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한 달 뒤-
식당 문을 열자 후끈한 히터 바람이 느껴졌다. 굳이 주변을 둘러볼 필요도 없이, 우중충한 남자 셋이서 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빈자리에 앉기도 전에 윤병철이 시비를 걸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차 엄청 막히더라. 걍 가까운 데서 보면 되지 왜 여기까지 나오라고 해?”
“밥 사 준다고 해도 지랄이네.”
서규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빈 컵에 물을 부어서 시원하게 들이켰다.
오늘 모임을 주도한 사람은 윤병철이었다. 사정상 늦은 신혼여행을 다녀와서는 굳이 선물을 주겠다면서 약속을 잡았다. 눈치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윤병철이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할 리가 없으니 녀석의 짝이 언질을 준 게 분명했다.
“받아.”
이윽고 제법 큰 쇼핑백이 하나씩 건네졌다. 박찬웅은 희희낙락하며 재빨리 스캔을 끝낸 다음, 뒤쪽에 세워진 채로 들어 있는 상자를 꺼냈다.
“오오.”
표정만큼이나 고조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상자 가운데 커다랗게 박힌 금색 로고가 기대감을 절로 자아냈다. 어느새 모두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박찬웅이 밀봉된 테이프를 떼고 상자 뚜껑을 열자, 뱀처럼 돌돌 말린 검은색 벨트가 나타났다.
“이야, 윤병철이 돈 좀 썼네.”
“짭은 아니지?”
시시한 장난을 윤병철은 웬일로 너그럽게 받아 주었다.
“네 거만 동대문에서 샀어.”
“정색하면서 말하지 마, 새꺄. 진짜 같으니까.”
“자세히 보면 G가 아니라 C야.”
“정색 빨지 말라고.”
주문한 중화요리들이 하나둘 테이블을 채웠다. 제 앞에 놓인 고량주 병을 딴 김강산이 다른 사람들 잔부터 차례로 채워 주었다. 자신의 잔에도 따라 주려는 것을 본 서규하는 가볍게 거절한 뒤에, 병을 가져와서 반대로 녀석의 잔에 대고 기울였다.
“난 안 마셔.”
“웬일로 네가 술을 다 마다해?”
의외라는 듯한 김강산의 물음에 박찬웅이 냉큼 대답을 가로채 갔다.
“저 새끼, 요즘에 몸 엄청 사리잖아. 위에 구멍 났다면서 요새는 내 전화도 안 받아.”
“맨날 나오라고 귀찮게 구니까 그렇지.”
“와, 내가 귀찮아?”
“존나 귀찮아.”
한때는 하루라도 술을 안 마시면 입에 가시가 돋는 줄 알았던 날도 있었는데 지금은 눈앞에 술병이 있어도 무덤덤했다. 여우의 신포도인가 뭔가 하는 것처럼 어차피 안 될 일을 자기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그와 달리 번번이 퇴짜를 맞은 박찬웅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괜한 트집으로 번지기 전에 서규하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결혼하니까 좋아?”
“말이라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듣자마자 팔푼이처럼 헤실헤실 웃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었다. 마침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깊게 물어보기로 했다. 이제 곧 자신에게도 닥칠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점이 제일 좋은데.”
“다 좋지.”
“그건 네 얼굴만 봐도 알겠고.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이러이러한 점이 좋다, 이렇게.”
“염장질한다고 돌 날아올 거 같은데.”
“다 듣고 나서 던질 테니까 일단 해 봐.”
윤병철은 답지 않게 쑥스러워하면서도 주어진 기회를 거절하지 않았다.
“음……. 일단은 아침에 눈뜰 때마다 내 옆에서 잠든 얼굴을 보는데, 진짜 천사처럼 예뻐.”
“지랄, 고추에 털 난 천사도 있, 아악!”
응징은 빨랐다. 짧고도 정확하게 허벅지 안쪽 살을 꼬집힌 박찬웅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자업자득인지라 다들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서규하가 “계속해 봐.” 하고 다시 자리를 마련해 주니 윤병철은 금세 온순한 얼굴로 돌아와서 말을 이었다.
“진짜 그냥 다 좋아. 같이 잠들고, 같이 눈 뜨고, ‘내 사람’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날아갈 것처럼 좋고. 말로 설명하려니까 어려운데, 같은 걸 해도 연애할 때랑은 느낌이 달라. 니들도 해 보면 알걸.”
서규하는 머릿속으로 자신과 이차영을 대입해 보았다. 이내 진중한 시선이 윤병철을 향했다.
“부딪치거나 그런 일은 없어? 아무리 좋아도 백 프로 다 맞을 순 없잖아.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을 거고.”
“아직은 없어. 언젠가는 올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미리 걱정하고 싶진 않아.”
“……그만큼 좋다는 거지? 결혼한 거.”
“당연하지. 다음에 한번 집으로 초대할게.”
오늘의 물주라는 이유로, 윤병철의 자랑 아닌 자랑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한 번씩 박찬웅의 발작 버튼이 눌리긴 했지만, 늘 그렇듯 선을 넘는 법은 없이 왁자지껄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식당에서 나오니 사방에 완연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김강산이 서규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넌 2차 안 갈 거지?”
“어. 약속 있어.”
“이 시간에?”
“잠깐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서규하의 두 손도 패딩 점퍼 주머니에 들어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주머니 안에 든 무언가를 아까부터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거였다.
오늘 모임은 윤병철이 선물을 주겠답시고 불러내서 마련된 자리였지만, 어쨌든 다들 모일 것을 감안하고 서규하 또한 챙겨 온 것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팽팽한 고민이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 윤병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마음속 저울이 천천히 한쪽으로 기울었다.
다른 놈들은 그새 2차 장소를 두고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더 망설이면 기회를 놓칠 것 같아서, 서규하는 주머니 안에 든 것을 단숨에 꺼내서 친구 놈들의 손에 하나씩 차례로 쥐여 주었다. 이번에도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인 사람은 박찬웅이었다.
“뭐야 이건?”
“보면 알아. 그럼 먼저 간다.”
“야, 서규하!”
당황한 듯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서규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하아….”
운전석에 앉아서 차 문을 닫자마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작 1, 2분 남짓 빠르게 걸었을 뿐인데도 심장이 쿵쿵대며 아우성을 쳤다.
사실은 그 이유 때문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창틀에 올린 팔로 머리를 지탱한 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으니 정적을 깨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곰새끼-
액정을 보고 잠깐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고, 지금 피한다 해도 언젠가는 마주치게 될 상황이었다.
“왜.”
- 야, 너 이거 뭐야? 신종 장난이야?
받자마자 터져 나오는 큰 소리에 서규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멀찍이 뗐다가 다시 귓가로 가져갔다.
“돌았어? 그딴 걸 장난으로 만들게.”
- 헐, 그럼 이게 진짜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이놈 이거 진짜라는데?’ 하는 말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이어서 다시금 가까워진 목소리가 크게 흘러나왔다.
- 야, 씨, 결혼이 어쩌다 보니 하는 짓이야? 너 아직 이 근처지? 다시 와서 이야기해. 다른 새끼들도 지금 난리야.
그럴 만도 했다. 자신만 해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을 때가 가끔 있는데, 결혼은커녕 지난 몇 년간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하지 않던 놈이 뜬금없이 던지듯 청첩장을 주고 갔으니 난리가 날 법했다.
결혼 사실까지 비밀로 했다간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난리 발광을 할 게 뻔해서 고민 끝에 청첩장까지는 줬지만……. 이면의 사실들을, 자신이 사실은 오메가이고, 남자 알파와 살림을 차리게 됐고, 애까지 생겼다는 것들을 말하기에는 아주 약간의 용기가 더 필요했다.
“약속 있어서 가 봐야 돼. 다음에 자리 마련할게.”
- 야, 서규하! 야! 서규,
뚝.
애타는 부름을 뒤로한 채 서규하는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자칫하면 되돌아와서 여기까지 잡으러 오고도 남을 녀석들이었기에, 서둘러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차는 빨간색 신호에 걸렸다. 라디오도 음악도 틀지 않은 탓에 차 안은 무척 조용했다. 기어에서 떨어진 서규하의 오른손이 무의식중에 자신의 복부로 향했다.
솔직히 말하면 서규하는 정말로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결혼’이라는 단어조차 한 번도 떠올려 보지 않았다. 말로는 엄마 찬스니 베이비 시터니 하는 말을 운운했어도 혼자서 아기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이차영과 함께 사는 것만 염두에 뒀던 참이었다.
동거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자신이 남자 오메가이기 때문이었다. 알파와 오메가이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동성 커플이 혼인신고까지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여성체 알파 또는 남성체 오메가 자체가 거의 없는 데다가, 그마저도 남녀끼리 부부의 연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차영과 성급하게 혼인신고를 해 버리면 나중에 배 속의 녀석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를 일이었다. 이유는 또 있었다. 서규하는 아직은 법적인 배우자를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막말로 단순히 동거만 하는 사이라면 살다가 수틀리는 일이 생겼을 때 헤어져 버리면 그만이지만, 혼인 관계를 깰 때는 그야말로 개싸움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서, ‘태어나서 이렇게 머리를 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심사숙고한 끝에, 서규하는 끝까지 한 번 가 보기로 어렵게 결심했다. 이유는 윤병철과 똑같았다.
‘그냥 다 좋아. 같이 잠들고, 같이 눈 뜨고, ‘내 사람’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날아갈 것처럼 좋고.’
‘말로 설명하려니까 어려운데, 같은 걸 해도 연애할 때랑은 느낌이 달라.’
서규하도 마찬가지였다. 퇴근 후에 귀가한 이차영을 반겨 주고,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같이 잠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한집에서 함께 사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설레는 일이었다. 딱히 대단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친구나 섹파였을 때처럼 시시덕거리는 말장난을 주고받아도, 그때와는 전혀 다른 관계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충족감이 상당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제 제 옆에 이차영이 없는 것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코가 꿰일 대로 꿰여 버렸으니, 개싸움이 날 때 나더라도 지금은 지금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생각이었다.
내일 일은 내일모레 걱정하면 된다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
문을 열자 고요한 정적이 밀려왔다. 현관에 구두가 없는 걸 보니 이차영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실로 들어선 서규하는 둘둘 말고 있던 머플러를 풀면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투덜거림이 절로 나왔다. 거실에서 축구라도 하고 싶은지 아니면 돈 지랄을 하는 게 취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신혼집이랍시고 새로 매입한 주택도 지나치다 못해 쓸데없을 정도로 넓은 탓에 걸음 낭비가 상당했다.
서규하가 거처를 옮긴 것은 대략 이주 전의 일이었다. 부모님들끼리 만났던 그날 이후로, 예식 준비는 물론이고 그 외 자질구레한 일들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집도 그중 하나였다.
언젠가 ‘몸만 오면 된다’고 이차영이 꼬드겼던 것처럼, 서규하는 정말로 캐리어 하나만 달랑 든 채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새집은 이차영의 할머니가 해 주셨다는데, 듣자 하니 그 외에도 결혼 축하 명목으로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신 모양이었다.
씻고 나온 서규하는 침대로 직행했다. 두 팔을 활짝 벌려 쓰러지듯 엎드리자 호텔 침구류처럼 푹신하고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잠깐 그렇게 누워 있다가, 곧바로 자세를 바로 하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켰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 놈들로부터 문자 폭탄이 들어와 있었다.
[진짜야? 진짜니가결혼을한다고? 그래서아까결혼생활어떠냐고겨ㅗ속물어본거야?]
[귓구멍존나가렵지? 제발다시와서 썰좀풀어봐 샤ㅐㅏ발]
[제발!!!!]
괜히 청첩장을 줬나 싶은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물론 진심으로 하는 후회는 아니었다.
윤병철이 자신과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배우자가 남자 오메가인 것을 다른 녀석들에게도 밝혔을 때 다들 반응은 같았다고 했다. 아니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윤병철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지금까지도 모임이 이어지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렇기에 서규하도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형질을 밝히게 됐고, 결혼 상대가 남자 알파여도, 이 녀석들이라면 아마 이해해 줄 거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거라고.
‘……그래도 존나게 놀리긴 하겠지.’
특히나 박찬웅은 요주의 인물 1순위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9시가 넘어가는데도 이차영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아직까지 오지 않는 걸 보니 오늘은 본가에서 자고 올 모양이었다.
오늘 이차영은 가족 모임이 있어서 본가에 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외국에 있다는 녀석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일찌감치 입국하셨고, 오랜만에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고 들었다.
같이 가지 않겠냐는 말에 서규하는 기겁하며 거절했다. 피로 이어진 사이라 해도 다들 서로에게 우호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남의 집안 사정을 자세히 알 길은 없지만, 막대한 재산이나 사업 등을 두고 벌이는 알력 다툼이 분명히 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스트레스가 폭발하는 일이었다.
꼬르륵-
배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서규하는 멈칫하며 아랫배를 내려다봤다가 이내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진짜 한결같네.”
먹덧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다. 돌아서면 배가 고프던 임신 초기에 비하면 점점 좋아지고 있긴 하지만, 식감이 자극적인 음식이 부쩍 당겼다.
‘먹을까 말까 고민할 시간에 주문하라’는 명언에 따라 서규하는 곧장 배달 앱을 켰다. 야식 카테고리에 속한 식당들을 쭉 살펴보다가 한 곳을 선택해서 주저 없이 음식을 시켰다.
배달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옆으로 팔을 괴고 누워서 TV를 시청했다. 늘 그렇듯 채널은 넘쳐나지만 볼만한 프로그램은 없었다. 먹방이나 볼까. 차라리 그게 나을 듯해서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드는데, 기척도 없이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깜짝이야.”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이차영이었다. 다녀왔어, 하며 성큼성큼 다가온 이차영이 곧장 서규하의 고개를 살짝 들고 입을 맞췄다. 체취가 섞인 시원한 향수 냄새가 훅 풍겼다.
“자고 오는 거 아니었어?”
“잠은 집에 와서 자야지. 너 혼자…, 아니, 둘만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이윽고 이차영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서규하와 시선을 마주했다.
“친구들은 잘 만났어?”
“어. 너는.”
“나도 잘 만나고 왔지.”
“그거 말고.”
둘이 같이 살게 되면서 서규하는 이차영이 입덧을 한다는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됐다. 처음부터 알아챈 것은 아니었다. 간혹 입맛이 별로 없다면서 남이 먹는 거만 구경하길래 진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날 새벽에 서규하는 그만 목격하고야 말았다. 자다 깼는데 옆자리가 텅 빈 것을 보고 녀석을 찾다가, 도둑놈처럼 주방 구석에 딱 붙어 서서 바나나를 까먹던 모습을.
눈이 마주친 순간에 이차영이 지었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온몸으로 당황함을 표출하며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더니, 어렵사리 꺼내는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입덧을 하는 것 같다고.
네가 그걸 왜 하냐고 물어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먹는 입덧 증상을 설명해 주던 부인과 의사가 ‘이런 경우 배우자분이 대리 입덧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도 해 줬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차영이 그 케이스에 해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한창 심했던 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는데, 사실이 어떤지는 알 재간이 없었다. 같이 식탁 앞에 앉으면 지금도 가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릴 때가 있었다.
“저녁은 좀 먹었냐고.”
“아니. 딱히 끌리는 게 없어서 차만 마시고 왔어.”
듣자마자 그 모습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흔하디흔한 동네 식당에 간 것도 아니고, 돈이 넘쳐나도 아무나 문턱을 못 넘는다는 최고급 요정에서 혼자 청승맞게 물이나 홀짝이고 앉아 있었을 모습을 생각하니 조금 짠하기는 했다.
“그냥 잘 거야?”
“글쎄. 그냥 자면 좀 허전할 것 같긴 한데……. 너는 배 안 고파?”
“배달 음식 시켜 놓은 거 있어.”
“잘됐네. 같이 먹어도 되지?”
“그러든가.”
매콤한 게 당기긴 해도 배가 많이 고프다는 느낌은 아니었기에 서규하는 순순히 대답했다. 초인종이 울린 것은 그로부터 3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시키지 않아도 이차영이 알아서 받으러 나갔고, 그사이 서규하는 먼저 식탁 앞에 앉았다. 잠시 후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나타난 이차영이 맞은편에 앉으면서 물었다.
“뭐 시켰어?”
“닭발 세트.”
안에 든 것을 차례로 꺼낸 서규하는 자그마한 비닐 커터를 찾아서 능숙하게 손을 움직였다. 김이 서린 비닐이 완전히 제거되며 플라스틱 용기 안에 든 내용물이 드러났고, 그 순간 이차영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웬만해선 흔들림이 없는 얼굴에 격렬한 동요가 일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서규하를 향했다.
“닭발이라는 게……. 진짜 닭 발이었어?”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 비주얼이었다. 동봉된 나무젓가락을 떼면서 서규하는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 가짜 닭발도 있어? 먹어 봐.”
선심 쓰듯 이쪽으로 먼저 내미는 젓가락에 이차영은 펄쩍 뛰어올랐다.
“나무젓가락 쓰지 마. 집에서 쓰는 거 갖다 줄게.”
임기응변으로 자리를 피한 이차영은 두 손으로 싱크대를 잡은 채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방금 본 닭발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날개나 다리도 아니고 닭 발로 만드는 요리가 있다는 점도 놀랍고, 무엇보다 비주얼이 자아내는 충격이 상당했다.
“뭐 해. 안 와?”
“어? 가야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재촉에 이차영은 뒤늦게 식기건조기 문을 열었다. 자리로 돌아가서 젓가락을 건네자 서규하는 “땡큐.” 하며 받고는 곧장 큼직한 닭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발가락을 본 순간 이차영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아차 싶어서 얼른 표정을 풀었지만, 그 전에 서규하의 시선이 먼저 이쪽을 향했다.
“먹어 본 적 없어?”
이차영은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이실직고했다.
“……어. 보는 것도 처음이야. 이렇게 발만 모여 있는 거.”
서규하의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렸다. 이차영의 표정도 그렇고, 발만 모여 있다고 말하는 것도 웃겼다.
“야.”
“응?”
“자세히 보면 발톱도 보일걸?”
이번에야말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면서 결국 서규하는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표정만 그러할까. 흠칫하며 의자까지 뒤로 밀린 걸 보니 정말로 놀란 모양인데, 그야말로 혼자 보기 아까운 명장면이었다.
“못 먹을 거 같으면 계란찜이나 샐러드라도 먹어. 보기 영 그러면 자리 비켜 줘?”
“괜찮아. 편하게 먹어.”
“존나 놀랐으면서 센 척하기는.”
이윽고 서규하는 신나게 닭발을 뜯기 시작했다. 쫍쫍 소리를 내며 야무지게 빨아 먹는 동안 정작 저녁도 제대로 못 먹은 이차영은 젓가락도 들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인에게 생소한 음식이라 그렇지, 날개나 다리 등 닭의 일부라고 생각하니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새 닭발을 집어 들던 서규하는 그제야 이차영이 꿈쩍도 않고 이쪽만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그냥. 잘 먹는 거 보기 좋아서.”
“……너도 먹기나 해. 남 먹는 거 그만 쳐다보고.”
“먹어도 돼?”
“된다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차영이 몸을 일으켰다. 한 팔로 식탁을 짚으며 상체를 숙여서는 다른 손으로 서규하의 턱을 붙잡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
할짝, 입 안을 가볍게 맛보듯 훑은 뒤에 입술을 뗐다. 이어서 서규하의 입가에 묻어 있는 양념도 혀끝으로 훔쳐 간 뒤에 다시 앉았다.
“양념 맛은 괜찮네.”
서규하는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버럭 성질을 냈다.
“먹는 중에 더럽게 뭐 하는 짓이야.”
“네가 먹어도 된다고 했잖아.”
“닭발 처먹으랬지 주둥이 들이대랬어?”
간질거리는 감촉이 남은 듯한 입술을 왼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존나 비위도 좋은 새끼.
“입술 더 빨개졌어.”
“닥쳐.”
이후로도 이차영의 시선은 계속해서 서규하를 향했다. 부푼 볼과 쉼 없이 오물거리는 입술을 보니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먹는 걸 방해할 정도로 간이 크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이번에야말로 닭발이 얼굴로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름대로 오붓한 분위기에서 야식 타임이 끝나고, 서규하는 양치질만 간단하게 한 뒤에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기엔 아직 일러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잠시 후에 이차영도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워 봐. 마사지해 줄게.”
“배불러서 안 될 거 같은데.”
“살살 할게.”
손에 든 오일 병을 본 서규하는 옅은 한숨을 흘리며 침대에 똑바로 누웠다.
이사 온 첫날, 이차영은 ‘너랑 아기한테 좋은 건 다 해 주고 싶고, 남들이 하는 것도 빠짐없이 다 하고 싶다’면서 정중하게 부탁했었다.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 서규하는 못 이기는 척 그러라고 대답했고, 그날 밤부터 이차영은 바로 행동에 돌입했다. 태아와 교감하면 발달에 도움이 된다면서 남의 배꼽에 대고 말을 거는가 하면, 시간이 날 때마다 산부에게 도움이 된다는 마사지까지 해 줬다.
그사이 이차영은 손바닥에 마사지 오일을 듬뿍 짜서 체온으로 녹인 다음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다리부터 주무르기 시작했다. 눈으로는 서규하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어.”
떨떠름하게 누운 것이 무색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딱 좋은 강도로 종아리를 주무르고, 체온이 높은 손바닥으로 힘주어 훑을 때마다 만족스러운 신음이 절로 나왔다.
배도 부르겠다, 정성이 가득한 맞춤형 마사지까지 받고 있으니 눈꺼풀이 절로 무거워졌다. 깜빡, 깜빡,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눈이 감겼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은데, 언제 위로 올라왔는지 가까이에서 나직하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
“……어.”
“할 말 있는데.”
“빨리해.”
“결혼식 하기 전에 할머니가 너랑 깜짝이 만나 보고 싶으시대.”
잠결에도 인상을 구기는 걸 보면서 이차영은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찌푸린 미간을 손끝으로 살살 펴 주면서 다시 물었다.
“약속 잡아도 돼?”
“……싫다고 하면, 안 잡게?”
“당연하지. 항상 네가 최우선인 거 알잖아.”
이차영은 행동만 스윗해진 게 아니었다. 어디서 강습이라도 받고 왔는지 말발도 한층 더 업그레이드됐다.
잠시 후에 서규하는 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중간에서 실드 못 치기만 해 봐.”
이차영의 할머니라니 부담스럽긴 하지만, 선뜻 집을 사 주시고 결혼 준비금까지 쾌척해 주신 걸 생각하면 모진 말씀을 하실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이제는 이차영이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 할머니 좋은 분이시거든. 그리고 아마 너도 보면 좋아할걸?”
“내가?”
“응. 나, 할머니 많이 닮았거든.”
새삼 서규하가 얼빠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향이 변하지 않고 한결같은 점도.
“우리 집안이 유전자가 좀 강한 편이야. 아기 태어나면 나 많이 닮아서 예쁠걸.”
잠결에도 귀가 솔깃한 말이었다. 촉,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뒤에 이차영은 자장가를 부르는 것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셋이서 행복하게 살자.”
“…….”
“응?”
“……앞으로 너 하는 거 봐서.”
단정한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솔직하지 못한 서규하의 화법을 생각하면 단연코 예스나 다름없는 대답이었다.
“규하야.”
“왜.”
“규하야.”
“왜.”
“규하야.”
“아씨, 왜.”
“사랑해.”
“……!”
“너는?”
곧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장난스레 “응?” 하고 재촉하는데, 불현듯 목을 끌어안는 느낌과 함께 따뜻한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뜬 것도 잠시, 이내 이차영은 기분 좋게 웃으며 기꺼이 입맞춤에 응했다.
뜨겁고 뭉클한 무언가가 가슴 가득 번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이 차올랐다. 둘이라서 누릴 수 있는, 서로가 서로이기에 느낄 수 있는 기쁨이자 행복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