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4.(3권) (14/28)

Chapter 14.

조용한 침실에는 째깍거리며 움직이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울렸다.

침대에는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나라 잃은 표정으로 몸져누운 남자는 바로 서창식이었다. 전 직원 필참 등산 대회만 열렸다 하면 매번 1등을 거머쥘 정도로 건강체 그 자체인 사람이, 십수 년 만에 머리를 싸매고 앓아누웠다.

막내아들이 임신했다는 말에 뒷목을 붙잡은 것은 맞지만,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녀석이 그간 연애 대상으로 남자들만 만나 왔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아내는 임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두 번 충격을 받았다.

아침저녁으로 아들과 마주칠 때마다 티격태격하는 말이 오갔지만, 내심으로는 적적한 집안에 활력이 도는 느낌이 무척 좋았다. 오죽하면 어느 순간부터는 퇴근 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질 정도였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아들놈이 사고를 쳐서 집에 붙어 있던 거였고, 아내하고만 비밀을 공유했다는 사실에 배신감 아닌 배신감이 들었다.

자식 키워 봤자 소용없다는 말이 지금처럼 가슴에 사무칠 수가 없었다. 망할 놈의 자식. 내가 어릴 때 지를 얼마나 예뻐하고 업어 키웠는데.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서창식은 서둘러 눈을 감았다. 이내 침대 한쪽이 살짝 내려앉는 기척이 났다.

“여보, 괜찮아요?”

“안 괜찮아.”

와중에도 아내의 말을 무시할 용기는 없었기에 마지못해 입술을 달싹였다. 등을 돌린 채 가만히 숨만 내쉬고 있으니, 달래는 듯한 아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까도 말했는데 규하가 임신한 건 정말 우연히 알게 됐고, 차영이 애라는 사실은 나도 좀 전에 알았어요.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정은희의 표정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규하가 오메가로 태어나긴 했지만, 고추 달린 사내자식이니 당연히 여자를 만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성체 알파의 아이를 가졌고, 하물며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이차영이 아이 아빠라고 하니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일전에 집까지 찾아와서 규하의 행방을 물었던 일이 절로 생각났다. 그동안 아들 녀석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며 길길이 날뛰지 않고 얌전한 걸 보니 아무래도 이차영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남편을 침실에 밀어 넣고, 서재로 직행한 정은희는 무너지듯 의자에 앉아서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충격은 생각만큼 오래가지 않았다. 쿨한 성격은 이럴 때도 드러났다.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고 기가 막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윽고 저보다는 남편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생긴 건 세상 호탕하고 대범하게 생겼으면서, 좋게 말하면 섬세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쫌생이 같은 기질이 있었다. 어쩌고 있나 싶어서 방으로 들어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자리보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럴 때 내버려 두면 좋을 게 하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정은희는 이불 밖으로 드러난 남편의 팔을 살며시 붙잡으며 달래듯 말을 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인 걸 어떡해요. 다 큰 자식 크게 뭐라 할 수도 없고, 안 보고 살 수도 없고.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서 책임지겠다고 하니까, 속상해도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 나 못지않게 차영이 좋아하잖아요.”

그 말에 서창식은 이불을 휙 걷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런 자식인 줄 알았으면 쳐다도 안 봤지! 규하가 나한테 어떤 아들인데…….”

“그런 아들한테 틈만 나면 그렇게 뭐라 해요?”

“……다 잘되라고 그런 거였지. 잘되라고.”

막내아들이 오메가로 태어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서창식은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속으로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가친척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지인들 중에도 남성체 오메가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또 하필 그 무렵에 오메가 남학생의 자살 소식이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기까지 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낙심이 밀려왔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자연히 다른 아들 녀석들보다 유하게 키우기도 했고, 타고난 성격이 만만치 않아서 어릴 때부터 사고뭉치로 급부상했지만, 어쨌거나 규하가 하나뿐인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아직도 아픈 손가락 같은 녀석인데……. 여성체 알파도 아니고 같은 거 달린 놈이랑 눈이 맞아서 애까지 생겼다고 하니 그저 탄식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알죠. 당신 마음이 내 마음인데.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깔끔하게 인정하고 허락해 줘요. 당신, 규하 성격 잘 알잖아. 진짜 원치 않는 사고였으면 진작 수습했지, 그렇게 둘이 손잡고 우리 보러 왔겠어요?”

“…….”

“어차피 허락해 줘야 되는 거, 괜히 시간 끌어서 서로 맘고생하지 말고 당신이 한 발 물러서 줘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차영이 같은 애가 또 어디 있겠어요?”

“…….”

“일어나요. 당신 좋아하는 반찬들로 저녁 준비하라고 했으니까, 맛있게 먹고 오랜만에 와인도 한 잔씩 해요. 얼른.”

살짝 손을 잡아끌며 하는 아내의 말에 서창식은 못 이기는 척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아내의 말마따나 결국은 허락해 줄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

“와 씨, 겁나 춥네.”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자마자 춥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히터가 빵빵하게 돌아가는 실내에 계속 있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더 춥게 느껴졌다.

목요일인 오늘, 롱 패딩과 머플러로 중무장한 서규하는 모처럼 영화관을 찾았다. 이차영이 폭탄을 떨구고 간 이후로 집안 분위기는 그야말로 좆망진창이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답답하지만, 친구 놈들을 만나면 필시 음주 가무가 뒤따를 것이 뻔해서 선뜻 연락할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서규하는 모처럼 바깥바람도 쐴 겸 영화관으로 차를 몰았다.

빙글빙글 올라가는 경사로를 빠져나오자마자 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언뜻 봐도 교통 체증이 상당했다. 프리하게 살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는데, 하필 딱 직장인들이 퇴근할 시간대라서 차가 제대로 막혔다.

어찌어찌 도로로 끼어들긴 했지만 앞뒤로 누가 막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좀 더 일찍 나올걸. 뒤늦게 후회하며 언짢은 표정으로 신호를 기다리는데 엄마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

- 어디야 아들?

“영화 보고 집에 가는 중이야.”

- 저녁은.

“집에서 먹으려고.”

- 엄마랑 아빠 약속 있어서 나가니까 아줌마한테 저녁 차려 달라고 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집밥이 물론 맛있긴 해도, 슬슬 패스트푸드가 당기던 참이었다.

전화를 끊은 서규하는 햄버거 가게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맛있게 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전화가 걸려 왔다. 내비게이션 상단에 뜬 이름은 이차개였다.

“왜.”

- 뭐 하고 있어?

“밥 먹으러 가는 중.”

대번에 상황을 파악한 듯 다시 묻는 말이 이어졌다.

- 저녁 약속 있어?

“아니. 나온 김에 먹고 가려고.”

- 혼자서?

“어.”

- 그럼 나랑 같이 먹자. 방금 일 끝났거든.

아직 회사에 있는지 뒤쪽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서규하는 고민하지 않고 오케이했다. 혼밥도 곧잘 하긴 하지만 이왕이면 일행이 있는 편이 더 낫긴 했다.

햄버거 가게에 먼저 도착한 사람은 서규하였다. 대학로 근처에 있는 곳이라 그런지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안쪽 테이블에 앉아서 폰 게임을 하고 있으니 잠시 후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오래 기다렸어?”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차영의 행색을 확인하고는 금세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핏이 두드러지는 클래식 코트에 심플하게 두른 검은색 머플러가 기깔 나게 잘 어울렸다. 나도 좀 신경 써서 입고 올걸.

이내 맞은편에 앉은 이차영이 실내를 가볍게 둘러본 다음 말했다.

“이런 데서 편하게 먹을 수 있겠어?”

서규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클럽이든 식당이든 돈을 처발라야 하는 곳에서는 제집 안방처럼 자연스럽게 구는 주제에, 일반 식당에서는 어리숙한 티가 팍팍 났다. 하긴. 살면서 패스트푸드 햄버거 가게에 가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오늘이 처음일 거라는 데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돌 맞아. 뭐 먹을래?”

티슈 통 뒤에 꽂혀 있던, 앞뒤 양면으로 인쇄된 메뉴판을 선심 쓰듯 내밀어 주자 이차영은 심사숙고하는 얼굴로 메뉴를 살피기 시작했다.

“넌 뭐 먹을 건데?”

“마라 버거 빅 사이즈 세트랑 베이컨 치즈 버거.”

“나도 같은 걸로 하지 뭐.”

기다린 것처럼 대답한 뒤에 이차영은 테이블 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뭐 해?”

“주문 벨이 안 보여서.”

그 말에 서규하는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여긴 그런 거 없어. 저쪽에 있는 기계로 주문하거나 카운터에 직접 가서 말해야 돼.”

“……그래?”

확실히 손모가지를 걸 만하다고 생각하며 서규하는 지갑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이차영이 자기가 다녀오겠다고 했지만, 혼자서는 평생 와 볼 일이 없을 법한 곳으로 순순히 찾아온 게 기특해서 특별 서비스를 해 주기로 했다.

자리로 돌아온 서규하는 또다시 핸드폰을 켜고 게임을 시작했다. 시선을 내리깐 채 화려한 컨트롤을 선보이고 있는데, 앞에서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고 있어?”

“게임.”

“사람 앞에 두고 게임을 한다고?”

“억울하면 너도 하든가.”

서규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간 이차영이 저녁마다 집 앞으로 찾아와서 잠깐씩 만나긴 했어도, 주로 차 안에 있다 보니 키스할 때를 빼면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일은 없었다. 사람 앞에 두고 매너 없는 짓이라는 걸 알지만, 서로 눈을 보면서 대화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딩동-

알림음에 고개를 돌리니 천장에 달린 모니터에 익숙한 주문 번호가 떠 있었다. 갔다 와. 턱짓하며 말하자 이차영은 군말 없이 몸을 일으켰고, 잠시 후 푸짐한 음식이 담긴 접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먹자.”

주스로 입가심부터 한 뒤에 서규하는 햄버거 포장을 벗기고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입가에 묻은 소스를 쪽 빨아먹는데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황홀했다. 서규하가 무서운 속도로 버거를 흡입하는 동안, 이차영은 제 몫으로 주문한 버거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큰맘 먹고 손을 뻗었다.

입으로 가져가는 데는 약간의 용기가 더 필요했다.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는 처음이기도 하고,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지긴 했어도 한 번씩 속이 심하게 메슥거릴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오래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태클 아닌 태클이 날아올 것이 분명했기에, 이차영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부분만 살짝 베어 물었다. 매콤한 소스 냄새가 훅 올라오긴 해도 다행히 헛구역질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누가 보면 독이라도 들어 있는 줄 알겠네.’

가득 베어 문 버거를 우물거리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서규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웬만해서는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는 녀석인데, 햄버거 먹는 게 저토록 비장한 얼굴로 해야 될 일인가 싶었다.

“먹기 싫으면 억지로 먹지 마.”

“아냐. ……맛있네.”

“빵 껍데기에 침만 발라 놓고는 퍽이나.”

한 입 남은 버거를 입 안으로 욱여넣은 뒤에 서규하는 새 햄버거로 손을 뻗었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옆 테이블에 손님이 앉았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가 서규하는 흠칫했다. 대각선 자리에 앉은 여자의 배가 둥글게 부푼 것이 보였는데 누가 봐도 임산부였다.

“뭐 먹을래, 자기야?”

“자기랑 같은 걸로 해 줘. 콜라 말고 우유로 바꿔서.”

서규하는 뒤늦게 시선을 거두며 새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먹었다. 이것도 분명 좋아하는 맛인데, 이상하게 좀 전에 먹었던 것보다 맛이 덜한 느낌이었다.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부인과를 다시 찾았을 때, 서규하는 일전에 의사가 미리 알려 줬던 대로 배 속에 있는 녀석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진상으로는 여전히 호두알만 한 아기집밖에 안 보이는데……. 그 속에 자리를 잡은 놈이 살아 보겠답시고 심장이 콩콩 뛴다고 생각하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불어 정말로 제 배 속에 아기가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확 와닿았다.

갑자기 다운된 분위기를 느낀 이차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맛없어?”

“아니. 존나 맛있어.”

서규하의 표정만 봐도 신빙성이 전혀 없는 대답이었다. 지금이라도 장소를 옮기자고 해 볼까? 말할 타이밍을 노리는데, 옆자리 커플이 나누는 대화가 원치 않게 들려왔다.

“맛있어, 자기야?”

“응. 완전 맛있어.”

“까꿍이는? 까꿍이도 맛있다고 해?”

“당연하지. 엄마가 맛있게 먹어서 기분 좋대.”

활짝 웃는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 그와 달리 이차영은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옆자리 커플 덕분에 그제야 생각난 사실이 있었다.

어떻게 아예 생각도 못 하고 있었을까. 아기 아빠 맞냐고 힐책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차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규하야.”

“왜.”

“우리 아기, 태명은 뭐야?”

말을 내뱉자마자 심장이 격하게 울렁거렸다. 태명은 아예 생각조차 못 하고 있던, 규하와 배 속 아기에게도 미안하기 짝이 없는 상황인데, 제 입에서 흘러나간 ‘우리 아기’라는 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없어.”

“업써? 영어 태명이야?”

서규하는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냐는 시선을 보냈다.

“없다고. 안 지었어.”

언제 가슴이 두근거렸냐는 듯 이차영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안 지었다고? 왜?”

“그냥.”

예전에 엄마가 태명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한 생각이지만, 딱히 부를 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못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서규하는 짧은 고민 끝에 말을 돌리는 편을 택했다. 태명이 뭐냐고 물을 때 이차영이 지었던 표정을 생각하면,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거다 싶은 게 없었어.”

이차영의 얼굴이 티 나게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서규하는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표정 관리 스킬이 타고난 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렇게 보이려고 존나게 애쓴 노력의 산물인 모양이었다.

“말 나온 김에 지금 같이 지을까?”

“그러든가.”

누가 들어도 무성의한 투로 대답한 뒤에 서규하는 다시금 버거 흡입을 시작했다. 그와 달리 이차영은 완전히 골몰한 모습이었다. 미간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서규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태명 말이야, 반짝이는 어때?”

“……!”

마침 빨대를 입에 물고 있던 서규하는 하마터면 주스를 내뿜을 뻔했다. 다행히 대참사는 면했지만, 입술 틈으로 살짝 새어 나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티슈로 입가를 닦는 동안에도 황당함은 가실 줄을 몰랐다. 많고 많은 태명 중에 하필이면 반짝이라니, ‘엄마랑 몰래 짰거나 특명이라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절로 들었다. 그러든 말든 이차영은 구름 위라도 걷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황금을 줍는 꿈을 꿨다면서 할머니가 전화 주신 적이 있거든.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올랐는데, 지금 내 상황이랑 딱 맞는 거 같아서.”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였다. 별 우연이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서규하는 한 번 더 주스를 쪽 빨아 마신 뒤에 대답했다.

“싫어.”

“왜. 마음에 안 들어?”

“어. 별로야.”

칼 같은 퇴짜에 이차영은 아쉬워하면서도 금세 다른 태명들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금덩이는 더 별로지? 그래도 뭔가 좀 빛나는 느낌인 게 좋을 거 같은데……. 아니면 별이나 달이는 어때? 선물이도 마음에 들긴 하는데.”

떨떠름한 서규하의 표정이 지금 심경을 대변했다. 금덩이는 당연히 탈락이고, 별이나 달이까지는 그나마 그러려니 하겠는데 선물이는 듣기만 해도 오글거렸다.

눈치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한 이차영은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아니면 작명소에 가서 지을까?”

“몇 번 부르고 말 건데 뭘 작명소까지 가. 잠깐만 있어 봐.”

이럴 땐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기에 서규하는 테이블에 올려 뒀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몇 번 가볍게 터치하자 익숙한 화면이 나타났다. 오래전에 임신 관련 질문 글을 올렸던 사이트에 들어간 서규하는 임신, 육아 카테고리를 선택한 뒤에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이어서 두 손으로 빠르게 문자를 입력했다.

카테고리 > [임신/육아]

태명짓는 방법

익명20XX-XX-XX 18:47:41

주변에 두 사람이 짠 것처럼 반짝이로 하자는데

반짝반짝 독수리 대머리 같아서 맘에 안 들거든요

이왕 짓는거 참신하고 기깔ㄴㅏ는 걸로 짓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여

등록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띠링, 띠링 하는 알림음이 울렸다.

카테고리 > [임신/육아]

태명짓는 방법 (1)

익명20XX-XX-XX 18:47:41

주변에 두 사람이 짠 것처럼 반짝이로 하자는데

반짝반짝 독수리 대머리 같아서 맘에 안 들거든요

이왕 짓는거 참신하고 기깔ㄴㅏ는 걸로 짓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여

Comments

1빠 20XX-XX-XX 18:50:02

반짝이도 좋은데요? 반짝반짝 빛나는 귀여운 아가로 자라라는 의미로^^

댓글을 읽자마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들렸다. 눈앞의 놈인가 하는 의심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이차영의 두 손은 헐겁게 깍지를 낀 채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아니면……. 설마 엄마는 아니겠지.’

이어서 또 한 번 알림음이 울렸다.

카테고리 > [임신/육아]

태명짓는 방법 (3)

익명20XX-XX-XX 18:47:41

주변에 두 사람이 짠 것처럼 반짝이로 하자는데

반짝반짝 독수리 대머리 같아서 맘에 안 들거든요

이왕 짓는거 참신하고 기깔ㄴㅏ는 걸로 짓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여

Comments

1빠 20XX-XX-XX 18:50:02

반짝이도 좋은데요? 반짝반짝 빛나는 귀여운 아가로 자라라는 의미로^^

2빠 20XX-XX-XX 18:52:18

태몽 꾸셨어요? 보통 태몽이랑 연관 지어서 많이들 짓던데

3빠 20XX-XX-XX 18:53:49

2222 저도 태몽 꾸고 나서 지었어용ㅎㅎ 꽃이 활짝 핀 꽃밭에 제가 서 있어서, 꽃송이에서 따와서 송이라고 지었어용

정성 어린 댓글이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태몽대로라면 반짝이가 1순위였다.

카테고리 > [임신/육아]

태명짓는 방법 (3)

익명20XX-XX-XX 18:47:41

주변에 두 사람이 짠 것처럼 반짝이로 하자는데

반짝반짝 독수리 대머리 같아서 맘에 안 들거든요

이왕 짓는거 참신하고 기깔ㄴㅏ는 걸로 짓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여

Comments

1빠 20XX-XX-XX 18:50:02

반짝이도 좋은데요? 반짝반짝 빛나는 귀여운 아가로 자라라는 의미로^^

2빠 20XX-XX-XX 18:52:18

태몽 꾸셨어요? 보통 태몽이랑 연관 지어서 많이들 짓던데

3빠 20XX-XX-XX 18:53:49

2222 저도 태몽 꾸고 나서 지었어용ㅎㅎ 꽃이 활짝 핀 꽃밭에 제가 서 있어서, 꽃송이에서 따와서 송이라고 지었어용

4빠 20XX-XX-XX 18:56:27

임신했을 때 느꼈던 기분으로도 많이 짓지 않아요? 저희 첫째는 기쁨이, 둘째는 행복이였거든요~^^ 근데 독수리 대머리가 아니라 대머리 독수리 아닌가요ㅎㅎㅎ

5빠 20XX-XX-XX 18:57:51

저 다니는 병원에서 들은 이야긴데, 된소리로 애기 이름을 지어주면 더 잘 듣는대요! 쑥쑥이, 까꿍이 이런 이름요~

6빠 20XX-XX-XX 18:59:33

헐 태명을 이런데서 묻는거임?

제일 밑에 달린 6빠의 댓글을 보자마자 인상이 확 구겨졌다. 일전의 그 개싸가지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이 새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고 지랄이야…….”

“뭐?”

“혼잣말이야. 좀만 더 기다려 봐.”

마지막 댓글까지 확인한 서규하는 미련 없이 게시글을 삭제했다. 이윽고 조금 전의 이차영이 그랬던 것처럼 생각에 잠겼다.

‘태몽이나 임신했을 때 기분 같은 걸로 많이 짓는다고?’

둘 다 난감하다면 난감했다. 특히 임신했을 때 느낀 기분으로 짓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제 심장 소리까지 들려주면서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녀석에게 ‘씨발’ 또는 ‘하늘이 무너짐’ 따위의 이름을 붙여 줄 수는 없었다. 말을 꺼냈을 때 이차영이 보일 반응은 또 어떻고.

지잉-

짧게 느껴지는 진동에 핸드폰 액정을 다시 켰다. 즐겨 보는 웹툰 사이트에서 날아온 앱 푸시가 보였다.

「깜짝 선물이 날아왔어요~ 정주행 찬스☆」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됐다. 눈길이 닿은 곳은 ‘깜짝’이라는 글자였다.

‘임신한 거 알았을 때 존나 깜짝 놀라긴 했지…….’

생각하면 할수록 괜찮은 것 같았다. 배 속의 녀석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기도 하고, 댓글로 누군가가 알려 줬던 된소리 단어이기도 했다.

이내 가벼운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살다 살다 아기 태명으로 고민하는 날이 올 줄이야.

“야.”

“응.”

고개를 들며 이차영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이로 하자.”

“뭘?”

“태명 말이야. 깜짝이로 하자고.”

이차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아닌 척하려 해도 입매가 저절로 풀어지는 게 서규하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좋네. 깜짝 선물, 뭐 그런 뜻으로 지은 거지?”

“……그런 걸로 해 두자.”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

“걍 그런 걸로 하자고. 아무튼 불만 없는 거지?”

“어. 마음에 쏙 들어.”

살짝 상기된 채로 턱을 매만지는 걸 보니 정말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다 먹었으면 나가자.”

미뤄 두었던 숙제 같은 미션도 본의 아니게 클리어했겠다, 서규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 때는 혼자였지만 갈 때는 둘이었다. 각자 갈 길 가자고 해도, 이차영은 한사코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운전대를 잡았다.

어느 순간 소리 없는 하품이 흘러나왔다. 배는 부르고 엉덩이는 따뜻해서 그런지 눈꺼풀이 절로 무거워졌다.

아직 월초인데 거리에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창밖 풍경을 의미 없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부모님들끼리 만나는 거 알고 있지?”

금시초문인 말에 서규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부모님들끼리 만난다고?”

“지금쯤 같이 저녁 드시는 중일 거야. 이야기 못 들었어?”

“약속 있어서 나간다고만 했어.”

“너 불편해할까 봐 일부러 말씀 안 하셨나 보다.”

순식간에 서규하의 얼굴이 흐려졌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지 가늠도 되질 않았다.

“아저씨는 좀 어떠셔?”

“말도 마. 아직도 삐져 있어.”

엄마 등쌀에 마지못해 저녁 겸상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차라리 대놓고 화를 내거나 뭐라고 하면 시원하게 훌훌 털 수 있을 텐데, 혼자 꽁해서 무언 시위를 계속하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미안.”

뜬금없는 사과에 서규하는 힐끗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말뜻을 깨닫고는 입꼬리를 비죽거렸다.

“존나 미안해해야지. 우리 집 분위기가 지금 어떤지 알기나 해?”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규하 좀 잘 챙겨 달라고, 좋은 알파 아가씨 있으면 소개해 달라며 속내까지 보이셨는데, 믿었던 그놈이랑 덜컥 사고를 쳤으니 충격이 더 컸을 터였다.

서규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 이차영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서규하 부모님께 안부 문자나 전화를 드리면서 어떻게든 신뢰를 다시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렇긴 해도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당장은 괘씸하고 화가 많이 나겠지만, 상황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조건으로만 본다면 자신은 흔히들 말하는 최고의 배우자감이라는 사실을 이차영은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서규하의 배 속에 아기까지 있으니 결국은 허락해 주실 게 분명했다.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당기고 싶은 욕심에 이차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슬쩍 미끼를 투척했다.

“우리 집에 와서 지낼래?”

뭔 소리냐고 눈빛으로 묻는 걸 보면서, 이차영은 조급함을 꼭꼭 숨기고 지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아저씨 눈치 보여서 불편하다면서. 그게 아니라도 부모님이랑 한집에 계속 같이 있으면 좀 그렇잖아. 먹는 거나 외출하는 것도 은근히 신경 쓰이고.”

서규하의 얼굴에 ‘그건 그렇지.’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사실 집에서도 하고 싶은 대로 해서 눈치를 보지는 않지만, 배달 음식을 시키면 당연하게 잔소리가 뒤따르거나 외출할 때마다 행선지를 알려야 하는 점 등이 성가시긴 했다. 마음을 흔드는 말은 계속 이어졌다.

“주변에 있을 거 다 있고, 굳이 밖에 안 나가도 웬만한 건 집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어. 운동 기구도 있고, 씨어터 룸이나 음악 감상실도 따로 있고.”

“돈 많아서 좋겠네.”

“이제 네 거나 다름없는데 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서규하는 멈칫했다. 놀란 표정으로 이차영을 바라보다가, 이내 픽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내 거나 다름없다고?”

“어. 네 이름으로 명의 바꿔 줄까?”

웃던 얼굴이 다시 한 번 굳어졌다. ‘그럼 내 명의로 바꿔 달라고 하면 해 줄 거냐’고 물어볼 참이었는데, 여봐란듯이 먼저 선수를 칠 줄은 몰랐다.

“……진짜 바꿔 줄 거야?”

“당연하지. 대단한 것도 아닌데.”

덤덤하게 말하는 옆모습을 보면서 서규하는 실소를 흘렸다. 외관부터 돈 냄새가 풀풀 풍기는 최고급 빌라의 펜트하우스인데, 그게 대단한 게 아니면 대체 네놈이 생각하는 대단한 집은 어떤 수준이냐고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팔기 전에 말 나와서 다행이네. 바로 양도 준비하라고 할게.”

농담이 농담으로 통하질 않는 놈이었다. 그보다 방금 녀석이 한 말을 듣고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 사는 집, 팔려고?”

“어.”

“그럼 너네 집으로 오라는 건 뭐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듣고 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는 생각에 이차영은 서둘러 상황 설명을 덧붙였다.

“같이 살 집 알아보고 있는 중이거든. 그러면 지금 지내는 집은 갈 일이 없을 거 같은데, 빈집으로 오래 비워 두기 그래서. 세놓는 건 귀찮고.”

“같이 살 집?”

“응. 너랑 나랑, 우리 아기랑.”

“……너랑 같이 산다고 말한 적 없는데.”

목소리 톤만 들어도 쑥스러워서 그런다는 것을 금세 깨닫고, 이차영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신생아들은 모유나 분유 먹는 간격이 짧아서 자다가도 울면 일어나서 먹여 줘야 돼. 트림시켜 주고, 잠들 때까지 안아 주고, 기저귀 갈고, 목욕도 해 줘야 되고. 생각보다 손이 엄청 갈 텐데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

“베이비 시터 쓰면 되잖아. 엄마 찬스도 있고.”

“24시간 내내 남한테 맡길 수는 없잖아. 그리고, 가능하면 부모가 같이 돌보고 양육하는 게 아기한테는 제일 좋다더라. 아무리 다른 사람이 예뻐한다 해도 부모만큼은 아닐 테니까. 사실 그런 것보다…….”

잘만 내뱉던 녀석이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 서규하가 재촉하듯 입을 열었다.

“그런 것보다, 뭐.”

“내가 너하고 같이 살고 싶어. 너랑, 우리 아기랑.”

“…….”

서규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거듭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별 대단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귓가가 멋대로 붉게 달아올랐다.

“진지하게 그런 말 하지 마. 존나 안 어울려.”

“왜. 좋아하는 사람이랑 계속 같이 있고 싶은 건 누구나 다 그럴 텐데.”

“우리 사이에 그런 게 가당키나 하냐?”

“당연하지.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너 우리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뒷감당 어떻게 하라고.”

쑥스러워서 괜히 틱틱대는 사이에 어느덧 차는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속도를 줄여서 진입한 차가 검은색 대문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 옆을 더듬어 안전벨트를 풀자마자 무언가가 훅 다가오며 입술에 닿았다.

“……!”

벌어진 입 안으로 미끈거리고 뜨거운 살덩이가 밀려 들어왔다. 서규하는 당황해서 눈을 홉떴다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못 이기는 척 눈을 감고 키스에 응했다.

“춥, 으응, 하아….”

야릇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예민한 곳을 자극하는 움직임, 서로의 혀가 문질러지는 감촉, 질척이며 타액이 뒤섞이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말초신경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본능처럼 착실하게 혀를 움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섹파였던 때도 키스는 자주 하는 편이었지만, 서로 잡아먹으려 든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막무가내이기 일쑤였다. 틈만 나면 입술이 찢어지거나 피를 볼 정도로 격렬하게 해 대기만 했던 탓에, 지금처럼 질척하고 끈적거리고, 마치 상대방의 모든 걸 세세히 탐색하려는 듯한 농도 짙은 키스는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고 손끝 발끝이 오그라드는 기분은 덤이었다. 단순히 성적인 행위로만 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감정적으로 나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자 긴 타액이 이어졌다. 어째 도중에 덜컹하며 몸이 뒤로 넘어간다 싶었더니, 좀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시트가 뒤로 완전히 젖혀져 있었다.

이차영이 그 위를 덮듯이 올라타고 있었다. 지척에서 눈이 마주쳤다.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차영의 바지 앞섶이 티 나게 불룩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말하면 서규하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둘이서 해 왔던 짓들이 있다 보니 키스만으로도 몸이 멋대로 다음을 기대하며 반응을 보였다. 이 상태라면 완전히 발기하는 것은 시간문제였기에 늦게나마 제동을 걸었다.

“비켜.”

“…….”

“비키라니, 흐읏!”

“해 줄게.”

다리 사이로 이차영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당황해서 버벅거리는 사이에 아예 속옷 안으로 파고 들어왔고, 말캉한 살덩이를 쥐고는 그대로 훑기 시작했다.

“야, 씨….”

멀쩡하던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사람 환장하게 하는 손기술은 여전했다. 엄지 끝으로 민감한 귀두를 문지르다가 손톱을 살짝 세워 요도구를 누르고, 그러다가 뜬금없이 아래로 내려가서 음낭 사이를 지그시 문질러 대는 동작에 허리가 절로 들썩였다.

머리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몸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안과 밖이 동시에 조금씩 젖기 시작했다. 쾌감의 도화선 위에 제대로 올라타 버린 탓에 더는 빈말로도 그만두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러려고, 흐읏, 데려다준다고, 흣, 한 거지?”

이차영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대답 대신 서규하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툴툴대면서도 그만두라는 말은 더 이상 안 하니 다행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밥만 먹고 헤어지려니 아쉬워서 차도 마시러 가자고 했는데, 눈치 없는 서규하는 배부르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미련 없이 걸어가는 모습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데려다주겠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막상 집 앞에 도착하니 또 이대로 그냥 보내기가 아쉬웠다.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정말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서 녀석을 꼭 끌어안고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서규하의 아버지는 지금도 서운함이 그대로라고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외박을 해 버리면 겨우 해결의 기미가 보이려는 일을 그르치고 더 크게 빙 둘러가게 될 소지가 다분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아쉬움과 갈증을 해결할 수밖에.

“엉덩이 좀 들어 봐.”

완전히 빠져든 듯, 서규하는 순순히 엉덩이를 들었다. 바지와 속옷을 단번에 끌어 내려 벗긴 뒤에 이차영은 서규하의 두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에 걸쳤다. 그런 다음 망설임 없이 고갤 숙여 페니스를 입에 물자, 기다린 것처럼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응, 하앗!”

춥, 추웁, 입으로 빨아들이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음탕하게 울렸다. 이차영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서규하의 페니스를 애무했다. 기둥을 핥고, 말캉한 음낭을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탐욕스럽게 빨아 댔다. 선액이 흘러내리는 귀두부도 아무렇지 않게 입 안 깊숙이 머금고 앞뒤로 머리를 움직였다.

그때마다 서규하의 아랫배가 빠르게 들썩였다. 그 안에 자신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한 순간,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한 이차영의 페니스에서도 끈적거리는 선액이 왈칵 터져 나왔다.

“너무, 흣, 세게 하지 마!”

계속 머리칼 속에 파묻고 있던 서규하의 손이 본인의 복부로 이동했다. 서규하 또한 아이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입 안 가득 차 있던 페니스를 뱉어 낸 뒤에 이차영은 까슬거리는 음모에 입술을 비볐다. 쪼는 듯한 입맞춤을 하면서 조금씩 위로 이동한 끝에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렀다.

머무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배꼽 부근에 잠시 닿아 있다가,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고, 심장은 귀를 울릴 정도로 크게 뛰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어떡하지.”

한창 남의 좆을 빨다 말고, 갑자기 ‘어떡하냐’는 타령에 서규하는 흘끗 고개를 들었다.

“뭐가.”

“그냥. 네 배 속에 진짜 아기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허, 서규하의 입에서 실소가 절로 흘렀다. 차 안이 캄캄해서 보이지는 않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훤히 그려졌다.

‘눈도 깜빡 안 하고 지우라 했을 때는 언제고.’

한소리 할 생각으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생각을 바꿔 도로 다물고 말았다. 그 일에 대한 변명인가 뭔가는 질릴 정도로 들었고, 이미 끝난 일을 계속 비아냥거리듯 들먹여 봤자 서로 감정만 상할 뿐이었다.

“안 할 거면 나와.”

“하던 건 마저 해야지.”

한 번 더 타이트하게 성기를 감싸 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움찔하며 신음을 흘리다가, 서규하는 이차영의 팔뚝을 붙잡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단단하게 부푼 곳을 더듬거려 지퍼를 찾아낸 다음 망설임 없이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 사이로 손을 집어넣자 이차영의 입에서도 나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바지 속에서 움직이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뜨끈한 열기를 내뿜고 있는 기둥을 바깥으로 꺼냈다.

“으응, 하아….”

또다시 입술이 겹쳤다. 왼손으로 이차영의 목을 거듭 끌어안은 채로 서규하는 키스에 몰두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요란했다. 숨결을 나누고, 서로의 가장 민감한 곳을 어루만지며 둘만의 시간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는 일인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

그러다 불시에 움직임이 멈췄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차가 있는지 강렬한 전조등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대로 스쳐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차 후미 쪽에서 방향을 틀더니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꼴깍,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시트에 누워 있어서 바깥 상황을 볼 수는 없지만, 불빛이 계속 일렁이는 걸로 봐서 망할 놈의 차가 바로 근처에 있는 듯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 골목에 있는 집들은 전부 집 안에 주차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잠깐 들른 차량이 아닌 이상 골목길에 차를 대는 일이 없었다. 하물며 불빛을 내보내는 차가 있는 방향은 자기 집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는 곳이었다. 서규하는 저도 모르게 한껏 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물었다.

“우리 부모님이야?”

“그런 거 같아.”

다행히 얼마 안 있어 불빛은 사라졌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캄캄한 어둠이 다시 찾아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잠깐 멈췄던 움직임을 재개하는 손길이 아래쪽에서 느껴졌다. 서규하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계속하려고?”

“이러고 집에 들어갈 수는 없잖아. 빨리 빼 줄게.”

기둥을 쥐고 흔드는 손길이 이어졌다. 쾌감은 금세 다시 불붙었지만, 아까처럼 완전히 집중되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야 될 거 같은데…….’

이대로라면 부모님이 자신의 부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있어 웅웅 하는 진동음이 울렸다. 더듬더듬 패딩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찾아서 꺼내자 ‘꼰대’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할 말이 있어도 꼭 엄마를 통해서 하는 양반이 하필이면 또 이럴 때 직접 전화를 걸다니, 하여튼 뭐 하나 통하는 구석이 없었다.

“잠깐만 있어 봐. 아빠한테 전화 왔어.”

이윽고 서규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지금 어디야?

“가는 중이야.”

- 아까 네 엄마가 전화했을 때 오는 중이라고 했다면서. 몇 신데 아직도 안 들어와.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중고딩 때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을, 내일모레면 서른을 앞둔 나이에 듣게 될 줄이야.

“10분 안에 들어갈게요. 끊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이차영이 다시금 달려들었다. 서규하는 빼지 않고 적극적으로 키스에 응하며 자신도 손을 내려 이차영의 것을 움켜쥐었다. 괜히 10분 안에 들어간다고 말해 버려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응, 으응, 춥, 하아….”

이번에는 반대편 골목에서 또 한 번 밝은 빛이 가까이 다가왔다. 차 옆으로 사람이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해도 밖에서는 안이 보이질 않는데도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며 스릴이 차올랐다.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지만, 언제 들킬지 모르는 야외 플레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하, 으읏!”

숨을 내뱉는 간격이 점점 빨라졌다. 거침없이 가해지는 쾌락에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끙끙대다가, 어느 순간 아찔한 무언가가 터지는 느낌과 함께 강렬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간발의 차로 뜨거운 무언가가 서규하의 몸을 적셨다.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 무렵, 어둠 속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당연한 것처럼 입술이 닿았지만 이번에는 길지 않았다. 이 이상 더 하면 정말로 보내 주기 싫을 것 같았다.

손끝으로 눌러서 켠 실내등이 밝은 빛을 뿜어냈다. 예상대로의 광경이 이차영의 눈에 들어왔다.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서 복부며 가슴이 훤히 드러난 서규하의 상체는 물론이고, 자신이 입고 있는 검은색 와이셔츠에도 흰색 얼룩이 잔뜩 묻어 있었다.

글러브 박스 안에 있던 물티슈를 꺼내서 서규하의 몸부터 닦아 주는데 대뜸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근데 말이야.”

“응.”

“뒤는 안 건드려?”

이차영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옅게 웃으며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서운해?”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렇지. ……아니지, 하던 짓을 안 하니까 이상하잖아. 카섹도 거리낌 없이 하면서.”

“하고 싶은데 참는 거야. 건드리면 못 참을 거 같아서.”

몸을 겹칠 때 느낄 수 있는 황홀감이 어떠한지를 뻔히 알고 있는데, 어중간하게 손을 댈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시작조차 하지 않는 편이 맞았다. 서규하는 모르겠지만, 귀국한 뒤로 이차영은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면서 틈만 나면 육아 관련 정보를 섭렵했다. 원래 무얼 하든 완벽을 도모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자신의 실수로 인해 시작이 늦은 만큼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해 두고 싶었다.

“그러니까 왜 참냐고. 너 그런 새끼 아니잖아.”

“깜짝이, 아빠 보고 깜짝 놀랄까 봐.”

“…….”

“밖에서 갑자기 누가 노크하면 얼마나 놀라겠어.”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뒤늦게 말뜻을 깨닫고는 단숨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야, 이 변태 새끼야. 그냥 애 때문에 안 한다고 하면 되지…….”

이차영은 그런 서규하의 손을 이끌어서 자신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방금 한 발 뺐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딱딱하게 부푼 것이 바지 안에 갇혀 있었다.

“전화로 네 목소리만 들어도 발딱발딱 서는 놈이야. ……진짜 하고 싶은데, 적어도 2, 3개월까지는 조심해야 된다고 해서 참고 있어. 아니면 그때 너 만나고 화해하자마자 당연히 섹스부터 했겠지.”

“…….”

“그러니까 감당하지도 못할 도발 그만하고, 보내 준다 할 때 얼른 들어가. 안정기에만 접어들면 질리도록 할 거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이에 또 한 번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꼰대’라는 글자가 보였다. 인상을 찌푸린 채 액정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 이차영은 빠른 손놀림으로 뒷수습을 마저 끝낸 뒤에 좌석을 원위치로 돌렸다.

“바지는 바로 세탁기에 넣어.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묻었더라.”

그새 또 그걸 본 모양이었다. 잠시 후, 운전석으로 넘어간 이차영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냥 가도 될 것을 굳이 앞쪽으로 빙 둘러 와서는 창문에 대고 똑똑 노크했다.

입 모양으로 무어라 벙긋대는 게 보이긴 하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창문을 내리자마자 불쑥 뒷목을 끌어당기며 한 번 더 입술이 맞닿았다.

“나중에 전화할게. 얼른 들어가.”

그제야 떠오른 생각에 서규하는 입을 열었다. 자신의 차를 타고 함께 왔으니 이차영의 차는 햄버거 가게 근처에 있을 터였다.

“내 차 빌려줘?”

“택시 타고 가면 돼. 아니면 그냥 자고 갈까?”

“아빠한테 들켜서 맨발로 쫓겨나면 볼만하겠네.”

어디까지나 농담인 것을 알기에 서로 피식 웃고 말았다. 진짜 안 빌려줘도 되냐고 재차 물었더니 같은 대답이 들려왔고, 서규하는 뒤늦게 운전석 쪽으로 넘어가서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힐끗 옆을 쳐다보니 이차영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잠시 후 빈 공간에 차를 댄 뒤에 서규하는 차에서 내렸다.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괜히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왜 계속 안 하던 짓을 하고 지랄이야.”

원래도 이차영은 기본적으로 젠틀한 성격이긴 하지만, 재회 후에 보이는 행동들은 이전과 비교해서 뭔가가 묘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전화할 때 들리는 목소리도 그렇고, 아까 밥 먹을 때 바라보던 시선도 그렇고,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계속 어딘가를 건드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햄버거 가게에서 마주 앉아 있던 동안에도 워커 속의 발가락을 몇 번이나 꼼지락거렸는지 모른다.

잠시 후, 현관문을 열자마자 서규하는 흠칫 놀랐다. 바로 앞에 어머니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깜짝이야.”

“왜 이렇게 늦었어? 집에서 저녁 먹는다면서.”

“……곰새끼한테 전화 왔길래 잠깐 만났어.”

정은희의 얼굴에 퍽이나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알파 페로몬이 훅 느껴지는데, 베타인 친구 녀석을 만나고 와서 그럴 리가 없었다.

“저녁은 먹었어?”

“응.”

“그럼 엄마랑 잠깐 이야기 좀 해.”

그 순간 서규하의 머릿속에는 ‘올 게 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녁에 이차영 부모님과 만났다고 하니 필시 그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 같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2층으로 장소를 옮겼다. 방문을 닫고 돌아선 정은희는 침대 끝에 걸터앉은 다음 입을 열었다.

“아까 너한테 말 안 했는데, 저녁에 태선이 만나고 왔어. ……결론부터 말하면, 자기네들은 대환영이라고 얼른 날부터 잡자더라.”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풀에 찔려서 엉뚱한 곳을 보고 있던 서규하는 그 말에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무슨 날?”

“무슨 날이겠어. 너희들 결혼식 날짜 말이지.”

헐, 하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언제 얌전히 있었냐는 듯 서규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표정은 한껏 구긴 채였다.

“미쳤어?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애 듣는데 말 예쁘게 안 해? 그리고, 둘이 좋다고 사고 쳐서 애까지 생겼는데 당연히 해야지.”

“안 해. 그냥 애만 낳고 살면 되지 그딴 걸 뭐 하러 해.”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들이 보일 반응은 뻔했기에 정은희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받아쳤다.

“그건 네 생각이고. 엄마도 그렇지만, 차영이 집에서 그걸 허락해 줄 거 같아?”

“……못 해 줄 건 또 뭐야.”

“그럼 애는 누구 밑에 올릴 건데.”

“당연히 나지.”

생각이라곤 없는 대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면 차영이 부모님 찾아가서 직접 그렇게 말하고 와. 참고로 결혼식 이야기 먼저 꺼낸 사람은 차영이 아버지야. 태선이도 빨리 날부터 잡았으면 하는 기색이었고.”

“…….”

서규하는 한껏 굳은 표정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안 본 지 엄청 오래됐긴 하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차영의 부모님은 결코 만만한 분들이 아니었다. 태선이 이모도 그렇고, 대기업을 이끄는 이차영의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가서 말을 꺼내기는커녕 로봇처럼 뻣뻣하게 앉아서 네, 네, 하는 대답만 하고 나올 것이 뻔했다.

한순간에 기세가 꺾인 아들을 바라보면서 정은희는 달래듯 말을 이었다.

“말이 결혼식이지, 가까운 친척들 초대해서 식사 대접하고 인사만 드리는 거야. 식순 같은 건 조율해서 최대한 간단하게 하면 되고.”

“…….”

“아무리 그래도 집안 어른들께 인사는 드려야지. 안 그래?”

“안 그래.”

즉각 부정하면서도, 닥쳐올 자신의 미래가 훤히 그려졌다. 서규하는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연거푸 마른 얼굴을 쓸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일은 절대 없겠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게 됐는데 자신이라 해서 설레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결혼은 별개의 문제였다. 남성체 알파와, 그것도 그 이차영과 결혼까지 하게 되다니. 임신에 이어 두 번째로 닥친 난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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