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dinary days
어느 순간 느껴지는 압박감에 서규하는 잠에서 깼다. 더듬더듬, 옆구리를 더듬자마자 곧바로 이유를 눈치챘다. 제 것이 아닌 커다란 손이 결박하듯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목덜미에 직격으로 닿는 숨결은 덤이었다.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다. 잘 때는 분명 똑바로 누워서 자거나 터치 없이 편하게 자는데, 답답해서 깨 보면 어김없이 시키지도 않은 팔베개를 해 주거나 뒤에서 끌어안고 있기 일쑤였다.
“아, 또…….”
짜증 섞인 중얼거림이 이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또르륵, 뭔가가 가슴 끝에서 방울져 흘러내리는 느낌에 서규하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가슴에 손을 대자마자 뭔가가 축축하게 묻어났다.
남자 오메가는 젖이 안 나오기는 개뿔.
부인과 담당의도 그렇고, 설렁설렁 넘겨 보던 임신 관련 서적에서도 분명 ‘남성체 오메가는 모유량이 적고 상대적으로 기간도 짧다.’고 해서 그런 줄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서규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첫 징조가 나타난 것은 출산 후 3일인가가 지났을 때였다. 안쪽 살이 꽉 뭉친 것처럼 붓고 아픈 걸 이차영이 뒤에서 안고 조심조심 만져 줘서 마침내 초유가 나왔는데, 그때부터 생각지도 못한 헬게이트가 열렸다. 의사조차 예외라고 놀랄 만큼 젖이 빠르게 도는데, 그걸 먹어 줘야 할 아기는 고군분투하며 인큐베이터에 있으니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어쨌거나, 자는데 뭔가가 예고도 없이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느낌은 사춘기 때 몽정을 하는 것처럼 찝찝하고 불쾌했다. 석 달 정도 지나니 양이 많이 줄어서 그동안 자존심을 접고 사용하던 수유 패드를 쿨하게 처분했는데, 가끔 오늘처럼 자는 중에 멋대로 새어 나와서 난감할 때가 있었다.
자기 전에 많이 좀 먹지. 투덜대면서도 몸을 일으켜 앉자, 팔을 밀어내는 기척을 느낀 이차영도 덩달아 잠에서 깼다.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이유를 눈치챘다.
“옷 젖었어?”
“어. 아오, 썅…….”
“유축기 꺼낼게.”
무드 등부터 켠 뒤에 허리를 숙인 이차영은 협탁 제일 아래 칸에 들어 있는 유축기를 꺼냈다. 자다 깬 사람답지 않게 능숙한 손놀림으로 세팅을 끝낸 다음, 따뜻한 물에 적셔 온 수건으로 가슴 마사지를 해 주었다. 비몽사몽간에 앉아 있던 서규하는 잠결에도 흡입기가 닿는 것을 느끼고 웅얼거리며 말했다.
“약하게 해.”
“알았어. 힘 빼고 편하게 있어.”
일련의 과정이 끝난 뒤에 뒷정리를 하는 것도 이차영의 몫이었다. 세척과 정리를 끝내고 침실로 돌아오니 그새 서규하는 옆으로 쓰러지듯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등을 끄고 옆에 나란히 누우려다가 이차영은 생각을 바꿔서 서규하의 위에 올라탔다. 옆으로 누운 몸을 슬쩍 정면으로 돌린 다음, 갈아입혀 준 셔츠를 살살 올려서 드러난 유두를 입에 물었다. 머리맡에서 금세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해.”
“또 젖을까 봐.”
“방금 짜냈잖아.”
“잔유 처리하는 거야. 편하게 자.”
잠결에도 들썩이며 움직이려는 것을 두 손으로 잡아 제지한 뒤에 이차영은 하던 짓을 계속 이어 갔다.
혀끝으로 돌기를 적신 뒤에 힘주어 빨자 안에 남은 잔유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밍밍하고 싱거워서 맛은 없었다. 다만 지금도 가슴을 빨아 주면 서규하가 좋아하고, 또 모유가 나오는 건 지금 한때뿐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워서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됐다. 둘째를 갖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으응….”
손바닥으로 지그시 내리누르고 있는 서규하의 손목이 좀 더 크게 들썩거렸다. 입술을 떼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잠옷 바지의 중심부가 눈에 띄게 불룩 솟아 있었다. 손을 대자 단단하게 융기한 것이 느껴졌다.
준비된 만찬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이차영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려 페니스를 꺼냈다. 서규하의 가슴을 입에 물었을 때부터 반응을 보인 놈답게 한껏 힘이 들어간 채로 끝부분이 젖어 있었다.
벌린 두 다리 사이로 허리를 들이밀려는 순간, 잠든 줄 알았던 서규하가 뒤척이며 실눈을 떴다.
“……할 거면 비비기만 해.”
“한 번만 하자. 뒤처리 내가 해 줄게.”
“꺼져. 넣기만 해 봐.”
우는 걸로 모든 의사 표현을 하는 아기 때문에 자다가도 기본 두세 번은 깨기 일쑤였다. 가뜩이나 수면의 질이 떨어져서 힘든데, 지금 휩쓸렸다가는 최소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날 것이 뻔했다.
“싫으면 비켜.”
“알았어. 비비기만 할게.”
다시 허리를 들이민 이차영은 두 개의 좆기둥을 동시에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는 시선이 서규하의 얼굴을 향했다.
아끼는 물건에 대한 집착과 애착은 강해도 사람이 그 대상이었던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몇 번 잠자리를 하고 나면 자연스레 흥미가 식기 일쑤였는데 오직 서규하만이 예외였다. 기간으로 따지면 벌써 1년이 훌쩍 지났지만, 질리거나 싫증나기는커녕 매일같이 붙어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흣, 으응….”
이차영은 서규하의 손을 끌어와서 기둥을 붙잡도록 했다. 표피에 닿는 체온만으로도 성감이 확 고조되며 선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친 채 힘주어 빠르게 흔들어 댔다. 치미는 사정감에 허리를 들썩이다가 두 사람은 간발의 차를 두고 절정에 달했다.
“하아…….”
기세 좋게 뿜어 나온 정액이 서규하의 가슴팍까지 튀어 올라 흔적을 남겼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백탁색 덩어리를 서규하의 젖꼭지에 대고 문지르다가 이차영은 수축됐던 등 근육을 이완시키며 또다시 상체를 구부렸다.
달큼한 숨결을 내뱉는 입술에 자신의 것을 포개려는 그 순간,
“우애애앵-.”
“……!”
문틈으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멈칫했다.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이 뒤늦게 흘러나왔다. 마침 딱 한 발 뺀 뒤에 깨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갔다 올게.”
몸을 일으킨 이차영은 급한 대로 잠옷 바지만 주워 입고 침실을 나섰다. 밤이 되면 문을 살짝 열어 두는, 바로 옆에 있는 아기방으로 들어가서는 벽면에 달린 달 모양 수면 등부터 켠 뒤에 침대로 다가갔다.
“깼어?”
귀여운 동물들이 가득한 얇은 이불을 걷은 뒤에 이차영은 기저귀부터 먼저 확인했다. 축축하게 젖은 것을 확인하고는 번쩍 안아 들어서 바닥의 매트로 장소를 옮겼다.
“아빠가 금방 기저귀 갈아 줄게. 얌전히 있자.”
“우으….”
“착하지.”
입에는 공갈 젖꼭지를, 손 싸개를 벗긴 손에는 작은 딸랑이를 쥐여 준 뒤에 이차영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재빨리 기저귀를 갈았다. 본래 뭘 해도 기본적으로 습득력이 빠른 데다가, 퇴근한 저녁부터 출근하기 전까지는 전담이나 다름없어서 손에 익을 수밖에 없었다.
미션은 금방 완수했지만 이차영은 규영이를 침대에 곧바로 눕히는 대신 상체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했다. 달래기용으로 물리고 있던 공갈을 빼고, 딸랑이를 쥐고 있는 오동통한 손가락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자 방긋방긋 예쁘게도 웃었다.
“좋아?”
이차영의 얼굴에도 덩달아 미소가 떠올랐다. 아기가 내심 서규하를 닮기를 바랐지만, 언젠가 장담했던 말처럼 아쉽게도 자신이 어렸을 때 찍은 사진과 판박이였다. 지금도 이차영은 검진이나 예방접종이 있을 때마다 운전기사를 자처하는데, 벌써부터 아빠랑 똑 닮았다며 의사가 너털웃음을 흘릴 정도였다.
어쨌거나 규영이를 볼 때마다 고마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퇴원할 때도 정상체중에 못 미치고 너무 조그마해서 내심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규영이는 젖도 잘 먹고 착실한 발달 단계를 거치면서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었다.
“배는 안 고파?”
“우. 바아.”
말을 걸 때마다 규영이는 작디작은 입술을 쫑긋거리며 사람 혼을 쏙 빼놓는 미소를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이러니 서규하와 같이 있을 땐 ‘대답도 못 하는 애한테 뭘 바라냐’는 타박을 받기 일쑤면서도 말을 붙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규영이를 다시 안아 든 이차영은 모유를 먹일 때처럼 자세를 잡은 뒤에 토닥토닥 아랫배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꺄르르 웃으며 예쁜 짓만 골라 하더니, 어느 순간 입을 벌리며 하품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픽 하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많이 컸다고는 해도 아직 제 손끝에서 팔꿈치 길이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은데, 잠이 온답시고 입을 벌리고 하품하는 게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원체 잠귀가 밝기도 하고 수유 때문에 매일 밤 두어 번씩은 반드시 깨다 보니 몸은 힘들지만, 미숙아라서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때를 생각하면 잠투정을 하며 우는 것조차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규영이의 눈이 완전히 감긴 것을 보고 이차영은 다리 힘만을 이용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다음, 딸랑이를 쥐여 주느라 잠깐 벗겼던 손 싸개를 다시 씌웠다.
재우는 것까지 클리어했지만 이차영은 곧바로 나가지 않았다. 침대 프레임에 두 팔을 걸친 채, 잠든 아이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숨을 쉴 때마다 헐떡이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55, 56, 57. 속으로 카운팅하며 러닝머신 위를 달리던 서규하는, 느리게 올라가던 숫자가 40:00으로 바뀌는 순간 미련 없이 정지 버튼을 눌렀다.
“하아, 하아….”
속도만 조금씩 다르게 하면서 쉬지 않고 40분을 뛰었더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물병으로 목을 축이면서 헉헉대는 숨을 고른 서규하는 잠시 후에 젖은 입가를 훔친 다음 샤워실로 걸어갔다. 마침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트레이너가 고객 응대용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다 하셨어요?”
“네.”
“40분 채우신 거 맞죠?”
“네.”
“고생 많으셨어요. 내일 뵙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뒤에 서규하는 계속 걸어갔다. 기분 탓인지 뒤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에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뛰는 게 너무 힘들어서 속도를 슬쩍 줄이거나 시간을 줄일 때마다 귀신같이 다가온 트레이너는 ‘이만큼은 하셔야 된다’면서 웃는 얼굴로 버튼을 삑삑 눌러 댔다. 대놓고 힘든 기색을 내비쳐도 소용없었다. 방송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사람이라더니 명성이 자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씻고 나오자 날아갈 것처럼 개운했다. 대충 머리를 말리고 단장을 끝낸 서규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피트니스 센터를 벗어났다.
오늘따라 햇볕도 쨍하니 눈이 부실 만큼 날씨가 좋았다. 친구 놈들을 집으로 초대한 게 아까울 정도로 좋은 날씨였다.
며칠 전, 늘 그렇듯 시시콜콜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불현듯 박찬웅이 ‘조카가 태어난 지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얼굴을 못 본 게 말이 되느냐’며 진상을 부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놈들도 서운함을 토로하는 메시지가 계속 올라오는 바람에 오늘 다 같이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삑삑삑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잖아 슬리퍼 소리와 함께 베이비 시터가 나타났다. 품에는 규영이를 안은 채였다.
“다녀오셨어요?”
“빠아!”
아빠를 보자마자 규영이는 폭풍 애교 미소를 발사했다. 덩달아 픽 웃으면서 서규하는 두 팔을 뻗어 아이를 제 품에 안았다.
“안 울고 잘 놀았어?”
“빠아! 우우.”
발음은 불명확하지만 대충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누구 새낀지 참 똑똑하기도 하지. 흐뭇하게 웃으며 둥기둥기 얼러 주는데, 손뼉을 치듯 손바닥을 맞대고 있던 규영이가 갑자기 신기한 걸 본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이윽고 오른손 검지가 입 안으로 쏙 들어갔다.
“손가락 빨지 마, 지지.”
곧장 아이방으로 들어간 서규하는 공갈 젖꼭지를 규영이 입에 물려 주었다. 안타깝게도 침에 젖은 손가락을 닦아 주는 건 깜빡하고, 그대로 아이를 안은 채 매트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오전의 놀이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소리가 나는 장난감을 설렁설렁 흔들어 대는데 바지 뒷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꺼내 보니 ‘곰새끼’라는 이름이 보였다.
“왜.”
받자마자 뜬금없는 물음이 이어졌다.
- 야, 규영이 키 몇이냐?
“뭐?”
- 규영이 키 몇이냐고. 60cm 정도 되나?
막 찍은 것치곤 정확한 추측이었다. 가장 최근에 병원에 가서 쟀을 때 60.7cm였다. 품 안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는 녀석을 어르며 서규하는 말을 이었다.
“애 키는 갑자기 왜 물어봐?”
- 병철이가 아기 옷이나 한 벌 사 가자고 해서 잠깐 들렀어.
“그냥 오라니까.”
힐끗, 시선이 절로 옷장을 향했다. 유전자를 제공한 또 다른 놈이 지금도 틈만 나면 퇴근길에 이런저런 걸 사 들고 와서 옷장이며 서랍장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 명색이 우리 첫 조카인데 그러면 안 되지. 암튼 애 키 몇이야?
웃음이 나온 건 그다음이었다. 집요하게 묻는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었다.
“왜. 60cm라고 하면 6m이라 적힌 걸로 사게?”
- 어떻게 알았어? 이 새끼, 애 아빠 맞네!
“닥쳐, 병ㅅ…….”
까지 말하다가 품에 안긴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 키 아니고 개월 수야. 3m이면 3개월용, 6m이면 6개월용.”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쓸데없이 멍청한 것도 똑같았다. 물론 제 무덤을 팔 이유는 전혀 없었기에, 자신도 착각했었다는 말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꼭 살 생각이면 6개월짜리용으로 하나 사 와.”
- 헐, 규영이 우량아야?
“우량아 같은 소리 하네.”
- 그럼 왜 6개월짜리 옷으로 사라는 건데? 아직 그 정도는 안 됐잖아.
“지금 입힐 건 넘쳐 나서 그래. 큰 치수로 사 오면 다음에 입힐게.”
- 오키오키.
경박한 대답을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작 1분 남짓 통화했을 뿐인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약 30분 뒤.
가을에도 변함없이 우중충한 행색을 한 세 남자가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제일 앞장서서 들어온 박찬웅이 서규하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자마자 잇몸을 만개하며 활짝 웃었다.
“규영아! 삼촌들 왔다!”
“난 보이지도 않냐?”
피식 웃으며 손부터 씻으라고 말하자, 세 남자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차례로 줄을 서서 화장실을 이용했다. 나와서는 멋대로 가위바위보를 하더니 당당하게 승리를 거머쥔 김강산이 기대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기, 안아 봐도 돼?”
“안 떨어뜨리게 조심해.”
“당연하지.”
서규하는 규영이를 김강산의 품에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말로는 조심하라고 했지만 딱히 걱정은 들지 않았다. 예상대로 김강산은 뭐든 잘하는 놈답게 아기를 안는 자세도 꽤나 안정적이었다.
“안녕, 규영아.”
눈을 마주치며 인사하자 꺄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났다. 김강산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애가 엄청 순하네. 낯도 안 가리고.”
“안 그래도 애 돌봐 주는…,”
“푸하하하!”
대답하는 말소리를 끊으며 느닷없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경박스러운 웃음의 주인은 박찬웅이었다.
“이야, 끝내준다. 너 이러고 살아?”
박찬웅의 시선은 거실에 닿아 있었다. 정확히는 거실 벽에 달린 커다란 액자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 속엔 정장을 입은 두 남자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 외에도 집 안 곳곳에는 각양각색의 액자가 가득했다. 대부분은 규영이 독사진이지만, 나란히 잠든 서규하와 규영이가 담긴 액자도 더러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이차영의 작품이었다.
‘시발, 뗀다는 걸 깜빡했네.’
괜한 머쓱함에 귓가가 불긋하게 변했다. 서규하는 속마음을 숨기고 목에 뻣뻣하게 힘을 준 채 대답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그렇게는 못 하지. 존나 부러워도 속으로만 생각할 거야.”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윤병철이 묵직한 팩폭을 날렸다.
“존나 부럽나 보다.”
“닥쳐.”
“애 앞에서 말하는 본새하고는.”
“닥, 조용히 해, 새꺄.”
이내 박찬웅은 활짝 웃으며 아기를 향해 두 팔을 한껏 벌렸다.
“삼촌한테도 와 보자!”
“조심해.”
애 아빠라도 되는 양 한마디를 덧붙이며 김강산은 박찬웅에게 규영이를 넘겼다. 안자마자 아기 특유의 분유 냄새가 훅 풍겼다. 안기도 전부터 싱글벙글 웃던 박찬웅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처럼 승천했다.
“규영아, 찬웅이 삼촌이야. 삼촌 하고 불러 봐.”
“우, 우우.”
“삼촌 잘생겼다고? 아직 애긴데도 보는 눈이 있네.”
얼씨구. 어이가 없어 쳐다보고 있으니 박찬웅과 눈이 마주쳤다.
“근데 애가 진짜 순하네. 웃기도 잘 웃고. 이차영 씨 닮아서 그런가?”
“뭔 소리야. 나 닮아서 그런 거야.”
“너 닮았으면 우리 들어오자마자 울고불고 난리 났지, 인마. 그지, 규영아?”
짜증 나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가끔 애를 데리고 본가에 가거나 부모님이 오시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어쩜 이렇게 순한 애가 태어났는지 모를 일이라며 감탄이 끊이질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서규하도 같은 생각이긴 했다. 반은 제 유전자가 섞여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하고 예쁘니, 이차영이 애만 보면 환장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야, 나도 좀 줘 봐.”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윤병철이 안달 난 표정으로 재촉했다. 박찬웅이 아쉬워하면서도 규영이를 품에 넘겨주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윤병철의 입가가 헤벌쭉 풀어졌다.
“우르르르, 까꿍!”
“우….”
“병철이 삼촌, 해 봐. 응?”
“우, 으….”
하지만 행복은 찰나에 불과했다. 윤병철에게 안기자마자 웃음이 서서히 사라지고 입술이 실룩실룩하더니, 이내 규영이는 와앙 하고 성대한 울음을 터뜨렸다.
“이리 줘.”
서규하는 서둘러 아이를 자신의 품으로 데려갔다. 옆에서 고스란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박찬웅이 박장대소하며 윤병철의 속을 긁어 댔다.
“푸하! 존나 웃겨. 윤병철 얼굴 보고 운 거 맞지?”
“규영이가 사람 볼 줄 아네.”
“인상이 얼마나 더러웠으면…….”
“닥쳐, 새끼들아.”
그사이 서규하는 아이를 안고 아기방으로 들어갔다. 쉬, 착하지. 뚝 하자. 응?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달랬지만 딸꾹질 같은 울음은 좀처럼 멎지를 않았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 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될까요?”
“네.”
이윽고 문이 열리며 도우미의 얼굴이 보였다. 온화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주세요. 제가 돌볼게요.”
이윽고 규영이를 자신의 품으로 데려간 도우미는 “아이구, 그랬어요?” 하며 눈을 맞추고 둥기둥기 아이를 얼렀다. 효과는 직방이었다. 훌쩍이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자 그녀는 서규하를 향해서 입 모양으로 말했다.
‘곧 잠들 거 같아요. 제가 재울게요.’
‘고맙습니다.’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감사 인사를 전한 뒤에 서규하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새 진땀이 배어 나온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먹고 자고 우는 게 아기의 일과라고는 하지만, 석 달이 지난 지금도 애가 우는 소리가 들리면 긴장감이 차올랐다.
뒤늦게 거실로 나가자,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친구 놈들이 보였다.
“애기는?”
“아줌마가 재우고 있어.”
“안 되겠네. 윤병철은 출입 금지해야겠다.”
“닥쳐, 좀.”
낄낄대는 두 놈과 침울한 한 놈을 데리고 서규하는 뒷마당으로 나갔다. 가사 도우미가 기계를 미리 세팅해 둔 덕분에 곧바로 바비큐 파티가 펼쳐졌다.
고기를 먹는 자리에 술이 있는 건 당연했고, 서규하도 맥주 캔을 따서 입으로 가져갔다. 수유 중에도 시간 간격만 잘 지키면 원 드링크까지는 괜찮다고 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이차영과 술잔을 기울일 때가 있었다.
“고기 존나 맛있다.”
“팩 뜯을 때 보니까 쓰리뿔 소고기던데?”
“이야, 우리 온다고 신경 좀 썼네. 이제 매주 여기서 만날까?”
“꺼져.”
정색하며 대꾸한 뒤에 서규하는 거듭 맥주 캔을 기울였다. 툴툴대는 말과 달리 표정은 꽤나 좋았다. 어김없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 대는 녀석들을 보니 늦게나마 집으로 초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실 지금도 한 번씩 기분이 다운되거나 답답한 감정이 차오를 때가 있었다. 애를 낳기만 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막상 낳고 보니 출산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김모란의 말은 반만 맞았다. 몸을 추스르고 운동을 시작하면서 체중은 빠르게 원상 복구 되었지만, 수술 자국이 길게 남은 배에는 좀처럼 근육이 붙질 않았다.
우울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간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꿈에도 모르고, 아빠랍시고 무방비하게 웃어 주는 아기를 볼 때마다 ‘죄책감’ 혹은 ‘책임감’처럼 묵직한 무게감을 지닌 감정들이 마음을 어지럽히곤 했다. 계획이라곤 없이 내키는 대로 살아왔는데……. 법적으로 묶인 배우자가 생기고, 또 앞으로 최소 20년은 책임지고 키워야 할 아기까지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 버텨 오는 중이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니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아마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차영 씨는 어디 갔어?”
문득 들리는 윤병철의 물음에 서규하는 픽 웃음을 흘렸다.
“빨리도 물어본다.”
“우리 불편해서 자리 피한 거 아냐?”
“같이 있어도 괜찮은데.”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떠드는 걸 들으면서 서규하는 거듭 웃고 말았다. 불편해서 자리를 피하기는 개뿔.
뭉그적거리며 집에 있으려는 녀석에게 축객령을 내린 사람은 서규하였다. 방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으면 별 상관 없지만, 틀림없이 나와서 제 친구들이라도 되는 양 같이 앉아서 웃고 떠들 게 분명했다. 사실 여기까지도 별문제 없는데, 같이 있을 때 오갈 법한 대화가 문제였다. 친구들이 짓궂은 질문이라도 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줄줄 읊어 댈 테고, 그럼 친구 놈들은 그걸 두고두고 우려먹을 거라는 데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야, 근데 우성 알파가 다르긴 하더라. 존나 서 있기만 해도 뭔가가 막 뿜어져 나오는 각이던데?”
캔을 홀짝이며 박찬웅이 하는 말에 윤병철은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거들먹거렸다.
“모르면 가만히 있어. 알파나 오메가라고 아무 때나 페로몬 개방하면 잡혀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새꺄.”
“친구가 잘못된 상식을 갖고 있으면 바로잡아 주는 게 도리잖아.”
“도리 같은 소리 하네.”
둘이서 쓸데없이 입씨름을 하는 동안 날름날름 고기를 주워 먹는 김강산이 승자였다. 아쉽게도 다 마신 빈 캔을 내려놓으며 서규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그러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참된 우정을 뒤로한 채 서규하는 뒷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도우미가 서규하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전화 왔어요.”
“고맙습니다.”
핸드폰을 건네받은 서규하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 뭐 하고 있어?
“밥 먹으면서 놀고 있어.”
이어서 서규하는 예의상 되물어 주었다.
“넌 뭐 하는데.”
- 너랑 통화하는 중이지.
“…….”
- 전화 끊지 마. 나도 밥 먹고 방에 들어왔어.
그러잖아도 끊으려 했던 핸드폰을 귓가로 다시 가져가면서 대답했다.
“어머니랑 바람 쐬러 간다면서.”
- 갑자기 점심 약속이 생기셔서 다음에 가기로 했어. 규영이는 뭐 하고 있어? 영상 통화라도 하고 싶은데.
“자고 있어. 나중에 집에 와서 실컷 봐.”
- 그래야겠네. 친구들은 언제 간대?
“가고 싶을 때 가겠지. 가고 나면 전화할게.”
- 알았어. ……규하 너도 보고 싶다. 보고 싶어, 자기야.
서규하는 흠칫했다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를 냈다.
“어. 나도 존나게 보고 싶다, 자기야.”
- 진심이 느껴져서 좋네. 나중에 얼굴 보면서 한 번 더 말해 줘.
“꺼져. 끊는다.”
전화를 끊고 화장실로 향하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 여보 자기 운운하는 말을 들었을 땐 소름이 쫙 돋는 기분에 학을 뗐는데, 그걸 노리고 한다는 걸 깨달은 뒤로는 지금처럼 덤덤하게 맞받아쳐 주곤 했다. 물론 조금은 근질근질하며 민망하긴 하지만.
***
친구끼리는 닮는다더니 정말이었다. 대체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셋 다 쉼 없이 입을 털더니, 점심에 이어 저녁까지 얻어먹고는 ‘잘 놀다 간다’며 뻔뻔한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거실에 걸린 벽시계는 어느덧 밤 8시가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규영이를 안고 현관문 앞까지 친구들을 배웅해 준 뒤에 서규하는 젖병을 챙겨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기분이 좋은지 꺄르르 웃으며 잘 안겨 있지만, 곧 있으면 밥 달라고 칭얼대며 보챌 시간이라서 생각난 김에 조금 일찍 먹일 생각이었다.
“맘마 먹자.”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쿠션을 끌어와서 준비하는 자세가 제법 안정적이었다. 젖병을 입에 물려 주자 규영이는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하암…….”
서규하의 입에서 긴 하품이 흘러나왔다. 오늘 하루는 꽤나 길게 느껴졌다. 아침부터 헬스클럽에서 땀을 쫙 빼고, 친구들이랑 웃고 떠들다가도 틈틈이 아이를 보살피느라 들락날락했더니 졸음과 피로함이 뒤늦게 한꺼번에 밀려왔다.
“흐아아앙-.”
“……!”
꾸벅꾸벅, 급기야 고개를 떨구며 졸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뭐지, 애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뒤늦게 근원을 발견하고 서규하는 몹시 당황했다. 졸다가 손이 엇나가기라도 했는지, 젖병 꼭지가 아기 볼에 닿아 있고 입가는 온통 젖어 있었다.
“미안.”
재빨리 다시 물려 준 뒤에 급한 대로 소맷자락을 끌어와서 젖은 입가를 닦아 주었다. 우르르, 까꿍. 영혼 없이 달래 주며 젖병을 잡고 있으니 또다시 졸음이 밀려왔지만 그때마다 고개를 마구 흔들며 안 자려고 안간힘을 썼다.
잠과의 사투를 벌이며 앉아 있다 보니 마침내 해방의 시간이 찾아왔다. 빈 젖병을 빼내고 규영이 입가를 한 번 더 닦아 준 뒤에 서규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불러서인지 한결 얌전해진 녀석을 한 팔로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쌓은 베개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는 규영이가 트림을 할 수 있도록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규영이 착하네. 얼른 하고 아빠랑 코하자. 응? 착하지…….
Trrr- Trrr-
차가 잠깐 신호에 걸린 틈을 타서 이차영은 서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녀석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톡, 톡, 초조함 담긴 동작으로 허벅지 위를 두드리다가 신호가 바뀌자마자 액셀을 밟았다.
밤이 되니 작은 소리도 유독 크게 울렸다.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마당을 가로지른 이차영은 이윽고 현관 앞에 당도해서 도어락을 해제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야근이나 출장 등이 있지 않은 이상 도우미들은 저녁 7시에 퇴근하니 그렇다 쳐도, 어느 순간 문자에 답장도 없고 집에 와 보니 쥐 죽은 듯 조용해서 괜한 불안함이 밀려왔다.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지른 이차영은 침실 문을 벌컥 열었다.
“하…….”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드 등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고, 품에 규영이를 안은 서규하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우웅….”
“쉿, 착하지. 아빠야.”
잠결에 칭얼대는 아이를 어르면서 이차영은 조심조심 규영이를 데려가서 자신의 품에 안았다. 완전히 잠들 때까지 안고 있다가 옆방의 아기 침대에 눕혀 주고는 방문을 살짝 열어 둔 채로 나왔다.
돌아와서 보니 서규하는 망부석처럼 그대로 앉아 있었다. 친구들이 갔는데도 전화를 주지 않은 이유는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서규하를 살짝 안아 들어서 편하게 눕혀 주었다.
씻고 나와서 보니 서규하는 눕혀 준 자세 그대로 잘도 자고 있었다. 작게 코 고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하루가 어지간히도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탁-
전등 스위치를 끄자 완벽한 어둠이 찾아왔다. 침대에 몸을 누인 이차영은 당연한 듯 서규하에게 팔베개를 해 주면서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맞닿은 곳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기분 좋은 따뜻함으로 다가왔다. 품 안의 몸을 좀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이차영도 뒤늦게 눈을 감았다. 자기엔 지나치게 이른 감이 있는 시간이긴 하지만, 규영이가 깰 때까지 잠깐이나마 서규하와 함께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