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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y to be parents (16/28)

Ready to be parents

삑삑삑삑- 삑삑삑삑-

언제부턴가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울렸다. 서규하는 인상을 구긴 채로 더듬더듬 베개 주변을 더듬어서 핸드폰을 찾았다. 소리부터 죽이고 누워 있다가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 시간은 오전 9시 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고민 없이 다시 잤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병원 검진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슬슬 움직이려고 하는데 타이밍 좋게 방문이 열리며 이차영이 들어왔다. 침대에 앉은 서규하를 보고는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일어났네. 안 그래도 깨우러 왔는데.”

미소가 좀 더 깊어졌다. 잠이 덜 깬 얼굴도 그렇고, 삐죽삐죽 뻗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머리카락도 마냥 귀여웠다.

“씻고 와. 안 늦으려면 빨리 준비해야 될 거 같아.”

“그러게 오후에 혼자 간다니까 귀찮게…….”

서규하는 마른세수를 두어 번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이차영은 도우미에게 식사 준비를 부탁하고, 드레스 룸으로 가서 외출복을 골랐다.

옷을 갈아입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지난달부터 이차영은 서규하가 부인과 검진을 받을 때마다 운전기사를 자처하며 동행했다. 계기는 산모 수첩이었다. 신혼집으로 짐을 옮겼던 날, 이차영은 정리가 끝난 집을 돌아다니며 꼼꼼히 살펴보다가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자그마한 수첩을 발견했다.

표지에는 귀여운 양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밑에 적힌 글자를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Parents’ Diary’와 ‘깜짝아 사랑해’, 그리고 ‘xx병원 부인과’라는 글자가 차례로 프린팅되어 있었다.

보자마자 뭔지 감이 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겨 보니 아니나 다를까 진찰 내용과 태아 초음파 사진 등이 보였고, 기록된 마지막 페이지에는 다음 검진 예정일이 적혀 있었다.

그날 밤, 이차영은 마사지를 받고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서규하에게 또 귓속말로 말을 거는 스킬을 시전했다. 규하야, 다음부턴 검진받을 때 나랑 같이 가자. 끝나면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응?

잠결에 귀찮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서규하는 예상외로 쿨하게 승낙했다. 이제는 다음 문제를 해결할 차례였다. 이차영이 알아본 바로는, 남성체 오메가는 임신을 해도 복강이 팽창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보통 8개월 전후로 출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렇게 계산하면 당장 서너 달 후에 아이를 낳게 되는데, 일반 병원에서 남성체 오메가의 출산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그리고 꼼수를 써서 일단 동의를 받아 내긴 했지만, 남자 둘이 나란히 부인과를 찾는다는 사실을 서규하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었다. 다음 날 이차영은 서규하에게 그룹 계열사 병원으로 옮기는 건 어떤지 조심스레 제안했고, 지원금이라는 훌륭한 무기와 약간의 권력을 이용해서 남성 임부들을 위한 대기실과 진료실을 따로 마련했다. 그 뒤로 매주 토요일 오전마다 함께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고, 검진이 끝나면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가곤 했다.

때맞춰 집을 나선 덕분에 다행히 늦지 않고 병원에 도착했다. 대기실에는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차영이 접수를 하는 동안 서규하는 익숙하게 걸음을 옮겨서 안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남성 임부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데 올 때마다 누구와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소파에 앉아 있으니 이차영이 뒤따라 들어왔다. 자리도 많은데 굳이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아서는 서규하의 손을 가져가서 주물렀다.

“혈압은 쟀어?”

“아직. 좀 이따 할 거야.”

“오늘은 뭐 먹으러 갈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너는.”

“난 아무거나 괜찮아.”

덤덤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서규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입덧 때문에 우욱 하며 헛구역질을 하거나 몰래 바나나를 먹다 들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지금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럼 초밥 먹으러 가자.”

“좋지.”

이차영이 곧장 핸드폰을 꺼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약 어쩌고 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며 간호사의 얼굴이 보였다.

“서규하 님, 진료실 들어가실게요.”

그제야 부랴부랴 혈압을 측정한 뒤에 서규하는 바로 옆 진료실로 자리를 옮겼다. 연륜이 느껴지는 의사는 살갑게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맞았다. 매번 하는 상세한 질의응답을 기록으로 남긴 다음, 복부 초음파 검사를 위해서 침대에 누울 것을 권했다.

시키는 대로 누워서 배를 까자 겔을 묻힌 기계가 복부에 닿았다. 이윽고 머리맡에 있는 모니터에 변화가 생겼다. 힐끗 고개를 돌린 서규하는 물론이고, 이차영도 화면에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보면 아시겠지만 이쪽이 머리입니다. 아주 건강하게 잘 크고 있네요.”

유심히 화면을 보고 있던 이차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머리가 너무 밑으로 내려간 것처럼 보이는데……. 괜찮은 겁니까?”

“원래 태아 위치는 계속해서 바뀌어요. 배 속에서 신나게 움직이다가, 30주 중반쯤 되면 자리가 잡힙니다.”

이어서 의사는 서규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태동은 느껴 보셨어요?”

“……아뇨.”

배가 살짝 나오고 단단하게 뭉친 느낌은 여전하지만, 아직 아기가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몇 번의 진료로 임부의 배우자 성격을 완전히 파악한 의사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이 18주 차니까, 아마 다음 주쯤이면 태동이 확실하게 느껴질 겁니다. 수분 섭취 계속 많이 하시고, 절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스트레칭이나 요가 같은 운동도 꾸준하게 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끝까지 투철한 프로 정신을 빛내는 의사를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진료실을 나섰다. 걸어 내려가면 금방이지만 서규하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편을 선택했다. 이내 또 피식 웃고 말았다. 그새를 못 참고, 또 아기 수첩을 들여다보는 이차영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문을 통해서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아까 말했던 대로 오늘 점심은 일식집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점심을 푸짐하게 먹을 생각에 아침은 가볍게 먹었더니 주린 배가 공복을 호소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댄 다음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영이 아니니?”

느닷없이 불린 이름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뒤를 향했다. 금세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네댓 걸음 떨어진 곳에 부모님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이차영이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랜만에 네 아버지랑 같이 밥 먹으러 나왔어. 어쩜 이런 데서 다 만나네.”

듣는 순간 느낌이 왔다. 지인이 하는 식당이라서 일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간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목적지가 같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너희들도 점심 먹으러 왔어?”

“네.”

“잘됐네. 안 그래도 오면서 너희들 보고 싶다고 얘기했거든. 그렇죠, 여보?”

마주 선 이차영의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서규하도 직감했다. 아. 백 퍼 같이 앉겠구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잔마다 공손하게 찻물을 따라 준 직원이 나가자마자 최태선은 맞은편에 앉은 서규하에게 물었다.

“몸은 어때, 규하야?”

“괜찮아요.”

“깜짝이는 잘 크고 있고?”

“네.”

이내 최태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서규하의 모친인 정은희와는 중학생일 때 서로 처음 알게 됐다. 새 학기 첫날 제비뽑기로 짝이 된 게 만남의 시작이었는데, 처음부터 대화도 잘 통하고 성격도 잘 맞고, 소소한 취향마저 닮은 점이 많았다. 영혼의 쌍둥이가 있다면 서로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맞다 보니 두 사람은 금세 둘도 없는 단짝이 됐다.

차례로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한 뒤에도 두 여인의 우정은 굳건하게 이어졌다. 정은희가 먼저 결혼해서 두 명의 아들을 낳고, 셋째 아이를 가졌을 무렵 최태선의 배 속에도 첫 아이가 생겼다. 동갑인 아이들을 출산한 이후로, 어쩌면 당연하게도 교류는 더욱 활발해졌다. 차영이가 해외 유학을 가기 전까지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아이들을 대동하고 만나서 즐거운 담소 시간을 가졌다.

당시에 정은희는 아들만 셋이었고, 자신 또한 첫째는 아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애들 중 한 명만 딸이었어도 사돈지간이 됐을 텐데.’ 하는 우스갯소리를 가끔 했는데, 그때마다 정은희는 평소처럼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치는 대신 빙긋이 웃기만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최태선은 그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막내아들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숨긴 것에 대한 서운함은 아주 잠깐이었다. 오죽했으면 절친한 친구인 자신에게조차 비밀로 하고, 가볍게 건넨 말 때문에 느꼈을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몹시도 미안했다.

어쨌거나 기저귀를 차던 시절부터 몇 년간을 쭉 봐 왔다 보니 최태선은 친구 아들인 서규하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감정에 솔직하고,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주저 없이 말하고. 소소한 사고는 또 어찌나 잘 치는지, 엄마들끼리 차를 마시다가 정은희가 기겁하며 아이들 방이나 주방으로 달려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디 그뿐일까.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팔다리에 반창고를 달고 살다시피 했다.

그에 비해서 자신의 아들인 이차영은 애어른이 따로 없었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그야말로 흠 하나 잡을 데가 없는 녀석이었다. 머리가 좋아서 뭘 가르쳐 줘도 금방 익히고, 장난감이나 로봇보다는 책 읽는 걸 더 좋아하고, 애답게 떼를 쓰며 울거나 엄마를 찾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런 아들 녀석이 드물게 활짝 웃으며 들떠 할 때가 있었는데, 바로 ‘규하 집에 놀러 간다’는 말을 할 때였다. 주로 가는 토요일 오전이 되면 아들은 그 좋아하는 수영 강습도 제쳐 놓고 엄마를 따라나섰다.

가서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으면 쳐다보지도 않을 게임기와 캐릭터 카드를 가지고 놀 때마다 최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규하와 어울릴 때면 비로소 아들이 제 또래의 꼬맹이로 보이는 까닭이었다.

“…….”

오랜만에 옛 추억을 회상하던 최태선의 시선이 거듭 서규하를 향했다.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말하면 아들의 결혼 상대로 보기에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게 사실이었다. 아기가 생겼다는 말에 남편은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주긴 했지만, 지금도 가끔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에 비해 최태선은 차라리 잘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규하 녀석이 오메가라는 사실에 한 번, 제 아들과 그런 사이였다는 사실에 두 번 놀라긴 했지만 자신이야 처음부터 규하를 예뻐했고, 무엇보다 둘이 가정을 꾸려서 잘 살겠다고 하니 오래 고민하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조건이 비슷한 배우자를 만나면 대외적으로는 서로 윈윈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비롯되는 안정감이나 만족감을 느끼기는 매우 어려울 터였다. 자신도 그러한 격차를 무릅쓰고 남편의 청혼을 받아들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틀에 박힌 시시한 삶보다는 서로 열렬하게 사랑도 하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면서 생동감 있게 사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이 최태선의 생각이었다.

“식사 나왔습니다.”

차례로 나오는 음식들이 테이블을 채웠다. 그동안에도 최태선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실 줄을 몰랐다. 어른들 앞이니 자중할 법도 한데, 아들 녀석은 제 몫으로 나온 전채 요리를 스스럼없이 제 짝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한창 연애할 때 남편도 꼭 저렇게 자신을 챙겨 주다가 괜한 타박을 받곤 했다.

“천천히 많이 먹어, 규하야.”

“네. ……많이 드세요.”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웃는 얼굴을 피해서 서규하는 서둘러 젓가락질을 했다.

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호칭 문제가 화두에 오른 적이 있었다. 오랜 논의 끝에 상대의 부모님을 각각 어머님, 아버님이라 부르기로 합의했는데, 아직은 입에 붙지 않아서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묵묵히 식사만 하던 이태한도 그제야 운을 뗐다.

“준비는 잘하고 있어?”

대번에 알아들은 이차영이 대답했다.

“네. 오늘도 같이 병원에 다녀왔어요. 이따 사진 보내 드릴게요.”

서규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옆을 쳐다봤다. 뭐라 할 생각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가, 맞은편에 어른들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상기하고는 소리 낮춰 으르렁거렸다.

“그걸 왜 보내?”

“전에 말했잖아. 깜짝이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해하셔서, 어머님께 사진 보내 드리는 김에 우리 어머니한테도 같이 보냈다고.”

“몰라. 기억 안 나.”

“집 안에도 CCTV 달아야겠네.”

“미쳤……. 뭔 소리야.”

최태선은 소리 없이 웃으며 식사를 이어 갔다. 역시나 자신의 짐작은 맞았다. 둘이서 애들처럼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고,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 뒤에 식당 밖으로 나갔다.

“다음엔 집으로 놀러 와. 엄마가 맛있는 거 해 줄게.”

이어서 최태선은 서규하에게도 살갑게 말을 건넸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차영이 팍팍 부려 먹고, 혹시라도 너 속상하게 하면 나한테 바로 전화해. 알았지?”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주차장에서 부모님과 헤어진 뒤에 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는 백화점이었다. 식사 후에 소화도 시킬 겸, 함께 병원에 가는 날 오후에는 백화점에 들러서 쇼핑하고 아기용품도 하나씩 사 모으기로 했다.

3층에서 내리자마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오늘도 입구 쪽에 있는 매장부터 차분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서규하의 표정도 제법 진지했다. 처음엔 제 손바닥만 한 내의나 주먹의 반도 안 되는 신발을 보고 너무 하찮아서 헛웃음을 흘렸는데, 몇 번 와 봤다고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그동안 이차영은 핸드폰 메모장을 켰다.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은 이런 때에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최종 수정 날짜가 지난주 토요일인 파일을 열자 매주 뭘 살지를 꼼꼼하게 적어 놓은 목록이 나타났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깜짝이 장난감을 사는 날이었다.

이차영은 걸음을 옮겨 영아용 장난감이 놓여 있는 섹션으로 갔다. 정신없이 빠져든 것은 금방이었다.

이걸 고르자니 저것도 예뻐 보이고, 저걸 사자니 그 옆의 것도 좋아 보이고. 오랜 심사숙고 끝에 이차영은 팔을 뻗어서 파란색 딸랑이와 노란색 딸랑이를 차례로 집어 들었다. 나란히 서서 매대에 진열된 상품을 눈으로 훑던 서규하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왜 두 개나 꺼내?”

“둘 다 마음에 들어서 못 고르겠어.”

서규하의 눈매에 못마땅함이 묻어났다. 지난주에도 저렇게 말해서 색깔만 다른 커다란 토끼 인형을 두 개나 샀다. 매번 이런 식으로 나오면 쌍둥이도 아닌데 같은 물건이 두세 개씩 넘쳐 날 게 뻔했다.

“하나만 해, 하나만.”

이차영의 시선이 거듭 자신의 두 손을 향했다. 딸랑이 박스를 내려다보는 눈길에 진중함이 가득했다. 한동안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하다가 결국 서규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넌 어떤 게 더 나은 거 같아?”

“파란색이 낫네. ……노란색도 괜찮은 거 같고.”

블루 계열을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아기한테는 왠지 노란색이나 분홍색처럼 포근한 느낌이 어울릴 것 같았다. 아니지, 여름에 태어날 거라고 하니까 시원해 보이는 파란색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으니 악마의 유혹 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두 개 사서 둘 다 쓰자. 너 하나, 나 하나.”

“…….”

“똑같은 것만 계속 보면 깜짝이도 지겹지 않겠어?”

“……그러든가.”

이렇게 충동구매 내역은 또 늘어갔다. 이제부터는 아이쇼핑만 할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맞은편 매장에서 전시해 놓은 아기 옷이 눈에 딱 들어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차영의 걸음이 먼저 움직였다.

“진짜 작다. 깜짝이도 나중에 이런 거 입겠지?”

매장 안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직원이 ‘이때다’ 하고 부리나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아기 옷 보시려고요?”

“네. 구경만 하려고요.”

“몇 개월이에요?”

“아직 아빠 배 속에 있, 아야.”

서규하는 퍼뜩 이차영의 팔뚝을 꼬집은 뒤에 직원을 쳐다봤다.

“구경만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무표정한 얼굴이라서 ‘화가 났나.’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직원은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두 남자에게서 부의 냄새를 감지한 베테랑 직원은 웃는 얼굴로 “네. 그럼 편하게 보시고, 혹시 도움 필요하시면 바로 불러 주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는 옆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이내 서규하는 이차영을 바라보며 잇새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 말은 뭐 하러 해?”

“낳았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잖아.”

웃는 낯짝에 침 못 뱉는다더니 정말이었다. 싱긋이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서규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답답한 느낌이 싫어서 외출할 때나 겨우 결혼반지를 찾는 저와 달리 이차영은 한시도 빼 놓는 법이 없었고, 자신이 유부남인 것과 예비 아빠라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평생 베타처럼 살아온 서규하의 입장을 생각해서 배우자가 남성체 오메가인 것은 비밀에 부치고 있지만, 지금처럼 누군가가 아이에 대한 질문을 하면 결코 거짓으로 둘러대지 않았다. 아이의 존재를 모르고 부정했던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속죄라나 뭐라나.

그 사이 이차영은 또 아기 옷 구경 삼매경이었다.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린 옷들을 착착 넘겨 보다가 그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파스텔 톤의 별무늬가 가득한 내의였다.

“이거 예쁘지 않아?”

“걸어 놔.”

서규하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대꾸했다. 장난감도 그렇지만, 옷을 사는 건 더더욱 이른 감이 있었다. 뻘쭘하게 서 있기 그래서 옷걸이에 걸린 옷을 설렁설렁 넘겨 보다가 이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야.”

“응?”

“이게 왜 여기 달려 있어?”

서규하가 가리킨 것은 브랜드명 등이 적힌 태그였다. 옷 안쪽, 그러니까 목덜미에 닿는 부분에 박혀 있어야 맞는데 지금 보니 하나같이 바깥쪽에 달려 있었다.

그러네, 하며 유심히 살펴보던 이차영은 금세 정답을 찾아냈다.

“안쪽에 있으면 피부에 닿아서 그런 거 같은데. 아기들은 거의 하루 종일 누워 있으니까.”

그럴싸한 대답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서규하는 또 하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사이즈도 이상한데?”

내의 한 벌을 꺼내서 방금 지적했던 태그를 가까이 보여 줬다. 이번에는 이차영도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6m이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옷에 대한 정보는 맞는 거 같은데…….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내려다보고 있다가 서규하는 고갤 돌리며 이차영에게 물었다.

“애 키가 6m라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 같은데.”

“아니면 60cm라는 건가.”

머리를 맞대고 속닥이는 모습을 본 직원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다가갔다.

“6m은 6개월 된 아기용이라는 뜻이에요. 돌 이전의 아가들 옷은 개월 수에 따라서 3m, 6m 이런 식으로 사이즈가 나오거든요.”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서규하는 머쓱함에 괜한 헛기침을 했다. 아기 옷을 보고 6미터 운운했던 게 생각난 탓이었다.

“이런 건 어떠세요? 백 퍼센트 면으로 된 옷인데…….”

작은 친절로 환심을 산 직원은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를 뽐내며 영업을 시작했다. 잠시 후, 쇼핑을 끝내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두 남자의 손에는 딸랑이와 신생아용 속싸개, 배내옷 등이 잔뜩 든 쇼핑백이 사이좋게 하나씩 들려 있었다.

***

“하, 피곤하다.”

침대에 눕자마자 피곤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간 김에 영화도 한 편 보고 저녁까지 밖에서 먹고 왔더니 어느덧 8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평소보다 많이 걸은 탓인지 아랫배가 유난히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배를 슬슬 문지르는데 기분이 묘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깜짝이가 순탄하게 잘 자라는 만큼 배도 조금씩 더 나오는 중이었다.

남자는 근육이 많은 신체 구조상 여자들만큼 배가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는데, 말 그대로 상대적으로 그러할 뿐 아예 나오지 않는 게 아니었다. 후드 티나 품이 넉넉한 옷을 입으면 감쪽같지만, 씻으려고 홀딱 벗거나 지금처럼 맨손으로 배를 만지면 확실하게 티가 났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침실에 딸린 욕실 문이 열렸다. 상쾌한 코롱 향을 풀풀 풍기면서 침대에 오른 이차영은 어김없이 협탁 서랍에 든 오일 통부터 꺼냈다. 알아서 편하게 누우니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종아리부터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서규하는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퀴즈를 푸는데 엉터리 대답이 나올 때마다 웃음이 절로 터졌다. 푹 빠져서 재미있게 보다가 뒤늦게 이상함을 눈치챘다. 어깨도 주물러 준다길래 별생각 없이 바로 앉아서 계속 TV를 봤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차영의 몸을 베개 삼아 백 허그 자세로 안겨 있었다.

서규하는 벗어나는 대신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서 좀 더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가슴이고 배고 근육이 꽉 잡혀서 불편할 것 같지만, 실제로 기대어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딱딱한 게 아니라 탄탄한 느낌에, 의자와 달리 따뜻한 체온은 덤이었다.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길에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이차영은 잠옷 위로 서규하의 배를 문지르다가 슬그머니 옷자락을 들치고 맨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얌전한 척 배꼽 주변을 배회하던 손이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앙증맞은 존재감을 자랑하는 젖꼭지를 엄지로 살살 문지르면서 이차영은 기대감과 궁금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모유는 언제부터 나올까?”

“징그럽게 뭔 소리야.”

“징그럽다니. 배 속에 아기가 있는데 당연하잖아.”

“그런 말 하는 거 자체가 징그럽다고. 남의 모…, 아씨, 암튼 그걸 네가 왜 신경 써?”

“네 몸인데 당연히 내가 신경 써야지.”

자칫 서운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이차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민망하거나 부끄러울 때면 일부러 더 정색하거나 툴툴대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쪽, 쪽, 잠옷 위로 드러난 부드러운 목덜미에 연거푸 입을 맞추다가 서규하의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입술을 겹쳤다. 자연스레 서규하의 눈이 감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벌리고 혀를 섞으면서 진한 키스를 이어 갔다. 입 안으로 침범한 말캉한 살덩이에 제 것을 비비며 빨다가 서규하는 이차영의 목을 한 팔로 끌어안으며 받은 그대로 돌려주었다.

“추웁, 하아….”

질척거리는 소리와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신음이 성감을 고조시켰다. 계속 키스하며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어느덧 서규하의 등이 침대 시트에 닿았다. 바로 위에는 이차영이 있었다. 행여나 배를 누를까 봐 팔꿈치로 자신의 상체를 지탱한 채, 이차영은 다른 손으로 서규하의 귓불을 매만지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할까?”

“……뭘 또 물어봐. 새삼스레.”

서규하는 거듭 이차영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겹쳤다. 이번에는 길지 않았다. 감질이 날 정도로만 한 뒤에 상체를 세운 이차영은 잠옷 대용으로 입는 검은색 반팔 티를 훌렁 벗은 다음 서규하의 옷도 벗겼다.

“춥지는 않아?”

“어.”

맨살이 노출되니 살짝 소름이 돋긴 해도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에만 이렇지 금방 몸이 뜨거워지고 나중에는 온통 땀으로 흠뻑 젖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차영은 안심하고 행위를 이어 갔다. 서규하의 귓바퀴에 머물던 입술을 점점이 아래로 내리면서, 조금 전까지 손가락으로 조물거리던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혀끝으로 건드리며 빙글빙글 돌려 대다가 좀 더 입을 크게 벌려서 주변 살까지 욕심껏 머금었다. 일부러 쪽쪽 소리를 내며 강하게 빨아 댈 때마다 서규하가 흠칫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번에 함께 병원에 갔을 때 검진을 끝낸 의사는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을 알려 주었다. 병원을 나서기 전에 혼자 진료실로 되돌아간 이차영은 성관계도 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졌고, 심하게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흡족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더없이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거의 석 달 만에 제대로 된 관계를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흥분해서, 시작도 하기 전부터 프리컴이 질질 흘러나올 정도였다.

절정은 삽입할 때의 순간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풀어 준 끝에 마침내 하나가 되었을 때, 그때 느꼈던 감각은 지금 생각해도 성기가 저절로 부풀 만큼 황홀하고도 뜨거웠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서규하가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을 집중적으로 자극하면서 이차영은 손바닥 가득 짠 젤을 체온으로 녹인 뒤에 서규하의 뒤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중지를 밀어 넣자마자 뜨겁게 들러붙는 내벽이 느껴졌다. 이차영은 신중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삽입하듯 천천히 넣었다 빼면서 한 번씩 안쪽 깊은 곳을 지그시 누를 때마다 서규하의 입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이던 손가락은 금세 두 개, 세 개로 늘어났다. 오른손으로는 계속 안을 넓히면서 왼손으로는 반쯤 발기한 서규하의 성기를 애무했다. 타이트하게 쥐고 짜내듯 밀어 올릴 때마다 말간 선액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흣, 하아….”

“입으로 해 줄까?”

거절할 이유가 없는 말이었다. 달뜬 숨을 내뱉던 서규하는 대답 대신 두 손을 뻗어서 이차영의 머리를 붙잡았다. 다리 사이로 끌어 내리자 이차영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리며 서규하의 성기를 삼켰다.

“흐응…!”

뜨거운 곳으로 쑤욱 빨려 들어가자마자 등골을 타고 짜릿한 쾌감이 번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탐욕스러운 애무가 이어졌다. 허리를 들썩이며 입 안 곳곳을 찔러 대니 거부감이 들 법도 한데, 그러기는커녕 외려 더 해도 좋다는 듯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은 채 강하게 빨아들이는 압력이 가해졌다. 그때마다 서규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힘이 단단히 들어간 발끝으로 시트를 긁어 댔다. 잠시 후에 호흡만큼이나 헐떡이는 목소리가 서규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와, 할 거 같아.”

그럼에도 한동안 입으로 빨아 대다가 이차영은 뒤늦게 성기를 뱉어냈다. 곧바로 얼굴을 드는 대신 좀 더 아래쪽에 입술을 묻으며 음낭과 회음부를 스스럼없이 핥아 댔다. 어깨를 틀어쥔 서규하의 손에 한껏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해서 기둥 주변을 입술과 혀로 자극하자, 머잖아 성기 끝에서 정액이 울컥 터져 나왔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는 서규하의 아랫배가 격하게 오르내렸다. 잠깐 호흡을 고르는 동안 이차영은 젤과 함께 꺼내 둔 콘돔 비닐을 뜯었다. 이제 부부 사이니 합의하에 체내 사정을 해도 무방하지만, 위생 문제도 그렇고 깜짝이 녀석을 생각해서라도 콘돔을 착용하는 편이었다.

젖은 채로 움찔대는 구멍에 성기 끝을 맞춘 이차영은 천천히 서규하의 몸을 열고 진입했다. 한 번에 끝까지 넣는 대신, 삼분의 일 정도만 삽입해서 느릿한 왕복 운동을 했다. 시선은 결합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딜 보고 있는지 눈치챈 서규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두 다리로 이차영의 허리를 감으며 끌어당겼다.

“장난하지 말고 빨리 넣어.”

“장난하는 거 아니고, 페이스 조절하는 거야. 한 번에 다 넣으면 아파하잖아.”

“시발, 그 큰 걸 처넣는데 당연히 아프지.”

“응. 그래서 지금은 절제하잖아.”

임신한 이후 첫 관계를 맺었을 때,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귀두로 포궁 외부를 누르는 바람에 서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 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이차영은 70 퍼센트 정도만 삽입하면 서로 무난하게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물론 끝까지 넣어도 아기집이 있는 체부에 닿을 정도는 아니지만, 혹시라도 그 충격으로 수축이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에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했다.

“젤 좀 더 써 봐.”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하는 말에 이차영은 군말 없이 허리를 물렸다. 빠르게 오므라드는 입구와 발갛게 달아오른 안쪽 내벽에도 젤을 충분히 바른 뒤에 다시 삽입했다.

이번에는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허리를 움직였다. 상체를 구부려 입을 맞추자, 미끈한 혀가 입술을 벌리며 입 안으로 침범했다. 기꺼이 환영하며 짧은 키스를 나눈 뒤에 이차영은 본격적으로 허릿짓을 시작했다.

시선은 여전히 서규하의 얼굴을 향한 채였다. 적당한 속도로 왕복 운동을 하다가 조금씩 더 안으로 들어갔다. 둥글게 부푼 귀두 옆면이 내벽 어딘가를 긁자 서규하가 숨을 들이켜며 아래를 꽉 조이는 것이 느껴졌다. 쪽, 쪽, 만일 억제술을 받지 않았더라면 페로몬이 마구 뿜어져 나왔을 목덜미에 흔적을 남기면서 이차영은 계속해서 그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찔러 댔다.

“흐읏, 거기만, 하지 마!”

솔직한 몸은 여전했다. 이차영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안쪽에서 찰박이며 젖은 소리가 울렸다. 알파를 수월하게 받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자, 애써 절제하며 움직이던 몸짓이 저도 모르게 조금씩 빨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서규하의 두 손을 결박한 채 내키는 대로 사정없이 안을 쑤시며 때려 박고 싶었다. 아기가 생기기 전까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야 씨, 천천히 해!”

팔뚝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외치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차영은 심호흡으로 한 차례 숨을 돌린 뒤에 다시금 속도를 조절했다.

젤과 체액으로 흠뻑 젖은 내벽은 지금도 알파의 성기를 빨아들이듯 오물거리며 요사스럽게 움직였다. 머잖아 또다시 욕망이 이성을 앞지를 것을 예상하고, 이차영은 먼저 차선책을 내놓았다.

“네가 위에서 할래?”

차라리 그게 나을 듯했다. 지금도 이차영과 하는 섹스는 끝내주게 좋았다. 임신으로 몸에 변화가 생겨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더 민감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종종 있었다.

거기엔 이차영이 조심하는 것도 한몫했다. 혼이 쏙 빠질 정도로 격렬하게 붙어먹었을 때는 정신을 차리고 보면 끝나 있기 일쑤였는데, 요즘엔 매번 애가 탈 정도로 조심하면서 천천히 하다 보니 감각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나 좀 일으켜 봐.”

서규하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차영은 힘들이지 않고 자세를 반전시켰다. 서규하는 무릎과 발끝으로 자신의 몸을 지탱한 채, 두 손으로 이차영의 복부를 짚은 다음 천천히 엉덩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존나 빠듯해.”

엄살이 섞인 말에 이차영은 픽 웃으며 서규하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살살 쓰다듬었다.

“노팅도 잘 받아 냈으면서, 이 정도로?”

그러자 대번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개새끼야,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거 아냐!”

아차 싶은 생각에 이차영은 서둘러 시선을 내리깔았다.

러트 사이클이라서 반쯤 정신이 나가기도 했고, 그땐 서규하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시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의 동의 없이 노팅까지 한 것은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하물며 알파를 감당할 수 있는 오메가가 아니라 베타인 줄로 알면서도 그 짓을 했으니 개새끼보다 더한 욕을 얻어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팔꿈치로 상체를 일으킨 이차영이 서규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미안, 하는 말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소리 내어 말하면 더 화를 낼 것을 알기에 마음을 담은 키스로 대체했다.

“이걸로 끝이야?”

“뭔 개소리야. 어떻게 넣었는데.”

엄밀히 따지면 삽입은 이차영이 했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아직 결합 중인 사실이 중요했다. 서규하는 다시금 허리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달아오른 눈가와 찌푸린 미간까지 샅샅이 탐닉하다가 이차영은 판판한 가슴에서 유일하게 도드라진 존재감을 드러내는 젖꼭지로 손을 가져갔다.

말캉하게 감기는 느낌이 환장할 정도로 좋았다.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비비다가 힘주어 잡아당기자 아래를 꽉 무는 조임이 한층 강해졌다.

“나중에 깜짝이한테 젖 물리면서도 느끼는 거 아냐? 그럼 질투 날 거 같은데.”

“돌았어? 내가 너 같은 변탠 줄 알아?”

“안 먹인다는 말은 안 하네.”

또다시 날벼락이 떨어지기 전에, 이차영은 단숨에 몸을 일으켜서 한 번 더 서규하의 입을 막았다. 기다렸다는 듯 두 팔로 목을 감는 녀석에게 혀를 내주면서 두 손으로는 탄력 있는 엉덩이를 주무르며 허릿짓을 이어 갔다. 힘을 실어 조금 깊숙이 밀어 넣자 대번에 저지하는 말이 날아왔다.

“끝까지 넣지 마.”

“안 해. 너 기분 좋을 정도로만 할 거야.”

목 부근에 이차영의 시선이 닿았다. 서규하가 반영구적인 페로몬 억제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쉬움’이었다. 서규하라면 틀림없이 페로몬도 끝내줄 텐데. 섹스할 때 서로가 내뿜는 체향이 온 방 안을 가득 채우고, 한데 엉켜 짐승처럼 몸을 섞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미칠 만큼 좋았다.

하지만 뒤늦게 알게 된 사실 덕분에 그 생각은 곧바로 사라졌다. 결혼을 앞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을 때, 서규하는 ‘너무 일찍 페로몬 억제술을 받아서 부작용 같은 게 생겼고, 그래서 아이를 지울 수 없었다’는 말을 스치듯 한 적이 있었다. 바꿔 말하면, 만일 서규하의 몸에 문제가 없어서 중절 수술을 하기라도 했으면 자신은 제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넘어갈 뻔했다. 또한 일찌감치 녀석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서 이런 사이가 되는 일 자체가 없었을 터였다.

한마디로 이차영이 지금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전부 서규하 덕분이었다. 수많은 우연에 우연을 거쳐서 여기까지 이른 것 자체가 다시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포궁으로 이어지는 길목 아래, 작은 돌기처럼 도드라진 곳을 귀두로 문지르면서 이차영은 느긋한 섹스를 이어 갔다. 신중하고도 느린 움직임이지만 열기만큼은 여느 때 못지않았다. 어느 순간 느껴지는 묘한 감각에 서규하는 움찔했다. 피부가 선득해지는 느낌이 밀려드는 걸 보니 이차영이 페로몬을 방출하는 모양이었다.

깨달은 순간 안에서 또 한 번 왈칵하며 애액이 터져 나왔다.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어 대는 놈을 밀어내면서 서규하는 문득 생각난 바를 입에 담았다.

“……너 말이야.”

“응.”

“아씨, 그만 좀 깨물어. 암튼 너, 러트 안 온 지 꽤 되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궁금했다. 우성일수록 주기가 짧고 규칙적이라는 것쯤은 서규하도 일반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이차영도 우성이니 모르긴 몰라도 벌써 몇 번은 지나갔을 텐데 그동안 낌새조차 느낀 적이 없었다.

더불어 떠오른 생각에 서규하는 바득 이를 갈았다. 설마 이 자식…….

말을 잇기 전에 이차영이 먼저 픽 웃으며 서규하의 미간으로 손을 뻗었다.

“인상 펴.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다.”

그러든 말든 서규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밖에서 좆 놀리고 다니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있어?”

“그럼 러트 때는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하긴. 약으로 넘겼지.”

“……아.”

언제 눈을 부라렸냐는 듯 서규하는 합죽이가 되었다.

맞다. 억제제가 있는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원래는 서규하도 30일마다 약을 챙겨 먹었지만, 배 속에 애가 생긴 이후로는 증상이 전혀 나타나질 않아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할 말이 없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으니 또 한 번 자세가 바뀌며 시트에 등이 닿았다. 거리가 좁혀지더니, 이어서 들으란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러트 때 억제제 안 먹고 섹스한 거, 그때 너랑 했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그 뒤로 다른 사람이랑은 손조차 잡아 본 적이 없고. 하물며 지금 나는 애까지 딸린 유부남인데……. 이 정도로 신뢰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좀 슬프네. 그것도 배우자한테.”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콕콕 찔렀다. 서규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소심하게 항변했다.

“……러트 때 미친놈처럼 날뛰었잖아. 그래서 당연히 딴 데서 푸는 줄 알았지.”

“서운해.”

“……!”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몹시도 뜨거웠다. 덕분에 거의 처음으로 ‘이번엔 내가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차영은 저 못지않게 섹스를 좋아하는 놈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 하는 말들이 거짓일 수도 있지만, 모양 빠지게 정말이냐고 되묻는 대신 그대로 믿어 주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진짜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자신이 최 비서와 휴양을 즐기던 동안, 이차영은 입덧이 심해서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있을 만큼 힘들었다고 하니까.

“미안하지?”

마침 깔아 주는 멍석 위에 서규하는 냉큼 올라탔다.

“……쪼끔.”

달아오른 서규하의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이차영은 지금도 녀석에게 제대로 먹히는 얼굴로 산뜻하게 웃으며 진심을 흘려보냈다.

“이제는 알 거 같은데, 앞으로도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너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 말에 서규하는 멈칫하며 그제야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왜 걸고넘어져?”

“너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안 돼.”

웃는 얼굴에 홀려서 바라보고 있다가 서규하는 한발 늦게 말뜻을 이해하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왜 네 멋대로 정해?”

“그렇게 말하면 완전 섭섭하지. 아니면……. 설마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뒹구는 거 생각해 본 적이라도 있는 거야? 배 속에 내 애가 있는데?”

정지 상태로 있던 것이 안쪽을 넓히며 깊숙이 들어오는 느낌에 서규하는 화들짝 놀랐다. 더불어 또 한 번 오싹 소름이 돋았다.

“너무 깊이 넣지 말라니까…!”

“대답해. 그런 생각 한 적 있어?”

“없어. 없어, 새꺄.”

즉각 흘러나오는 대답에 이차영은 그제야 페로몬을 살짝 거두며 서규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언제 싸늘한 눈빛을 했냐는 듯 온순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농담을 빙자한 진심을 흘려보냈다.

“깜짝이 낳고 나면 100가지 체위 정복, 그런 거에 도전해 볼까? 매너리즘에 빠지면 안 되니까.”

“무슨 뜻이야?”

단어를 몰라서 물어본 건데 이차영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고 대답했다.

“다양하고 색다르게 즐겨 보자고. 우리 아직 못 해 본 거 많잖아.”

솔깃한 유혹이었다. 쪽, 한 번 더 입을 맞춘 뒤에 이차영은 “우선은 하던 대로.” 라고 말하고는 다시금 느긋하고도 집요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이제는 앞을 쓰든 뒤를 쓰든 서규하가 저 아닌 다른 사람과 몸을 섞는 일은 절대로 없을 터였다. 그럴 틈이 없을 테니까. 설령, 정말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걸 기회로 삼으면 됐다. 상대방이야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버리면 그만이고, 서규하는 백치로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곁에만 둘 생각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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