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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 (13/28)

Chapter 13.

***

모처럼 날씨가 좋다고 일컬을 만한 날이었다. 공기가 차갑긴 해도 상쾌하고, 청명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차 안은 조용했다. 잠깐 신호에 걸린 틈을 타서 최 비서는 룸미러를 힐끗 쳐다봤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갈 때와 달리 뒷좌석에는 성인 장정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시트에 놓인 각자의 손끝은 가볍게 맞닿은 채였다. 이차영은 깍지를 끼고 싶어 했지만, 서규하가 질색해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새끼손가락만 서로 가볍게 얽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느긋하고도 여유로운 이차영과 달리 서규하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일자로 다물린 입술 또한 지금의 불편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유는 이차영 때문이었다.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비몽사몽간에 꾸벅꾸벅 조는데, 어느 순간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자. 응?’

‘으음…….’

미간을 구긴 채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는 집요했다. 남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자꾸만 대답을 바라는 행동에 서규하는 몹시 귀찮아하며 잠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짐을 찾고 나와서 차에 타자마자 이차영이 입을 열었다.

‘너희 집부터 갈까?’

그 말에 서규하는 고갤 돌려 옆을 쳐다봤다.

‘뭔 소리야?’

‘그편이 너한테 부담이 덜할 거 같아서. 물론 우리 부모님부터 만나도 나는 상관없어.’

귀신 씻나락 까먹는 것 같은 소리에 서규하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내가 너희 부모님을 왜 봐?’

‘기억 안 나? 비행기에서 ‘부모님들 뵈러 가자’고 하니까 그러자고 대답했잖아.’

상황인즉 이랬다. 잠에 취해서 반쯤 맛이 간 사람에게 이차영은 말도 되지 않는 개소리를 지껄였고, 기어코 원하는 대답을 받아 냈다. 당황해서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뗐지만 늘 그렇듯 말발로 놈을 이기기는 역부족이었다.

자기가 애 아빠인 걸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생각은 절대 없으며,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지게 될 거 먼저 이실직고하는 게 여러모로 편하지 않겠냐고 구슬리는 말에 저도 모르게 조금씩 넘어가서, 결국 서규하는 또 한 번 ‘응’ 하는 대답을 입에 담고 말았다.

후회는 뒤늦게 찾아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애 아빠가 저놈이라는 사실을 숨기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설마 데려가려는 건 아니겠지?

혹시라도 그럴 생각이라면 정말로 개새끼였다. 지금도 부성애는커녕 부모가 된다는 자각도 별로 없긴 마찬가지지만, 제 덕분에 무사한 거나 다름없는 아이를 두 눈 뜨고 그냥 빼앗길 생각은 없었다.

잘근잘근, 또 무의식중에 입술을 깨물던 서규하는 잔뜩 굳은 얼굴로 옆을 돌아봤다.

“야.”

“누구 부모님부터 찾아뵐지 결정했어?”

“개소리 그만하고. 부모님은 대체 왜 만나자는 건데.”

“왜긴. 당연히,”

서규하는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 애라서 네가 키우겠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그런 거면 꿈 깨.”

“…….”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얼굴이 한순간 굳는 것이 보였다. 그에 대고 서규하는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네 유전자도 섞여 있는 건 부정 안 하겠는데, 나 아니었으면 진작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애야. 내 성질머리에 술 담배 다 끊고, 낳기로 결심해서 별 탈 없이 배 속에 붙어 있는 애라고.”

“…….”

“그러니까 혹시라도 허튼 생각은 하지 마. 얘 생긴 거 우리 엄마는 이미 알고 있고, 너 아니어도 부족함 없이 키울 자신 있으니까.”

이쯤 하면 알아들었겠거니 싶어서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손을 꽉 붙잡는 악력이 느껴졌다. 고갤 돌리니 한껏 가라앉은 얼굴이 보였다. 언뜻 기가 막힌 듯도 하고,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다시금 시선을 마주하며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하는 말이 들렸다.

“나한테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는 말 따윈 꺼내지도 않았을 거야. 만반의 준비를 한 뒤에 합법적으로 데려오면 그만이니까.”

“…….”

“모르겠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이차영의 시선은 오롯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그럼 뭔데.

생각을 해 보려 해도 혼자서 알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당사자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듣는 것뿐이었다.

“그럼 무슨 뜻인데.”

“무릎 꿇고 석고대죄한 다음, 부탁드릴 생각이었어. 널 나한테 달라고.”

“…….”

“부탁의 탈을 쓴 통보였겠지만.”

힘주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는 척하며 그대로 얽듯이 깍지를 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서규하가 굳어 버린 사이에 이차영은 뒤늦은 서운함을 토로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기를 가졌는데, 그런 상황에서 같이 부모님 뵈러 가자고 하면 보통은 ‘책임지겠다 하겠구나’,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 혼자서 애 키울 거라는 말이나 하고, 나 상처받았어.”

서규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항변했다.

“너랑 안 어울리니까 그렇지. 눈도 깜빡 안 하고 지울 거라던 인간인데, 이제 와서 책임진다는 말을 할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냐고. 안 그래 성열이 형?”

아닌 척하며 듣고 있다가, 느닷없이 튄 불똥에 최성열은 당황했다. 서둘러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에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만일 차영 씨가 아이만 데려갈 생각이었으면, 말씀하신 대로 법적인 조치를 취하면 될 일이지 집안끼리 얼굴 붉힐 수도 있는 일을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한 말씀만 더 드리자면, 도련님이 계신 곳까지 찾으러 오신 것만 봐도 차영 씨 마음은 확고하다고 생각됩니다.”

그 말에 서규하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 최 비서가 저렇게 말하니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결 가벼워진 정적을 깨는 중얼거림이 들린 것은 그 직후였다.

“최 비서님도 아는 걸 혼자만 모르고.”

“아 씨, 너 때문이라니까!”

“맞아. 다 나 때문이야. ……그러니까.”

헐겁게 얽혀 있던 손가락을 좀 더 힘주어 잡으면서 이차영은 거듭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부모님 찾아뵙자. 우리 아기, 너랑 같이 키우고 싶어.”

“…….”

“응?”

짙은 갈색 눈동자가 진실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머릿속만큼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서규하는 뒤늦게 시선을 피하듯 반대편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닫혀 있던 입술이 열리며 마지못한 투로 하는 대답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얼굴 때문에 봐주는 줄 알아.”

***

정은희는 거실에 달린 벽시계를 거의 1분 간격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막내아들이었다. 연락을 받은 것은 오늘 오후였다. 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한창 꽃꽂이 수업을 받고 있는데 갑자기 최 비서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귀국할 거라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정은희는 식품관에 들러서 먹거리를 잔뜩 산 뒤에 집으로 돌아왔고, 공항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딩동-

마침내 인터폰이 울렸다. 벌떡 몸을 일으킨 정은희는 도우미 대신 직접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옆자리에 앉아서 아닌 척하며 같이 기다리던 서창식도 느긋하게 걸음을 움직였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다녀왔어요.”

빠른 눈으로 아들을 살피자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정은희는 안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있다 왔어?”

“어.”

“차영이랑 같이 오니까 좋네.”

단순히 화해한 줄로만 알고 정은희는 기분 좋게 웃었다.

“앉아서 이야기하게 들어와.”

먼저 걸음을 옮긴 서창식이 소파 상석에 앉고, 정은희가 그 뒤를 따랐다. 아들들은 여전히 현관 근처에 서 있었다. 들리지는 않아도,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니 뭔가 대화를 주고받는 모양이었다.

그때, 넌지시 손을 뻗은 이차영이 아들의 손을 잡는 것이 보였다. 뜻밖의 장면에 정은희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무슨 말을 하길래 저러는 거지? 얼른 오라고 부르려는 순간, 마침내 둘이 나란히 걸어와서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이차영이었다.

“두 분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규하랑 같이 왔습니다.”

눈길이 절로 갈 만큼 잘생긴 외모와 듣기 좋은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언뜻 긴장한 기색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 옆에 앉은 막내아들은 못마땅함이 팍팍 드러나는 얼굴로 애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조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불안함이 차올랐다. 정은희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뭔데. 응? 얼른 말해 봐.”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덤덤하게 앉아 있는 서창식도 내심 지금 상황이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에 두 녀석이 손을 잡는 모습을 서창식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일전에 이차영이 갑자기 찾아왔을 때만 해도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자리를 피하던 아들 녀석인데, 손을 잡아도 가만히 있는 데다 옆자리에 순순히 앉아 있기까지 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서창식도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하는 말을 꺼냈다.

“할 말 있으면 얼른 해 봐.”

태연함을 가장하며 앉아 있던 것도 잠시, 두 부부의 눈동자가 또 한 번 휘둥그레 커졌다. 몸을 일으킨 이차영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서규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뭐 하는 거야?”

한순간에 어수선하게 변한 분위기 속에서, 이차영은 두 주먹을 가볍게 그러쥔 채로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겼습니다.”

목덜미와 어깨 사이 어디쯤을 바라보고 있던 서규하는 뒤늦게 천천히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미루면 계속 신경 쓰일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다독이길래 어쩔 수 없이 나란히 앉긴 했는데,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이제야 생각났다. 저 새끼 혼자 깨지게 냅두고 튈걸.

좀처럼 눈치를 보는 법이 없지만 지금 분위기가 개좆망이라는 것쯤은 자각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튈까. 아무래도 그게 좋을 듯했다. 곁눈질로 퇴로를 살피며 도망갈 각을 재는데, 싸하디싸한 적막을 깨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본인의 청력을 의심하는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어조였다. 정은희도 기겁할 정도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입을 벌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다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 규하 배 속에 있는 애가…….”

“맞습니다. 제 아이입니다.”

“뭐, 뭐라고?”

급기야 서창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배 속의 애라니, 금시초문인 일에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이차영은 아래로 향하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움직여서 서창식과 눈을 마주했다. 처음부터 그가 선택한 방법은 정공법이었다. 변명 따윈 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됐다.

절대 본의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생각 없이 했던 말들로 인해 서규하에게 상처를 준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고, 그때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한 첫 단추가 지금 이 순간인 것을 이차영은 잘 알고 있었다. 친부모님 앞에서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무릎을 꿇고 앉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우연한 계기로 규하와 깊은 사이가 됐고, 만나면 만날수록 끌리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규하가 오메가인 줄 몰라서 제가 실수를 했고, 얼마 전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알았으면 진작…….”

“잠깐. 잠깐만 멈춰 봐.”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있던 서창식이 이차영의 말을 끊었다. 이내 잔뜩 굳은 표정이 눈앞을 향했다.

“오메가인 줄 몰랐다니, 그러면 차영이 너는 규하를 베타로 알고 있으면서도 만났다는 거야? 애가 생길 만한 짓까지 하고 다니면서?”

“……맞습니다.”

“하.”

기가 막힌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분노의 화살은 서규하를 향했다.

“대체 생각이 있어, 없어? 걱정돼서 한마디 할 때마다 그렇게 아빠 속을 긁어 대던 놈이, 뭐? 차영이랑 계속 만나? 거기다 애까지 생겨?”

“진정해요, 여보. 일단 나하고 먼저 얘기 좀 해요.”

점점 목소리가 커지더니, 급기야 벼락같은 호통에 놀란 정은희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 여전히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있는 이차영을 향해서 애써 덤덤한 낯으로 말했다.

“차영아, 미안한데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줄래? 나중에 이모가 전화할게. 규하 너는 네 방에 올라가 있고.”

아내가 부축하듯 팔을 붙잡자, 서창식은 뒷목에 손을 올리고도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마침 고개를 들던 서규하의 눈에 그 모습이 비쳤다. 하여간 웃긴 양반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다가, 지금 상황을 깨닫고는 금세 굳은 표정이 되었다.

힐끗 고개를 돌렸다. 부모님이 들어가셨는데도 이차영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서규하는 발끝으로 놈의 엉덩이를 꾹꾹 찔렀다.

“일어나.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곧바로 다시 나오실까 봐.”

“무서운 말 하지 마, 새꺄. 우리 꼰대 눈 돌아서 골프채 들고나오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맞아야지.”

“지랄. 널 때리겠냐? 날 패려고 하겠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뭐?”

대번에 도끼눈을 뜨고 버럭 성질을 내자 이차영은 그제야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서규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면 바로 너 데리고 우리 집으로 갈 수 있잖아. 물론 골프채가 너한테 닿는 일은 없게 할 거고.”

서규하는 뒤늦게 말뜻을 깨닫고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한편으로는 묘하게 등골이 싸한 느낌이 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잘못 걸린 거 아냐?’ 하는 생각이 언뜻 뇌리를 스쳐 갔다.

잠시 후, 서규하는 대문을 등진 채 이차영과 마주 보고 섰다. 어서 꺼지라고 했더니 대문 앞까지만 배웅해 달라고 해서 같이 나왔다.

“진짜 안 갈 거야?”

“안 가.”

나란히 대문을 향해 걷는 동안 이차영으로부터 자기 집에 같이 가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서규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버지야 그렇다 쳐도, 엄마를 서운하게 했다가는 앞으로가 무척 고달파질 거라는 눈치쯤은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한나절 만에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서, 서규하 또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잘 풀릴 테니까.”

밑도 끝도 없이 장담하는 말에 서규하는 코웃음을 쳤다.

“잘 풀리기는 개뿔. 너야 이렇게 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나는 얼마나 가시방석 같을지 생각이나 해 봤어?”

“놀라서 잠깐 그러시는 거지,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나도 최선을 다할 거고.”

“……뭘 어떻게 다할 건데?”

내심 기대를 갖고 물은 말에 이차영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허락해 주실 때까지 싹싹 빌어야지.”

얼굴로 욕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차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보기만 해도 좋은데, 행방도 모르고 떨어져 있던 그 시간을 대체 어떻게 견뎌 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잠깐 눈 좀 감아 봐. 눈꺼풀 위에 뭐 묻었어.”

“어느 쪽인데.”

“내가 떼 줄게.”

순순히 눈을 감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차영은 서규하의 뒷목을 감싸 안으며 거리를 좁혔다.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입술이었다. 촉,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가 떼자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야, 우웁!”

그대로 또 한 번 거리를 좁히며, 말하느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피하지 못하도록 뒷머리를 붙잡아 고정한 채 이차영은 무아지경으로 키스를 이어 갔다. 혀와 혀가 비벼지고, 타액이 뒤섞이는 느낌이 미치도록 황홀했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뜨거운 감촉에 흥분을 넘어서서 전율마저 이는 듯했다.

계속 밀어붙이는 힘에 조금씩 뒤로 밀리던 서규하의 몸이 급기야 대문에 닿았다. 그때까지도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밀어내려 했지만, 키스에 한이 맺힌 것처럼 달려드는 놈을 떼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으응, 하아….”

민감한 입 천장을 핥고, 혀뿌리를 건드리고, 한 번씩 깊숙이 들어온 혀가 자신의 것을 얽으며 음탕하게 비빌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깐 잊고 있었는데, 이차영은 좆질뿐만 아니라 키스도 끝내주게 잘하는 놈이었다.

또한 이런 성적인 접촉은 꽤나 오랜만이었기에 흥분하고 싶지 않아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와중에도 질척하게 퍼붓는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에라, 모르겠다. 더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움찔대며 방황하던 손이 올라가서 이차영의 목을 끌어안았다.

“춥, 추웁, 하아….”

계속해서 딥키스를 퍼부으며 이차영은 서규하의 옷자락을 들치고 손을 넣었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옆구리를 쓸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앞쪽으로 조금씩 손을 움직였다.

배꼽 부근에 손바닥이 닿은 순간, 이제껏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 손끝에서부터 번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안에 두 사람의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뒤늦게 지금 상황을 파악한 서규하가 서둘러 녀석의 손을 붙잡았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입술을 피해서 겨우 고개를 돌리고는 막힌 숨을 토해 냈다.

“그만해.”

“조금만 더 만질게. 응?”

“읏…!”

궤도를 바꾼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여린 살을 잘근대며 빨아들이는 느낌에 서규하는 흠칫 놀라며 서둘러 이차영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만하라니까. 여기 지금 바깥이야.”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아니,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더한 짓을 하기 전에 멈출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진짜 나랑 같이 갈 마음 없어? 아래, 선 것 같은데.”

귓가에 입을 맞추며 하는 말이 이어졌다. 이차영의 말마따나 서규하의 아랫도리는 어느새 슬쩍 고개를 들고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느닷없는 팩폭에 당황했지만, 이내 무언가를 보고는 비웃음을 날렸다. 이차영의 벨트 아랫부분도 언덕처럼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지적질할 거면 네 거나 먼저 죽이고 해.”

“그냥은 안 죽을 거 같은데.”

“마취총이라도 처놓든가. 빨리 가.”

뒤돌아선 서규하는 주저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이차영이 미소 띤 얼굴로 그런 서규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카섹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금욕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한 번으로 끝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가는 필시 서규하의 부모님이 아들을 찾아 나설 테고, 그랬다간 이번에야말로 쉽게 수습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질 것이 분명했다.

가득 찬 물처럼 흘러넘치는 미련을 애써 내리누르며 이차영은 서규하의 고개를 살짝 돌려 한 번 더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전화할게. 차단 푸는 거 잊지 말고.”

“생각해 보고.”

서규하는 곧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쾅, 하고 야무지게도 닫히는 대문을 보면서 이차영은 거듭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딘가가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몽글몽글한 감정이 드는 걸 보니 흔히들 말하는 콩깍지가 제대로 씐 모양이었다.

뒤늦게 걸음을 옮겨서 운전석에 올랐다. 곧바로 출발하는 대신 창틀에 팔을 올린 채 생각에 잠겼다.

며칠간 함께 머무는 동안, 이차영은 최 비서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과 애 엄마가 누군지 모른다고 말했던 것,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다가도 은연중에 한 번씩 출산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내비쳤던 일까지. 몰랐던 사실을 하나둘 알게 될수록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안함이 밀려왔고, 혼자서 감당하느라 힘들었을 서규하에게 지금이라도 확실한 안도감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부모님들께 한시라도 빨리 아이가 생긴 것을 말씀드리는 거였다. 책임지고 함께 아이를 낳아 키우고, 한발 더 나아가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동시에 서규하를 좀 더 확실하게 붙잡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연락 두절로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던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행여나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녀석과의 관계를 주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못 박아 두고 싶었다.

무엇보다 더는 서규하와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으니, 당연히 바로 옆에서 함께하면서 책임과 도리를 다하고 싶었다.

서규하의 부모님이 보일 반응은 쉽게 짐작이 갔다. 녀석의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일전에 함께 등산을 마친 뒤에 나눈 대화로 짐작해 보면 아저씨 또한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실상은 누구보다 막내아들을 걱정하고 애틋하게 생각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아들이 결혼도 하기 전에 덜컥 임신부터 한 데다, 하물며 그 상대가 믿었던 아들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놀라서 까무러치지 않는 게 이상할 노릇이었다.

서규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뺨을 후려치거나 정말로 골프채가 날아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분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유했고, 당장은 충격이 크겠지만 결국엔 허락해 주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잠시 후에 이차영은 핸드폰을 꺼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몇 번 울린 뒤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저예요, 어머니.”

낙관적인 상황이긴 해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기는 했다. 만에 하나라도 서규하의 부모님이 반대하시기라도 하면, 맞불 작전으로 이쪽에서도 부모님 카드를 꺼낼 생각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들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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