용아가 활짝 웃으며 술잔을 쥔 손을 윤제를 향해 내뻗었다. 착실히 술을 따라 주던 윤제가 순간 멈칫했다. 합방례가 있을 때마다 온몸으로 어색함을 뿜어대던 용아였다. 반쯤 따르다 멈추는 술병을 의아한 듯 보는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 벌써 취했냐.”
윤제가 술병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안 취했습니다.”
용아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어째서 그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입술이 내뱉는 말은 또렷했고, 시선 역시 올곧았다. 혈색도 평소보다 살짝 붉긴 하지만 내내 따듯한 물에 있었으니 술에 취해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윤제는 긴가민가하며 마저 잔을 채웠다.
용아가 다시 홀짝 잔을 비웠다.
“…….”
그걸 본 윤제가 눈썹을 사납게 세웠다. 해맑은 얼굴이 왜 그러냐는 듯 남자의 굳어 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손끝으로 만지면 웃음이 묻어날 것 같은 눈가가 윤제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항상 지나치게 어른스럽고, 진중하여 표정 없는 얼굴에 웃음이 감돌자 부드러움이 넘쳐흘렀다. 살짝 끝이 올라간 눈이 웃음으로 이지러지자 자존감 높은 성정을 드러내는 평소와 달리 달콤하게만 보였다.
윤제는 확실히 알았다. 용아는 취한 것이다. 겨우 술 석 잔에.
“한 잔 더 주세요.”
용아가 눈초리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윤제를 향한 술잔을 쥔 두 손은 공손하였다. 간청하는 속삭임에 윤제는 저도 모르게 술병을 기울였다.
술잔이 차기 무섭게 용아가 홀짝 들이켰다.
“어이.”
말리는 저음에 용아가 웃음을 건네었다. 달달함이 번져 나오는 듯한 웃음이었다.
“맛있어요.”
불현듯 제북 대부인이 용아에게 술을 내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제나 무심한 얼굴에 웃음이 감돌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보는 이를 마주 웃게 하는 달콤한 웃음이 술을 마셨을 때만 나오는 것일까, 그래서였을까, 그런 게 아닐까 의심이 깊어 갔다.
“맛있어?”
“네.”
대답도 꼬박꼬박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간지러운 웃음이 번져 나왔다. 윤제는 유혹에 빠진 고행자처럼 잠시 고민했다가 금세 고민을 내던지고 입술을 떼었다.
“한 잔 더 줄까.”
믿음직한 형이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네.”
곧장 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간청하는 것처럼 쑥 내밀어 오는 술잔에 윤제는 이러면 천벌 받지 생각하면서도 술을 가득 따랐다.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용아가 술을 곧장 비웠다.
짙은 술향을 퍼트리는 입술에서 만족한 소리가 흘렀다. 술맛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윤제와 눈이 마주치자, 용아가 더 진한 웃음을 퍼트렸다.
윤제는 시험에 들었다. 고뇌는 지극히 짧았다. 손이 다시 제멋대로 움직인 탓이었다. 남자의 손이 웃음을 퍼트리고 있는 얼굴에 닿았다. 뺨에 닿는 커다란 손에 웃는 얼굴이 의아함을 웃음으로 표했다. 윤제의 손에 감싸인 용아가 얼굴을 기울여 남자의 손이 웃음을 더욱 흠뻑 만질 수 있도록 했다. 조심스러운 손안에 달콤한 웃음이 가득 번졌다. 달달한 웃음을 만지는 손끝이 저릿저릿 울리는 듯해서, 윤제는 힘겹게 손을 물렸다.
“너, 취했다.”
윤제가 엄격하게 말했다.
“취하면 안 됩니까?”
달콤한 웃음을 퍼트리는 얼굴이 순진하게 속닥거렸다.
“안 되지.”
“칫.”
토라진 소리를 내뱉은 입술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달콤한 미소가 인내심이 강하다 자부한 남자의 시선을 어지럽게 했다. 웃는 얼굴이 고뇌가 깊어 가는 윤제의 얼굴을 살피다가 슥, 두 손에 사랑스럽게 쥔 술잔을 내밀었다.
“…….”
윤제의 눈썹이 완전히 구겨졌다.
“한 잔만 더 주세요.”
달콤하게 웃는 얼굴이 웃으며 울상을 지었다. 애원하는 목소리가 절절했다. 술을 주지 않는 자신이 매정하게 느껴질 만큼 사랑스럽고 가련했다.
“안 돼, 인마.”
윤제는 단호히 거부했다. 웃는 얼굴이 더욱 깊이 울상 지었다.
“윤제 형.”
그 부름에 윤제는 버텨 내질 못했다.
“……하지 마라.”
입으로 거부의 말을 하면서 손으로 술잔을 채워 줬다. 평소 자부해 온 인내심이 무색하도록 허무한 패배였다. 용아가 장난기 많은 아이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헤헤, 웃었다. 개구쟁이 같은 웃음과 달리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윤제는 과하게 자극적인 풍경에서 시선을 내렸다.
그야말로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웃음의 의도는 순진하기만 할 텐데, 그에게는 유혹적으로만 보였다. 딴청을 부리는 남자의 얼굴 곁으로 용아가 손을 뻗어 살살 흔들었다. 무심하고자 애쓰는 윤제의 뺨 위로 무방비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얼굴 주위에서 살랑거리는 용아의 손을 윤제가 잡아챘다. 탁, 손이 잡히는 순간 용아가 어깨를 움칫하며 웃음을 흘렸다. 눈을 접어 웃는 얼굴에 시선을 건네며 윤제가 붙잡은 손을 빼앗아 가는 것처럼 제 쪽으로 당겼다.
평소라면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놔주십시오, 할 용아가 웃기만 했다. 윤제가 손 안에 담긴 따스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아파요, 윤제 형.”
용아가 잡힌 손을 살살 흔들며 말했다.
“너, 진짜 취했어?”
윤제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재차 달콤하게 취해 든 얼굴을 향해 물었다. 얼굴 가득한 웃음을 제외하면 용아는 술에 취한 것 같지 않았다. 말은 분명하고, 시선도 또렷하고, 사리 분별도 똑발랐다.
용아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안 취했어요.”
평소 윤제가 용아를 몰랐다면 못 이기는 척 속아 넘어갔겠지만, 평소의 용아를 알기에 그는 단언할 수 있었다.
용아는 흠뻑 취했다.
혀 꼬부라진 말도, 앞뒤 안 맞는 말도 없었다. 난동을 부리거나, 행패를 부리지도 않았다. 살살 간질이는 것 같은 순하고 달콤한 웃음만 퍼트리지만, 그것이 바로 술에 취했다는 증거였다.
“이리 와 봐.”
윤제가 한쪽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왔습니다.”
남자의 얼굴 가득 고뇌가 어렸다. 평소의 용아도 윤제가 청했으면 그의 말이 비정상적이 아닌 것이면 따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가온 얼굴은 그를 드러내지 않은 채 경계할 터였다. 지금, 윤제의 곁에 앉은 얼굴은 무방비했고, 웃음으로 가득했고, 위험할 정도로 가까웠다.
“뭘 이렇게 가까이 왔어.”
윤제가 진지한 얼굴로 튕기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평소라면 웃으며 농을 하듯 해도 이상한 듯 쳐다볼 얼굴이 웃으며 더 바싹 다가왔다.
“뭐가 가까워요. 윤제 형, 용아입니다.”
용아가 장난을 치듯 윤제에게 달라붙으며 키득댔다. 윤제가 제게 착 달라붙어 짓궂은 짓을 하듯 비벼 대는 용아를 충격에 빠진 듯 멍하니 바라봤다.
“평소엔 왜 이러지 않는 건데.”
윤제가 저도 모르게 본심을 토로했다. 용아의 웃음 가득한 눈가에 순진한 의문이 떠올랐다.
“……?”
술에 취한 용아는 관대했다. 웃음이 가득했다. 다정하고 달콤했다. 그래서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윤제는 제 몸에 붙어 있는 몸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 물리며 엄격하게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러냐.”
그러나 어째서인지 내뱉어진 말은 불평 가득한 투덜거림에 불과했다.
“뭐든 해도 돼요.”
달콤한 웃음을 퍼트리는 얼굴이 위험한 말을 속삭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해?”
윤제의 툴툴거림이 더욱 강해졌다. 사랑스러운 웃음을 퍼트리는, 아니 웃음을 퍼트려 평소보다 몇 배는 사랑스러워 보이는 얼굴이 순간 웃음을 지웠다.
“압니다.”
순간 술에 취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러나 정중한 말을 건넨 얼굴로 피어오르는 짙고 달콤한 웃음에 눈앞의 얼굴이 잔뜩 취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로 이런저런 짓을 하는 것은 사내답지 못했다.
“알긴 네가 뭘 알아, 인마.”
윤제가 알 수 없는 억울함에 저도 모르게 성질을 부렸다.
“나도 다 아는데.”
술에 취한 용아가 웃는 얼굴로 꿍얼댔다.
“내가 너한테 다시 술 주나 봐.”
윤제가 혼잣말을 다 들리게 투덜대며 달콤한 뺨에 입을 맞췄다. 뺨에 닿는 입술이 간지러워서 용아가 웃음을 퍼트렸다. 자극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웃음이 윤제의 귓가를 적셨다. 반대편 뺨에도 입을 맞춘 남자가 웃음을 흘리는 용아를 안아 침상으로 데려갔다.
윤제가 착실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 몸을 돌리려 했다.
“어디 가요.”
용아가 웃는 얼굴로 남자를 붙들며 물었다.
“내 방에 가.”
“왜요?”
윤제의 대답에 용아의 얼굴에서 웃음이 찬찬히 가라앉았다. 잦아 든 웃음이 은은히 번지는 얼굴이 건넨 물음에 윤제가 잠시 머뭇댔다.
“오늘은 참기 어려울 것 같다.”
미묘한 의미가 담긴 말이 더없이 정중히 울렸다.
“안 참아도 돼요.”
순진한 얼굴이 뭔지 모르겠지만, 이라는 투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술 취한 이와의 논쟁은 의미 없었다. 윤제는 달콤한 웃음이 여전한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했다.
“잘 자라.”
남자의 물러나려는 몸을 부드러운 손이 단단히 붙들었다.
“가지 마요.”
그저 흔한 말이었다. 평범하기까지 한 말인데, 귓가에서 소곤대는 말에 윤제는 순간 머리끝까지 욕정이 차오르는 감각에 잠시 꼼짝하지 않았다.
“용아.”
“오늘 합방례 날이랬잖아요.”
달콤한 웃음이 부드럽게 번져 있는 얼굴로 걱정을 표한 용아가 손을 움직여 남자의 얼굴을 감쌌다. 윤제의 귓불 뒤로 부드러운 입술이 감겨들었다. 다가오는 얼굴에 입을 맞추는 줄 알고 긴장했던 윤제가 귓가에 닿는 숨결에 숨을 멈췄다.
반대편에도 입을 맞추려는 용아를 윤제가 다급히 붙들었다.
“잠깐.”
“……?”
웃음이 어린 얼굴이 의문을 표했다.
“나머지는 넘어가도록 하자.”
윤제가 애원하듯 청했다.
“왜요?”
남자의 고민을 모르는 얼굴이 부드럽게 물었다.
“오늘은 참기 힘들다.”
“안 참아도 되…….”
“뭘 참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윤제의 투덜거림에 용아는 달콤한 웃음이 고요히 흐르는 얼굴로 무어라 하려 했다. 용아가 내뱉으려던 말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남자의 입술이 소곤거리는 입술을 온통 뒤엎었다. 먹힌 소리가 용아의 목 아래에서 둔탁하게 울렸다. 입술이 포개지고, 혀가 뒤엉키는 부드러운 감각이 예민하게 일어난 신경을 빠르게 잠식해 갔다. 헐떡이는 혀를 빨며 윤제는 합방례의 무엇도 하지 말 것을 후회했다. 용아의 얼굴을 만지는 순간부터 단단해져 온 그의 아래는 완전히 발기한지 오래였다. 부드럽게 허우적거리는 입술을 먹어치우던 그는 숨을 쉬지 못해 힘겨워 하는 용아를 깨달고 천천히 입술을 물리다 당황했다.
“하아, 하, 하아…….”
발갛게 열이 올라 야하게 흐트러진 얼굴이 남자를 올려다봤다.
“…….”
윤제의 손이 용아의 허벅지를 정신없이 매만지고 있었다. 기다란 손가락 끝이 둔덕 가까이에 닿도록, 커다란 손이 허벅지 옆면을 따라 오르내렸다. 숨이 찬 용아가 허우적거리다 윤제의 허벅지를 짚은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용아의 손을 자신이 당겨 제 허벅지 쪽으로 바싹 당긴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토록 좋다 했다고, 윤제는 생각했다.
“…….”
흥분으로 젖어 든 얼굴이 윤제를 바라봤다.
“미안하다.”
윤제가 의식적으로 손을 뒤로 물리며 사과했다.
“괜, 괜찮아요…….”
온몸이 짙은 흥분으로 진동하는 것처럼 떨리는 감각에 용아는 현실감이 없었다. 멍한 얼굴에 낯선 욕정과 쾌감의 흔적이 떠돌았다. 용아의 뜨거운 손은 여전히 남자의 허벅지 위에 머물고 있었다. 손을 치워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윤제는 손목을 붙잡아 부드럽게 물렸다. 지지대를 잃은 것처럼 용아의 몸이 휘청했다. 용아가 무의식적으로 다시 남자의 허벅지를 짚으려 했다. 단단한 손이 위험한 행동을 하려는 손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뜨거운 몸을 품으로 당겨 안은 윤제는 꼬물대는 손에만 닿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괜찮아?”
윤제는 방금 괜찮다고 한 상대에게 괜찮냐고 묻는 자신의 모자람에 실소하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어서 질문을 거두지 않았다. 웃음이 감도는 눈가를 이지러트리며 용아가 소곤거렸다.
“쿵쾅쿵쾅해요.”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대서 용아는 겁이 많은 아이처럼 손으로 가슴을 살며시 짚어 보기까지 했다. 온몸이 이상하도록 얼떨떨했다.
“잘 수 있겠어?”
윤제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속삭이며 품에 안은 옆머리에 닿을 듯 말 듯한 입맞춤을 내렸다.
“모르겠어요. 너무 떨려요.”
용아가 남자의 단단한 품에 뺨을 기대며 답했다.
“나도 그래.”
잔뜩 가라앉아 갈라져 쉰 저음이 속삭였다. 심장이 무섭게 쿵쾅대는 시간이 차근차근 흘렀다. 서로를 단단히 부둥켜안은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용아를 강하게 안고 있던 몸이 부드럽게 물러났다. 다음 순간 용아의 세상이 휘돌았다. 용아는 반듯하게 누운 채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올려다봤다.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치는 건 멍청이나 하는 짓이다.
윤제가 열감이 덜 가신 얼굴을 손으로 뒤덮으며 웃었다. 눈이 가려진 용아가 속삭였다.
“안 보여요.”
“응.”
용아의 순진한 말에 윤제는 자신이 생각해도 바보 같은 대답을 내뱉으며 손을 떼어 냈다. 시야를 가리던 손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본 용아가 웃음 지었다. 큰일이라고, 속삭이는 윤제에게 용아가 괜찮다고 위로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관대하고, 다정하고, 웃음이 너그러운 입술에 입술을 겹치며 윤제가 곤란한 소리를 흘렸다. 베개에 파묻힌 채로 입술을 얽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숨이 차도록 마주 닿아 있는 건 처음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얼떨떨한 시선을 건네는 용아에게 윤제가 애절하게 부탁했다.
“얼른 자.”
“왜 자꾸 자라고 해요…….”
용아는 하복부로 내리는 얼얼한 감각에 난감했다. 입술에서 제멋대로 모난 투덜거림이 내뱉어졌다. 한편으로 술기운 때문에 빠르게 오르는 잠에 눈이 가물거렸다.
“다 널 위해서지.”
윤제가 투덜대는 입술에 짧게 입술을 내렸다. 잠으로 감겨드는 입술이 우물댔다.
“……내가 괜찮다는데…….”
“괜찮긴.”
윤제가 투덜대는 입술에 입술을 가볍게 묻으며 난처하게 웃었다. 입술이 빨리는 감각 속에서 용아가 잠으로 가라앉았다. 잘 자, 윤제가 다시 한 번 밤의 인사를 건넸다. 두근두근하고 곤란한 밤이 고요히 깊어 갔다.
만경에 온 후로 늘상 늦잠을 잤던 용아가 새벽이 지나자마자 눈을 떴다. 잠에서 막 깼음에도 시야는 믿을 수 없도록 깨끗했다. 찬물로 씻고 난 것처럼 청명한 시야 가득 지난밤 자신의 추태를 받아 준 남자가 잠들어 있었다.
“…….”
모든 기억이 선명한 아침이었다. 용아는 베개에 얼굴은 묻고 소리 없이 끙끙 앓았다.
“일어났어?”
소리 없이 버둥거린다고 버둥거렸는데, 윤제를 깨운 것 같았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베개에서 얼굴을 떼어 내지 않은 채로 인사를 건넸다. 수치스러워 하는 뒤통수와 희미하게 부끄러워하는 목덜미로 쪽쪽, 입술이 내렸다. 익숙하지 않은 감촉에 용아의 뒷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굳어 있던 용아가 얼굴을 돌려 옆을 보았다. 돌아보는 입술 옆에 남자의 입술이 와 닿았다.
용아의 얼굴이 더욱더 황망함으로 굳어 들었다.
“안녕.”
윤제가 무심히 아침 인사를 건넸다. 당연한 것처럼 입술이 짧게 맞물렸다. 맞닿는 순간은 지극히 짧았다. 놀랄 틈도 없이 순식간이었다.
용아는 눈만 깜박였다.
“…….”
용아가 무얼 할 틈도 주지 않고 남자가 다시 용아를 부둥켜안았다. 그 단단한 품을 말은 않았지만 용아는 좋아했다. 따듯한 체온이 사방에서 감싸 오는 감각에 염려가 될 정도로 무력해졌다. 등을 안아오는 팔에 저도 모르게 몸을 내맡겼다.
“졸리다.”
윤제의 투정 같은 말에 용아가 고개를 끄덕이다 굳어 들었다. 귓가로 촉촉, 남자의 입술이 내렸다. 목덜미 깊숙한 곳에 얼굴을 묻을 것처럼 구는 윤제의 행동에 용아가 순간 숨도 쉬지 못하고, 멈추었다.
그 감촉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기이했다.
싫은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상체를 바싹 붙여 안아 오며 무릎 아래를 얽는 남자의 행동은 이전에는 없는 것이었다. 낯선 아침에 잠시 방황하는 사이 윤제가 다시 잠들었다.
“…….”
용아가 몸을 재빨리 일으키려 하자, 온몸을 얽고 있는 남자의 팔과 다리로 힘이 더해졌다. 잠든 줄 알았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너도 자.”
“윤…….”
“어제는 다 괜찮다고 했잖아.”
앞뒤 없는 난데없는 말에 용아는 아무 말도 못했다. 제대로 벙긋대지도 못하는 입술 위로 다시 깊은 입맞춤이 겹쳐졌다. 호흡이 마구 뒤엉켜 숨이 가빠졌다. 어깨를 안아 오는 단단한 팔이 좋으면서도 당혹스러웠다. 귓가로 남자의 입술이 짧고 강렬하게, 두서없이 내렸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마도 잠이 덜 깬 상태라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용아는 솟아오른 당황을 내리누르며 잠을 청했다. 뺨으로 입술이 꾹꾹 눌러지는 감촉은 모르는 척했다. 잠이 빨리 오길 간절히 바랐다.
모든 기억이 선명한 아침에 다시 잠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용아는 오랜 방황 끝에 잠이 들었다. 힘들게 잠이 든 탓인지 깨어난 뒷머리가 뒤숭숭했다. 여전히 많이 멍했다. 잠이 깬 듯 만 듯한 상태로 침상 끝에 앉아 있는데, 문이 열리고 윤제가 들어왔다.
“일어났느냐.”
수치로 굳어 드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예.”
용아는 뻔뻔스레 굴기로 했다. 당당히 행동하기로 다잡은 입술 위로 남자의 입술이 겹쳐졌다. 단박에 입가가 굳어 들었다.
“씻어야지.”
잠이 덜 가신 입술에 윤제의 입술이 머문 순간은 짧았다. 그래서 용아는 자신이 뭘 잘못 알았나 혼란해 했다. 윤제는 합방례를 치를 때마다 한없이 곤란해 했다. 그런 남자가 불쑥 입술을 가져다 댈 리 없었다. 그런 짓을 하고 용아를 보는 얼굴에 머쓱함 하나 없을 리 없었다.
“……네, 네…….”
윤제의 얼굴은 평연하기만 했다.
“용아.”
윤제가 주섬주섬 움직이는 용아를 불렀다.
“……네?”
용아가 경계 가득한 기색으로 돌아보았다. 남자도 방금 씻고 나왔는지 물기를 닦아 낸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산뜻한 감촉의 손이 손안에 감겨들었다. 손이 닿는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손가락이 얽히며 윤제의 쪽으로 당겨졌다. 그리고 입술이 겹쳐졌다. 용아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입술을 잔뜩 맛보는 남자의 움직임에 당황해 혀를 얽은 채로 말을 하려 해 뜻을 알 수 없는 웅웅거림을 흘렸다. 윤제는 우물대는 입술을 흠뻑 머금은 후에야 놓아주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이해했다.
류윤제가 용아에게 어떤 곤란함도 표하지 않고 입을 잔뜩 맞췄다.
“뭐라고?”
“……네?”
“방금 뭐라고 하려 했잖아.”
윤제가 은근히 몸을 물리는 용아의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아니에요.”
용아가 대놓고 몸을 빠르게 물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빠르게 손사래를 치고 도망치는 것처럼 씻으러 갔다. 한숨 깊이 잠들고 일어났는데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탁.
닫히는 문을 빤히 보던 윤제가 입가를 손으로 감싸며 웃음을 흘렸다.
용아는 알 수가 없었다. 윤제는 어제처럼 씻고 나온 용아를 욕탕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탕조에 몸을 전부 담그고 씻는 게 아니면, 씻고 난 후에 용아의 옷은 물에 빠진 것처럼 엉망이었다. 옷을 씻겨 준 거냐며 놀리는 말을 한 남자가 용아를 방으로 데리고 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 주었다. 괜찮다고 하고 싶었지만 윤제의 움직임이 용아의 반응속도보다 압도적으로 빨랐다.
아침 식사에 앞서 의원이 들 거라고 알려 온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입술을 먹어치웠다. 전혀 예상 못 한 행동이었기에 용아의 목 안에서 잠긴 소리가 웅웅 울렸다. 윤제는 축축하게 젖은 용아의 입술을 손으로 친절히 닦아 줬다. 곧 의원이 오니 어서 옷 갈아입으란 다정한 말이 귓가에 번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문이 닫히고, 문밖에서 의원이 다가오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의원은 용아가 다소 놀란 것 같지만 어제 사고의 여파는 보이지 않으며 염려할 것 없다 했다. 따로 처방 받은 약도 없었다.
그 후에 식사를 했다.
식사 때 윤제는 다정한 형 같았다. 용아가 좋아하는 것들은 용아의 앞으로 몰아 주었다. 평소와 같은 듯했다.
식사 후에는 차를 마셨다. 윤제가 네가 만든 차를 마시고 싶다 청했다. 여러 정황상 용아는 그에게 찔리는 것이 많았기에 순순히 청을 들어주었다. 첫 잔을 마시며 윤제가 차를 한 모금 맛볼 때마다 열렬히 칭찬했고, 용아의 입술을 짙게 머금었다. 뭘 하는 거냐고 물어야 한다는 걸 잊었다.
그저 머리가 멍했다. 어버버 하는 틈에 남자가 차를 마셨고,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첫 잔을 다 비울 즈음에야 용아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자리를 뜨는 방책을 떠올렸지만, 어디 가냐는 물음에 멈춰 돌아보다가 붙들렸다. 대답을 못 하는 입술로 웃는 입술이 내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용아는 파고드는 입술의 따뜻함과 다정함에 설득된 것처럼 습관이 돼 버린 움직임을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그걸 깨닫고 얼굴을 잔뜩 붉혀야 했다.
시선이 마주 할 때마다 입술이 얽혔다. 용아는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숨을 쉬는 것인지, 윤제가 빼앗아 가는 숨을 채워 넣으려고 숨을 쉬는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온종일 틈만 나면 남자와 입술을 얽었다.
왜 이러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물어보질 못했다. 입술이 맞물려 있을 땐 말을 할 수 없어서. 입맞춤을 하고 난 직후엔 숨이 차서. 숨을 좀 쉴 만하면 얼굴에, 목덜미에, 어깨에, 손에 윤제의 입술이 내려서 당혹스러워 어어, 하느라. 당혹이 가시면 남자의 입술이 주는 따듯함에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릴 즈음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처음부터 반복됐다.
곤혹스러운 하루에도 끝은 있었다.
“…….”
온종일 용아를 방 안에 붙들어 놓은 윤제는 저녁 식사에 앞서 다시 의원이 올 것임을 알렸다. 아침에 다녀간 의원이 괜찮다고 하지 않았냐 용아가 더듬더듬한 말로 물었다. 말을 하는 용아에게 윤제가 계속 입맞춤을 퍼부은 탓이었다. 윤제는 아침과 다른 의원이 온다고 했다.
저녁에 온 의원의 의견은 아침과 별다르지 않았다.
“공자께서 다소 놀라신 듯하나, 건강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을 듯하옵니다.”
“그렇소?”
의원은 용아에게 눈짓으로 예를 건네고, 말을 건네는 윤제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윤제의 걱정을 들으며 밖으로 나서는 의원은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좋지 않은 일의 징후를 소상히 알려 주었다. 용아는 자신의 방 탁자 앞에 앉아 별채 입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윤제는 걱정하는 병을 가진 것처럼 걱정으로 가득했다. 남자의 과한 걱정에 부끄럽고 민망했다. 쑥스러워 하는 귓가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
윤제는 어제 용아가 물에 빠진 것을 이유로 낮 동안 방을 나서지 못하게 했고, 식사도 무조건 방에서 받도록 했다. 용아는 방 입구에서 기다리는 일꾼의 방문을 허락했다.
“들어오세요.”
“형님께서 공자를 무척 아끼시나 봅니다.”
푸근하면서도 청초한 인상의 여급이 웃으며 속닥였다. 윤제와 의원의 대화는 아직까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전부 윤제의 걱정 병 때문이었다.
“저는 건강한데 말이지요.”
“그런 말씀 마세요. 호수가 워낙 깊어 물에 빠지고 난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른답니다. 저리 걱정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찻물 데울 화로를 들일까요. 그나저나 오늘은 내내 놀러 못 가셔서 무료하시겠습니다. 내일도 못 가실 거예요. 의원은 내일 아침 한 번만 더 보겠다 하세요. 모레 올 의원까지 일정 약속이 끝나 있는 듯했어요. 물러갑니다.”
“……고마워요.”
용아는 귓가에 속닥속닥 울리는 말에 조용한 소리를 흘렸다. 여급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제가 돌아왔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시선을 보며 윤제가 의자에 앉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놀러 갈 생각 마라.”
“윤제 형…….”
용아는 상대에게 잘 통하는 말을 건넸다. 오늘 이 말은 금기어였다. 그리 부르면 혀뿌리가 얼얼하도록 입술을 빨렸다. 탁자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윤제의 입술이 가볍게 용아의 입술을 빨았다. 식사 때라도 예의를 차리는 듯했다. 입술을 물리는 남자를 용아가 멍하니 보고 있자, 윤제가 넋 나간 얼굴을 향해 친절히 말했다.
“먹어라.”
“윤…… 아닙니다.”
입술을 떼려던 용아가 다급히 부정했다.
“걱정돼서 그러지.”
윤제가 그릇만 보고 있는 조용한 얼굴을 향해 말했다.
“저는 튼튼합니다.”
용아의 단호한 말에 남자가 웃음을 퍼트렸다.
“야한 소리를 하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다. 용아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황망한 말을 한 얼굴을 망연히 바라봤다. 어서 먹어라, 라는 권유를 선선히 내뱉은 남자가 무심히 식사를 이어 갔다.
“…….”
용아가 지켜본 윤제는 성적으로 담담한 편에 가까웠다. 상대적인 평이었다. 남자를 그런 의도로 보는 시선이 훨씬 많았고, 의도가 담긴 시선에 그는 무관심한 쪽이었다.
황궁 안에서도, 황궁 밖에서도 남자를 향하는 의도가 담긴 시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가 스스로 인내심이 강하다 자부하는 것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진족의 성향상으로도 그랬다. 승명원에 다닐 적에 대충 보았음에도 동행한 황족 중 자신에게 관심을 표하는 눈길에 가장 무관심한 것이 윤제였다. 그에게 정인이 있어 그러는 줄 알았지만, 진양군을 제외하면 나머지 셋은 그때도 군왕부 내원에 이미 수많은 처첩을 들인 후였다. 너무 많은 관심에 그런 시선이나 의도에 무심해진 것 같기도 했다.
한편, 윤제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이해가 갔다. 태자가 찾아와 행패를 부린 첫날, 용아는 저를 찾아온 남자가 당황스럽도록 잘생겨서 타인이 보기에도 그런 가 확인코자, 궁인에게 태자가 잘생겼느냐 물었다. 궁인은 용아가 어린 소년이라 어른 사내의 생김에 대한 일반적인 평에 공감하기 어려워 묻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답변을 망설였지만, 무척 고민한 끝에 태자께서 헌앙하시다, 라고 했다. 궁인의 말에 용아는 타인과 자신의 시선이 그리 다르지 않음에 안도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만으로 시선을 끄는 사내였다. 윤제가 남의 시선에 관심 없는 것도 이해가 될 듯 말 듯 했다.
그런데 대체 내 말의 무엇이 야하지?
음식 하나를 입에 넣고 자신을 유심히 살피는 시선에 윤제가 멋쩍은 웃음을 퍼트렸다. 고민이 역력한 용아의 얼굴이 흥미진진했지만, 이러다 체하거나 얼굴에 구멍이 날 것 같았다.
“할 말 있으면 해라.”
“저 튼튼해요.”
“야한 소리 좀 그만해.”
윤제가 야유하듯 말했다. 황망하고 또 황망했다. 용아는 억울해서 콧김을 씩씩 내뿜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디가 음란하다는 겁니까. 제가 한 말에 음탕한 의도 따위 조금도 없단 말이에요. 튼튼하다는 게 뭐가 야해요. 의원 더 만나기 싫고, 내일부터 나가 놀 겁니다.”
“내 귀에 야하게 들려.”
윤제가 덤덤히 말했다. 억지였다. 논리 따위 없는 말이었다. 용아의 얼굴이 황당하다! 라고 외쳤다.
“…….”
차를 마시고 입가를 닦아 정리한 남자가 일시적으로 멈춘 용아의 얼굴에 촉, 입을 맞췄다. 어느새 달콤한 소리가 일상이 되어 있었다.
윤제가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까지 계속 아픈 체 해. 힘든 척, 유약한 체 해. 호수에 빠지고 난 후잖아. 네가 튼튼하면 내가 참기 힘드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자꾸 그러냐. 어깨 아래로 손 안 대는 게 나라고 쉽기만 하겠느냐.”
“그건…….”
웅얼대려는 입술로 신속한 입맞춤이 내렸다.
“그러게 어제 술 마시고 왜 그랬냐. 그래, 귀엽긴 했지. 제북 대부인이 너한테 주기적으로 과실주를 줬다면 조카가 귀여운 짓을 하는 걸 보고 싶어서였을 거다. 술 취했다 해도 그러는 거 아니지. 뭐든 해도 되긴. 뭘 하면 도망갈 거 다 안다. 참을 필요가 없어? 진짜? 안 참으면 짐승 취급할 것도 다 안다. 다 아는 건 나지. 네가 다 알긴, 뭘 다 알아. 거짓말은. 아무튼 그건 됐다. 술 취해 한 말이니까. 앞으로 내가 술 권하면 도망쳐. 음탕한 짓을 하려는 걸지도 모르니. 그래도 나한테 이 정도는 봐줘야지. 술 취한 네가 다 괜찮다고 한 거 술 깬 네가 조금은 책임지는 게 맞잖아?”
정중하기만 하던 저음이 말을 내뱉을수록 불만을 드러냈다. 남자의 입술이 다시 용아의 입술을 먹어치웠다.
“……우, 응…….”
깊은 입맞춤에 흐릿한 소리가 울렸다.
“내일 아침에 의원 한 번 더 보고 나면 객잔 반경 50보 안에서는 놀게 해 주마. 야한 소리 그만하고, 마저 먹어라. 잠깐 다녀올 테니 여기 있어. 어디 가는지 묻지 마.”
남자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너그러운 웃음인데 성질을 부리는 것처럼 험악하게 느껴졌다. 잔뜩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용아는 다른 말 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윤제가 허리를 숙여 붉어진 귀와 목덜미를 따라 입술을 내리고 돌아섰다.
용아는 밤새 남자의 품에 안겨 입 맞췄다. 윤제에게 때때로 야한 소리 좀 내지 말라고 무척이나 구박을 당했다. 그저 소리가 나간 것뿐이라 억울했는데, 따질 수조차 없었다.
귓가로 내리는 남자의 숨소리가 야했다. 입맞춤을 하고 물러나는 입술의 웃음이 야했고, 입술과 입술 사이에 퍼지는 숨결은 그보다 더 야했다. 숨을 삼키는 남자의 목덜미가 야하게 보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 역시 야했다.
윤제의 모든 것이 음란했다.
그런데 불쑥불쑥 입을 맞춰 오며 네가 너무 야해서 큰일이라는 남자의 나직한 툴툴거림에 기가 막혔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입맞춤을 퍼붓는 남자의 무자비함에 숨 좀 쉬게 해 달라고 헐떡이며 말하려 하자, 네가 그러면 내가 어떻게 참겠냐고 훈계 아닌 훈계를 당해야 했다.
성질 같아서 그럼 참지 말라고 버럭 외치고 싶었지만, 이따금 자제력을 잃은 윤제가 체중을 실어 압박해 오며 등이나 엉덩이, 허벅지를 음란하게 쓸고 갈 때 말로 할 수 없는 감각이 쏟아지고 어떤 움직임도 할 수 없었기에 괜한 허세를 부리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다.
순진함과 인내가 뒤범벅된 야한 밤이 지나갔다.
윤제는 약속을 지켰다. 용아는 새로 밝은 아침에 의원을 한 번 더 만난 후 나가서 놀 수 있었다. 물론, 새벽에 가까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남자의 품에 안겨 잔뜩 입을 맞췄고, 씻고 나오자마자 밖에 기다리고 있던 품에 안겨 남자의 입술이 뺨에, 귀에 뒤통수에 정신없이 내리는 것을 멍하니 흘려보내고, 끝에는 혀를 흠뻑 얽는 입맞춤을 주고받았다.
윤제가 몰아쳐 올 때 숨을 쉴 수 없는 건 여전했다. 하룻밤 사이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아침을 먹고 난 후에 용아는 객잔 정원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윤제가 놀고 있는 용아를 불러 나무 그늘이 내린 곳으로 데리고 가 입을 맞췄다. 용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해 남자의 가슴을 몇 번인가 더듬었다. 윤제가 자신을 자극 말라며 엄중한 얼굴로 경고하고, 용아의 입술을 손으로 실컷 더듬어 만지고 난 후에야 놓아주었다.
황당했다.
용아는 늦은 점심을 먹고, 객잔 밖에서 노는 아이들을 구경하다 어린 손들에 이끌려 갔다. 아이들과 놀고 있는 용아를 본 윤제가 어릴 때 또래랑 못 놀아서 삐뚤어졌으니 애들이랑 놀면서 결핍된 걸 채우라는 얄미운 소리를 했다. 말을 마친 후에는 커다란 손으로 뒷머리를 쓸어 주었다.
기분이 좀 그랬다.
용아는 꿋꿋하게 아이들과 더 즐겁게 놀았다. 윤제는 걱정 많은 팔불출 형처럼 객잔 의자를 가지고 나와 앉아서 용아를 지켜봤다. 진흙놀이, 나무 쌓기, 패 맞추기 같은 단순한 놀이에 용아가 깊이 심취했다. 한참 놀고 있는 용아의 곁으로 윤제가 다가왔다.
같이 놀고 싶은가.
용아는 역시, 라고 생각했다. 윤제가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뒤통수에 대고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방에 황족으로 의심되는 4인이 다가오고 있다.”
용아의 귀에 입술을 대다시피 하며 떠들었기에 저희들끼리 바쁜 아이들은 남자의 말을 듣지 못했다. 윤제가 아이들이 있어 염려된다는 듯 노느라 분주한 어린 머리들에 시선을 던졌다.
“윤공자 형님이 이쪽으로 끌어내 주면 소제가 붙들겠습니다.”
용아가 가볍게 품 안을 손으로 훑으며 말했다. 윤제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윤제가 몸을 일으켜 걸음을 내딛듯 한 발 내었다. 발이 땅을 딛는 순간 가볍게 땅 울음이 일었다. 아이들을 등지고 있고, 약한 강도여서인지 한참 패를 뒤집던 아이들은 그저 얼음된 것처럼 멈췄다.
진족은 서로의 힘을 불쾌해 했다.
용아는 상대가 다가와 힘을 내어 보이면 물러나며, 상대가 도망가면 따라가 공격하려 했다. 어정쩡하게 몸을 내었다가 물리려는 이들에게 용아가 손안에 쥐고 있던 작은 표창을 연이어 날렸다. 표창은 석주 길거리에서 산 것으로 장난감 같은 모양 덕분에 윤제를 여러 번 웃게 했다.
티딩. 팅. 툭. 투툭.
날아간 표창이 걷어 내져 튕겨 나오는 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으억.”
“악, 이게 뭐야.”
들려오는 목소리에 윤제가 실망이라는 얼굴로 용아를 돌아보았다.
“안 죽였느냐?”
질문하는 반듯한 얼굴은 냉혹하기만 했다.
“……네?”
아이들이 사람 소리가 난 곳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윤제도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가는 아이들을 뒤따랐다. 황망해하던 용아도 모두가 향한 곳으로 다가갔다.
“용공자!”
예상대로 익숙한 얼굴들이 용아를 반겼다.
“형님들. 언공자. 강녕하셨습니까.”
소양군과 영양군과 진양군, 세 왕공 자제와 언준이었다. 네 남자는 용아가 날린 표창에 옷이 고정돼 나무에 걸린 꼴이 돼 있었다. 헌앙한 사내들을 고정하고 있는 표창이 고양이 발자국 모양, 강아지 발자국 모양이라서 모양새가 영 그랬다. 놀며 구경시켜 준 덕에 용아의 표창을 아는 아이들이 용아를 돌아보며 외쳤다.
“용아 형님, 멋집니다!”
아이들이 사심 없이 격하게 칭찬했다.
“고맙다.”
용아는 네 남자의 체면을 생각해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윤제는 용아가 표창을 거두러 가기 전까지 지켜만 보다가 용아가 표창을 뽑아내려 하자, 뒤따라가 대신 표창을 뽑았다.
용아가 던진 표창들은 손목 옆, 팔꿈치와 무릎, 어깨 옷자락을 고정하고 있었다. 네 개의 강아지 발자국 모양 표창은 사타구니 아래와 허벅지 사이를 노렸는데, 단 하나만 목적한 바에 꽂혀 있었다. 세 명의 황족을 보호하느라 제 몸을 보호하지 못한 언준의 다리 사이에 꽂힌 표창을 윤제가 유심히 바라봤다.
“큰일 날 뻔한 거 아니냐.”
“송구합니다.”
태자가 그곳의 표창까지 빼어 줄 리 없었다. 언준을 짤막하게 대꾸하며 자유로워진 손으로 위험한 곳에 꽂혀 있는 표창을 뽑아냈다. 그곳을 상하게 하거나 닿은 것은 아니지만, 그곳 가까이에 있던 표창을 태자비에게 다시 돌려주는 게 좋을지 잠시 망설여졌다.
“언공자, 죄송합니다.”
용아가 급히 사과하며 입구가 열린 금낭을 내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사치한 금낭에 괴악한 모양의 표창을 넣으며 언준이 점잖게 대꾸했다. 금낭에 담기는 표창을 살피는 용아의 얼굴이 무척이나 해맑아서, 지켜보는 사내들의 얼굴은 더욱 기묘해졌다.
“헌데 네 분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금낭을 품에 넣으며 용아가 물었다.
“허허허, 용공자.”
“그게.”
“…….”
“…….”
네 남자가 곤란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정답을 말한 것은 윤제였다.
“우릴 잡으러 온 것이다.”
눈썹을 사납게 기울인 얼굴이 속닥이는 목소리로 그러게 아까 없애 버렸어야지, 라고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용아는 남자의 매정한 말에 무언가 깨달은 얼굴을 하며 아주 조금 뒤늦게 후회했다.
황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