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all right.
옷장 문을 열자 한 치의 오차 없이 가지런하게 정돈된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를 꺼내 든 이차영은 셔츠 깃 뒤로 두른 다음 능숙하게 손을 움직였다. 올가미처럼 미리 모양을 잡아 둔 걸 착용해서 시간을 단축하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이차영은 아침마다 직접 매는 것을 선호했다. 출근 전에 뭔가 기합을 넣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정장 상의까지 갖춰 입고 나와서 잠깐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규하는 한밤중이었다. 너무 어두우면 깼다가도 다시 잠드는 것을 알기에 암막 커튼을 두 뼘 정도만 걷은 다음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다녀올게.”
“……갔다 와.”
이어서 이차영은 서규하의 배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말을 걸었다.
“깜짝아, 아빠 출근하니까 힘내라고 파이팅 해주라.”
지랄. 서규하는 잠결에도 속으로 웅얼거렸다.
“오늘도 재미있게 놀고 나중에 보자. 사랑해.”
촉, 서규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에 이차영은 침실을 나섰다.
***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서규하는 눈을 떴다. 마른세수를 한 뒤에 시계를 확인하니 곧 있으면 오전 10시였다.
“하암…….”
긴 하품이 흘러나왔다. 오른손은 습관처럼 허리로 향했다. 최근 들어 부쩍 아랫배가 쿡쿡 쑤시는 느낌이 잦고, 허리와 등에도 통증이 느껴졌다. 푹 잠들지 못하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면 피곤할 때가 많았다.
서규하는 뒤늦게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밤새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았다.
들어온 김에 옷을 훌렁 벗고 샤워기 밑에 섰다. 두 손에 물을 받아서 얼굴부터 대충 씻고, 바디 워시를 펌핑해서 몸을 닦기 시작했다.
목과 두 팔, 가슴을 차례로 씻다가 복부까지 내려온 순간 멈칫했다. 언뜻 봐도 비정상적으로 부푼 배를 내려다보는 표정이 금세 암담하게 변했다. 탄식처럼 흘러나온 한숨은 덤이었다.
배가 조금씩 커진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리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20주 차에 접어들자마자 갑자기 확 커진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품이 넓은 옷을 입어도 불룩하게 나와서 티가 날 정도였다.
“하아…….”
거듭 한숨이 흘러나왔다. 같이 살자는 프러포즈를 받은 뒤부터, 아니, 이차영이 아이를 책임지겠다며 무소의 뿔처럼 다짜고짜 부모님을 뵈러 갔을 때부터 서규하는 현실 도피를 그만두기로 했다. 원래 대책 없이 태평한 성격이기도 하고, 어차피 하나뿐인 선택지를 외면해 봤자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가장 큰 피해자는 깜짝이였다. 자신과 이차영은 한 짓이라도 있지만, 깜짝이 녀석은 생기고 싶어서 생긴 게 아니었다. 제 배 속에 떡하니 자리 잡게 된 것은 전적으로 부모인 자신들 탓이니,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지금이라도 더 큰 애정을 갖고 노력해 볼 생각이었다. 깜짝이 덕분에 이차영과 가족이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처음엔 제법 괜찮았다. 언젠가 했던 약속대로 이차영은 벼락 맞고 다시 태어난 놈처럼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고, 낯간지러운 말도 서슴지 않았다. 변화가 생긴 것은 서규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병원에서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해 줘도 귀에 들어오는 게 없었는데, 이제는 초음파 영상을 보거나 콩콩 뛰는 심장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를 다 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깜짝이가 자랄수록 배가 나오는 게 당연한데, 옷으로도 커버하지 못할 정도로 계속 커지니 처음으로 두려움 비슷한 감정이 생겨났다.
예전처럼 임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정의 내릴 수 있는 ‘남자’ 그리고 ‘오메가’ 중에서 ‘남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 보니, 보통 남자들은 평생 경험해 볼 일이 없는 신체 변화가 점점 버겁게 다가왔다.
튼살이 생기는 것도 그렇고, 바텀들의 감탄을 자아냈던 복근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무슨 병에 걸린 사람처럼 배만 불룩하게 부푼 모습은 생각보다 더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운동에 제한이 있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기구를 이용한 근력 운동은 물론이고, 남녀노소 누구나 하는 유산소 운동도 마음대로 못 하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문제는 이게 시작이라는 거였다. 5개월 차인 지금도 이런데, 앞으로 계속 더 커질 거라고 생각하면 극심한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심경의 변화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내킬 때면 깜짝이 영상도 돌려 보고 아기 수첩에 적힌 정보도 읽어 보고 그랬는데 이번 주부터 올 스톱 상태였다. 어제는 이차영이 마사지를 해 주겠다는 것도 짜증을 내며 거절했었다.
뒤늦게 마무리를 하고 거실로 나가자 청소 중이던 도우미가 살갑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일어나셨어요? 식사 준비해 드릴게요.”
와중에 배는 또 고프다는 사실이 더 슬펐다. 잠시 후에 서규하는 식탁 앞에 앉았다. 숟가락으로 국물부터 떠서 맛보는데, 식탁에 반찬 접시를 하나 더 놓아 주면서 도우미가 말했다.
“어이구, 이제 제법 아기 아빠 태가 나네요.”
“아, 예…….”
“천천히 많이 들어요. 모자라면 바로 말씀하시고요.”
어머니뻘인 도우미는 흐뭇한 미소를 남긴 뒤에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하, 서규하는 짧은 한숨을 흘리며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도우미를 뽑은 사람은 이차영이었다. 수소문 끝에 출산 경험이 있는 남성체 오메가 아들을 둔 여인을 골랐고, 과하다 싶을 정도의 월급을 주는 대신 여러 조항이 적힌 계약서를 내밀었다.
인정 많은 여인은 청결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친아들을 챙기는 것처럼 세심한 배려도 해 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욕실에서 한 차례 진한 현타를 맞고 나온 터라 애 아빠 운운하는 말이 입 안의 가시처럼 불편하게 느껴졌다.
결국 서규하는 반 공기도 못 비우고 몸을 일으켰다. 발길이 향한 곳은 드레스 룸이었다. 실내를 두리번거리자 오픈형 옷장 제일 아래 칸에 찾는 물건이 있는 게 보였다. 체중계를 꺼낸 서규하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에 천천히 올라섰다.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미친…….”
빠르게 올라가는 숫자만큼이나 격렬한 동요가 일었다. 고작 4일 만에 몸무게가 2kg이나 더 늘어났다.
잠옷 상의야 그렇다 쳐도 어째 바지도 살짝 끼는 것 같더라니, 끼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낀 거였다. 서규하는 충격을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본래 식후에는 어슬렁어슬렁 산책하러 나가거나 귀찮으면 거실이라도 몇 바퀴 도는데, 몸무게 때문에 충격이 커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 또 한 번 현타가 찾아왔다.
“씨발, 이러니까 살이 찌지.”
실제로는 지극히 정상적인 범위 내에서 체중이 증가하고 있지만, 그런 것 따윈 생각나지도 않았다. 튼실하게 살이 붙은 듯한 허벅지를 한 번 잡아 보고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맨날 처먹고, 자고, 빈둥거리는데 살이 안 찔 리가 없지.’
임신 이후로 외출이 줄어든 것도 체중 증가에 한몫한 것 같았다. 주말에 같이 병원에 가거나, 하루 한두 번씩 산책 코스를 걸을 때 말고는 딱히 나갈 일이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는 횟수도 부쩍 줄어들었다. 임신 사실을 밝혔을 때 처음에만 박장대소하며 웃었을 뿐 이후로는 조금도 다름없이 대해 주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괜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야근이 많아서 힘들다거나 직장 생활이 좆같다는 말이라도 들을 때면 자존감마저 뚝뚝 떨어졌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침울한 분위기를 깨며 드르륵대는 진동음에 서규하는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도 이차영의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자는 사람 배에 대고 말을 거는 둥 아침부터 혼자 바쁘더니, 서두르다가 핸드폰을 놔두고 간 모양이었다.
드륵, 드륵, 탁자 위에서 용트림을 해 대는 핸드폰을 보면서 서규하는 고민에 잠겼다. 백수인 자신도 핸드폰이 안 보이면 찾게 되는데 이차영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터였다. 계속해서 그쪽을 바라보다가 큰맘 먹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 하루가 아직 많이 남았으니 운동 삼아 나가서 갖다 주고 올 생각이었다.
차 댈 걱정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 주차장에는 빈 곳이 제법 있었다. 최대한 안쪽에 주차한 뒤에 서규하는 차에서 내렸다.
걸음을 떼기 전에 먼저 옷매무시부터 살폈다. 주문 제작한 버클 없는 바지에 검은색 후드를 입고, 위에는 봄 코트를 걸쳤다. 두 손을 후드 주머니에 넣어서 손 때문에 옷이 나온 것처럼 위장술을 펼친 뒤에 서규하는 빌딩을 향해서 걸어갔다.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호텔처럼 넓고 깨끗한 로비가 나타났다. 사원증이 없어서 입구 컷을 당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잠깐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서규하는 안내 데스크처럼 생긴 곳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사람 좀 만나러 왔는데요.”
“잠시만요.”
양복 차림의 직원은 양해를 구하고 어딘가로 사라지더니 몇 분 뒤에야 다시 돌아와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부서랑 성함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시작부터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이름이야 모를 리가 없지만, 녀석이 어느 부서에서 근무하는지는 몰랐다. 팽팽 머리를 굴리던 서규하는 간신히 기억 한 조각을 꺼내서 뒤늦게 대답했다.
“이름은 이차영이고, 이사인가 그럴 겁니다.”
그러자 직원은 멈칫하며 시선을 움직여 눈을 마주했다.
“DS 총괄 이차영 상무 이사님 말씀입니까?”
“……맞을걸요.”
아마도.
서규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 흔한 이름도 아니고, 같은 이름에 직급까지 동일한 사람이 또 있지는 않을 터였다.
“방문자분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서규하요.”
“방문 목적은 어떻게 되십니까?”
“얼굴 보러요.”
“네?”
“얼굴 보러 왔다고요. 전해 줄 것도 있고요.”
주머니에 든 두 개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직원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방금 했던 대답을 고스란히 반복해서 말하더니 또 한 번 시선을 보냈다.
“임원 회의 중이라서 당장은 전달 불가하고, 연락처 알려 주시면 메모로 남겨 두겠다고 하시네요.”
“그러면…….”
이름만 전해 주라고 말하려다가, 서규하는 생각을 바꿔서 핸드폰 번호를 불렀다. 매번 최근 기록에 있는 이름으로 전화를 걸다 보니 이차영의 번호를 못 외우는데, 녀석이라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직원을 바라보다가 서규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있어요?”
“네?”
“회의,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있냐고요.”
“죄송하지만 그건 확인이 어렵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서규하는 순순히 납득하고 뒤돌아섰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오전 11시 20분이었다. 나온 김에 점심이나 같이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오는 길에 봐 둔 카페로 향했다. 지금 바로 식당으로 가면 멀뚱히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니, 카페에서 시간을 좀 때우다가 12시쯤에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다.
틈틈이 핸드폰을 들여다봤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 화면을 끈 서규하는 머그잔에 담긴 차를 마저 마시기 시작했다.
찌푸린 미간이 불만족스러움을 대변했다. 지금이라도 쓸데없는 칼로리 섭취를 줄여 보고자 난생처음으로 카모마일 차를 골랐는데, 무슨 향수 뿌린 물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더럽게 맛이 없었다.
또 한 번 핸드폰을 확인했다. 11시 50분. 이번에는 주머니에 든 이차영의 핸드폰도 꺼내 봤다. 놈의 핸드폰도 잠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두어 번 진동이 느껴지긴 했는데 패턴을 모르니 잠금을 해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기다리는 건 이차영의 연락이지, 놈의 핸드폰을 들여다봤자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몇 분 더 기다린 뒤에 서규하는 트레이를 반납하고 카페를 나섰다. 이차영의 회사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한 번 더 찾아가 볼까.’ 하는데, 마침 눈에 들어오는 장면을 보자마자 생각이 싹 사라졌다.
딱 봐도 회사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밖으로 계속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점심시간이니 로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혼자만 이런 차림으로 눈에 띄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리고 데스크에 있던 직원도 자리를 비웠을 가능성이 컸다.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네.’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며 서규하는 뒤돌아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회사로 전화부터 해 보는 건데. 당연히 바로 만날 줄 알고 일부러 점심시간에 맞춰서 왔는데, 하필 딱 이 시간에 회의가 있다니 재수도 없었다.
“아 씨…….”
차를 반도 안 마시고 남겼는데 하필이면 지금 화장실 신호까지 강하게 왔다. 주변을 둘러본 서규하는 급한 대로 제일 가까이 있는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다란 메뉴판에 적힌 소머리 국밥 1인분을 주문한 뒤에 쫓기는 사람처럼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갔다.
덕분에 평온함은 금방 찾아왔다. 손을 씻고 별생각 없이 홀로 되돌아갔다가 서규하는 멈칫했다. 들어올 때만 해도 손님이 별로 없었는데 그새 꽤 많은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어딜 봐도 느낌이 비슷했다. 오피스 건물이 밀집한 지역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정장 차림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그나마 구석진 곳에 2인용 테이블이 비어 있어서 서규하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습관처럼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냈다. 웬만해선 남의 눈치를 보는 법이 없고 혼밥도 곧잘 하지만, 온통 회사원들뿐인 식당에서 외딴섬처럼 혼자 앉아 있으니 살짝 민망하긴 했다.
이차영은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놈뿐만이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웃긴 짤이나 헛소리가 올라오는 단톡방도 오늘따라 암전이었다. 터치해서 창을 띄운 서규하는 오랜만에 메시지를 입력했다.
[다들뭐함?]
숫자 3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혀를 차며 화면을 꺼 버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산하던 거리 또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머잖아 서규하는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감정을 컨트롤하는 기관이 고장 나기라도 했는지 급격한 우울함이 밀려왔다.
‘……좆같네, 진짜.’
회사원들이 바글거리는 식당에서, 비정상적으로 부푼 배를 하고 혼자만 덩그러니 앉아 있으니 밥이나 축내는 밥벌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싶어도, 늪에 빠진 사람처럼 자꾸만 부정적인 감정이 스멀스멀 번져 갔다.
“식사 나왔습니다.”
김이 풀풀 나는 뚝배기가 식탁 위에 놓였다.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지만 기분이 우울해서 그런지 딱히 입맛이 돌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손도 대지 않고 나갈 수는 없어서 억지로 한 숟갈 뜨려던 그때, 또 한 번 딸랑 하고 식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
서규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멈칫했다. 이번에도 대여섯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왔는데, 남들보다 키가 커서 보자마자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차영이었다.
‘쟤가 여긴 왜…….’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이내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왔다. 쟤가 여긴 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회사 근처에 있는 식당이니 회사원인 이차영이 오는 게 당연한 거고, 이방인은 자신이었다. 촉각이 절로 곤두섰다. 혹시나 이쪽을 쳐다볼까 봐 긴장했지만, 몇 초가 지나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은 없었다. 잠시 후에 고개를 들자 이차영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분리된 다른 테이블 쪽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뒤늦게 숟가락으로 국밥을 휘휘 젓는데 방금 봤던 이차영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이런 데도 다 오네.’
까칠한 놈이니 점심때가 되면 혼자 고고하게 단골 식당을 찾을 줄 알았는데……. 이런 일반 식당에, 그것도 직장 동료들과 함께 온다는 사실이 생소했다. 생각나는 것은 또 있었다. 웃는 낯으로 이차영을 바라보며 말을 걸던 사람들의 얼굴이 잔상처럼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
현관문 앞에 이른 서규하는 이차영과 자신의 생일을 조합해서 만든 여덟 자리 비밀번호를 눌렀다.
집 안은 조용했다. 집에 오는 길에 ‘장을 보고 오겠다’는 도우미의 문자를 받았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걸음을 옮긴 서규하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드러눕듯 몸을 젖히면서 긴 한숨을 흘렸다. 가만히 숨만 내쉬고 있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씨발, 이러다 지구 반대편까지 뚫고 나가겠네.”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집에 처박혀 있으면 우울증이 점점 더 심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정신을 좀먹어 봤자 좋을 게 하나 없으니, 근처 바닷가에라도 가서 바람을 쐬고 올 생각이었다.
척척척척, 현관으로 빠르게 걸어가는데 무언가가 코트 주머니에서 털렁대며 흔들렸다. 손을 넣자 이차영의 핸드폰이 잡혔다. 서규하는 잠깐 고민한 끝에 자신의 핸드폰을 다시 켰다.
[바람좀쐬고올게]
녀석이 퇴근하기 전까지는 돌아오겠지만, 혹시 몰라 선심 써서 메시지를 보냈다. 띠링 하며 울리는 이차영의 핸드폰을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 둔 뒤에 서규하는 집을 나섰다.
***
현란한 드럼 연주가 돋보이는 록 음악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서규하는 몸으로 박자를 타며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오후라 그런지 도로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목적지도 없이 일단은 내키는 대로 액셀을 밟는데, 갑자기 음악 소리가 뚝 끊기며 내비에 ‘김모란’이라는 이름이 떴다. 느닷없는 전화가 의아했지만 일단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뭐 하고 있어?
전방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뀐 걸 보고 서규하는 브레이크를 밟으며 대답했다.
“바람 쐬러 가는 중.”
- 바람? 바람났어?
“뭔 소리야. 답답해서 바람 쐬러 가는 중이라고.”
- 이차개랑 싸웠어?
기다렸다는 듯 냉큼 묻는 말에 웃음이 픽 나왔다.
김모란에게 결혼 소식을 알린 사람은 이차영이었다. 이차영 말로는 진심 어린 축하를 받았다고 하는데, 개도 안 믿을 개뻥이었다. 나 물 먹이는 거냐는 둥, 왜 하필 그 새끼냐는 둥 전화로 노발대발 화를 내서 귀가 따가워 죽는 줄 알았는데 진심 어린 축하는 개뿔.
그래도 김모란은 의리 있게 결혼식에 참석했고, 잘 먹고 잘살라는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깨지면 그땐 나랑 살림 차리자’는 말은 덤이었다.
“안 싸웠어. ……그냥, 바다가 보고 싶어서.”
- 이차개는.
“회사에 있지.”
- 그럼 혼자 가는 중이야?
“어.”
- 그럼 차 아무 데나 세우고 잠깐만 기다려. 나랑 같이 가자.
이번에는 서규하가 되물었다.
“휴가 받았어?”
- 어. 위치 찍어 주면 그쪽으로 갈게.
“그냥 너네 집으로 갈게. 나선 지 얼마 안 됐어.”
- 그럼 존나 땡큐지. 집 주소 알아?
“문자로 보내 줘.”
- 알았어.
채 몇 초도 안 돼서 문자가 들어왔고, 서규하는 곧바로 핸들을 돌려서 김모란의 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서규하의 차는 왕복 4차선 대로를 시원하게 내달렸다. 아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운전석에 김모란이 있고 서규하는 그 옆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차 키를 강탈하듯 가져가서는 말릴 틈도 없이 운전석을 차지해 버린 탓이었다.
‘운전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던 무시무시한 발언과 달리 김모란은 아슬아슬하게나마 제한 속도를 지키면서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목적지는 전통시장이었다. 좀 전의 누군가처럼 흥얼거리며 리듬을 타는 김모란과 달리, 서규하는 마냥 밝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운을 뗐다.
“꼭 거기까지 가야 돼?”
“당연하지. 너 시간 되면 같이 가려고 전화했는데 마침 너도 바람 쐬러 가는 중이었다며. 이쯤 되면 운명이지.”
운명이 다 얼어 죽었나 보네.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김모란이 내비에 입력한 전통시장은 무려 강원도에 있는 곳이었다. 끝내주는 곳으로 모시겠다고 약을 칠 때부터 눈치 깠어야 됐는데. 안타깝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휴게소에라도 들러서 김모란이 자리를 비우지 않는 이상 당장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김모란은 계속해서 리듬에 몸을 맡겼다.
“이거 누구 노래야?”
“라 플랫. 영국 록 밴드야.”
“웃겨서 더 좋네.”
“웃기다고?”
“지구 멸망하라고 외치는 것처럼 질러 대는데 애인한테 존나게 매달리는 가사잖아.”
“반전 매력이라고 해 주라.”
영어 가사 따위 알아들을 리가 없지만 ‘라 플랫’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소싯적에 노래방에서 기깔 나게 부르고 싶어서 한글로 적힌 발음을 찾아보다가, 곡 분위기와 정반대인 가사를 보고 충격을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소소한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휴게소에도 들르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떠들다 보니 어느새 동해로 진입하는 톨게이트가 나타났다.
해탈은 이미 일찌감치 했다. 솔직히 말하면 첫 번째 휴게소에서 내심 차 키를 노렸지만, 김모란이 자기 주머니에 쏙 넣는 바람에 손도 못 대봤다. 그리고 각자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란히 서서 떡볶이며 어묵을 먹는 동안 완전히 잊어버렸다. 차로 돌아가면서 아차 했지만 김모란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것처럼 운전석 문을 열고 타는 바람에 또 조수석에 앉는 처지가 되었다.
그때부터 서규하는 완전히 마음을 내려놨다. 이쯤 되니 남부 지역이나 땅끝마을로 가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내로 접어들고도 꽤 오래 달린 뒤에야 목적지가 나타났다. 김모란은 기깔 나는 폭풍 후진을 선보이며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댔다. 후줄근한 복장에 어울리지 않는 명품 체인백을 들고 차에서 내린 다음 큰소리를 빵빵 쳤다.
“내가 쏠 테니까 가서 배 터지게 먹자.”
서규하는 픽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것만 봐도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잠시 후, 시장 초입에 이르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에 온갖 먹거리들이 즐비했다.
“끝내주지? 채널 돌리다가 발견했는데 ‘여기다!’ 싶더라고.”
이차영 못지않은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그런 것치고 김모란은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식당에서의 김모란은 카멜레온 같은 여자였다.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서는 우아하면서도 완벽한 테이블 매너를 선보였고, 양갈비 전문점에 가면 스스럼없이 뼈를 붙잡고 갈빗살을 뜯어 먹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규하 덕분에 이제 겨우 배달 음식의 묘미를 조금씩 배워 가는 이차영과 달리, 김모란은 흔히들 말하는 길거리 음식이나 분식도 감탄사를 연발하며 스스럼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국수 먹을 줄 알아?”
“당연하지.”
“그럼 국수부터 먹으러 가자.”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자그마한 식당이 나타났다. 어중간한 오후 시간대인데도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두 사람은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테이블을 닦는 직원을 향해서 김모란은 주저 없이 말을 걸었다.
“이모님, 국수 곱빼기도 되죠?”
“예, 됩니다.”
이윽고 김모란은 서규하에게 물었다.
“뭐 먹을래?”
“비빔국수.”
“역시 뭘 좀 아네.”
이번에도 김모란은 목청 높여 음식을 주문했고, 임신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셀프인 밑반찬과 물을 채운 컵을 들고 왔다. 목이 마르던 참이었기에 서규하는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이윽고 김모란이 묻는 말이 들렸다.
“힘들지?”
“……그렇지 뭐.”
김모란도 덩달아 물을 원샷했다. 서규하와 마주 앉아 있으니 두어 달 전에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이 절로 떠올랐다.
지방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를 수습하고 한시름 놓은 뒤에 김모란은 그제야 이차영이 연락한 걸 기억해 내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보통 때였으면 무시했겠지만, ‘언제라도 좋으니 꼭 연락 달라’며 저자세로 나오는 걸 보니 뭔가 중대한 일이 생긴 듯했다. 어릴 때부터 사사건건 비교당하며 크다 보니 지금도 이차영은 타도해야 할 숙적에 가까운 놈이지만, 공동의 적이 나타나거나 집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었다.
그래서 기껏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이차영은 부재중이었다. 잠시 후에 다시 걸어도 놈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김모란은 ‘이 새끼 뭐야?’ 하고 한마디 내뱉고는 신경을 끊었다. 급하면 또 먼저 연락하겠지, 생각하면서.
이차영의 호출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만나자는 전화에 ‘네 새끼 필요할 때만 두드리는 동네북이냐’고 비아냥대면서도 일단은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곳에서 김모란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는 말을 듣게 됐다. 서규하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고, 양가 부모님의 허락하에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미친 헛소리이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사실이었다. 예식 내내 영혼이라곤 없는 박수를 보내면서 김모란은 실로 오랜만에 패배감을 맛보았다. 안 어울리면 코웃음 치며 정신승리라도 하겠는데, 맞춤 예복을 입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선남선남이 따로 없어서 더 속이 쓰라렸다.
“식사 나왔습니다.”
잠시 후,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스테인리스 쟁반을 두 손으로 든 직원이 다가왔다. 두 사람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감탄사를 흘렸다. 거짓말 좀 보태서 국수 그릇이 세숫대야만 했다.
“양 엄청 많네.”
“맛있겠다. 빨리 먹자.”
어디서 났는지 머리끈으로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뒤에 김모란은 본격적으로 면 치기를 시작했다.
“와 씨, 존나 맛있어.”
욕심껏 건져 올리는 면발만 봐도 그렇게 보였다. 서규하도 뒤늦게 비빔 양념을 섞어서 한 젓가락 뜬 면을 입으로 가져갔다.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가는데 불현듯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속 안 좋아?”
“뭐?”
“속 안 좋냐고.”
“아니, 괜찮은데.”
“근데 왜 그렇게 깨작깨작 먹어. 입에 안 맞아?”
“아니.”
그럼 대체 왜 그러냐고 눈빛으로 묻는 물음에, 서규하는 머뭇대다가 이실직고했다.
“……살이 많이 쪄서 먹는 것 좀 줄이려고.”
이내 김모란은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임,”
까지 내뱉었다가, 주변을 힐끗 둘러보고는 한껏 소리 낮춰 말을 이었다.
“임신부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배 속에 애가 있는데 살찌는 게 당연하지.”
“……좀 심각한 거 같아서.”
“뭐래. 얼굴만 보면 티도 안 나는구만.”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김모란은 젓가락을 꽉 움켜쥐며 가자미눈을 떴다.
“이차개가 뭐라 했어? 너 살쪘다고?”
“아니.”
서규하는 즉각 부정했다. 그러기는커녕 못 먹여서 안달 난 사람처럼 먹을 걸 사다 바치고, 늦은 시간에 셀프 머슴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추궁을 거듭하던 김모란은 서규하가 몇 번이나 아니라고 부정하자 그제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그럼 얼른 먹어. 네가 잘 먹어야 깜짝이가 쑥쑥 잘 자라지.”
그 말에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마침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서규하는 답지 않게 주저하다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잘 먹는 수준을 떠나서 돼지처럼 처먹고 있어. 며칠 만에 2kg이나 찌는 게 말이 돼?”
“보통 사람이 그러면 문젠데, 넌 아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
“배도 하루가 다르게 나오고…….”
다운된 기색을 감지한 김모란은 ‘임신하면 원래 그렇다.’는 타박 대신 서규하의 기운을 북돋아 줄 수 있을 법한 말을 해 주었다.
“말했잖아. 얼굴만 보면 티도 안 난다고. 아기 낳으면 쑥 들어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먹어.”
“진짜 들어갈까?”
“당연하지. 연예인들 애 낳고 한두 달 만에 살 쫙 빼서 복귀하는 거 못 봤어?”
“그 사람들은 연예인이라서 그런 거잖아.”
“그래 봤자 똑같은 인간이야. 아님 너도 아기 낳고 나서 이차개한테 PT 회원권 끊어 달라고 해. 결혼식 때 그 새ㄲ…, 걔 얼굴 보니까 PT 회원권이 아니라 헬스클럽도 통째로 사 줄 기세더라. 나 걔 그렇게 똥멍…, 바보처럼 풀어진 표정 처음 봤어.”
입에 붙은 말버릇이 있다 보니 자꾸만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둘만 있으면 컨트롤할 필요가 없지만, 서규하의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생각해서 바르고 고운 말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저한테는 지금도 눈엣가시 같은 놈이지만 깜짝이한테는 아빠니까 말이다.
“얼른 먹어. 여기까지 왔으니까 제대로 싹쓸이하고 가자.”
“나 배 나와서 걱정이라니까.”
“내 말 귓등으로 들었어? 아기 있으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잘 먹어야 돼. 얼굴만 보면 진짜 티 하나도 안 나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키는 대로 마음껏 먹어.”
“……살쪄서 한심하게 볼까 봐.”
주어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김모란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목청을 높였다.
“자기 애 가져서 그런 건데 한심하게 보면 그게 미친 새끼지. 특히 넌 그런 걱정 할 필요가 없어. 말했잖아. 이차영이라면, 네가 살찐 수준이 아니라 데굴데굴 굴러다녀도 좋다고 업고 다닐걸?”
“…….”
“알파인 내가 보증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맛있게 먹자.”
내려둔 젓가락을 잡아서 손에 쥐여 주기까지 하는 바람에 서규하는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면발을 돌돌 말았다. 뒤늦게 덧붙이는 김모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차개가 속 썩이거나 짜증 나게 굴면 이혼 서류 내던지고 나한테 와. 위자료 왕창 뜯게 도와줄게.”
서규하는 픽 웃으며 식사를 이어 갔다. 분명 조금 전과 똑같은 맛일 텐데 희한하게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나란히 그릇을 비우고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본격적인 먹자 타임을 가졌다. 오로지 먹을 목적으로 작정하고 내려온 김모란은 물론이고, 서규하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배를 채우는 데 동참했다. 일렬로 죽 늘어선 상점마다 발걸음이 멈췄다. 다 먹은 어묵 꼬챙이를 내려놓은 김모란은 바로 옆에 있는 양념 염통 꼬치를 집어서 스스럼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와 씨, 존나 맛있다.”
매콤달콤한 양념과 불 맛의 조화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서규하도 홀린 듯이 손을 뻗어서 숯불 꼬치를 골랐고, 마찬가지로 아낌없는 감탄을 쏟아 냈다.
다음 메뉴는 빈대떡이었다. 지글지글한 기름 위에서 노릇하게 익어 가는 걸 보니 군침이 절로 돌았다. 이어서 매콤한 순대와 납작 만두, 씨앗이 잔뜩 든 호떡까지, 상점을 하나씩 거쳐 갈 때마다 김모란은 현금을 빵빵하게 채워 온 지갑을 아낌없이 열었다.
한 바퀴를 쭉 돌아서 출발 지점으로 복귀했을 때는 말 그대로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쪽, 화려한 푸른 빛깔의 레모네이드를 빨대로 마신 뒤에 김모란은 서규하에게 물었다.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없어. 배 터질 거 같아.”
배가 아니라 목 끝까지 가득 찬 느낌이었다. 습관처럼 부른 배에 손을 올리는데 뒤늦은 민망함이 찾아왔다. 이렇게 잘 먹을 거면서, 살이 쪄서 고민이네 어쩌네 하는 말을 괜히 한 것 같았다.
“하암……. 먹으니까 졸리네.”
배부르면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건 누구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이윽고 김모란의 시선이 거듭 서규하를 향했다.
“좀 쉬었다 갈까? 안전벨트 매면 바로 올릴 거 같아.”
“……그런 생각은 속으로만 해, 좀.”
미간을 찡그리고 타박했지만 내심 혹하는 제안이었다. 몇 시간 동안 계속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아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근처에 쉴 만한 데 있어?”
“호텔 예약해 놨어. 난 하룻밤 자고 갈 생각이었거든. 아님 너도 그냥 여기서 1박 하고, 내일 나랑 같이 올라가자.”
서규하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난 그냥 좀만 쉬었다가 올라갈게. 잠은 집에서 자야 편할 거 같아서.”
딱히 잠자리를 가리는 편은 아니지만, 당연히 당일치기로 다녀올 줄 알고 아무런 준비도 해 오지 않은 상태였다. 갈아입을 옷도 그렇고 매일 먹어야 하는 영양제 등도 생각나서 거절했더니 김모란은 대번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놀렸다.
“웬일이야. 그냥 꽉 잡혀 사네.”
“잡혀 살긴 누가 잡혀 살아.”
“누구긴. 너 님이지.”
실실 웃으며 장난스럽게 들이대는 얼굴을 피해서 서규하는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냈다. 상단 표시줄은 여전히 잠잠했다. 이차영에게 한 번 더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생각을 바꿔 화면을 끄고 말았다. 어차피 녀석의 핸드폰은 지금도 집에 있을 거고, 한 시간 정도 쉬었다 가도 이차영보다 자신이 먼저 도착할 것 같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되돌아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김모란이 운전석을 차지했고, 서규하는 다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
정원을 지나쳐 현관문 앞에 이른 이차영은 빠른 손길로 도어락을 해제했다. 거실은 잠잠했다. 실내를 한 번 쭉 둘러본 뒤에 이차영은 성큼성큼 침실로 직행했다.
“나 왔…….”
문을 열자마자 멈칫했다. 거실에 없으니 당연히 침실에 있을 줄 알았는데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었다. 혹시나 해서 안에 딸린 화장실 문을 열어 봤지만 그곳에도 서규하는 없었다.
덕분에 본의 아닌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주방, 드레스 룸, 2층에 있는 손님방에 이어서 부부 침실 옆에 있는 아기방 문까지 열어 봤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찾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규하야. 서규하.”
다시 한 번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이차영은 소리 높여 서규하를 찾았다. 하지만 어딜 가도 적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확실한 부재를 인지하자마자 기저에 깔려 있던 불안함이 순식간에 증폭했다.
결혼 이후에 이차영은 서규하에 한해서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딱 하나 용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서규하가 말도 없이 집을 비울 때였다. 경험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은 생각보다 영향력이 컸다. 임신 초기에 서규하와 연락이 완전히 두절됐던 일이 자신도 모르게 내면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 버렸는지, 귀가했을 때 녀석이 보이지 않으면 겁부터 덜컥 났다.
얼마 전에는 이 문제 때문에 처음으로 다투기까지 했었다. 정신없이 온 집 안을 돌아다니며 찾는데 서규하가 편의점 봉지를 손에 든 채 나타났고, 그때 이차영은 언성을 높이면서 진심으로 화를 냈다. 그다음은 애원이었다. 어딜 가도 괜찮은데, 제발 말없이 나가지만 말아 달라고.
서규하는 내가 무슨 물가에 내놓은 애새끼냐며 어이없어하면서도 결국엔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뒤로 웬만하면 자신이 퇴근하는 시간에는 집에서 기다려 주는데……. 오늘 또 기척이 전혀 느껴지질 않으니 덜컥 불안함이 밀려왔다. 홑몸이 아니기에 더더욱.
‘아.’
가벼운 패닉에 빠진 채로 거실을 서성이다가 이차영은 그제야 핸드폰의 존재를 생각해 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침실 문을 다시 열었다. 협탁에 놓인 핸드폰을 낚아채듯 잡아서 켜 보니 서규하가 보낸 문자가 보였다.
[바람좀쐬고올게]
“하…….”
맥이 탁 풀리는 느낌과 함께 신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안도는 아직 일렀고, 이차영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Trrr- Trrr-
단조롭게 반복되는 연결음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마침내 끊기는 소리에 이차영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기대하던 목소리 대신 ‘지금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다시 한 번 걸어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굳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은 이차영은 곧바로 문자를 보냈다.
[어디야? 문자 보면 바로 전화해]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몇 글자를 지우고 다시 입력했다.
[나 왔어ㅎㅎ 깜짝이랑 산책 나갔어? 문자 보면 전화해줘]
메시지를 보낸 뒤에 이차영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뚫어져라 핸드폰을 쳐다봤다. 하지만 핸드폰은 죽은 것처럼 잠잠했다. 참고 참다가 10분 뒤에 한 번 더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았고, 이차영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일어서며 최근 통화 기록에서 ‘도우미’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 네, 도련님.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규하, 어디 갔는지 아세요? 집에 없는 거 같아서요.”
- 어머나,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아직’이라는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이차영은 곧바로 되물었다.
“몇 시에 나갔습니까?”
- 아마 11시쯤에 나가셨을 거예요.
“그 뒤로 본 적 없고요?”
- 네. 퇴근할 때까지 못 뵀어요. 퇴근한다고 문자 보냈는데 답장도 없으셨고요.
“……알겠습니다.”
유의미한 소득이 없는데 계속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어서 이차영은 정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위치 추적 및 CCTV로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
“으음…….”
침이 슬쩍 나온 듯한 입가를 훔친 뒤에 서규하는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숙면을 이어 가려던 것도 잠시, 불시에 정신이 드는 느낌에 튕기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에 닿는 풍경은 낯설었다. 여기가 어딘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잠깐 쉬었다 가려고 김모란과 함께 호텔로 들어온 것을 떠올렸다. 누워서 허리만 펼 생각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몇 시나 됐지?’
어둑한 사위가 뒤늦은 불안함을 자아냈다. 몸을 일으킨 서규하는 소파에 올려둔 코트를 집어 들고 핸드폰을 찾았다. 그런데 어째 양쪽 주머니 전부 텅 비어 있었다. 두어 번 확인을 끝낸 뒤에 침대로 돌아가서 이불을 들썩였지만 어디에도 찾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차에 흘리고 왔나…….”
시장 입구에서 만지작댔던 기억이 있으니 호텔로 오는 동안 차 안에서 흘렸을 가능성이 컸다. 쯧, 하고 혀를 차면서 서규하는 복도로 나갔다.
똑똑-
도어벨은 생각도 못 하고 다급하게 옆방 문을 두드리며 김모란을 불렀다.
“나야. 안에 있어?”
잠시 후에 김모란이 놀란 얼굴로 문을 열었다.
“아직 안 갔어?”
“누워 있다가 그대로 자 버렸어. 나 핸드폰 좀 빌려주라.”
“배터리 다 됐어?”
“차에 놔두고 온 거 같아.”
어쩐지, 하는 표정이 김모란의 얼굴에 떠올랐다.
잠깐 쉬는 거니까 같이 올라가자고 말했지만 서규하는 부득불 옆방을 따로 잡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이제 가냐’고 문자를 보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없었다. 먹고 튀었다는 생각에 다다다다 쏘아붙이는 문자를 다시 보냈는데, 전말을 알게 되니 뒤늦게 머쓱해졌다.
“들어와.”
침대로 다가간 김모란은 잠깐 핸드폰을 만지작거린 뒤에 서규하에게 건네주었다. 액정을 보자마자 픽 웃음이 나왔다. ‘이차개새끼’라는 이름이 떠 있는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가니 잠시 후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 왜.
순간 서규하는 멈칫했다. 고작 한 음절에 불과하지만 느낌이 평소와 사뭇 달랐다. 받기 싫은 전화를 받았거나 자다 깬 사람처럼 싸가지가 없었다.
- 여보세요? 잘못 걸었어?
“나야.”
짧은 침묵 뒤에 되묻는 말이 이어졌다.
- ……서규하?
“어.”
- 너 지금 어디야!
금세 터져 나오는 고성에 서규하는 화들짝 놀라서 핸드폰을 멀찍이 뗐다. 시발, 깜짝 놀랐네. 테러당한 귀를 문지르다가 다시금 귓가로 가져갔다.
“왜 소리는 지르고 지랄이야. 문자 남긴 거 못 봤어?”
- 봤어. 전화는 왜 안 받아?
“폰, 차에 흘린 거 같아. 금방 들어갈 테니까 발 닦고 먼저 자.”
기다리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이차영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 모란이 좀 바꿔 줘.
“? 모란이는 왜.”
- 할 말이 있어서.
서규하는 떨떠름해하면서도 김모란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너 바꿔 달래, 하는 말을 덧붙였더니 김모란도 떨떠름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왜.”
서규하는 귀를 쫑긋 세웠지만, 볼륨이 작아서 이차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김모란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이내 멈칫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규하 말 못 들었어? 발 닦고 먼저 처자라잖아. 집 못 찾는 애도 아니고.”
- 고속도로 탔어.
“……뭐?”
- 고속도로 탔다고. 어디에 있는지만 말해 줘. 시간 줄이게.
김모란은 한 박자 늦게 말뜻을 깨닫고 실소를 흘렸다.
“와, 이 미,”
까지만 내뱉고 급하게 말을 삼켰다. 힐끗, 서규하의 부푼 배를 확인하고는 욕 대신 한숨을 흘리며 뒤늦게 대답했다.
“동해에 있는 xx호텔이야. 1302호.”
- 규하한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해 줘. 금방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서규하가 묻는 말이 들렸다.
“뭐라고 해?”
“…….”
고개를 든 김모란의 눈동자에 측은함이 번졌다. 어쩌다 저런 올가미 같은 새끼한테 걸려서는.
각인한 상대에게 집착하는 알파의 특성은 김모란도 익히 잘 알고 있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인 줄 알았는데……. 저 이차영이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집착하고 지랄 발광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왜, 뭐라고 하던데. 너한테 뭐라 한 건 아니지?”
은근한 재촉이 담긴 말에 김모란은 어깨를 으쓱이며 뒤늦게 대답했다. 염병천병 둘이 똑같구나, 속으로 생각하면서.
“너 데리러 여기까지 오신단다.”
***
“이 집 햄버거 잘하네. 완전 아메리카 스타일이다.”
“그러게.”
서규하는 이견 없이 동의했다.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킨 뒤에 또 한 입 크게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인체 메커니즘은 실로 경이로웠다. 시장에서 그렇게 많이 먹고 왔건만, 시간이 흐르니 언제 그랬냐는 듯 슬슬 허기가 느껴졌다. 김모란도 속이 허하다면서 수화기를 들고는 망설임 없이 룸서비스를 시켰다.
TV로 외국 영화를 보면서 늦은 저녁을 먹는데 문 너머에서 딩동 하는 큰 소리가 울렸다. 직원을 제외하고 도어벨을 누를 법한 사람은 뻔했다. 앉아 있어, 하고 말한 김모란이 저벅저벅 걸어가서 객실 문을 열었다.
정말 여기까지 찾아온 이차영의 얼굴이 보였다. ……참 지극도 정성이네. 옅은 한숨을 한 차례 내쉬고는 입을 열려는데 이차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규하는.”
“안에 있어.”
서둘러 들어가려는 것을 막아서며 김모란은 읊조리듯 재빨리 말했다.
“내가 오자고 해서 온 거야. 밥 먹는 중이니까 성질내지 마.”
“……안 그래.”
이차영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옆을 지나쳐 룸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서규하와 눈이 마주쳤다. 그대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녀석의 어깨를 와락 껴안았다.
“야…….”
당황한 듯 밀어내는 손짓이 느껴졌지만 이차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에 그제야 천천히 시선을 마주했다. 허리로 내려간 손은 계속해서 서규하를 안고 있었다.
“몸은 괜찮아?”
“멀쩡해. ……금방 간다니까 뭐 하러 여기까지 오고 난리야.”
“여기가 금방 올 수 있는 거리야? 이렇게 멀리 나오면서 결혼반지도 안 끼고.”
그건 또 언제 봤는지, 웃는 얼굴로 정곡을 찌르는데 할 말이 없었다. 서규하는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손 부어서 빼놓고 온 거야. 저녁은 먹었어?”
“아직 안 먹었어.”
“시간이 몇 신데 밥도 안 먹고 돌아다녀?”
“너 찾느라 정신이 팔려서 배고픈 줄도 몰랐어.”
염병하고 있네.
딱 그 표정으로 멀찍이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김모란은, 이차영이 서규하의 귀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축객령을 내렸다.
“남의 방에서 염장질 그만하고 니들 방에 가서 놀아.”
백 퍼센트 진심이 담긴 표정이었다.
***
욕조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뒤쪽에 앉은 이차영도 그렇고, 이차영의 가슴팍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있는 서규하도 더없이 안온한 표정이었다. 1인용이라 조금 비좁긴 해도 그만큼 몸이 밀착되는 느낌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서규하의 배를 만질 때마다 수면이 얕게 흔들렸다. 이차영이 세우고 있는 무릎에 두 팔을 걸친 채로 느긋하게 앉아 있다가, 문득 생각난 사실에 서규하는 입을 열었다.
“너, 내 번호 못 외워?”
“당연히 외우지.”
“근데 왜 진작 전화 안 했어?”
“집에 폰을 놔두고 갔어. 아님 당연히 점심때 문자했지.”
‘점심’이라는 말을 들으니 덩달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어딜 둘러봐도 회사원들끼리 앉아 있는 곳에서 혼자 돼지처럼 밥을 먹는 것도 쪽팔리고 비참했지만, 하필 그 타이밍에 여봐란듯이 일행들과 함께 들어오던 이차영을 본 것이 결정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윽고 서규하는 몸을 일으키며 불만 섞인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나 찾아간 거 들었을 거 아냐. 얼마나 바쁜지는 모르겠는데, 사람이 이 꼴로 거기까지 갔으면 전화 한 통쯤은 해 줄 수 있잖아. 번호도 외우고 있다면서.”
미안하다며 능글맞게 웃을 줄 알았는데, 이차영은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욕조 벽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찾아왔다고? 회사에?”
“폰 놔두고 갔길래 갖다 주러 갔었어.”
“근데 왜 말도 없이 그냥 갔어.”
“그냥 가긴 누가 그냥 가? 너 찾으니까 회의 중이라길래 메모 남겨 놨는데……. 못 들었어?”
“전혀 못 들었어.”
당황스러워하는 이차영의 표정을 보니 뒤늦게 한 가지 더 깨달은 바가 있었다. 당시엔 연이어 찾아온 현타 때문에 몰랐는데, 일부러 회사까지 찾아갔는데도 끝내 전화 한 통 없었다는 사실이 저도 모르게 서운함으로 남은 듯했다.
지금이라도 사실을 알고 나니 꽁하던 마음이 눈 녹듯 스르륵 녹아내렸다. 자세를 바로 하며 다시금 등을 기대자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미안. 많이 서운했겠다.”
“……서운은 무슨.”
촉, 눈앞에 드러난 서규하의 목덜미에 입을 맞춘 뒤에 이차영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규하야.”
“왜.”
“오늘 빨리 연락 못 한 거 말고, 혹시 내가 너 또 서운하게 한 건 없어?”
서규하는 몇 초의 텀을 둔 뒤에 대답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
일부러 농담조로 되묻자 상체를 끌어안는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그냥. 요즘 좀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혹시 내가 뭐 잘못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으면 말해 줘. 바로 고칠게.”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슬쩍 달아오른 귓불을 한 채 서규하는 대답을 잠깐 보류했다. 없다고 대답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이차영이 이렇게까지 말하며 노력하려는 모습을 보니 ‘솔직하게 털어놔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차영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참방, 물속에 잠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서규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없어. 그냥……. 배가 갑자기 많이 나와서 스트레스를 좀 받았어. 복근은 흔적도 없고, 배는 자꾸 나오는 데다 살까지 쪄서.”
“…….”
“너 때문에 힘든 건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키던 이차영이 뒤늦게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미안.”
“네가 왜 사과를 해? 나 때문에 그런 거라니까.”
“그것조차도 미안해.”
“…….”
“스트레스 쌓이면 참지 말고 나한테 풀어. 쌍욕 해도 되고, 성질내도 되고, 기분 풀릴 때까지 실컷 두들겨 패도 돼. ……뭘 해도 다 좋은데, 오늘처럼 말없이 사라지지만 마.”
뜻밖의 말에 서규하는 멈칫했다가 다시금 천천히 몸을 이완시켰다.
“내가 언제 말없이 사라졌다고 그래. 문자 보냈잖아.”
“응. 그래도 엄청 놀랐어.”
여기까지 한달음에 내려온 것만 봐도 알 것 같았다. 누굴 상습 잠수함으로 알아. 속으로 괜히 툴툴대면서도 서규하는 이차영의 손끝을 넌지시 붙잡았다. 마침 이런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온 김에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깜짝이 낳으면 나도 일하러 갈 거야.”
“일?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카페지.”
점장이랍시고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얼굴을 내비쳤는데, 배가 티 나게 불러 오면서부터 코빼기도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노는 건 똑같아도, 스스로 농땡이를 치는 것과 외부적 요인에 의해 못 나가게 되는 건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응.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나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덕분에 몸을 담그고 있는 물의 온도만큼이나 따뜻하고 몽글한 기분이 차올랐다. 역시,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을 ‘이차개’에서 ‘이차영’으로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
그러다 서규하는 멈칫했다. 시선이 저절로 아래를 향했다. 숨죽이고 배를 쳐다보고 있다가, 거듭 흠칫 놀라며 이차영을 찾았다.
“움직인 거 같아.”
“응?”
“배가 움직인 거 같다고.”
정확히는 배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음식물이 소화되면서 꼬르륵할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어디 봐.”
커다란 손이 복부에 닿았고, 머잖아 두 사람 모두 멈칫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배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확실하게 났다.
“야, 이거…….”
뒷말은 이차영이 이었다.
“태동 같아.”
정답이라는 듯, 한 번 더 콩콩대는 귀여운 발길질이 이어졌다. 계속 서규하의 배에 손을 올린 채 등 뒤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이차영의 얼굴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걱정할까 봐 말은 안 했지만, 이르면 18주 차쯤부터 느껴진다는 태동이 아직 없어서 내심 신경 쓰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마침내 이렇게 확실한 기척이 느껴지니 안도감이 절로 밀려왔다.
“……기분 존나 이상해.”
이차영은 옅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딱 서규하다운 감상이었다. 춥,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긴 뒤에 이차영은 “그만 나갈까?” 하고 먼저 몸을 일으켰다.
밤 9시가 넘은 시간이라서 두 사람은 내일 새벽에 출발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단했는지 서규하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 이차영은 김모란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금방 온 답장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서 복도로 나갔다.
똑똑- 옆방 문에 대고 노크하자 잠시 후에 문이 열리며 김모란이 나타났다. 턱짓으로 안을 가리키는 행동에 이차영은 사양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왜 보자고 한 거야?”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말해 보라는 표정으로 삐딱하게 서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의 말이 이어졌다.
“규하가 스트레스 때문에 많이 힘든가 봐. 시간 되면 오늘처럼 한 번씩 만나서 이야기 상대 좀 해 줘.”
솔직히 말하면 좋아서 하는 부탁은 아니었다. 김모란도 엄연한 알파라서 경계 대상에 속하지만, 자신에게만 그러할 뿐이었다.
언제부턴가 서규하는 학창 시절 때부터 친하다는 친구들도 잘 만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녀석이 부른 배를 하고도 스스럼없이 만나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김모란이 있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부담 없이 편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라는 뜻이었다.
“오늘처럼 너무 멀리까지 가지는 말고.”
당부를 덧붙이자 김모란은 코웃음을 쳤다.
“부탁한다는 새끼가 조건 붙이기는.”
저벅저벅 걸어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끌리는 게 없었다. 탁, 사감을 담아 문짝을 닫고 일어선 뒤에 김모란은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툴툴댔다.
“시발, 내가 먼저 덮치는 건데.”
불확실한 문장이었지만 이차영은 곧바로 알아듣고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규하, 여자한테는 안 서.”
“지랄, 좆대가리에 성별 감지 기능이라도 달려 있어? 만지면 서는 거지.”
“남자 오메가 알아봐 줄까?”
“신경 써 주는 척하지 마. 나한테 규하 뺏길까 봐 그러는 거 모를 줄 알아?”
“들켰네.”
일견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어디까지나 농담에 불과한 말이었다. 거듭 한숨을 흘린 뒤에 이번에는 김모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해 줘. 세상 태평한 애가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하는 거 보니까 짠하더라.”
“그래야지.”
“말도 가려서 해. 여기까지 온 지랄 정성을 봐서 해 주는 말인데, 살쪘다거나 부었다, 뭐 그런 말 하면 바로 이혼 각이야.”
“알았어. 조심할게.”
순순히 수긍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배알이 꼴렸다. 쌍으로 염장질하는 것도 아니고.
“할 말 다 했으면 꺼져. 잘 거야.”
이차영은 곧바로 돌아서는 대신 김모란을 향해 무언가를 가볍게 던졌다.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잡고 보니 차 키였다.
“내 차 끌고 올라와. 올 때 규하 차 타고 왔다면서.”
“웬일로 마음에 드는 짓을 다 하네.”
갈게, 하는 인사를 남긴 뒤에 이차영은 옆방으로 되돌아갔다. 다행히 서규하는 계속 한밤중이었다. 아까처럼 조심조심 기척 없이 올라가서 그 옆에 조용히 몸을 뉘었다. 그러길 잠시, 이내 옆으로 돌아누워 머리를 괴고 잠든 서규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왼손은 이끌리듯 서규하의 복부로 향했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지며 미소가 나왔다. 고요한 정적마저 행복으로 다가오는 안온한 밤이었다.
***
다음 날 저녁, 가방을 챙겨 든 이차영은 직원들의 인사를 뒤로한 채 이사실을 나섰다. 임원진 전용 엘리베이터는 단 한 번의 멈춤 없이 빠르게 하강했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어김없이 정 실장이 주차장에 먼저 와 있었다.
“오셨습니까?”
이차영은 거두절미하고 그에게 물었다.
“부탁한 건 준비됐습니까?”
“네. 지금 바로 설치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차영은 스마트 키로 차량 잠금을 해제했다. 가까이 다가간 정 실장이 열린 트렁크 안으로 상체를 숙여서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이차영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정 실장이 서규하의 차량에 설치하는 것은 위치추적기였다. 그동안은 핸드폰 어플로도 충분했지만, 어제처럼 서규하가 들고 있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차선책을 마련했다. 사실 이것도 백 퍼센트 만족스러운 방법은 아니었다. 차를 놔두고 어딘가로 이동하면 소용이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소요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잠시 후에 정 실장은 숙이고 있던 상체를 바로 하며 손을 탁탁 털었다.
“끝났습니다. 커버 안쪽으로 붙여 놔서 들킬 가능성은 없다 보시면 되고, 설치 어플 주소는 문자로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오래 지속됩니까?”
“최장 3년까지 배터리 교체 없이 사용 가능합니다. 박 실장이 손을 좀 봐서 주기적인 지도 업그레이드가 가능하고, 로드뷰 기능을 이용하시면 주변 지형지물도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동일 옵션으로 더 작은 사이즈는 없습니까? 지름 5mm 정도면 좋을 거 같은데.”
“유감스럽지만 그 정도로 초소형인 위치추적기는 아직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수고했습니다.”
짤막한 격려를 남기고 이차영은 먼저 차에 올랐다. 퇴근 시간 러시아워 때문에 차는 얼마 못 가서 신호에 걸렸다.
[이제 출발했어. 저녁 같이 먹자]
서규하에게 문자를 보낸 뒤에 이차영은 창틀에 올린 팔로 머리를 괸 채 표정 없는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생각할수록 아쉽기는 했다. 초소형 사이즈가 있으면 서규하가 늘 하고 다니는 피어싱으로 만들어서 선물하면 딱인데. 그렇다고 몸에 칩을 박을 수도 없고…….
생각난 김에 핸드폰을 다시 켰다. 자신과 헤어지자마자 바로 보냈는지 정 실장으로부터 문자 한 통이 들어와 있었고, 이차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금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