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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21/28)

And

조용하고 한적한 골목길에 새카만 세단 한 대가 진입했다. 익숙한 대문 앞에 차를 세운 이차영은 조수석에 놓여 있던 쇼핑백과 과일 바구니 등을 챙겨 들고 차에서 내렸다.

초인종을 누르자 인터폰으로 얼굴을 확인한 듯 금세 대문이 열렸다. 저벅저벅,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이차영은 자신의 옷매무시를 확인했다. 탐스러운 동백나무와 이름 모를 조경수가 어우러져 있는 정원 모퉁이를 돌자 활짝 열린 현관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미리 연락을 받은 정은희가 손주를 품에 안은 채로 이차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규영아, 아빠 왔네.”

이차영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서 두 사람을 마주 보고 섰다.

“저 왔어요, 어머님.”

“잘 왔어. 추운데 얼른 들어와.”

집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 소파에 서창식이 앉아 있었다. 이차영은 고개를 숙이며 살갑게 인사한 뒤에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도우미가 찻잔과 과일 접시를 내려놓고 물러가자 정은희는 어서 들 것을 권하며 웃는 낯으로 이차영을 바라봤다.

“출장은 잘 갔다 왔어?”

“네. 하루 동안 규영이 봐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고생은 무슨. 나도 그렇고 이이도 그렇고, 규영이 돌보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눈만 마주치면 방싯방싯 예쁘게 웃고, 울어도 달래 주면 금방 뚝 그치고. 볼 때마다 규하 그 녀석 배 속에서 나왔다는 게 안 믿긴다니까. 그죠, 여보?”

“말해 뭐 해. ……성격은 차영이 널 닮은 거 같아서 다행이야.”

이차영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결혼한 뒤에도 아버님과는 미묘한 거리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규영이가 태어난 순간을 기점으로 다시 한층 가까워졌다. 한 달에 한 번은 규영이를 데리고 본가를 찾고, 일부러 육아 관련 팁을 묻는 등 나름의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였다.

“규하는 같이 안 왔어? 지가 데리러 올 것처럼 말하더니.”

“몸이 좀 안 좋아 보여서, 집에서 쉬라고 했어요.”

정은희의 얼굴에 금세 걱정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왜. 어디 아프대?”

“몸살 기운이 있는 거 같더라고요.”

이유는 물론 하드 섹스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오늘 아침에 동이 틀 무렵까지 섹스는 계속됐고, 짧게 눈을 붙이고 일어난 서규하는 근육통과 미열을 호소했다. 네가 사람 새끼냐는 욕을 칭찬으로 묵묵히 받아들이며 집에 먼저 데려다준 뒤에 혼자서 아들을 데리러 온 참이었다.

“어제 찬웅이랑 만났다더니 또 부어라 마셔라 했나 보네. 혹시라도 기침하고 그러면 바로 병원에 데려가. 애한테 옮으면 큰일이니까.”

“네.”

“참, 그러고 보니 눈치도 없이 내가 계속 규영이를 안고 있었네. 얼른 안아 봐.”

정은희가 아이를 안은 채 일어서는 것을 보고 이차영도 퍼뜩 몸을 일으키며 두 팔을 뻗었다.

무려 2주 만에 느껴 보는 아이의 체온과 작은 무게감에 가슴이 절로 벅차올랐다. 매일같이 영상 통화로 얼굴을 봤지만, 끊고 나면 어김없이 더 큰 아쉬움이 밀려오곤 했었다. 이윽고 이차영은 아이와 눈을 맞추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빠 안 보고 싶었어?”

“우, 우으….”

금세 울먹이는 얼굴이 보였지만 이차영은 당황하지 않았다. 부모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아주 약하게 페로몬을 개방했다. 계속 눈을 맞추면서 어르자 마침내 규영이는 방긋방긋 웃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이만 가 볼게요.”

이어지는 말에 정은희는 아쉬움을 느꼈지만, 집에 혼자 있을 아들 녀석을 생각하면 더 붙잡고 있기도 그랬다. 잠시 후에 이차영은 집을 나섰다. 카 시트에 아이를 앉히고 어제 서규하가 놔두고 갔던 가방을 좌석 밑에 두는 등 만반의 준비를 끝낸 뒤에, 대문 앞까지 따라 나온 서규하의 부모님과 시선을 마주했다.

“들어가세요.”

“다음 주에 집으로 저녁 먹으러 와. 맛있는 거 해 줄게.”

“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예의 바른 인사를 남긴 뒤에 이차영은 차에 올랐다. 출발하기 전, 리모컨 버튼을 누르고 룸미러로 뒤를 확인하자 노래가 흘러나오는 후방 거울에 한껏 집중한 규영이의 얼굴이 보였다. 덕분에 이차영은 안심하고 기분 좋게 차를 몰았다.

***

집으로 돌아온 이차영은 규영이를 한 팔로 안아 들고 부부 침실로 직행했다. 문 앞에서 노크를 하려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규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딱 봐도 깊이 잠든 것 같아서 굳이 깨우는 대신 소리 없이 방문을 닫아 주었다.

“아빠 코하네.”

“우, 우우!”

“나갔다 왔으니까 목욕부터 하자.”

촉, 아이의 말랑한 볼에 입을 맞춘 뒤에 이차영은 우선 아기방으로 들어갔다. 최근에 규영이가 가장 좋아하는, 각종 장난감이 가득한 쏘서를 들고나와서 욕실 문 앞에 내려놓았다.

“잠깐만 놀고 있자.”

안쪽 의자에 앉혀 주자 규영이는 꺄르르 웃으며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한 손으로는 작은 코끼리 장난감을, 다른 손으로는 소리가 나는 고양이 장난감을 만지면서 노는 것을 확인한 뒤에 이차영은 욕실로 들어가서 라디에이터부터 켰다.

바깥에서 안쪽이 보이도록 욕실 문은 활짝 열어 둔 채였다.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잘 놀다가도 주변에 사람이 안 보이면 곧바로 울먹이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물 온도 확인에 이어서 헤어 캡과 오리 인형 등을 꺼내 와서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에 이차영은 규영이를 안아 들고 욕실로 들어왔다.

옷을 벗기고 욕조에 앉히자마자 오리 인형 두 개를 물 위에 띄워 주었다. 대번에 꺄르르 웃으며 좋아하는 동안 이차영은 규영이 머리에 노란색 헤어 캡을 씌웠다. 지금부터는 스피드 전쟁이었다. 샴푸로 거품을 낸 이차영은 한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자그마한 머리를 빠른 속도로 삭삭 문지르며 씻겼고, 온도를 미리 체크해 둔 샤워기로 거품을 헹궜다.

다음은 몸을 씻길 차례였다. 손바닥에 펌핑한 바디 워시를 두 손으로 문지른 뒤에 작고 통통한 손가락부터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바! 아바!”

그동안 규영이는 기분이 좋은 듯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오리 인형을 가지고 신나게 놀았다. 덕분에 이차영은 수월하게 목욕을 끝낸 다음 커다란 타월로 꼼꼼하게 감싼 아이를 품에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단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아이템을 활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인형을 규영이 손에 쥐여 준 뒤에 로션 바르기와 옷 입히기까지 차례로 클리어했다.

시계를 보니 곧 있으면 오후 1시였다. 어머님 댁에 도착하기 전에 분유를 먹였다고 하셨으니, 낮잠을 좀 재운 뒤에 이유식을 먹이면 될 것 같았다.

짤막한 한숨을 내쉰 뒤에 이차영은 몸을 일으켰다. 양가 어른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처럼 규영이는 순하고 얌전해서 혼자 아이를 돌봐도 크게 어려운 점은 없지만, 잠을 재우는 데는 약간의 스킬이 필요했다.

“서서 둥기둥기 할까?”

주변 물건을 붙잡고 설 수 있게 되면서부터 규영이는 부쩍 서 있는 것을 좋아하고 활동량도 많아졌다. 그래서 낮잠을 재우려면 우선 커튼부터 쳐서 방을 어둡게 만든 뒤에, 서 있고 싶은 만큼 원 없이 서서 놀도록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점점 졸려 하면서 울먹이면 그때 침대에 눕혀 주고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재우기까지 보통 이삼십 분은 족히 걸리는데, 오늘은 직전에 목욕해서인지 평소보다 잠드는 시간이 빨랐다. 칭얼대며 뒤척이더니 어느 순간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 이차영은 뻐근한 팔을 앞뒤로 돌리면서 조용히 방을 나섰다.

못다 한 뒷정리를 하는 것도 이차영의 몫이었다. 어질러진 욕실을 치우고, 자신도 간단히 샤워를 마친 뒤에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규하는 여전히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아까처럼 조심조심 이불을 걷고 침대에 올랐지만, 인기척을 느낀 서규하가 잠기운이 그득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왔어?”

“응. 깨워서 미안.”

이차영이 몸을 가까이 하자 시원한 머스크 향이 훅 풍겼다. 서규하는 다시금 눈을 감으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규영이는.”

“방금 낮잠 재웠어. 일어나면 이유식 먹이려고.”

“고생했어.”

내심 규영이가 이차영을 보고 낯을 가리진 않을지 걱정하면서 잠들었는데 다행히 무탈하게 데려온 모양이었다. 아이의 안위도 확인했겠다, 마음 놓고 다시금 눈을 붙이려는데 뒤에서 팔베개를 해 주면서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규하야.”

“왜.”

“저녁에 식당 예약해 놨으니까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알았어.”

“그리고, 내년 결혼기념일에는 규영이 데리고 셋이서 여행이라도 다녀오자.”

“……그러든가.”

웅얼거리며 하는 대답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뒤에서 서규하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이차영도 오랜만에 주어진 달콤한 오수를 즐기기 위해 눈을 감았다.

내리쬐는 햇살처럼 따사롭고도 안온한 일상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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