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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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 안에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납심에 어린궁인들뿐 아니라 모장까지도 놀라 혼비백산이었다. 무심한 얼굴을 한 것은 영화대의 주인 하나였다. 소년은 차를 준비할 필요도, 다과를 준비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황제께서 나가 있으라 명하면 잘 물러날 것만 당부했다.

“부황을 뵙습니다.”

전각 안까지 친히 납신 황제께 소년이 예를 올렸다.

“일어나라.”

“황공하옵니다, 부황.”

황제의 넉넉한 목소리에 용아가 다시 공손히 예를 표했다.

“모두 물러가 있으라.”

소년이 예견한 대로 황제가 명하셨다.

“예.”

모장의 대답에 궁인들이 일제히 전각에서 물러 나왔다.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황제가 시중인의 도움도 없이 의자에 앉으며 하문하였다. 용아는 서탁에 놓여 있던 종이를 가져와 건네며 답했다.

“내일 태후께 보낼 서편을 쓰고 있었습니다.”

숨기는 바 없는 소년의 태도에 황제가 웃음을 흘렸다.

“태후께서는 잘 계시느냐.”

“때때로 좋지 않으실 때도 있지만 최근에는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새아가가 가져다준 약재 때문이라지?”

황궁 안에 황제가 모르는 일이란 없었다.

“태의의 노력이 아니겠습니까.”

용아는 덤덤히 답하면서도 곧 처벌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새아가. 내 너를 아낀다. 네가 다칠까 염려가 되어 이러는 것이니 너무 섭섭해 말아라.”

“아옵니다.”

권좌에 앉은 이들이 하는 달콤한 말은 신기하게도 닮아 있었다. 소년은 제북에서 들었던 말을 황궁에서 다시 듣는 것을 재미있어 하며 표정 없는 얼굴로, 순종적인 음성으로 답하였다.

“음 상궁, 밖에 있느냐.”

“예있사옵니다.”

황제의 부름에 전각의 문이 열리며 깐깐해 보이는 노상궁이 들었다. 깡마른 얼굴과 후덕해 보이는 몸집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황제와 비슷한 연배의 노상궁이 용아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음 상궁은 짐의 유모 상궁으로 어려서부터 절친한 친우처럼, 오누이처럼 지내 왔다. 짐이 태자비가 걱정되어 그러니 앞으로 태후전과 황후전, 영화대를 나설 때 항시 음 상궁과 동행하도록 하거라. 영화대 안에서도 음 상궁을 곁에 두고 그의 말을 짐의 말처럼 듣고 따라 주길 바라마.”

“예, 부황.”

소년은 눈을 내리깐 채로 순하게 답했다.

“또한 궁 밖 출입에 관해서 당부하고 싶구나.”

“하명하소서.”

“조정 안팎이 태자비를 걱정하는 목소리로 높으니 당분간 출입은 자제하고 영화대에서 자숙하도록 하라. 다음에 볼 때 새아가가 음 상궁과 친구가 되어 있으면 좋겠구나.”

용아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만 들었다.

“명을 따르옵니다.”

태자비의 반듯한 예에 황제가 손사래를 살살 쳤다.

“가족끼리 그리 엄격하고 깍듯하게 굴 게 무어냐.”

“부황을 향한 저의 작은 마음이옵니다.”

황제가 온 얼굴로 서운해하였다. 용아는 어렵지 않게 섭섭해하는 얼굴을 위로했다. 할 말을 끝낸 것 같던 황제가 다시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아아. 그것을 잊을 뻔하였네. 제북의 가족이 아가를 찾더구나.”

용아의 여유롭던 얼굴에 지친 기색이 번졌다.

“홍문에 드는 것 말씀이옵니까.”

소년이 곧바로 본론으로 치고 들었다.

“새아가가 벌써 열네 살이 되었잖느냐.”

황제가 당신과 상관없는 양 떠들었다. 권력자들이란 참으로 짜증 나는 족속들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면 될 텐데 꼭 상대의 입을 통해 듣고 싶어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용아는 조금 지친 상태였고, 사이좋은 가족 놀이가 그만하고 싶었다.

“특별히 무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 그저 새아가의 제북 가족 소식을 전하려 하는 것이다.”

“저에겐 가족이 없습니다.”

“……그 무슨 말이냐. 이 부황도 있고, 모후도 있고, 모자라긴 하나 부군인 태자도…….”

용아는 기분 꽤 상해 있었다.

“그야 시가 식구가 아니옵니까.”

“이곳에 시집왔으면 이곳 가족이 새아가의 가족 아니겠니.”

“아아, 부황께서는 모르시나 보옵니다.”

소년의 태도가 다소 불손, 방만하였다. 음 상궁의 얼굴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나설 수 없었다. 지금은 황제와 태자비가 말을 나누는 중이니 기다려야 했다.

황제의 용안에도 당황이 스쳤다.

“응?”

“제북에서 홍문에 드는 소년과 소녀는 부모 또는 아버지 어머니가 같은 형제의 보살핌을 받으며 홍문에 들 준비를 합니다. 제북에는 제 가족이 없습니다. 일족과 친족은 있으나, 홍문을 들 준비를 해 줄 가족은 아니지 않습니까. 돌봐줄 가족도 없는데 그 먼 데를 가야 합니까. 제가 가기 싫어하더라 전해 주십시오.”

용아가 귀찮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구나.”

“예, 그러하옵니다.”

황제가 체면도 잊고 감탄했다. 용아는 이제 대놓고 어서 황제께서 가 주기를 바라는 기색을 뿌렸다. 음 상궁은 황제께서 이곳까지 납신 소득을 얻으신 것에 기뻐했으나, 방자하기 그지없는 태자비의 태도에 자신이 다 민망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이리저리 눈치를 봤다.

“어. 그러면 그리 알고 내 처리하마. 이만 쉬렴.”

“차도 드시지 않고 가시옵니까.”

용아가 차 내줄 시늉도 하지 않으며 말로만 황제를 붙잡았다.

“짐이 일이 있어 이만 가 보아야겠다.”

“살펴 가소서.”

황제의 고상한 일별에 태자비가 우아하게 예를 올렸다. 예법에 그른 것 하나 없는 공손한 태도이나, 흉내로라도 한번 붙잡을 만한데 그런 의중이 전혀 없었다.

“잘 있거라.”

끝에는 고개만 얌전히 숙이는 것으로 끝이었다.

“…….”

음 상궁은 움칫거리는 입술을 내리누르며 깊이 예를 올렸다. 예는 이리하는 거라는 걸 보여 주는 듯한 태도였다. 황제가 전각을 떠나는 소리가 밖에서 분분히 전해져 왔다.

“음 상궁이라 하였나.”

황제가 완전히 떠나길 기다린 소년이 노상궁을 차분히 불렀다.

“예, 비전하.”

음 상궁이 사뿐히 걸어와 예를 올렸다. 용아는 예를 올리는 노상궁을 잠시 가만히 쳐다봤다. 궁중의 예법은 까다로워 흐트러짐 없이 예를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음 상궁께서는 폐하의 친우라지?”

“송구하옵니다.”

상궁이 겸손한 태도로 답을 피했다.

“음 상궁께서 황궁에 들어온 지는 얼마나 되었소?”

“오십 여년이 되어 가옵니다.”

“음 상궁께서 폐하보다 연상이신가?”

“그러하옵니다.”

“누이 같은 분이라는 게 그런 말씀인가 보오. 음 상궁께서 글을 읽을 줄 아오?”

태자비는 궁금한 것이 많은 소년이었다.

“기본적인 것인 것만 가능하옵니다.”

“잘되었소.”

음 상궁은 무엇이 말이옵니까 라는 물음 대신, 슬쩍 시선을 올려 어린 상전을 살폈다. 용아는 서탁으로 돌아가 두툼한 서책을 들고 돌아왔다. 지금부터 음 상궁은 황궁 예법에 익숙하지 않은 태자비의 예법을 다시 교육하고, 장차 내궁의 주인이 될 것을 대비해 훈육을 할 예정이었다. 용아가 음 상궁에게 서책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책이지 않소. 이 사람의 팔이 아픈데.”

“송구하옵니다.”

평생 웃전을 모시고 살아온 노상궁이 어린 상전의 엄살에 얼른 손을 내어 팔 안에 가득 안기는 책을 받아 들었다.

“음 상궁께서는 궁 안 예법에 능통하지 않소?”

“그러하옵니다.”

“글도 읽을 줄 알고. 예법도 잘 아시고. 아주 잘되었소. 영화대 다른 궁인들은 바쁘고, 글을 덜 깨친 이가 많아서 말이오. 음 상궁께서 이 사람을 도와주어야겠어. 내 제북에서 와 예법이 서툴다 흉을 당할까 봐 월주대에서 예법에 대한 책을 항시 빌려다 둔다오. 허나 서고에서 빌려 온 책은 때가 되면 가져다주어야 하지 않나. 늘 곁에 두고 보고 싶은데 며칠씩 갖다 두었다 가져오는 게 번거로웠소. 음 상궁이 필사해 주면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으니 잘되지 않았소. 거기다 상궁께서 예법에 밝다 하니 내용의 진위 여부도 잘 아실 터이고 말이오. 그대를 만나려고 오늘 이 책을 빌려 왔나 보오. 무엇하오. 어서 필사하러 가 보지 않고?”

태자비가 우아하고 오만한 상전의 얼굴로 말했다.

“이걸 전부 다 말이옵니까.”

“전부 다 부탁하오. 예법을 소상히 알아 둘수록 좋은 게 아니겠소. 수고하시게.”

소년이 할 말이 끝났다는 얼굴로 손을 살랑살랑 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물러가옵니다.”

두 팔 가득 예법에 관한 서책을 안은 노상궁이 예를 올리고 물러갔다. 소년이 할 모든 말이 그녀가 할 말이었다. 어린 상전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노상궁을 우아하게 내쫓았다. 허망하였다. 그리고 아득하였다. 영화대로 자신을 데려온 황제가 그저 원망스러웠다.

태자비의 비공식적인 칩거는 황제의 방문 후 공식적인 금족령에 가까워졌다. 용아는 조석으로 문안을 들 때와 태후전과 황후전을 방문할 때를 빼고는 바깥출입을 일체 하지 않았다.

제북의 일족과 제관에 머무는 제관부의 일족은 태자비의 운신에 제한을 두는 황실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태자를 찾는 제관부 일족의 방문이 하루도 거르지 않은 채 두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조정 대신들과 제북 일족의 다툼은 나날이 심화되고, 언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유치해져 갔다.

태자비를 사이에 둔 조정과 제북의 다툼이 미묘한 자존심 싸움이라면, 양제에 대한 의혹은 점점 짙어져 심증은 확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양제의 사주를 받은 이가 태자비의 말을 건드렸다는 것이 발각되어 붙잡혀 갔다는 소문이 한바탕 일어 잠시 소동이 있었다. 소문은 곧 거짓으로 밝혀졌다. 황궁 마방과 승명원에 드나들 수 있는 모든 궁인을 상대로 한 전체적인 조사에 들어간 것이 와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양제에 대한 불온한 시선은 커진 채로 수그러들 줄 몰랐다. 언제 양제가 붙잡혀 가 구금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황제가 태자비에게 금족령에 가까운 명을 내린 것도, 태자가 태자비의 상황을 방관하는 것도 전부 양제로부터 태자비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까지 돌았다.

“…….”

황궁의 스산한 분위기와 다르게 한낮의 햇살은 따스하다 못해 뜨거웠다. 완연한 봄을 지나 순식간에 여름이 다가왔다. 햇살이 드는 전각 밖에 키가 작은 의자를 내어 앉은 용아가 꾸벅꾸벅 졸았다.

“비전하.”

용아는 다급한 목소리에도 나른하게 손을 내저었다.

다시 써 와, 음 상궁.

요즘 용아는 어려운 상전이 되어 있었다. 황제의 오랜 친우며 누이 같은 이라 알려진 음 상궁은 황궁 안에서 황후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이인데, 어린 태자비는 가차 없이 상전 노릇을 하였다. 음 상궁은 필사를 하고, 다시 필사를 하고, 조금이라도 허투루 필사한 것은 다시 필사를 명받았다.

“응? 목교로구나.”

“비전하.”

목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용아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냐.”

용아가 눈가에 붙은 잠을 떨치며 물었다.

“방금 봉의께서 자결한 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무서운 사실을 알려 왔다.

“누구?”

소년이 순식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채련각 봉의 경씨가 죽었다고 합니다.”

목교가 벌벌 떨면서도 주인에게 또박또박 고해 올렸다. 벌떡 일어섰던 용아가 화사한 빛이 내리는 주위를 찬찬히 보다가 다시 본래대로 앉았다.

“자결…….”

차갑게 굳은 얼굴이 믿을 수 없는 말을 나지막하게 웅얼거렸다. 들리지 않게 혼잣말을 속삭이던 소년의 입술이 비스듬한 웃음을 그리듯 움찔거렸다. 권력이 빛처럼 넘쳐 나는 황궁에 본인의 뜻대로 이루어진 순수한 자결이 있을 리 없었다. 어린 얼굴의 기이한 반응에 궁인이 염려 가득한 목소리를 전했다.

“비전하?”

“안 되었군.”

용아가 짧게 타인의 죽음을 평했다.

“바깥이 소란합니다.”

“봉의의 전각에 위로를 전하도록 해라.”

“그리해도 될까요.”

목교가 불안한 시선으로 속삭였다.

“안 될 건 무어지?”

소년이 냉엄한 얼굴로 말했다. 모장이 궁인을 비켜서게 하며 조용히 고했다.

“봉의께서 비전하의 말고삐를 끊으라 사주하시어 범인을 찾는 범위가 좁혀 오자 자결하신 게 아닌가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벌써…….”

용아의 얼굴에 서늘함이 흘렀다.

“비전하. 지금 전각 밖에 양제께서 와 계십니다. 자신으로 인해 태자비께서 불온한 말을 듣게 되었으니 죄를 청한다 하십니다. 어찌할까요.”

모장의 뒷말에 용아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졌다.

“놔둬라.”

“예.”

“모두 물러가라.”

홀로 있기를 청하는 용아를 두고 전각 문 너머로 궁인들이 사라졌다. 혼자가 된 소년이 찬란한 햇살 아래에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얼굴 위에서 부서지는 빛 속에서 용아는 몇 번이나 잘게 고개를 저었다. 굳게 다물렸던 어린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여자잖아.”

햇살이 유독 좋은 날이었다. 날씨가 이토록 좋은데, 장장 두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찾아오는 끈질긴 외가 일족을 대면코자 일주대로 향하는 태자의 얼굴에는 이리저리 구김이 가 있었다.

“방금 뭐라 했느냐.”

일주대 계단을 오르던 사내가 멈췄다.

“봉의께서 자결하신 채 발견되었다 합니다.”

“자결?”

말을 하는 윤제의 얼굴이 헛소리를 들은 것처럼 황망했다.

“목을 매신 채 발견되었답니다.”

“수수가, 왜?”

등우의 얼굴이 안절부절못했다.

“나흘 전부터 진양군께서 명하신 대로 마방 출입 가능인과 승명원 출입 가능인 전원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그중에 경봉의의 사람이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단순 조사를 알 턱이 없으니 혹여 고신 끝에 당신의 과오를 발설할까 자진을 하신 것 같다 합니다.”

“수수가 그랬을 리 없다.”

태자가 얼굴을 굳힌 채 소리쳤다.

“송구하옵니다.”

“조사 받은 이 중에 봉의의 사주를 받은 자는?”

“그것이 이상한 게 조사 받은 이 중에 봉의와 연관된 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합니다. 주인을 따라 자결한 이도 없고요. 단순히 불러다 말 나눈 게 고작이라 관련자가 나오지 않는 것 같으니 범인을 색출할 때까지 의심자 전원에 대해 강도 높은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심각한 대화가 오가고 있을 때 일주대 궁인이 다가와 아뢰었다.

“태자 전하. 태자를 뵙습니다. 전하, 알현을 청한 제관부의 이들이 들었사옵니다.”

등우가 눈치 없는 궁인을 불만스럽게 쏘아봤다.

“지금 가겠다.”

윤제는 얼떨떨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궁인을 탓하는 등우를 말리는 것처럼 답을 전하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일주대에서 가장 큰 전각 앞을 지키는 궁인들이 차례로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문 앞의 궁인들이 분분히 예를 올렸으나 태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등우의 끄덕임에 문이 열리고 알현실로 들어선 윤제가 상석에 올랐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미리 와 있던 제관의 일족이 예를 올렸다. 한 사람의 선창에 맞추어 나머지 일행이 따라서 외침을 퍼트렸다. 그것을 보는 태자의 눈이 무성의했다.

“전하, 태자비 전하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뻔한 양제에 대한 처벌은 어찌 되어 가옵니까?”

제관부의 장점이라면 조정의 대신들보다 훨씬 단순히 원하는 바를 알려 오는 것이다.

“어제도 말씀드렸소만 양제에 대한 죄과는 밝혀진 게 없습니다.”

태자가 어제와 마찬가지로 담담히 답했다.

“양제가 요사한 짓을 했다는 소문이 황궁 안팎에서 무성하옵니다. 황궁과 태자비께 이리 무도한 말에 휩쓸리게 한 것 또한 후궁 된 자의 크나큰 죄가 아니겠습니까. 최소한 전하께서 양제를 가까이 않는 모습은 보여 주셔야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아직도 양제를 곁에 두시옵니까.”

“동궁의 후궁까지 외가의 어른들께서 다스리려 하십니까.”

등우는 소리 없는 몸짓으로 윤제에게 차를 올렸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차였다. 찻잔을 들어 가린 얼굴이 상심으로 젖어 있었다. 봉의는 세 후궁 중 존재감이 그리 강한 이는 아니었다. 양제와 소훈의 단장을 돕고자 동궁에 머물다가 후궁으로 발탁된 이였다. 품성이 어질고 타인의 말을 잘 들어 주어 태자가 자주 담소를 나누던 상대였다. 온화한 성품과 달리, 활동적인 것을 좋아해 태자와 함께 외유도 곧잘 나간 이였다.

세 후궁 중 태자에게 있어 가장 친구에 가까운 존재였다. 평소 순한 성정으로 알려진 봉의가 이번 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중경에서 처첩을 몇을 두든 집안의 일로 외인은 간섭할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음 제좌에 오를 태자가 후궁을 몇을 두는 것 또한 온전히 태자의 의지에 달렸다. 제북의 풍습과 다르나 그것까지 문제 삼을 수 없었다.

제관부와 태자의 알현은 두 달 가까이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태자비의 목숨이 위험했다는 제관부의 항의에 곧 범인을 찾아낼 것이라 태자가 대답하였다. 양제가 범인이 아닌가 라는 의혹을 제기하면 아직 밝혀진 바 없음으로 무마했다. 의혹을 받는 양제를 아직 가까이 두는 이유가 무어냐 라는 질문이 나오면 그는 후궁에 관여 말라는 말로 대화의 여지를 잘라 버렸다. 제관부는 지난날 황가의 후궁과 지금의 동궁전 후궁의 다름 따위를 거론했으나 모든 것은 집안일이라는 말로 끝났다.

“태자 전하의 정부인은 태자비가 아니십니까. 태자께서는 어찌하여 적법한 태자비를 박대하신단 말입니까.”

“제북에서 오신 태자비께서 구금 상태나 다름없다는 것이 황실이 제북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태자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태자비께 이리 상처를 주시다니요. 태자비 전하께서 진정한 전하의 짝이실 것인데 지금의 과오 때문에 후회하실 날이 오실까 염려가 되옵니다.”

어제까지 이어 온 대화와 달랐다.

“태자비는 구금된 게 아니오.”

윤제는 신경 긁는 소리를 모른 체하며 필요한 말만 던졌다.

“태자께서 양제를 귀애하시는 것을 아옵니다. 허나 양제는 전하의 진정한 짝이 아니옵니다. 언제고 이 날을 후회하실까 소신은 걱정이 되옵니다.”

“태자께서 양제를 귀애하시는 것을 아오나, 그분은 태자께 후사를 안겨 주실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전하의, 황가 적통의 여인인 이상 제북에서 온 이가 아닌 양제는 석녀나 다름없사옵니다. 전하께오서는 괜히 허튼 데 힘 쓰시는 격이옵니다.”

다시 대화의 양상이 달라졌다. 태자가 팔걸이를 거칠게 내려쳤다.

“말을 삼가시오.”

“전하께서 듣기 싫겠으나 이는 신하 된 도리로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집안의 어른 된 입장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조정 관료들은 그리도 태자비께 후사를 보기 전에는 위험한 행동을 피해야 한다며 제북에서 오신 그분께 말도 못 타게 하는데, 웃기는 말이 아닙니까. 태자께서 태자비를 찾지 않으시고 매일 딴 여자와 밤을 보내는데 애를 태자비 혼자 만드신단 말입니까.”

“외숙!”

“저희를 외숙, 외가의 어른이라 생각하기는 하십니까, 전하. 지금 드리는 말씀은 외가의 친인 입장에서도 중한 것이지만 조정 관료들이 간절히 바라는 황실 후사와 사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태자비가 아니시면 황실은 다음 대 후계를 구경도 못 할 것입니다. 후족 없이 황실 적통이 아이 하나 볼 수 있었습니까. 전하께서는 태자비께 예를 다하여 주십시오. 후사만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도 아닙니다. 중경의 황족들과 제북의 장군부 사내가 가진 힘이 정확히 같지 않으나, 뿌리가 하나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사옵니다. 태자께 장군부 사내가 제 짝을 찾지 못해 겪는 광증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는 전부 전하를 걱정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관부 대인들이 깊이 예를 올렸다. 머리를 깊이 숙인 열 사람의 등을 보며 윤제가 웃었다.

“광증. 이 사람은 지금 광증이 올 것 같은데.”

태자의 비꼬임 가득한 말에 공야대인이 나섰다. 죽은 친모후와 같은 성씨 출신인 공야대인은 그나마 제관부 인물 중 태자와 말이 통했다. 윤제가 이들 중 유일한 진정 외숙이라 믿고 따르는 이기도 했다.

“전하.”

“말씀하십시오.”

윤제가 차를 들이켜며 분노를 가라앉혔다. 태자비가 없으면 아이 하나 볼 것 같은가, 태자비 없이 너는 광증이 올 수도 있다 협박하는 이들과 더는 마주 보고 있기 싫었으나 지금 자리를 박차고 가면 그들의 말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전하께서 양제마마가 첫정이시고 귀하게 여기심을 아오.”

“외숙.”

대화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이 사람의 말을 고깝게 듣지 마십시오. 전하와 양제의 관계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오. 양제는 당신의 짝이 아니니 양제를 진정 아끼신다면 지금이라도 양제를 후궁에서 나가도록 하시는 게 어떠시옵니까.”

“후궁에서 양제를 내쫓으란 말입니까.”

“이는 둘 모두를 염려하는 말씀이라오. 홍문에서 광증은 흔한 일이 아니나 없는 일이 아닙니다. 양제가 전하의 짝이 아님은 분명하고, 짝이 될 수 있는 일족이 아님도 명백하오. 혹여 전하께 광증이 오면 가장 위험한 것은 가장 자주 한 침상을 쓰시는 양제가 될 거요. 허튼 데 힘쓴다는 말은 무엄하고 불쾌할 것이나 광증이 왔을 땐 이미 늦소. 사내의 광증으로 아끼는 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그것이 더 큰 슬픔이고, 충격 아니겠소. 사내가 가진 힘이 강하고, 혈통이 강인할수록 광증의 여파도 크오. 황실 적통은 이 땅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일족이 아니오. 중경의 방식으로 양제를 쫓아낸다 생각 말고, 그녀를 제북처럼 인연이 아니라 놓아준다 생각 하시오. 태자비께서 아직 어리고, 사내애라 관심 가지 않으신다는 것 아오. 시간은 금방 지나오. 시간이 지나 태자비께서 준비가 끝나면 이 사람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겝니다.”

“양제는 나의 정인이오!”

“그런 말씀 마시오! 양제가 어떻게 태자의 정인이란 말인가? 태자께서 지금 하는 말,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하후가와 하후가 출신 태자비를 불편하게 하심을 진정 모르시는가?! 지난날 말씀 올린 것처럼 하후가는 장군부 다른 가문이 모르는 일족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소. 특별한 약과 특이한 방책들도 많이 알지요. 태자비께서 성장이 더딘 것조차 이 사람들은 하후가에서 손을 쓰는 중은 아닐까 염려하고 있거늘. 태자께서는 어찌 이리 경거망동하신단 말이오?!”

알현을 청한 후 제관부 측에서 처음으로 소리를 높였다.

“태자비의 성장이 느리다니……?”

“태자비께서 또래에 비해 어려 보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 외에도 있습니다. 태자비가 벌써 홍문에 들 나이가 되었는데 다른 아이들 중엔 그즈음 가진 성질을 엿보이는 이가 적지 않거늘 그분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지 않습니까. 태자께서 이리 가까이 있는데 아무렇지 않은 것이 이상하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태자비를 뵐 수 있기를 간곡히 청하였거늘 폐하께서도 태자께서도 완강히 거부하셨지.”

태후와 같은 가문 출신인 단목씨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단목대인과 공야대인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전하. 전하께 광증이 올 때는 이미 늦습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양제가 되실 것이오. 아무리 죄인이라도 황가 적통의 광증으로 죽게 된다면 처참한 모양새가 될 터이니 마음을 단단히 하십시오. 이는 모두 걱정이 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부디 살펴 주소서.”

공야씨와 단목씨를 제외한 모두가 태자를 말로써 겁박했다. 일제히 머리를 숙이는 제관부 이들을 보며 윤제가 싸늘한 웃음을 퍼트렸다. 무척이나 걱정돼 하는 말이라도 저리 하면 협박일 뿐이었다.

“외숙들의 말씀 깊이 새기겠소. 오늘은 다들 이만 물러가시오. 봉의 경씨가 자백을 하고 자결하여 목숨으로 갚고자 하여 마무리 조사가 필요해 이 사람은 일어나겠습니다.”

“봉의 경씨…… 가 왜…….”

“전하!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관부 대인들이 소리를 높여 태자를 잡으려 했으나 이미 그는 전각 밖으로 향한 후였다. 등 뒤에서 빗발치는 외침에 윤제가 인상을 구겼다 펴기를 반복했다.

“전하.”

등우가 불안한 음성으로 태자를 위로했다.

“영화대에…… 아니. 거길 가 뭐하겠나. 조사처로 가겠다. 앞장 서거라.”

일주대 계단을 내려서며 윤제가 명했다. 영화대라는 말에 안색이 희게 질렸던 등우가 행선지를 바꾸는 주인의 말에 기쁜 얼굴을 하며 재빨리 길을 밝혔다.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고비를 하나 넘긴 기분으로 조사처로 향하는 태감의 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예상대로 조사처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다. 태자의 납심에 분주하게 다가와 고하는 이들이 있었고, 조사 받고 가는 이들 중 몇을 불러 대면해 봤으나 기존에 오고 간 문답의 결과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소득 없이 조사처에서 반나절을 허비하고도 윤제는 동궁으로 돌아가기 싫은 기색이었다. 뭉그적대는 주인을 등우는 모른 체했다. 그러나 해가 다 떨어질 즈음에는 어쩔 수 없었다.

“전하, 밖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등우의 말에 그제야 윤제가 물었다.

“채련각은?”

“다들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궁인들에게 너그러운 주인이셨으니까요. 경대인께서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봉의마마의 죄가 인정될 경우 경씨가도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조사가 끝나는 대로 들라 해라. 채련각으로 가겠다.”

“예.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고, 봉의의 죄가 완전히 인정된 게 아니라 조의를 표하는 이들의 방문이 적지 않다 합니다. 평소 인품과 덕망이 좋던 분이라 찾는 곳이 제법 되옵니다. 무엇보다, 영화대에서 가장 먼저 사람을 보내 조의를 표하였기에 다들 편히 채련각으로 사람을 보내는 듯합니다.”

“영화대에서?”

동궁으로 발길을 향하며 긴한 대화가 오갔다.

“예.”

등우는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짧게 대꾸했다.

“서둘러라! 어서! 태의를 불러 와!”

그때 저편에서 수 개의 등불을 밝힌 일행이 뛰듯이 오고 있었다. 상궁의 성마르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울렸다. 등불을 앞세우고 뛰듯이 움직이던 궁인들이 태자를 보고 얼른 걸음을 멈추며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물결이 번져 나가는 것처럼 겁에 질린 목소리들이 퍼져 나갔다.

“무슨 일이냐.”

“해원의 궁인들입니다.”

윤제의 물음에 등우가 곧장 고했다. 대답을 올리는 태감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일행의 꽁무니에 있던 양제가 양팔에 두 명의 궁인과 상궁에게 부축을 받으며 다가왔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예를 올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났다.

“어디 다쳤느냐.”

하문하는 태자의 목소리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윤제의 눈이 옆에 움츠리고 있는 등우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아니옵니다.”

양제가 얼굴을 낮추며 급히 답했다. 낮춘 얼굴을 요령 좋게 손으로 훔치는 그녀를 보며 태자는 대화 상대를 바꾸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지?”

“영화대에서 오는 길이옵니다, 전하.”

벽 상궁이 제 주인을 살며시 놓고 예를 올리며 고했다. 벽 상궁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궁인들의 부축을 받고 있음에도 양제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곳은 왜?”

태자가 한걸음에 다가가 양제를 붙잡아 주며 말했다.

“전하.”

양제가 자신을 붙잡은 사내의 손을 떼어 내려 하며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태자가 양제를 감싸 안으며 벗어나려는 가녀린 여자를 단단히 붙잡았다. 주위에 있던 모두가 그것이 보이지 않는 척, 그것을 보는 걸 피하기 위해 더 깊이 머리를 숙여 피하였다.

“내 질문하였다.”

윤제의 시선이 벽 상궁에게 꽂혀 움직이지 않았다.

“양제께오서…….”

벽 상궁이 양제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어서 고하지 못하겠느냐!”

태자의 고함이 벼락처럼 내렸다.

“전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죄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송구하옵니다. 양제께오서 궁 안팎에서 마마로 인해 태자비께서 좋지 않은 말에 휩쓸리게 됐으니 죄를 청하고자 하셨습니다. 태자비께서 며칠간 문안도 가시지 않기에 양제께오서 아침이 밝자마자 영화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하셨습니다. 소인이 주인의 몸이 상하지 않게 좀 더 강경히 갈 것을 청하였어야 하는데 마음 약한 양제께서 태자비를 뵙기 전까지 일어날 수 없다 울며 말씀하셔서 제대로 주인을 보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소서.”

“지금까지 영화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양제가 울며 소곤거렸다.

“네가 송구할 것이 무어냐. 태자비는? 태자비는 무엇을 했기에 사람이 밖에서 온종일 벌을 서고 있는데 나오지 않았단 말인가.”

태자의 외침에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태자비께서 채련각에 사람을 보내시었다 들었습니다. 저의 사죄를 돌아봐 주시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 너그러운 분이 아니겠습니까.”

“산 사람이 중요하지 죽은 이를 살피는 게 무엇이 중요하단 말이야? 너는 나와 주지 않는 태자비를 지금까지 기다렸단 말이냐? 그래서 이리 절뚝거리는 것이군.”

“송, 송구합니다.”

양제가 눈물을 쏟으며 죄를 청했다. 그녀가 태자에게 무릎을 꿇어 죄를 청하려 하자, 태자가 가녀린 여자를 강제로 일으켰다. 양제를 품에 안다시피 한 태자가 등우를 찾았다.

“등우.”

“예, 전하.”

등우가 바삐 앞으로 나섰다.

“양제를 업어다 전각으로 데려다주도록 해라.”

“예.”

태자의 명에 등우가 재빨리 무릎을 낮춰 등을 내보였다. 태자의 태감이 업어 주는 것은 곧 태자가 업어 주는 것과 진배없었다. 황공한 상황에 양제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전하. 전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업혀라.”

태자가 등우의 등에 양제를 강제로 얹었다.

“전하 이러지 마셔요.”

양제가 눈물을 쏟으며 애원했다.

“이만 쉬도록 해라. 태의를 부르고 양제에게 불편이 없도록 살피도록 해라. 주인을 잘 보살피지 못한 죄는 후일 내 직접 엄벌할 것이다. 어서 가라.”

양제를 향해 다정하고 살뜰히 말한 사내가 뒤이어 서늘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등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양제를 업은 채 달렸다. 등우가 가 버린 후, 태자의 일행은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밤길이 고요한 침묵에 싸였다.

등우에 이어 태자를 보필해야 할 등평이 두려움에 감히 태자의 곁으로 가지 못했다. 허나 아무리 무섭다 하나 이대로 주인을 밤길에 둘 수 없기에 등평이 무서움을 억누르고 태자의 뒤로 다가갔다.

“전하.”

태감의 부름에 태자가 답했다.

“영화대로 가겠다.”

등평을 포함한 일행 모두가 소리 없이 침음했다.

“모시겠사옵니다.”

“필요 없다.”

태감의 조심스러운 몸짓을 외면하며 윤제가 성큼한 걸음으로 영화대로 향했다. 태자를 뒤따르려던 등평과 일행이 태자의 위엄에 눌려 도리어 뒷걸음쳤다.

전각 밖에서 겁에 질린 발걸음들이 들썩였다. 소낙비가 내리는 것 같은 소리에 용아는 보던 책을 옆으로 치우고 찻잔을 들어 남은 차를 깨끗이 비웠다.

“비전하.”

모장의 갈급함 부름에 소년이 담담히 대꾸했다.

“괜찮다, 가 보아라.”

뒤이어 태자의 납심을 알리는 소리들이 가냘프게 울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라는 예가 채 끝까지 울리지 못하고 겁에 질려 도망치는 소리로 바뀌었다. 소리 없는 도주들이 꽤나 오랜만이었다.

벌컥.

전각문이 소란하게 열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용아는 서탁 앞에서 몸을 일으켜 옆으로 비켜서며 무서운 얼굴에게 예를 올렸다. 영화대 궁인들이 온 정성을 쏟아 살핀 전각 안은 아름답고 아늑했다. 영화로운 전각 안의 소년 또한 애정 어린 손길들의 살핌을 받아 손끝에 작은 거스러미 하나 없었다.

“이게 누구신가. 모두가 인정하는 적법하고 완벽한, 사랑받는 태자비 전하가 아니신가.”

윤제가 예를 올리는 용아의 뒷머리에 대고 떠들었다. 잔뜩 꼬인 목소리는 차가운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리 못나게 구시는 걸 보니 양제가 갔나 봅니다.”

용아가 예를 올린 모양새 그대로 답했다.

“양제가 와 있다는 걸 알았어?”

“알았습니다.”

“알면서 나와 보지도 않았단 말이냐!?”

소년의 냉랭한 얼굴은 태자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동시에 태자의 소리 높인 외침은 소년을 더욱 냉랭하게 했다.

“제가 나가 봐야 했습니까.”

“무어라.”

“죄를 청하면 무엇이든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용아가 가만가만 말했다.

“너와 관계된 소문 때문에 괜히 없는 죄를 청하는 가엾은 사람이다!”

“제가 낸 소문이 아닙니다.”

“안다! 누가 네가 낸 소문이라 했느냐?! 양제는 나의 정인이다. 하지만 태자비는 너지. 내가 정인이라 아무리 아껴 주어도 양제는 나와 함께하는 이상 평생 너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 제북, 장군부 대가주를 배출하는 대 하후가에서 보내온 적법하신 태자비이시니 배려를 베풀면 안 되는 거냐.”

태자의 말에 용아의 얼굴이 흐려졌다.

“양제가 죄가 없다면, 진범이 잡히면 자연히 없어질 소문입니다.”

금세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소년이 무심히 말했다.

“양제를 의심하는 거냐.”

“…….”

“너와 제법 친해졌다 생각했다. 내가 너를 마냥 외면하지 않듯, 너도 나를 외면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와 덜 서먹하면 궁 안에서도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후궁과 친해지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서로에게 날을 세우지 않기를 바랐다. 다른 이들이 네게 후궁의 존재 자체가 불쾌할 것이라 했으나, 후궁이기 전에 내가 가까이 두는 친구 같은 이라 여겨 주길 바랐다. 그리도 싫더냐.”

윤제의 말에 용아의 인상이 다시 흐려졌다.

“태자께오서 저와 어울려 주신 것에 감사하나, 태자께서 좋아하는 사람 모두와 제가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양제와 친하게 지내란 게 아니잖아.”

“저는 그에 대해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소년의 꼿꼿한 태도에 태자가 긴 숨을 몰아쉬었다.

“태자비께서는 황손을 낳으면 그만이라지. 후사를 보기만 하면 영화롭고 고귀한 황후가 되시고, 황태후가 되시겠지! 너에게 가여운 사람이란 게 있긴 하냐.”

윤제의 말에 용아가 끝이 긴 눈을 올려 떴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별 해괴한 말을 다 들었다는 얼굴이 무심히 물었다.

“저와 아이를 낳으실 셈입니까. 왜입니까. 전하께는 정인이 있잖습니까.”

진실로 의아해하는 얼굴이 윤제의 속을 뒤집어엎었다. 굳어 들었던 사내의 얼굴이 픽 일그러졌다.

“네 본분을 잊었냐.”

윤제가 놀리듯 소년의 손목을 잡아채었다.

“제가 왜 전하의 아이를 낳습니까.”

용아가 진심으로 거부를 표하며 남자의 손에 붙잡힌 손을 빼냈다. 온몸으로 거부를 표하는 소년을 보며 윤제는 뒷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잠시 멍해졌다.

“너는 황가의 후손을 이어 주러 신부로 온 것이다.”

“싫습니다.”

소년이 완강히 거부를 표했다.

“내게 황족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라며.”

윤제는 방금 전까지 화를 내었던 것도, 못된 장난을 치려는 것도 잊고, 소년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소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부정한 명을 들은 것처럼 질색했다.

“전하께는 정인이 있는데 왜 내게서 당신의 아이를 보려는 겁니까.”

용아의 얼굴로 비웃음과 경멸감이 퍼져 나갔다.

“…….”

윤제의 말문이 막혔다. 제관부 일족이 말한 광증이 이런 것일까 싶도록 머릿속 가득 분노가 차올랐다. 영화대 안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남자가 한 발 내디뎌 소년에게 다가갔다. 용아가 불측한 존재를 마주한 것처럼 도망치려 했다. 커다란 손이 소년을 움켜잡았다.

“싫어.”

용아가 남자를 밀쳐 내며 거부를 표했다.

“이리 와.”

소년의 시간 중에 단 한 순간도 일족의 위엄에 눌려 제약을 당해 본 바 없었다. 남자의 손이 감겨들자,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말에서 거꾸러져 추락할 때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싫어.”

윤제에게 붙잡힌 자그마한 몸이 그대로 당겨 갔다.

“너는 나의 신부다.”

“싫어.”

“그러고 보니 네가 후사를 보면 모든 게 해결될 일 아니냐. 내 사람을 쫓아내란 말을 더는 듣지 않아도 되고, 너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귀찮은 말도 안 들을 것 아닌가. 네가 아이만 낳으면 서로 보기 싫은 얼굴 안 보아도 되니 좋지 않으냐. 어서 아이를 보고, 인연 끊으면 되겠다. 아니 그러냐. 황가 때문에 평생 자유를 빼앗겼다? 아이를 낳고 나면 네가 그리 바라는 자유를 주마. 열네 살이면 다 큰 거지.”

남자가 소년을 끌고 침상으로 향했다.

“싫어.”

용아는 거부의 말만 되뇌었다. 신부에게서 거절의 말을 들을 때마다 윤제의 머릿속에 가득 찬 분노가 끓어올랐다. 싫다, 싫다, 네가 싫다는 말이 칼날처럼 머릿속에 와 박혔다.

주인의 성정에 맞추어 영화대의 궁인들이 사치하고 기품 있으되 화려하지 않게 단장해 둔 침상의 천개가 모조리 뜯겨 나갔다. 소년이 끌려가지 않으려 천개를 붙잡고 늘어졌고, 천개가 잡아 뜯기도록 남자가 천개에 매달리는 손을 힘으로 끌어당겼다.

침상에 처박힌 용아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사내를 올려다봤다.

펄럭.

남자의 손이 충격으로 멈춰 선 몸으로 다가와 겉옷을 뜯어냈다. 얇은 옷감이 단박에 뜯겨 나갔다. 종잇장처럼 떨어져 나간 우아한 포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다시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용아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차가운 얼음물에 갑자기 담가진 것처럼 파리하게 얼은 얼굴이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했다. 얼어붙은 몸에서 상의가 난폭하게 뜯겨 나갔다. 공포로 헐떡이는 숨에 소년의 몸이 간헐적으로 울렸다. 눈을 뜬 채로 정신을 잃은 것처럼 움직일 줄 모르는 용아를 본 윤제가 멈칫했다.

“…….”

남자가 주춤한 틈에 용아가 침상 끝으로 뒷걸음쳤다.

“…….”

윤제가 놀란 아이를 달래 주려고 무심결에 손을 뻗자 용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엉망으로 뜯긴 천개를 꽉 쥐고 버텼다. 남자가 뻗었던 손을 물렸다. 공포에 질린 소년의 얼굴을 인지하고, 머리에 순간 차올랐던 분노를 천천히 억눌렀다. 그가 침상에서 물러났다. 사내의 그림자가 물러가는 걸 느낀 용아가 다 뜯긴 천개를 쥔 채로 이부자락을 당겨 안았다.

“용아.”

침상 너머에서 저음이 조심스레 울렸다.

“…….”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불만 안은 채 어깨를 웅크리고 자꾸만 급하게 차오려는 숨을 내리눌렀다. 겁에 질린 소년의 반응이 침상에서 몇 걸음이나 물러선 윤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안하다.”

후회해 봤지만 한참 늦었다.

“…….”

용아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나는, 미안하다. 가 보마.”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용아에게 차분히 용서를 구하려던 윤제는 기척조차 숨겨 버리는 소년을 깨닫고 자신이 사라져 주는 것이 용아를 위한 것이라는 걸 느끼고 도망치듯 전각을 나섰다. 남자가 떠난 후에도 방 안엔 정적만 감돌았다. 고요한 방 안에 서늘한 밤공기만 존재하는 듯했다.

영화대의 궁인들은 태자의 부름에 전각으로 바삐 돌아왔다. 단단히 화가 나 영화대를 찾아왔던 태자의 얼굴은 영화대를 나갈 때 더욱 좋지 않았다. 전처럼 화가 난 것은 아니나, 표정 없는 얼굴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장은 안으로 들어가 보라는 명에 숨이 차도록 전각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전각 안은 예전에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엉망이었다.

어린 주인이 황궁 안 모두가 감히 마주하기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태자를 혼자 상대하느라 고되고 무서웠을까 싶어 달래 주려던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흉하게 천개가 뜯겨나간 침상이 이전과 조금 달랐다.

“비전하.”

모장이 혹여 크게 부르면 큰일이라도 날까 조심조심 소리를 퍼트렸다. 사람이 없는 것 같은 방 안에 온후한 목소리가 떠돌았다. 분명 용아가 이곳에 있을 텐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비전하, 어디 계셔요. 소인, 모장이옵니다.”

모장은 다시 조심히 말했다.

“비전하.”

다시 소년을 찾는 모장의 목소리가 불안으로 떨렸다. 그녀는 주인을 조심히 부르며 엉망이 된 방 안을 찬찬히 하나씩 훑으며 소년이 있을 법한 곳을 더듬었다.

바스락.

침상 곁으로 그녀가 다가서자 무언가 바삐 숨는 기색이었다.

“비전하, 거기 계십니까.”

모장은 주의하며 제 모습을 상대에게 보이려 했다.

“…….”

침상 깊숙한 곳에 다 뜯긴 천개와 이불을 끌어안은 용아가 잔뜩 웅크린 채 있었다. 소리가 나는 쪽을 보는 것이 두려운 듯 웅크린 몸은 겉옷도 상의도 없었다.

“비전하?”

그제야 모장은 어수선한 방 저편에 소년에게 그녀가 곱게 지어 입힌 옷이 뜯겨 날아간 것을 발견했다.

“…….”

말없는 소년의 반응에 모장이 충격으로 잠시 휘청거렸다.

“전하, 괜찮습니다. 이리, 오세요. 소인입니다.”

여인의 애달픈 목소리에 용아가 힐끗 옆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품에 안은 이불로 턱을 묻으며 용아가 머리를 내저었다. 겉옷과 상의 외에 뜯겨 나간 것이 없는 걸 본 모장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소년의 맨등에 급히 덮어 주며 다시 부드러이 말했다.

“이리 오십시오. 왜 거기 계시옵니까. 불을 켤까요.”

잔뜩 웅크린 등을 따듯한 손이 조심스레 건드렸다. 흠칫,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다가온 이를 깨닫고 다급히 품으로 파고들었다.

“모장.”

“예, 소인입니다.”

“……싫어…….”

소년이 들리지 않을 만큼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다 괜찮습니다. 소인이 있지 않습니까.”

사내아이가 아무리 자그마해도 다른 아이들은 그녀의 어깨 어림까지 오고는 했다. 용아도 지난겨울과 이번 봄에 부쩍 크기는 했으나 키만 커질 뿐, 체구가 가녀린 소년은 여전히 조그만 아이 같아서 모장을 안타깝게 했다. 지금은 이렇게 품 안의 자식처럼 보듬어 줄 수 있어 좋지만 좀처럼 크지 않는 용아는 모장의 큰 걱정거리 중 하나였다.

“…….”

소년은 울지도, 불안한 목소리로 떠들지도 않고, 가만히 따뜻한 품을 파고들기만 했다. 모장은 아무런 말없이 품 안의 용아를 조심스레 도닥여 주었다.

긴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지난밤 태자가 다녀간 후로 태자비는 말이 없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말수가 줄었다. 영화대의 궁인들은 엉망이 된 방과 뜯겨 날아간 겉옷과 상의로 둘 사이에 심각한 다툼이 있었다는 걸 짐작만 하고 말았다. 걱정으로 문 곁을 멀리서 오고 갔지만 그뿐이었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진 주인이 알아차릴 정도로 다가가는 조심성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영화대의 궁인들은 하필 밝아 오는 아침에 태자와 태자비가 정천궁으로 문안을 올리러 가야 한다는 것에 슬퍼했다. 제 일도 아닌데도 걱정을 한 짐씩 짊어지고 침울한 얼굴로 금당대의 태감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태감이 오다가 뭔가 잘못되거나, 태자가 갑자기 병증이 생기는 일은 없을까 하는 철없는 투덜거림도 한숨과 함께 퍼트렸다. 그녀들의 기대와 달리, 등우는 약속된 때에 영화대에 당도했다.

“오셨습니까.”

영화대의 궁인들이 음침하게 예를 올렸다.

“준비되셨소.”

등우가 우울한 궁인들의 낯빛을 살피며 조심히 말했다.

“알리겠습니다.”

어린궁인이 답하고 영화대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등우의 눈이 바쁘게 주위를 살폈다. 그가 무슨 말을 붙여 보려 해도 영화대 궁인들은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곧 태자가 영화대 앞에 당도했다.

거의 동시에 전각의 문이 열리며 태자비가 나왔다. 태자비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각 밖으로 나선 용아가 시선을 올리지 않은 채 궁인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괜찮…….”

윤제가 가볍게 아는 체를 하며 손을 뻗으려는 순간 소년의 얼굴이 희다 못해 파리하게 질렸다. 파랗게 언 얼굴이 불안하게 남자를 외면했다. 모장은 태자비를 단단히 붙들고 버텨 냈다. 용아는 태자의 말에도, 시선에도, 존재에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몸을 숙여 예를 올렸다. 예를 올리며 전해야 할 말은 없었다.

“…….”

예를 올린 소년의 머리가 두려움으로 경련했다.

“일어나세요.”

윤제가 천천히 말을 건넸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용아는 무서운 것을 피하듯 다급한 걸음으로 정천궁으로 향했다. 도망치는 듯한 소년에게 윤제는 감히 손을 뻗지도, 말을 건네지도 못했다. 그가 조금만 다가가도 용아의 얼굴이 파리하게 얼어붙었다.

태자비가 겁에 질렸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토록 굳은 얼굴로 태자 옆에 서 있는 게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문안을 온 태자 내외를 맞으러 나온 좌공공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드소서.”

전각의 문을 열며 좌공공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따듯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황을 뵙습니다.”

“부황을 뵙습니다.”

태자와 태자비가 나란히 예를 올렸다.

“모후를 뵙습니다.”

“모후를 뵙습니다.”

예를 올리는 데에 있어 잘못된 것은 없었다. 태자 옆에 서서 태자의 시선이 닿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태자비의 태도가 너무도 선명하여 상석의 황제와 황후조차 당황했다.

“그만 물러가 보거라.”

황제는 긴말 않고 둘을 내보냈다.

“송구하옵니다. 물러가옵니다.”

“물러가옵…….”

재빨리 예를 올린 용아가 태자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를 피해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소년이 윤제를 피해 밖으로 달아났다.

황제도 황후도 태자도 도망치는 태자비를 붙잡지 못했다. 태자비를 불러 태자 곁에 다시 세우는 것은, 겁에 질린 어린 짐승이 포식자를 피해 내달리는 것을 붙들어 마주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격이었다.

“물러가옵니다.”

첫 문안부터 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태자가 영화대까지 태자비를 배웅해 주는 것이 당연한 절차가 돼 있었다. 밖으로 나온 용아는 태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늉조차 않고, 주위를 재촉하는 상전의 모습을 보이려는 기색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영화대로 걸었다. 혹여 태자가 따라 올까 굳은 소년의 얼굴은 잔뜩 겁에 질려 있고, 세상에 있어선 안 되는 못 볼 것이 쫓아오지는 않을까 공포에 잠긴 표정이었다.

“비전하, 천천히 가셔도 됩니다. 아니 오십니다.”

모장이 소년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

용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부황과 모후께 예를 마저 올리고 나온 태자가 정천궁 앞에 나왔을 때 등우와 금당대 일행만 남아 기다리고 있었다.

“배웅은 하지 말아 달라 하십니다.”

등우가 힘겨운 얼굴로 주인에게 말을 올렸다. 혹여나 자신이 올까 뒤도 안 보고 저 멀리 가 버리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는 시선에 허탈함이 가득했다.

“누가.”

“모 상궁이 그리 부탁하였습니다.”

“왜.”

“거기까지는 모르겠사옵니다. 물어 올까요.”

등우가 심기 불편한 얼굴을 부지런히 훔쳐보며 말했다.

“내가…….”

윤제가 험악한 말을 쏟을 것처럼 말을 하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등우가 더욱 몸을 낮췄다. 사내의 아름다운 얼굴이 불쾌하게 구겨진 것이 두렵고, 더 좋지 않은 일이 이어질까 심려되었지만, 등우는 반드시 해야 할 말은 전하는 고집 있는 태감이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 질문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여쭈었지만 침묵뿐이었다. 윤제가 몸을 돌려 그대로 가 버렸다.

정천궁에 문안을 올리고 금당대로 돌아갔던 태자는 황명으로 금당대에 도착하자마자 정천궁으로 불려 왔다. 황제는 모두에게 물러가라는 말 대신 황족의 높으신 권능을 떨치셨다. 우르르, 겁에 질린 발들이 도망치듯 전각 밖까지 물러났다.

황제의 억압에 윤제 역시 견디기 힘들었으나 지금은 몸을 일으켜 나갈 수 없었다.

“네놈은!”

황제가 예를 올리고 있는 태자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윤제는 부친이 힘을 휘두르는 대로 받아들였다. 손등에 핏줄이 서도록 아들의 목줄을 틀어쥔 황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귀한 아들을 험악하게 흔들어 댔다.

“시집온 첫 해에 고작 열두 살짜리가 짐에게 뭐라고 한 줄 아느냐?”

“모르옵니다.”

“짐과 황후처럼 너와 서로 존중하는 사이가 되기를 바란다 하더라! 그런 아이에게 그딴 짓을 해? 일국의 태자라는 놈이……!”

황제가 태자를 아래로 내팽개쳤다.

“…….”

윤제는 부친이 던지는 대로 나가떨어졌다. 지난날 소년이 했다는 말이 그에게 아프게 와 박혔다. 무릎을 꿇은 채 부황의 말을 기다리는 윤제의 머리 위로 사나운 말이 쏟아졌다.

“제 짝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자란 놈. 짐이 서른이 넘어 얻은 아들이라 태자를 아끼고 귀하게 여겨 왔다지만 이리 무도하게 키우지 않았거늘. 어찌 이리 모자라게 굴어?! 밖에 있느냐! 들어라. 당분간 동궁전 후궁에 금족령을 내리고, 내외인의 출입을 일체 금한다. 태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금당대 또한 아침저녁 문안 외에는 금족령을 명한다. 정무도 전부 금당대 안에서 해결토록 하라!”

황제의 소리가 전각 안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소자, 부황의 명을 따르옵니다.”

윤제는 예를 올리고 나서야 물러 나왔다. 황제의 화에 오랫동안 노출된 탓인지 태자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전각 밖으로 나온 그가 평생 해 본 적 없는 기침을 긴 시간 쿨룩였다.

금당대의 궁인들이 분주히 다가왔다.

“괜찮다.”

등우가 태자를 부축하려 들었다. 본 적 없는 동궁 주인의 지친 기색에 궁인들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염려 가득한 시선에 윤제가 흐릿한 웃음을 흘렸다.

“못 보일 꼴을 보였다. 걱정 마라. 괜찮으니 가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태자가 금당대로 향했다. 피로한 행색은 금세 천천히 가셨지만 윤제의 얼굴에 앙금처럼 남은 침중한 표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초여름, 정오의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는데 황궁 안 공기는 서늘하기만 한 날이었다.

태자비가 실어증에 걸렸다는 소문은 동궁을 넘어 황궁 전체로 퍼져 나갔다. 황궁의 높은 담을 넘어 대가로, 북쪽 끝 제북까지 순식간에 닿았다. 태자비가 실어증에 걸린 것은 오롯이 태자 때문이라고 했다. 태자비가 가장 즐겁게 찾던 함월전에 향하다 태자를 보고 범을 만난 어린 짐승처럼 얼어붙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금당대에 내려졌던 황명은 여름이 끝나고 거두어졌다. 동궁 후궁에 내려진 금족령과 내외인에게 내려진 금족령도 가을이 시작되고 거두어졌다.

태자비 말의 고삐를 끊은 사건의 진범은 여전히 잡히지 않고 있었다. 봉의 경씨의 일가가 자결한 봉의와 함께 책임을 지겠다 청하였기에 봉의가 죽음으로 책임을 다한 것으로 일단락 짓고 지나갔다. 죄를 청한 경씨의 부친에게서만 관직을 거두고, 봉의의 친정인 경씨가에 대해서는 사사롭게는 황가의 사돈이 되니 따로 죄를 묻지 않았다.

두 계절이 바람처럼 지나가 버렸다.

영화대 전각 안에 든 태자비는 꼼짝하지 않았다. 자주 찾던 태후의 함월전도 최근 찾기 시작한 황후전에도 발길을 끊어 버렸다 했다. 때문에 태자비의 실어증 소문은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태자와 태자비가 말을 나누지 않은지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황제는 태자비를 성심껏 보살펴 주셨으나 조석으로 올리는 문안 만큼은 계속 이어가게 했다. 태자의 곁에 설 때마다 태자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제 옆에 선 헌앙한 신랑을 귀신이라도 되는 양 무표정한 얼굴로 질겁하는 게 선명히 보였으나 지난 반년간 아침저녁 문안은 계속 되었다.

“드소서.”

태감의 말에 태자는 정면을 바라보며, 태자비는 비스듬히 내리뜬 시선으로 안으로 들었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두 사람의 표정은 큰 차이가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다를 바 없었다. 태자는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태자비에게 굳이 제 존재를 보이려 하지 않았다. 소년이 태자가 나타나면 못 볼 게 나타난 것처럼 시선을 피하면, 태자 또한 소년을 못 본 척 지나쳐 버렸다.

“부황을 뵙습니다.”

“부황을 뵙습니다.”

태자와 태자비가 나란히 예를 올렸다.

“모후를 뵙습니다.”

“모후를 뵙습니다.”

태자비가 밖에 나와 말을 건네는 건 이때뿐이다.

“아가, 요즘은 어찌 이 사람의 전각을 찾아 주지 않느냐. 좀 괜찮은 게냐.”

“…….”

용아는 황후의 하문에 침묵만 건넸다. 황후는 부드러이 재촉하여서라도 한마디 끌어내 보려는 듯 안타까운 얼굴을 했지만, 황제의 제지에 막혀 그만두어야 했다.

“물러가 보거라.”

황제와 황후 사이에 안쓰러운 시선이 오갔다.

“물러가옵니다.”

“물러가옵니다.”

바깥으로 나온 태자비가 전각 앞에 기다리고 있는 궁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함께 나온 태자에게 말도 없이 예를 올렸다. 윤제는 아무런 반응 없이 예를 올리는 무심한 소년을 잠시 바라봤다. 용아는 태자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제가 할 예만 올리고 돌아서서 가 버렸다.

태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답을 할 수도, 가벼이 손짓으로 답할 수도, 무얼 할 수도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소년을 공포에 빠트렸고, 손짓은 뒷걸음치게 했으며, 무얼 하지 않아도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 작은 어깨는 흠칫 떨었다.

처음엔 고민하느라 답례할 틈을 놓쳤고, 이후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관례가 되어 버렸다. 그도 소년에게 말을 걸어 보려 한 적도 있었다. 사죄를 하려면 우선 말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조금 다가가기만 해도 다가간 것의 배는 피해 버리는 상대를 강제로 붙들고 말을 나누는 게 상대에게 더 못할 짓이란 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안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태자가 태자비를 배웅하는 것을 그만둔 지도 반년이 되어 간다.

저 멀리 옆도 뒤도 잠깐 돌아보지도 않고 분주히 걸어가는 용아를 보며 윤제가 등우를 향해 말했다.

“지난번보다 덜 피하는 것 같지 않아?”

등우는 얼마 전부터 이리 묻는 주인에게 올릴 말이 없어 곤란했다.

“전혀 아니옵니다.”

“예를 올릴 때 말은 없지만 그렇게까지 피하지는 않잖아?”

“아니오.”

“아직 이쪽을 제대로 안 보는 것은 안다.”

“예, 아닙니다.”

등우는 곤혹스러움을 반복해 당하기 싫었기에 최대한 단호히 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윤제가 엄격한 태감의 얼굴을 불만스레 살피고는 앞서 걸어갔다.

“여전히 영화대에만 있다더냐.”

“예.”

“태후전도 찾지 않고?”

금당대로 향하는 태자의 걸음이 느렸다.

“이따금 서편으로 문안을 올리지만 직접 찾으시는 일은 없다 합니다.”

“나하고 만난 후부터라.”

“그러하옵니다.”

윤제의 혼잣말 같은 읊조림에 등우가 재빨리 답해 올렸다. 험악함을 풍기는 사내의 눈이 선량한 공공에게 내리꽂혔다. 소인은 여쭈시는 줄 알고, 라고 웅얼거리며 등우가 걸음을 빨리 했다. 총총히 걸어 길을 밝히는 태감의 뒷머리를 향해 태자가 나직하게 고했다.

“천천히 가.”

윤제의 말에 앞서 가고 있는 태자비 일행을 떠올린 등우가 걸음을 멈췄다. 과하도록 천천히 걸으며 다음부터 전하께서는 이원을 산책하신 후 돌아가는 게 어떠냐 아뢰었다. 잘생긴 얼굴이 다시 험악한 시선을 던졌다. 괜찮은 생각인 줄 알았다,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다 고하는 말에 괜찮은 거 같기도 하다, 라는 답이 한숨과 함께 돌아왔다.

용아가 실어증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말을 할 수 있긴 했다. 다만 하루에 내뱉는 말이 열 마디가 채 되지 않을 뿐이었다. 영화대의 궁인들이 불손한 소문에 대해 염려하는 것을 알지만 용아는 정말로 실어증에라도 걸려 버렸으면 했다. 말을 할 수 없으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어떤 말을 들어도 반응하지 못할 테니 그편이 나을 것 같았다.

“비전하.”

궁인의 부르는 소리에 용아가 시선을 건네는 것으로 답했다.

“말씀을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음 상궁이었다. 노상궁은 불쾌한 소문에 분해했고 말없는 주인을 답답해했다. 이럴 때일수록 태자비의 지엄함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노상궁에게 용아는 말없이 그녀가 할 필사거리만 들이밀었다.

“장차 내궁을 다스리셔야 할 태자비께서 이리 못나게 구십니까.”

귓전에 와 닿는 잔소리에 손을 저어 물러날 것을 명했다.

“태자 전하와의 그날 밤 일도 그러합니다. 비전하께서 어리다 하나 그리 싫어하고 무서워하실 일입니까. 황실에 태자비로 오셨으면 지아비를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옵니다. 후족은 혼인 후 대개들 열여덟이 지난 후에 정식 합방에 드시긴 하나, 제북의 다른 이들은 일찍 혼인하여 자손을 본다 들었습니다. 열넷이면 적지 않은 나이입니다.”

음 상궁의 얼굴에 꼬장꼬장한 성격이 올곧게 번져 나갔다.

“왜 이러십니까……!”

“이러지 마셔요!”

주위의 궁인들이 말리려 해 봤으나, 황후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가는 황제의 친구요 누이인 상궁을 말릴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

용아가 몸을 돌려 노상궁을 돌아보았다.

“소인이 잘못된 말씀을 올렸습니까?”

음 상궁이 말리려 하는 궁인들을 떨치며 당당한 얼굴로 고했다.

“저것을 끌어내.”

용아가 선선히 말했다.

“비전하.”

“음 상궁께서 잠시 실언한 것입니다!”

목교와 목란이 태자비를 말리려 했다.

“실언이라니! 이 사람은 잘못된 길로 가시려는 태자비를 바르게 인도하려는 것뿐입니다. 제가 잘못된 말을 했다면 잘못을 바로잡아 주소서.”

음 상궁이 꼿꼿한 태도로 말했다.

“저것을 당장 끌어내 장50대를 쳐라.”

용아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은 목소리로 명했다.

“비전하!”

“전하!”

목교와 목란이 말리는 소리를 들은 모장이 안으로 다급히 들었다. 모장을 본 용아가 다시 명했다.

“저것을 끌어내 장50대를 쳐.”

태자비의 명에 모장이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비전하. 왜 그러시옵니까. 장50대라니. 음 상궁의 나이에 그리 맞으면 살 수 없음을 모르시옵니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모장의 말에 음 상궁이 주름진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소인이 무엇을 잘못하였다 이리 핍박하십니까?”

“음 상궁!”

모장이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담아 돌아봤다.

“너희가 못 하면 내가 하마.”

태자비가 소문과 달리 술술 말을 하고, 며칠간 움직일 거리를 잠깐 사이 오고 가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이런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용아가 혼인할 때 가져온 혼수품이 든 방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걸어 방에 드는 태자비의 등을 살피며 모장과 궁인들이 음 상궁을 재촉했다.

“어서 죄를 청하세요!”

“어서요!”

“이 사람이 뭘 잘못하여……!”

혼수품이 든 방에서 나온 용아의 손에 채찍이 들려 있었다.

촤악! 짝.

소년의 가녀린 체구에 맞추어 만든 채찍은 가늘고 탄탄했다. 팔을 펼쳤을 때 이쪽 손끝에서 저쪽 손끝까지 닿을 길이의 채찍을 용아가 휘두르자 채찍이 소년의 팔처럼 목적한 바를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비전하!”

“노상궁이 잘못하였으나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고정하소서!”

태자비의 채찍은 짧지 않은 길이인데 정확히 음 상궁의 치마만 후려치고 거두어졌다. 전각의 천장 높이가 낮지 않지만 채찍의 방경을 보아 방 안이 누더기가 되도 이상하지 않았다. 소년이 목적한 바만 정확히 때릴 수 있을 만큼 채찍질에 능숙한 것을 깨달은 궁인들은 놀라는 한편, 황급히 노상궁의 앞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비켜라.”

음 상궁의 위세가 실로 대단한 듯했다.

“비전하, 이러지 마소서.”

소년의 팔에 감긴 채찍은 척 보아도 귀해 보였다.

“너희가 그래 봤자다.”

용아가 선선히 채찍을 휘둘렀다.

“비전하!”

“고정하시어요!

“전하!”

표정 없는 얼굴로 채찍을 휘두르는 소년은 먼 과거 황실이 장군부와 전쟁을 할 때 보았다던 악귀 같았다. 홍문의 악귀는 채찍으로 황족의 목을 휘어감아 낙마시키고, 원하는 목을 정확히 꺾을 수 있다 했다.

“소인에게 죄가 있다면 소인에게만, 악!”

음 상궁은 채찍의 위협 속에서 당당히 외치려 했다.

“너만 때릴 테니 걱정 마라.”

용아가 무심히 노상궁의 걱정을 달래 주었다. 철썩! 휘둘러진 채찍이 앞을 막고 있는 궁인들의 머리 너머에 있는 음 상궁의 팔을 꿰듯이 찌르고 물러갔다.

“음 상궁!”

모장이 강한 힘에 순식간에 옷이 다 해진 음 상궁의 팔을 몸으로 감싸며 음 상궁을 불렀다. 연이은 충격과 예상치 못한 격통에 음 상궁은 신음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

“비전하. 이러지 마셔요. 음 상궁의 노령을 생각하시어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목교는 태자비께 감히 손을 뻗어 막지도 못하고 발 앞에 엎드려 간절히 빌었다. 용아는 친분 있는 궁인의 애달픈 외침에도 상관하지 않고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모장과 목란이 음 상궁을 감싸고 있지만 빈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촤악, 무서운 소리가 유려하게 울렸다.

“비전하!”

모장의 외침이 전각 안에 안타깝게 울렸다.

“악!”

채찍이 날래게 와 후려칠 때마다 음 상궁이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모장과 궁인들이 음 상궁의 몸을 팔과 손으로 가려 보았지만 소년의 매서운 채찍은 음 상궁의 몸에 어렵지 않게 내려쳤다. 음 상궁의 비명에 몇몇 궁인이 안으로 뛰어들었지만 휘두르는 채찍의 무서운 소리에 우선 멈추었고, 다급함에 안으로 뛰어들려 하면 소년의 채찍이 그녀 앞에 방해물을 가져다 두어 들어올 수 없도록 했다.

음 상궁의 괴로운 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노상궁의 얼굴과 몸이 상처로 엉망이 된 후에야 태자비가 채찍질을 멈췄다. 꼿꼿한 태도를 잃지 않고 비명을 내지르던 음 상궁은 끝까지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용아의 무심한 얼굴을 보고는 공포에 질려 살려 달라 넋 나간 얼굴로 빌고 또 빌었다.

“저것을 광에 가두어라.”

“비전하.”

모장이 무릎으로 기어 태자비에게 다가갔다. 음 상궁을 감싼 궁인들은 머리며 옷이 채찍이 퍼트리는 속도에 엉망이 됐지만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말끔했다.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것이 더 무섭고 두려웠다.

“응.”

감정이라고는 없는 얼굴이 모장을 돌아봤다.

“음 상궁을 광에 가둘 순 없습니다. 저리 다쳤는데 의원에게 보여야 합니다. 음 상궁은…….”

“폐하의 친우요 누이라.”

모장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자 용아가 친절히 뒷말을 이었다.

“……그러합니다…….”

모장이 이만 화를 거둘 것을 소리 없이 청했다.

“황가는 아랫것 관리가 엉망이 아니냐. 아랫것 하나 광에 가둘 수 없다니. 주인에게 제 기분대로 떠드는 아랫것을 채찍으로 쳐 죽이는 게 뭐 대수라고. 저것이 황제의 것이면, 저것을 폐하께 갖다 버려라.”

용아는 손목에 감겨 있던 채찍을 바닥에 내던지며 침상이 있는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태자비는 어린 나이에도 기품 있고 우아한 상전이었다. 항상 자신의 시중을 드는 궁인들에게 고맙다 감사를 전하고, 곁에 두며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결코 진정한 친구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좋은 상전으로 받들며 자랑으로 여겼다.

소년은 궁인이 실수로 잘못을 하여도 괜찮다 웃어 주는 다정한 상전이었다. 고귀하게 태어나 온갖 호사만 누리며 컸을 태자비의 이력을 생각하면 과하게 너그러운 주인이었다. 작은 실수에도 소리를 지르고, 뺨을 치거나 매질부터 명하는 성격 고약한 웃전들과 달랐다. 다르다고 믿고 있었다.

아니었다.

너그러운 주인이란, 그가 너그럽고 싶을 때만 너그러운 것이었다. 너그러운 주인도 언제든 지독한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소년은 대부분 너그러웠지만, 언제든 그가 원할 때 악귀처럼 굴 수 있었다. 시시때때로 매질을 명하는 무서운 웃전도 친히 채찍을 휘두르는 일은 없었다. 그리 능란하게 채찍질이 가능한 이도 없었다.

영화대 궁인들은 채찍의 무서움보다 다정한 주인의 돌변에 더 놀라서 후들후들 떨었다. 황제께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음 상궁을 데려가면서도 황제가 내릴 화를 무서워할 틈도 없었다. 그저 주인의 명을 어서 따라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캄캄한 전각 안으로 모장이 사뿐히 걸어 들었다. 낯선 고요에 잠긴 전각은 입구와 안의 일부는 정돈되어 있었으나 여인의 마음에 찰 만큼은 아니었다. 꼼꼼한 손이 지날 때마다 어수선하던 전각 내부가 깔끔하게 정돈되었다. 갑자기 돌변한 주인을 두려워, 해가 져 감에도 불조차 밝히러 들어오지 못한 탓에 방 안은 어둑어둑했다. 등불을 하나씩 밝히며 방 안으로 든 모장은 침상 곁의 등불까지 환히 밝혔다.

“비전하.”

불을 밝히겠다 여쭈는 말을 건네기도 두려워하는 궁인들과 달리 여인은 비교적 담담히 무서워진 주인을 불렀다.

“응.”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는 소년은 몹시도 작았다.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주무시옵니까.”

“응.”

“주무시온데, 대답은 어찌 이리 잘하실꼬.”

모장이 침상 끄트머리에 앉아 채찍을 휘두르느라 거칠어졌을 손을 가져가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 주었다. 용아는 폭력을 휘두른 손을 살뜰히 닦아 주는 모장을 깨닫고 픽, 웃고 말았다.

“…….”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침묵한 채로도 서로 편안했다. 그런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음 상궁은…….”

모장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용아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잘 데려다주었나?”

“예. 전하. 음 상궁은…….”

모장은 어떻게든 화가 난 주인을 다독이려 했다. 그녀의 마음을 알지만 용아는 듣지 않으려 했다. 모장의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몸을 반듯하게 한 용아가 거칠어진 손을 다독여 주는 여인의 손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내가 모장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지 마라.”

“예.”

소년의 엄격한 말에 모장이 다정하게 답했다.

“……많이들 놀랐겠지…….”

용아는 다정한 답에 금세 풀어져 모장의 무릎에 얼굴을 올리며 소곤거렸다. 모장은 냉혹한 주인이 될 수 있지만 항상 너그러움을 베푸는 어린 주인의 옆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다정하게 답했다.

“염려 마시어요.”

믿음직한 말에 용아는 눈을 단단히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황궁 안이 발칵 뒤집혔다.

“뭐라고?”

습관처럼 영화대는? 이라고 물었던 윤제는 현실감 없는 말에 세 번째 되물었다. 등우는 주위에 혹여 듣는 이가 있을까 얼굴을 쭉 빼 바삐 살피며 고했다.

“태자비 전하께서 음 상궁을 채찍으로 때렸다 합니다.”

“채찍……?”

“예. 채찍질이 아주 일품이시라 하더이다. 음 상궁을 본 의원이 어떻게 이렇게 급소 옆에 알맞게 피해서 때릴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합니다. 죽이려고 때리는 게 아니라 상처를 입혀 오래도록 아프게 하는데 매우 알맞은 매질이라는 뜻이지요. 소인이 알기로도 그런 고상하고 악의 어린 채찍질은 잘 없사옵니다.”

“부황께서는? 음 상궁은 부황의 유모 상궁이 아닌가.”

“소식을 들은 왕공 대신들과 조정의 신료들이 몰려와 태자비를 폐할 순 없다 하나 가두어 두거나 엄벌에 처해야 한다 하였지요. 상궁이라 하나, 음 상궁은 황제 폐하의 친구며 누이가 아니냐면서요.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태자비가 어리고 혈기 방장하여 잠시 분노를 이기지 못해 과하게 훈계했다 하나 아랫사람이 잘못하여 그런 것이니 탓할 수 없다 하셨답니다. 음 상궁은 극진히 보살펴지고 있으니 걱정 말라 하셨습니다. 음 상궁은 정천궁 후전 곁방에 있다 합니다.”

“끝이냐?”

“예.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영화대의 태자비 전하를 따로 부르지도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다 합니다. 벌도 당연히 없고요. 오히려 정천궁에서 보살핌을 받는 음 상궁과 독대를 하시다 화를 내셨다 하더이다.”

등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마쳤다.

“음 상궁에게 화를 내셨어?”

“예.”

“음 상궁이 태자비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지?”

질문을 하는 윤제의 표정이 기묘했다. 태자비가 채찍을 휘둘렀다는 게 태자에게도 큰 충격인 듯했다. 등우가 다정히 답해 올렸다.

“거기까지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알아봐.”

“그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영화대 궁인들이 평소 그리도 다정하고 너그럽다 자랑하던 태자비께서 엄한 주인이라는 게 알려져서 그쪽 궁인도 입을 열지 않고, 다른 전각 궁인들도 영화대 궁인과 말을 섞지도 영화대 근처로 가지도 않는다 합니다. 잘못 갔다가 태자비 전하 채찍질에 녹진하게 당하면 어쩌냐면서요. 부득이 영화대 앞을 지날 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한답니다. 금당대 궁인들도 다음 문안 때 영화대 앞에서 기다리는 걸 몹시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만만하게 보았나 보다?”

“워낙 너그러우시니 큰 무례만 저지르지 않으면 대부분 눈감아 주셨던 걸로 아옵니다. 이를 비추어 볼 때 음 상궁이 큰 무례를 저질렀다는 뜻이지요. 폐하와 음 상궁의 독대 중 폐하께서 화를 내실 때 음 상궁이 무엄한 소리를 하였는데 그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자비께서 어린아이처럼 구시니 답답하다며, 열네 살이면 다 큰 게 아니냐고 소리치셨다 합니다. 친구요 누이로 가까이 하신다지만 황제께 소리를 높였다니 음 상궁이 채찍질을 너무 맞아 미쳤나 봅니다.”

윤제의 얼굴이 정적에 감싸였다.

“…….”

기이한 침묵에 등우가 상전의 눈치를 살폈다.

“전하?”

윤제가 눈썹을 구기며 소리 없이 침음했다. 무척이나 뼈아파 보이는 얼굴이었다. 방금까지 대화를 잘 하던 이가 갑자기 아파하니 등우의 눈이 요란스럽게 움직였다.

“미친 늙은이.”

태자의 욕에 등우가 곧바로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윤제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나를 채찍으로 패야 기분이 풀리려나.”

낮고 낮은 목소리로 황궁, 황실, 황가 종친, 이 나라 종묘사직이 뒤집어질 소리를 하는 태자를 눈이 튀어나오도록 큼지막하게 뜬 등우가 올려다봤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때는 폐태자비가 될 겁니다.”

“그걸 바랄지도.”

윤제가 음울한 얼굴로 소곤거렸다.

음.

등우가 소리 없이 동의했다. 황제께서 태자비에게 따로 벌을 내리지 않는 게 태자비가 잘못되어 안 좋은 건 태자비 본인이 아니라 황제와 태자를 포함한 황가이기 때문 아니겠냐는 시선이 있었다. 태자비가 실어증이 걸려 얕보이지 않을까 염려하였던 것이 무색하게, 영화대 태자비의 위세는 날로 높아져 갔다.

함월전 연 상궁이 영화대에 든 것은 아직 날이 밝지 않은 흰 새벽이었다.

“비전하.”

용아는 자신을 깨우는 손에 설핏 깨어났다. 그를 흔드는 사람이 연 상궁의 것이란 걸 깨닫고 잠기운 선명한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침상 곁에 선 연 상궁 옆으로 모장이 급히 다가오는 걸 보아, 연 상궁이 전각을 살피는 상궁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침상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용아는 잠결 속에서도 반사적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비전하, 어서.”

침상에서 내려서는 용아의 시중을 들며 연 상궁이 다급히 말했다. 용아는 이런저런 말도 없이 방을 나섰다. 모장이 바깥이 추우니 뭐라도 걸치셔야 한다 바쁘게 말하며 손에 쥐고 있던 겉옷을 어깨에 걸쳐 주었다. 소년은 걱정하는 이의 손을 살짝 쥐어 주고는 겉옷을 챙길 틈도 없이 전각을 뛰쳐나갔다.

새해 첫날 함월전에 태후의 첫 축언을 훔치러 갈 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함월전을 향해 달렸다. 바깥출입의 무서움도 잊고, 그토록 피하고 싶은 태자에 대한 두려움도 전부 잊어버리고 오직 함월전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갈급한 얼굴로 울먹이며 따라오는 연 상궁이 한참 뒤처진 것도 살피지 못하고 함월전 계단을 두 개씩, 세 개씩 한꺼번에 뛰어올랐다. 황궁의 지엄한 예법 따위 나중에 실컷 벌 받으면 될 터였다. 가슴이 들썩이도록 내달려 함월전으로 드는 용아를 맞은 것은 울고 있는 궁인들이었다.

“……할머님…….”

소년은 숨이 차 헐떡이는 것도 잊고 안간힘을 쓰며 전각으로 달려들었다. 태자비가 편히 들도록 죄 열어둔 전각의 문 옆마다 흐느끼는 궁인이 주저앉아 있었다. 함월전의 후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침상을 향해 용아가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섰다.

“할머님.”

침상은 기묘하도록 고요했다.

“……할머님…….”

침상에 누운 다정한 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님. 용아입니다. 용아가 왔습니다.”

온몸으로 경험해 본 바 없는 소름이 일었다. 대답 없는 따듯한 손을 단단히 붙들었다. 작은 손 위에 올린 메마른 손이 툭, 힘없이 내렸다.

침상 곁에 달라붙은 소년이 잘게 머리를 저었다.

“할머님.”

용아는 무엄하게도 잠에 드신 황태후의 몸을 허락도 구하지 않고 거칠게 흔들었다. 고개를 내젓는 얼굴에 빨갛게 열이 올랐다. 고요하던 어린 얼굴이 무너져 내리며 울음을 퍼트렸다.

무엇이 무서워서 방 안에 숨어 지냈던가. 소중한 이를 만나러 올 용기도 없는 겁쟁이인가. 짧은 순간 바보 같은 후회와 철없는 응석이 이어졌다.

“할머님. 용아가 왔습니다. 가지 마세요.”

침상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달라붙은 소년이 울며 애원했다. 항상 다정히 느릿느릿 깨어나 웃음을 건네던 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목 놓아 우는 용아의 뒤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소년은 울다 돌아보았다.

태자와 황제가 목석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용아는 무서워 태자에게 시선조차 건네지 못했던 것을 잊고 그를 황급히 끌어와 몸짓으로 할머님을 깨워 달라고 청했다. 윤제는 울며 제 손을 당겨 미동 없는 태후의 손에 겹치는 소년을 안쓰럽게 내려다봤다.

“할머니 가지 말라고 해요.”

소년이 간절히 말했다.

“용아.”

태자의 달래려는 말에 용아가 얼굴을 내저으며 어서 할머니를 못 가게 하라고 다시 떼를 썼다. 세 계절이 다 가도록 표정 없던 얼굴이 쉴 새 없는 울음으로 엉망이었다. 가여운 애원의 말을 들어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이루어 주고 싶지만 누구도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아가.”

태자비가 된 후로 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는 소년이었다.

“부황, 어서요.”

용아가 자신을 부르는 황제의 손을 끌어와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당신께서 황제이니 네 부탁 하나 얼마든 들어주마 하였던 황제는 우는 소년의 청에 곤란하고 서글픈 얼굴을 건넸다.

용아는 다시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움직이지 않은 손을 붙들고 울며 소곤거렸다.

“할머님, 가지 마세요.”

침상에 붙어 앉은 소년의 몸이 흐느끼는 울음으로 쉼 없이 울렸다. 소년의 우는 소리를 따라 함월전의 궁인들도 울음을 퍼트렸다.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작은 등을 가엾게 보던 황제가 손짓으로 태자에게 명했다. 윤제는 넋이 나간 얼굴로 우는 용아에게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용아.”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우는 뒷머리를 감쌌다. 정신없이 우는 소년의 몸은 이상하도록 뜨겁고 자그마했다. 용아는 울다가 부르는 소리에 저와 함께 가는 이를 붙잡아 달라고 옷깃을 부여잡고 매달렸다. 윤제는 울음으로 떨리는 용아의 등을 안아 부드럽게 당겼다.

“할머니는 네가 있어 기쁘셨을 거다.”

남자의 말에 용아가 침상을 돌아봤다. 울음으로 빨갛게 된 얼굴이 다시 눈물을 쏟았다. 태자비가 너무 슬피 눈물을 쏟아 대 정작 직계 친족인 황제도 태자도 소년을 달래느라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네가 있어 외롭지 않으셨을 게다. 태자는 태자비를 데리고 나가 보거라. 이러다 태자비가 잘못될까 걱정이구나. 아가가 울면 할머님이 걱정하지 않으시겠느냐.”

황제의 말에 용아가 소리 죽여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제는 황제의 애타는 손길에 용아를 돌려세워 밖으로 나왔다. 할머님이 걱정하실 거라는 말을 염려해서인지 태자의 손에 붙들려 나오며 소년은 소리를 잔뜩 억누른 채 울었다.

용아가 숨을 내쉬는 것처럼 눈물을 쏟았다.

윤제는 우는 용아를 품으로 당겨 흐느끼는 등을 쓸어 주었다. 소년은 다 내리누르지 못하는 소리를 숨기려고 얼굴에 와 닿는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며 서러운 울음을 퍼트렸다. 윤제는 울고 또 우는 어린 등을 도닥여 주고 다시 도닥여 주었다.

용아는 눈만 뜨면 울었다. 잠을 자다가도 우는 소년을 모두가 안타깝게 바라봤다. 소리도 없이 우는 소년이 하는 말이라고는 가지 마세요, 라는 작은 애원이 고작이었다.

기력을 다 잃은 얼굴로 울기만 하는 태자비가 염려되어 무어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소년은 그때마다 그저 어깨를 떨며 울고 또 울었다. 감히 누구도 용아에게 말을 건넬 수 없게 됐을 때에 오직 태자만이 소년을 붙잡고 엄히 말했다.

“또 울었냐.”

용아는 눈물의 흔적이 남은 얼굴을 깊이 숙여 숨기며 다시 울음을 흐느꼈다. 소년의 숙인 목이 울음을 삼키느라 떨리면 윤제가 우는 소년의 어깨를 안고 다독여 주었다.

“네가 이리 울면 할머니께서 걱정하잖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용아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울음을 그치는 법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우는 수밖에 없었다. 따지는 말 하나, 또박또박 논리 정연하게 되받아치는 대꾸 하나 없이 울기만 하는 소년이 생경했다.

“울지 마라.”

황궁 안에 서럽게 우는 용아를 평소와 같이 대할 수 있는 건 윤제뿐이었다. 남자는 우는 얼굴을 조심성 없이 닦아 주며 우느라 열이 오른 등을 부지런히 토닥였다.

태후의 국장이 치러지는 내내 태자비는 울다가 쓰러졌다. 울고 기진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황제와 태자가 우는 태자비의 곁에서 쉼 없이 위로했다.

홍문에서 태어나 황실로 온 후족은 서로를 몇 없는 드문 일족으로 여겨 강한 유대를 가지며 서로를 애틋하게 여겼기에, 선황후가 떠날 때 남편인 황제 당신보다 어머니이신 태후께서 더 슬퍼하며 오래도록 상실감에 괴로워하셨다 알려 주며 황제가 소년의 머리를 쓸어 주셨다.

국장이 치러지는 동안, 황궁의 예법 하나하나가 용아에게는 고통이었다. 관이 나가는 날 용아는 기어코 관을 붙들고 가지 마시라 통곡하였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흉이 되었을 테지만 애원하는 소년의 얼굴이 간절해서 누구도 무어라 할 수 없었다. 관이 나가고, 용아는 사흘을 울고 나흘을 쓰러져 있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울지 않았으나, 말을 하지도,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아 모두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은 얼굴로 국장의 남은 예를 치르러 간 용아가 황제 앞에 나아가 예를 올렸다.

“태자비가 할 말이 있느냐?”

“부황. 제북의 예법에 따라 함월전에 신당을 세우고 3년간 조모를 기릴 수 있게 하여 주소서.”

황가에 시집 온 태자비가 제북의 예법을 따르겠다 공적으로 청하는 것은 황실과 조정의 분노를 살 일이다. 함월전에 신당을 세우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허락한다.”

황제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태자비의 청을 거절할 수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황공하옵니다, 부황.”

황명에 사은한 용아가 그대로 쓰러졌다.

용아는 세상과 단절되었다. 아침과 저녁 영화대에서 함월전으로 오가는 길을 다닐 때를 빼고, 소년은 깊은 곳에 마련한 신당에 들어 나오지 않았다. 황제는 태자비가 3년간 조모를 기리는 동안 모든 공식적인 것에서 물러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용아는 태자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다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태자뿐 아니라, 세상 모두와 단절된 채로 함월전 깊은 곳과 영화대만 오갔다.

윤제는 순식간에 선을 긋는 용아의 태도에 황망하였으나 강제로 소년에게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특별히 서먹해진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태자를 곁에 두었던 태자비는 울고 있을 때의 용아뿐이었다. 소년은 울지 않을 때 태자를 찾지 않았고, 태자도 울지 않는 소년에게 감히 다가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용아는 웃지도 울지도 크게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깊은 슬픔으로 무엇도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무미한 얼굴이었다. 상실감 속에 가라앉아 고독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적막한 시간이 고요히 지나고 있었다.

겨울이 다 지나간 봄의 시작에 폭설이 내렸다.

황궁 곳곳에도 눈이 쌓였다.

겨울도 끝이라 방심했던 태감과 궁인들은 새벽부터 나와 비질을 했다. 전각 앞 넓은 길에 쌓인 눈부터 쓴 탓에 전각 사이사이 소로에는 눈이 쌓여 새하얀 순백의 길이 펼쳐졌다.

사박사박. 눈을 밟고 일주대 편백전 소로를 거닐어 오른 사내가 궁인을 향해 말했다.

“청하여 주시게.”

궁인은 명을 듣기 무섭게 몸을 빼 한달음에 달려갔다. 일주대를 나섰던 궁인은 금세 돌아왔다. 궁인의 곧 오실 것이라는 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밖이 조용히 들썩였다.

전각으로 든 고귀한 이는 예를 올리려는 궁인들을 바삐 물려 최소한의 사람만 남겨 두었다.

“……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 너머의 궁인이 상석으로 드실 분께 소곤소곤 아뢰었다. 문이 열리고 호화롭게 차려입은 여자가 안으로 들었다. 기묘하도록 짧았던 여름부터 가을을 지나 국장이 있었던 겨울, 새해 첫날까지 뵙기를 간곡히 청했으나 묵묵부답이었던 여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사내를 맞았다.

“황후마마,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처고모께 인사 올립니다. 황후마마. 홍복을 누리소서.”

“어서 오세요.”

상석의 보좌에 앉으며 황후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조카사위의 오랜 알현 요청을 묵과하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위가 무척 서운하고, 곤란하였습니다.”

“요사이 국상이 있고 바쁘지 않았나.”

“이 사람이 어디 가서 떠들기라도 할까, 무섭지도 않으셨습니까.”

사내의 웃음 어린 말에 황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오늘도 빈틈없이 단장한 여자는 순후하고 단정하였으나 깊이 보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걸친 것 중 사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황후마마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지만 어진 국모인 척하는 평소 황후의 태도를 아는 이라면 실소할 일이었다.

“조카사위께서 본궁을 겁박하시는가.”

“이 사람을 피하신 게 서운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처고모께서 이 사람을 보기 어려워하시는 것은 아옵니다. 제가 이리 숨만 달리 내쉬어도 두려워하시는 연약한 분이 아니시옵니까.”

사내의 달라진 기색에 황후의 얼굴이 굳어 들었다. 상석에 앉은 그녀가 황후이니 웃전이고, 아래쪽에 앉은 이가 처조카이니 아랫사람일 텐데 사내가 일족의 위엄을 드러내자 황후는 그만 일어나 문 곁으로 도망이라고 가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네, 네 죄가 알려지는 게 두렵지 않…… 느냐……?”

황후가 국모의 위엄을 세우려 애쓰며 떨리는 음성으로 엄히 말하였다.

“제 죄가 알려지면 당신의 죄는 묻힐 줄 아시옵니까. 책임도 지시지 않으실 것이면서 어찌하여 결행의 명을 내리셨나이까. 피하기만 하면 해결된다는 심산이라니 무능한 보통 사람 생각다웠습니다.”

“네놈이 감히……!”

황후가 도망치지 않을 정도만 힘을 내어 보였던 사내가 본색을 드러내며 뇌까렸다.

“언행을 조심하셔야 하실 겁니다, 황후.”

보좌에 앉아 있던 황후가 혼비백산하며 문으로 내달렸다. 숨을 다급히 들이켜는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허옜다. 사내는 구르기라도 할 것처럼 허둥대는 황후의 앞을 막아섰다.

“예, 예가 어디라 오르…….”

“황후께서 오를 곳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숨을 쉬시지요. 그리 겁에 질리신 얼굴을 하면 이 사람이 크게 잘못을 지른 것 같지 않습니까.”

“저리…….”

사내의 목소리는 매끄럽고 선량했다.

저리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소리를 내질러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황후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자 그가 입술로만 웃으며 아래로 내려가 다시 반듯하게 예를 취했다.

“지난 일은 묻어둘 것입니다. 허나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면 이 사람이 어찌 굴지 모르겠습니다. 분란을 위해 동조한 것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저를 발고하시면 배후로 지목당할 위험이 있으신 마마와 달리 이 사람은 때가 되면 황도를 떠날 테니 투서를 남기고 가 버리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사내가 물러나며 황후를 억압하던 것들도 물러갔다.

“이 황후를 협박하는가!”

다시 보좌로 돌아갈 정도가 된 여자가 고상하게 화를 내려 했다. 사내는 제자리에 엎드린 채 아뢰었다.

“이 사람의 말씀은 더는 사사로이 뵙기를 청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번에 황후의 명에 응한 것은 저의 사사로운 궁금증을 풀어 보기 위한 것뿐입니다. 답을 얻었으니 더 궁금해하지 않으렵니다. 소신은 태자 전하도 태자비 전하도 마음에 드옵니다. 좋은 배필이 되실 것이고, 좋은 통치 조력자가 되실 겁니다. 황후께서도 태자비를 죽이려 하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동궁의 후궁 안 모두가 당신께 머리를 조아리게 하고,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하는 한편, 당신께만 찾아와 아양을 떨게 하려던 게지요. 괜한 짓을 하여 아까운 시간만 버리게 되었습니다. 후에라도 같은 일이 일어나면 이 사람은 지체 없이 이 일을 태자께 고해 문제의 근원을 도려내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더 명이 없으실 것으로 알고, 이만 물러가옵니다. 강녕하소서.”

사내는 시늉으로만 하던 예법도 관두고 일어났다.

“무엄한……!”

황후가 사내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그는 관여치 않고 전각을 나섰다. 상석의 호화로운 보좌에 앉아 거짓 가득한 예법을 받는 게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사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성큼성큼 밖으로 나선 남자는 동궁이 있는 곳을 돌아보며 오래도록 후족만을 황후로 모셔온 이유를 새삼 이해하고 동의했다.

일족의 힘에 무관한 후족은 후족에게도 자부심을 가질 일이겠으나, 그보다 중경과 제북의 일족에게 복된 존재였다. 왕공 자제들의 위엄과 힘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아 처음에는 황망했고, 때때론 얄밉기까지 했던 무심하고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

편히 곁에 둘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 받은 일인지 태자가 하루빨리 알기를 바랄 뿐이었다.

진군왕부 청수전 안에 침묵이 내렸다. 전각으로 귀하신 손님을 불러들인 진양군은 차만 들이켰다. 첫 번째로 온 태자를 상석에 모시고, 뒤이어 온 횡양군에게 차를 대접하던 그는 시끄럽게 떠들며 전각 안에 드는 소양군과 영양군을 불손한 얼굴로 맞았다.

“일찍들 다니지.”

진양군이 소양군과 영양군에게 차를 권하며 말했다.

“우리는 제 시간에 왔는데 너희 성격이 너무 급한 거 아니냐.”

“네가 중간에 떠드느라 좀 늦었지 뭘.”

영양군이 소양군을 타박하며 차를 들었다.

“다 부질없지만 결과는 들어 봐야지.”

입술로 가져갔던 찻잔을 내리며 윤제가 말했다.

“그것 때문에 불렀습니다.”

진양군이 제자리로 돌아가며 답했다.

“범인은?”

기묘한 정적이 사방을 짓눌렀다.

“횡양군입니다.”

진양군이 적막을 허망하도록 쉽게 깨트렸다.

“……!”

말없이 차를 축내고 있던 횡양군이 찻잔을 다급히 내리며 놀란 얼굴로 진양군을 돌아봤다.

“뭐?!”

소양군 역시 찻잔으로 뻗던 손을 거두며 소리쳤다.

“상이라고? 윤공자나, 너나, 우기가 아니라?”

영양군이 횡양군과 저를 제외한 모든 이를 용의 선상에 올리며 놀라워했다. 진양군은 처음부터 의심을 받은 탓인지 별 반응 없었다. 소양군은 태어난 직후부터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온 영양군의 의심에 잔뜩 얼굴을 구겼다.

“너, 나를 의심했냐. 너는 아니야? 너도 금은이라면 눈 돌아가는 비열한 아니냐.”

“욱아. 너는 인생이 뒤통수잖아.”

둘은 서로를 까 댔다.

“나도 너희 둘을 의심했다. 아니면, 음.”

진양군이 서로를 비방하기 바쁜 둘을 향해 무뚝뚝하게 말하다 끝에는 태자를 빤히 바라봤다.

“야이.”

“내가 왜?!”

소양군과 영양군이 서로 싸우던 걸 멈추고 진양군을 쏘아봤다.

“…….”

윤제가 자신과 많이 닮은 얼굴을 불쾌하게 바라봤다. 진양군은 항의의 말이 들리지 않는 양 무시했다.

“셋의 행적을 파악해 보니 사고가 있기 직전 사흘간 혼자만 있을 틈이 없었다. 특히 태자께서는 온종일 등 태감과 함께하니 가장 먼저 제외되셨어. 소양군과 영양군을 의심한 것은 둘 모두 측비 될 이가 적지 않아서다. 복잡한 혼인 관계로, 얽힌 이해득실도 복잡하니 태자비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고 싶을 가능성이 높다 봤다. 태자비 말에 손을 대는 것이니 만큼 아랫것들을 시키기는 어렵다 보고 직접 손을 썼다고 보았는데, 횡양군만 사고가 있기 전날과 당일 아침에 행적을 증명해 줄 이가 없더군. 그러니 횡양군이 범인이다. 하지만 증좌는 없으니 죄를 묻기 어렵다.”

말을 마친 진양군이 투덜거리는 듯한 표정으로 차를 들이켰다.

“어떻게 알았지?”

모두의 시선을 받던 횡양군이 말했다.

“뭐!?”

소양군이 다시 소리쳤다.

“내가 범인이다. 태자비 전하의 말고삐를 자른 건 국법으로 엄히 다스릴 일이라는 걸 알지만, 증좌는 없으니 나를 발고하지는 못할 거다. 윤공자가 똑같이 만들어 다섯이 나누어 가진 단검으로 고삐를 썰었으니 여기 전부가 유력한 범인이라 할 수 있지. 혹여 몰라 내 칼로 안 썰고 혹시 몰라 진양군 자네 칼로 썰었다. 그것도 알았나?”

“이 미친!”

소양군이 놀란 진양군을 대신해 욕했다.

“진공자 예상대로 배후가 있어. 그러나 배후는 밝힐 수 없다.”

순식간에 다가선 손이 말하는 횡양군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유가 뭐냐.”

윤제였다.

“나는 그저 알고 싶었어. 태자 전하가 왕공들보다 얼마나 더 강건한 신체를 가졌고, 어느 정도의 차이가 나는지. 장군부의 기마술 또한 알고 싶었다. 앞으로 황실의 흐름도 궁금했다. 장난질도 좀 쳐보고 싶었어. 태자와 태자비께서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궁금하였거든. 너희는 궁금하지 않아?”

횡양군이 죄책감 따위 느껴지지 않는 떳떳한 얼굴로 답했다.

“야, 너는…….”

소양군이 궁시렁거렸고, 영양군이 망연히 시선을 던졌다.

“…….”

“…….”

진양군 역시 영양군과 비슷한 얼굴을 했다. 범인을 찾아내긴 했으나 이유가 이런 것이란 생각과 이리도 뻔뻔하게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다친 사람 없잖아. 표정들 좀 풀어라. 나도 나중에 후회했다. 용공자 기마술에 평지에선 말고삐 끊어져도 떨어질 것 같지 않더라. 그래서 일부러 내리막을 내달릴 즈음에야 끊어지도록 잘라 두긴 했는데, 용공자가 낙마를 한 번도 안 해 봐서 그렇게 당황할 줄은 몰랐지. 그래도 잘됐지. 전하가 어렵지 않게 구해 주셨잖아. 애초에 황실 적자와 왕공 자제 넷이 곁에 있는데 고삐 끊어진다고 태자비가 위험해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지시를 내린 배후야 불구가 될 것도 염두에 뒀겠지만 나는 아닐 거라 봤다.”

횡양군이 당당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놈이었냐, 횡공자.”

영양군이 황당함을 온 얼굴로 퍼트리며 말했다.

“이런 놈이란 게 뭔데.”

“미친놈.”

횡양군의 물음에 진양군이 답했다.

“그럼 내가 미친놈인가 보다.”

횡양군이 겸허히 미쳤다는 소리를 받아들였다.

“진짜 미친놈.”

소양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양군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이만 가겠다는 말을 던지고 돌아섰다. 영양군도 이만 가겠다 알리며 문으로 향하다 돌아와, ‘정신 차려라, 미친놈’이라는 말을 투덜투덜 건네고 가 버렸다. 진양군이 아주 못 볼 걸 보는 시선으로 횡양군을 주시했다.

“미친놈도 이만 가 보마.”

횡양군이 슬쩍 웃는 얼굴로 말하며 일어섰다.

“고생했다. 나도 가 보마.”

윤제가 진양군의 어깨를 두드리고 횡양군을 따라나섰다.

“살펴 가십시오, 전하. 다음에 또 보세.”

진양군은 전각 앞에서 짧게 예만 건네고 돌아섰다. 두 사람은 함께 밖으로 나왔다. 횡양군도 윤제도 곁으로 다가오는 태감을 말없이 물렸다. 둘은 전각을 나와 아무도 없는 소로를 거닐며 낮춘 목소리로 말을 나눴다.

“배후가 누구지? 양제인가.”

둘만 남으면 듣게 되리라 예상한 질문이었다. 하문하는 윤제의 얼굴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재촉하는 기색도, 걱정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아닙니다.”

횡양군이 답하자 태자가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

안도의 한숨이 명백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양제가 배후일까 무척 고심한 모양이었다. 안도하는 윤제를 본 횡양군이 이어 말했다.

“양제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윤제가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뜻인가.”

“말고삐를 끊은 것은 저이고, 그를 사주한 배후는 따로 있습니다. 허나, 기물 구간을 무너뜨리는 지시를 내린 건 양제입니다.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전하. 양제는 바깥에 부릴 사람이 없지만 죽은 봉의와 맹소훈은 어떻습니까. 전각의 일부처럼 심혈을 기울여 지은 기물이 무너졌다는 게, 하필 태자비가 방문할 때마다 지나는 곳 위의 기물이 통째로 떨어져 내렸다는 게 우연인 것 같으십니까. 황궁 안에 스스로 결정하여 자결할 수 있는 가엾은 목숨이 얼마나 됩니까. 대개는 주살되거나, 모함을 받거나, 협박을 받아 자결을 택할 수밖에 없지요. 봉의는 희생된 겁니다. 진양군이 전수조사에 들었을 때 기물 구간에 손을 쓴 자도 드나들었으니 걱정이 됐을 겁니다. 정확한 순서까지 알지 못하겠으나 실제로 손을 쓴 자에서부터 봉의, 소훈, 양제로 이어지는 고리 때문에 봉의를 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걱정할 만큼의 조사가 아니었지만 동궁전 후궁 안에서 취할 수 있는 협소한 정보 속에서 내린 결정이겠지요.”

윤제는 말이 없었다.

“…….”

횡양군이 멈춘 채 움직일 줄 모르는 태자를 향해 실컷 떠들었다.

“그 착한 여자가 왜? 라고 생각하십니까. 질투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을 당당하게 정인이라고 불러 주는, 자신의 정인과 다정히 외출하는 태자비를 볼 때 미움을 가질 법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본디 착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말입니다. 다른 건 상관없으나, 용공자에게 하루빨리 사과하십시오. 서먹하던 것이 괜찮아진 듯하더니 어쩌다 하루아침에 버림받는 신세가 되셨습니까. 전하께서 잘못하신 것이니 먼저 숙이시는 게 옳습니다.”

“…….”

윤제가 느리게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저도 자백할 겁니다.”

“자백?”

“다들 저라는 것을 알고 놀라는 걸 보니 용공자께도 친히 알려 놀라게 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물러가옵니다. 살펴 가시옵소서.”

횡양군이 침착한 얼굴로 괴이한 소리를 하며 예를 올렸다.

“그래…….”

횡양군과 일별하는 윤제의 얼굴은 무미건조했다. 홀로 남은 그는 오랫동안 한자리에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멈춰 있었다.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가는 얼굴은 미묘하게 구겨져 있었다. 살짝 기울어진 눈썹이 더 깊이 좁아 들었다가 펴지길 반복했다.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얼굴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쌀쌀한 봄에 다시 폭설이 내렸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동궁 영화대 앞으로 횡양군의 자백 편지가 당도했다. 태자비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월전에 머무느라 편지를 저녁 늦게야 받아 들었다. 자백과 사죄, 안타까움을 표하는 편지에는 선량한 인상의 글씨가 빼곡하였다.

태자비 친전(親展).

용공자, 보시게. 횡양군이라네. 공자의 말고삐를 자른 것은 사실 나일세. 용공자가 아녀자는 아니나 후궁에 속해 있으니, 후궁에 속한 이가 바깥에 나와 나보다 빨리 달리는 게 보기 언짢아 심술을 부린 것이네. 나의 뛰어난 간계로 이와 같은 행동을 포착할 만한 날카로운 이가 중경 안에 있을 리 없어, 스스로 이와 같이 자백하여 보네. 잠시 심술을 부린 것뿐인데, 궁을 나오지 못하게 만들게 되어 버렸네. 정말로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미안하게 되었어. 강녕하시게.

선량한 인상의 글씨가 말하는 태도는 너무도 뻔뻔했고, 내용은 기함할 것이었다. 이튿날로 횡군왕부에 태자비의 서신이 도착했다.

횡양군 친전.

횡공자 형님. 용아입니다. 소제가 이제야 밝히는 바, 때때로 횡양군 형님이 조용하게 미친자(狂者)가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고삐 끊긴 것 정도야 홍문에서 태어난 소제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염려 놓으소서. 그러나 형님 된 도리를 잊고 어린 소제에게 죄를 지었으니, 앞으로 해마다 청명절이 되면 금은(金銀) 10관씩을 사죄의 표시로 바치도록 하십시오. 다음에 뵐 때까지 안녕하시길.

횡양군이 답신을 받았단 소식에 횡군왕부로 왕공 자제들이 난입했다. 남의 편지를 훔쳐본 소양군과 영양군, 진양군은 눈물이 찔끔 솟을 정도로 웃어 댔다.

“역시 용공자!”

“장하다!”

“금은 10관이면 너무 너그러운 거 아닌가.”

그날 영화대에 세 왕공 자제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죄다 시비가 가득한 솔직함 넘치는 글줄이었다. 소양군의 서신은 그의 평소 성정처럼 시끄러웠다.

영양군의 서신은 멋과 분위기가 넘쳐흘렀으나 내용은 치졸하였다.

태자비 친전.

용공자 사실 나, 네가 너무 싫었다. 나보다 말을 잘 타다니. 세상에 내가 탄 것보다 혈통 좋은 말을 타는 이가 황가 적자 외에 또 있다니. 어린 녀석이 나보다 부자라니 참으로 불쾌하였다. 이 형에게 제관에서 쓸 옥패를 빌려준다면 너 필요한 거 얼마든지 구해다 주마. 내 딴 욕심이 있어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니 곡해해 듣지 마시고 생각 있으면 연락다오. 다음에 볼 때까지 잘 지내라.

소양군에게도 영양군에게도 진양군에게도 답신은 오지 않았다. 셋의 편지에 대한 답장은 물론, 이후로 횡양군이 다시 보낸 편지에도 답은 없었다.

소년은 다시 깊은 침묵에 감싸였다.

소양군도, 영양군도, 횡양군도, 진양군도 답장 없는 영화대에 편지 보내기를 그치지 않았다. 네 남자는 서로 모이면 답신 받은 게 있는지 묻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영화대 앞에 사내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궁인의 예에 윤제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태자의 하명이 없으니 문 앞을 지키는 궁인은 얼굴을 낮춘 채 고뇌에 빠졌다. 태자비께서 아침에 나가시었고 함월전에 드셔서 저녁이나 되어야 돌아오실 것이라는 말을 아뢰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아무런 물음도 없는데 말을 하는 게 무엄해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태자비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터라 따로 알려 줄 필요도 없었고, 태자가 영화대 앞에 이리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벌써 며칠째였다.

거의 열흘이 넘었다.

목담은 속으로 문 앞을 지키는 이들의 말을 되새기며 태자가 여길 찾은 지 며칠째인가 헤아리고 있었다.

“이것.”

숙인 궁인의 얼굴 앞으로 빳빳한 비단을 입은 서신이 내밀어졌다. 목담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공손히 내어 받아 들었다.

“전하겠나이다.”

윤제는 궁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끄덕이고는 훌쩍 가 버렸다. 목담은 높으신 태자의 서신을 눈썹 높이로 올린 채 전각 안으로 향했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걸어드는 목담의 입술에 움칫움칫 웃음이 올랐다가 내려갔다. 하례품을 모아 두는 방에 고귀한 서신을 내려 둔 그녀는 바람 같은 몸짓으로 전각을 나와 지나가는 친구들을 씨익 웃는 얼굴로 바라봤다.

“얘들아.”

목담의 당당한 부름에 목란이 눈을 깜빡였다.

“어찌 여기 있어. 밖은?”

“너희에게 알려 줄 것이 있다.”

“뭔데?”

앳된 얼굴들이 순식간에 목담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너희, 아니?’ 목담의 으스대는 말에 궁인들이 대체 뭐냐고 애달프게 물었다. 곧 영화대 안에 우오오! 함성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금당대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쉬시렵니까.”

전각의 문이 열리며, 등우가 안으로 드는 태자를 향해 여쭈었다. 태자는 좌우 뒤, 아래에 붙어서 그의 의복을 살피는 궁인들에게 몸을 내주느라 잠시 멈췄다.

윤제가 말없이 끄덕였다.

모든 궁인을 물러가게 한 등우는 침상을 다시 살피고 주인을 모셨다.

“쉬소서.”

윤제가 앉는 것까지 지켜본 태감이 작게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등우.”

가는 태감의 등으로 낮은 목소리가 던져졌다.

“하명이 있으시옵니까.”

등우가 조붓이 물었다.

“영화대는?”

침상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 누운 윤제가 접어 쥔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따로 올릴 것이 없사옵니다.”

태감의 매끄러운 대답에 윤제가 작게 끄덕였다. 그만 물러가 보란 뜻이었다. 등우는 다시 한 번 반듯하게 예를 올리고 안타까운 주인에게 시선을 준 후 물러갔다.

함월전 깊은 곳에서 바람이 불어 나왔다. 서늘한 바람 소리가 불어오는 곳 앞에서 작은 실랑이가 일었다.

“비전하.”

걱정 가득한 모장의 부름에 용아가 답했다.

“금방 다녀오겠다.”

새벽 일찍 영화대를 나와 저녁이 올 때까지 함월전에 머무는 태자비는 더는 울지 않았다. 누가 볼 때건 누가 안 볼 때건 울게 되지 않은 소년은 단 한 곳, 화우전에 다녀오면 얼굴 곳곳에 울고 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았다. 용아가 화우전에 갈 때마다 그곳에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모장과 궁인들은 화우전으로 향하는 태자비를 따르겠다 청했다. 오래전부터 화우전은 감금당한 왕비의 이야기가 내려오는 곳이라 특히 더 따라나서려 했다.

용아는 그러나 화우전에 갈 때만큼은 오롯이 혼자였다.

“금방 오셔야 합니다.”

궁인들의 애타는 말에 용아가 손을 살살 저었다.

“응.”

함월전에서 다락원으로 드는 숲길은 오래된 나무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대한 숲에 감싸인 조그만 숲길의 시작점에 선 용아의 뒷등은 작고 가녀려서 숲 안으로 든 소년이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은 인상을 풍겼다.

숲 안에 바람이 일 때마다 나뭇가지가 몸을 떨어 나뭇잎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퍼트렸다. 귀를 적시는 시원한 소리를 들으며 다락원을 지난 용아가 화우전으로 들어섰다.

“…….”

다시 긴 바람이 불었다.

“봄, 여름인가.”

화우전이라는 이름 그대로였다. 화우전이 시작되는 꽃나무 길부터 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비가 내리는 소로를 걸어 화우전 안으로 드는 용아의 볼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곳에만 오면 왜인지 내리눌러 두었던 눈물이 제멋대로 터져 나왔다.

용아는 꽃이 내리는 아름다운 전각의 석계를 한걸음에 올라 그리운 이와 나란히 앉았던 낯선 보좌를 부둥켜안았다. 몇 날 며칠을 감정 없는 이처럼 보내온 소년이 눈물을 쏟으며 숨겨 두었던 서글픔을 꺼내 놓았다.

“……어.”

한참을 목 놓아 울던 얼굴이 급히 눈을 비볐다.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쳐 내고, 뺨을 축축하게 적신 울음의 흔적도 닦아 냈다.

울음 후의 서러운 숨결을 삼키며 용아가 눈물로 젖은 손을 부둥켜안고 있던 보좌의 표면에 가져다 댔다. 눈물로 젖은 손과 닿은 보좌의 표면을 가득 채운 호화로운 문양을 따라 푸르스름한 빛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뭐지.”

뭘 잘못 본 줄 알고 용아는 다시 눈물이 괸 눈가를 깨끗하게 닦았다. 손이 닿지 않을 때에는 그저 표면의 문양이 호화로운 보좌일 뿐이었다. 눈물이 마른 손을 대어도 그저 표면의 문양이 화려한 보좌였다.

용아는 턱을 따라 흘러내린 눈물이 보좌의 표면에 떨어져 내린 것을 보다가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댔다. 흐리긴 하지만 아까와 같은 푸르스름한 빛이 짧게 어렸다가 눈물이 마르자 옅어지며 곧 사라졌다. 놀라 뒷걸음치던 용아는 귓가에 그리운 소리가 울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빛나는 아이가 오셨는가.’

태후는 항상 용아를 볼 때마다 그리 이르셨다.

빛나는 아이.

제북과 홍문에서 태어난 이에게 흔히 붙이는 꾸며 주는 말이라 생각했던 부름이 사실 그대로를 이름이란 것이 당황스럽고 황망했다. 제북은 결코 거짓을 이르지 않는다며 웃던 태후의 얼굴이 기억 속을 스쳤다.

“……정말…… 그냥…… ……밉습니다.”

앞으로 용아에게 남은 시간 내내 ‘빛나는 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를 진솔하게 불러 준 따뜻한 음성이 떠오를 것이다. 다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눈물이 내린 곳에 용아가 닿을 때마다 낯선 보좌가 빛나는 아이의 존재를 반기며 부드러운 빛을 퍼트렸다.

한참을 운 용아는 기묘한 진실을 품고 있는 보좌에 앉아 꽃이 바람에 내리는 것을 바라봤다. 얼굴에 번진 울음의 흔적이 지워질 때까지 오래도록 그곳에 앉아 내리는 꽃들을 지켜 주었다.

<다음 권에 계속>

#TRP절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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