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24/28)

3.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무척이나 새파랬다. 조금만 시선을 내리면 하늘 못지않게 푸른 바다와 유유자적하게 떠 있는 몇 대의 요트들이 보였다.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는 각양각색의 활엽수와 여러 개의 풀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리조트 전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놀기엔 다소 이른 시간인데도, 부지런하게 아침부터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정확히 오전 9시 30분이 되자 손목시계가 작게 울기 시작했다. 야박하게 바로 멈추는 대신, 이차영은 속도를 줄여 몇 분 더 걸은 뒤에야 러닝머신 전원을 껐다.

“후우…….”

내뱉는 숨에서 단내가 느껴졌다. 실내에는 에어컨 바람이 빵빵하게 나오고 있지만, 30분이 넘도록 쉬지 않고 계속 뛰었더니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닦고 곧장 샤워실로 향했다. 아침부터 운동을 즐기는 VIP 고객은 없는지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덕분에 부담 없이 샤워를 마친 다음, 고층에 머무는 일부 투숙객들만 이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복도는 조용했다. 객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이차영은 거실을 지나쳐서 안쪽에 있는 침실로 직행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나올 때 분명 온도를 좀 높이고 나왔는데, 그새 또 확 낮췄는지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침대 위의 하얀 이불은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픽 웃으며 걸음을 뗀 이차영은 밤새 드리워져 있던 커튼부터 걷었다. 다음은 서규하를 깨울 차례였다. 이불로 온몸을 꽁꽁 싸맨 채 얼굴만 내놓고 자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 옆에 걸터앉으며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규하야, 일어나.”

“…….”

“아침 먹자.”

거듭 흔들어 깨우자 그제야 부스스 눈을 떴다. 인상을 찡그리고도 순순히 일어나서 앉는 걸 보고 이차영은 또 한 번 소리 없이 웃었다. 짧은 머리가 눌려서 사방으로 뻗친 게, 누가 봐도 지금 막 잠에서 깬 사람의 모습이었다.

서규하는 앉은 채로 마른세수를 몇 번 하더니 잠이 덜 깬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몇 시야?”

“10시 다 됐어.”

어제와 비슷한 기상 시간이었다. 서규하는 이내 두 팔을 쭉 뻗으면서 한껏 기지개를 켰다. 아직 시차 적응이 덜 됐는지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더니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그에 비해 이차영은 한눈에도 생기가 넘쳐 보이고, 방금 씻은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머리카락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하여튼 언제 어디서든 쓸데없이 부지런한 놈다웠다.

“아침은 뭐 먹을래?”

“아무거나 상관없어. 너는?”

“나도 별 상관 없는데……. 그럼 샌드위치 같은 걸로 간단하게 때울까?”

“그러든가.”

이차영은 호텔 안내 책자를 팔락팔락 넘기다가 룸서비스 메뉴가 적힌 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무난한 걸로 주문한 다음 뒤돌아서니 서규하가 한 손으로 어정쩡하게 핸드폰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 해?”

“엄마한테 전화 걸었어.”

경쾌하게 울리던 전화 연결음이 사라지면서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빠!

4, 5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우렁차게 들리는 목소리에 이차영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간 그는 서규하의 뒤쪽에 걸터앉으며 한 손으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다른 손은 핸드폰 액정 속 아들을 향해서 다정하게 흔들어 보였다.

“규영아. 저녁은 먹었어?”

- 네. 할머니가 고기 구워 주셨어요!

“그랬어? 맛있었겠네. 양치질도 했지?”

- 네!

본의 아니게 선수를 빼앗긴 서규하도 질세라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오늘 동생들이랑 재밌게 놀았어?”

- 네! 아까 아까 전에는 다른 할머니도 만났어요! 규영이 예쁘다고 용돈 많이 줬어요. 고모한테도 받았어요!

“그랬어?”

규영이가 말한 다른 할머니는 이차영의 어머니였다. 사돈지간이기에 앞서 엄마들끼리 절친한 친구 사이이다 보니, 지금도 종종 만나서 수다를 떤다고 들었다.

- 아빠 언제 와요?

“이제 두 밤만 더 자면 갈 거야.”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이차영의 얼굴에 거듭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도 서규하는 별생각이 없겠지만, 규영이를 대할 때 보통의 부모들이 어린 자녀에게 쓰는 표현이나 행동을 제법 자연스럽게 하곤 했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면 새삼 둘이 함께 가정을 꾸려서 아이를 키운다는 실감이 났다.

“규영아, 아빠 보고 싶어?”

- 네!

“둘 중 누가 더 보고 싶은데?”

대답은 규영이 옆에 앉아 있던 정은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너는 애한테 뭐 그런 걸 묻고 그래?

“궁금하니까 그렇지.”

- 규영아, 다른 아빠가 더 보고 싶어요, 하고 말해.

“참나, 엄마는 대체 누구 편이야?”

- 차영이 편이라고 하면 또 삐지게?

“또는 무슨.”

두 밤만 자고 꼭 가겠다고 한 번 더 아이에게 약속한 뒤에, 서규하는 기분 좋게 전화를 끊었다.

필요가 없어진 핸드폰을 무성의하게 내려 두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난 사람처럼 고갤 돌려 이차영을 쳐다봤다.

“진짜 신기하지 않냐?”

“뭐가?”

“규영이 말이야, 아빠랑 떨어져 있어도 안 울잖아. 수빈이는 잠깐만 혼자 둬도 난리가 난다던데.”

사실 굳이 멀리서 예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저번에도 둘이서 여행을 다녀온 뒤에 애를 데리러 갔을 때, 잠깐 차를 마시는 동안 엄마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규하 넌 지금 규영이만 했을 때 말도 못 할 정도로 사고뭉치였는데, 밤에 자기 전에는 그렇게 엄마를 찾았어.’

‘내가 그랬다고?’

‘기억 안 나? 엄마 맹장 수술받고 입원해 있었을 때, 네가 집에 엄마 없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결국 한밤중에 네 아빠가 너 안고 병실로 찾아왔던 거. 네 아빠 말로는 세 시간이 넘도록 대성통곡을 했다는데, 엄마 옆에 눕자마자 잠들어서 거짓말인 줄 알았어.’

‘……몰라. 기억 안 나.’

‘사진을 찍어 둘 걸 그랬네. 아무튼, 너한테 비하면 규영이는 진짜 애어른 같아. 의젓하고, 차분하고. 보면 볼수록 차영이랑 판박이라니까?’

결론은 늘 그렇듯 이차영에 대한 칭찬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어쨌거나 자신이 보기에도 규영이는 나이에 비해 확실히 차분하고 얌전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긴 했다.

뭐, 그래 봤자 아직은 한 줌도 안 되는 귀여운 꼬맹이지만.

“야.”

“응?”

“너도 어릴 때 별로 안 울고 그랬어? 엄마랑 떨어져 있어도 안 찾고?”

“음, 아마 그랬던 거 같은데. 부모님 두 분 다 바쁘신 걸 아니까 철이 좀 일찍 들었던 거 같아.”

“네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안 민망해?”

“전혀.”

티격태격하는데 멀리서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 내가 나갈게. 몸을 일으킨 이차영이 객실 문을 열어 주자 호텔 직원이 카트를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서규하는 뒤늦게 욕실로 들어가서 세면대 앞에 섰다.

세안을 마치고 고갤 든 순간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검은색 민소매 티 위로 드러난 목 곳곳에 불그스름한 자국이 있는 게 보였다.

‘개새끼, 며칠만 참아 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알았다는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은 제가 병신 쪼다였다. 처음부터 하반신만 집중 공략하길래 안심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 씻을 때 보니 온몸이 얼룩덜룩했다. 원래도 집요하게 물고 빨아 대는 놈이지만 이번엔 일부러 더 심하게 씹어 놨다는 데에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씻고 나간 서규하는 순식간에 샌드위치 하나를 해치운 다음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수영복 어디에 있어?”

“소파 위에 올려 뒀어. 벌써 나가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뽕 뽑아야지.”

소파 쪽으로 다가가 보니 옷걸이에 걸린 채 반듯하게 누워 있는 수영복이 보였다. 타이트한 반바지부터 입은 다음, 잠깐 망설이다가 래시가드 상의도 집어 들었다.

표정엔 불만이 가득했다. 자고로 이런 데서는 몸매 자랑도 좀 하고, 가벼운 복장으로 물놀이를 즐기는 게 제맛이건만. 웬 미친놈이 몸 곳곳에 쪼가리를 남긴 탓에 물 건너갔다.

남의 시선 따윈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서였다. 섹스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자국을, 어린애와 청소년들도 많은 곳에서 당당하게 드러내 놓고 다닐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는 않았다.

잠시 후에 두 사람은 나란히 룸을 나섰다. 누가 봐도 풀장에 어울리는 차림새인 서규하와 달리 이차영은 흰 셔츠에 연한 갈색 반바지를 입고 손에는 태블릿 PC를 든 채였다.

사유지에서 바다 수영을 하거나 회원제 클럽에서 조용하고 쾌적하게 수영을 즐기는 걸 훨씬 더 선호하지만, 굳이 이렇게 사람이 붐비는 리조트를 찾은 것은 순전히 서규하의 취향에 맞춘 결과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이차영의 시선이 서규하의 목가에 닿았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호선을 그렸다. 투덜대면서도 긴팔 수영복을 입은 걸 보니 일부러 여기저기에 키스 마크를 잔뜩 남긴 보람이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마자 후끈하고 습한 공기가 느껴졌다. 바로 앞에 VIP 객실 전용 풀장이 있었지만 서규하는 미련 없이 그곳을 지나쳤다.

5분 남짓 걸어갔더니 워터 파크를 축소시켜 놓은 듯한 시설이 나타났다. 다들 어찌나 부지런한지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이차영은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커다란 야자수들을 따라서 줄지어 놓여 있는 비치 베드 앞에 멈춰 섰다.

“난 여기서 쉬고 있을게.”

“알았어.”

편하게 몸을 기댄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잠시 후에 구명조끼를 착용한 서규하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차영은 거듭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머쓱해할 법도 한데 날다람쥐처럼 이곳저곳을 잘도 누비고 다녔다.

한동안 눈으로 서규하의 모습을 좇다가 뒤늦게 태블릿 PC를 켰다. 주머니에 넣어 온 이어폰을 한 짝씩 귀에 꽂고, 어제 보다가 만 영화를 재생시켰다.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여기에 있는 동안이나마 일에서 해방되고자 며칠간 다소 무리해서라도 업무를 진행한 보람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발치 쪽으로 다가오는 서규하를 보고 이차영은 이어폰을 빼면서 베드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손목시계를 보니 그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하, 피곤하다.”

구명조끼를 벗어 던진 서규하가 빈 옆자리에 털썩 드러누웠다. 이차영이 시선으로 그런 서규하를 천천히 훑었다. 젖은 옷이 피부에 착 달라붙어서 미미하게 도드라진 유두와 중심부가 몹시도 섹시하게 보였다.

속마음을 정직하게 드러냈다간 어떤 말을 듣게 될지 안 봐도 뻔했기에 눈으로만 조금 더 음미하다가, 선량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시원한 거 좀 마실래?”

“좋지. 뭐 마실래?”

“앉아 있어. 내가 갔다 올게.”

건물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자그마한 오픈형 카페가 있었다. 망고주스 한 잔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다.

“차영이 형?”

고갤 돌리자 뜻밖에도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긴가민가하며 말을 걸었던 상대의 얼굴에 금세 환한 웃음이 번졌다.

“형 맞지?”

말을 건 사람은 사촌 동생인 최승화였다.

자신과 거의 맞먹는 키에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외모, 알파치고는 슬림한 몸매. 잔디처럼 초록빛으로 물든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2년여 전에 녀석이 잠깐 귀국해서 만났던 때와 전혀 달라진 점이 없었다.

이차영은 곧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째 이런 데서 다 만나네. 놀러 왔어?”

“응. 한 학기 더 휴학하고 내년에 복학하기로 했거든. 와, 근데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여기서 이렇게 딱 마주치지?”

“그러게.”

그룹 계열사에서 운영하는 리조트이니 언제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지만, 같은 기간에 같은 장소에서 이렇게 마주친 게 신기하긴 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을 보면서 이차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최승화는 조부모님과 함께 영국에 거주 중인 막내 고모의 아들로, 유학생 시절에 한집에서 잠깐 같이 산 적이 있었다. 당시 녀석은 딱 지금의 규영이만 한 또래였는데, 한 주먹도 안 되는 녀석이 형, 형 하면서 따르는 게 귀여워서 꽤나 예뻐했었다.

그때가 벌써 십여 년 전이니 지금은 어엿한 20대 중반이지만, 어릴 때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아 있는 탓에 아직도 철부지 어린애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이랑 같이 온 거지? 규영이는 어디 있어? 보고 싶은데.”

“이번엔 규하랑 둘이서 왔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최승화의 얼굴이 금세 떨떠름하게 변했다.

“둘이서만 왔다고? 왜?”

어찌 보면 무례한 질문이지만 이차영은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대신 녀석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1년에 한 번쯤은 둘이서만 돈독한 시간을 보내고 싶거든. 너도 나중에 결혼해 보면 알 거야.”

“그럼 규영이는 지금 어디 있는데?”

“할머니가 봐주고 계셔. 규하한테 인사하러 갈래?”

최승화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빙긋이 웃는 얼굴로 뒤늦게 대답했다.

“그러고 싶은데,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바로 가 봐야 돼. 나중에 문자 해도 돼?”

“당연하지.”

“그럼 먼저 갈게. 재밌게 놀아, 형.”

손을 흔들어 보인 녀석이 먼저 자리를 떠났고, 이차영은 뒤늦게 카페 직원으로부터 주스 컵을 건네받았다.

길을 따라 걷기를 잠시, 멀리서 눈에 들어오는 장면에 이차영은 멈칫했다. 서규하가 쉬고 있는 비치 베드 주변에 웬 여자 두 명이 서로 팔짱을 낀 채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걸음이 빨라졌다. 근처에 이르기 무섭게 이차영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규하야?”

입으로는 서규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시선은 눈앞의 여자들을 향했다. 뒤늦게 아래쪽을 바라보자 서규하가 뒷목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고, 너랑 나랑 둘이 온 거면 넷이서 같이 놀자고 하네.”

때를 놓치지 않고 여자 한 명이 불쑥 끼어들었다.

“두 분 다 알파시죠? 멀리서 봐도 너무 잘생기셔서 아까부터 계속 눈길이 가더라고요. 저희도 둘이서 왔는데, 괜찮으시면 같이 노는 건 어떠세요?”

눈이 있다 보니 의도치 않아도 상대의 외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배우처럼 세련되게 생긴 얼굴에 피부색은 건강해 보이고, 옆구리가 움푹 파인 과감한 디자인의 수영복이 몹시도 잘 어울렸다.

그 옆에 있는 여자도 평균 이상의 미모를 자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 있는 미소로 생긋이 웃는 그녀들을 보면서 이차영도 가볍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제안은 고마운데, 우리 둘 다 결혼했어요.”

“……예?”

언제 웃었냐는 듯 여자의 표정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이차영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시늉을 하자 동공마저 급격하게 흔들렸다.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시야에 콱 박히듯 들어왔다.

“두, 둘 다 유부남이에요?”

“네. 사실 부부끼리 놀러 온 거예요. 얘랑 나랑,”

“야!”

기겁한 서규하가 외치듯 말을 자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재밌게 놀다 가세요. 억지로 웃으며 통보 같은 인사를 남기고는, 그대로 이차영의 팔을 낚아채듯 붙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뒷모습만 봐도 씩씩대는 기색이 느껴져서 또 웃음이 나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엄살 아닌 엄살을 피웠다.

“규하야, 나 팔 아파.”

그 말에 서규하가 멈칫하며 잠깐 걸음을 멈췄다. 별로 세게 잡지도 않았구만. 툴툴대면서도 이차영의 팔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서 손끝을 붙잡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진심 어린 미소가 절로 나왔다. 가끔 뵐 때마다 어머님은 규하가 철이 안 들어서 걱정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시지만 이차영의 생각은 달랐다.

예전 같았으면 제가 아프다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질 않거나 오히려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었을 텐데, 함께 규영이를 키우는 동안 알게 모르게 행동도 표현도 많이 유해졌다. 아니, 알게 모르게가 아니라, 티 나게 많이.

그동안 계속 걸어간 서규하는 커다란 나무 기둥 뒤에 이르러서야 이차영의 손을 놓아주었다. 누워 있던 비치 베드 쪽을 힐끗 쳐다본 뒤에 불만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뭐 하러 해?”

“무슨 말?”

알면서도 모르는 척 되묻자 매끈한 미간이 좀 더 구겨졌다.

“방금 네 입으로 했던 말도 까먹었어? 내가 중간에 안 끊었으면 우리 둘이 결혼했다고 말할 생각이었지?”

행동만 달라진 게 아니라 눈치도 제법 빨라졌다. 이차영은 미안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넌지시 팔을 뻗어 서규하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화났어?”

“화난 건 아닌데……. 알잖아. 그런 말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자주 볼 수밖에 없거나 행동반경이 겹치는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형질을 오픈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수군대거나 신기해하거나, 혹은 불쌍하다는 시선을 보낼 인간들이 태반일 텐데, 어떤 식으로든 기분을 잡칠 게 뻔한 이야기를 제가 먼저 할 이유가 없었다.

이차영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뭐 때문에 먼저 입을 털려고 한 거지?

“미안. 불안해서 그랬어.”

“……!”

뜻밖의 말에 서규하는 멈칫했다. 불안해서 그랬다고?

“뭐가?”

“내가 자리 비우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너한테 접근했잖아. 그것만 봐도 목적이 뻔해 보여서……. 결혼했다는 말이라도 안 하면, 계속 그 여자들이 집요하게 달라붙을 것 같았어. 만일 내가 방해 안 했으면 오케이할 생각이었어?”

“그럴 리가 있냐? 여자한테는 아예 관심 없는 거 알잖아.”

“여자가 아니라 예쁘장한 남자였으면 넘어갔을 거고?”

“당연하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가, 이내 픽 웃으며 이차영의 복부를 가볍게 툭 쳤다.

“표정 풀어, 새꺄. 농담인 거 알잖아. 이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나보단 널 더 노리고 있었을걸?”

“아냐.”

이차영의 입에서 단호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랬으면 너한테 말을 걸 게 아니라 나를 따라왔겠지. 특히 뒤에 서 있던 여자는 대놓고 너만 쳐다보고 있더라.”

“…….”

“서규하, 아직 안 죽었네.”

“당연하지.”

쿨한 척 대답하는데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고 했다. 이차영이 립 서비스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걸 알지만, 띄워 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긴 했다.

“그건 언제 줄 거야?”

“응?”

“손에 든 거 말이야. 나 주려고 산 거 아니었어?”

턱짓으로 한 곳을 가리키자 이차영의 시선이 움직였다. 이내 그는 간식으로 반려견의 관심을 끄는 것처럼, 표면에 물방울이 잔뜩 맺힌 플라스틱 컵을 장난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맞긴 한데, 맨입으로는 안 돼.”

“쪼잔하기는.”

서규하는 툴툴대면서도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휘익, 멱살을 잡아당겨 가까워진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당당하게 요구했다.

“내놔.”

“겨우 이걸로 퉁치려고?”

“겨우? 내 입술이 이깟 주스 한 잔보다 못하다는 거야?”

그러자 군말 없이 컵을 내미는 손이 보였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받아 든 서규하는 뚜껑을 열고 컵째로 시원하게 주스를 들이켰다.

놀 만큼 실컷 놀았겠다, 잠깐 들어가서 쉴 생각으로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걷던 이차영이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참, 좀 전에 승화 만났어.”

“그게 누군데.”

“내 사촌 동생. 우리 결혼식 할 때 왔었고, 너한테 따로 소개도 해 줬는데. 기억 안 나?”

“안 나.”

이제 진짜로 코 꿰였단 생각에 안 그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하도 많은 사람들이 대기실을 들락거려서 누가 누구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나중에 저녁이나 같이 먹을래?”

“그러든가.”

이차영의 친척이라면 둘이 부부 사이라는 걸 알고 있을 거란 생각에 서규하는 별 고민 없이 오케이했다.

하지만 쿨하게 승낙한 것이 무색하게도 저녁은 둘이서만 먹어야 했다. 정작 그 사촌 동생이라는 녀석 쪽에서 난색을 표한 탓이었다.

‘친구들이랑 와서 자기만 빠지기가 좀 그렇다네. 미안해.’

이차영이 말을 전하며 미안해했지만 서규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지인도 아니고 더군다나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사람과 겸상하는 것보다 당연히 이차영과 둘이서만 밥을 먹는 게 훨씬 더 편했다.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틈날 때마다 원 없이 물놀이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휴가가 끝이 났다. 저녁 비행기를 탔지만 한국은 새벽 시간이었고, 집에 도착한 서규하는 곧바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오는 내내 두 다리를 쭉 뻗고 나름 편하게 누워서 왔지만 집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기절한 사람처럼 곯아떨어졌다가 어느 순간 잠에서 깼다. 눈을 떠 보니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잠깐 자고 일어난 거 같은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2시가 넘어 있었다. 서규하는 긴 하품을 흘리면서 기지개를 켠 뒤에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일어나셨어요?”

며칠 만에 보는 도우미가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식탁에 앉아 대충 배를 채운 서규하는 곧장 드레스 룸으로 직행했다. 잠옷 대용으로 입는 민소매 티와 반바지를 훌훌 벗어 던지고, 상큼한 민트색 셔츠에 연한 갈색 바지를 매치해 입었다.

거울로 옷매무시를 한 번 확인한 뒤에 지갑과 차 키, 선물이 든 쇼핑백까지 잊지 않고 챙겨서 집을 나섰다. 차에 오른 서규하는 곧바로 핸들을 돌리면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본가였다. 휴가 동안 부모님 댁에 맡겨 놨던 규영이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집에 도착해서 대문과 현관문 초인종을 차례로 누르자 모친이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왔어?”

“네. 이거 받으세요.”

“아무것도 사 오지 말라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은희의 손은 쇼핑백을 향했다. 넌지시 안을 들여다보는 동안 서규하는 무언가를 찾듯이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규영이는요?”

“좀 전에 잠들었어. 점심 먹고 나서 졸려 하길래 일부러 너한테 전화 온 거 말 안 했어.”

“잘하셨어요. 밤에 저 찾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첫날엔 자다 깨서 좀 칭얼거렸는데, 네 아빠가 안고 토닥이니까 금방 다시 자더라. 그저께는 태선이 집에서 하룻밤 자고 왔어.”

“아빠가 허락해 줬어요?”

“어휴, 말도 마. 할아버지랑 계속 있자면서 애 붙잡고 징징대서 나한테 혼났어.”

안 봐도 그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말이 좋아서 혼난 거고, 왜 애를 곤란하게 하냐면서 최소 등짝 스매싱을 당했을 게 틀림없었다.

첫 손주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양쪽 집안 다 손주 사랑이 대단했다. 그 무뚝뚝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양반인 이차영의 아버지도 규영이랑 찍은 사진에서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고 있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속살이 뽀얀 배를 포크로 꼭 찍어 아들에게 건네면서 정은희는 여행이 어땠는지 물었다. ‘좋았다’는 짧은 대답을 듣고는 조심스레 아들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규하야.”

“…….”

일순 서규하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모친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뭔가 부탁하거나 은밀한 제안을 할 때 엄마의 목소리 톤이 달라지는 건 지금도 여전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소 껄끄러운 주제가 모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도 둘째 생각은 아예 없어?”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입 안에서 산산조각이 난 배를 꿀꺽 삼킨 뒤에 서규하는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알잖아. 그런 얘기 싫어하는 거.”

“알지. ……진짜 솔직하게 말하면, 엄마는 규영이만 잘 키워도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 아들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받았던 충격은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오죽하면 규영이가 여섯 살이 되고, 눈앞에서 사부작거리며 노는 모습을 보면서도 규하가 애를 낳았다는 사실이 가끔씩은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어쨌든, 둘째 손주 욕심이 조금도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규영이처럼 예쁜 아이가 한 명 더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에 앞서 정은희는 엄마였다. 누가 뭐래도 배 아파 낳은 막내아들인데, 평생을 베타처럼 자라 온 데다 자존심도 강한 녀석이 또다시 임신으로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럼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데.”

“왜긴. 규영이 때문이지.”

한숨 섞인 대답을 들은 서규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친에게 되물었다.

“규영이가 왜. 설마 동생 갖고 싶대? 근데 규영이는 내가 아기 못 낳는 걸로 알고 있을 텐데.”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는데, 늘 착하고 얌전하던 규영이가 생각지도 못한 폭탄을 던진 날이 있었다.

어린이집에 다녀와서 조르르 달려오더니, 조막만 한 손으로 제 다리를 꼭 붙잡은 채 한껏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자기도 동생이 갖고 싶다고.

듣자 하니 학부모 중 누군가가 갓난아기를 데리고 어린이집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뜻밖의 말에 몹시 당황한 서규하는 ‘어, 아빠가 한번 생각해 볼게.’ 하는 말로 일단은 그 상황을 모면했다. 간식 먹고, 뛰어놀고 그러다 보면 금세 잊어버릴 거라고 자위하면서.

하지만 크나큰 오산이었다. 이후로 틈만 나면 규영이는 아빠 배에 관심을 보였다. 어디 관심뿐이었을까? 배는 언제 나오는지, 남자 동생인지 여자 동생인지 등을 종알종알 물어볼 때마다 서규하는 몹시도 곤란함을 느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진땀을 뻘뻘 흘리다가, 결국 이차영이 수습에 나섰다.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애를 제 앞에 앉혀 두고 이차영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아이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아빠는 배 속에 있는 아기집이 약해서 아기를 또 갖는 건 힘들다고.

그 뒤는 뭐……. 말 그대로 규영이가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둘이서 그런 애를 달래느라 씨름을 했다. 품에 안고 어르며 토닥이다가, 동생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집에서 자그마한 관상용 물고기를 키우는 걸로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날 이후로 규영이는 한 번도 동생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애 때문에 엄마가 둘째 이야기를 꺼냈다고 하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저껜가 규영이 데리고 밥 먹으러 갔는데, 옆 테이블에 있는 아기를 자꾸 쳐다보더라고. 네 아빠가 눈치 없이 동생 갖고 싶냐고 그러니까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하더라. 동생이 진짜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빠가 못 낳아 준다 했다고.”

이차영이 말했는데 괜히 자신이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원망의 화살은 뒤늦게 한 방향을 향했다. 아빠는 왜 눈치 없이 애한테 그딴 걸 물어 가지고.

“진짜 아예 생각 없어? 아예?”

“……없어. 알잖아요. 규영이도 어쩔 수 없이 낳은 거.”

정은희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옅은 한숨으로 속마음을 흘려보냈다. 누차 말했지만 규하가 애를 또 갖는다 생각하면 걱정이 앞서기도 하고, 아무리 부모라 해도 다 큰 자식의 가족계획까지 간섭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그래. 좀 쉬다가 저녁 먹고 가. 아니면 차영이도 퇴근해서 여기로 오라 하고.”

“네. 그럼 가서 좀 쉴게요.”

몸을 일으킨 서규하는 미련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정은희는 거듭 한숨을 흘리면서 미지근하게 식은 찻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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