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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12/28)

Chapter 12.

***

서규하는 알록달록한 매트 위에 양반다리를 한 채로 앉아 있었다.

방 곳곳에는 인형과 장난감이 가득하고, 흡사 미니어처 같은 유아용 침대도 있었다. 하지만 서규하는 조금의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꼬맹이의 환심을 사고자 손에 든 딸랑이를 설렁설렁 흔들어 댔다.

“이리 와. 놀아 줄게.”

꼬맹이는 꺄르륵 하며 예쁘게도 웃었다. 서규하의 입가에도 보일 듯 말 듯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에게 있어 아기라는 존재는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가는 애물단지와 다를 게 없었고, 눈앞의 꼬맹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한 줌도 안 돼 보이는 녀석이 방싯방싯 웃는 게 귀엽기도 하고, 보면 볼수록 제가 아는 누군가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아. 아빠한테 와. 응? 착하지.”

그때였다. 갑자기 들리는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에 서규하는 휙 고갤 돌려 옆을 쳐다봤다. 몹시도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이내 서규하는 실소를 흘렸다.

‘얼씨구.’

늘 그렇듯 이차영은 핏이 딱 맞는 셔츠와 정장 바지 차림에 이목을 잡아끄는 얼굴을 자랑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모습이지만, 손에는 서류 가방이나 보고서 대신 욕심 많게도 양손에 하나씩 딸랑이를 쥐고 있었다. 게다가 다리 사이에는 곰 인형까지 끼우고 있다니. 존나 치사한 새끼.

슬금슬금 올라오는 승부욕을 닮은 감정에, 서규하는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똑바로 하며 본격적으로 꼬맹이의 관심을 유도했다.

“빠! 빠아!”

남의 속도 모르고 연신 꺄르르 웃던 꼬맹이가 마침내 뽀작뽀작 엉덩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을 향한 두 사람의 구애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야 인마, 너 배 속에 품고 있다가 낳아 준 사람이 누군지 잘 생각하고 선택해. 그러니까 이쪽으로… 이쪽으로…….

***

누가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깜빡깜빡, 모로 누운 채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서규하는 뒤늦게 몸을 일으켜서 부스스한 몰골로 침대에 앉았다.

밤새 꿀잠을 잔 것에 비해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 때문이었다.

“별 거지 같은 꿈을…….”

쯧, 하고 혀를 차며 머리카락을 벅벅 헝클어 대는데 저만치서 삐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이윽고 최 비서가 나타났다. 가벼운 옷차림인 걸 보니 아침부터 피트니스 센터라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핸드폰을 켜 보니 이제 겨우 7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었다. 다시금 침대에 벌렁 눕는 모습을 보면서 최 비서가 물었다.

“더 주무시게요?”

“아니.”

잠이 완전히 깨 버린 탓에 더 잘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서규하는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깜빡, 깜빡, 느리게 눈만 깜빡이는데 간밤에 꿨던 개꿈이 절로 떠올랐다.

이내 입가가 꿈틀하며 비웃음을 닮은 실소가 흘렀다. 비록 꿈이라고는 해도, 양손에 딸랑이를 쳐들고 흔들어 대던 꼴이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묘하게 싸한 느낌이 든 것은 그다음이었다. 보통 머리만 닿았다 하면 곯아떨어지는 편이고, 숙면을 취하는 동안 꿈을 꾸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주 가끔 잠결에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생각들을 해도 아침에 일어나면 어렴풋한 느낌만 남아 있는데, 어제 꾼 꿈은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했다. 자신의 옷차림과 딸랑이 모양은 물론이고 벽지 색깔마저 선명할 정도로.

“…….”

생각할수록 느낌이 좋지 않았다. 힐끗, 아랫배를 한 번 내려다봤다가 서규하는 몸을 일으키며 최 비서를 불렀다.

“형.”

“네.”

“우리, 슬슬 다른 데로 가 볼까?”

“다른 데요?”

모처럼 여유롭게 TV 채널을 돌리고 있던 최 비서가 안경을 올리며 의아한 듯 되물었다.

“계속 같은 데 있으니까 지겨워서. 근처에 다른 섬들도 많다는데, 슬슬 옮겨 보는 건 어때?”

최 비서는 속으로 뜨끔했다. 왜냐하면 오늘 새벽에 받은 사모님의 전화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안 되겠다고,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와야지 마음이 놓일 것 같다는 말에, 최 비서는 주저 없이 지금 묵고 있는 리조트의 주소와 호실 넘버까지 알려 주었다.

한국 시각으로 이른 새벽에 출발했다고 했으니 조금만 있으면 도착하지 싶은데, 갑자기 거처를 옮기면 곤란했다.

‘설마 어젯밤 통화 내용을 들었을 리는 없고.’

객실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으니 소머즈급 청력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촉이 아주 좋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형은 여기가 좋아?”

“……아무래도 익숙한 곳이 편해서 좋긴 하죠. 아니면 일단 식사부터 하고, 천천히 알아볼게요.”

“그러든가. 말 나온 김에 밥이나 먹으러 갈까?”

아침잠이 많다 보니 보통은 늦은 룸서비스를 시켜 먹는데 오늘은 조식 뷔페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층 식당으로 내려간 서규하는 아침부터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부지런히 배를 채웠다.

덕분에 올 때와 달리 돌아갈 때의 발걸음은 사뭇 느렸다. 식당을 나와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최 비서가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나온 김에 마트에 잠깐 들를까 싶은데, 같이 가실래요?”

그 말에 서규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더워서 싫어.”

왕복 20분 정도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지만, 쨍한 햇빛에 높은 습도가 복병이었다. 처음에 멋모르고 쫄래쫄래 따라갔다가 더워서 뒤지는 줄 알았다.

“그럼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키 챙겨 가세요.”

잊지 않고 카드 키를 건넨 뒤에 최 비서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 객실로 올라간 서규하는 방만한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잠깐 앉아서 쉬다가 다시 일어나서 테이블로 다가갔다.

널브러진 물건들 사이에 놓여 있는 감자칩 봉지와 태블릿 PC를 챙겨 들고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헤드에 편하게 등을 기댄 자세로 최 비서가 미리 다운받아 둔 영화 중 하나를 골라서 재생했다.

아삭아삭, 짭조름한 감자칩을 집어 먹으면서 서규하는 태블릿 액정에 시선을 고정했다.

엑소시즘 장르답게, 초반부터 웬 남자가 밧줄에 목이 졸리고 유혈이 낭자하는 등 잔인한 장면이 계속 이어졌다. 아침부터 볼만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서규하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눈물 질질 짜는 신파보다는 차라리 이런 게 나았다.

『오, 주여! 부디 이 어린양을 굽어살펴 주, 크흑!』

몇 분이나 지났을까. 나름 평온하던 표정이 갈수록 조금씩 굳어 갔다. 포스터만 봐서는 대작의 냄새가 솔솔 풍겼는데 순 사기였다. 시작한 지 벌써 5분이 지났는데, 그간 나온 장면이라곤 시커먼 덩어리가 무차별로 사람들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존나게 재미없네.”

흥미는 빠르게 식었다. 더는 못 참고 영화를 끄려는데, 갑자기 딩동 하는 큰 소리가 울렸다.

아침에 룸서비스를 시킬 때마다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바꿔 말하면 누군가가 객실 초인종을 눌렀다는 뜻이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문 쪽을 쳐다본 것도 잠시, 이내 생각난 사실에 서규하는 몸을 일으켰다. 마트에 갔던 최 비서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벌컥-

“갔다 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가 서규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최 비서가 아니었다.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자신과 마주 선 사람은, 지금 이곳에 절대 있어선 안 되는 남자였다.

‘이 새끼가 여긴 왜……. 내가 지금 헛걸 보고 있나?’

머리가 새하얘진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놀라서 굳어 버린 서규하는 물론이고, 이차영 또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간마저 멈춘 듯한 착각 속에서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열리는 이차영의 입술을 본 순간, 서규하는 “악!” 소리를 지르며 반사적으로 문을 닫아 붙였다. 생각에 앞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규하!”

하지만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턱 하고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과 함께 길쭉한 손가락들이 문틈 사이로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손이 낀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그런 것치곤 열린 문 사이의 공간이 제법 넓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색 구두코가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나가, 새끼야.”

서규하는 문을 붙잡고 있는 이차영의 손가락을 떼어 내면서 몸으로는 온 힘을 다해 문을 밀어붙였다.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영화보다 지금 이 상황이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 눈 뜨고 꾸는 꿈처럼 현실감이 없는 상황이지만, 이 와중에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이 문을 열어 줘서는 안 됐다.

“규하야, 잠깐만.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 응? 규하야.”

반대편에서 밀어붙이는 힘이 문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서규하는 이를 악물고 문을 계속 닫으려 했지만, 어느 순간 조금씩 힘의 열세가 느껴졌다. 초조해진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씨발, 당장 꺼지라고!”

외침과 동시에,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문 너머에서 순간적으로 큰 힘이 가해졌다. 그 바람에 서규하는 손 쓸 새도 없이 튕기듯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서규하!”

바닥에 넘어져 있는 모습을 본 이차영이 서둘러 다가가서 서규하의 상체를 일으켰다.

“괜찮아? 안 다쳤어?”

“아오, 썅…….”

넘어지면서 바닥을 잘못 짚었는지 왼쪽 손목이 욱신거렸다. 투덜대며 아픈 손목을 주무르다가, 서규하는 뒤늦게 지금 상황을 깨닫고 후다닥 물러섰다. 눈동자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왜 왔지?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그러잖아도 갑자기 넘어진 탓에 놀란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피를 내뿜으며 뛰기 시작했다. 서규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며 속입술을 잘근거렸다.

꿈에 이차영이 나왔을 때부터 찝찝했는데, 지금 보니 일종의 예지몽인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눈 뜨자마자 숙소부터 옮기는 거였는데. 좋다고 밥이나 처먹으면서 여유를 부렸던 것이 몹시도 후회스러웠다.

“……!”

뒤늦게 고개를 든 순간, 이번에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차영은 계속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녀석의 시선은 미묘하게 좀 더 아래쪽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깨달은 순간 손끝이 움찔했지만, 가까스로 움직이지 않고 참아 냈다. 긴장감 때문인지 아랫배가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서규하는 애써 초조한 기색을 숨기고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나가. 경찰 부르기 전에.”

“규하야…….”

“귓구멍 썩었어? 당장 나가라고!”

허공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에 이차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없어. 좋은 말로 할 때,”

“서규하, 너.”

도중에 말을 끊어 버리며 낮은 목소리가 겹쳤다.

“……오메가라면서.”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규하는 굳은 얼굴로 이차영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거 따지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존나 한가한 새끼네.”

“…….”

“내 입으로 너한테 베타라고 말한 적 없어, 병신아. 좆도 모르면서 우성 알파는 개뿔.”

일부러 자극적인 단어를 골라서 비아냥댔지만 이차영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에 되레 초조해진 사람은 서규하였다. 힐끗, 눈동자만 움직여서 문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쫓아내는 건 이미 틀려먹었으니 차라리 자신이 나가는 게 빨랐다. 어렴풋이 짐작 가는 말이 화두에 오르기 전에, 열리길 원치 않는 상자가 헤집어지기 전에.

달려 나갈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낮은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네 말이 맞아.”

“……뭐?”

“네 말이 맞다고. 좆도 모르는 병신이라서 내 마음도 몰랐고, 네가 오메가인 것도 이제야 알게 됐어. 그리고…….”

이차영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이어서 할 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어딘가가 뻐근하니 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이 아니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중에도,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는 중에도, 무의식중에 심장 부근을 몇 번이나 눌렀는지 모른다. 그리고 서규하와 대면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그 감각은 극에 달했다.

심장 또한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뛰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진정되길 기다리고 싶어도 불가능하단 걸 알기에, 또 한 번 가슴께를 꾹 눌렀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아이를 가진 것도 알아.”

“…….”

서규하의 심장도 다른 의미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탁자 모서리를 붙잡고 있는 손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신 뒤에 일단은 발뺌을 했다.

“돌았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분위기였다. 괜한 헛수고 하지 말라는 듯, 이차영은 집요한 시선을 보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다 알고 왔어. ……임신해서 병원에 다닌 것도, 얼마 전에 이곳에서 클럽 바텀이랑 만난 것도.”

더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서규하는 잔뜩 찡그린 채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여느 놈 같았으면 끝까지 잡아뗐을 테지만, 상대가 이차영이라면 무의미한 짓이었다. 남의 진료 기록을 열람하는 것쯤이야 손만 까딱해도 가능할 테고, 불확실한 추측만으로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로 한가한 새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계속 발뺌했다간 결과는 뻔했다. 같이 확인해 보자며 병원으로 질질 끌고 갈 테고, 곧바로 수술실로 밀어 넣겠지.

“…….”

으득, 짓씹은 입술이 찢어지며 피 맛이 번졌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배 속의 녀석을 억지로 없애 버리면 페로몬 체계가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서규하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유는 또 있었다. 지금도 임신 사실을 상기하면 한숨이 나오지만, 예전처럼 부정적인 감정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좋든 싫든, 또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어딜 가도 24시간 내내 같이 있고, 가끔은 틱틱대며 말도 붙일 때가 있다 보니 인간적인 정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도망칠 구석이 없다고 확신하는지, 이차영은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서 있었다. 그동안 서규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애가 없다는 거짓말은 안 통하니까……. 그렇다면…….’

꿀꺽, 울대가 움직이며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윽고 서규하는 조소 띤 얼굴로 이차영을 다시 쳐다봤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는 것이 관건이었다.

“잘못 짚었어.”

“……뭐?”

“잘못 짚었다고. 아니, 반만 맞았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네.”

맥박 소리가 들린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뛸지언정 서규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애가 생긴 건 맞는데, 네 새끼 아니야.”

“……!”

“내가 너하고만 잤을 거 같아?”

무표정하던 이차영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그에 대고 서규하는 아낌없는 조소를 보냈다.

“나 섹스 좋아하는 거 알잖아. 술 처먹고 한 적도 있어서 일일이 기억은 못 하는데, 날짜로 따지면 너는 절대로 아니야. 클럽에서 원나잇 했던 날에 생겼으니까.”

미동도 없이 듣고 있던 이차영이 돌연 옅은 웃음을 흘렸다.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원나잇을 했다고?”

“그럼 내가 너하고만 붙어먹었을 거 같아? 존나 자신감 쩌네.”

“…….”

“한 번 더 말해 줘? 애가 생긴 건 맞는데, 너랑은 아무 상관 없, ……!”

그 순간, 피할 틈도 없이 거리가 좁혀졌다.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며 시야가 흔들리더니, 서규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밀어 눕혀졌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몸을 내리누르는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결박하듯 허벅지에 올라탄 이차영이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봐.”

서규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이차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미쳤어? 당장 비켜!”

“내 애를 임신한 게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잖아!”

“그럼 지워.”

얼음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말뜻을 이해한 순간, 손을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움직임이 불시에 멈췄다.

배가 아니라 목을 짓누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잠시 후에 서규하는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뭐?”

“지우라고. 진짜 다른 새끼 애라면……,”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이차영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서규하는 한 번 더 주먹을 휘두르려 했지만, 커다란 손이 그보다 더 빠르게 자신의 손목을 붙잡았다.

“놔.”

“…….”

“놔, 개새끼야!”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미친놈처럼 욕을 퍼붓고 소리를 질러도 이차영은 붙잡고 있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하아, 하아, 숨을 쉴 때마다 서규하의 가슴팍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어느 순간 찾아온 침묵 속에서 이차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이미 다 알고 왔다고. 그런데 왜 계속 아니라고 해.”

“…….”

꽉 다문 턱이 불끈거렸다. 뜨거운 무언가가 눈 안쪽에서 치밀어 오르는 느낌에 서규하는 황급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동의 없이 애를 가진 거라면 당연히 지워야지.’

‘돈이 목적일 게 뻔하니까.’

언젠가 들었던 감정 없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동의 없이 임신한 것은 맞지만, 이쪽도 결코 원해서 생긴 일이 아니었다. 이차영보다는 못할지 몰라도 살면서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애를 빌미로 남의 인생 망치려 드는 쓰레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스치듯 짧긴 했어도, 각자의 연애관이나 결혼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지우지 않고 있다면 한 번쯤은 이유를 물어봐 줄 법도 한데…….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 시간을 못 기다리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여기까지 쫓아와서 낙태를 종용하려 드는 태도에 더할 수 없는 비참함이 차올랐다.

또 한 번 침묵이 찾아왔다. 지금 이 순간 눈물을 보이는 건 죽기보다 싫었기에 서규하는 살점이 너덜거릴 정도로 속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하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고여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떨림이 담긴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미안해.”

“……!”

“이 말부터 먼저 했어야 됐는데……. 내가 잘못했어.”

“…….”

“저번에 네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면 어떡할 거냐고 물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평소의 주관대로 대답했어. 그 전에 네가 며칠 동안 내 연락을 피해서 기분이 안 좋기도 했고.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알 것 같더라. 네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냈는지.”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이차영의 얼굴에 간절함이 더해졌다. 툭 불거진 울대가 크게 일렁거렸다. 타액이 아니라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뜨거웠다.

“진짜 몰라서 그랬던 거니까……. 한 번만 봐주라.”

“…….”

“나랑 같이 돌아가자, 서규하.”

굳게 다문 입술 틈으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애먼 창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규하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디, 애 없애러 병원에?”

“……!”

“……그랬다간 진짜 죽여 버릴 거야, 너.”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기껏 낳아서 키우겠다고 결심했는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애를 잃고 몸까지 망가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차영의 목을 따 버릴 생각이었다.

“절대 아니야. 내가 어떻게 그래.”

울음을 참듯 붉게 변한 눈가를 보면서 이차영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규하가 우는 걸 좋아하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잠자리에 한해서이지 결코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그리고 애를 없애러 병원에 가다니,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떨리는 말이었다. 그때 무심코 한 말 때문에 단단히 오해를 사 버린 듯한데,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전에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만 했다.

고집스럽게 옆을 향하고 있는 얼굴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젖은 눈가를 손끝으로 더없이 조심스레 닦아 준 뒤에, 이차영은 지금껏 누구에게도 해 본 적이 없는 말을 읊조리듯 조용히 입에 담았다.

“좋아해.”

“……!”

“좋아해, 서규하.”

“…….”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만일 그때 처음부터 내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더라면, 틀림없이 나는 다른 대답을 했을 거야.”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깨닫지 못했을 뿐,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미 그전부터 자신의 마음은 서규하를 향하고 있었다.

스스럼없이 사적인 공간을 내어 주고, 약속을 정할 때마다 설렘을 닮은 기대감이 들고, 만나는 날이 기다려지고, 다른 원나잇 상대는 떠올려 본 적조차 없는 것이 그 증거였다. 어느 순간 자신의 세상은 온통 한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 이대로 너 절대 못 놓쳐.”

서규하는 여전히 애먼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날 좋아한다고?”

“그래.”

“너, 내가 그렇게 우스워?”

마침내 다시금 눈이 마주쳤지만, 바라던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차가움을 넘어서 경멸의 빛을 띠고 있는 눈빛에 이차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 입으로 한 말 잊었어? 결혼은 비즈니스로 할 거라면서, 내 스펙으로 만족이 되겠어? 아, 아니면 바람피우는 상대가 나야? 존나 볼만하겠네.”

덤덤하게 내뱉는 말이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모든 것이 자신의 과실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간을 되돌리고만 싶었다.

“……아니야. 내가 너한테 어떻게 그래.”

절절한 음성으로 하는 말이 이어졌지만 서규하는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간 두 귀로 직접 들은 바가 있는데, 아이를 지울 거라고 차갑게 말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데……. 손바닥 뒤집듯 한순간에 바뀐 태도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슴 주변이 뻐근하게 아려 왔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방심하게 해 놓고, 검진을 핑계로 아이를 떼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기회를 달라고?”

“…….”

“그럼 지금 당장 너네 부모님한테 전화해. 전화해서 애가 생겼다고, 낳아서 네 자식으로 키울 거라고 똑바로 말해. 그러면 생각해 볼게.”

당황해하며 얼버무릴 것을 확신하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른 상황이 전개됐다. 이차영이 수트 상의 안으로 허겁지겁 손을 집어넣더니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이 조용하다 보니 뚜르르 울리는 연결음이 서규하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설마, 아니겠지. 희미한 불안감이 피어오르려는 찰나, 연결음이 뚝 끊기며 웬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 네, 도련님.

“지금 아버지랑 잠깐 통화할,”

‘아버지’라는 단어가 들리는 순간, 서규하는 저도 모르게 이차영의 핸드폰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액정을 보니 ‘박정준 비서실장’이라는 글자가 보이고, 통화 시간을 알려 주는 숫자가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 도련님?

도련님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렸다가, 서둘러 종료 버튼을 눌렀다. 평정심이 완전히 깨진 얼굴이 이차영을 향했다.

“누구한테 전화한 거야?”

“아버지 직속 비서실장님. 핸드폰 줘. 다시 걸게.”

“걸긴 뭘 걸어, 새끼야!”

버럭 외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당연히 말을 돌릴 거라고 생각했지,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에 없던 거였다.

“하아…….”

서규하는 짤막한 한숨을 흘리며 눈가를 덮고 말았다. 줄곧 팽팽하게 날 서 있던 긴장감이 가위로 자른 것처럼 툭 끊어지며 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씨발, 내가 이렇게 반응할 줄 알고 일부러 그런 거 아냐?

Trrr- Trrr-

갑자기 울리는 벨 소리에 시선을 내리자 방금 봤던 이름으로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서규하의 얼굴이 또 한 번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어쩌지. 확 그냥 던져 버릴까.’

실전에 옮길 생각으로 핸드폰을 붙잡은 순간, 손등 위로 이차영의 커다란 손이 겹쳤다. 뿌리치는 것보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은 것이 먼저였다.

“좋아해. 진심으로.”

“……!”

“나 때문에 힘들었던 거, 맘고생하게 한 거, 살면서 전부 다 갚을게.”

“…….”

“그러니까……. 나랑 같이 돌아가자, 규하야.”

손에 쥐여진 핸드폰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 자리를 대신하듯, 크고 단단한 손마디가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며 살며시 깍지를 끼는 것이 느껴졌다.

서로 시선을 마주한 가운데 서규하는 말없이 숨만 내쉬었다. 뿌리치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만, 어쩐 일인지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미안해.”

“…….”

“앞으로는 절대 상처 주는 일 없을 거야. 힘들게 하지도 않을 거고.”

“…….”

“약속할게.”

서규하는 찌푸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늦게나마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 힘주어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비켜 봐.”

그제야 몸을 일으킨 뒤에 서규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든지 한다고 했지?”

“어. 무릎이라도 꿇을까?”

뜬금없는 말에 서규하는 흠칫했다가 이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무릎이 뭐 별거라도 되는 줄 알아? 됐고, 돈 바꿔 온 거 있어?”

환전을 일컫는다는 걸 깨닫고 이차영은 즉각 대답했다.

“아직 못 했어. 대신 달러랑 카드는 있어.”

“그럼 나가서 이 나라 돈으로 바꾸고, 시내에 있는 식당에 가서 크림새우 2인분만 포장해 와.”

“……크림새우?”

뜬금없는 미션에 황당해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제 알 바 아니었다. 서규하는 턱을 치켜들고 말을 이었다.

“뭐든지 한다면서. 거짓말이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이차영은 곤란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다가 이실직고했다.

“나간 사이에, 너 딴 데로 가 버릴까 봐.”

하,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딴 데로 가 버리다니, 이쪽은 아예 생각도 안 해 본 일이었다. 기가 막혀 침묵하는 것을 멋대로 해석한 이차영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않고 되물었다.

“진짜 그럴 생각이었어?”

“지랄. 십 원짜리 하나 없는데 가긴 어딜 가? 뻘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서 크림새우나 사 와. ……앞으로 네 새끼가 먹고 싶어 하는 건 전부 너한테 사 오라고 할 거니까.”

네 새끼?

“아.”

말뜻을 이해하자마자 화색이 절로 돌았다. 언제 불안해하며 뭉그적거렸냐는 듯 이차영은 대번에 몸을 일으켰다.

“갔다 올게.”

그러다 문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보았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래 놓고……. 아니야. 얼른 갔다 올게.”

이래 놓고 만일 다른 곳으로 가 버리면 땅끝까지 뒤져서라도 찾아낼 거라는 말을 속으로 삼킨 채 이차영은 밖으로 나갔다.

타악- 문이 닫히며 한순간에 서규하는 혼자 남게 됐다. 닫힌 문을 잠깐 바라보다가 뒤늦게 시선을 거두었다. 일시정지 상태인 태블릿 PC와 널브러진 감자칩 등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하…….”

여전히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침대 위에 떨어져 있는 이차영의 핸드폰만 아니었어도, 존나 리얼한 꿈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한 두 손을 내려다보다가 서규하는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진짜 튈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살짝 들었지만, 제 수중에는 정말로 땡전 한 푼 없다는 걸 자각하고는 금세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 때문에 자신이 도망치듯 떠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

멋대로 이차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곱씹어 생각해 보니 마냥 거짓말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 가진 놈이니 살면서 남한테 아쉬운 소리는 해 본 일이 없을 텐데…….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절절매는 태도를 보이고, 무릎까지 꿇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음식 셔틀로 부려 먹겠다는 말을 듣고도 좋다고 뛰쳐나간 거는 또 어떻고.

“……사람 헷갈리게.”

서규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옆으로 돌아누웠다. 나직한 목소리로 하던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좋아해. 진심으로.’

‘나 때문에 힘들었던 거, 맘고생하게 한 거, 살면서 전부 다 갚을게.’

‘같이 돌아가자, 서규하.’

치트키 같은 얼굴이 떠오른 순간, 서규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오른손으로는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꾹 눌렀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차영이 찾아오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배 속의 녀석이 최고로 좋아하는 크림새우 때문에라도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 볼 생각이었다.

……결심이 무색하게, 채 일주일도 안 돼서 짐을 챙기게 될 줄은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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