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외전) (22/28)

외전

1.

아침이 되니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깜빡, 깜빡, 인상을 찌푸린 채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서규하는 깍지 낀 손을 쭉 뻗으면서 길게 기지개를 켰다.

두 뼘 정도 열린 커튼 틈 사이로 환한 햇살이 비쳐 들었다.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오전 8시를 살짝 넘어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출근하는 중이거나 벌써 하루 일과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서규하에게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잘 생각으로 눈을 붙인 것도 잠시,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몸을 일으켰다. 아마 곧 있으면 방문이 열릴 텐데, 이왕 깬 김에 오늘은 자신이 먼저 밖으로 나가 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으으…….”

일어서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는데 고요한 정적을 깨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시선이 저절로 움직였다. 웃음이 나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니 침실 외부에 응접실처럼 꾸며 놓은 공간이 나타났고, 예상대로 규영이가 들어와 있는 게 보였다.

“아빠!”

눈이 마주치자 규영이는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자세를 낮춘 서규하는 달려오는 아이를 그대로 번쩍 들어 올려서 품에 안았다.

“잘 잤어?”

“네!”

아침에 약한 것은 지금도 여전했기에 규영이 유치원 등원 준비는 도우미가 맡아서 했다. 식사 후에 양치질까지 하고 나면 규영이는 부모님 방을 찾았고, 아빠를 깨워서 볼 뽀뽀와 함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곤 했다. 그때가 보통 8시 20분 전후였기에, 마침 눈이 떠진 김에 오늘은 먼저 아이를 보러 나가려던 참이었다.

오늘 규영이는 갈색 체크무늬 원복 대신 병아리 같은 노란색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매해 봄가을마다 하는 가족 운동회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이내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린애는 지금도 딱히 좋아하지 않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규영이는 예외였다. 제 자식이라서 그런 것도 있을 테고, 언젠가 이차영이 했던 장담처럼 어릴 때 녀석을 쏙 빼닮아서 몹시도 귀티가 나고 사랑스러웠다.

“밥 먹었어?”

“네.”

“뭐 먹었는데?”

“계란이랑, 김치랑, 요구르트도 먹었어요!”

“잘했네.”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유치원 가방을 들고 서 있던 도우미와 눈이 마주쳤다. 뜻밖이라는 듯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일어나셨어요?”

네, 하고 짧게 대답한 뒤에 서규하는 다시금 품 안의 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먼저 가 있어. 아빠는 좀 이따 갈게.”

규영이의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만개했다.

“네에! 빨리 오세요!”

“알았어.”

“아빠, 뽀뽀.”

잊지 않고 씩씩하게 외치는 단어에 서규하는 픽 웃으며 고개를 살짝 돌려 주었다. 받은 대로 돌려준 다음 땅에 내려 주자 규영이는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씩씩한 인사를 남기고 도우미와 함께 집을 나섰다.

“하암…….”

홀로 남게 된 서규하는 긴 하품을 흘리면서 욕실로 향했다. 기억이 맞다면 학부모들은 10시까지 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중간하게 눈을 붙일 바에야 지금부터 여유 있게 준비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대략 한 시간 뒤에 서규하는 집을 나섰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주차장이었다. 평소 애용하는 쿠퍼를 지나친 서규하는 안쪽에 주차된 검은색 세단 앞에서 스마트키를 눌렀다. 올드한 디자인에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나 타고 다닐 법하게 생겨서 자신의 취향에는 맞지 않지만 규영이가 큰 차라고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해 준 도시락 가방을 뒷좌석에 실은 다음,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봄 운동회는 실내에서 했지만 이번에는 날씨가 좋아서 미리 대절한 야외 운동장에서 행사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날씨가 좋았다. 가을이라는 계절에 걸맞게 하늘이 새파랗고, 햇볕은 쨍해서 야외 활동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몇 번의 정차와 출발을 반복한 끝에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벌써 꽤 많은 차들이 세워져 있었다. 서규하는 잊지 않고 도시락 가방을 챙긴 다음 운동장 입구를 향해서 걸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경쾌한 멜로디의 동요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서니 정반대 편에 마련된 진행 부스가 보이고, 운동장 가장자리를 따라서 하얗고 파란 캐노피 천막들이 빙 둘러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덩굴나무로 그늘진 좌측 스탠드에 아이들과 선생님이 모여 있는데, 규영이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을 터였다.

이윽고 서규하는 ‘사슴 반’이라는 종이가 큼직하게 프린팅되어 붙어 있는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유를 갖고 도착했는데도 먼저 와 있는 학부모가 제법 있었다. 그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고, 상대가 먼저 반갑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규영이 아버님.”

“안녕하세요.”

서규하도 대외용 미소를 장착하고 학부모들과 인사를 나눴다.

남자의 몸으로 자신이 규영이를 낳은 사실은 몇 년간 일부 가까운 사람들만 알던 일이었지만, 규영이가 유치원에 입학하게 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어느 날 밤, 이차영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 좀 하자.’며 부르더니 뜻밖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학부모로서 유치원 선생님과 연락하고 또 가끔은 직접 가 봐야 할 일도 있을 텐데, 혼자 맡아서 할 수 있겠느냐고.

잠시 후에 서규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넌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거야?’ 인상을 찌푸린 채 되물으니 이차영은 그런 뜻이 아니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답지 않게 어두운 얼굴로 하는 말이 이어졌다.

‘우리 둘 다 가면 규영이한테 아빠만 두 명 있다는 게 드러나잖아. ……이미 알음알음 알려져 있긴 한데, 뜬소문처럼 듣는 거랑 실제로 체감하는 건 완전히 다르니까.’

말하는 내내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녀석을 서규하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에둘러 말하는 태도는 질색이고 이면에 담긴 뜻을 파악하는 재주도 없지만, 어쩐 일인지 지금은 이차영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꺼내는지 곧바로 알 것 같았다.

드물게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소 버거운 침묵을 깨며 잠시 후에 서규하는 입을 열었다.

‘내가 규영이 낳은 거 알려지면, 너한테 뭐 불리한 거 있어?’

‘아니. 그런 건 전혀 없어.’

‘그럼 뭐가 문제야.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지.’

이차영은 대답을 아꼈다.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에 서규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았다. 뒷담화 까거나 쑥덕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감당할 수 있겠냐 묻고 싶은 거겠지.

‘네 말대로라면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건데, 이제 와서 나 혼자 아빠인 척하는 게 더 웃겨. 그리고 규영이 봐 봐. 너랑 완전 존똑인데 그건 어쩔 거야.’

‘……그건 그렇지.’

언제 심각했었냐는 듯 이차영이 슬며시 풀어진 얼굴로 입가를 매만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여간 저 팔불출.

‘난 딱히 상관없어. 대신 규영이가 상처받는 건 절대 안 돼. 혹시라도 누가 놀리거나 뭐라고 하면 애라도 가만 안 둘 거야.’

‘당연하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이차영은 호언장담했고, 며칠 뒤 유치원에 입학한 규영이는 우려와 달리 선생님도 친구들도 너무너무 좋다면서 즐거워했다.

알고 보니 그 유치원은 이차영의 친척 중 누군가가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는 사립 재단에 속한 곳으로, 소위 말하는 금수저 집안 애들이 주로 다니는 곳이었다. 학부모들은 이름만 대면 알 법한 기업의 임직원이거나 ‘사’자 직업을 가진 이들이 대다수였고, 그래서인지 속이야 어떻든지 간에 겉으로는 하나같이 교양이 넘쳐 보였다.

덕분에 서규하는 유치원에 갈 일이 생길 때마다 스스럼없이 찾아갔고, 태도는 언제나 당당했다. 막말로 죄지은 것도 아닌데 남의 눈치를 보고 위축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몇 번 들락날락하다 보니 서로 얼굴을 익힌 학부모가 제법 있었다. 그중 한 명인, 웃는 인상이 선해 보이는 남자가 적극적으로 옆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여기 앉으세요.”

규영이의 단짝인 희수라는 아이의 아버지였다. 편해 보이면서도 세련된 운동복 차림을 한 희수 어머니가 마찬가지로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날씨가 좋아서 진짜 다행이에요.”

“그러게요.”

“부사장님은 오늘 안 오세요?”

“네, 회사 일이 바빠서요. 어째 두 분은 다 오셨네요.”

“엄마 아빠 둘 다 오라고 희수가 사정사정하더라고요. 이이는 금방 돌아가야 돼요.”

어쩐지 희수 아버지는 정장 차림이더라니, 얼굴만 비치고 돌아갈 모양이었다. 다른 학부모들과도 짤막하게 인사한 뒤에 서규하는 다시금 반대편 스탠드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워낙 거리가 먼 데다 아이들이 잔뜩 모여 있는 탓에 규영이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뒷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냈다. 딱히 할 게 없어서 이리저리 화면만 돌려 대고 있는데, 아래를 향하고 있는 시야에 검은색 구두코가 불쑥 들어왔다.

“뭐 하고 있어?”

고개를 들자 넥타이 없이 셔츠만 입은 정장 차림에 포마드 스타일로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바로 윤병철이었다.

윤병철 혼자였으면 턱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일행이 있었다. 나란히 서 있는 임형빈을 본 서규하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예의상 몸을 일으켰다.

“오셨어요, 형?”

“오랜만에 보네요, 규하 씨.”

“그러게요.”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그 덩치가 안 보이면 눈이 삔 거지.”

“쓰읍, 말 예쁘게 해.”

윤병철이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따라서 시선을 옮기자 임형빈의 배가 티 나게 부푼 것이 보였다.

갓난아기였던 규영이를 본 뒤부터 자기도 2세를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대더니 그다음 해에 진짜로 애 아빠가 되었고, 얼마 전에는 둘째까지 생겼다.

“여긴 왜 왔어?”

두 사람의 딸인 수빈이는 규영이보다 한 살 더 어렸다. 나이가 다르니 반도 다르고, 천막도 옆에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일부러 보러 와도 지ㄹ…, 크흠, 잘 살고 있나 궁금해서 보러 왔다. 어쩔래.”

“어쩌긴 뭘 어째.”

바로 어제도 단톡방에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는데 어지간히 할 일도 없는 모양이었다. 윤병철은 빈자리에 임형빈을 먼저 앉힌 다음, 그 옆에 나란히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차영 씨는?”

“일 때문에 못 와.”

“규영이 운동회 하는 거 못 봐서 아쉽겠다. 나중에 사진이랑 영상 많이 찍어 줄게.”

“그러든가.”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자는 사람을 살살 깨우면서 규영이 사진 많이 찍어 달라고 부탁하는 말을 들은 참이었다. 두 손을 헐겁게 깍지 낀 채 생각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임형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같이 갈까?”

“괜찮아. 앉아 있어.”

벌떡 일어섰다가 엉거주춤하게 다시 앉는 친구 놈을 보면서 서규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모자란 놈 같으니라고. 희대의 팔불출인 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눈앞에서 꼴값을 떨어 댈 때면 소름이 절로 오소소 돋았다.

“그만 좀 쳐다봐. 형 등짝 다 타겠다, 새꺄.”

“걱정되니까 그러지.”

“네가 제일 걱정스러워.”

“또 시비 걸지?”

지지 않고 받아치던 윤병철이 돌연 한쪽 입가를 올리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서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윤병철이 저런 재수 없는 표정을 지을 때면 백 퍼센트 남의 속을 박박 긁거나 깐족깐족 약 올리는 말이 이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놈의 입에서 달갑지 않은 이름이 흘러나왔다.

“차영 씨도 장난 아니던데?”

“닥쳐.”

듣자마자 이쪽이 불리하거나 수치심을 주는 말을 씨불일 거라는 확신이 왔다. 그래서 곧장 닥치라고 엄포를 놨지만, 윤병철은 뚫린 입으로 잘도 나불거렸다.

“네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 가지고 존나 다정하게 막 챙겨 주는데, 와, 난 진짜 발끝도 못 따라가겠더라. 형이 그거 보고 차영 씨 칭찬을 하도 해 대서 질투 나 죽는 줄 알았어.”

예상보다 별 타격이 없는 말에 서규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귓구멍을 팠다. 지난달인가 지지난달에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때를 일컫는 듯했다.

이내 코웃음을 쳤다. 지가 한 짓은 기억도 안 나나 보네.

긴 다리를 자랑하듯 거만하게 꼬면서 윤병철은 달갑지 않은 말을 이어 갔다.

“규하 넌 둘째 생각은 없어?”

“없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튀어 나갔다.

처음부터 ‘둘째는 없다’고 워낙 완강하게 못 박은 탓에 이차영은 일절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물론 아주 가끔 장난식으로 말하거나 섹스할 때 뻔뻔한 요구를 하긴 해도 한 귀로 흘려들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정작 다른 사람들이 그 문제로 한 번씩 심기를 불편하게 할 때가 있었다. 본가에 가면 아버지가 규영이 동생은 볼 생각이 없느냐며 넌지시 운을 떼고, 이차영의 집에 가면 녀석의 아버지가 한 번씩 말을 꺼낼 때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두 분이 하는 말도 한 귀로 듣고 흘려보내면 그만이고, 실제로도 쭉 그렇게 해 오는 중이었다.

“규영이 앞에서는 동생 어쩌고 하는 말 입도 벙긋하지 마.”

“그 정도 눈치는 있어, 인마.”

잠시 후에 임형빈이 돌아왔고, 타이밍 좋게 스피커마다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가 확 줄어들면서 진행 요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운동장 한가운데 있는 단상으로 시선을 옮긴 윤병철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 이따 점심이나 같이 먹자.”

“알았어.”

마침내 자유를 되찾게 된 서규하는 다시금 핸드폰 액정을 켰다. 그런데 그사이에 이차영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잘 도착했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늘 계속 바쁠 거 같다더니, 그래도 문자 보낼 시간은 있나 보네.

[ㅇㅇ]

답장을 보내기 무섭게 곧바로 새 메시지가 보였다.

[우리 아들 잘 나오게 사진 많이 찍어줘. 점심은 준비해갔어?]

[ㅇㅇ 아줌마가도시락싸줫음]

[뭐 싸주셨는데?]

[몰라 열어봐야알지ㅡㅡ]

[알았어. 재밌게 놀다와]

[ㅇㅇ]

이번에도 자음만 짧게 쳐서 보낸 뒤에 유치원 단톡방을 터치했다. 규영이 담임 쌤이 어제 미리 올려 준 프로그램 진행표가 있었고, 확대해서 보니 개회식이라는 글자가 제일 위에 적혀 있었다.

어쩐지 좀 전부터 원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떠들더라니. 다행히 연설은 그리 길지 않았고, 잠시 후에 또 다른 마이크를 쥔 사회자가 경쾌한 목소리로 프로그램 진행을 이어 갔다.

“-그럼 많은 박수 부탁드립니다!”

멘트가 끝나자 어린아이들이 와르르 운동장으로 달려 나왔다. 신나는 동요가 흐르고, 아이들은 앞에서 춤을 추는 선생님을 따라서 귀여운 율동을 선보였다. 박자에 맞춰 폴짝폴짝 뛰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다들 꽤나 열심히 연습한 모양이었다.

편하게 등을 기댄 채 구경하던 것도 잠시, 문득 눈에 들어온 장면에 서규하는 조용히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타깃은 윤병철이었다. 앞으로 나와 쭈그려 앉은 채 자기 딸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고, 서규하는 그런 윤병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가족 한정 팔불출인 건 이미 애저녁에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저 덩치와 저 얼굴로 나사 빠진 사람처럼 칠렐레팔렐레 웃어 대니 개그가 따로 없었다.

찰칵, 찰칵, 찰칵-

연속으로 찍은 뒤에 사진을 확인해 보니 퍽 만족스러웠다. 언젠가 협상이 필요할 때 유용한 무기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앙증맞은 두 손을 흔드는 동작을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율동은 끝이 났다. 사회자는 계속 학부모들의 호응을 유도하면서 능숙한 진행을 이어 갔다. 적절한 때에 유머 섞인 멘트도 곧잘 해서 서규하도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서너 개의 프로그램이 지나가고, 다음 순서는 6세 반 아이들의 달리기 시합이었다. 안내 멘트를 들은 서규하는 줄곧 편하게 앉아 있던 몸을 처음으로 일으켰다. 규영이가 달리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서 이차영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행여나 방해가 될세라 너무 가까이 가지는 않고, 열댓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줄을 맞춰 앉아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살폈다. 아까 덩굴나무 밑에 있던 때에 비하면 거리가 훨씬 가깝고 인원수가 적기도 해서 금세 규영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

텔레파시가 통하기라도 한 걸까. 앞쪽을 보고 앉아 있던 규영이가 갑자기 무언가를 찾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규하는 본능적으로 손을 번쩍 들어서 휘휘 흔들었고, 덕분에 금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 하고 외치는 게 분명한 입 모양과 함께 규영이는 환하게도 웃었다. 서규하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참, 누구 자식인지 예쁘기도 하지.

그동안 달리기 시합은 계속 진행됐고, 마침내 규영이가 속한 조의 차례가 다가왔다. 운동복 차림으로 다가온 선생님이 아이들을 인솔해서 스타트라인 앞에 세웠다.

서규하는 여기까지 나온 목적을 잊지 않고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동영상 모드로 전환한 다음, 화면 한가운데에 규영이가 잡히게끔 각도를 맞췄다.

잠시 후.

탕-!

출발을 알리는 총성과 함께 아이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격차는 금세 벌어졌다. 규영이는 초반부터 치고 나가서 선두권에 있었는데, 옆옆 라인의 여자아이와 막상막하였다.

“오, 오오. 잘한다.”

감탄과 더불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면 속 규영이의 시선은 오롯이 목표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작은 입술은 한껏 앙다물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승부욕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규영이는 비단 생김새만 이차영을 닮은 게 아니었다. 담임에게 듣기로는 규영이가 같은 반 아이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고 양보도 잘한다면서 칭찬이 자자한데, 그러면서도 지는 건 싫어하는 성격조차 제 아빠와 똑같았다.

어느덧 결승선이 코앞이었다. 내심 규영이가 먼저 들어오기를 바랐지만, 아쉽게도 여자아이에 이어 두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아이들이 전부 들어오자 선생님이 또다시 인솔하는 걸 보고 서규하는 뒤돌아섰다. 자리로 되돌아가서 앉자마자 방금 촬영한 영상을 재생했다.

같이 녹음된 제 목소리가 좀 거슬리긴 해도 결과물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또다시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작은 주먹을 꼭 움켜쥔 채, 입술은 앙다문 채 최선을 다해서 달리는 모습이 다시 봐도 이차영과 판박이였다.

지이이잉-

그때, 작은 팝업 창이 뜨면서 이차영이 보낸 문자가 언뜻 보였다. 양반은 못 된다고 생각하면서 곧바로 확인했다.

[뭐하고 있어?]

[그늘에앉아있는중. 방금규영이달리기한거영상찍었어]

[그래? 안 넘어지고 잘 달렸어?]

[ㅇㅇ 2등했음 나중에보여주께ㅋㅋㅋㅋ]

“저기, 규영이 아버님.”

열심히 답장을 보내는데 옆에서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갤 돌려 보니 희수 어머니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슴 반 학부모들 나오라고 하는데, 안 가세요?”

타이밍 좋게 다시 한 번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 박 터뜨리기 시합이 있을 예정이니 사슴 반과 토끼 반 학부모님들은 운동장으로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뭘 또 나오래. 귀찮게.’

미간에 못마땅함이 묻어났다. 학부모들만 참여하는 거면 배 째라 하고 계속 앉아 있었겠지만, 애들도 함께 하는 거라서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사슴 반이 터뜨려야 하는 박은 왼쪽에 있는 파란색 박이었다. 아이들을 배려해서인지 높이는 낮았지만 크기는 무슨 대형 수박만 했다.

더럽게도 크네. 작년에도 했으면서 까맣게 잊고 속으로 꿍얼대며 걸어 나가자 규영이가 먼저 아빠를 발견하고 씩씩하게 외쳤다.

“아빠!”

힘껏 달려온 규영이는 고목 나무의 매미처럼 서규하를 와락 껴안고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위를 올려다봤다.

“아빠, 나 달리기 2등 했어요!”

“어. 잘했어.”

“열심히 했는데 1등 못 했어요.”

“2등도 엄청 잘했어. 아빠는…….”

“아빠는?”

“아냐. 진짜 잘했다고.”

서규하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면서 대견함을 담아 아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아빠는 달리기할 때도 대충 뛴 기억밖에 없다고, 이래저래 꼴통으로 명성이 자자했다는 말은 굳이 해 줄 필요가 없었다.

아이 손을 잡고 서 있으니 또 한 번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시키는 대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콩 주머니를 하나 주워 들자 게임 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럼 지금부터 박 터뜨리기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던져 대는 공이 박을 향해 날아갔다. 전투력을 돋우려는 듯 또다시 경쾌한 리듬의 동요가 흘러나왔고,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는 양쪽 상황을 생중계하며 저 세상 호들갑을 떨어 댔다.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공간 속에서 서규하만이 콩 주머니를 위로 던졌다가 받으며 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진짜 귀찮…… 응?’

별생각 없이 쳐다본 시선 끝에 규영이의 얼굴이 보였다. 게을러터진 아빠와 달리 일찌감치 첫 번째 공을 던진 규영이는 근처에 있는 또 다른 공을 주워 와서 박을 향해 열심히도 던졌다. 쪼끄만 입술을 앙다물고 집중한 모습이 아까 달리기할 때와 똑같았다. 만일 상대 팀 박이 먼저 터지면 실망해서 울먹거릴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쩔 수 없지.

옅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뒤에 서규하는 쥐고 있던 공을 처음으로 박을 향해 힘껏 던졌다. 목표 지점은 테이프가 발라져 있는 가운데 균열 부분이었다.

퍽-!

“소리 좋고.”

하나씩 줍기가 귀찮아서 대여섯 개를 한꺼번에 움켜쥐고는 연이어 그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때려 대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규영이도 안간힘을 다해 열심히 공을 던졌다.

- 양 팀 부모님들,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파란색 박이 많이 흔들리고 있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흰색 박도 조금 벌어진 것 같습니다!

힐끗, 상대 팀을 바라보자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다들 힘껏 공을 던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극받은 서규하는 다시금 이음새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다른 학부모들도 같은 전략을 쓴 덕분에, 한참을 두들겨 맞은 박이 마침내 조금씩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퍽! 퍽!

어느새 서규하는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애들만 시키지 어른들은 왜 불러내냐던 불만은 온데간데없었다. 힘껏 던질 때마다 스트레스도 풀리고, 점점 입이 벌어지는 박을 보니 성취감도 들었다.

잠시 후, 절반 정도 갈라진 박이 마침내 완전히 벌어지면서 안에 담겨 있던 종이 꽃가루가 터지듯 뿜어져 나왔다. 플래카드도 쫙 펴지면서 ‘식사 맛있게 하세요!’ 하는 글자가 나타났다.

“와, 열렸다!”

규영이는 폴짝폴짝 뛰면서 몹시도 좋아했다. 아빠! 우리 팀이 이겼어요! 온 얼굴로 좋아하는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서규하는 한 팔로 규영이를 안아 들었다. 본의 아니게 너무 집중한 것 같아서 민망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아이가 이렇게나 좋아하니 ‘뭐 어때’ 싶었다.

잠시 후에 흰색 박도 터지며 비슷한 문구가 나타났고, 서규하는 그대로 규영이를 품에 안은 채 자리로 돌아갔다. 앰프에서는 점심시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빠, 손 닦고 싶어요.”

자리에 앉히자마자 규영이가 자그마한 두 손을 내밀었다. 어어, 잠깐만. 허둥대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시락 가방을 열자 다행히 도우미가 챙겨 준 것이 보였다. 아이 손부터 닦아 준 뒤에 두어 장 더 물티슈를 뽑는데, 약속대로 윤병철이 자기 딸을 안은 채로 나타났다.

“규영아 안녕.”

“안녕하세요! 수빈아 안녕?”

아기일 때부터 알고 지낸 덕분에 규영이는 낯가림 없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자리에 앉은 임형빈이 가방 안에 든 도시락을 꺼내서 차례로 뚜껑을 열었다. 그때마다 서규하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와, 형이 직접 만들었어요?”

대답은 윤병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운동회 날이라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만든 거야. 장난 아니지?”

“네가 만들었냐?”

“아니, 형이.”

“근데 꼭 지가 만든 것처럼 으스대고 난리야.”

“뿌듯하니까 그렇지.”

저 팔불출 새끼.

“너네 집 도시락도 좀 보자.”

서규하가 그제야 도시락 통을 꺼내자 윤병철이 넌지시 들여다보며 “오.” 하는 짤막한 탄성을 흘렸다.

“아줌마 솜씨지?”

“당연하지.”

물어볼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규영이가 좋아하는 강아지 캐릭터를 형상화한 김밥,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닭 대가리 모양 메추리알과 문어 모양 소시지, 데커레이션에 한껏 공을 들인 과일 후식까지 갖춘 3단 도시락은, 죽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이번 생에서는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영역이었다.

‘신경 좀 쓰셨네. 언제 다 만들었지?’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는 익히 잘 알고 있지만, 집에서 이렇게 예쁜 도시락을 만들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이런 건 전문 업체에서나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곧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저보다 어린 동생이랍시고, 규영이는 “이것 좀 먹어 봐 수빈아.” 하면서 김밥과 소시지 등을 포크로 콕 찍어서 수빈이에게 건넸다. 그때마다 윤병철은 몹시도 흐뭇한 표정으로 규영이를 바라봤다.

“규영이도 아직 애긴데 우리 수빈이 챙겨 주는 것 좀 봐. 진짜 누굴 닮아서 저렇게 착하고 예쁘지?”

“당연히 나지.”

“이차영 씨 닮아서 진짜 다행이야.”

“뒤질래?”

“쓰읍, 말 또 험하게 하지?”

티격태격하면서도 부지런하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아줌마표 도시락은 겉모양만 화려한 게 아니었다. 애 입맛에 맞춰서 간이 조금 싱겁긴 해도, 밑반찬과 곁들어 먹으니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저녁엔 뭐 하냐?”

“몰라.”

“우린 수빈이 데리고 영화 보러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운동회 끝나고 바로? 피곤할 거 같은데.”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으면서 피곤은 무슨……. 어?”

나불대던 윤병철이 갑자기 말을 끊고 어딘가를 쳐다봤다. 그러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식사에 몰두하는데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저기, 차영 씨 아냐?”

종이컵으로 향하던 손이 멈칫했다. 꿀꺽, 입 안에 든 음식물을 삼키고 그제야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정말로 웬 남자가 운동장 출입구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이내 서규하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긴 하지만 제가 봐도 이차영이 틀림없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신체 비율에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또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Trrr- Trrr-

익숙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이차영’이라는 이름이 깜빡이는 액정을 잠깐 쳐다보다가, 서규하는 뒤늦게 전화를 받았다.

“어.”

- 어디야?

“어디긴. 운동장이지.”

대답하는 동안에도 시선은 한곳을 향한 채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차영 또한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신을 찾는 듯했다.

- 어느 쪽에 있어? 사실 지금 막 운동장에 도착했어.

역시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일단은 착실하게 대답했다.

“천막에 사슴 반 적힌 거 보여? 오른쪽에.”

- 어, 보여.

“그쪽으로 걸어와. 천막 뒤쪽 스탠드에서 점심 먹고 있으니까.”

- 알았어.

전화를 끊자마자 윤병철이 물었다.

“차영 씨 맞아?”

“어. 대체 어떻게 봤어?”

“그냥 눈에 딱 들어오더라고. 양쪽 시력 2.0의 위엄이지.”

“위엄은 개뿔.”

또다시 티격태격하는데 규영이가 씩씩한 목소리로 외치는 말이 들렸다.

“아빠!”

고갤 돌렸더니 정말 바로 앞에 이차영이 서 있었다. 입구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제법 되는데, 어지간히 부지런히 걸어온 모양이었다. 규영이를 품에 안아 든 이차영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빈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녕하세요.”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서규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오늘 무슨 미팅 있다면서.”

“미팅은 아니고, 회의가 있었는데 내일로 미뤘어. 이번에도 안 오면 규영이가 서운해할 거 같아서.”

“밥은 먹었어?”

“아니. 여기서 같이 먹으려고 시간 맞춰서 나왔어.”

상큼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서 서규하도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말없이 일찍 퇴근하거나 카페로 찾아오는 등, 시시한 서프라이즈를 좋아하는 건 지금도 여전했다.

도시락 통이 워낙 큰 데다 3층이나 돼서 많아 보였는데, 입 하나 더 늘었다고 빠른 속도로 김밥이 사라졌다. 가끔 규영이 입에 김밥을 넣어 주면서 이차영은 미소 띤 얼굴로 윤병철에게 말을 걸었다. 윤병철도 자기 딸을 무릎에 앉힌 채로 제법 유식한 척 대화를 이어 갔는데, 그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고 꽤나 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아빠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규영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빠, 나 달리기 2등 했어요!”

“진짜? 잘했어, 우리 아들.”

또 시작이네, 또.

후식으로 사과를 찍어 먹으면서 서규하는 비뚜름하게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애가 태어난 후로 질리도록 많이 본 모습이지만, 그러다가도 한 번씩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뭐라더라. 우성일수록 번식욕이 크고 핏줄에 대한 집착도 강하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는데, 세상 쿨하게 생긴 놈이 무릎에 애를 앉히고 우쭈쭈하는 걸 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센스 있는 아줌마는 식후에 마실 커피까지 보온병에 챙겨 주었다. 덕분에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시종일관 흘러나오던 동요 소리가 확 줄어들면서 진행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원생 전원을 소집하는 안내 방송에, 규영이는 벌떡 일어나서 운동화를 신었다. 수빈이가 신발을 신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가 두 꼬맹이는 손을 잡고 사이좋게 무대 중앙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에 윤병철과 임형빈도 자리를 떠났고, 금세 둘만 남게 됐다.

“하암…….”

배가 부르니 자연스레 하품이 나왔다. 서규하가 다리를 쭉 뻗고 편하게 쉬는 동안, 이차영은 브리프케이스에서 꺼낸 카메라를 세팅했다.

굳이 카메라까지 챙겨 온 걸 보니 작정하고 제대로 사진을 찍어 줄 생각인 듯했다. 그중 베스트 샷은 액자 속에 들어가서 거실을 장식할 게 훤히 그려졌다.

거듭 하품을 흘렸더니 이차영이 이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피곤해?”

“아니, 배불러서 그래. 너무 많이 먹었나 봐.”

“나중에 운동 열심히 해야겠네.”

“오늘은 쉴 거야. 어제 빡세게 하고 왔어.”

끈기 없고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지만 웨이트 트레이닝만큼은 지금도 꾸준히 하는 중이었다. 매일 하면 안 좋다길래 하루걸러 하루씩 다니고 있는데, 대답을 들은 이차영이 입가를 올리며 짓궂게 웃었다.

“그거 말고.”

뭐? 하고 돌아보는 서규하의 귓가에 대고 이차영이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침대에서 하는 운동 있잖아. 나랑 같이.”

“미쳤어?”

대번에 말뜻을 깨닫고 질색했지만 이차영은 허파에 바람 들어간 놈처럼 실실 웃기만 할 뿐이었다. 팔꿈치 킥으로 응징을 가한 뒤에 운동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밤톨만 한 어린애들이 나와서 제 몸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란 공을 굴려 대는 게 보였다. 권태로움 속에서도 프로그램은 착착 진행됐고, 또다시 안내 방송이 크게 흘러나왔다.

- 다음 순서는 운동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죠! 학부모 이어달리기가 있을 예정이니, 참가를 희망하시는 학부형들께서는 좌측 스탠드로 모여 주시길 바랍니다.

진행자의 목소리는 몹시도 카랑카랑했지만 서규하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학창 시절에 체력장을 할 때도 제대로 뛰어 본 적이 없는데, 학부모 이어달리기 따위에 참가할 리가……. 응?

기척이 느껴져서 고갤 돌리자, 지칠 줄도 모르고 계속 사진을 찍어 대던 이차영이 일어서 있는 게 보였다. 서규하는 곧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화장실 가게?”

“아니, 달리기하러 가려고.”

삐딱하게 머리를 괴고 있던 서규하는 저도 모르게 팔을 떼며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달리기? 설마, 지금 방송으로 나온 거?”

“응. 너도 같이 갈래?”

“절대 안 가.”

질색하며 대답하고는 다시금 머리를 괴면서 역으로 제안했다.

“너도 그냥 앉아서 구경이나 해. 괜히 눈에 띄는 짓 하지 말고.”

본인 앞에서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일이 없겠지만, 30대 초중반이 된 지금도 이차영의 미모는 여전했다. 젊을 때는 말 그대로 핸섬하게 잘생긴 외모였다면, 지금은 여유로움과 완숙함까지 더해져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게다가 무슨 향수를 틈틈이 뿌려 대기라도 하는지 근처에 있기만 해도 좋은 냄새가 나서 괜히 심장이 두근거릴 때가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이차영이 JM전자 부사장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한마디로 눈에 안 띄고 싶어도 안 띌 수가 없는 짓인데, 아쉽게도 이차영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외려 셔츠 소매까지 걷어붙이더니 자신만만한 투로 말했다.

“아들 앞에서 멋진 모습 보여 줘야지.”

“운동화도 없잖아. 넘어지면 존나 쪽팔릴걸?”

머릿속으로 절로 그 모습이 그려졌다. 뛰다가 혹시라도 스텝이 꼬여 나자빠지기라도 한다면……. 일어섰는데 정장 바지 무르팍에 구멍이라도 나 있다면……. 생각만으로도 제가 다 수치스럽고 쪽팔려서 서규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냥 있으라니까.”

하지만 얄궂게도 그 타이밍에 다시 한 번 달리기 시합에 참가할 학부모를 찾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차영은 흘끗 고개를 돌렸다가 서규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서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니면 나랑 내기할래?”

“? 무슨 내기.”

“이어달리기니까 팀으로 할 거 같은데, 내가 뛰는 팀이 1등 하면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걸로.”

서규하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혹한 표정을 지었다.

“2등이나 그 밑이면 내 소원 들어주고?”

“그렇지.”

“콜.”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계주면 적어도 몇 팀이 동시에 뛸 텐데, 그중 1등을 할 확률은 잘 쳐줘도 20 퍼센트 정도에 불과할 터였다. 종목 자체도 다소 불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차영이 국대 선수처럼 내달려도, 같은 팀에 한 명이라도 복병이 있으면 게임은 끝나는 거였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어.”

“너나 입 닦지 마. 파이팅.”

영혼이라곤 없는 응원을 보내자 픽 웃어 보이더니 이차영은 곧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잠깐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서규하는 제일 앞줄에 있는 의자로 위치를 옮겼다.

운동장은 말끔하게 비어 있었고, 잠시 후에 딱 봐도 학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걸어 나왔다. 그중엔 이차영도 있었다. 서규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자세를 바로 하면서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시시한 내기를 걸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달리는 것도 아닌데 괜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심판이 허공으로 천천히 들어 올리는 총을 보자 긴장감은 두 배로 늘어났다.

- 탕!

우렁찬 총성과 함께 시합이 시작됐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는 사람들을 보는데 탄성이 절로 나왔다.

“장난 아니네.”

다들 자기 애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하나같이 이를 악물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전력 질주를 했다. 트랙을 도는 사람들을 따라서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왕년에 뜀박질 좀 해 본 사람들만 나왔는지, 애들이 달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스릴감이 넘쳤다.

- 사슴 반과 토끼 반 아버님들, 아주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습니다!

흥분해서 내뱉는 진행자의 멘트대로 선두에서 달리는 두 남자의 신경전이 대단했다. 뒤에서 인코스로 치고 들어오려 해도, 참가 번호 대신 ‘토끼 반’이라는 글자가 프린팅된 종이를 가슴에 달고 있는 남자는 절대로 선두를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접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주자에게 배턴이 넘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에서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미친. 뭐야, 저 사람은?”

서규하의 입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흘렀다. 웃음 유발자는 사슴 반 두 번째 주자인 남자였다. 표정만 보면 무슨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처럼 비장하기 짝이 없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사람한테만 슬로모션 기술을 건 것처럼 뛰는 속도가 지독하게도 느렸다.

한 명, 또 한 명, 뒤에서 달리던 사람들이 유유자적하게 그를 지나쳤다. 표정만 국가대표 선수급인 사슴 반 학부모는 눈 깜짝할 사이에 2등에서 꼴찌로 추락했고, 선두권과의 거리는 회복 불가할 정도로 많이 벌어졌다.

“끝났네.”

이쯤 되면 이차영과 한 내기는 자신이 이긴 거나 다름없었다. 뭐 해 달라고 하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 동안 배턴은 다음 주자에게로 넘어갔다.

다행히 세 번째 남자는 발이 꽤나 빠른 듯 보였지만,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격차를 좁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열심히 달려서 반환점을 돌아올 때쯤, 드디어 이차영이 라인에 자리를 잡고 서서 뒤쪽을 주시했다.

‘욕심내서 뛰다가 진짜 나자빠지는 거 아냐?’

실제로 그러면 앞으로 백 년은 족히 놀려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몹시도 즐거웠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하는 사이에 마침내 파란색 배턴이 이차영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규하의 표정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헐…….”

아까와는 뉘앙스가 완전히 다른 탄성이 흘러나왔다. 배턴을 넘겨받은 이차영은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전력 질주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도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영화에서 본, 벼르고 벼르던 용의자를 추격하는 열혈 형사가 저렇게 기를 쓰고 달리던 모습이 생각났다.

다시 보니 잔뜩 열받은 채로 돌진하는 미친 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두 명을 제치는 모습을 보면서 서규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런 놈한테 붙잡히면 뼈도 못 추리겠네.

- 사슴 반 마지막 주자인 아버님, 정말 대단합니다! 다들 응원의 박수 힘차게 보내 주세요!

“규영이 아버님 파이팅!!!”

“파이팅!!!”

같은 천막에 있는 열혈 학부모 중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열띤 응원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 분위기에 동조되어 서규하도 내심 역전을 기대했지만, 끝내 선두 주자는 제치지 못하고 두 번째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규영이가 사슴 반이다 보니 살짝 아쉽기는 했다. 아까 그 남자가 조금만 잘 뛰었어도 1등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근데 그 인간은 대체 뭘 믿고 자기가 뛴다고 나간 거지?

다시 생각해도 웃겨서 피식대고 있으니 잠시 후에 이차영이 자리로 되돌아왔다. 서규하는 거듭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살짝 비뚤어진 넥타이도 그렇고, 흐트러진 머리카락만 봐도 백 퍼센트 진심으로 달린 게 분명했다.

금의환향하는 자식을 맞이하는 것처럼 반겨 주는 다른 학부모들에게 머쓱한 얼굴로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에 이차영은 서규하가 있는 곳으로 가서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존나 이 악물고 뛰더라?”

능글맞은 놀림이 이어졌지만 패배자는 말이 없는 법이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서규하가 건네주는 물병을 받아 들고 목을 축인 뒤에, 이차영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규하야.”

“왜.”

“집에 갈 때 업어 주라.”

“뭐?”

“다리 후들거려서 못 걸어갈 거 같아.”

엄살이 다분히 섞인 말투에 서규하는 입가를 씰룩대며 웃었다.

“미친놈처럼 뛸 때부터 알아봤어.”

“업어 줄 거야?”

“그럴 리가 있냐? 그리고 소원은 내가 말해야지.”

“나 업어 주는 걸로 하면 되잖아.”

“미쳤어?”

티격태격 유치한 말장난을 치면서 서규하는 속으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평소에도 가끔 둘이서 시시한 내기를 할 때가 있는데, 몸이나 힘을 쓰는 일은 절대로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