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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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무섭게 내달리던 용아가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용아를 따라오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찬 사내들의 표정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용아도 사내들도 서로 힐끗 얼굴만 살피고, 특별히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느린 속도로 움직임을 이어 가는 용아의 곁으로 영양군이 다가왔다.

“용공자.”

“예.”

“아까 그 옥패 말이야.”

“네.”

“웬 건가?”

용아는 어느 때보다 더 무관심한 얼굴이었고, 영양군은 이상하도록 눈치를 살폈다. 묻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궁금증을 참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숙부께서 혼수로 선물해 주셨습니다.”

“제북의 대가주 말이지.”

“용공자를 제북 대가주인 숙부께서 무척 아끼시는 모양이야.”

영양군이 없는 쪽에서 나타난 소양군이 아는 체하며 말했다. 질문을 한 영양군이 말을 받았다. 두 남자 모두 용아가 내뱉은 ‘혼수’라는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그럼요. 소제는 숙부께서 하후가 자손들 중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걸요. 다음 대가주가 될 뻔한 전 대가주의 막내아들의 장자인 귀하신 존재니까요.”

“제북은 막내아들에게 후계를 잇게 한다지.”

“용공자가 아주 귀하게 컸다는 건 진정 사실이었구나. 대가주이신 숙부와 사이가 좋은가 보다.”

“그럼요. 소제는 기마도, 활쏘기도, 창술도, 사냥도 전부 현재 제북의 대가주이신 이숙께서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관 약재상에서 내보인 옥패와 비슷한 권한을 가진 옥패를 혼수로 9개나 챙겨 주셨습니다. 소제는 잠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용아가 다시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쟤 지금 화내는 거지?”

소양군이 순식간이 점처럼 작아진 소년의 뒷등을 보며 말했다.

“그런 것 같다. 그런데 그거보다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해. 거만하고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제관 상인을 털 수 있는 옥패를 9개나 숙부가 선물로 줬다잖아. 그거 엄청난 부자라고 자랑하는 거 맞지? 용공자가 나보다 더 졸부 같지 않아?”

영양군이 자존심에 큰 손상을 입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네.”

소양군이 그제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동조했다.

“좁혀.”

여유를 두고 뒤따라오던 세 남자가 소양군와 영양군 뒤에서 나타났다. 윤제가 짧게 재촉했고, 일행은 툴툴거리며 다시 온몸에 얼얼한 고통이 오르도록 말을 내달렸다.

앞서 달리던 용아가 다시 느릿느릿 가고 있었다. 이전보다 전력 질주가 짧았던 만큼 따라붙기가 덜 힘들었다. 뒤에서 사내들이 다가오는 소리에 용아가 돌아보았다. 소년은 말 머리를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자신과 거리를 좁혀 오는 남자들의 쪽으로 다가갔다.

용아가 되돌아오는 걸 본 남자들이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무슨 일인가, 용공자?”

소양군의 물음을 들으며 용아가 복아의 말 머리 방향을 좀 더 사내들 쪽으로 확실하게 빙그르 돌렸다.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군더더기 없고 매끈한 기마술에 보고 있던 사내들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소년이 남자들과 조금 거리를 넓히며 말했다.

“뭐냐.”

윤제가 짧게 대꾸했다.

“형님들. 다섯 분 중에 발기부전은 누굽니까?”

소년이 무해한 얼굴로 천진하게 물었다.

“커흡!”

“누, 누, 누가!”

소양군과 영양군은 놀라서 하마터면 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진양군은 그대로 돌이 되었다. 횡양군이 어른 된 도리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발…….”

용아가 한 말을 윤제가 따라하려다 말았다.

“아까 설핏잎을 유심히 보셨잖습니까. 그거 아재들이 그게 안 설 때 먹는 거랬습니다. 다섯 분 중에 누굽니까. 소제가 참으로 궁금하고 염려가 됩니다. 설핏잎은 희귀해 여기서는 잘 구할 수도 없고, 뭐어 제북에서도 구하기 어려워 부르는 게 값이랬습니다. 여기서는 더 값이 어마어마할 텐데 필요하신 분이 있으시면 소제가 미력하나마 구해다 드리는 게 아우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섯 분 중 누굽니까.”

소년의 또랑또랑한 눈망울이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애, 애들은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소양군이 버럭 화를 냈다.

“칫.”

용아가 버릇없는 소리를 툭 흘렸다.

“그…… 그…… 그런 사람 우리 중에 없어!”

영양군이 힘껏 외쳤다.

“핏.”

용아가 다시 버르장머리 없는 소리를 퍼트렸다. 소년은 도움을 주려했는데 싫음 마시라며 다 늦게 부탁하면 그땐 들어주지 않을 거라 협박을 쏘아 대고, 다시 말을 재촉해 훌쩍 앞서 달려 나갔다. 사내들은 괘씸하고 무엄한 놀림을 당했다 불쾌해 해야 하는데 저 멀리 달려 나가는 소년의 등을 보며 뭔가 큰 이득을 놓친 듯한,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중경의 입구가 빠르게 가까워 오고 있었다. 어느새 황성이었다.

함월전 전각의 문이 열렸다. 용아가 안으로 걸어 들자, 문 곁에 선 궁인이 안을 향해 웃는 얼굴로 아뢰었다.

“태자비께서 드셨습니다. 어서 드소서, 비전하.”

중년의 궁인이 전하는 따뜻한 말에 소년이 짧은 미소를 건네고 예를 올렸다.

“할머님, 용아가 왔습니다.”

태후께서 새로 올라온 약을 장복하는 동안 함월전의 문안이 중단되었다. 때문에 달포가 넘도록 함월전에 들지 못했다. 태후께 서신으로나마 꾸준히 문안을 여쭈긴 했으나 직접 뵙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가까이 오세요.”

오랜만에 본 태후는 보좌에 앉아 소년을 맞았다. 여인의 허락에 용아는 바람이 부는 것처럼 가볍게 움직여 가까이 부른 이의 발끝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시 깊이 예를 올렸다.

용아는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손을 붙잡아 이마에 대고 가만히 온기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간 뵙지 못하여 서운하였습니다.”

아이의 투정하는 얼굴을 다정히 쓸던 손이 느릿느릿 물러났다.

“오늘 이 늙은이의 몸이 고맙게도 움직일 만하니 소중한 이를 데리고 산책을 가 보고 싶소.”

태후를 뵌 후로 이토록 기운 차린 모습은 처음이었으나, 산책을 나가실 만큼 좋아진 건 아니었다. 어서 일어나 나가 보자 청하는 황태후의 손을 잡고 일어서며 용아가 궁인의 얼굴을 살폈다.

궁인은 태의의 허락이 따로 없었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저었고, 태후께서 나가고자 하니 태자비께서는 뜻을 따르라는 의미로 얕게 끄덕이는 눈짓을 건넸다.

함월전의 문이 다시 열렸다.

“할머님.”

바깥은 겨울이 가까워져 공기가 벌써 쌀쌀했다. 용아가 염려스럽게 태후를 부르자, 온후한 미소를 띤 얼굴이 소년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소. 염려 마오. 이 할미가 주인 된 도리로 이 사람 사는 집을 소개해 드리리다. 갑시다. 어서.”

태후의 하명이 있었는지 궁인들이 다가오지 않았다.

“어디로 뫼시 오리까.”

용아는 잠시 걱정을 젖혀 두고 미소하였다. 소년이 여인의 팔을 따듯하고 든든하게 안아 받쳤다. 태후는 당신과 아이가 걸어 나온 함월전을 돌아보며 느리나 빠트림 없이 말하였다.

“함월전은 이곳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전각이라오. 근간 만들어진 것이라 가장 크고 아름답지. 이 할미가 욕심을 부려 여기를 차지하는 바람에 이 사람의 아드님이신 황제께서 곤욕을 다소 치르었소. 어미가 사는 집이라 먼지도 철저히 털고, 전각에 올린 기와도 새것으로 갈아 주고 힘 깨나 써 주셨고 말이오.”

“부황께서 아름다운 할머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시니 당연히 해 주셔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빛나는 아이께서 아부가 쓸 만하오.”

둘은 함월전의 전전과 후전 사이를 거닐며 웃고 떠들었다. 날이 좋아 햇살은 따스한데 공기가 차 걷는 내내 용아의 얼굴이 때때로 불안에 휩싸였다.

“함월전 권역에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는 것은 다락원이라오. 다 둘러보는 것은 어려우니 지름길로 갑시다. 내 궁인들 따돌리고 홀로 이곳에 들어와 지름길로 질러 다니는 걸 퍽 즐기오.”

귓가에 흐르는 따뜻한 말이 듣기 좋다고 걱정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둘이서만 갑니까?”

다락원의 규모는 황성에서 세 번째 컸다. 함월전 주위도 넓은데, 뒤를 떠받치는 다락원은 그보다 몇 배는 커 쉽게 오갈 거리가 아니었다.

“내 꼭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다.”

소년의 머리를 다정히 쓸어 준 여인이 단호히 걸음을 옮겼다.

“사람을 데려가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할머님을 잘 보필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용아의 말에 여인이 씩씩한 미소를 퍼트렸다.

“장차 후가주가 될 터이니 담대함을 기르시는 게 좋겠소.”

“저는 충분히 담대합니다.”

태후의 말에 소년이 힘껏 답했다.

“그럼, 갑시다.”

태후께서는 지름길이라 했으나 거대한 다락원을 가로지르다 혹여 중도에 그녀가 지칠까 염려되었다. 소년의 체구는 아직 부족해 여인을 업고 쉽게 이동할 정도는 아니었다. 후가주가 될 터이니 담대하시란 태후의 말에 망설이던 용아가 과감하게 발을 내디뎠다.

“가시죠.”

소년의 결의에 찬 얼굴을 본 태후가 웃음을 흘렸다.

“이곳 다락원에는 기화요초가 많다오.”

“그렇다 들었습니다.”

“허나 이 늙은 몸이 차지하고 있으니 외부인의 출입이 있을 수 없어 아까운 것들이 저 혼자 피고 지기만 하지. 예전에는 황후의 화원이라 희귀한 차나무와 꽃나무들이 찾아보면 많으나, 이 사람은 힘이 없고, 이곳에 아이들은 눈이 어둡거나 이 몸 때문에 너무도 바빠 수확의 시기를 놓치고 있다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못한 곳도 많아 이제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아리송한 모양이야. 이곳 출입을 잠시 허락 받았던 태의의 말로 그도 눈이 어두워 곧바로 알아보기가 어렵다 하더군. 그의 눈이 어두운 게 아니라 이제는 원시림처럼 어지러워진 게지.”

태후가 쓸쓸한 얼굴로 어지러운 숲길을 살폈다.

“할머님께서 다시 살펴 주시면 곧 제 모습을 찾을 겁니다.”

“그럴까요.”

용아의 말에 여인이 잔웃음을 퍼트렸다. 사람이 잘 찾지 않은 것에 비해 다락원 내부의 길은 잘 정돈돼 있었다. 길을 벗어나면 풀숲 밖에 없는 곳도 있어 위험할 테지만, 길만 따라 간다면 문제 될 게 없었다. 용아는 따뜻한 팔을 받치고 걷다가 달콤한 붉은 열매를 발견하면 날래게 달려가 따다가 좋은 이와 나누어 먹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리가 아닐까? 염려했던 것치고는 빠르게 목적지에 당도했다.

“…….”

황궁의 깊고 깊은 곳에 위치한 함월전 안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 하는 화우전이 고아한 풍채를 드러냈다. 황후의 후원이라 불리는 다락원 안쪽에 감추어진 화우전은 아담한 전각이었다. 다락원이 끝나고 화우전이 시작되는 길은 화우전이라는 이름대로 양쪽에 키가 큰 꽃나무가 드리워져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나무들은 색 바랜 잎만 펼치고 있었으나, 날이 풀리고 봄이 오면 만발한 꽃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비처럼 내릴 테니 전각의 이름에 걸맞은 풍경을 보여 줄 터였다.

“어떻습니까.”

화우전 일대 곳곳에 존재감이 대단한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색 바랜 잎들만 있어도 근사했다.

“멋집니다.”

소년의 감탄에 태후가 마주 웃었다.

“아름답지요. 오늘 이곳에 올 수 있는 건 모두 그대 때문이라오. 먼 곳까지 가 이 늙은이를 위해 귀한 것들을 가져다주었소. 고맙소.”

“그런 말 마십시오. 당연한 겁니다.”

다정하게 답하는 얼굴을 따듯하게 쓸어 준 우아한 노파가 소년의 손을 잡고 화우전 안으로 걸어 들었다. 아담한 전각 앞에 낯선 기물이 있었다.

그것은 키가 낮은 보좌 같기도 했고, 사각 우물을 반으로 쪼개어 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보좌라고 하기에 맨몸을 드러낸 채라 너무 딱딱했다. 하지만 우물 같지도 않았다. 사각 우물이라고 하기에 그것의 표면 가득 호화로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여인은 장난기 많은 소녀처럼 기묘한 것의 한쪽 끝에 앉았다.

툭툭.

주름진 손이 소년에게 반대편 빈 곳을 권했다. 용아가 잠시 머뭇거리다 태후의 청에 따랐다. 기묘한 보좌의 촉감은 이상하도록 부드러웠고 적당한 온기를 품은 쇳덩이 같았다.

“이곳에 오니 고향에 온 것 같지 않소?”

“모르겠습니다.”

태후의 난데없는 물음에 용아는 솔직하게 답했다.

고향이라.

거짓 없는 소년의 머리를 쓸어 주며 여인이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와 소년 둘밖에 없건만,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 같은 투였다.

“이 사람은 이곳에 오면 홍문으로 돌아온 것 같다오.”

“그러십니까.”

태후의 주름진 손끝이 기이한 보좌의 표면에 새겨진 호화로운 무늬 위를 따라 움직였다.

“용아야.”

“예, 할머님.”

이름을 자주 불러 주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이곳은 사실 아름다운 감옥이란다.”

태후께서 무섭게 웃으시며 비밀을 품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감옥이요?”

“황성이 서기 이전에 옛 왕성의 터 중 원형 그대로 보존된 얼마 안 되는 곳 중 한 곳이란다.”

“왕성이 있던 곳에 덧대어 황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들었습니다.”

태후께서 기묘한 얼굴로 말씀을 하셔서인지 화우전 일대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 들었다.

“아느냐? 홍문의 후손이든, 황가의 후손이든 한번 정한 짝은 거스를 수 없다. 황성이 되기 전 왕성이 있을 때도 그것은 똑같았다. 이곳이 아직 왕성의 일부였을 때 어느 폭군이 제 짝으로 정한 왕비를 가두어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단다.”

“왕비가 죄를 지었습니까?”

“글쎄. 그것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가여운 왕비는 이곳에 평생을 갇혀 있었고, 왕만이 화우전에 드나들었다는 무서운 옛 이야기가 전해질 따름이지.”

잠시 바람이 지나는 소리를 듣던 소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감금터가 아름다워 그나마 다행인걸까요.”

“나도 그리 생각한다. 또한 나는, 옛 이야기의 감금하였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이 아름다운 곳에 제 짝을 감금해 두기보다, 너무나 짝이 소중하여 이리 깊은 곳에 숨겨 모셔 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랬…… 을 것 같진 않습니다.”

이곳은 깊어도 너무 깊은 심처였다.

“설령 말이다, 용아야. 류씨가 사내가 성급하고 난폭한 성정이라 잠깐 제 포악함을 이기지 못하여 소중한 짝을 이곳에 강제로 붙들어 둔 것이라도 그것은 너무나 소중하고 소중해 그리한 걸 게다.”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여인에게 소년이 도리질을 건넸다.

“진정 소중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소년의 단호함에 태후가 부드러운 웃음을 퍼트렸다.

“용아는, 빛나는 아이는 냉정한 소년이구나. 언젠가 이 할미 말을 숙고하여 네 짝이 잘못을 저질러도 한 번쯤 기회를 다시 주지 않으련?”

“그래야 할까요.”

“이곳에 갇힌 왕비는 하후가 왕비란다.”

태후가 은밀한 목소리로 비밀을 속삭였다.

“사내라서 갇힌 거 아닙니까?”

소년이 냉정한 얼굴로 옛 이야기를 지적했다.

“용아야.”

태후께서 웃음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책하듯 소년을 불렀다.

“정말 짝이긴 했대요?”

소년은 몹시도 부정적이었다.

“그럼.”

“아닐지도 몰라요. 황가로 오는 하후가의 신부는 언제나 사내였다고 했습니다. 사내 신부라니 보기 싫어서 깊은 데다 가둬 둔 걸 수도 있습니다. 무서운 데였네요. 멋진 데이긴 한데. 그만 돌아가고 싶습니다.”

용아가 벌떡 일어나며 할머님을 재촉했다.

“사이좋게 지내렴.”

“……예…….”

소년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며 태후께서 웃는 얼굴로 부탁했다. 몸을 일으킨 여인이 아끼는 전각을 눈으로 더듬으며 혼잣말처럼 떠들었다.

“나의 빛나는 아이들을 더 못 보게 될 것이 아쉽구나.”

“오래도록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태후를 올려보며 용아가 힘주어 말했다. 그래야 할 터인데, 라고 대꾸 하는 얼굴에 흐린 웃음이 가득 번졌다. 그럴 겁니다, 용아가 다시 힘차게 말하며 따듯한 팔을 받쳐 안았다.

“돌아갈까요.”

“예, 용아가 모시겠습니다.”

소년의 다부진 말에 항상 점잖으신 태후가 장난 많은 어린 소녀처럼 작은 머리에 옆몸을 기대셨다. 함월전으로 돌아가는 길은 화우전으로 향하는 길보다 훨씬 더 소란하고 웃음이 넘쳐 났다.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될 때마다 엄격한 예법에 따라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는 모두 중요한 것들이지만 용아와 무관하다.

입춘 하루 전날 열리는 봄맞이 춘례도, 황실 친인척들이 모두 모여 등불을 구경하는 관등회도, 단오도, 황궁 첨식방 단맛의 과자가 널리 베풀어지는 중원절도, 연잎을 먹는 입추도, 중양절도, 소년과는 상관없이 흘러갔다. 식사 시간에 오르는 음식을 보고 오늘은 무슨 날이라 알고 지나가는 게 고작이었다.

황가의 일원이 된 용아에게 내려진 명은 간단하였다. 어린 태자비는 홍문에 들 수 있는 나이가 지날 때까지 부황과 모후께 조석으로 문안 올리는 것 외에 자유로이 지내며 공식적인 곳에 일체 드나들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섣달그믐 이튿날은 달랐다.

새해 첫날이 밝았다.

새해가 밝았다 반기는 영화대 궁인들과 축하의 말을 건네고, 선물을 주고받던 소년이 밤을 샌 고단함도 잊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비전하?”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에 용아가 감탄사처럼 짧게 내뱉었다.

“축언.”

태후께 새해 첫 축언을 훔쳐야겠다. 새해 첫날 하기에 알맞은 훌륭한 생각이었다. 그대로 달려 나가려던 용아는 불현듯 멈추었다. 황제와 태자가 있는데 태후께 자신이 새해 첫 축언을 청해도 되나? 머릿속에 짧고도 깊은 고민이 올랐다.

“그렇지, 둘은 모르지.”

중경에서 태어나 이곳에서만 자란 태후의 두 핏줄은 다행하게도 제북의 새해 첫 축언 예법을 알지 못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소년은 기뻐하며 밤을 샌 후유증도 잊고 후후후, 웃으며 전각을 박차고 나갔다.

“비전하!”

홍문의 진정한 주인이시며 내원의 통솔자인 후가주께 새해 첫 축언을 듣는 것은 한 해를 가장 복되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얇게 서리가 낀 거리를 내달리는 용아는 오직 한 가지 목표에만 집중했다. 태후께 받을 새해 첫 축언은 그리도 중한 것이었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비전하, 새해 첫날…….”

바람처럼 달려 함월전에 든 소년은 궁인의 새해 인사를 입술에 손가락을 세워 급히 멈추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계신가?”

궁인이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끄덕였다.

“가만 계시게.”

용아는 소리 없이 문을 살며시 열고 깨금발로 숨어드는 것처럼 전각 안에 들었다. 궁인은 몇 번이고 조용히 해 줄 것을 몸짓으로 당부하며 조용히 안으로 드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아주 예전의 기억을 끄집어 올렸다.

제북의 새해 첫 축언 훔치기다.

가장 높은 이에게 그조차 모르게 다가가 잠결에 내리는 새해 첫 축언을 들으면 축언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소년이 아는 가장 높은 분이며, 제북에 계셨어도 가장 높았을 이가 함월전 전각 안에 잠들어 계셨다.

이곳 중경에 새해 첫 축언 훔치기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 소년에게는 쾌재였다. 살금살금 안으로 숨어든 용아는 바닥을 거의 기다시피 해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잠이 들어 있는 노인의 손끝을 놀라지 않게 살그머니 두드리는 손길은 부드럽고도 조심스러웠다.

눈썹을 살짝 움직이는 얼굴을 본 용아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할머님, 용아입니다. 새해 첫 축언을 제게 내려 주십시오.”

잠결에 속삭임을 들은 태후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새해 첫날 첫 축언 내려 달라는 청을 들은 게 십여 년이 훌쩍 넘어 있었다. 까마득한 기억 속의 소녀도 제 짝 몰래 새벽 아침부터 달려와 그녀에게 새해 첫 축언을 우아하게 훔쳐 갔었다.

“빛나는 소중한 이여. 빛나는 짝과 옥 같은 아이를 낳고 천수를, 만수를 누리려무나.”

침상에 얼굴을 기댄 채로 태후께서 축언을 내렸다.

“…….”

용아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흘렀다. 기대한 바와 전혀 다른 내용의 축언이었다. 살짝 눈을 뜬 여인이 손끝에 닿아 있는 손을 두드리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새해 첫날 축언을 훔치러 온 이를 맞은 게 이십여 년에 가까워. 아득해 잊혀도 이상하지 않은데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니 신기한 일이야.”

아마도 선황후인 공후를 말하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저와 같은 축언을 훔쳐 가셨습니까.”

“그랬지.”

둘은 마주 본 체 웃었다.

“다음해 새해 첫 축언도 제가 훔쳐 가게 해 주십시오.”

용아가 답례의 축언을 속삭였다.

“…….”

태후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흘렀다. 말없는 웃음에 답을 청하는 고갯짓을 건네 보았지만, 따스한 손으로 답을 재촉하는 얼굴을 쓸어 만지기만 할 뿐 확언을 건네지 않으셨다. 소년은 얼굴을 쓰다듬는 따듯한 손을 당겨 제 이마에 깊이 대었다가 예의 바르게 물리고,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하게 속삭이고 물러 나왔다.

“물러가 옵니다.”

용아가 밖으로 나오자, 함월전의 궁인이 예를 급히 올리고 문 안으로 스미듯이 조심스레 들었다. 문 곁에서 서서 소년을 맞아 주었던 궁인은 용아에게 아주 작은 몸짓으로 바깥의 상황에 대해 눈치를 주었다.

새해 첫 축언을 훔치는 데에 성공한 기쁨과 축언이 예상과 다른 기묘함, 답례로 건넨 자신의 축언에 긍정적인 응답이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의아함으로 복잡한 기분이었던 용아는 궁인이 살짝 건네는 눈짓에 걸음을 멈추었다.

함월전 밖에 장대한 행렬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가장 앞, 가장 화려한 행렬의 주인은 황제였다. 황제의 옆에는 황후의 행렬이 있었고, 그보다 살짝 옆 동떨어진 곳에 태자의 행렬이 있었다.

이 새벽부터 연회가 있었나? 아니면, 새로운 황궁 예법인가.

용아는 분분한 걸음으로 함월전 계단을 내려가 황제와 황후께 우선 예를 올렸다. 부황과 모후 곁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던 태자가 계단을 바삐 내려오는 용아를 보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부황을 뵙습니다. 모후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일어나세요.”

새해 첫 문후를 야외에서 받게 되었음에도 황제와 황후는 너그러운 목소리로 용아를 일으켰다. 용아가 태자를 향해 예를 올리려 하자 윤제가 예를 올리려는 팔을 붙잡아 일으키며 다급히 물었다.

“인사는 되었고, 무슨 일 있느냐.”

“예? 일이라니요.”

소년의 말간 얼굴에 장대한 행렬을 이끌고 온 세 사람이 안도의 긴 숨을 훅 몰아쉬었다. 태자가 붙잡은 팔을 툭 치듯 가벼이 흔들며 말을 이었다.

“새해 첫날 새벽부터 함월전으로 왜 그리 뛰어간……거요……?”

둘만 있을 때처럼 편히 말하던 윤제가 곁에 선 황제와 황후의 존재를 깨닫고 대충 예를 차렸다.

“예…….”

소년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 함월전 전각으로 향했다.

새해 첫 축언을 훔치러요.

라고, 감히 진실을 고할 수 없었다. 다음해 새해 첫 축언을 훔치는 것도 자신이 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새해 첫 축언 훔치기의 존재를 발설했다간 갑자기 경쟁자가 확 늘게 될 터였다.

그보다 이토록 엄청난 행렬을 이끌고 놀라서 함월전으로 달려왔을 황제와 황후, 태자에게 미안해서 말하기가 어려웠다. 더불어 새해 첫날 새벽에 상전의 외출에 죄 없이 끌려 나왔을 궁인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야.”

윤제가 용아에게만 들리도록 나지막하게 소곤거렸다. 잘 대답해라, 그런 뜻의 을러댐 같았다.

“할, 할머님이 보고 싶어서요.”

거짓은 아니었다.

“새해 첫날 새벽부터?”

윤제가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은근히 주며 말했다.

“새해 첫날 새벽이니까…….”

용아가 무서운 표정이 되었을 남자의 얼굴을 외면하며 제 할 말만 떠들었다. 진심이 담겨 있지 않는 듯한 혼 없는 웅얼거림에 윤제가 험악한 웃음을 건넸다.

“야.”

남자가 다시 소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대답을 바란 부름이 아니라 그저 위협뿐인 부름이었다. 격의 없는 형제 같은 둘의 투닥임을 지켜보며 황제와 황후가 잔잔한 미소를 퍼트렸다.

“폐하. 황후마마. 전하.”

그때 함월전의 상궁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 높으신 객들을 불렀다.

“말하라.”

황제가 반가운 음성으로 답했다.

“태후께서 전하시길 먼 함월전까지 귀하신 손들이 와 준 것에 감사하나, 새벽에 잠시 다녀간 손님을 맞은 것을 끝으로 오늘 더는 외부의 인사는 만나지 않겠다 명하셨습니다. 이리 먼 곳까지 와 주신 것에 참으로 고마우나 시시때때로 몸의 상태가 오르내리니 예를 갖추어 귀한 손님 맞을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를 덧붙이셨습니다. 비록 얼굴은 볼 수 없으나 새해 선물을 전하니 그로써 새해 인사를 대신해 달라 하셨습니다. 오늘은 모쪼록 그만 물러가 주시옵소서.”

함월전 연 상궁은 송구한 기색도 없이 황제와 황후, 태자에게 축객령을 담담하게 건넸다.

“그리하지. 말을 전해 주느라 고생하였소.”

황제는 함월전에 짧게 시선을 던지고 답하였다. 그의 얼굴에 아쉬운 쓸쓸함이 감돌았다. 황후의 표정은 그보다 더했다. 황제가 서운함을 느끼는 정도라면 그녀의 얼굴은 참담해 보일 정도였다. 말을 건네려던 황후는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가 표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말을 내뱉었다.

“어머님을 잘 살펴 주시게. 이 사람은 물러가 보겠습니다. 이따 보자꾸나. 아가는 나와 함께 가는 게 어떠냐.”

황후의 말에 연 상궁이 허리를 굽히는 것을 답을 대신했다.

“가 보세요.”

“살펴 가십시오, 어머님.”

황제와 태자의 일별에 황후가 고요한 웃음으로 답했다.

“물러가 보겠습니다.”

용아는 팔을 아직 놓아주지 않고 있는 커다란 손을 냉큼 떼어 내고 자신을 지켜보는 황후의 곁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윤제는 아직 소년에게 할 말이 남은 듯했지만 부친과 모후 앞이라 도망가는 용아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겉옷은 어찌하였습니까.”

황후가 곁으로 온 소년을 살뜰히 살피며 말을 건넸다.

“……다, 다급히 나오느라 잊었나 봅니다.”

“함월전 안에 두고 온 게 아니라 이 추위에 겉옷도 안 입고 달려 나왔단 말입니까.”

“……예…… 괜찮습니다.”

황후는 미색이 대단한 편은 아니나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외형이었다. 중경의 고귀한 여인답게 이 새벽에도 빈틈없이 단장하는 철두철미함을 가졌다. 입술연지의 선 하나조차 엇나가지 않게 그리는 여인의 눈에 겉옷도 아니 입고 새해 첫날 새벽부터 밖을 내달린 태자비는 말썽쟁이 막내아들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황후는 당신의 팔에 걸치고 있던 털토시를 풀어 펼쳐 소년의 어깨에 올려 주었다.

“태자비가 이리 허술하게 입고 다니면 아니 됩니다.”

말을 건네는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이, 이러지 않으셔도…….”

용아는 뒤늦게 제가 새해 첫 축언 훔치기에 넋이 나갔었구나 깨달으며 우물우물 말을 건넸다. 밤을 새고 새벽에 대책 없이 뛰쳐나온 탓인지 슬슬 졸음이 밀려왔다. 거기다 무언가 계획에서 비껴난 목표 달성에 기운이 쇠하였고, 함월전을 나오자마자 기함할 만큼 대단한 시가 식구들을 예고 없이 마주한 탓인지 피로가 마구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그냥 걸치고 있으세요.”

함월전에서 거절을 당하고 돌아선 후로 처음으로 편히 웃는 황후의 얼굴에 용아가 거절을 그만두었다. 돌아가는 길은 달려올 때와 달리 멀고, 조용했다.

소년은 괜한 말 대신 여인의 어두운 안색을 가만가만 살피며 걷기만 했다.

용아가 황후를 올려보고 있을 때, 생각에 잠기어 있던 우울한 얼굴이 마침 소년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용아가 머쓱한 웃음을 퍼트렸다. 위로가 담긴 웃음에 여인 또한 미묘한 웃음을 퍼트렸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울음을 닮은 웃음이었다.

용아는 문득 태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태후께서 황후를 섭섭하게 대하신다는 투의 말이었다. 누구나 각자의 입장이란 것이 있었다. 용아에게 태후는 더없이 상냥하고 따듯하고 자애롭지만, 황후에게 태후는 특별히 잘못한 것 없는 그녀를 외면하는 냉랭한 시모일 수 있었다.

용아는 태후의 입장에서도, 황후의 입장에서도 어느 쪽만 두둔하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저 때문에 다들 놀라신 게 아닌지 송구하옵니다.”

소년은 적당히 예를 차리는 말을 건넸다.

“내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아니옵니다.”

“태후께서 나를 박대하시지는 않지만, 나를 어여뻐 하시지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구나. 예쁨 받을 나이는 한참이나 지났어도 서운한 건 어쩔 수가 없어. 어쩌면 모두 나의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허나, 나는 제대로 된 황후가 아니니 괜스레 눈치가 보인다. 한참이나 어린 태자비를 붙들고 내가 참으로 부끄러운 말을 하는구나. 하지만 섭섭한 걸 숨기기가 어렵다. 이 사람이 태자비를 투기하여 심술을 부리더라도 모른 척 눈감아 주렴.”

황후의 우아한 투정에 용아가 어색한 웃음을 퍼트렸다.

“모후께서 저를 투기하시다니요.”

“비는 폐하조차 쉬이 허락하지 않는 태후마마의 곁에 드나들며 사랑을 받지 않느냐. 질투가 나 배가 다 아프다네. 폐하께서도 태자비를 주시하고 계실지 모르니 조심하여라.”

용아의 엄살에 황후가 아름답게 협박하셨다.

“모후.”

황후의 마음을 다는 모르지만 조금은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태후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양자 간의 입장 차이를 뭐라고 말해할지 알 수 없었다.

“말씀하세요.”

“태후께서 지금 모두를 피하는 것은 당신을 아름답던 모습으로만 기억해 주기 바라서일지도 모릅니다.”

저도 모르게 태후의 입장에서 말이 나갔다.

“그러신가. 태자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네.”

황후는 너그러이 소년의 말에 답했다.

“중경과 제북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떠나온 곳이 그립소?”

용아의 말에 황후가 걸음을 멈추며 말을 건넸다. 소년은 낯선 몸짓으로 여인의 손을 청했다. 황후가 두 손을 내밀어 자신의 손을 청하는 소년에게 한쪽 손을 내주었다. 용아가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춰 제북의 예를 올리며 손에 붙잡고 있던 여인의 손을 이마로 가져가 겹쳤다.

소년의 말대로 그곳과 이곳은 무척 다른 것 같았다. 낯선 예법은 기묘한 풍모를 가졌다. 어린 이마에 닿은 손을 어찌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하는 황후에게 소년이 살짝 시선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축언을 내려 주세요.”

아름답게 단장한 여인의 얼굴에 울음 같은 웃음이 다시 번졌다.

“만복을 누리세요.”

과분한 축언에 용아의 얼굴로 곤란한 웃음이 감돌았다.

“모후, 만복을 누리소서.”

소년은 정중히 답례의 축언을 전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주 황송한 날이었다. 14살이 된 용아의 새해 첫날 아침이 화사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영화대로 돌아온 모장이 어린 주인의 어깨를 다정히 도닥여 주었다. 궁인의 얼굴 가득 뿌듯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어머니가 모자란 아들이 드물게 일을 해내었을 때 짓는 함박웃음을 닮은 미소였다.

“잘하셨습니다.”

“응?”

“태후께서 비전하께 잘 대해 주시지만 황후께는 알게 모르게 섭섭하게 하시는 게 없잖아 있으셨습니다. 비전하께서 황후께 위로를 해 주신 건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잘하셨습니다. 황후마마와 친분이 도타와 지는 것은 좋은 겁니다. 태후께 사랑받으시는 것도 좋지만, 황후께서 내궁의 주인이시니 사이를 좋게 해두어 나쁠 것 없으니까요.”

용아는 그저 황후께 제북의 것 하나를 알려드리고 싶었다.

그렇지, 축언.

여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소년이 살그머니 그녀를 불렀다.

“모장.”

“예.”

“내 축언 사지 않겠어?”

용아가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장은 소년의 어깨에 올라가 있던 황후의 털토시를 떼어 내 정리하는 중이었다. 어린 주인의 청이라면 무엇이든 그러마 하는 궁인이 하던 일은 멈추고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아한 태를 지닌 얼굴이 잔웃음을 부드럽게 퍼트렸다.

“아니오.”

모장이 웃는 얼굴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

“왜? 좋은 건데.”

용아가 의자에서 일어나 분주히 할 일을 하는 여인의 꽁무니를 따르며 축언 판매에 열을 올렸다.

“그 축언 누가 내려 주신 겁니까.”

“태후마마께서 내려 주신 거야.”

“태후께서 내려주신 귀중한 축언을 한낱 궁인인 제게 파시려고요?”

모장이 엄격하게 따져 들었다.

“정말 좋은 걸세.”

용아가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그러니까 어서 산다고 해, 라고 소년의 얼굴이 소리 없이 외쳤다.

“싫습니다.”

“아니, 왜? 왜 싫어.”

소년이 안달할수록 모장의 얼굴이 잠잠해졌다.

“비전하. 축언 내용이 뭡니까.”

“그건 알려 줄 수 없으이. 산 후에 알려 줘야 해.”

“좋은 거라고요?”

모장이 꼼꼼하게 따졌다.

“응.”

용아의 얼굴 가득 팔고야 말겠다는 열의가 흘러넘쳤다.

“그 축언은 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소인의 생각에 그 축언은 비전하께서 가지시는 게 맞을 듯합니다. 무엇보다 축언을 사고파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모장이 훠이 벌레를 쫓듯 상전을 일터에서 내쳤다.

“제북에선 축언 다들 사고팔아! 모장! 모장? 이 축언 좋은 거라니까!?”

“알겠습니다. 그 좋은 축언 저는 사지 않으렵니다, 비전하.”

모장이 잡인을 쫓는 상궁의 얼굴로 용아를 한쪽으로 치웠다. 얼결에 떠밀려 나온 용아가 우울한 표정을 퍼트렸다. 태후는 좋으신 분이지만 그분께서 내려 주신 축언은 소년에게 전혀 필요 없는 것이었다. 허니 갖고 싶지 않은 축언을 올해가 가기 전에 얼른 팔아 치워야 했다.

‘빛나는 소중한 이여. 빛나는 짝과 옥 같은 아이를 낳고 천수를, 만수를 누리려무나.’

제북의 속설에 따르면 후가주가 내리는 축언은 예언과 같은 영험함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어서 이 축언을 팔아야 했다. 반드시 팔아치워야 했다.

용아가 가지고 싶지 않은 축언에 머리가 아파 오려 할 때 마침 목교가 다가왔다. 예비 고객을 발견한 소년의 눈이 금세 빛났다.

“목교야.”

“안 삽니다.”

아직 사라는 권유도 않았는데 목교가 딱 잘라 거절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잖아?”

“뭘 파실 것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비전하.”

황궁 안에서 평생을 산 목교는 얼굴만 봐도 상대가 하려는 말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용아가 목교를 다시 부드러이 불렀다.

“목교야.”

“저 돈 없습니다.”

황궁 궁인들은 귀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바깥나들이를 가면 씀씀이가 좋은 편이라 했다. 그러다 곧잘 재산을 탕진해 궁핍한 삶을 산다고도 했다. 모장의 아래에 있는 궁인들은 쪼들리게 살진 않으나 괜한 곳에 엮여 금은을 털어 넣는 일은 없었다.

“은비녀 하나면 돼.”

합리적인 소비자 목교에게 용아가 유혹적인 가격을 제시했다.

“축언 같은 걸 사는 데에 쓸 은비녀 없습니다.”

목교는 강적이었다.

“은비녀 하나도 없어?”

용아가 은근히 궁인의 신경을 긁었다.

“안 사요.”

모장도 그랬지만, 목교도 안 사요, 안 삽니다 따위의 거절에 지체함이 없었다. 연이은 판매 실패에 용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축언 팔기는 철없는 아이들과 실없는 어른들의 일이라 했다. 철없고 실없는 축언 팔기에 자신이 열을 올리는 상황이 참으로 개탄스러웠다.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반드시 팔고 말겠다!

영화대 궁인들은 모장부터 시작해 모두가 깐깐하고 예민한 손님들이었다. 거절에 거침이 없는 그녀들은 영화대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인 태자비의 구매 권유에 냉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삽니다.”

용아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거절의 말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제일 가능성 높은 손님들의 단체 거부에 용아는 기력을 잃어 갔다. 간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 모장의 걱정을 사 축언을 팔아 보려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시들시들한 움직임으로 마음 약한 목희를 꼬드겨 봤으나 다른 거 다 들어준다면서 축언 사는 것만은 안 된다 미리 선을 그어 왔다. 온종일 흐늘흐늘한 용아를 보다 못한 목란이 와 이미 영화대 안에 비전하가 축언 팔기를 시도하면 거절하란 정보가 쫙 퍼졌으니 손님은 딴 데 가서 알아보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들었다.

“나쁜 거 아니라니까?!”

용아는 억울했다.

“하지만 그 축언 어쩐지 비전하가 반드시 가지시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모 상궁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대 안에서 축언 팔 생각은 관두십시오.”

참으로 무정한 여인네들이었다.

새해맞이 축례를 위해 등불과 비단으로 단장을 한 승명원은 평소보다 훨씬 더 호화로웠다. 승명원을 방문한 이들도 유달리 신경 쓴 차림이었다. 평소보다 덜 요란한 색상이지만, 수가 훨씬 더 화려하게 들어간 어두운 색 포(袍)를 걸친 소양군이 유독 시선을 끌었다.

“소형.”

어두운 포 위의 화려한 수가 부유함을 팍팍 뿌려 주었다.

“어, 용공자. 왔는가.”

“제 축언 사지 않으실래요?”

용아는 축언 팔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소년을 유심히 보던 소양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사지 않으련다.”

“왜. 왜요…… 좋은 겁니다.”

소양군의 드문 냉정하고 진중한 태도에 용아가 주섬주섬 뒷말을 더했다.

“당연히 축언이란 건 좋은 것이겠지. 용공자 같이 귀한 신분의 이에게 축언을 줄 수 있는 이라면 만나기조차 어려운 분이 내리셨을 것이다. 귀하신 분께서 귀한 이에게 내리는 축언이 나쁜 것은 없을 텐데 그리 팔려는 것 보니, 내가 사면 상당히 위험해지는 축언 아니겠는가.”

“정말 좋은 것인데…….”

“새해 초입부터 위험한 것을 사들이고 싶지 않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소년에게 소양군이 쐐기를 박았다. 용아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영공자 형님.”

“나도 아니 사련다.”

영양군이 다가오는 용아를 홱 피하며 말했다.

“최근 투자한 게 실패하셨습니까?”

“아니야! 투자 실패라니?! 부정 탈 말 마시게. 신년에는 몸조심을 해야 하는 법이다, 용공자. 용공자 너도 윗분이 특별히 내려 주신 축언 털어 낼 생각 말고 안고 가도록 해.”

“저렴하게 팔게요.”

“되었다.”

가장 공략하기 쉬울 거라 생각한 두 남자가 완강히 거절했다. 아쉬운 얼굴로 시선을 돌리던 용아와 횡양군의 눈이 마주쳤다.

“아니 산다.”

횡양군이 묻기도 전에 거절했다.

“아직 말도 안 했잖아요.”

횡양군이 투덜대는 소년이 귀엽다는 듯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안 살 거면 동정하지도 마십시오.”

이제는 완전히 친해진 왕공 자제들에게 용아가 입술을 삐죽대며 툴툴댔다. 세 남자가 대체 무슨 축언이기에 그렇게 팔아 치우려 하냐며 소년을 힘껏 동정했다.

나아쁜.

용아가 세 남자를 쏘아보고 있을 때 마지막 손님이 등장했다.

“아까부터 뭘 그리 팔아.”

평소 시비 걸기 좋아하는 사내가 오늘은 묘하게 관심 어린 얼굴로 용아에게 말을 건넸다. 용아가 세 남자를 버리고 냅다 돌아서며 마지막 희망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건넸다.

“진공자 형님. 제 축언 사실래요?”

“아니.”

“안 살 거 왜 물어봐요.”

단호한 거절에 용아의 태도가 돌변했다.

“묻지도 못하냐. 뭘 하도 열심히 팔고 있기에 궁금하니 물어봤지. 너도 그리 싹싹하게 굴 수가 있구나. 딴사람인 줄 알았다. 뭘 판다는 게 어려운 거지.”

진양군이 잔뜩 시비를 걸어 댔다.

“그 축언 내가 사마.”

용아의 머리 위에서 그토록 바라던 말이 울렸다. 그러나 용아는 기뻐하지 않았다. 축언을 사 주겠다 나선 이가 문제였다.

“안 돼!”

소년이 왈칵 소리쳤다.

“왜, 그렇게나 팔려고 기를 쓰더니. 나한테는 안 파냐?”

윤제가 언짢은 듯 눈썹을 좁히며 말했다.

“안 돼…… 윤공자 형이 사면 내가 가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아, 안 돼!”

한번 팔린 축언은 무를 수 없었다.

“그런 거냐. 축언이 대체 뭔데?”

윤제가 황망한 얼굴로 좌절하는 용아를 바라봤다. 사내의 얼굴에 올랐던 언짢음 사라지고 곤란한 기색이 도드라졌다. 용아가 팔로 머리를 쥐어 싸매며 온몸으로 좌절을 표출했다.

“몰라요!”

“야야. 내가 딴 데다 팔게.”

윤제가 몸을 낮춰 용아와 시선을 맞추며 달래듯 말했다. 용아는 축언이 잘못 팔린 것에 완전히 혼이 날아간 듯했다.

“내용이 발설된 축언은 팔아 봤자야.”

“아냐. 짐작만 할 뿐이지 발설된 건 아니지.”

윤제가 열심히 용아를 달래었다.

“아무도 안 사 줘요.”

용아가 서러움 가득한 얼굴로 하소연했다. 지난 며칠간 거절의 연속이었다. 소년이 입만 떼어도 ‘안 사요’ ‘안 삽니다’라는 말이 날아 들었다.

“이 형님 믿어.”

윤제가 단단히 말했다.

“누구한테 팔 건데요?”

“괜찮은 데가 있다.”

두 사람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네 남자가 근심 어린 얼굴을 했다. 용아에게 내린 축언인데, 윤제가 사면 의미 없는 축언이란 둘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내용이란 뜻이었다. 저들이 나이 차가 큰 형과 아우처럼 지내고 있으나 공식적인 직함은 태자와 태자비로 엄연히 부부 사이였다. 부부에게 내리는 축언이래야 봐야 거기서 거기였다.

“저거 팔아도 되는 거야?”

“축언 산 사람 괜히 나중에 천벌 받는 거 아닐까.”

소양군과 영양군이 저것 좀 말려 보라는 듯 횡양군의 옆구리를 찌르며 속닥거렸다. 횡양군은 방관자의 얼굴로 현실을 냉정히 짚어 줬다.

“저 녀석들 진심 같다.”

“그런데 대체 그 축언이란 게 내용이 뭔데?”

세 사람을 향해 진양군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모르겠냐?!”

소양군이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그려 댔다.

“모르니까 아까 물어봤잖아. 살 것처럼 물어보면 가르쳐 주는 줄 알았지. 사고 난 후에나 가르쳐 줄 기색이라 안 산다고 한 건데. 이제라도 산다고 할까. 대체 무슨 내용인가.”

“뻔하잖아.”

영양군이 진짜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뻔한 거 뭔데!”

진양군은 자신이야말로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남의 축언을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눈치 없는 친우를 둔 두 남자는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손만 살래살래 저었다. 횡양군이 진양군의 어깨를 다독이며 악담을 부드럽게 내뱉었다.

“진공자 이래 가지고 장가는 갈 수 있겠나.”

“그러니까.”

“어우, 답답해.”

세 남자의 안타까운 시선에 진양군이 험악한 표정을 했다.

“나는 장가 안 간다.”

진양군의 난데없는 독신 선언에 곁에 이들 모두가 경악했다. 횡양군은 익히 알고 있었던 듯 또 그 소리냐는 듯 도리질을 했고, 소양군과 영양군은 그게 되겠냐며 실소했다.

“장가를 왜 안 가냐.”

용아를 다독이느라 바쁘던 윤제가 불쑥 끼어들었다.

“혼인을 진공자 형님 마음대로 정할 수 있습니까.”

언제 침울했냐는 듯 말끔한 얼굴이 악담 같은 의문을 건넸다. 세상만사를 다 깨우친 것처럼 의젓하고 영리하며 삐딱함이 담뿍 담긴 의문이었다.

진양군이 나란히 선 두 사람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

“너희 그 축언 꼭 이뤄질 거다.”

용아와 윤제가 동시에 진양군을 외쳐 불렀다.

“진공자!”

“진공자 형님!”

진양군은 그 축언이란 게 당최 무엇인지 모르겠다만 반드시, 기필코, 결국 이루어질 거라 거듭하여 강조하고는 말을 훌쩍 타고 앞서 가 버렸다.

“괜찮아. 이 형님만 믿어라.”

윤제가 침울해진 용아를 다시 달래고 또 달래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저녁. 해원을 나오는 윤제의 얼굴은 시큼털털했다. 용아의 힘찬 응원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축언 팔기에 나선 그는 장렬히 실패했다.

마침 운 좋게 해원 모여 있는 세 여자에게 축언 사지 않겠나? 권해 봤으나 셋 모두 까르르 웃으며 싫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남이 파는 축언이라니 어째 께름칙하지 않냐는 게 거절의 사유였다. 세 여자는 태자가 파는 축언을 사는 것을 한 번 더 거절하며 영화대 태자비께서도 요즘 한참 축언을 팔더란 말을 했다. 그쪽도 아무도 사 주지 않더란 말이 덧붙여졌다.

그 축언이 이 축언이란 말은 할 수 없었다.

해원에서의 축언 팔기는 태자비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옮아 가, 태자비께서는 여인이 아니니 태자와 바깥출입을 할 수 있어 부럽다는 부드러운 책망의 말에 다다랐다. 밖에 나가 무엇을 하느냐는 캐묻는 말도 잠시 있었다. 윤제는 사내들끼리 가볍게 말 타고 노는 것이라 답하고 자리를 털고 나왔다.

“등우.”

금당대로 향하던 윤제가 곁에 선 등공공을 불렀다.

“예, 전하.”

윤제가 당당한 얼굴로 권했다.

“내 축언 살래?”

“싫사옵니다.”

등우가 동궁의 주인을 애잔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다들 너무하는 것 아니냐.”

윤제가 소년처럼 투덜거렸다.

“그 축언 사면 훗날 큰 화를 입을 것 같사 온데 어느 간 큰 인사가 그 대단한 축언을 사들이겠습니까.”

등우의 침착한 말에 윤제가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사실 나는 축언 내용이 뭔지 모르겠다.”

“예……?”

“뭔지 알 것 같기도 한데 정확히 그것이다 확신은 못 하겠다.”

등우가 의아한 얼굴로 말을 올렸다.

“하온데 어찌 태자비 전하의 축언을 사 주셨습니까.”

“항상 어른스러워 지나치게 철이든 녀석이 제 나이에 맞게 분주히 이리저리 뭘 팔려고 나서는 게 재밌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하니 그저 사 주어야 할 것 같지 않나? 혹여 그 축언을 사 내게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사 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해원에 든 것도 그렇다. 내가 무언가 팔려고 하면 그들은 사 주지 않을까 했는데 다들 거절하니. 내가 평소 잘못 행동 했거나, 사람을 잘못 보았나 보다.”

“너무 실망 마십시오. 축언을 사고판다는 게 이곳에선 낯설고 특이한 일 아니옵니까.”

등우가 주인을 성심껏 위로했다.

“그 녀석 기대를 잔뜩 기대하고 있을 텐데 무어라 하지.”

윤제가 뭘 파는 게 이리 힘든 거냐며 잠깐 사이 굳은 어깨를 두드리며 엄살을 부렸다. 태자의 곁에 바싹 붙어서며 낮춘 목소리로 등우가 속삭였다.

“파셨다 하십시오.”

“네가 살 거냐.”

윤제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차 권했다.

“익명의 고마운 분이 사 주셨다 하십시오. 비전하께서 어찌 아시겠습니까. 무척 기대하시는 것 같던데 실망시키실 것입니까.”

등우가 세상엔 하얀 거짓말이란 훌륭한 것이 있다 속삭였다.

“나중에 축언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하시지요.”

등우가 척척 답했다.

“처음으로 네가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저는 항상 믿음직했사옵니다.”

윤제의 말을 등우가 지지 않고 받았다.

“그랬냐.”

“그렇습니다. 최근 비전하께서 황후전을 살뜰히 찾아가 두 분 사이가 무척 살가워졌다 하더이다. 태후전 드시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으시지만, 바깥출입도 없고 객도 받지 않으시는 태후전을 다니시는 것과는 아무래도 다르옵니다. 태자비께서 내궁을 다스리는 황후전에 오가시며 사이가 좋다 알려지니 안팎으로 보는 시선이 좋사옵니다. 비전하께도 좋고, 황후마마께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모후께서 피하시는 것, 좋아하지 않는 것, 아끼시는 것에 대해 영화대에 알려 주도록 해라.”

“그는 저보다 영화대의 모 상궁이 더 잘 아옵니다. 염려 놓으소서.”

등우의 말에 윤제가 발길을 돌렸다.

“영화대로 가자.”

등우가 재개 발을 놀려 방향을 바꾸었다.

“모시겠습니다. 하온데 가셔서 무얼 하시려고요. 석반은 해원에서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축언을 판 훌륭한 형님의 위엄을 세우고 사례를 받아야지.”

등우는 동궁의 주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태감의 발이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공공은 주인이 가실 길을 밝히며 영화대에 태자 전하께서 오셨으니 잘 차린 다과를 준비하라 명해 두겠다 소리 높여 말하였다.

“으음.”

영화대로 향하는 헌앙한 사내의 넓은 뒷등이 몇 번이나 주춤했다. 큰 손이 반듯한 뒷목을 머쓱하게 쓸었다. 낮은 저음이 의미 없이 반복해 울렸다.

“태자 전하 납시오!”

등 태감이 당당하게 태자의 방문을 알렸다. 쾌청한 밤이 머쓱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호화로운 방은 사내의 서재다. 방의 네 면 중 세 면 전체를 어둡게 옻칠을 한 행나무 책장이 가득 채우고 있다. 고상한 책장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죽간부터 최근에 나온 서책까지 갖가지 진귀한 것들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책장을 지나 책상 앞으로 가던 사내가 멈추어 섰다.

깨끗하게 비어 있어야 할 책상 위에 잘 개어 놓은 서신이 놓여 있었다.

백서(帛書)는 오랜만이었다.

비단에 남기는 서신은 왕이나 쓰는 것이지만 그분은 그런 소소한 것에 신경을 쓰는 세심한 인물이 아니었다. 사치한 서신에 사내가 소리 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진보랏빛 겉비단에 싸인 흰 비단을 꺼내자 짧은 명이 쓰여 있다.

「결행.」

짧은 하명에 수많은 이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탈 없이 지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 사람의 인생은 단단히 엉킬 것이다. 가여운 소년의 우아한 얼굴을 떠올리며 사내는 느릿느릿 숨을 내쉬었다.

사치하고 호화로운 백서가 화사한 화로로 던져졌다.

불에 닿는 순간 까맣게 움츠러든 화려한 비단은 곧 타닥타닥 불티를 짧게 피우다가 이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졌다.

승명원 들판에 말발굽 소리가 가득 차올랐다. 용아는 언덕을 내려와 속도를 높이는 중이었다. 긴 겨울이 가고, 봄기운이 오르며 날이 풀려 기수도 말도 한껏 기분을 냈다. 말고삐가 끊긴 건 순간이었다. 체고가 높은 산융마의 위에서 소년이 거꾸러졌다.

세상이 뒤집히는 풍경이 무능한 시야를 가득 메웠다.

추락은 아찔하고 아득하였다.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과 소리들이 용아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낙마를 할 때 해야 할 대처가 캄캄해진 머릿속에 잠겨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뭘 할 수 있을 거라는 의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두려움에 눈을 감는 얼굴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추락하는 몸 위로 단단한 몸이 감싸이듯 닿으며 거꾸러지던 몸이 강제로 당겨 돌려졌다. 단단하지만, 언 땅보다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사내의 몸이 소년의 몸을 바치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땅에 내동댕이치듯 떨어져 뒹구는 순간 무서운 소리가 났다. 추락의 순간 용아를 당겨 품에 안은 남자가 팔을 세워 모든 충격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 냈다.

시야가 다시 어지럽게 흔들렸다. 남자의 품에 안겨서도 강렬한 충격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충격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용아를 안은 단단한 몸은 흔들림 없이 소년을 품에 가두고 있었다.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태자 전하……!”

추락한 충격의 여파로 머리가 웅웅 울렸다. 쿵쿵쿵 무섭게 뛰는 심장 소리로 외부에서 부르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당황해 굳은 뒷머리와 얼굴로 커다란 손이 소년을 집어삼킨 겁을 풀어 주듯 가볍게 문질러 왔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지.”

윤제의 낮고 낮은 저음이 웃음을 품고 부드럽게 울렸다.

“……전하…….”

용아는 그제야 자신을 안고 뒹군 게 태자라는 걸 깨달았다. 소년은 낙마하는 자신을 안고 모든 충격을 몸으로 받아 낸 남자를 초점을 잃은 눈으로 바라봤다.

머리가 아직도 멍했다.

태자가 자신 때문에 말에서 몸을 던졌다는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제아무리 대단한 일족이라, 황가의 적통이라 해도 말에서 떨어지고 괜찮은 사람은 없었다.

“괜찮느냐.”

정지된 시간에서 풀려 느릿느릿 자신을 올려다보는 용아를 향해 윤제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용아는 안고 있던 제 몸을 놓아주고, 몸을 일으키는 태자의 팔과 몸에 허락도 구하지 않고 손댔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 얼굴을 본 윤제가 위로하듯 안심을 시키려는 듯 말했다.

“나는 괜찮다.”

“말, 말에서 떨어져서 괜찮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정말 괜찮아.”

겁에 질려 하얗게 언 소년의 얼굴을 쓸며 윤제가 자신은 정말로 괜찮다는 뜻을 전하고자 웃었다.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말에서 뛰어내려 온 사내들의 발소리가 바쁘게 이어졌다.

“……전하……!”

“어.”

왕공 공자들이 태자의 뒤로 다가서며 분주하게 말을 쏟아 냈다.

“괜찮으십니까.”

“비전하는 괜찮으신 겁니까.”

“둘 다 괜찮다.”

용아는 여전히 희게 질린 얼굴이었다.

“말에서 떨어졌어요.”

소년이 곧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멍하니 웅얼거렸다.

“괜찮다니까.”

윤제가 다시 한 번 말했다. 태자의 곁에 붙어 소양군과 진양군이 소년을 안고 구른 몸을 빠짐없이 살폈다. 어디 부러진 곳 없고, 잘못 터져 나간 곳도 없었다. 달리는 말에서 스스로 몸을 내던지고도 괜찮다 오만하게 말하는 남자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윤제는 용아의 차게 굳은 뒷덜미와 뒷머리를 열이 오르도록 몇 번이고 쓸어 주었다. 얼어붙은 소년은 좀처럼 상심한 눈썹을 펴지 못했다. 잔뜩 굳어서 저를 반쯤 안다시피 하고 있는 윤제의 팔에 붙어 꼼짝하지 않았다. 걱정과 두려움과 겁으로 범벅된 어린 얼굴이 남자를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바라봤다.

“아프죠…….”

용아는 자신이 말하고도 바보 같은 말이다 싶었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에는 순수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아프긴 하지.”

윤제는 다시 한 번 놀란 소년의 뒷머리를 쓸어 줬다.

“휴, 너무 놀라서 애 떨어지는 줄 알았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야겠다. 용공자, 어디 다친 데 없지? 괜찮은 게지?”

사고가 있었으니 여기서 그만 정리하자는 눈짓들이 오갔다. 주인이 뛰어내려 기수를 잃었음에도 태자의 말은 영특한 녀석이라 홀로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소년의 말도 부지불식간에 허공으로 날아간 제 주인을 걱정하며 곁을 배회하고 있었다.

용아가 흙을 털고 일어나 헐떡이던 숨을 가라앉힌 후에야 푸르릉, 부드러운 소리를 퍼트려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영양군이 태자의 말을 데려오고, 횡양군이 소년의 곁을 살피는 복아를 챙겼다. 복아에게 남아 있던 끊어진 고삐를 살피던 그가 멈칫했다. 다가오던 영양군 또한 횡양군의 시선 끝에 눈길을 주었다가 기묘한 얼굴이 되었다.

너스레를 떨며 놀란 용아를 달래어 주던 소양군이 묘한 뒷모습들 곁으로 갔다.

횡양군이 복아의 끊긴 고삐를 다가온 얼굴에게 말없이 보여 줬다. 한쪽 끝은 가죽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최대치로 늘어지다 끊겨 있었지만 반대편 끝은 날카로운 것이 잘라 낸 것처럼 단면이 매끈했다.

세 남자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소양군은 끊어진 복아의 고삐를 해체해 재빨리 품속에 챙기며 제 말에 매어 둔 짐 안에서 여분의 끈을 꺼내 복아에게 고삐를 대신할 수 있게 묶어 주었다.

“태어나서 말에서 처음 떨어져 봐요.”

뒷정리를 하는 사내들 사이에 서 있던 용아가 불쑥 고백했다.

“뭐어?”

소양군의 엄중하던 얼굴이 황망함으로 깨어졌다. 그가 데려다 주는 복아를 받으며 용아가 의아한 시선을 올렸다. 낙마해 놀란 어린 얼굴에 평소 잘 드러나지 않던 감정이 솔직하게 새어 나왔다.

말에서 처음으로 떨어진 게 뭐가 잘못된 거냐는 순진한 물음이 당황한 얼굴에 한가득이었다. 말 타는 걸 배우며 말에서 안 떨어져 본 이가 없었다. 소양군도 영양군도 횡양군도 진양군도 순식간에 침침한 얼굴이 되었다.

“용공자, 너는 역시 버릇이 없어.”

진양군이 솔직한 소년의 얼굴에 대고 불만을 토했다.

“……?”

용아가 황망한 얼굴로 진양군을 올려다봤다. 왜 갑자기 시비냐는 표정이었다. 말을 타다 낙마하는 것은 큰일이지만, 지금껏 말 타면서 한 번도 안 떨어져 봤다는 것은 대단히 오만한 말이었다. 실수라도 다들 말에서 한 번쯤 미끄러져 내리잖아? 모두의 얼굴에 울컥한 외침이 떠올랐다.

“그랬냐.”

단 한사람 윤제만이 소년의 충격에 동의해 주었다.

“네.”

용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사내가 놀란 소년을 다시 위로했다. 저희들끼리 동조하고 위로하는 둘을 네 남자가 비스듬한 얼굴을 바라봤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꾸미지 않으면 낙마 할 일 없는 대단한 둘은 시기 어린 시선을 이해 못하는 듯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충격이 조금씩 가시는 소년의 얼굴에 그런 물음이 떠 있었다.

낙마는 큰일이잖습니까.

소년을 위로하는 사내의 얼굴에는 오만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

말에서 떨어질 일이 뭐가 있어?

소양군은 짜증으로 구겨진 얼굴을 펴지 못하며 뒷정리마저 하고 어서 가자고 괜히 재촉을 했다. 진양군과 횡양군은 말이 없었고, 영양군은 나는 말 타는 것 배울 때 하루동안 세 번도 말에서 떨어졌다고 투덜댔다.

“왜요…….”

항상 어른스러운 얼굴이던 용아가 순진한 소년의 얼굴로 의문을 내뱉었다. 약 올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상했다.

“말을 잘 못 타니까!”

영양군이 왈칵 소리쳤다. 그의 곁에 있던 세 친우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해 주었다. 용아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얼굴이었다. 소년과 둘만 남은 윤제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이었다.

“왜 화를 내죠.”

“글쎄.”

윤제는 평상시 얼굴로 돌아온 용아를 다시 한 번 다독여 주었다. 괜찮다, 말하며 용아 역시 말에서 떨어진 충격을 전부 받아 낸 윤제에게 걱정의 말을 건넸다.

두 사람의 사이가 제법 좋아 보였다.

잠시 가벼운 투덕거림을 하기도 했지만 첫 낙마의 충격에서 용아는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평소보다 훨씬 더 신중하고 빠르게 회궁이 이루어졌다. 소년을 영화대 앞까지 극성스러운 형님들처럼 친히 데려다준 사내들은 태자의 초대를 받는 형식으로 동궁 금당대로 향했다.

소양군은 금당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전각의 모든 문을 닫게 했다. 그는 황가 종실 외의 인물을 쫓아 버린 후 품 안에 가지고 있던 복아의 고삐를 탁자 위에 내어놓았다.

툭.

금당대 안은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누굴까.”

영양군이 아까 제대로 살피지 못한 깔끔하게 잘린 단면을 손으로 만져 살피며 말했다. 소양군과 영양군의 시선이 진양군에게로 닿았다.

“나를 의심하는 거냐.”

진양군은 평소 소년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툭하면 언성을 높여 별것 아닌 것으로 실랑이를 했고, 동궁 후원에 있어야 할 태자비가 바깥출입을 하는 것에 대해 늘 걱정을 빙자한 시비의 말을 건넸다. 더군다나 오늘 일꾼에게서 말을 받아 일행이 있는 곳으로 데려온 것이 바로 진양군이었다.

“평소 용공자와 자주 다투었잖아.”

소양군이 가볍게 말을 건넸다

“용공자 말버릇을 봐라.”

“왜 그랬냐.”

진양군의 말에 영양군이 은근 몰아 갔다.

“나 아니야.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내가 했다는 증거라도 있냐?”

“오늘 네가 말들을 데려왔고. 늘상 용공자가 말을 잘 타서 버르장머리 없다고 네가 뒷담화도 가장 많이 했고. 곧잘 싸웠으니 둘 사이 감정도 좋지 않고. 말싸움을 하면 중재해 줄 때까지 어찌어찌 버티긴 한다만 네가 만날 졌잖냐. 용공자랑 말다툼할 때마다 솔직히 네가 다 진 거야. 그러니까 한 번쯤 버릇 고쳐 줄 셈으로 그랬을 수도 있지. 솔직히 말해라. 우리끼리밖에 없잖아.”

“나 아니다.”

진양군이 단호히 부정했다.

“그만해라. 용공자와 은원이 있거나 그에게 목적이 있어 위협을 가하려는 게 한둘이냐. 진양군이 표면적으로 용공자와 가장 싸움이 잦았지만 그야 전부 애들 장난이지. 태자비가 전하와 말 타러 다닌다는 건 알음알음 소문난 것이고, 인간 같지 않은 전하보다야 말만 제법 타는 태자비를 위협해 겁을 주는 게 훨씬 쉬우니 황실과 사이좋지 않은 이들은 모두 용의선상에 오르는 게 아니겠나. 지난해에 소동으로 끝났지만 없어진 고대 황실을 숭상하고, 지금의 황실을 부정하는 사이한 무리들이 황궁 담을 넘으려다 실패한 일도 있었잖아. 올해로 용공자가 열네 살이 되어 제북에서 장군부의 전통에 따라 태자비가 홍문에 들어야 하니 황실 측에 꾸준히 태자비를 제북으로 보내 달라는 요청도 있다 들었다. 양측 협의가 되지 않으니 그쪽에 유리하도록 이쪽에 흠집 내기를 하려고 이런 일을 벌였을 수도 있지 않나? 어쩌면 우리들 중에 있을 수도 있지만, 찾아보면 적은 많다.”

횡양군의 말에 윤제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러고 보니 용공자가 엄청 거물이군.”

“태자비 전하가 아니시냐. 뿐만 아니라 시집 온 태자비 중에서 대가주 가문의 출신이라 제북에서도 높으신 분이지.”

소양군와 영양군의 현실을 짚는 말에 진양군이 덧붙여 말했다.

“아무튼 나는 아니다.”

진양군 본인을 제외 한 이들이 웃음을 흘렸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전하.”

“물러가옵니다.”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전하.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소양군과 영양군, 횡야군이 진양군만 남기고 금당대를 나섰다. 태자는 말없는 끄덕임으로 세 사람을 배웅했다. 둘만 남은 금당대 안은 이전보다 더 깊은 적막에 감싸였다.

“앉지 그러냐.”

침묵이 지겨워질 즈음에야 윤제가 자리를 권했다.

“나 아니오.”

진양군이 선 채로 말했다.

“다들 너인가 의심한다.”

윤제는 불손한 악당처럼 웃으며 친우의 말을 받았다. 탁자에 놓여 있던 서편을 펼쳐 시선을 고정한 채 떠드는 게 어쩐지 성의 없어 보였다.

“나 진짜 아니야.”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데, 자꾸 그러니 의심스러워지려 한다.”

“나한테 뭘 시키려고 이러는 거요?”

진양군의 말에 윤제가 보던 것을 옆으로 치웠다. 태자가 손짓으로만 다시 자리를 권했다. 진양군이 한숨을 내쉬며 못 이기는 척 태자의 앞자리에 앉았다.

“진범을 찾아오면 될 것 아니냐.”

“귀찮은 건 꼭 나를 시키시지.”

“너만 시키는 건 아니다만, 수고해라.”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낮고 은밀했다. 태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여유가 있었고, 진양군은 귀찮은 걸 떠맡았다는 듯 얼굴이 구겨졌다.

“가 보겠습니다.”

윤제는 떠나는 진양군을 향해 선선히 끄덕여 줬다. 태자에게 시선을 건넨 진양군은 상대의 관심 없는 태도에 더 말 붙이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전각 밖으로 나온 얼굴에 귀찮음과 짜증으로 오만상이 떠올랐다.

진양군은 당금 황제께서 사랑을 하는 아들을 위해 해마다 친히 보강을 명해 황성에서 가장 아름답다 칭송 받는 금당대를 불손하게 노려보다 성큼성큼 걸어 떠나갔다. 금당대 권역을 나온 진양군의 곁으로 재빨리 진군왕부의 태감이 붙었다. 주인 홀로만 늦게 나온 것이 걱정 되었는지 순한 얼굴의 태감이 분주히 말을 건넸다.

“늦으셨습니다.”

“별일 아니다. 소군왕부, 영군왕부, 횡군왕부에 사람을 붙여. 세 공자를 살펴라. 최근 행적, 특히 어제오늘 오간 곳 드나든 곳 대해서 상세히 알아보도록 해. 태자께도 사람을 붙여. 금당대 태감들에게 내 행적을 흘리고, 태자 전하의 동향을 파악해 와. 왕부로 고운을 불러들여라.”

“명을 따르옵니다.”

보폭이 큰 것이 주인께 중한 일이 생긴 듯했다.

“……영화대 앞으로 가자.”

저 혼자 앞서 걷던 진양군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주인의 뜬금없는 명에 순한 인상의 공공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태자비 전하께서는 아직 연치 어리셔서 알현을 할 수 없으시옵니다.”

“안다. 그냥, 그 앞으로 가자는 거다.”

단중이 실눈을 동그랗게 떠 주인을 바라봤다. 왜요? 물음이 강하게 서린 시선이었다.

“거기 앞이 풍경이 좋잖아.”

“영화대 앞이요?”

나쁜 경관은 아니었다. 허나 풍경 좋기로는 동궁 금당대와 해원이 최고라 했다. 단태감이 아련한 움직임으로 금당대를 돌아보았다.

“운동 삼아간다 생각해.”

“운동 좋지요.”

진양군의 앞서 걷는 걸음을 따르며 단중이 허리를 굽실댔다. 단중이 성격 급하게 걷는 주인의 곁을 빠르게 따르며 제가 모 상궁마마와 앞면이 있다 소곤거렸다.

“그런 거 아니다.”

“그런 게 무언데요?”

진양군의 단호한 말에 단중이 순한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범인은 반드시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나게 돼 있어.”

“범인…… 이요?”

오늘 승명원 만남이 평소보다 빨리 파해 무슨 일이 있다는 건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

“헌데 그 범인은 용의주도한 놈이라 다시 나타날 거 같지 않아. 누굴까, 라는 궁금증 보다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이 더 크단 말이지. 범인은 알고 있으면서도 몰랐다. 그러니 확실하게 목숨을 취할 생각으로 일을 꾸민 것도 아니다. 찾아내는 건 귀찮지만 어렵지 않을 터. 어쩐지 찾아내도 소득이 없을 거 같단 말이야. 모 상궁에게 태자비가 어떤지 물어보고 와.”

진양군이 더 빨리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예…… 아? 소인이 모 상궁마마와 앞면이 크게 있다니까요.”

단중이 한참 앞서 걷는 주인을 따르며 꼬드기듯 떠들었다. 진양군은 귀찮은 것을 쫓듯 손을 내저으며 성큼한 걸음을 바삐 이어 갔다.

금당대 안은 침묵이 내리깔려 있었다. 서책에 고여 있던 윤제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고삐로 향했다. 절반은 예리한 것에 잘려 깨끗하고, 절반가량은 힘과 무게를 이기지 못해 끝이 흉하게 늘어져 끊긴 고삐는 인위적인 흔적이 선명했다.

윤제가 유일한 증좌인 고삐를 보고 있을 때, 전각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등우가 소리도 없이 안으로 들었다.

“환아는?”

“진양군께서는 가셨습니다.”

“그쪽에 사람을 붙여라.”

태자의 명에 이미 예상했다는 듯 태감이 머리를 조아렸다.

“예. 하온데. 진양군께서 영화대 앞을 지나 궁을 나가셨습니다.”

등 태감은 익숙한 명을 능란하게 받으며 이걸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로 느릿느릿 고해 올렸다. 성의 없는 손짓으로 탁상 위 고삐를 치우게 한 윤제가 움직임을 멈췄다.

“왜?”

“이유는 소인도 모르겠습니다. 진양군께서는 영화대 앞을 그냥 지나치셨고, 진군왕부의 태감이 영화대로 가 짧게 말을 나누고 갔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아볼까요.”

등 태감의 말에 윤제가 미묘한 얼굴로 답했다.

“용공자가 걱정돼 안부를 물으러 간 거겠지.”

“그렇겠지요.”

등우가 자신도 그리 생각한다는 표정을 건넸다.

“알아봐라.”

“예…….”

“오늘 일에 대해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진양군에게 붙인 이에게 보고를 받으면 내게 곧바로 알리도록 해라. 저녁은 영화대에서 먹겠다. 갈 때 놀랄 때 먹는 환약을 챙겨다 줘라.”

등 태감은 괜히 쓸데없는 말을 더하지 않았다.

“예.”

반듯하게 답을 올리고 돌아서려던 태감은 문을 열려다 멈추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아 윤제가 시선을 던지자, 할 말이 있는 듯한 태감이 얼굴을 낮추었다.

“할 말이 있느냐.”

“제관부에 머무는 일족이 태자 전하를 뵙기를 청합니다. 태자비께서 열넷이 되셨으니 홍문에 들게 제북으로 잠시 보내어 달라는 청을 올리기 위해서인 듯합니다. 어찌할까요.”

윤제가 뭐가 문제냐는 얼굴을 하며 서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무시해.”

짧고 명료한 명이 떨어졌다.

“따르옵니다.”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 했다. 황궁 벽의 눈과 귀가 보고 들은 것들은 알음알음 번져 나가 결국 만인이 알게 되었다.

최근 태자가 태자비의 영화대를 자주 찾은 걸 두고 여러 말들이 오갔다. 둘의 사이가 좋아지려는 것 아니겠는가, 역시 황가 종친 어른들의 말씀대로 정해진 짝에게로 가는구나, 앞으로 동궁의 후궁들은 어찌 되는 것인가. 태자비를 특별히 아끼고 존중해서가 아니라 그저 동궁 안에서 위세를 떨치던 후궁의 곤란함을 즐기는 목소리들이었다.

영화대의 궁인들은 태자가 주인을 자주 찾는 것을 기꺼워했으나 최근 태자의 방문은 석연찮은 데가 있었다. 둘만 곧잘 남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은 징조여야 하는데 대화의 흐름이 걸렸다.

태자는 대부분 태자비를 달래는 듯한 얼굴로 말을 건넸고, 소년은 전혀 설득당하지 않은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태자가 영화대를 자주 찾은 후로, 태자비의 출궁이 완전히 끊겼다. 후일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월주대에 다녀오던 목교는 모여 쑥덕거리는 궁인들의 모습이 이상해 모르는 척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교 언니.”

영화대로 가기 전에 함께 방을 썼던 궁인 아이가 목교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 있니?”

“교 언니. 태자비 전하께서 외출을 하셨을 때 낙마를 하셨다는 게 사실이여요? 크게 다치셨다면서요?”

“비전하께서? 그런 말이 있어?”

목교는 최대한 담담히 말했으나 웃음이 제멋대로 무너져 내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녀를 보는 궁인 아이의 눈이 예리하게 빛나는 것도 목교를 힘겹게 했다.

모장의 얼굴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비전하.”

다정한 부름도 한결같았다.

“말하게.”

수차를 가져다주는 모장의 특별히 비장하지 않았으나 용아는 왜인지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일이 있고, 자신과 관련된 일이었다.

“몸은 괜찮으신 겝니까.”

“멀쩡해.”

찻잔을 든 손이 멈칫했다. 그러나 전혀 짚이는 게 없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모장의 얼굴에 숨겨져 있던 걱정이 진하게 배어 나왔다.

“비전하, 낙마를 하셨다면서요.”

용아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렸다.

“…….”

용아는 다친 곳 하나, 아픈 곳 하나 없어 자신이 낙마를 했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걸 그제야 깨달았다. 용아가 엉뚱한 충격에 멍해져 있을 때 모장이 낮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며칠 전부터 동궁 안에 비전하께서 낙마하셨다는 말이 암암리에 돌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알려질 줄 알았다. 그런데 낙마했다는 것조차 잊었다. 방금 전 받은 충격을 용아는 새삼스레 다시 곱씹었다. 추락의 순간은 생생했다. 자신의 무신경함이 놀랍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에 잊었나 싶어 인간의 간사함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어디서 말이 나왔을까.”

충격은 충격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소년의 물음에 곧장 답이 돌아왔다.

“해원과 융각이옵니다.”

“응?”

“말이 퍼지는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모장의 걱정 어린 말에 용아는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양제가 소문을 내었다 말하고 싶은 건가.”

“주인의 허락 없이 소문이 이리 빨리 날 리 있겠습니까.”

“왜지?”

소년이 이해되지 않음을 표했다.

“비전하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태자 전하께서 영화대에 자주 찾으시어 어울리시니 그를 방해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겨우 그것 때문에?”

“정인의 애정을 빼앗긴 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모장이 인자한 어머니처럼 알려 주었다.

“하지만 양제는 정인을 빼앗기지 않았어.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낙마했다는 소문을 내어 양제에게 무슨 이득이 있지? 어떤 말이 돌든 태자께선 이곳에 올 일이 있으면 오실 분이지 세간의 시선 때문에 주저하실까. 만약 양제가 이 소문을 내었다면 제 발에 제가 걸린 격이지.”

말을 하는 소년의 얼굴은 서늘하기까지 했다.

“그렇사옵니까.”

모장은 여전히 의아한 기색이었다.

“이 소문은 양제를 힘들어지게 할지도 몰라. 동궁 안에서 태자비를 가장 해코지하고 싶어 한다고 의심 받는 이가 누구인지 안다면 양제는 이 건에서 발을 빼야 했다.”

용아가 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년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소문의 근원지가 해원과 융각이란 것이 의아했다. 모장이 나도는 말에 대해 알아볼까 의중을 여쭈었다.

“내가 알 게 뭐야.”

용아가 냉정히 거절하며 차를 들었다.

“명을 따르옵니다.”

모장은 그녀의 어린 주인이 상상 이상으로 차가운 성정이거나, 권력 다툼에 능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귀한 이가 갖추어야 할 훌륭한 덕목이었기에 모장은 몹시도 기뻐했다.

황궁 안에 새로운 소문이 피어올랐다.

영화대 태자비가 외출하여 낙마한 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말고삐에 손을 댄 것이며, 범인은 양제라는 말이 떠돌았다.

태자비가 낙마하였다는 것은 완전한 사실이 되어, 정국이 뒤집혔다. 범인에 대한 의혹은 분분하였지만 그것 또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말들이 빠르게 오고 갔다.

만약 양제가 태자비를 해하려 한 것이라면 국법에 따라 엄히 다스려야 한다 주장하는 이들과 황궁 내궁에 있어야 할 태자비가 사사롭게 출궁하였으니 이대로 좌시하여서는 안 된다 주장하는 이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정전 안은 고요하다 못해 썰렁했다. 가장 상석의 황제. 정전 우측을 채우고 있는 조정의 대신들, 좌측 상단을 차지한 왕공 대신들과 왕공의 자제들, 좌측 하단에 위치한 제북 출신의 제관부 인물들이 조용하고 험악한 시선만 주고받고 있었다.

침묵 속에 차가운 적의만 쌓여 갔다.

“폐하.”

미동 없는 왕공부와 제관부를 바라보던 승상 맹방이 결국 가장 먼저 중앙으로 나가 황제를 찾았다. 황제의 상석과 왕공 대신들 사이에 놓인 보좌에 앉은 태자가 앞으로 나선 맹방의 얼굴을 쏘아봤다.

“신(臣), 맹방 아뢰나이다.”

정전 안 모든 시선이 맹방의 숙인 머리로 쏟아졌다.

“동궁에 있으셔야 할 태자비께서 사사로이 출궁을 하시어 말을 타다 낙마를 하셨다는 말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장차 국모가 되시며, 앞으로 후궁을 다스리셔야 할 내궁의 안주인이 해서는 안 될 경솔한 행동이 아니옵니까. 앞으로 이와 같은 단정치 못한 경솔한 행동을 예방하려면 태자비께 엄벌을 내리셔야 하실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승상.”

“예, 태자 전하.”

“태자비가 사사로이 출궁하는 것을 승상께서 보셨는가?”

“전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사옵니까. 이미 수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떠드니 부끄럽다 속이셔서는 아니 되실 것입니다.”

맹방의 엄격한 말에 윤제가 잘게 웃음을 퍼트렸다.

“승상. 수많은 입들이 말하면 본 적 없는 것도 그대에게는 사실이 되는가? 그럼, 이 사람은 양제의 노예겠구려. 동궁전 궁인들은 태자가 양제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니 노예나 다름없다며 입이 닳도록 떠들지 않던가. 승상은 새로 들인 열일곱 번째 첩, 아니 열여덟 번째던가? 아무튼 새 첩의 노예시고 말이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피차 각자 집안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허나,”

맹방과 태자의 대화가 오갈 때 제북의 인사가 옆으로 나섰다.

“태자비께서는 황실에 혼인을 온 것이지 감금당하려고 오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장군부는 태자비 전하께서 시집을 오셨지, 볼모로 잡혀 온 줄 몰랐는데요. 저희가 모르는 사이 태자비께서 볼모가 되셨습니까.”

“볼모라니! 언제 이 사람이 볼모라 하였소?”

“제북 장군부 출신이 말을 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말 타는 게 무엇이 그리 단정치 못하단 말입니까. 고작 말 탔다고 엄벌에 처하라니? 태자비께서 장차 내궁을 다스릴 것이나 아직 연치 어리시니 자유롭게 일상을 보내도록 폐하께서 배려해 주신 줄 알았습니다. 폐하의 배려 덕분에 아직 대외적인 일정을 치르시지 않아 지금껏 일족조차 대면 못 하신 분인데, 말 타는 것조차 제한한단 말입니까? 아예 안전을 위해 사지를 묶어 놓고 있으라 하시지요.”

“내 언제 그리 말하였소! 말을 삼가시오! 사지를 묶다니! 태자비께 어찌 그리 무례한 언사를 한단 말이오! 말을 타는 것은 위험한 행동으로 태자비께서 다치실 수 있으니 염려가 되어 한 말이 아니오?! 그리고 태자비께서 비록 장군부 출신이라 하나 이곳에 시집을 오셨으면 중경과 황궁의 법도를 따라야 할 것이오.”

“황실 법도에 태자비가 말을 타면 엄벌에 처해야 한다 쓰여 있습니까?”

“그리 쓰여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기씨를 가지셔야 할 태자비께서 말을 타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 아니오. 태자비께는 앞으로 황실의 후계를 책임지실 막중한 의무가 있으시오. 황실의 후사와 태자비께 혹여 잘못이 생기면 그대가 책임지실 것인가?!”

“태자비께서 황실 후사를 잇기 전에는 말도 못 탄단 말입니까.”

“황실의 후사를 잇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이 어디 있소! 제관부의 대인은 후사를 잇는 것을 가벼이 보시는 것이오?! 그는 곧 제북이 황실을 하찮게 여기는 것 아니겠소?”

“황실과 중경의 법도란 게 아이 낳기 전에는 말도 못 타는 건 줄 내 미처 몰랐습니다. 송구합니다. 중경 처자들은 애 낳기 전까지 말 타는 일 없는 가엾은 인생들인가 봅니다. 안타깝습니다. 말 타기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승상께서는 말 타기 같은 위험한 행동은 하시지 않겠지요. 아, 맹승상께서 아이 낳을 일이 없으시니 본인은 타시옵니까.”

“지금 이 사람을 우롱하시는 겐가!?”

맹방이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제관부의 대인을 향해 소리쳤다.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삿대질을 하는 승상을 향해 제관부의 인사가 삼엄한 시선을 보냈다. 맹방이 급히 걸음을 뒤로 물렸다. 우측의 조정 대신들이 언제든 뒷걸음을 칠 것처럼 자세를 취했고, 제관부의 인물들 앞쪽에 배치 된 왕공 대신들이 불쾌한 기색을 퍼트렸다.

탕!

상석에 앉은 황제가 팔걸이를 거세게 내려쳤다.

“짐과 힘겨루기를 하고 싶으신가.”

정전 안의 모두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송구하옵니다, 폐하.”

“송구하옵니다, 폐하. 소신(小臣)은 그저 태자비께 말 타기 하나 허락 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맹방과 말다툼을 하던 이가 숙인 몸을 기는 것처럼 앞으로 가까이 움직여 가며 고했다.

“승상의 말이 거친 데가 있으나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말 타는 것을 제한할 것까지는 없으나 말을 타는 것은 위험한 일이 맞잖은가. 말을 타다 다치는 것을 충분히 염려할 수 있지 않나.”

“그것과 관련하여 아뢰 올 말씀이 있습니다.”

황제의 은근한 두둔에 기뻐하던 승상의 얼굴이 금세 굳어 들었다.

“무엇인가.”

황제와 왕공 대신들 또한 표정이 잦아들었다.

“제북에서 청하옵니다. 황실에서 태자비 전하의 안위를 염려하시나 소상히 챙기기 어려우니 제북의 무사를 태자비 전하의 호위로 보내는 것은 어떠시옵니까. 태자비께서 제북에 계실 때 어려서부터 함께 커 온 호위가 있으니 그들을 중경으로 보내 주겠다는 전언이옵니다.”

제관부의 말에 정전 안이 얼어붙었다. 일시에 적막이 깨어지며 중경에 군사를 보내려는 제북의 태도에 불쾌감을 토로하는 말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탕!

황제가 다시 팔걸이를 험악하게 내려쳤다.

“모두 자중하시오.”

상석에서 내리는 목소리에 앞으로 나섰던 제관부의 인물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는 물론 왕공 대신들까지 뒷걸음질을 쳤다. 저만큼 물러나 있던 조정의 대신은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청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송구하옵니다, 폐하.”

황제가 조아리는 머리를 향해 무관심한 얼굴로 떠들었다.

“최근 제북은 해월과 협약이 깨져 국경 일대에 분쟁이 있지 않나?”

“태자비 전하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있겠사옵니까.”

“짐의 며느리는 짐이 지켜 줄 터이니, 제북은 해월과의 분쟁을 한시 바삐 정리해 주기를 바라네. 장군부는 국경 문제에 최우선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폐하.”

“짐은 최선을 믿지 않는다네. 제북은 언제쯤 해월을 국경에서 완전히 몰아낼 것 같은가.”

“여름이 오기 전까지 분쟁을 정리할 것이옵니다.”

“여름 전에 해월에서 보내온 조공품을 받기를 기대하겠네. 수고해 주게. 오늘은 여기서 파하도록 하지.”

황제는 당신이 할 말만 던지고 몸을 일으켜 가 버렸다.

“퇴청!”

정전을 정리하는 태감이 대신들을 향해 소리 높였다. 웅성웅성, 정전 안에 뒤숭숭한 소리가 떠돌았다. 윤제는 전각을 나서자마자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좌공공은 등우가 말을 전하기도 전에 집무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며 태자를 모셨다.

태자가 안으로 들자 황제가 손짓으로 주위를 물렸다.

“새아가는 괜찮은 게냐?”

“괜찮습니다.”

“아가가 정말 낙마를 했어? 낙마를 한 것은 너라며. 아이는 말을 곧잘 탄다 하지 않았더냐.”

황제가 불만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하문했다.

“누가 손을 쓴 사고였습니다.”

“손을 써?”

“태자비의 기마 능력과 저희들이 다니는 길을 알고 있는 자의 소행입니다. 평길에서 고삐가 끊어졌다면 낙마할 리가 없는 실력입니다. 가파른 내리막이 있는 언덕 쪽으로는 며칠에 한 번만 가는데 그것까지 계산하고 고삐를 잘라 둔 것 같습니다. 사고의 내용보다 소문이 너무 소상히 나는 쪽이 의아합니다.”

윤제가 방금 전 있었던 불쾌한 일을 떠올리며 눈썹을 잔뜩 좁혔다.

“왕공 자제의 짓이라. 윤아, 너 요즘 친구들하고 사이가 나쁘냐?”

황제는 불만과 걱정을 한 게 언제였냐는 듯 장난 많은 소년처럼 말했다.

“부황.”

“내게 왜 거짓을 고했느냐.”

황제가 다시 표정을 바꾸었다.

“거짓은 아닙니다.”

윤제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답했다.

“고해 봐라.”

“태자비 말의 고삐가 끊어져 낙마하려 하기에 소자가 말을 버리고 뛰어내려 태자비가 다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속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리지 않으려 한 의도는 분명히 있었다. 윤제가 머뭇거리는 사이 황제가 태자의 말을 받았다.

“그래서 이 애비에겐 네가 낙마하였고, 태자비 말에 이상이 있어 일찍 들어왔다 했던 거로군. 증좌는 있느냐. 범인과 배후는?”

“환아가 찾고 있는 중입니다.”

“진양군의 무얼 믿고? 그는 아니라는 확증이 있느냐.”

황제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흘렀다.

“저희 안에서 가장 유력한 범인이라 열과 성을 다해 진범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찾을 수 있을 듯하냐.”

“범인은 찾을 수 있을 테지만 배후까지 밝혀질지는 모르겠습니다. 범인과 배후를 엮을 증좌가 없습니다. 상대는 저희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표면상에 보이는 위협이 목적이 아니라 분란을 일으키는 게 목적으로 보입니다. 상대가 진심으로 숨어들면 저희는 진범의 잘못조차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고생하거라.”

황제가 손을 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물러가옵니다.”

“윤아.”

“예, 부황.”

“태자비를 잘 다독여 주도록 해라. 정전에서 말이 나온 이상 짐이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으니. 한동안 태자비에게 서운한 일이 많을 것이다.”

황제의 말에 예를 표하고 나서려던 윤제가 입을 열었다.

“용아를 괴롭히려 하십니까.”

“요즘 서로 이름도 부르고 그러느냐.”

황제가 눈을 접어 웃으며 딴소리를 했다.

“부황께서도 겪어 보시면 아실 테지만 조금 괴롭힌다고 받아 주는 성격이 아닙니다. 원했던 반응이 아니라고 너무 핍박 마시고, 어린 소년의 치기요 자존심이니 적당히 눈감아 주십시오.”

“새아기가 제법 맹랑한 모양이지?”

“물러가옵니다.”

윤제는 대답 않고 반듯하게 예를 올리고 돌아섰다.

“있느냐.”

전각을 나서는 태자에게 예를 올린 후 안으로 들던 좌공공이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재촉했다.

“찾으셨나이까.”

“해월에 가 있는 게 누구였지?”

황제의 물음에 좌공공이 작게 웃었다.

“안숙이옵니다. 안숙에게 자금과 사람을 보내올까요.”

“기분 나쁘게 왜 웃느냐.”

“태자께서 방금 나가시며 해월의 안숙에게 자금과 사람을 보내 주고, 폐하께 청을 올리라 하셨습니다. 명을 준비해 두었으니 허락을 내려 주시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어찌할까요.”

황제가 철없는 소년처럼 험악하게 웃었다.

“그리하라.”

“명을 따르옵니다.”

좌공공이 머리를 조아리며 웃는 얼굴로 고했다. 맘이 잘 맞는 부자를 칭찬하는 듯한 미소가 눈에 유독 걸렸다. 황제는 한소리 하려다가 만다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무성의한 손짓에 좌공공이 예를 올리고 물러나려 했다. 물러나려는 그를 황제가 멈춰 세웠다.

“좌첨.”

“예.”

“음 상궁을 들라 하고, 영화대에 가겠다 알리게.”

황제의 명에 좌공공이 멈칫했다. 태감은 깊이 허리를 숙여 답하고 몸을 돌려 전각을 나섰다. 황궁 안에 낯선 파란이 불어오고 있었다.

황제의 집무실을 나온 윤제의 걸음이 더뎠다. 우선 동궁으로 향하고 있는 태자에게 등우가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태자비께서는 태후전에 드셨다가 황후전에 듭시어 영화대에 계시지 않으시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진양군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분 공자 모두 금당대를 찾으시려다가 전하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시어 영군왕부로 가 기다리시겠다 하셨습니다.”

윤제가 동궁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영군왕부로 가자.”

“예.”

돌아서는 사내의 등에 고민이 어려 있었다. 상황이 기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건에 대해 퍼트리는 소문의 진원지가 남자를 망설임에 빠트렸다.

황도, 중경 안에서도 사치하기로 이름 높은 영군왕부는 유명세답게 요란스러운 호화로움을 두르고 있었다. 황궁의 것과는 완연히 다른 화려함을 지닌 전각 안으로 윤제가 들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군왕부의 궁인이 예를 올리고 문을 열었다.

“전하 오셨습니까.”

커다란 탁자 앞에 둘러 모여 말을 나누던 네 남자가 열리는 문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윤제는 손을 내젓고, 의자에 앉는 것으로 예를 물렸다. 몸을 일으킨 네 남자는 제 각각 예를 올리고서야 제자리에 앉았다.

소양군이 말을 쏟아 냈다.

“소문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승명원 안에서의 일은 우리만 알고 있는데 단 며칠 만에 태자비께서 낙마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실제로 낙마한 충격을 받은 것은 전하라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걸 보아, 이 안에서 말이 새고 있는 건 아닙니다. 첫 소문은 일을 꾸민 쪽이 흘린 소문을 누군가 의도적으로 널리 퍼트렸을 수도 있고, 단순히 전하께서 비전하를 자주 찾으시는 것으로 유추해 태자비께 흠집을 내려고 소문을 낸 걸 수 있어 보입니다. 어느 쪽이든 좋은 뜻으로 퍼트린 소문은 아닐 겁니다. 단순히 태자비께서 낙마했다, 라는 소문에서 그치지 않고 태자비의 고삐가 끊겨 있었다는 소문으로 바뀐 것은 애초 목적이 태자비 전하였다는 뜻일 겁니다. 후자, 최근 퍼진 소문은 확실히 일을 꾸민 이들이 퍼트린 겁니다. 전하가 대신 낙마하였다는 건 모르나 태자비께서 고삐가 끊어진 탓에 낙마했다는 걸 정확히 알 이는 일을 꾸민 쪽뿐 아니겠습니까.”

“나도 그리 생각한다.”

“현재 알려진 사실을 유추해 보았을 때 소양군의 말이 합당해 보입니다.”

영양군과 횡양군이 동의를 표했다.

“첫 번째 소문이 시작된 것은 동궁 궁인들 사이에서부터입니다. 최초 유포자를 찾지 못했으나 그쪽에서부터 의도적으로 말이 퍼져 나온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동궁 후원의 세 분이 자주 만남을 가졌는데 주로 나온 이야기가 태자께서 태자비를 유난히 찾으시는 것이었다 합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태자비께서 말 타시다 낙마라도 한 게 아니겠냐는 주장입니다. 말 탄다는 사실만으로 낙마했다는 걸 추측하다니 양제나 소훈께서 대단한 안목과 혜안을 가지셨습니다.”

진양군의 비꼬임 가득한 말이 고요 속에서 울렸다.

“으흠.”

“음.”

“…….”

소양군과 영양군이 목을 울려 진양군에게 눈치를 줬다. 횡양군은 시선을 피해 버렸다.

“양제는 아니다.”

말없던 태자가 단호히 말했다. 그의 흔들림 없는 태도에 진양군은 물론, 나머지 셋도 침묵한 채로 태자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양제는 그럴 이가 아니다. 그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이가 드물어.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소훈이나 봉의라면 모를까. 양제의 집안은 한미해 바깥에 사람 쓸 가족조차 없다. 그에 반해 소훈이나 봉의는 권력을 쥔 부친이 있으니 바깥에도 얼마든 부릴 사람이 있지.”

네 남자가 태자를 향해 말없는 시선만 계속 던졌다.

“양제가 그럴 이유가 없다.”

윤제가 딱 잘라 말했다.

“없긴, 왜 없……!”

영양군이 태자께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려 했다. 소양군이 재빨리 친우의 옆구리를 걷어차 입을 막으려 했다. 진양군이 옆으로 고꾸라지는 영양군을 받아 주었다. 진양군의 팔을 잡고 버틴 영양군이 소양군을 발로 걷어차 똑같이 갚아 주며 태자 쪽으로 돌아보았다. 뒤로 나자빠지려는 소양군을 횡양군이 붙잡는 사이, 윤제가 드물게 도전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영양군에게 할 말 있으면 해 보란 시선을 건넸다.

“윤공자. 태자께서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황궁 안에서 양제가 제일 동기가 분명한 인물이다.”

횡양군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 소양군이 영양군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윤제가 소양군을 떨쳐 주며 영양군에게 말했다.

“계속해라.”

“먼저 묻자. 윤공자. 태자께서는 후사는 어쩔 생각이신가.”

윤제의 얼굴에 모호한 감정이 흘렀다.

“…….”

영양군이 침묵하는 태자에게 실소를 가득 담은 표정을 건넸다. 진양군이 팔꿈치를 슬쩍 휘둘러 영양군의 불온한 얼굴을 말없이 꾸짖으려 했다. 횡양군도 친우의 안위를 걱정하는 폭행에 동참했다.

“황가 적통은 제북에서 보낸 정식 신부가 아니면 후사를 못 보는 게 현실 아닙니까, 태자 전하. 수백 년, 수 대를 이어 오는 동안 그래 왔습니다. 태자께서는 양제가 황실이나 제북의 아주 먼 후손이 아닐까 의심하는데, 그것참 대단한 헛소리라 생각하오. 본왕은 그것은 절대 아니라 생각한다. 태자께서 양제를 후궁으로 들인 첫해에는 거의 매일 밤 시침 들게 했다는 건 알 사람 다 아는데 만약 태자의 기대대로 양제가 황실이나 제북의 먼 후손이 맞다면 벌써 태자의 자손이 열둘은 더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소!”

영양군은 좌우에서 다가오는 팔과 손을 단박에 떨치며 말을 이었다.

“영공자야, 그건 아니지. 태자께서 양제와 알고 지낸 지 겨우 3년 반째인데 애가 열둘은 아니야. 애는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간 지내다 나온다고. 너는 그것도 모르냐. 아무리 많아야 셋이지. 열둘이라니, 사람 과장은.”

소양군이 힐난하는 영양군를 툭툭 팔꿈치로 찍으며 능청스러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열둘이든 셋이든! 중요한 것은 그거다. 태자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 제북에서 보내 온 태자비뿐이오. 황궁 후궁의 승리자는 결국 후손을 보아 다음 제좌를 잇게 하는 이. 태자가 사랑을 주던 사랑을 주지 않던, 용공자가 나이가 차 후사만 보면 무조건 용공자가 승리하는 승부이지. 지금 태자의 후궁이 몇이든 무슨 소용이겠소. 태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 태자비뿐이신데. 태자비는 황후가 되고, 후에는 태후가 될 게 분명합니다. 그걸 막으려면 태자비가 아이를 못 낳게 하거나, 죽이는 수 아니겠습니까. 양제가 태자의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면 벌써 낳았을 텐데 몇 년째 아이는커녕 회임의 낌새조차 없고, 태자비는 점점 자라고 계시니 양제께서 무슨 짓을 꾸민다 해도 이상치 않은 전개 아니오?”

“영공자 말이 틀린 게 없긴 하다.”

진양군이 침묵하는 태자를 한번 보고, 영양군을 향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하. 폐하와 다르게, 태자께서 후궁이 있는 게 이 사람은 늘 의아했소. 괜찮은 거요?”

“부황께서 상관없다 하셨다. 내게 짝이 생기면 다 해결될 거라고 하셨지.”

소양군의 물음에 태자가 답했다. 영양군이 다시 거센 목소리로 말했다.

“그 짝이 태자비 전하 아니야?”

태자는 침묵했고, 진양군과 횡양군은 침묵하는 태자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딴청을 부렸다. 소양군만이 자신의 말에 심취해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제북과 중경은 꽤 다르단 말이지. 제북은 혼전에 남녀 불문 자유롭게 연애해. 서로 그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듯 하더군. 하지만 혼인을 하게 되면 평생 자신의 짝만 보고 산다 했어. 나는 그게 황실 적통들의 혼인과 굉장히 닮아 보였다. 꽤 오래전이기는 한데, 수많은 중경 사내를 맥 못추게 했던 제북 출신의 기녀가 있었다더군. 특히 왕공과 그의 자제들이 열을 올렸는데, 오랫동안 중경 제일 기녀로 이름을 날리다가 목숨 걸고 덤빈 어느 왕공 자제와 결국 혼인하였지. 정식 혼례를 치르고 왕부에 들며 기녀가 말하길 서로 짝이 되었으니 다른 이에게 눈길조차 줘선 안 될 거라 했었다더만. 제북에서는 혼인 전에 무얼을 했든 남자나 여자나 짝이 된 후에 서로 짝만 본다는 게 그때 널리 알려졌지. 왕부의 자제는 그것을 여자의 투기 어린 위협이라 생각한 것 같지만. 신혼 때에는 서로 사이가 무척 좋았지만 왕공 자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버릇 못 버리고 첩을 들였지. 그때 기녀가 남자를 죽일 듯이 굴면서 결국 너와 나 둘 다 죽게 될 것이라 저주를 내려서 이야, 제북 출신 역시 성격 장난 아니로구나. 다들 껄껄 비웃었다잖아. 문제는 여기서부터지. 첩을 들인 후 갑자기 남자의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제북엔 특이한 기화요초가 많아 남자는 여자가 독을 쓴 게 아닌가 의심해 기녀를 죽이거나 해독약을 구하려 새로 첩을 들인 후 처음으로 기녀를 찾았는데 이미 그녀는 피 토하고 죽어 가는 중이었다지. 죽을 때 기녀가 말하길 네가 날 배신했다, 왜 나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냐, 너를 좋아한 걸 후회한다며 죽었다는 거야. 여자가 죽었으니 혹여 사술을 쓴 것이면 남자는 자신은 살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1년도 못 되어 그도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지. 무섭고도 웃겼던 것은, 남자가 죽은 게 저를 저주하고 죽은 기녀가 사라진 슬픔 때문에 병환이 심해져 죽은 것이라는 뒷말이 있었다. 이 일 이후로 한동안 중경 왕공들은 제북 출신을 내원에 들이는 걸 종친 차원에서 반대하거나 막게 됐다고 했거든. 이거 꽤 큰일 아니야? 이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치면, 태자께서 용공자와 아이를 낳게 된 후에는 더는 후궁을 찾아선 안 된다는 거 아닌가. 태자가 태자비를 두고 허튼 눈 팔면 태자와 태자비 전부 죽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 여자만 이상한 거일 수도 있지 않아?”

“아닐걸. 생각해 봐. 너희 부친, 우리 부친, 이쪽 부친, 저쪽 부친, 전부 내원에 처첩이 가득하지. 허나 황가엔 대대로 정후 외엔 없었고, 정치적 혼인조차 더 없었다. 또, 정군왕도 그렇지. 정군왕께서는 제북 출신 군왕비 한 분만 계시고 다른 이에게 눈길조차 안 주시지. 흔히 밤 시중 드는 시비 하나 들이지 않았다 알려져 다른 군왕부 부인들이 얼마나 정군왕비를 부러워하시냐.”

“정군왕비께서는 엄청난 미인이시잖아.”

진양군이 담담히 정군왕비의 미모를 찬양했다.

“그 정도 미인이 아니면 장가가지 않는 게냐. 너, 진짜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는 거 아니냐. 아무튼 이 원칙 대로면 태자께서 지금 거느리고 있는 후궁은 괜찮은 거냔 말씀이오.”

소양군의 말에 진양군은 짧게 인상만 썼다. 태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영양군이 차를 후르륵 들이켜며 냉엄하게 말했다.

“그렇다 해도 결국 태자의 뒤를 이을 후사를 보는 건 태자비이실 테니, 용공자의 승리일세.”

“왜 그리 노친네처럼 후사 타령이냐, 영공자야.”

“양제에게 동기가 분명하단 뜻이다. 나도 양제께서 태자비 고삐를 끊었다 생각하지는 않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또한 양제께서 머리가 있다면 태자비께서 낙마했다는 소문을 내어서는 안 될 일이지. 이렇듯 동기가 가장 뚜렷한 게 자신인 상황에서 고작 태자비의 입출궁을 방해해 보겠다고 자신에게 불리한 소문을 냈다면, 그건 또 다른 의미에서 가여운 분 아니겠나.”

진양군이 영양군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나는 태자께서 도움이 필요한 양제를 우연히 만난 것도 의아했다. 그 넓은 궁에서? 정말 우연일까.”

태자와 마찬가지로 내내 침묵하고 있던 횡양군이 조용히 말했다. 방 안에 지독한 침묵이 깔렸다. 횡양군이 정적 속에서 말을 덧댔다.

“허나 이 일을 꾸민 게 양제는 아닐 거 같아. 그러기에는 소문의 속도가 너무 일사불란해. 항상 동궁에서 말이 나오기 시작하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황궁 곳곳으로 말이 퍼져.”

진양군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을 꾸민 자는 태자비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려 하고, 일을 꾸민 걸 양제인 것으로 몰아가는 듯해. 태자비도 양제도 곤란하게 되셨다.”

태자를 제외한 모두가 동의를 표했다. 자리를 파할 때까지 윤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방 안의 누구도 그의 침묵을 지적하지 않았다.

태자가 자리를 뜬 후, 넷만 남게 되었을 때 난감하게 웃으며 속닥거렸다.

“양제가 태자의 첫정이시지.”

“아직 무슨 짓을 해도 한참 좋아 보일 때야.”

“양제가 미색이 꽤나 훌륭하긴 해.”

“남자의 첫사랑은 무섭지.”

갑작스레 고요해진 방 안에 고민 가득한 숨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서로 눈치를 보는 듯한 허탈함이 담긴 짧은 웃음이 이어지고, 다시 긴 한숨 소리가 차올랐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태자의 얼굴은 황궁을 나올 때보다 더 좋지 않았다. 등우는 쉴 새 없이 주인을 곁눈질했다.

“할 말 있느냐.”

윤제가 말의 속도를 늦추며 태감을 돌아봤다.

“황후께오서 동궁의 세 분 후궁을 부르셨다 합니다. 안에서 다소 높은 소리가 나온 듯합니다. 정확한 앞뒤 정황은 말씀 않으셨으나, 다 같이 태자를 모신다 하나 태자비 전하와 후궁은 다르다 훈계하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평소와 다른 말씀을 하셨군.”

“그리 말씀하신 후에 후궁은 모두 동등하다 하셨다 합니다.”

등우의 말에 윤제가 짧게 웃었다.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이었다. 등우의 눈이 조금 더 빠르게 주신을 살폈다.

“양제는?”

“해원에 계시옵니다.”

윤제는 알겠다는 듯 끄덕이고 말았다. 등우가 다시 주인을 부지런히 살폈다.

“또 뭐냐.”

험악함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가 공공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제관부에 머무는 일족이 전하를 뵙기를 다시 청했습니다. 이번에는 공야대인께서 청을 올리셨습니다. 어찌할까요.”

공야씨는 선황후인 친모후의 일족이다.

“내일, 들라 해라.”

명을 내린 윤제가 그대로 말을 내달려 앞서 가 버렸다.

“예. ……그리고 폐하께서 음 상궁을 데리고 영화대를 찾으신다는데…… 휴우. 별일 없겠지…… 나도 모르겠다. 모두 속도를 높여라!”

혼잣말을 웅얼거리던 등우가 태자를 따라가지 못한 일행을 향해 외쳤다. 거리에 말달리는 소리가 차오르며 먼지바람이 자욱하게 불었다. 곧 황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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