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
태자비의 알현 허락이 떨어지자 정국은 더욱 분주해졌다. 황제는 익선 행궁에서의 모든 일을 태자에게 일임하고 개별적으로 당신을 찾는 왕공과 대신, 제관부와 제북 사신을 만나는 것만 허락하였다. 왕공과 조정관료, 제관부 일족과 제북 사신이 정천궁 황제의 집무실을 숨 돌릴 틈도 없이 찾았다.
태자는 태자비가 몸을 가눌 수 있을 때까지 행궁의 일과 관련한 모든 상소를 미루어 두었다. 제북 사신과 제관부 일족이 시시때때로 찾아와 태자비의 일주대 알현 허락을 재차 확인했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밝았다.
“…….”
수저를 든 사내의 얼굴이 사나웠다.
“하실 말 있으면 하십시오.”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린 밥 떠먹여 주기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용아가 말했다. 숟가락은 착실하게 움직였다. 그와 달리 불편하게 굳은 얼굴은 좀 더 험악해졌다.
“그치들을 꼭 만나야 돼?”
어제저녁부터 은근한 압박이 들어오고 있었다.
“윤공자 형님, 약속하셨잖아요.”
용아가 어렵지 않게 대꾸했다.
“알아?”
윤제가 눈썹 사이에 주름을 만들며 숟가락을 내밀었다. 숟가락 가득 고소하게 볶은 해산물이 들어간 따끈한 죽이 담겨 있다. 용아는 대부분 당연하게 숟가락을 받아들였지만 불쑥불쑥 민망해져 가끔씩 고민에 빠지고는 했다. 잠깐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숟가락이 금세 비었다.
“왕공들께서 부황을 찾아와 왕궁 시절처럼 일족이 함께 사는 게 좋았던 것 같다 말씀하신단다. 내원에 들 아이들이 태자비의 보살핌 아래에 있는 게 좋겠다고 하신다더라. 정군왕께서는 빈 전각 있으면 달랬다던가.”
숟가락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랬답니까.”
대답하는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제북 사신은 황실이 태자비를 잘 지키기 어려운 것 같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제북의 무장을 보내어 혈족의 고귀한 이인 태자비를 지켜 준다 하더라.”
말을 건네는 잘생긴 눈썹이 움칫움칫 불만스레 울었다.
“염려 마십시오.”
용아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화아, 형이…….”
마지막 숟가락을 비워졌다. 형이 알아서 다 해 주겠다, 형만 믿어라, 형이 털어 줄게 따위의 말을 하려는 얼굴을 향해 용아가 무심히 말했다.
“윤제 형, 저 옷 갈아입어야 됩니다.”
손바닥 상처를 자극하지 않도록 오른손의 손가락만 이용해 용아가 침의의 옷고름을 풀었다. 슥슥, 얇은 천이 쓸리는 소리에 윤제가 침상 끝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재빨리 일으켰다.
탁자 위 다반에 그릇과 수저를 담아 방을 나서는 태자에게 안으로 들어올 준비를 하던 모장이 예를 올렸다. 안으로 들어오던 모장이 방탕한 차림이 된 용아를 보고 잔소리를 늘어놨다.
“비전하. 앞섶 풀어헤치고 다니시면 아니 된다니까요.”
“바로 옆방인데 뭘.”
침상에서 내려서는 얼굴이 무심히 대꾸했다. 밖으로 쫓기듯 향하던 윤제는 닫히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
닫힌 문을 물끄러미 보는 윤제를 향해 등우가 말을 건넸다.
“전하, 안에 무얼 두고 나오셨습니까.”
“아니다.”
윤제는 고개를 젓다가 손에 들린 다반의 존재를 깨달았다. 빈 그릇이 담긴 다반이 등우에게 넘겨졌다. 등우는 이걸 전하께서 왜 들고 나오셨습니까, 물으려다 말았다. 태자도 그걸 본의에 의해 들고 나온 건 아닌 것 같았다. 황급히 밖으로 나온 것에 비해 별로 할 일도 없는 듯했다.
“비전하께서 오늘부터 태자비의 정복을 입으신다 합니다.”
“그래?”
목적 없이 멀뚱히 서 있는 윤제를 향해 등우가 살뜰하게 말을 올렸다. 정복이면 뭐가 다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남자의 얼굴이 열리는 소리가 나는 문을 돌아보다가 순간 멈추었다.
붉은 비단 장포를 입은 용아가 문을 나섰다. 광택이 도는 붉은 장포는 땅에 쓸리지 않을 만큼만 길었다. 목둘레와 어깨, 팔, 등의 선을 따라 금사로 수가 놓인 붉은 장포는 그자체로 시선을 끌었다.
황궁 안 뭇사람의 포와 다르게 붉은 장포는 팔의 통이 좁았다. 어깨에서 손으로 떨어지는 선이 넉넉한 편이었지만, 팔을 내리면 너울거리는 소매가 발목에 닿을 만큼 통이 넓은 다른 포에 비하면 간결해 보일 정도였다. 어깨에서 손으로 향하는 선이 나팔 모양으로 퍼지는 붉은 장포의 소매 끝이 손목 위를 달랑하게 덮은 아래로, 손등까지 완전히 가려 주는 몸에 꼭 맞는 이중 소매가 덧대져 있었다. 단령처럼 몸의 선을 따라 내려 간결해 보이면서도 호화로운 비단의 광택과 금빛 수가 시선을 끌었다. 여밈이 있는 곳을 따라 흐르는 광택 도는 검은 비단에 금빛 수가 붉은 장포의 화려함과 장중함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비전하, 하나만 더요.”
“되었다니까.”
용아와 모장이 장신구를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항상 하나로 올려 묶고 고정해, 묶은 부분과 인근에만 집중적으로 장식을 꽂았던 용아가 오늘은 긴 머리를 풀어 내리고 있었다. 단정하게 가르마를 탄 머리의 윗부분을 일부는 묶어 고정하고 일부는 뒤로 내렸다. 고정해 묶은 부분에 간결한 장신구가 꽂혀 있었다. 등 뒤로 내린 머리도 하나로 모아 어깨선 부근에서 장신구로 고정해 주었다. 장신구가 고정된 부근과 경계가 나누어진 부분마다 모장은 걸으면 부드럽게 흘리는 보요와 홍보석 남보석을 녹보석을 머금고 있는 비녀를 꽂으려 했고, 용아는 하나라도 덜 꽂으려고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제발 하나만 더요!”
“하나만이야.”
모장의 애절한 외침에 용아가 옆머리를 내줬다. 한숨을 내쉬며 선을 긋는 태도가 단호하면서도 다정했다. 금장식이 가득 담긴 모장의 양손이 안타깝게 떨렸다.
“하나 더 하지 그러냐.”
다가온 윤제의 말에 모장이 얼른 손을 뻗었다. 이쪽에 하나 더 할까요? 라고 묻는 손짓에 윤제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용아가 무어라 할 틈도 없이 자그마한 금장식과 광택이 없어 투박해 보이면서도 섬세한 작은 은장식들이 추가로 꽂혔다.
“무겁습니다.”
용아의 투덜거림에 윤제와 모장이 재빨리 손을 물렸다.
“예쁘다.”
예상치 못한 말이 갑작스레 울렸다. 용아의 얼굴이 굳어들 었다. 자신을 한 뼘 위에서 웃으며 내려다보는 얼굴이야말로 그림처럼 완벽했다. 감히 태자에게 전하가 더 예쁘십니다 말할 수 없었다.
“……이상한 말을 다 하십니다.”
표정을 억누른 얼굴이 짧게 말을 내뱉고 휙 돌아섰다. 윤제가 휭하니 가는 용아를 멍하니 바라봤다. 순식간에 멀어진 뒷모습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횅한 허공에 대고 윤제가 말했다.
“…….”
“…….”
얼떨떨한 얼굴을 향해 침묵에 감싸인 도리질이 건네졌다.
“그렇지?”
윤제가 동의를 구하며 빠르게 멀어지는 차가운 뒷모습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모장과 등우가 태자를 따르며 소리 없이, 동시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쑥스러워 하시는 거 아닐까요.”
“잘하신 겁니다, 전하.”
모장과 등우가 태자에게 격하게 찬사를 보냈다.
“그런가.”
윤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척 훌륭한 칭찬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장과 등우가 윤제를 힘껏 독려했다. 엉뚱한 데서 안달 내는 둘의 모습에 윤제가 픽 웃으며 용아를 따라잡았다. 형이 좋은 말한 건데 이상한 말이라니 기분이 상했느냐 물으려 했던 남자는 계단을 오르며 오른쪽 어깨를 과감하게 휙휙 돌려 푸는 뒷모습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뭐하냐.”
오른쪽 왼쪽 비틀어 푸는 허리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뭐, 뭡니까…….”
용아가 후다닥 몸을 물리려 했다.
“어디가 아파?”
용아를 살피는 남자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했다.
“안 아픕니다.”
용아가 곧장 답하며 허리를 붙든 손을 떼어 내려 했다. 당황한 얼굴로 낯선 열기가 번졌다. 쉬지 않고 꼬물대는 용아를 놓아주며 윤제가 눈썹을 구기다 웃음을 퍼트렸다.
“뭘 하려고 몸까지 풀어?”
“한몫 뜯어낼 거라니까요.”
용아가 호기롭게 말하며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기대하마.”
윤제가 바삐 가는 뒷등을 어렵지 않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머리 위에서 저음이 울릴 때마다 용아의 얼굴이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숨을 고르는 용아를 대신해 윤제가 다가온 궁인에게 지금 바로 들겠다 말했다. 궁인이 사뿐사뿐한 움직임으로 태자 내외를 모셨다.
전각 안으로 든 둘은 궁인의 날렵한 움직임을 따라 걸었다. 상석으로 드는 통로는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복잡하게 꺾이는 복도를 따라 걸으며 용아는 뒷등에 달라붙은 어색함을 떨쳐 내려 애썼다. 궁인이 문을 열고 뒷걸음질을 치며 열린 문 옆에 시립해 섰다. 한걸음 내디디면 보좌로 향하는 통로였다.
“들어가자.”
윤제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용아를 향해 말했다.
“전하.”
다정하지만 닿지 않으려 노력하는 손길을 따르며 용아가 남자를 불렀다.
“응.”
태자 내외를 기다리는 선객들은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저랑 친한 척해 주세요.”
“친한 척?”
용아가 낮춘 목소리로 속닥거렸고, 윤제가 눈치껏 목소리를 줄여 되물었다. 용아가 보좌로 향하며 덧붙였다.
“저한테 잘해 주는 척하시라고요.”
“척이라니.”
윤제가 보좌에 앉으려는 용아의 어깨를 감싸며 소곤거렸다. 어깨로 와 닿는 온기를 용아가 쳐 내려 했다. 남자의 손이 꼼짝 않았다.
“전하.”
용아의 부름에 윤제가 목을 흠, 울리며 웃었다.
“화아. 아직도 얼굴이 창백하다. 앉아 있을 수 있겠느냐?”
걱정 가득한 커다란 목소리가 전각 안에 차올랐다.
“괜찮습니다, 전하.”
용아가 어깨에 달라붙어 있는 남자의 손을 쳐 내려 하며 다소곳이 답했다. 윤제의 손이 어깨를 감싼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용아는 거의 남자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상태였다. 용아는 이럴 것까진 없다고 하려 했다. 뒷머리를 살살 조심스럽게 쓰는 손길이 지나치게 다정했다. 친한 걸 넘어 좋아하는 사이처럼 보일 것 같았다.
“앉자.”
윤제가 품에 안고 있던 용아를 보좌에 앉혀 주고서야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상석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먼저 와 예를 취하고 있던 얼굴들이 미묘해졌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 전하, 홍복을 누리소서.”
“태자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태자비 전하, 홍복을 누리소서.”
전각 안에 흠잡을 데 없는 인사가 연이어 울렸다.
“오늘 이 자리는 태자비를 알현하러 온 것이니 나는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말씀들 나누시오.”
“송구하옵니다, 전하.”
윤제가 아래를 향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내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옆에 앉은 용아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몹시 다정하고 조심스러웠다. 용아는 몸에 닿는 따스한 기운에 왜 자꾸 집적대냐고 하려다 힘겹게 웃었다. 웃는 얼굴 아래로 이를 악문 속닥거림이 울렸다.
“이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왜에. 형이 잘해 준다니까. 아, 실례. 나하고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비. 나는 여기 없는 사람이니까.”
“송구하옵니다, 전하.”
윤제가 흐뭇한 시선을 용아에게 끊임없이 건네며 뻔뻔스레 말했다. 낮춘 목소리로 형이 잘해 준다고 했잖아, 라는 말을 다시 반복했다.
용아는 귓가에 감도는 속삭임을 떨치고 앞을 바라봤다.
“이 사람이 어려 그대들을 보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긴 기간 기다려 주어 고맙소. 나를 보기를 청하였다지요. 내게 할 말이 있습니까.”
아래에 시립해 있던 무리 중 하나가 중앙으로 나섰다. 양쪽 중 소수의 무리에서 나선 사내가 태자비를 향해 예를 올렸다.
“태자비 전하. 신(臣), 제북의 사신으로 황도에 온 동곽가(家)의 공순이라 하옵니다. 동곽씨 일족을 대신하여 태자비께 인사 올립니다. 오랫동안 뵙기를 간하여 왔사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무탈하신지 여쭙고 싶으나 최근 불미스러운 일이 있음을 아는 바 그는 허례겠지요.”
“동곽의 후인을 볼 수 있어 이 태자비는 기쁘오. 동곽의 가주께서는 강녕하신가. 동곽씨 후계의 향방을 정하였는지 묻는 것은 실례일까요.”
용아가 너그러운 목소리로 사신을 맞았다.
“……동곽의 후계는 근 시일 내에 정해질 것이옵니다, 비전하.”
태자비가 가볍게 덧붙인 물음에 사신이 일순 시선을 올렸다가 내리며 대답을 고했다. 용아는 무심한 얼굴로 그러신가, 짧게 대꾸했다. 옆자리에 앉아 그걸 보고 있던 윤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사신도 용아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지만, 근 시일 내에 정해진다는 것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태자비 전하.”
앞으로 나선 사신이 흐트러졌던 얼굴을 엄숙히 굳히며 태자비를 찾았다.
“말씀하세요.”
용아가 담담히 답했다.
“태자비 전하께서 이번 신년 연회 때 큰 변고를 당하셨음을 아옵니다. 이럴 수는 없사옵니다. 황실은 태자비 전하를 지켜 내야 하거늘 제북의 고귀한 분께서 크나큰 해를 입도록 하다니 이를 좌시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황제께서 며느님을 귀애하신다지만 현실적이고도 확실한 방책이 있어야 할 줄 아옵니다.”
“할 말은 그것이 답니까.”
“태자비 전하. 이곳에 태자 전하께서 있다 하나 이 사람 후족의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으신 비전하를 지키기 위한 마음에서 한 말씀 올립니다. 황실이 태자비 전하를 지키기 어렵다면 장군부 무장을 중경으로 불러들여 비전하의 안전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태자비께서 이 건에 대해 이 사람들의 말에 힘을 실어 주실 것이라 믿겠사옵니다. 비전하께서 가장 어렵고 힘들 때 도와줄 이가 동향 사람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사신이 엄중히 말했고, 용아가 심드렁한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가 있을 거란 말인가.”
태자비의 말은 순진하고도 오만했다.
“비전하께서 황가로 시집을 오셨다 하나 태어난 곳을 잊으셔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태자비께서 고귀할 수 있는 것도 다 홍문의 힘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홍문의 힘이 쇠해지면 태자비 전하의 힘도 쇠해지는 것 아닐는지요.”
사신이 겸손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동곽이 나를 겁박하는 겐가.”
“송구하옵니다, 비전하. 겁박이라니요. 당치 않사옵니다.”
태자비의 예민한 반응에 동곽씨가 곧장 부정했다.
“아니야. 동곽씨들이 지금 나를 겁박하고 있는 게지. 내가 너희 편을 들지 않으면 너희가 이 태자비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잖아. 그게 협박이 아니면 칭찬인가. 내가 떠나온 사이 제북의 풍토가 바뀌었나. 아니면, 동곽은 사신 감투를 쓰면 항상 이런 식으로 후가주들을 앞세워 황가를 욕보여 온 것인가. 동곽의 후예가 후가주가 되면 마음 단단히 먹으라 황실에 진언을 올려야겠어. 동곽뿐 아니라 지금 입 다물고 있는 후족 가문 전부가 다 한마음이신가.”
용아가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받아쳤다.
“비전하. 말씀이 지나치시옵니다. 후족과 동곽은 황실과 장군부를 위하여 온 정성을 다해 왔습니다. 일족에 대한 불온한 말을 부디 거두어 주소서!”
분노를 다 누르지 못한 낮은 목소리가 전각 안을 울렸다.
“……!”
목소리뿐이 아니었다.
스슥.
전각의 안과 밖에 시립해 있던 궁녀들이 조심스럽고도 빠르게 걸음을 물렸다. 용아의 옆에 앉아 있는 사내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 들었다. 동곽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퍼트리는 싸한 긴장감에 함께 전각 안에 들어 있던 제관부 일족들이 숨을 죽였다.
장군부 십일 후족은 홍문을 숭상한다. 후족이 홍문을 떠나지 않는 것은 홍문을 떠나면 힘이 쇄하는 탓이다.
제북 장군부와 중경을 오가는 사신과 중경 제관과 제관부로 터전을 옮긴 이들 사이에 미묘한 힘의 차가 발생하는 것은 그래서다. 제관부 일족의 위치도 중경 안에서 다루기 어렵지만, 제북 사신의 위치는 그보다 더 조심스럽다. 황족마저 한 수 접어 주는 게 제관부 일족이라면, 어떤 말을 해도 황제조차 우선 들어 주어야 하는 게 제북 사신이다.
제북 사신의 위세가 실로 대단했다.
“…….”
용아가 손을 뻗어 당장 황족 적자의 위엄을 보여 주려는 남자의 손을 붙잡아 말리며 무심히 입술을 열었다.
“네놈이 감히 뉘 앞에서 돼먹지 않은 위엄을 으스대려 하느냐.”
“송, 송구하옵니다, 비전하.”
죄를 지은 이가 아닌 다른 이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였다. 정작 동곽씨 사신은 분함이 여전한지 숨만 내리눌렀다. 단단하게 굳힌 입매에 곧장이라도 비소가 오를 듯했다.
“너희는 예의가 없지.”
태자비의 말은 지극히 짧았다.
“비전하.”
황족이라 하나 전각 안에 든 이들은 제북의 사신이며 황실과 제북을 잇는 가교역을 하는 중한 이들이니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예의를 배우지 못한 것들에게는 채찍질을 내려야 하는데. 오늘 이 사람이 채찍 들고 오는 걸 잊었다. 너희가 감히 누구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드느냐. 황실이 본 태자비를 지키지 못했으니 제북의 무장을 황도로 불러 호위를 시켜야 한다? 헛소리하고 있네. 이 나라 영토의 방벽이 누구냐. 장군부가 아니냐. 장군부가 국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황가 내원에 속한 아이들이 약탈당할 뻔하였으니, 신연회가 열리던 날 국경 경비를 선 장군부 무관의 목을 우선 전부 베어 내 놓고 황가와 장군부 사이의 과실을 따져야 하지 않겠느냐! 황족들이 행궁으로 든 날부터 신연회가 열리던 당일까지 국경 수비대의 무장에 대한 기록을 갖고 와. 내 손수 전부 죽여 드리지. 무엇하느냐!”
태자비의 분노에 전각 안의 이들이 다급히 머리를 숙였다.
“비전하, 화를 가라앉히소서. 옥체가 상하실까 저어되옵니다.”
“옥체가 상하실까 저어되옵니다.”
“옥체가 상하실까 저어되옵니다.”
제관부 대신의 말에 다른 이들이 뒤이어 말을 외쳐 올렸다.
“비전하. 장군부 국경 수비대가 설령 실수를 하였다 해도 모조리 목부터 베어 놓고 말을 논하자니 과하신 처사가 아니옵니까. 부디 화를 내려 두시고…….”
“동곽씨는 예의 없는 입 다물라.”
중앙에 나와 있던 사신의 덧붙이는 말을 용아가 짧게 쳐 냈다.
“송구하옵니다.”
동곽씨 사신이 분한 듯한 얼굴을 했지만 이전처럼 위협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비전하. 장군부의 과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황실의 방비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 또한 그것대로 책임을 묻고 죄에 따른 벌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어찌, 장군부 국경 수비대에만 목숨으로 죄를 갚으라 하시옵니까. 태자비께서 홍문 아래에서 태어나셨음을 잊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 또한, 비전하께서 고귀한 태생이시고, 황가의 적법한 태자비라 하시나 제북에서 온 사신께 예를 갖추셔야 하오. 제관부에 머무는 이들 역시 제북과 황실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넓은 의미로 봤을 때 사신과 진배없지 않겠소.”
단목씨가 옆으로 나서며 온유하게 태자비를 책했다.
“서열 정리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신가.”
용아가 픽 웃으며 말했다.
“으흠.”
여전히 제북 일족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 태자비의 태도에 불편한 소리가 미약하게 흘렀다.
“태자께서는 너그러우시어 제북에서 온 일족을 외숙으로 여겨 주신다지. 내게도 일족이 되니 당숙들로 불리고 싶으신 듯한데, 허튼소리. 너희는 황도에서 살며 배움이 부족해 예의가 없어. 황후께서 참으로 너희를 어여쁘게 봐 주신 모양이다. 본 태자비는 태자비이며, 후가주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너희는 모두 내 아랫것들이다. 이해가 되느냐.”
아랫것이라는 말에 동곽씨 사신이 미미하게 분노를 표했다.
“비전하.”
“예의 없는 입 다물라 했을 터인데. 그새 잊었는가. 너희 놈들은 힘이 넘쳐나 반대로 머리는 가볍게 태어나는 것인가.”
“말씀이 지나치…….”
“앞으로 나에게는 물론, 모든 이를 장군부 가주회에 참석하는 이들처럼 대해야 할 것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할 테니 풀어 설명해 주지. 함부로 보잘것없는 위엄을 표출하지 마라. 네놈이 지금 이곳에 장군부 대가주가 있으면 어쭙잖은 힘을 드러내 보이겠느냐! 가주회에서도 네놈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으면 그리 파르르하여 같잖은 위엄을 드러내느냔 말이다! 중경에는 네 변변찮은 힘에 주눅 드는 이들이 많으니 네 세상을 만난 것 같더냐. 네가 왕이라도 된 것 같으냐. 황도의 여유작작함에 취해 예의범절 익히기를 게을 리해서 그런 게지. 홍문 아래에서 태어나 내궁을 다스리는 책무를 지닌 내가 그런 돼먹잖은 버릇을 바로잡아 주어야 옳을 것이다. 네놈의 예의가 눈 뜨고 보아 줄 수 없으니 앞으로 입궁할 때 황실과 황도에 대한 예를 표하고 지난날 함부로 부끄러운 힘을 내보임을 반성하는 뜻으로, 남주문 이후부터 무릎걸음으로 들도록 하라.”
태자비의 지나친 말에 전각 안이 술렁였다. 사신이 소리 높였다.
“비전하!”
“너희 집 대문 앞에서부터 무릎걸음으로 오고 싶으냐.”
용아가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비전하, 과한 벌을 부디 거두어 주소서.”
“그대들도 동향 일족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는 뜻으로 남주문부터 무릎걸음으로 들고 싶소? 본 태자비의 말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올바르게 지적할 일이지 실컷 잘못을 저지르고 무조건 정에 얽매이려 하시오. 제북이 그런 곳이던가. 내가 아는 제북은 그렇지가 않은데.”
“비전하. 그는 제북에서 온 사신이며 동곽씨 적자 중 하나이옵니다. 그의 체면을 생각하시어 벌의 과중함을 거두어 주소서.”
단목대인 옆으로 공야대인이 나서며 급히 말했다.
“지금 내 앞에서 혈통 자랑을 하는 건가.”
용아가 악당처럼 웃으며 아래를 여유롭게 관조했다.
“비전하.”
“비전하, 그런 것이 아니오라…….”
제관부 대인들이 입을 다문 채 말없는 동곽씨와 사신들의 눈치를 보며 안타까움을 엿보였다.
“다들 잊은 모양입니다. 나는 하후가 전 대공자의 장자다. 나보다 혈통 좋은 이가 태자 전하 말고 여기서 누가 있다고 내 앞에서 혈통을 들먹인단 말이야. 너희가 황도에서 편히 살며 정말 생각이라고 하질 않으며 사는 모양이다. 체면? 그리 체면을 앞세우는 작자가 감히 태자비 앞에서 제 성질대로 비루한 힘을 내보였단 말이지. 본 태자비의 체면보다 제 체면이 위에 있다는 건가? 제북에서 온 사신인데 나더러 어쩌란 게야. 여기 가서 들은 말 저기 가서 똑바로 전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면 관둘 일이지. 사신인 게 뭐.”
태자비의 말이 이어질수록 전각 안이 고요해졌다.
“제관부가 넓게는 사신이시라. 중간에서 살기 힘들면 짐 싸서 홍문으로 돌아가면 될 게 아닌가. 내가 그대들 발목이라도 잡고 있는 줄 아는가. 나는 홍문의 후가주다. 네놈들이 개처럼 기기 바란다 하면 어쩔 것이냐. 황도에서 몇 년 살아보니 이 사람은 제관부가 그리 필요 없는 것 같아. 크게 쓸모없는 걸 내버려 두는 건 낭비가 아닌가. 이 사람의 시부께서 당신이 황제시니 내게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면 하나쯤은 들어주신다 하였거든. 너희만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짐 챙겨서 가실 이는 가시고, 사신을 관둘 이는 관두시게. 다만, 한 가지.”
용아가 품속의 금낭에서 도자기 조각을 움켜쥐고 꺼내 동곽씨의 면전에 내던졌다. 도자기 흔적이 쏟아져 내리며 사나운 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레 날아든 도자기 파편들에 웅크리고 있던 사신의 얼굴이 경직했다.
“대가주와 후족들에게 전해라.”
상석에서 내리는 목소리가 지독하도록 낮았다.
“하후가가 본 태자비의 목숨을 취하려 했으니 하후가와 뜻을 같이하는 후족 모두가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장군부 대공자 정화는 이 태자비 앞에 무릎걸음으로 와, 나와 황친들에게 폐를 끼친 것을 온 마음을 다해 사죄하고 벌을 청해야 할 것이다.”
태자비의 무도한 태도에 불평을 품고 있던 이들의 얼굴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옵니까.”
“하후가가 비전하의 목숨을 취하려 하였다니요. 하후가는 비전하의 친정이 아니옵니까. 지나친 억측이시옵니다. 증좌 없이 대가주의 가문을 욕되게 하는 것은 비전하께서 태자비이시며 후가주라 하셔도 좌시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부당한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행궁에서 비전하께 과한 위협이 있음을 아옵니다만 태자 전하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격이 용이한 상대라 태자비께 더 많은 위협이 가해진 것 아니겠습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기묘한 일이긴 했으나, 비전하의 목숨을 취하려 들다 의심하시다니, 하후가와 장군부가 그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곳곳에서 말이 터져 나왔다.
“증좌다.”
용아가 아래에 점점이 뿌려져 있는 도자기 흔적을 보며 말했다.
“이것만으로 죄를 묻기는 어렵습니다.”
사신 쪽의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고했다. 제관부 일족이 전혀 모르는 얼굴인 것과 다르게, 사신쪽 얼굴들 중 몇몇은 난감한 기색을 흘리고 있었다. 상석에 태자가 있고, 아래에 제관부 대신들이 있어 용아가 내놓은 증좌에 대해 눈치껏 언급을 자제한 얼굴이었다.
“누구냐.”
하문하는 얼굴이 몹시도 권태로웠다.
“송구하옵니다, 비전하. 사안이 중하여 예를 잠시 잊었습니다. 신, 제북의 사신으로 황도에 온 백목가의 원춘이라 하옵니다. 백목씨 일족을 대신하여 태자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후족이 천하를 이루는 이들 사이에서 소수라 하나 홍문에 속한 머릿수가 적다 할 수 없습니다. 주인이 바라지 않은 것이 때로 집 밖으로 내돌려질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백목대인. 설령 하후가와 대가주가 원치 않게 잃은 것이라 해도 그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 아니겠소.”
“그리 전하겠습니다. 허나 위험한 물건을 잃었다는 이유로 하후가 대공자를 이 먼 황도까지 오게 하는 것은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대공자 정화는 아직 열셋에 불과하옵니다. 중경까지 오는 것은 불가하니 부디 명을 거두어 주소서.”
“백목대인. 이 사람은 열두 살에 황도로 왔소. 하후가 무기고에 있어야 할 무기를 잃은 것인지, 내다 판 것인지, 순순히 내준 것인지 아직 정해진 것은 없으니 잃었다 추측은 금하세요.”
“송구하옵니다.”
사신들의 머리가 땅에 닿은 채 움직일 줄 몰랐다.
“비전하.”
단목대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태자비를 찾았다.
“아직 짐 안 싸셨습니까, 당숙.”
“소신은 예서 황가와 태자비 전하를 보필할 것이옵니다. 어디 가지 않을 것입니다. 섭섭한 말씀 모쪼록 거두어주 소서. 비전하, 그보다 하후가 무기고의 무기를 설혹 순순히 내주었다 하여도 그것의 쓰임을 모른 채 내준 것일 수도 있으니 무조건 죄를 묻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더하여, 장군부 대가주의 후계 중 바깥을 드나들 수 있는 자제는 대공자 정화뿐인 것으로 압니다. 의도치 않은 실수였다면 대공자 정화에게 죄를 청하라 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 아닐는지요.”
“당숙.”
“예, 비전하.”
“후족은 오래전 황가의 신부 사냥으로 많은 내원 아이들을 약탈당한 후 여러 가지 대비를 했지요. 그중 요아검도 있습니다. 황족의 압도적인 무력을 효과적으로 상쇄하려 만든 검법은 지금에 와서는 국경에서 뿌리가 같은 이들을 효과적으로 베는 데 쓰이고 있지요. 요아검의 효용은 황족과 뿌리가 같은 제북에게도 똑같이 통하지요. 국경 안팎에서 요아검의 묘수를 본 딴 검법이 횡횡하고 있습니다. 허나 원류를 이기기란 어렵지요. 장군부는 꾸준히 요아검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행궁에 난입한 진족은 장군부의 요아검을 썼고, 장군부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 준비한 변형 초식들도 사용했습니다. 만에 하나 하후가 무기고의 무기와 요아검이 실수로 외부에 내돌려져 황족의 목숨을 위협하는 데에 쓰였다 하더라도 이는 이 나라 강산을 지키는 방벽이 할 행동이 아닙니다. 진족이 사용한 연환검이 요아검이 아니라 의심되면 이 사람이 여기서 요아검의 검리를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용아의 웃음 띤 말에 윤제의 눈이 빛을 퍼트렸고, 아래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얼굴들은 핼쑥해졌다.
“송구하옵니다, 비전하. 소신들의 짧은 식견으로 비전하를 수고스럽게 하였습니다. 따로 설명을 하시는 노고를 끼칠 순 없지요. 망극하옵니다.”
“망극하옵니다.”
제북 사신 일행 전체가 앞으로 나서며 선창을 따랐다.
“망극하옵니다, 비전하.”
제관부 일족 역시 선창을 따랐다.
“…….”
한사코 수고를 끼치는 민폐를 부릴 수 없다 외치는 이들을 윤제가 무뚝뚝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내원에 드는 태자비가 검리를 어떻게 아느냐 꼬장꼬장하게 따지면 일목요연한 설명이 이어질 텐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굳힌 입매를 움직이던 윤제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알아차리고 인자한 웃음을 건넸다. 조금 머쓱해하는 웃음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퍼트린 용아가 시선을 돌리며 표정 없는 얼굴이 되었다.
“소신이 책임지고 그대로 전하겠나이다.”
깊이 숙인 머리를 올리지 않은 채 백목씨 사신이 소리 높였다.
“수고하시게.”
“하오나, 비전하. 하후가와 후족이 크나큰 실책이 있다 하여도 제북의 유일한 대공자이며 열세 살 어린 소년을 먼 황도까지 불러 죄를 청하는 것은 역시 과하신 처사라 사료되옵니다. 부디 명을 거두어 주소서.”
다시 한 번 간청하는 말이 울렸다.
“대공자 정화에게 무릎 꿇고 죄를 청하라 한 게 그리 과한 처분이라 말이오? 내가 정화의 목을 베기라도 하겠다 하였나. 대공자는 장차 제북과 장군부를 이끌어 나가는 대가주가 될 터이니 이참에 후족의 무거운 책무에 대해 몸소 익히는 게 좋지 않겠소. 후족의 과실이 크다 하나 대가주더러 죄를 청하라 할 순 없지 않소. 이 사람이 숙부를 아비처럼 따랐는데 숙부의 무릎을 꿇릴 순 없으니 말이야. 오랜만에 사촌 아우도 직접 보고 좋을 거요.”
태자비의 태도는 꼿꼿하기만 했다.
“비전하. 소신들이 금번의 문제에 대해 장군부에 확실하게 아뢰겠나이다. 대공자를 불러 문책하는 것만은 다시 생각해 주소서.”
태자비가 말한 대로 대공자는 별일이 없는 한 장차 대가주가 될 것이다. 지금껏 장군부 대공자가 황실로 와 죄를 청한 역사가 없었으니 다음 대가주가 될 대공자에게 오명을 씌우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수고해 주오. 대공자에 대한 것은 하도 간청들을 하니 그대들 노력 여하에 따라 숙고해 보겠소. 맡은 바 책무를 다하여 주길 바라오. 그만 물러가 보시오.”
“물러가옵니다.”
“물러가옵니다.”
용아의 축객령에 장군부 일족이 반듯하게 예를 올렸다. 물러가는 몸짓이 하나같이 공손하였다. 문이 닫히고, 상석 보좌 앉은 둘만 남았다. 은근한 기척으로 주위를 물린 윤제가 용아를 향해 말했다.
“대공자 정화가 누구냐.”
“제 사촌 아우입니다.”
“왜 그리 못 불러서 안달이야. 대공자를 부르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 하는데, 무리 마라.”
윤제가 자못 너그러운 얼굴로 말했다.
“좀 놀려 주는 겁니다. 그리고 부를 수 있으면 불러 놓고 굴리면 되죠.”
“……굴리다니? 불러다 어디에 두려고. 아니, 대공자를 황도에 두는 걸 장군부가 허락할 리가 있나. 너, 대공자랑 사이 나쁘냐. 장군부에 있을 때 대공자가 널 괴롭혔어? 영 못쓸 녀석이야?”
“아뇨. 애가 좀 모자라기는 해도 구김은 없습니다. 괴롭히긴 제가 걜 괴롭혔죠. 걔가 저를 어떻게 괴롭힙니까. 어릴 땐 하루 볕이 무서운 거 아니겠습니까. 뭐, 부를 수 있으면 영화대 아무 방에서나 재우면 되죠. 제가 땅바닥에서 자라고 하면 땅바닥에서도 잘 거예요.”
어디 길가 돌멩이에 대해 말하는 얼굴로 용아가 떠들었다.
“하후가 대공자한테 땅바닥…… 대공자면 내원에 드는 이가 아니잖아? 영화대에 다 큰 사내애를 어떻게 둬.”
윤제가 묘한 부분에 예민하게 굴었다.
“어려서부터 이상하게 먹는 대로 자라긴 했는데 걔가 무슨 사냅니까. 애죠. 제 앞에서 찍소리도 못 합니다.”
무심히 떠드는 얼굴에 악덕한 형이 자리하고 있었다.
“용용아. 동생한테 잘해 줘야지. 이 먼 데까지 부르려 하냐.”
“동생한테는 위계를 정확히 심어 줘야죠. 윤제 형도 저한테 그랬잖아요.”
용아가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윤제가 용아를 따라 일어나며 황망해 했다.
“만날 남의 전각 와서 다 박살 내고 간 게 누군지 기억 안 나십니까. 꿇려 앉혀 놓고 일어나지도 못하게 한 건 또 어디의 누굽니까. 윤공자 형님 나한테 그러고 보니 못된 짓 진짜 많이 했네. 내가 정화한테 한 건 아무것도 아니지.”
용아의 하나하나 손꼽아 말했다.
“그건…….”
윤제가 어찌할 바 몰라 하며 과거의 자신을 죽어라 욕했다. 용아가 힁하니 돌아섰다. 윤제가 빠르게 따라붙으며 용아를 부르며 무어라 말을 하려 애썼다.
전각을 나온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전하.”
일주대를 나서는 윤제의 곁으로 등우가 다가섰다.
“무슨 일이냐.”
“잠시…….”
등우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태감의 어깨 너머로 해원의 벽 상궁이 시립해 있는 것이 보였다. 용아는 눈치껏 물러났다.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금방 가마.”
“오실 것 없습니다.”
윤제의 다감한 말을 용아가 싹둑 자르고 돌아섰다. 곁을 주지 않는 뒷모습을 잠시 보던 태자가 무슨 일이냐 다시금 물으려 할 때 떠나는 영화대 궁인보다 빠른 걸음으로 벽 상궁이 윤제의 앞으로 와 섰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해원 벽 상궁입니다.”
벽 상궁의 인사에 등우가 낮춘 목소리로 그녀의 정체를 알렸다.
“무슨 일이냐.”
“전하께서 바쁘신 줄 아오나 소인 대죄인 것을 알면서도 높으신 태자 전하를 찾았사옵니다. 이 죄인을 죽여 주소서. 죄 많은 소인을 죽이시되, 소인의 주인을 한 번만 찾아 주십시오.”
상궁의 간청에 윤제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양제에게 무슨 일 있느냐.”
“행궁에서의 사고 후로 무서움증을 앓으시어 곡기가 끊긴 지 벌써 닷새째이옵니다. 사고 직후에는 겨우겨우 청하여 단물과 미음을 올려 드셨으나 무서움증이 좀처럼 줄지 않으니 걱정이옵니다. 이러다 안 그래도 가녀린 양제께서 잘못될까 저어되옵니다. 전하께서 찾아 주시면 무서움을 조금이나마 떨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찾아뵈었습니다.”
윤제가 등우를 돌아봤다.
“행궁의 사고가 후궁들께서 견디기에 너무 과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황궁에 돌아온 후로 의원들이 매일 같이 찾아뵙고 있으나 크게 차도가 없다 합니다.”
“내가 의원도 아닌데 내가 간들 무어가 달라지나.”
태자의 말은 무심하였다.
“전하…….”
벽 상궁이 한 번 더 간청하려 했다. 등우가 벽 상궁에게 시선을 건네며 눈짓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궁의 앞을 막아 선 태감이 능숙하게 말을 올렸다.
“의원들에게 차도가 있을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들라 하고 필요할 때마다 들 수 있도록 소환을 붙여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해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상궁을 향해 등우가 재차 눈짓을 주었다.
“…….”
그대로 돌아서려던 윤제가 상궁을 향해 말했다.
“양제에게 내 곧 찾겠다 전해 다오.”
“예, 전하. 망극하옵니다.”
태자 앞을 가로막는 무엄한 짓을 하고도 여전히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상궁의 뒷머리에 시선을 준 윤제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다시는 이러지 마시게.”
윤제가 적당히 멀어지는 걸 보며 등우가 낮춘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벽 상궁은 소리 없이 살짝 머리를 숙일 뿐 약속의 말을 내뱉지 않았다. 등우는 언제든 다시 이러겠다는 무언의 몸짓에 고개를 내저으며 떠나갔다. 주위가 다 비고 나서야 벽 상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양제를 대하는 태자의 태도는 확실히 바뀌었다. 지난 몇 해간 조금씩 미미하게 관심이 사그라지던 것이 쌓이고 쌓여 행궁 신연회 사고를 기점으로 돌변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달라졌다. 한창 자주 찾을 때에는 양제가 미열만 올라도 당장 찾아와 걱정을 했던 태자였다. 곧 찾겠다는 말은 전혀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양제가 그토록 불안해할 만했다.
“설핏잎이라.”
주인이 간절히 찾는 약제를 입안말로 웅얼거린 벽 상궁이 일주대를 빠르게 벗어났다.
조정이 격렬하게 들끓었다.
일주대 동백전에서 있었던 태자비와 홍문 일족 사이의 일이 속속들이 알려졌다. 황제는 익선궁에서의 일은 전부 태자에게 일임한다는 원론적인 말만 다시 했다. 태자는 후족 내 일이라는 말로 여지를 주지 않으려 했다.
편전을 찾은 왕공과 조정 대신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차별점이라면 서로 평소와는 다른 입장을 내보이는 것이었다. 대개 왕공과 황족 자제들은 제북과의 마찰과 분쟁에서 불편함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장군부의 효용성을 높이 사 중도적인 입장을 보여,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는 발을 빼는 양태라는 뒷말을 들었었다. 황실 종친들이 후족에 대해 중도적인 입장을 보이기에 조정 대신들은 반대로 더 강경한 태도를 표출할 수 있었다. 헌데 일주대에서의 일에 대한 황족들의 태도는 평소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일주대의 일을 전해 들은 조정 대신들이 태자비가 사고 후유증으로 거동이 어려웠고, 후족 내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보라 족외인에게 언급하기 쉽지 않음을 이해하지만, 태자비와 후족간에 오간 말들은 조정과 제북의 사이에 큰 영향을 주는 만큼 태자비가 독단적으로 후족을 책해서는 안 되었던 게 아니냐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었다.
“연대인, 태자비께서 무얼 잘못했단 말이오?”
황제나 태자의 차가운 웃음과 집안일이니 관여치 말라는 말을 들을 줄 알았던 연환은 정군왕의 부드럽고도 신경질적인 반응에 움칫했다.
“태자비께서 이번 일을 맡으신 태자 전하나, 내궁의 웃어른인 황후마마를 통하여 폐하께 아는 바를 알리시고 해결책을 강구해야 했던 게 아니겠습니까. 내궁에 머무는 태자비께서 단독으로 후족을 문책하시고, 장군부의 대공자를 불러들이라함은 태자비께는 가족끼리의 일이나 자칫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위험이 있음입니다.”
“황실과 조정은 태자비 전하의 후족 접견을 동의하고 있소. 일주대에 후족들이 든 것은 황가와 조정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이고 대면한 상황에서 정쟁과 관련한 말이 나오는 것은 필연이 아니오? 다들 익히 알고 있었던 일은 뒤늦게 문제 삼는 작태가 우습구료.”
정군왕이 웃는 얼굴로 조정관료를 향해 야유를 보냈다.
“태자비께서 잘못하였다는 게 아닙니다. 충분히 문제를 삼을 만한 것이나, 절차상 더 보기가 좋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 것이 아닙니까.”
“익선 행궁에서의 모든 일에 중심에 태자 전하와 태자비께서 있으시니 당사자 중 하나인 태자비께서 주최가 되어 문책하는 게 무어 문제냔 말이오. 폐하께서 이 건에 대해 태자께 일임했고, 태자께서 태자비를 존중하신다 밝히셨는데 괜한 말을 왜 붙이냔 말이오.”
“왕야. 결국 사건의 뒷마무리를 하는 것은 조정이 아니겠습니까. 후족의 태도를 보십시오. 태자비께서 문책한 사안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고, 태자비께서 내놓은 정황과 증거들이 장군부를 의심하기에 합당하니 죄를 청하는 게 마땅하지만 대공자를 보내는 것은 불가하다 하지 않습니까. 대공자의 특별한 신분과 황도와 홍문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되새겨 주기를 당부하며 황실과 조정의 긍정적인 답을 청하니 수습을 하는 건 이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태자비께서 후족과 말을 나는 중 폐하의 위세를 앞세워 제관부를 없애 버릴 수도 있다는 암시를 준 것에 대해 은근히 따지고 있고 말이요. 태자비께서 문책에 필요한 사안만 조정에 알리시는 게 여러모로 나았던 것 아니겠습니까.”
조정의 관료 또한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연대인은 그래서 태자비께서 잘못했단 말인가?”
“그런 게 아니라, 이 사람의 말은…… 내궁에 기거하시는 태자비께서 과한 언사를 하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말입니다.”
정군왕이 조정관료들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황실의 다른 종친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소만, 본왕은 태자비께서 후족에게 내린 말에 적극 찬동하오! 태자비께서 아주 훌륭하셨다 소리 높여 말할 수 있소. 자꾸 내궁을 언급하는데, 황가와 조정은 태자비 전하의 후족 접견을 동의하고 있고, 그것은 접견에서 오가는 정쟁 역시 동의한다는 뜻이오. 이미 결론을 내린 사안을 끄집어내 내용을 흩트려선 안 될 것이야. 태자비께서 폐하의 위세를 앞세운 것은 시부께서 평소 하신 말씀이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소. 시부가 황제이신 것은 맞는 말이고, 폐하께서 하나뿐인 귀한 며느리 청을 하나쯤 들어준다 한 게 뭐가 그리 잘못된 것이오. 제관부 없애 버릴 수 있다는 암시는 태자비께서 하시기에 광오한 것이기는 하나, 제관과 제관부가 애초 황도에 터를 잡은 것은 황실과 장군부의 가교역도 있지만 후족의 가장 중한 인물이 황가와 혼인하니 황실 외가의 입장으로 온 것 아니오. 제관과 제관부가 존재하는 것은 넓게 보면 태자비 전하로 인한 것이고, 태자비께서 그거 필요 없다고 하면 치울 수도 있는 거지. 평소 조정은 제관과 제관부에 대해 불편을 쏟아 내지 않았소? 없애 버리자는데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하는 것 아니오?”
정군왕의 말에 조정관료 쪽에 싸늘한 기색이 흘렀다.
“제북과 전쟁이라도 하자는 말씀입니까.”
대신의 물음에 정군왕이 다시 웃는 얼굴이 되었다.
“제관과 제관부를 없애면 제북이 황실을 적으로 삼기라도 한다는 말이오, 뭐요. 그리고 제북하고 전쟁을 해야 하면 할 수도 있지. 지금껏 제북의 무례함과 야만성에 대해 목에 핏대 세워가며 주청하던 이들이 오늘은 왜 이리 몸을 사리시오. 본인은 이제까지는 제북의 효용을 더 높게 보았으나, 제북이 이 나라 강산의 안녕과 황실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문제를 품고 있다는 게 명확하면 전쟁이라도 불사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왕야…….”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소. 대신들도 그럴 테지만, 본왕은 평생을 중경에서 살아왔소. 어린 날 떠나 왔다지만 중경 안에서 제북, 장군부, 후족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태자비 전하시오. 본왕은 이번 사안에 대해 공적인 명을 내리는 것은 태자 전하가 되어야 옳다 보지만, 방향성을 정하는 것은 비전하가 되어야 한다 보오. 우리들 중 누가 후족 가장 내밀한 대가주 가문의 정보를 알고 있다고?”
“소신들도…….”
“어허, 본왕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태자비께서 태자 전하를 통하여 장군부로 의견을 내었어야 한다는 것도 그렇소. 비전하께서 혼인으로 황실의 가족이 되었다 하나, 하후가와 후족은 그분의 가족이 아니게 되오? 가내인만 아는 것을 부군이라 하나 태자께 곧이곧대로 말하는 건 그것대로 문제 아니오? 그분께도 홍문에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법이지. 후족이 문제를 지적한 태자비 전하가 아니라 황실과 조정 측으로 의견을 보낸 게 웃기는 거요.”
정군왕이 제북에서 보내온 서신 내용이 쓰인 종이를 툭 내던지며 말했다. 관인들이 정군왕의 과한 행동을 조심스레 지적하려 했다.
“왕, 왕야.”
“태자비께서 후족조차 잘 모르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분께 괜히 들이댔다가 홀딱 털릴까 봐 그러는 게 아니겠나. 정쟁은 우리가 할 테니 태자비께 당신이 아는 것 다 내놓으라고 하는 건, 염치가 없는 짓이오. 부끄러운 짓이고,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짓이지. 일주대에서 오고간 대화 중 비전하와 후족 양측 모두 외부로 알려져선 안 되는 건 함구한 것을 모르겠소? 태자비께 당신 시집왔으니 황가에 가내 비전을 전부 토설하라고 하는 건 날강도란 뜻이오. 그러므로 이 건에 대하여 태자비 전하의 의견을 적극 따르고, 그분께서 정하는 방향에 따라 답신을 보내야 한다 본왕은 생각하오.”
진족의 신부 사냥은 모든 황족을 과민하고 험악하게 만들었다. 왕공 대신들이 연이어 상석 앞으로 나서며 말을 올렸다.
“본왕도 그리 생각합니다. 제북이 대공자를 끼고 도느라 전쟁도 불사하겠다 하면 싸우면 될 일이지요.”
“저 또한 숙부들의 말씀이 옳다 봅니다. 제북과 싸우게 되면, 황족이 지키는 국경 범위가 좀 더 넓어질 뿐 아니겠습니까.”
“항상 하는 게 전투인데, 제북과 싸우는 게 무어 대수겠습니까. 제북의 과실로 하마터면 황실의 고귀한 적자 소년 소녀들을 잃을 뻔했습니다. 제북 또한 그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여야 할 겁니다. 대공자는 되어야 황실 적자들과 비견 되지 않겠습니까. 태자비께서 대공자를 소환해 사죄를 받아야 한다고 한 건은 아주 합당하고, 무척 훌륭한 대처라 봅니다.”
“제북 측의 주장도 그렇습니다. 후족 무기고를 어떻게 관리하기에 그렇게 특별한 무기를 잃고, 뭘 얼마나 싸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제자를 길렀기에 대단하다는 검법 중 일부가 부득이 유출됐다는 건지. 별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게 어디 제대로 된 해명입니까.”
태자비가 제북으로 진격하자고 하면 곧바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하오나…….”
“하오나는 뭐가 하오나요. 피해를 입을 뻔한 건 황족들이오. 황족들은 태자비 전하를 따르기로 했소. 필요하다면 황족이 앞에 나가 싸울 거요. 그거면 된 거 아닌가? 피해를 안 봐서, 피해를 봤으나 앞에 나가 싸우는 게 여의치 않으시면 그대들은 빠지시오! 이번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사고가 났을 때 확실하게 처리를 하고 넘어가야 하오.”
“소신도 왕공들의 말씀이 옳다 봅니다. 제북, 장군부 전체를 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이번 사안에 과실이 확실한 대가주와 후족에게 같은 과오를 범해선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 줄 필요가 있다 생각 되옵니다. 대공자를 소환한다면 상징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만약 다른 방법으로 과실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한다면 후족의 머릿속에 씻기지 않을 만한 것이어야 하겠지요. 태자 전하와 태자비 전하의 노력으로 큰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목숨을 잃은 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목숨을 잃은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내어야 할 것입니다.”
조정 대신들 안에서도 왕공들에 동의하는 말이 하나둘 나왔다.
“허면 제북에서 보내온 뜻을 태자비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황가와 조정의 의견을 전할 이를 정하고, 뜻을 규합하면 이 사람에게 전해 주세요. 태자비와 상의 후 진척이 있으면 따로 알려드리리다. 더 나올 말이 없을 것 같니 여기서 마치는 게 좋겠습니다.”
윤제가 상황을 정리하며 황제를 바라봤다.
“고생하거라.”
황제가 태자를 독려하고 몸을 일으켰다. 태감 총관이 황제를 모시고 밖으로 향하자, 남은 태감들이 소리를 높였다.
“퇴청!”
법랑완에 담긴 봉밀인자를 꺼내던 손이 멈칫했다. 예쁜 틀 모양이 섬세하게 살아 있는 봉밀인자가 법랑완 안으로 다시 굴러 들어갔다. 다른 손 역시 삐그덕거려 들고 있던 금완개가 법랑완을 바르게 덮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리려 했다.
“네?”
윤제가 황망함을 표하는 얼굴에 시선을 던지며 금완개를 바로잡아 열고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봉밀인자를 탕 숟가락으로 떠 망연히 열린 입가로 가져다 댔다.
“부황께서 네가 벌린 일이니 네가 수습하시란다.”
반사적으로 숟가락을 입술로 쓸어 봉밀인자를 먹은 용아가 온 얼굴로 의문을 표했다.
“……제가요?”
숟가락을 내린 윤제가 다반에 함께 올라오는 수건을 쥐여 법랑완 안을 더듬은 용아의 손을 닦아 주었다.
“제북에서 답신이 왔다.”
“들었습니다.”
봉밀인자에 박혀 있던 꿀이 퍼지며 입 안에 달콤한 맛이 감돌았다.
“네가 신연회 사건을 해결할 황실의 책임자다. 후족들은 의도한 바는 아니나 황실에 해를 끼치게 된 것에 유감을 표한단다. 하지만 무기고에 있던 것이 장군부 밖으로 나간 것은 모르는 일, 재차 확인해 봤지만 수량이 어긋나는 곳을 발견할 수 없단다. 요아검이 외부에 도는 것은 한두 해가 아니니 특별할 게 없고, 그러나 태자비의 말대로 장군부에서 추가한 검리가 유출되었다면 여러 제자를 두면서 벌어진 일로 고의는 아니었지만 황실에 폐를 끼쳐 몹시 송구하단다. 하지만 장군부 대공자의 독특한 위치를 감안하여 황도로 소환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하신다.”
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황실 종친들께서 장군부하고 ……전쟁을…… 하신다고요?”
“만약 필요하다면 정군왕께서 선봉에 서신단다. 신년 인사를 위해 황도로 온 모든 군왕들께서 하나로 뜻을 모으셨다. 황친들 뜻이 궁금하면 대표로 정군왕을 뵈면 된다. 하나 더 줄까.”
“네…….”
용아가 얼빠진 얼굴로 답했다. 숟가락이 착실히 움직였다. 열린 입술로 달콤함이 스며들었다. 다문 입술이 입 안에 든 것을 꼭꼭 씹을 때마다 달콤함이 점점 더 짙어졌다.
“이러다 진짜 동궁전에 군왕부 가솔들이 쳐들어올 거 같다.”
“네?”
“자꾸 나더러 숙부들이 전각 한 칸 내어놓으란다. 당신들 자리 비우실 때 연약한 내원 아이들을 지켜 줄 이가 태자비 전하뿐이라면서. 정군왕께선 자리도 안 비우는데 왜 그러냐고 했다가 옆구리 하도 찔려서 멍들 지경이다. 어떻게 할 셈이냐.”
윤제의 너스레에 용아가 마주 웃었다.
“대공자를 불러서,”
“대공자는 불러서 뭘 하게. 재울 데도 없는데. 대공자 기재가 홍문에 다시없을 정도라며. 그런 걸 황도로 불러들여도 되는 거냐.”
윤제가 묘하게 대공자를 경원시했다.
“재울 데가 없긴요. 영화대 아무 방이나…….”
“동궁에 사내를 들이는 걸 허락할 것 같으냐.”
남자의 반듯한 눈썹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용아가 웃음을 키득거렸다. 사내, 라는 말이 웃긴 모양이었다.
“걔 덩치만 컸지 겨우 열세 살입니다.”
“심지어 체구가 크기까지 해?”
“전하보다는 작고, 저보다는 크지 않을까요. 제가 하후가를 나설 때 저보다 머리 하나는 컸거든요.”
용아의 말에 윤제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런 걸 황도에 불러선 안 돼.”
“전하. 애가 좀 모자라긴 하지만 그런 거라뇨. 잘 가르치면 괜찮은 대가주가 될 겁니다. 한 10년 아니, 15년은 더 가르쳐야겠지만. 황도로 소환해서 구석에 박아 놓고 구박도 좀 하면서 형님들 무서운 것도 심어 주고 해야 나중에 더 잘 굴리는 거 아닙니까.”
용아가 봉밀인자를 하나 더 먹으며 상큼하게 말했다.
“……제북 대공자를 구석에 박아 놓고 핍박하겠다는 거냐.”
윤제가 표정을 달리했다.
“그럼 안 됩니까?”
용아가 죄책감이라곤 없는 얼굴로 물었다.
“안 되지, 인마. 걔가 너한테야 사촌 동생이지, 황도로 오면 비교 대상이 없는 귀빈이야. 특급 귀빈이지. 지난번부터 궁금하던 건데 너, 대공자랑 하후가에서 지낼 때 잘 지낸 거 맞냐. 정말로 대공자를 네가 형이라고 공갈 협박 같은 거 한 거 아니지? 때렸다거나?”
“…….”
용아는 대답 없이 팔꿈치를 탁자에 기대었다. 세운 팔 위에 턱을 얹고 손으로 입가를 감아쥔 얼굴이 자못 심각했다.
“화아.”
윤제가 불길한 기색으로 용아를 불렀다.
“제가 형이잖아요.”
“형이라고, 애를 때리면 어떡해. 너보다 어리다며. 너 어린애를 폭행한 거야?”
“폭행이라니요.”
윤제의 엄격한 말에 용아가 얼굴을 내저었다.
“때렸어, 안 때렸어.”
“……때렸죠.”
용아가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때린 게 그게 폭행이지. 나중에 대가주 돼서 너한테 덤비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어.”
이어지는 훈계에 용아가 콧등을 찡그렸다.
“덤비긴 지가 저한테 어떻게 덤빕니까.”
“나중에 제북이랑 틀어지면 네 탓인 거냐, 화아. 이실직고해 봐라. 왜 그랬냐. 걔가 너 괴롭힐 수 없는 입장이었던 거 같은데. 너는 애를…… 물론 너도 애였겠지…… 덤비긴 지가 어떻게 덤비냐니, 너 대체 대공자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똥강아지.”
윤제의 물음에 용아가 곧장 답했다.
“용용아.”
“모자란 녀석?”
용아의 모자라다는 말에 잘생긴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흘렀다.
“너한테는 사촌 아우지만 대공자 위치를 생각해야지.”
“큰일입니다. 제북 망하는 거 아닐까요? 걔가 저보다 어리기는 한데요. 저보다 말도 못 타고, 칼 쥐는 것도 변변치 못하고, 활도 잘 못 쏘고, 검로를 읽으라면 도끼질하듯이 내려찍기부터 하려 하고, 진법 같은 건 배우는 게 불가능한 예감이 들어요. 별거 아닌 공차기도 못합니다. 걔가 내세울 건 숙부 아들이라서 혈통 좋은 거랑 튼튼한 거 정도랄까. 심지어 말도 늦돼요. 제가 걔를 만만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안 본 지 몇 년이지만 글쎄. 좀 컸다고 까불어도 적당히 몇 대 치면 제가 금방 눌러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아. 동생이란 거에 대해서 나와 너의 관념이 많이 다른 것 같다. 너한테 동생이란 무어냐.”
윤제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귀찮은 거요.”
용아가 지체 않고 답했다. 윤제가 난감한 얼굴로 긴 숨을 내쉬었다. 마른세수를 하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윤제가 용아에게 한 말이 오롯이 진심이라면, 남자에게 동생, 아우에 대한 환상이 있는 모양이지만, 친형제 같은 사촌 동생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용아에게 동생에 대한 환상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용용아, 너 성격 어떡하냐.”
“제가 뭘요. 자꾸 나한테 동생이라며 걜 붙여 주려고 한 어른들이 잘못한 거죠. 덩치만 큰 바보를 대공자라고 쩔쩔 매니까 걔가 버르장머리가 없어지니 내가 조용히 손봐 준 거잖아요. 됐습니다. 어차피 볼일 없으니까. 오랜만에 얼굴 보고 좀 굴려 주나 했는데 아쉽게 됐습니다. 일주대로 제관부 일족과 사신들을 불러들여 주십시오. 마무리 작업해야죠.”
“마무리 작업…….”
“한몫 뜯어낼 거라니까요. 말은 역시 산융마죠?”
“어. 어?”
용아의 상큼하기까지 한 말에 저도 모르게 동조한 윤제가 말을 다 더듬었다. 용아가 손짓으로 봉밀인자를 하나 더 청하며 살풋 웃었다. 웃는 얼굴이 달콤한 것을 받아먹으며 유쾌하게 웅얼거렸다.
“청해 산호를 전부 뺏어 올까.”
“전쟁 안 해?”
“전쟁을 왜 합니까.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요. 그런 낭비는 하는 게 아닙니다. 역주의 진주도 내놓으라고 해야지.”
콧노래를 부르는 듯한 얼굴이 산뜻하였다.
일주대 동백전 안에 삭막함이 내려앉았다. 아래에 엎드려 태자비의 하명을 기다리는 공손한 등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던져졌다.
“제북의 답신은 잘 들었소.”
태자비가 내뱉는 말의 내용은 부드러우나 귓가에 울리는 음성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송구하옵니다, 비전하.”
제북의 사신들이 일제히 몸을 더 깊이 숙였다. 태자비에게 남주문부터 무릎걸음으로 들 것을 명받은 동곽씨 사신은 남주문에 당도하기 직전 어깨 높이보다 머리를 낮추는 것으로 새로 명을 받았다. 무릎걸음으로 입궐하는 망신을 면하게 된 덕분에 사신들의 경직된 분위기는 다소 풀렸다.
“후족의 실책은 인정한다. 그러나 대공자는 보낼 수 없다. 잘못은 유감이지만 사죄는 불가하다. 장군부가 죄를 지어 황족이 납치를 당할 위기에 처하고, 태자비가 죽을 뻔했지만 책임은 지지 않겠다. 이것 참 우습지 않은가. 내가 잘못해서 네가 죽을 뻔했지만, 미안. 뭐 이런 건가? 홍문 밖에서 홍문의 일족을 보니 새삼스러워. 내 실수이긴 한데 그런데 나는 모르겠다고 하는 이런 뻔뻔한 작자들이 나와 한 일족이라니. 내가 한 말을 잘 전하겠다더니 어떻게 된 거요. 이 답신이 사신들의 뜻인가!”
용아가 제북에서 보내온 답신을 아래로 내던졌다. 화사한 비단으로 치장한 두루마리 족자가 험한 모양으로 나뒹굴었다.
“송구하옵니다, 비전하.”
“송구하옵니다.”
내동댕이쳐지는 두루마리 족자에 사신들이 머리를 바닥에 납작 붙이며 죄스러워했다. 날아가는 족자를 윤제가 놀라워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내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대공자를 황도로 불러와. 가족을 잃을 뻔한 황족 앞에, 내 앞에 무릎을 꿇리고 죄를 청하라 하라. 다들 물러가시오.”
“비전하.”
“물러가라는 말 안 들리는가!”
백목씨가 앞으로 나서며 태자비를 달래려 했지만 내려쳐지는 고성에 금세 뒷걸음쳤다.
“물러가옵니다.”
사신들이 태자비의 분노에 우선 몸을 물렸다.
“비전하.”
제관부 일족이 엉망으로 구겨진 족자를 힐긋거리며 용아를 불렀다. 예민함과 불쾌함이 적절하게 뒤섞인 어린 사내의 목소리가 상석에서 내렸다.
“당숙들도 그만 물러가세요.”
“대공…… 예. 상처가 덜 가신 옥체가 상하지 않도록 고정하소서. 물러가옵니다.”
“물러가옵니다.”
제관부 일족 중 가장 연장자가 대공자에 대해 언급하려다가 상석에 쏟아지는 사나운 시선에 하려던 말을 다급히 삼키고 머리를 조아렸다. 물러나는 숙인 머리들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가 인사했다.
“살펴 가세요.”
뒷걸음치던 머리들이 깊이 예를 차렸다.
“…….”
휑하니 빈 전각 안을 윤제가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용아가 손짓으로 제북에서 보내온 답신을 가져올 것을 명했다. 일주대 궁녀가 흐트러진 두루마리 족자를 정리해 상궁에게 건넸다.
“제관부와 사신들에게 저녁쯤에 대공자 언제 오냐고 제가 묻더라 전해 주십시오.”
용아의 말에 윤제가 불편한 얼굴을 했다.
“화아.”
윤제가 용아를 불렀다. 용아는 대답 대신 보좌 위에 올라가 있는 남자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염려 말라는 듯 달래는 투의 얼굴에 윤제가 눈썹을 구긴 채 픽 웃었다.
그날 저녁, 동궁전의 태감이 제관부를 찾았다. 제북의 사신과 제관부 일족은 황족을 대신 해 후족에 뜻을 전하는 태자비의 명을 바르게 이행하라는 태자의 명이 태감의 입을 통해 엄중하게 전해졌다. 태자의 명을 받은 제북 일족은 성심을 다해 이행하겠다 소리 높였다.
그날 해가 진 시각임에도 사신들은 제북으로 의견을 조정하기 위해 떠났고, 제관부 일족은 이튿날 아침 태자비를 뵐 수 있는지 여쭈었다.
태자비가 제관부 일족의 입궐을 허락했다.
일주대 동백전 안에 싸늘한 숨소리가 울렸다.
“내 목숨 값을 내겠다?”
제북은 그리 말하지 않았다.
“비, 비전하.”
제북은 장군부 안에서 대공자의 독특한 위치를 부디 숙고하여 달라 간곡히 부탁했다. 말을 올리는 제관부 대신들의 목소리는 거의 울다시피 했다. 송구하게도 대공자를 보낼 수 없으니 그에 상응할 만한 것으로 대신하고 싶다 하였다. 애원에 가까운 말은 저리도 비정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워 어안이 벙벙했다.
“내 목숨 값은 비싸네.”
“송구하옵니다.”
웃음기 어린 말에 울적한 음성이 답했다.
“내 목숨 값에 황족 내원에 들 이들의 목숨 값도 더해야 하는데, 괜찮은 게요.”
“송구하옵니다.”
제관부 이들이 할 말이라곤 송구하다는 것뿐이었다.
“황가에 산융성을 주게.”
피해 보상비를 요구하는 용아의 얼굴은 가벼웠다. 태자비의 말에 제북 일족이 황망함에 굳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상석을 올려봤을 터였다. 입을 벌리지 않았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윤제가 용아를 망연히 돌아봤다.
“비전하…….”
“왜. 이 태자비가 산융성보다 덜 중하다는 것인가. 대공자가 산융성보다 못한가. 금번에 피해를 볼 뻔한 황족이 몇인데 산융성 하나 내어 줄 각오를 안 하고 보상을 운운했겠나. 홍문 아래에서 후족은 풍요롭지 않소. 이 이상의 양보는 있을 수 없어.”
“하오나 산융성은…….”
“듣기 싫소. 이만 물러들 가 보시오.”
상석에서 축객령이 내렸다.
“물러가옵니다.”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 태자비의 양보 없는 보상책이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전각이 비고 고요가 내렸다. 정적에 휩싸인 상석에 겸손 가득한 저음이 울렸다.
“용아, 형이 잘할게. 정말 잘할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기 어려운 말에 용아가 투덜댔다.
“뭡니까.”
“점심때에 제관부로 등우를 보낼까. 산융성 아직이냐고? 그러면 될까.”
“훌륭하십니다.”
용아의 격찬에 윤제가 자신이 그런 건 잘할 수 있다 말하며 목적어가 없는 형이 진짜 잘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건네었다. 용아가 끝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제북은 어떻게든 이 일을 유야무야하거나, 시간을 끌어 적당한 타협을 끌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태자비는 동백전에 드는 제북 일족을 서슬 퍼렇게 을러댔고, 아침저녁으로도 부족해 틈이 날 때마다 태자의 태감이 찾아와 태자비의 명을 바르게 이행하라 압박해 왔다. 배웅하고 돌아서면 태감을 맞는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황실 종친들은 태자비의 하명에 온 마음으로 적극 찬동하였다. 태자비의 영명함을 다들 활짝 웃는 얼굴로 칭찬했다.
가장 괴로운 건 제북 사신들과 그 일가였다.
백목인규는 동백전에 들었다 나온 사신과 일족이 전해 오는 연통을 받을 때마다 숨이 막혀 오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일족이 동백전에 들었다 말만 들어도 앞이 캄캄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황궁의 태자비뿐이 아니었다.
‘태자비께서 참으로 영명하십니다.’
태자비의 과격한 요구와 주도면밀함에 치여 욕 같은 칭찬을 하후가 대가주에게 툭 던지고는 했다. 비틀린 칭찬에 대가주는 허허 웃으며 우리 용아가 어려서부터 일찍 철이 든 데다 영특하여 배움도 빨랐다는 진심이 가득한 자랑의 말을 건네 왔다.
‘저희를 덕분에 정말 힘들게 하십니다.’
웃으며 건넨 하소연 안에 이를 으득 가는 말이 담겨 있음을 대가주가 모를 리 없었다. 대가주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조카에 대한 말만 나오며 흐뭇한 얼굴을 하며 잘못된 칭찬에 끄덕끄덕 동조했다.
가주가 되기 전부터 대가주가 내궁에 들 조카를 무척 아끼고, 어여뻐 했다는 건 제북 안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대가주뿐 아니라 하후가 적자들 모두 훗날 멀리 떠날 조카를 귀하게 여겼다. 태자비는 기대치가 높은 숙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만한 기재였다. 황궁에 가서도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지 떠날 때보다 더욱 정진한 듯하다 대가주가 은근히 흘려 알려 주었다. 거기다 하후가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제북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혈통과 권력만으로 벅찬 존재인데 이쪽을 속속들이 알고 후려쳐 오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태자비를 설득하기도 어렵고, 도저히 원하는 타협점까지 가기 힘들어 눈물을 머금고 태자비의 요구에 맞춰 보상책을 올리자, 대가주의 차디찬 시선이 돌아왔다.
‘그대들은 하는 일이 뭔가.’
태자비가 여기 이상은 양보해 줄 것 같지 않다 태자비가 한 말을 곁들여 올리자, 대가주가 누구의 편인지 허허 웃으며 당신 조카가 역시 명석하다 떠들었다. 웃는 얼굴의 눈치를 보며 이대로 할까 여쭈자, 싸늘한 얼굴이 일을 이렇게밖에 못하겠냐는 힐책이 쏟아졌다. 돌아 버릴 것 같았다.
‘태자비께서 워낙에 훌륭하시어 미욱한 저희가 설득할 길이 없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우리 용아가 그렇지. 허나 이대로는 안 돼. 노력해 주게.’
대가주는 조카를 한바탕 칭찬하고, 짧은 꾸짖음을 내뱉고 주위를 물렸다.
지난 석 달이 숨 가쁘게 흘러갔다.
태자비는 장군부를 쉴 틈 없이 굴려 주었다. 하나 지나갔는가 하면 곧바로 다른 하나를 끄집어내 쩔쩔 매게 했다. 산융성을 어마어마한 보상 목록으로 겨우 지켜 냈는가 했더니, 장군부 무기고에 있는 무기의 위험성을 이유로 황가가 모르는 무기에 대한 폐기 요구로 후족가를 발칵 뒤집었다.
태자비가 사신들에게 받아쓰게 한 산융성을 대신할 보상목록의 사치함만으로 기함할 일이었다. 사신들에게 지필묵을 내주고 뜬금없이 받아쓰라고 한 행동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것일 테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건 더 따질 수도 없었다.
장군부 무기고의 무기 목록부터 내놓으라는 것은 도가 지나친 처사였다. 장군부에게 주어진 독립성을 명백히 훼손하는 요구이기도 했다. 국경 수비를 이유로 가까스로 타협에 들었지만, 서로 조건을 주고받는 내내 무기 목록 내놓으라고 들들 볶이면서 동시에 보상 물품을 보내는 날짜를 확정하라고 이중으로 괴롭힘 당해야 했다.
제북의 흐름을 늦추려는 행동은 전부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태자비는 곧이어 요아검을 함부로 내돌렸단 트집으로 사신들을 괴롭혀 댔다. 천하에 퍼져 나간 요아검을 전부 회수할 수 없고, 제북이 가르치 않아도 검술을 보고 가져가는 걸 무슨 수로 막느냐는 것으로 버텨 보려 했지만, 너희가 황족이 시해되기를 바라서 여기저기 퍼 주는 거 아니냐는 울화통 터지는 시비를 받아야 했다. 억울해서 억울하다 소리를 높였더니 죄 지어 놓고 책임도 안 진다며 실컷 욕만 먹었다.
제북이 억울함을 갖지 않도록 황족이 요아검에 당하는 일이 없게 해드릴까 라는 태자비의 물음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장군부 후족들은 그때만은 참지 못하고 대가주를 찾아가 태자비가 요아검을 얼마나 아느냐 따져 물었다. 대가주는 애매한 얼굴로 허공만 바라봤다. 한참 후에야 워낙 어릴 때 가르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무책임한 말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우리 용아가 이해도가 높다는 황당한 소리가 더해졌다.
문제는 태자비가 가진 것들은 대가주 한 사람만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태자비에게 세 명의 숙부가 있었고, 대가주의 두 형제 역시 조카가 황궁에 가 황족들에게 핍박 받을 일 없도록 당신들의 절기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가르쳐 주었다 하였다.
하후가의 자랑에 무력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장군부 내 다른 가문의 수장조차 모르는 것을 정수만 빼어 가르침 받은 태자비가 황가 황족 안에서 핍박 받을 리 없을 것이다. 핍박받기는커녕, 황족들을 핍박하고 다닐 터였다.
그리고 태자비에게 가장 험악하게 핍박받고 있는 것은 제북이었다.
태자비는 제북이 보낸 답신을 하나하나 걸고넘어졌다. 글자 하나 허투루 넘어가 주는 법이 없었고, 시비를 걸 수 있는 건 죄다 걸어 놓고는, 할 말이 많으나 이쯤 하겠다라고 뒷말을 붙인다 하였다. 대가주 또한 그랬다. 가신들이 올린 서안을 쉬이 넘어가 주는 법이 없었다. 열에 아홉은 내쳐졌다.
태자비가 누구를 닮았는지 자명했다. 태자비는 제 숙부를 닮았다. 아주 똑 닮았다. 둘 다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족속 같았다.
양쪽으로 치이는 통에 백목인규는 나날이 말라 가고 있었다. 황실과 제북을 오가는 그의 조카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할 수 있다면 태자비와 대가주를 대면케 해 너희끼리 해결을 보라고 하고 싶었다. 그랬다간 양쪽에서 말로 이루어진 무형의 비수가 날아들 터였다.
서글펐다.
아랫사람이란 이토록 가련한 존재였다.
편전에 든 정군왕이 소리를 높였다.
“지금 뭐라 했나?!”
“말씀을 삼가십시오, 왕야.”
앞으로 나선 대신이 옆을 돌아보며 엄히 말했다. 왕공들이 불쾌감에 일제히 퍼트리는 서늘함에 순간 오금이 저려 왔지만 하얗게 된 얼굴로 힘껏 버티어 냈다.
“보상책이 모두 결정되었으니 태자비께 맡긴 과중한 책무를 덜어드리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내궁에 머무시는 태자비께서 조정의 일에 계속 관여하는 것도 보기에 좋지가 않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소서.”
“신, 송량 높으신 황제 폐하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소신 또한 승상의 말에 동의하옵니다. 태자비께서 감당하기에 보상의 규모가 너무 크옵니다. 옥체가 미령하신 태자비께 이 이상을 감당하시라 하는 것은 신하된 도리로 부끄러운 일. 이후부터 조정의 대소신료가 논의하여 보상의 처분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조정신료들이 줄줄이 나와 제북이 보내올 보상의 과하게 큰 규모와 그것을 처리하는 데에서 올 어려움에 대해 소리 높여 아뢰었다.
“음.”
상석에 앉은 황제가 나직하게 소리를 흘렸다.
“폐하.”
정군왕이 형형한 눈으로 앞으로 나섰다. 정군왕이 분노를 거두지 않았기에 앞에 나서 있던 대신들은 급히 옆으로 몸을 물려야 했다.
“말하시게.”
황제의 허락에 정군왕이 번쩍거리는 눈으로 대신들을 돌아보며 아뢨다.
“소제는 금번 보상은 전부 태자비 전하의 공이라 보옵니다.”
“아니, 그것은…….”
대신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흘렀다.
“부정하기 어렵네.”
웅성대는 말들을 잘라 버리듯 황제가 대꾸했다.
“허니 제북이 보내올 모든 보상품은 태자비 전하의 소관일 것입니다. 제북이 보내온 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태자비께서 결정 내리는 게 맞다 보옵니다. 제북이 보내올 부귀한 것들에 소제의 눈 역시 쏠리는 걸 부정할 수 없으나 소신은 보상품에 대한 처결에 일체 관여치 않을 것입니다.”
정군왕을 따라 왕공들이 자신 또한 그렇다 고해 올렸다.
제북이 보내올 것이 적지 않았다.
후족을 상대로 한 태자비의 협상 결과는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다. 명단에 있는 것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만한 품목이었다. 그런 것에 조금도 욕심내지 않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족들의 선택에 대신들은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전에 황족들과 뜻을 함께한 대신들 또한 난처한 얼굴로 양쪽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폐하. 신, 위세옥 높으신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소신이 한 말씀 올리는 것을 허락하여 주소서.”
“말하라.”
“소신은 지난 신연회의 사고로 부인을 잃고, 어린 딸이 다쳤사옵니다. 신의 미천한 집으로 태자전하와 태자비께서 사람을 보내 딸을 살펴 주셨습니다. 황가와 후족을 대신하여 위로의 말과 사과의 말을 해 주셨지요. 소신과 저희 가문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옵니다. 태자비께서 장군부로 하여금 사죄를 이끌어 낸 것만으로 족하옵니다. 보상의 행방이 무슨 상관이겠사옵니까. 부디, 태자비께서 바르게 이끈 일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황제는 위세옥을 다시 한 번 위로하고, 태자와 태자비를 칭찬했다. 신연회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계속하여 조사하고 있으며 책임을 질 이를 가리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더불어, 행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도 가장 큰일을 한 것도 태자비이니 그에게 보상품을 다 주어도 다들 할 말 없지 않겠는가 태자에게 의견을 구했다.
“폐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태자가 아첨꾼처럼 황제의 말에 무조건 동조했다.
“그리 처리하라.”
“예, 폐하.”
황제가 명했고, 태자가 곧장 답했다. 상석에서 당신들끼리만 짧게 말을 주고받고 결정을 내리는 부자를 보며 황명을 기다리던 조정 대신들은 지금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게 현실이 맞는지 의아해하느라 항명할 틈조차 놓쳤다. 어느새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퇴청!”
태감이 쌀쌀맞은 축객령을 내렸다.
“지금…….”
“대인, 이것이…….”
편전을 나서는 황제를 보며 몇몇 대신이 모여 지금 결론이 난 게 맞느냐 떠들었다. 술렁대는 대신들의 곁으로 왕공과 왕공 자제들이 다가왔다.
정군왕이 잔뜩 비틀린 얼굴로 대신들을 내려다보며 틱틱댔다.
“거 사람들이 그러는 거 아니외다.”
“정군왕 전하.”
정군왕 곁을 따르던 순양군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온갖 귀한 걸 힘들게 뜯어낸 게 누군데 이제 와 손 털고 댁은 뒤로 빠지래.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나이도 많은 양반들이, 어이구.”
“순양군 공자, 지금…….”
“보상품 따위 관심 끄십시오. 그건 전부 우리 태자비 전하 꺼요. 아시겠소.”
정군왕은 먼 친척 조카를 데리고 나가며 태자비 전하가 왜 조카님의 우리 태자비 전하냐 별 잡스러운 걸 따지고 들었다. 순양군은 더없이 진지하게 우리 태자비 전하가 뭐가 틀린 말이냐고 대거리를 했다. 괴상한 소리들을 하고 있다는 시선에도 둘은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따져 댔다.
정천궁 교헌재 안에 든 황제의 얼굴에 은은한 웃음이 감돌았다. 황제 곁에 앉은 태자와 주위에 함께 자리한 왕공들 또한 만족한 얼굴이었다.
“이번에 아가가 고생하였다.”
황제는 당신의 말대로 익선 행궁과 관련한 모든 일을 태자에게 완전히 일임하였다. 용아가 조석으로 문안을 올리고자 찾았을 때에도 제북을 암시할 수 있는 것은 티끌만큼도 말하지 않았다. 용아 역시 황제께 그와 관련해 일체 말을 올리지 않았다. 일견 무관심해 보이지만 무조건적으로 믿어 주는 행동이었다.
“태자비가 부황의 배려를 알게 되면 감사해 할 것입니다.”
윤제의 말에 왕공들이 동조했다. 소군왕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으며 운을 띄웠다.
“그나저나 아쉽습니다.”
“뭐가 말이신가.”
영군왕이 능란하게 말을 받았다.
“거, 제북 사신이 무릎걸음으로 입궐하는 걸 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기어서 입궐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요즘 아주 납작 찌그러져 입궐하니 그것만으로도 나쁘지는 않지만 말이오. 조상님들 말대로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제북 사신이 저렇게 절절매는 걸 볼 날이 올 줄이야. 태자비께서 기백이 있으십니다.”
“사나이지, 사나이.”
두 왕공의 말을 시작으로 태자비를 칭찬하는 말이 이어졌다. 찬양에 가까운 칭찬을 쉴 새 없이 늘어놓는 왕공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정군왕이 말없는 윤제를 아는 척했다.
“조카님께서는 어째 표정이 그러신가.”
“태자비에 대한 칭찬은 이 조카가 빠트리지 않고 전부 전해드리겠습니다. 태자비가 이번에 정말 어려운 일을 하였다 싶어서 그럽니다. 비가 어려서 황도로 와, 태자비가 지금 발휘한 역량의 대부분은 장군부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란 생각을 하니 놀랍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합니다. 하후가에서 열두 살에 떠나왔는데 그 어린 나이에 뭘 어떻게 했기에 지금의 모습을 보여 주나 해서 말입니다. 대가주가 조카를 사랑해 손 붙들고 가르쳤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만으로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난날 스승들께서 말하시길 어려서 지나치게 영민한 아이 중 일찍 철이 들어 아이 같지 않은 이가 있다 했는데, 태자비가 그런 아이는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황궁에 와 별로 신경 써 주지 못한 것이 뒤늦게 미안하기도 하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필요하다는 걸 해 주고 싶은데 잘될지 모르겠습니다.”
태자의 말에 왕공들이 안쓰러움과 웃음을 동시에 표했다.
“조카님.”
“예, 숙부.”
찻잔을 비운 왕공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남은 이가 몇 되지 않을 때 주위를 살핀 정군왕이 윤제를 불렀다.
“아까 말한 것 말이오. 태자비께 잘해 주고 싶다한 것 말이오.”
“예.”
“태자비께서 아직인 모양이시야. 사내라 그런지, 하후가 혈통이 그런지 모르겠소만. 태자비께 머잖아 조카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올 거요. 그때 잘해 주시오. 조카님도 좋을 거요. 아주 좋을 거야. 이 숙부 말을 믿으시게. 폐하께서는 조카님께서 그를 태자비의 약점으로 삼을까 염려되어 닥치면 알려 주시려는 모양이오만, 이 숙부 말을 잘 새겨 두시오. 항상 열린 마음으로 태자비께서 조카님을 필요로 할 적에 가 주시오. 이 말이 아니라도 때가 되면 조카님이 알아서 가실 거요. 갈 수밖에 없거든.”
앞뒤 설명 없이 본론만 남겨진 듯한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윤제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에 되물었다.
“태자비께 잘해드리란 거잖소.”
정군왕은 황제의 눈치를 보다가 애매하게 웃으며 태자의 팔을 툭툭 치는 무례를 저지르고 자리를 내뺐다. 태자비께서 힘들어할 때 언제든 가 주라는 당연한 말을 대단한 비책이라도 되는 양 다시 한 번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쁜 말은 아니었기에 윤제는 넙죽 답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정군왕은 가던 걸음을 되돌려 와 태자께도 아주 좋은 거라고 당부하고는 돌아섰다. 묘한 말을 흘리고 떠나는 등에 대고 묻고 싶었다.
그 좋은 게 대체 뭡니까.
윤제가 의문에 잠겨 있을 때 황제가 비운 찻잔을 내렸다. 차가 다시 채워졌다. 부자 간에 말없는 시간이 흘렀다. 윤제가 식은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몸을 일으켰다.
“물러가 보겠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호르륵, 호르륵. 뜨거운 차를 들이켜는 소리만이 방 안을 한참 채웠다. 차 마시는 소리가 잠시 멎었다가, 모호한 침묵 후에 차를 들이켜는 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봄이었다.
용아는 화우전으로 향했다. 함월전과 다락원을 잇는 소로로 들어섰던 용아가 어째서인지 황급히 돌아 나왔다. 뭔가 할 말이 있지만 당황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을 본 모장이 재빨리 다가갔다.
“비전하……?”
“잠깐만.”
용아가 낮춘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용아의 손에 이끌려 다락원으로 드는 소로 앞으로 간 모장이 어릴 적 표정이 고스란히 보이는 얼굴을 향해 속닥였다.
“무슨 일이 있으셔요?”
“다락원 길 안에 석등 같은 게 있어.”
말을 건네는 얼굴이 무척 심각했다.
“태자 전하께서 길을 정비하신다 하였는데 석등을 들여 두셨나 봅니다.”
모장이 뿌듯하고 기쁜 표정으로 아뢰었다. 용아의 얼굴이 여전히 심각했다. 상처가 깨끗이 아문 손이 모장의 손을 다시 끌었다.
“저거.”
다락원의 소로 안 초입으로 모장을 데리고 간 용아가 길 안쪽에 있는 낯선 석등에 힐긋 시선을 주며 소곤거렸다. 뒤에 시립해 듣고 있는 귀가 많기는 했지만 숨길 게 뭐가 있나 의아했다.
“예?”
“저거, 화주옥 아닌가.”
“예……?”
용아가 무서운 것을 보듯 석등을 멀찍이서 살폈다.
“잘 봐 봐.”
용아의 속담임을 모장은 그제야 이해했다. 겁을 먹은 듯한 얼굴을 올려보며 고개를 끄덕인 상궁이 성큼성큼 걸어가 우아한 꽃이 조각된 석등 안을 살폈다.
다락원은 황궁 안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넓은 권역을 자랑했다. 다락원을 가로질러 화우전까지 가는 길은 결코 짧지 않았다. 태자의 지시로 늘어선 석등은 조형물 자체로 값어치가 높았다. 시야가 닿는 끝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석등 안을 화주옥이 채우고 있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황족의 방탕과 사치로, 후에 문제가 될 여지가 있었다.
모장이 핼쑥해진 얼굴로 돌아와 소곤거렸다.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용아의 되물음에 모장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께서 비전하를 아끼시는 마음이 무척 큰 것 같습니다.”
모장이 힘껏 태자를 치장했다.
“태자 형님 미쳤나 봐.”
“비전하. 아무리 그래도 태자께 그리 말하시면 안 됩니다. 그나저나 어쩌지요. 등 태감이 다락원을 정비한 것에 대해 비전하의 칭찬을 기다리는 눈치인데요. 뭐라 할까요.”
용아가 끝도 없이 늘어선 우아한 석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고맙다고 해야겠지?”
“그렇죠.”
“태자 전하께 신경 써 주심에 감사하다 답례를 올리고, 저게 무슨 짓이냐고…….”
용아의 말에 모장이 잘게 고갯짓을 건넸다.
“…….”
그래선 안 된다는 간곡한 뜻이었다.
“알겠어. 뒷말은 전하지 말고 앞에 것만 전해 주어. 다녀올게.”
용아는 한숨 한 번에 곤란함을 날려 버리고, 다시 한 번 모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락원 안으로 향했다.
“다녀오십시오.”
용아를 배웅하며 모장은 저도 모르게 소로 안에 이어지는 석등을 헤아렸다. 언뜻 봐도 혹여 잘못되면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았다. 태자와 태자비의 사이가 친해진 것은 좋은 일인데 어째 중요한 것은 비껴가고, 문제가 될 사안만 소소하게 느는 기분이었다.
온후한 인상의 여인이 긴 숨을 소리 없이 내쉬었다.
소로 앞에서 돌아서던 모장은 안으로 향한 주인의 모습을 찾듯 숲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화우전으로 든 후리후리한 뒷등이 걱정되었다. 어린 날처럼 또 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그친 후로 타인의 앞에서 눈물을 내보이지 않은 그녀의 주인은 화우전에 들 때만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 낸 흔적을 엿보였다.
만약 혼자 또 울고 있다면, 운 것을 보이지 않으려 한참이나 홀로 찬바람을 맞고 있다가 온 걸 깨닫게 된다면 마음이 쓰릴 터였다.
화우전 안으로 든 입술이 삐딱하게 기울었다.
“졸부야?”
다락원 초입부터 늘어선 석등은 화우전 안까지 이어졌다. 모든 석등 안에는 화주옥이 잠들어 있었다. 못해도 커다란 궤 10개에 담길 양이었다. 허랑방탕한 황족의 사치로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계단을 오르던 용아는 이전에 남자가 자신에게 화주옥 10궤를 주마, 했던 것을 불현듯 떠올렸다.
설마.
의심이 사실로 굳혀지고 있을 때. 계단을 다 오른 시야로 깔끔하게 정리된 화우전의 정경이 들어왔다. 기묘한 모양의 보좌 주위에 놓인 아담한 석등과 전각 안에 새롭게 세워진 석등 덕분에 해가 져도 화우전 전체가 잘 보일 것 같았다. 화주옥이 빛을 퍼트리지 않는 지금도 어지럽던 것이 정리되고 새로 들인 석등이 아름답게 배치되어, 주위가 훨씬 훤했다.
“좋네.”
보좌 주위로 놓인 아담한 석등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들으며 보좌로 가 앉은 용아가 웃음을 퍼트리며 눈을 감았다.
이 고요가 좋았다.
긴 시간 바람을 맞은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감겨 있던 시야가 열리며 눈을 감기 전에는 없던 것이 바로 보였다. 봄바람에 실려 온 기묘한 간질거림이 누구의 것인지 예측하고, 눈을 떠 답을 확인한 용아가 보이지 않는 웃음을 흘렸다.
“뭐하냐.”
“언제 오셨습니까.”
기척도 없이 온 사내가 화우전 안으로 드는 순간부터 용아는 알 수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방금?”
성의 없이 대꾸한 남자가 용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커다란 남자의 손이 평온한 뺨을 뒤덮었다. 뭘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얼굴을 감싼 윤제의 손이 용아의 뺨을 샅샅이 더듬었다. 무방비한 뺨으로 열기가 번져 올랐다.
“울었어?”
“안 울었습니다. 울긴 제가 왜…….”
용아가 얼굴에서 큰 손을 황급히 떼어 내며 답했다. 뭘 하는 거냐, 따져 물을 여유가 없었다. 뺨에 자꾸만 감겨들려는 손이 곤혹스러웠다. 머릿속에 심장이 옮겨 온 것처럼 얼얼했다. 아직 도이환을 먹을 때는 아닌 것 같은데, 도이환을 먹어야 할 때가 온 것처럼 온몸으로 낯선 열기가 번졌다.
“어디 아프냐?”
시선을 피하며 손을 밀쳐 내는 얼굴을 향해 윤제가 물었다.
“안 아파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로 용아가 답했다.
“그나저나 왜 또 이거야.”
남자는 용아의 정복 차림을 좋아했다. 반면, 용아가 평소에 입는 복식을 영 마뜩찮아 했다. 정복과 결금포와 착수포를 적절히 뒤섞어 만든 연복은 팔다리 통이 좁아 움직이기 편하면서도, 모장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팔과 아랫부분에 적당히 여유를 둬 황족의 기존 복장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윤제는 동의하지 않았다. 용아의 연복을 남자는 정체불명의 복장으로 규정하고, 볼 때마다 타박했다. 연복을 입을 때 긴 머리칼을 뒤에 하나로 내려 묶는 것마저 툴툴대었다. 머리칼을 고정하는 무늬조차 없는 비단 끈을 못마땅해하며 어느 날부터인가 장신구를 품에 챙겨 가지고 다니며 장식 없이 다니는 용아의 뒷머리에 머리칼을 고정하는 장신구를 손수 꽂아 댔다.
“하, 하지 마세요.”
“어허.”
남자는 용아의 편한 차림을 구박하며 황족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다고 엄살을 부려 댔다. 사치함을 제 몸처럼 여기는 남자다웠다. 윤제의 세심한 손길에 용아가 투덜투덜 사은했다.
“송구합니다.”
“제대로 좀 하고 다녀라.”
쏟아지는 잔소리에 용아가 이만하면 되었지 하는 얼굴을 했다.
“귀찮게.”
나지막한 목소리가 꿍얼댔다.
“귀찮다니.”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대꾸가 날아들었다.
“그만 좀 하세요.”
귓가에 내리는 저음과 함께 고정대 주위에 섬세하면서도 간결함이 돋보이는 장식이 쉴 새 없이 더해졌다. 전하께서 걸어 다니는 장신구함이냐 투덜거려 봤지만 분주히 움직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장식을 꽂고 나서야 남자의 손이 물러갔다.
“이제 좀 낫다.”
끝이 살짝 올라간 눈이 흘기듯 윤제를 쏘아봤다.
“무겁습니다.”
툴툴대는 얼굴로 웃음이 내렸다.
“예쁘다.”
요즘 자주 듣는 낯선 칭찬에 용아의 얼굴이 불편하게 뒤틀렸다. 미묘하게 침묵하던 용아가 보좌 옆 석등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마음에 들어? 예쁘게 하고 다녀라.”
“그거 말고요. 이거요.”
잘못 알아들은 윤제의 말에 용아가 석등을 마구 쓰다듬었다.
“그걸 이제야 봤어? 너 아플 때 함월전을 정비한다고 했잖아. 기억 안 나?”
“그런데 석등 안에 저건 뭡니까. 바꿔 주십시오. 전하께서 안 바꿔 주시면 제가 바꿔 두겠습니다. 전각 안도 아니고 밖에다 화주옥을 놔두면 어떡합니까.”
“그러면 안 되나?”
윤제가 뭘 그런 걸 신경 쓰냐는 얼굴로 무심히 말했다.
“바꿔 주십시오.”
“알았다. 아, 너 부자다.”
사치가 일상인 남자를 향해 용아가 허세를 부렸다.
“저 원래 부잡니다.”
딱히 허세라고 할 순 없었다. 용아가 가진 것은 충분히 많았다. 다만 태자가 가진 것이 비교할 수 없이 많을 따름이었다. 용아의 당당한 말에 윤제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한참 어린 아우의 치기 어린 말을 귀여워하는 얼굴이었다. 남자의 웃는 얼굴이 좋았고, 또 싫었다.
윤제는 불퉁함을 흘리는 얼굴을 향해 편전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황제와 태자의 과분한 처우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되는 걸까 싶었다.
“부황께 사은하도록 해라. 반드시 정복을 입고, 알겠느냐.”
“예.”
용아는 산융마를 제외한 물목 중 피해를 입을 뻔한 황족에게 배분해야 할 것과 국고로 넘겨 조정에서 처리할 것에 대해 윤제와 의견을 나누었다.
“산융마를 제외하고 전부 황친과 국고로 넘기려고?”
“예. 별로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지 마라. 황족에게 배분하는 데에서 네 몫도 나누어 챙겨. 다들 버릇 나빠진다. 석등에서 꺼낸 화주옥은 영화대로 보내 주마. 아직 바람이 차다. 그만 가자.”
윤제의 말에 용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보좌에서 일어나는 등으로 남자의 팔이 감겨들었다. 용아는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내내 자신은 앉아 있고 태자는 선 채로 말을 나누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파 누워 있는 동안 태자가 너무 자신을 오냐오냐해 준 탓이었다. 예법도 잊고, 황족과 태자에 대한 어려움이 위험할 정도로 사라져 있었다. 남자가 지키지 마라 하명했다 해도 이래선 안 되는 거였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안 아픕니다. 아까부터 자꾸 아픈 사람으로 만들려 하십니까.”
자신은 아픈 게 아니었다. 그저 따스함을 주는 존재를 좋아하고 있었다.
용아도 알고 있다.
윤제가 아픈 자신을 극진히 보살펴 준 것은 태자의 첫 신연회에서 일어난 사고로 다쳤고, 남자의 옆자리에 앉았던 자신에 대해 큰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일 터였다.
용아가 태자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태자비라는 위명 덕분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따듯함을 준 것도, 옆자리에 앉힌 탓에 크나큰 책임감을 느끼는 것도, 전부 용아 자신이 태자비라서였다. 그것을 다 알지만 한번 뛰기 시작한 심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힘들 때 언제든 형한테 말해라.”
윤제가 용아의 뒷머리를 도닥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웃는 얼굴에 심장이 더 거세게 울었다. 용아가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에 요즘 자주 보이는 흐뭇함과 다른, 면밀히 관찰하는 시선과 의뭉스러운 표정이 따랐다.
“힘든 거 없습니다.”
용아가 담담히 말했다. 남자의 샅샅이 살펴보는 듯한 시선 앞에 당당하려 했다.
“너도 사람인데 힘든 게 왜 없겠냐.”
윤제가 선선히 대꾸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평소와 묘하게 달랐다. 뭔가 용아에게 비밀이 있고, 그를 캐내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뭘 알고 있나.
용아의 머릿속으로 선득한 예감이 스쳐 갔다.
“지금 소제가 힘들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그 성격 어쩌냐. 어쩌다 그렇게 삐뚤어졌어. 형이 걱정해서 하는 말이잖아.”
윤제가 철부지 소년처럼 어린 아우의 한 팔에 안아 휘두르는 장난을 치려 했다. 그러자 용아가 질색하며 덤벼드는 남자를 밀쳐 내려했다.
“하, 하지 마십시오.”
태자에게는 장난이지만 용아에게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앞세운 억압이었고,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하게 하는 곤란한 짓이었다. 용아가 기겁하자 윤제가 성격 나쁜 형처럼 즐겁게 웃으며 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남자에게 장난이 분명했다. 용아가 온 힘을 다해 밀쳐 내는 데 허리를 안은 팔이 꼼짝을 안 했다.
“너무 애쓰지 마라.”
윤제가 버둥대는 허리를 조금 놓아주며 너그럽게 말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너 목이 다 빨개졌다며 키득댔다. 용아는 사사롭게 배운 험진 말을 내뱉을까 치열하게 고민했다.
“비켜요.”
“형이 너 좋아서 이러는 거잖아.”
“저리 가라고요.”
투닥거리며 걷는 사이 다락원의 소로가 끝나고 있었다.
“이 형한테 잘 좀 해 줘라.”
“잘해 주긴 뭘 잘해요. 괴롭히지 좀 마요.”
쉬지 않고 툴툴거리면서도 표정 아래에 흐릿한 웃음이 깔려 있었다. 둘의 실랑이가 한창일 때 소로 초입에 어름어름한 그림자가 오갔다. 모장과 등우였다.
“가 보자.”
용아의 밀침을 슬쩍슬쩍 가볍게 쳐 내던 윤제가 바르작거리는 손을 단숨에 제압하며 걸음을 옮겼다. 태감과 상궁이 예를 올리려는 것을 남자가 손짓으로 물렸다.
“전하. 횡군왕부로 가셔야 합니다.”
등우가 태자 곁으로 붙어서며 아뢰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횡군왕께서 돌아가셨다 합니다. 지금 시신이 황도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횡양군께서 부친의 시신이 입도 하는 대로 혜주로 떠나실 겁니다. 폐하께서 아직 고인을 기릴 기간을 얼마나 주실지 정하지 않았으나 법도대로 처리하실 듯하다 합니다.”
“출궁하겠다.”
윤제가 품에 안은 거나 진배없던 용아를 놓아주며 말했다. 용아는 갑작스레 급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태자를 신속히 배웅했다.
“살펴 가소서.”
윤제는 용아의 인사에 정결한 등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려 답을 대신했다. 무척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태자를 보필하고자 기다리고 있는 궁인들을 향해 걸어가던 윤제가 걸음을 되돌려 용아에게로 돌아왔다. 떠나간 걸음보다 더 빠르게 돌아온 사내가 용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너도 가자.”
용아는 고민하지 않고 다가온 손을 맞잡았다.
“…….”
윤제의 손을 맞잡고서야 모장의 얼굴을 살폈다. 모장은 돌아보는 시선에 눈짓으로 끄덕이며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태자가 함께한다지만 이전에 태자비가 바깥으로 가는 걸 문제 삼는 이들이 있었으니 시늉이라도 얼굴을 가리는 게 안전할 터였다.
횡군왕부의 소식을 듣자마자 태자의 출궁 준비를 한 등우의 팔에 얼굴까지 가려 주는 겉옷이 걸려 있었다. 모장의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 등우가 팔에 걸려 있던 태자의 포를 모장에게 넘겼다. 모장이 재빠른 놀림으로 걷고 있는 태자비의 어깨에 포를 씌우려 했다. 윤제가 본래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포를 받아 용아에게 입히고 얼굴을 가리도록 머리까지 둘러씌웠다.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가자.”
등우가 일행을 이끌었다. 태자를 따라 빠르게 걸으며 용아가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횡공자 형님이 횡군왕이 되시는 겁니까.”
“그렇지.”
등우의 준비가 무척 철저했는지 마차가 황궁에 들어올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에 대어져 있었다. 태자와 태자비가 안에 오르고 문이 닫히며 곧바로 출발했다.
“헌데 혜주로 가십니까.”
“혜주가 횡군왕부의 분봉지이며 지켜야 할 땅이다. 일반적인 분봉지와는 다른 개념이다. 군영에 더 가까운 개념이라, 땅을 하사 받은 황족은 정해진 때 외에는 항상 그곳을 지켜야 한다. 군왕은 그의 봉지에, 군왕의 가솔 중 일정 나이가 찬 직계들은 황도에 있는다.”
윤제의 설명에 용아가 입을 다물었다. 분봉이라 하지만 어떻게 보면 황도에 있어야 하는 군왕의 일족은 군왕의 입장에서 황가에 붙잡혀 있는 볼모였다.
마치 자신처럼.
제북과 장군부는 잊은 듯 하지만, 후족이 황도로 보내는 황가의 반려는 황실의 대를 잇는 동시에, 황가가 붙잡고 있는 볼모와 다를 바 없다.
“혜주는…… 멀죠.”
“응. 멀다. 통상적으로 봉분 받은 황족이 군영을 떠나 황도에 머무는 기간은 석 달인데, 혜주는 서남 최하단 초원 가운데 외따로 떨어져 있지. 오고 가는 데만 최소한으로 해도 두 달가량 소모하니 황도에 머무는 기간이 극히 짧다. 분봉지로 첫 출타를 간 군왕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3년간 황도로 오지 못한다.”
말을 하는 태자의 얼굴이 침침했다.
황가는 냉엄하고 철저하다. 더불어 다정하다. 마치 남자처럼. 황가는 혈족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강한 애착을 보이지만, 황족이 제좌의 위엄을 거스를 여지를 주지 않는다.
태자는 오랜 친우가 먼 곳으로 떠나 한동안 돌아오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고 쓸쓸해하며 염려를 드러내지만 그가 표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황도에 머무는 기간이 동일해야 공평한 것이 아닙니까.”
“나도 그리 생각해.”
용아의 물음에 윤제가 침울한 얼굴에 웃음을 퍼트렸다.
“그런데…….”
“황가와 종친 안에서 여러 번 황도에 머무는 기간을 동일하게 조정하자 말이 나왔지만 매번 횡군왕부와 분봉지가 먼 군왕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내가 생각할 때 그건 세뇌를 당한 게다. 자신이 해당 일가에 태어났기 때문에 강제로 만들어 낸 자부심이야. 이 강산 안에서 가장 어렵게 국경을 수호하는 일가에 대한 자부심들이 크달까. 가까운 곳에 분봉지가 있는 황족은 그들대로 황도와 멀지 않는 곳으로 가는 것에 대한 자긍심이 있지. 스승들과 친우들에게 여러 번 황족들의 그릇된 자부심이라 지적해 봤는데, 황족의 고결함을 모르는 불온한 인사 취급만 당했다. 너도 내색하지 마라. 이 땅에서 가장 험하고 먼 곳에 가시니 대단하다 추켜세워 주면 오히려 좋아할 거다.”
“주의하겠습니다.”
장군부 안에서 가장 추운 땅으로 출정을 가는 헌원가와 비슷한 것일까, 생각한 용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씨들의 추위에 대한 헛된 젠 체가 떠올랐다. 숙부들은 헌원씨들에 대해 얼어 죽는 걸 자랑으로 삼는 웃기고 오만한 것들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숙부는 추우면 솜옷을 입어야 한다, 단단히 당부했다.
“전하, 도착하였습니다.”
마차가 멈추고 이어 등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어라.”
태자의 명에 문이 열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횡양군과 횡군왕부의 가솔들이 나와 태자를 맞았다.
“일어나라.”
윤제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서 내린 용아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남자의 곁에 서 있었다. 태자는 횡군왕비에게 위로를 건네고 횡양군에게 안으로 들기를 청했다. 윤제가 손을 붙잡은 채 그의 뒤에 숨기듯 두었기에 용아는 따로 나서지 않았다.
횡군왕부 일족과 가솔들은 가주를 잃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으나, 군왕부를 찾아 준 태자께 예를 다했다. 안으로 드는 태자에게 예를 올리는 횡군왕비를 향해 용아는 얼굴이 가려진 채로 마주 예를 올리고 이끄는 손을 따라 걸었다.
전각 안에 들어 문이 닫히는 걸 보고서야 윤제가 용아의 손을 놓아줬다. 머리에 씌운 것이 벗겨지지 않도록 고정하기 위해 묶어 둔 얇은 끈을 커다란 손이 풀었다. 용아는 턱가를 스치는 남자의 손을 밀어내고 직접 끈을 풀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것을 등 뒤로 넘기자 한결 시야가 트였다.
“횡공자 형님.”
용아의 부름에 차를 준비하고 있던 횡양군이 그대로 멈췄다.
“……깜짝이야.”
“먼 곳으로 가신다 하여 찾아뵈었습니다.”
“용공자. 와 줘서 고맙다. 못 보고 가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더 반갑다.”
횡양군이 기대하지 못한 얼굴을 본 게 기쁜지 한층 밝아진 얼굴로 차를 권했다. 윤제가 용아에게 건네진 조그만 찻잔을 횡양군에게 돌려줬다.
“너부터 마셔라. 이거 기미 해 봐야 하는데. 네가 위험한 녀석 아니냐. 그리고 서열대로 차를 줘야지. 어째 제일 어린 녀석부터 주는 거야.”
횡양군이 작은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차는 예쁘고 어린애부터 주는 거 아니었나.”
“실없는 소리는. 그리고 내가 더 예쁘댔다.”
“그거야 아주 어릴 때지. 세 살 이후로 윤공자 너는 쭉 짐승이었다. 내가 어디 가서 키로 안 밀렸는데 윤공자는 볼 때마다 쑥쑥 자라서 태자 전하 잘 때 궁인들이 비료 뿌리는 거 아니냐고 우리끼리 뒷말을 많이 했었다. 둘 다 표정 좀 풀 수 없는가. 세상 버리신 것은 부친이지 내가 아니다. 나 죽으러 가는 거 아니고,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잖나. 다시 보는 것도 금방일 거다.”
횡양군이 그림자 진 얼굴들을 향해 가벼이 말했다.
“3년이나 못 본다면서요.”
“법도란 게 다 필요하니 있는 거겠지. 그래도 걱정 마시게. 나 없어도 횡군왕부에서 태자비께 매해 청명절마다 보내야 할 것을 제대로 보낼 거요. 그나저나 군왕부에 용공자가 온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돌아 볼 상황이 아니라 아쉽네. 용공자가 태자비라서 불편한 게 많다.”
“그리 먼 곳으로 가셔야 하는 줄 몰랐습니다.”
함께한 기간은 짧았지만, 횡양군은 용아의 몇 안 되는 친우였다. 잠시 오가던 것이 끊긴 이유가 곤란한 것이었으나 용아도 횡양군도 신경 쓰지 않았다.
“특별히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
태자의 물음에 횡양군이 일부러 웃으며 답했다.
“없소.”
혜주는 척박한 땅의 끝에 있었다. 서쪽 국경이 그토록 긴 것은 혜주의 위치 때문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을 지나, 모래 바람이 부는 사막을 건너 돌과 바위로 이루어진 곳 너머에 있는 크지 않은 녹지대. 혜주는 천혜의 요새이며 홀로 외롭게 서 있는 곳이었다. 강산이 다 정복당해도 혜주성만은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때문에 분봉지보다 주둔지에 더 가까운 인상을 주었다.
혜주의 위치적 특성과 인근에서 나는 특이 자원은 척박한 땅을 가로지는 것을 강행하게 했다.
“전하.”
“응.”
“복아를 횡양군께 드리고 싶습니다.”
용아의 말에 태자가 묘한 얼굴을 했다. 횡양군은 방금 들은 소리가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윤제가 손을 뻗어 서운함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을 다독였다.
“지금 바로 불러서 줄까.”
“네.”
윤제의 물음에 용아가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밖에 있느냐.”
태자의 부름에 등우가 안으로 들었다. 명이 곧바로 내려졌다. 태자비가 자신의 말을 횡양군에게 하사하니 마장에 있는 말을 데려오라는 명에 태감이 깊이 머리를 숙이고 물러갔다.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횡양군이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건강하십시오.”
용아의 말에 횡양군이 다시 웃었다.
“글쎄, 아주 가는 게 아니라니까.”
용아가 신소리를 하는 사내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우리는 둘 다 가정이 있어서 이러면 곤란하다, 횡양군이 그답지 않은 소리를 연이어 하며 우울한 얼굴을 위로했다. 위로 받아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인데, 연신 자신을 위로하는 횡양군의 태도에 용아가 곧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우가 태자비께서 횡양군께 하사한 산융마를 도착했다 알렸다.
윤제가 용아의 얼굴을 다시 가리며 밖으로 향했다. 횡양군도 둘을 따랐다. 횡양군은 아름다운 산융마를 살피고, 태자에게 예를 올린 후, 태자비가 있을 황궁 방면을 향해서도 감사의 예를 올렸다.
“고맙다. 잘 타마. 복아에게 용공자도 인사해라.”
횡양군의 말에 얼굴이 가려진 채로 용아가 복아를 부둥켜안았다가 놓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마장에서 보내는 것보다 횡양군을 따라 거친 땅을 달리는 것이 복아를 위해서도 더 좋을 것 같았다. 복아가 있기에 횡양군이 덜 힘들 수 있다면 더욱 좋을 터였다.
“다시 뵐 때까지 강녕하십시오.”
“살펴 가십시오.”
태자와 태자비에게 예를 올리는 횡양군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윤제는 가볍게 답례를 하고 돌아섰다. 마차에 오르는 태자 일행을 향해 군왕부의 가솔들이 다시 엄격히 예를 올렸다.
“…….”
마차에 오른 후에 이상하도록 잠잠한 용아를 윤제가 유심히 바라봤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화아, 우느냐.”
가려진 얼굴이 쓸쓸히 흔들렸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평생토록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이별은 매번 힘들고 괴로웠다. 자꾸만 눈가가 뜨거워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견디기 어려웠다. 잘게 들썩이는 가려진 얼굴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아이를 달래 주듯 끌어안고 도닥여 주는 손길에 용아가 매달리듯 남자를 마주 안았다.
당장은 횡양군뿐이지만, 때가 되면 모두가 각자 가야 할 길을 떠날 터였다. 어린애처럼 굴고 싶지 않지만 아쉬웠고,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어린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