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RP절갠-五-六 (5/25)

#TRP절갠

새벽 공기 위로 깃발 흩날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호화로운 보랏빛 주단에 은실로 수놓인 거대한 글씨가 바람을 따라 나부꼈다. 땅을 울리는 말 달리는 소리 위로 희뿌연 먼지바람이 일었다. 수많은 깃발들이 춤추는 소리가 분주히 뒤섞였다.

황도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둔중한 뿔 나팔 소리가 거대한 일행의 위를 뒤덮었다.

“전하, 곧 황성입니다!”

태자의 끄덕임에 앞서 달리던 무리가 말을 재촉해 더 빠르게 달려갔다. 태자를 맞을 채비를 하라는 명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태자 일행이 황성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 걷힌 시각이었다.

“태자 전하.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먼저 와 태자의 환궁을 알린 이들과 황성을 지키는 이들이 남주문 앞으로 드는 태자를 향해 예를 올렸다. 일찌감치 활짝 열려 있는 남주문 곁에는 태자의 태감들은 물론, 정천궁의 태감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전하,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모두 일어나라.”

남주문 안으로 들며 윤제가 짧게 명했다.

“모시겠습니다.”

태감들이 분주한 걸음으로 태자의 곁을 따랐다. 예를 올리는 일사불란한 소리에 이어, 태자가 안으로 드는 것을 알리는 소리가 바삐 울렸다. 정천궁 앞에 다다랐을 때 동궁 태감들이 멈추어 서며 소리 없이 태자를 배웅했다. 정천궁의 태감만이 윤제의 곁을 따르며 길을 밝혔다.

정천궁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전각의 문이 있는 곳까지 금실로 둘레에 수가 놓인 붉은 비단이 깔려 있었다. 호화로운 붉은 비단을 밟고 계단을 오르는 윤제의 주위로 태감들의 고아한 외침이 날아들었다.

“태자를 들라 하신다!”

전각의 깊은 곳에서 퍼져 나온 소리에 맞추어 거대한 문들이 분주히 입을 벌렸다. 열린 문을 그가 오를 때마다 공명하는 것처럼 태감들의 외침이 울렸다.

“태자 전하 듭시오!”

정천궁의 모든 문이 태자를 향해 일제히 열렸다가 태자가 안으로 들자 동시에 걸어 닫혔다.

황제를 알현코자 안으로 든 태자는 초조반부터 중반까지 함께한 후에야 정천궁을 나섰다. 윤제는 서쪽 경계인 정주와 헌주, 남방의 거점인 온주 일대까지의 국경 동향을 오랫동안 아뢰었다. 넉 달에 걸친 국경 시찰은 태자 본인에게도, 명을 내린 황제에게도 특별한 일이었다.

정천궁을 나선 윤제의 곁을 살피며 등우가 살갑게 말했다.

“전하, 군영에서 지내기는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괜찮다. 궁은?”

정천궁에서 금당대로 향하는 발길은 자연스럽게 영화대 앞을 거처 가는 행로를 따랐다. 등우의 말을 듣기 위해 옆으로 시선을 돌리던 윤제의 얼굴이 멈추었다.

“궁이야 무에 별고 있겠습, ……전하?”

영화대 앞에 고정된 태자의 시선이 움직이지 않았다. 앞을 보는 얼굴에 황망함이 가득했다.

“방금 그거 누구지?”

영화대 안으로 든 나붓하고 정결한 뒷등을 말함이었다. 윤제의 망연한 얼굴을 훔쳐보던 등우의 표정이 안타까움과 연민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했다.

“태자비 전하……이십니다.”

평연히 대답을 올리던 등우가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없는 사람 취급 당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왜 갑자기 이러시는가 의아해하던 태감의 얼굴에 때늦은 깨달음이 흘렀다.

윤제의 얼굴은 더욱 기묘하게 굳어 들었다.

“태자비?”

윤제는 완전히 걸음을 멈추었다. 등우가 태자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공손히 답을 건넸다.

“예. 태자비 전하이십니다. 최근 넉 달 사이 부쩍 장성하셨지요. 장성이라고 해도 키만 자란 것이나 진배없습니다만, 전하와 비교하면 크지 않으시나 이제 웬만한 도련님들과 비슷하게 자라셨습니다.”

“넉 달 만에……?”

“지난 넉 달간 무척 부지런히 자라셨지요. 뵐 때마다 자라시는 기분이었습니다. 하하. 하하…… 으흠. 모 상궁이 말하기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궁인들마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자라셨다 하더이다. 밤에 주무시러 들어가실 때와 아침에 깨어나 나오시는 사이 자라는 게 느껴졌다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키만 커져서 조금 위태위태하기도 합니다. 폐하께서 친히 태자비께 의원을 보내시어 몸을 보하는 탕을 올리게 하실 정도이옵니다. 전하께서는 넉 달 만에 보시는 것이니 놀라시는 게 당연합니다.”

태자비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월전에 드는 게 벌써 3년째다. 태자를 보고도 아니 보이는 척하거나, 못 본 척하는 무시 아닌 무시를 한 지도 3년째. 일관되게 무시당하던 윤제가 새삼 당황해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던 등우는 뒤늦게 이유를 깨닫고 소상히 말을 고했다.

“내가 없으니 잘 자라는 건가.”

텅 빈 영화대 앞을 보며 윤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

등우는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이 그리 이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저 놀라웠다. 쓸쓸해하는 주인의 곁을 총총히 따르는 얼굴로 물음이 건네졌다.

“서신은?”

황도를 떠나 있던 넉 달 동안에도 윤제는 주기적으로 영화대를 향해 서편을 전했다.

“……없사옵니다.”

등우는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으로 답을 고했다.

“그래.”

윤제도 별달리 기대하지 않은 듯한 얼굴로 선선히 말을 내뱉고 성큼한 걸음을 이어 갔다. 휙, 바람에 떨쳐지는 옷자락이 씁쓸함을 떨쳐 내는 것처럼 보였다. 태자의 뒤를 따르는 궁인들은 숨조차 쉬이 내쉬지 못하고 주인을 뒤따랐다.

금당대로 태자가 들어서자 사방에서 소리가 날아들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동궁 궁인들이 오랜만에 귀환한 주인을 향해 반듯하게 예를 올렸다. 모두 등우가 준비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환궁한 주인을 살뜰히 살피고자 등우는 태자의 환궁에 맞추어 그답지 않게 단단히 힘을 주었다. 요 며칠 동궁 태감의 위세도 제법 부렸다. 태자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그토록 준비했건만, 금당대로 들어서는 등우를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등우는 아쉬운 얼굴로 윤제를 소환에게 맡기고 궁인이 있는 문 곁으로 향했다.

등우가 다가오는 걸 본 궁인은 바삐 다가서며 조용히 속삭였다. 궁인의 말을 들은 등우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전각 안으로 들고 있는 윤제의 등에 꽂혔다. 소환의 시중을 받으며 안으로 드는 태자의 얼굴을 무미건조했다.

등우는 분주히 속닥이는 궁인에게 끄덕임을 건네고, 곳곳에 배치된 궁인들과 위병들을 물러서게 한 후에야 전각 안으로 들었다. 그가 안으로 들자 시중을 마친 소환이 방을 나서고 있었다. 어린 얼굴은 구김 없이 발랄하였다.

“전하께서는?”

“공공. 전하께서는 서재에 잠시 드셨다가 일찍 쉬실 거라 하셨습니다. 명이 있을 때까지 물러가라 하십니다.”

“고생하였다. 물러가 있거라.”

등우는 경쾌하게 아뢰는 소환을 칭찬하고 물러갈 것을 당부했다. 그는 소환의 뒤편에서 태자의 포를 정리 중인 궁인들에게도 손짓으로 물러날 것을 명했다.

소환과 궁인들이 모두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후우.

모두가 물러난 전각 안은 잠잠했다. 등우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품속에 담긴 것을 누르며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가늠해 보고자 노력했으나 알 수 없었다.

“전하.”

태자가 있다는 서재 앞에 가 말을 건네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들어오너라.”

곧바로 윤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문을 열고 안으로 그림자처럼 스민 태감은 정적 속에 몸을 숨겼다. 등우는 주인을 향해 잠시 시선만 올리고 감히 말을 건네지 못했다.

“…….”

기묘한 침묵이 흐른다.

“뭐냐.”

윤제가 서책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그것이…….”

쉬이 말하지 못하는 등우를 향해 윤제가 의문을 담은 눈길을 건넸다.

“그것이 뭐.”

등우가 땅에 머리가 닿도록 허리를 숙였다.

“영화대에서 답신이 왔사옵니다.”

재빨리 고해 올린 태감이 순식간에 태자의 앞으로 다가왔다. 낮춘 머리는 그대로였다. 품에 있던 서신을 꺼내 머리보다 더 높게 올려 내미는 동작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예의 바른 손 위에 풀 먹인 비단을 두른 서신이 올려져 있었다.

3년 만의 답장이다.

서신을 가져가는 손길은 고요했다. 봉해진 입구가 호사스러운 종이칼로 그어졌다. 안에 담겨 있는 서신은 단출했다. 서신을 펼쳐 본 손이 우뚝 멈추었다.

“…….”

윤제의 입술에서 어처구니없어 하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웃음과 불쾌감이 뒤섞인 기묘한 울림이었다.

“…….”

등우가 낮춘 시선을 올려 주인을 살폈다. 서신에 고정된 윤제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희미하게 찡그린 눈썹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한쪽만 비스듬히 올라간 입술은 웃는 듯 인상을 쓴 듯했다. 고운 종이를 삐딱하게 든 커다란 손이 미묘하게 움칫댔다.

등우는 온 신경을 세웠다. 눈치를 보는 등우의 시선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시선이 일순 얽혔다. 윤제가 손에 든 서신을 권하듯 으쓱였다.

보겠어?

그리 묻는 듯했다. 등우는 괜히 상상으로 전전긍긍하기보다 현실을 당당히 마주하기로 하였다. 공손한 걸음으로 다가가 윤제의 손에서 서신을 건네받은 태감은 짧디짧은 서신의 내용에 당황했다. 그리고 짧은 글이 주는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

태자전하 친전(親展).

전하. 저한테 서신 보내지 마십시오.

기품이 넘치면서 강직한 인상의 글씨가 전하는 말은 단호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한눈에 뜻하는 바가 정확히 와 박히는 직설적인 서신이었다.

비전하! 비전하! 비전하……!

등우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소리 내 외치고 또 외치고 싶었다. 차라리 지금껏, 3년간 그래 온 것처럼 무시로 일관하시지 그랬냐고 따져 묻고 싶었고, 갑자기 막 울고 싶어졌다.

“영화대로 가겠다.”

윤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전, 전하…….”

등우는 이유를 막론하고 우선 태자의 앞길을 막고 봤다.

“비켜라.”

윤제가 발 앞에 엎드려 웅크린 등을 향해 말했다.

“전하께오서 넉 달 만에 환궁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본디 사람은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치게 마련이고 지친 마음은 예민한 법 아니겠습니까. 부디…….”

등우는 할 수 있다면 태자의 다리에 매달릴 셈이었다.

“비켜.”

윤제가 무성의한 음성으로 명했다.

“전하!”

등우는 저를 옆으로 밀치고 가려는 다리를 와락 안으며 읍소하려 했다. 3년 전을 잊으셨느냐, 비전하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마음 아파 하셨느냐, 지난 세월의 노력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려 하느냐는 절절한 속삭임이 녹아 있는 부름이었다.

“놔라.”

윤제가 덤덤히 말했다.

“전하. 이리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비전하께서…… 아, 아직 어리시고…… 어릴 때 얼마나 용기백배한지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등우는 혼신의 힘을 발휘해 태자비를 꾸며 주려 했다.

“그 녀석 내일모레면 열여덟이잖아.”

“아직 하아아아아안참 어리실 때이지요! 어릴 적에 미욱한 실수를 하는 것은 당연한! 아주 당연한 일이옵니다. 부디…….”

“열두 살이었을 적에도 말 한마디 안 지던 걸 잊었느냐.”

윤제가 등우의 팔에 안겨 있는 다리를 가볍게 빼냈다.

“전하!”

등우는 이제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왜 자꾸 불러 대.”

윤제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무심히 말했다.

“영, 영화대에 가셔서 무엇을 하시려 하십니까! 전하와 금당대 소인들을 영화대 궁인들이…… 그것이 아니옵고, 소인이 보기에 전하의 안색이 무척 좋지 않사옵니다. 거둥을 하시기에 앞서 쉬셔야 한다고 보옵니다. 제발, 안으로 드셔서 쉬소서!”

등우는 튀어나오려는 진심을 욱여 삼키며 딴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아주 멀쩡하다. 놔라. 왜 이리 질척대.”

윤제는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옷자락을 움켜쥐고 버티는 등우의 손을 날래게 쳐 냈다.

“전, 전하!”

등우는 어렵게 주워 삼킨 말을 울부짖음 속에 담았다. 영화대 궁인들이 또다시 전하와 금당대 소인들을 인두겁 쓴 괴물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보게 하실 것이옵니까!? 멈춰요! 멈춰!

등우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말리려거나 말거나 윤제는 제 갈 길을 갔다. 뒤따르는 등우의 외침에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 있던 금당대의 궁인들이 후다닥 태자를 향해 움직였다.

“전하, 어디로 가시옵니까.”

등평은 다급한 등우의 손짓에 무엄함도 잊고 윤제의 앞길을 막았다. 앞길을 교묘하게 막아서는 태감의 유려한 몸짓에 윤제가 불편한 기색을 퍼트렸다.

“영화대로 간다.”

“전하. 금일 환궁하시어 곤하실 터인데 쉬지 않으시옵고, 영화대까지 가시려 하시옵니까.”

등평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등우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괜찮다.”

“전하. 평아의 말씀대로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금세 쫓아와 곁으로 다가온 등우가 쏟아 내듯 급히 말했다.

“비켜라.”

윤제는 양쪽에서 쉬라고 아우성인 두 태감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명했다. 등우와 등평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여차하면 태자의 양팔에 매달릴 각오를 다졌다.

“전하, 쉬셔야…….”

“소인이 보기에 안색이 무척……”

태자께서 곧 쓰러지실까 염려된다는 얼굴들을 윤제는 덤덤히 휙휙 밀치고 걸음을 옮겼다. 울부짖는 얼굴들이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시끄러웠다. 갑작스럽게 밀침을 당한 등우와 등평이 쓰러진 사이 윤제가 앞으로 훌쩍 걸어 나갔다. 금당대의 궁인들이 분주한 걸음으로 앞서 나가는 태자를 뒤따랐다.

“전하……!”

다급한 외침들이 뒤따랐지만 윤제는 들은 체도 않았다. 태자는 귀하신 분이시니 홀로 가시면 안 된다는 말이 희미하게 울렸다.

“전하, 소인들을 두고 어디를 가시옵니까!”

엎어져 있던 등우가 몸을 일으키며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어떻게 해서든 태자를 말리리라 결의에 찬 몸짓이었다.

“영화대에 간다!”

저 멀리 앞서 가던 윤제가 뒤를 돌아보며 와락 외쳤다. 태감들을 자빠트리고 가버리는 태자를 영문도 모른 채 바삐 따르던 금당대의 태감과 소환, 여관들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며 이전보다 훨씬 분주한 걸음이 이어졌다.

“전하.”

태자를 따르는 이중 제일 나이가 많은 등섭이 태자의 곁에 재빨리 붙으며 말을 건넸다. 사삭사삭, 곁으로 붙어 서는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신경을 갉작였다.

“너는 또 뭐냐.”

윤제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영화대의 주인께서 지금 계시지 않으시옵니다.”

등섭이 무례를 잊고 태자의 옷자락을 조심조심 붙들며 아뢰었다. 임기응변으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말을 하고 보니 제법 괜찮은 말 같았다.

“안다.”

윤제가 선선히 답했다.

“허면…….”

등섭이 붙든 태자의 옷깃을 당기며 금당대로 돌아갈 것을 권하려 했다. 윤제가 옷 끝에 조심스레 닿아 있는 손을 탁, 떨치며 몸을 돌렸다.

“기다리지.”

그리고 다시 성큼성큼 걸었다.

“전하!”

영화대로 향하는 윤제의 뒤에서 가련한 외침들이 이어졌다. 태자는 걷고 있고, 궁인들은 뛰다시피 하는데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전하, 가시면 안 되옵니다!”

“부디 쉬소서!”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옵니다!”

윤제는 흡사 저주 같은 악담에 험악한 웃음을 흘렸다.

“헛소리.”

오후에서 저녁으로 향하는 하늘이 청명했다.

“전하!”

“그러다 정말 쓰러지시옵니다!”

“안색이 창백하십니다!”

투명한 푸른빛에서 따듯한 주황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 아래에서 태감들의 애절한 저주가 쨍하니 울렸다.

영화대의 고즈넉함 위로 부드러운 예가 겹겹이 덧씌워졌다. 고요함 위로 번지는 침착한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들으며 윤제는 전각의 주인이 돌아온 것을 알아챘다. 밖에서 울리는 속삭임이 문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그대로 기척이 끊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궁인이 내뱉는 희미한 소곤거림에 걱정과 염려가 가득 담겨 있었다.

“모두 물러가 보아라.”

소년 태가 가신 단정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렸다.

“하오나.”

“괜찮아.”

웃음 서린 목소리에 제법 사내 태가 났다. 태자비 전하 드시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전각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소리 없이 열리는 문과 걱정으로 비틀거리는 궁인의 목소리가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서재 안 서탁 앞에 앉아 서책을 보는 윤제의 시선은 펼친 책장에 머물러 있었다.

“태자 형님은 문맹이셨습니까.”

윤제는 머리 위로 내리는 버릇없는 말에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하마터면 누구시냐 말할 뻔했다. 영화대 서재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건 영화대의 주인뿐이었다.

“너.”

입술 사이로 단속하지 못한 말이 새어 나갔다.

“글을 읽을 줄 모르십니까.”

버릇없는 말을 예의 바르게 하는 걸 보아 눈앞에 선 이는 하후용화가 맞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목구비는 어릴 때 그대로였다. 그저 못 본 넉 달 사이 훌쩍 자라서 낯선 이 같았다.

책을 접어 내린 윤제가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용아가 윗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도망치려는 손목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지며 앞으로 잡아당겼다. 가슴팍 어림에서 겨우 아른거리던 소년이 어느새 자라 턱 근처에 닿을 만큼이 되었다.

“너, 엄청 컸다.”

윤제가 시선을 내려 용아를 보며 말했다. 용아가 넉 달간 부지런히 자랐음에도 아직 윤제와는 한 뼘 이상 차이가 났다. 한참 차이가 날 때 윤제가 허리를 숙여야 시선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놓으십시오.”

용아가 손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미안하다.”

용아의 손목을 놓으며 윤제가 사죄의 말을 건넸다. 난데없는 사과에 잠시 침묵한 용아는 남자의 사죄가 3년 전에 하지 못했던 걸 하는 것임을 깨닫고 눈썹 끝을 살풋 구겼다.

“사과 한번 빠르십니다.”

윤제는 귓가로 흐르는 말을 들으며 낯선 얼굴에 적응해 갔다. 말하는 걸 보니 기묘한 분위기의 사내가 자신이 아는 이가 틀림없었다.

“승명원에는 왜 오지 않았느냐.”

윤제는 여러 차례 서편을 통해 용아에게 만날 것을 청했다. 태자비에게 자유로이 승명원을 오갈 수 있도록 허락한 것도 그러한 일환이었다.

“곧 갈 겁니다.”

용아가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딴 사람 같다.”

저녁볕을 받는 얼굴을 향해 윤제가 무심히 말했다. 남자의 느닷없는 말에 용아가 눈을 구겼다. 순간적으로 피어오른 찡그림이 어린 날 보여 준 구김과 똑같았다. 기이한 감상을 느끼게 하는 풍경에 윤제가 소리 없이 웃었다. 남자의 웃음에 용아가 괜스레 시비를 걸 듯 말했다.

“사과는 그게 끝입니까.”

“미안하다.”

윤제가 웃음을 지우고 다시 사죄의 말을 건넸다.

“말로만 미안하면 답니까.”

낯선 얼굴이 소년처럼 투덜댔다.

“청명절에 금은 10관씩 보내는 횡양군을 따라 금은과 청옥백옥을 10관씩 보냈는데 열어 보지도 않고 창고로 보냈다기에, 다음 청명절에 홍옥과 진주와 비단을 보냈는데 역시 본 척도 않고 창고로 보냈다며. 올해 청명절에 금사와 은사, 해당옥을 보냈는데 역시 쳐다도 안 봤다며. 공식적으로 나설 수 없어도 편히 다니라고 때마다 출입을 허하는 서편을 보내도 답신도 없었지. 3년간 사죄의 편지를 보냈는데 3년 만에 온 답장은 너한테 서신하지 말라는 것이고. 뭐, 필요한 것 없느냐.”

“밤에 책 볼 때 불 안 켤 수 있게 화주옥을 10궤쯤 주시렵니까.”

화주옥은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특별한 옥이었다. 그 특별함 때문에 화주옥은 극상품의 장신구에만 쓰였고, 항상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특별하기도 하지만 수량 또한 적어 더욱 귀하게 취급되었다. 오직 황주산과 황주 강역 일부에서만 채취돼 한해 발굴양이 심할 땐 한 궤도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부르는 게 값이라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주마.”

윤제가 선선히 말했다.

“…….”

제아무리 사치하다고 하나 화주옥을 밤에 불빛을 대신해 쓸 배포 좋은 인물은 없었다. 세상 제일 졸부도 하지 못할 짓이었다. 헌데 남자는 진심인지 밖을 향해 명을 내리려 했다.

“게 있느냐.”

“뭘 하시는 겁니까.”

용아가 윤제를 다급히 말렸다.

“화주옥 필요하다며.”

있으면 좋긴 했다.

“됐습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재물이라면 아쉽지 않게 있습니다.”

“그런 짓을 왜 못 하는데.”

“사과를 하랬더니 왜 졸부 행세십니까.”

윤제는 그걸 생각 못해서 못하는 거지 그런 짓을 할 사람은 많다고 나지막하게 웅얼거렸다. 뒤이어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용아는 질색하며 툴툴댔다. 사과를 하라고 타박하는 용아의 손을 윤제가 단단히 쥐었다.

“용공자.”

“뭐…….”

용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처럼 멈추었다. 윤제가 용아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단단히 쥐고 있던 용아의 손을 당겨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용아의 시선 한참 아래에서 얼굴을 올린 남자가 사죄의 말을 건넸다.

“미안하다.”

그것은 제북의 예법이었다.

“뭘, 뭘 하시는 겁니까!”

윤제의 이마에 손이 닿는 순간 용아가 기겁하며 손을 빼냈다. 윤제가 손쉽게 용아의 손을 도로 가져와 제 얼굴에 가져다 댔다.

“사죄한다.”

용아가 다시 기겁했다.

“무슨, 무슨 뜻인 줄 알고 하는 겁니까?”

“무슨 뜻인데.”

용아가 격렬한 몸짓으로 손을 빼내었다.

“일어나세요. 어서요. 다신 하지 마십시오.”

온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용아가 뒷걸음치며 윤제의 얼굴에 닿았던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무슨 뜻인데.”

달음박질이라도 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용아에게 윤제가 다시금 은근히 물었다.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짓을 하십니까. 다신 하지 마십시오.”

“모르니까 묻잖아. 무슨 뜻인데 그래?”

윤제가 피하려는 용아의 곁을 따라붙으며 속닥거렸다.

“모르면 됐습니다. 다신 하지 마세요.”

용아는 기를 쓰며 피하려 했다.

“무슨 뜻이냐니까.”

남자의 집요한 물음에 용아가 눈썹을 잔뜩 구겼다. 구겨진 눈썹이 어린 날의 구겨진 모양과 똑같아서 윤제는 또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관심과 애정과 보살핌을 갈구하는 몸짓입니다! 이제 와 부끄러워해도 늦었습니다.”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애쓰던 용아가 남자의 픽 웃는 얼굴에 울컥해 소리를 내뱉었다. 부끄러워해 보았자 늦었다고 외치는 얼굴이 부끄러운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부끄러워해야 해?”

윤제가 뻔뻔스레 말했다.

“됐습니다.”

용아가 세상 제일 무식자를 본 듯한 얼굴로 말했다.

“너도 할머님께 자주 했잖느냐. 친모후께서 하시는 것도 어렴풋하지만 기억한다. 나도 혈통으로 따지면 제북에 더 가깝지.”

“저는 어렸으니까요. 연소자가 어른께 애정을 청하는 게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건 대개 내원에 드는 이들만이 하는 겁니다. 후가주께 아껴 주십사 애정과 보살핌과 관심을 온몸으로 갈구하는 거죠. 외원에 들 수 있는 이가 내원의 주인에게 그걸, 하는 건 ……사랑을 갈구하는 겁니다.”

용아가 소름이 돋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랑을 소리 내어 말할 땐 온몸이 오그라든다는 듯 몸서리까지 쳤다. 말을 하면서 괴로움이 증폭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왜. 너하고 나는 부부 사이인데. 내외간 사이가 좋으면 좋은 거 아닌가.”

못 본 사이 남자는 능글맞은 소릴 더 잘하게 된 듯했다.

“그러십니까.”

“응. 그러니 나한테 애정을 내려 줘라.”

“미쳤습니까.”

용아가 마치 보란 듯이 노골적으로 윤제를 피해 뒷걸음쳤다. 남자를 보는 낯설고 기이한 얼굴에 어린 날의 표정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 낯설면서도 반갑고 그리웠고, 친근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아 마주하면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가 보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윤제의 때늦은 안부 인사에 용아는 황궁의 예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남자의 곁에서 한참이나 먼 곳에서 서 있던 낯선 인상의 청년이 손닿지 않을 거리까지만 다가서며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저기. 그거 한참 늦은 거 아니냐.”

용아의 예에 윤제가 건성으로 답례하며 시비를 걸 듯 대꾸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너, 성격은 그대로구나.”

“국경에 가셨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사옵니다. 조모를 기리는 동안 예에 어긋났었던 것을 너그러이 살펴 주소서, 전하. 강녕하신 모습을 뵈니 광영이옵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도 잘하고, 그만 일어나라.”

“전하의 너르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용아는 끝까지 예의 반듯하게 법도를 지키고 몸을 일으켰다. 윤제는 자신의 말을 몽땅 듣지 못하는 척 제 할 말만 하는 낯선 얼굴을 불퉁한 얼굴로 보다가 예를 끝내고 무성의한 태도로 몸을 일으키는 용아를 보고 피식, 웃음을 퍼트리다 이내 키득키득 소리를 흘렸다.

미쳤습니까.

용아의 낯선 얼굴이 그리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차마 태자를 상대로 그런 불온한 말을 두 번 할 수 없는지 빙 두른 말만 건넸다.

“오랜 기간 국경에 계시느라 곤하지 않으십니까.”

“나를 걱정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아. 금당대 태감들 말이 내가 곧 쓰러질 것처럼 허약해 보여 염려된다 하더라. 네가 보기에도 그러냐.”

“아뇨.”

남자의 어느 곳도 허약함과 친하지 않았다.

“아파 보이는 데도 없는데 곤하냐고 묻는 건 뭐냐. 그만 썩 꺼지란 뜻이냐.”

용아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

“너무 솔직한 것도 여전하시고.”

“송구합니다.”

윤제의 말에 용아가 매끈하게 대꾸했다. 그가 없는 사이 순식간에 커 버린 용아를 보는 윤제도 어리둥절하겠지만, 용아 역시 태자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 어리둥절했다.

다시 마주할 때 한참이나 어색할 줄 알았는데 막상 마주하자 어제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익숙했다.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친근했고,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솟아올랐다. 용아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공포에 질리게 한 남자였다. 또한 용아가 소년일 적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와 멈출 수 없을 때에 유일하게 타박하며 도닥여 준 것도 남자였다.

“앞으로 나하고 다시 말을 주고받아 주는 거냐.”

윤제가 어려운 말을 어렵지 않게 내뱉었다.

“전하께서 제게 말을 걸어 주시면요.”

“네가 나에게 말 걸어 줘도 되잖아.”

남자의 말은 기묘한 데가 있었다. 한 번도 고백 따위 받아 본 적 없지만, 마치 고백을 받는 것 같아서 용아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잠겼다.

“할 말 있으면 하겠습니다.”

“지난 3년간 서신에 구차하게 써서 건넨 글의 내용 그대로 그때 내가 한 짓이 잘못되었다는 걸 안다. 용서를 바라지만 용서가 불가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약속한 대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다.”

용아는 말없이 약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복아는 종종 보았느냐.”

“가끔요.”

용아가 미약하게 끄덕이며 답했다.

“함월전에 드는 것을 마치면 함께 말 타러 가자.”

“…….”

윤제의 청에 용아가 다시 말없이 끄덕였다.

“내가 함월전에 드는 걸 허락해 주면 좋겠다.”

남자의 이어지는 부탁에 용아가 시선을 올렸다. 낯선 얼굴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데, 기묘한 얼굴 위로 기억 속에 남은 표정이 떠오르면 말할 수 없이 친근한 이를 마주한 듯했다.

“내일 함월전에 가시겠습니까.”

“영화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이만 가 보마.”

윤제가 기꺼운 얼굴로 답하며 물러섰다.

“태자 전하, 살펴 가시옵소서.”

낯선 이가 익숙한 몸짓으로 예를 올리며 윤제를 배웅했다. 윤제는 말할 수 없는 기묘함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본 후에야 영화대를 나섰다.

따듯한 겨울밤이 차분히 다가오고 있었다.

함월전 전전 깊은 곳에 마련된 공간은 시작점부터 어둑했다. 검박한 입구를 무릎걸음으로 들어가면 천장이 야트막한 긴 방이 나타났다. 긴 방은 세 사람이 나란히 붙어 앉으면 여유가 없도록 좁았다.

작은 방의 소박한 첫 인상과 다르게, 입구를 제외한 세 벽면에 덧대어진 석조 장식대의 칸칸마다 호화로운 초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새벽 일찍 함월전에 든 용아의 하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초들의 불을 살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촛불들을 돌보고 정오까지 그곳에서 예를 올렸다. 한낮에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저녁이 될 때까지 예를 올리고, 초들을 면밀히 살피고서야 방을 나섰다.

용아와 같이 사흘째 함월전에 든 윤제가 적막 속에서 목을 울렸다.

“왜 그러십니까.”

“말해도 돼?”

남자의 말에 고개를 낮춘 채 눈을 감고 있던 용아가 시선을 올렸다.

“하십시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사흘간의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은 용아가 약속한 바를 올곧게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린 날 3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리워합니다.”

윤제의 물음에 용아가 흔들림 없이 답했다. 3년을 한결같이 그리워한 얼굴이 윤제를 돌아봤다.

“이곳에서 그리움은 좀 나아졌느냐.”

“아니오.”

“그래서 계속 그리워해?”

윤제가 무뚝뚝하게 재차 물었다.

“보고 싶어 합니다.”

진솔한 목소리가 좁은 공간을 채웠다. 그리움과 간절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던 윤제가 손을 뻗어 용아의 머리를 쓸었다. 예전에, 하염없이 눈물이 나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처럼.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도 이상하지 않은 얼굴을 위로하듯 무방비한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위로에 당황해 굳은 용아를 향해 윤제가 말했다.

“편지는 쓰지 않고?”

가련한 소년을 다독이는 듯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건 너무 슬프니까요.”

용아가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내내 답신이 없더라도 보아 주는 이가 있는 서신을 쓰는 게 훨씬 위로가 되긴 하지.”

남자의 말에 용아는 입술 끝만 움칫했다. 짧은 침묵 후에 용아가 말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3년인가.”

“예. 곧 3년이 다 되어 갑니다. 더는 미련 부리지 않을 겁니다. 이제는 그때처럼 울지도 않습니다. 여전히 그립고, 보고 싶지만. 가끔은 감당할 수 없도록 불쑥 슬퍼질 때도 있지만. 3년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는데 다시 돌아와 주지 않는 걸 보면 정말 가셨나 봅니다. 저를 두고요, 내가 보고 싶지도 않은가 봐요. 꿈에도 한번 나와 주지 않으십니다.”

용아의 투정 같은 말에 윤제가 미소했다.

“그런 거냐.”

남자가 알 수 없는 물음을 던지며 용아의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용아는 머리칼을 어지럽히는 커다란 손을 피해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며 툴툴댔다.

“하지 마세요.”

“그래.”

윤제는 그러 마 답하면서도 머리를 쓰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 말라고요.”

“요즘은 울지는 않고?”

“안 웁니다.”

“울어도 괜찮은데.”

윤제가 우는 건 아닌가 하는 기색으로 용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떠들었다. 울긴 누가 우냐고 투덜대며 다가오는 남자에게 용아가 팔꿈치를 휘두르려 했고, 윤제가 날렵하게 움직이는 팔꿈치를 부드럽게 잡아채며 버둥거리는 용아를 끌어안다시피 하며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하지 마십시오.”

용아가 저를 끌어안다시피 한 남자를 다급히 밀쳐 내며 말했다.

“뭘 그리 내외해.”

윤제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밀어내려는 용아를 향해 장난스레 투덜거렸다.

“내외는 누가 내외를 한다고…… 그런 거 아닙니다. 함, 함월전에 들 날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정천궁에 문안을 드리러 가는 것을 시작할까 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용아는 허둥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말을 돌렸다.

“좋은 생각이나, 네가 힘들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요즘 제북에서 태자비를 정식으로 홍문에 들게 하여야 한다고 아침저녁으로 상소를 밀어 넣고 있다. 네가 곧 18살이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고 제북의 인사들이 어지간히 성화를 부려야지.”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정천궁에 문안을 드리는 것은 내 여쭙고 영화대로 사람을 보내마.”

“송구합니다.”

“행궁에서 곧 연회가 있다. 부황께서 내게 주관을 맡기실 듯한데 그때면 네가 함월전에 드는 것을 마칠 즈음이다. 참석해 줄 테냐.”

윤제의 제의는 공적이며 동시에 사적인 것이었다.

“참석하겠습니다.”

용아는 어렵지 않게 수락하였다.

“준비해두지. 밖이 어두워지고 있다. 데려다주마. 나가자.”

윤제는 좁은 공간에 앉아 바깥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용아는 남자의 확신에 의문이 담긴 웃음을 건네며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자, 어둠이 깔린 밤이 펼쳐져 있었다. 용아가 저도 모르게 남자를 돌아보았고, 윤제가 거만한 웃음을 여유롭게 흘렸다.

어둠이 내린 함월전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함월전 권역의 끝에 다다랐을 때 용아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전하.”

“응?”

“전하께서도 조모의 빛나는 이였지요.”

용아의 말에 윤제가 기억을 더듬어 갔다.

“아주 어릴 적에.”

눈썹을 더 깊이 찡그릴수록 더 오래전의 기억을 하는 것인지 남자는 아주 짙게 인상을 쓴 후에야 답했다.

“저와 잠시 가실 데가 있습니다.”

그것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잠시만, 겨울이라 금세 더 어두워질 텐데…… 용아?”

용아는 모 상궁이 품에 곱게 안고 있는 도자기병을 낚아채듯 가져가며 다른 손으로는 윤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잠시 멈추려는 기색이었던 윤제가 어딘지 다급해 보이는 용아의 얼굴을 보고는 잡아끄는 대로 따랐다. 남자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아 당긴 용아는 왔던 길을 되짚어 올랐다.

“전하……?”

“비전하……!”

등우와 모장이 각자의 주인을 불렀다.

“잠깐만.”

윤제는 용아가 잡아끄는 대로 당겨져 가며 말을 건넸다.

“어서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낯선 얼굴이 윤제를 붙잡고 함월전을 가로질렀다. 거대한 함월전 권역을 내달린 용아는 곧 나무 그림자가 깊게 내려진 다락원의 입구로 남자를 끌었다.

“저기, 용공자. 어딜 가는 거냐.”

“빨리 좀 오세요.”

“가고 있다. 천천히 가면 안 되는 거냐. 헌데 여기 들어가도 되는 거냐. 용아, 내 말 듣고 있느냐.”

“얼른 오십시오. 무서워서 그래요?”

용아의 냉엄한 타박에 윤제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밤길을 무서워하기에 윤제에게는 앞이 너무도 훤히 잘 보였다. 그가 걱정하는 건 오히려 돌아올 때 불현듯 자신을 꺼려하게 돼 용아가 홀로 나오려 하는 상황이었다. 어둠이 무섭진 않지만, 너무 깊은 곳으로 향하는 듯해 걱정이 되기도 했다.

“대체 어딜 가냐니까.”

“화우전에 갑니다.”

“내일 가면 되지. 밤이 너무 깊었으니…….”

“귀신 나올까 봐서요? 그런 거 없어요. 빨리 오십시오. 얼른 못 걷겠습니까.”

“그런데 왜 아무도 안 따라오는 거냐.”

용아에게 끌려가며 윤제가 의아함을 표했다.

“여기는 저 외엔 아무도 못 들어옵니다.”

화우전의 초입이 서서히 드러났다.

“너 말곤 들어오지 못하는 이런 으슥한 데에 나는 왜 데리고 오는 것이냐.”

“알아볼 게 있다니까요.”

“네가 이러면 남들은 오해한다.”

윤제가 놀리듯 말했다.

“무슨 오해요?”

용아가 무해한 표정으로 사내를 돌아보며 물었다. 정말로 조금도 의심되는 바가 없는 얼굴이었다. 윤제는 그런 용아를 보며 그래, 그래, 무언가 자조하듯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석등의 불 하나조차 없는 겨울밤의 화우전은 황량하기까지 했다. 용아는 제집처럼 화우전을 편안히 내달려 남자를 기이한 보좌 앞으로 데려갔다. 한두 번 와 본 게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서 뭘 하려고…… 아, 차가……!”

용아는 붙잡고 있던 윤제의 손을 보좌의 위에 올리고 주병을 열어 술을 쏟아부었다. 보좌의 표면이 주는 서늘함에 멈칫한 윤제는 곧이어 손등 위로 쏟아지는 술에 차가움을 호소하려다 손이 닿은 보좌의 표면에 흐릿한 빛이 도는 걸 보고, 일순 모든 걸 멈췄다.

당황해 정지하기는 용아도 마찬가지였다. 윤제가 손을 떼어 내려 하자, 남자의 손을 눌러 떼어 내지 못하게 한 용아가 낯선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거짓말.”

“……뭐?”

“아니야.”

용아가 치기어린 소년처럼 부정의 말을 쏟아 냈다.

“아니라니?”

윤제는 손등을 적신 후 소매 끝을 타고 팔꿈치까지 축축하게 물들여 가는 독한 술에 불만을 토하려다가 멈칫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 다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거짓말.”

용아의 얼굴은 거의 울 것처럼 흐려졌다.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냐.”

용아가 고집 센 아이처럼 도리질을 했다.

“아니야.”

순식간에 훌쩍 커버려 뒷등이 정결하고 단정한 사내가 된 이가 그대로 돌아서서 내달렸다.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늘씬한 등을 향해 윤제가 소리쳤다.

“용아!”

“싫어. 아니야. 거짓말.”

용아가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며 달려갔다.

그것은 분명 폭언이었다.

헌데 이유를 알 수 없으니 화를 내기가 애매했다. 윤제는 절망에 빠진 소년처럼, 울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가, 뺨을 괴롭히는 것처럼 짓눌렀다가, 턱을 쥐어뜯을 것처럼 굴다가 정신없이 내달리는 용아를 따라 달리며 소리쳤다.

“용아!”

이곳을 얼마나 자주 오갔는지 용아는 앞도 안 보고 내달리는데 움직임에 불필요한 곳이라고 없었다. 순식간에 화우전을 나와, 다락원 숲길을 내달려, 함월전 가운데에 멈춰 선 용아를 윤제가 붙잡는 데에 성공했다. 어깨가 쉴 새 없이 들썩이도록 달린 용아가 윤제에게 붙잡히자마자 다시 폭언을 건넸다.

“말도 안 돼.”

예의 바른 말로 욕을 하는 중인 게 분명했다.

“뭐가 말이 안 돼?”

윤제는 이유 모를 분노를 느꼈으나 후회할 짓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감정을 내리누르고 최대한 부드럽게 물었다.

“진짜 싫다.”

용아가 다시 폭언을 했다. 그리고 도망쳤다. 윤제가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야!”

함월전에서 태자와 태자비를 기다리던 궁인들은 혼비백산 내달려 가는 용아를 안타깝고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영화대의 궁인들은 태자에게 예를 차리는 것도 잊고 또 무슨 변고를 당한 듯한 어린 주인을 바삐 따랐다. 표홀히 달려가는 태자비를 뒤따르며 못난 분노를 표출하는 태자를 힐끗 불손하고 원망스레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금당대 궁인들은 삽시간에 풀이 죽었다.

“저거 뭐야?!”

그와 무관하게 윤제는 다시 분노를 내질렀다.

“…….”

“…….”

금당대의 태감들이 우울한 얼굴로 화를 토하는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을 깨달은 윤제가 궁인들이 시립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왜.”

“……아니옵니다.”

등우가 공손히 태자의 시선을 외면하며 아뢰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윤제가 울컥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선언 같은 말에 세 태감 사이에 은밀한 시선이 오갔다. 조금 미심쩍어 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쉬는 듯하던 얼굴들이 뒤이어 들려오는 명에 뻣뻣하게 굳어 들었다.

“영화대로 간다.”

이번에는 말릴 틈이 없었다.

“……전, 전하…….”

태자가 온 사방으로 서슬 퍼런 위엄을 떨치며 영화대로 향했다.

영화대에 가장 일찍 도착한 용아가 뒤따른 모두를 물러가게 한 탓에 방 안은 조용했다. 고요함 속에 떠돌던 염려가 담긴 술렁임이 그친 것은 순간이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이는 것 같은 소리가 겁에 질린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에서 묻어났다. 침상 기둥에 기대어 앉아 모든 것을 듣고 있던 용아는 벌컥, 예고 없이 열리는 문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너, 인마.”

태자께서 체통도 없이 태자비를 불렀다.

“오셨습니까.”

용아는 기력이 다한 듯한 음성으로 답했다. 기둥을 부둥켜안고 있는 모양새가 의문의 욕설을 들어먹은 게 윤제가 아니라 용아인 것만 같았다.

“이제 예법도 다 무시하는 거냐.”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침상 기둥에 꼭 붙어 앉은 채로 용아가 버릇없이 예를 올렸다. 윤제는 뒷골목 왈패처럼 뒷목을 요란하게 주물렀다.

“너.”

“예.”

용아가 흐느적흐느적 답했다. 축 늘어진 모양이 아무래도 기묘해 화를 내기가 어려웠다. 과거 황태후의 축언을 받고 축언 팔기에 열을 올리다 실패했을 적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몰골이었다.

“아까 그건 뭐냐.”

진지하게 분노하자면 끝도 없었다.

“무엇요.”

침상 기둥에 기댄 자그마한 머리가 조금 웃기고 많이 가련했다. 윤제는 축 늘어진 낯설 얼굴 옆으로 가 털퍽 앉으며 강하게 항의했다.

“사람 면전에 대놓고 싫다니.”

내내 무심히 앉아 있던 용아가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싫으면 안 됩니까.”

윤제를 빤히 쳐다보던 용아가 선전포고를 하듯 물었다.

“너가 나 싫어하는 건 온 황궁이 다 아는 일이지.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비전하.”

윤제가 옹골찬 선전포고에 지지 않고 투덜거리며 옆에 앉은 기묘한 인상의 낯선 얼굴 슥 밀쳤다. 기분 나쁘라고 한 행동이기는 했다. 그러나 때릴 셈은 아니었다. 익히 아는 용아라면 슬쩍 밀친다고 나동그라질 인사가 아닌데, 낯선 얼굴이 된 용아는 남자의 손이 미는 대로 흐물흐물 밀려 갔다. 순식간에 방금 전 기력 없을 때로 돌아간 모양새였다. 흐늘흐늘 무방비하게 기우는 머리가 침상 기둥에 부딪치기 전에 화들짝 놀란 큰 손이 기둥과 용아의 머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뭡니까.”

뺨에 닿는 남자의 손을 치우며 용아가 옆으로 비켜 앉았다. 기둥과 얼굴 사이에 손을 넣느라 팔을 뻗은 남자의 품에 안긴 듯한 모양이 된 탓에 어색함이 마구 솟구쳤다.

“모 상궁이 제대로 끼니도 챙겨 주지 않느냐.”

불쌍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 용아의 뺨에 닿았다. 태자의 겁박에 잔뜩 움츠러든 채 도망쳤을 모 상궁이 떠올라 용아는 딴소리를 늘어놨다.

“사람들 겁 좀 주지 마십시오. 성격이…….”

“성격으로 누구에게 질 사람이냐, 네가.”

윤제가 재빨리 대꾸했다. 부정할 만한 지적이 아니었기에, 또 부정할 생각도 없었기에 용아는 잠시 딴청을 부렸다. 곳곳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놓인 호화로운 도기 안에 그보다 더 호화로운 화주옥이 듬뿍 담겨 있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화주옥처럼 윤제의 손이 보좌에 닿았을 때 빛이 번져 나왔다.

“가십시오.”

“아까 그건 무어냐니까.”

제북은 진정 거짓을 모르는 곳이었다.

“뭐긴요.”

제북의 오래된 칭찬 중 ‘빛나는 아이’, ‘빛나는 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줄 알았던 그것은 진실로 사실이었다. 흔히 칭찬으로 하는 말이니만큼 실제로는 드문 사례였다. 드문 사례가 이 공간 안에 둘이나 있었다.

“대답하기 싫으냐.”

“확인해 보는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나 보다?”

남자의 물음에 용아는 웃는 듯 마는 듯했다.

“아니었지요.”

순순히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 면전에 대고 싫다고 연발했느냐.”

“예.”

“무엄한 것.”

흐늘흐늘한 용아의 앞으로 가 서며 윤제가 엄히 말했다.

“송구합니다. 나만 빛나는 줄 알았더니…….”

용아가 꿍얼꿍얼 불손하게 웅얼댔다.

“뭐라는 거냐.”

윤제의 차분한 물음에 버릇없는 도리질이 돌아왔다. 부정의 몸짓을 퍼트리는 모양이 기억을 자극했다.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윤제는 잠자코 태자비의 무엄함을 지켜봐 주었다. 무어라 부드럽게 을러대 불쾌함을 풀까 윤제가 고민하고 있을 때 그리운 부름이 울렸다.

“태자 형님.”

“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을 믿으십니까.”

용아가 의미심장하면서도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모르겠다.”

과거에는 운명이란 게 있다 여겼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게 있듯,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인연과 굴레들이 있다 여겼다. 한때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른 방향이 만약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운명이란 것을 거꾸러뜨리고 스스로 원하는 바를 운명으로 만들겠다 호언하기도 했다.

“태자 형님이라면 운명 같은 거 없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요.”

용아의 말이 조금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네게 주어진 운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

“걱정 마라. 내 장담컨대 만약 네게 운명이 있고 그 운명이란 게 네 기준에 차지 않는 거라면 염려할 필요가 없다. 너라면 그 마음에 차지 않는 운명의 멱살을 쥐고 머리부터 메다꽂은 후에 네 갈 길 갈 것이다.”

윤제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기둥에 윗몸을 기댄 채 있는 용아에게 자신의 뜻을 굳건히 전하고자, 윤제는 기둥을 한 팔로 짚고 시무룩하게 있는 귓가에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떠들었다.

“지금 욕하시는 겁니까.”

용아가 허리를 바로 세우며 따져 물었다.

“칭찬이다.”

윤제가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뻔뻔한 그 얼굴을 뚱하니 올려보던 용아가 침상으로 올라가 이부자락을 거칠게 당겼다.

“그만 가십시오.”

“뭐하는 거냐.”

“소제는 잘 겁니다.”

용아가 불손한 태도로 태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아직 초저녁이다. 너는 그러고 보니 태자비가 되어서 손님이 왔는데 차도 안 권하고, 식사도 안 권하고 웃전 인심이 뭐 이리 야박하냐.”

금침을 몸에 둘둘 말아 고치 모양이 된 용아의 곁에 앉은 윤제가 부지런히 투덜거렸다. 침상 끝에 앉은 남자가 웅크린 용아를 감싸고 있는 꾸깃꾸깃하게 접힌 이불을 반듯하게 펴주며 너는 저녁도 안 먹냐? 덧붙여 말했다. 귀 바로 옆에서 울리는 툴툴거림과 이불을 펴는 손길에 용아가 기겁하며 이부자락을 움켜쥐었다.

“뭐. 뭐하는 겁니까.”

“이불 펴 주잖아.”

“그걸 전하가 왜 하시는데요?”

용아와 윤제가 얇은 비단보를 사이에 두고 미묘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용아가 남자의 손에서 금침을 빼앗으려 했고, 남자는 용아의 위에 이불을 반듯하게 덮어 주려 했다.

전각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모장이 들었다.

“전하. 비전하. 모장이옵니다. ……송, 송구하옵니다! ……하…… 하시던 것 부디 마저 하소서.”

예를 올리고 시선을 올리던 상궁의 눈이 주먹만큼 커다래졌다. 그녀의 손에는 차구가 담긴 다반을 들려 있었다. 소리도 없이 들었던 것처럼 주춤주춤 물러난 여인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 버렸다.

“…….”

“…….”

전각 안에 감도는 싸한 바람이 없다면 모장이 들었다 나간 것이 착각이 아닐까 싶을 만큼 찰나에 괴이한 상황이 지나갔다.

“오해받겠다, 너.”

윤제가 당황해 멍하니 있는 용아의 손에서 이불을 가볍게 빼앗아 예쁘게 각을 맞춰 덮어 주며 속닥거렸다.

“오해는 무슨 오해요. 나가요!”

용아가 몸을 거칠게 일으켜 윤제를 쫓아내려 했다. 금침에 감싸인 몸은 행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윤제가 침상 바깥 부분의 금침은 무릎으로, 침상 안쪽 금침은 팔을 뻗어 손으로 누르니 뜻하는 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금침 안에 갇혀 바르작대는 용아를 여유롭게 굽어 살피며 윤제가 떠들었다.

“이 형님은 말이다, 용아. 형제가 갖고 싶었다. 헌데 아우도 알다시피 황가는 손이 워낙에 귀하지 않느냐. 어려 철이 없을 때 부황께 나는 어찌 형님도 없고 아우도 없냐 부황께서 어떻게 해결을 해 주십사, 부황이 곤란해하는 것도 모른 채 떼를 쓰고는 했다. 그때 부황께서 말씀하시길 제북에 나의 반려가 있다 하셨지. 그를 형제로 여겨, 형처럼, 아우처럼 귀하게 아껴 주라 하셨다. 이 형님이 다소 늦었다만 이제라도 귀하게 아껴 주마. 좋지? 오늘은 이불 덮어 주고, 내일은 자장가를 불러 주련?”

“가라고요.”

“달포 후부터는 말 타러 가고, 호반에 놀러도 가고, 국경성 시찰도 시켜 주고, 야시장에 밤놀이도 가고 좋겠지?”

“가시라고요.”

“수줍어하긴.”

용아의 이마를 손끝으로 통 치며 몸을 일으킨 남자가 말도 안 되는 괴이쩍은 소리를 했다. 용아는 벌떡 일어나려다가 언제든 자신보다 빠르게 금침을 짓누를 준비가 된 남자의 움직임을 보고 얌전히 아우 행세를 하기로 했다.

“살펴 가십시오.”

“또 오마.”

윤제의 인사에 용아는 언젠가처럼 입술만 움직여 소리 없이 답했다.

오지 마.

마치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문을 나서던 윤제가 뒤를 돌아보며 가벼운 바람 소리를 퍼트렸다. 뭔가 알 수 없는 밤이었다.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에 가느다란 비가 싸락눈이 되어 내렸다. 끝 부분에 촘촘히 금실로 수가 놓인 붉은 비단 위를 걷는 용아와 윤제의 머리 위로 흐릿한 눈발이 날렸다. 호화로운 붉은 비단이 깔린 계단을 오르는 두 사람을 소환이 안내했다. 태감의 가볍고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알리는 말에 거대한 전각 안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태자를 들라 하신다!”

“태자비를 들라 하신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두텁게 내려둔 호화로운 비단이 밀쳐지며 안으로 드는 통로가 드러났다. 안을 향해 알리는 말과 귀하신 객을 맞이하는 예가 연이어졌다.

태자와 태자비가 방 안에 들고 비단이 내려지고 문이 닫혔다.

“부황을 뵙습니다.”

“부황을 뵙습니다.”

거의 3년 만에 올리는 문안이었다.

“왔느냐.”

황제는 너그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맞아 주었다.

“모후를 뵙습니다.”

“모후를 뵙습니다.”

두 사람의 인사에 황후가 우아하게 미소했다. 사치하지만 기려한 미가 돋보이게 치장한 여인이 움직일 때마다 얕게 방울 소리가 울렸다. 몸을 꾸민 장신구 중 방울 달린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절제하여 꾸밀 줄 아는 여인은 자신을 과하지 않게 돋보이도록 하는 법을 잘 알았다.

“어서 오세요. 그간 잘들 지내었소? 이따금 보기는 하였지만 이리 보니 더욱 좋구려. 태자비, 잘 지내었느냐.”

“모후께서 기뻐하시니 소자도 기쁘옵니다.”

“송구하옵니다, 모후. 제가 미욱하여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옵니다. 모후께서도 강녕하셨습니까.”

윤제와 용아의 말에 황제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퍼트렸다.

“그만들 어서 일어나라.”

“황공하옵니다, 부황.”

“황공하옵니다.”

황제의 명에 두 사람이 다시 예를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먼저 몸을 일으킨 윤제가 옆을 돌아보며 일어나는 용아를 살폈다. 그걸 본 황제가 깊이 웃음 지었다.

“이리 보니 좋구나. 아직 3년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만 정천궁에 문안을 오게 되었으니 오늘부터 공식적으로 태자비로서 예와 의무를 다하도록 하라. 칠일에 한 번 일주대 동백전에서 친인이 있는 제관부 일족을 대면하는 것을 시작하여도 좋다.”

“예, 부황.”

황제의 명에 표정을 달리 한 것은 황후와 태자였다.

“제관부 일족 중에 하후가가 있습니까.”

윤제의 물음에 황제와 황후가 각각 다른 웃음으로 답했다. 황제의 웃음은 장난기가 가득하였고, 황후의 웃음은 예의 발랐다.

“하후가는 제북 밖으로 잘 나오지 않지. 허나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후가의 사람이 있건 없건 그는 중요치 않다. 장군부를 다스리는 건 홍문의 힘 아래에서 태어난 제북 출신이 맡아 주어야 한다. 잘하여 주리라 믿는다, 아가.”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황제의 말에 황후의 얼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허나…….”

제관부 일족은 태자의 힘으로도 대하기가 어려웠다. 제관부는 따지자면 가교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었다. 장군부가 갖는 위치의 중요함과 황도에서 오래 머물며 정세를 잘 아는, 두 가지를 능란하게 이용해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는 제관부를 다루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았다.

“새아가가 잘하겠다 하지 않니.”

윤제의 염려 섞인 반발을 황제가 가볍게 떨쳤다.

“…….”

황제의 단호한 태도에 윤제가 옆을 슬쩍 돌아봤다. 지난 3년을 검박한 방 안에서, 호화로운 초에 둘러싸여 무릎 꿇고 예만 올리던 이었다. 비열함과 저열함이 한데 어우러진 현실 따위는 모르는 순진한 뺨이 윤제의 시선에 움칫했다. 윤제를 슬쩍 돌아본 용아가 짧은 순간 부딪친 시선을 거두며 몸을 낮추었다.

“부황.”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이 숙이는 예에 윤제도 조용히 몸을 낮추었다.

“듣고 있다.”

황제의 넉넉한 대답에 용아가 얼굴을 숙인 채 말을 일었다.

“소자 청이 있습니다.”

윤제는 상체를 깊이 숙이고 있는 용아를 의아하게 돌아봤다. 성격상 최선을 다하겠다 답을 건넨 일을 무를 인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청이 있다고 하니 기묘한 일이었다.

“무엇이냐.”

용아는 여전히 웅크린 채로 답했다.

“제북 장군부에서 저의 홍문례를 이유로 부황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을 들었나이다.”

“어지럽힐 정도는 아니나 그런 일이 있긴 하구나.”

“제가 황도로 열두 살에 혼례를 치르러 온 것은 태어날 때 존귀함을 인정받아 온 것이옵니다. 허니 홍문 후가주의 등극대전은 무의미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를 제가 제북 장군부와 제관부 대신에게 관철하여 부황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해 줄 수 있겠느냐?”

“대신 제게 선대 후가주이시며, 조모이시며, 돌아가신 황태후마마의 함월전을 다스릴 권한을 하사하여 주십시오.”

용아의 말에 전각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

“……!”

함께 예를 올리고 있던 윤제가 웅크리고 있는 늘씬한 등을 휙 소리가 나도록 돌아봤다. 함월전 권역 전체는 황궁 안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거대했다. 황태후께서 거하실 때도 종친과 조정관료, 귀족 사이에서 흉흉한 소리가 나왔었는데 고작 열일곱의 태자비가 그곳을 다스린다면 어떤 소리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

황제는 말이 없었다. 슬그머니 몸을 더 낮춘 윤제가 입술을 떼지 않고 옆을 향해 소곤거렸다.

“용용이, 미쳤느냐.”

용아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태자비의 무엄한 청에 태자비 본인이나 황제와 태자보다 더 긴장한 이가 있었다. 황후는 말도 안 되는 청을 한 태자비를 내려다보다가 불안한 시선으로 옆을 돌아봤다.

“허락하마.”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황공하옵니다, 부황. 부황의 은혜에 모자람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용아가 재빨리 사은했다.

“부황……!”

황제의 허락을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여선 안 될 일이다. 엄청난 황은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치기 어린아이의 청을 수락한 황제를 다급히 찾던 윤제는 벼락에라도 맞은 양 깜짝 놀라는 황후를 보고 드러내었던 감정을 감췄다. 동시에 황후의 입장으로도 생각하였다.

이는 무도한 짓이다.

황후를 놔두고 혼례 치른 지 몇 해 되지도 않은 태자비가 제북의 혈통을 이었다는 이유로 황궁에서 가장 큰 권역을 차지하는 것은 황실의 체면에도 좋지 않았다.

“윤아, 짐에게 화내는 것이냐.”

황제가 아들을 놀란 얼굴로 내려다보며 연약한 체 하였다.

“부황.”

지금 장난을 칠 때가 아니다.

“왜 그러세요, 전하.”

내내 윤제의 존재와 속삭임을 깡그리 무시하던 용아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떠들었다.

“몰라서 묻는 거냐.”

앞에 황제와 황후를 둔 것도 잊고 윤제가 으르렁댔다.

“모르겠습니다.”

용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모른 체하는 모양새가 과거 윤제를 분노로 치떨게 하던 어린 날과 아주 똑같았다.

“함월전을 고작 열일곱 살 태자비가 다스리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

윤제가 화를 억누르며 좋게 말하려 애썼으나 끝에는 험악한 말투가 되었다.

“저 거기서 안 살 겁니다.”

“당연하지!”

용아가 차분히 대답했다. 낯선 얼굴의 태도는 지극히 선량하고 담백하였지만 앙큼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윤제가 곧장 맞받아쳤다. 화를 내는 것 같은 사내를 향해 용아가 찬찬히 말했다.

“저한테도 명분이 있어야지요.”

“명분?”

“전하는 제가 홍문례를 치르러 제북에 가기를 바라십니까.”

“네가 거길 왜 가냐.”

“홍문 아래에서 태어난 이들은 열여덟이 되기에 앞서 홍문례를 치러야 합니다. 황도 종친이나 귀족들로 치면 급계례를 치르는 것이지요. 성인식을 치르지 않으면 사람으로 인정해 주지 않지 않습니까. 제북 장군부의 홍문례도 그렇습니다. 홍문례를 대신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황실에서 태자비에게 함월전 정도는 내려 주셔야 저도 홍문례를 거부하고 함월전을 잇는 것으로 후가주의 예를 마쳤다 말할 것 아닙니까. 뭐 알지도 못하면서.”

용아가 끝말은 들리지 않게 속닥거려 내뱉으며 황제와 황후에게 예를 올렸다.

“…….”

윤제도 덩달아 예를 올렸다.

“부황, 크나큰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옵니다. 이만 물러가옵니다.”

“물러가옵니다.”

용아가 반듯하게 예를 올리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윤제 역시 예를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돌아서는 시선에 괜찮은 듯 미소를 건네지만 우울하게 내려앉은 게 훤한 황후의 얼굴이 보였으나 그는 더 입대지 않았다. 모후의 섭섭함은 명을 내린 부황이 달래줄 터였다.

윤제가 신경 써야 할 것은 호사가들에게 짓씹힐 이었다. 명분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나, 겉으로 보이는 것에 불만이 있으면 명분 따위 잊고 씹어 댈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용아는 자신과 그의 주위에 있는 이들을 은근한 압박으로 물러나게 하고, 제 바로 옆으로 따라붙는 남자의 무력시위에 걷던 걸음을 늦췄다.

“왜 따라오십니까.”

“나도 이쪽으로 가.”

윤제는 자신의 행동이 고약하고 나쁜 버릇이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만큼 편한 게 없었다. 지난 3년간 자신이 다스리지 못한 흐릿한 분노에도 화들짝 놀라며 물러나는 이들만 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보는 얼굴을 보니 기이한 그리움이 솟는 듯했다.

“그러십니까.”

용아가 주위에 물러나 있는 궁인들을 쓱 훑어보고 반성 좀 하라는 듯한 시선을 태자에게 불손히 건네고 제 갈 길을 걸었다.

“네 명분이 중요하다지만 적잖이 괴롭힘을 당하게 될 거다.”

윤제가 용아의 곁에 바싹 붙어 걸으며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궁인들 모두 저만치 멀리 떨어진 탓에 둘의 대화가 새어 나갈 일은 없었다.

“어려서 그런 게냐. 씩씩해서 좋겠다.”

“단지 명분 때문에 함월전을 청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

“저는 욕심이 많습니다.”

용아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황궁에서 욕심 없는 게 칭찬은 아니지. 하지만 과욕은 몸을 상하게 한다. 너와 서로 예를 다하는 관계를 이어 가고 싶으나 이번에는 도와주지 않을 거다.”

“필요 없습니다.”

윤제의 조언에 용아가 픽 웃었다. 예의라고는 없는 웃음이었다.

“엄청난 권력가가 되시겠습니다, 비전하.”

“기대하십시오.”

“어련하시겠어요.”

윤제가 시비를 걸듯 말했고, 용아가 지지 않고 답했다.

“제가 조모의 유품 하나는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설령 그 유품이 황궁 안에서 가장 큰 권역을 가지는 전각이라 할지라도요. 명분은 덤 정도로 생각하지요. 살펴 가십시오, 전하. 제발, 성격 좀 고치시고요. 그러다 주위에 친한 사람 하나도 안 남습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돌아서는 용아의 얼굴에 모호한 웃음이 가득했다. 쓸쓸한 것 같기도 하고, 재미있어 하는 같기도 한 웃음이 시선을 어지럽혔다. 명분도 유품도 말하는 이가 모두 정당히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유품을 두 개 가지지 않으려 하는 게 다행인가.”

영화대의 닫힌 문을 보며 윤제가 혼잣말을 투덜거렸다. 벌써부터 시끄러운 말을 떠들어 댈 입들에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은데 왜인지 키득키득 웃음이 흘렀다.

정전 안에 격한 고함이 오고 갔다.

“폐하!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황궁 안에 폐하가 아닌 태자비가 가장 넓은 권역을 다스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설령 함월전이 내궁의 권한이라 하더라도 그는 태자비가 아닌 국모이신 황후께서 다스리시는 것이 옳음입니다!”

중경의 대귀족 출신인 대신의 말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는 말이외다! 폐하, 황후께서는 제북 출신이 아니니 선 후가주이신 태후에 이어 함월전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태후께서 생전 함월전을 다스리신 데에는 필경 연유가 있을 터! 특히, 함월전 권역 중 한 곳인 화우전은 유구한 세월 동안 제북의 후족에게 하사된 땅이오니 태자비께서 함월전을 다스림이 옳습니다!”

“황실 웃어른들이 있는데 태자비가 제북 출신 이유만으로 함월전을 가진다는 게 말이 된단 거요?! 폐하, 제북의 후족이 특별하다 하나 황가와 가례를 맺은 이상 태자비께서는 황실의 예법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불효를 청한 태자비께서는 그릇된 욕심을 내려 두어야 하며, 폐하와 국모이신 황후께서는 황실의 어른 된 도리로 따끔히 훈계를 내려 주셔야 옳은 줄로 아옵니다.”

“황가는 오랫동안 함월전을 제북 후족께 선물하였소. 당금 황실에 제북 후족이 태자비 외에 누가 또 계시오? 예법에 따라 잘 처리되었는데 왜 그러시오들. 그대들의 발언은 괜히 태자비께 시비를 거시는 것 아니오?”

황제 앞으로 나선 중경 귀족과 제관부 대신이 옥신각신했다.

“태자비께 시비라니요! 이는 효와 예에 관한 이 사람의 간곡한 당부요. 폐하, 결단을 내려 주소서!”

“폐하께서 명을 내리신 것을 어째 다시 결단을 내리라 하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제북의 모두는 태자비께서 함월전을 하사 받음이 실로 훌륭한 일이다 믿사옵니다.”

“태자비께서 황실 웃어른보다 넓은 권역을 다스림은 말도 안 되는 일이래도! 제북은 효와 예도 모르는가?! 그래서 태자비께서 이리 방자한 청을 올려 폐하를 곤란케 하신 것 아니오!?”

대귀족 출신 대신이 제관부 쪽에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제북이 효와 예가 없다니?! 황실이야말로 제북의 예를 무시하는 중 아니오?! 태자비께서 다음 달이면 벌써 열여덟이신데 가례 올리기 전에는 홍문을 치를 때 보내 주겠다 하여 놓고, 제북에서 후가주의 등극대전 홍문례를 청하면 왜 들은 척도 않는 것이오! 황실과 조정이야말로 효와 예도 모르는 것 아니겠소! 이참에 결단을 내립시다. 폐하, 태자비께서 부득이 일찍 가례를 치르느라 어려서 황도로 오시어 아직 홍문에 들지 못하셨으니, 오늘에야말로 태자비께서 홍문례를 치르도록 친정에 돌아갈 길일을 택하여 주소서!”

“황실 내원에 든 이가 황궁, 황도 바깥에 가는 것이 말이나 되오?!”

“조정백관들은 그대들이 한 약속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날의 약조를 잊었다 한다면 다들 기억력이 형편없는 자들이니 몽땅 관복을 벗어야 할 것이오!”

“그대가 황제인가?! 백관의 관복을 벗으라 말라 하게?! 그런 날강도 같은 말이 어디 있나?! 황제의 권능을 탐하는 것은 목숨으로 갚아야 할 대죄로다!”

“폐하. 소신은 폐하의 높으신 황은을 잊지 않았사옵니다. 황실과 조정이 국혼에 앞서 한 약조가 지켜져야 함을 상기시켜드리고자 아뢴 것이옵니다. 부디, 감안하여 주소서.”

황실과 혼례를 마친 태자비가 홍문례를 위해서라 하나 장군부가 있는 제북으로 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짐은 명을 내렸다.”

까마득히 높은 상석에서 황제의 말이 내렸다.

황제는 제북, 후족, 장군부, 홍문의 예를 진실로 존중하신다 하셨다. 그리고 그만큼 황실과 황가의 법도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셨다. 당사자인 태자비가 아뢰길, 태자비는 태어날 때부터 존귀함을 인정받아 황도로 와 혼례를 치르었다 하였다. 그러니 홍문을 위하여 제북으로 가는 것은 불필요한 일.

태자비 자신은 홍문에 들지 않아도 정당한 제북의 후인이라 하였다. 허나 홍문의 아래에서 태어났으니 홍문례의 지엄함을 존중하니, 선대 후가주인 태후께서 다스리던 함월전을 이어받아 홍문의 예를 대신하고자 청하였다.

황제는 그것이 합당한 청이니 허락하였다.

황도 대귀족들은 태자비가 홍문으로 가지 않는 것은 합당하다 하였으나, 함월전을 이어 받는 것은 불가하다 했다.

제북 사신과 제관부 일족들은 태자비는 후족의 관례를 치르러 가야 하며, 함월전을 이어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주장했다.

정전 안에 기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북의 예는 존중하나, 짐은 묻고 싶구나. 지금의 태자비를 제북은 정당한 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인가? 지난 3년간 조모인 돌아가신 태후를 기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한 이가 누구인가. 혼례를 통하여 가족이 되었다 하나, 황실의 일원으로 제북 후족의 기품과 덕망을 보여 준 태자비의 존재만으로 그 아이는 이미 이번 대의 홍문 후가주가 아닌가. 제북의 예를 존중한다 하나, 황가 내원에 거하는 태자비가 국경 밖 홍문까지 가는 먼 여정을 황가가 어찌 허락할 수 있다고 그리 고집들을 부리시나. 태자비는 어려서부터 연약한 아이이니 홀로 보내는 건 염려되어 태자와 함께 보낸다는 건 한사코 아니 된다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가. 짐이 걱정되기도 하고, 온 종친도 염려하여 나름 방책을 내었거늘? 태자 내외 또한 두 사람이 함께 가는 것이라면 다시 한 번 숙고한다는데 그대들이 그는 절대 안 된다 하지 않았나. 어서, 대답해 보시게. 제북은 지금의 태자비를 정당한 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태자비께서는 정당한 후인이십니다.”

황제의 다그침에 제북 일족이 일제히 고했다.

“조정 대신들은 결정을 하여야 할 것이다. 제북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태자비가 홍문례를 치를 수 있도록 친정에 다녀올 수 있는 방책을 가지고 오거나, 태자비가 정당한 후가주로서 권한을 보일 수 있게 함월전을 이어 받는 것에 동의하도록 하라. 어찌할 텐가. 방도가 있으면 내어 보시게. 맹승상부터 말해 보겠는가.”

“태자비께서 이미 정당한 후인이신데, 홍문으로 가실 것이 무엇이며, 함월전을 이어 받아야만 권한이 있는 것은 무엇이옵니까.”

“승상은 오늘부로 승상부를 비우고 길바닥에서 사시오.”

황제가 냉엄한 명을 웃으며 내렸다.

“……폐, 폐하. 냉혹한 명을 부디 거두어 주소서.”

승상이 몸을 깊이 숙이며 청했다.

“그대를 짐이 이 나라 승상으로 인정하거늘 승상부에 살던 길바닥에 살던 무슨 상관이라고 그리 새파래지시오. 경의 얼굴이 보기 참혹하니 짐이 아주 못된 사람이 된 것 같구려. 여봐라. 당장 승상부로 가 가솔들을 다 쫓아내라.”

“폐하! 소, 소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지조를 지키시오. 고작 가솔들 길바닥에 나앉아 살게 하는 게 무슨 큰 망신이라고 벌벌 떠시나. 짐은 어린 태자비에게 너는 정당한 후인이니 그대로 되었다, 예도 필요 없고, 태자비의 정당함을 엿보일 것도 없지만 너면 충분하다, 말하여야 하는데. 짐과의 의를 지켜 고통을 함께 하도록 합시다. 다음은 누구신가. 한 사람씩 차례로 나와 방책을 말해 보시오. 무엇하는 것이냐. 아까는 잘도 떠들던 인사들이 어째 책임을 함께 하자니 말이 없어!? 약조를 지켜 홍문에 보낼 것도 아니고, 빈 전각 하나 내주는 것도 아니 되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던 인사들의 가택이라도 비웠다는 명분이라도 짐에게 주어야 할 게 아니냐! 어서 답하지 못할까?!”

황제의 분노에 대신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서며 죄를 청했다. 잠깐 사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황제께서 태자비께 함월전을 하사한 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었다 아뢰었다.

“…….”

윤제는 조정관료들의 빠른 발 빼기에 암담함을 느끼며 침음을 삼켰다.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은 백관들인데 곤란함을 절절히 느끼는 건 자신인 것이 억울하고 우스웠다. 어느 밤 지나가듯 홍문에 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둔 바가 있다 말한 얼굴이 떠올랐다.

괜찮을지도…….

조정백관과 제북 일족이 서로 이해득실을 위해 치고받으며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을 제시하는 걸 보면 일주대에 드는 일족을 대면하는 것도 문제없을 듯했다. 정례는 대신들이 다시 한 번 그들의 부족함과 무지함에 대한 죄를 청하고, 황제의 공명정대한 결단을 존애하는 것으로 끝났다.

“해원으로 가자.”

정전을 나온 윤제가 태감에게 명했다.

윤제가 해원의 전각 안으로 들자, 미리 소식을 듣고 이중 겹문 곁에서 기다리고 있던 양제가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예를 들었다.

“태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오셨습니까, 전하.”

“일어나라.”

양제는 안으로 따라드는 궁인들을 물리고 태자의 겉옷 시중을 직접 들었다. 윤제는 소매와 팔, 어깨에 와 닿는 손에 몸을 내주며 미소를 흘렸다.

“정례는 잘 마치셨습니까.”

호화로운 문양이 새겨진 곁벽에 정리한 포를 올리며 양제가 소곤소곤 말했다. 옆에서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윤제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럭저럭? 헌데 무엇하러 나와서 기다렸느냐. 시중까지 직접 들고, 너무 잘해 주니 좀 걱정될 정도다.”

윤제의 너스레에 양제가 웃음을 퍼트렸다.

“염려 놓으소서. 흑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옵니다.”

“흑심?”

“조만간 익선 행궁에서 새해를 맞아 신연회가 있지 않습니까. 이번 신연회는 소첩들도 가는 거지요? 소첩의 자리는 어디 입니까.”

양제가 다정한 음색으로 물었다.

“우측 하단 상석이다.”

양제의 손에 이끌려 상석에 앉은 윤제가 선선히 대답했다. 마치 질문해 주기를 기다린 것처럼 신속한 대꾸였다. 양제의 얼굴이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우측 하단…… 소훈과는 가까운 곳입니까?”

“둘이 나란히 앉게 될 거다.”

태자가 다시 막힘없는 답했다.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새어 들었다.

“안으로 들어도 될는지요.”

“들어오너라.”

윤제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다반을 든 궁인이 들었다. 양제가 차를 준비하려는 궁인의 손에서 다반을 통째로 건네받으며 흐트러졌던 얼굴에 웃음을 퍼트렸다.

“그만 나가 보거라.”

양제의 명에 궁인이 소리 없이 예를 올리고 물러갔다. 찻잔에 찻물을 붓는 양제를 향해 윤제가 말을 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네게 신연회에 관해 말하려 했다.”

“그러셨습니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셨어요?”

“나와 떨어져 있는데다, 동궁 밖이라 위험하지 않을까 해서. 언준을 붙여 줄까 한다. 금당대에서 몇 번 본 적 있을 것이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몇 안 되는 훌륭한 무관이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잘 지켜 줄 것이다.”

언준은 황궁 밖에서 태자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필하는 이었다. 그를 양제 곁에 둔다는 것은 윤제 본인이 곁에 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전하께서 저를 지켜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양제가 일부러 응석을 부리는 아이처럼 약하게 칭얼거렸다.

“나와 네가 앉을 곳 사이에 꽤 거리가 있어 내가 지켜 주러 가면 늦는다. 네게 내가 필요해지는 상황이라면 내가 곁에 있는 이들을 보살펴야 할 테니 여력이 없을 듯하다.”

“압니다.”

양제가 눈을 접어 웃으며 다 이해한다는 투로 말했다.

“내 옆에는 태자비가 앉을 것이다.”

윤제가 웃는 얼굴을 향해 담담히 말을 건넸다.

“……그게 맞는 것이지요.”

양제가 천천히 답했다.

“오늘은 이걸 말하러 왔다.”

양제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 입가로 가져가며 윤제가 말했다. 자신의 찻잔을 손안에서 느릿느릿 돌리던 양제가 아픔이 느껴지는 얼굴로 태자를 바라봤다.

“요즘 제게 무심하십니다.”

윤제가 찻잔을 내리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랬느냐.”

“예. 태자비께서 전하의 옆자리에 앉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아옵니다.”

슬픔에 잠긴 얼굴이 서러움을 퍼트렸다.

“너를 아프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

윤제의 말에 서러워하던 얼굴이 쓸쓸한 시선을 건넸다. 순한 인상의 미인이 건네는 시선에 윤제가 위로를 담아 찻잔을 만지작대는 손을 쓰다듬었다.

“서운해 마라.”

“섭섭합니다.”

태자는 해원을 가장 빈번히 드나들지만 예전 같지는 않았다. 지척에서 태자와 양제를 보필하는 이들조차 잘 모르는 듯하지만, 당사자인 양제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울지 마라.”

눈물을 떨구는 가련한 얼굴로 윤제가 손을 뻗었다.

“소첩이 정후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고, 전하를 뵙기도 전부터 알던 바입니다. 허나, 저의 정인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제게 전하의 사랑이 없으면 무엇이 있다고요. 전하의 옆자리가 될 수 없음을 알지만 이리도 차갑게 말씀하셨어야 합니까. 저는 더는 전하의 정인이 아닙니까. 그런 것입니까.”

“내가 알려 주는 게 다른 이가 알려 주는 것보다 낫지 않아? 법도에 따라 당연한 것, 그리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차갑고 서러운지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말하는 것이 옳았던 것인지 말해 보아라.”

태자의 말에 양제의 눈가를 적시던 눈물이 멎었다.

“…….”

잠시 완전히 사라졌던 눈물이 온 뺨을 뒤덮을 정도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서러움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윤제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안안.”

그녀의 말대로 태자는 더는 자신의 정인이 아니었다. 아닌 듯했다. 양제가 눈물로 젖은 얼굴을 잘게 내저었다.

“……너무, 너무하셔요. 전하께 소첩이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 서러워 내뱉는 작은 투정조차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차갑다고 느껴졌다면 미안하게 되었다.”

윤제가 찻잔을 비우고 일어서며 다정한 말을 무미하게 건넸다.

“……전하……?”

일어서는 그를 떨리는 목소리가 불렀다.

“내 전하고자 한 말을 했으니 이만 가 보마. 속상하더라도 너무 울지 말거라. 고운 얼굴이 다 가려진다. 나올 것 없다.”

제 할 말을 마친 태자가 밖으로 나섰다.

“전하…….”

급히 불러 봤지만 돌아보는 기색조차 없었다. 몸을 일으켜 나서려던 진안은 치장이 다 녹아들도록 울어 버린 것을 깨닫고 문 앞에서 머뭇거리기만 했다. 밖을 향해 약하게 다시 불러 보았으나 태자에게 예를 올리는 정연한 소리만 들려왔다.

“태자 전하, 살펴가소서.”

윤제가 떠남을 알리는 소리에 다급히 문을 열어 봤으나 엉망이 된 얼굴로 날아드는 궁인들의 시선을 깨닫고 다시 문을 닫고 안으로 향했다. 서러운 울음이 방 밖으로 새어 나는 것이 염려돼 입술 안의 살을 씹으며 소리를 삼켰지만 모두들 알 것이다.

진안은 뒤늦게 괜히 문을 열어 보았다, 울지 말걸, 투정을 부리지 말 것을, 후회했지만 떠난 이가 돌아오는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요즘 진안의 기분은 오락가락했다. 그제 오후에 차를 마시러 왔다가 차가운 말을 했던 태자는 어제 아침 일찍 다녀갔다. 새벽에 가까운 시각에 찾아온 태자는 갖가진 진귀한 것을 건네고 짧게 머물렀다가 돌아갔다.

‘운 것은 괜찮아졌느냐.’

정인의 다정한 말에 금세 서럽던 것이 풀렸다. 태자는 대개 너그럽고, 화가 났을 때조차 참을성이 좋지만, 결론을 내리면 후회 한 조각 내비침 없이 완전히 돌아선다고 했다. 몇 년이 넘는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지만 그녀에게 화낸 적 없었고, 자신의 잘못을 알아도 모르는 척해 주는 게 대부분이었다.

진안에게 태자는 그를 그저 정인으로 대해 주면 족하다 했다. 황족, 태자라는 위세를 앞세워 그녀를 핍박하거나 억압하려는 시늉조차 한 적 없었다. 그래도 그분은 태자이고, 황족이시고, 높으신 분이니 정인으로만 대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주위에서 잔소리를 쏟고는 했지만 진안은 개의치 않았다.

아침녘에 온 태자의 행동은 정인의 그것이었다. 물론 태자를 불쾌하게 할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이른 아침에 찾아준 태자에게 진안은 좋은 얼굴과 예에 거스르지 않을 태도를 유지했다.

조례가 끝나고 함께 식사를 하자 온 그를 보고 지난 오후에 있었던 일은 별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저녁이 되어 침궁에 들기에 앞서 다녀가러 왔다는 정인에게 모호한 섭섭함을 느꼈지만 그녀는 티 내지 않으려 했다. 함께 차를 들며 소소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평소와 같았고, 태자는 여전히 그녀의 정인이었다. 이야기 끝에 함월전을 하사받게 된 태자비가 언급되었다. 만용을 부리려던 것은 아니었다.

‘전하의 옆자리는 태자비이시죠. 흥. 아옵니다.’

정인된 입장으로 그만한 농도 못 할까 싶었다. 장난인 척 저도 모르게 비꼬는 소리가 나갔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했느냐. 투기하는 것이야? 네가 아무리 투기해도 태자비는 될 수 없다. 정후도 결코 될 수 없지. 다 안다 이해한다 해 놓고 딴소리를 하려는 거냐.’

윤제가 웃는 얼굴로 정곡을 찌르며 냉엄한 현실을 말했다. 이전이라면 그녀를 달래 주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당신이 태자 된 입장이라 정인을 아프게 하게 될 것이라고 미안해하던 사내가 웃는 얼굴로 애달프게 떠들었던 말을 되짚어 줬다. 태자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 같지 않은 건 명백했다.

그림 같은 미소를 그리며 현실을 알려 주는 사내는 권력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정인이며, 또한 권좌의 주인이 될 이었다.

정인이 바뀌어서는 곤란했다.

진안은 태자의 태도가 바뀐 연유를 찾고 있지만 짚이는 것이 없었다, 혹은 의심되는 게 너무도 많았다.

아까도 그렇다.

그녀와 저녁을 든 태자는 맹소훈과 차를 들기로 했다며 가 버렸다. 후궁에 여자가 그녀 하나가 아니니 당연한 것인데,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 어려웠다. 이전이라면 이러지 않았다. 태자의 여유 시간 거의 대부분은 본디 진안의 차지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진안은 겨울 찬바람의 맹위도 잊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밖을 거닐었다. 맹소훈과 차를 들고 산책을 하거나, 금당대로 돌아갈 태자의 행로에 맞춘 산택이었다. 마주칠 만한 곳을 걸었고,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곳에서 마주했다. 태자의 옆에는 맹소훈이 아닌 선시각 궁인이 따르고 있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진안이 서 있는 곳은 금당대로 향하는 길목이나 다름없었다. 윤제는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겠으나 굳이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금당대로 향하고자 자신 곁으로 다가오는 태자를 향해 진안이 예를 올렸다.

선시각.

양제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홍빛과 보랏빛이 적절히 뒤섞인 하늘하늘한 3중 겹옷에, 가느다란 흰 띠는 선시각 궁녀의 복식이었다.

선시각 궁녀들은 황족의 색사를 맡았다.

처음에는 어린 나이에 등극해 황후를 들이기 전, 황제의 시침을 돕고자 만들어진 집단은 이제는 황제와 태자, 드물게 황손의 시침까지 도왔다. 황가의 특성상 정비를 일찍 들이며 유명무실해졌으나, 황제나 태자가 아닌 왕공 및 왕공 자제의 밤 시중을 들고 왕부로 시집가거나, 귀족이나 장군의 처첩으로 보내지기도 해 기능을 바꾸어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선시각의 주인은 태자였다.

황제께서 태자에게 선시각을 물려준 후에도 선시각은 본래 기능보다 바뀐 기능으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 태자가 종종 선시각 궁녀를 들여 밤을 보내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최근처럼 뒷말이 무성하도록 빈번하게 들인 적은 없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 또한 그랬다. 고작 선시각 궁녀를 태자가 직접 데리고 간다는 말 역시 이전에는 들어 본 적 없었다.

“산책하느냐.”

“예, 전하.”

“바람이 차니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산책 잘 하거라.”

양제의 예에 윤제가 선선히 아는 체를 하며 짧게 말을 건넸다. 선시각의 주인인 태자가 선시각 궁녀를 밤에 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진안의 기분은 곤두박질쳤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끝이 샐쭉해진 눈으로 태자를 따르는 선시각 궁녀를 쏘아보았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태자를 따르는 궁녀의 어깨가 좁아 들었다.

“마마, 바람이 차옵니다.”

태자의 무심한 행동에 눈치를 보며 상궁이 말을 건넸다.

“알아보도록 해라.”

상궁의 손에 이끌려 발길을 돌리며 양제가 나직이 명했다. 금당대를 나온 선시각 궁녀의 가느다란 하얀 띠가 짙은 남색 비단 띠로 바뀌는지 알아보라는 명이었다. 남색 비단을 둘렀다면, 시침을 들었다는 뜻이었다.

“예, 마마.”

“그이를 찾는 건 어떻게 돼 가느냐.”

“백방으로 수소문 중이옵니다.”

“수고해 다오.”

“바람이 찹니다. 어서 돌아가시지요.”

겨울바람이 사나운 소리를 퍼트리며 호화로운 비단 옷을 할퀴고 지나는 저녁이었다.

황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익선 행궁은 품이 넓고 깊이가 얕은 구조로 유명했다. 대개 궁은 행궁이든 별궁이든 가로에 비해 세로가 배는 긴데, 익선 행궁은 그와 반대였다.

행궁의 뒤는 여러 개의 인공 동산이 둘러싸고 있고, 인위적으로 만든 동산 너머는 산새가 험하기로 이름 높은 쟁룡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익선 행궁 앞에는 은어가 많이 살아 은호라고 불리는 호수가 펼쳐져 있다. 이러한 입지 조건 때문에 익선 행궁의 풍광이 아름답다 하나, 행궁의 터로 알맞지 않았다.

궁터로 삼기에 산과 호수 사이의 땅이 너무 좁았다. 그럼에도 익선 행궁이 역대 황제와 황족의 애정을 받은 것은 황도에서 크게 멀지 않은 위치와 궁터에 맞추어 지어 올린 전각의 독특함 덕분이었다.

첫 전각은 별장처럼 단출하게 지어졌고, 은호를 좋아한 역대 황제들이 별장 좌우로 전각을 늘려가면서 덩치를 키워감에 따라 행궁으로 승격되었다.

때문에 행궁 중앙 심처에서 멀수록, 가장자리에 있을수록 최근에 지어진 전각이었다.

가로로 길게 배치된 행궁의 특성상 입구를 하나로 제한하지 않고, 연회의 방비를 맡은 호위대는 황족 및 왕공 대신과 제북관 일족은 동로(東路)로, 조정백관 및 귀족은 서로(西路)를 통해 입궁하게 했다.

행궁에 든 이들은 호위대에 알린 후 얼마든지 행궁 바깥에서 즐길 수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동로와 서로를 통해 입궁 절차를 마친 후에야 가능했다.

익선 행궁의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했기에 정군왕 역시 가솔들을 데리고 바깥나들이를 갈 계획이었다. 외출에 앞서 황가 종실의 도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태자 전하, 강녕하셨습니까.”

연회가 열릴 곳을 살펴보고 있는 윤제의 등 뒤에서 유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오셨습니까, 숙부.”

둘은 간소한 예만 주고받았다.

“잠시 외출하기 전에 조카님 얼굴을 보러 왔습니다. 헌데, 대단하고 유명하신 전하의 내자께서는 보이시질 않습니다. 올해도 참석하지 않으시는 게요?”

정군왕은 일가를 이룬 황족 중 유일하게 황도에 머무는 종친이다. 황제가 정군왕과 무척 사이가 좋기도 하고, 정군왕의 능력이 뛰어나기도 하고, 정군왕처럼 황실과 황가에 직언을 할 수 있는 이가 없기에 가까이 두고 솔직한 의견을 청하고 있었다.

“태자비도 함께 왔습니다.”

“아아, 제가 예전에 스치듯 뵌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리 탐욕스러운 분 같지 않았거늘. 장성하신 후에 성정이 바뀌신 모양이오.”

“숙부.”

황제와 정군왕의 사이가 막역하듯, 윤제와 정군왕의 사이 또한 돈독하고 말할 수 없이 가까웠다. 정무로 바쁜 부황을 대신해 정군왕이 부친 역할을 해 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도 사이가 좋기에 정군왕은 얄궂은 얼굴로 밉살스러운 말을 톡톡 쏘아댔고, 윤제는 황족이며 왕부를 다스리는 정군왕의 등을 팔로 안으며 친근함을 표할 수 있었다.

“갑자기 어찌 이리 친한 척이십니까. 사람들이 보잖소.”

정군왕이 새침을 떠는 처자처럼 몸을 틀며 투덜댔다. 그의 뒤에는 부친이 말을 마치고 오기를 기다리는 가솔들이 있었다.

“태자비에 대한 것은 마무리된 것 아닙니까. 숙모님, 오셨습니까. 너희는 와 놓고 이 오라버니한테 인사도 하지 않고 가려 하였어?”

윤제는 몰이를 하듯 정군왕을 왕부 식구들 곁으로 데려가며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태자를 본 정군왕부 식구들이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 못 본 사이 더 헌앙해지셨습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부친께서 오라버니 바쁘시다고 얼른 약올려 주고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라버니, 태자비 전하는 어디 계셔요? 양제마마와 소훈마마도 올해는 오신다 하였잖아요.”

정군왕비와 두 현주가 태자에게 알은체를 했다.

“숙부께서 이 조카를 약올려 주시려고 하셨군요.”

정군왕을 안은 팔에 힘을 꽉 주며 윤제가 웃음을 퍼트렸다.

“왜, 왜 이러시나, 조카님. 노구를 상대로 힘자랑을 하려 드시나. 아이들 듣기 험악하여 골려 준다 하였지. 이 숙부 말을 허투루 듣지 마세요. 이 사람이 틀린 소리를 하였나? 태자비께서 시집온 것 외에 하신 게 무어가 있어 그 큰 함월전을 물려받으신다 말이야.”

“숙부님.”

“태후께서는 폐하의 어머니시니 격 자체가 다르지. 사람이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라오. 태자비께서 이번에 꽤나 공들여 황실과 조정, 제북을 비등비등하게 고민에 빠지게 해 어물쩍 넘어간 게지.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이후에 이번의 일이 화로 돌아올 테니 방비 잘 하셔야 할 게요.”

정군왕은 손쉽게 윤제의 팔을 떨쳤다. 부인과 딸 앞에서 위엄을 세우듯 그가 유려하게 말했다. 틀린 것은 없는 말이었다. 윤제가 입을 열려 할 때 뒤에서 부드러운 말이 울렸다.

“정군왕 전하의 고견 새겨듣겠습니다.”

윤제와 군왕부 가솔들이 소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여기는 웬일이냐.”

윤제의 말에 용아가 웃음을 퍼트렸다.

“누가 저더러 욕심 많다 욕하기에 와 봤습니다. 정군왕 전하, 강녕하셨습니까. 정군왕비를 뵙습니다.”

“……태자비 전하.”

정군왕은 키가 헌칠하게 자란 용아를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바라봤다. 웬 낯선 사내가 보여 누군가 했는데, 태자가 대하는 태도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보이는 이목구비를 보니 태자비였다. 단정하고 정결한 얼굴이 사윗감 욕심이 들 정도이나 황실이 있는 한 절대로 사위 삼을 수 없는 존재였다.

“태자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정군왕비와 두 소녀가 앞으로 나서며 예를 올렸다.

“일어나세요.”

용아는 세 사람을 얼른 일으켰다.

“송구합니다, 비전하. 어서 감사 인사드리렴.”

정군왕비가 몸을 일으키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곁에 있는 두 딸에게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를 올리고 얼굴을 든 두 소녀는 용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비전하.”

조잘조잘 감사의 말을 건넨 소녀들의 노골적인 시선에 소녀들의 부친인 정군왕이 다 난감할 정도였다. 정군왕의 곤란함은 두 딸보다 군왕비가 용아를 믿음이 담긴 선망의 눈길을 보낼 때 최정점을 찍었다. 정작 세 여자의 뜨거운 신뢰의 눈길을 받고 있는 태자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 사람이 차를 대접해 드려도 될까요.”

정군왕 일가는 행궁 밖에 나들이를 갈 계획이었다.

“태자비께 차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따르겠습니다.”

“비전하의 처소로 가나요?”

“비전하 차 마시고, 저희가 머무는 돈화전 구경 시켜드릴게요. 같이 가요.”

정군왕은 세 여자의 배신에 깊은 타격을 받았다. 뻣뻣하게 굳어드는 쓸쓸한 가장의 등을 조카인 윤제가 찬찬히 두드려 주었다.

“제가 세 분을 모셔 가도 되겠습니까.”

용아가 멍해 보이는 정군왕을 향해 예의상 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왕야.”

정군왕비가 정군왕의 대답을 대신하듯 부군을 향해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이따 봬요.”

“안녕.”

정군왕부의 귀여운 두 현주가 부친을 향해 손을 흔들고 태자비의 곁에 붙어 팔랑거리며 걸어갔다.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정군왕이 쓸쓸한 얼굴로 조카를 돌아봤다.

“가내에서 혹시 따돌림을 당하십니까, 숙부.”

“……따, 따돌림이라니요!”

“너무 상심 마세요. 숙부께서 익히 아시는 그겁니다. 제북, 그거. 아시지요? 조모께서 함월전 출입을 제한하기 전에도 자주 당하셨을 거 같은데…….”

윤제의 위로에 정군왕이 침울하니 말했다.

“그때보다 더한 것 같아.”

“그야 태자비가 더 어리고 거기다 제법 얼굴이 괜찮기까지 하니까. 목소리도 훌륭하지. 쟤가 말도 엄청 잘 탑니다. 듣자 하니 하후가 후가주가 서면 내원 결집이 더 잘된답니다.”

“내가 어째서 이걸 떠올리지 못했을까…….”

“어쩌겠습니까. 결국 만나게 될 사이인 것을요.”

“대체 왜 그리 고향 가주를 선망하는 게지. 이유를 모르겠어. 아니, 태자비 전하 장성하신 걸 보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조카님 보기에도 과하지 않소? 저러다 친척 누이들한테 내자를 뺏기시겠소. 좀 분발해 보세요.”

정군왕이 죄 없는 윤제를 타박했다.

“생전 조모를 태자비도 저만큼 좋아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니까요. 그만 받아들이십시오. 그나저나 잘됐습니다. 행궁 밖에 나가시지 않을 거면 이 조카나 도와주십시오.”

윤제는 피식피식 웃으며 침울한 숙부를 다독이고 또 놀렸다. 할 일 없는 유능한 일꾼을 얻은 것은 덤이었다.

정군왕은 지난 이틀을 쉴 틈 없이 보냈다. 그는 자칭, 제북 후가주가 정식 알현을 시작하면 중경에서 제일 쓸쓸한 남자가 된다.

정군왕비의 고향은 제북으로, 후족 중 하나인 복양씨(氏)다. 복양씨와 하후가의 사이가 그리 돈독하지 않은 편이라 했다. 그러나 출신 가문과 무관하게 제북 출신으로 내원에 드는 이들은 제북에만 독특한 후가주란 존재 아래에 끈끈하게 결집한다.

“……꺄아! 비전하. 고양이에요!”

“비전하. 같이 보러 가요!”

부유한 행궁에 음식 구걸을 하러 온 고양이는 당연한 것이거늘. 정군왕의 두 딸이 꺅꺅 행복한 소리를 퍼트리며 태자비의 둘레를 빙글빙글 뛰어다녔다.

저 모습은 결집보다는 강력한 유대감에 더 가까웠다. 냉정히 말해, 태자비가 어린 소녀와 제북 땅에서 온 이들을 배려해 주어 함께 어울려 주는 것이기에 유대감보다는 태자비를 떠받드는 신실한 신도에 더 가까웠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호감을 보이는 딸네미들을 보며 정군왕은 후우, 숨을 내쉬었다. 딸들뿐 아니라 군왕비 역시 옆에 있기만 해도 행복하다는 얼굴이었다.

서럽고 서글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이 익선 행궁이라 쓸쓸함을 삼키는 것이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동지가 꽤 있었다.

황도 황족 외에도 황도 밖을 거점으로 삼고 있는 먼 방계 혈족들도 신년 연회를 위하여 익선궁을 찾았다. 중경에는 제북 출신을 비로 둔 이가 드물지만 먼 방계 중에는 장군부와 통혼하여 적지 않은 가문이 혈계를 공고히 하고는 했다.

성격 사나운 부친이 아닌 모계의 특별함을 담고 태어나 온 가문과 일족에게 특히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사랑받는 이들이 백련각 후원을 뛰놀고 있었다.

제 아비를 보면 손을 살살 흔들어 주기는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비에게 손을 흔들어 준 많은 소녀와 드문 소년은 태자비의 곁으로 선망과 신뢰로 눈을 빛내며 맴돌았다.

정군왕의 곁에는 삭주 순군왕부의 순양군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황족 형제답지 않게 서로 힘겨루기를 하기는커녕, 형님인 순양군이 일방적이다 싶도록 귀애하며 보살펴 온 순군왕부의 차남이 태자비 앞에서 귀를 붉히며 속닥대고 있었다.

순양군의 절친한 친우이자 원군왕부를 이을 원양군이 순군왕부 차남에게 첫눈에 반했다 외치며 고백하자, 순양군이 친구의 머리를 박살 낼 것처럼 주먹을 내질렀다는 것은 황족 안에서 아주 유명한 일화였다.

원양군이 몇 년이나 끙끙대며 애정을 접지 않고 수년째 정식 혼서를 넣기에 순군왕부에서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려 하자, 순양군이 부왕인 순군왕께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역아를 다른 놈에게 주어선 안 된다며 차라리 내가 데리고 살겠다 한 것 역시 아주 유명한 소문이었다.

순양군은 수줍음도 많지만 도도함도 그 못지않은 아우가 꽃 같은 웃음을 퍼트리며 태자비를 올려다보는 것이 도무지 이승의 것 같지 않았다. 아우를 태자비께 빼앗긴 것과는 달리, 태자비의 행궁 거처인 백련각 후원은 황족 사내에게 별천지요, 숨 막히도록 황홀한 공간이었다.

“인기 좋구나.”

황족 사내라면 지상의 낙원처럼 보일 곳에 들어선 윤제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부러우십니까.”

태자의 등장에 백련각 후원의 모두가 분분히 예를 올렸다. 여타 종실 자제들과 달리 태자는 황홀한 후원의 풍경에 그리 감동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여기가 꽃밭인가.”

윤제의 웃음 서린 말에 용아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미인을 꽃에 비유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분위기가 싸늘해지도록 정색하는 용아의 태도에 윤제는 입가에 어려 있던 웃음을 흩트리며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왜 화를 내느냐는 뜻의 우물거림을 띄엄띄엄 건넸다.

인간이란.

태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용아는 속으로 한탄했다. 윤제는 별 뜻 없이 한 말이겠으나 이곳이 꽃밭이라는 표현이 제북에서는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울컥했다.

“용아.”

조심스러운 부름에 싸한 시선만 보내는 용아를 향해 윤제가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

이 후원에 퍼져 있는 홍문의 혈통은 언제고 개화를 할 터였다. 그가 사내이건 여인이건 황족과 장군부의 혈통을 이은 정인과 짝을 맺어 후손을 볼 것이다.

개화.

용아는 예쁘지만 불쾌한 울림을 모른 척했다. 개화를 마치면 주기가 오게 돼 있었다. 대개 홍문례를 치른 후 개화가 시작되어 일찍 짝을 정해 혼인하여 주기 때 정인과 보내어 안정을 갖지만, 하후가 일족의 개화는 대대로 늦된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열일곱, 며칠 후에는 열여덟.

최대로 미뤄진다 해도 1년 후가 되면 개화의 징후가 나타날 터였다. 용아는 옆의 사내를 돌아보며 불편한 표정을 억눌렀다.

개화 후에 오는 주기가 주는 충격은 상상 이상이라고 했다. 열병에 빠져 이지를 잃고 본능만이 남게 된다고들 떠들었다. 개화를 늦추는 수차를 물처럼 마시고, 주기를 억누르는 도이환을 전각 하나 가득 채우도록 모아 두었지만 늘 불안함이 그의 등 뒤를 바싹 쫓았다. 용아가 열에 취해 넋을 놓고 본능만으로 달려들 존재는 이 땅에 단 하나뿐이었다.

“용아.”

“말씀을 삼가 주십시오, 전하.”

“그러 마. 들어가느냐?”

모장은 자신을 찾는 용아의 몸짓에 재빨리 다가섰다. 윤제의 물음에 용아는 후원에 모인 이들은 태자께서 알아서 해 주십사 하는 부탁의 표정을 건네며 답했다.

“갑자기 곤해서요.”

“내일이 연회이니 일찍 들어가 쉬어라.”

전각 안으로 드는 용아를 배웅한 윤제는 후원에서 뛰놀다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울먹울먹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친인들에게 웃는 얼굴로 축객령을 내렸다.

“비전하께서는…….”

“태자비는 내일 연회를 위하여 일찍 들어갔으니 너희도 이만 다들 물러가 보아라. 언제까지 예 있으려 했느냐. 어서 가 보아라.”

저 먼데서 있었으나 용아에게 신경을 세우고 있던 아이들은 태자의 조심성 없는 말 때문에 태자비가 가 버린 거라고 의심했지만 대놓고 묻지는 못했다. 권력과 신분을 앞세우는 친척 형님의 위세에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서며 태자비께 또 오겠다 말을 아뢰고 가는 게 고작이었다.

“칫.”

정군왕부 둘째 현주가 무엄하게도 태자께 투덜대는 소리를 건넸다. 윤제 또한 그리 투덜대고 싶었다.

‘쳇.’

방 안에 든 용아는 빈 다탁 앞에 앉아 있었다. 홀로 있는 용아를 향해 으음, 목 가다듬는 소리가 건네졌다. 차를 들일까 여쭈었다가 물러가란 명을 받은 모장이 문밖에서 눈치를 주는 목소리에 못 이겨 조심스레 고했다.

“비전하.”

“모셔라.”

괜히 실랑이를 할 필요 없지 싶었다.

“곤한 건 어떠냐.”

문이 열리고 키가 큰 사내가 걸어 들었다. 아직 눕지 않았어? 라고 덧붙이는 얼굴을 힐끗 올려본 용아가 다시 차를 들일까 묻고자 서 있는 모장을 향해 말했다.

“차는 되었다. 물러가라.”

“예.”

손님이 왔는데 차를 낼 필요 없다는 건 어서 가라는 뜻이었다. 전혀 반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모장은 지금 방문한 손님이 태자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시늉도 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얼른 물러났다.

“등우.”

“예있사옵니다.”

윤제는 쌀쌀맞은 주인과 주인 못지않은 상궁의 태도에 굴하지 않았다. 그가 등우를 부르자, 태감이 손 위에 미리 준비해 두고 있던 호화로운 목갑을 내밀었다. 모서리마다 목련 꽃을 피어올리고 있는 자그만 나무 궤를 집어 가며 윤제가 제 수족 같은 태감을 향해 말했다.

“나 차 마시고 싶다.”

“준비하겠나이다.”

등우가 살가운 음성으로 주인께 답을 올리고 물러갔다. 문밖에서 시립해 있던 모장과 영화대 궁인들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태자와 태자의 태감을 강제할 수 없기에 벙찐 표정만 짓고 말았다. 태자가 다탁 앞으로 가 앉을 즈음 방의 문이 닫혔다.

“용용아.”

“그리 부르지 마십시오.”

용아의 불안하던 심기는 많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좁아 든 눈썹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였다.

“화아. 형님이 너 주려고 가져왔다. 먹어 봐라. 네가 어울리지 않게 몸이 약하잖느냐.”

“그리도 부르지 마십시오.”

용아는 윤제가 슬그머니 밀어 건네는 나무갑 안을 보며 툴툴댔다. 세로로 길고 폭이 좁은 직사각 궤 안에 유지에 감싸인 권과(卷果)가 가득했다. 설탕을 발라 말린 색색의 과일 중 앵두 권과를 까먹으며 용아가 구겼던 눈썹을 조금씩 풀었다. 권과로 만들면 색이 퇴색되기 마련인데 태자가 가지고 온 권과들은 과육의 본래 색감을 거의 잃지 않은 어여쁜 모양새였다. 부드러우면서도 오독오독 씹히는 식감이 나무랄 데가 없었다.

“맛있느냐.”

“네.”

용아가 권과의 유지를 하나 더 열고 있을 때 문밖에서 등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락의 말에 안으로 들어온 등우는 태자에게는 백차를 태자비에게는 수차를 올리고 한 걸음 물러났다.

윤제가 물러가지 않는 등우를 바라봤다.

“전하. 맹승상과 승상부인이 밖에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여기, 백련각 밖에서?”

용아는 세 번째 권과를 씹으며 네 번째 권과의 유지를 펼쳤다. 귓가로 흐르는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태자가 제게 권과만 주려고 왔을 리 없었다.

이유야 뻔했다.

용아는 정오에 태감이 가져온 자리 배치를 보고 이런 일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황제께서 태자에게 일임한 신연회 상석에 태자와 태자비의 자리만 마련돼 있었다.

명목상 태자와 태자비의 자리를 나란히 하고, 태자의 우측 높이를 낮춘 곳에 후궁들의 자리를 두거나, 태자비의 좌측으로 두되 후궁 탁자의 규모와 차림새를 낮추는 방법이 있는데, 태자는 동궁 후궁들을 상석에 앉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후궁의 자리 배치에 대해 따로 묻지 않았으나 아마도 우측 하단 상석일 것이다. 우측 하단은 황족들이 앉을 테니 결코 나쁜 곳은 아니지만, 황가 역사상 흔치 않은 존재기에 위세가 남다른 동궁 후궁들이 받아들이기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 곳이었다.

“예.”

되묻는 태자의 얼굴은 승상 내외와 무관해 보였다.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았다 하더냐.”

태자의 하문에 등우는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그것이…….”

태감이 제게 시선을 던지는 것을 알면서도 용아는 권과 먹기에만 집중했다. 윤제가 가져온 권과는 상등품 중에서 특상등품이었다. 금당대 반방에서 꽤나 공을 들였을 터였다.

“전하.”

그때 문밖에서 힘찬 소리가 들려왔다.

“소인이 당장…….”

승상의 목소리에 등우가 사색이 되어 속닥였다. 윤제가 등우를 말리며 웃는 목소리로 답했다.

“놔둬 봐라.”

그는 이게 맛있는 것이라는 듯, 권과만 보는 용아에게 유지를 반쯤 벗긴 권과를 건넸다. 용아는 예상과 다른 기묘한 상황과 분위기에 권과를 우물거리며 방 안을 살폈다.

“소신, 맹방 무례인 줄 알면서도 부인과 전하를 찾아뵈었습니다. 전하, 도리가 아님을 아옵니다만 동궁전 후궁은 역대 황실에 희소한 존재로서 그에 맞는 합당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 보옵니다. 전하와 태자비 전하와 나란히 있음이 어렵다면 상석에 차림을 다르게 하여 함께 하심이 옳지 않을는지요. 부디 영명한 판단을 내려 주소서.”

승상이 이리 분위기를 띄우면 태자가 곤란한 척하며 용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후궁 내 다툼의 흔한 결말이었다.

“그건 이미 결정 난 게 아니었던가.”

윤제가 나지막하게 말하였고, 등우가 문밖을 향해 “그건 이미 결정 난 게 아니었던가, 하시오.”라고 전하자, 문밖의 태감이 다시 저 너머의 승상에게 말을 전했다.

“전하! 소훈께서 부족하여 전하께서 불편하실 수 있으나, 양제께서는 전하가 특별히 아끼는 분이 아니십니까. 관례가 중하다 하나 황가 안에서 희소한 분을 보살펴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승상이 방 안까지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높였다.

윤제가 벌떡 일어나 문 앞으로 가서 서자, 문 안의 등우와 문밖의 태감이 동시에 문을 밀고 당겨 열었다. 문이 열리며 윤제의 얼굴이 밖을 향했다.

“관례보다 중한 것이 어디 있소, 승상. 경에게 이러라고 소훈이 시키더이까, 양제가 시키더이까! 아니면 후궁을 앞세워 이 사람을 제 마음대로 해 보려는 더러운 욕심에서 이러는 것인가?! 내 그리 만만하시오? 썩 물러가지 못하겠는가.”

태자의 목소리에 서늘함이 함께했다.

“소신은 그저…….”

“물러가라는 말 못 들었는가.”

“물, 물러가옵니다.”

태자의 지난 말을 비추어 보면 의아한 일이었다.

“저런 작자가 태자비 거처 앞까지 와 어지럽히도록 두다니 다들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태자의 노성에 태감과 궁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추며 머리가 땅에 닿도록 웅크리며 죄를 청했다. 아무리 잘 방비한다 해도 행궁은 황궁에 비해 느슨한 데가 있었다. 윤제의 분노를 한 몸에 맞은 등우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주춤주춤 문밖으로 물러났다.

“등 태감, 괜찮은가.”

움칫움칫 하는 태감의 등을 안쓰럽게 살피며 용아가 물었다.

“비켜 서거라.”

윤제가 험악한 얼굴로 명했다.

“그러다 주위에 친한 사람 하나도 안 남는다니까요.”

“뭐?”

“형님도 이거 하나 드십시오. 화났을 땐 단 게 최곱니다.”

용아가 유지를 조금 벗긴 권과를 건네며 윤제를 슬슬 안으로 몰아 다탁 앞으로 데리고 갔다. 태자가 내리던 삼엄한 위엄이 옅어지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등우는 잽싸게 방 밖으로 몸을 빼내며 문을 소리도 나지 않게 닫았다. 아랫것을 혼내는 자신 앞을 가로막는 용아의 무엄함을 타박하려던 윤제는 다탁으로 가 식어 버린 찻잔에 첨차를 하는 우아한 손을 보고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손에 든 권과를 입으로 밀어 넣은 그가 의자에 털퍽 소리 나게 앉았다.

그 과격한 소리에 용아가 시선을 올렸다.

“너만 좋은 사람인 척 하냐.”

“저는 황궁 안에서 매우 드문 아주 좋은 상전이지만, 눈이 뒤집히면 채찍질을 하는 미친 상전이라는 뒷말도 도는걸요.”

용아가 웃는 얼굴로 무서운 말을 잘도 했다.

“……그땐 정말 미안했다…….”

윤제가 새삼 죄스러워하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지난 일인걸요.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채찍 들고 설칠지도 모르지만, 형님께서 소제 채찍질 정도에 휘둘릴 사람은 아니니까. 뭐, 어때요. 드세요.”

채찍질을 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응.”

윤제는 얌전히 용아가 건넨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

용아는 빈 제 찻잔에 새로 우려낸 백차를 붓다가, 혹시 채찍질 때문인가? 같은 괴이한 의심에 도달했다. 후궁과 그 측근들에게는 매우 중대한 일이겠으나, 용아는 상석에 몇이서 앉건 사실 별로 상관없었다. 그러나 좋은 웃전인 척하며 상석에 같이 앉게 해 주십사 말해 줄 의향은 조금도 없었다.

“용아.”

윤제가 불쑥 용아를 진지하게 물렀다.

“예.”

남자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너 나한테 일부러 여태 차 안 준 거냐.”

“일부러는 아닙니다.”

“엄청 맛있다. 내가 네 전각에 간 게 몇 번인데 차 한잔 안 준 게 우연이란 말이지. 앞으로 내 자주 가마.”

용아는 차향을 살피던 것을 멈추고 뻔뻔한 말을 하는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지금껏 윤제에게 용아가 차를 내어 줄 일 없었던 건, 남자가 자신의 전각에 들 때마다 풍비박산을 내놓고 가거나 난동을 부리고 가거나 제 할 말이나 할 일을 끝내면 휑하니 가 버린 탓이었다.

더해, 대부분 차는 태감과 궁인이 준비했다. 방금 용아가 차를 우려낸 것은 첨차를 해야 할 등 태감이 태자의 억압에 핍박받는 걸 견딜 수 없어 혼비백산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

용아의 시선에 차를 마시던 윤제가 눈썹을 으쓱였다.

“왜 그리 봐.”

“이 방에 채찍이 어딨더라.”

용아가 찻잔을 들며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윤제에게 선명히 전해지는 혼잣말이었다. 태자가 으음, 목을 울리며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함월전 하사 받은 것 늦었지만 축하한다.”

“송구합니다.”

“아주 균형이 알맞은 명분이었다.”

윤제의 대단하다 놀리는 듯한 칭찬에 용아가 입술을 조금 구겼다.

“하나 이상의 이익집단이 있는 상황에서 싸움에 임할 때 한쪽 편만 들면 안 되는 법이지요. 하나만 핍박해서도 안 되고요. 서로 싸우게 해 제가 원하는 걸 얻는 계책은 계책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용아는 으스대는 소년처럼 뻔뻔하게 말하며 차를 들이켰다.

“그래, 그래, 잘했다. 한 잔 더 줘.”

윤제가 건성으로 칭찬하며 빈 찻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만 마시고 가십시오.”

용아는 빈 잔에 첨차하며 말했다.

“음, 맛있다.”

찻잔이 채워지자 입가로 재빨리 가져간 윤제가 차향을 음미하고, 한 모금 맛보며 웃는 얼굴로 딴소리만 했다. 시원스레 뻗은 눈이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걸 보니 정말로 맛있는 모양이라 내심 좋으면서도, 왜인지 몹시 불길했다. 그래도 맛없다는 것보다 낫지 싶었다.

“용아.”

“예?”

“한 잔만 더 줘…….”

잘생긴 얼굴이 가련한 체하며 소곤거렸다. 역시 좀 불길하다.

익선궁 소천전은 행궁 안에서 가장 넓은 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금은사로 수를 놓은 비단과 비단꽃, 비단등으로 치장한 소천전 전각 앞, 석기단 상석에 태자와 태자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석기단 아래 펼쳐진 계단 위에는 유지에 감싸인 소담한 비단등을 수 개 띄워 둔 주둥이가 넓은 커다란 도자기 접시가 놓여 있었다. 시간이 깊어져 밤이 되면 더욱 호화로운 풍경을 보일 예정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도자기 안의 물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수면이 잔바람에 흔들리면 물 위에 뜬 비단등과 꽃이 가볍게 흔들렸다.

신연회를 맞아 행궁에 찾아온 손님이 차례로 청녹빛 비단이 깔린 중앙의 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 들었다.

가장 높은 곳, 보좌에 앉은 태자비가 예를 받으며 이따금 옆자리에 앉은 태자를 살폈다. 용아가 생각한 것보다 소천전 석기단의 높이가 훨씬 높았다. 황궁 정전 석기단 높이에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최소 성인 남자 무릎 높이의 계단이 열 개 남짓 되는 단이 세 개나 있었다.

상층부 석기단의 엄청난 높이 덕분에 전각의 시작 지점이 손쉽게 보일 지경이었다. 반면, 석기단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은 손가락 하나 크기도 안 되게 보였다.

오른쪽 하단 상석의 인물이 제 탁자 앞에서 시선을 뗄 때면 석기단 위 상석만 보고 있음에도 저쪽에서 이곳을 보는지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까마득히 멀었다.

용아는 새삼 괜찮은 걸까 생각하며 윤제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

까마득한 거리에 있는 남자의 정인이 안쓰러운 얼굴로 저 높은 석기단 위에 있는 얼굴을 바라고 있었다.

“태자 전하. 태자비 전하. 홍복을 누리소서.”

황족과 황실 친인척의 예가 끝나고 조정백관의 인사가 시작될 때.

“……전하……?”

윤제가 옆자리로 팔을 뻗어 갑자기 용아를 품으로 당겼다. 용아의 얼굴이 윤제의 품 안에 가두어졌다. 왼손으로 용아를 안아 당긴 남자는 오른손으로 검을 빼어 들며 소리쳤다.

“양혜!”

태자의 부름에 영호대 부대장 양혜가 석기단 끝에서 계단 아래 중앙으로 뛰어내렸다. 거의 동시에 소천전 안으로 바람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울리며 화살이 쏟아졌다. 양혜는 태자께 예를 올리고자 앞으로 나와 있던 대신의 위로 내리는 화살을 쳐내며 어리둥절해하는 관인을 일으켜 옆으로 피했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태자와 태자비 뒤에 보이지 않게 시립하고 있던 영호대가 석기단 전면으로 나서며 상층부로 쏘아진 화살을 전부 쳐냈다. 몸 외에도, 얼굴과 목, 손가락 하나 보이지 않도록 빈틈없이 무장한 영호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석상 같았다. 영호대가 화살을 쳐내는 사이 윤제는 거대한 탁자를 넘어뜨려 벽을 세우고, 앉아 있던 보좌로 각각 좌우를 막아 단단히 방비한 곳에 용아를 구겨 넣었다.

기습은 모두 그렇듯 갑작스러웠다.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찰나에 앞서 눈치챘다고 하나 완벽하게 막아 낸 것은 아니었다.

“꺄아아악!”

석기단 아래에 있던 영호대가 대신들의 주위를 감싸며 화살 대부분을 쳐냈지만 몇몇은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질렀고, 다친 이를 본 이들은 안타까움과 놀라움에 소리를 내질렀다.

한차례 화살비가 내리고 공백이 있었다. 이어질 화살비와 공격을 대비하고 있는 이들이 긴장한 얼굴로 침묵에 싸인 담을 지켜봤다.

기습은 계속되었다.

쿵.

아수라장이 된 소천전 앞마당 안으로 높디높은 담을 넘어 괴인이 떨어졌다. 떨어질 때의 통증 때문에 움직이기 어려울 것 같은 남자는 용케도 몸을 일으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병을 열어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하늘에 계신 상제시여! 괴물들을 멸하시고, 고귀한 고 황실을 보살펴 주소서!”

앞으로 휘청휘청 걸으며 그가 저주나 진배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수 대 전에 스러져 사라진 고 황실을 신봉하고 수호하는 괴집단은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 가고 있었다.

옆으로 쓰러트린 보좌 밖을 살피며 윤제가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역모?”

고(古)황실을 쓰러트리고 일족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린 것은 지금의 황실이다. 일반 백성과 고 황실을 따르던 구족 중에는 지금 있는 황실을 따르지 않고, 고 황실이 진정한 황족이라 믿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또, 사람 같지 않은 현재의 황족을 괴물이라 여겼다.

고황실 부흥 집단은 잊을 만하면 종종 나타나 황족들을 습격하고 갔다. 괴집단을 음으로 양으로 돕는 백성과 구족이 있을 테지만, 황가와 황실은 모든 구족과 백성을 죽일 수 없기에 사고가 터지면 적당히 위기만 쳐 내고 무시로 일관했다.

상대할 가치가 없는 이들이었다.

“상제시여!”

괴인의 악에 바친 외침이 다시 한 번 터지자, 담 너머에서 불덩이가 날아와 남자의 몸에 뿌려졌던 액체를 타고 화르르 불타올랐다.

“괴물을 멸하시고, 진정한 황실을 돌려주소서!”

괴인은 몸이 불타고 있음에도 전력을 다해 소리치며 걸어 나갔다. 마치 몸에 붙은 불이 주는 아픔 따위 모른다는 듯한 태도였다.

“꺄아아아!”

온몸에 불을 두른 남자가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비명을 내지르며 괴인을 피해가는 이들 앞으로 영호대의 무관이 나서며 칼을 휘둘렀다.

괴집단의 괴악하지만 시시한 불장난이라면 이곳에 모인 황족과 영호대에게 문제 될 게 없었다. 영호대가 앞으로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담 위의 궁수들이 활을 쏘아 부었다.

한편으로 담 너머로 앞의 괴인과 같은 넋 나간 얼굴들이 쿵! 쿵! 쿵! 무차별적으로 떨어져 내리며 허리춤의 도자기병을 열어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이제는 몸 위로 쏟아지는 액체가 무엇인지 모두가 알았다. 괴인과 함께, 창칼을 든 낯선 복장의 무사들도 내려섰다.

무사들을 본 황족과 영호대의 움직임에 일순 불쾌감이 드러났다.

적을 끌어내는 불에 감싸인 미끼와 창칼.

보좌 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용아의 얼굴이 기묘하게 굳어 들었다. 다가서는 낯선 무사들을 본 영호대의 무관이 소리를 내질렀다.

“적습이다!”

황가 혈통의 위엄 하나에 주춤주춤 물러날 괴집단과 격이 다른 적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그사이 몸에 불을 붙인 괴인들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위협했다.

“용병……?”

괴집단의 어설픈 난동이라면 태자와 태자비만 몸을 피하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시시한 공격이라 해도 황실을 수호하고, 황가의 일족을 보호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이 싸움에 황가와 황족이 떨칠 수 있는 권능과 같은 종류의 힘을 가진 이들이 끼어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윤제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제북이었으나, 그의 옆자리에 제북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이 앉아 있었다.

해월?

해월은 제북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거점지에서 멀리까지 벗어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가까이 있는 제북과만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전하, 진족입니다.”

영호대의 무장이 태자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진족?”

무장의 말에 윤제의 얼굴이 모호하게 바뀌었다. 윤제와 황가, 황실, 황족 일가 모두가 엄연히 따지고 보면 진족이었다. 제북을 중심으로 장군부의 십일 후족, 해월, 산융, 동리, 만위, 홍문 북쪽과 서남에 거점지를 가진 전부가 먼 과거에는 진족이라고 불렸다.

가장 먼저 진족의 이동에서 떨어져 나와 터전을 잡은 것은 제북. 가장 오랫동안 진족과 함께 했으나 여타 일족과 가장 달랐던 것은 황가와 황족이다.

황가와 제북이 서로 뿌리가 같은 혈족이라고 떠들 때 진족을 떠올리지만, 현재의 진족은 유랑자에 불과했다.

과거처럼 뚜렷한 법칙을 가진 경로를 따르지도 않고, 터전 없이 떠돌며 필요한 것을 때때로 약탈하고 겨우겨우 도망치는 게 전부에, 터전을 굳건히 한 다른 일족들의 무위에 비해 특별히 강한 것도 아니라 토벌까지 나설 가치도 없었다.

머리와 몸통을 잃은 떠돌이와 넋 나간 괴집단의 조합이라니 괴이하기만 했다.

“쳐라!”

윤제의 의아함이 깊어갈 때 아래의 난장이 더욱 가열됐다. 세 명씩 합을 맞춘 진족 무사들이 영호대를 향해 덤벼들었다. 온몸을 불태운 괴인이 사람들 속으로 두서없이 뛰어들었다.

“……신부……사냥……?”

보좌 뒤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용아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용아의 손이 곁에 있는 윤제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하얗게 질려 가는 얼굴을 본 윤제가 겁에 질린 뒷머리를 매만지며 깨우려 했다.

“괜찮다.”

윤제의 말에 용아가 고개를 저었다.

“……신부 사냥……입니다.”

용아의 입에서 한여름 밤 아이들을 겁줄 때나 나오는 말이 내뱉어졌다. 황실 건국기 설화 속 첫 장을 호화찬란하고 험악하게 꾸미기 위해 쓰인 황족과 후족의 첫 혼례를 가리키는 말. 지난날 황가는 수차례 제북 후족을 사냥해 신부를 훔쳐 왔다.

그것은 야만의 역사다.

윤제와 영호대 무관은 난감한 얼굴로 태자비를 바라봤다. 용아의 얼굴은 더욱더 새하얗게 질려 갔다. 진족이 후손을 가지는 법칙은 제북과 같았다. 개화할 수 있는 소년과 소녀가 필요했다.

이곳에 개화를 앞둔 아름답고 강성한 혈통의 일족이 있다.

“가라.”

윤제는 우선 영호대를 내보냈다.

“개진!”

영호대의 무관이 석기단 아래로 뛰어내리며 소리 높였다. 석기단 상층부에서 아래로 수십의 무관이 일제히 떨어져 내리며 쿵, 쿵, 쿵, 충격음을 퍼트렸다. 쿠궁, 쿵, 쿵. 이어지는 소리와 진동을 들으며 용아는 손안에 잡힌 윤제의 옷을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

“용아, 내 말 잘 들어라. 전각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 미궁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신……부 사냥은 진인의 신부가 될 수 있는 신부 후보들을 사냥하는 겁니다. 불을 지른 손쉬운 미끼로 방비를 깨고, 앞으로 나선 무사를 하나씩 사냥해 전력을 약화시킨 후에 숫자와 무력을 앞세워 상대를 으깨고, 진인의 공포에 억눌려 도망치지 못하고 있는 신부를 훔쳐 가는 거죠. 전하도 알고 계시지요?”

“안다.”

신부 사냥을 가장 잔혹하고 냉철하게 해낸 이들이 바로 황가와 황족이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용아…….”

“개화를 앞둔 아이들을 구해 내야 합니다. 가십시오. 저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를 꼽으라면 태자다. 이곳에서 가장 희귀한 존재를 꼽으라면 아마도 용아일 것이다. 한 세대에 일곱까지 있었던 황가 적통과 달리 후가주 될 이는 반드시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한 세대에 하나가 고작이다. 그러니 모두를 잃더라도 용아를 지키는 것이 더 옳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용아야, 형이.”

“어서요!”

머리에 단장하고 있던 것들을 빼내 바닥에 버리고 긴 머리칼을 하나로 모아 단단히 고정하며 용아가 재촉했다. 우아하고 위엄 넘치는 겉옷을 내팽개치고, 아름답게 흔들리도록 묶어 둔 끈들을 풀리지 않게끔 촘촘히 묶는 손길이 야무졌다.

“이거 받아라.”

윤제가 용아의 손에 자신의 검을 쥐여 줬다.

“전하는요?”

용아가 다급히 묻자 윤제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전하? 용아가 다시 남자를 불렀다. 세워 둔 방벽 밖으로 나서는 윤제를 향해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칼을 던져 주려는 용아를 돌아보며 윤제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의아함이 남아 있었다.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서너 걸음 물러난 윤제가 다음 순간 석기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흡사 날아오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석기단 밖으로 뛰어오르는 남자에게서 인간의 것 같지 않은 흉성이 터져 나갔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아래에서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던 영호대 대장 언준이 답을 하듯 소리쳤다.

“용황쇄!”

소천전 담에서 쏟아지는 화살과 다가오는 무사를 어렵지 않게 막고 있던 황족들이 언준의 외침에 뻣뻣하게 표정을 굳히며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부인과 딸들 앞에서 한 번도 힘을 내보인 적 없는 정군왕이 등 뒤로 겁에 질린 가족들을 보내며 황족이 가진 위엄을 내보였다.

부족해.

아이 둘이 있다 해도 혼자서 셋의 앞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라.”

소양군의 말에 소군왕부 셋째 공자가 구르듯이 정군왕의 곁으로 달려가 힘을 보탰다. 황족들이 순식간에 몸을 물려 가족들을 감싸는 사이, 영호대는 기묘한 걸음을 밟아 진을 펼쳤다. 삐죽삐죽하게 튀어나온 부분과 움푹 들어간 부분을 맡은 무관의 뒤로 셋이 혹은 넷도 넘는 무장이 달라붙어 힘을 보냈다.

저 멀리에서부터 땅 울음이 터져 나오며 지축이 요동쳤다. 곧이어 화창한 하늘에 어둠이 내리는 것처럼, 오감을 억압하는 서늘함이 모든 이를 짓눌렀다. 까마득히 높은 석기단 최상층부에서 뛰어내린 태자가 중앙으로 곧바로 떨어져 내렸다. 본신의 힘을 억누르지 않은 윤제가 닿자 공기가 무섭게 울렸다.

세상이 온통 뒤흔들렸다.

윤제가 아래로 내려서는 순간 황족과 왕공, 제북 일족은 퍼렇게 굳어 들도록 악을 써 댔고, 진을 펼친 영호대 또한 혼신을 다해 방어진을 펼쳤다.

“커헉…….”

“큽!”

태자의 갑작스러운 출사에 무방비하게 공격만 하고 있던 진족 무사들이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다. 불을 두르고 달려들려던 괴인들은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절명했다.

“가! 어서 가라!”

틈을 놓치지 않고 언준이 외쳤다. 그는 공격할 무장들을 보내는 한편, 구출조를 짜 여자와 아이부터 대피하도록 했다. 방어진 안에 있긴 했으나 태자가 보인 권능에 공포로 절여진 이들은 좀처럼 쉽게 몸을 추스르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엄호해!”

언준은 어깨 위에 맹소훈을 올리고 옆구리에 양제를 끼다시피 하며 소천전 전각을 향해 내달렸다. 부인들과 아이들을 품에 들거나 업어 올린 구출조 영호대 무장이 뒤이었다.

“……나는, 나를…….”

“어디로…….”

겁에 질린 이들이 우물우물 떠들었다. 소천전 곁문을 열어 데리고 온 후궁들을 밀어 넣으며 언준이 말했다.

“안에 들어가 계십시오.”

양제가 다급히 언준을 붙들었다. 그가 가면 누가 자신을 지켜 줄 것인가 걱정이 솟았다. 맹소훈도 뒤따라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그를 붙잡았다. 언준이 머리를 내젓는 양제와 소훈을 좀 더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을 통해 나갈 수 없으니 예 계십시오. 가능하면 심처로 들어가 계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물러가옵니다.”

연회가 열린 소천전에 취해진 표면적인 경계는 전부 4겹.

창병 위주로 짜인 외곽의 1진과 궁병으로 구성된 2진은 전멸했다고 보아야 한다. 영호대 소속이지만 천병대 백부장으로 3진을 지휘한 이들에게서 소식을 없는 걸 보아 그들 또한 거의 없는 전력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남은 것은 연회가 열리는 곳을 감시하고 보호하기 위해 배치돼 있던 영호대 1대와 태자와 태자비의 뒤를 지키던 태자 직속 영호대뿐이다.

언준은 할 일이 많은 사내다.

“……그대의 소임은 우리를 ……지켜 주……는 것이다!”

양제는 다리가 풀려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몸을 쥐어 짜내 소리를 내뱉었다. 어서 들어가라는 시선을 건네고 언준이 돌아섰다. 벌써부터 피로감이 몰려왔다. 저 많은 귀부인들과 고관들을 어느 세월에 하나씩 안아 올려 피신시킬 수 있겠나, 고민하는 그의 귓가로 위험천만한 소리가 내리꽂혔다.

피잉. 핑. 피잉. 피잉. 피이잉.

돌아본 시선 끝에 석기단의 계단을 내달리는 날씬한 뒷등이 걸렸다.

‘신부 사냥.’

준비를 마치고 임시 방벽 뒤에서 나온 용아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계단을 뛰어내렸다. 상단부를 내릴 때 적지 않게 쏟아지던 화살은 하단부로 내려서자, 점점 더 많아졌다. 텅 빈 계단에 홀로 나타난 목표물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여겼다.

투웅.

머리 위로 내리는 위협적인 것만 쳐 내며 엄폐물이 될 수 있는 박살 난 장식 뒤로 내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계단을 순식간에 내려와 수많은 이가 뒤섞여 싸우는 곳에 당도했음에도 용아를 노리는 화살의 수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더 늘어나, 전부 제대로 내리꽂히면 용아를 고슴도치라도 만들 것 같았다. 화살뿐이 아니었다. 내리는 화살이 위협적이라 다가오지 못하고 포위망만 좁혀 드는 진족의 무사들 역시 용아를 단단히 노리고 있었다.

퍽.

담 안쪽에 내리는 화살 중 특별히 공력이 실려 있는 화살들이 있었다.

퍽. 퍼벅. 펑!

용아를 향해 내쏘아지던 특별한 화살이 하나둘 늘어나다 걷잡을 수 없이 많아졌다. 격전지 한가운데에 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자보다 태자비인 용아에게 더 많은 공격이 퍼부어졌다.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적 역시 용아에게 다가오는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내리 쏘아지는 특별히 힘을 실은 화살을 쳐 내고 돌아보며 용아가 저도 모르고 웅얼거렸다.

“……신부 사냥…… 그리고 나인가…….”

“비전하!”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돌아보기도 전에 퍽! 왼쪽 팔뚝에 뜨겁고 끔찍한 격통이 내리꽂혔다. 언준이 무관들과 용아를 감싸며 전각으로 다시 모시려 했다.

으득.

용아가 팔에 꽂힌 화살의 긴 뒷몸과 팔뚝 앞으로 튀어나온 앞머리를 분질러 내던지며 소리쳤다.

“달려!”

“비전하!”

언준의 안타까운 외침을 들으며 용아가 튀어 나가듯 내달렸다. 머릿속에 빙글빙글 같은 단어가 맴돌았다.

신부 사냥. 나. ……그리고 숙부.

격전지로 뛰어드는 태자비를 따르며 언준은 몇 번이나 소리쳤다. 전각으로 돌아가야 한다, 전각으로 가시자, 전각에 계시면 어떻게든 해 보겠다. 언준의 지키지 못할 약속에 용아는 어서 달리기나 하라는 듯 무관의 등을 두드려 독려만 했다. 태자비에게 호언장담한 것과 달리, 아래의 상황은 한눈에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결국은 태자와 황족들이 진족을 멸절시킬 테지만, 그때까지 태자와 싸울 수 있는 황족 외의 목숨들은 장담할 수 없었다. 특히 눈앞의 태자비가 염려스러웠다. 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족의 궁수와 무사들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태자비에게 공격을 집중했다.

용아가 정군왕 일가가 몸을 숨기고 있는 곳으로 기어들었다. 그곳에 정군왕비와 두 딸 외에도 황족 여아들이 숨어 있었다.

“비전하!”

“신부 사냥입니다.”

용아가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나를 죽이러 왔지요. 뒷말은 속으로 삼키며 씁쓸하고 기묘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비전하, 예서…….”

팔뚝에 부러진 화살을 꽂고 있는 태자비를 본 정군왕은 당장 용아만이라도 소천전 안으로 데리고 가려 했다. 몸을 일으키던 그는 신부 사냥, 이라는 말에 태자비를 보고 놀란 얼굴에 진노를 더했다.

“밖을 향해 주십시오.”

정군왕의 분노와 함께 더해진 힘에 방벽 뒤에 숨은 이들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갔다. 용아의 말에야 정신을 차리려 할 때, 눈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저질러졌다. 용아가 들고 있던 칼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 오른쪽 손바닥을 그었다. 정군왕이 고함을 내질렀다.

“비전하!”

“아프네, 제기랄.”

용아가 불온하게 투덜거리며 군왕비의 얼굴에 허락도 구하지 않고 피로 젖은 손을 문댔다. 제 피로 젖은 뺨에 통증으로 후들거리는 손이 축언을 그렸다.

군왕비 다음은 두 현주였다.

피로 젖은 얼굴에 글씨를 써 넣는 용아에게 무얼 하냐 묻지 않았다.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하던 군왕비와 두 딸이 태자비가 내린 가호에 떨림을 멈추고 있었다. 태자가 보여 준 권능이 흉신의 역습 같다면, 태자비가 보여 주는 권능은 하늘이 내리는 기적과 같았다.

“내가 전부 살려서 데려갈 것이다.”

용아가 축복을 내리듯 말했다.

나도 반드시 살아 돌아가 괴롭혀 드리겠습니다, 숙부.

어떤 이는 뺨에, 어떤 이는 턱에, 어떤 이는 이마에 용아의 피가 내렸다. 축언의 문양 역시 제각각이었다. 사실은 용아조차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제북은 먼 옛날 있었던 신부 사냥을 잊지 않았다. 장군부는 다시 재개될지 모르는 황가의 신부 사냥과 맞닿아 있는 적들에 대비해 시기마다 가문과 가문끼리 신부 사냥을 본떠 만든 내원전을 벌였다. 쓸 수 있는 무력과 경계가 정해진 전쟁이지만 상대가 훔쳐 간 어린 신부 후보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기에 다들 목숨을 걸고서라도 내원을 지키려 했다.

하후가도 내원전을 치렀지만 용아는 단 한 번도 거기에 끼지 않았다. 황가로 가는 것이 정해져 있기도 했지만, 가주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가주는 용아에게 신부 사냥과 그것을 본뜬 내원전에 대해 되도록 알려 주지 않으려 했다. 알고 있어 봐야 용아와는 무관하기도 하거니와, 장차 황실에 가 마음이 불편할 테니 그와 관해 신경을 거두라 명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매번 그것 때문에 떠들썩한데 자신만 모른다는 소외감과 호기심에 남몰래 귀만 열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 서각에서 옛 이야기 형태로 남아 있는 신부 사냥에 대해 읽었다. 그저 글줄을 읽었을 뿐인데 머릿속에 이상하도록 선명한 형상들이 떠올랐다.

후가주가 신부 사냥에 나선 적을 따돌리고 피칠을 한 얼굴들을 이끌어 홍문으로 갔다는 글이었다. 얼굴에 칠해진 피들이 후가주의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 또한 이들을 지킬 것이다.

“갈 수 있겠지?”

어린 현주를 향해 용아가 물었다. 소녀는 여전히 겁에 질린 채였지만 힘껏 끄덕였다. 용아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쏟아 낸 피가 이들을 권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것인지, 그가 그려 넣은 본능을 따른 조악한 글자들이 힘을 낸 것인지, 그저 위기에 손을 붙들어 준 이를 따르기 위해 일시적으로 힘이 난 것인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들이 부정하지 않는 한 이전과 달리 모두 뜻하는 대로 뛰어갈 수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전부 데려갈 수 있겠나?”

“비전하도 가셔야 합니다.”

용아의 물음에 언준이 갈급한 얼굴로 답했다.

“실랑이 할 틈 없다.”

“전하!”

“이 사람은 할 일이 있어. 아이들을 어서 데려가라. 되도록 빨리 돌아와 도와주시게. 저들을 몰아붙여 증좌를 꺼내게 해야 해. 증좌를 손에 넣어 진범을 붙잡아야지.”

용아가 스스로 다짐을 하듯 말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언준이 그러니 여기 계시라 간곡히 말하려 할 때 태자비가 표정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나는 가서 미끼가 되겠다.”

“비전하……? 전하!”

언준의 어깨를 툭하니 친 용아가 방벽을 벗어나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보다 훨씬 줄어들긴 했으나 용아를 발견한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쏟아부었다.

“사람도 아니야.”

용아는 높디높은 담벼락을 뛰어올라 진족 궁수들의 머리를 하나씩 빠르게 거두어가는 영호대 무장들을 보며 철없는 소년처럼 감탄했다.

제일 인간 같지 않은 건 태자였다. 제 칼을 주고 맨손으로 간 윤제는 검을 돌려주려는 용아에게 되었다 거절할 만했다. 남자가 지나갈 때마다 진족 무사가 툭툭 쓰러졌다. 적은 그의 힘이 실린 가격에 피를 뿜었고, 손에 들고 몸에 지니고 있던 무기를 내어놓고 나자빠졌다. 윤제의 손으로 들어간 진족의 무기는 진족의 살을 뚫고, 뼈를 박살 냈다.

윤제가 인세의 것 같지 않은 권능을 몇 번이고 더 쓸 수 있음에도 쓰지 않는 것은, 피신해야 할 이들은 물론이고 영호대와 황족들이 그의 힘을 버텨 낼 수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까의 것만으로 영호대와 황족의 내장이 뒤틀렸을 테니 한 번 더 힘을 받았다간 뒷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용공자!”

격전지를 뛰어다니는 용아의 곁으로 두 사내가 달려왔다. 용아를 못 보고 지나치려야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영공자 형님. 횡공자 형님. 오랜만입니다.”

용아는 이리저리 어슬렁어슬렁 뛰어다니며 시선을 한껏 끌고 있었다. 덕분에 언준이 이끄는 구출조와 황족들이 얼굴에 피칠을 한 아이들을 이끌고 순조롭게 소천전으로 향했다.

“용공자, 여기서 뭐하는 건가. 으악. 여기 왜 이래!?”

영양군이 쏟아지는 화살을 질린 얼굴로 쳐 내며 투덜거렸다. 태자와 영호대가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고 있지만 담벼락 너머에서 화살을 날려 대는 궁수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크고 탐스러운 미끼 놀이 중입니다.”

“뭐!?”

“그 꼴을 하고?”

용아의 대답에 영양군과 횡양군이 인상을 써 댔다. 한쪽 팔뚝에는 부러진 화살이 꽂혀 있고, 다른 쪽 손 손바닥에는 천을 매어 두긴 했지만 피가 새고 있는 꼴이 지금 당장 나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용아와 영양군과 횡양군은 방심할 틈 없이 날아오는 화살과 칼을 척척 쳐 내며 떠들었다.

“잘되었습니다.”

“잘되다니, 뭐가?!”

영양군은 신연회를 위해 맞춘 귀한 포가 누더기가 되는 걸 보며 마치 친우인 소양군처럼 악을 써 댔다.

“형님들께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칼은 좀 휘두를 줄 아시지요?”

“용공자, 잠깐 기다려라. 태자비 전하께서, 안 돼!”

격전지 중앙을 향해 성큼 뛰어들려는 용아를 횡양군이 말리려 했다. 그는 용아를 아는 친한 아우처럼 부르다가 위기 상황이란 생각에 법도에 맞추어 태자비라 부르며 용아를 뒤로 빼내려 했다. 용아가 횡양군을 방패처럼 앞세우고 영양군을 창처럼 옆으로 들이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소제가 위치를 말하면 그곳을 비우십시오.”

“잠, 잠깐만.”

영양군은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칼과 화살에 칼질을 해 대며 용아를 말리려 애썼다.

“오른쪽.”

진족 무사 셋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연환 공격은 쉽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족과 뿌리를 함께하는 황족이 아니면 체력이나 힘 자체가 다르기에 칼 한번 맞대면 팔이 터져 나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 사람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적을 본 용아가 가볍게 말했다.

용아의 오른쪽에 서 있던 횡양군이 자연스레 앞으로 나서며 자리를 비워 줬다. 횡 베기 세 번 오간 후에 우득, 살이 뚫리는 소리가 울렸다. 오른손에 윤제가 주고 간 장검은 왼손에 짧은 단검을 든 용아가 긴 칼로 상대를 유인해 끌어들이고 짧은 칼로 연이어 적의 목을 내려찍었다.

“……!”

“……!”

횡양군과 영양군의 얼굴이 기괴하게 흐트러졌다. 두 사람 또한 황족이라 강건한 육체에 남부럽지 않은 무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기묘한 연환 공격을 쉽사리 깨지 못했다. 더 강한 육체와 힘으로 짓누르며 부서트려 나가고는 있었지만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진족이 구사하는 삼인 합격은 국경 지대에서 이미 악명이 높은 공격법이다. 철저하게 황실과 황가, 황족을 부수기 위해 짜인 검법으로, 이 기묘한 합격진에 당한 류씨 종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용아가 연환 공격의 중심을 바스라트리자 나머지 둘은 두 황족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 일격에 적을 쓰러트린 둘을 향해 덤덤히 말했다.

“가시죠.”

“용공자, 너. 우리 몰래 쟤네 뒤통수라도 쳤니?”

영양군이 쏟아지는 화살을 요령 좋게 쳐 내며 소곤거렸다.

“가운데. 아니요.”

한번 해 본 탓인지 셋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용아는 말한 자리에 서자마자 칼을 내질러 상처 입은 상대를 그대로 걷어찼다. 공격의 흐름이 깨지는 순간 양쪽 검수가 두 황족의 칼에 으스러졌다. 용아에게 채여 넘어진 적이 일어서려는 걸 본 횡양군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창을 주워 땅과 적의 몸통을 하나로 꿰어 주었다.

뻑!

사람의 몸에서 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그건 어디서 배웠는가, 용공자.”

손목을 풀며 검로를 점검하는 용아를 향해 횡양군이 물었다. 용아가 하얗게 질리고 지친 얼굴로 웃으며 떠들었다.

“가전이라, 안 됩니다.”

“실례했다.”

“괜찮습니다. 좀 더 털어 주죠.”

용아가 기세 좋게 앞으로 나서며 적을 맞았다. 두 황족이 기기묘묘한 검로를 따라 칼을 움직이고, 상대의 검술 자체를 파훼하는 것처럼 보이는 용아를 곁에서 도왔다.

상황은 빠르게 호전되었다.

태자와 영호대의 무위는 나무랄 데가 없었고, 셋이 함께 다니며 칼질 몇 번에 연환 공격을 깨부수어 대자 무게의 추가 확 기울기 시작했다. 거기에 소천전 전각 안에 신부 후보가 될 아이들을 대피시키고 온 황가 종친이 싸움에 가세하며 판도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셋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게 한참 되었을 때.

치익!

이제는 적을 찾아다녀야 할 정도가 되자, 사방에서 들어 본 바 없는 소리가 울렸다. 퉁, 두퉁. 무언가 던져지는 소리와 퍼석! 도기가 깨어지는 소리가 뒤이었다. 희미한 연기를 피우며 데굴데굴 굴러 오는 암녹색 깨어진 도기를 보고 용아가 소리쳤다.

“저걸 시체로 덮어요.”

적의 시신이라 하나 사람의 몸이었다.

“저, 저게 뭔데?!”

용아가 죽은 진족 무사의 몸을 끌어 굴러 오는 암기 위를 덮는 걸 본 영양군이 아는 동생의 냉엄함에 대경실색하면서, 잽싸게 그걸 따라하며 물었다.

그사이 치익, 불길한 소리는 점점 더 강해져 갔다.

“진범을 잡을 수 있는 증좌입니다.”

한때의 진범, 횡양군이 눈치를 보는 기색으로 물었다.

“진범?”

세 사람이 제물을 바치듯 죽은 진족 무사들을 끌어다 불길한 소리를 뿜는 도기 위를 덮는 것을 본 영호대의 무장들 또한 주섬주섬 그를 따라했다.

“저걸 챙겨 둬야 합니다.”

용아의 당부에 횡양군과 영양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헌데 대체 뭐기에…….”

둘의 대답이 다 울리기도 전에 펑! 퍼벙! 소리가 울리며 곳곳에 뿌려진 도기가 완전히 박살 나는 소리를 울렸다. 치익, 치익 희미하게 새어 나오던 연기가 점점 더 짚어지며 사방을 뒤덮었다. 웬만한 탄이 뿌리는 연기에 눈조차 깜빡 않는 영양군과 횡양군이 시야를 빠르게 잠식해 가는 흰 연무에 눈을 찡그렸다. 시체에 짓눌려 새어 나오는 속도가 현격히 줄었지만 모든 연기를 다 막을 수 없었다. 시체를 덮어 두지 못한 도기가 터져 나가며 빠르게 시야를 뒤덮었다.

“하후가 비술의 집약체이지요.”

갑작스럽게 시야를 빼앗긴 이들이 퍼트리는 소리와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망치는 적들의 발소리에 다시 한바탕 소요가 일었다. 바닥에 깔린 연기를 헤치고 달리며 검을 내지르던 용아가 더는 팔을 들 힘조차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지친 등 뒤에서 다급한 소리가 건네졌다.

“용아!”

윤제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려 했으나 뒤돌아보려는 시야가 빠르게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빌어먹을…….”

머리부터 떨어져 내리는 감각 속에서 용아가 욕설을 웅얼댔다. 빌어먹을, 허약한 나. 빌어먹을, 대가주. 빌어먹을, 하후가. 빌어먹을. 쓰러져 내리는 몸에 단단하고 부드러운 것이 감겨들었다.

“용아……! 태의! 태의를 데려와!”

시끄러운 소리가 두터운 장막 너머에서 울리는 것처럼 웅웅 흐리게 울렸다. 그래도 소리를 지르는 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용아는 쓰러져 의식을 잃어 가며 속으로 투덜댔다.

전하, 바보입니까.

황실, 황족은 크나큰 결함이 있었다. 황가 혈통은 강대한 권능을 가지고 있는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비고의적으로 혹은 고의적으로,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힘을 발휘해 지금과 같이 도움이 필요할 때 곁으로 누가 다가올 수 없게 하는 것이다.

하후가 비술의 집약체가 담긴 연기를 들이마신 후유증은 좋지 않았다. 머리가 멍했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쓰러진 이를 부축하기 위해 감싸 주는 의미 없는 온기일 뿐인데 가여운 아이처럼 그가 주는 따듯함이 제 것인 양 기꺼워하며 매달리게 되었다. 마음이 이상하게 술렁댔다. 무심한 부둥켜안음일 뿐인데. 남자의 몸에 닿은 옆얼굴을 타고 울리는 진동이 그의 간절함과 다급함을 알려 주는 듯했다. 소리를 지를 때 동반되는 진동임을 알지만 이 순간의 따뜻함에 만족하기로 했다.

곧 세상이 캄캄하게 사라졌다.

이제 와 돌이켜 떠올리면 실제로 그리 말했는지 그저 꾸며진 기억 속에서 생겨난 것인지 알 수 없는 단단한 음성이 말했다.

‘용아, 괜찮다. 이리 오련. 이 숙부가 오늘부터 너의 아비다. 내 너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줄 것이다.’

그가 한 말, 행동은 단 하나도 따르고 싶지 않지만, 그는 스스로 약속한 바대로 용아를 지켜 주고 길러 주었기에 용아의 옳고, 바르고, 현명한 것은 그의 가치를 따랐다. 용아는 진정 그의 아들이었다.

대가주의 서재 앞에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서재 앞 벽에는 커다란 활이 걸려 있다. 만위에서 대가주의 등극을 축하하며 보내온 선물이었다. 사실 소년의 이숙은 아직 완전한 대가주라 할 수 없었다. 가주회는 이숙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 몇몇 가문의 의문을 받아들여 정식으로 대가주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의 이숙은 대가주의 거처에 살며, 대가주의 문장이 찍힌 서신을 보내고, 그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대가주라고 불리었다.

‘용아, 또 거기 있느냐.’

서재 앞에 서 있는 소년을 향해 반가움 가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소리를 따라 돌아본 용아가 웃으며 사내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남자가 달려드는 아이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숙부.’

‘잘 놀고 있었어? 오늘을 무얼 하였느냐. 아기는 만나 봤니?’

용아를 품에 안은 사내가 즐겁게 떠들었다.

‘예. 오늘은 아침과 저녁에 두 번 활을 쐈습니다. 낮엔 말 타러 갔고요. 저는 언제 검이랑 창을 배웁니까. 활 잘 쏘면 가르쳐 준다고 하셨잖아요.’

‘이 숙부가 시간이 나질 않는구나. 곧 가르쳐 주마.’

‘딴 사람이 가르쳐 주면 되죠. 숙부는 대가주라 바쁘시잖아요. 공야 아저씨나 동곽 삼촌에게 배우면 안 됩니까. 복양 할아버지도 시간이 많으시다고 했는데요.’

‘아니 된다. 이 숙부가 가르쳐 줄 것이다. 그치들보다 이 숙부의 실력이 훨씬 좋대도. 숙부 말을 믿지 못하는 거니?’

‘나중에 숙부가 모자란 부분만 가르쳐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돼. 처음부터 끝까지 꼭 숙부가 가르쳐 줄 것이다.’

웃음기 어린 고집스러운 말에 용아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퍼트렸다.

‘피이.’

대가주의 거처로 들어온 지 여섯 달. 이숙이 용아의 아비를 대신하게 된 지 아홉 달이 다 되어 간다.

‘아기는 만나 보았어?’

사내가 용아를 품에서 내려 주며 하문했다.

‘예.’

‘아기는 어떠냐.’

숙부의 어린 아들은 아직 아기에 불과했다. 함께 살게 될 때부터 그는 용아에게 아기가 어리니 네가 형 노릇 잘해 주어야 한다 당부했었다.

‘아기는 머리가 큽니다.’

사내의 물음에 용아가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

‘아기는…….’

아이의 천진한 말에 사내는 웃지 않으려 애쓰며 진지하게 표정을 억눌렀으나 쉽지 않았다. 웃음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는 숙부를 모르는 용아가 끝이 살짝 올라간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정말 머리가 커요.’

아기는 다들 그렇다 말하려던 대가주는 결국 주저앉아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웅크리고 앉아 자신을 끌어안는 숙부가 어디 아픈가 놀랐던 용아는 푸하하하, 웃는 소리를 듣고 걱정으로 물들었던 눈을 치떴다. 아기 머리는 진짜 크다고 다시 말하려는 용아를 품에 안은 사내가 조카를 어여삐 바라보며 웃었다.

‘용아야, 너를 어떡하면 좋으냐.’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숙부의 말에 용아가 재빨리 답했다.

‘어서 검술 가르쳐 주세요.’

소년의 매끈한 대꾸에 다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등 뒤에서 달려오는 발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도련님! 산실에서 찾으십니다!’

대가주의 서재 앞에 가 커다란 활을 보는 것은 용아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아기는?’

용아는 등 뒤에서 울리는 조급한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사내아이라 합니다.’

용아는 어린 노복 월사의 말에 멈칫했다.

‘……태어났어?’

월사는 어린 주인을 재촉하듯 당기며 답했다. 월사는 용아보다 서너 걸음 앞서 달리면서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숨을 쉬지 않는다 합니다. 하후가 의원들이 전부 산실 앞에 불려 왔습니다.’

개화를 거쳐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고 하나 사내가 출산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첫 아이가 아니니 수월할 것이라고 예측한 하후가 내의원의 말은 전부 거짓말처럼 빗겨 나갔다.

지독한 난산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산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용아를 가솔들 모두가 눈치만 보기에 잠시 자리를 비운 짧은 틈에 아기가 태어났다. 숨을 쉬지 않는 아기가 든 방으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안의 모든 의원 뛰어들었다. 산실 앞으로 온 용아를 총관이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도련님!’

‘아버지는……?’

용아의 물음에 답하듯 산실 안에서 울음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화아……! 화아 어디 있느냐……?’

하후가의 가솔들이 온몸으로 산실문 앞을 지킬 태세를 보였다. 옛 어른들은 산실에 부정한 것이 가득하니 허락 받지 않은 이는 들면 안 된다 하였다. 하후가와 십일 후족은 산실에 든 임부와 갓 태어난 아이는 연약하니 외부인은 함부로 산실에 드나들어서 안 된다 하였다.

‘아버지는 어떠하시냐.’

산실 앞을 지키고 있는 내의원 수장을 향해 용아가 물었다. 아이의 얼굴은 침착하나 목소리는 가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좋지 않으십니다.’

의원은 잠시 망설이다 곧 고했다.

‘열어라.’

가솔들은 이런저런 옳고 바른 이유를 들어 태어날 때부터 고귀함을 인정받은 아이를 말리려 했다.

‘도련님.’

‘만약 너희가 문을 열지 않아 내가 부친의 임종을 다시 지키지 못하면, 너희 하나하나를 기억했다가 후가주의 저주를 내려 주겠다.’

용아의 침착한 협박에 가솔과 의원 모두 주춤했다.

‘도련님!’

용아가 틈을 놓치지 않고 산실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소년을 낳은 사내는 아름답고 연약했다.

‘화아.’

만삭이 되어 배가 불러 온 그는 용아를 마주할 때 동생은 태어나지 못할 것 같다, 라는 허약한 말을 어린 아들에게 쓸쓸히 웃는 얼굴로 전했었다.

‘가지 마세요.’

아직 죽음을 알기에 용아는 너무 어렸다.

‘울지 마라.’

산실 안 침상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짙은 피 냄새가 공포를 자극했다. 두서없이 떨어지는 눈물과 내젓는 뺨 위로 새하얀 손이 겹쳐졌다.

‘울지 않을 테니까…….’

숙부들이 전해 준 하후씨 부친의 죽음은 현실감이 없었다. 그가 입었던 갑옷과 쓰던 무기는 집으로 오기에 앞서 깨끗하게 닦여 있어서 새 것 같았다. 용아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은 덜덜 떨렸지만 알겠다, 한마디 하는 게 전부였다. 당신의 배를 감싸고, 용아의 어깨를 보듬어 안으며 방으로 들어간 후에야 소리 죽여 울음을 쏟아 내었다.

‘내가 했던 말 모두 기억하고 있느냐.’

정인의 죽음에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 냈던 이는 웃으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억…… 합니다.’

용아가 울음을 억누르며 답했다.

‘어찌하라고 했지?’

‘숙부들의 말을 잘 들으라 했습니다. 대가주께서 가르치는 대로 잘하라고 하셨습니다…… 검술도 궁술도 채술도 말타기도 빼먹지 말고, 아버지, ……아버지 가지 마세요. 대가주께서 가르치는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라고…… 책도 보라고…… 아버지!’

‘대가주를 성심을 다해 따라, 화아.’

‘예…….’

‘대가주께서 네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려 줄 것이다.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 사랑한다, 아가. 우리의 빛나는 아이께서 함께할 정인을 보고 싶었는데 홀로 남겨 두고 가 미안해. 그대의 빛나는 정인을 뵐 때까지 강녕하시길…… 보고 싶을 거야, 화아.’

‘아버지!’

소년의 간곡한 부탁에도 감기는 눈을 붙잡을 수 없었다. 숨결이 거두어진 얼굴은 탈색된 것처럼 색을 잃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감긴 눈초리를 타고 뺨을 따라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부여잡고 용아는 영원히 그럴 것처럼 울고 또 울었다. 옛 선조의 지혜와 미신이 함께하는 하후가, 장군부 안에서 부덕한 것으로 가득한 산실 안으로, 허락받지 않은 이는 들 수 없는 신성한 산실 안으로 들어올 이는 없었다. 피 냄새 가득한 산실에 울음이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대가주 서재 앞에 선 용아가 말했다.

‘저리 가.’

차가운 목소리에 굴하지 않고 우유 향이 번져 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우물거렸다.

‘용화 형. 나하고…….’

‘저리 가란 말 안 들려?’

소년의 목소리에 귀찮음이 가득했다.

‘형이랑 놀라고…….’

품에 온갖 호사스러운 장난감을 탐욕스레 끼고 있는 아이가 다섯 살 위 사촌 형을 향해 꾸역꾸역 말을 이어 갔다. 용아가 끝이 살짝 올라간 눈을 무섭게 치뜨며 으르렁댔다.

‘저리 안 가냐.’

‘놀아 줘!’

‘저리 가!’

아이는 쌀쌀맞은 사촌형을 무척 따랐다. 다섯 살 위 사촌형은 못하는 게 없었다. 뭘 해도 잘 안 되는 아이와 달리 소년은 뭘 해도 잘 해냈다. 정화가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놀아 줘!’

아이가 소리를 내지르자 용아의 시중을 위해 곁에 있던 월사가 흠칫 굳으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대가주의 강성함과 대부인의 귀한 태를 빌어 난 대공자는 장자임에도 다음 대 대가주가 될 재목이라 벌써부터 말이 많았다.

‘이게.’

용아는 대가주의 외아들이 저도 모르게 내비치는 힘을 깨닫고 바로 발을 날렸다. 정화의 왼발목 옆면을 용아의 발등이 툭, 치자 아이가 균형을 잃고 곧장 나자빠졌다. 아이의 힘에 겁을 먹은 이들이 물러난 덕에 주위가 텅 비어 있었다.

‘엄, 엄마한테 이를 거야!’

‘이르긴 뭘 일러. 네가 못된 버릇 부리는 거 이실직고한다고?’

‘놀아 줘!’

‘저리 안 가!?’

‘우에에에에엥.’

‘콩알만 한 게 별것도 아닌 힘으로 약한 사람 위협이나 하고, 대가주께 일러 준다. 시끄러워! 안 그쳐? 숙부께 말하러 갈까!?’

용아가 아이의 손목을 붙들어 당기며 협박하듯 말했다.

‘…….’

정화가 부르르 뺨을 떨며 도리질을 해대며 버텼다. 콩알만 하다고 했지만 아이는 또래에 비해 많이 컸고, 용아 자신은 또래에 비해 작았기에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버티는 아이를 끌고 가기는 쉽지 않았다.

‘뭘 먹고 이렇게 큰 거야?’

용아의 툴툴거림에 정화가 서럽게 코를 훌쩍였다.

‘큰 거 아니야.’

아이는 큰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 힘껏 부정했다.

‘바보.’

‘바보 아니야!’

용아가 놀리는 말에 발끈하는 사촌 아우의 품에서 공을 빼앗으며 삐딱한 웃음을 지었다.

‘원래 바보가 자기 바보 아니라고 하는 거다, 바보야.’

‘정화 바보 아니라니까!’

아이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용아가 빼앗아 간 공을 공중에 띄워 올린 후, 무릎으로 치고 발목과 발바닥으로 연속해서 쳐올렸다. 울고 소리치던 아이의 시선이 공의 궤적을 따라 바삐 움직였다. 용아가 왼발에 축을 싣고 허리를 비틀며 허공에 떠 있는 공을 문밖으로 뻥 찼다.

저 멀리로 곧장 쭉 날아가는 공을 정화가 멍하니 바라봤다.

‘공 주워 와, 정화.’

용아가 날아가는 공을 보는 아이에게 말했다.

‘응!’

정화가 울었던 것도 잊고 품에 안고 있던 호사스러운 것들을 모두 내려 두고 공이 날아간 방향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형과 놀 생각에 신나게 달려가는 아이의 등을 보며 용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바보야.’

공을 주워서 정화가 돌아왔을 때 서재 앞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용화 형……? 형!’

정화는 공을 내려 두고 숨바꼭질인가 생각하며 밖으로 다시 달려갔다.

대가주는 황가로 언제 떠날지 모르는 조카를 과분하도록 아꼈다. 하후가 대가주 저(邸) 옆의 빈 땅과 집들을 사들여 대가주 저만큼은 아니나 적지 않은 규모의 별저를 지어 조카의 생일날 선물하셨다. 황가로 간 후에도 이곳에 네 집이 있으니 언제든 오라는 뜻으로 주는 것이라 하였다.

대가주는 황궁 내원의 주인이 될 조카의 특성을 고려하여 함께 수학할 이들을 엄선했고, 스승을 요청하고, 조카의 청에 따라 별저에 흔쾌히 서각까지 지어 주었다.

조카를 보살핌에 있어 대가주가 가장 신경 쓴 것은 삼중사 중으로 둘러싼 방비였다. 대가주 저와 별저가 이어져 있다 하나 바깥출입에 버금가는 먼 길을 걸어야 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탓에 자연히 용아의 주위를 힘깨나 쓰는 이들이 지키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도록 촘촘히 방비를 둘러쳤으나, 사람의 호승심을 완전히 막기란 어려웠다.

대가주의 조카에게 손발을 휘둘러 무력을 내보이는 단순한 자는 없었다. 지켜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고, 대가주의 조카에게 잘못 손을 대었다가 뒷일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기에 보이지 않는 장난질을 거는 것에서 그쳤다.

대가주 댁 도련님.

장군부 내에서 용아를 부르는 호칭은 다양했다. 하후가의 호위를 맡고 있는 무관들 사이에서는 도련님으로 통했다. 도련님에게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었다. 황궁 내원의 주인이 되실 분인 탓인지, 도련님은 후족, 장군부 고귀한 혈족의 권능이 통하지 않는다 하였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개화를 거칠 이이건, 개화와 무관한 이이건, 혈족 외의 이이건 권능 앞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었다. 후족의 힘에 비견할 수 있는 황족조차 주춤되거나 하다못해 불쾌감이라도 드러내었다.

‘흡!’

별저 후원에서 볕을 맞으며 책을 보는 용아 곁의 월사가 멈칫했다.

‘월사, 열 걸음 물러나도 좋다.’

대가주 저와 별저를 오갈 때 숙부는 어린 조카에게 호위가 있어야 안심할 것 같다 하였다. 용아도 동의했다. 호위를 보내기에 앞서 대가주이신 숙부께서는 거친 무장들이 힘없는 어린 주인에게 저급한 장난질을 칠 거라 경고하며, 용아 스스로 잘 처리해 낼 것이라 믿는다 말하셨다. 용아는 흔쾌히 걱정 마시라 답했다.

‘…….’

용아는 그것을 신고식이라고 칭했다.

‘첫날인가.’

용아는 월사를 물러나게 하고,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별무대 소속 교백은 대가주 조카의 말대로 오늘이 호위 첫날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늦은 것 같지만 발뺌을 해야 하나 교백이 고민하고 있을 때.

‘…….’

용아가 책을 접으며 얼굴에 웃음을 띠웠다.

‘꿇어라.’

대가주 댁 도련님은 소문대로였다. 서서히 조심스레 접근했지만 적잖은 강도의 힘을 내보였는데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교백은 용아의 곁에 서 있다가 너무도 단호한 명에 저도 모르게 어린 주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도련……’

교백은 무어라도 말해 보려 했다.

‘손을 잘라 줄까, 발을 잘라 줄까, 아니면 봐줘서 귀를 자르고 말까.’

열 살 소년이 하기에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도련님…….’

의자에 깊숙이 허리를 붙이고 앉으며 용아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보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보일 터였다.

‘누가 말하라 했지?’

송구하다 죄를 청하려던 교백은 또 말하려다 눈짓을 주는 어린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

‘호위로 차출될 때 본 공자 앞에 쓸모없는 힘쓰지 말라 경고를 듣지 못했나? 너희는 가진 힘을 드러내지 않으면 병이라도 걸리느냐. 열이면 열 모두 개수작이라니. 한심스러워서 원. 힘이 넘칠수록 머리가 나빠지나?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해라. 손, 발 둘 중 뭐로 하겠느냐. 아까 내 말에 끼어들려 해서 봐주고 싶지 않아졌다.’

손이든 발이든 무장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들이었다.

‘도련님……!’

교백의 말과 동시에 용아가 팔을 휘둘렀다. 촤악! 날카로운 소리가 교백의 웅크린 몸 바로 옆에서 울렸다.

‘다음에 허락 없이 말하면 진짜로 채찍질을 할 것이다. 본 공자 앞에서 허락 받지 못한 힘을 드러내도 마찬가지다. 자, 이제 대답해 봐. 손, 발, 둘 중 뭐.’

교백은 방금 전 날선 소리에 주위의 시선이 쏟아진 걸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손과 발. 둘 중 하나만 택해 말할 수 있는 상황이나 손도 발도 잘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행패를 부리는 것은 더 불가능했다. 상대는 하후가의 적통이며, 대가주의 조카이자, 황가로 혼인을 떠날 고귀한 혈통이었다.

‘도련님, 소관의 무지를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것입니다!’

교백의 외침에 적당한 거리마다 서 있는 본 다른 호위들이 나직이 침음했다.

짝!

소년은 경고의 말도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교백은 어설피 저항하기보다 완전히 납작 엎드려 새 주인의 화가 풀리기만을 바랐다.

촤악, 짝! 채찍질 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다시 어설픈 짓 하면 말도 없이 끌려가는 수가 있다.’

용아의 말에 피투성이가 된 등이 움찔거렸다.

‘…….’

주인의 허락 없이는 말할 수 없었다.

‘너희 믿을 건 튼튼함뿐인가 보다. 재미없게. 으, 손 아파. 그런 꼴로 호위를 설 수 없으니 가내 의원에게 가 봐라. 약 발라 줄 게다.’

용아가 채찍을 월사에게 던져 버리며 손을 내저었다. 채찍을 받아 의자 등받이 고리에 건 월사가 상처투성이가 된 무관을 능숙하게 일으켜 후원을 빠져나갔다.

‘갈수록 매질이 현란해지시는데.’

‘소리도 점점 더 차져.’

‘미리 아무리 경고해 줘도 들어 먹질 않는 이유가 대체 뭘까.’

후원 문을 지키는 세 무관들이 낮춘 목소리로 쑥덕거렸다.

‘우리가 그런 말할 처지인가.’

셋 모두 앞서 본 신고식을 치른 선배들이었다.

‘도련님이 허술한 매력이 있는 건지도 몰라. 평소에 하도 아랫것들 순한 얼굴로 보듬어 주시니 조금 기어올라도 봐주겠거니 하게 되잖아. 그래서 선을 넘으면 촤악촤악!’

관택의 격한 말에 용아가 시선을 돌렸다. 돌아보는 용아를 본 관택이 창을 들지 않은 손을 내어 휘휘 저었다. 용아가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손을 살살 저어 주었다.

‘봐 봐. 엄청 관대한 주인 같잖아?’

관택은 용아가 손을 내릴 때까지 휘휘 흔드는 팔을 내리지 않았다.

‘실제로 관대한 주인 아니냐. 월사가 말하길 도련님이 홀로 식사할 때 월사랑 같이 식사한다더라.’

‘그 녀석 말을 믿냐. 그거 완전 사기꾼 아니야? 지금쯤 교아우도 한참 농락당하고 있겠지. 불쌍한 놈. 월사 말에 홀랑 넘어가면 안 되는데. 월사 그것이 항상 전혀 경계하지 않고 있으니, 조금만 예기를 퍼트려도 바로 컥컥 해서 도련님한테 신호 주는 거잖아. 아, 아니지. 걔도 도련님한테 채찍질 당했나? 그나저나 도련님은 뭘 어떻게 배웠기에 저럴 수 있지. 웬만큼 힘 못쓰면 창칼 들고도 못 이기겠어.’

‘못 들었냐. 대가주께서 조카를 엄청 예뻐하셔서 웬만한 힘쓰는 것들 얼쩡거리지 못하게 활시위 먹이는 것부터 칼 잡는 법, 고삐 쥐는 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다 가르치셨다더라. 도련님이 하도 잘 따라서 가주회에 가서도 조카 자랑만 하다 오신다더만. 조카 사랑이 하도 대단해서 황실에서 도련님을 부를 때 대가주가 불복할까 봐 다른 가문에서 걱정이 많대.’

세 사람은 호위가 온 것도 잊고 수다에 빠져들었다.

‘대가주가 도련님을 그리 좋아하신대?’

낮게 깔린 어린 목소리가 속닥거렸다.

‘그렇다니까, 여태 뭘…… 헉. 도, 도련님.’

용아는 자신을 보고 경계 태세를 갖추는 무관들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안 때려.’

‘압, 압니다.’

세 무관은 용아가 나오는데 왜 아무도 알리는 사람이 없지 의아해하다가 방금 전에 교백이 월사의 부축을 받아 나간 걸 떠올리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저희 도련님이 어떤 분인지 소관들이 더 잘 압지요.’

‘응, 채찍질하는 주인이잖아.’

‘때…… 때리시려고요?’

‘안 때린다니까. 대답은 안 해? 대가주께서 나를 그리 좋아하시냐니까.’

‘도련님도 차암. 다 아시면 뭘 물어보십니까. 대공자보다 도련님을 더 예뻐 하신다 뒷말 도는 거 모르십니까.’

관택이 눈썹을 꿀렁꿀렁 폈다 접었다 하며 답했다.

‘숙부께서 용아를 어여뻐 하시지. 나도 알아. 집에 가자.’

용아가 별저 문을 나섰다.

‘서재로 모실까요.’

관택의 물음에 용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주께서 출타하셨는데도 서재로 가십니까.’

무관의 의아한 말에 용아가 다시 말없이 끄덕였다. 호위는 별저에서 대가주 저 앞까지면 충분했다. 세 무관은 여기까지면 되었다 일별하려는 용아의 곁을 따라붙어 대가주의 서재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항상 서재를 찾으시네.’

‘서재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서재 앞의 활을 보시는 것이라더라.’

소년의 등을 보며 무관들이 말을 주고받았다.

‘…….’

대가주의 서재 앞 벽에 걸린 커다란 활을 보는 용아의 얼굴은 언제나와 같았다. 고요하고, 깊이 집중하고 있었다. 커다란 활에 시선을 준 것은 무의적인 행동이었다. 뜻 없는 관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만위는 거창을 주로 쓰는 일족이라고 했다. 활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나 전략적으로 꼭 필요할 때만 쓴다 스승은 말하였다. 장군부 대가주가 될 뻔한 부친은 만위와 맞닿아 있는 곳에서 추격전 중 화살을 맞아 생을 달리했다. 이숙의 애병기는 활이었다. 그래서 만위는 이숙이 대가주가 되고자 했을 때, 대가주가 되심을 경하드린다 축하하며 가장 먼저 이 커다란 활을 보내왔다.

깨달음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깨달았을 때 이미 모두 끝난 후였다. 소년을 지키고 길러 준 것은 부친을 죽인 원수이고, 원수는 소년의 진정한 어버이가 되어 있었다. 깨달음으로서 소년은 세상에 오롯이 홀로 남게 됐다.

태감 총관 좌첨은 숨을 가만히 억눌렀다.

“지금 뭐라 했느냐.”

고요한 전각 안이 더 깊은 고요에 감싸였다. 찻잔의 입구를 찻잔 뚜껑으로 우아하게 쓰다듬던 소리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황제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옆으로 치우고 웅크리고 있는 태감을 향해 몸을 돌렸다.

태자가 만호대를 행궁으로 불러들였다. 황궁과 황가 종친의 거처에 최고 수준으로 방비를 올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황도 전체가 전시나 다름없는 경계에 들었다. 제관부 가솔들에게 금족령이 내려지고, 제관부를 지키고 동시에 감시할 병사가 보내졌다. 제관의 입출입이 전면 금지되었다.

황궁으로 돌아오고 있는 태자 일행은 영호대 기병, 천병대 보병, 만호대 기병과 보병의 사중 경계를 두르고 이동 중이었다.

태자가 내린 하명 중 잘못된 것은 없었다.

“진족 중 일부가…….”

좌공공이 눈치껏 내뱉은 말에 황제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걸 말한 게 아니란 뜻이었다. 태감의 물음이 담긴 시선에 황제가 험악한 웃음을 퍼트렸다.

“신부 사냥이라니.”

포식자의 음성에 공공이 몸을 깊이 낮췄다.

“부, 부디 고정하시어 옥체를 보하소서, 폐하.”

황제의 분노가 사방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잠시 물러가 있으라.”

“황공하옵니다.”

자애로운 황제의 명에 좌공공은 재빨리 몸을 물려 전각을 벗어났다. 그를 따라 뒷걸음치다 내달리던 궁인들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위협이 점점 더 거세졌다.

“신부 사냥! 감히 제깟 놈들이 신부 사냥!?”

전각 안에서 위엄 넘치는 화가 터져 나왔다. 태자에게 정무 중 많은 부분을 넘겨준 후로 황제의 예민함이나 잔혹함은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다 하나 예전의 거친 성정이 어디 간 것은 아니었다.

좌첨은 이미 고해 올린 말과 아직 고하지 못한 말을 부지런히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사방에 떨쳐지는 황제의 권능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천만다행으로 태자가 신부 사냥임을 알고 강경하게 초기 대응을 해 피해가 없었던 것이지 어영부영 받아 주었으면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을 터였다. 중경의 왕공 자제 중 내원에서만 머무는 귀하신 분들과 중경 밖 황족 방계 중 중심이 되는 이들의 내원 후손을 빼앗겼으면 앞으로의 정국이 어떻게 흐를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지게 된다. 경황없이 당한 기습과 난전 중에 죽은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인명 피해도 싸움의 규모에 비해 크지 않았다.

가장 많이 심하게 다친 건 누구도 아닌 태자비이기에 혹여 가족 중 목숨을 잃은 이가 있다 해도 황실에 대한 반감은 없을 것이다.

“게 있느냐!”

전각 안에서 들려오는 거친 소리에 태감이 달려들어 갔다.

“예있사옵니다.”

“들라.”

“송구하옵니다, 폐하.”

공공은 혹여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까 숨조차 조심히 쉬며 안으로 들었다. 황제의 얼굴에는 여전히 험상궂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신부 사냥 이후부터 고하도록 하라.”

“예, 폐하. 공격이 시작된 직후 태자비께서 신부 사냥임을 아시고 태자께 알린 덕분에 황가 종실들의 피해는 일체 없사옵니다. 사망한 이는 조정 대신 중…….”

“잠깐. 태자비가 신부 사냥을 어찌 아느냐.”

“태자비 전하께 직접 들은 것은 아니오나 노복의 생각으로 제북은 옛 신부 사냥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장군부 내에서 모의 기습을 절기마다 치르는 풍습이 있으니 신부 사냥에 대해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장군부는 인근에 거점을 둔 뿌리가 같은 일족들로부터 신부 사냥의 위협을 여전히 받고 있습니다. 후족 내원 깊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위협이 미치지는 않겠으나 중경보다는 훨씬 더 위험한 환경이라 할 수 있지요.”

“태자가 태자비의 말을 잘 들어 주었나 보구나. 헌데 어쩌다 태자비만 그리 심하게 다친 게야. 가장 먼저 몸을 피해야 할 이가 가장 앞에서 미끼 노릇을 자청했다니, 태자와 종친들은 정신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아이를 기절 시켜서라도 깊숙한데 숨겨 두었어야 할 게 아닌가!”

황제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툴툴대었다.

“태자비께서 무위가 대단하셨다 합니다.”

“그렇겠지. 제북 대가주가 황도에까지 말이 들릴 정도로 끼고 돌며 손 붙들고 가르쳤다니 오죽 대단하겠어. 아니, 그렇다고 내원에 들 아이가 칼 들고 휘두르게 하나? 종친이란 것들이 말이야, 그래선 안 되지. 황족으로 살아간다는 게 뭐야. 칼 날아올 때 제 몸이라도 들이대서 막아야 하는 거 아니겠느냐.”

“언준의 말에 따르면, 비전하께서 국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3인 합격술을 들고 나온 진족 무사들을 쉽게 와해 시켰다 합니다. 말 전한 이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비전하가 칼 두어 번 휘두르면 중심축이 되는 공격자가 무너지며 순식간에 연환 공격이 깨어진답니다.”

“대가주가 그런 것도 가르쳤나?”

“그런 게 아닐까요.”

황제와 좌첨이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친정에서 배워 온 걸 물어보면 못된 시부가 되겠지.”

“예.”

황제의 조심스러운 말에 좌첨이 곧바로 답했다.

“물어볼 순 있지 않나?”

“아니 된다 사료되옵니다.”

좌첨이 거듭 반대했다.

“절대?”

“절대 아니 될 일이라 생각되옵니다.”

좌첨이 평소의 수더분함을 찾아볼 수 없는 깐깐한 얼굴로 답했다. 황제가 삐친 아이처럼 표정을 구기며 투덜댔다.

“이런 건 부군인 태자가 사이좋을 때 넌지시 물어보아야 하는데, 못난 놈. 아이들은 언제쯤 온다던가.”

“한 시진 내로 황도에 드실 것이옵니다.”

“태의들을 동궁 앞에 기다리게 해 오가는 시간을 줄이고, 태자의 요청이 있으면 무엇이든 들어주도록 하라. 행궁의 사건은 전부 태자에게 일임하겠다 전하는 것도 잊지 말라. 왕공과 그의 자제들이 알현을 청하면 시와 때에 상관없이 짐에게 알리도록 해라.”

황제의 명에 태감이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명을 따르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귓가로 적막과 정연한 말발굽 소리가 오갔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사나운 말발굽 소리에 이어지는 격렬한 반동과 거친 바람 소리가 없는 게 너무도 낯설었다. 잘못 들었나 생각 들 만큼 조심스러운 말발굽 소리와 희미한 흔들림 속에서 용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느리게 열린 시야로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이 보였다.

“일어났느냐.”

윤제가 힘겹게 깨어난 얼굴을 향해 말했다. 남자의 얼굴 뒤로 전각의 천장만큼은 아니지만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는 천장이 있었다.

“……전하…….”

메마른 목 안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움직이지 말고 대답만 해라. 우선 네 상태는 왼쪽 팔뚝엔 부목을 대어 둬 손목 위로는 움직일 수 없고, 오른손 손바닥에 다섯 겹이나 감싸 둬 주먹을 쥘 수 없다. 그곳 외에 어디 아픈 곳 있느냐?”

마른 입술이 내저어졌다.

“여긴, 어디……!”

질문을 하던 목소리가 당황으로 끊겼다. 용아는 무심결에 돌린 시선 끝에 남자의 어깨가 있는 걸 보고 자신의 몸이 윤제의 무릎 위에 있는 걸 깨달았다.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용아의 이마를 가볍게 눌러 일어나려는 몸을 눕혔다.

“그대로 있어라. 출혈이 심하고 상태가 중하니 자세를 고정해야 한다.”

“내, 내려 주십시오.”

“혼자 두면 팔다리 가누지도 못하는 녀석을 어떻게 내려 둬. 내가 말한 곳 외에 더 아픈 데 없으면 잠이나 더 자라. 얼마 남지 않았다.”

윤제가 등을 안은 팔로 어깨를 조심스럽게 다독이며 말했다.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언준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이상하도록 가까운 곳에서 울리는데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무슨 일이냐.”

“황성입니다.”

“동궁 앞까지 이대로 유지한다.”

“예, 전하.”

윤제의 명에 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낮은 것은 이상할 게 없지만, 멀어져 가는 말발굽 소리가 기묘할 정도로 거리감이 있었다. 오가는 말로 보아 이동 중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동하는 마차에 탄 기분이 아니었다. 잘 닦인 관도를 달리고 있을 테니 덜컥거림이 덜할 수 있지만 고요해도 너무 고요했다.

“……여기 어디예요?”

용아가 아까 건넸던 질문을 다시 내뱉었다.

“마차 안이다.”

윤제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얼굴로 답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해요.”

잠에서 깬 직후부터 품고 있던 의문을 내뱉자, 웃음이 돌아왔다. 몹시 불길했다. 장군부 대가주 집안에서 태어난 용아 역시 귀하게 보살핌을 받았지만 황족만큼은 아니었다.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난 이들은 때로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희생시켰다.

“신경 쓸 것 없다. 잠이나 자.”

남자가 선선히 웃으며 하명했다.

“설마, 마차가 아니라 사람이 들고 가는…….”

“그럴걸 그랬나.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의외로 장군부에서 아랫사람을 혹독히 부리는가 보다. 내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에는 그리해 주마.”

윤제가 태평스레 웃으며 말했다. 시시덕거리는 말에 용아가 칭얼대는 아이처럼 그를 불렀다.

“전하.”

“피를 하도 쏟아서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랄 정도다. 그만 자라.”

커다란 손이 걱정 가득한 용아의 눈가를 뒤덮었다. 강제로 어둠이 내리자, 억지로 밀어 두었던 잠이 몰려왔다. 잠이 들기 직전까지 대체 무얼 한 거냐고 물으려는 집요한 입술 위로 웃음이 실린 숨결이 울렸다.

정적 속에서 가만히 웃음을 흘리던 얼굴이 금세 표정을 굳혔다. 윤제는 품 안에 든 반질반질한 암녹색 도자기의 흔적을 떠올렸다. 그의 손에 가려져 있는 얼굴이 말하길 제북 장군부 하후가의 비술을 담고 있는 것이라 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 사용된 약술을 아는 것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제 힘으로 전부 파악해 낼 수 있는 약술이 아니었습니다. 수면을 유도하는 향과 일시적으로 환시를 보게 하는 향 외에 적게는 십 수개, 많으면 수십 개의 약제가 이용된 게 아닌가 추측만 가능하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특이한 기화요초가 많고 아무리 약술에 비상할지라도 여기에 이용된 약제 중 특이한 것이 많기에 대량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시야를 가리고 오감을 둔하게 만드는 연기는 황족에게 크게 피해를 끼치지 못하는 반면 진족이 던지고 간 것은 황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만큼 더 깊이 조사하겠사옵니다.’

‘수고해 주게.’

조사를 맡은 약제사에게 명을 내리긴 했지만 별반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보다 하후가의 비술에 대해 말한 파리한 얼굴이 지난 며칠간 앓으며 내뱉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숙부.

찡그린 얼굴이 애달프게 속삭인 말의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먼 곳에 있는 혈육을 그리워해 부르는 것인지, 하후가 비술이 담긴 특이한 무기를 진족의 손에 넘겨준 대가주에게 분노하여 부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숙부를 찾으며 잘게 떨리는 차가운 손을 윤제가 붙들면 따듯한 온기를 찾아 메마른 손이 매달리는 것처럼 엉켜들었다. 애정을 갈구하는 가련한 아이 같은 몸짓이었다.

잠이 든 손안에 윤제가 손을 가져다 대자 마른 손가락들이 얽혀 들었다. 며칠 사이 익숙해진 것인지 붙드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낯설지 않았다. 잠이 든 손과 고민이 많은 손이 얽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나직한 소리가 건네졌다.

“전하, 숙의문 앞입니다.”

선도하는 말이 멈추는 소리와 말을 다독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도착했다는 말과 함께 예의 바른 소리들이 줄을 이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내릴 준비를 하던 윤제의 반듯한 눈썹이 살짝 굳어 들었다. 억지로 잠재운 얼굴이 분분한 인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전하……?”

“더 자.”

윤제가 품에 용아를 안은 채 마차에서 내려섰다. 잠에서 깬 얼굴이 당황으로 허둥거렸다. 윤제가 버둥거리려는 몸을 단단히 안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남자의 성큼한 걸음에 주위 풍경이 빠르게 스쳐 갔다. 입에 하얀 천을 물리고, 네 발에 두터운 천을 덧댄 말이 이끄는 육두마차가 시선을 끌었다. 육두마차의 말뿐 아니라 선도하는 말과 주위의 모든 말이 입에 재갈을 물고, 네 발에 천을 덧대고 있었다.

“……전하…….”

윤제는 팔에 힘을 더할 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영화대로 간다.”

“예, 전하.”

태자의 하명에 태감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용아가 더 무어라 말하려 할 때 가물가물한 얼굴 위로 짧은 말이 내렸다.

“잠이나 자.”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저도 걸을 수 있습니다…….”

용아가 투덜거리고는 얼굴을 옆으로 기울였다. 뺨에 닿는 단단한 팔의 감촉이 싫지 않았다. 남자의 말대로 잠이나 자는 게 좋을 듯했다. 눈을 감자, 그대로 암전이었다.

동궁전 입구에서 영화대까지 태자비를 안고 걷는 태자의 뒷머리로 수많은 시선이 조심스레 던져졌다가 물러났다. 윤제는 뒷머리와 뒷등으로 쏟아지는 시선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영화대로 향했다. 얼굴을 못 알아보도록 부쩍 자라났지만 키만 커졌을 뿐 품에 안은 몸은 가볍기만 했다.

“드소서.”

까무룩 잠이 든 용아를 훔쳐 본 모장이 살짝 웃는 얼굴로 태자를 맞았다. 태자가 동궁전 앞까지 태자비를 온 정성으로 데려오는 것만으로 기쁜 일이었다. 영화대까지 친히 데리고 오는 것은 정말이지 예상 밖이었다. 최근 사이가 급격히 좋아지고 있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다감한 태자의 모습에 영화대 궁인들은 걱정을 하면서도 웃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태의는?”

“고태의가 곧 올 것입니다.”

“나가 보거라.”

갈 기색 없는 태자의 말에 모장이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예.”

잠이 든 주인을 깨우지 않도록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물러나는 상궁을 보며 윤제가 뜻 모를 숨을 훅 내뱉었다. 전각 밖으로 나오던 모장이 은밀히 웃음을 퍼트리는 궁인들과 함께 웃음을 퍼트렸다.

고태의가 오면 안으로 데려가기 위해 밖으로 향하던 상궁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모장의 시선이 등 뒤의 전각에 닿았다. 둘의 사이가 좋으면 당연히 기쁜 일이지만 그녀들이 바라는 애정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황궁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모장이 아는 황족이 짝이 된 반려를 대하는 태도와도 다소 달랐다.

뭐더라.

사람의 욕심이 참으로 끝도 없었다.

“차차 나아지겠지.”

모장은 미묘한 불안을 떨치고 부풀어 오른 기분을 다독이며 웃는 얼굴로 걸음을 이어 갔다.

긴 잠에서 깨어난 용아가 멈칫했다. 열린 시야로 눈을 감기 전에 보았던 얼굴이 보였다. 눈을 뜰 때마다 같은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당황스럽고 황망했다.

“전하……?”

용아의 부름에 윤제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어째서 또 일어났느냐.”

“여기…….”

“네 방이다. 보면 모르냐. 얼른 잠이나 자라. 태의 말이 무조건 절대 안정하란다.”

“전하.”

“왜 또 불러.”

용아는 불필요하도록 가깝게 있는 얼굴을 보며 입술을 멈췄다. 윤제와 알고 지낸 지 제법 됐지만 이토록 가까이 있는 건 드물었다.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순간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좋지 않은 때였다.

“정무 안 보십니까.”

다 갈라진 목소리가 무심히 말했다.

“알아서 잘하고 있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거리낌이 없었다.

“여기서요?”

“그만 떠들고 자. 지금 내 가장 큰 정무는 너를 일으키는 것이다.”

윤제의 말에 잠시 정적에 휩싸였던 용아가 무언가 깨달은 듯한 얼굴로 편히 목을 기댔다. 감은 눈이 전보다 조금 편해 보였다.

“어명이라도 받으셨습니까.”

황제께서 명이라도 내리셨나 보다 싶어 미안한 마음을 거두었다. 옆으로 기운 뺨 위로 커다란 손이 내렸다. 뺨에 닿는 온기에 감은 눈은 움칫 떨렸다.

“금방 나야져야 할 텐데.”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가 싫지 않았다.

“…….”

감겼던 눈이 소리 없이 뜨였다.

“필요한 게 있느냐. 어디가 불편해? 태의를 불러 줄까.”

용아의 말없는 시선에 윤제가 살뜰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용아가 느릿느릿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시 눈이 감겼다. 기대는 뺨 위로 의아한 기색이 담긴 남자의 커다란 손이 내렸다. 뺨으로 내리는 온기가 낯설고 어색했다.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란 것은 알았다.

“무겁습니다.”

살짝 열린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힐끗 뺨을 덮은 손을 가리켰다.

“어서 나아야 할 텐데. 손 하나조차 무겁다니 큰일이다. 태의 부를까? 새해 내내 탕약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

윤제가 걱정스럽게 투덜거렸다. 뺨을 덮고 있던 커다란 손이 머리칼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이마로 옮겨 갔다.

“간지러워요.”

용아가 눈썹 끝을 구기며 웅얼거렸다.

“예민하기는.”

윤제는 투덜대면서도 더 조심스레 움직일 뿐 머리칼을 정리하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용아가 희미하게 꼬물거렸다. 얼굴에 닿는 온기를 피하려는 몸짓이었다. 세상에 오롯이 혼자라는 걸 깨달은 이후로, 어느 계절이건 용아는 늘 추웠다. 온전한 혼자란 것은 늘 애정을 고프게 했다.

마음이 몹시도 허했다.

빈 땅 위에 혼자만 있는 나날이 이어졌다. 숙부가 주는 따듯함은 현실이되, 허상이었다. 모장과 궁인들이 주는 관심은 진실이되, 용아가 지켜 주고 책임져야 할 관심과 애정이었다. 지금 이 온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의아했다. 단순한 착각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 마요…….”

용아가 나지막하게 웅얼댔다.

“응?”

윤제의 속삭임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이 고요했다. 쌔근쌔근한 숨소리만 울렸다. 내내 손길을 피하던 창백한 얼굴이 따듯함을 찾아 기대었다.

용아는 잠에서 깰 때마다 보이는 얼굴에 숨을 들이켰다.

“뭡니까.”

다 쉰 목소리가 허탈하게 울렸다.

“뭐가.”

윤제가 꼿꼿하게 앉은 모양을 유지하며 대꾸했다.

“태자 전하.”

“어.”

“일 안 하십니까.”

꼬장꼬장한 웃전 같은 말은 하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피를 그만큼 쏟았으니 힘이 남아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알아서 한다지 않아.”

“저는 괜찮습니다.”

“네가 의원이냐? 괜찮은지 아닌지 알게. 허튼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깬 김에 약 먹고 자라. 꼼짝하지 마라. 밖에 있느냐.”

윤제가 사람을 부르며 움직이려 하는 용아에게 으름장을 놨다.

“…….”

용아는 입을 떼려다 말았다. 누워 있으면서도 설마 했는데, 의심한 바대로 내내 윤제의 무릎 위에 누워 있었다. 꼼짝하지 말라고 경고를 한 후에야 용아를 일으켜 앉힌 남자는 제 무릎과 용아의 등 사이에 있던 덧대는 베개를 용아의 등과 침상 기둥 사이에 빼곡히 채워 넣었다. 거기다 용아가 세 살 배기 아이라도 되는 양 앉힌 몸에서 손을 떼며 몇 번이고 망설였다.

“찾으셨습니까.”

“약 가지고 오너라.”

“예, 전하.”

모장이 바람처럼 달려와 명을 듣고 물러갔다. 서운할 정도로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상궁의 뒷모습을 용아가 멍하니 바라봤다. 다반을 들고 돌아온 모장은 여전히 태자의 명에만 집중했다.

누구 상궁인지 모르겠네.

용아의 눈초리가 섭섭함에 치켜 올라가려 할 때 시선을 낮추고 있던 얼굴이 살풋 웃음을 건네 왔다. 용아는 마주 웃으려다가 관뒀다. 피를 몇 사발은 쏟았다는 윤제의 협박이 거짓이 아닌 모양인지, 조그만 움직임에도 앞이 휘청거리는 기분이었다.

“약 먹자, 용아.”

“제가…….”

“한 번에 쭉 마셔.”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약이 담긴 그릇이 입술에 대어졌다. 얼굴을 뺄 수 없도록 커다란 손이 옆머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힘으로 몰아치거나, 강제로 약을 들이붓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렁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배려해 주면서도 도망칠 틈은 주지 않았다.

용아가 입술을 열고 약을 들이켜자 윤제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약은 끔찍하도록 썼다. 빈 사발이 치워지기 무섭게 용아가 얼굴을 잔뜩 구기며 몸서리를 쳤다. 위태롭게 휘청대던 시야가 휙 쉽게 꼬꾸라졌다. 허무하게 기우는 용아의 몸을 옆머리를 붙들고 있던 손이 가볍게 지탱하며 어깨로 재빨리 받아 냈다.

“……!”

까무룩 사라지는 시야에 아찔해졌다가 순간 받아 내 주는 몸에 안도하던 용아는 남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걸 깨닫고 안간힘을 써 댔다.

“괜찮아?”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네…….”

무엇보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워야겠다.”

용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고집 부리다가 주위만 번다하게 할 게 뻔했다. 이 이상 추태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윤제가 눕혀 주는 대로 순순히 누웠다. 등 아래에 푹신한 것이 잔뜩 깔려 있었다. 포대기에 감싸인 아기라도 된 것 같았다. 잠이 든 사이 몸부림을 치다 상처를 악화시킬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과해도 너무 과했다.

태자 무릎을 침상 대신 쓰다니 이런 호사가 없을 터였다. 시야가 선명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머리를 누이기 무섭게 잠이 쏟아졌다.

곤혹스럽고 사치한 삶은 계속되었다.

“…….”

창백한 얼굴이 입술 앞에 멈추어 있는 백자기 숟가락을 보며 머뭇거렸다. 마실 수 있는 미음까지는 탕약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떠먹는 죽이 되자 모양새가 확 달라졌다.

“배 안 고파?”

숟가락을 입술 앞으로 더 들이대며 윤제가 말했다. 너무도 익숙한 태도로 숟가락을 내미는 남자를 용아가 입술을 모은 채 바라봤다. 열린 듯 말 듯한 입술 앞으로 숟가락이 다가왔다.

“모장이…….”

“모 상궁 바쁘다.”

용아의 우물거리는 말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모장이 바쁘긴 했다.

태자가 거의 영화대에서 살다시피 하니 당연히 궁인의 할 일이 늘어났다. 거기다 용아 자신이 아프니 사소한 빨래부터 탕조를 들이는 것까지 본래도 번거로운 일이 몇 배는 더 귀찮아졌다. 숟가락을 들이대는 윤제를 보던 용아가 모장이 있을 법한 곳을 빤히 쳐다봤다. 남자의 시선이 용아가 보는 곳으로 움직인 틈에, 오므리고 있던 입술이 숟가락을 부드럽게 쓸고 물러났다.

기분이 참 괴상했다.

손끝에 전해지는 무게감에 윤제가 시선을 제자리로 돌렸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숟가락에 담겨 있던 것이 사라졌다. 창백하고 무뚝뚝한 얼굴이 윤제를 물끄러미 봤다.

“……왜 이렇게 잘해 줘요……?”

다음 숟가락을 뜨던 윤제가 멈추었다. 남자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고소한 죽을 듬뿍 담은 숟가락을 내밀며 그가 말했다.

“형이 잘해 준다고 했잖아.”

가볍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

용아는 말을 한 직후 곧장 후회했지만 이미 내뱉은 후라 도로 담을 길이 없었다. 민망함과 쑥스러움으로 고민하던 얼굴이 대수롭지 않은 말에 다시 가만히 시선을 던졌다. 망설인 끝에 한번 거르고 건넨 말이라 그나마 다행이지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다면 비교할 수 없이 수치스러운 말을 내뱉을 거라는 자기 위로가 순간 사라졌다.

나한테 왜 잘해 줘요.

부끄러운 말에 기대하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말이야 쉽지 잘해 주겠다, 귀하게 아껴 주겠다, 서로 예를 다하겠다는 것을 지키기란 어려웠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넉넉하게 지켜 내는 남자가 내민 숟가락을 으쓱였다. 어서 먹으란 뜻이었다. 시선을 피한 채 용아가 얼른 내밀어진 숟가락을 입술로 훑었다.

묘한 시간이 흘렀다.

윤제가 숟가락을 내밀면 용아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따랐다.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약까지 먹고 나서야 남자가 물러났다. 잘했다, 칭찬하듯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매만졌다. 귓가에 닿는 따스함에 고요하던 얼굴이 부드럽게 들썩였다.

“용아? ……왜 울어. 아파 서러워서 우는 거냐. 인마, 그러게 누가 그리 무식하게 손바닥을 칼로 썰래. 네 손 네가 썰었다면서 얼마나 깊이 베었기에 상처를 보자마자 태의가 죽여 달라고 애원을 하냐. 용용아. 왜 우냐니까. 다 커서 수발 받는 게 수치스러워서 그래? 네가 양손을 다 못 쓰게 만들 걸 어쩌겠느냐. 그만 울어라.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힌 줄 알 것 아니냐. 너는 한번 울기 시작하면 그치질 않아서 큰일이다. 설마, 아프고 서러우니까 할머님 보고 싶어져서 우는 거냐.”

윤제는 소리도 없이 우는 얼굴을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품으로 당겼다. 울음으로 열이 오른 등을 차분히 다독이고 서럽게 들썩이는 어깨를 안아 주었다.

따듯함이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그럴수록 이유 모를 설움이 더 커져서 울음이 새어 나왔다. 그치는 법을 알 수 없는 울음을 퍼트릴 때처럼 용아는 오래도록 울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빈 땅에 오롯이 혼자라는 쓸쓸함이 조금 흐려졌다.

황궁으로 돌아온 지도 아흐레가 넘었다. 꽤 차도가 있어, 용아 혼자 일어나 앉거나 서지는 못해도 앉혀진 몸을 가눌 수는 있었다. 유동식이 주식인 것은 변함없지만 가벼운 식사도 가능했다. 누워 있는 시간보다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다. 부축해 주는 손이 있으면 짧은 산책도 어렵지 않게 해냈다. 잠을 잘 때 상처를 건드리지 않게 지켜보는 눈이 필요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평상시와 거의 같았다.

윤제는 혼자 앉아 있는 게 가능한 용아 곁에서 가벼운 일과를 봤다. 손을 사용하기 어려운 것은 여전해 식사를 할 때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었다. 식사 후에 실없는 농담을 곁들인 이야기를 나누거나, 밖으로 나가 잠시 걸었다. 용아가 잠드는 것을 지켜보았고, 깊은 밤이 되어서야 모장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금당대로 향했다. 새벽이 시작되면 다시 자리를 넘겨받았다. 모장이 깊은 밤과 새벽 사이를 지키는 걸 모른다면 용아의 입장에서는 내내 윤제가 있다 여길 정도로 철저하게 옆을 지켰다.

오른손에 두툼히 덧대어 둔 약초덩이를 제거한 고태의가 엄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손을 사용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알겠네.”

“수저질도 당분간은 하시면 안 됩니다.”

태의의 당부에 용아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

고태의가 얇게 약을 바르고 얼금얼금한 천을 댄 후에 깨끗한 광목으로 빈틈없이 상처 주위를 감쌌다. 약초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주먹도 쥐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대답해야지.”

옆에 앉아 상처를 감싸는 태의를 살피며 재촉하는 윤제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번듯했다. 용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 얼굴에 건네지는 시선에 입을 열었다.

“조심하겠습니다.”

지난밤에는 황제가 다녀갔다.

“식사는 계속 죽만 먹여야 하나?”

태자의 물음에 고태의가 예를 표하며 몸을 일으켰다.

“술만 아니면 마음껏 드셔도 될 듯합니다.”

“더 필요한 약재나 먹여야 할 건 없나.”

황제가 예고 없이 찾아온 덕분에 영화대 궁인은 물론, 영화대 안에서 시립하던 금당대 궁인들과 용아까지 혼비백산했다.

“윤공자 형님 피는 안 먹습니다.”

“부황 피를 받아 올까.”

“피는 싫습니다.”

지난밤 찾아온 황제는 태자비의 얼굴을 보고 단단히 표정을 굳혔다. 갑작스레 키가 크느라 안 그래도 위태위태한데 피를 얼마나 쏟았기에 뼈밖에 남지 않았냐고 걱정을 쉬지 않고 쏟아 내셨다. 그러다 태자를 보고는 너나 황제 당신 피라도 뽑아서 용아에게 먹여야 혈색이 돌아오지 않겠냐고 아들인 태자에게 역정 같은 한탄을 퍼부었다. 윤제는 질겁한 용아의 얼굴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제 피를 한 사발 뽑아 먹이겠다 고해 올렸다. 용아가 황제께 보이지 않도록 소리 없는 도리질을 힘껏 했지만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저 이제 다 나았습니다.’

용아가 고심 끝에 속삭이자.

‘다 낫긴!’

‘다 낫기는!’

비슷한 인상의 얼굴이 무섭도록 삼엄한 표정으로 용아를 돌아보며 같은 말을 외쳤다. 세월의 흐름만 더 있고 덜 있을 뿐 똑같이 생긴 두 얼굴에 나란히 떠오른 표정에 네가 다 나으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주장이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피…… 먹는 건 싫습니다.’

입에 말을 올리는 것조차 싫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용아가 투덜거려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허망했다. 툭툭, 조심스레 등을 두드리는 황제의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귓가에 내리는 말은 괴기스러웠다.

‘어서 나아야지.’

황제께서 가시고 배웅을 마치고 돌아온 윤제가 마치 부황과 짠 것처럼 용아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곧이어 귓가에 똑같은 말이 울렸다.

‘어서 나아야지.’

용아는 사람이 사람 피를 어떻게 먹냐고 기겁했다. 윤제는 눈썹을 굳히고 말려 올라가려는 입술을 내리누르며 드러내지 않은 채 웃었고, 궁인들은 얼굴을 깊이 내리거나 손으로 입가를 급히 가리며 웃음을 억눌렀다.

키가 훤칠하게 자라나 늘씬한 사내가 되었지만 어릴 적 모습이 보이면 한없이 어린 소년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안색이 많이 돌아왔지만 창백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파리한 얼굴은 모장이건, 등우건, 영화궁 궁인이건 금당대 태감이건 누가 곁으로 오기만 하면 다친 손을 내어 다가오는 것을 막으며 힘껏 도리질을 쳤다.

피는 안 돼.

피를 드리려는 게 아니라는 설명을 들은 후에만 접근을 허락했다.

“물러가옵니다.”

고태의는 숙인 채 희미한 웃음을 퍼트리고는 말을 건넸다. 용아가 쫓듯이 허락의 말을 내렸다. 부목을 대고 있는 왼팔과 상처를 감싸고 있는 천이 두툼해 움직이기 불편할 텐데 휙, 한쪽 손을 내젓기까지 했다.

“가보게.”

고태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이고는 뒷걸음질로 물러갔다.

“피.”

윤제가 창백한 얼굴을 향해 짧은 말을 던졌다.

“윤공자 형님, 산책하실래요.”

용아가 회피 법을 바꿔 피는 싫어, 피는 안 돼 대신 못들은 체하며 딴말을 건넸다. 윤제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용아를 일으켜 주었다. 내내 침상에만 있다 움직이니 살 것 같았다. 어제보다 훨씬 가벼운 발걸음을 보며 윤제의 표정도 느슨하게 풀렸다.

함께 걷는 둘을 보는 궁인들의 얼굴도 가벼웠다.

“너를 찾는 이가 많다.”

“그렇습니까.”

“나에게 보자고 하는 이들보다 너를 만자고자 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제북 사신과 제관부 일족이 매일 같이 일주대에서 태자비 뵙기를 청하고 있다. 왕공과 황족 종친들도 태자비를 찾고 있지. 행궁에서 있었던 사고에 대해 부황께서 모든 권한을 내게 일임하셨다. 할 말이 있느냐.”

용아가 가만히 말했다.

“사흘 후쯤엔 일주대에 나가 앉을 수 있을까요.”

“혼자는 안 돼.”

용아의 말에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본 윤제가 단호히 말했다. 남자의 말에 고요하던 얼굴이 불퉁해졌다.

“제가 어린앱니까.”

“피를,”

“보좌를 옆에 나란히 두고, 윤공자 형님이 중간에 끼어들지 않으면 될 것 같습니다.”

용아의 재빠른 말에 윤제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되겠다.”

키득거리며 답하는 그를 끝이 휙 올라간 눈이 불손하게 바라봤다. 윤제가 뭐 할 말이라도 더 있냐는 표정을 치켜 올라간 눈을 향해 건넸다.

“윤공자 형님, 가셔야죠.”

뺨의 꼬물거림으로만 불만을 표하던 용아가 무심히 말했다.

“데려다주마.”

남자의 말에 끄덕임이 돌아왔다. 윤제가 손을 뻗어 위태위태하게 보이는 등을 감쌌다.

둘의 사이가 보기 좋았다.

태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등우의 얼굴에 긴 웃음이 걸렸다. 그와 달리, 곁에 서 있는 모장의 얼굴엔 기묘한 그림자가 끼었다. 숙인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장을 향해 등우가 시선을 던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닌데…….”

등우의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라 혼잣말 같은 소리가 약하게 울렸다.

“모 상궁?”

“저게 아닌데 말입니다.”

모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다정하게 걷는 등을 바라봤다.

“저게 아니긴요. 두 분이 사이가 좋지 않소.”

상궁께서 뭘 모른단 얼굴로 등우가 말했다.

“등공공.”

“예.”

“연애해 본 적 없지요?”

모장이 높으신 누님 같은 얼굴로 물었다.

“연…… 연애라니…… 태감이 연애를 어떻게 합니까. 모 상궁께서 아주 위험한 소릴 다 하십니다. 여기 황궁이에요, 밤말은 쥐가 낮말은 새가 듣습니다. 조심하세요.”

연애를 못 해 보았다고 말하려니 왜인지 자존심이 상했지만 연애를 해 봤다고 거짓을 말할 수도 없었다. 등우는 가르치는 듯한 투덜거림을 내뱉고 흥, 고개를 돌렸다.

“금방 다녀오마.”

윤제가 인사를 건네며 앉은 용아의 머리를 살살 쓸었다.

“살펴 가십시오.”

누가 봐도 사이가 좋았다. 며칠 전 일어서서 태자를 배웅하던 태자비가 법도에 따라 예를 올리려 하자, 태자가 친히 걸음을 되돌려 앞으로 다 나을 때까지 말로만 인사하라 명을 내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아프다지만 과할 정도로 아껴 주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저게 아니긴, 뭐가.

등우가 삐죽한 눈길을 보내며 으스댔다. 모장이 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저었다. 태자와 태자비의 사이가 좋은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지나치다 할 정도로 태자는 태자비에게 정성을 쏟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태자의 정성이 반려에게 쏟는 정성이라기보다, 한참 어린 아우에게 나이 차가 큰 형이 내리는 형제애 같아 모장을 고민에 빠지게 했다.

저러면 안 되는데.

모장의 고민을 모르는 태자가 산뜻한 얼굴로 영화대를 나섰다.

“태자 전하 살펴가소서.”

예를 올리고 얼굴을 든 모장이 혼잣말을 우물댔다.

“아직 비전하가 어리셔서 그런 게지.”

바깥을 정리한 상궁은 바삐, 그러면서도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주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침상에 앉은 창백한 얼굴은 도자기 인형 같았다. 기력이 없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어 평소보다 훨씬 자그마하게 보였다. 등과 팔, 몸의 옆면을 따라 도톰하고 호화로운 덧베개가 셀 수 없이 바쳐져 있어 더 연약함이 강조되었다.

“비전하.”

모장이 초점 잃은 얼굴을 향해 속삭였다.

“응?”

용아가 움칫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허리 옆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둥근 덧베개들을 그제야 보았는지 팔꿈치로 긴 덧베개를 툭 쳐 자빠트렸다. 불퉁한 얼굴 위로 덧베개를 쌓아 놓고 간 사람에 대한 투덜거림이 묻어났다.

“태자께서 비전하 아끼시는 마음에 그리 해두신 거지요.”

모장이 재빨리 다가와 용아가 넘어뜨린 덧베개를 다시 쌓아올렸다.

“전하는 내가 세 살짜리인 줄 아나 봐.”

“지금 세 살 아이보다 더 허약한 상태라는 걸 부정키 어렵습니다. 어찌 그리 무모하셔요.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았는데 일주대에 꼭 나가셔야 합니까.”

모장이 챙겨온 수차를 용아의 입가에 대어주며 말했다.

“응, 가야 돼. 할 일이 있다.”

아무리 수족처럼 움직이는 궁인이라고 하나, 타인의 손으로 차를 마시기란 쉽지 않았다. 하루에 정해진 분량을 채우듯 수차를 꼬박꼬박 들이켜는 용아를 보던 모장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웃으며 말을 건넸다.

“태자 전하께서 잘해 주시지요?”

웃는 얼굴에 기대가 가득 실려 있었다.

“훌륭한 형님이시지.”

용아 역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비전하.”

모장이 주저하면서도 용아를 불렀다.

“물러가 보게.”

그가 생각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태자가 생각하는 바 역시 모르지 않았다. 용아를 대하는 윤제의 태도는 명확했다. 까마득히 어리고 연약한 아우를 보살펴 주는 다정한 형의 모습이었다. 그도 나쁘지 않았다. 서로 예를 다하기를 바랐던 것이 형제와 같이 다정한 형태로 바뀌었으니 더 나아졌다 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남자에게는 오랫동안 함께한 정인이 있었다. 항상 당연하게 여겨 온 사실이 마음을 시큰거리게 했다. 남자가 형제처럼 대해 주니 형제로 그를 대해 주는 게 옳았다.

그러니까 그것으로 족했다.

영화대를 나와 걷던 윤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편하신 데가 있으시옵니까.”

등우의 말에 윤제가 걸음을 멈췄다.

“우야.”

“예, 전하.”

드물게 머뭇거리던 윤제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윤공자 형님이라고 불러 봐라.”

태자의 하명에 등 태감이 작은 눈을 홉떴다. 태자가 태자라 하나 등우에게 형님은 아니었다. 그것과 이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전하께서 어떻게 소인의 형님입니까. 묻고 싶었으나, 태자께 무엄한 말을 할 수 없었다.

“윤공자 형님.”

등우가 눈썹을 잔뜩 좁히며 태자의 명을 따랐다.

“아니야.”

윤제가 고개를 잘게 흔들며 돌아섰다.

“아니라니요?”

등우가 잽싸게 윤제의 곁을 따라붙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모장도 한참을 아니라 고개를 짤랑거렸다. 다들 아니라 하니 자신만 모르는 게 있나 싶어 의아했다.

“나한테 형제가 없어서 그럴까.”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윤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동복형제는 없으시지만 가까이 황족 친우들과 형제처럼 자라지 않으셨습니까.”

황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손이 귀한 황가에서 태어난 태자가 독단적인 성격이 되는 것이었다. 당금 황제뿐 아니라 대대로 황가는 손이 많지 않아 훈육에 있어 그 부분을 가장 신경 썼다.

“어린 동생이 없잖아.”

윤제가 찌푸린 눈으로 등우를 돌아봤다.

“……태자비 전하 말씀하시는 겁니까.”

잠시 침묵한 등우가 말했다. 윤제가 곤란한 얼굴로 돌아섰다. 태자의 등 뒤를 따르며 등우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자와 어울리는 왕공 자제들은 그와 또래이지만, 왕공 자제들의 이복동생 중에는 한참 어린 공자도 있었다. 정작 왕공 자제들은 동복이 아니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동복아우라 해도 특별히 정이 있는 형제는 드물었다.

정천궁 계단을 오르던 윤제가 낮게 중얼거렸다.

“큰일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그 녀석이 나한테 윤공자 형님이라고 부르면 뭐든 다 들어줘야 될 거 같단 말이지. 이러다 순양군처럼 되면 어떡하지.”

윤제의 말에 등우가 뜨악한 얼굴을 했다. 순양군은 황족 안에서 동생바보로 불리는 종친이었다.

“비전하께서 무엇을 해달랍니까.”

“내 피 먹기 싫단다.”

“그럼 폐하의 피를 드시겠대요?”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을 등우가 큰일이라는 얼굴을 했다. 이어 별스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부황의 피도 먹기 싫단다.”

“역시 사슴뿔을 구해 올까요.”

“피는 다 싫대.”

윤제의 말에 등우가 큰 난관을 맞이한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그러면 어쩝니까.”

“그러니까. 며칠 더 놀려 주려 했는데 말이야. 윤공자 형님, 피 먹는 건 싫습니다, 라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응, 알겠다 해 버렸다니까. 어쩌지.”

“전하.”

등우가 책하는 음성으로 윤제를 불렀다.

“녹용도 안 될 것 같다.”

윤제가 등우의 팔을 툭툭 치고는 전각 안으로 향했다.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서려던 윤제가 상체를 비틀어 등우를 돌아보며 녹용 말고 다른 거 생각해 둬라, 어려운 하명을 간단히 건네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녹용도 겨우 타협 끝에 내놓은 것인데 다른 걸 생각해 두라니 울분이 확 치밀었다.

“전하!”

등우가 머리를 쥐어뜯는 그 시각, 안으로 든 윤제 역시 뒷목을 손으로 쓸며 난감해 했다. 처음 듣던 그날부터 ‘윤공자 형님’이란 호칭은 윤제를 곤혹스럽게 했었다. 전하나, 태자 전하와는 전혀 다른 파괴력이 있는 부름이었다. 이게 다 동생이 없는 탓이었다.

“형이라고 불러 보라고 할까.”

자신이 생각해도 엉뚱한 소릴 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나간 실없는 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리던 윤제는 순간 표정을 지우고 고민에 빠졌다.

“정말 불러 보라 할까.”

시킨다고 할 녀석이 아니었다.

“조금만 귀엽게 굴면 얼마나 좋아.”

윤제는 투덜거리다 상념을 털고 안으로 향했다.

깊은 밤이었다.

“윤제 형.”

영화대 전전 안에 바람직한 소리가 울렸다.

“어.”

무심한 대답이 곧장 이어졌다.

“윤제 형, 약속하신 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약속?”

“소제는 생녹혈도 싫습니다.”

용아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누워 있는 몸 주위로 호화로운 덧베개가 방벽처럼 쌓여 있었다. 왼팔을 고정하던 대도 떼어 냈고, 오른손을 감싸는 천도 많이 얇아졌지만 잠을 잘 때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여전했다. 양쪽 상처 모두 빠르게 아물어 가고 있지만 상처가 악화되는 걸 계속 경계하고 있었다.

“얼굴이 아직도 하얗다.”

윤제의 말에 용아가 뻔뻔스레 말했다.

“소제는 원래 하얗습니다, 윤제 형.”

저녁이 되자마자 영화대를 찾은 남자는 깊은 밤이 되자 용아를 잠자리에 들게 했다. 침상 옆 다탁 앞에 앉아 책첩(冊帖)을 들여다보던 윤제가 불쑥 자신의 피와 부황의 피가 싫으면 사슴뿔이라도 잘라 먹어야겠다라고 말했다. 사슴뿔을 자르면 몸에 좋은 생녹혈이 나온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생녹혈이라는 말에 용아의 창백한 얼굴이 하얘졌다. 사슴이 무슨 죄가 있어 저에게 피를 내놓아야 하냐고 용아가 몹시 인도주의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걸 들은 윤제가 코웃음을 치며 사슴뿔이 너무 커지면 나무에 걸리니 적당한 때에 잘라 주는 게 도리어 사슴에게 득이라고 했다. 윤공자 형님, 이라고 부르는 용아를 향해 그가 윤제 형이라고 불러 보라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곧바로 윤제 형, 이라는 올바른 소리가 울렸다. 좋은 일이었다. 사슴머리에 달린 뿔을 잘라 먹는 게 저어되면 봄철에 저절로 떨어져 나간 사슴뿔이라도 구해서 먹어야 한다 한발 양보한 해결책이 건네어졌다. 용아가 넙죽 그러겠다 답했지만, 피를 먹는 건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는 얼굴을 본 남자는 불쑥불쑥 너무 혈색이 없어 걱정이란 말을 꺼냈다.

“등 태감에게 녹각 구해 두라 일러두마.”

한참이나 윤제 형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남자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꼭 말씀해 두셔야 합니다. 윤제 형.”

꼬박꼬박 붙는 윤제 형이라는 소리가 듣기 괜찮았다.

“이거 주마. 횡공자와 영공자 말이 이걸 꼭 챙겨 두라 했다며?”

윤제가 품에 지니고 있던 금낭을 꺼냈다. 주머니 안에서 나온 암녹색 자기 조각이 탁자 위에 주르르 늘어섰다. 연기가 다 뿜어져 나온 후에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표면이 반질반질한 도자기 몇 조각이 다였다. 약제사에게 맡긴 조각 몇 개를 빼자, 행궁 곳곳에 던져졌던 것을 전부 긁어모았는데도 금낭 하나가 다 차지 않았다.

“표면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응, 없다.”

윤제의 대답에 용아가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인데 건네지는 말이 없었다. 윤제가 손에 쥐고 있던 책첩을 내렸다. 침상 곁으로 의자를 붙이는 그를 보는 용아의 귓가로 부드러운 바람 소리 같은 발소리들이 스쳐 갔다. 다급하지 않지만 적당히 기척들이 물러서는 게 느껴졌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얼굴을 향해 용아가 조용히 말했다.

“원형의 도자기 표면에는 하후가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파손되며 흔적이 사라진 모양이다.

“이게 뭔지 말해 줄 수 있느냐?”

윤제가 반질반질한 자기 조각을 용아의 시선 앞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장군부가 국경을 효율적으로 지키기 위한 무기이고, 실상은 황족에게도 유용한 암기탄 아니겠습니까. 하후가 비술의 정수를 쏟아부어 만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장군부 안에서는 아는 이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하후가 내에서도 가주의 직계와 최측근 외에는 손을 댈 수 없습니다.”

“만드는데 돈 좀 써야 하는 모양이더라.”

“알아내신 게 있습니까.”

“약제사의 말이 수면향의 흔적이 남아 있고, 환각과 환시를 유발하는 향도 있단다. 그 외에 적으면 십 수개, 많으면 수십 개의 약제가 들어가 있지만 정확한 성분을 알아내기는 어렵단다.”

“장군부 안에는 대가주 화원에 기화요초가 사시사철 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만큼 들어가야 할 게 많으면 원하는 수량을 만들지는 못하겠습니다.”

윤제가 흐릿하게 웃는 창백한 얼굴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황가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는 피가 이어진 황족이다.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 역시 황족이었다. 혈족 안에서 권력을 두고, 때로는 겉으로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암투를 벌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당연한 일이라 해도 피가 이어진 혈족이 제 목숨을 노리고 위협해 오는 걸 말하는 건 결코 즐겁지 않을 터였다. 잠에 들었던 창백한 얼굴이 몇 번이나 불렀던 말이 윤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숙부.

윤제가 무심한 체하며 말했다.

“너를 해하려 한 게 대가주라고 생각하느냐.”

“예.”

“대가주는 너의 가족이다.”

그것도 몇 남지 않은 친족이었다. 용아가 팔을 내어 일으켜 줄 것을 청했다. 윤제가 익숙한 몸짓으로 용아를 일으켜 앉혔다.

“황가가 황손을 가져 안정을 취하면 가장 껄끄러운 이가 누구입니까.”

“……제북.”

“황가가 가장 취약한 것이 무엇입니까.”

“……후손이 적은 것이지…….”

“황가와 황족과 뿌리가 같은 일족을 가장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아는 무리가 황가, 황족을 제외하고 어디입니까.”

“……장군부.”

용아가 웃는 얼굴로 대답하는 윤제를 힐난했다.

“진족은 국경 외곽을 떠돕니다. 그들에게 가장 빠르고 어렵지 않게 연통을 넣을 이가 누구이며, 그들을 쉽게 설득할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국경을 그만한 무력을 지닌 집단이 이렇게 쉽게 넘어온 건 누군가 눈감아 줬거나 넘어갈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 알려 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모든 게 한곳을 가리킵니다. 답이 뻔히 보이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는 건 믿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의 눈을 가리는 겁니다. 검은 걸 하얗다 말할 수 없습니다. 검은 건 검은 것이죠. 국경의 빈틈을 가장 잘 아는 것은 국경을 지키는 이들입니다. 행궁의 방비가 그토록 쉽게 무너진 것은 의아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것이니까.”

“검은 건 검은 것이라며. 황족 안에 내통자가 있는 것이다. 황족 납치와 태자비 살인모사를 방기한 자가 있다. 아쉽게도 친족이 사냥 당해도 아무렇지 않을 이가 황족 중 적지 않아 가려내려면 시간이 걸리겠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윤제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남자의 말을 듣고 있던 용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말은 역시 산융마죠.”

“그렇지. 말은 역시 산융마…… 화아. 너 뭘 하려는 거냐.”

용아의 발랄하고 온당한 말에 저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던 윤제가 멈칫하며 창백한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핏기 없는 얼굴이 악당 같은 웃음을 퍼트리고 있었다.

“장군부와 전쟁을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한몫 뜯어내야죠.”

용아가 날강도 같은 말을 온후한 얼굴로 내뱉었다.

“잠깐.”

윤제가 용아를 급히 말렸다.

“대가주 산융마 마방을 싹 털어 와야지.”

“그건 좋은 생각인데. 아니, 잠깐. 그게 무슨 산적 두목 같은 말이냐.”

“윤제 형. 대가주 산융마 마방 끝내줍니다.”

본 적 없지만 산융마로 가득한 마방은 물론 끝내줄 것이다.

“가 봤어?”

“당연히 가 봤죠. 저는 전(前) 대공자의 장자이며, 하후가 적통 중 혈통으로 저를 넘어설 이가 없습니다. 거기다 대가주이신 저희 숙부가 가장 사랑하는 적자인데요.”

윤제의 물음에 용아가 뿌듯한 얼굴로 떠들었다.

“대가주가 너를 해하려 했다 하지 않았어?”

“아마도 그럴걸요.”

“야야. 아마도라니.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거 아니지? 이거 되게 중요한 거야, 인마.”

“대가주가 진범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용아가 얼굴에 걸치고 있던 웃음을 순간 지웠다.

“정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 아닙니까.”

“그렇기는 한데…….”

“제 목숨 노리려 하면 어떻게 털리는지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 줘야죠.”

용아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감돌았다. 아까 말한 대로 정말 한몫 단단히 뜯어낼 얼굴이었다. 제대로 털어 주리라 의지를 다지는 얼굴을 향해 윤제가 조심스레 말했다.

“황도로 오기 전에 숙부랑 싸우기라도 했어?”

윤제의 물음에 용아가 악당 같은 웃음을 지우고 부드럽게 눈을 접었다.

“윤제 형.”

“말해라.”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숙부입니다. 숙부께서 저를 당신의 친아들만큼 사랑하고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 역시 허언이 아닙니다. 숙부는 저를 키워 준 아버지이고, 제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숙부께 직접 가르침 받은 것입니다. 제게 말 타는 것, 활 쥐는 법, 검 끝을 두어야 하는 위치 하나까지 직접 자세를 고쳐 가며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일 숙부를 만난다면 숙부께서는 저를 본 것을 기뻐하고 반가워하실 겁니다. 저도 그럴 거고요. 하지만 숙부께서 필요하다면 저를 죽일 겁니다. 그리고 죽은 저를 세상 누구보다 그리워해 주시겠죠. 권력이란 그런 것이니까. 저 또한 그럴 겁니다. 제게 필요하다면 저는 대가주를 갈아치우기 위해 모략을 부릴 거고, 죽은 숙부를 친아비보다 더 그리워할 겁니다. 숙부는 훌륭한 대가주입니다. 제대로 다스릴 수만 있다면요. 아직은 헤어질 때가 아니죠.”

용아의 말에 윤제가 의자에서 침상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너희 가족 괜찮은 거냐.”

윤제가 이쪽 친척도 문제가 적지 않은데 너희는 더 장난 아닌 것 같다는 투덜거림을 한탄하듯 덧붙였다.

“괜찮겠습니까.”

용아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대꾸했다. 웃음 짓는 얼굴은 태어나는 순간 태자비로 간택되었다. 태자비로 태어나 존중과 애정 속에서만 살아갈 것이라 착각하지만 그가 소년일 적에 말한 것처럼 황족에게 주어진 책무는 막중했다. 더해 단지 태자비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위협 받아야 했다.

용아가 소년일 적에 쏟아 낸 외침이 윤제의 머릿속을 어지러이 떠돌았다. 태자비가 되고 싶어 된 게 아니고, 같은 사내에게 시집오기를 바라서 온 게 아니라 했었다. 황가, 황실이 없었다면 평생 자유롭게 살 수 있다 하였다. 웃는 얼굴이 우는 것 같은 것은 어쩌면 황가, 황실, 자신 때문일지도 몰랐다.

윤제가 우는 것 같은 웃는 얼굴을 품으로 당겨 안았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몸을 감싸 오는 체온만으로 말할 수 없이 위로가 되었다.

용아는 불쑥 안아 온 커다란 품에 갇힌 채 머뭇거렸다. 갈피를 잃은 손을 뻗어 체온을 나눠 준 이의 등을 안아도 되는지 안 되는지 오래도록 망설이다 손을 가만히 내리는 것으로 방황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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