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25/28)

4.

“아이고, 죽겠다.”

욕실에서 나온 서규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알바생 두 명이 동시에 빠져서 오랜만에 풀타임으로 카페에 붙어 있었더니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어깨 좀 주물러 줄까?”

“어깨 말고…….”

다리라고 대답하려다가 서규하는 퍼뜩 말을 바꿨다.

“어깨랑 다리도.”

엎드려 누운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픽 웃다가 이차영은 헤드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다리부터 주물러 줄게.”

커다란 두 손이 다리에 닿았고, 얼마 안 가 서규하의 입에서 연신 만족스러운 탄성이 흘렀다. 웬만한 건 뭐든지 잘하는 놈답게 마사지 솜씨도 여전히 끝내줬다.

“많이 바빴어?”

“말도 마. 죽는 줄 알았어.”

가뜩이나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인데 주말이기까지 하다 보니 계속해서 손님이 밀려들어 왔다. 자리가 없으면 테이크아웃으로 가져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기분상으로는 온종일 일하면서 채 한 시간도 제대로 쉬질 못한 것 같았다.

“내일도 풀타임이야?”

“아니. 내일은 오후에 나가면 돼.”

“그나마 다행이네. 참,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할 말? 뭔데.”

“승화 말이야, 한국에 있는 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고 싶대.”

연락을 받은 건 오늘 오후였다. 늘 그렇듯 정신없이 업무에 매진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형!!!! 나 승화야. 나 지금 한국이야!!!!! 서프라이즈~~]

느낌표를 남발한 것만 봐도 최승화가 맞았기에 이차영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어쩐 일로 귀국했냐며 간단히 안부를 묻고,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오늘은 서규하가 풀타임으로 일하는 날이라서 집에 잠깐 들러 규영이를 데리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까 봐 내심 신경이 쓰였는데 괜한 기우였다. 규영이를 처음 본 최승화의 반응은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눈높이까지 맞춰 쭈그려 앉은 채 너무 귀엽고 인형 같다는 칭찬을 쏟아 내더니, 틈만 나면 아이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심지어 무릎에 앉힌 채로 밥을 먹으려는 걸 저지했더니 의자를 아예 제 옆으로 끌어가서 바짝 붙어 앉았다.

자기 자식 예뻐하는 걸 싫어하는 부모는 없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했고,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에 최승화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한국에 있는 동안 형 집에서 지내면 안 되냐는 거였다.

‘호텔은 삭막해서 싫어. 재미도 없고. 딱 4일만 있다 갈 건데, 안 돼? 규영이 유치원도 내가 데려다줄게. 응?’

이차영은 고민에 잠겼다. 누구라도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질색이기에, 본래라면 듣자마자 딱 잘라 거절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유학생 시절에 녀석의 집에서 몇 년간 신세 진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의는 아니고, 아직 미성년인 아들이 걱정된 부모님 때문에 할 수 없이 고모 댁에서 지낸 거긴 하지만…….

어쨌든, 고민하는 기색을 읽어 낸 최승화도 영악하게 ‘형도 우리 집에서 지낸 적 있잖아.’ 하면서 그때 그 일을 언급했고, 결국 이차영은 내일 중으로 연락하겠다는 말로 대답을 유예했다. 자신이야 그렇다 쳐도 만일 규하가 싫다고 하면 미안하지만 거절할 생각이었다.

“오늘 저녁에 만났다던 그 사람이지?”

“맞아.”

서규하는 의외로 쿨하게 승낙했다.

“난 상관없어.”

“진짜? 불편하지 않겠어? 사흘 정도 있을 거 같은데.”

“어차피 2층 손님방 내줄 거잖아. 휘젓고 다니거나 설치지만 않으면 괜찮아.”

선뜻 허락한 이유는 규영이 때문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활짝 웃으며 품에 안긴 규영이는 작은 입술을 종알거리며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아빠랑 같이 만난 형아가 칭찬도 많이 해 주고, 커다란 상어 인형도 사 줬다면서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러잖아도 요즘 둘 다 부쩍 바빠서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기에, 애를 예뻐해 주는 사람이 며칠 같이 있어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차영이 이렇게 말이라도 꺼낼 정도면 이상한 놈은 아닐 터였다. 조금이라도 께름칙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으면 제 선에서 자르고도 남았을 테니까.

“오고 싶으면 오라고 해.”

“…….”

“왜 말이 없어?”

“아니, 생각해 보니까…….”

“생각해 보니까, 뭐.”

“아냐. 그럼 내일 집으로 오라고 할게.”

그러고 보니 최승화도 알파란 사실이 뒤늦게 생각났지만, 입 밖으로 내기 직전에 말을 멈췄다.

규하한테 말했을 때 돌아올 반응은 뻔했다. 경계할 사람이 없어서 새파랗게 어린 애한테도 그러냐며 기막혀하겠지.

사실 딱히 걱정할 일은 없었다. 어차피 서로 각인하기도 했고, 그게 아니라도 서규하는 알파의 페로몬을 감지하지 못했다. 행여나 최승화가 규하의 페로몬을 맡을 일도 없었다.

규하가 너무 일찍 페로몬 억제술을 받은 게 지금도 가끔 아쉬울 때가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럴 땐 최고의 안전장치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녀석이 제 눈에 닿지 않는 곳에 있어도, 주변에 어떤 알파나 오메가가 기웃거려도, 적어도 페로몬 때문에 휩쓸리는 일은 절대 없으니 말이다.

***

다음 날 저녁, 서규하는 그간 말로만 들었던 이차영의 사촌 동생을 마침내 실제로 볼 수 있게 됐다. 결혼식 때 왔다는데 여전히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고, 퇴근길에 녀석을 데려왔다는 이차영이 중간에서 서로를 소개해 주었다.

“얘가 승화야. 그리고 여긴 형 배우자인 규하인데, 전에 본 적 있지?”

그동안 서규하의 시선은 최승화를 향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든 생각은 ‘예쁘게 생겼네.’였다.

살짝 눈높이가 높을 정도로 키가 크지만 얼굴은 작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조화로워서 모델이나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언젠가 이차영이 말했던 유전자의 축복을 눈앞의 녀석도 제대로 타고난 모양이었다.

알파치곤 곱상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외모로 형질을 판단하는 건 적어도 제가 할 짓은…….

“왜 웃으세요?”

“뭐?”

“방금 저 보면서 웃으신 거 아니에요?”

당황해서 입술을 달싹이는데, 눈치 빠른 이차영이 먼저 잽싸게 끼어들었다.

“반가워서 웃은 거지. 가서 손부터 씻고 와. 욕실은 저쪽이야.”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키자 최승화의 시선이 따라갔다가, 곧 허리를 낮추며 웃는 낯으로 규영이에게 말을 걸었다.

“규영아, 형 기억하지?”

“네!”

“착하네. 규영이가 화장실까지 형아 데려다줄래?”

“네에!”

신이 난 규영이가 쪼르르 앞장서고 그 뒤를 최승화가 따라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다가 서규하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쟤 뭐야?”

“승화가 원래 엄청 직설적이고 자기가 느낀 대로 말하는 애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기분 풀어. 응?”

“…….”

“싹싹하고 솔직한 애라서, 친해지면 아마 너랑 잘 맞을 거야.”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면서 이차영도 곧 드레스 룸으로 사라졌다. 거실로 걸어간 서규하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미간은 살짝 찡그린 채였다.

왜 웃느냐고 묻던 놈의 면상이 떠올랐다. 그놈도 생글생글 웃던 걸 보면 이차영의 말마따나 시비를 걸려고 그런 건 아닌 듯한데…….

‘그래도 보통은 그냥 넘어가지 않나? 기분 나쁘게 실실 쪼갠 것도 아닌데.’

잠시 후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최승화가 밖으로 나왔다. 시키지 않아도 다가와서 소파에 털썩 앉더니 또다시 규영이에게 말을 걸었다.

“규영아, 형이 선물해 준 인형은 어디 있어?”

“내 방에 있어요.”

“그럼 형한테 보여 줄래? 잘 있는지 보고 싶은데.”

규영이는 곧장 서규하를 올려다보면서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아빠, 나 형이랑 내 방에 가도 돼요?”

서규하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최승화의 입꼬리가 좀 더 올라가는 게 보였다.

가타부타 말없이 웃기만 하는 모습에 서규하는 또 한 번 인상을 찡그렸다. 이렇게 누군가와 서로 빤히 쳐다보는 상황은 흔치 않았다. 보통 백이면 백 상대가 먼저 시선을 피하는데.

“저녁 준비 다 됐어요.”

눈싸움 아닌 눈싸움은 주방에서 나온 도우미로 인해 중단되었다. 결국 먼저 눈을 돌린 서규하는 애써 웃는 낯으로 규영이를 내려다봤다.

“밥 먹고 나서 형한테 방 구경시켜 주자.”

“네에!”

이어서 드레스 룸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이차영은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후우, 짤막한 한숨을 흘린 뒤에 마지못해 다시 최승화를 쳐다봤다.

“밥 먹으러 가자.”

하지만 이번에도 최승화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근데 왜 계속 반말하세요? 서로 초면이나 다름없는데, 예의상이라도 말 편하게 해도 되냐고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

이 새끼가 진짜.

“꼬우면 나가.”

“에이, 뭘 또 그렇게 말씀하세요. 정 없어 보이게.”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문이 열리며 이차영이 거실로 나왔다. 대치하듯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가까이 다가갔다.

“뭐 하고 있어?”

“규하 형이랑 인사 좀 나눴지. 아줌마가 밥 먹으러 오라던데, 주방은 어디야?”

“따라와. 밥 먹으러 가자, 규하야.”

규영이를 한 팔로 안아 든 이차영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최승화가 냉큼 따라붙었다. 뭐라고 말을 거는 옆얼굴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가 가득했다. 서규하는 뒤늦게 몸을 일으키면서 꽉 다문 입술을 씰룩거렸다.

‘잘 맞을 거 같기는 개뿔.’

그러기는커녕 본능적으로 느낌이 왔다. 싸움이 안 나면 다행일 거라고.

식사를 마치자마자 규영이는 최승화의 손을 붙잡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이차영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개인 서재로 사라진 탓에, 서규하는 또 본의 아니게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가 됐다.

혹시나 해서 아이 방문을 열어 보니 규영이는 매트에 앉아서 놀고 있었다. 널브러진 블록과 그 앞에 바짝 붙어 앉은 양아치 같은 놈을 보니 괜히 배알이 꼴려서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규영아, 아빠가 놀아 줄까?”

“아니. 형아랑 블록 맞추기 할래요. 재밌어요.”

“……그래?”

얄밉게 입가를 올리는 놈을 보니 울컥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씁쓸하게 뒤돌아선 서규하는 오랜만에 씨어터 룸으로 들어갔다.

애도 봐주고. 편하네.

정신 승리로 본인을 위로하면서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일전에 도입부만 조금 보다가 말았던 영화를 재생하자 금세 시끄러운 사운드가 울려 퍼졌다.

줄거리는 허접하지만, 다 때려 부수고 폭파하는 액션 영화라서 속은 시원했다.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채로 팝콘을 입에 넣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화면에 집중했다. 속편까지 연달아 보고 나니 어느덧 자정을 앞둔 시간이 됐다.

“하암…….”

긴 하품을 흘리면서 문을 열다가 멈칫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있는 화장실 문이 열리면서 최승화가 복도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타이밍 한 번 끝내주네.

서규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없이 고개를 돌리는 편을 택했다. 반지르르한 면상이 눈에 들어오니, 왜 허락도 없이 말을 놓느냐며 긁어 대던 모습이 절로 생각났다.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대뜸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형.”

우뚝,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 지금 2층에는 두 사람밖에 없는데 설마 허공에 대고 헛소리를 한 것은 아닐 터였다. 마지못해 옆을 돌아보면서 서규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왜 네 형이야?”

“그럼 규하 씨라고 불러요? 아니면 서규하 씨?”

“…….”

“농담이고,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부를게요. 대신 형도 말 편하게 하세요.”

선심 쓴다는 투로 말하면서 최승화는 생긋이 웃어 보였다. 곧 느슨하게 팔짱을 끼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봐도 진짜 좋네요. 나도 이런 집에서 살고 싶은데……. 이참에 그냥 여기 눌러앉을까요?”

“미쳤어? 꿈도 꾸지 마.”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이 튀어나왔지만 최승화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와, 매몰차다.”

“너 같으면 좋다고 하겠어?”

“당연히 아니죠.”

“…….”

“인상 풀어요, 형. 농담 두 번 했다간 눈빛에 찔려 죽겠어요.”

겁먹은 듯 방어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어려 있었다. 서규하가 받아 주질 않자 곧바로 손을 내리더니 “잘 자요.”라는 말을 남긴 채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하아…….”

서규하는 한숨을 흘리면서 짜증스런 손길로 제 머리카락을 벅벅 헝클었다.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에도 짜증이 가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침실 문을 열자 방 안은 캄캄했다. 불이 꺼져 있는 걸 보니 이차영은 아직도 서재에 있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서규하는 미니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안에 든 맥주 캔을 꺼냈다.

의자에 앉자마자 탭을 따고 단숨에 들이켰다. 한 캔으로는 부족해서 하나 더 꺼내 오는데, 방문이 열리면서 이차영이 들어왔다. 손에 들린 캔을 보더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잘 밤인데 마시는 거야?”

“속이 뒤집힐 거 같아서.”

앞뒤가 다 잘린 말이었지만 이차영은 금세 짚이는 바를 찾아냈다.

“왜. 혹시 승화 때문에 그래?”

이름을 듣자 또다시 울컥하는 기분에 서규하는 한껏 인상을 구긴 채로 툴툴댔다.

“나랑 존나 안 맞는 거 같아.”

“집에 다른 사람 있는 거 많이 불편해?”

불편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여기저기 빈방이 넘쳐나겠다, 한두 명쯤 머무는 건 전혀 상관없었다.

문제는, 집에 머무는 사람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제가 본 최승화는 습관처럼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호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웬만해선 눈치 보는 일 없이 멋대로 살아온 게 맞지만, 그렇다고 눈치가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저를 바라보는 최승화의 시선은 악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좋은 감정이 있지 않은 건 확실했다. 농담인 척하면서 사람 속을 살살 긁는 것도 그렇고, 입을 가리고 눈만 보면 웃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나가라고 할까?”

순간 혹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냉큼 그러라고 대답하기도 뭐했다. 처음부터 거절했으면 모르겠는데, 이제 와서 나가라고 하면 누가 그랬는지 너무도 투명한 짓이었다.

또 저와 달리 규영이는 형, 형 하고 그놈을 잘 따르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며칠 동안 같이 있을 거라고 미리 말을 해 줬는데 하루 만에 안 보이면 시무룩할 게 분명했다.

“……됐어.”

“불편하면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이해 못 해 줄 녀석도 아니고.”

“됐다니까. 고작 며칠인데 뭐.”

변명처럼 덧붙이면서 서규하는 거듭 맥주 캔을 기울였다. 그러다 시선이 느껴져서 앞을 보니 이차영이 턱을 괸 채 미소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웃어?”

“그냥. 좋아서.”

“실없기는.”

말은 그렇게 해도 한결 표정이 풀리는 걸 보면서 이차영은 좀 더 깊게 미소 지었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내보내라고 날뛰거나 아님 자기가 나가겠다면서 문을 박차고도 남았을 텐데, 이럴 때 보면 확실히 많이 성숙해지고 인내심도 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하다.”

서규하는 멈칫하면서 캔을 떼고 물었다.

“설마, 나한테 한 말?”

“응.”

“뒤질래?”

어디서 애 취급이냐며 으르렁댔지만 이차영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앓느니 죽지, 내가.

다 마신 캔을 쓰레기통에 골인시킨 뒤에 서규하는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오니 이차영은 벌써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반대쪽 이불을 들치고 몸을 누이자 기다린 것처럼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저리 가. 무거워.”

슬쩍 밀어냈지만 돌덩이처럼 단단한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외려 꼼지락거리는 척하면서 제 품에 딱 맞게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잘 자, 규하야.”

“……너도.”

오늘 하루도 나름 바쁘게 보낸 탓에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고르게 내쉬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이차영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쾅! 콰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서너 대의 전투기가 연달아 공중에서 폭파했다. 쉼 없이 새로 생겨나는 전투기와 이름 모를 비행기도 현란한 컨트롤로 없애고 있으니 인기척과 함께 장지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최승화의 얼굴에 금세 환한 미소가 만개했다.

“왔어?”

“미안.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좀 늦었어.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좀 전에 왔어.”

30분 가까이 핸드폰 게임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예약 손님이 모두 착석하자 직원들은 알아서 차례로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맛있겠다.”

최승화는 곧바로 젓가락을 들었다. 종종 같이 PC게임을 하는 친구들이랑 어울리느라 늦은 새벽이 되어서 눈을 붙였고, 다시 일어났을 땐 해가 하늘 한가운데 떠 있었다. 가사 도우미가 밥을 차려주겠다고 했지만 점심 약속이 있었기에 거절했다. 공복으로 버틴 시간이 꽤 길다 보니 허기가 져서 허겁지겁 샐러드를 먹는데 맞은편에서 이차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식 많이 나오니까 천천히 먹어.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응. 형도 많이 먹어.”

씩 웃어 보인 뒤에 최승화는 다시금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 어김없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주로 말을 꺼내는 사람은 최승화였는데, 그때마다 이차영은 소리 내어 웃음을 흘리거나 가볍게 맞장구를 쳐 줬다.

생각해 보면 최승화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면 조르르 달려 나와서 반겨 주고, 방으로 따라 들어와서 묻지도 않은 본인의 일과를 종알종알 잘도 늘어놓곤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볼을 가볍게 꼬집어 주거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곤 했는데, 성인이 됐어도 쾌활하고 수다스러운 성격은 여전해 보였다.

또 한 번 문이 열리면서 직원이 들어왔다. 테이블에 놓이는 음식을 확인한 이차영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 좋아하는 거 나왔네.”

“응?”

“연어 엄청 좋아했잖아. 아, 혹시 입맛이 바뀌었나?”

“아냐. 지금도 엄청 좋아해.”

최승화는 서둘러 훈제 연어로 젓가락을 뻗었다. 입에 든 것을 우물대면서 시선은 힐끗 앞을 향했다.

이차영은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무난한 디자인의 블랙 와이셔츠에 일정한 패턴이 반복되는 와인색 넥타이. 옷만 놓고 보면 전혀 특별할 게 없지만 그 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외가 쪽은 대체로 인물이 훤칠한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이차영은 군계일학이었다. 팔방미인을 보면 ‘신이 모든 걸 몰빵해서 만든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한다던데, 최승화의 눈에는 자신의 사촌 형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미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외할머니를 쏙 빼닮은 얼굴에 훤칠한 키, 완벽에 가까운 신체 비율. 거기다 형은 우성 알파였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는 존재감과 주변을 압도하는 지배력이 형에게는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롤 모델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동경하는 만큼 닮고 싶었고, 형이 하는 건 뭐든지 따라 하고 싶었다. 실제로 최승화는 이차영이 다녔던 명문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죽기 살기로 노력한 끝에 대학도 같은 곳으로 들어갔고, 취미는 물론이고 영화나 음악 취향마저도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머리가 클 대로 큰 지금에도 사촌 형은 제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나 완벽하고 자랑스러운 형인데, 대체 왜…….

‘왜 그런 사람을 배우자로 맞은 거지?’

언제 들떴었냐는 듯 최승화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머니한테서 형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최승화는 제 일처럼 기뻐하고 설레하면서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낌없는 축하를 건네고 미주알고주알 떠들며 긴 통화를 마친 뒤에 멋대로 그의 배우자를 상상해 보기 시작했다.

집안은 당연히 좋을 거고, 형 눈이 높으니까 얼굴도 엄청 예쁘겠지? 성격도 좋으면 좋겠는데.

형만큼 완벽한 사람이 또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에 준하는 아름다운 오메가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큰 기대를 품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결혼식장에서 마침내 형의 배우자를 보게 된 순간 최승화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저 사람이 형의 파트너라고?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너무 황당하니 헛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오죽하면 식이 진행되는 내내 ‘혹시 몰래카메라인가?’, ‘치명적인 약점이라도 잡혔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내막을 알게 된 건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서로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이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형이 상대에게 먼저 청혼했고, 그쪽 집안도 개털이 날리는 수준은 아니라는 것 등등.

생각을 이어 가다 보니 자연히 서규하라는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심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보면 스타일은 나쁘지 않은데……. 왜 하필 오메가로 태어나서 형의 발목을 붙잡은 걸까.

처음엔 애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결혼까지 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며칠간 본의 아니게 지켜본 결과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배우자를 대하는 형의 태도는 진실했고, 바라보는 눈빛이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만 들어도 애정이 담겨 있는 게 느껴졌다. 어쩔 땐 형이 더 안달을 내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최승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뭐 해?”

“응?”

“입에 안 맞아?”

“아니, 맛있어.”

최승화는 어설프게 웃어 보이고는 다시금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러기를 잠시, 살짝 올려 뜬 시선이 이차영을 향했다.

“형.”

“응?”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말해.”

“……혹시 규하 형한테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어?”

“뭐?”

되묻는 표정을 보면서 최승화는 장난이라는 듯 좀 더 생글생글 웃었다.

“아니, 보니까 규하 형한테 꽉 잡혀 사는 거 같더라고. 봐주기도 많이 봐주는 거 같고.”

봐주는 정도가 아니었다. 표정은 무뚝뚝하고, 말은 틱틱대듯이 하고, 심지어 귀찮다는 뉘앙스를 풍겨대도 형은 너그럽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떡잎부터가 남다르다 보니 집안 어른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던 사람인데……. 막말로 눈을 씻고 찾아봐도 무엇 하나 형보다 잘난 구석이 없는 사람이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도 놀랍고, 심지어 형이 그걸 아무렇지 않게 넘긴다는 게 더 큰 충격이었다. 그러니 또다시 ‘협박이라도 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웃음이 사라진 최승화와 달리 이차영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화나면 엄청 무서운 녀석이거든.”

최승화는 설핏 미간을 구겼다. 잘생기긴 했지만 빈말로도 썩 좋은 인상이 아닌 얼굴을 떠올리니 ‘설마’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싸울 때 폭력이라도 쓰는 거야?”

진심으로 묻는다는 걸 깨닫고 이차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있어?”

“그러면 대체 왜…….”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진다고들 하잖아.”

애를 낳고 함께 살면서 많이 유해졌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노력의 산물이지 타고난 성격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긴 하지만……. 제대로 수틀리거나 화가 나면, 애고 뭐고 간에 미련 없이 제 곁을 떠날 수 있는 녀석인 것을 이차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뭐 별수 있나.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미연에 조심하면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아무리 생각해도 형이 아까운 거 같아. 규영이도 안됐고.”

잔을 만지작거리던 최승화의 입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놓치지 않고 그 말을 들은 이차영이 멈칫하며 녀석을 쳐다봤다. 이내 한쪽 입가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우리 승화, 많이 컸네. 형 앞에서 형 욕도 할 줄 알고.”

“어?”

고개를 든 최승화가 뒤늦게 깜짝 놀라며 강하게 부정했다.

“무슨 말이야, 형. 그런 적 없어.”

“규하를 안 좋게 보는 건 날 그렇게 생각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당혹스러워하는 녀석을 바라보면서 이차영은 낮고도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저 그런 인간들 백 명, 천 명보다 서규하 한 사람이 나한테는 훨씬 더 소중해. 안 좋게 수군대는 사람들이 있을 걸 알면서도 날 선택해서 내 사람이 되어 줬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이까지 낳아 줬어. ……그런데, 내가 아깝다고? 규영이가 안됐다고?”

차디찬 표정을 본 최승화는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사과했다.

“미안해, 형. 내가 말실수를 했어. 형이 남자 오메가랑 결혼할 줄은 정말 몰라서, 음, 아무튼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절대 아니었어.”

“…….”

“진짜 미안해. 앞으로는 안 그럴 테니까 화 풀어. 응?”

절절매는 녀석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차영은 긴 한숨을 흘린 뒤에 그나마 누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고, 성격이 안 맞을 수도 있어. 하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 내 사람 낮춰 보는 말은 하지 마.”

“응. 이제 절대 안 그래.”

고개까지 끄덕이며 다짐한 뒤에 최승화는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규영이는 진짜로 형 많이 닮은 거 같아. 형이 봐도 엄청 예쁘지?

다행히 제대로 먹혔다. 아이 이야기를 꺼내자 금세 웃는 얼굴로 돌아간 이차영을 보면서 최승화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를 끝낸 뒤에 먼저 자리를 떠난 사람은 이차영이었다. 웃으며 손을 흔들던 최승화는 차 뒤꽁무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손을 내렸다.

웃던 얼굴이 서서히 무표정하게 변했다. 홀로 남게 된 최승화는 품에 든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

내뱉은 연기가 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번져 갔다.

정말 오랜만에 형이랑 둘이서 밥을 먹었고, 슈트 차림도 실컷 봤고, 음식도 꽤나 입에 잘 맞았다. 마무리 격으로 식후땡까지 하고 있으니 응당 기분이 좋을 법도 한데,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는 것처럼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원인은 물론 그 사람 때문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답도 없다고들 하지만, 설마 이차영도 그럴 줄은 상상도 하질 못했다. 막말로 쌍욕을 퍼붓거나 모욕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형이 아깝다고 했을 뿐인데, 남자 오메가한테서 태어난 조카가 안됐다고 스치듯 한마디 했을 뿐인데, 정색하며 선을 긋던 태도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툭, 떨어트린 꽁초를 구둣발로 짓이긴 뒤에 최승화는 차에 올랐다. ‘형 집’이라고 입력된 목적지를 누르려다가 생각을 바꿔서 호텔 이름을 입력했다.

기분도 꿀꿀하고, 오랜만에 진탕 퍼마시고 싶지만 그러기엔 아직 시간이 너무 일렀다. 근처 호텔에서 뒹굴대다가 클럽으로 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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