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26/28)

5.

벽 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캡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그는 소리 없이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죽 장갑을 낀 손에는 시퍼런 날붙이가 들려 있었다.

문 앞에 선 또 다른 남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피곤에 절은 얼굴로 도어락 키패드를 누르는 그를 향해서, 칼을 든 남자가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이…….

지이이잉-

“왁!”

드르륵대며 울리는 진동음에 서규하는 까무러치게 놀라며 펄쩍 뛰어올랐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바스켓을 놓치면서 사방으로 팝콘이 쏟아졌다.

하마터면 심장 발작을 일으킬 뻔한 주범은 유리 탁자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었다. 멋대로 액정이 켜진 핸드폰을 조심조심 잡고 보니 이차영이 보낸 문자가 보였다.

[아직 영화 보는 중이야? 1시 넘었는데]

이차영의 말마따나 핸드폰 시계는 어느덧 새벽 1시 4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미간이 좀 더 찌푸려졌다. 공포 스릴러 영화라서 안 그래도 심장이 쫄리는데, 하필이면 문자가 온 시간도 44분이었다.

[먼저자 보던거만보고갈게]

[알았어.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얼른 와]

[ㅇㅇ]

대충 답장을 보낸 뒤에 다시금 화면을 봤지만 클라이맥스는 이미 지나간 뒤였다. 현관문을 열던 남자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고 주변에는 검붉은 피가 낭자했다.

장면이 바뀌면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현장에 출동한 감식반 형사들이 사진을 찍어 대는 걸 보면서 서규하는 다시금 영화에 집중했다.

내일은 모처럼 오프라서 속편까지 연달아 봤더니 어느덧 새벽 4시가 코앞이었다. 얼굴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결말이 궁금해서 끝까지 버티긴 했는데, 침대에 누우면 곧장 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하암…….”

하품을 흘리면서 문을 열고 나오다가 멈칫했다. 저만치 맞은편 복도에서 최승화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불량스러운 자세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왜 또 마주치고 지랄이야.

옷차림을 보니 자다가 방에서 나온 건 아닌 듯했다. 마찬가지로 잠깐 멈춰 섰던 최승화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좁혀지자 훅 풍기는 술 냄새에 서규하는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

‘지금 집에 온 건가? 시간이 몇 신데…….’

소싯적에 본인은 더했었다는 사실은 잊은 지 오래였다. 어쨌든, 눈이 마주쳤는데 그냥 지나치기도 뭣해서 예의상 말을 붙였다.

“늦었네.”

“…….”

“씻고 자라.”

최승화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대로 곁을 지나치려는 찰나, 갑자기 턱 하고 팔을 붙잡히는 느낌이 났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희고 커다란 손이 자신의 팔뚝을 쥐고 있었다.

“왜 그래?”

“……나랑 잠깐 얘기 좀 해요.”

마주한 얼굴은 몹시도 멀쩡해 보였다. 여전히 저보다 조금 더 눈높이가 높고, 이차영과는 살짝 다른 의미로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에는 그 흔한 잡티 하나 없었다. 하지만 전신에서 풍기는 술 냄새는 여전했기에 서규하는 고민하지 않고 녀석의 말을 거절했다.

“내일 해. 술 많이 마신 거 같은데.”

점잖게 타이르면서 녀석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거듭 콱 붙잡으면서 낮게 읊조리는 투로 묻는 말이 이어졌다.

“진짜 오메가 맞아요?”

취한 사람답지 않게 강렬한 시선이 얼굴에 와 닿았다. 느닷없는 질문에 서규하는 잠깐 굳은 채로 서 있다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그렇잖아요. 남자 오메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태어난 건 그렇다 쳐요. 근데 아무리 봐도 안 믿기잖아. 작고 예쁜 것도 아니고, 성격은 더럽고, 사근사근한 맛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고…….”

가늘게 변한 눈매가 위아래로 서규하를 훑었다.

하, 서규하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근본 없이 후려치는 말을 듣는 건 참으로 오랜만인데, 화가 난다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든 말든 최승화는 뚫린 입이라고 계속해서 사람 속을 긁는 말을 나불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요. 내가 아는 차영이 형은 눈도 엄청 높고,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매치메이킹도 엄청 들어왔을 건데, 어쩌자고 그쪽을 선택해서 스스로 오점을 남겼는지 모르겠어. ……애 때문에 발목이나 잡히고.”

서규하의 눈썹이 티 나게 꿈틀거렸다. 마지막은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거리가 가까운 탓에 여과 없이 고스란히 귓가에 닿았다.

‘이걸 콱 어째 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슬며시 그러쥔 주먹을 움직이는 대신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참자. 술에 취하면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데, 너그러운 내가 참아야지.

제정신이 아닌 놈을 붙잡고 씨름해 봤자 이쪽만 피곤해질 뿐이었다. 약간의 사심을 담아서 이번에야말로 강한 힘으로 녀석의 팔을 떼어 낸 뒤에 돌아서는데, 헛소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페로몬도 고장 났다면서요.”

“……뭐?”

“다 들었어요. 제거술인가 뭔가를 받아서 페로몬을 못 뿜는다는 거. 그런 데다 남자 오메가라니, 진짜 최악이잖아.”

미묘한 긴장감을 깨트리며 최승화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찌푸린 상대의 얼굴을 직시하면서 느리게 말을 이었다.

“진짜 오메가면……, 나랑도 자요.”

그 순간 서규하는 실로 오랜만에 퓨즈가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씨발, 이 개새끼가. 생각에 앞서 먼저 움직인 손이 최승화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주먹 쥔 오른손으로 뺨을 후려갈기려는 순간,

“어, 어어?”

건들건들 서 있던 녀석의 몸이 갑자기 아래로 훅 꺼지면서, 멱살을 쥐고 있던 서규하도 덩달아 휘청거렸다. 버티거나 손을 놓을 틈도 없이 그대로 같이 우당탕탕 하는 소리를 내면서 복도 위로 넘어졌다.

“……아오, 썅…….”

팔로 몸을 일으키는데 바로 앞에 최승화의 얼굴이 있어서 흠칫 놀랐다. 허리를 곧추세운 채 놈을 내려다보니, 분명 몇 초 전만 해도 똑바로 자신을 쳐다보던 두 눈이 굳게 잠겨 있었다.

“야.”

불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녀석은 요지부동이었다. 잠깐 쳐다보다가 손으로 뺨을 툭툭 때려봤지만 감긴 눈꺼풀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피유우-.”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 바람 빠지는 숨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평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놈과 달리 서규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눈 떠, 새끼야.”

“…….”

“네 할 말만 씨불이고 잠들면 다야?”

헛웃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이미 기절하듯 잠든 놈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매끈한 얼굴을 내려다보는 서규하의 표정이 갈수록 조금씩 굳어갔다.

완벽하게 무방비한 상태겠다, 응징을 가하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실제로 거듭 주먹을 그러쥐었지만, 이내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시발.”

분풀이로 제 머리카락을 헝크는 손길이 꽤 거칠었다. 힐끗, 한 번 더 눈을 내리깔고 쳐다보니 최승화는 여전히 피유, 피유, 하는 숨소리를 내면서 열받을 정도로 단잠을 처자고 있었다.

웃을 땐 능글맞은 구석이 있어서 잘 몰랐는데, 잠든 모습은 퍽 어려 보였다. 그러다 문득 녀석이 스물넷인가 다섯이라던 말을 떠올리고는 거듭 인상을 찡그렸다. 어려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애새끼네.

“하아…….”

여러 가지로 들끓던 감정이 순식간에 푸시시 가라앉았다.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흘린 뒤에, 서규하는 그때까지 최승화의 허리께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여전히 곯아떨어진 놈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어깨에 두른 뒤에,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축 처진 몸은 생각보다 무게가 나갔다. 후, 기합을 넣은 뒤에 서규하는 다시 걸음을 옮겼고, 손님용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 위에 녀석을 눕혀 주었다.

말이 좋아 눕혀 준 것이지 거의 내팽개친 수준이었지만 최승화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으음……. 꿈틀대며 몸을 웅크리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서규하는 뒤돌아섰다.

슈트가 형편없이 구겨지겠지만, 거기까진 제 알 바가 아니었다. 한창 혈기 왕성한 때였으면 잠든 놈을 신나게 두들겨 패고 그대로 복도에 방치했을 텐데, 손님이랍시고 군말 없이 침실로 옮겨 준 것만으로도 서규하로서는 최선을 다한 거였다.

뻐근한 팔을 주무르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방문을 열자 침대 머리맡에 있는 무드 등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서규하는 발소리를 죽여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등을 끄고 침대에 눕기 무섭게 뒤에서 뻗어 나온 팔이 허리에 감겼다.

“왔어?”

“안 자고 있었어?”

“방금 살짝 깼어. 잘 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르게 내쉬는 숨소리가 들렸다. 서규하도 편하게 자세를 잡으며 눈을 감았지만 어쩐 일인지 평소와 달리 잠이 빨리 들지 않았다.

허리에 감겨 있는 이차영의 팔을 슬며시 밀어낸 뒤에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로 누웠다. 그러다 슬쩍 고개만 돌려서 이차영을 쳐다봤다만, 캄캄한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문득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결혼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망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손을 꼭 붙잡으면서 이차영은 이렇게 말했었다.

‘아직 날 완전히 못 믿는 거, 이해해.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고. ……규하 네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내 마음을 깨달은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어릴 때부터 아무 조건 없이 친해지고 싶고, 순수한 호감을 느낀 사람은 규하 너밖에 없었어. 그러면서도 네가 베타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꽉 막혀서……. 우정 이상의 감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어. 바보같이.’

그렇게 말하는 이차영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덕분에 그 뒤로는 녀석의 마음을 딱히 의심해 본 적이 없는데……. 망할 놈의 자식이 내던진 말 때문에 실로 오랜만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왜 당신 같은 사람을 골라서 스스로 오점을 남겼는지 모르겠어. 애 때문에 발목이나 잡히고.’

‘남자 오메가라니, 최악이잖아요. 페로몬도 고장 났다면서요.’

순간적으로 미간이 확 구겨졌다. 시발, 고장은 무슨.

새파랗게 어린 놈이 남자 오메가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사람을 무슨 하자 있는 물건 취급하던 말을 떠올리니 다시 생각해도 열이 올랐다.

‘한 대라도 처때리고 오는 건데.’

미간 주름이 움푹 팰 정도로 인상을 찡그린 채 다시금 모로 돌아누웠다. 잠이나 자자.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자신을 타일렀지만, 이후로도 한동안 뒤척여야만 했다.

***

다음 날 아침, 서규하는 느지막한 시간에 밥 한 숟갈을 뜨고 집을 나섰다. 지금도 매달마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임신 사실을 알려 준 의사가 말했던, 자칫하면 페로몬 체계가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다던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지만, 출산 이후 새롭게 생겨난 이상 증세가 있었다.

히트 사이클 기간에는 안 그래도 몸이 축축 처지고 무기력해지는데, 거기에 신체 감각까지 극도로 예민해졌다. 작정하고 흘리는 게 아니라 숨 쉬듯 자연스럽게, 그것도 웬만한 오메가는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극미하게 방출하는 이차영의 페로몬조차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히트 사이클 때는 각방을 써야 할 정도였다.

주치의인 오태석의 말에 따르자면 지속적으로 강력한 알파 페로몬에 노출되고 노팅으로 임신까지 해서 그런 것 같다는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차영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왔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태석이 퍽 반가운 얼굴로 환자를 맞았다. 마우스를 손에 쥐고 달칵달칵하더니, 안경을 밀어 올리며 하는 말이 이어졌다.

“음, 좋네. 계속 꾸준히 약 먹나 봐.”

짐작대로였다. 식탁 위 눈에 띄는 곳에 약통이 있기도 하고, 가끔 잊고 그냥 일어서면 도우미든 이차영이든 누구라도 기다렸다는 듯 챙겨 주곤 했다.

“다음 달엔 언제로 잡아 줄까?”

마지막에 매번 듣게 되는 말이 이어졌다. 평소였으면 ‘오후 아무 때나.’ 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했겠지만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두 손을 헐겁게 깍지 낀 채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서규하는 고개를 살짝 들고 오태석을 불렀다.

“형.”

“왜.”

“……나 말이야, 혹시 페로몬 풀 수 있어?”

오태석이 멈칫하며 시선을 돌렸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었냐는 표정을 잠깐 짓다가, 서규하의 얼굴을 보고는 농담이나 장난이 아닌 듯한 분위기를 캐치했다. 이내 일반 내원 환자를 대할 때처럼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왜.”

“그냥. 존나 일찍 수술받아서 내 페로몬이 어떤지 나도 모르잖아. 궁금해서 그래.”

아닌 척해도 희미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오태석이 턱을 문지르면서 한 대답은 서규하의 예상을 완전히 비켜 갔다.

“안 돼.”

“……!”

“기구를 삽입했거나 약으로만 컨트롤한 거면 큰 문제가 없는데, 규하 넌 분비선을 직접 건드리는 수술을 해서 다시 복구하기가 어려워. 그마저도 너무 오래돼서……. 설령 수술이 잘된다 해도,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봐.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내뿜는 페로몬을 느끼게 되면 적응하기도 어려울 거고.”

“……그럼 일시적으로 잠깐이라도 푸는 건? 그것도 안 돼?”

“더 어렵지. 말했다시피 분비선을 또 직접 건드려야 되는 거라서 쉽지 않아.”

오태석은 프로페셔널한 태도로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전전긍긍했다. 푹신한 쿠션감을 자랑하는 의자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늘 뻔뻔하고 당당한 놈이 한껏 풀이 죽어 낙심한 기색을 풀풀 풍겨대니, 어린애한테 몹쓸 짓이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

조심스럽게 떠보듯이 묻자 서규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다음 날짜는 형이 알아서 대충 잡아 줘. 갈게.”

“야, 서규하!”

당황해서 이름을 불렀지만, 서규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료실을 나섰다. 타악- 문이 닫히며 금세 뒷모습마저 사라졌고, 오태석은 잠깐 그쪽을 쳐다보다가 핸드폰으로 서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괜한 짓이었다. 두어 번 연속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끝끝내 녀석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

“으음…….”

목이 타는 갈증에 최승화는 눈을 떴다. 침대 위에 형편없이 널브러져 있던 몸을 일으킨 그는 정신이 들자마자 밀려오는 두통에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오, 머리야.”

숨만 내쉬는데도 묵은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한국에는 친구가 거의 없어서 또래 친척들을 클럽으로 호출해서 술 파티를 벌인 기억이 났다. 주량은 제법 많은 편이지만, 이 술 저 술 가리지 않고 잡히는 대로 마셔댔더니 후폭풍이 꽤나 거셌다.

한동안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앉아 있다가 뒤늦게 손을 내리며 다시 눈을 떴다. 사흘째 머문다고 제법 익숙해진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옷은 어제 입었던 정장 차림 그대로였다. 꽤 많이 마셨는데, 그래도 방을 제대로 잘 찾아서 들어온 모양이었다.

냉장고를 열어 봤지만 숙취 해소제 같은 게 들어 있을 리 없었다. 하아, 진짜 죽겠다. 지끈거리는 두통은 여전했다. 일단 술 냄새만이라도 없애 보고자 최승화는 옷을 훌훌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일어나셨어요?”

대충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거실을 청소하던 도우미가 퍽 살갑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식사를 차려드리겠단 말에 못 이기는 척 식탁으로 가서 앉으니 커다란 유리컵이 내밀어졌다.

“이거부터 드세요.”

“뭐예요?”

“헛개 열매로 만든 냉차인데, 숙취에 좋아요. 사장님이 챙겨 주시라 하더라고요.”

“사장님이요?”

“네. 지금 바로 식사 챙겨드릴게요.”

최승화는 덩그러니 놓인 유리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생각보다 약재 맛이 강하게 받치긴 해도 마시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차영이 형이 챙겨 주라고 한 건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한 모금 더 마시려다가, 순간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불현듯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나랑 얘기 좀 해요.’

잠깐. 잠깐만…….

‘아무리 봐도 안 믿기잖아. 작고 예쁜 것도 아니고, 성격은 더럽고, 사근사근한 맛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고.’

‘진짜 오메가면……, 나랑도 자요.’

“아악!!!”

느닷없이 들리는 비명에 도우미가 화들짝 놀라 수저를 떨어트렸다. 그러든 말든 최승화는 미친놈처럼 계속해서 악, 악 하고 소리를 질러 댔다. 이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망했다.”

망한 정도가 아니었다. 자는 동안 개꿈을 꾼 거라고 믿고 싶지만, 차에서 내려 집에 들어온 것부터 2층 복도에서 서규하를 마주쳤던 기억이 그린 것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내뱉었던 말도, 미간을 살짝 구긴 채 그런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빛도.

“하아…….”

오만 가지 욕이 입 안을 맴돌았다. 일부는 염불을 외듯 중얼거리는데, 눈앞이 온통 캄캄했다.

이차영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만큼 그의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사실이고, 아닌 척하면서 일부러 살살 긁어 댄 것도 맞았다.

하지만 뭘 해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속이 쓰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차영이 형 눈빛만 봐도, 어제 했던 말만 봐도 상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오죽하면 이젠, 대체 무슨 매력이 있길래 저렇게 푹 빠졌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랬는데……. 망할 놈의 술이 화근이었다. 이성이 흐리멍덩한 상태로 서규하의 얼굴을 보니 그간 기저에 깔려 있던 생각들이 뇌를 거치지 않고 마구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나하고도 자자’니.

“진짜 돌은 거 아니냐고.”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취했다 해도 그런 말까지 했을 리가 없었다.

설마 차영이 형한테 이른 건 아니겠지? 생각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돋았다. 멀쩡히 눈을 뜬 걸로 봐선 아닌 것 같긴 한데……. 미치겠다, 진짜.

각종 그릇이 식탁에 놓였지만 숟가락을 들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마를 짚은 채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마침 밖으로 나가려는 도우미를 발견하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기요, 아줌마!”

“네?”

“……규하 형, 지금 집에 있어요?”

“아뇨, 아까 나가셨어요.”

“그래요?”

어색한 웃음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거듭 인상을 찌푸리며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밑 빠진 독처럼 마셨는데도 쓸데없는 기억이 왜 그렇게 선명한지, 어제 봤던 서규하의 얼굴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이윽고 여기저기 제 몸을 훑어보고, 두 손으로 더듬더듬 얼굴도 만져 봤다. 하지만 딱히 어디가 아프거나 문제가 있어 보이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심란했다. 죽일 듯이 자신을 팼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하아.

‘사과……해야겠지.’

어쩔 수 없었다. 기억 안 나는 척하고 넘어가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나중에라도 이차영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어제 이미 경고 비슷한 말까지 들은 참인데, 제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게 되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거듭 한숨을 푹푹 흘리면서 머리카락을 헝클어대다가 고갤 들고 도우미에게 물었다.

“언제 오는지 아세요?”

“네?”

“규하 형이요.”

“병원 갔다가 규영이 데리고 오신다고 했으니까,”

삑삑삑삑-

말을 끊듯 멀리서부터 도어락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셨나 봐요, 하고 웃어 보인 도우미가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나섰다.

“다녀왔습니다!”

귀엽고 깜찍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최승화가 계속 생각하던 남자의 목소리도 귀에 닿았다.

“규영이 손 씻기고, 간식 좀 챙겨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 녀석은요?”

최승화는 거듭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느낌상 자신을 일컫는 게 분명했다.

“지금 식사 중이세요.”

“네. 그럼 가서 좀 쉴게요.”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계속 귀를 기울였지만 더는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들리질 않았다.

식탁 위를 의미 없는 눈길로 내려다보다가 결국 최승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뭔가 실수하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쿨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태도는 최승화가 지닌 큰 장점 중 하나였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관계가 더 악화되거나 혹시라도 이차영의 귀에 무슨 말이 들어가기 전에 지금이라도 수습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실 앞에 이른 것까진 좋았지만, 막상 굳게 닫힌 방문을 보니 모션을 취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애꿎은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큰맘 먹고 천천히 방문에 대고 노크했다.

“계세요?”

안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소리가 작아서 못 들었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주먹을 쥐고 좀 더 세게 방문을 두드렸다.

“형, 저 최승화, 왁!”

갑자기 벌컥 문이 열리면서 서규하가 나타났다. 빈말로도 웃거나 좋은 표정은 아닌 얼굴로 묻는 말이 이어졌다.

“무슨 일이야?”

“그게……. 저랑 잠깐 얘기 좀 해요.”

“난 너랑 할 얘기 없어.”

“잠깐만요!”

닫히려는 문을 본 최승화가 서둘러 손을 뻗어 문을 막았다. 어느덧 내일이면 영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최승화는 망설임 없이 본론을 꺼냈다.

“미안해요.”

“…….”

뜬금없는 사과에 서규하의 눈썹이 꿈틀했다.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시선을 잠깐 바라보다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리며 받아쳤다.

“까고 있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진짜예요! 그렇게 말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취해서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그러셨겠지.”

비아냥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라더라. 이차영이 자기 롤 모델이고 어쩌고 하면서 나불댔던 걸로 봐서 자기를 눈엣가시 취급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제정신이라면 그런 형의 배우자한테 ‘나랑도 자자’는 말 따위를 하진 않았을 터였다. 이차영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더더욱.

“진짜 미안해요, 형. 진심이에요.”

“칼로 사람 쑤시고 미안하다 하면 그만이야?”

“……그래도 미안해요.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거듭 실소가 흘러나왔다. 무릎 어쩌고 하는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었다. 전에 이차영도 그러면서 싹싹 빌더니, 저 집안 사람들은 자존심도 없나.

“아빠!”

그때였다. 문득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온 규영이가 보였다. 덩달아 그쪽을 보고 활짝 웃은 최승화가 다시금 앞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무릎 꿇을까요?”

“닥쳐, 좀.”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나왔지만 속으로는 내심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판에 정신 줄을 놓고 쓰러져서 어제 일을 기억 못 하거나, 생각나도 당연히 모른 척 잡아뗄 줄 알았는데. 실수했다 싶으면 즉각 사과하는 것도 집안 내력인가?

최승화는 여전히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뜻대로 될 때까지 버티는 것도 존똑이라고 생각하면서, 서규하는 그나마 누그러진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할 일 없으면 가서 규영이 놀이 상대나 해 줘. 좀 있으면 선생님 오시니까.”

“그럼 용서해 주는 거예요?”

“그게 의미가 있어?”

“당연하죠.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하는 사이인데, 감정적인…, 음…, emotional baggage가 남아 있는 건 싫거든요.”

“왜 갑자기 영어는 하고 지랄이야.”

그사이 다가온 규영이가 안아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서규하 대신 최승화가 으차, 하고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는 놀이기구를 태우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려댔다.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차영이 형한테는 안 이를 거죠?”

“이르면 어쩔 건데.”

“절대 안 돼요! 그럼 저 평생 형 얼굴 못 볼지도 몰라요.”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

새삼 눈앞의 녀석이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쟤가 나 놀렸어요.’ 하고 엄마한테 쪼르르 일러바치는 애도 아니고, 저보다 한참 어린놈이 술김에 시비 좀 걸었다고 그걸 이차영한테 말할 리가 없었다.

특히나 마지막에 했던, 나랑도 자자 어쩌고 했던 말은 오히려 제가 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였다. 둘 사이가 나빠지든 비틀어지든 전혀 알 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차영의 눈이 돌아갈 게 뻔했다. 한마디로 자신에게까지 괜한 불똥이 튈 확률이 백 퍼센트였다.

“아, 형! 제발요.”

“저리 비켜.”

“네? 형.”

“애 똑바로 안 안아?”

아무것도 모르는 규영이가 해맑게 꺄르르 웃으면서 최승화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느새 문 앞을 막고 선 최승화는 몹시도 집요했다.

“제발요, 제발.”

“이거 안 놔?”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엔 서규하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최승화는 규영이를 안은 채로 찰거머리처럼 계속 들러붙었고, 그 탓에 ‘이차영한테 말하지 않겠다.’고 확실하게 다짐한 뒤에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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