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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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장군부가 보내온 보상품 처분에 대한 권한을 전부 영화대로 넘겼다. 익선 행궁 사고와 관련해 일임 받은 태자는 태자비의 청에 따라 황족에게 보낼 품목과 국고로 처리될 품목에 대해 편전 회의 때 고해 올렸다.

황제는 태자의 말을 고생하였다로 일축했다.

모든 물품의 권한을 가진 태자비가 지극히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 피해를 입을 뻔한 황족에게 위로품을 보낸 후이고, 황제가 동의한 사항에 대해 따지고들 틈이 없었다. 대신 국고로 넘어 온 물목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치열한 다툼이 이어졌다. 각 부의 이해득실이 달려 있었다. 왕공들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방관에 가까운 황족들을 두고, 조정 대신들만의 싸움이 한참 계속됐다. 끝까지 결론을 내지 못해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금당대로 향하려던 윤제는 정천궁 심처로 향하고 있었다.

태감 총관 좌첨이 태자를 이끌었다.

황제는 만인지상이기에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까지 모두에게 드러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천자에게 사적인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천궁의 많은 부분이 공적인 곳으로 쓰였지만 일부 전각은 친족인 윤제조차 들어 본 적 없었다. 깊고, 깊은 곳에 위치한 전각에는 ‘정(亭)’이라는 한 글자만 쓰여 있었다.

“드소서.”

윤제는 말없이 태감의 청을 따랐다. 황제께서 찾는다는 말을 듣고 왔으나 그것이 반드시 황제와 독대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전각 안은 볕이 잘 들어 따듯한 풍경이 윤제를 맞았다. 열린 전각 문 안으로 드는 윤제의 곁에 좌첨이 뒤따랐다. 태감은 지나온 문이 닫히고 나서야 새로 나타난 문을 열었다. 부드러운 바람과 햇살이 드는 환한 곳에 소박한 의자가 있었다. 오래되어 표면이 반질반질한 의자에 앉은 노파는 궁인의 복식을 했으나 태자도 황제의 총관 태감도 알아보지 못했다.

“손님이 드시었소.”

웃음 짓는 노파의 목소리는 가늘고 여렸다.

“황노야. 빛나는 분이 오셨다오.”

“폐하께서?”

좌첨이 노파의 팔을 붙들며 말하자 몸을 일으키며 예를 취하려 했다.

“태자께서 오셨다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빛나는 분을 뵈오니 광영이옵니다. 쇄한 육신이 단정치 않음을 용서하여 주소서.”

“예는 되었습니다. 앉으세요.”

윤제가 엉뚱한 곳을 보며 예를 올리려는 노파를 급히 말렸다. 좌첨이 노파를 다시 자리에 앉혀 주고 태자가 앉을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윤제는 자리에 앉으며 그를 보며 희미하게 열린 눈이 색을 분간하기 어려운 탁한 노란색인 걸 보고 멈칫했다.

좌첨은 태자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보이고 황노야라고 부른 노파의 귀에 속삭이고 물러갔다. 닫히는 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던 노파가 감은 눈으로 윤제를 찾았다.

“전하.”

“할멈은 누구시요.”

부드럽게 끝이 흐트러진 노파의 목소리가 귀에 감겨 왔다.

“소인에게 높여 말하지 마소서.”

“황노야라 부르면 되는가.”

윤제의 말에 황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불러 주시면 영광이지요.”

“나에게 할 말이 있으신가.”

“소인과 전하의 대면은 늦은 편이랍니다. 폐하께서 소인의 귀를 막고, 전하를 보여 주지 않으려 하시어 이 사람은 더는 빛나는 분을 뵙지 못하는가 했습니다. 이리 훤하신 분을 뵈니 기쁘기 그지없사옵니다. 소인의 손녀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요.”

황노야가 마치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윤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황께서 황노야의 귀를 막으셨나.”

“어림없지요.”

“어림없다……?”

무겁고도 가벼운 말이 오갔다.

“중경 진족은 항상 그랬다 들었으니 신경 쓰지 않사옵니다. 폐하께서는 당신에 대해서도 숨기려 하셨지요. 젊은 날에 소인이 닦달한 것이 듣기 싫으셨나 보옵니다.”

노파는 발랄한 소녀처럼 떠들었다.

“황노야는 홍문에서 오셨군.”

“그러하옵니다.”

“부황께서 무엇을 숨기려 하셨는지 물어봐도 되는가.”

윤제가 호기심 많은 소년처럼 속삭였다.

“아니 되옵니다. 허나, 전하에 대해 소인이 들은 바가 있으니 쇤네의 말을 듣다 보면 아시게 되실 겁니다. 폐하께서 이 늙은이에게 전하께 말하여도 좋다 허락하셨으니 오늘 일족과 홍문에 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전하께서도 당신이 진족 일가의 후손이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아오.”

“소인에 대한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오나, 소인이 태어난 곳은 중경이옵니다. 그러나 모친이 태어난 곳은 홍문이었습니다. 홍문과 인연이 있는 아이들은 나이가 차면 홍문으로 돌아가 홍문의 선택을 받습니다. 제북에 갔을 때, 소인은 홍문의 아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중경으로 돌아왔습니다. 소인의 일가는 중경 진족의 가솔이기 때문이지요. 중경 진족의 수장은 당금 황가이옵니다. 못된 폐하의 방해로 전하께서 알지 못하시겠으나, 황가 적통과 황족이 후손을 얻는 규칙은 다르옵니다. 중경에 터를 잡은 황족은 지극히 소수입니다. 황가 적통은 그보다 더 적지요. 황가 적통이 후손을 얻는 법칙은 제북 진족이 후손을 얻는 법칙과 더 닮았습니다. 전하께서는 홍문의 다른 이름을 아시옵니까.”

“모르오.”

“저런. 폐하께서 정말 못되셨습니다. 홍문의 다른 이름은 백문이옵니다. 진족 일가의 후손들은 홍문의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진족이라 부르나, 엄격히 따지자면 진족의 힘을 부릴 수 있는 이만을 진인이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오서도 진인이 되시옵니다. 이해가 되시옵니까.”

“이해했네.”

“진족은 정해진 짝을 통해서만 후손을 보는데, 그들을 홍문에서는 백화(百花)라 하옵니다. 백화란, 말 그대로 온갖 꽃이라는 뜻입니다. 꽃은 저마다 다른 특징이 있는데 홍문 주위에서 태어나는 백화들 역시 저마다 다른 특징이 있기에 그리 부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백화가 많이 태어나는 곳이기에 홍문은 또한, 백문이라 불립니다. 아주 옛날에는 백화가 훨씬 많아서 진족 안에서 백화를 함부로 다루었고, 그보다 가까운 옛날에는 백화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며 백화의 수장이 진족을 다스렸지요. 중경 안에는 손에 꼽을 만큼 진족이 소수이나, 제북은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 진족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백화입니다. 나머지 셋 중 하나는 진족이나 백화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거나, 그들의 후인 중 진족이나 백화가 태어날 수 있어 그 땅을 떠나지 않습니다.”

“…….”

“꽃은 아름답지요. 때가 되면 꽃은 개화하여 짝을 받아들일 것임을 알립니다. 제북에서 태어나는 백화 중에 특별한 꽃들이 있사 온데, 스스로를 숨길 줄 아는 꽃이옵니다. 장군부 십일 후족이 본신을 숨길 줄 아는 백화가 태어나는 가문들입니다. 진족은 반드시 백화를 통해서만 후손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중경 황가 적통은 자신을 숨길 줄 아는 백화를 통해서만 후손을 볼 수 있지요. 반면, 중경에 터를 잡은 다른 진족과 방계 일가는 백화가 아닌 이로부터 진족의 힘을 지닌 아이를 볼 수 있습니다. 황가와 황실 종친은 분명 친족임에도 후손을 얻는 방법에서 뚜렷한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서로를 의지하고 견제할 수 있다 하더군요. 이 늙은이가 홀로 너무 떠들었습니다. 전하, 궁금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윤제는 긴 시간 말이 없었다. 노파의 물음에 윤제가 입을 열었다.

“역대 황가 정후들은 후족가의 백화란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중경 안에서 황가 적자들도 여타 황족들처럼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면 더 가능성이 늘어나니 후손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주장하는 이들도 있네.”

윤제의 말에 황노야가 조글조글하게 주름이 진 입술로 웃었다.

“천벌 받을 소리를 하십니다.”

“송구하오.”

“아니옵니다. 소인의 말이 불손하였습니다. 가까운 옛날에, 황실 진족이 장군가 후족들처럼 왕궁에 모여 살 즈음일 겁니다. 그때 황가 진족들도 그리 생각하였지요. 오랫동안 후손을 기다려 왔으나 후궁 안 처첩이 기백이 되어 가는 데도 후손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는 아시지요?”

“신부 사냥.”

“그렇습니다. 황가 진족이 이후로도 왕궁에 모여 살았던 이유가 신부 사냥에서 얻은 백화 때문이었지요. 홍문을 처음으로 마주한 중경 진족에게 그곳은 별천지였지요.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한 곳에 당도하였다고 뒷이야기가 항상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수많은 진족은 백화를 사냥하고 약탈하였고, 중경으로 온 백화 중 일부는 죽고 일부는 죽기를 바랐습니다.”

윤제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침묵하는 이를 상대로 황노야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의 제북은 대가주가 다스리나 옛날의 제북은 백화 가주가 다스렸지요.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짝을 정하지 않아도 되는 백화 가주가요. 그는 진족의 힘과 무관한 특별함을 가졌고, 일족을 수호할 수 있으니 모든 백화가 그녀를, 그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라고 개화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황가 진족 옆에 있으면 정해진 순리보다 더 빠르게 개화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개화한 백화는 주기를 거칠 때마다 신열에 들거나 통증을 호소합니다. 진족은 백화를 배필로 들이고, 백화의 주기에 오는 통증을 가라앉도록 힘을 나누어 줍니다. 전하, 당신의 꽃은 얼마나 자랐습니까. 이제는 피어나실 때가 되셨는데요.”

윤제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노파가 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에게 낯설기만 했다.

“그분은 아름다우십니까.”

윤제의 침묵에 황노야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어여쁘지.”

윤제가 조용히 답했다.

“백화는 주기 때 진족의 힘이 없다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다니……? 그저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아주 옛날에는 그러기도 했습니다. 지금이야 세월이 흘러 약술로 통증을 다스릴 수 있사옵니다. 때로는 개화를 늦추고 주기 자체를 억제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허나, 주기가 시작되면 괴로움은 여전할 겁니다. 당신의 꽃을 보살펴 주십시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윤제가 부드러이 웃는 얼굴을 향해 말했다.

“홍문의 백화들은 자신의 특이성에 대해 알고 있나.”

“알 겁니다.”

“홍문, 하후가 백화를 아는가.”

“전하.”

윤제의 물음에 황노야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말하시게.”

“아시옵니까. 저희 일가는 주인을 따르고자 대를 이어 홍문을 배신하고 있습니다. 소인은 하후가 백화에 대해 모르지 않으나 그보다 중경 황족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소인이 드리는 말씀을 잘 들어 주십시오. 진족과 백화는 서로에게만 충실하겠다는 뜻으로 가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가약을 맺으면 주기에 들더라도 백화의 어려움이 줄어드옵니다. 전하께서는 백화가 아닌 정인이 있으시다지요. 그럼, 당신의 백화와 가약을 맺어선 안 됩니다. 가약을 어기면 꽃의 독에 당하게 됩니다. 가약을 어긴 대가는 진족과 백화 모두를 죽일 수 있습니다.”

황노야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전하, 정고를 아십니까. 사특한 요녀가 제 피를 먹여 키운 꽃을 사내에게 먹여 사내가 자신 아닌 다른 이를 품었을 때 저주에 빠지게 한다는 일화에 나온 독이옵니다. 정고가 바로 요녀의 피를 먹고 자란 꽃의 독이옵니다. 정고는 요녀를 죽여 저주를 막을 수 있다 합니다. 정고와는 분명 다르나, 가약을 어길 때 오는 죽음은 막을 방도조차 없습니다.”

윤제는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당신의 유일한 짝이 되어 줄 수 있는 백화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고, 그는 당신을 두고 도망갈 수 있습니다. 당신의 백화는 진족의 힘 아래에 있지 않으니까요. 또한, 당신 아닌 짝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황가는 이 땅 위의 어떤 진족보다 강성합니다. 당신의 백화에게 황가 적자의 흔적을 남겨 두세요. 다른 진족이 취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당신의 백화가 전하 아닌 다른 진족과 짝을 맺는다 해도 전하께서 그를 끊어 내실 수 있지만, 황궁에 든 백화가 다른 짝을 맺게 둘 수 없음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꽃을 소중히 여겨 주십시오. 전하 아닌 다른 이를 택할 수 있는 백화에게 족쇄를 걸어 두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결코 잊지 마시고요.”

말을 마친 황노야가 지친 얼굴로 미소했다.

“흔적을 남긴다는 게…….”

윤제의 물음은 조심스러웠다. 황노야의 답은 무심하고 즉각적이었다.

“체액을 주고 받으셔야 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에 윤제의 얼굴이 기묘하게 굳어 들었다. 곤란한 것을 마주한 것처럼 목을 울리는 사내의 반응에 노파가 짓궂은 소녀처럼 키득거렸다. 윤제가 놀리는 게 또렷이 느껴지는 노파의 태도에 한마디 던졌다.

“황노야.”

“정식 합방례가 곧 있을 것입니다. 흔적을 남기는 방법은 합방례의 법도에 들어 있을 것입니다. 백화가 주기에 겪는 어려움은 전하께서 지금 마주한 곤궁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가약을 맺지 못하시니 더욱 전하의 백화를 정중히 보살펴 주셔요. 약속하여 주십시오.”

“약속하겠다.”

윤제의 대답에 황노야가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손을 청하여도 되겠습니까, 전하.”

모든 것이 소박한 노파였다. 그러나 왼손과 팔만은 달랐다. 차르릉, 소리가 나도록 수십 개의 빛나는 팔찌가 손목에 걸려 있었고, 왼손 손가락 전체에 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손가락 하나에 3,4개의 반지가 겹겹이 끼워져 있어 거추장스럽도록 화려했다.

이질적인 장식으로 가득한 손 위에 윤제가 손을 겹쳤다.

“황노야?”

눈을 꼼짝 않는 노파를 윤제가 조심스레 불렀다. 손에 겹쳐진 노인의 손은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가냘팠다.

“이 죄인은 용서받지 못할 겁니다.”

“일족을 등졌기 때문인가.”

“예. 이 죄인은 생이 끝날 때까지 일족의 가주를 뵐 광영을 누릴 수 없지요. 대신이라기엔 송구하오나, 주인의 손을 붙잡는 영화라도 누리고 싶습니다. 이 음흉한 늙은이를 혼자만 욕해 주십시오.”

“태자비가 보고 싶은가.”

“그분은 저를 용서하셔서 안 됩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늙은이는 유혹에 약하답니다. 모쪼록 소인이 고한 말들을 부디 잊지 마시옵고, 전하의 부친이신 폐하처럼 성실히 따라 주소서. 아셨지요? 소인이 드릴 말은 여기까집니다. 가 보셔도 좋습니다. 이 늙은 몸은 친절한 이가 와 일으켜 줄 것입니다.”

죄를 청하는 황노야의 얼굴은 겁먹은 아이처럼 어렸다. 윤제는 평온한 얼굴로 힘겹게 돌아간 얼굴을 바라보며 주름진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가 놓고 몸을 일으켰다.

“가 보겠다.”

“살펴가소서.”

황노야가 엉뚱한 곳을 보며 예를 올렸다. 윤제는 아이 같은 노파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나서는 그를 좌첨이 맞았다.

“이쪽이옵니다.”

태감은 방향만 안내하고 전각 안으로 향했다. 전각 밖으로 나서는 윤제를 황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왔느냐. 예는 되었다.”

윤제가 예를 올리려 하자,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윤제는 자신을 향해 내어지는 팔 곁으로 다가갔다.

“잠깐 걷자구나. 헌데, 황노야 엉큼한 늙은이가 젊은 사내 손을 청해 주물거리더냐.”

“주물거리지는 않았습니다.”

“거, 늙은이. 음흉하긴. 손을 잡히긴 했단 거 아니냐. 짐도 황노야의 말을 들으며 자주 손을 희롱 당했어. 노인네 협박은 얼마나 또 잘한다고. 네 부인은 너 두고 도망가 딴 놈이랑 살림 차릴 능력이 있다며 홍문 자부심이 머리꼭지까지 차 있는 치라니까. 그이 말은 잘 들었느냐.”

황제의 하문에 윤제가 곧바로 답했다.

“예, 부황.”

“이 아비가 너에게 너무 늦게 알려 주었다. 이유를 아느냐.”

“부황께서는 언제 아셨습니까.”

황제의 물음에 윤제는 답 대신 물음을 올렸다.

“열다섯, 열여섯? 어릴 때였다. 황노야 협박을 듣고 제북에서 신부가 오기 전까지 밤마다 신부가 도망쳤다는 소식이 올까 두려움과 분노에 떨었지.”

“소자에게 두려움과 분노를 모르게 하기 위함은 아니셨던 것 같습니다.”

윤제가 황제를 보며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윤아. 네가 내 아들이고 소중한 것처럼, 나의 고집으로 어린 날 시집와야 했던 태자비 역시 내게는 또 다른 자식이 아니겠느냐. 네가 잘못된 짓을 하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고, 네가 잘못된 행동을 하리라 생각하고 싶지 않다만.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태자비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려움을 네게 일찍부터 알려 줄 수 없었다.”

“소자가 태자비를 황궁 밖으로 데리고 다닐 때 염려되지는 않으셨습니까.”

“새아가가 똑똑하게 굴 거라 여겼다.”

황제가 웃는 낯으로 떠들며 아들을 다독였다.

“용아가 이 모든 걸 알고 있습니까.”

“알 거라 생각해라. 적어도 나와 너보다 더 잘 알 것이다. 하후가 후족이 늦되다 해도 이토록 늦된 것은 드물다. 하후가에서 따로 손을 쓴 게 아니라면, 태자비가 알고 피하는 것이겠지. 곧 합방례 길일을 정하여 알리겠다.”

“부황.”

윤제의 얼굴에 머뭇거림이 가득했다.

“물러가 보아라.”

황제가 하명하였다.

“물러가옵니다.”

잠시 마뜩찮은 표정이 스쳐 갔지만 윤제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예를 올렸다. 돌아서는 얼굴에 고민이 넘쳐흘렀다. 이제야 태자와 태자비의 입장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미안했고, 지난날 그가 어린 소년에게 쏟아 냈던 말들이 수치스러웠다. 동시에 궁금증이 들었다.

그때의 자신이 이 모든 걸 알았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미안함과 죄스러움, 책임감을 느낄 것인지 거만한 태도로 약점을 잡은 양 협박을 해 댔을지 알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걷는 윤제의 곁으로 정천궁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태감과 궁인들이 따라붙었다.

태자 일행은 이원을 지나쳐 동궁으로 향했다. 함월전에서 이원으로 오는 길목으로 드는 일행을 본 등우가 생각에 잠긴 윤제를 불렀다.

“전하.”

윤제는 부름에 시선을 돌리다 다가오는 용아를 보고 멈췄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용아가 예를 올렸다. 보통 때라면 그럴 것 없다 예를 올리기 전에 이르게 말릴 텐데,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은 예를 올리는 태자비를 묵묵히 마주했다.

등우가 잔뜩 낮춘 목소리로 태자의 등에 대고 소곤거렸다.

“전하.”

윤제가 예를 올리고 있는 용아를 일으키며 말했다.

“함월전에 다녀오느냐.”

“예. 윤공자 형님은 어디 다녀오십니까.”

용아는 남자의 손에 의해 일으켜지며 주위를 살폈다. 생각 없는 손을 커다란 손으로 붙잡아 오는 남자의 태도를 무심히 넘기려 했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듯한 윤제에게 그가 제 손을 잡았음을 소리 없이 전하고자 했다. 용아의 손을 움켜쥔 커다란 손에 남자가 시선을 주었지만, 붙잡은 손을 인지하는 것 같지 않았다.

현실감 없는 얼굴이 묘하게 현실에서 벗어나 있는 듯했다.

용아는 제 손을 당연한 듯 잡고 걷는 남자를 얼결에 따라 걸었다. 뒤에는 숨죽인 일행이 따랐다. 시선을 내린 얼굴들에게 괜한 말 말라 주의를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러는 게 괜한 짓 같았다. 커다란 손에 붙잡힌 채 이원을 벗어날 때까지 말없이 걸었다.

“부황을 뵙고 왔다.”

이원이 끝나 갈 즈음에야 윤제가 답했다.

“잘 뵙고 오셨습니까.”

용아는 적당히 답하며 커다란 손에 붙잡힌 손을 조심스레 물렸다. 단단하게 움켜쥔 손에 붙잡힌 손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아프게 쥐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곤란할 뿐이었다.

남자는 무성의하게 끄덕이며 손을 빼고, 팔을 뒤로 물리려하고, 등으로 버티려는 용아에게 손을 뻗었다. 곤란함이 더 짙어졌다. 커다란 손이 뺨을 뒤덮었다. 잘못 건드리면 부서지기라도 하는 것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 뺨과 턱, 이마로 이어졌다. 크고 단단한 손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기분이 기묘했다.

“어디 아픈 덴 없고?”

“없습니다.”

용아가 재빨리 답했다.

“잘 생각하고 답해야지.”

남자의 진지하던 손길이 움찔대는 뺨을 장난스레 만지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 불편해하는 뺨을 굽힌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누르던 윤제가 얼굴로 쏘아지는 사나운 시선에 희미하게 웃음을 퍼트렸다. 남자의 표정과 손은 금세 진지하고 걱정 가득한 모양으로 바뀌었다.

“전하.”

“형이 잘해 준다 했잖아.”

“윤공자 형님.”

두 손 가득 용아의 얼굴을 담고 남자가 소곤거렸다. 누가 보아도 귀여워하는 아우를 잔뜩 괴롭히고 또 어여뻐 해 주는 모양새였다.

“열나거나 그러지는 않아?”

용아는 기묘하게 유난한 남자의 태도에 휘말리지 않고자 했다. 뺨을 안고 있는 손을 한껏 불쾌해하며 쳐 내려는데 윤제가 슬쩍 손목만 비틀어 날랜 손짓을 피했다. 눈가는 웃고 있고,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형이 아프냐고 묻잖아, 라고 염려하는 척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가 얄미웠다.

“소제는 아주 건강합니다.”

용아의 힘찬 말에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물러갔다.

“다행이다.”

대신 다시 한쪽 손이 붙잡혔다.

“…….”

용아가 이것 좀 놓으라는 뜻으로 제 손을 붙잡은 커다란 손을 보여주듯 움직였지만, 윤제가 남은 손으로 불만을 퍼트리는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조모께서도 화아가 정복을 제대로 입는 걸 좋아하실 것인데.”

그리고 단장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놨다. 차라리 아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말없이 손만 잡고 걷는 몇 배는 좋았지 싶었다.

“할머님께서는 소제가 무얼 입든 좋아해 주십니다.”

윤제가 고개를 내저으며 제 취향을 떠들려 했다. 자신은 붉은 장포, 다홍색과 금색이 섞인 장포, 연한 옥색 장포가 좋으시다 구체적으로 알려 줄 남자를 익히 알고 있기에 용아는 손을 붙잡고 있는 커다란 손을 단단히 맞잡으며 빠르게 걷고자 하였다.

남자의 신조는 확실했다. 이왕이면 고운 게 좋은 거라는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태자이기에 윤제가 입은 황족 사내 복식은 황제 다음으로 복잡하고 치렁치렁했는데, 남자는 늘 호화로운 복식을 반듯하게 차려입었다. 아픈 용아를 돌봐 줄 때도 화려한 태자의 연복은 한결같았으니 타인에게, 태자비인 용아에게 엄격한 복식을 요구하는 걸 과하다 할 수도 없었다.

용아는 한시라도 빨리 영화대로 가고자 했다.

“잠깐.”

윤제가 제 손을 고집스럽게 이끄는 용아를 말리며 시선만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멈춘 태자를 본 등우가 곁으로 다가오려 했다. 윤제가 손을 보여 태감과 일행을 물렸다.

“……왜 그러십니까?”

용아는 특별한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이 형님이 귀가 밝다.”

윤제가 농을 하듯 떠들며 용아가 단단히 쥔 손을 깍지를 얽는 모양으로 쥐었다. 남자가 시선만으로 태자와 태자비의 긴 일행을 더욱 뒤로 물렸다. 용아가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윤제가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으로 용아를 이끌었다. 여유롭고도 고요한 발걸음을 따라 소리를 낮춘 발걸음이 따랐다.

눈치 없는 심장이 자꾸만 쿵쾅댔다.

용아가 평연히 숨을 들이켜고 내뱉으려 할 때, 짜악! 조심스레 걷는 발길 앞으로 험악한 소리가 날아들었다. 윤제가 재미있는 일이 있는가 보다, 라고 소곤거리며 용아를 조금 더 품으로 당겼다. 잠시 어렵게 가라앉혀 둔 심장이 다시 호되게 쿵쾅댔다.

빌어먹을.

용아는 나쁜 말을 삼키며 숨을 억눌렀다.

황궁, 호화로운 담 아래에서 사나운 소리가 울렸다.

철썩!

매서운 손에 맞아 휘청거린 몸들이 비척비척 제자리로 돌아갔다. 분홍빛과 보랏빛이 적절히 뒤섞인 하늘하늘한 3중 겹옷에 짙은 남색 비단 띠를 한 궁녀가 셋에, 남색 비단 띠 대신 흰 띠를 한 궁녀가 하나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소훈마마.”

동궁전 소훈 맹위이는 승상의 셋째 딸이다. 세상 모두가 아는 대로 맹씨가는 구족 출신으로 중경 안에서 황족에 버금가는 위세를 자랑하는 대귀족이다. 또한, 세상 모두가 잊었지만 중경 맹씨가는 황족이 짝을 잃었을 때 계후로 간택되는 중경 후족 가문 중 하나다.

그러나 중경 후족이라는 말은 세상에서 지워졌다.

당금의 황족은 장군부 후족과 일찍 정혼하여 정후를 들이면 평생 정후 한 사람을 바라보며 살아갔다. 때문에 중경 계후 일족의 소녀들은 오랫동안 황족과 왕공의 정처로 시집보내졌다. 중경 후족이라는 인상을 사라지고 군왕비 후보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위이는 그럼에도 자신 있었다. 운 좋게도 그녀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있었다. 지금의 황후는 출산 후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선황후에 이어 국모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는 어린 태자를 생각해 비교적 빠르게 계후를 들이는 데에 동의했다.

황후가 후손을 낳지는 못하였지만 위이는 그조차 상관 않았다. 황가와 황실 종친들 사이에 복씨성 후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 믿음이 존재하는 듯했지만, 뭍사람이 보기에 황가 적통과 황실 종친이 지닌 힘은 큰 차이가 없었다.

황궁 밖 황족은 내원에 수많은 처첩을 두고 태어난 아이 중에서 강력한 힘을 지닌 이에게 후계를 맡겼다. 황가 적통만큼은 아니나 황족 역시 손이 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구족은 장자계승을 원칙으로 했다. 당금 황족이 들어서며 황족과 마찬가지로 가장 능력이 우수한 이에게 후계를 맡겼다. 후계 승계 방식을 바꾼 후 대귀족은 더욱 빠르고 위협적으로 성장했다.

황가 적통의 손이 귀한 것은 제좌의 주인이 정후에게만 곁을 주기 때문이라 보았다. 황가 역시 황궁 밖 황족과 귀족처럼 수많은 처첩을 둔다면 황궁 안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게 위이만은 아니었다.

철썩!

다시 살벌한 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매서운 손에 버티지 못하고 넷 중 둘이 풀썩 나자빠졌다.

“일으켜드려라.”

맹위이는 태자비가 될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일으켜드려라.’

더 나아가 황후가 되리라 자신했다.

‘송구합니다, 맹 소저.’

8년 전, 어느 아침에 불현듯 전해져 온 태자에게 정인이 생겼다는 소식은 위이에게 충격이고, 동시에 기회였다. 태자의 정인이 된 진안이 과거에 그녀에게 사소한 온정을 받았다는 것이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과거, 귀족가의 모임에서 한미한 집안의 여식이었던 진안의 순진하고 어여쁜 얼굴은 독밖에 되지 않았다. 당연한 시비 끝에 밀쳐진 진안에게 위이가 온정을 베푼 것은 그것이 중경 후족가에서 가장 권세 높은 맹씨가 적녀의 책무라 여겨서였다.

기회가 현실적인 형태를 띤 것은, 양제가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황궁 법도에 익숙하지 않으니 대귀족가 영애의 조언을 구하며 위이를 동궁으로 와 줄 것을 청했을 때였다.

태자의 정인이 된 진안은 지난날 짧은 온정을 잃지 않고 맹위이에게 예를 다했다. 황궁으로 가 양제와의 만남을 거듭할수록 위이는 더욱 확신에 찼다.

대귀족가에서 태어난 위이에게 동궁전은 제집처럼 편안했다. 양제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황후가 그녀에게는 친척 오라버니와 혼인으로 이어진 집안의 어른이라 어렵긴 해도 숨도 못 쉴 정도는 아니었다. 말도 훨씬 잘 통했다. 간곡히 도움을 청하는 양제를 한껏 도와주며 기회를 엿봤다.

황궁의 엄중한 어려움과 황후의 매서움에 대해 토로하며 진정 자매가 되어 달라는 말을 양제가 건네었을 때 모든 게 다 이루어진 것 같았다.

양제의 청을 못 이기는 척 받아 주었던 그때부터 잘못되었을까.

“……송구하옵니다, 마마.”

소훈의 명에 궁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선시각 궁녀들이 황급히 말을 올렸다.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들이 가련하였다.

불쌍한 것들.

맹위이가 다시 손을 매섭게 날리려 했다. 결국 서러운 눈물을 엿보이는 아리따운 얼굴들 또한 자신처럼 황궁 안에서 무료하게 스러져 갈 터였다. 혹은 간사한 말에 현혹되어 자신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제 풀에 쓰러질 것이다.

“그만하세요, 위이.”

등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위이가 멈추었다.

망할 년.

돌아서는 표독한 얼굴을 마주하는 얼굴은 순하고 청초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두려움에 떠는 이들을 씁쓸한 눈으로 보는 게 아주 일품이었다.

“진 언니가 아니십니까.”

맹위이가 웃는 얼굴로 양제를 맞았다.

“모두 물러가라.”

양제가 윗사람다운 태도로 명을 내렸다. 선시각 궁녀들이 짧게 예를 표하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떠나가는 얼굴의 열 오른 눈가와 붉어진 뺨이 안쓰러웠다. 주위를 지키고 있던 궁인들 또한 빠르게 물러났다.

“흠.”

위이가 콧소리를 내며 웃음을 더 짙게 퍼트렸다.

“지금 웃는 겐가.”

“그래. 웃었소.”

“동생은 점점 정도를 모르는군.”

양제가 선하고 점잖은 태도로 소훈을 꾸중했다.

“나는 나쁜 이야. 그렇지 않아, 진 언니?”

위이의 웃음 가득한 비틀린 말에 양제가 아미를 구겼다.

“뭐라.”

“뭐라…….”

위이가 대놓고 양제의 말을 따라하며 웃었다.

“지금 무엇 하는 건가.”

양제가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위이가 표정을 지웠다. 그만 인정하기로 했다. 이 싸움에서 자신은 졌다. 처절하고 철저한 패배였다.

“네가 다 이긴 것 같지?”

위이가 입술을 끌어올리며 속삭였다.

“지금…….”

양제의 순한 얼굴에 분노가 퍼졌다.

황궁에 들어온 이후로 맹위이는 내궁의 법도에 따라 양제를 깍듯이 받들었다. 언젠가 자신이 양제보다 더 높아질 때를 대비한 행동이었다. 돌이켜 보면 터무니없는 꿈이었다. 과거 위이의 눈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양제는 황궁 안에서 헐벗은 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총애는 짧으니, 후궁에서 지녀야 할 것은 가문의 드높은 권세와 직첩에 맞는 권위였다.

지금 와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양제가 한낱 사내의 애정에 기댄다면, 자신은 태어난 가문에 기대었다. 상대의 것은 가변적이고 자신의 것은 불가결한 것이라 여겼다. 부친에게 분노하면서도 가문에 기대려 한 자신이 여전히 우습지만, 상황에 따라 처세가 능란한 양제가 더욱 가소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양제가 되고도 맹 소저라 부르며 어려워하던 여자는 위이가 입궁하자 단박에 태도를 바꾸었다. 여전히 선한 얼굴로 어려워하는 체하기는 했다. 없는 법도를 대신해 기존의 법도를 넓게 적용하여 태자비에게 해야 할 예법을 소훈이 된 위이에게 요구하였고, 곧이어 자신은 원하지 않으나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탓하며 호칭을 정리하여 한다고 했다.

위이는 태자비에게 올릴 예를 양제에게 올리고, 내궁의 법도에 따라 양제를 윗사람으로 높이고 따랐다. 그 예전에 자신의 앞에서 얼굴도 못 들던 한미한 가문의 여자의 대단한 성장이었다.

“나는 아주, 아주 나빠.”

맹위이가 짙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위이.”

양제의 얼굴이 심각했다.

“그리고 너는 나보다 더 나쁘고.”

대단한 비밀을 알려 주듯 속삭여 떠든 위이가 깔깔 웃음을 퍼트렸다. 남부럽지 않게 귀하게 태어나 엄하게 자란 탓에 발칙한 웃음을 퍼트리는 그 모습조차 대귀족의 풍모가 배어 나왔다.

“……어디 아픈 겐가…….”

양제가 얼굴에 올라 있던 화를 털어 내고 걱정하는 음성으로 물었다. 위이는 주위를 살펴 누구 보는 이가 있나 찾는 시늉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데도 눈앞의 진안이 양제의 모습을 보이는 게 웃기고 짜증스러웠다. 자신도 어지간하지만 양제는 참으로 대단했다.

“아니.”

“아니라니 다행이야, 위이.”

양제가 선량한 얼굴로 말했고, 위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화가 나.”

“화가 왜…….”

“내가 내 발로 스스로 걸어 이 황궁에 들어왔는데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황궁에 있는 게 화가 나다니 수치스러워서 정말로 화가 다 나. 너는 안 그래? 아아, 너는 여기 황궁에서 음흉한 짓 하느라 바빠서 한가할 틈이 없지. 양제 언니, 달랑 둘뿐인 동궁전 후궁 사이에 예법 운운하며 윗사람인 체하니 즐겁소. 대단한 권력을 지닌 거 같아 뿌듯하오? 사실 너도 전하가 취한 여자들을 후려치고 싶잖아. 네 자리 뺏을까 봐 두렵지. 어리고, 어여쁘고, 새롭고. 거기다 끊이지 않고 새로운 이가 올 걸 아니 암담하지. 너도 때리고 싶으면 불러다 쳐. 그게 솔직하지 않소?”

“어찌 이런 경박한 말을 하는가.”

“그리 아닌 체하다가 나중에 머리 풀고 미친 짓하는 거 아닙니까?”

양제의 말을 위이가 얄미운 얼굴로 받았다.

“그만하지 못하겠나.”

“못 하겠소. 아까 도망간 넷에 대해 내게 슬쩍 알려 준 게 진 언니 아니십니까. 아닌 척 마세요. 내가 때리는 거 아무리 봐야 양제 언니 속에 있는 화가 가라앉을까. 직접 쳐야 분기가 풀리는 거라오. 아니, 아니지. 아까 도망간 넷 중 수수를 대신할 이는 누구요.”

양제가 단단하게 굳힌 얼굴로 말했다.

“수수를 대신하다니…… 말씀이 지나치네, 소훈.”

“기억 안 나십니까?”

맹위이는 늘 알려 주고 싶었다. 세상 모두에게 말하고 싶었다. 특히 양제 본인의 앞에서 실컷 쏟아 내고 싶었다.

“나는 위이 너를 자매라 믿고 의지하였는데, 내게 이리 모진 말을 하는 이유가 무언가. 내가 무얼 섭섭하게 하였어? 소훈의 말대로 동궁 후궁이라곤 이제 우리 둘뿐인데, 우리가 서로 이러면 곤란하지 않겠어.”

양제가 처연하고 순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성격 사납고, 어질지 못한 인사라는 것은 황궁 안 모두가 아는데, 양제 언니에 대해 아는 이가 없는 게 늘 이 간악한 동생의 짜증 중 하나였습니다.”

“위이.”

“우리가 서로 이러면 곤란하다. 이러면, 이란 게 무업니까. 한 번쯤 해 밝은 하늘 아래에서 양제언니에 대해 누구에게든 말하여 주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이러면 곤란하다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동궁 후궁전의 시중을 이유로 들인 귀족가 여식들 중 누구를 전하에게 취하게 해 후궁에 남길까 작당하던 것을 말하십니까.”

“그만하시게.”

“그때 나는 이부상서의 딸이 세 번째 후궁이 되어야 한다 했고, 양제 언니는 동의하였으나, 엉뚱하게도 경수가 있는 곳으로 태자께서 우연히 실수로 드셨죠. 그게 정말 실수였을까. 경수가 후궁이 된 연유는 진 언니와 내가 상의한 내용과 똑같았습니다. 귀족가 아가씨가 뭘 모르고 제멋대로 탕조를 쓰고 나오다 벗은 몸을 외간 사내인 태자께 보여 후궁이 되는 것이었지요. 수수뿐입니까. 수수를 들이기 이전에, 그보다 앞서서 나를 들이기 이전에도 양제께서는 꾸준히 후궁으로 동궁전에 들일 규수에 대한 간택을 사적으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요즘은 아니 하십니까.”

“헛소리 그만하라지 않아?!”

“헛소리라니. 양제께서는 다루기 쉬운 궁녀나 당신 같은 한미한 가문의 소녀들을 태자께 안겨드리고 싶었겠으나 가당치 않다는 걸 내가 한 말을 들은 후에야 이해하신 듯하던걸요. 그때 내가 그랬지요. 태자께 헐벗고 덤빈 이가 한둘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장성하기 전부터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많았을 겁니다. 그나마 귀족가 여식이나 되어야 체면과 명분을 앞세워 강제로 후궁에 앉힐 수 있다, 했을 때 그때까지 당신의 실패를 이해한 것 같았는데요. 아닙니까.”

“그만해, 위이.”

“그만두기 싫다지 않아.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 표정이 어찌 그래. 불쾌하십니까. 나는 말이야, 양제 언니의 그런 능수능란함을 높이 평가합니다. 태자께서 당신의 정인이라는 말로 치장해 주는데 내가 후궁에 들기 전에는 얼마나 겸손하셨소. 내게 깍듯하게 맹 소저라 부르며 꼬박꼬박 예를 올렸었지. 그러다 내게 애원했잖소. 황궁에 궁녀로 있는 것과 후궁으로 있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황궁과 동궁 역시 완연히 다르다. 이곳에서 혼자 잘 지내기란 어렵다. 부디, 맹 소저께서 함께 있어 달라.”

“그만.”

“당신을 대신해 태자의 의복을 돌봐드리는 일을 넘겨주며 얼마나 소상히 조언해 주었습니까. 친히 사내 옷을 입고 자신을 상대로 먼저 해 보이라고 하는 배려심까지, 대단하셨지요. 양제 언니의 노력을 내 잊지 못할 거요. 처음 방에 들어 예를 올리고 태자께서 나를 물리지 않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네며 해야 할 것을 잘해 낸 후에 어떤 실수를 하고, 어느 때에 양제께서 오실지 친절하게 계획을 세워 주지 않았소. 태자께 잘 말하여 준다더니. 저가 보내 놓고 정인에게 배신당한 순진한 얼굴을 잘도 꾸미시더만. 사람들이 이런 양제언니의 노력을 알아야 할 것인데, 그러면 언니께서 많이 곤란하십니까.”

“위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너는 몰라도 나는 잘 알아. 네가 그리 상처받은 얼굴을 한 것은 막상 정인이 다른 이의 시중을 받으니 속상함을 숨길 수 없었다, 맹 소저가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하였지. 그때도 지금도 전혀 믿기지가 않는 말이야.”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겐가.”

“다음 말은 더욱 가관이었지. 양제가 태자비는 아니나 동궁전 후궁에 나와 너뿐이니 윗사람인 네게 예를 올리라 하였지. 그것이 법도이니 맹 소저는 이해하시라. 나도 참 어려서 그랬는지, 황궁에 살겠단 욕심에 눈이 뒤집혀서 정신이 나갔던지 잘도 너한테 절을 올렸지.”

“위이 자네가 최근 상심한 일이 있은 모양이야.”

“그리고 다음엔 뭐랬어. 맹 소저가 대귀족가 적녀이나, 황궁에 들어왔으니 보고 듣는 눈과 귀를 생각해 황궁의 법도에 따라 자매의 연을 맺자 하였지. 위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안 돼. 지금이라면 그럴 텐데. 그때는 내가 눈이 멀어 그게 당연한 줄 알고 덥석 받아들였다.”

“이만 가보겠어. 다음에 볼 땐 나아져 있길 빌겠네.”

양제가 다급히 말을 건네고 돌아서려 했다. 맹위이가 떠나려는 이의 얼굴에 대고 빠르게 말을 쏟아부었다.

“내가 여기서 누굴 붙들고 떠들 줄 알고 가십니까, 양제 언니. 내 말 아직 끝나지 않았어.”

“…….”

“문득 궁금해졌지 말이야. 나와 수수를 들일 때 이리도 복잡한 수작을 부린 이가 과연 우연히 태자 전하의 은혜를 입어 정인이 되었을까. 정말 그게 우연일까. 말해 보시오, 언니. 태자를 뵌 것이 정말 우연입니까. 양제께서는 누구의 조언을 받으십니까. 승상인 이 사람의 부친조차 알지 못하는 귀한 말들을 어디에서 듣고 와 알려 주십니까. 그가 양제 언니의 조언자입니까. 그가 대관절 누구인데요? 궁녀로 들어와 궁인 중에 친한 이가 많다는 핑계도 한두 번이라오.”

“헛소리 그만하…….”

맹위이의 말은 끝날 줄 몰랐다.

“설핏잎은 무엇입니까. 그건 왜 찾으시오. 설핏잎이란 게 양제언니께 관심이 사그라진 전하의 마음을 돌릴 비책이라도 됩니까. 그게 뭔데요.”

“네 마음대로 떠들거라.”

양제가 차갑게 말하고 발길을 돌렸다. 소훈이 시원섭섭한 얼굴로 허탈하게 웃다가 냉랭히 가 버리는 등을 따르려 했다. 항상 음전하고 예의 바르며 순후하다는 말을 듣는 양제의 걸음이라 생각할 수 없는 대범한 속도로 걸어가던 등이 멈칫했다.

“양제 언니……!”

어딜 그리 바삐 가냐 놀리는 말을 하려던 위이 역시 멈추었다. 겁에 질린 등이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전, 전하.”

도망치듯 뒷걸음치는 가냘픈 여자의 얼굴 위로 긴 그림자가 내렸다. 반듯한 얼굴은 헌앙했으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서늘하기만 했다. 사내가 퍼트리는 황족의 힘 앞에 양제도 소훈도 힘없이 흐느적댔다.

“…….”

윤제는 말이 없었다.

“전하, 소첩은 모르는 일…… 소, 소첩에게, 전하…….”

양제가 공포에 질려 허둥허둥 도망쳤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진안에게 가해지는 두려움은 극심해졌다. 태자를 알아 온 시간이 짧지 않은데 그가 이토록 무서움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녀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신연회 아수라장 속에서도 태자가 내보인 권능은 양제 자신에게만 가해진 게 아니었기에, 태자에 대한 어려움을 모르고 있었다. 태자가 표적을 가지고 내리는 권능 앞에 무력하게 뒷걸음쳤다.

황궁 안 모두가, 세상 사람 모두가 황가 적자의 고귀하고 포악한 권능의 어려움에 대해 입 모아 말하며 그녀에게 태자를 대할 때 항시 조심할 것을 권하였지만, 지금껏 태자의 권능 앞에 티끌만큼도 노출된 적 없었다. 사내는 자신이 가진 힘의 위험함을 잘 알고 있었고, 제 정인이 가지고 있는 유약함을 알았기에 언제나 주의해 왔다.

윤제는 무의식적으로 울며 도망치는 얼굴을 무미한 표정으로 관찰자처럼 따르며 내려다봤다. 그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걸음을 디디면 양제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남자를 피해 도망쳤다. 뒷걸질만 치던 진안의 도망은 뒤돌아 달리는 것으로, 끝에는 공포에 사로잡혀 네 발로 기는 것처럼 나자빠진 손으로 땅을 짚으며 허우적거리는 것으로 변모했다. 겉보기와 체면을 누구보다 중요시하던 양제였으나 지금은 자신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그만큼 태자가 내리는 공포가 컸다.

아름다운 비단 치마가 땅에 죄 끌려 넝마처럼 흉해졌다. 온몸이 한겨울 얼음물에 담겨진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고운 얼굴에 눈물이 흥건히 내렸다. 겁에 질린 얼굴이 그녀의 제어를 잃고 힘없는 소리와 의미 모를 도리질을 끊이지 않고 내보였다.

윤제가 진안의 앞에 구겨 앉으며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거짓을 고하지 마라.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 알았느냐. 너의 주인이 누구냐.”

“……소, 소첩의 주인은 전하이십…… 전, 전하! ……전하. 전하…… 용서하여 주소서. 소첩은 모, 모르는…….”

공포에 질려서 내뱉는 여자의 허튼소리에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사내의 얼굴이 찡그린 웃음을 퍼트렸다.

“내게 거짓을 고하지 말라 했을 텐데.”

“전, 전하!”

윤제는 그저 몸을 일으켰다. 양제가 불에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괴로워하며 숨을 컥컥댔다. 진안은 끊임없이 태자를 찾았다. 사내가 다시 하문했다.

“너를 내게 보낸 주인이 누구냐.”

양제가 열리려는 입술을 악물며 고개를 저었다. 순하기만 하던 얼굴에 다부진 악의가 흘렀다. 그녀는 태자의 권능을 두려워하면서도 공포에 질려 말을 내뱉지도 모르는 자신을 더욱 두려워했다.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너무 큰 공포에 말을 하지 못하는 지경이 된 진안을 깨달은 윤제가 숨을 내쉬며 위엄을 조금씩 거두어들였다.

“……전하. 소첩에게 어찌 이러십니까…….”

입을 연 양제의 말에 침잠했던 윤제의 얼굴에 분노가 스몄다.

“너는 내게 왜 그랬느냐.”

윤제가 허탈한 웃음을 퍼트리며 속삭였다.

“소첩은 다만 전하를 바, 바라였습니다…… 소첩 같은 미천한 가문 출신이 황궁 안 높으신 태자를 뵐 수 있을 듯싶으십니까. 소첩의 주인이 전하라는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소첩에게 도움을 준 이가 있다 하여도 그는 전부 전하를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소첩의 말도 들어 보지 않으시고 이리 핍박만 하시다니…… 제게…….”

“네가 바라는 것은 내가 아니다. 네가 바란 것은 태자, 황제의 아들이지. 부황을 미혹하는 것은 어렵다 생각하였느냐.”

“어떻게 그런…….”

양제가 불쾌감을 퍼트렸다.

“너를 정말 좋아하였다.”

윤제의 얼굴에서 웃음이 완전히 걷혀 있었다.

“전하…….”

“네가 태자의 위세를 빌려 황궁 안을 어지럽힌다는 걸 알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며 그런 것이 전혀 없을 수 없다는 이유로 수차례 모르는 척해 왔다. 나를 만나고자 주인을 이용하였다면 내가 너를 곁에 두고 소중히 할 때 무엄한 짓을 관뒀어야지. 계속해서 분란을 조장하는 연유가 무엇이냐.”

양제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소첩은 모르겠습니다.”

“나와의 처음을 수를 써 접근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했느냐. 나도 상관없다. 태자란 그런 것이니까. 그래도 나 역시 알게 돼 싫은 건 어쩔 수 없구나.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됐을 때 너도 나를 조금은 좋아해 주지 그랬느냐.”

“……전하…….”

양제가 태자의 손이라도 잡아끌 것처럼 굴었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앞세워 무엄하게 구는 동안 즐거웠느냐. 다시 그런 즐거움을 느낄 일 없을 것이다. 너를 만나 나 또한 즐겁고 기뻤던 적이 있었는데 더는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만 내 앞에서 사라져 주겠느냐.”

“전하! 오해이십니다! 전하!”

양제가 소리를 높이면서도 윤제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네 주인과 연을 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첩이 당신의 정인이라…….”

“황후께 가서 나를 대신해 여쭈어 줘도 좋겠다. 그간 즐거우셨는가. 이 태자는 불쾌하다 전해 다오.”

윤제가 돌아서려 했다.

“……소첩을 황후께서 처음부터 마음에 차하지 않으시는 걸 전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그런……!”

양제가 네 발로 기듯 손으로 바닥을 짚어 태자에게 향하며 소리 높였다. 윤제가 돌아서던 몸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한 걸음 다가왔던 진안이 공포에 절은 얼굴로 수 걸음 물러갔다.

“나는 제법 착실한 아들이었다. 계후라 하나 반드시 모후라 부르라는 부황의 말을 거스를 생각 한번 한 적 없지. 내게 모후가 없으니 그분이 나의 친모후가 되어 주시기를 바랐다. 내가 황궁 안 오갈 곳, 들고날 곳을 누구보다 소상히 고해 올린 이가 모후였다. 너와 나의 처음이 우연일 리 없으니 너의 주인은 황후가 아니겠느냐. 둘이 그리 사이가 좋으면 좋게 지낼 일이지 왜 뭇사람 앞에서 위악을 떨었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그럴 것 없다.”

윤제가 진안에게서 완전히 돌아섰다.

공포와 태자의 무심한 말에 질려 벽까지 밀려가 있는 여자는 움직일 줄 몰랐다.

“…….”

용아는 가만히 멈춰 있었다. 처음 사나운 소리를 듣고 엿들을 때만 해도 이런 끝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다. 윤제는 소훈의 매서움에 곤혹스러워하면서도 농을 치기도 했다.

양제가 나타나고 소훈의 말이 이어질수록 곤란해진 것은 용아였다. 윤제의 손을 맞잡고 있는 동안 몇 번이나 그의 품에서 조용히 물러나려 했었다. 그때마다 커다란 손이 아프도록 용아를 움켜쥐었다. 그녀들이 하는 말이 윤제에게 지독한 것이라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더 듣고 있기 힘들어졌을 때 애원을 하고 무력을 써서라도 몸을 빼려고 했으나, 남자는 도리어 용아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조용히 할 것을 부탁했다.

용아를 끌어안는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권좌와 이어진 혈통들이 타인을 이용하고, 타인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다지만 그걸 모두 알 필요는 없었다. 또한 그것을 누구와 공유할 필요는 더욱 없었다.

“위위.”

윤제가 무너져 앉아 있으면서도 물러서려는 기색 없는 맹위이의 앞에 섰다.

“전하.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겁에 질려 하얗게 된 얼굴이 힘겹게 예를 올렸다.

“황족이 힘을 보이면 무서운 게 당연하다. 억지로 버티지 말고 몸이 시키는 대로 물러나도록 해라. 그게 당연한 거니 부끄러워할 것도, 굴욕적으로 느낄 것도 없다.”

윤제의 말에 맹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태자를 피해 몸을 물렸다.

“전하, 소첩이 한 말을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십시오.”

맹위이가 벌벌 떨면서도 말을 건넸다.

“이미 들어 다 아는 걸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하느냐.”

윤제가 농을 하듯 얄밉게 떠들었다.

“전하. 전하께서 모르셔도 될 일이 아닙니까. 전하께서 언제고 아실 일이라 생각하였으나 이렇게 알려지길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소첩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첩이 결코 좋은 이가 아니라는 걸 아옵니다. 하지만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한 자로 기억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소첩을 죽이시고 화를 거두소서.”

“네가 뭐라고. 내가 너를 죽이건, 네가 스스로 죽건 맹승상과 싸움밖에 더 하겠느냐. 죽을 생각 마라.”

“전하…… 이 모자란 인사가 죽을 수도 없게 하십니까……!”

“위위. 네가 한 말은 다 잊었다. 그러나 이미 아는 것은 잊을 수 없다. 내가 모자라게 굴어 그간 나를 많이도 욕하였겠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전하, 사랑받고 싶은 여인들의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황궁 안 여인네들이 가질 권력이 부군의 관심에서 기인한 것 말고 무어가 있겠습니다. 부디, 흉하다 외면 마시고, 저희를 아끼고 굽어살펴 주실 때처럼 관용을 베풀어 주소서.”

맹소훈이 머리를 깊이 낮추고 애원을 거듭했다.

“나는 내가 우습다. 모자란 놈이잖느냐. 수치스러워 어디 가 떠들지도 못할 테니 소문날 염려는 마라. 내가 너를 덜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네가 생각한 대로 후궁이 채워졌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으니. 그런데, 수수는 왜 죽였느냐.”

윤제의 말에 맹위이의 얼굴을 뒤덮은 눈물이 더 거세졌다.

“소첩을 죽여…….”

“죽지 마라. 이것은 태자의 명이다.”

“……전하…….”

태자의 명에 맹위이가 무언가 잃은 듯한 얼굴로 허공만 바라봤다. 윤제는 돌아서며 용아를 데리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있느냐.”

등우가 재빨리 다가와 태자의 곁에 섰다.

“찾으시옵니까.”

길게 이어지는 일행 틈에 아직도 볼이 빨간 선시각 궁녀들이 있었다. 혹여 몰라 등우와 금당대 궁인들이 선시각 궁녀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금당대와 영화대 궁인 옆에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 기색을 살피는 해원과 융각의 궁인들이 시립해 있었다. 등우와 모장이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걸 막고자 데려다 둔 것이었다.

“양제와 소훈의 직첩을 박탈하고, 봉의로 강등한다. 해원과 융각의 상궁 일인을 제외하고 전부 출궁시키도록 하라. 빈 궁인은 금당대 궁인으로 채우고, 필요한 물품은 금당대에서 조달해 주도록 하라. 해원과 융각의 상궁은 봉의들의 수발만 들게 해라. 봉의와 상궁은 침전 밖으로 나서지 못하게 하고, 해원과 융각의 내외 출입을 금한다.”

“명을 따르옵니다.”

“안에 있으니 살펴 데려다주도록 해라. 따를 것 없다.”

태자의 갑작스러운 출궁 명에 해원과 융각의 궁인이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나서서 말을 올리려는 이가 있었지만 금당대 궁인들의 행동이 더 빨랐다. 태자비의 손을 붙들고 성큼성큼 걸어간 태자의 희미한 권능이 퍼져 나가자 미미하게 오르던 실랑이마저 씻은 듯 사라졌다.

“…….”

용아는 말 없는 얼굴에 시선을 건네는 것조차 저어했다. 영화대가 시야에 보일 즈음 윤제가 걸음을 멈췄다. 지독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어려운 정적을 깬 것은 윤제였다.

“오늘 더 이상 배웅은 어려울 것 같다. 들어가 쉬도록 해. 고생하였다.”

“……살펴 가소서.”

윤제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괜찮을 리 없으니 괜찮냐 물어볼 수 없었다. 남자는 용아의 말을 듣자마자 돌아섰다. 떠나는 너른 등을 용아는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동궁 태자는 후궁 안 불민한 일의 처결을 이유로 저녁 문안을 서편으로 대신함을 알렸다. 영화대의 태자비는 태자의 뜻을 존중하여 역시 서편으로 문안을 대신하였다.

금당대 태감과 상궁들은 빠르게 주인의 명을 따랐다.

동궁 내원 심처에서 벌어지는 일이 한 시진 만에 강제 출궁 당한 궁인의 입을 통해 무서운 속도로 번져 나갔다. 양제와 소훈을 봉의로 강등했다는 말이 순식간에 황도 곳곳에 퍼졌다. 문안을 서편으로 대신한 태자가 다른 서편을 통해 황제께 세상을 떠난 봉의 경씨의 부친을 요직으로 불러들일 것을 청하였다는 소식 역시 빠르게 황도를 휩쓸었다.

동궁에서 일어난 일의 선후에 따라 호사가들의 입이 분주히 들썩였다. 봉의의 죽음으로 실각한 것이나 진배없던 경대인이 복권하는데, 동궁 후궁 안의 양제와 소훈이 갑자기 직첩을 박탈당했으니 피해자와 가해자의 인과가 명확한 게 아니냐는 구체적인 말들이 돌았다.

영화대의 궁인들도 황궁 안과 황도로 퍼져 나가는 말들을 빠르게 취합하여 분주히 주인에게 고해 올렸다. 태자비는 그러했느냐, 짧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따로 더 묻지도, 태자와 후궁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러나 관심을 거두는 것도 아니었다.

소식을 전해 올리는 궁인들의 노고를 살피며 계속하여 소문을 주시하라 하명했다.

쾅쾅쾅!

영화대의 문이 사납게 울린 것은 다 늦은 밤이었다. 영화대 궁인들도 바깥의 곤궁함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기에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등우의 목소리에 곧장 태자비에게로 달려갔다.

“비전하.”

“들어오너라.”

용아는 수차를 마시며 밤을 보내고 있었다.

“비전하. 금당대 태감이 왔사옵니다. 잠시 영화대에서 머물기를 청하옵니다. 영교 주위에도 금당대 궁인들이 있다 하옵니다.”

“머물기를 청했어……?”

“예. 금당대 권역으로 지금 발을 들일 수 없는 상황이옵니다. 등 태감에게 직접 들으시겠사옵니까.”

“들여라.”

태자비의 명에 모장이 곧장 문을 열고 나가 태감을 안으로 들였다. 안으로 든 등우가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예를 올렸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금당대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

용아는 곧장 본론을 건넸다.

“전하께오서 곁을 주지 않으시옵니다.”

등우가 고상한 말로 태자가 패악을 부리고 있음을 알렸다. 말을 고하는 태감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전하께서 지금 금당대에 홀로 계시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정천궁으로 서편을 보내셨지 않은가.”

“그러셨습니다. 할 일을 처리하시는 동안은 곁을 내주셨으나 일을 마치고 전각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갑자기 접근조차 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심화가 깊으신 듯합니다.”

등우가 하소연 같은 말을 내뱉었다.

“범위가 얼마나 되나.”

“금당대는 당연히 접근이 불가하고, 해원과 융각으로 들어간 궁인들은 고립된 것 같습니다. 월주대의 전각 몇몇을 제외하고 버텨 내기가 어렵사옵니다. 동궁에서는 영화대만 전하의 힘에서 무해한 편입니다. 동궁은 물론 황궁 전체로 희미하게나마 전하의 심화가 전해지는 듯하여, 외부에서 동궁으로 들기도 어렵습니다. 전하에게 밀쳐져 떠밀려 나온 이들을 제외하고, 현재 황궁 안에 전각 밖을 나와 있는 이가 거의 없다 보시면 되옵니다.”

“접근하려는 이가 없었나.”

“지금의 상황에서 전하께 가까이 가는 것이 가능한 이는 폐하와 비전하 외에는 없다 보시면 되옵니다. 왕공과 그의 자제들께서 전부 퇴청하셨을 것이고, 최근 특별한 일이 없었기에 남아 있는 이가 없는 데다 전하의 심화가 저리 깊으시니 그분들도 접근이 어려우실 겝니다. 폐하께서는 어렵지 않게 오실 수 있겠으나 수행할 이를 하나도 데리고 가실 수 없으니 원칙상 가지 않으실 겁니다.”

등우가 말을 건네며 눈치를 잔뜩 주는 모장을 수시로 살폈다.

“전하를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지.”

“두어 시진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많이 불편해 보였나?”

용아의 물음에 등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찾아뵙고 명을 하달 받을 때도 이전에도 평온하셨습니다. 불쾌한 일이 있으신 듯한데 이상하도록 아무렇지 않아 보이셔서 묘하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등우의 말에 용아가 말했다.

“밖에 있는 궁인들을 영화대로 들여 머물도록 해 주어라.”

“예.”

“송구하옵니다, 비전하.”

모장이 예를 올리고 마뜩찮은 시선을 등우에게 건네며 물러갔다. 안으로 겁에 질린 이들을 들이는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해원과 융각의 처결은 잘 끝났는가.”

용아가 고민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모두 처리가 되었습니다. 내보낼 궁인들은 내보내고, 다시 배치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왕부나 행궁 쪽으로 내보내는 방향으로 했습니다. 두 곳을 살필 금당대 궁인을 보내는 것도 끝내었습니다. 전하께 이것을 고하러 갈 때였는데 어째 곁을 내주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서운해 말게.”

“서운한 것도 서운한 것이지만 저리 혼자 계속 계실까 염려가 됩니다. 아무리 화가 나셔도 잠시 주위를 물렸다 곧 다시 불러 주시는데 말이지요. 많이 좋지 않은 일이옵니까.”

등우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응, 많이 좋지 않은 일이네.”

용아가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 항상 평정을 유지하도록 훈육 받은 태감의 표정이 복잡하게 뒤틀렸다. 걱정과 두려움, 염려가 뒤섞인 얼굴이 용아를 올려다봤다.

황궁 태감은 모시는 이들의 특별함 때문에 그들의 힘을 빠르게 회피하는 법을 우선적으로 배우지만, 나이가 차면 황족의 지엄한 힘을 조금씩 견뎌 내도록 훈련 받았다. 태감과 궁인들이 주인에게 등을 보이고 뛰쳐나올 땐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로 위급한 때였다. 그렇기에 정 없는 주인에게 등을 보이고 나오며 투덜댔고, 다음에는 단단히 버텨 내리라 의지를 다졌다.

“많이…… 많이, 좋지 않은 일입니까. 무슨 일인지 여쭈어도 알려 주실 수 없으시지요?”

“미안해.”

용아가 걱정 가득한 얼굴에 사과를 건네며 몸을 일으켰다. 등우가 밖으로 향하는 태자비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빈 찻잔을 거두어가려 들어오려던 모장이 밖으로 나서는 용아를 보며 드물게 꼿꼿한 얼굴을 했다. 주인을 지키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하는 상궁이 교묘하게 용아의 곁에 붙어서며 걷는 것을 방해했다. 용아가 배치기라도 할 것처럼 옆몸을 들이대는 모장을 부드럽게 말리며 말하려 했다.

“아니 됩니다.”

용아가 말도 하기 전에 그녀는 반대부터 했다.

“금방 다녀오겠다.”

“비전하.”

용아의 말에 모장은 밖에 땅 울음이 희미하게 들려오는 걸 아시냐 투덜거렸다. 태자의 진노가 어느 때보다 지엄하니, 경계하여야 했다. 범인들은 발도 들이기 어려운 삼엄한 곳을 평연히 거닐 수 있는 태자비라 해도 어두운 밖을 혼자 가시는 건 절대 안 된다 거듭 반대했다.

태자비와 상궁의 실랑이에 등우는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윤공자 형님이 혼자라잖아.”

“전하는 누구보다 강건한 사내이십니다.”

모장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용아가 놓아주지 않으려는 어머니처럼 저를 아껴 주는 상궁의 손을 부드럽게 쓸며 속삭였다.

“혼자는 쓸쓸해, 모장.”

“쓸쓸해지기를 자청한 이가 누구입니까.”

모장이 더없이 엄격하게 말했다.

“내가 아플 때 윤공자 형님이 보살펴 주었잖아.”

“예에, 전하께서 지극하셨죠. 허나 공과와 인과를 따지자면 전하께서 그리 하시는 게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못 가십니다. 소인이 보내드리지 않을 거여요. 지금 밖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아십니까. 절대 아니 됩니다.”

“모장. 아무 일 없을 거다.”

“태자비께서 한밤에 혼자 다니시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밖에 아무도 없대.”

용아가 모장을 성심껏 달래고 여인의 손을 날래게 떨치며 문으로 달려갔다. 모장을 도울 때만 살피고 있던 궁인들이 손쓸 틈도 없이 용아가 문을 열고 나섰다.

“비전하!”

“혼자서는 안 된다니까요!”

“안 돼요, 비전하!”

용아의 등 뒤에서 따듯한 잔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금방 다녀올게.”

문밖으로 나선 그를 따라나설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용아에게는 그저 인적 드문 밤길이, 다른 이들에게 한발 들이는 것조차 불가한, 허락되지 않은 땅이었다.

어두운 밤은 스산했다.

영화대에서 금당대까지,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 밤길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그래서 더 쓸쓸하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용아는 기나긴 밤길을 거닐어 금당대에 당도했다. 금당대는 기묘한 평온함에 감싸여 있었다. 금당대 호화로운 석계단을 오르는 용아의 발소리만이 살아 있는 이가 퍼트리는 것이었다.

태자궁은 크고 화려했다. 텅 빈 회랑을 홀로 걸으니 더욱 까마득하고 광활했다. 와 본 적 없는 곳이라 그러리라 생각하며 바삐 걸었다.

“……여기…….”

한참이나 떠돈 끝에야 용아는 금당대 침전으로 들었다. 수많은 문을 지나,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 앞에서 방황하며 여기가 아닌가 돌아서려고도 했다. 하지만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이 그 방이 유일했기에 대답이 없음에도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호사스러운 것으로 가득한 방은 넓고 넓었다. 천장이 높은 방 안은 바깥처럼 광활하게 느껴졌다. 호화로운 방에 불은 켜져 있는데 텅 빈 채 인적이 없었다.

“윤공자 형님.”

빈 공간에 대고 말을 건네는 것은 쑥스러웠다.

“윤제 형.”

용아는 넓은 방 안 곳곳을 살피며 상심한 남자를 찾았다. 여기가 아닌가 싶어 돌아서려는 차였다. 규모가 어마어마한 침상 곁에 서 있는 용아의 앞으로 짙은 그림자가 내렸다. 한 손에 서책을 든 윤제가 벽밖에 없던 곳을 열고 나오며 용아를 바라봤다.

“여기 어떻게 왔느냐.”

바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남자는 평온하기만 했다.

“거기.”

용아가 순식간에 벽이 된 윤제가 열고 나온 곳을 보며 황망한 시선을 던졌다.

“서재다.”

막상 마주하니 할 말이 없었다.

“……여기에 아무도 못 오고 있습니다. 아십니까.”

“안다.”

윤제의 덤덤한 반응에 용아가 눈을 구겼다.

“혼자서 뭘 하십니까.”

“궁상떨어.”

침상 끝에 걸터앉으며 남자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

괜찮은가 했는데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앉아라.”

윤제가 책을 펼치며 말했다. 글자를 눈에 담는 얼굴의 심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봉의가 되어 버린 양제와 소훈에게 권능을 내보이던 남자의 모습이 훨씬 공감하기 수월했다.

“우는 게 어떠십니까.”

남자의 옆에 앉으며 용아가 점잖게 권했다.

“운다고 뭐가 바뀌냐.”

웃는 얼굴이 용아를 짧게 보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갔다. 책을 진심으로 보는 것 같았다. 곁을 강제로 물리는 걸 보아 아무렇지 않은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윤제의 얼굴은 고요하기만 했다. 책이나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체하는 건 그에게 좋지 않았다.

“저 좀 보세요.”

용아의 말에 남자가 순순히 책을 덮었다. 윤제가 저를 심각하게 바라보는 얼굴을 다정히 쓸며 말했다.

“나하고 있어 주려 온 거지, 고맙다.”

남자의 시선이 용아의 시선을 어설피 피해 갔다. 용아가 외람되게도 태자의 얼굴에 손을 뻗어 시선을 마주 보도록 고정했다.

“저 보십시오.”

“너에게 면목 없다.”

윤제가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얼굴을 향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하려 했다.

“화도 안 나십니까.”

“화가 나.”

“화를 내세요. 욕을 하든가. 물건이라도 다 때려 부수든가. 화가 나는데 왜 화를 안 내요.”

용아가 제 일처럼 화를 토했다.

“너에게 정말 면목 없다. 그런 것도 통하는 이에게 하는 것이다. 개선이 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나 하는 떼쓰기지. 가망 없는 때에 화를 내는 건 무의미하잖아. 모든 게 이미 끝난 후인데 뭘 더 하겠느냐. 태자가 되어 그런 짓까지 할 순 없지.”

“태자는 사람이 아니랍니까.”

윤제가 분해하는 얼굴을 돌아봤다. 멍한 표정이었다. 남자가 힘들어하는 것은 명백했다. 괴로울 게 분명한 사람의 마음은 평소보다 약해져 있을 터였다. 힘든 이의 허약한, 빈틈을 파고드는 것은 정당하지 않게 여겨졌다. 그랬기에 남자를 찾아와 그의 안위만 살피고 갈 셈이었다.

“고맙다.”

윤제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로 말했다. 피로가 절절히 새어 나오는 얼굴을 바라보던 용아가 남자의 얼굴을 붙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머뭇거리던 손이 힘없는 사내의 몸을 당겨 안았다.

“…….”

그저 상처 받은 이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용아에게 안긴 남자의 몸이 한 호흡 느리게 멈칫했다.

“……!”

결코 약한 부분을 파고들려는 게 아니었다. 절대 욕심을 채우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고 용아는 소리 없이 스스로를 설득하고 되뇌었다. 그저 정인을 놓아야 해 힘들어진 이를 위로하는 거였다. 남자의 멈칫한 등을 고민 가득한 손이 천천히 쓰다듬었다.

용아의 품에 안기게 된 남자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가 느릿느릿 숨을 내뱉었다. 몇 번이나 자신의 철없고 무지한 행동에 상처받았을 소년이 이제는 정결한 사내가 되어 위로를 해 주고 있었다. 당혹스럽고 쑥스러운 현실에 윤제는 잠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용아에게 안겨 한참을 꼼짝 않던 윤제가 자신을 안고 있는 몸을 마주 당겨 안았다. 맞닿은 몸으로 퍼져 나가는 따스함과 흐릿한 진동이 좋았다. 윤제가 품 안의 몸을 더욱 단단히 안았다. 마주 부둥켜안은 채 체온을 나누는 고요한 시간이 차분히 흘렀다.

깊은 밤의 침묵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윤제가 눈을 떴을 때 새벽이 파르스름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간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은 파편처럼 조각나 있었다. 고요한 몸을 부둥켜안고 잠시 있었을 뿐인데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가 심상함을 가라앉혔을 땐 품 안에 안긴 몸이 잠들어 있었다. 품 안에서 고른 숨을 내쉬는 얼굴을 웃으며 보다가 그대로 몸을 뉘여 잠을 청했다.

잠에서 깬 시야로 무방비하게 잠이 든 얼굴이 보였다. 윤제는 잠든 용아의 얼굴을 웃는 얼굴로 만졌다. 손에 감겨드는 따뜻하고 매끄러운 감촉에 입가에 오른 웃음이 짙어졌다. 웃는 얼굴이 그대로 입술을 내려 잠이 든 목덜미에 입을 맞추려다 코끝에 스치는 부드러운 감각에 움직임을 멈췄다.

따듯함을 찾아 움츠러드는 목 안에 입술을 맞추는 건 어린 아우를 어여뻐 해 내리는 몸짓이라고 할 수 없었다. 코앞에 잠들어 있는, 부드러울 것이 분명한 목덜미를 물끄러미 보던 사내가 기척 없이 빠르게 몸을 물려 옆으로 빠져나왔다.

“…….”

그 부름을 좋아했다.

윤공자 형님.

귓가에 부드럽게 감기는 소리가 좋은 것은 아우 없이 홀로 커서 그렇다고 여겼다. 그리 불릴 때마다 이상하도록 맥을 못 추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 고민 끝에 찾은 답은 꽤나 설득력 있게 느껴졌었다.

그렇게 부르는 입술에 순간순간 시선을 빼앗기는 것은 부르는 이의 얼굴이 정결한 생김을 가져라 생각했다. 과거에 의도적으로, 제멋대로 구는 성격을 다스리지 못해서 그리 불러 주는 얼굴을 상대로 많이도 못나게 굴었다.

그래서 잘해 주고자 했다. 예를 갖추어, 예를 갖추지 않을 때는 다정하거나 친절하기라도 하여야지 했었다. 주위의 의아한 시선과 의혹이 있었으나 무심히 넘겼다. 그는 떳떳했다. 자신만이 아는 과오를 갚는 중이라는 이유에 심취해 있었다.

사내는 태자였고 잠이 든 이는 태자비였지만, 둘 사이 나이 차이가 적지 않은데다 처음 만나던 때에 그는 다 큰 사내이고 상대는 어린 소년이었기에, 늘 까마득히 어린 아우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려 했다.

그렇기에 미안할 게 많은 자신은 정결한 사내가 된 용아를 무릎에 올려 재웠고, 주위의 곤란함을 무시하고 직접 죽을 떠먹이고, 어린 날의 표정이 고스란히 남은 얼굴이 파리할 때 매번 안아 옮겼다. 팔불출 형처럼 꾸밈을 모르는 담백한 아우를 붙들고 품에 일부러 지니고 다니는 호화로운 장신구를 머리에 꽂아 댔다.

자신이 머저리였다. 말도 안 되게 모자란 것이었다.

타인이 보기에 아름답게 자란 이에게 탐욕을 부리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자신만 의식적으로 아닌 척해 온 것이지, 그의 본심은 어린 날 함부로 군 이가 새삼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을 지금 깨닫는 것도 참담했다.

제가 정인이라 소리 높였던 자에게 혼자서 믿었다가 믿음에 대한 보답이 제가 바라는 모양이 아니라는 이유로 등 돌리고, 외로워지니 어려움을 무릅쓰고 찾아와 위로해 준 다정한 은인에게 흑심을 부리는 꼴이었다. 파렴치한도 이런 파렴치한 작자가 없었다.

침상 끝에 걸터앉은 윤제가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 세우고 메마른 손안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입술에 나오는 것은 전부 한숨이었다.

이제 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정말 면목 없는 놈, 스스로를 욕하며 그가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을 때 등 뒤에서 희미한 부스럭거림이 울렸다.

윤제는 저도 모르게 재빠르게 움직여 본래 용아를 안고 잠들어 있던 모양으로 돌아갔다. 팔 안에 감기는 용아의 몸을 느끼면서 자신이 왜 이럴까, 마치 앙큼을 떠는 듯한 이런 짓 왜 했지 후회했지만, 이미 잠든 체한 후였다.

“…….”

용아는 커다란 팔 안에서 깨어나며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시야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었다.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남자의 품을 깨달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금당대에 왔었지, 하고 떠올리고서야 윤제의 품 안을 잠이 덜 가신 시선으로 더듬었다. 미동 없이 잠들어 있는 사내를 멍하니 보다가 유치한 아이처럼 잠이 든 눈가에 손을 흔들어 정말 잠이 들어 있나 살폈다. 곤한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흔들어 보아도 용아의 손이 만든 그림자만이 아른거렸다.

용아는 윤제가 제게 그러는 것처럼 남자의 눈가를 손으로 더듬어 울지는 않았는지 살폈다. 반듯한 얼굴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스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좋아서 잠이 든 얼굴이 깰지도 모른다는 것도 잊고 몇 번인가 만졌다.

“울지 않으셨습니까.”

잠이 덜 깬 얼굴이 소곤거렸다.

“…….”

윤제는 잠든 채였다.

“대답 안 하십니까.”

“…….”

용아는 짓궂은 소년처럼 잠든 이를 상대로 엄히 투덜거렸다. 잠들어 있음에도 그저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은 사내의 반듯한 얼굴을 손으로 살살 쓸고는 커다란 품에서 조심히 빠져나왔다. 호화로운 침상에는 헌앙한 사내와 쉽게 볼 수 없는 고귀한 서책이 어지럽게 잠들어 있었다.

용아는 지난밤 윤제가 보다만 서책을 품에 주워 담고 침상을 벗어났다.

방 안 깊은 곳에 위치한 침상을 나서자, 문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시립해 있는 등우가 보였다. 등우가 반가운 표정을 하고,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용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조심조심 건네는 목소리가 태자가 아직 잠들어 있음을 아는 듯했다.

“기침하셨습니까.”

용아는 아쉬움을 숨기고 품에 안고 있던 서책들을 태감에게 넘겼다. 등우는 태자비가 건네는 책들을 무심히 받아 침전 안 책상 위에 올렸다.

태감의 유려한 몸짓에 따라 용아가 방을 나섰다.

“금당대에 와 있었나.”

“일출이 있고서야 왔습니다. 밤새 강녕하셨습니까. 전하께서는 어떠시옵니까.”

“아직 주무시네.”

용아와 등우가 떠나고 방 안이 침묵에 감싸였다. 윤제의 감겨 있던 눈이 천천히 열렸다. 철없는 아이처럼 빈 이불을 끌어 품에 당겨 안은 그가 베개에 옆얼굴을 깊이 묻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울고 싶다.”

태자비를 배웅하고 방을 정리하러 들어온 등우는 침상에서 희미하게 번지는 소리에 어깨를 흠칫했다.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태감의 기척 없는 접근에 윤제 역시 깜짝 놀랐다. 그가 품에 안고 있던 이불을 내팽개치며 일어나 앉았다. 같은 사내라도 후리후리한 늘씬함이 있는 태자비와 태자는 태생적으로 규격부터 다르다는 인상을 주었다.

등우는 헌앙한 얼굴을 가졌지만 워낙 번듯한 체구를 가져 조금만 거칠게 움직이면 위험한 기세를 퍼트리는 사나운 주인의 눈치를 보며 침상 위에 구르고 있는 서책을 조심조심 주웠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태자는 침상 끝에 앉아 빈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태자비는.”

“모 상궁이 모시고 갔사옵니다.”

주인의 분위기가 험악할 때는 몸을 사려야 하는 법이다.

“어때?”

태자의 말은 난데없었다.

“비전하 말씀이십니까.”

“어.”

또한 척하면 척이야 했다. 그것이 태감이 해내야 할 일이었다. 등우는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태감이었다. 등우가 침상을 슥슥 정리해 나가며 말을 건넸다.

“어젯밤에 모 상궁이 비전하 혼자 밤길을 걷는 건 절대 아니 된다 하였는데, 비전하께서 당신 말고 지금 밖에 다닐 수 있는 게 누구겠냐며 걱정 말라시며 영화대를 나서셨습니다. 하온데 금당대가 낯설었던 모양입니다. 금당대까지는 금세 왔는데 침전 찾는 데 한참 걸리셨다 하셨습니다.”

“그랬대?”

“예. 말씀을 들어 보니 처음에는 궁인들 기거하는 전각 쪽으로 가셨던 것 같습니다. 다들 불도 못 켜고 자릴 비워서 거기는 어두컴컴했을 겁니다. 가다 보니 이 길은 영 아닌 것 같으시더래요. 길 잃은 애처럼 불빛 있는 곳을 찾은 끝에 침전으로 드셨답니다. 헌데, 전하. 비전하가 애타게 전하를 불렀는데 왜 대답도 아니 해 주셨습니까. 불러도 하도 대답이 없어서 여기도 아닌 줄 알고 갈 뻔했다 하셨습니다.”

“서재에 있었다.”

“그것도 말하시더라고요. 전하가 벽이 갈라진 데서 나왔다고요. 근시일 내에 비전하를 금당대로 청하셔서 서재 구경을 시켜 주시는 게 어떠십니까.”

침상 정리를 끝낸 등우가 자연스럽게 태자의 시중을 들었다.

“그럴까.”

윤제는 등우의 몸짓을 따라 침상을 나섰다. 태감의 허락 하에 소환들이 안으로 들어 아름다운 가벽을 세워 방의 경계를 만들고, 옆방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문가에도 가벽이 세워졌다. 윤제는 가볍게 씻었다. 등우가 태자의 손이 올 곳에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해 내밀었다.

“탕조를 들일까요.”

태감의 물음에 윤제가 고개를 저었다.

“직접 가겠다.”

그의 대답이 다 내려지기도 전에, 등우의 손에 의해 어깨에 포가 씌워졌다. 태감은 앞서 걷는 태자를 쉼 없이 살폈다.

“곧바로 들어가시면 되옵니다.”

등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윤제가 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봤다. 하명이 있으신가 묻는 몸짓이 곧장 돌아왔다.

“어제.”

“예.”

“고생했다. 전부 다. 다시 그러지 않도록 노력해 보마.”

윤제가 등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문으로 다가섰다. 욕탕이 있는 전각의 겹문이 태자의 걸음에 맞춰 연이어 열렸다. 뒷목을 주무르며 안으로 드는 윤제에게 예를 올리는 얼굴들 위로 안쓰러움과 웃음이 교차했다.

꽤 좋은 아침이었다.

제법 좋은 아침에 태자와 태자비가 정천궁에 문안을 올리러 들었다. 태자와 태자비가 붉은 융이 깔린 계단을 오를 때까지는 모든 게 평안하였다. 소환의 안내에 이어 정천궁 좌태감이 안내를 이어받을 때도 만사가 잘되어 갔다.

정천궁의 커다란 문이 열리고, 호화로운 비단이 밀쳐지며 안으로 드는 통로가 드러났다. 그곳으로 태자 내외가 든 직후부터 사방이 불온하게 들썩였다.

전각 안, 황제와 황후를 향해 알리는 말과 귀하신 객을 맞는 예가 삐걱거렸다. 낙엽이 부서지는 것 같은 사각거림이 웅크려 예를 올리는 궁인과 태감으로부터 퍼져 나왔다.

태자와 태자비가 방 안에 들고 비단이 내려지고 문이 닫혔다.

곧 웅크리고 있던 궁인과 태감들이 포식자의 공격을 받은 여린 짐승들처럼 정숙해야 할 통로를 내달려 도망쳤다. 전각 안의 정천궁 태감과 궁인을 물론, 전각 밖에서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금당대와 영화대 태감과 궁인들도 기겁하며 밖으로 도망쳐 나온 이들과 합류하여 이원 방면으로 내달렸다.

소요의 원흉은 태자로부터 시작되었다.

등우와 금당대 태감들은 한참 모장과 영화대 궁인들에게 전하께서 어제와 같은 일을 다시 하지 않으마 노력하겠다 약속하셨다고 흐뭇한 얼굴로 자랑을 하던 중이었다. 밀어닥치는 소요에 떠밀린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모장은 노력은 그저 노력에 그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며 등우를 위로하며 이원을 향해 힘껏 달렸다.

“부황을 뵙습니다.”

“부황을 뵙습니다.”

태자와 태자비가 반듯하게 예를 올렸다. 용아는 귓가로 와 닿는 소낙비가 내리는 것처럼 분주한 발소리를 들으며 시선만 움직여 주위를 보았다.

황제가 인자한 얼굴로 흉흉하게 하문하였다.

“무엇하는 것이냐.”

윤제는 무심한 얼굴로 앞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안으로 드는 순간부터 황후는 새파랗게 질려 벽 쪽으로 떠밀려 가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본능적인 공포를 거스를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황후의 얼굴은 두려움과 치욕스러움으로 뒤범벅돼 있었다.

예를 올리는 와중이었다.

용아는 우아하게 내려온 비단에 가리어져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고집스럽게 권능을 내보이는 남자의 손을 찾아 붙잡았다. 손끝에 걸린 단단한 손을 꽉 쥐었다. 제발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윤제는 조금 움찔했지만 힘을 거두지 않았다.

“…….”

“…….”

벽에 달라붙어 있는 황후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황후는 잠시 물러가 있도록 하시오.”

황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자의 태도를 잠시 지켜보다가 어쩔 수 없이 황후에게 물러갈 것을 명했다.

“송구…… 하옵니다…….”

황후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둥 마는 둥 하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이곳에 편히 있을 수 있는 태자비가 그녀를 시중 들어주기를 바라는 기색이었지만 그런 말을 할 여유가 없는지 앞만 보는 용아의 얼굴에 시선을 던지곤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상석의 황제가 험악한 인상을 숨기지 않으며 소리 높였다.

“태자, 무슨 짓이냐.”

윤제는 답하지 않았다.

“…….”

용아는 황제와 태자 사이에서 머뭇대고 있었다. 윤제의 겁박에 동의할 수 없었으나, 그를 마냥 나쁘다 할 수도 없었다. 황제께 예를 올리는 중이었다. 용아도 윤제도 상석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예를 올리고 있는 윤제의 머리가 점점 더 아래로 향했다.

용아의 손안에 쥐여진 윤제의 손끝이 불안하게 움칫댔다.

용아는 황족의 위엄과 무관했다. 부자 사이에 무엇이 오가는 게 틀림없었다. 윤제가 황후를 진족의 힘으로 짓누른 것처럼, 황제는 당신의 아들을 힘으로 훈계하고 있었다.

“부황.”

용아는 무례하다는 것을 잊고 황제를 향해 말을 올렸다.

“새아가는 그대로 있거라. 네놈은……!”

황제가 말을 건네려는 태자비를 떨치며 태자를 향해 다시 소리를 높이려 했다. 용아는 황제가 본격적으로 윤제를 핍박한다는 걸 눈치챘다. 둘 사이에 오가는 힘의 다스림이 황족의 훈육법인 것 같았다. 윤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면서도 물러서거나 죄를 청하지 않았다.

용아는 붙잡은 손이 벌벌 떨리는 걸 느끼고 험악한 표정을 내리는 황제로부터 윤제를 가리듯 힘겨워 하는 얼굴을 몸으로 가렸다.

“부황. 태자께서 천자 앞에서 무엄하게 군 것을 혼내시는 것은 합당하나 우선 말을 들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새아가는 나서지 말라 하였다!”

황제가 왈칵 소리 질렀다. 용아는 사나운 소리에 어깨를 움칫하면서도 가리고 있는 윤제를 내놓지 않았다. 용아의 몸에 가리어져 있는 윤제는 멍한 얼굴로 지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 했다.

“…….”

용아의 몸에 가려지는 순간 따듯한 장막에 감싸이는 것처럼, 황제로부터 내려지는 서슬 퍼런 권능이 차단되었다. 기묘한 안온함이 그를 단단히 안아 주었다.

“부황, 노여움을 거두어 주소서.”

용아가 간곡히 청했다.

“네가 그러고…… 알겠으니, 그놈을 떼어 놓거라.”

황제가 노한 얼굴로 툴툴댔다.

“전하.”

용아가 제 품에 기대어 있는 윤제를 불렀다. 윤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용아의 부름에 답하며 황제에 대한 예를 갖췄다.

“어…….”

둘은 숙인 채로 괜찮냐, 괜찮다 속닥였다.

“짐 모르는 새에 사이가 좋아졌구나.”

상석에 불퉁한 소리가 내렸다.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윤제의 반응이 조금 느렸다. 황제께 호되게 당한 탓인지, 황제께서 자신 몰래 여전히 벌을 내리는 게 아닌가 하여 용아는 옆과 위를 부지런히 살폈다.

“새아가는 이 부황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황제가 잔뜩 토라진 면모를 표출했다. 용아는 재빨리 부정하며 몸을 낮췄다.

“그래. 그렇다 치고. 태자 너는 좋은 아침에 힘없는 모후에게 어찌 불한당처럼 같잖은 힘을 으스대었느냐.”

“송구하옵니다. 부황의 황후이나, 황후는 더는 소자의 모후가 아닙니다.”

윤제가 덤덤히 고했다.

“황후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황후께서 왜인지 모르겠으나 소자에게 그분께서 조종하는 여자를 보내었습니다. 소자가 모자라 그를 좋아하고 아껴 주었습니다만 속은 것을 알고 기뻐할 이가 있겠습니까. 황후는 소자의 모후가 아닙니다.”

태자의 말에 황제가 픽 웃었다.

“다 커서 계모가 싫어졌다 칭얼대는 것이냐.”

“부끄러운 것인 줄 소자도 아옵니다.”

윤제가 무심히 동의했다.

“증좌가 있느냐.”

“없습니다. 소자가 다니는 황궁 안 동선을 부황보다 더 자세히 아는 이는 황후뿐이고, 진안과 처음 만났던 곳을 가르쳐 줄 이가 황후밖에 없기에 의심하는 것입니다.”

“심증만으로 사람을 상대로 고양이 쥐 몰 듯했다는 게야?”

황제는 태자의 태도에 안타까움을 표하면서도 지적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윤제는 묵묵히 사나운 말을 듣고만 있었다. 용아는 함께 그것을 들으며 옆과 위를 번갈아 봤다. 고민 가득하던 얼굴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단지 심증만은 아닙니다.”

용아의 말은 갑작스러웠다. 용아 자신뿐 아니라, 황제에게도 윤제에게도 의외의 말이었다. 윤제가 의문 가득한 시선을 용아에게 보냈고, 용아 역시 복잡한 시선으로 옆을 살폈다.

“새아가는 할 말이 있느냐.”

“태자께서 황족의 위엄을 힘없는 이에게 사사로이 보인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오나 황후께 그런 것은 마냥 잘못되었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황후께는 혐의가 있습니다.”

“혐의?”

황제가 하문하였다. 용아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윤제는 모르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입 다물고 있으면 남자가 할 법한 합리적 의혹으로 황후를 징벌한 것이라 여기고 넘어갈 터였다. 여기서 입을 열면 윤제가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는 일족에 관한 것을 밝혀야 했다.

“봉의가 된 양제가 설핏잎을 음복하려 했습니다.”

용아는 말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언제가 되었건, 태자비를 들인 태자는 홍문과 백화에 대해 알게 될 테니. 조금 빨라진다 해도 문제 될 것 없었다.

“……설핏잎……?”

“……설핏잎…….”

황제와 태자가 동시에 말했다. 말하는 음성에서 알고 모름의 차이는 알 수 없었다. 황제는 당신의 의중을 완벽하게 숨겼고, 윤제는 아마도 모르는 듯했다.

황제가 계속 말해 보라는 시선을 내렸다.

“설핏잎은 대개 사내가 음복하여 자양강장제로 쓰인다 알려져 있지요. 허나, 제북 홍문과 중경 황족은 때때로 다르게 쓰지 않습니까. 부황께서 계후를 들이셨으니 아실 것입니다.”

용아는 최대한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며 말했다.

“그래. 짐은, 나의 백화를 잃었다.”

황제는 쓸쓸한 얼굴로 답했다. 허탈한 음성이 택한 말은 고민 가득한 얼굴의 망설임을 덜어 주려는 듯 직접적이었다. 용아는 황제의 말에 옆을 살폈다.

“…….”

윤제의 얼굴은 고요했다.

“…….”

남자는 알고 있었다.

“짐은 비교적 빠르게 계후를 들였다. 정해진 짝인, 백화를 잃은 후 별로 삶에 대한 애착이 없어지는 것은 진족의 타고난 천성이 아니겠느냐. 황가 적자들은 특히 더 그러하다. 황제의 이러한 상태를 알고 있으니 계후를 들일 때 첫 합방에 앞서 계후에게 설핏잎을 음복하게 하는 것은 피치 못할 선택일 것이다. 설핏잎을 음복한 상대는 진족에게 주기에 든 백화를 마주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니 말이다. 황후가 자신의 첫날밤을 보살펴 준 궁인을 찾아 그것에 대해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낱 궁인이 황가의 비밀을 엄중히 관리하는 태감의 감시와 보살핌을 받는 비밀스러운 이로부터 우연히 설핏잎에 대해 전해 듣는 것보다, 직접 음복해 본 적 있는 황후에게 사주 받았을 가능성이 훨씬 높구나.”

“혐의가 있다 하나, 황후의 죄를 묻기가 어렵습니다.”

용아는 말없는 사내의 얼굴에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그렇구나. 황후가 자신을 보살펴 준 궁인을 찾아 살뜰히 살피거나 하사품을 내리는 것을 죄로 삼을 수 없고, 일일이 다 관리할 수도 없으니. 증좌를 잡는다 하여도 황후는 그것을 황족 아닌 이에게 알려 주어선 안 된다는 걸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 말하면 할 말이 없지. 진족과 홍문, 백화에 대한 황실과 제북의 맹약 또한 걸림돌이 될 것이다.”

“황실과 제북의 맹약이 무엇입니까.”

윤제의 의문에 답을 한 것은 용아였다.

“중경 진족은 백화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백화란, 말조차 모르는 이가 태반이지요. 황실은 중경 진족이 백화 아닌 반려에게서 후손을 보는 것이 낫기에, 제북 진족은 장군부 안에도 많지 않은 백화를 중경에 빼앗기지 않을 수 있으니, 중경 안에서 백화에 대해 불문에 붙이도록 맹약을 맺은 겁니다. 때문에 진족과 홍문, 백화 모두에 대해 중경 안의 이들은 잘 모르게 되었지요. 우연히 중경 밖에 갔다가, 어쩌다 중경으로 온 백화를 만나 짝을 이루는 것까지 막지는 않지만 일부러 백화에 대해 알려 주려 하지는 않는 겁니다. 황후는 비밀 중 일부를 외부인에게 알렸으나 비밀은 비밀이기에 말할 수 없으니, 황후의 죄를 묻기 어렵습니다.”

말을 하는 용아의 얼굴이 서늘했다.

“그에 대해 짐이 숙고해 보도록 하겠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 보라.”

황제의 축객령에 용아가 예를 올렸다.

“물러가옵니다.”

“……물러가옵니다.”

윤제가 생각을 하는 사이 용아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제가 어서 가 보라는 듯 당신 아들을 향해 손을 슬슬 저었다. 기묘한 것이 많은 아침이었다. 윤제는 얼떨떨한 와중에 바쁘게 앞서 가는 용아를 부지런히 따랐다. 무엇이 불쾌한지 앞서 걷는 늘씬한 등에서 냉기가 풍겨 나오는 듯했다.

이유를 알 듯 말 듯 했다.

“용아.”

태자와 황제의 위엄이 펼쳐진 덕분에 밖은 한산했다. 하나둘씩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평소에 비하면 텅 비다 시피 했다.

“예.”

윤제의 붙잡는 손길에서 팔을 빼어 내며 용아가 답했다.

“아까 고마웠다.”

남자가 싸늘한 얼굴로 돌아서려는 이를 붙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예.”

용아는 짧게 말하고 재차 돌아서려 했다. 단단히 틀어진 얼굴이 무엇을 고마워하는지 알기는 할까 싶었다. 윤제가 자신을 재차 지나치려는 이를 꿋꿋하게, 간곡한 태도로 붙들었다.

“용아.”

남자의 다정한 부름과 따듯한 시선에 용아가 쌀쌀맞은 얼굴로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그래서 저를 볼 때마다 어디 아픈 데 없느냐 물어보셨습니까. 그래서 제게…….”

그제야 윤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했다.

“……얼마 안 되었다.”

남자의 얼굴이 방금 전보다 훨씬 정중하였다. 미안함 가득한 시선이었다. 용아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용아의 말이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그리 가엾은 것을 보는 시선하지 마십시오. 제가 볼모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윤제의 반듯한 얼굴이 곤란함을 퍼트렸다.

“그런 뜻 아니다.”

“그런 뜻이 뭔데요.”

용아가 드물게 어리게 굴었다. 날 선 표정을 내보이는 얼굴을 윤제가 차분히 바라봤다. 애틋함이 느껴지는 시선에 용아가 더 불쾌해했다.

“조만간 합방례가 있을 거다.”

윤제가 나직하게 말했다. 남자의 저음이 전하는 말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태자고, 용아는 태자비이니 합방례를 이제야 하는 건 늦어도 한참 늦었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제가 전하는 말의 무게는 전혀 달랐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친절히 알려 주는 것이며, 동시에 경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요…….”

용아가 당황한 얼굴로 그게 뭐가 놀랍냐는 투로 말했다.

“네가 도망가고 싶으면 내가 도와주마.”

참으로 친절한 태자셨다.

“놓으십시오.”

용아는 제 팔꿈치를 조심스레 붙잡고 있는 사내의 손을 사납게 뿌리치고 돌아섰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 용아의 곁으로 속속 모여든 영화대의 궁인들이 따라붙었다.

“……또 미움 받았네.”

윤제가 떠나는 차가운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계단 아래에서 태자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등우의 표정이 근심 걱정으로 가득했다. 떠나는 태자비를 보고 자신을 한심스레 올려다보는 태감의 얼굴에 대고 무어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언제 다가온 것인지 좌첨이 윤제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폐하께서 찾으시옵니다.”

정천궁 태감의 말에 윤제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태감을 향해 손을 저어 주었다. 공공을 따라 걷는 태자의 얼굴이 불손하였다.

“방금 가라고 해 놓고 왜 부르실까.”

“그것까지 소인도 모르겠사옵니다. 드시지요.”

좌공공이 문을 열어 주며 머리를 낮췄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열린 문 안으로 든 윤제는 침묵한 채 예를 올리고 무릎을 꿇은 채 하명을 기다렸다.

“태자는 태자비와 합방해라. 이틀 뒤다.”

“부황!”

윤제가 낮추고 있던 얼굴을 들며 소리 높였다.

“도망 보낼 생각 마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짐이 다 들었느니라. 어설픈 착한 남자 흉내 따위 관둬라. 새아가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안타까우냐. 그럼 네가 잘해 주면 될 일이지. 도망은 무슨. 도망? 태자비가 사라지면 너하고 나하고 전쟁이다. 알겠느냐. 당연히 짐이 이길 것이야. 그러면 너희 둘을 한방에 감금해 둘 것이다. 도망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짐의 양팔에 손주가 안기기 전까지 어림없다.”

황제가 양팔을 둥글게 굽히며 아이 둘을 안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윤제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부황…… 저희 대화를 엿들으신 겁니까.”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는 법이야. 조심해야지. 어젯밤에 둘이 한 침상 썼다며. 사이도 좋아졌는데 무슨 도망이야. 알아야 할 걸 다 알고 있다는 걸 보였으니 바로 행동에 들어가야지.”

“태자비가 똑똑하게 군다고 하셨으니 굳이 합방례를 하지 않아도 불미스러운 일은…….”

윤제의 말에 황제가 팔걸이 탕! 소리 나도록 쳤다.

“네 걸 쟁취하여야지.”

“쟁취라니요…….”

“모르느냐. 짐은 너에게 황가의 혈통을 물려주어 제좌를 잇게 하는 것보다 너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스스로 짝을 정할 수 있는 특별한 백화와 짝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에 더 큰 자부심을 느낀다.”

“소자를 낳아 주신 모후를 그런 마음으로 아끼셨습니까. 상대가 특별한 것보다 서로 좋아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럼 안 되느냐. 그 특별한 존재가 나로 인해 생의 결정을 바꾸는 게 좋아하는 게 무어가 이상해. 태어나길 그리 태어나서 스스로의 결정이 아니라 해도, 특별한 건 특별한 게지. ……서로 좋아하는 거야…… 중요하지. 중요하니까 새아가가 너를 좋아하게 만들면 되잖느냐. 우선 어제를 생각해 봐라. 네가 못된 성질머리 부릴 때 곁을 내주지 않는데도 다가와 위로해 줄 수 있는 것 자체가 이 까다로운 혈통에게 내려진 축복 아니겠느냐. 성질부리는 건 순간이고 후회도 순간이다. 그런 특별한 애가 세상에 둘도 아니고 하나라는데, 걔가 네 짝인 걸 좋아해야지. 네가 싫으면 도망가게 해 주다니, 그게 무슨 헛소리냐. 내 양팔에 손주 안기 전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다시는 하지 말고, 어떻게 걔가 너를 좋아하게 할지 고민이나 해라. 짐의 말을 명심해라. 합방례는 이틀 뒤다.”

황제가 다시 손을 내저어 윤제를 물리려 했다.

“길일을 정한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틀 뒤가 길일이다.”

“부황은 그저 손주를 양팔에 안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안 되느냐.”

황제가 이죽대며 위엄 넘치는 체 하였다.

“부황.”

“딴 놈들은 힘의 고하를 막론하고 마흔 넘자마자 손주를 줄줄이 거느리기도 하는데, 황가는 가리는 게 많으니……! 줄줄이까지는 어려우니 우선 양팔부터 채울 것이야.”

“할아버지가 그리 되고 싶으십니까.”

윤제가 무엄하게도 짜증을 엿보였다.

“그래. 되고 싶다. 네가 잘 좀 해 보아라!”

황제가 상관하지 않고 당신 할 말만 늘어놨다. 황망하였지만, 더 말해 봐야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물러가겠습니다.”

황제가 예를 올리는 태자의 머리꼭지에 대고 엄중히 말했다.

“길일은 이틀 뒤다.”

윤제는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얼굴로 돌아서며 건성으로 답했다. 이틀 뒤라고! 황제가 다시 강조했다. 격한 외침에서 도망치듯 윤제가 정천궁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왔다.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는 그를 본 등우가 살피는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전하.”

걱정 가득한 물음조차 귀찮았지만 태감에게는 죄가 없었다.

“영화대로 가자.”

윤제는 대답 대신 말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갑작스러운 합방일을 알리는 것이 벌써부터 걱정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걷는 내내 몇 번이나 머리를 내저었다.

적막이 내려앉은 방 안에 따듯한 차향만 쌓여 갔다.

“…….”

윤제는 찻잔만 만지작거리는 손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영화대를 찾은 태자와의 대면을 용아는 처음에는 거부했다. 상궁은 태자에게 송구한 말을 올리며 곤란해 했지만 태자비가 만나지 않겠다 하니 앞을 내어 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태자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주위를 치우고 들 수 있는 존재란 것을 다들 그가 정중하게 굴 때는 잊고는 했다. 윤제는 다시 한 번 태자비에게 만날 것을 청했다. 용아가 재차 거부했다. 세 번째로 청할 때, 윤제는 합방일이 정해졌고, 일자를 알고 싶으면 자신을 불러들이라 말했다.

태자의 말에 영화대와 금당대 궁인들이 더 놀랐다. 모장에게 말을 전해 들은 용아는 결국 남자를 방에 들였다. 어차피 그가 원하면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합방…….”

용아는 차를 한 잔 다 비우고서야 웅얼웅얼했다.

“이틀 뒤다.”

입가로 가져가던 찻잔을 내리며 윤제가 말했다. 지나치게 가까운 합방일에 대답을 들은 얼굴이 잠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틀…….”

긴장으로 굳어 든 얼굴이 우물댔다.

“걱정할 것 없다.”

윤제가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대는 손 위에 손을 겹치며 말했다. 돌아설 때 모질게 떨치고 나왔음에도 다정하기만 한 남자를 용아가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불안을 숨기지 못하는 뺨으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용아는 남자가 주는 위로를 가만히 받았다.

“…….”

말없이 끄덕이는 얼굴을 향해 윤제가 목을 울리며 친절히 말했다.

“교합하지는 않을 거다.”

합방례는 신부를 붙잡아 놓기 위한 것이니, 어떻게 보면 신부의 입장에서는 더 좋지 않은 것이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남자의 손이 전하는 위로를 가만히 받고 있던 얼굴이 적나라한 말에 움칫 튀어 올랐다. 난감해하는 용아만큼이나 쑥스러운 말을 건넨 윤제 또한 곤란한지, 껄렁한 농을 하는 것처럼 머쓱한 웃음을 퍼트리며 말을 이었다.

“정말이야.”

용아의 얼굴이 모호하게 흐트러졌다.

“형만 믿어라.”

윤제가 조금 더 허세를 부렸다. 너는 나의 비이니 합방은 합당한 것이라 말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진심에 더 가까웠지만 그런 만용을 부릴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상대로 용기를 내는 것도,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도 모두 당연한 것이었다. 용기를 내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이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진 않잖아요.”

용아가 눈을 내리 깐 채로 속닥거렸다.

“그렇지…… 합방례 법도를 알고 있느냐.”

윤제 역시 눈을 내리깔며 소곤거렸다.

“아니요. 윤공자 형님은요……?”

두 사람의 대화에 여백이 무척이나 많았다. 윤제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내저었다. 용아는 시선을 내리깔고 있음에도 남자의 대답을 알아챘다.

“어떻게 해요…… 길일이 이틀 뒤래요……?”

용아의 속삭임이 전하는 바는 명확했다. 길일이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윤제가 생각하기로 황제의 심중 길일을 앞으로 있을 모든 날이 길일이었고, 이틀간 여유를 주는 것은 궁인들이 신혼 동방을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인 듯했다.

“……형이 잘할게…….”

윤제가 단단히 약속했다. 용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까 못나게 군 거…….”

“괜찮다.”

“고맙습니다.”

용아의 사죄에 윤제가 얼른 답했다.

“나야말로 아까 못나게 굴 때 부황을 막아 주고 편들어 주어 고맙다. 그런데…… 이틀 뒤에는…… 괜찮을 거다. 가 보마…….”

윤제는 네가 감싸 주는 순간 일어난 그것이 무엇일까 물어보려다 말았다. 남자의 말에 어느 때보다 여백이 많이 담겨 있었다. 용아는 윤제의 말에 무엇이든 끄덕끄덕 동조했다. 윤제가 용아의 손을 단단히 쥐었다가 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윤제의 만류에 용아는 예를 거의 올리지 못했다.

다시 방 안에 침묵이 내렸다.

“합방.”

긴 침묵 후에 조그만 웅얼거림이 울렸다. 낯선 첫날밤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합방례 당일이 되었다.

이틀 뒤는 눈 깜짝할 새였다.

합방례가 정해진 순간 동궁에서 가장 높은 상궁들이 영화대로 들이닥쳐 태자비의 치수를 재었다. 합방례에 입을 침의를 지어야 한다고 했다. 이틀 만에 금수와 은수를 넣은 침의가 완성되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용아가 은근히 염려하는 척 의문을 띄우자, 염려 말라는 씩씩한 대답만 돌아왔다. 상궁들의 씩씩한 대답처럼 이튿날 정오에 완성된 침의가 태자비에게 보내졌다. 태자비에게 침의를 선보이러 온 상궁은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만들어졌다 수차례 강조했다.

동궁에서 가장 높은 상궁들이라는 명성에 맞게 그녀들은 태자비의 침의를 만들며, 동시에 태자의 침의도 완성했다고 하였다. 침의라기에 너무 호화찬란한 수가 들어가 있었다. 하루 만에 그걸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완성했다는 게 놀라움을 넘어 당황스러웠다.

합방례 하루 전에 금당대 태감과 상궁들이 와 태자와 태자비의 합방례가 금당대 침전의 가장 깊은 방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뿌듯한 얼굴로 고했다. 등우는 금당대 침전, 가장 깊은 방은 태자와 태자비만이 들었음을 일곱 차례나 강조했다.

그러냐는 대답이 다였다.

등우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었으나, 모장이 그의 숙인 옆구리를 팔꿈치를 날래게 찍어 와 숨을 삼키느라 말을 할 순간을 놓쳤다.

황제는 합방례 당일 태자와 태자비에게 조석으로 올리는 문안을 올 것 없다 하였다. 태자와 태자비가 진실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되니 기쁘다는 말씀까지 전하여 오셨다.

합방례 당일 태자는 태자비를 찾을 수 없었다.

어둠이 내린 후에 태자비는 태자의 교에 올라 금당대로 향했다. 교는 침전 앞에서 내려졌다. 용아는 며칠 전 밤처럼 어둠을 걸었다. 시선을 내린 손들이 열어 주는 침전 안으로 들자, 며칠 전과 전혀 다른 풍경이 용아를 맞아 주었다. 호화로운 비단이 시선이 닿는 곳마다 둘러져 있었다. 비단의 귀마다 금사로 축언이 새겨져 있었다. 화려한 동방을 거닐어, 동방에서 가장 사치하게 꾸며진 텅 빈 침상 끝에 앉았다.

이틀 전에 본 윤제는 용아에게 그저 하룻밤 잠을 자는 것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이미 얼떨결에 둘은 함께 밤을 보냈다. 그러니 별것 아니라 했다.

태자의 납심은 따로 알려 주지 않았다. 여닫이는 문의 기척만으로 충분했다. 호화로운 침상 끝에 오도카니 앉아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를 본 윤제는 순식간에 주위를 물렸다. 고요한 소낙비가 내리는 소리를 퍼트리며 금당대에 머무르고 있던 이들이 떠나갔다.

“왔느냐.”

적막한 공간에 어색한 안부가 오갔다.

“오셨습니까.”

윤제가 용아의 곁에 앉았다. 용아가 저도 모르게 조금 옆으로 피했다. 그걸 윤제가 지켜보고 있었고, 그래서 용아는 물러난 만큼 다시 돌아가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가 힘겨웠다. 눈치 없는 심장이 가슴이 얼얼하도록 쿵쾅댔다.

“용아.”

“예. 윤공자 형님.”

평소 아무렇지 않게 나누던 말이 미친 듯이 어색했다.

“있잖아…….”

윤제가 수줍은 많은 소년처럼 어렵게 말했다.

“……?”

용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너하고 나하고…….”

“네…….”

“그, 입 맞춰야 한다…….”

윤제가 대죄를 짓겠다 고하는 얼굴로 합방례의 법도를 신부에게 알려 주었다. 남자의 말을 들은 무구한 얼굴은 곧바로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살짝 끝이 올라간 눈을 치뜬 채 멈추어 있었다. 윤제가 무어라 더 설명하려 할 때 용아가 물결이 치는 것처럼 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완전히 이해했는지 답했다.

“예.”

무심한 얼굴은 차분했다.

“그리고.”

윤제의 이어지는 말에 힘겹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용아의 얼굴이 원망을 퍼트리며 남자를 돌아봤다. 뭐가 또 있냐는 얼굴을 향해 윤제가 말을 이었다.

“손대도 될까.”

남자가 손등을 다 덮는 침의의 호화로운 소매를 치우며 물었다. 용아가 가만히 끄덕였다. 남자의 큰 손이 용아의 양쪽 귓불의 뒤와 열 개의 손가락 끝, 아랫배의 배꼽 옆, 무릎 새치 위 허벅지를 차례로 짚었다. 남자의 손이 짚고 갈 때마다 용아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혀로 핥아야 한다.”

윤제가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네?”

동방에 든 후로 용아가 가장 소리 높여 말했다. 잔뜩 잠긴 저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답했다.

“네가 나한테 해야 돼.”

윤제의 말에 용아는 잠시 눈을 뜬 채로 기절한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고 멈추어 있는 얼굴을 윤제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긴 정적 후에 용아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할게요.”

“괜찮겠느냐. 깨끗이 씻긴 했다.”

윤제가 잔뜩 미안해하며 말을 건넸다. 경직된 얼굴을 풀어 보려 가벼운 말을 덧붙여 봤지만 무심하게 답한 얼굴의 뻣뻣함은 풀릴 줄 몰랐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아가 대단한 시험에 드는 것처럼 단단히 답했다.

“……응, 고생스럽겠지만 수고해 다오…….”

윤제가 곤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말하며 뭐부터 할까 라는 뜻으로 손을 펼쳐 보이며 몸을 내주었다. 용아가 예고 없이 얼굴을 기울여 남자의 귓불 뒤를 핥았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살덩이가 맨살을 쓰다듬는 감촉에 윤제가 숨을 일시에 멈췄다.

오른쪽에 이어 왼쪽에도 부드러운 까끌함이 훑고 갔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용아가 진지한 얼굴로 의문을 건넸다.

“맞는 걸로 하자.”

윤제가 열이 오르려는 얼굴을 가라앉히며 무해한 입술 앞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손끝에 닿은 부드러운 입술이 열리며 축축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내어져 메마른 피부를 핥고 갔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 끝을 훑는 간지러움에 윤제가 숨을 삼키고 다시 삼켰다. 왼손 다음은 오른손이었다. 부드러운 살에 빨리며 손가락이 열 개인 이유를 윤제는 깊이 고민했다.

다음은 무릎 새치 위 허벅지였다.

“아니. 아니, 잠깐.”

용아가 침상 아래로 내려가 남자의 허벅지를 핥으려 했고, 윤제가 다급히 아래로 내려가는 몸을 멈춰 세웠다. 태자는 높으신 분이었다. 그의 앞에 무릎 꿇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 의미를 담은 얼굴이 윤제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같은 곳에 앉은 채로 무릎 위를 핥는 건 어려웠다.

“싫으십니까.”

용아는 여기, 여긴가? 혀를 대야 할 곳을 가늠하며 물었다.

“내가 일어설까.”

윤제의 물음에 용아가 솔직히 말했다.

“어떤 거든 이상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이 진실이었다.

“네가 편한 대로…….”

윤제가 허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용아가 아래로 내려가 남자가 옷자락을 걷어 주기를 기다렸다. 딱 무릎까지만 올라가는 침의를 윤제가 힘으로 허벅지가 보이도록 당겨 올렸다. 뭔가 단단히 찢기는 소리가 났지만 둘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용아가 혀를 내 남자의 맨살을 핥았다. 깨끗하게 씻었다는 그의 말대로 맨살에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짙은 체온과 자신의 혀가 품고 있는 온기만 선명히 알 수 있었다.

용아는 잠시 기다렸다.

윤제가 옷자락을 풀어 아랫배를 내주었다. 긴장으로 굳어 든 맨살 위로 내리는 숨결이 간지러운지 근육의 윤곽이 선명한 아래가 희미하게 웃었다. 합방례의 법도가 짓궂고 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혀끝으로 재빨리 단단한 살 위를 핥고 몸을 일으켰다.

침상 위로 돌아온 용아의 얼굴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윤제가 고요한 얼굴 위로 입술을 기울였다. 단단히 각오를 다지는 얼굴을 향해 남자가 곤혹스러운 말을 건넸다. 하다가 멈추고 알려 주고 다시 하는 것보다 이편이 나을 것이다.

“……입술 벌려야 돼…….”

남자의 입술이 고요에 잠긴 윗입술을 빨았다. 살짝 진동하는 입술을 두드린 남자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 아랫입술을 이어서 머금었다. 남의 맨살을 무심히 핥고 간 입술이 닫힌 채 잠잠했다. 따듯한 입술에 닿아 있던 윤제가 천천히 물러나자, 망설임 가득한 몸짓으로 열리지 않던 입술이 느릿느릿 열렸다.

남자의 입술이 다시 용아를 삼켰다.

열린 입술 안으로 부드럽고 따듯한 살덩이가 파고들었다. 입술을 파고든 살덩이의 부피와 움직임이 이상할 정도로 선명히 와 닿았다. 안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움직일 줄 모르는 혀를 빨아 당기고 깊이 머금기를 반복했다. 남자의 숨결이 용아를 파고들 때마다 숨이 차올랐다. 뜨거운 감각이 쏟아질 때마다 머릿속이 얼얼하게 울렸다. 입 안을 어지럽히던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혀를 천천히 놓아주며 물러났다. 턱 끝이 차오른 숨을 헐떡이는 용아를 본 윤제가 당황한 얼굴로 붉어진 얼굴을 살폈다.

“…….”

신혼동방에 든 후 사죄가 숨 쉬는 것만큼 합당해진 남자가 입술을 열려고 할 때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타고 눈물이 내렸다.

“……용아…….”

윤제는 더욱 당황했다. 남자의 부름에 용아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서러운 숨을 삼키는 얼굴을 앞에 두고 윤제가 절절 매었다.

“…….”

용아는 말없이 울며 잘게 도리질만 했다.

“형이 정말 미안해.”

윤제가 이유 불문하고 사과했다.

“……아니…… 에…….”

용아는 겨우 말을 내뱉다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울음을 이어 갔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정인이 아니었다. 남자는 원치 않게 정인과 소원해졌고, 자신은 그 틈에 태자비의 위명을 내세워 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걸 다 아는 데도, 입술이 닿는 순간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마치 좋아서 입을 맞추는 것처럼 착각에 빠졌다. 귀와 머리가 다 아프도록 뛰어대는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두근두근한 낯선 설렘이 좋아서 눈물이 나도록 부끄러웠다.

용아의 속을 모르는 남자가 뜨거운 울음을 퍼트리는 얼굴을 품으로 당겨 안아 주었다. 심장이 더 무섭게 뛰어 댔다.

“형이 다 미안하다.”

윤제가 우느라 뜨거워진 등을 다독여 주며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용아가 고개를 다시 내저었다. 몇 번이나 아니라고 했지만 남자의 사죄는 멈출 줄 몰랐다. 눈물로 젖은 눈가와 뺨을 훔치는 손길이 닿을 때마다 용아는 곤혹스러워 몇 번이고 숨죽였다.

“저, 잘래요.”

용아는 다정해서 곤란한 손을 피해 무뚝뚝하게 말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윤제는 웅크리는 어깨 위까지 꼼꼼히 이불을 덮어 주고 제자리에 누웠다.

어둠 속에서 기묘한 두근거림이 번져 갔다.

“용아.”

“예.”

“그래도 첫날밤인데, 등 돌리고 자는 건 좀 너무…….”

윤제가 말끝을 흐리며 용아의 뒷머리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웅크린 몸이 조금 더 방어적인 모양을 취했다. 뒷머리에 시선이 내리는 기분이 일었다.

오랜 머뭇거림 끝에 용아가 몸을 굴렸다. 돌아선 시야 가득 이쪽을 바라보는 윤제의 얼굴이 들어찼다. 흐릿한 빛 속에서 용아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화사한 웃음을 퍼트렸다. 윤제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잠시 고요해졌던 심장이 다시 두근두근 뛰어 댔다. 용아는 눈을 감아 심장을 자극하는 얼굴과 단절했다. 잠을 청하는 얼굴로 부드러운 속삭임이 건네졌다.

“벌써 자?”

“밤이 깊었습니다.”

용아는 눈을 감은 채 답했다.

“피곤하였어?”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말을 건네려는 윤제를 용아가 냉정히 쳐 냈다. 윤제는 철없는 소년처럼 칫, 혓소리를 내며 차갑긴, 나지막한 투덜거림으로 섭섭함을 표하다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단호히 잠을 청하는 얼굴에게 속삭였다.

“잘 자라.”

첫날밤이 두근두근 깊어 가고 있었다.

<다음 권에 계속>

#TRP절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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