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3/28)

2.

달칵-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이차영은 침대에 편하게 다리를 쭉 뻗은 채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문소리를 듣고 고갤 들더니 곧장 몸을 일으켰다.

“앉아 봐. 머리 말려 줄게.”

“됐어. 짧아서 금방 말라.”

“침대 젖는 거 싫어서 그래.”

“깔끔떨기는.”

못마땅하게 툴툴대면서도 서규하는 침대로 직행하는 대신 협탁과 세트인 의자를 빼고 앉았다. 딱히 드문 일은 아니었다. 셀프 머슴 짓이 몸에 완전히 배기라도 했는지, 지금처럼 침실에 같이 있으면 머리를 말려준다거나 갈아입을 옷을 갖다 주겠다는 말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욕실에서 드라이기를 가져온 이차영이 위잉 하며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그동안 서규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후부터 방치하다시피 했더니 여기저기서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차례로 하나씩 확인하다가, 돌연 풉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작은 변화를 귀신같이 알아챈 이차영이 드라이기 바람을 약하게 낮추고 말을 걸었다.

“뭐 재밌는 거라도 있어?”

“어. 존나 재밌어.”

서규하는 곧 희희낙락하며 이차영에게 핸드폰을 보여 줬다. 아까 운동장에서 이어달리기를 하던 모습이 동영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네가 찍었어?”

“아니. 윤병철이 보내 줬는데, 미친놈 보는 줄 알았대.”

원래는 ‘오늘 쩔었다’면서 엄지 척 이모티콘을 몇 개나 찍어 보냈지만 자체적으로 각색해서 전달했다. 이차영은 조금도 기분 나빠 하는 기색 없이 동문서답 같은 말을 했다.

“나 오늘 좀 멋지지 않았어?”

“응. 전혀.”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누가 그런 개소리를 해? 부정은 그냥 부정이지.”

“내 생각은 좀 다른데. 규하 너도 좋은데 싫다고 할 때 있잖아.”

“내가? 언제?”

금시초문인 일에 고개를 휙 돌리며 되묻자, 이차영이 빙긋이 웃는 낯으로 그런 서규하를 내려다봤다.

“섹스할 때.”

“……!”

“좀 거칠게 하거나 박으면서 앞에 만져 주면, 말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엄청 느끼잖아.”

“웃기시네. 내가 언제 그랬다고.”

“매번 그러지. 억울하면 좀 이따 확인해 볼래?”

“꺼져.”

투덜대며 앞을 바라보는 서규하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음담패설로는 자신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희한하게 이차영한테는 말려들거나 제대로 못 받아칠 때가 많았다. 멀끔한 낯짝으로 상상도 못 할 타이밍에 불쑥불쑥 치고 들어오니 타격이 좀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소원은 생각해 봤어?”

“아직. 고민 중이야.”

알고 있는 척했지만 사실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운동회가 끝난 뒤 오랜만에 애를 데리고 셋이 같이 영화를 보고, 쇼핑몰 구경도 하고, 저녁까지 밖에서 해결하는 동안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웠다.

뒤늦게 고민에 잠겼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갖고 싶은 것도 없고, 필요한 것도 없고. 전에도 마땅히 할 만한 게 없어서 ‘하루 동안 말 안 하기’, ‘극존칭으로 말 높여서 하기’ 등등 유치하기 짝이 없는 미션을 부여했는데, 물론 이차영은 전부 수월하게 해냈었다.

아니면 ‘내일 아침까지 물구나무서서 팔로 걷기’ 같은 걸로 해 볼까? 근데 이것도 해내면 쫌 소름일 거 같은데…….

더는 고민하기도 귀찮아서 쿨하게 상대방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그 전에 우선 가볍게 먼저 떠보았다.

“넌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거 있어? 내가 해 줬으면 하는 거나.”

“엄청 많지.”

“침대 어쩌고 하는 지랄 맞은 거 말고.”

“지랄 맞다니, 나한테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중요한 거 다 얼어 죽었나 보네.”

몹시도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이차영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계속 머리를 말려주면서 말을 이었다.

“왜. 나한테 양도해 주게?”

뭐든 기민한 놈 아니랄까 봐 이럴 때도 기가 막히게 눈치가 빨랐다. 그냥 없던 일로 할까 싶은 마음이 언뜻 들었지만, 이미 말을 꺼냈으면서 무르기도 그랬다. 거울에 비치는 이차영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가, 서규하는 마음을 굳히고 거듭 강조해서 말했다.

“지랄 맞은 건 진짜 안 해.”

“잠자리랑 관련된 부탁만 아니면 되는 거지?”

“손발 오그라드는 말도 절대 안 해.”

“자기야 같은 거?”

“잘 알고 있네.”

시큰둥하게 대답하긴 했는데, 왠지 모를 초조함과 께름칙함이 뒤늦게 조금씩 들었다. 대화를 이어 갈수록 어째 제 무덤을 제가 판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또 피해야 되는 게 뭐가 있지? ……그냥 지금이라도 무를까?’

시끄럽던 드라이기 소리가 멎었다. 거의 동시에 이차영이 불쑥 제 손을 들이밀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볍게 주먹을 쥔 채로 새끼손가락만 위를 향하고 있는 동작이었다.

“뭐야?”

“약속하자고. 못 한다고 배 째라 하면 한 달간 야식 금지, 아니면 차 키 압수하기.”

내기에서 이긴 사람이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을 말했을 때 ‘못 하니까 배 째라’며 패악을 부린 이가 있긴 했다. 서규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이차영을 올려다봤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응. 한 번 더 먹튀 당하는 건 싫거든.”

“먹은 적도 없는데 먹튀는 무슨.”

“얼른 해 줘. 나 팔 아파.”

이어지는 가벼운 재촉에, 서규하는 마지못해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서로의 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을 찍고, 존나 유치하게 복사까지 한 뒤에야 손을 놓아주었다.

“소원이 뭔데?”

“잠시만.”

싱긋이 웃어 보인 이차영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녀석의 손에는 웬 자그마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뭐야, 그건?”

시뻘건 상자에 금색으로 영어가 휘갈겨 있는 게 한눈에도 범상치 않다는 느낌이 왔다.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상자를 협탁에 올린 이차영이 뚜껑을 열었고, 넌지시 안을 들여다본 서규하는 금세 인상을 구겼다.

상자 속에 든 건 작스트랩이었다. 기억이 맞다면 올해 생일 때 친구들 중 한 놈이 선물이랍시고 준 건데, 나이를 처먹고도 짓궂고 유치한 아이템을 선물로 주는 건 여전했다.

흔히 말하는 삼각팬티도 곧잘 입는 편이긴 하지만 작스트랩은 얘기가 달랐다. 국부 보호가 필요한 운동선수도 아니고, 입은 듯 만 듯한 속옷으로 엉덩이를 드러내는 취미도 없으며, 집안일을 담당하는 어머니뻘의 여인들에게서 이상한 눈초리를 받는 것도 싫었다.

뭣보다 디자인이 죄다 하나같이 구렸다. 성기를 감싸는 앞부분이 운동화 끈처럼 생겼거나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황금색 속옷도 있었다. 그리고 엉덩이 부분은 끈 두세 가닥으로 이어진 게 전부였기에 보자마자 쌍욕을 하면서 상자 뚜껑을 덮었다.

백 년이 지나도 입을 일이 없다 확신하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걸로 기억하는데, 왜 그게 지금 눈앞에 다시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걸 왜 네가 갖고 있어?”

“아주머니가 물어보더라고. 새거 같은데 진짜 버리는 거 맞냐고. 그래서 아니라고 했지.”

“버린 거 맞아.”

“네가 버렸지 내가 버린 건 아니잖아.”

“말꼬리 물고 늘어지지 마.”

찌푸린 미간에 못마땅함이 묻어났다. 살을 맞대고 산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말발에서 밀리는 건 지금도 여전했다.

불평은 그보다 한발 더 늦게 찾아왔다.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으면 그냥 버리면 되지, 하필이면 왜 또 그걸 이차영한테 물어본 거냐고.

“규하 넌 뭐가 마음에 들어? 난 이게 제일 괜찮은 거 같은데.”

비닐째로 포개져 있는 속옷을 뒤적거리던 이차영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흰색 밴드에 알 수 없는 영어가 적혀 있고, 나머지 부분은 검은색이라서 그나마 제일 무난해 보였다.

“나도 그게 제일 나은…, 누가 입는대?”

반쯤 말려들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더불어 생각난 사실에, 서규하는 턱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기억하지? 침대에서 하는 짓은 소원에서 빼기로 한 거.”

탁월한 선견지명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겼다는 생각에 더없이 홀가분하게 몸을 일으키는데, 이차영이 살짝 걸음을 움직여 그 앞을 막아서다시피 했다.

“기억하지. 빨리 보고 싶으니까 얼른 갈아입고 와.”

생글생글 웃는 낯짝을 바라보면서 서규하는 천천히 미간을 구겼다.

“장난해? 안 한다고 했잖아.”

“안 해. 침대에서는.”

침대에서는 안 한다고? 그러면…….

“서서 할 거야.”

서규하는 한발 늦게 말뜻을 이해하고 오랜만에 이를 세우며 으르렁댔다.

“네 머릿속엔 그딴 생각밖에 없어? 절대 안 해.”

“……약속했잖아. 안 지킬 거야?”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금세 마음이 약해졌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어째 순순히 넘어간다 싶었는데, 이런 함정이 숨어 있을 줄이야.

뭔가 묘하게 사기당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아주 조금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잠시 후, 서규하는 다시금 이차영과 시선을 마주하면서 꿀릴 것 없다는 표정으로 한 손을 내밀었다.

“내놔. 입고 올 테니까.”

***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몸이 한 번씩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앙다문 잇새로는 간헐적인 신음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팔뚝에 얼굴을 묻은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결국 서규하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냈다.

“언제까지 할 거야?”

“아직 멀었어. 지금 박으면 아프다고 할 거잖아.”

“흐읏!”

입구를 또 한 번 진득하게 핥아 대는 감각에 서규하는 진저리를 쳤다. 그러든 말든 이차영은 집요하게 쫓아가서 혀끝으로 입구를 간질이다가 잠시 입술을 떼며 말했다.

“허리 좀 뒤로 더 빼 봐. 자꾸 앞으로 도망가지 말고.”

“누가 도망갔다고 그래?”

욱한 마음에 내뱉은 말과 달리 서규하의 허리는 요지부동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까부터 한계였다. 엉덩이를 뒤로 빼느라 애매하게 꺾인 허리도 아프고, 벽을 지탱하느라 눌린 팔뚝도 아팠다. 무엇보다 바로 뒤에 꿇어앉은 이차영이 혀로 그곳을 핥을 때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됐, 으니까 그만하고 넣어.”

“괜찮겠어? 아직 손가락 두 개밖에 안 넣었는데.”

“괜찮다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존나 비위도 좋은 놈은, 펠라는 물론이고 뒤를 핥거나 혀를 밀어 넣는 짓도 스스럼없이 했다. 그걸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는 10분이고 20분이고 계속 얼굴을 처박고도 남을 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분은 개뿔. 체감상으로는 벌써 1시간도 더 지난 것 같았다.

“후우…….”

마침내 이차영이 얼굴을 뗐을 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이내 한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면서 바짝 붙어서는 느낌이 났다.

“넣을게.”

“천천히 해!”

이제는 완전 버릇이 되어 버린 말이 튀어나왔다. 알았어, 하는 대답과 함께 이윽고 뒤가 빠듯하게 벌어지는 느낌이 밀려왔다.

“하…, 씨….”

서규하는 입술을 달싹이며 안절부절못했다. 몇 년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몸을 겹쳤지만, 워낙 크고 존재감이 뚜렷하다 보니 삽입할 때마다 긴장감이 차올랐다. 처음에만 살짝 버겁고 금세 괜찮아진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오늘은 서 있는 자세로 받아서 그런지 저항감이 좀 더 크게 느껴졌다. 이때 힘을 주면 둘 다 괴로운 것을 알기에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잠시 후에 등 뒤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 들어갔어. 괜찮아?”

“안 괜찮다고 하면 뺄 거야?”

“아니.”

촉, 건강한 색으로 그을린 뒷목에 입을 맞춘 뒤에 이차영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서규하의 골반을 단단히 붙잡고, 시선은 둘이 이어져 있는 결합부를 향한 채였다.

기대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처럼 조금 덜 풀어 준 상태로 삽입을 하면, 깊숙이 넣었다 빼낼 때마다 입구 주변의 속살이 딸려 나오곤 했다.

“하아…, 흐읏….”

숨을 고르기 위해 내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페니스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갔다. 뒤늦게 시선을 거둔 이차영은 아래를 바짝 맞붙인 채 본격적으로 속도를 높였다.

“흣, 응, 하아, 흣!”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이 젖어 드는 느낌이 났다. 고개를 살짝 숙인 이차영이 붉게 달아오른 서규하의 귓가며 목덜미에 마구잡이로 입을 맞췄다. 잘근잘근 깨물면서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꽉 꼬집자, 서규하가 흠칫 놀라며 아래를 꽉 조였다.

“좀 더 세게 만져줄까?”

“물어보지 말고, 흣, 그냥 해!”

어째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했다. 침대에서는 곧 죽어도 지 좆대로 하는 주제에, 꼭 이럴 때만 한 번씩 의사를 물어보곤 했다.

이차영은 뜸 들이지 않고 나머지 한 손도 위로 이동해서 도드라진 유두를 동시에 꼬집어 댔다.

“흐읏!”

서규하의 입에서 속절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살짝만 건드려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곳을 동시에 자극하면서 굵직한 걸로 몸속 성감대까지 꾹꾹 누르며 쑤셔 대니 견뎌 낼 재간이 없었다.

“기분 좋아? 안에 엄청 젖은 거 같은데.”

제 몸이니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차영이 드나들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나서 처음에 버거워한 게 민망할 정도였다.

“하…, 가슴 빨고 싶다.”

“그럼 침대로 가든가.”

“그렇게는 못 하지.”

침대로 올라가는 순간 게임 오버인 걸 알고 있는데 장소를 옮길 리가 없었다. 촉, 촉, 입술에 살갗이 닿는 대로 계속 입을 맞추다가, 상체를 떼며 두 손으로 거듭 서규하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새 불긋한 흔적이 더러 남은 목덜미와 두드러진 견갑골, 곧게 이어지는 척추와 등 곳곳에 있는 잔근육 등을 차례로 탐닉하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와서 엉덩이 위쪽의 속옷 밴드에 닿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이차영은 서규하의 몸속 깊숙이 파묻고 있던 페니스를 천천히 빼내며 끝부분만 물리게끔 했다. 몸이 떨어진 만큼 간격이 생기면서, 박을 때마다 탄력 있게 흔들리던 둔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울대가 움직이며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벗은 몸은 이미 수도 없이 많이 봤고 심지어 벌어진 구멍 안의 속살까지 다 본 사이이건만, 고작 엉덩이를 가로지르는 얇은 끈 두 줄이 왜 이렇게 섹시하고 야하게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시금 페니스를 깊숙이 밀어 넣으면서 이차영은 서규하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이름을 불렀다.

“규하야.”

“왜.”

“근데 이거, 누가 선물한 거야? 친구들이 사 준 거 맞지?”

“……몰라.”

웬수 같은 친구 놈이 준 건 맞는데 셋 중 누군지는 알 길이 없었다. ‘또 이딴 거냐’고 정색했더니 셋 다 낄낄대며 웃던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귓가를 진득하게 핥는 애무가 느껴졌다. 뜨겁고도 습한 숨결에 또 한 번 젖꼭지가 바짝 곤두서고, 페니스 끝에서는 선액이 흘러나왔다.

“그만 좀 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밀어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차영은 손쉽게 서규하의 손목을 붙잡아 내린 다음, 귀 아래쪽 부분을 잘근대며 키스 마크를 남겼다.

“말해 봐.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사이즈가 딱 맞는 걸 선물한 거야?”

“모른다니까. 대충, 흐읏, 맞겠다 싶어서 샀겠지.”

이차영이라 해서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엉덩이에 끈 자국이 거의 남지 않을 정도로 딱 맞는 걸 보니 괜한 의심 아닌 의심이 들었다.

허리 밴드와 아래쪽 끈 사이로 훤히 노출된 엉덩이를 주무르면서 이차영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 갔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이런 거 입은 적 있어?”

“절대 없어.”

대답을 내뱉는 목소리가 꽤나 단호했다.

인간은 학습하는 동물이고, 서규하도 예외는 아니었다. 뭣도 모르던 시절이었으면 괜한 허세를 부리거나 약 올리는 말을 하고도 남았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쓸데없이 떠보는 짓은 일절 하지 않게 됐다. 그때마다 사람 숨넘어갈 정도로 몰아붙이거나 괴롭히는 짓을 번번이 당한 탓이었다.

“그래. 앞으로도 내 앞에서만 입어 줘.”

“……지랄. 누가 또 입는대?”

꿍얼대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면서 이차영은 계속 허릿짓을 이어 갔다. 깊숙이 치고 들어온 페니스가 몸속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서규하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힘들게 버티고 선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작정하고 페로몬을 뿜어 대는지 온몸이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맞닿은 서규하의 몸이 앞으로 떠밀릴 만큼 깊게 넣은 채로 이차영은 또다시 서규하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지금 너, 진짜 예뻐.”

“뭔 개소리야?”

“완전 섹시해.”

“돌았네.”

거친 대답과 달리 귓가에는 열이 올랐다. 이차영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서규하는 가쁜 숨을 몰아쉬기에 여념이 없었다.

스탠딩 섹스는 침대에서 할 때와 또 다른 맛이 있지만, 받는 쪽에서는 확실히 부담이 컸다. 지금도 이차영이 빠르게 움직이거나 한계까지 밀고 들어올 때면 발뒤꿈치가 들릴 정도로 몸이 밀리면서 자칫하면 짜부가 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슬슬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침대로 옮기자고 할까? 시발, 근데 그러면 틀림없이 네가 말한 거네 어쩌네 하면서 약 올릴 건데.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두는 건 나도 싫…….

“무슨 생각 해?”

“흐읏!”

또다시 양쪽 젖꼭지를 움켜쥐듯 꼬집는 손길에 서규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반사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이 한층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딴생각할 여유가 있어?”

“없어, 그런 거.”

즉각적인 부정이 튀어나갔다. 그나마 지금은 이차영이 설렁설렁 움직여서 버틸 만한 거지, 작정하고 박아 대면 생각을 하긴커녕 녀석의 몸짓을 따라가기도 벅찼다.

“나한테만 집중해.”

짧게 말한 이차영이 두 손으로 벽을 짚은 채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타이트한 조임과 쫄깃하게 들러붙는 감각이 미치도록 황홀했다. 찰진 내벽을 마음껏 음미하면서 무아지경으로 박아 대는데, 헐떡이며 신음하던 서규하가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이차영의 팔뚝을 붙잡았다.

“자, 잠깐만.”

“왜?”

“이제 이거 벗을래. 존나 갑갑해.”

그 말에 이차영은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아래로 내려간 손이 거침없이 서규하의 속옷 안으로 침범했다.

“엄청 미끌미끌하네.”

하지만 그걸 벗겨 주는 일은 없었다. 촉, 서규하의 얼굴을 돌려 가볍게 입을 맞춘 뒤에 이차영은 또다시 허릿짓을 이어 갔다.

“이거 벗고 싶다니까?”

“한 번은 그냥 하자. 진짜 섹시하고 예뻐서 그래.”

그리고 이 상태로 싸면 벽에도 안 튈걸?

태연하게 덧붙이는 개소리에 서규하는 이를 갈듯 내뱉었다.

“시발, 그게 걱정되면 내 좆에도 콘돔 씌우든가.”

“안 돼. 너 뒤로만 가는 거 보면 얼마나 꼴리는데.”

“하.”

기가 막혀 대꾸할 말도 떠오르질 않았다. 밝히고 정력 좋은 거야 진즉 알고 있던 일이지만, 어째 해가 가면 갈수록 변태력도 점점 더 상승했다.

뒤에서 한 팔로 서규하의 가슴을 끌어안은 채 이차영은 또다시 속도를 높였다. 다른 손은 거듭 아래로 내려가서 속옷째로 서규하의 페니스를 움켜쥔 채 마구잡이로 주물렀다.

“흣, 아, 앗, 응, 하읏!”

앞뒤로 가해지는 자극에 속절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계속 짧고 빠르게 안을 찔러 대던 흉기가 어느 순간 쑤욱 빠져나갔다. 단숨에 다시 몸을 가르며 힘껏 쳐올리는 순간, 서규하의 페니스에서 정액이 왈칵 터져 나왔다.

“하아, 하아, 으음….”

저도 모르게 잠깐 멈췄던 숨을 내뱉는데 또다시 턱이 붙잡히며 이차영의 입술이 다가왔다. 입 안으로 침범하는 혀를 기다렸다는 듯 휘감으면서 서규하는 적극적으로 키스에 응했다. 그러고 보니 시작부터 이딴 자세로 하는 바람에 오늘 처음 제대로 하는 키스였다.

“하아….”

입술이 멀어지자 긴 타액이 이어졌다. 손끝으로 젖은 입술을 닦아 준 뒤에 이차영은 그제야 서규하의 속옷을 벗겨 주었다.

“흠뻑 젖었네.”

“닥쳐, 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속옷을 입은 채로 사정해 버린 탓에, 페니스는 물론이고 그 주변까지 온통 흠뻑 젖어 버렸다.

“빨아 줄까?”

“……됐어.”

순간적으로 혹한 마음이 들었지만 금세 정신을 차렸다. 싼 직후에 곧바로 자극이 가해지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의 쾌감이 일 게 분명했다.

“내 목에 팔 감아 봐.”

말은 그렇게 하면서 이차영이 서규하의 두 손을 잡아서 자신의 목에 두르게 했다. 서로 마주 본 자세로 진한 딥 키스를 하면서, 이차영은 아직 사정하지 않아서 단단한 페니스를 붙잡고 다시 한 번 서규하의 안을 파고들었다.

“으응…….”

서규하는 그런 놈을 밀어내는 대신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키스에 집중했다. 젖은 탓에 삽입은 수월했지만 버거움마저 가시는 건 아니었다. 끙끙대며 아이처럼 매달리는데, 갑자기 발이 붕 뜨는 느낌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섹스하는 중이지.”

“미친…. 빨리 내려. 허리 나가면 어쩌려고 그래?”

안절부절못하는 서규하와 달리 이차영은 몹시도 태연했다.

“괜찮은 거 알잖아.”

곧바로 안을 들락거리는 움직임에 서규하는 기겁하며 반사적으로 이차영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갑자기 놔 버리거나 떨어뜨리는 짓은 하지 않겠지만,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불안감이 차올랐다.

“야, 씨, 내려 달라니까?”

“부탁하는 태도가 영 불손하네.”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이차영은 느긋한 움직임을 이어 갔다. 들고 박는 게 처음도 아닌데 매번 놀라는 건 여전했다.

다른 체위에 비해서 힘이 많이 들어가는 건 사실이지만, 서규하가 안절부절못하면서 힘껏 매달려 오는 그 느낌이 좋았다. 말하는 순간 쌍욕이 날아들 테니 절대 입 밖으로 낼 일은 없지만.

“흣, 하아….”

이차영은 본인이 움직이는 대신 서규하의 몸을 살짝 들었다 내리길 반복했다. 서규하는 여전히 이차영의 목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불안정한 자세는 지금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굵고 단단한 좆이 아래를 꽉 채우며 밀려 들어올 때마다 저도 모르게 구멍이 움찔댔다.

한 번 싸고도 여전히 발기해 있는 페니스가 이차영의 복근에 비벼지며 쾌감을 더했다. 덕분에 서규하는 시간이 갈수록 애가 타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처럼 느긋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장시간 계속 이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처음부터 워낙 격렬하게 붙어먹었던 탓에, 정신이 없을 정도로 몰아붙이는 편이 좀 더 취향에 맞았다.

애꿎은 이차영의 목덜미를 잘근대면서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서규하는 아까부터 입 안을 맴돌던 말을 꺼냈다.

“침대로 가서 해.”

“응?”

“침대로 가서 하자고.”

살이 움푹 팰 정도로 잇자국을 남겨도 전혀 개의치 않던 이차영이 잠깐 움직임을 멈추고 서규하의 눈을 마주했다.

“침대로 가면 못 하게 할 거잖아.”

서규하는 붉어진 눈가를 한 채로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럴 때 보면 이차영도 참 알기 쉬운 놈이었다.

“해도 돼. 나도 계속하고 싶으니까.”

이차영의 입꼬리가 살며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내 맘대로 해도 돼?”

“존나 어이없네. 언제는 네 맘대로 안 했어?”

“음…, 기억이 잘 안 나네.”

뻔뻔한 대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도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었다.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네 마음대로 해. 대신 애태우면 죽을 줄 알아.”

“알았어.”

짧은 입맞춤을 남긴 뒤에 이차영은 삽입한 상태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침대에 서규하를 눕혀 주고는, 녀석이 당부한 대로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안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하, 윽, 아앗!”

서규하는 시트를 움켜쥔 채로 울먹이며 신음했다. 이차영이 빠르게 치고 들어올 때마다 묵직한 음낭이 철썩대며 둔부를 때려 댔다. 안에서는 단단한 귀두가 내벽의 도드라진 부분을 긁어 대면서 발끝이 오그라들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상체를 숙인 이차영이 서규하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거둬 갔다. 그대로 입술을 막으면서, 아래를 완전히 밀착한 채로 말 그대로 난잡하게 허리를 놀려 댔다.

“우읍…, 흣….”

아래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페니스에서는 선액이 줄줄 흘렀다. 몸속에서도 계속 체액이 스며 나와 구멍 주변이 가려울 정도로 흥건하게 젖었고, 그곳을 이차영이 드나들 때마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났다.

멋대로 움직인 손이 이차영의 등을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서규하의 턱을 눌러 입 안과 혀를 마음껏 탐한 뒤에 이차영은 곧 두 팔로 본인의 상체를 지탱한 채 풀 스피드로 추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 흣, 하읏, 사, 살살 해!”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럴 때만 볼 수 있는, 느끼는 게 다분한 표정으로 울먹이는 모습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흥분이 들끓었다.

“하아…, 서규하….”

“흐, 흐읏!”

“울지 마. 우니까, 시발, 더 흥분돼서….”

잇새로 짓씹는 듯한 욕설을 내뱉으면서 이차영은 계속 거칠게 허리를 놀려 댔다. 말로는 아프다고 하면서도 찰지게 오물대며 감겨 오는 감각이 미치도록 황홀했다.

“이름 불러 줘.”

귓가에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서규하는 진저리를 치며 녀석을 밀어냈지만 돌덩이처럼 단단한 가슴팍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외려 손쉽게 붙잡아 머리 위로 내리누르면서, 이차영은 한 번 더 서규하의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달콤한 목소리로 꼬드기듯 말했다.

“얼른. 네가 이름 불러 주면 좋아하는 거 알잖아. 응?”

잠깐 멈춘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면서 귀 아래쪽 부분에 가볍게 이를 세웠다. 입술을 떼자 열꽃이 핀 것 같은 자국이 또 하나 생겨났다.

“아…!”

이래도 계속 버틸 거냐는 듯, 아까부터 계속 빳빳하게 서 있던 유두를 자극하는 손길에 서규하는 헛숨을 삼키며 자지러졌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이차영의 좆이 빠져나가는 걸 인지한 순간, 저도 모르게 입술이 열리며 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차, 차영아!”

섹스 도중에 이름을 부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큼 서규하는 다급했다. 빠져나간 것이 단숨에 치고 들어온다는 생각만으로도 배 속이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한 번 더 불러 줘.”

“차영아…, 흐읏, 제, 제발 천천히….”

퍼억-!

채 말을 잇기도 전에 강렬한 충격이 아래를 강타했다. 서규하의 허벅지를 붙잡은 채로 이차영은 그대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하아…….”

오래 참은 만큼 사출할 때의 쾌감이 여느 때보다 강렬했다. 몇 번에 걸쳐 남김없이 내보낸 뒤에, 나직한 신음이 섞인 한숨을 흘리면서 뒤늦게 눈을 떴다.

어쩐지 서규하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더니, 방금 그걸로 녀석도 갔는지 희멀건 정액이 가슴팍까지 튀어 있는 게 보였다.

감고 있는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스윽, 상체를 숙인 이차영은 발갛게 달아오른 서규하의 눈가를 더없이 부드럽게 살살 쓸어 주었다.

“울지 마. 또 퉁퉁 붓겠다.”

“……시발, 너 때문이잖아.”

“응. 미안.”

순순히 수긍하는 말을 들으니 더 열불이 났다. 늘 그렇듯 후회는 뒤늦게 찾아왔다. 섹스하는 중에 이름을 부르면 미쳐 날뛰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도, 존나 지 좆대로 처박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부른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한 번만 더 섹스할 때 이름 부르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개.’

벌써 수십 번은 더 개로 변해야 했을 허무한 다짐을 하는 동안 얼굴 곳곳에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파리 쫓듯이 휘휘 손을 내젓자 이차영은 여봐란듯이 소리까지 내면서 쪽쪽댔고, 곧 새 콘돔을 꺼내서 갈아 씌웠다. 본의 아니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서규하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쿨 타임 없이 바로바로 세우는 건 지금도 여전했다.

“넣을게.”

두 번째 섹스는 상대적으로 느긋했고 그만큼 더 농밀했다. 이차영은 뭉근하게 허리를 놀려 대면서 서규하가 민감하게 느끼는 곳을 빠짐없이 예뻐해 주었고, 마지막은 늘 그렇듯 후배위로 박아 대다가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열락의 흔적을 토해 냈다.

“하아…….”

사정 후에 찾아오는 탈력감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싫었다. 널브러지듯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고개가 뒤로 돌려지며 이차영의 입술이 닿았다.

짧은 입맞춤을 남긴 뒤에 이차영은 천천히 페니스를 빼냈다. 네 번째 사정인데도 정액이 가득 찬 콘돔을 대충 묶어 처리한 다음, 작은 냉장고에 들어 있던 생수병을 꺼내서 서규하에게 건넸다.

“크, 시원하다.”

차가운 물이 감로수보다 더 달게 느껴졌다. 미리 선수를 쳐서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뒤에 서규하는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오니 온갖 체액으로 얼룩덜룩하던 시트가 새걸로 바뀌어 있었다. 서규하는 포갠 베개 위에 냉큼 머리를 기대며 누웠다. 혹사당한 거기가 좀 얼얼하긴 해도, 개운하게 씻고 나와서 뽀송뽀송한 시트 위에 몸을 누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암…….”

긴 하품을 흘리면서 핸드폰을 만지작대고 있으니 잠시 후에 이차영도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하지만 곧바로 침대 쪽으로 오는 대신 달칵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목적지는 뻔했기에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이차영은 채 1분도 지나질 않아서 침실로 되돌아왔다.

“잘 자고 있어?”

“어. 근데 이불은 또 다 걷어찼더라.”

대답하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제가 봐도 규영이는 어릴 때 자신과 똑같이 생겼지만, 사소한 데서 서규하를 닮은 부분들이 많았다. 잠버릇이 꽤 험하다거나, 은근히 편식을 한다거나, 엄지손톱이 옆으로 납작하다거나 하는, 그런 작은 부분들.

이윽고 이차영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연휴 때는 어디로 갈지 생각해 봤어?”

“아직. 너는?”

“나도 아직 고민 중이야.”

상대적으로 시간이 자유로운 서규하와 달리 이차영은 며칠 연속으로 회사를 빠지는 게 쉽지 않았다. 특히 올해는 더 바빠서 매년 결혼기념일 때마다 둘이서만 가던 여행도 가질 못했기에 이번 추석 때 만회할 계획이었다.

“아무래도 프라이빗한 휴양지가 낫겠지?”

서규하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사람 좀 많은 데로 가자. 규영이도 없으니까.”

자신도 별 부족함 없이 자랐다 보니 평소엔 격차를 잘 못 느끼는데, 한 번씩 이차영네 집안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있었다. 녀석의 할머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체인 호텔의 지분인가 뭔가를 갖고 있고, 해외 곳곳에 그룹과 개인 명의로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개인 소유인 섬도 있어서 해마다 여름이면 애를 데리고 가서 며칠씩 지내다 오곤 했다.

인파에 치일 일도 없고 차례를 기다리거나 눈치 볼 일도 없어서 편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무료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에는 모처럼 둘이서만 가기로 했으니 좀 더 시끌벅적하고 활력이 넘치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나랑 둘만 있는 건 싫어?”

“싫다기보다는……. 이왕이면 여럿이 부대끼면서 놀면 훨씬 더 재밌잖아.”

속으로는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에 소원을 쓸 걸 그랬나? 휴가 내내 둘만 붙어 있자고 할 거 같은데.

하지만 이차영은 예상과 다른 대답을 입에 담았다.

“알았어. 한번 알아볼게.”

진짜냐고 되묻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으면서 서규하는 냉큼 몇 마디를 덧붙였다.

“호텔보단 리조트가 좋아. 바다 근처면 더 좋고.”

“뽀뽀해 주면.”

“할 거 같아?”

아낌없는 실소를 흘린 뒤에 서규하는 베개 하나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잠잘 준비를 했다. 이차영이 눈치껏 무드 등을 꺼 준 덕분에 금세 어둠이 찾아왔다. 자연스레 허리에 감기는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고, 어느 순간 서규하는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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